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7-07 21:48:29
아름다움과 추함 그 너머
영화 <태풍 클럽> 리뷰
SYNOPSIS.
태풍이 불어 닥친 날, 미카미 쿄이치를 비롯한 6명의 중학생이 학교에 갇히고, 교이치의 절친 리에는 등교하던 중 홀연 방향을 바꿔 도쿄로 향한다. 고립된 상황 속에서 결핍과 욕망, 불안과 쾌락이 뒤섞인 이상야릇한 축제가 벌어진다.
POINT.
✔️ 1980년대 일본 영화계의 변화를 이끈 소마이 신지 감독의 대표작이 약 40년 만에 개봉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유명한 감독이라는데, 동양 영화를 일본 위주로 좁게 읽어온 경우가 많은 서구권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감독이에요.
✔️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류의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관심을 가져보실 만합니다.
✔️ 1980년대의 현란한 음악과 음향이 매우 매력 있게 쓰인 영화
✔️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잘 만든 영화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해요.

청춘은 늘 아름답게 혹은 위태롭게 혹은 둘 다로 그려진다. 소용돌이 치는 미완의 감정들이 어쩌지를 못하고 파들거리는 각자의 세계. 자기 자신만으로도 팽창하다 터져버릴 것 같지만 외부와 또 끊임 없이 잡음을 일으키는 일상. 차라리 태풍이라도 와서 이 모든 것이 깨쳐지길 바라게 되는 마음 같은 것들. 여기까지는 청춘을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로 미화하여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쉬이 공감할 법하다.
이 영화도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영화 속 리에의 대사에서 표현되듯, 곧 올 거라는 태풍이 차라리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쩌다 학교에 남아 버린 아이들이 점점 거세지는 태풍 속에서도 굳이 집에 가거나 연락하려는 마음 없이, 교실에 남아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청춘이라면... 저는 그냥 한평생 응애 할랍니다.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다.

아름다운 시네마의 힘
이 영화가 아름답지 않았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에너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제각각의 이유로 학교에 남은 아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흔히 이 영화를 소개할 때 사용되는 불안이나 본능 같은 단어들 또한, 청춘이나 사춘기나 청소년기라는 단어들 또한, 이 영화 속 아이들이 표출하는 에너지를 적확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최선은 결코 최적에 닿지 못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말하고 쓰며 이 영화의 주변을 더듬거려 보고 싶다.
현란한 80년대 음악과 독특하게 사용된 음향, 공간 사용 하나하나 다, 영화를 잘 모르는 눈으로 보아도 잘 만들었구나 감탄하게 되기는 한다. 책상을 쌓아 올리고 종이학을 매달아 둔 교실의 풍경, 거기에 마치 아이돌 군무처럼 원자처럼 제각각 서 있는 아이들,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모습은, 그 장면이나 정서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장면적으로 힘이 있다. 마치 온도가 높아지면 활발해지는 원자의 운동 같다. 전자와 충돌이 증가하고 비저항이 커지는 원자의 모습처럼,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다.
태풍 안에서 제각각의 이유로 끓어 오르는 아이들의, 탁구공처럼 튀어오르는 에너지는 분명히 힘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8명의 아이들이 마치 하나의 사회를 표현한 것처럼도, 한 인간 안의 복잡다단한 정서를 표현한 것처럼도 보인다는 지점이다. 하나의 물체 안의 원자들처럼.

아름답지 않은 원시의 폭력
특히나 이 영화 속 아이들의 세계를 하나의 사회라고 한다면, 내 눈에 그것은 태곳적 원시의 사회로 보였다. 인간보다는 짐승의 그것과 조금 더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낳은 이들은 보호자로 기능하지 않거나 아예 부재한다. 아이들이 쌓아올린 보호의 수단은 그다지 보호할 만큼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책상을 바리케이드처럼 쌓아 올린 것은 물리적 충격을 막기 위함이고 종이학은 으레 소원의 상징이나, 둘 다 이 영화 속에서는 장난스러워 보인다고나 할까, 조개 껍데기 가면 정도의 선사 시대 주술 수준으로 무력해 보인다. 그 안에서 생의 감각은 통제되지 않는다. 노래와 춤, 웃음과 폭주, 그리고 폭력.
특히 미치코에 대한 켄의 폭력 장면은, 개인적으로 관객석에 앉아 있기 괴로울 정도였다. 너무 괴로워 속이 좋아지지 않았고, 주먹을 자꾸 불끈 쥐게 되었으며, '미치코 그렇게 밀어내면 네 코어가 흔들려... 코어를 다잡고, 있는 힘껏 한 대 치고 발로 차...'라고 생각하게 되는, 자꾸 극을 극으로 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장면에 얼마나 깊은 괴로움을 느끼냐에 따라서도 평가가 갈릴 지점이 있을 것이다. 유독 길고 집요했던 이 장면은, 명백히 성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가해자의 입장을 고려한다. 그가 가정에서 겪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결여와 그로 인한 그의 정신적 불안정 상태, 좋아한다는 이유로 미치코에게 이미 저지른 일과, 그 일에 대한 면죄부의 의도로 해석될 자리까지 내어준다. (심지어 이 영화의 시놉시스에서 “소년은 짝사랑했던 소녀에게 마음을 고백“한다고 표현한 문장도 있다. 누가 썼는지 몰라도 이건 좀 많이 다르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원색적인 세계에 출구는 있는가? 도쿄에서 태풍 속을 뛰어다니는 리에와 강당 앞에서 춤을 추는 아이들이 노래하는 '만약의 내일'에는, 출구가 있을까. 원시 사회를 벗어난다면, 이 미완성의 시기를 벗어난 '어른'의 세계에는 대안이 있는가.
이 영화 내에는 없다. 대사 하나 없이 잠시 등장하지만 보호자 역할은커녕 스스로를 돌보는 일조차 버거워 보이는 켄의 아버지, 그의 함석지붕에 아들이 내리꽂는 돌멩이, 무책임하게 피하던 약혼녀의 가족과 함께 가라오케 노래를 부르며 무성의하고 무기력하게 술에 몸을 맡긴 교사, 문을 열어 몸을 적시는 이상으로 태풍을 맞이할 수 없는 그의 세계...

