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7-08 11:46:48
7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탈주> 개봉 주 누적관객수 70만 돌파!
" 살아도 내가 살고 죽어도 내가 죽는다 "
<탈주> 명대사
<탈주>가 개봉 첫 주 누적관객 수 7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하지만 개봉 첫 주 1위에 오른 <탈주>는 개봉 2일차에 <인사이드 아웃 2>에 밀려 2위로 하락했으며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는 <핸섬 가이즈>가 전주와 동일하게 3위에 머물렀습니다.
<핸섬 가이즈>의 손익분기점은 100만 명이며 현재 96만 명을 넘기며 손익분기점은 가뿐히 넘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편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는 <미니언즈 4>가 개봉하면서 <인사이드 아웃 2>를 밀어내며 1위로 올랐으며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은 3위로 밀려나며 큰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탈주 줄거리
“내 앞 길 내가 정했습니다”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군부대.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 ‘규남’은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북을 벗어나 원하는 것을 해 볼 수 있는 철책 너머로의 탈주를 준비한다.
그러나, ‘규남’의 계획을 알아챈 하급 병사 ‘동혁’(홍사빈)이 먼저 탈주를 시도하고, 말리려던 ‘규남’까지 졸지에 탈주병으로 체포된다. “허튼 생각 말고 받아들여. 이것이 니 운명이야” 탈주병 조사를 위해 부대로 온 보위부 소좌 ‘현상’은 어린 시절 알고 지내던 ‘규남’을 탈주병을 체포한 노력 영웅으로 둔갑시키고 사단장 직속보좌 자리까지 마련해주며 실적을 올리려 한다.
하지만 ‘규남’이 본격적인 탈출을 감행하자 ‘현상’은 물러설 길 없는 추격을 시작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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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주변을 잊지 않는 따뜻함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이 개인의 과거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일 수도 있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과업이나 책임감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 다른 이들은 그저 자신을 위한 성취감을 위해 목표를 세우고 그 길을 걸어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구원과 회복을 찾으며, 때로는 나 자신을 위해, 때로는 더 큰 목적을 위해 나아간다. 목표가 모든 사람을 구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표가 더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예를 들어 환경이나 자연재해를 연구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을 넘어 더 큰 대의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단지 개인의 성공이나 성취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삶을 구하는 일이다. 때로는 돈이 되지 않는, 보상받지 못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집중하는 목표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귀하다.
영화 <트위스터스>는 이런 목표를 가진 주인공 케이트(데이지 에드가 존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케이트는 토네이도를 연구하며 그것을 없애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녀는 외모적으로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에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토네이도가 언제 발생하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하는 직감이다. 영화는 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그녀가 토네이도를 연구하며 그 피해를 줄이려는 과정을 따라간다. 케이트의 목표는 단순한 연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토네이도에 대한 그녀의 집념이 재난의 극복이라는 희망이라는 의미가 더해진다.
[첫 번째 감정] 케이트의 상실감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케이트가 목표에 집착하는 건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는 과거에 토네이도 연구를 함께하던 세 명의 친구를 잃었다. 그들은 토네이도에 맞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 힘을 억제하려고 화합물질을 투입하면서 실험적인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이 사건은 케이트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고, 그녀는 더 이상 현장에 나서지 않고 기상청 사무실에서 날씨만을 바라보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의 목표는 단지 이론적인 성과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상실감은 너무나 깊어서, 그녀는 더 이상 전처럼 용기를 내기 어려웠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이러한 케이트의 모습을 본다. 그녀는 토네이도를 막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상실감은 그녀의 의욕을 완전히 잠식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사무실에 출근하지만, 누군가 토네이도에 대한 예측을 물어올 때면 눈빛이 살아난다. 그녀는 토네이도에 대한 연구를 사랑했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 목표를 아직 포기하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친구 하비(안소니 라모스)가 찾아와 다시 연구를 시작하자고 설득하기 전까지, 케이트는 자신이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하비의 설득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케이트의 마음속 뚜껑을 서서히 열어 그녀가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도록 만든다. 다시 토네이도 연구에 뛰어들면서 케이트는 자신의 진짜 목적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토네이도에 희생당할 사람들을 최대한 막고자 함이다. 자신이 자라온 지역에 매년 출몰하는 토네이도들은 그녀에게 삶의 목적을 주었고, 하비의 설득은 그녀가 잊었던 목적을 다시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그 모든 상실감을 이끌고 다시 일주일 동안 하비와 토네이도를 쫓는다.
[두 번째 감정] 타일러의 자신감
영화 속 또 다른 인물인 타일러(글렌 파월)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그런 유튜버로 보인다. 그는 토네이도 속에 차를 고정시키고 폭죽을 터뜨리는 등의 기행을 일삼으며, 조회수를 얻기 위해 그 모든 도발적인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타일러의 진정한 목적은 단순한 관심 끌기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벌어들인 수익을 토네이도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었다. 타일러는 밝고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그는 토네이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해 일부러 무모한 행동을 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감을 유지하려 한다.
영화 중반 타일러는 케이트에게 두렵기 때문에 계속 도전한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두렵지만 소와 맞서는 카우보이들처럼 그는 토네이도를 쫓으며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실감을 가진 케이트와 통하는 구석이 있다. 타일러는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계속 토네이도에 맞서고, 케이트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토네이도를 쫓는다.
타일러의 과거는 극 중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토네이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진실하다. 그는 단순히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일러는 케이트를 만나면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구원자로서의 자질을 끌어내고, 두 사람은 함께 토네이도 연구에 뛰어들게 된다. 타일러는 케이트에게 그녀의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켜 주며, 그녀가 다시 연구를 시작하도록 돕는다. 그는 토네이도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과학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타일러와 케이트의 만남은 두 사람이 가진 부정적인 감정적들을 상쇄시키며,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준다.
