CINELAB2023-12-06 17:08:34
마음이 따듯해지는 <나 홀로 집에> 명대사 모음
어렸을적 겨울에 TV앞에 가족이 모여 앉아 <나 홀로 집에>를 보며 깔깔 웃으며 하루를 보냈는데, 그땐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들이 마냥 재밌었는데 커서 보니 새삼 케빈이 해주는 말들이 따듯하고 와닿는거 있죠?
우리 천재 갱얼쥐 케빈의 대사 같이 보아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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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애 규범이 두 소년에게 남긴 상처
8★/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루카스 돈트 감독이 연출한 영화 〈클로즈〉는 제75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자 2023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벨기에 대표 출품작이다. 2022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하다.사랑과 우정의 경계에 있는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이성애라는 규범이 폭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과 그 폭력의 여파를 홀로 견뎌야 하는 자들의 슬픔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려낸다.
시골 마을에 사는 두 소년 레미와 레오는 어릴 때부터 서로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며 자랐다. 그러나 ‘친구’라는 호명은 둘의 관계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한다. 한 침대에서 서로의 숨결을 가까이 느끼며 자는 게 익숙하고, 자연스레 둘이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는 둘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두 소년이 그렇듯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친구일 수 있지만, 연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른들의 시선 밖에서 자기 둘만이 구축한 관계를 만끽하는 두 소년은 기존의 언어로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관계의 우주를 자유로이 탐색하는 중이다.
둘이 함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변화가 생긴다. 학교는 공적 제도다. 아이들이 건실한 성인, 즉 ‘건전하고 착실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기관 말이다. 즉 학교는 공적 권위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몸에 정상성이라는 규범을 새긴다. 제도로서의 학교는 레미와 레오의 관계처럼 ‘애매모호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단지 선생님이 ‘동성애는 안 돼!’라고 겁박하는 차원이 아니다. 학교라는 기관에 관여하는 모든 주체가 기존 규범을 전파하고 재확립한다. 친구들은 늘 꼭 붙어 있는 레미와 레오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살갗을 맞댄 채 앉은 레미와 레오의 물리적‧정서적 가까움은 호기심/의심의 대상이다. 누군가는 그저 “너희들은 너무 딱 붙어 앉아”라고 웃으며 말할 뿐이지만, 누군가는 레미와 레오를 “호모”라고 부른다.
레미는 남들의 시선을 괘념치 않는다. 레오와 오랫동안 구축해온 세계에 무한한 안정감과 절대적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는 그렇지 않다. 레오는 둘의 관계를 ‘오해’하는 친구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레오는 둘만 있을 때도 친구들의 시비를 떠올린다. 규범은 이토록 위력적이다. 규범은 주체를 잠식해 자아를 검열하는 거울로 작동한다. 둘만의 역사가 새겨진 둘만의 장소에서도 레오는 레미를 멀리 한다. 같은 침대를 쓰기를 거부하고, 둘이 늘 함께 하던 전쟁놀이 중에도 “진짜로는 아무도 없다”며 김을 뺀다. “진짜로는 아무도 없다”는 레오의 말은 이성애만을 정답으로 간주하는 규범의 권위 앞에서 레오가 둘의 관계를 수치스러워하기 시작했음을, 둘이 구축한 세계가 허깨비처럼 사라져버릴 가능성을 레오가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레미는 레오를 기다려주고 더 기회를 준다. 하지만 레오는 점점 레미에게서 멀어지기만 한다. 아이스하키 동아리에 들어가 남자들의 놀이문화를 익히고, “생리하냐”라는 여성 비하적 농담을 습득한다. 결국 레미는 더는 레오와 이전처럼 지낼 수 없음을, 레오가 둘의 관계를 배반했음을 깨닫고 눈물 흘리며 레오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선생님이 말리는데도 레오에게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는 레미는 고작 친구들 말 몇 마디에 둘의 모든 것을 저버린 레오를 향한 분노, 자신들의 세계가 이토록 쉽게 무너졌다는 것에 대한 허탈함, 거대한 규범 앞에서 무력감 등을 느꼈을 것이다. 근래 본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전반부다. 후반부에서는 레오만이 주인공이다. 레미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친구들, 가족들이 모두 레미의 죽음을 슬퍼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를 진행한다. 하지만 레오는 내내 경직된 표정이다. 침대에 오줌을 싸고 화가 많아지는 등 레오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레오는 레미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슬픔이 버겁기도 하다. 레미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레오는 레미의 어머니에게 찾아가 “저 때문이에요. 제 잘못이에요”라고 눈물로 고백한다. 그러나 레오는 틀렸다. 레미는 레오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정상적 규범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 즉 동성에게 우정 이상의 친밀성을 느낀 레오가 수치심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규범은 이런 식으로 자기 바깥의 존재를 점령하고 포섭한다. 강압적 통치뿐 아니라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것이다.