<일본산고>의 일침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원시 사회 같은 폭력을 보며 대문호 박경리 선생님의 <일본산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보다는 죽음, 희망보다는 절망을 향해 있다. 출구보다는 막다른 길처럼 느껴진다.
"비상을 꿈꿀 수 없는 사로잡힌 영혼에게 깃드는 것이 허무주의다. 그리고 쾌락이다. 남경 학살, 백주의 난행은 일본군의 전략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의 여실한 참극, 절망 없이 그 짓을 했을까.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또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추구야말로 문화의 시발점인 동시에,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박경리, <일본산고>. 이하 큰따옴표는 모두 같은 책 인용.)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원시적인 사회를 담고 있다고 느꼈다. 로망 포르노 (다시 말해 포르노) 연출로 감독 생활을 시작한 소마이 신지라는 감독에게서도 박경리 작가가 비판한 지점이 느껴졌다. "감각만 살아나서, 마치 달팽이처럼 축소되고 밀폐된 채 끈적끈적한 점액을 남기며 기어다니는 이런 형국에 불어닥친 세계의 바람" 앞에서 "기능 면으로는 재빠르게 받아들여 전환할 수 있었겠지만 의식세계는 일대혼란"이었던 나라의, 말초신경만 남아 버린 허무주의.
이 영화에서의 청춘은 결국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1985년 작품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에로·구로(그로테스크)·난센스·칼과 무의미, 그것은 칼의 세계에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황무지와도 같은 의식을 여실하게 드러낸" 유행이 1920년대의 것이었다면, 일본 문화에서 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진 작품 쪽이 더 보고 싶다.

아름다운 카메라의 움직임, 아름답지 않은 사상의 부재. 그곳에서 나는 내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절감한다. 나는 "인생은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며 보다 고통스럽게 무량한 우주의 비밀을 헤치고 나가는 과정"이라는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저는 일본의 민족성을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스스로도 희생자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체제입니다. 체제가 뭐냐를 물어야지요."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본다.
누가 언제 청춘이 반짝반짝 솜사탕처럼 아름답기만 하다고 했나. 죽고 싶은 순간도 있고, 미완성의 감정들이 나를 추동해서 아주 기묘한 짓거리들을 하며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지만... 이 정도의 귀결이 보편적 청춘인가? 나와 주변인의 청춘에 그런 허무주의가 없었음이 단순히 우리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래 뭐 그랬나보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비릿한 것만이 청춘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야말로 진짜 청춘이고 다른 반짝거리는 영화들은 마치 가짜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커팅된 보석의 일면처럼 다양한 청춘이 있다. 이 영화는 그 중 하나를 너무나 잘 포착했을 뿐이다. 에너지는 아름다웠으나, 그 에너지 뒤에 어떤 사상의 결여가 있는가 생각하면 이 영화가 편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마지막 꼭 해두고 싶은 말은 결코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라는 박경리 선생님의 말을 생각하며 역시나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거 내 청춘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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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그림자> 줄거리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이지만 이 시기에는 출신지로 예술가를 칭하기도 했다. 그의 출생지는 카라바조가 아닌 밀라노이지만 페스트를 피해 카라바조에서 잠시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므로 그의 출생지는 밀라노이나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 메리시, 즉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가 된다. 하지만 이 이름은 너무 길다 보니 그는 어느샌가 '카라바조'라 불린다. 영화에서도 그는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불리기도 하지만 카라바조라 불리는 일이 빈번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인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불리지 않고 '카라바조'로 더 빈번하게 불리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있어 지명인 '카라바조'로 불리게 됐다는 추측이 존재한다. 물론 이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이 당시 남성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던 흔한 이름이었기에 동시대의 다른 이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카라바조'라 불렸을 수도 있다.
그의 그림은 동시대의 그림과는 다르게 어두운 배경에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비를 이용하여 그림 속 형상에 극적인 효과를 보여준다. 이런 카라바조의 기법은 테네브리즘이라 일컫는 17세기 양식의 기원이 되었다.
어둠으로 존재하는 그림자
영화는 카라바조가 살인죄로 인해 로마를 떠난 뒤를 보여주는데, 교황청에서 그의 사면을 판가름하기 위해 조사를 하며 그의 행적을 좇는다. 우리는 조사관과 함께 그의 삶을 파헤쳐 나간다. 그 과정에서 보게 된 카라바조의 삶은 방탕하며 폭력적이고 오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거리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고,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해 여러 번 재판대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카라바조의 그림을 사랑하는 권력에 의해 그의 죄는 여러 번 눈 감아진다.
조사관은 늘 카라바조의 발아래 있는 그림자가 되어 그의 삶을 샅샅이 살핀다. 이런 조사관의 평가는 가차없다. 그를 감싸주던 가문들, 종교인들 역시 타락했다 비난하고 성인들을 종교의 엄숙함과는 맞지 않게 묘사한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 타락을 재촉한다 말한다.
우리를 집중시키는 빛
카라바조의 문란한 삶은 결국 그를 도피의 길로 이끌었고 끝끝내 젊은 나이에 죽게 만들었지만, 그는 이런 거리의 삶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부분으로는 극명한 명암 대비도 있지만 인물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매춘부, 노숙자 등을 자신의 모델로 세우며 그의 그림 속 성인들로 묘사한다. 그들에게서 삶의 괴로움과 고통을 읽어내고 더 나아가 성인들의 고뇌와 역경을 본 것이다.
