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4-08-02 11:25:30
여성 지휘자가 되기 위해 험난한 시련을 마주하다!
<디베르티멘토> 영화 시사회 후기
시놉시스
자히아 지우아니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튼 지휘자 영상을 보고 지휘자의 꿈을 꿨다. 자히아 지우아니의 가족은 프랑스의 아랍인 이민자 가족이고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파리의 명문 음악원에 다닌다. 자히아 지우아니가 맡고 있는 분야는 비올라지만 자신의 꿈은 지휘자가 되어 악단을 연주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원에 다니는 친구들의 무시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지휘자가 될 수 없는 시선이 공존한다. 그래서 그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자히아 지우아니에게 앞으로 무슨 일들이 펼쳐질까?
전 세계에서 여성 지휘자의 비율이 6%밖에 안된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자히아 지우아니를 포함한 4%만이 여성 지휘자라고 하는데 그만큼 지휘자의 비율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가 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자히아 지우아니가 당시 사회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성 지휘자 자리까지 올랐는지도 보여준다.
음악은 제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자히아 지우아니의 대사와 지휘자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어떤 건지 관객들에게 잘 보여준다.
세계적인 지휘자인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자히아 지우아니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휘자 수업을 가르친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엄격하게 지휘자를 기르는 수업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제자들에게 따뜻한 덕담도 하는 좋은 스승이었다. 자히아 지우아니가 지휘를 하는 모습이 너무 교과서적이다고 해서 때때로 음악에는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필요하다고 충고를 해준다.
사실은 자히아 지우아니의 내면 속에는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단원들과 연습할 때도 자신이 혼자인 기분이 들곤 했는데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언젠가는 그 외로움이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거라고 조언하고 그 말이 현실이 된다.
이 영화의 메세지는?
자히아 지우아니는 언젠가 오케스트라에 서서 지휘자를 하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피나는 연습을 해왔다. 그렇기에 지금의 여성 지휘자의 자리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다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꿈을 펼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출발선이 달라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봤고 자히아 지우아니에게 다가온 역경과 시련을 잘 이겨낸 걸 보고 필자도 그 점을 본받아 꿈을 위해 끈기 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여성 지휘자가 되기 전에 겪어야 했었던 한계를 극복한 어느 여성 지휘자의 이야기!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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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밖으로 귀신의 정체를 발설하는 순간 사망하는 마을? - 랑종 감독의 최고 흥행작
'랑종' 개봉기념 감독전작리뷰 Part2
피막 (2013)
-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칼 하나로 생존에 성공한 전우들. 하지만 제대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전쟁터보다 더 무서운 마을. 진실을 말하면 죽게 되는 이 공포의 마을에서 살아남으려면 문 닫고 입 닫는 방법 뿐이다. 하지만 친구를 죽게 나둘 수 없다며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 '피 막'을 살리기 위해 친구들이 발 벗고 나서는데...태국 역대 박스 오피스 1위
태국 최초 천만관객을 돌파 시킨
영화 '랑종' 감독의 최고 흥행작 리뷰귀신보다 더 무서운 전우들의 마을 탈출기! 이 영화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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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엔젤> 예고편
다들 미친 것 아닌가
자유로운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가고 싶은 데로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지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야
각자 운명대로 사는 거야
난 타고난 도둑이야
그래서 나한테는 내 것 네 것이 없어
그러니 끝까지 가야지
불법과 사기가 판을 치는 세상이야
끝까지 간다
나는 바로 ‘죽음의 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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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캔디맨> 메인 예고편
들어봤니? 미지의 존재 캔디맨
비주얼 아티스트 '안소니'는 새 작품 구상을 위해 어릴 적 살던 도시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오래 전부터 떠돈 괴담을 듣고 매혹되면서 '캔디맨'에 대한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되는데...
불러봤니? 죽음을 부르는 남자 캔디맨
세상을 뒤흔든 미지의 존재 캔디맨,캔디맨,캔디맨,캔디맨,,,
한 번만 더 부르면 그가 나타나게 되는데..
용기가 있다면 그의 이름을 불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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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크리처 2 | 의도가 느껴지려면 일단 맛있어야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에 몸을 던진 후 나진이 뇌에 파고들어 초인적인 괴력과 불사, 불로의 능력을 갖게 된 '윤채옥'(한소희).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타인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낸다. 대신 그녀는 능력을 살려 실종자를 찾아주는 뒷거래로 생계를 꾸린다. 어느 날, 의뢰를 받아 몰래 들어간 모텔 방에서 윤채옥은 놀라운 사람을 발견한다. 이미 죽었어야 하는 옛 연인 '장태상'을 똑 닮은 '장호재'(박서준)를 발견한 것.
절친한 형 '권용길'(허준석)과 함께 흥신소 일을 하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장호재. 밀린 월세에 의해 압박받던 그는 의뢰를 받아 향한 모텔 방에서 의뢰인 대신 사체와 윤채옥을 발견한다. 윤채옥이 곧바로 모습을 감춘 나머지 살인 혐의로 수사를 받던 호재는 윤채옥을 찾아 진상을 알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장호재와 윤채옥은 미처 몰랐던 진실과 그들을 노리는 과거의 적에게 한 걸음씩 다가선다.
맛을 빼먹은 의도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성황리에 끝났다. 시청자도 많았고, 수많은 밈을 만들어냈다. '의도가 느껴져야 한다'는 안성재 셰프의 일관된 심사평도 그중 하나다. 음식을 먹는 순간 셰프의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져야 활용된 기술이 유의미하다는 그의 미식 철학은 공감 혹은 의문을 자아내며 화제가 됐다. 그런데 안성재 셰프의 말에는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기본적으로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 2>는 안성재 셰프의 심사평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듯한 드라마다. 창작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전편이 일제의 만행을 장르적으로 풀어내려 했다면, 이번에는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는 현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다. 문제는 전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의도를 보여주는 데 지나치게 힘을 쏟은 나머지 밑바탕이어야 할 맛, 곧 드라마의 재미를 놓쳐 버렸다.
분명한 의도
<경성크리처 2>가 겨냥하는 대상은 확실하다. '토착왜구'다. 일제를 미화하거나 일본의 정치적, 역사적 입장을 옹호하는 한국인 혹은 그러한 현상을 비판하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에도 친일파가 급변하는 세태에 발맞춰 부와 권력을 유지했으며,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세간의 인식과 현실을 시나리오에 녹여냈다.
악역 캐릭터만 봐도 의도가 보인다. '마에다'(수현)와 옹성병원 위에 지어진 전승제약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일본군 장교와 일본인, 친일파의 후손이 협력해 과거의 연구를 이어가는 이 조직은 토착 왜구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들의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일제 패망 후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혼란했던 한반도. 마에다는 그 틈을 타서 장태상과 그의 동료들을 제거하고 재산과 영향력을 되찾았다.
이러한 전개는 한국전쟁을 지렛대 삼아 경제를 재건한 일본과 혼란을 틈타 과거를 씻어냈던 몇몇 친일파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정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권준택'(위하준)의 자손은 임대료 걱정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다는 모습도 현대사의 비극을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더 나아가 그들의 대사에는 친일파, 뉴라이트, 일본 우익의 사관을 반영되어 있다. 마에다는 양아들이자 시즌 1 막바지에 사망한 명자의 아들 '승조'(배현성)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또 장태상에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이제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속삭이기도 한다. 마치 식민지 근대화론을 필두로 한 일본 측 사관을 요약해 보여주는 듯하다.
의도만 남은 디시
에피소드 7개에 꽉꽉 눌러 담은 메시지는 사실 비판하기 어렵다. 피식민지국 국민 입장에서는 항상 관심을 갖고 염두에 둬야 할 이야기가 맞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에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시의적으로도 적절해 보인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공조 긴밀해지는 만큼 한국, 일본, 미국의 협력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경성크리처 2>가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두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논제를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메시지를 뻔하게 만드는 기제다. 기시감이 강한 클리셰의 반복은 의의가 중요한 의도마저도 거부감이 느껴지게 한다. 극 중 분량이 상당한 액션이 대표적이다. 나진을 맞은 이들의 초인적 괴력과 속도를 활용한 연출은 돋보이지만 구성은 식상하다. 한국 드라마 중에서는 <기생수>와 유사하고, MCU의 <시크릿 인베이젼>과도 흡사하다. 팔을 대신하는 촉수를 활용하는 식의 아이디어는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드라마의 정체성 문제와도 직결된다. '크리처물'을 표방하지만 전편의 세이싱 같은 괴물의 비중이 거의 없다. 크리처물에게 기대할 법한 시각적 쾌감이 사라지면서 차별점도 잃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퀄리티도 아쉽다. 어두운 복도, 공터, 폐공장에서 주로 액션이 펼쳐지다 보니 회차가 지날수록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인상이 짙다. 경성의 화려함과 옹성 병원의 스케일을 강조하며 눈을 즐겁게 한 지난 시즌과는 대조적이다.
그나마 멜로는 살았다
그래도 마지막 보루를 지켰다는 점은 위안이다.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세밀해진 덕분에 로맨스의 완성도가 높아졌기 때문. 사실 지난 시즌은 장태상과 윤채옥의 멜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첫눈에 빠진 운명적이 사랑이라는 클리셰를 답습했고, 둘이 사랑을 싹 틔우는 과정도 못 보여줬다. 로맨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옹성병원에 갇힌 채 각자 사투를 펼쳤으니까.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에 자연히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시즌 2는 두 주인공 간의 감정선을 영리하게 그려냈다. 10부작에서 7부작으로 분량을 줄이고, 각자의 서사를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시키면서 아련함을 극대화했다. 전반부는 윤채옥이 이끌어 나간다. 그녀는 어머니 세이싱으로부터 나진을 이식받아 불로 및 불사의 존재로 79년간 홀로 지냈다. 시즌 1에서의 첫 만남과 같은 구도로 이뤄지는 윤채옥과 장태상의 재회는 그녀의 그리움과 쓸쓸함을 극대화하고 뇌리에 각인시킨다.
중반부부터는 장태상이 극을 이끈다. 그는 마에다가 억지로 투여한 나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겨우 나진을 적출하고 기억을 잃은 채로 1년간 장호재로 살아왔다. 과거의 악연과 비극을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윤채옥과 재회한 후로 점차 기억을 되찾고 끝내 장태상으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전승제약이 잡아간 윤채옥을 구출하러 간다.
그 끝은 다크 초콜릿 같다. 윤채옥은 나진을 제거당하고 기억을 잃은 상태로 평범한 대학생활을 영위한다. 반면에 장태상은 장호재라는 이름으로 죽지 못하는 삶을 홀로 살아간다. 그들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순간, 서로 맞바꾼 삶의 궤적은 한눈에 들어온다. 해피엔딩 같지만 정반대의 상황을 마주한 쌉쌀한 멜로를 완성한다. 이러한 결말은 <경성크리처 2>가 최소한의 몫은 해냈다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이유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경성크리처 2>는 예술 작품의 본질을 간과한 여러 작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은 창작자가 미적 감각 속에 의도를 숨겨서 전달하고, 수용자는 미적인 즐거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의도를 발견 혹은 체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성크리처>는 창작자의 의도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미적 감각과 기술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나머지 역효과가 발생한 듯 보인다.
이는 쿠키 영상대로 시즌 3가 나오더라도 기대가 크지 않은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쿠키 영상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시즌 3은 나진이 세상에 퍼짐으로써 그 유산을 비로소 사람들이 직시하고 맞서는 전개를 보여줄 듯 싶다. 나진을 현재까지 남은 일제의 유산이나 저주로 이해한다면, 지난 두 시즌 동안 보여준 의도의 연장선상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시즌 3만큼은 철저히 장르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반일이라는 가치와 메시지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 달리 말해 두 주인공의 멜로와 액션, 그리고 크리처물의 정체성만 살아나도 작가의 의도가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
Poor 형편없음
반일이라는 의도를 감싸지 못한 액션과 크리처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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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무지 - 테렌스 맬릭
황무지 - 테렌스 맬릭
많은 영화 목록을 들여다보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영화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를 '클라이테리온'에서 배급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 단조롭고 물기 없이 메마른 화면의 나열, 미국중북부의 평범한 주, 사우스다코타의 가난한 동네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남한)보다 두 배나 넓은 면적의 땅에 인구는 70여 만 명에 불과한 곳으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지역이다.