[세 번째 감정] 케이트와 타일러, 하비의 따뜻함
영화 속 인물들은 단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토네이도를 쫓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토네이도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것을 연구하여 더 이상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들의 목표는 단지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따뜻함은 단순히 재난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역할을 넘어선다. 그들은 토네이도를 직접 마주하며,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 중반부부터 그들의 따뜻함은 점점 더 드러난다. 피해 지역을 돕는 그들의 활동은 단순한 과학적 연구를 넘어선다. 특히 마지막 재난이 닥쳐온 작은 마을을 돕는 과정에서 그들은 단지 연구자나 과학자가 아니라, 그 지역사회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는 영화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따뜻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들의 따뜻함과 진정성은 단순히 데이터를 수집하고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
케이트는 결국 자신을 희생하여 토네이도 안으로 뛰어든다. 그녀의 목표는 단순한 연구 성과를 넘어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에 있었다. 그 장면은 그녀의 과거 상처와 그 상처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결합된 순간이었다. 케이트는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목표가 단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정이삭 감독의 연출 스타일과 영화의 의미
영화 <트위스터스>는 정이삭 감독의 연출 아래, 재난 영화라는 장르를 따뜻하고 감성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정이삭 감독은 이전에 <미나리>를 통해 가족의 이야기와 그 속에서의 희망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트위스터스>에서도 그는 재난 속에서도 빛나는 인간의 따뜻함과 희생을 강조하며, 단순한 스릴러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정이삭 감독은 자연재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안에서 빛나는 작은 인간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했으며, 평단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영화는 단순히 재난 영화로서의 시각적 효과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목표를 깊이 탐구하며 큰 감동을 주었다.
영화 속 배우들 역시 인상적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들은 각자의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들며, 토네이도라는 거대한 위협 속에서도 인간적인 감정과 진정성을 전달했다. 케이트 역의 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내면의 상처와 강한 의지를 섬세하게 표현하며,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타일러를 연기한 글렌 파월과 하비를 연기한 안소니 라모스 또한 각자의 개성과 감정을 잘 살려내며, 캐릭터 간의 유기적인 연결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단순한 연구자가 아니라, 그 목표를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진정한 영웅들로 그려졌다.
<트위스터스>는 시각적으로 굉장히 강렬한 재난 영화다. 영화 속에서 토네이도의 거대한 힘과 파괴적인 위력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특히나 최신 CG 기술을 활용해 토네이도를 보다 정교하게 묘사한 점이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토네이도의 형태와 움직임을 더욱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정보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트위스터스>의 CG는 토네이도의 모든 디테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토네이도가 형성되는 순간부터 그 속에서 날아다니는 잔해들, 지표면에서의 바람의 움직임까지도 매우 실감 나게 묘사되었다. 특히 거대한 토네이도가 도시와 자연을 휩쓸며 파괴하는 장면에서는 그 규모와 파괴력이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CG 효과는 관객에게 단순한 시청 경험을 넘어선 몰입감을 제공하며, 마치 토네이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만든다.
특히 이 영화는 4DX 상영관에서 감상했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4DX로 영화를 보면 토네이도의 강력한 바람과 폭풍우가 고스란히 체감된다. 좌석이 토네이도의 회오리바람과 함께 흔들리고, 물이 뿌려지는 등의 효과는 관객이 마치 영화 속 토네이도 안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소나기가 쏟아지는 순간, 그리고 무거운 물체들이 날아다니는 순간까지도 관객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재난의 긴박함과 위협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해 주며, CG로 그려진 토네이도의 현실감과 결합되어 강렬한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 <트위스터스>는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도 빛나는 인간의 따뜻함과 희생을 강조한다. 케이트는 자신의 목표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 했고,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과학적 연구를 넘어선 진정한 인간애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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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빈에 대하여>에 없고 <침범>에는 있는 것
* <침범>과 <케빈에 대하여>(2011)의 장면과 결말 묘사 포함
<케빈에 대하여>, 케빈이 아빠와 동생, 동급생들을 살해하고 청소년 교도소에 간지 2년이 되던 날, 그의 엄마 에바는 면회 자리에서 묻는다. “왜 그랬어?(Why?)” 케빈은 답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I used to think I knew, now I’m not so sure.)” 영화가 조명하는 그의 마지막은 에바의 포옹을 받는, 떨리는 뒷모습이다. ‘내 탓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서 해방된 에바가 빛이 쏟아지는 열린 문을 마주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그런데… 케빈은 왜 그랬을까. 작품이 ‘당연한, 타고난 모성’을 의심하는 것과는 별개로, ‘에바가 사랑을 주지 않아서’라는 단언은 부적절하고 부당하다. ‘원래 그렇다’는 설명은 어딘가 충분치 않다. 모든 기행은 ‘에바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 케빈이 비틀린 근친 이성애를 품고 성장하기를 거부한 탓이었을까? 허나 적의는 분명하지만 그 동기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케빈의 낯에 떠오른 혼란처럼 모호하다. <케빈에 대하여>에는 케빈의 언행을 관찰하거나 그가 의도적으로 전시하는 감정을 클로즈업하는 숏은 있어도, 그의 본성을 은유하는 숏은 없다. ‘악행의 원인’은 물음표로 남는다. 에바의 입장에서 이해를 시도하되, ‘안다’고 확언하는 오만은 보이지 않는다. 원제 “We need to talk about Kevin.(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해.)”은 에바가 남편에게 아마도 수 차례 했을 요청이자, 영화가 관객에게 건네는 제안으로 다가온다.
<케빈에 대하여>가 에바의 시선으로 케빈을 관찰하듯, <침범>의 전반부는 영은의 시선으로 소현을 관찰하며 관객이 영은과 호흡을 맞추도록 유도한다. 전개상 가장 먼저 등장하는 소현의 기행은 반려견 살해다. 영화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영은이 수영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는 모습, 아파트 앞에서 사람들 몇에게 둘러싸인 소현을 발견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영은의 허벅지에 흉터가 생긴 정황을 알려주는 과거 장면을 살펴보면, 잠에서 깬 영은이 문에 기대 기묘하게 웃으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소현을 목격한 후, 이내 허벅지의 상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순서로 전개된다. 이처럼 소현의 행위와 관찰자/화자인 영은의 인식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자리하고, 이 점은 효과적인 서스펜스를 구성한다. 소현은 끊임없이 통제를 벗어남으로써 영은의 일상을 침범한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 흉으로 남아 있듯, 그 영향력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까지 뻗는다.