레오에게 ‘네 탓이 아니다’라고 말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아이스하키 시합에서 팔이 부러진 레오가 깁스 처치를 받는 장면이 있다. 레오가 눈물을 흘리자 의사가 팔이 부러지면 아픈 게 당연하다고 레오를 달랜다. 그러나 레오는 팔이 아파서 우는 게 아니다. 레미를 잃은 슬픔 때문에, 마찬가지로 폭력의 희생자인 그가 잘못된 자책으로 괴로워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레오의 오인된 자책과 그런 레오를 향한 엉뚱한 위로. 이는 레미를 그리워할 레오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이다. 〈클로즈〉는 정상성과 규범 바깥의 존재가 마주하는 폭력의 여러 양상을 가슴 아프도록 생생하게 고발한다. 자신을 멋대로 재단한 사람들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다는 루카스 돈트 감독처럼, 레오가 언젠가 다른 답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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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뺑반>은 뺑소니라는 신선한 소재를 두고 거대 악을 물리치는 뻔한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
공효진과 조정석이 드라마 <질투의 화신> 이후 다시 만났다는 소식에 기대를 하며 봤었던 영화 <뺑반>. 영화 <뺑반>이 나오던 시기 이런 류의 범죄 오락 장르의 작품들이 다시 한번 붐을 일으켰던 시기였다. 하지만 모두 베테랑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서 그렇게는 새롭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뺑반> 시놉시스경찰 내 최고 엘리트 조직 내사과 소속 경위 은시연. 조직에서 유일하게 믿고 따르는 윤과장과 함께 F1 레이서 출신의 사업가 정재철을 잡기 위해 수사망을 조여가던 시연은 무리한 강압 수사를 벌였다는 오명을 쓰고 뺑소니 전담반으로 좌천된다.
알고 보면 경찰대 수석 출신, 만삭의 리더 우계장과 차에 대한 천부적 감각을 지닌 에이스 순경 서민재. 팀원은 고작 단 두 명, 매뉴얼도 인력도 시간도 없지만 뺑소니 잡는 실력만큼은 최고인 뺑반. 계속해서 재철을 예의주시하던 시연은 뺑반이 수사 중인 미해결 뺑소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재철임을 알게 된다.뺑소니 친 놈은 끝까지 쫓는 뺑반 에이스 민재와 온갖 비리를 일삼는 재철을 잡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시연. 하나의 목표를 향해 힘을 합친 그들의 팀플레이가 시작되는 가운데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사망을 빠져 나가려는 통제불능 스피드광 재철의 반격 역시 점점 과감해진다.
*본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조했습니다.
연기는 정말 잘한다...!공효진과 조정석의 만남을 기대한 이유는 질투의 화신이라는 드라마 이후 재결합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두 배우가 어떤 캐릭터던 소화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공효진은 엘리트 의식이 있는 경찰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고, 류준열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뺑소니를 굉장히 감각적으로 잘 잘아내는 캐릭터를 과거 사건 한 번 저지른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싱크로율이 높았다. 그리고 조정석이 맡은 망나니 재벌 2세의 역할 역시 조정석이 단정하고 깔끔한 역할만 잘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더듬이 싸이코 캐릭터도 잘 소화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웠던 점은 각각의 배우가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은 높았을지 모르지만 배우들간의 합이랄까? 시너지는 전혀 나지 않았던 느낌이었다. 영화 속에서 배역으로 보이지 않고 배우로 보이다보니 연기는 참 잘한다~~는 느껴졌지만 영화 스토리 자체에 대한 공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듯 싶다.
다 봤던 내용이다..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배역으로 보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이미 다 다뤘던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영화 뺑반은 소재만 뺑소니일 뿐 베테랑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유아인의 망나니 역할을 지우기에는 그 아우라가 너무 강력했고, 조정석이 아무리 연기를 훌륭하게 해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베테랑의 조태오 캐릭터가 이미 각인되어 있는 터라 딱히 조정석의 재철이라는 캐릭터가 악인의 존재로 한 순간에 입력이 되지는 않았다.