이른 아침, 쓰레기 청소차가 골목을 지나가면서 두 사람이 집앞마다 쓰레기통을 들어 차에 옮긴다. 청년 키트(마틴 쉰)는 무심한 표정으로 쓰레기통을 옮기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홀리(씨씨 스페이식)의 나레이션으로 진행한다. 홀리는 고등학생이고, 여기 사우스다코다주로 오기 전에 텍사스주에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텍사스를 떠나 사우스다코타주로 이주하는데, 홀리의 아버지는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먹고 사는 문제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집도 비교적 깨끗하다.
홀리는 학교에 다니지만, 아직 친구도 없고, 혼자 집에서 곤봉 연습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홀리와 키트는 우연히 만나고, 두 사람은 홀리의 아버지를 피해 점점 깊은 관계를 갖는다.
지루하고 심심할 것만 같은 영화는 키트의 돌발적 행동으로 급변한다. 홀리의 아버지는 키트에게 경고하고, 두 사람이 만나지 말라고 말한다. 키트는 홀리의 집에 몰래 들어가 홀리의 가방을 싸고, 홀리의 아버지와 맞닥뜨리자 그를 살해한다. 첫번째 살해다.
놀라운 것은 홀리의 태도다. 자기 아버지가 키트에게 총맞아 죽었지만, 홀리는 놀라지도, 비통하게 울지도 않는다. 다만, 죽은 아버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걱정한다. 키트는 집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범행을 녹음한 싱글 LP판을 집앞에 놓고 홀리와 함께 도망한다.
영화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이 있었다. 1957년 미국 네브라스크주 링컨에서 연쇄살인을 하던 커플이 있었다. 찰스 스타크웨더와 카릴 앤 퍼게이트가 그들인데, 나이가 19살, 13살이었다. 이들은 약 10여 명의 사람을 살해했고, 1959년 찰스는 전기의자로 사형, 카릴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영화의 흐름도 실제 찰스의 범행과 매우 비슷하게 진행한다.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주인공의 태도가 비정상적으로 차분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을 죽이면서 감정의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지 못하는 싸이코패스이거나,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한 비정상적인 인물일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의 사랑을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행위가 비정상인 상황에서 두 사람이 갖는 감정 역시 '정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키트가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홀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닮았다.
감독 테렌스 맬릭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이후 테렌스 맬릭의 작품들을 보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마쳤으며, 서른 살이 되기 전에 MIT에서 철학과 조교수로 강의를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서른 살에 저예산으로 이 영화를 만들어 감독 데뷔를 하자, 헐리우드에서는 천재 감독이 나타났다는 반응이었다. 영화와 관련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놀라운 영화를 만들면서 등장한 것이다.
데뷔 작품부터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는 영상으로 철학을 드러내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은 뛰어난 영상 이미지와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적 의미를 모색하는 장치를 내재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극단적 무심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를 생각하면, 영화가 단순히 미장센으로서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적 상황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영화에서도 두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열정도, 의욕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좀비'같은 인물인 것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엄청나게 성장하고, 물질문명의 첨단을 달려왔지만, 70년대의 미국은 심각한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극심한 자본주의의 폐해에 저항하는 히피운동이 일어나고, 이때부터 미국에는 남미에서 들어오는 마약이 급증하면서 마약중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너는 왜 노력도 하지 않고 절망하며, 분노하는가'라고 충고하는 건 꼰대가 하는 말이거나, 자본의 비웃음일 뿐이다. 70년대 미국의 청년들 가운데 특히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평생 다른 주로 넘어가지 못한 채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의 '부'는 고르게 퍼지지 않았고, 일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커졌으며, 욕망의 대상은 주로 대도시에서 발생하고, 집중했다. 발버둥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갇힌 것같은 답답한 상태의 청년들 가운데 일부는 대도시로 떠나고, 일부는 체념하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극히 일부는 범죄자가 된다.
미국의 평범한 하층민은, 하루 노동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본다. 주급을 받으면 월세를 내고, 일주일치 식량을 구입하고, 다시 주중에는 노동을 하고, 주말에는 비 새는 지붕을 고친다.
평생 이렇게 살 것이 뻔하다는 걸 아는 청년들은, 이 삶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고향을 떠나야 한다. 그곳이 어디인지,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무조건 이 낡고 더러운 고향을 떠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
키트는 극단적 방법으로 고향을 떠난다. 그는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자기 부모를 먼저 살해하고 홀리의 집을 찾아온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홀리의 아버지를 아무렇지 않게 살해한 것이고, 계획적으로 홀리를 데리고 떠난 것이 아닐까.
이후, 그가 보여주는 행동은 일관성이 있다. 그를 추적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을 살해하고, 자기와 함께 쓰레기 청소부로 일하던 동료의 집을 찾아가 그를 죽이고, 그 동료를 찾아온 남녀를 지하실에 가두고 총을 쏜 다음 도망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살해한다.
하지만 키트가 죽이지 않은 두 사람이 있는데, 부잣집에 들어가 주인과 하녀를 감금하고 나올 때, 이 두 사람은 살려둔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 부자가 키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고, 신고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찰스와 홀리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오직 부자와 부자의 하녀만 살려두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키트가 살해하는 대상이 특정 계층이나 계급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즉 키트는 20대 청년이지만 대단히 어리석고 무지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냉혹한 싸이코패스가 아니라, 시골 구석에서 배우지 못하고, 사회적 윤리와 도덕에서 비껴 있는 소외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외'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키트는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것을 자각한다는 것은 사회와 자기의 위치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키트는 그럴만한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을 읽으면서 키득거리는 것을 보면, 그가 문맹은 아니라는 것이고, 어느 정도 학교 교육을 받았다는 걸 의미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거로 보긴 어렵다.
건조하고 냉담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테렌스 맬릭의 관점은 키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이입하지 않는 것, 그래서 오로지 인물의 행위만을 관찰하면서 인물과 상황을 객관화하고, 관객으로하여금 인물의 감정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한 장치는 이후 짐 자무시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과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철학적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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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괜찮아질 거야, 우린 <로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지 Rosie , 2018 제작
아일랜드 | 드라마 | 2019.05.16 개봉 | 12세이상관람가 | 86분
감독: 패디 브레스내치
다 괜찮아질 거야, 우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엄마는 오늘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이 가족은 하루아침에 집에서 쫓겨났다. 집주인이 그들의 집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던 이들은 작은 차에 짐을 싣고 호텔방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거리로 내몰리는 저소득층의 현실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와 반복적으로 "가족실 방이 있나요?"라고 묻는 로지의 다급한 전화소리가 그들의 현실을 대신 설명한다. 하룻밤 묵을 방도 찾기 힘든 로지에겐 딸 3명과 아들 1명, 그리고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는 남편이 있다. 총 6명의 대가족에게 주어진 하루는 너무나 짧다. 더구나 그녀에겐 핸드폰만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다.
출처: 영화 <로지> 스틸컷
아이들은 길바닥에 내몰린 자신의 상황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큰딸 케일라는 모든 게 다 쪽팔리고, 아들 알피와 딸 밀리는 차 안에만 있는 게 너무나 지루하다. 매일 같이 보던 강아지(너깃)도 보고 싶고, 얼른 집에 다시 들어가 마음껏 뛰어놀고 싶다. 가장 어린 막내딸은 피치(토끼 인형)만 있음 괜찮지만, 매번 사라지는 피치를 챙기는 건 역시 부모의 몫이다.
결국, 오직 로지만이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카드는 호텔에겐 대부분 환영받지 못하고 하필 대가족인 관계로 큰 방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다. 어렵게 구한 호텔 방도 겨우 하룻밤만 보낼 수 있는데, 로지는 그마저도 편히 쉬지 못한다. 아마 집을 나온 후로 제대로 잠을 청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버린 아이들을 두고 마음 편히 자는 엄마는 이 세상에 드물 테니까.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며 잘자란 말을 해주는 건 더 이상 평범한 일이 아니다. 오늘을 힘겹게 버틴 그녀가 또다시 절망스러운 하루를 맞이하는 의식이니까. 로지는 부엌에서, 방에서, 화장실에서, 거실에서 바쁘게 움직였던 몸을 이젠 내일도 5인용 작은 차 안에 구겨 넣어야 한다.
로지의 충전식 핸드폰과 호텔의 번호가 적힌 장부는 평범함을 앗아간 비극의 출발선이다.
출처: 영화 <로지> 스틸컷
<로지>의 이야기는 단조롭다. 하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사회체제의 맹점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무엇이 진정 국민을 위한 일인지 알 수 없는 정부의 위급사항 대처능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다. 로지는 자신이 끊임없이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음을 정부에 확인시켜줘야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이 일을 하지 말라는 담당의사의 소견서를 품고서, 기초생활수급을 받기 위해 일자리용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처럼. 어처구니없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평범함을 담당하고 있었고, 여전히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 중이다. 남들과 똑같이 살기 위해 말이다. 그저 로지에게 더 가혹한 현실이 다가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평범함이 무엇인가?
<로지>에겐 쓸모없는 질문이다. 아마 로지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지금 그게 중요해? 빨리 여기 종이에 적힌 호텔 번호나 불러줘!"
<로지>가 관객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환상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니까.
출처: 영화 <로지> 스틸컷
로지의 마지막 자존심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다. 집은 그저 로지가 아이들을 위해 현실적으로 만든 건축물, 수단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녀는 차에 그들의 잠옷을 쑤셔 넣으면서 수십 번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그러나 로지의 현실엔 굳게 먹은 마음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산더미이다.
친구의 집에서 빨래를 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케어 하지만, 밀리는 학교에서 "쉰내 밀리"란 소리를 듣는다. 케일라는 더 이상 친구들 앞에서 지각한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이 없는 아이들은 어떡해서든 티가 났고, 케일라는 학교에서 사라져 버린다.
철옹성 같던 로지는 그제야 한 인간으로서 무너진다.
아는 모든 이에게 다음 주면 이사한다고 수백 번 거짓말하고, 동생 부부에게 강아지와 짐을 부탁한 대신 '노숙자'란 소리를 듣고, 아빠와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를 엄마에게 또다시 경멸스럽게 듣고도 두 발로 우뚝 서있던 그녀였다. 순식간에 터져버린 아이들의 문제는 로지의 핸드폰을 내려놓게 만들었고, 이는 곧 잘 곳을 구하지 못한 현실로 이어진다. 아마 로지에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시에서 제공하는 '노숙자 전담 번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였다. 무너지고 싶어도 주저 않을 수 없는 엄마. 그래서 그들은 주차장 한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밤을 지새운다.
출처: 영화 <로지> 스틸컷
아내와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차를 멀리서 홀로 비를 맞으며 지켜보는 남편의 뒷모습을 끝으로 <로지>는 끝난다. 그 씬이 <로지>의 명장면이다. 첫 씬과 시간대만 다를 뿐 모든 요소가 똑같지만. 낮에 내렸던 굵은 빗방울과 깊은 밤 남편이 홀로 맞고 있는 빗방울의 의미는 다르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지만, 어느새 서로를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 견고함이 강인한 로지를 만든 발판이겠지.
홀로 흐느껴 우는 로지보다도 케일라에게 "우린 다 괜찮을 거야."라 말하는 엄마가 기억에 남는다.
끝까지 희망을 얘기할 그들을 응원한다.
로지의 말처럼 그들은 다 괜찮아질 거니까.