<침범>은 영은에게 찍힌 낙인의 압박 또한 담아낸다. 미술관에서 영은과 그의 전남편이 소현에 관해 대화하다 언성을 높이는 씬, 영상 전시물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몸에는 스크린 이미지가 문신과도 같이 드리워져 있다. 장면의 끝에 전남편은 전화를 받겠다며 빠져나가고 영은은 그대로 남겨진다. ‘병원에 입원시키자’는 전남편의 제안은 영은에게는 아마 다른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공식적으로는 흩어졌으나 사회와 개개인에게 촘촘히 스며들어 있는 오래된 관습의 영향이다. 소현의 예외적이고 특수한 사고/행동 방식만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일반적’ 관습과 시선 역시 영은의 삶에 침범한다. 영은이 엄마의 권유로 나간 교회에서 마주친 ‘소라 엄마’는, ‘소현이 때문에 소라는 아직 정신과를 다닌다’며 분노한다.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라는 지혜 엄마의 말이 상징적으로 나타내듯, 그 분노들은 자주 (‘미성숙하다’고 여겨지는) 소현이 아닌 영은을 향한다. 아빠들이 상냥하게 타이르거나 양해를 구하는 동안, 분노하거나 사죄하는 것은 엄마들의 몫이 된다. 이를 영화는 선명하게 짚어내기보단 은근히 암시한다.
그렇기에, ‘차라리 나만 해하면 좋겠다’던- 영은이 받는 극한의 스트레스가 결국 고립된 (엄마)자신에게로 수렴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다. 영은이 소현 담당 정신과 의사의 당부를 듣는 장면, 의사의 대사가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발화자가 아닌 영은의 얼굴만을 촬영한다. 의사는 ‘엄마가 지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영은은 키우던 강아지를 산에 묻은 날부터 이미 지쳐 보였다. “엄마가 왜 울까.”는 물음보단 새어나온 한탄으로 들렸다. 지친 영은의 방법은 설득과 사과에서 물리적 차단으로 기운다. ‘소현이 괴롭힌다’는 지혜의 고백을 듣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영은의 얼굴이, 지혜의 몸에 가려 극히 일부만 보이는 숏이 있다. ‘지친 상태’는 그의 균형을 흐트러트리고 시야를 좁힌다. 소현의 행위와 그로 인한 파장을 차단하려는 영은의 시도는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터, 이번엔 그의 시야 내에서 무력하게 실패한다.
소현을 포기하며 스스로를 포기한 영은이 수영장에 가라앉으며 하나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영화는 20년 후로 점프해 ‘민’을 따라간다. 전반부가 영은의 관점으로 진행되며 소현을 침입자로 다루었다면, 후반부는 민의 관점으로 진행되며 해영을 침입자로 다룬다. 영화는 민이 ‘소현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면회하는 ‘엄마’의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려 볼 수 없게 하고, 습관적 절도와 날카로운 태도를 강조한다. 허나 캐릭터성의 차이는 금방 드러난다. 어린 소현은 민과 같이 일관성 있게 방어적이기보단, 해영과 같이 사회적 연기를 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곤 했다. 해영이 소현이라는 반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영화도 딱히 숨겨놓지 않았다.
헌데 이 반전이 공개되는, 그리고 그 이후 영화가 소현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침범>의 전/후반부에는 한 차례씩 CCTV 화면이 삽입된다. 그 첫 번째 특성은 객관적 증거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거기 찍힌 소현을 관리자가 목격하고 집단에서 내보내겠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 두 번째 특성은, 촬영된 소현이 뭉개져 실루엣에 가깝게 보인다는 점이다. 소현이 유치원을 옮기는 계기로 작용하는 전반부 CCTV 씬은, 소현이 그 속의 상처럼 영은에게 흐릿하고 낯선 존재라는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이때 소현은 영은과 관객에게서 더 멀어진다. 후반부의 CCTV 화면도 전반부와 유사하게 팀장의 판단 근거로 쓰인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해영이 찍힌 영상을 보는 자는 다름아닌 해영 본인이다. 이즈음부터 연출 선택들은 대체로 해영-소현을 ‘선명하게 밝히는’, 관객에게로 ‘가까이 가져다주는’ 방향을 바라본다. 팀장과 해영의 대면은 민과 소현 할머니의 대면과 교차편집된다. ‘해영이 소현’임을 민이 알게 되며 소현이 팀장을 해한 상황이 공개된다. 소현은 스스로 ‘무엇인지’를 강조하듯, 피범벅이 된 팀장의 몸을 과격하게 발로 찬다. ‘해영이 소현’임이 밝혀지며, 소현의 (본질적인) 정체가 밝혀지는 듯한 연출이 아닌가. 그는 이제 CCTV 속 실루엣처럼 흐리고 낯설어 두려운 형상도, 자꾸만 거리를 벌리고 예상을 벗어나므로 매번 새로 파악해야 하는 캐릭터도 아니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를수록 무르익어야 할 서스펜스는, 민과 영화가 해영-소현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단정을 내보이면서 설익은 채 사그라든다. 전반부가 훌륭하게 쌓은 물음표의 집은 무너진다. 이제 소현의 폭력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전시되며, (그 정도가 아니라 패턴의 측면에서)예측 가능하다. 기대를 뛰어넘는 것은 오로지 이설의 어마어마한 퍼포먼스 뿐이다. 표면적으로 유사한 성장 배경을 지닌 민을 후반부 화자로 택한 까닭은 일단, 그를 소현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민이 소현과 몸싸움을 하는 와중 자신이 ‘해석한’ 소현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그와 소현을 철저히 분리/비교하기 위해서’라는 또다른 까닭이 드러난다.