삶의 고통과 시련, 그리고 실제 하는 현실에서의 죽음을 바로 옆에 둔 카라바조는 그것을 그의 그림에 담길 주저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 위험하다 평했지만 당대 많은 귀족들과 심지어 종교인인 추기경까지 그의 그림에 매혹된다. 교회에서 거절당한 그림들은 불태워지기는커녕 나오는 족족히 다른 이들에게 팔려 나갔고, 불경하고 방탕한 그림이라 칭해지면서도 동시에 아름답고 강렬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조사관 역시 위험한 그림이라 평하면서도 그의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한다. 위험한 그림이라는 평가는 신성모독적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를 부정하다 여기는 이 조차도 매혹시킬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매혹시키는 그림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카라바조의 방탕한 삶과 그의 예술적인 그림을 보여주면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해서 그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지, 카라바조의 작품도 그의 죄로 봐야 할지에 대해 물어보는듯하지만 끝에 가면 이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가 사면은 잊고 그가 무질서한 삶 속에서 찾아낸 성인들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들에 매료된다. 관객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보며 미술관에서 몇 줄의 문장으로 적혀있는 설명만으로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를 통해 그의 삶을 몇 개의 작품과 함께 훑어보다 보면 어느 순간 카라바조의 작품에 빠져들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카라바조의 그림자>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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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의 씁쓸한 뒷면
이 글은 영화 [판의 미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기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혼자서 책조차 읽을 수 없었습니다. 받아쓰기는 늘 30~40점을 오갔죠. 엄마는 속이 터져 한글 개인 과외라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속 편한 아빠는 그런 거 다 때 되면 한다며 저를 품에 안고 파란 물고기가 바다로 간 이야기를 서른마흔다섯 번째로 읽어주셨죠.
딸이 드디어 한글을 깨우친 그날. 아빠는 신이 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제게 동화책 다섯 권을 선물해 주셨고 그 책은 부부 싸움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그림보다 글자가 많은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동화의 실제 모습. 그러니까 팥쥐와 팥쥐 어머니의 알고 싶지 않은 결말이 담겨있는 '잔혹동화'였기 때문입니다. (참고 1)
덕분에 저는 생애 최초로 받은 조기 교육의 결과 동화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게 되었고 산타 따윈 없다는 것을 너무도 일찍 알게 된 시니컬한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사준 동화책에서 아는 글자가 나왔다며 환호성을 치는 저를 보며 쟤를 어쩌누.라는 말을 늘 하셨었는데. 결국 이렇게 커 버리고 말았죠.
영화 [판의 미로]는 스페인 전쟁(내전) 상황에서 오필리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제 겨우 한글을 깨친 제가 읽은 진짜 동화처럼 잔혹하고 또 잔인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기이함과 신비함이 섞여 정말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죠.
영화 전체가 암울하고 어둡지만 오필리아의 환상과 현실의 대비로 인해 더더욱 아름답고 슬픈 영화입니다.
이게 어찌 15세란 말이요
나도 무섭다고요.
사진출처:구글 YTN Science/익숙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개봉 당시,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였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동화 같은 분위기의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했기에 많은 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을 방문했죠. 그 결과 개봉관마다 학생이고 보호자고 할 것 없이 울어 젖혔다는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동화의 기본 공식을 익히 알고 있죠.
착하고 순진한 주인공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만나며 시련을 겪지만 결국 극복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야 디폴트죠.(인어공주 제외)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큰 줄기 자체가 스페인의 내전 이야기를 하고 있죠. 한국 영화 [밀정]을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내부의 스파이가 있고 그를 통해 정보를 얻어 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이야기가 주가 되죠. 그 혼란 속에서 어린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와 낯선 환경 속에 있게 되고. 그 안에서 만난 요정들과 작고 큰 모험을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동화에 나오는 "의붓"이라는 단어가 붙은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대위는 그 수위를 이미 진작에 넘어버린, 너무도 잔인한 사람입니다. 의심 하나만으로 멀쩡한 사람을 활자 그대로 때려죽이는.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뱃속의 아들만을 사랑하는 남자입니다. 고지식하고 자신의 명예를 누구보다 생각하는 그런 자존심 밖에 남지 않은 사람 말입니다. 그가 벌이는 살인 혹은 살육의 행각은 지금의 제가 보아도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오필리아의 모험 속에 나오는 괴물들 마저 기괴하기 짝이 없죠. 콩쥐팥쥐에서 나왔던 두꺼비는 귀여울 정도로 험악하게 생긴 두꺼비와 오물은 물론. 모든 아이들을 울리기 충분했던 그 "손바닥 괴물"까지 나옵니다. 요정이 잡아먹히는 건 뭐 말할 것도 없죠. 저는 정말 이걸 다 오필리아가 겪었다면 다시 기억을 찾아 공주가 된다 해도 PTSD에 걸릴 것이라는 걱정이 더 앞섰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제가 어릴 적 접했던 동화의 진짜 모습, 혹은 숨겨진 동화의 잔혹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진 달의 앞면이 아닌 숨겨졌던 달의 못생긴 뒷모습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우리가 몰랐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 영화는 그런 동화나 판타지가 가진 아름다움을 걷어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동화를 잃어버린지 오래인 어른들 틈바구니의 오필리아를 통해서 말이죠.
물론 배급사는 진짜 반성(?) 해야 합니다. 15세라뇨.
제가 보면서 먹던 딸기가 목에 걸렸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기예르모 델 토로, 세계관 최강자
역시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사진 출처:구글 etoland/이걸 디즈니가 받아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제겐 팀 버튼 감독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입니다. 음울하고 어둡죠.
제가 색깔과 냄새로 이 두 감독을 구분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팀 버튼 감독은 총천연색에 가깝고, 녹기 시작한 눅진한 사탕에 가깝습니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텁텁함이 있죠.
그에 반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달빛에 비치는 물체의 그림자 같은, 무언가 생명력이 빠져 가는 죽음과 삶 그 경계에 가깝습니다. 대충 꿈도 희망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덕후들에겐 늘 시련이 존재합니다. 이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그들의 유니버스로 올 수 있는 초대장을 꾸준히 날렸죠. 기괴하지만 각인되기 쉬운 그들의 예술세계는 이제 그들의 이름을 딴 장르로 기억이 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원더랜드가 되었습니다.