이미 매운맛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와 비슷한 강도를 전달한들 큰 자극이 없는 것처럼 이미 한 번씩 다 접해봤던 내용이어서 큰 감흥과 충격을 일으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차라리 뺑소니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으면 좋지 않았을까?뺑반이라는 영화 제목 답게 뺑소니 사고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고 기대를 했었지만, 시놉시스부터 그런 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뺑반에 대한 평들이 다들 클리셰 덩어리라고 하는 이유는 소재만 뺑소니를 선택해 그 차이를 뒀을 뿐 내용과 전개가 너무나도 기존의 범죄 오락 영화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거대악을 물리치는 경찰들의 영웅담 이야기보다는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는 소소한 악들의 모습을 바로잡는 일반사람들의 뺑소니를 다룬 내용이었다면 적어도 클리셰 덩어리라는 비판을 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뺑반>은 배우들의 연기력은 두말할 필요없이 너무나도 뛰어났지만 영화 자체의 스토리에는 힘이 없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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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를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매일 생각하는 영화가 있다.
과장이면 좋겠지만 아니다. 영화를 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니아라>를 생각하면서 살고있다.
나는 스웨덴 영화제에서 영화를 봤는데 티빙 독점 공개로
티빙 이용권만 있으면 아니아라를 볼 수 있다.
나중에 꼭 개봉하면 좋겠다. 영화관에서 꼭 봐야하는 영화니까.
<아니아라>는 스웨덴 영화고 장르는 SF이며 우주 영화다.
화성으로 떠나는 우주선인 아니아라호는 지구에서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힐링 AI 프로그램인 미마와 식량 시스템까지 갖추었다. 멸망하고 있는 지구를 떠나서 화성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아니아라호에 탔고 3주 후면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니아라호는 우주 부유물과 충돌해 궤도를 이탈해버리면서 어쩌면 평생 우주에서 떠돌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다.
스포주의
영화는 줄거리만 봐도 절망적이다. 새로운 삶을 찾아서 탔던 우주선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줄거리를 알고 영화를 봤지만 글로 보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다. 3주 후 가 아니라 어쩌면 평생 우주에서 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미쳐가며 무너진다.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낙관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과 버티는 사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평생 우주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사람과 죽을지도 모르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이 존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생각났다. 지구를 벗어나고 지구의 기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지구에서의 모습과 닮았다. 이기적이고 나약해지고 사랑하고 불신하는 모습들...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고 현실감이 없지만 영화 속 인물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보였다. 물론 영화의 상황이 훨씬 심각하지만 코로나로 인해서 전 세계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우리는 코로나가 언제 완전히 끝날지 예상할 수 없다. 확진자가 줄어들어서 안도하면 갑자기 확진자 수가 늘어나고 다른 나라의 뉴스를 보면 더 절망적이다. 만약에 끝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침범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에 코로나가 존재하지
않았던 2018년에 <아니아라>를 봤다면 지금처럼
몰입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아라호에는 힐링 AI 프로그램인 미마가 있어서 미마 로브가 관리하는 미마가 있는 곳에 가면 지구에서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사람들은 미마에게 점점 집착하기 시작한다.
미마가 없으면 지구와의 연결고리가 사라지니까. 물론 자신들은 살려고 그랬지만 미마는 사람들의 이기심에 지쳐가고 결국 자살한다. AI가 자살한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고 너무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미마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찾고 지구에서의 순간을 회상하기 위해 발악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영화에서 사실을 은폐하고 그래도 화성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캡틴이 너무 싫었다. 처음에는 너무 미웠다. 왜 사실을 은폐하며 살아가지? 차라리 먼저 사실을 말했다면..이라고 생각했는데 근데 사실을 말했다면 사람들은 무너졌을 거다. 먼저 무너지거나 나중에 무너지거나의 차이다. 캡틴의 선택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사실을 은폐하고 잘못이 없는 미마 로브에게 누명을 씌우는 인간이기에 나쁜 사람이다. 근데도 아니아라를 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미마 로브 이야기를 진작에 했어야 하는데 이제야 적는다.
미마 로브는 힐링 AI 프로그램인 미마의 관리자다. 미마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아끼는 미마 로브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누명을 받고도 지하실에 몇년을 있어도 다시 살아간다. 미마 로브는 사랑하는 연인인 이사겔과 지내면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계속 살아가려는 미마 로브와 다르게 이사겔은 체념하고 지쳐하다가 결국 삶을 포기한다. 사실 영화를 처음 볼때는 이사겔이 조금 미웠다. 혼자 남은 미마 로브는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광활한 우주에서 평생을 살고 죽어도 우주에 있다고 생각하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게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낮이 아니아라호에는 없다. 밖은 깜깜한 우주일뿐. 나라면 그런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이사겔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혼자 남은 미마 로브가 안타까울뿐이다. 이사겔을 보면서 울부짖던 미마 로브의 표정이 생생하다. 미마 로브는 바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래도 살아간다.