결국 <침범>은 ‘소현이 왜 그랬는지 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정확히는, ‘그럴듯한/인간적인 이유 따위는 없으며 그는 원래 그런 자’라고 못박는다. 거기엔 인물의 ‘본질’에 대한 평가, 악행의 악마화가 수반된다.(준섭이 지닌 ‘비교적 평범한’ 폭력성이 그가 소현의 피해자가 되며 묻히는 것은 덤이다.) 시냇가에 있는 소현을 조명하는 엔딩은 어린 소현의 뒷모습을 보여주던 오프닝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씬이다. 영화는 여기서 영은의 환영을 등장시킨다. 포옹과 ‘왜’의 답까지, <케빈에 대하여>의 엔딩이 겹치지만 전하는 바는 완전히 다르다. 영은과의 대화는 사실상 소현의 독백이다. ‘고통이 좋다’는 고백은 소현과 민이 대립하는 장면의 지난한 대사들처럼, 인물의 언어보다는 작가의 언어로 들린다. 이해의 시도보다는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제스처, 심층적 탐구보다는 표면적 규정이다. 영화는 물에 비친 소현의 상을 어린아이로 그리며, 그의 내면이 일곱 살 때와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다. ‘성장하지 못했다’보다는 ‘완성된 악으로 태어났다’는 관점으로 읽힌다. 소현은 관객에게 공포와 고민을 동시에 선사하는 복잡한 악인에서, 자체적으로 결론과 해석을 지닌 ‘악마’로 변한다. 마지막 숏은 엄마의 환영을 돌로 찍어 ‘죽인’ 소현의 정면 클로즈업, 그 낯은 거의 결연하다. ‘나는 앞으로도 타인의 고통을 즐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도 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침범>은 소현을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정해 놓은 채로, 그 (일종의, 이를 테면)‘순수악’이 주변을 잠식하는 과정을 그려내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관점은 ‘교회에 데려가자’에서 ‘걔는 사람이 아니야’로 옮겨가는 소현 할머니의 것과 비슷하다. 제가 낸 불을 후광으로 두르고 무감정하게 서 있는-‘머물렀던 곳을 깡그리 불태우는 존재’-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전하는 소현의 이미지와 가장 가깝지 않은가. <케빈에 대하여>는 케빈의 정체를 모르고, <침범>은 소현의 정체를 안(다고 말한)다. 영화가 알려주므로, 관객은 사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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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내용으로 글이 모였으나, “20년 후” 이전 파트는 매우 좋았다. 곽선영 배우의 서서히 가라앉는 연기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아쉬웠음에도 이설 배우의 연기만큼은 다시 관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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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적인 프로덕션 디자인 요르고스 란티모스 세계관
기묘한 영화 전문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비현실적이고 우화적인 설정, 정교하고 인공적인 미장센이
돋보이는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가여운 것들>
<더 랍스터>의 프로덕션 디자인 같이 살펴보아요.
여러분들의 최애 영화는 뭔가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절대 권력을 지닌 히스테릭한 영국의 여왕 ‘앤’(올리비아 콜맨). 여왕의 오랜 친구이자 권력의 실세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와 신분 상승을 노리는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욕망 하녀 ‘애비게일 힐’(엠마 스톤)은 여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버둥치기 시작하는데…
[가여운 것들]
천재적이지만 특이한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난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 갓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던 벨라는 날이 갈수록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 넘쳐난다. 아름다운 벨라에게 반한 짓궂고 불손한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자는 제안을 하자, 벨라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떠나고 처음 보는 광경과 새롭게 만난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되는데….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놀라운 반전과 유머로 가득한 벨라의 여정이 이제 시작된다.
[더 랍스터]
가까운 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에게 완벽한 짝을 찾아야만 한다. 홀로 남겨진 이들은 45일간 커플 메이킹 호텔에 머무르며, 완벽한 커플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을 얻지 못한 사람은 동물로 변해 영원히 숲 속에 버려지게 된다. 근시란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고 호텔로 오게 된 데이비드(콜린 파렐)는 새로운 짝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숲으로 도망친다. 숲에는 커플을 거부하고 혼자만의 삶을 선택한 솔로들이 모여 살고 있다. 솔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그들의 절대규칙은 바로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 것! 아이러니하게도 데이비드는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자신과 같이 근시를 가진 완벽한 짝(레이첼 와이즈)을 만나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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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꽃 같은 얼굴을
극장의 존폐 위기를 말하는 시대다. 코로나19의 영향을 영화계만 받은 건 아니지만, OTT 경쟁의 시대까지 겹치면서 영화계는 예상보다도 큰 타격을 입었다. CGV는 한동안 극장을 축소 운영했고, 상상마당 시네마를 비롯한 작은 영화관들도 잠시 문을 닫았으며, 서울극장조차 역사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 영화의 주요 수입원인 극장이 휘청거리는데 영화계가 휘청거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좋은 성적이 기대되던 영화들조차 극장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겼고, 어렵게 개봉한 영화들도 흥행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 흐름이 반복되면서 제작 자체가 위축될 위기까지 이야기되고 있다. 악순환은 현재 진행형이다. 티켓 값에 포함되는 영화진흥위원회 발전기금 또한 고갈 위기라는 말이 들려온다. 여기저기서 긴급 좌담회가 열리고, 의견을 개진하고... 하는 것 같지만, 아직까지 극장가의 반등이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와중에 CGV는 가격을 인상한다는 소식. 코로나19 이후로만 몇 번째인지. 어려움은 알겠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다. 변방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CGV 이 망할 것들아... 망하지 마... 제발.
그러던 중,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영화의 개봉 소식이 들려왔다.
포스터를 보는 순간,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포스터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강진아 배우의 옆얼굴을 보는 순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아라는 배우를 볼 때마다 감탄한다고 꼭 힘주어 말하고 싶다. 그를 자주 본 것은 아니다. 몇 페이지나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내가 제대로 본 것은 <소공녀>와 <빛과 철> 두 작품뿐이다. 그러나 볼 때마다 기억에 남았다. 잠깐 내려와 링거를 꽂으면서도 예의상의 친절함과 싹싹함을 잊지 않는 사회인 문영의 얼굴이. 안쓰럽게 생각하지만 다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여동생에게 참다 참다 한 마디 건네는 올케 소은의 얼굴이. 평생 문영과 소은으로 살아온 사람이나 지을 수 있는 표정과 아우라를 내뿜고 있어서. 억지로 아우라를 만들어 내기도 쉽지 않지만,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건 더 어려울 것 같은데 강진아라는 배우는 늘 멋지게 해냈다. 그래서 더 길게, 더 자주 보고 싶다 생각하던 배우였다.
<태어나길 잘했어>는 그 마음을 충족시켜주는 영화다. 이 어려운 시국에 봄처럼 찾아와, 들꽃처럼 보는 이의 마음마저 다정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영화.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래도 '태어나길 잘했어' 말해주고 싶은 영화다.