기예르모 감독의 취향(?)은 괴수물이었습니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취향을 심하게 타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재능이 점점 영화 안에서 발휘되는 것을 보는 맛이 있는 감독이었죠. 다른 세계, 혹은 차원에서 불러들인 것 같은 생명체가 튀어나올 때마다 저는 환호성을 지른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감독 특유의 감성을 제가 좋아하나 봅니다.
이 영화의 판(Pan)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염소(혹은 양)가 악마 혹은 나쁜 기운을 불러오는 장난의 정령 같은 느낌의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로테스크 한 (혹은 쏘우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해 낸 감독을 보며 저는 또 한 번 내적 댄스를 춰야 했죠.
그의 또 다른 영화인 shape of water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와 합쳐졌기 때문에 더더욱. 저는 이 불행한 결말과 크리처를 사랑하는 감독에게 홀라당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저랑 똑같이(?) 음울한 동화를 보고 자랐지만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고. 저는 그냥 덕후가 되었네요.
이게 나라냐.그래서 결말은 해피엔딩인가요?
꼭 해피엔딩 이어야 하나요.
사진 출처:구글 뉴스 포인트/오필리아 너무 사랑스러움. 드레스 입었을 때 너무 깜찍했다.
오필리아는 마지막에 죽습니다. 의붓아버지가 될 뻔했던 대위가 쏜 총에 맞아서.
그리고 그녀의 피가 지하세계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 닿아 그녀는 지하 세계 공주로 있었던 기억을 되찾고 백성들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이 영화의 끝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녀는 죽은 상태죠.
결말의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필리아가 실제 지하 왕국의 공주였다는 사람들과 전쟁 때문에 힘들었던 아이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만든 판타지일 뿐이라는 부류로 말입니다.
저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오필리아는 아직 아이입니다. 엄마의 죽음을 비롯한 자신 주변에서 생긴 많은 변화들이 아이에겐 방어 체계를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것이 극대화된 것이 자신이 만든 판타지 속의 세계인 것이죠.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고 목소리를 냈다 해도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이 조그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들은 정보를 통합해 그 세계 안으로 자신이 숨어버린 것이죠.
그렇기에 결말은 더더욱 안타깝고 아픕니다.
오필리어는 고통만 가득한 기억을 안고 죽어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죠. 이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작은 아이는 살아있는 동안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관을 찾았던 아이들이 울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공주님이 죽어버렸으니. 자신들에겐 익숙한 결말이 아니었던 것이죠. 해피엔딩이 디폴트가 아닌 동화는 그들에겐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테니까요.
슬프고 아름답고. 그럼에도 이해가 간다.
동화가 당신을 부를 때.
한글을 제대로 쓰지도, 읽지도 못하던 아이는. 잔혹 동화를 읽고 나서 더 잔혹한 세상을 조금은 더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도피하는 방법을 배워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오필리아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지금도 악착같이 동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제가 처한 현실이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아이의 모습으로 본 전쟁의 힘듦과 무서움을 잘 그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씁쓸함과 행복함이 공존하는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더욱 그러하죠. 이젠 오필리아도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판타지가 아닌 현실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말입니다.
참고 1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말 글이 그림보다 많은 책이었고 나는 내용보다는 내가 아는 글자를 찾아 읽기 바빴음. 근데 엄마의 입장에서는 다섯 살짜리 애가 "엄마 이거 젓갈!! 엄마 팥쥐가 젓갈!! 젓갈 되었대!!! 맞지!!"라고 하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그 말에 엄마는 아빠를 베란다로 쫓아냈다고 함.
참고 2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 중 크림슨 피크, shape of water, 판의 미로 이 세 편을 가장 좋아함. 감독은 멕시코 사람이었나 그런데 우리나라 전래동화처럼 거기 민화? 도 장난 없다고 한다.
[이 글의 TMI]
1. 정형외과 갔다 옴. 의사 선생님이 운동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안 할 거면 병원도 오지 말라고 함.
2. 집 꾸미는 재미에 폭 빠짐. 아 물론 며칠 안 가겠지.
3. 패딩 찾아야 하는데. 까먹었다.
4. 택배가 하도 와서 이젠 나도 움찔움찔 놀랄 지경.
5. 오늘은 빨리 자야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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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병에 걸린 인물들의 허무한 결말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고 의지할 때가 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거나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일 수도 있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좋아하는 마음은 그 마음의 크기만큼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사람에게 긍정적인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의 반응을 살핀다. 이런 구도는 사랑을 하는 연인, 직장 생활의 인간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로에게 감정적인 접점이 있다면 서로 기대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적정한 선을 넘어가면 그것은 집착이 된다. 상대방의 대단한 점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 정도라면 괜찮지만, 그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고 오로지 자신만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것은 그 상대방에게 만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만 보고 가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줄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그런 위험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좁아진 시야는 자신에게 불행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영화
영화 <독전 2>는 많은 인물들이 한 인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야기다. 사실 몇 년 전 개봉한 <독전> 1편 속의 인물들도 이선생이라는 미스터리 한 인물에 집착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선생이 누구인지라는 미스터리를 관객에게 던지면서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이선생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게 구성했었다. 마약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선생은 경찰에게는 소탕하고 싶은 갱단의 두목이고, 다른 범죄자들에게는 한 몫챙길 수 있는 기회를 줄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다. 이번 2편에서는 전편의 인물들이 대부분 재등장하면서 이선생을 향한 집착이 엄청난 광기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건 1편과 마찬가지로 형사 원호(조진웅)와 락(오승훈)이다. 여기에 브라이언(차승원)이 다시 등장하고, 큰 칼(한효주)이 새롭게 소개되면서 영화에 긴장을 불어넣으려 애쓴다. 이 중심인물 네 명의 공통점은 모두 이선생을 찾는다는 것이다. 사실 1편은 형사 원호의 수사로 시작되어 이선생은 누군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는 이야기다. 다양한 인물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섞이면서 벌어지는 난장 같은 상황들이 영화 끝까지 시선을 끌었고, 약간 모호하게 끝나는 결말부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의미에서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번 속편은 1편의 클라이맥스가 정리되고 꽤 시간이 흘러 보이는 마지막 결말 장면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원호는 여전히 진짜 이선생을 찾고, 락과 브라이언 그리고 큰 칼까지 합류하면서 이선생을 찾는 모든 인물이 서로 속고 속이는 대결을 벌인다. 이 정도면 도대체 이선생이 뭐길래 그렇게 모든 인물들이 매달리는지 질문을 하게 된다. 전편에서는 집착이라는 느낌보다는 집요한 추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속편으로 이어지면서 각 인물들이 모두 이선생에 너무 집착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선생이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물일까. 원호가 이선생을 잡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인물 락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이선생을 찾는다. 반면에 이 영화의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언과 큰 칼은 이선생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마약에 대한 사업권이나 부의 축적이라고 하기엔 그 동기가 너무 약하다. 게다가 여러 가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선생을 찾으려 애를 쓰는 인물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썬생은 누구인가
영화는 진짜 이선생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없었다. 영화는 그를 마치 특별한 인물인 것처럼 보여주려 하지만 그에겐 어떤 카리스마나 능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의 긴장이 가장 고조되어야 하는 부분에서 가장 긴장감이 떨어진다. 주요 인물인 락과 이선생의 대면은 분명 특별한 장면이겠지만 복수의 통쾌함이나 시원함을 느낄 수 없다. 이건 이선생을 추적하는 각 인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각 인물들은 적당히 무능하고 과하게 집착한다.