-
- 어떤 하루의 총합
전쟁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굉음이 터지고 피가 터지고 시체가 터지고 마음이 터지는, 뭔가 많은 것들이 팡팡 터지는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반대쪽이다. <덩케르크>도 "이것은 전쟁 영화가 아니다"라는 카피가 아니었으면 보지 않았을 테고, <1917>도 그다지 볼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1917>을 보고 너무 좋았다고 할 땐 좀 놀랐다. 자꾸 같이 보러 가자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친구 얼굴 봐서 한 번 보러 갔다. 그리고... 같이 미쳤다. 용산 아이맥스에 출근 도장을 찍고 포토티켓을 뽑아대는 우리는 누가 봐도 과몰입 오타쿠였다. 아무리 정상인인 척 리뷰를 써보려고 해도 잘 안 된다. 그래서 또 <러브레터> 때처럼 과몰입 오타쿠답게 구구절절 써보려 한다. 스포일러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영화 전체를 서술하고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해 주시길.
영화 <1917>의 수식어는 항상 "원 컨티뉴어스 숏" 이야기다. 2시간짜리 원테이크처럼 보이게 촬영했다는, 물론 당연히 2시간을 원테이크로 찍은 건 아니고 그렇게 보이게끔 잘 연결한, 즉 "원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기법을 활용한 것이라는. 최신 기술을 집약한 영화라는.
어마어마하긴 하다. 그렇게 찍기 위해 모든 세트장을 직접 제작하고, 그 세트장 동선에 맞춰 대사 길이까지 세밀하게 조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6개월의 리허설 끝에 찍었다니 부분적으로 연극 같은 느낌마저 든다. 자본과 기술의 냄새가 물씬 나는 설명에 압도되어서인지, <1917> 이야기는 평론부터 리뷰까지 기술 이야기 일색이었다.
그러나 <1917>은 기술 이야기만 하고 떠나보내기엔 너무 아깝다. 과시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 영화가 아니라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다. 풀어가고 싶은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기법이라 그렇게 찍은 것뿐이다. 배우들의 세밀한 연기, 탁월한 연출, 감정 머리채를 잡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가진 장점 중 하나지 전부는 아니다. 이 모든 장점들을 모아 더없이 주제에 집중한 영화다.
영화는 노란 꽃과 흰 꽃이 섞여 산들거리는 들판에서 시작한다. 관 속의 시체 같은 자세로 누워있는 블레이크와, 나무에 적당히 기대 눈을 감은 스코필드. 블레이크를 부르며 누구 한 명 데려오라는 목소리를 듣고, 블레이크는 스코필드에게 손을 내민다.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 채.
두 사람은 참호로 들어가 장군에게서 임무를 받는다. 적진이 후퇴했으며, 데번셔 제2연대가 후퇴한 적군을 총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항공사진을 보면 적군은 작전상 한 발 물러난 것뿐이라, 위기에 빠진 건 오히려 데번셔 제2연대라는 것. 적군이 통신망을 끊고 갔기 때문에 인편으로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해야 한다는 것. 해당 연대의 1,600명 중에는 블레이크의 형도 있고, 블레이크는 지도를 잘 보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것. 그리고 얻어걸린 스코필드도 함께 간다는 것.
참호를 빠져나가 허허벌판을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스코필드는 경악한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다. 대량 살상 무기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말 타고 창 찌르고 칼 휘두르던 전쟁은 종말을 맞았고, 공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는 것이 당시 전쟁의 기본 포맷이 되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어깨와 등을 따라가면서 좁은 참호를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시작부터 보여주고, 짐짝처럼 참호에 몸을 기대어 죽음의 냄새를 맡는 병사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시체가 그대로 썩어 지저분해진 진흙, 시체를 파먹고 자란 큰 쥐들을 보면 적군의 공격 못지않게 비위생적인 환경 또한 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의 생존을 위협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그 참호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상상 못 할 일이었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블레이크에 비하면, 솜 전투에도 참전했다는 스코필드는 전쟁의 참상을 좀 더 겪어보고 그만큼 노련해진, 동시에 내상도 더 깊게 입은 병사로 보인다. "정말 적군이 후퇴했다면 보급품에 수류탄을 왜 줬겠냐"라고 꼼꼼히 따져보지만, 형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씩씩거리고 있는 블레이크를 막을 수는 없다. 결국 참호를 벗어나기 전 그는 "Age before beauty," 장유유서라고 억지로 웃어 보이며 블레이크보다 앞서 미지의 위험에 발을 딛는다.
스코필드도 높은 직급은 아니지만, 무자비한 살육 현장이었다던 '솜 전투'를 경험했고, 거기서 훈장도 받았다. 목숨이 오가는 장면을 많이 보았고 또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간순간 구체적인 두려움과 싸우고 있고, 말을 아낀다. 아직 순진한 블레이크에 비해 그가 좀 딱딱해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참 좋은 사람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다. 이 장면도 그랬다.
두 사람은 아군의 참호와 적군의 참호 사이 무인지대를 지나간다. 질척한 진흙에 썩어가는 시체들만이 가득한 곳. 나무와 철조망이 기이한 형태로 뒤틀려 있는 공간. 시체가 마치 지형지물처럼 늘어져 있는 이상한 광경이다. 총검을 세우고 엄폐물을 찾으며 그들은 적진의 참호로 천천히 다가간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말 시체를 한 번 더 뒤돌아보는 표정을 봐도, 철조망에 쉽게 걸리거나 미끄러운 진흙을 올라갈 때 손 잡아달라고 이름 부르는 걸 봐도 블레이크는 전쟁터에 있기엔 아직 너무 어린 소년이다.
스코필드는 그런 블레이크를 알게 모르게 잘 챙긴다. 철조망을 잡아주다 손을 찔려도, 그 손을 썩어가는 시체에 푹 담그게 되어도 블레이크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블레이크가 앞만 보고 가면 그 뒤에서 총으로 엄호하고 있다. 두 배우의 섬세하고 탁월한 연기가 돋보이는 대목들이다.
정말 비어 있는, 그러나 적군이 떠난 지 오래되지는 않은 적진의 참호는 반파되어 있다. 땅굴로 들어서니 곰팡이 냄새 날 것 같은 병사 숙소가 보인다. 누군가 미처 챙기지 못한 흑백 가족사진 앞에 잠시 멈춰서는 스코필드와 침대에 앉아 방방 스프링을 튕겨보는 블레이크. 두 사람은 부비트랩을 발견한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처음부터 거슬렸던 커다란 쥐 때문에 목숨의 위기를 맞는다.
사실 둘이 출발했으니 하나는 죽거나 다치겠구나 싶긴 했다. 두 사람이 이 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단순한 플롯이면 분명 중간중간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해결하고 그러면서 더듬더듬 나아가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러는 동안 두 사람 모두가 무사하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다. 영화니까. 그럼 여기서 죽나, 하는데 블레이크의 발 빠른 대처로 스코필드는 목숨을 구하고, 첫 위기는 다행히 벗어난다.
전쟁터의 긴장감은 사람을 순식간에 옥죄었다 풀었다 한다. 사지를 벗어나고 블레이크의 농담으로 풀어지는 것 같았던 공기는 하늘을 가르는 정찰기 소리로 단숨에 다시 굳어진다. 블레이크는 때마침 나타난, 다 뭉턱뭉턱 베어졌지만 아직 꽃이 하늘거리고 있는 체리나무로 다시 분위기를 풀어본다. 5월이면 형과 함께 어머니의 과수원에서 체리를 딴다는, 아마도 가족에게 다정하고 싹싹한 둘째 아들일 그는 전장에 비현실적으로 나부끼는 꽃잎 사이를 거닐며 몇 마디 대사만으로 자신의 전사를 풍성하게 풀어놓는다.
영화가 사용한 기법 상, 그리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로드무비 느낌을 전쟁에 버무려놓은 배경 상, 게임 스테이지를 하나씩 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참호의 위기를 체리 꽃잎으로 마무리하고 꼭 '2단계, 버려진 농가' 같은 느낌으로 눈앞에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젖소 한 마리와 우유 한 통이 있을 뿐 별스러울 건 없는 공간이었다.
퇴각하던 독일군은 협상국 군대의 식량 확보와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나무도 베고 젖소도 죽였는데, 한 마리가 비현실적으로 살아남아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한 연대가 이런 젖소를 발견했고, 암소를 연대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스코필드는 어쩐지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예감은 현실이 된다.
공중전에서 패한 적기가 추락하고, 몸에 불이 붙은 독일인 파일럿을 "편히 가게 해주"려던 스코필드와, 안 된다며 물을 가져오라고 하던 블레이크. 사제가 되는 걸 고민했던 만큼 자연스러운 반응일지 모르지만 전쟁은 나이브한 선의를 봐주지 않는다. 스코필드는 자신이 폭발에 쓰러졌을 때 블레이크가 그랬듯, 칼에 찔린 블레이크를 들어올려 보려 하나 이번에는 되지 않는다. 블레이크는 결국 눈을 감는다. 힘없이 떨군 그의 손 옆에 마지막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아무나 한 사람 골라잡은, 처음부터 이 작전에 반대할 수 있었다면 반대했을 이는 그렇게 유일한 전령이 된다. 동시에 군사적인 사명뿐 아니라 친구의 유언을 건네받은 개인적인 사명까지 그의 어깨에 얹힌다.
블레이크의 시체를 움직여보려 할 때 아군이 나타난다. 여태까지 두 명에 몰입해 따라가고 있다 보니 아군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이건 전쟁이고,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뿐 아니라 어딘가에서 모두가 다 각자의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적군이든, 시간이든, 죽음이든, 부상이든, 적막이든.
스코필드의 사정을 들은 스미스 대위는 가는 길이니 태워주겠다며 스코필드를 사병 트럭에 태운다.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 사병들과 어깨를 부딪혀 가며, 스코필드는 혼자서만 다른 곳을 멀거니 바라본다. 멀어져 가는 블레이크의 시체를,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를 생각하며 전해야 할 편지를 틴케이스 안에 소중히 집어넣는다.
트럭을 타고 가는 길도 쉽지만은 않다. 독일군이 길을 막도록 베어놓은 나무를 치우고, 진흙탕에 빠진 차를 밀어가며 스코필드는 시간과 싸워야 하는 간절함을 드러낸다. 그를 이상히 여기며 묻는 사병들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그들의 태도가 묘하게 바뀐다. 다들 말을 아끼지만,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은 작전과 무의미하게 터덜터덜 실려가는 그들의 현실은 곧 1차 세계대전 자체의 현실이다.
무너진 다리 때문에 다른 길로 에둘러갈 사병 트럭에서 내려, 스코필드는 조심스레 무너진 다리를 건넌다. 그 앞 버려진 저택에 있는 저격수와 맞붙게 되고, 명중 확인을 위해 들어간 곳에서 저격수와 대치하며 그도 죽음 코앞까지 다녀오게 된다. 영화가 잠시 암전되는데, 인도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도 여기서 인터미션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노골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끊어냈다. 다시 눈을 뜬 스코필드는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고 있고, 시계가 깨져 더 이상 시간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어느덧 세상은 어두워져 있다.
카메라는 죽은 저격수를 넘어 창문으로 쭉 내려가고, 음악은 서서히 고조되면서, 반쯤 무너진 마을로 스코필드가 천천히 들어가는 장면. 살아있는 적군을 찾아 끝까지 말살하려고 적기가 조명탄을 쏘며 날아다니고, 조명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 번씩 낮처럼 밝아지는 광경, 적기의 움직임에 따라 건물 그림자가 유유히 자라나듯 펼쳐지는 광경은 너무나도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보이는 것과 음악이 어우러져 가슴을 쥐어잡게 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평화로웠던 시절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만드는, 분수대와 커다란 교회가 있는 광장. (저 장면을 조명으로 만들었다니 놀랍다.) 역시 무사한 시절에 붙였을 서커스 공연 포스터. 그러나 구석에 피 묻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곳. 이 뒤틀리고 모순적인 공간에서, 그만큼이나 반대되는 상대들을 마주치게 된다. 얼굴도 나오지 않지만 금방이라도 닿을 듯 추격해 오던 독일군과, 그를 피해 들어가다가 만난 프랑스 여성과 아기.