<태어나길 잘했어>의 주인공은 배우 강진아가 연기하는 춘희. 걸어간 자리마다 척척한 물 발자국이 남을 만큼 땀이 많이 나는 다한증을 앓고 있어, 수술을 받기 위해 마늘 까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고, 어려서부터 얹혀 산 친척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서도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성실한 인물이다. 하지만 외로운 이들이 으레 그렇듯, 춘희의 성실도 바라보는 입장에서 속이 편하지만은 않다. 어느 정도 천성이기도 하겠지만, 기댈 데 없이 오래 살아온 이의 노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매일 마늘을 까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식구들이 모두 떠난 옛날 집에서도 어린 시절 쓰던 좁은 다락방에서 잠을 청하고, 그렇게 조용히 성실하게 살던 춘희의 일상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춘희도 앞으로 나아간다.
<태어나길 잘했어>의 가장 큰 장점은 촘촘하게 설계된 인물들이다. 영화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까지 세심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세필화처럼 꼼꼼하게 그려냈다. 그 결과 생생하고 개성 있는 인물들이 가득해서, 인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고 마음이 훈훈해진다. 잘 그려낸 인물은 그 자체로도 이야기를 굴러가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등장하는 인물들 상당수가 이 각박한 세상을 훌륭하게 헤치고 살아가기엔 좀... 쉽지 않을 것 같은, 어딘가 어수룩하고 그래서 귀여운 사람들이다. 주황과 춘희 사이에서 오가는 연애의 스파크는 그래서 더욱 솔직하고 풋풋해 사랑스러우며, 어느 날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는 과거의 춘희와 현재의 춘희를 함께 보고 있노라면 춘희라는 인물이 잘 살아남기 위해 꾸준히 발돋움해 왔음이 느껴져 뭉클하다. 자기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마주친 노숙자의 걸걸한 태도에 겁을 먹었으면서도 그 옆에 신발을 놓아두고 가는 춘희의 다정함 또한, 인물들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인물들 사이에서 춘희의 성장은 정말, 민달팽이처럼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궤적을 남기고 일어난다. 늘 속 없는 사람처럼 미소를 짓거나 덤덤하게 대답하던 춘희가 마침내 하고 싶었던 말을 또박또박 전하는 순간, 옆얼굴임에도 불을 품은 것처럼 빛나는 눈동자에서 형형한 힘이 느껴졌다. 그건 춘희라는 인물의 성장이자, 강진아라는 배우의 빛이었다.
아쉬운 지점도 존재한다. 이야기를 나아가게 할 정도로 인물이 힘이 있지만, 정작 사건은 크게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조금 산발적이다. 과거 춘희와 현재 춘희의 교감은 기대보다 훨씬 미진하게 진행되었고, 정작 개인적으로는 크게 기대하지 않은 주황과 춘희의 연애사가 훨씬 재미있었다. (둘의 연애는 정말 너무 하찮고 너무 귀엽다.) 사건이 조금 헛도는 느낌이라,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메시지가 의도만큼 힘 있게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는 느꼈다.
아쉽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몇 번이나 손가락을 머뭇거렸다. 나는 왜 이 영화에 아쉬움을 느꼈으면서도 아쉽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가. 사람마다 취향과 기준이 다른데 좀 아쉬울 수도 있지, 그 사실을 왜 이렇게 안타까워하고 있는가. 이유가 뭘까. 이 마음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니, 이 영화의 진심에 공명하는 마음이 있었다.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 주목한 끝에 빚어진 영화라는, 이들을 안아주는 영화라는 진심이 분명하게 전해졌던 것이다. 이 영화만이 가진 힘은 인물을 촘촘히 설계했다는 것도, 배우들이 연기를 감탄 나오게 잘했다는 것도 (강진아 배우만 언급했지만 홍상표 배우를 비롯한 다른 배우들의 호연도 대단히 빛나는 영화다)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한 애정에 있었다.
주황과 춘희가 처음 만난 모임처럼, 어수룩하고 상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신경림의 시 한 구절처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다정하게 보듬는 것. 그게 영화 속 인물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영화 자체와 관객 사이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민달팽이 점액처럼, 땀 찬 손처럼 끈끈하게.
모두가 오래 버텨온, 버틸 힘이 점점 사라져 가는, 어렵다고 말하는 시대다. 영화들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어려운 때에, 봄꽃 같은 이 영화의 얼굴을 본다. 독립영화의 면면을 이뤄온 배우들의 든든한 얼굴을, 다정한 마음을 가득 담아 영화를 만든 제작진의 이름을, 영화 속 펼쳐지는 배경의 나지막하고 다정한 길거리를.
망하지 않을 거다. 힘들고 모자란 대로 끈끈한 손을 맞잡는 이런 영화가 있는 한. 이 영화 정말, 태어나길 잘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봄꽃 같은 얼굴을 마주하고 행복해지길. 태어나길 잘했다는 말을 다정하고 질척하게, 더 많이 주고받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CineLab'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영화를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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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토대위의 완성형 오컬트,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기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출처 : 왓챠피디아
미국 LA, 거액의 의뢰를 받은 무당 ‘화림’과 ‘봉길’은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는 집안의 장손을 만난다.
조상의 묫자리가 화근임을 알아챈 ‘화림’은 이장을 권하고, 돈 냄새를 맡은 최고의 풍수사 ‘상덕’과 장의사 ‘영근’이 합류한다.
“전부 잘 알 거야… 묘 하나 잘못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절대 사람이 묻힐 수 없는 악지에 자리한 기이한 묘.