<독전 2>가 가장 실패한 부분은 새로운 악당인 큰 칼의 이미지다. 1편의 진하림(김주혁)이나 보령(진서연) 같은 강렬한 캐릭터를 추가하려 투입했지만, 큰 칼을 연기한 한효주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고 그저 이선생에 집착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캐릭터로 소비되고 만다. 그는 브라이언이나 락, 원호를 위협하긴 하지만 크게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퇴장하고 만다. 이선생과 직접적인 연결점을 가지고 있는 빌런치고는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이썬생은 실제로 많은 사람을 돕는다. 새로운 마약을 만드는데 돈과 사람을 지원하면서 자신의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이선생은 그를 궁금하고 추종하는 수많은 범죄자들을 양산했다. 그들은 이선생을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 마음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선생의 뒤를 따라가 집착의 모습으로 변했다. <독전 2>는 그렇게 집착하다 망가져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는 영화다.
영화는 1편에서 어느 정도 열어두었던 결말을 완전히 닫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선생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그 수많은 희생을 했을까.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은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아무도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뒷맛도 그렇게 좋지 않게 되어버렸다. 1편이 끝나고 나서 많은 살람들이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만들었고 여러 번 관람하면서 추가적인 흥행을 할 수 있었지만 이번 속편은 그렇지 못했다.
영화 <독전 2>는 1편의 박해영 감독 대신, 백종열 감독이 연출했다. 그는 1편을 보고 나서 채워지지 않은 이야기를 새롭게 채워 넣었지만 오히려 각 인물들을 모두 집착병에 걸린 사람들로 만들었다. 또한 실제 이선생을 공개하는 강수를 뒀지만 그마저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극적인 긴장감도 전편에 비해 많이 떨어지면서 스타일리시한 영상만이 유일한 장점이 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적정한 선을 넘는다. 이선생을 애타게 찾던 인물들은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면서 전편에서 보여줬던 매력을 대부분 잃는다. 무엇보다 1편의 락 역을 맡은 류준열이 오승훈으로 교체되면서 배우가 만들어냈던 특유의 아우라가 많이 사라져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점도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유일하게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점은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영화지만,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큰 손실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1편의 성공을 생각하면 무척 아쉬운 결과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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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속 감춰진 ‘WOW’ 한 인생 스토리
정말 ‘WoW’한 인생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제목 그대로 평범하지 않은 질환을 가진 한 청년의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 속 비범한 인생 스토리를 그린다. 가족도 몰랐던 이 청년의 삶은 저마다 고통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큰 의미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평생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게임을 즐기다 세상을 떠난 그의 인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년의 이름은 두 개다. 실제 삶은 마츠, 그리고 온라인 게임 내에서는 이벨린으로 불린다. 마츠는 태어나면서 뒤셴이란 근육 질환을 가진 채 태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이 더디고 자주 넘어지는 건 물론, 휠체어에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었으니 바로 ‘WoW’였다. 가족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있었던 그는 안타깝게도 25살로 생을 마감한다. 부모는 아들의 부고를 그가 생전 운영하던 블로그에 올리기로 하고, 아버지 로버트는 글 하단에 메일 주소를 남긴다. 이후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로버트의 메일함에는 마츠를 향한 고마움과 명복을 비는 소식이 도착하고, 이로 인해 가족들은 아들의 또 다른 인생을 알게 된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첫째는 손만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 둘째는 현실 세계가 아닌 온라인, 그것도 게임 내에서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마츠이자 이벨린의 믿기 힘든 삶을 오롯이 영상으로 옮기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두 고정관념에 쌓여 있는지를 확인시킨다. 그리고 주인공의 온·오프라인 삶 속 비범함을 일깨운다.