이 영화에 나오는 단 두 명의 여성이자, 체리나무 장면 이후 처음으로 평온하게 숨 고르기를 하는 장면이다. 짤막한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 두 사람은 대화한다. 독일군이 아님을 설명하며 여성을 안심시키고, 여성은 스코필드의 뒤통수에서 피를 살짝 닦아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스코필드가 고개를 든 건 아기 울음소리가 났을 때였다.
그는 아기를 보고 가방에 있던 부식과, 이렇게 쓰일 줄 모르고 담아뒀던 우유까지 모두 꺼내준다. 조심스럽게 아기의 손을 어루만지고 시를 읊어주는 걸 보며, 아마도 그가 "집에 가는 게 더 괴롭다"라고 할 만큼 괴로워한 데에는 후방에 아이까지 두고 떠나온 이유가 있겠거니 느끼게 된다. 더불어 이 시는 무모해 보이지만 단단한 의지가 돋보이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같은 시이기도 하다.
They went to sea in a Sieve, they did,
In a Sieve they went to sea:
In spite of all their friends could say,
On a winter’s morn, on a stormy day,
In a Sieve they went to sea!
그들은 바다로 갔네 체를 타고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
모든 친구가 말려도
폭풍우 치는 한겨울 아침이었어도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
And when the Sieve turned round and round,
And every one cried, ‘You’ll all be drowned!’
They called aloud, ‘Our Sieve ain’t big,
But we don’t care a button! we don’t care a fig!
In a Sieve we’ll go to sea!’
체가 빙빙 돌고 돌아갈 때
모두가 "너희 다 익사할 거야!" 소리칠 때
그들은 외쳤네 "우리 체는 크지 않지만
신경 안 써! 하나도 신경 안 쓴다고!
체를 타고 우리는 바다로 갈 거야!"
Far and few, far and few,
Are the lands where the Jumblies live;
Their heads are green, and their hands are blue,
And they went to sea in a Sieve.
저 멀리 점점이
머리가 초록빛이고 손이 푸른빛인
점블리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영화에서는 1연의 처음 5행과 마지막 5행만 읽는다. 가운데 5행은 읽지 않는다.)
때마침 시계탑 종이 울리고, 시간을 가늠한 스코필드는 단꿈에서 서둘러 일어난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이름을 모르는 아기를 거둬 기르고 있을 만큼 인간애 있고 단단한 프랑스 여인은 스코필드를 걱정하지만 그는 고마운 마음을 유감으로 전하고 단호하게 일어선다. 그리고 독일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강에 뛰어든다.
힘이 빠진 나머지 본인이 읽(지 않)은 시 구절처럼 익사할 뻔했지만, 때마침 거짓말처럼 하얀 벚꽃 잎이 흩날리고 새 소리가 들린다.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의 큰 축인 블레이크를 떠올리며 그는 다시 한번 힘을 낸다. 아름다운 벚꽃잎과 퉁퉁 불어 터진 시체들까지 건너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미 사위는 밝아져 있다. 참아온 눈물을 터뜨리는 것도 잠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따라간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이승인 듯 저승인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장송곡을 듣는다.
그들이 데번셔 2연대 후발대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마지막 전력을 다해 뛴다. 몸을 웅크린 이들, 정신을 놓고 울음을 터뜨린 이, 동료를 붙드는 이들... 다양한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나치다가, 이렇게 가서는 시간 내 닿을 수 없음을 깨닫고 참호 위로 올라서 평야를 달린다. 포탄 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면서도, 부딪혀 넘어지면서도, 병사들과 종횡을 달리해 그는 뛰어간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가 내게로 뛰어온다. 전쟁의 내상과 외상을 모두 가진 이가, 전쟁을 막기 위해 달린다. 모두가 무의미하고 적막하게 괴로워하며 앉아있다가 우르르 뛰어가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때, 그 흐름을 끊고 달리는 사람이 된다.
영화 내내 궁금해하게 만들었던, 이전의 대사들을 통해 어쩌면 답 없는 전쟁광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인물 매켄지 또한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희망을 품었지만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며 머리를 쓸어내리고,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Last man standing.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스코필드는 고개를 든다.
자막에는 "마지막 단 한 사람까지 죽는 것"이라고 번역되었다. 매켄지의 캐릭터를 감안하면 맞는 번역이지만 사실은 중의적인 문장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전투를 끊어낸 이가 고개를 꼿꼿하게 들어 반듯하게 서는 순간.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몰살도 있지만, 이건 아니라고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인간 그 자체도 있다.
전투를 막았다고 그의 사명을 마친 것은 아니다. 그는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유품을 건넨다. 이제 다시는 두 형제가 함께 체리를 딸 수 없겠구나, 슬퍼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블레이크의 형은 인사를 나누며 스코필드의 이름을 묻는다. 윌리엄. Thank you, Will.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 건넨다. Will은 의지의 이름이었다. 시작부터 형에게 갈 거라고, 내가 할 거라고 단단하게 말하던 블레이크의 의지가 스코필드의 이름에도 들어있었다.
모든 사명을 마친 그는 더 이상 노란 꽃이 없는 들판에 혼자 앉는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마다 열어보던, 소중해진 것을 집어넣던 틴 케이스를 열어본다. Come back to us. 꼭 우리에게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담긴 가족의 사진. 일상은 비일상이 되고, 비현실은 현실이 되고 만 전장에서 그는 잠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는다.
이 영화는 샘 멘데스 감독의 할아버지 알프레드 멘데스를 비롯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일화에서 따와서 만들었다. 특정 실화를 모티프로 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실화의 가닥가닥을 엮어 만든 것이다. 참호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부식을 먹고 개를 쓰다듬고 서로의 상처를 싸매는 사람들의 시간,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거둬 기르고 낯선 군인의 상처에서 피를 닦아주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이들은 생각보다도 많고, 다양한 곳에 있다. 심지어 인도계와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곳곳에 보인다. 참호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 중엔 인도 남부 출신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었고, 스코필드가 노래를 들으며 나무에 몸을 기댈 때 그 자리에는 흑인도 있었으며, 사병 트럭에는 터번을 쓴 시크교도 병사가 등장한다. 가볍게 억양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딱히 희화화하는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에 비해 철저하게 유럽 중심이었던 1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영화 속 이들의 존재는 놀랍다.
(실제로 1917년은 인도 남부에 있는 하이데라바드 토후국에서 영국군에 전투기를 선물한 해다. 토후국의 왕 니잠은 엄청난 부와 탄탄한 사회를 이룬 군주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패권 다툼이라는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 싸움에 가담하여 자신도 당당히 패권국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 인도계나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참전했음을 고증하는 것임인 동시에 자본의 영향이라는 느낌도 받는다. 인도 최대 기업인 릴라이언스의 엔터테인먼트사가 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으므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서 찾아와 뜻밖의 만남을 가진 이들이 실은 각각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것. 각자 자기의 죽음과 싸우고 있다는 것. 그게 전쟁의 무의미한 본질이다. 그러나 전쟁은 보통 큼직한 것들로만 기억된다. 솜 전투, 인천 상륙 작전, 한산도 대첩 같은 웅장한 이름들로. 수많은 전쟁 영화도 그런 순간들을 많이 담곤 했다. 일반인들의 미시사는 전쟁의 본질이 아니라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전쟁이 깨뜨린 일상의 대조점으로 주로 담기곤 했다.
그러나 전쟁 자체를 이루는 것은 거대한 전투와 군함, 장군보다 그냥 수많은 보통 사람들임을 이 영화는 담는다. 스코필드는 그중 한 사람이다. 참호 속 혹은 트럭 속의 다른 병사들은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같은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시계가 깨져도 잔혹하게 흘러가던 스코필드의 하루는 그런 여상한 하루하루의 총합이 전쟁임을 알려준다. 그냥 보통 좋은 사람들의 얼굴로, 그들의 하루하루의 총합으로 전쟁은 이루어진다. 스코필드의 어떤 하루는 전쟁이라는 전체를 닮은 프랙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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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도 '젠틀'했던 '언젠틀 오퍼레이션'
들어가며
*스포일러 주의
*본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를 바탕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언젠틀 오퍼레이션>은 가이 리치 감독의 신작이다. <셜록홈즈>, <더 커버넌트>를 통해 블록버스터 영화(일명 팝콘 무비)의 흥행을 성공시킨 감독이다. 여기에 <맨 오브 스틸>로 유명한 '헨리 카빌'과 드라마 <삼체>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에이사 곤살레스', 압도적인 피지컬로 시원한 액션을 보여줄 '앨런 리치슨'까지 그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제2차 세계대전, 영국 정보부는 독일의 유보트(U-boat)를 무력화하기 위해 극비 작전을 개시한다. 윈스턴 처칠의 지휘 아래 창설된 영국 최초의 특수부대. '거스 마치필립스(헨리 카빌)'가 이끄는 작전팀은 저마다 개성 넘치는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독일군 점령지인 페르난도 포 섬에 잠입, 먼저 스파이로 섬에 정착해 있던 '마조리 스튜어트(아이사 곤잘레스)'와 '헤론(뱁스 올루산모쿤)'과 협력해 유보트를 폭파하여 무력화하는 미션을 수행한다. 하지만 전쟁이란 결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U보트의 설계가 강화되어 '폭파'로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지로 나치군을 무너뜨리고 임무를 완수해 나가는 실화 바탕의 이야기이다.
실화 바탕의 유쾌한 전쟁, 액션, 스파이 영화
가이 리치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특유의 '유쾌함'으로 극을 이끌어나간다. 이러한 '유쾌함'은 암울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함에도 빛나게 된다. 감독은 '나치를 한방에 처리하는' 액션의 유쾌함을 선보인다. 이 영화는 주인공, 혹은 주변 인물이 관객을 답답하게 하지 않는다. 적들을 '딸깍' 한 번에 쓸어버리는 통쾌함은 그 적들이 '나치군'이라는 점에 기인해 유쾌함을 선사한다. 감독이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함에도 유쾌함을 줄 수 있는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이러한 유머는 긴장감 있는 상황 속에서도 관객들이 그 텐션에 지치지 않게 윤활유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를 더 몰입하고 더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는 것이다.
액션, 전쟁, 스파이 영화 장르의 결합도 흥미로웠다. 물론 그 장르들의 결합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느낌을 준다기보다는 기존에 영화가 흥행했던 '고전적'인 방식에서의 결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의 결합으로 관객은 낯섦보다는 익숙함을, 그리고 그 익숙함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몰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각각의 장르가 훌륭하게 융합되었다기보다는 여러 장르의 혼합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각 장르의 특징을 희석시키게 되는 것은 있었다. 스파이 영화지만 기존 007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긴장감보다는 텐션이 약하고, 기존 전쟁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비장함과 처참함'도 찾기 힘들다. 액션의 경우도 아쉬운 것이 소위 '딸깍' 액션이라는, 다시 말해 주인공이 총만 잡으면 일격필살로 적을 무찌르는 것에 초반에는 신선했을지 몰라도 극의 후반부에서까지 이러한 동일한 액션의 반복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액션 씬이 지루해지는 것은 있다.