‘상덕’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제안을 거절하지만, ‘화림’의 설득으로 결국 파묘가 시작되고…
나와서는 안될 것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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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4년 2월, 오컬트를 좋아하는 나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던 영화가 개봉했다. 한 줌에 불과한 오컬트판에서 그저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던, 절대 기대할 수도 없었던 천만 관객이 나온 <파묘>이다. <파묘>는 시작부터 달랐다. 웰메이드 오컬트 작품을 찾아보기 힘든 나로서는 큰 감명을 받았던 <검은 사제들>을 연출하신 감독님께서 또 다시 같은 장르의 영화를 만드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오매불망 극장 개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메인 포스터와 예고편이 공개되면서, 단숨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도 그럴게, 예고편에 드러난 스토리가 기대했던 만큼 흥미로웠으며 포스터 디자인은 그러한 기대감을 최대한으로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출처 : CGV
각 등장인물의 시선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었다. 수많은 디자인 요소가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 미니멀한 형태로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가 쉽지 않은데, <파묘>가 그걸 해낸 것이다. 한국 오컬트의 근간에 있는 '풍수지리'를 활용함은 등장인물 중 '풍수사'가 있었기에 예상할 수 있었는데, 가장 기본적인 동서남북의 개념을 메인 포스터에 적용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더욱 새롭게 다가왔던 거 같다. 보통 극의 전체적인 내용과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담으려고 하지, 디테일한 소재를 활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점부터 나는 '아, 감독님께서 기초부터 꽉 잡고 가는구나' 싶어서 스토리에 대한 기대가 더더욱 커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처 : CGV
위 버전의 포스터 또한 너무 취향이었다. 가장 먼저 공개되었던 캐릭터 포스터처럼 미니멀한 구성임에도 여느 포스터보다도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경문이 써져 있는 얼굴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긴장된 표정과 눈빛이 강렬하게 다가오고, 스토리의 진행이 얼마나 긴박할지 은연중에 상상하게 되는 즐거움 또한 이끌어냈던 거 같다. 각 캐릭터의 얼굴 일부만을 배경으로 사용하여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하되, 여백을 살리는 디자인으로 타이틀 또한 각인되었기 때문에 '홍보' 포스터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고 감히 생각한다.
'파묘', 이토록 직관적인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한 것도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한국 오컬트 중에서도 특히나 '묘'와 관련된 속설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져 있기 마련이다. 묫자리는 해가 잘 드는 곳으로 해야 한다, 묘가 있는 부근에서 무언가 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 등 예로부터 이어진 유교 사상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현상들을 위와 같은 미신들로 이미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파묘>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공동체를 정확하게 건드렸다. 묘를 파헤쳤다고! 큰일났네, 대체 무슨 일이 생길까?
포인트1. 오컬트와 미스터리의 곁들임
오컬트는 곧 종교이자, (나에게) 종교는 곧 오컬트이다. 사람의 맹목적인 믿음과 순수한 신념은 아이러니하게도 괴기스러운 이미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살린다. 장재현 감독의 연출작 중 <검은 사제들> 또한 이러한 공식을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다만, 서양 오컬트의 주요 소재인 '악마'와 '엑소시스트'를 거의 그대로 끌고 왔다는 점에서, 물론 연출은 독보적이고 완벽했지만, 여타 외국 작품들에서도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미지를 떠나 이제는 조금 더 한국스러운 오컬트를 갈망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파묘>가 이 부분을 완벽하게 간파한 것이다.
출처 : 왓챠피디아
한국식, 아니, 조금 더 넓게 가보자. 동양적인 오컬트란 뭘까? 개인적으로 동양의 오컬트 근간에는 '음양오행'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주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어떠한 이상현상이나 초자연적인 일을 이해해보려고 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바로 그 공식이다. '금, 수, 목, 화, 토'의 다섯 가지 원리에 따라 우주의 만물이 생성하고 또 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보는 사주에는 수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오행'은 스스로의 인생을 파악하기에 간단한 방법으로 일컬어진다. 예를 들어, 모 연예인의 사주에 '수'가 부족해 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승승장구했다거나 하는, 일반인들도 피해갈 수 없는 정설과도 같은 미신이다. 다른 예로 SNS에 밈처럼 퍼져 있는 일화를 보면, 문신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시선도 '사주에 ㅇㅇ이/가 부족해서 했어요'라고 하면 납득하게 된다는, 그런 우스갯소리로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 있기도 하다.
출처 : 왓챠피디아
<파묘>는 한국의 무교와 연관되어 있는 여러 직업이 한 데 모인다. 직접 영가를 파악하고 굿을 진행하는 무당, 그 옆에서 경문을 외는 또 다른 무당, 땅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지관, 그 옆에서 마지막까지 예우를 다 하는 장의사. 어떻게 보면 모두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이 '묘'라는 하나의 소재로 모여 각자의 관점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매우 매력적이다. 여러 개의 장으로 나누어질 만큼 복잡했던 <파묘>의 극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이들이 처음 묘를 보러 갈 때 끝없이 이어지는 산 속을 굽이굽이 들어간다.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를 자처하여 들어가는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 이들은 경로를 잘못 들어가게 된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초~중반부까지 이어지는 숨막히는 전개로 한 사건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숨을 돌릴 시간도 주지 않고 후반부가 시작되며 위 나레이션이 나온다. 내비게이션 음성을 활용한 트랜지션은 정말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미스터리함을 가중시키는 데 한 몫 했다. 이대로 끝이기에는 아쉬운 타이밍이었고, 그런데 대체 일이 어떻게 꼬이려나 상상도 안 되던 시점에 '첩장'이 나온다. 그리고 이 문제상황을 발견한 인물은 다름아닌 상덕이다. 처음부터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던, 피하고 싶어했던 상덕이 오히려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는 발걸음을 하게 된다. 수직으로 꽂혀 있는 거대한 무덤은 서양 오컬트의 '역십자가'를 떠올리게 했다. 순수한 믿음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거꾸로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죽은 자의 영원한 안녕을 바라는 무덤이 수직으로 서 있을 수는 없는 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알아챈다.