영화는 AI 프로그램인 미마를 보여주면서 기억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지구의 소중함을 느끼게하면서 절망만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난 이 영화를 보면서 희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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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과 끝이 무한히 반복되는, 깨지 못할 한때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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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Queer, 2025)
시작과 끝이 무한히 반복되는, 깨지 못할 한때의 꿈
개봉일: 2025.06.20.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37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드류 스타키, 레슬리 맨빌, 제이슨 슈왈츠먼, 엔히 자가
개인적인 평점: 3.5 / 5
쿠키 영상: 없음
나에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는 딱 이 한 문장으로 정립되어 있다. ‘펄떡이는 것들로 그득한, 살아있는 영화’. 들끓는 욕망과 한순간 솟아오르는 치기, 따가운 햇살, 뜨끈한 피, 생생한 피부의 촉감. 온갖 감각이 넘치는 그의 영화는 매번 내 둔해진 감각을 새롭게 재생시킨다.
이 모든 감각들의 시작점엔 바로 ‘사랑’이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그리는 사랑은 맹렬하고 솔직하기에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하고 외롭다. 개인적으론 이러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고 생각하며 당연하게도 나의 루카 구아다니노 최애작 또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로도 온전한 소유를 목적으로 한 카니발리즘 로맨스 <본즈 앤 올>, 세 주인공 사이의 다자간 사랑의 랠리 <챌린저스>처럼 여러 독특한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쉼 없이 발표했고 나는 그때마다 그의 뜨거운 욕망과 변태력에 큰 박수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영화.. 어떻게 한 번 더 안 되는 걸까…’하는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퀴어>를 정말 오래 기다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채. 그런데 영화가 끝나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이거였다. “뭐지? 이건 또 봐야 알 것 같은데?”
<퀴어>는 언뜻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닮아있는 듯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본격적으로 영화 <퀴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느낌을 기대하고 있는 감독의 팬들에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언제 떠올려도 아름다울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퀴어>는 마음을 걸어 잠가도 비집고 들어오는 칼바람 같은 꿈이라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생생한 감각들을 떠밀어주는 영화라면 <퀴어>는 스스로 인물의 감각을 더듬어내야 하는 버석한 영화에 가깝다고.
<퀴어>는 동명 소설 [퀴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기존 질서에 반항하고 기행을 일삼았던 비트 세대의 주요 인물이었던 원작자 ‘윌리엄 버로스’는 다이내믹했던 자신의 생을 그대로 투영한 문학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퀴어]는 그중 한 편으로, 약물 금단증상에 시달리던 그가 멕시코에서 한 청년을 만나며 겪은 경험을 담은 책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기는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영화 <퀴어>는 원작에 비해 주인공의 감정이 비교적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이야기 사이 공백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갔던 원작에 비해 갈피가 잡혀있는 편이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 모두, 한 번 놓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어지러운 작품이니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대략 피곤한 날 관람은 피하시라는 말이다.)
영화 <퀴어>의 주인공인 작가 ‘리’는 마약 단속을 피해 미국에서 멕시코시티로 이주한다. 그는 모아둔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인생을 함께할 짝을 찾는 중이다. 그런데 곱게 말해 ‘짝을 찾는다’고 표현한 거지, 그는 사실 아름다운 청년들에게 열심히 추파를 던지는 중이다. 하지만 리에게도 명확한 기준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퀴어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리와 같은 퀴어, 그것도 진심으로 사랑을 나눌 퀴어를 찾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처음 등장하는 앳된 청년은 퀴어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퀴어임이 확실해 정사를 나눈 청년은 육체적인 사랑. 그 이상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더해 퀴어가 아닌 이들은 리를 대놓고 괄시하니 리는 항상 사랑을 하면서도 외롭다.