각양각색의 매력적인 캐릭터
<언젠틀 오퍼레이션>의 임무는 '팀미션'인 만큼 팀원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다. 마치 '어벤저스'가 그러하듯 각자가 지닌 특기(특수한 능력)가 있고 그 능력을 때에 맞게 잘 활용한다. 주인공 '거스 마치 필립스 (헨리 카빌)'는 팀원의 리더로서 뛰어난 사격 실력과 리더십을 보여준다. 작중의 시간대로 봤을 때 그의 첫 등장 장면은 수갑에 묶인 채 군 교도소에서 불려 나온 장면일 것이다. 대체 이 인물이 얼마나 '막 나갔길래' 2차 대전 도중 군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해가 가는데, 그는 상관의 명령보다 자신의 소신대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소위 말해 어느 정도 '똘끼'가 있는 인물이다. 마치 '내 편일 때 가장 든든한' 미친놈처럼 그는 나치들의 공격과 지략 속에서도 그의 '똘끼'로 위기를 시원하게 극복해 낸다. '앤더스 라센 (앨런 리치슨)'은 어떠한가, 작중 나치군을 정말 '썰어버리 듯' 살육하고 다니는 근육질의 '힘캐'이다. '도끼', '활', '총' 등등 그가 못 다루는 무기는 없으며 그 무기들로 정말 시원하게 적들을 처리하고 다닌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관객은 이러한 캐릭터에 쉽사리 감정이입하지 못할 것 같지만 적군이 '나치'임을, 나치군이 그에게 했던 끔찍한 짓들을 떠올리다 보면 금세 그를 응원하게 된다. 유일한 두뇌 캐릭터로서 전략을 주도하는 '제프리 애플야드 (알렉스 페티퍼)'와 폭파 전문가 '프레디 알바레즈(헨리 골딩)', '헨리 헤이즈(히어로 파인스 티핀)'도 등장한다.
나아가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마조리 스튜어트 (에이사 곤살레스)'는 전형적인 미인계형 스파이다. 적진의 한가운데 고위급 나치 장교의 최측근이 되어 폭파 임무 팀이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정보를 캐내고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임기응변 능력과 뛰어난 미모로 '하인리히 뤼르(틸 슈바이거)'를 꾀어내어 U보트에 관한 핵심 정보를 캐낸다. 그녀는 독일계 유대인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유일한 흑인 캐릭터인 '헤론(뱁스 올루산모쿤)'도 뛰어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주인공 일행들을 끝까지 돕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렇듯 이 영화에서는 실존 인물이지만 당시 시대상을 봤을 때 '묻혔을' 법한 인물들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관객들에게 이러한 인물도 전쟁 종식에 큰 기여를 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들이 다양하게 제 역할을 해내는 일종의 '하이스트 무비'로서의 특징도 갖고 있다. 다만,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구축했지만 정작 디테일한 부분에서의 설명은 많이 생략되어 인물이 갖고 있는 입체성을 무시한 채 너무 평면적으로 그려낸 점은 아쉽다. 극의 초반부 노년의 나치 해군은 망설임 없이 처리하면서 후반부 어린 나치 군인을 살게 보내준 '거스'의 모습은 크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또한 나치의 소굴에서 같은 흑인 인종이 고문받고 있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헤론'의 모습이나, 고전적인 미인계형 스파이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마조리'도 그렇다. '거스'의 팀원들도 나치 군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인물들로 그려지는데 영화의 유쾌함을 위해서인지 그들의 아픔은 그리 자세히 그려내지 않고 그저 적들을 처리하는 데 집중한다. 그것이 득이 된 경우도 있지만, 인물에 매력은 느끼나 그 인물을 '나와 같다'라고 느끼지 못하는 공감을 방해하는 요소로서 작용하게 된 경우도 있다. 인물 각각은 매력적이지만 그 인물에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언젠틀 오퍼레이션>은 관객들이 정말 편안하게 킬링타임 용으로 볼 수 있는 최고의 액션 영화라 할 수 있다. 인물의 매력도 뚜렷해 인물의 합을 보는 재미도 있고, 시원시원한 액션과, 스파이 장르 특유의 긴장감 또한 맛볼 수 있다. 다만, 너무 '친절'했다. 우리의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이 이 영화는 관객보다 앞서 '정답'을 제시한다. 분명 재미있게 영화관을 나오지만, 그 이상은 없는 느낌인 것이다. 친절한 설명과 알기 쉬운 플롯, 어디서 많이 본듯한 '클리셰'의 활용으로 익숙함은 있지만 '낯섦'은 없다. 비슷하게 2차 대전의 상황을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는 타이카 와이티티의 <조조래빗>의 유머는 유쾌해 보여도 사실은 깊다. '나치를 때려잡는 통쾌함'을 앞세운 나머지 고통받았던 피해자들에 대한 조명은 약하다. 그저 킬링타임 용으로 즐기기에는 생각보다 그 시대상은 어둡고 무겁다. 그것을 유쾌하게 그려내려면 적어도 <조조래빗> 만큼의 '영리함'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관객들에게 '재밌고 신나는' 경험을 선사했지만 가장 큰 단점은 단지 '재밌고 신나는 경험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아마 관객들을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영화는 '정말 재미있다'.
한줄평 : 너무나도 '젠틀'했던 '언젠틀 오퍼레이션'
영화 <언젠틀 오퍼레이션>은 3월 19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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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럽게 재밌고 끝나면 프레첼이 먹고 싶어지는 영화
이 영화는 젠더부터 시작해서 자본주의와 계급, 사상과 정치까지 3부로 나누어 다루고 있으며 147분 내내 블랙코미디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슬픔의 삼각형"의 뜻은 얼굴에서 미간과 콧대를 이은 역삼각형이라고 해요.
이 모양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뒤집어진 계급사회를 의미하는 것 같네요.
1부는 젠더 고정관념을, 2부는 각양각색 부자들의 위선과 자본주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3부는 계급도 뒤바뀌어 청소부가 캡틴이 되는 이야기로 상황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뒤바뀌고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전복되었을 때 이 영화의 재미는 배가 됩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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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밖으로 귀신의 정체를 발설하는 순간 사망하는 마을? - 랑종 감독의 최고 흥행작
'랑종' 개봉기념 감독전작리뷰 Part2
피막 (2013)
-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칼 하나로 생존에 성공한 전우들. 하지만 제대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전쟁터보다 더 무서운 마을. 진실을 말하면 죽게 되는 이 공포의 마을에서 살아남으려면 문 닫고 입 닫는 방법 뿐이다. 하지만 친구를 죽게 나둘 수 없다며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 '피 막'을 살리기 위해 친구들이 발 벗고 나서는데...태국 역대 박스 오피스 1위
태국 최초 천만관객을 돌파 시킨
영화 '랑종' 감독의 최고 흥행작 리뷰귀신보다 더 무서운 전우들의 마을 탈출기! 이 영화 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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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엔젤> 예고편
다들 미친 것 아닌가
자유로운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가고 싶은 데로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지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야
각자 운명대로 사는 거야
난 타고난 도둑이야
그래서 나한테는 내 것 네 것이 없어
그러니 끝까지 가야지
불법과 사기가 판을 치는 세상이야
끝까지 간다
나는 바로 ‘죽음의 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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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캔디맨> 메인 예고편
들어봤니? 미지의 존재 캔디맨
비주얼 아티스트 '안소니'는 새 작품 구상을 위해 어릴 적 살던 도시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오래 전부터 떠돈 괴담을 듣고 매혹되면서 '캔디맨'에 대한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되는데...
불러봤니? 죽음을 부르는 남자 캔디맨
세상을 뒤흔든 미지의 존재 캔디맨,캔디맨,캔디맨,캔디맨,,,
한 번만 더 부르면 그가 나타나게 되는데..
용기가 있다면 그의 이름을 불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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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크리처 2 | 의도가 느껴지려면 일단 맛있어야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에 몸을 던진 후 나진이 뇌에 파고들어 초인적인 괴력과 불사, 불로의 능력을 갖게 된 '윤채옥'(한소희).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타인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낸다. 대신 그녀는 능력을 살려 실종자를 찾아주는 뒷거래로 생계를 꾸린다. 어느 날, 의뢰를 받아 몰래 들어간 모텔 방에서 윤채옥은 놀라운 사람을 발견한다. 이미 죽었어야 하는 옛 연인 '장태상'을 똑 닮은 '장호재'(박서준)를 발견한 것.
절친한 형 '권용길'(허준석)과 함께 흥신소 일을 하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장호재. 밀린 월세에 의해 압박받던 그는 의뢰를 받아 향한 모텔 방에서 의뢰인 대신 사체와 윤채옥을 발견한다. 윤채옥이 곧바로 모습을 감춘 나머지 살인 혐의로 수사를 받던 호재는 윤채옥을 찾아 진상을 알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장호재와 윤채옥은 미처 몰랐던 진실과 그들을 노리는 과거의 적에게 한 걸음씩 다가선다.
맛을 빼먹은 의도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성황리에 끝났다. 시청자도 많았고, 수많은 밈을 만들어냈다. '의도가 느껴져야 한다'는 안성재 셰프의 일관된 심사평도 그중 하나다. 음식을 먹는 순간 셰프의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져야 활용된 기술이 유의미하다는 그의 미식 철학은 공감 혹은 의문을 자아내며 화제가 됐다. 그런데 안성재 셰프의 말에는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기본적으로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 2>는 안성재 셰프의 심사평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듯한 드라마다. 창작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전편이 일제의 만행을 장르적으로 풀어내려 했다면, 이번에는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는 현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다. 문제는 전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의도를 보여주는 데 지나치게 힘을 쏟은 나머지 밑바탕이어야 할 맛, 곧 드라마의 재미를 놓쳐 버렸다.
분명한 의도
<경성크리처 2>가 겨냥하는 대상은 확실하다. '토착왜구'다. 일제를 미화하거나 일본의 정치적, 역사적 입장을 옹호하는 한국인 혹은 그러한 현상을 비판하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에도 친일파가 급변하는 세태에 발맞춰 부와 권력을 유지했으며,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세간의 인식과 현실을 시나리오에 녹여냈다.
악역 캐릭터만 봐도 의도가 보인다. '마에다'(수현)와 옹성병원 위에 지어진 전승제약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일본군 장교와 일본인, 친일파의 후손이 협력해 과거의 연구를 이어가는 이 조직은 토착 왜구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들의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일제 패망 후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혼란했던 한반도. 마에다는 그 틈을 타서 장태상과 그의 동료들을 제거하고 재산과 영향력을 되찾았다.
이러한 전개는 한국전쟁을 지렛대 삼아 경제를 재건한 일본과 혼란을 틈타 과거를 씻어냈던 몇몇 친일파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정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권준택'(위하준)의 자손은 임대료 걱정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다는 모습도 현대사의 비극을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더 나아가 그들의 대사에는 친일파, 뉴라이트, 일본 우익의 사관을 반영되어 있다. 마에다는 양아들이자 시즌 1 막바지에 사망한 명자의 아들 '승조'(배현성)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또 장태상에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이제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속삭이기도 한다. 마치 식민지 근대화론을 필두로 한 일본 측 사관을 요약해 보여주는 듯하다.
의도만 남은 디시
에피소드 7개에 꽉꽉 눌러 담은 메시지는 사실 비판하기 어렵다. 피식민지국 국민 입장에서는 항상 관심을 갖고 염두에 둬야 할 이야기가 맞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에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시의적으로도 적절해 보인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공조 긴밀해지는 만큼 한국, 일본, 미국의 협력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경성크리처 2>가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두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논제를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메시지를 뻔하게 만드는 기제다. 기시감이 강한 클리셰의 반복은 의의가 중요한 의도마저도 거부감이 느껴지게 한다. 극 중 분량이 상당한 액션이 대표적이다. 나진을 맞은 이들의 초인적 괴력과 속도를 활용한 연출은 돋보이지만 구성은 식상하다. 한국 드라마 중에서는 <기생수>와 유사하고, MCU의 <시크릿 인베이젼>과도 흡사하다. 팔을 대신하는 촉수를 활용하는 식의 아이디어는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드라마의 정체성 문제와도 직결된다. '크리처물'을 표방하지만 전편의 세이싱 같은 괴물의 비중이 거의 없다. 크리처물에게 기대할 법한 시각적 쾌감이 사라지면서 차별점도 잃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퀄리티도 아쉽다. 어두운 복도, 공터, 폐공장에서 주로 액션이 펼쳐지다 보니 회차가 지날수록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인상이 짙다. 경성의 화려함과 옹성 병원의 스케일을 강조하며 눈을 즐겁게 한 지난 시즌과는 대조적이다.