포인트2. 인상깊은 연출
출처 : 왓챠피디아
여러 등장인물 중 무당 조합이 <파묘>의 흥행을 이끌었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현대적으로 풀어낸 무당의 모습만으로도 획기적인데, 생사가 오가는 오컬트 세계관에서 두 인물의 서사까지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병에 걸려 평범한 삶을 포기한 후배가, 선배와 같이 있기만 하면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완벽한 캐릭터 디자인은 감독의 투철한 자료 수집에서 기인했다.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무당에 관한 정보를 찾아 다니던 중, 신병을 겪고 무교에 발을 들이며 몸에 경문을 문신한 분을 뵐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봉길'의 삶은, 섬세한 고증을 통해 더욱 실감나게 구현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출처 : 왓챠피디아
이름 없는 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 또한 다시금 언급하고 싶다. 뱀의 움직임처럼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직부감으로 담아낸 쇼트와 긴장감을 더해주는 사운드가 나오다가, 한 순간 끊긴다. 적막이다. 무덤과 그 뒤쪽으로 이어지는 숲을 매우 넓게 잡은 롱 쇼트는 그러한 정적과 소름 돋게 잘 어울렸다. 광활한 풍경이 주는 압도감을 적절하게 활용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배경에서 이어지는 화림의 대살굿 씬은 컷 연결부터 사운드 디자인까지 정말 완벽했다. 새까만 재를 얼굴에 바르는 화림의 강렬한 눈빛과, 그 뒤를 받쳐주는 봉길의 기세 있는 목소리는 지금까지 접한 '굿'을 재현한 장면들 중 가장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서양의 엑소시스트와 동양의 굿은 어떻게 보면 일반인에게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고, 현실적으로 성립이 되는가, 하는 갑론을박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분야이기에 조금 동떨어진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파묘>의 굿 시퀀스는 매우 차별적이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온 힘을 다 해 지금의 행위에 임하고 있는지 화면 너머의 관객인 나조차도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출처 : 왓챠피디아
이외에도 정말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 있는데, 첫 번째 관이 열리고 그 혼령이 여기저기 날뛸 때, 과연 전화를 하는 상덕이 진짜일까, 문 앞에서 말하고 있는 상덕이 진짜일까? 하는 나폴리탄 괴담식 공포가 그대로 매체에 드러난 경우는 처음이라 속으로 굉장히 반가웠다. 공포 장르에서도 다른 시각/청각적 요소 없이 텍스트로만 즐기는 나폴리탄 괴담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소소하게 즐기고 있던 소재가 이렇게 영화의 한 장면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롭고 흥미로웠다.
출처 : 쇼박스
그리고 도깨비놀이! 오컬트 장르답게 생소한 옛 설화를 기반으로 호러스러운 장면을 구현한 부분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사실 '도깨비놀이'는 정확하지 않은 출처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조금 더 명확한 행위가 있긴 하지만, '대화'만으로 영가를 속여 불러온다는 방법 자체가 오컬트에서 바이블로 등장하는 분신사바/위자보드와 같은 기묘한 분위기 그 자체이기에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함에 적절한 소재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전통적인 기괴함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이에 더해, 제한된 공간에서 어떠한 물리적 상호작용 없이 네 사람만의 대화 흐름에 맞추어 카메라가 움직이며 다이나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부분 또한 감탄스러웠다. 도깨비놀이 자체는 제주도에서 발현된 일종의 굿이지만, 모든 지역의 사투리가 활용되었다는 요소도 꽤 매력적이었다. 절대 한 데 존재할 수 없는 각자의 지역적 특징을 지닌 것들이 일상적이지 않은 목표로 모여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고 이 세상 것이 아닌 무언가를 부르고 있다, 는 모순적인 상황에 혼란한 심리가 완벽하게 작용되었다고 본다.
물론, 아쉬웠던 부분도 몇 가지 있다. 초반에 화림과 상덕의 나레이션을 통해 사건의 시작과 등장인물들의 특성을 설명했던 만큼, 이후에도 설명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있었다. 특히 두 번째 관이 열리고 오니가 처음 등장한 직후, 화림이 혼령과 정령의 차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상덕에게 이야기할 때, 앞으로 우리가 결말을 위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알게 되는 중요한 장면인 거 같은데 그저 말로만 설명하는 전개가 조금 아쉬웠다. 짧은 몽타주로 구성되고 끝났던 화림의 일본 요괴에 대한 끔찍했던 일화를 조금만 더 자세히 다루었다면 훨씬 매력 있게 표현될 수 있었을 거 같아서 더욱 마음에 남았던 거 같다.
1장에서 간접적으로 다가왔던 공포 요소와 달리, 2장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오니의 모습으로 인해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표했을 것이다. 현실적인 공포가 아닌 판타지물에 나올 법한 크리처의 느낌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크리처 소재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마음 속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커다랗고 붉은 공으로 디자인된 <파묘>의 도깨비불은 평소에 '도깨비불'이라는 소재 자체에 큰 흥미를 가지고 어떤 장르에서 어떤 형태로 활용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던 나에게는 또 다시 실망스러운 부분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모든 이를 무력화시켰던 오니를 무찌르는 방법이 음양오행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금과 목은 상극이다'였다는 게, 누구보다도 전문가인 지관 '상덕'이 마지막에서야 깨달았다는 설정까지 결정적인 단서라고 보기엔 부족했기 때문에 다소 아쉬웠다.
포인트3. 역사적 의의
출처 : 왓챠피디아
<파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탄탄한 역사적 소재의 기반 위에 오컬트를 잘 올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기가 흐르는 산맥에 철심을 박아서 그 기운을 끊어버린다는 속설, 오랜 시간 동안 별 거 아닌 미신이라고 여겨졌으나 계속 회자되는 증거와 영화 개봉 당시 대중들의 반응으로 하여금 해당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언급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었음을 입증했다고 본다. 당시 삼일절이 가까워지던 시기에 개봉했던 점과, 극중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이 독립운동가의 성함 그자체이며, 영화 구석구석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이스터에그를 심어 놓았다는 것이 결합되어 큰 시너지를 냈다고 판단된다.
올해로 제106주년 삼일절을 맞았지만, 일본의 만행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파묘>는 매우 직설적이고 명확한 연출로 일제강점기에 대해 한국인으로서 의식하고 기억해야 할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독립운동과 광복을 넘어, 독재와 민주화운동까지. 말 그대로 피로 쓰여진 우리의 자유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여담으로, 명백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영화 <파묘>는 동물권에 대해 올바르지 않은 태도로 임한 사실이 있다. 제작사 측에서 피드백을 통해 자정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으나, 작품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 직접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먹어야 할 은어를 감쪽같이 젤리로 만들고 여우 또한 CG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을 뿐만 아니라 마케팅 요소로 활용했으면서, 오로지 촬영을 위해 살아 있는 은어를 대량으로 죽이고 실제 돼지의 사체를 폭력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작품을 소비해야 마땅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공포/오컬트 장르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관련 종사자와 소비자들은 계속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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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과 확신 그 사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콘클라베>는 일관적으로 ‘이방인’에 주목한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서 알파벳 ‘I’만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다양한 알파벳을 흰색으로 칠하나 각 이름마다 단 하나의 알파벳만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교황을 선출하는 마지막 투표 전, 하얀 우산을 쓴 추기경들의 행렬 쇼트를 자세히 살펴보자. 한 명의 추기경이 우산을 쓰고 있지 않다. 투표를 앞두고 추기경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공유하는 씬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너 명씩 모여 있는 추기경들과 달리 추기경 한 명이 혼자 의자에 앉아 있다.