그러던 어느 날, 열기 가득한 길거리. 리는 수많은 인파 너머로 지나가는 유진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노골적인 표현과 거짓말까지 동원하며 유진의 옆자리를 사수한다. 리는 지금껏 다른 청년들에겐 퀴어인지, 퀴어가 아닌지. 말과 몸을 동원해 거침없이 질문해왔지만 유진에겐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
그렇게 설레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한 날들이 지나가고 리는 온갖 노력 끝에 유진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몸을 맞췄으니 이제 마음을 맞춰갈 순서가 아닐까. 리는 기대감에 부풀어 유진을 다시 찾는다. 하지만 유진의 태도는 점점 미스터리하게 변하고 유진을 향한 리의 갈망과 애정. 외로움은 쉼 없이 몸집을 키운다. 그리고 그것에 짓눌린 리는 유진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것에 집착하게 된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Queers가 아닌 Queer
영화의 중심인물은 리와 유진, 두 사람이고 영화의 사건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이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퀴어들(Queers)’이 아닌 ‘퀴어(Queer)’다. 그 이유는 리의 이야기 속에서 동성인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 퀴어는 리뿐이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유진의 신체, 행동, 젊음은 리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대상화되지만 리의 모습은 그렇게 표현되지 않는다. 리는 유진에게 욕망을 느꼈지만 유진은 리에게 진짜 욕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진이 퀴어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후, 리는 유진이 퀴어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그의 몸에 손을 얹는다. 유진은 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함께 밤을 보낸다. 리는 이를 유진이 퀴어이고 자신을 허락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유진은 리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유진을 향한 리의 마음이 사랑이라면 리를 향한 유진의 마음은 호기심에 가깝다. 유진에게 리는 ‘가보지 않은 다른 동네 퀴어바’ 처럼 그저 궁금한 것. 딱 그 정도인 거다.
유진은 리와의 관계를, 퀴어와의 관계를 체험한다. 그는 리와 나란히 앉아 함께 술을 마시고, 같은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하고, 같은 영화를 보며 발을 맞춘다. 하지만 리가 그토록 바랐던 순간이 지나간 후, 유진의 호기심은 급속도로 사라진다. 유진은 첫 정사 이후 리가 여운에 빠져있는 사이 리의 성기에 닿았던 손을 리의 셔츠에 닦거나 키스를 나눈 후 입술을 닦거나, 더 이상 리와 같은 메뉴를 먹지 않는 -첫 정사 이후 장면들에선 리 앞엔 술. 유진 앞엔 콜라가 놓여있다.- 등 거리를 두는 행동을 보인다. 금전으로 얽힌 2장 이후의 관계는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한눈에 봐도 건조하고 일방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실제인지 리의 환상인지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영화의 끝에 가선 유진이 ‘저는 퀴어가 아니’라 말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첫 정사 전, 저녁 식사 장면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리가 식사를 미뤄두고 진지하게 퀴어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동안 유진은 리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게걸스레 식사를 이어간다. 이 때 카메라가 식당 밖에서 두 사람을 비추는 컷에선 유진이 앉아있는 쪽은 벽으로 가려져 있고 리가 앉은 쪽만 유리로 되어있어 마치 리가 앞에 앉은 유진이 아닌 두꺼운 벽에 대고 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는 영화 내내 통할 수 없는 벽, 유진을 향해 열심히 사랑을 이야기했고 또 자신과 같길 바랐다. 하지만 유진에게 리와 리의 사랑은 구토를 불러오는 술 같은 존재였다. 유진은 리의 집으로 가던 날 밤. 리에게 맞춰 술을 마셨고 마지막으로 집에서 리가 직접 따라준 술을 한 잔 마시고는 결국 토를 하고 만다. 리는 ‘술은 별로 안 마시지 않았나?’라며 유진을 걱정함과 동시에 약간의 의아함을 가진 채 화장실 밖에서 그를 기다린다. 리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아무리 유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유진은 리가 건넨 술과 사랑을 구역질과 함께 뱉어낸다. 그렇게 유진이 사랑을 뱉어내는 동안 리는 유진이 그어놓은 선 밖에서 괴로워할 뿐이다.