그나마 멜로는 살았다
그래도 마지막 보루를 지켰다는 점은 위안이다.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세밀해진 덕분에 로맨스의 완성도가 높아졌기 때문. 사실 지난 시즌은 장태상과 윤채옥의 멜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첫눈에 빠진 운명적이 사랑이라는 클리셰를 답습했고, 둘이 사랑을 싹 틔우는 과정도 못 보여줬다. 로맨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옹성병원에 갇힌 채 각자 사투를 펼쳤으니까.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에 자연히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시즌 2는 두 주인공 간의 감정선을 영리하게 그려냈다. 10부작에서 7부작으로 분량을 줄이고, 각자의 서사를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시키면서 아련함을 극대화했다. 전반부는 윤채옥이 이끌어 나간다. 그녀는 어머니 세이싱으로부터 나진을 이식받아 불로 및 불사의 존재로 79년간 홀로 지냈다. 시즌 1에서의 첫 만남과 같은 구도로 이뤄지는 윤채옥과 장태상의 재회는 그녀의 그리움과 쓸쓸함을 극대화하고 뇌리에 각인시킨다.
중반부부터는 장태상이 극을 이끈다. 그는 마에다가 억지로 투여한 나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겨우 나진을 적출하고 기억을 잃은 채로 1년간 장호재로 살아왔다. 과거의 악연과 비극을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윤채옥과 재회한 후로 점차 기억을 되찾고 끝내 장태상으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전승제약이 잡아간 윤채옥을 구출하러 간다.
그 끝은 다크 초콜릿 같다. 윤채옥은 나진을 제거당하고 기억을 잃은 상태로 평범한 대학생활을 영위한다. 반면에 장태상은 장호재라는 이름으로 죽지 못하는 삶을 홀로 살아간다. 그들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순간, 서로 맞바꾼 삶의 궤적은 한눈에 들어온다. 해피엔딩 같지만 정반대의 상황을 마주한 쌉쌀한 멜로를 완성한다. 이러한 결말은 <경성크리처 2>가 최소한의 몫은 해냈다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이유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경성크리처 2>는 예술 작품의 본질을 간과한 여러 작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은 창작자가 미적 감각 속에 의도를 숨겨서 전달하고, 수용자는 미적인 즐거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의도를 발견 혹은 체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성크리처>는 창작자의 의도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미적 감각과 기술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나머지 역효과가 발생한 듯 보인다.
이는 쿠키 영상대로 시즌 3가 나오더라도 기대가 크지 않은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쿠키 영상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시즌 3은 나진이 세상에 퍼짐으로써 그 유산을 비로소 사람들이 직시하고 맞서는 전개를 보여줄 듯 싶다. 나진을 현재까지 남은 일제의 유산이나 저주로 이해한다면, 지난 두 시즌 동안 보여준 의도의 연장선상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시즌 3만큼은 철저히 장르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반일이라는 가치와 메시지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 달리 말해 두 주인공의 멜로와 액션, 그리고 크리처물의 정체성만 살아나도 작가의 의도가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
Poor 형편없음
반일이라는 의도를 감싸지 못한 액션과 크리처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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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무지 - 테렌스 맬릭
황무지 - 테렌스 맬릭
많은 영화 목록을 들여다보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영화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를 '클라이테리온'에서 배급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 단조롭고 물기 없이 메마른 화면의 나열, 미국중북부의 평범한 주, 사우스다코타의 가난한 동네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남한)보다 두 배나 넓은 면적의 땅에 인구는 70여 만 명에 불과한 곳으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지역이다.
이른 아침, 쓰레기 청소차가 골목을 지나가면서 두 사람이 집앞마다 쓰레기통을 들어 차에 옮긴다. 청년 키트(마틴 쉰)는 무심한 표정으로 쓰레기통을 옮기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홀리(씨씨 스페이식)의 나레이션으로 진행한다. 홀리는 고등학생이고, 여기 사우스다코다주로 오기 전에 텍사스주에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텍사스를 떠나 사우스다코타주로 이주하는데, 홀리의 아버지는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먹고 사는 문제에 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집도 비교적 깨끗하다.
홀리는 학교에 다니지만, 아직 친구도 없고, 혼자 집에서 곤봉 연습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홀리와 키트는 우연히 만나고, 두 사람은 홀리의 아버지를 피해 점점 깊은 관계를 갖는다.
지루하고 심심할 것만 같은 영화는 키트의 돌발적 행동으로 급변한다. 홀리의 아버지는 키트에게 경고하고, 두 사람이 만나지 말라고 말한다. 키트는 홀리의 집에 몰래 들어가 홀리의 가방을 싸고, 홀리의 아버지와 맞닥뜨리자 그를 살해한다. 첫번째 살해다.
놀라운 것은 홀리의 태도다. 자기 아버지가 키트에게 총맞아 죽었지만, 홀리는 놀라지도, 비통하게 울지도 않는다. 다만, 죽은 아버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걱정한다. 키트는 집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범행을 녹음한 싱글 LP판을 집앞에 놓고 홀리와 함께 도망한다.
영화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이 있었다. 1957년 미국 네브라스크주 링컨에서 연쇄살인을 하던 커플이 있었다. 찰스 스타크웨더와 카릴 앤 퍼게이트가 그들인데, 나이가 19살, 13살이었다. 이들은 약 10여 명의 사람을 살해했고, 1959년 찰스는 전기의자로 사형, 카릴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영화의 흐름도 실제 찰스의 범행과 매우 비슷하게 진행한다.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주인공의 태도가 비정상적으로 차분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을 죽이면서 감정의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지 못하는 싸이코패스이거나,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한 비정상적인 인물일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의 사랑을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행위가 비정상인 상황에서 두 사람이 갖는 감정 역시 '정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키트가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홀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닮았다.
감독 테렌스 맬릭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이후 테렌스 맬릭의 작품들을 보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마쳤으며, 서른 살이 되기 전에 MIT에서 철학과 조교수로 강의를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서른 살에 저예산으로 이 영화를 만들어 감독 데뷔를 하자, 헐리우드에서는 천재 감독이 나타났다는 반응이었다. 영화와 관련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놀라운 영화를 만들면서 등장한 것이다.
데뷔 작품부터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는 영상으로 철학을 드러내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은 뛰어난 영상 이미지와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적 의미를 모색하는 장치를 내재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극단적 무심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를 생각하면, 영화가 단순히 미장센으로서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적 상황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영화에서도 두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열정도, 의욕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좀비'같은 인물인 것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엄청나게 성장하고, 물질문명의 첨단을 달려왔지만, 70년대의 미국은 심각한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극심한 자본주의의 폐해에 저항하는 히피운동이 일어나고, 이때부터 미국에는 남미에서 들어오는 마약이 급증하면서 마약중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너는 왜 노력도 하지 않고 절망하며, 분노하는가'라고 충고하는 건 꼰대가 하는 말이거나, 자본의 비웃음일 뿐이다. 70년대 미국의 청년들 가운데 특히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평생 다른 주로 넘어가지 못한 채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의 '부'는 고르게 퍼지지 않았고, 일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커졌으며, 욕망의 대상은 주로 대도시에서 발생하고, 집중했다. 발버둥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갇힌 것같은 답답한 상태의 청년들 가운데 일부는 대도시로 떠나고, 일부는 체념하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극히 일부는 범죄자가 된다.
미국의 평범한 하층민은, 하루 노동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본다. 주급을 받으면 월세를 내고, 일주일치 식량을 구입하고, 다시 주중에는 노동을 하고, 주말에는 비 새는 지붕을 고친다.
평생 이렇게 살 것이 뻔하다는 걸 아는 청년들은, 이 삶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고향을 떠나야 한다. 그곳이 어디인지,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무조건 이 낡고 더러운 고향을 떠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
키트는 극단적 방법으로 고향을 떠난다. 그는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자기 부모를 먼저 살해하고 홀리의 집을 찾아온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홀리의 아버지를 아무렇지 않게 살해한 것이고, 계획적으로 홀리를 데리고 떠난 것이 아닐까.
이후, 그가 보여주는 행동은 일관성이 있다. 그를 추적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을 살해하고, 자기와 함께 쓰레기 청소부로 일하던 동료의 집을 찾아가 그를 죽이고, 그 동료를 찾아온 남녀를 지하실에 가두고 총을 쏜 다음 도망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살해한다.
하지만 키트가 죽이지 않은 두 사람이 있는데, 부잣집에 들어가 주인과 하녀를 감금하고 나올 때, 이 두 사람은 살려둔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 부자가 키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고, 신고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찰스와 홀리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오직 부자와 부자의 하녀만 살려두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키트가 살해하는 대상이 특정 계층이나 계급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즉 키트는 20대 청년이지만 대단히 어리석고 무지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냉혹한 싸이코패스가 아니라, 시골 구석에서 배우지 못하고, 사회적 윤리와 도덕에서 비껴 있는 소외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외'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키트는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것을 자각한다는 것은 사회와 자기의 위치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키트는 그럴만한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을 읽으면서 키득거리는 것을 보면, 그가 문맹은 아니라는 것이고, 어느 정도 학교 교육을 받았다는 걸 의미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거로 보긴 어렵다.
건조하고 냉담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테렌스 맬릭의 관점은 키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이입하지 않는 것, 그래서 오로지 인물의 행위만을 관찰하면서 인물과 상황을 객관화하고, 관객으로하여금 인물의 감정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한 장치는 이후 짐 자무시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과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철학적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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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괜찮아질 거야, 우린 <로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지 Rosie , 2018 제작
아일랜드 | 드라마 | 2019.05.16 개봉 | 12세이상관람가 | 86분
감독: 패디 브레스내치
다 괜찮아질 거야, 우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엄마는 오늘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이 가족은 하루아침에 집에서 쫓겨났다. 집주인이 그들의 집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던 이들은 작은 차에 짐을 싣고 호텔방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거리로 내몰리는 저소득층의 현실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와 반복적으로 "가족실 방이 있나요?"라고 묻는 로지의 다급한 전화소리가 그들의 현실을 대신 설명한다. 하룻밤 묵을 방도 찾기 힘든 로지에겐 딸 3명과 아들 1명, 그리고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는 남편이 있다. 총 6명의 대가족에게 주어진 하루는 너무나 짧다. 더구나 그녀에겐 핸드폰만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다.
출처: 영화 <로지> 스틸컷
아이들은 길바닥에 내몰린 자신의 상황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큰딸 케일라는 모든 게 다 쪽팔리고, 아들 알피와 딸 밀리는 차 안에만 있는 게 너무나 지루하다. 매일 같이 보던 강아지(너깃)도 보고 싶고, 얼른 집에 다시 들어가 마음껏 뛰어놀고 싶다. 가장 어린 막내딸은 피치(토끼 인형)만 있음 괜찮지만, 매번 사라지는 피치를 챙기는 건 역시 부모의 몫이다.
결국, 오직 로지만이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카드는 호텔에겐 대부분 환영받지 못하고 하필 대가족인 관계로 큰 방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다. 어렵게 구한 호텔 방도 겨우 하룻밤만 보낼 수 있는데, 로지는 그마저도 편히 쉬지 못한다. 아마 집을 나온 후로 제대로 잠을 청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버린 아이들을 두고 마음 편히 자는 엄마는 이 세상에 드물 테니까.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며 잘자란 말을 해주는 건 더 이상 평범한 일이 아니다. 오늘을 힘겹게 버틴 그녀가 또다시 절망스러운 하루를 맞이하는 의식이니까. 로지는 부엌에서, 방에서, 화장실에서, 거실에서 바쁘게 움직였던 몸을 이젠 내일도 5인용 작은 차 안에 구겨 넣어야 한다.