일단 마츠의 삶은 암울하다. 점점 죽어가는 근육처럼 마츠의 인생도 점점 행복을 잃어간다. 하지만 ‘WoW’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뒤바뀐다.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말처럼 그는 온라인에서는 실제 모습이 아닌 다른 역할로 살아갈 수 있다. 마치 <아바타>의 제이크(샘 워싱턴)가 아바타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자유롭게 걷고 또 다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그가 온라인상에서 탐정 이벨린으로 살아가면서 페이커처럼 영웅적 성과를 올리는 것에 주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함께 게임을 하는 유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했다. 게임을 통해 빚어진 부모와의 갈등을 봉합해 주고, 자폐증 아들과 소원해진 엄마의 고민을 듣고 이를 도움도 준다. 마치 대화하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말했던 이벨린의 고마움은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 그만큼 마츠는 이벨린이었을 때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친구를 사귀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긍정적 요소만 나오는 건 아니다. 마츠 또한 인간이기에, 자신과 달리 평범하게 사는 온라인 친구들에게 시기와 질투, 자격지심을 얻는다. 이로 인해 이간질을 서슴없이 하고,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불편한 행동을 일삼는다. 점점 죽음을 향해 가는 실제 삶의 고통이 온라인으로 번진 것. 이때 게임 속 친구들은 자신들이 받은 도움만큼 그에게 손을 내민다. 물론,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는 등의 과정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 이들은 다시 이전의 관계를 회복한다. 마치 현실 속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런 마츠의 숨겨진 인생을 좀 더 흥미롭게 따라가기 위한 형식도 눈에 띈다. 감독은 실제 가족의 인터뷰와 홈비디오 영상을 통해 가족이 생각하는 마츠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게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영상 구현과 마츠의 블로그 글, 온라인 친구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벨린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는 실제 그의 삶을 보여준 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삽입 후 게임에 접속해 몰랐던 이벨린의 생각을 엿보고, 감정을 느끼게 한다. 형식 자체로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나눠 표현한 건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하며 좀 더 마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마츠의 숨겨진 인생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거시적인 성과의 기폭제가 된 건 아니다. 그냥 한 청년의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삶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제목에 낚였다고 하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있을 듯하다.
마츠는 이벨린으로 살면서 평범한 현실 속 자신을 온라인 상에서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든 온라인이든 그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다는 걸 영화는 오롯이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모습을 비범하다고 표현한 건 앞서 말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의해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장애인으로서 이런 삶을 살 수 있구나, 너드 커뮤니케이션으로써 활용되는 게임에서 이런 일들일 벌어지는구나 하는 놀라운 그러나 편협한 생각들. 이 생각들로 마츠의 삶이 비범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하지만 비범함이 평범함으로 바뀌는 그 순간, 비로소 이 작품이 가진 비범함을 알 수 있을 듯하다.사진 제공: 넷플릭스
평점: 3.0 / 5.0
한줄평: 온라인에서도 인생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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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퀸스 갬빗
퀸스 갬빗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즌1 1-7화. 한꺼번에 몰아서 다 봤다.
앤 마가렛을 닮은 베시 하먼은 8살 무렵, 교통사고로 엄마가 사망하면서 고아가 된다. 시즌1에서 베시의 개인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아주 짧게 보여주는 플래시백으로 추측하면, 베시의 엄마는 정상적으로 결혼한 부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베시의 아빠는 등장하지 않고, 연락할 사람도 없다고 했다. 베시는 두 가지 강렬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가 어릴 때 한 남자가 찾아와 엄마에게 애원하는 장면, 엄마가 베시를 데리고 어딘가로 가서 어떤 남자에게 애원하는 장면이다. 이때 두 남자는 같은 인물이며, 베시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베시의 엄마는 마주오는 트럭과 정면 충돌하면서 사망하는데, 이는 엄마의 자살이었고, 이 사고에서 베시는 천행으로 살아남는다. 사고가 발생하기 직전, 베시 엄마는 베시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베시 엄마는 베시와 함께 자살할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겼으나 베시는 살아남았다. 이 트라우마는 베시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이 드라마는 베시의 성장 드라마이면서, 서양 장기인 '체스' 이야기이자, 1960년대 동서냉전 시대와 미국 문화를 잘 드러내고 있다. 베시가 체스 천재라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베시의 엄마 앨리스 하먼은 코넬 대학에서 '단항식 표현과 대칭 표현'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학 명문대학인 코넬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라면 촉망받는 젊은 수학자였을텐데,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시즌1에서 베시의 엄마 앨리스의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시즌1을 보고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이 드라마에는 나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즉 베시 주변 인물은 지극히 평범하며, 상식적 인물이고, 친절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들이다. 보통은, 주인공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고난에 해당하는 사건과 악역을 등장시키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악역을 맡는 특별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인물 사이의 갈등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장면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악역이나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베시가 체스를 두기 때문으로 보인다. 체스 자체가 두 사람이 만나서 대립하는 것이고, 날카로운 두뇌 싸움이며, 상대방과 자신과의 심리전이어서 따로 악역이나 사람 사이의 갈등을 설정하지 않아도 좋고, 오히려 그런 장치가 체스 경기를 치르는 베스에게 방해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졸지에 고아가 된 베시는 고아원에 입소하고, 그곳에서 약 5년 정도 생활한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의 미국 고아원 풍경은 어떤 면에서 부럽고, 어떤 면에서 끔찍하다.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도 고아원이 나오는데, 19세기 영국고아원은 끔찍하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환경이지만, 베시가 생활하는 고아원 역시 따뜻하고 아늑한 가정집과는 거리가 멀다.
베시는 고아원 입소 첫날부터 '비타민'을 의무적으로 받아 먹는다. 모든 원생은 '비타민'을 먹는데, 두 개의 알약 가운데 하나가 '진정제'였다는 건 나중에 밝혀진다. 고아원 운영자와 관리자들은 진짜 비타민과 함께 진정제를 먹이는 것에 어떤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이는 마치 19세기 영국 고아원에서 아기들에게 럼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유모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칭얼대거나 울지 않고 긴밤을 깊고, 오래 잠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발견한 방법이었으므로, 영아들은 치명적인 알콜중독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베시가 머문 고아원 역시 그 정도는 약했지만 어린 여자아이들 가운데 약물중독에 이르는 경우가 나타났고, 베시도 그런 아이였다. 베시의 고아원 생활은 짧고 건조하게 묘사되고 있다. 베시는 고아원에서 두 명을 만나는데, 첫날 알게 된 '졸린'과 건물관리인 '샤이벌'이 그들이다.
두 사람은 베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시즌1에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샤이벌'은 시즌 끝부분에서 사망한다.
베시는 두 사람을 만나면서 자기에게도 '가족'이 생겼다는 걸 어렴풋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멀리 떨어져 있긴 해도,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신적으로 큰 위안이 된다는 걸 베시는 느낀다.