베니테즈 추기경은 이방인이다.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로렌스조차 알지 못하고 오직 선종한 교황만이 베니테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거의 없는 카불의 대주교로 로마에 온 추기경이며 준비된 명단에 없던 인물이다. 이 이방인은 로렌스의 부탁으로 추기경들의 식사 전 기도를 맡는다. 그는 주신 음식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식사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기도, 그리고 음식을 준비해준 수녀들에 대한 기도까지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콘클라베를 운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안락한 식사 자리가 일상이 아닌 이들을 떠올리고 있다.
여기서 수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수녀들은 콘클라베에 참여할 수 없다. 교황 선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고 당연히 교황이 될 수도 없다. 수녀 또한 콘클라베에서의 이방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콘클라베 자체는 수녀들의 노동력 없이 열릴 수 없다. 영화는 이러한 수녀의 역할을 조명한다. 마지막 교황 투표를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씬에서 계단을 오르는 추기경들의 쇼트 뒤로 계단을 내려오는 수녀들의 쇼트가 나온다. 위에서 열리는 콘클라베를 아래서 뒷받침하는 수녀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로렌스는 트랑블레 추기경의 비리를 알리기 위해 추기경들에게 보여줄 기밀문서를 복사하고자 한다. 로렌스는 무려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단장이나 복사기는 사용할 줄 몰랐기에 아녜스 수녀의 도움을 받아 문서를 복사하게 된다. 이 기밀문서를 공개한 로렌스는 추기경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는다. 이때 아녜스 수녀는 트랑블레가 아데예미 추기경을 곤경에 빠트리게 하기 위해 한 일을 증언하며 트랑블레가 교황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 시퀀스의 핵심은 교황이 될 유력 후보자였던 트랑블레의 몰락이다. 로렌스가 복사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트랑블레의 몰락을 묘사하는 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과정 속에서 수녀의 역할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베니테즈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남성인 동시에 여성인 존재다. 그의 성 정체성을 통해서도 그를 이방인이라 규정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성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첫 교황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마지막 투표를 앞두고 베니테즈는 테러를 벌이는 무슬림들을 상대로 종교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테데스코 추기경의 말에 반박한다. 우리의 적은 그들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며 가톨릭 교회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니테즈의 모습은 성경 속의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7:41) 영화는 베니테즈를 이 시대의 메시아로서 재해석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베니테즈가 말한 미래로 나아가는 교회는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가? 이 교회는 과연 신 앞에서 ‘옳은’ 교회인가?
교황은 선종 직전까지 가톨릭교회를 의심했다. 이 의심은 교황 자리를 향한 추기경들의 욕심과 각종 비리로 인한 교회 내부의 부패를 의미한다. 추기경들은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교황을 선출하는 데보다 세간의 평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교황을 선출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다. 전통주의자들은 로마의 전통을 강조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발맞추어 교회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같은 성서를 근거로 하기에 양측 중 하나의 주장만이 옳다고 우리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베니테즈의 미래로 나아가는 교회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강조한다. 영화는 베니테즈의 교회를 양측을 모두 포용하는 옳은 방향의 교회로 그리며 베니테즈는 자신이 확신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영화가 로렌스를 통해 계속해서 강조하는 의심과 확신의 질문에 대한 베니테즈의 응답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니테즈의 입장 또한 끊임없는 의심보다는 확신에 가깝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소인배’이기에 어느 것이 옳은 방향의 신앙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로렌스는 첫 번째 투표를 앞두고 추기경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 예수의 12제자 중 의심하는 제자로 알려진 도마처럼 (토마스) 로렌스는 영화 내내 의심한다. 그는 교황이 될 유력 후보자들의 결점을 하나하나 의심하고 있으며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로렌스의 말에 비추어 우리는 그가 신의 존재까지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베니테즈를 교황으로서 가장 적합한 추기경이라 ‘확신’하는 순간 다시 의심이 찾아오기도 한다. 과연 간성(intersex)인을 교황으로 세워도 되는 걸까. 베니테즈의 성 정체성이 앞선 추기경들처럼 하나의 결점에 해당하진 않을까.
영화에는 거북이가 두 번 등장한다. 첫 투표가 끝난 날 밤, 거북이들을 보고 있는 베니테즈에게 로렌스는 전대 교황이 생전에 거북이들을 아꼈다며 자꾸 도망치려 하는 게 문제라고 이야기해준다. 교황이 선출된 뒤 베니테즈의 성 정체성을 알고 혼란스러운 로렌스는 성당 안까지 도망쳐온 거북이를 다시 마주친다. 로렌스는 거북이를 물가로 돌려보낸 뒤 미소 짓는데, 이 거북이는 마치 로렌스 그 자체 같다. 추기경들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까지 의심했던 로렌스는 길을 잃은 거북이, 물가로부터 도망치려는 거북이다.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로렌스는 죽은 교황의 뜻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고 끊임없는 의심에 휩싸인다. 마침내 그는 베니테즈의 비밀을 받아들이고 베니테즈의 교황 선출이 신의 뜻임을 인정한다. 영화는 이를 물가로 돌아온 거북이와 그 앞에서 미소 짓는 로렌스로 표현한다.
영화 <콘클라베>는 성스럽고 경건한 의식 이면에 교차하는 인간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복잡성만을 다루지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과 그 신앙의 형태를 깊이 고찰한다.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불변하나 그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과정은 단순히 확정될 수 없다. 끊임없이 의심하자. 의심 없는 확신을 멀리하자.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야 종교는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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