무한히 새로 시작되는 잘못된 사랑과 그것을 향한 진심
리는 유진을 위해 자신이 그어놨던 선을 하나 둘 넘는다. 리는 첫 번째로 만난 청년에겐 “너 퀴어 아니지?”라고 물으며 그를 추궁하고 청년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 판단한 후 자리를 뜬다. 두 번째로 만난 청년과 밤을 보낸 후엔 돈을 줘서라도 그를 잡을까 고민하다가 이내 지갑을 닫는다. 그런데 유진을 처음 본 후, 리는 거짓말을 쳐 유진을 십아호이에 불러내고, 하룻밤을 보낸 남자들에게 집을 털렸다는 친구 조에게 “털리기 싫었으면 집이 아닌 모텔로 가지.”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유진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유진에겐 지갑을 여는 걸로도 모자라 십아호이의 일부를 인수하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리는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식물, 야헤에 집착하고 다시 약에 손을 대며 또 다른 선을 넘게 되는데 이 모든 건 유진과 얽힌 사랑, 외로움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리는 선을 넘으면서까지 진심으로 사랑을 쟁취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골라도 너무 잘못 골랐다. 리와 유진이 여행을 떠나기 전, 1장의 후반부에서 리는 메리와 함께 있는 유진에게 찾아가 돈을 줄 테니 자신과 함께 남미로 떠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유진은 그의 제안에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때 메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와 리와 유진 사이에 있는 체스판에 손을 뻗는다. 그리고 조금 전에 리가 손댔던 체스 말을 옮기며 “이거 여기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둘 곳이 아닌, 두면 안 되는 칸에 자리를 잡은 체스 말처럼 리는 ‘퀴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유진의 세계에 잘못 발을 들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리는 유진을 포기하지도, 그를 죽이지도, 자신을 죽이지도 못한다. 유진을 미워하고 또 사랑하기 때문에. 리가 마지막으로 본 환상 속엔 방 안에 누워있는 유진과 ∞ 모양의 지네 목걸이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빨간 뱀이 나온다. 이 뱀은 꼬리를 삼키는 자 ‘우로보로스’를 떠오르게 하는데, 이는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와 영원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리의 사랑은 이 뱀과 지네처럼 시작과 끝이 영원히 반복되는 ∞ 모양을 따라 움직인다. 리는 지독한 외로움에 벌벌 떨다가도 무심히 얹어진 유진의 발에 안정감을 느끼고 환상 속에서 유진을 죽이고도 그를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기에 미치도록 증오스럽고 사랑하기에 감히 죽일 수도 없었던 외로운 그의 사랑은 매일같이 부서졌다가 또 새롭게 시작된다. 심지어는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말이다.
리는 침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유진과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왼쪽으로 돌아누운 리의 발 위로 같은 방향으로 누운 유진의 발이 겹쳐지고 리는 마지막 숨을 뱉는다. 과거 현실에선 벌벌 떨면서 허락을 받고 나서야 겨우 자신을 등지고 있는 유진과 발을 한 번 겹칠 수 있었는데.. 리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나마 잠시 유진과 자신의 자리를 바꿔본다.
사랑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여행의 끝
리에게 남미 여행은 사랑을 지킬 마지막 기회였기에 그는 여행에 최선을 다했고 죽을 때까지 이 여행을 잊지 못한다. 반면 유진에게 이 여행은 당시 하고 있었던 신문사 아르바이트와 다름없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일 정도로 인식된다. 그래서인지 유진은 여행이 마무리되자마자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여행의 결말은 1장에서 두 사람이 영화관에서 함께 봤던 영화 <오르페>의 흐름과 비슷하다. <오르페>는 장 콕토의 영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신화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랑에 빠진 오르페우스과 에우리디케가 결혼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는다. 슬픔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저승의 신에게 아내를 돌려달라 간청해 저승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올 단 한 번의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앞서 신이 걸었던 조건을 잊고 실수를 저지르고 또 한 번 에우리디케를 잃는다. 유진을 얻었다 잃고, 다시 그를 얻기 위해 야헤가 있는 정글로 뛰어들었지만 영영 그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리의 이야기는 오르페우스 신화와 닮아있다.
의식을 한 겹 깨부수고 심장을 토하고도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은 파편화된 감정만을 남긴다. 혼자 남은 남자, 리는 그 파편들을 끌어안는다. 그것들은 리의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지만 그는 절대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정말 끝 맛까지 참 쓰디쓴 드라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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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많은 소녀
죄 많은 소녀
충격적인 영화다. 주제, 배우의 연기, 감독의 연출 모두 예사롭지 않을 뿐 아니라 탁월하다. 저예산 독립영화의 작품 수준이 이 정도라면, 한국영화는 가능성과 희망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다.
여자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한 여학생의 자살 사건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어떻게 살해하는가'에 관한 핍진한 관찰 기록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관객의 심리를 건드린다. 그것은 배우들의 연기 뿐 아니라 음악, 음향, 인물들이 놓여 있는 극단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도록 한다.
경민이 실종되고, 담임 선생과 형사들은 전날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를 불러 경민의 실종에 관해 묻는다. 학교에 오지 않은 경민의 부재를 보면서, 영희도 마음 속에 한가닥 불안함이 꿈틀거리는데, 담임과 형사는 경민의 실종에 영희가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질문한다.
영희는 억울하다. 형사는 영희와 친하게 지내는 한솔을 불러 영희와 대질 심문을 한다. 한솔은 영희가 경민에게 '죽을 용기도 없는 게...'라는 말을 했다고 말하면서 영희의 말이 경민의 실종 또는 자살을 부추기는 말을 했을 거라는 의미로 말한다.