수업시간에 수학문제를 가장 먼저 풀고 조용히 앉아 있던 베시에게 선생님은 칠판지우개를 털고 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베시는 샤이벌을 만나게 되고, 샤이벌이 혼자 체스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체스가 마음으로 들어온다. 나중에 베시가 밝히지만, 8살 베시의 마음은 황폐하고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움으로 괴로운 상태였다.
그때 흑백의 체스판이 눈에 들어왔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체스에 마음을 빼앗긴다. 무언가 몰두하고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베시에게 체스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베시는 당돌하게 할아버지 샤이벌에게 체스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고, 샤이벌은 무뚝뚝하면서도 살갑게 베시에게 체스를 가르쳐준다.
두 사람은 체스를 두면서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위로와 위안의 대상이 된다. 샤이벌은 노인이고, 고아원의 건물관리자로 일하면서 시간이 조금 빌 때마다 지하에 내려와 혼자 체스를 두는 노인이다. 샤이벌에게는 가족이 없을까. 처음부터 가족이 없었거나, 있어도 인연을 끊은 채 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장례식에 가족이 참석하지 않았으니.
베시 자신도 체스에 천재적 재능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베시가 체스에 끌린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선택이었다. 베시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프로 체스선수가 되는데, 베시가 대학에 진학해 수학을 전공했다면 엄마처럼 수학자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크다.
짧은 시간에 샤이벌을 이긴 베시는 샤이벌의 도움으로 근처 고등학교 체스선수들과 시합을 갖고 그들을 모두 이긴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베시는 과거의 불행하고 외로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체스에 있다고 믿는다.
영웅신화에서 영웅의 탄생에는 반드시 고난과 멘토가 존재한다. 베시는 어려서 부모를 잃는다는 설정은 고전에서 이미 수없이 다룬 클리셰다. 콩쥐도, 장화와 홍련도, 심청도 어머니를 어려서 잃는다. 이들이 '여성'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드라마를 페미니즘 영화로 보는 건 지나치지만,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이 겪는 고난은 거의 모든 집단과 국가에서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사회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어린 베시가 고아가 되고, '대체 가족'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졸린'과 '샤이벌'인데, 이들은 각각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상징한다. 졸린은 같은 여성으로, 몇 살 많은 언니지만, 일찍 고아원에 들어와 베시에게 고아원 멘토가 되고, 친구처럼 지내며, 때론 엄마처럼 베시를 돌봐준다. 샤이벌은 할아버지면서, 아버지다.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샤이벌은 베시의 재능을 드러내도록 돕고, 베시가 더 넓은 세상에 나갈 수 있는 기본을 갖추도록 돕는 역할이다. 즉, 고아원 안에서는 졸린이, 바깥에서는 샤이벌이 베시의 세계를 구축하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베시가 체스로 성공하고, 졸린을 만나서 샤이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둘이 샤이벌의 장례식에 참석해 베시가 샤이벌이 머물고, 자신이 체스를 배웠던 그 지하실에서 샤이벌이 스크랩한 자기의 신문기사를 보면서 오열하는 장면은, 누가 진짜 아버지인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베시는 열 세살에 입양된다. 베시의 부모는 평범한 사람이고, 다른 아이는 없어서 베시가 유일한 자식인데, 청소년 고아를 입양한 이유는 관객이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설정했다. 베시의 양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매우 바쁜 사람이고, 처음부터 입양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인물이다. 베시를 입양한 사람은 양엄마인데,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아이를 입양해 돌보거나 대화를 나누면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가 있다. 그녀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으나 무대공포증이 있어 무대에 서지 못한 좌절감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이 양부모의 역할은 베시가 고아원에서 나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 보호자가 되는 것이다. 베시는 학교에 다니며 스스로의 힘으로 체스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체스를 잘 두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양엄마를 설득해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서 양엄마와 둘이 체스대회를 다니며 돈을 번다. 이때는 이미 양아버지는 먼 곳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한 이후여서, 베시와 양엄마는 경제적인 문제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베시가 체스대회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양엄마는 적극적으로 베시의 매니저가 되어 텍사스주 뿐아니라 다른 주까지 옮겨다니며 각종 대회에 출전해 상금을 쟁취하며 승승장구, 잘 나가는 체스 챔피언과 매니저로 활동한다.
그러다 베시의 양엄마는 어느날 갑자기 호텔에서 사망하는데, 이 부분은 드라마의 진행에서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마 양엄마의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갑자기 사라지도록 만든 것인데, 어색한 부분인 건 분명하다. 양엄마의 퇴장은 베시가 이제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개척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베시의 성공은 빠르게 그려진다. 고아원 생활, 입양은 스케치로만 보이고, 베시가 체스로 승승장구하면서 미국챔피언십, US오픈 같은 큰 대회를 치르며 전국적 인물로 등장하고, 마침내 체스세계 챔피언인 러시아의 보르고프와의 대전을 향해 질주한다.
이 시기의 세계 체스는 러시아가 단연 최고 수준이고,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이 그 뒤를 따르고 있으며, 미국은 변방이었다. 바둑으로 치자면 한국과 중국이 최고 수준이고 일본이 그 아래,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가 변방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런 체스의 변방에서 어느 이름도 없던 한 여성이 혜성처럼 나타나 세계챔피언을 꺾고 새로운 챔피언이 되는 건,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며, 불우하게 성장한 소녀가 스타가 되는 헐리우드식 '스타 탄생'의 줄거리와 같다.