로지의 충전식 핸드폰과 호텔의 번호가 적힌 장부는 평범함을 앗아간 비극의 출발선이다.
출처: 영화 <로지> 스틸컷
<로지>의 이야기는 단조롭다. 하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사회체제의 맹점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무엇이 진정 국민을 위한 일인지 알 수 없는 정부의 위급사항 대처능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다. 로지는 자신이 끊임없이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음을 정부에 확인시켜줘야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이 일을 하지 말라는 담당의사의 소견서를 품고서, 기초생활수급을 받기 위해 일자리용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처럼. 어처구니없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평범함을 담당하고 있었고, 여전히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 중이다. 남들과 똑같이 살기 위해 말이다. 그저 로지에게 더 가혹한 현실이 다가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평범함이 무엇인가?
<로지>에겐 쓸모없는 질문이다. 아마 로지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지금 그게 중요해? 빨리 여기 종이에 적힌 호텔 번호나 불러줘!"
<로지>가 관객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환상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니까.
출처: 영화 <로지> 스틸컷
로지의 마지막 자존심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다. 집은 그저 로지가 아이들을 위해 현실적으로 만든 건축물, 수단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녀는 차에 그들의 잠옷을 쑤셔 넣으면서 수십 번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그러나 로지의 현실엔 굳게 먹은 마음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산더미이다.
친구의 집에서 빨래를 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케어 하지만, 밀리는 학교에서 "쉰내 밀리"란 소리를 듣는다. 케일라는 더 이상 친구들 앞에서 지각한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이 없는 아이들은 어떡해서든 티가 났고, 케일라는 학교에서 사라져 버린다.
철옹성 같던 로지는 그제야 한 인간으로서 무너진다.
아는 모든 이에게 다음 주면 이사한다고 수백 번 거짓말하고, 동생 부부에게 강아지와 짐을 부탁한 대신 '노숙자'란 소리를 듣고, 아빠와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를 엄마에게 또다시 경멸스럽게 듣고도 두 발로 우뚝 서있던 그녀였다. 순식간에 터져버린 아이들의 문제는 로지의 핸드폰을 내려놓게 만들었고, 이는 곧 잘 곳을 구하지 못한 현실로 이어진다. 아마 로지에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시에서 제공하는 '노숙자 전담 번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였다. 무너지고 싶어도 주저 않을 수 없는 엄마. 그래서 그들은 주차장 한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밤을 지새운다.
출처: 영화 <로지> 스틸컷
아내와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차를 멀리서 홀로 비를 맞으며 지켜보는 남편의 뒷모습을 끝으로 <로지>는 끝난다. 그 씬이 <로지>의 명장면이다. 첫 씬과 시간대만 다를 뿐 모든 요소가 똑같지만. 낮에 내렸던 굵은 빗방울과 깊은 밤 남편이 홀로 맞고 있는 빗방울의 의미는 다르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지만, 어느새 서로를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 견고함이 강인한 로지를 만든 발판이겠지.
홀로 흐느껴 우는 로지보다도 케일라에게 "우린 다 괜찮을 거야."라 말하는 엄마가 기억에 남는다.
끝까지 희망을 얘기할 그들을 응원한다.
로지의 말처럼 그들은 다 괜찮아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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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하루의 총합
전쟁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굉음이 터지고 피가 터지고 시체가 터지고 마음이 터지는, 뭔가 많은 것들이 팡팡 터지는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반대쪽이다. <덩케르크>도 "이것은 전쟁 영화가 아니다"라는 카피가 아니었으면 보지 않았을 테고, <1917>도 그다지 볼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1917>을 보고 너무 좋았다고 할 땐 좀 놀랐다. 자꾸 같이 보러 가자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친구 얼굴 봐서 한 번 보러 갔다. 그리고... 같이 미쳤다. 용산 아이맥스에 출근 도장을 찍고 포토티켓을 뽑아대는 우리는 누가 봐도 과몰입 오타쿠였다. 아무리 정상인인 척 리뷰를 써보려고 해도 잘 안 된다. 그래서 또 <러브레터> 때처럼 과몰입 오타쿠답게 구구절절 써보려 한다. 스포일러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영화 전체를 서술하고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해 주시길.
영화 <1917>의 수식어는 항상 "원 컨티뉴어스 숏" 이야기다. 2시간짜리 원테이크처럼 보이게 촬영했다는, 물론 당연히 2시간을 원테이크로 찍은 건 아니고 그렇게 보이게끔 잘 연결한, 즉 "원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기법을 활용한 것이라는. 최신 기술을 집약한 영화라는.
어마어마하긴 하다. 그렇게 찍기 위해 모든 세트장을 직접 제작하고, 그 세트장 동선에 맞춰 대사 길이까지 세밀하게 조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6개월의 리허설 끝에 찍었다니 부분적으로 연극 같은 느낌마저 든다. 자본과 기술의 냄새가 물씬 나는 설명에 압도되어서인지, <1917> 이야기는 평론부터 리뷰까지 기술 이야기 일색이었다.
그러나 <1917>은 기술 이야기만 하고 떠나보내기엔 너무 아깝다. 과시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 영화가 아니라 시나리오가 탄탄한 영화다. 풀어가고 싶은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기법이라 그렇게 찍은 것뿐이다. 배우들의 세밀한 연기, 탁월한 연출, 감정 머리채를 잡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가진 장점 중 하나지 전부는 아니다. 이 모든 장점들을 모아 더없이 주제에 집중한 영화다.
영화는 노란 꽃과 흰 꽃이 섞여 산들거리는 들판에서 시작한다. 관 속의 시체 같은 자세로 누워있는 블레이크와, 나무에 적당히 기대 눈을 감은 스코필드. 블레이크를 부르며 누구 한 명 데려오라는 목소리를 듣고, 블레이크는 스코필드에게 손을 내민다.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 채.
두 사람은 참호로 들어가 장군에게서 임무를 받는다. 적진이 후퇴했으며, 데번셔 제2연대가 후퇴한 적군을 총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항공사진을 보면 적군은 작전상 한 발 물러난 것뿐이라, 위기에 빠진 건 오히려 데번셔 제2연대라는 것. 적군이 통신망을 끊고 갔기 때문에 인편으로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해야 한다는 것. 해당 연대의 1,600명 중에는 블레이크의 형도 있고, 블레이크는 지도를 잘 보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것. 그리고 얻어걸린 스코필드도 함께 간다는 것.
참호를 빠져나가 허허벌판을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스코필드는 경악한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다. 대량 살상 무기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말 타고 창 찌르고 칼 휘두르던 전쟁은 종말을 맞았고, 공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는 것이 당시 전쟁의 기본 포맷이 되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어깨와 등을 따라가면서 좁은 참호를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시작부터 보여주고, 짐짝처럼 참호에 몸을 기대어 죽음의 냄새를 맡는 병사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시체가 그대로 썩어 지저분해진 진흙, 시체를 파먹고 자란 큰 쥐들을 보면 적군의 공격 못지않게 비위생적인 환경 또한 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의 생존을 위협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그 참호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상상 못 할 일이었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블레이크에 비하면, 솜 전투에도 참전했다는 스코필드는 전쟁의 참상을 좀 더 겪어보고 그만큼 노련해진, 동시에 내상도 더 깊게 입은 병사로 보인다. "정말 적군이 후퇴했다면 보급품에 수류탄을 왜 줬겠냐"라고 꼼꼼히 따져보지만, 형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씩씩거리고 있는 블레이크를 막을 수는 없다. 결국 참호를 벗어나기 전 그는 "Age before beauty," 장유유서라고 억지로 웃어 보이며 블레이크보다 앞서 미지의 위험에 발을 딛는다.
스코필드도 높은 직급은 아니지만, 무자비한 살육 현장이었다던 '솜 전투'를 경험했고, 거기서 훈장도 받았다. 목숨이 오가는 장면을 많이 보았고 또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간순간 구체적인 두려움과 싸우고 있고, 말을 아낀다. 아직 순진한 블레이크에 비해 그가 좀 딱딱해 보일 수 있지만, 그가 참 좋은 사람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다. 이 장면도 그랬다.
두 사람은 아군의 참호와 적군의 참호 사이 무인지대를 지나간다. 질척한 진흙에 썩어가는 시체들만이 가득한 곳. 나무와 철조망이 기이한 형태로 뒤틀려 있는 공간. 시체가 마치 지형지물처럼 늘어져 있는 이상한 광경이다. 총검을 세우고 엄폐물을 찾으며 그들은 적진의 참호로 천천히 다가간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말 시체를 한 번 더 뒤돌아보는 표정을 봐도, 철조망에 쉽게 걸리거나 미끄러운 진흙을 올라갈 때 손 잡아달라고 이름 부르는 걸 봐도 블레이크는 전쟁터에 있기엔 아직 너무 어린 소년이다.
스코필드는 그런 블레이크를 알게 모르게 잘 챙긴다. 철조망을 잡아주다 손을 찔려도, 그 손을 썩어가는 시체에 푹 담그게 되어도 블레이크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블레이크가 앞만 보고 가면 그 뒤에서 총으로 엄호하고 있다. 두 배우의 섬세하고 탁월한 연기가 돋보이는 대목들이다.
정말 비어 있는, 그러나 적군이 떠난 지 오래되지는 않은 적진의 참호는 반파되어 있다. 땅굴로 들어서니 곰팡이 냄새 날 것 같은 병사 숙소가 보인다. 누군가 미처 챙기지 못한 흑백 가족사진 앞에 잠시 멈춰서는 스코필드와 침대에 앉아 방방 스프링을 튕겨보는 블레이크. 두 사람은 부비트랩을 발견한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처음부터 거슬렸던 커다란 쥐 때문에 목숨의 위기를 맞는다.
사실 둘이 출발했으니 하나는 죽거나 다치겠구나 싶긴 했다. 두 사람이 이 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단순한 플롯이면 분명 중간중간 위기를 맞고 그 위기를 해결하고 그러면서 더듬더듬 나아가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러는 동안 두 사람 모두가 무사하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다. 영화니까. 그럼 여기서 죽나, 하는데 블레이크의 발 빠른 대처로 스코필드는 목숨을 구하고, 첫 위기는 다행히 벗어난다.
전쟁터의 긴장감은 사람을 순식간에 옥죄었다 풀었다 한다. 사지를 벗어나고 블레이크의 농담으로 풀어지는 것 같았던 공기는 하늘을 가르는 정찰기 소리로 단숨에 다시 굳어진다. 블레이크는 때마침 나타난, 다 뭉턱뭉턱 베어졌지만 아직 꽃이 하늘거리고 있는 체리나무로 다시 분위기를 풀어본다. 5월이면 형과 함께 어머니의 과수원에서 체리를 딴다는, 아마도 가족에게 다정하고 싹싹한 둘째 아들일 그는 전장에 비현실적으로 나부끼는 꽃잎 사이를 거닐며 몇 마디 대사만으로 자신의 전사를 풍성하게 풀어놓는다.
영화가 사용한 기법 상, 그리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로드무비 느낌을 전쟁에 버무려놓은 배경 상, 게임 스테이지를 하나씩 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참호의 위기를 체리 꽃잎으로 마무리하고 꼭 '2단계, 버려진 농가' 같은 느낌으로 눈앞에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젖소 한 마리와 우유 한 통이 있을 뿐 별스러울 건 없는 공간이었다.
퇴각하던 독일군은 협상국 군대의 식량 확보와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나무도 베고 젖소도 죽였는데, 한 마리가 비현실적으로 살아남아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한 연대가 이런 젖소를 발견했고, 암소를 연대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스코필드는 어쩐지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예감은 현실이 된다.