영희는 사실을 말하지만, 이때까지 관객은 영희와 한솔의 진술 가운데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영희의 태도는 자칫 도도하고 건방져 보이기도 하고, 담임을 비롯한 학교의 선생과 경민의 부모는 경민이 아무 이유없이 실종되거나 자살할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가장 만만한 아이가 영희였다. 실종 전날 밤 늦게까지 함께 있었고, 경민의 가방과 신발이 발견된 장소 부근에 있는 CCTV를 모두 조사한 결과, 경민이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밝혀졌다. 그렇다면 경민과 마지막까지 있었던 영희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경민이 실종 또는 자살한 것일까를 선생들과 형사들은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했다.
영화에서 경민은 자살한 것이 확실하다. 다만, 경민이 왜 자살했는가에 관한 이유나 암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중에 경민의 시신이 발견되고, 모든 사람들 - 선생들, 형사들, 심지어 같은 반의 친구들도 - 이 영희를 의심과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면서, 영희도 억울함을 벗어나려고 자살을 기도한다.
영희가 병실에서 겨우 회복하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찾아와 경민의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다고 알려준다. 즉, 경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유서를 쓰고 자살한 것이며, 영희가 함께 있었던 날은 우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선생들과 같은 반 친구들은 - 그들 가운데는 영희의 집으로 쳐들어가 영희를 린치한 몇 명의 같은 반 친구들도 있었다 - 경민이 영희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상황이 분명해지는 순간 모두 태도를 바꾼다. 영희를 의심하고 비난하던 친구들이 다정한 태도로 영희의 건강을 걱정하고, 병문안을 오며, 기꺼이 어려운 일을 돕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같은 세대의 갈등은 봉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경민의 자살에 영희보다 더 책임이 있는 사람은 '한솔'이었다. 영희와 가까운 친구였지만, 영희가 경민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질투를 느끼고, 영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다. 한솔은 영희가 병원에 있을 때 찾아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한다. 영희도 한솔을 안아주고 입맞춤을 하는데, 이 영화에서 동성애 코드를 넣은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희와 한솔은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영희를 괴롭히는 또 한 사람은 경민의 엄마다. 경민이 자살한 직접적 원인은 알고 보면 그의 부모에게 있다. 경민의 부모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원인과 책임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그래서 경민의 유서가 발견되었음에도 영희의 병실을 찾아와 영희를 괴롭힌다.
처음부터 영희의 말을 믿지 않았던 선생들과 형사들, 경민의 엄마는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경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물으려 하고, 없는 죄를 덮어 씌우려 했던 기성세대에게 영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는 '자신의 죽음'이다. 그래서 영희는 표백제를 먹고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실패한 죽음 이후에도 영희는 끝없이 자살을 궁리한다. 이때 두번째 자살은 명백한 의도와 목적을 갖는다.
영희가 경민에게도 말했듯, 지금과 같은 의미 없는 삶이라면 사는 것과 죽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고등학생은 가장 고통스러운 세대다. 이미 유치원,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는 암기식 수업을 해야 하고, 여러 개의 학원을 다니며 밤낮 없이 공부, 공부, 공부만 하는 지겹고 역겨운 나날이 무려 12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여기에 부모의 무관심(경민), 가난(영희)과 같은 외부적 환경까지 겹치면서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은 우울하고 괴로운 심리상태가 된다. 청소년들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질식시킨 건 기성세대인데, 정작 그 기성세대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한다.
영희는 그런 기성세대를 보면서 환멸과 증오의 감정이 차갑고도 날카롭게 솟아나는 걸 느낀다. 영희는 한솔과 함께 경민의 엄마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한다. 자기(영희)는 경민이 왜 죽었는지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경민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이면 내(영희)가 왜 죽었는지 사람들이 당신(경민 엄마)에게 물어볼 거다. 그때 내 죽음에 대한 이유나 잘 대답하길 바란다.
즉, 영희는 경민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추악한 책임전가를 그대로 경민 엄마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앞부분에서 경민의 죽음을 두고 선생들, 형사들, 경민 엄마는 영희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한솔은 그 장면을 보면서 침묵한다.
이제, 영희가 죽게 되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경민 엄마가 되고, 그 옆에 한솔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형사와 사람들은 영희의 죽음에 대해 경민 엄마에게 물을 것이고, 한솔은 역시 침묵할 것이다. 경민 엄마는 당연히 영희의 죽음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을 것이며, 한솔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도 사과할 대상이 사라지고, 죄책감은 무겁게 그의 삶을 짓누를 것이다.
처음부터 경민의 죽음은 기성세대가 만든 원죄의 결과이며, 기성세대가 저지른 타살이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세대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전가한다.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억울함이 기성세대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게 되고, 기성세대에 대한 복수는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완성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김의석 감독은 이 작품이 장편 데뷔작인데,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 연출부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대부분이 여성이어서 여성의 심리, 세부적인 생활 모습을 보면서 여성 감독인 줄 알았는데, 남성 감독이어서 놀라웠다.
영희가 형사에게 추궁당하고, 마치 범인인양 낙인 찍히고 나와서 화장실에 앉아 생리대를 보는 장면은 영희의 심리와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영희는 죽을 만큼 억울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하혈인 것처럼 보이는 다량의 생리혈을 보여줌으로써, 영희가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는 걸 관객이 느끼게 한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다리를 향해 걸어가는 영희는 중간에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볼 듯 하다 다시 걷는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다리 안쪽을 향해. 영희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을까. 성대를 다쳐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뱉어내지 못한다. 그의 침묵은 죽음보다 무겁다.
배우 전여빈의 연기는 마치 '곡성'에서 어린이 배우 '김환희'의 연기와 비교할 수 있다. 그만큼 처절하고 극적이다. '영희'는 자존감도 있고, 자기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청소년이지만, 그 모습이 기성세대에게는 건방지고 불편하게 보인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신세대를 길들이려는 기성세대의 어리석은 모습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억울한 심정을 꾹꾹 눌러 참으며, 자신을 죽임으로써 기성세대에 복수하겠다는 영희의 태도는, 죽을지언정 기성세대에 굴복하거나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기성세대가 저지른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고발하겠다는 자기파괴적 행동이 극단적으로 보여도 그같은 방법 밖에는 가지지 못한 약자의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영희'는 기성세대가 키운 훌륭한 신세대지만, 결국 기성세대가 죽인 신세대이기도 하다. 아니, '영희'는 기성세대가 키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잘 큰 신세대였고, 그를 죽인 기성세대는 오만하고 건방지며, 비겁하고, 야비한 존재였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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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멸이라는 실로 짜인 사랑
과거의 나와 단절하고 싶어도, 현재의 나는 여전히 그 과거와 보이지 않는 실로 엮여 있다. 때로는 이를 '저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존재하며 타인과의 관계, 나의 감정과 정체성의 깊은 내면까지 파고든다.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패션 디자이너인 주인공 레이놀즈 우드콕은 정교하게 짜인 삶과 옷감 속 자신을 가두며 감정을 억누르고 타인과의 거리두기를 고집한다. 우드콕이 '나는 저주받지 않았다'고 적힌 글귀를 옷감 안에 숨겨둔 장면이 있다. 완벽주의의 강박으로 자신이 정한 규칙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꺼리지만 자신도 이 규칙들을 깨고자 하는 의지와 나약함이 내면에 있었음을 상기해 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우드콕은 보이지 않는 실을 자리고 싶어 하지만 되려 그 실들이 그를 구성하는 본질이었다.
하지만 이런 견고한 것 같던 우드콕의 세계에 알마가 들어왔다. 처음엔 그녀도 우드콕이 그간 만나왔던 여자들과 똑같이 우드콕에게 순종하고 모든 걸 그에게 맞춰주지만, 점차 그의 틈에 파고들며 그의 세계를 파괴하고 삶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이 파멸로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독버섯'이다. 알마는 독버섯을 통해 우드콕의 건강을 의도적으로 해치고 그가 무력해진 틈을 타 나약한 내면을 드러낸 우드콕을 돌본다. 계속해서 연인관계인 우드콕과 알마 사이에서 위로 군림하려고 하는 관계에서 권력관계를 타파하고 균형을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알마는 독버섯을 선택했다. 이 둘의 사랑은 결국 파멸되어야만 지속할 수 있었다. 이 파괴적 행위는 알마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순되게도, 우드콕은 이 파멸 속에서 비로소 안식과 의존을 경험하며 안정적으로 되고 자신이 나약해짐을 알면서도 독버섯을 먹는 것을 선택한다. 이처럼 우드콕과 알마의 사랑은 파괴와 의존, 나약함과 지배가 공존하는 역설 속에서 완성된다. 알마는 우드콕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움으로써 그와 진정한 관계를 맺고, 두 사람은 통제와 복종이 아닌 새로운 균형 위에서 함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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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다음 소희> 리뷰 30초 예고편
“올해 가장 큰 울림을 선사한 영화” 온 세상이 [다음 소희]를 주목해? 폭발적 극찬! 리뷰 30초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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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 공식 예고편
스마트하게 성공 가도를 달리던 '남성' 히야마 켄타로.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며 그의 삶은 악전고투의 연속이 된다. 웃음과 생각할 거리를 함께 선사하는 사회적 코미디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 곧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