공중전에서 패한 적기가 추락하고, 몸에 불이 붙은 독일인 파일럿을 "편히 가게 해주"려던 스코필드와, 안 된다며 물을 가져오라고 하던 블레이크. 사제가 되는 걸 고민했던 만큼 자연스러운 반응일지 모르지만 전쟁은 나이브한 선의를 봐주지 않는다. 스코필드는 자신이 폭발에 쓰러졌을 때 블레이크가 그랬듯, 칼에 찔린 블레이크를 들어올려 보려 하나 이번에는 되지 않는다. 블레이크는 결국 눈을 감는다. 힘없이 떨군 그의 손 옆에 마지막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아무나 한 사람 골라잡은, 처음부터 이 작전에 반대할 수 있었다면 반대했을 이는 그렇게 유일한 전령이 된다. 동시에 군사적인 사명뿐 아니라 친구의 유언을 건네받은 개인적인 사명까지 그의 어깨에 얹힌다.
블레이크의 시체를 움직여보려 할 때 아군이 나타난다. 여태까지 두 명에 몰입해 따라가고 있다 보니 아군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이건 전쟁이고,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뿐 아니라 어딘가에서 모두가 다 각자의 전투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 상대가 적군이든, 시간이든, 죽음이든, 부상이든, 적막이든.
스코필드의 사정을 들은 스미스 대위는 가는 길이니 태워주겠다며 스코필드를 사병 트럭에 태운다.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 사병들과 어깨를 부딪혀 가며, 스코필드는 혼자서만 다른 곳을 멀거니 바라본다. 멀어져 가는 블레이크의 시체를,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를 생각하며 전해야 할 편지를 틴케이스 안에 소중히 집어넣는다.
트럭을 타고 가는 길도 쉽지만은 않다. 독일군이 길을 막도록 베어놓은 나무를 치우고, 진흙탕에 빠진 차를 밀어가며 스코필드는 시간과 싸워야 하는 간절함을 드러낸다. 그를 이상히 여기며 묻는 사병들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그들의 태도가 묘하게 바뀐다. 다들 말을 아끼지만,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은 작전과 무의미하게 터덜터덜 실려가는 그들의 현실은 곧 1차 세계대전 자체의 현실이다.
무너진 다리 때문에 다른 길로 에둘러갈 사병 트럭에서 내려, 스코필드는 조심스레 무너진 다리를 건넌다. 그 앞 버려진 저택에 있는 저격수와 맞붙게 되고, 명중 확인을 위해 들어간 곳에서 저격수와 대치하며 그도 죽음 코앞까지 다녀오게 된다. 영화가 잠시 암전되는데, 인도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도 여기서 인터미션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노골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끊어냈다. 다시 눈을 뜬 스코필드는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고 있고, 시계가 깨져 더 이상 시간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어느덧 세상은 어두워져 있다.
카메라는 죽은 저격수를 넘어 창문으로 쭉 내려가고, 음악은 서서히 고조되면서, 반쯤 무너진 마을로 스코필드가 천천히 들어가는 장면. 살아있는 적군을 찾아 끝까지 말살하려고 적기가 조명탄을 쏘며 날아다니고, 조명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 번씩 낮처럼 밝아지는 광경, 적기의 움직임에 따라 건물 그림자가 유유히 자라나듯 펼쳐지는 광경은 너무나도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보이는 것과 음악이 어우러져 가슴을 쥐어잡게 하는, 놀라운 장면이다.
평화로웠던 시절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게 만드는, 분수대와 커다란 교회가 있는 광장. (저 장면을 조명으로 만들었다니 놀랍다.) 역시 무사한 시절에 붙였을 서커스 공연 포스터. 그러나 구석에 피 묻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곳. 이 뒤틀리고 모순적인 공간에서, 그만큼이나 반대되는 상대들을 마주치게 된다. 얼굴도 나오지 않지만 금방이라도 닿을 듯 추격해 오던 독일군과, 그를 피해 들어가다가 만난 프랑스 여성과 아기.
이 영화에 나오는 단 두 명의 여성이자, 체리나무 장면 이후 처음으로 평온하게 숨 고르기를 하는 장면이다. 짤막한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 두 사람은 대화한다. 독일군이 아님을 설명하며 여성을 안심시키고, 여성은 스코필드의 뒤통수에서 피를 살짝 닦아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던 스코필드가 고개를 든 건 아기 울음소리가 났을 때였다.
그는 아기를 보고 가방에 있던 부식과, 이렇게 쓰일 줄 모르고 담아뒀던 우유까지 모두 꺼내준다. 조심스럽게 아기의 손을 어루만지고 시를 읊어주는 걸 보며, 아마도 그가 "집에 가는 게 더 괴롭다"라고 할 만큼 괴로워한 데에는 후방에 아이까지 두고 떠나온 이유가 있겠거니 느끼게 된다. 더불어 이 시는 무모해 보이지만 단단한 의지가 돋보이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같은 시이기도 하다.
They went to sea in a Sieve, they did,
In a Sieve they went to sea:
In spite of all their friends could say,
On a winter’s morn, on a stormy day,
In a Sieve they went to sea!
그들은 바다로 갔네 체를 타고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
모든 친구가 말려도
폭풍우 치는 한겨울 아침이었어도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
And when the Sieve turned round and round,
And every one cried, ‘You’ll all be drowned!’
They called aloud, ‘Our Sieve ain’t big,
But we don’t care a button! we don’t care a fig!
In a Sieve we’ll go to sea!’
체가 빙빙 돌고 돌아갈 때
모두가 "너희 다 익사할 거야!" 소리칠 때
그들은 외쳤네 "우리 체는 크지 않지만
신경 안 써! 하나도 신경 안 쓴다고!
체를 타고 우리는 바다로 갈 거야!"
Far and few, far and few,
Are the lands where the Jumblies live;
Their heads are green, and their hands are blue,
And they went to sea in a Sieve.
저 멀리 점점이
머리가 초록빛이고 손이 푸른빛인
점블리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체를 타고 그들은 바다로 갔네(영화에서는 1연의 처음 5행과 마지막 5행만 읽는다. 가운데 5행은 읽지 않는다.)
때마침 시계탑 종이 울리고, 시간을 가늠한 스코필드는 단꿈에서 서둘러 일어난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이름을 모르는 아기를 거둬 기르고 있을 만큼 인간애 있고 단단한 프랑스 여인은 스코필드를 걱정하지만 그는 고마운 마음을 유감으로 전하고 단호하게 일어선다. 그리고 독일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강에 뛰어든다.
힘이 빠진 나머지 본인이 읽(지 않)은 시 구절처럼 익사할 뻔했지만, 때마침 거짓말처럼 하얀 벚꽃 잎이 흩날리고 새 소리가 들린다. 그를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의 큰 축인 블레이크를 떠올리며 그는 다시 한번 힘을 낸다. 아름다운 벚꽃잎과 퉁퉁 불어 터진 시체들까지 건너 그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미 사위는 밝아져 있다. 참아온 눈물을 터뜨리는 것도 잠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따라간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이승인 듯 저승인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장송곡을 듣는다.
그들이 데번셔 2연대 후발대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마지막 전력을 다해 뛴다. 몸을 웅크린 이들, 정신을 놓고 울음을 터뜨린 이, 동료를 붙드는 이들... 다양한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나치다가, 이렇게 가서는 시간 내 닿을 수 없음을 깨닫고 참호 위로 올라서 평야를 달린다. 포탄 소리에 어깨를 움찔거리면서도, 부딪혀 넘어지면서도, 병사들과 종횡을 달리해 그는 뛰어간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가 내게로 뛰어온다. 전쟁의 내상과 외상을 모두 가진 이가, 전쟁을 막기 위해 달린다. 모두가 무의미하고 적막하게 괴로워하며 앉아있다가 우르르 뛰어가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때, 그 흐름을 끊고 달리는 사람이 된다.
영화 내내 궁금해하게 만들었던, 이전의 대사들을 통해 어쩌면 답 없는 전쟁광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인물 매켄지 또한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희망을 품었지만 희망은 위험한 것이라며 머리를 쓸어내리고,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Last man standing.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스코필드는 고개를 든다.
자막에는 "마지막 단 한 사람까지 죽는 것"이라고 번역되었다. 매켄지의 캐릭터를 감안하면 맞는 번역이지만 사실은 중의적인 문장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전투를 끊어낸 이가 고개를 꼿꼿하게 들어 반듯하게 서는 순간.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몰살도 있지만, 이건 아니라고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인간 그 자체도 있다.
전투를 막았다고 그의 사명을 마친 것은 아니다. 그는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유품을 건넨다. 이제 다시는 두 형제가 함께 체리를 딸 수 없겠구나, 슬퍼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블레이크의 형은 인사를 나누며 스코필드의 이름을 묻는다. 윌리엄. Thank you, Will.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 건넨다. Will은 의지의 이름이었다. 시작부터 형에게 갈 거라고, 내가 할 거라고 단단하게 말하던 블레이크의 의지가 스코필드의 이름에도 들어있었다.
모든 사명을 마친 그는 더 이상 노란 꽃이 없는 들판에 혼자 앉는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마다 열어보던, 소중해진 것을 집어넣던 틴 케이스를 열어본다. Come back to us. 꼭 우리에게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담긴 가족의 사진. 일상은 비일상이 되고, 비현실은 현실이 되고 만 전장에서 그는 잠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는다.
이 영화는 샘 멘데스 감독의 할아버지 알프레드 멘데스를 비롯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일화에서 따와서 만들었다. 특정 실화를 모티프로 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실화의 가닥가닥을 엮어 만든 것이다. 참호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부식을 먹고 개를 쓰다듬고 서로의 상처를 싸매는 사람들의 시간,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거둬 기르고 낯선 군인의 상처에서 피를 닦아주는 사람들의 시간으로.
이들은 생각보다도 많고, 다양한 곳에 있다. 심지어 인도계와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곳곳에 보인다. 참호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 중엔 인도 남부 출신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었고, 스코필드가 노래를 들으며 나무에 몸을 기댈 때 그 자리에는 흑인도 있었으며, 사병 트럭에는 터번을 쓴 시크교도 병사가 등장한다. 가볍게 억양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딱히 희화화하는 경향이 보이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에 비해 철저하게 유럽 중심이었던 1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영화 속 이들의 존재는 놀랍다.
(실제로 1917년은 인도 남부에 있는 하이데라바드 토후국에서 영국군에 전투기를 선물한 해다. 토후국의 왕 니잠은 엄청난 부와 탄탄한 사회를 이룬 군주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패권 다툼이라는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 싸움에 가담하여 자신도 당당히 패권국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 인도계나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참전했음을 고증하는 것임인 동시에 자본의 영향이라는 느낌도 받는다. 인도 최대 기업인 릴라이언스의 엔터테인먼트사가 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으므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서 찾아와 뜻밖의 만남을 가진 이들이 실은 각각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것. 각자 자기의 죽음과 싸우고 있다는 것. 그게 전쟁의 무의미한 본질이다. 그러나 전쟁은 보통 큼직한 것들로만 기억된다. 솜 전투, 인천 상륙 작전, 한산도 대첩 같은 웅장한 이름들로. 수많은 전쟁 영화도 그런 순간들을 많이 담곤 했다. 일반인들의 미시사는 전쟁의 본질이 아니라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전쟁이 깨뜨린 일상의 대조점으로 주로 담기곤 했다.
그러나 전쟁 자체를 이루는 것은 거대한 전투와 군함, 장군보다 그냥 수많은 보통 사람들임을 이 영화는 담는다. 스코필드는 그중 한 사람이다. 참호 속 혹은 트럭 속의 다른 병사들은 블레이크와 스코필드 같은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시계가 깨져도 잔혹하게 흘러가던 스코필드의 하루는 그런 여상한 하루하루의 총합이 전쟁임을 알려준다. 그냥 보통 좋은 사람들의 얼굴로, 그들의 하루하루의 총합으로 전쟁은 이루어진다. 스코필드의 어떤 하루는 전쟁이라는 전체를 닮은 프랙탈이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선이정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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