시즌1의 줄거리만 보면, 스타 탄생과 영웅 신화의 클리셰가 분명하게 보이는데,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시즌1에서 보인 것은,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가 뻔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시즌1의 후반에서 고아원 친구이자 언니인 졸린이 나타나고, 베스는 챔피언이 되어 정점에 이른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요소는 주인공 베시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스타 탄생'의 줄거리로 관객의 대리만족을 충족시키고, 주인공인 배우 안야 테일러조이의 매력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악한과 악당이 나오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히 재미있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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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틴 스튜어트 버젼의 다이애나는? 영화 <스펜서>
- 스펜서 (SPENCER, 2021)
장르 : 영국·미국, 드라마 │ 감독 : 파블로 라라인
출연 : 크리스틴 스튜어트(다이애나), 잭 파딩(찰스왕세자), 샐리 호킨스(매기) 외
등급 12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6분
이 영화의 제목은 왜 스펜서인가
금발에 파란 눈, 훤칠한 키에 감각적인 패션, 수많은 파파라치. 엄숙함이 지배하는 영국 왕실에서 헐리웃 스타처럼 반짝이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비운의 왕세자비, 다이애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사람들의 입에는 지금도 다이애나가 오르내린다. 패션의 아이콘으로, 영국 왕실의 이단아로, 그리고 만인이 사랑해마지않을 친숙하고 소탈한 성격의 한 여인으로. 그런 다이애나를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했다기에, 한 걸음에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다이애나의 일대기를 다룰 줄 알았던 영화는, 뜬금없이 크리스마스이브에서 시작한다. 이미 두 아들을 낳아 길렀고, 남편의 오랜 외도를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하는 시댁 식구들을 견디며 행복을 연기해야 하는 시점의 다이애나다. 동화 같았던 세기의 결혼식으로부터 너무나 멀찌감치 떨어진 시점을 다루고 있는 것에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몰입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아니라 ‘스펜서’니까. 왕실의 며느리이기 이전에 고유한 인간이었을 다이애나 스펜서를 우선적으로 조명해준 덕에, 그녀가 겪었을 고통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었다.
공주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고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날이 크리스마스였던 걸까. 영화는,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 날조차 살얼음 같은 불행을 걷고 있는 다이애나를 비춘다. 남편과 싸우고, 자해를 하고, 변기에 몸을 구부려 음식물을 토해낸다. 그리고는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해 ‘보이는’ 사진을 찍는다. 국민들에게 따뜻한 왕실의 크리스마스를 보여줘야 하니 그에 걸맞게 몸무게도 1.4kg 찌워야 한단다. 왕세자비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왕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반복의 일상. 정해진 옷을 입고, 몸무게를 통제받고, 마음대로 궁전 밖을 나가거나 개인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삶. 그 억압에 짓눌린 다이애나의 크리스마스는 당연히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앤 불린’의 귀신과도 마주한다. 오명을 뒤집어쓰고 목이 잘려 처형당한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그 앤 불린 말이다. 그녀는 왕실의 일부이면서도 영원히 왕실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자신과, 왕과 결혼했지만 결국 왕에 의해 처형된 앤 불린을 동일시했던 모양이다. 앤 불린의 환영을 보기도, 자기 자신이 앤 불린이 되기도 하면서 영화는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의 다이애나를 보여준다. 불안이 극에 달했던 고작 3일간의 시간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촘촘한 줄거리가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이 두서없고 심란한 내면 상태를 편집증적으로 나열하는 방식 덕분에, 관객은 다이애나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궁전 밖에 있음을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왕자랑 결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재벌가에 시집가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릴까. 하지만 매일매일 값비싼 의상에 둘러싸여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단편적인 이미지에 불과할 것이다. 영화 말미, 다이애나는 자신을 옥죄던 비싸고 아름다운 옷 대신 야구모자를 뒤집어쓰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 KFC로 향했다. 궁전에는 일반 서민들은 맛보지도 못할 오케스트라와 최고급 요리가 즐비하지만, 굳이 다이애나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귀가 터지도록 떼창하는 대중가요나 KFC 치킨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것. 언제든 원하는 복장으로 원하는 음식을 먹으며 마음껏 넷플릭스를 봐도 되는 우리들의 이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고 행복이라는 것 아닐까.
우리가 사랑했던 건 스펜서
왕족들은, 언제나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며 그 성벽을 굳건히 유지해왔다. 다이애나를 며느리로 들였던 영국의 윈저 가문 역시 자신들의 이미지를 엄격히 통제하며 그 위엄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건 더는 왕이 필요치 않은 이 자유평등의 시대에 걸맞는 방식이 아니었다. 다이애나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단연 다이애나가 그 틀을 깨고 불행한 왕세자비에서 걸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럼없이 국민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에이즈 환자들의 손을 잡거나 노숙인을 찾는 등 친근하고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테다.
<실제 다이애나와 두 왕자들>
그리고 이는 다이애나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두 왕자를 통해 묻어나는 중이다. 어머니의 발취를 따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운동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는 왕자들의 발자취를 보노라면, 다이애나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두 왕자에게도 아마, 경호원도 대동하지 않고 켄터키 치킨을 먹던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기억이 아니었을지.
스펜서의, 스펜서에 의한, 스펜서를 위한
그녀가 원하던 방식대로 기억해주고 싶은 바람을 담아서인지, 영화는 샤넬백에 펌프스를 신고 있던 불안한 다이애나에서 시작해, 야구모자에 점퍼를 입은 채 웃는 다이애나로 마무리된다. 그녀는 너무나 고고해서 깨질 것 같은 존재가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존재였다. 또, 행복해 보이고 수동적인 동화 속 여성상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소신 있게 살아간 한 여성이기도 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건 왕세자비 타이틀과는 무관한 그녀의 인품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를 영원히 ‘스펜서’로 기억해주고 싶다.
글쓰는 우두미
브런치 https://brunch.co.kr/@deum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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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그림자> 줄거리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이지만 이 시기에는 출신지로 예술가를 칭하기도 했다. 그의 출생지는 카라바조가 아닌 밀라노이지만 페스트를 피해 카라바조에서 잠시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므로 그의 출생지는 밀라노이나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 메리시, 즉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가 된다. 하지만 이 이름은 너무 길다 보니 그는 어느샌가 '카라바조'라 불린다. 영화에서도 그는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불리기도 하지만 카라바조라 불리는 일이 빈번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인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불리지 않고 '카라바조'로 더 빈번하게 불리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있어 지명인 '카라바조'로 불리게 됐다는 추측이 존재한다. 물론 이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이 당시 남성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던 흔한 이름이었기에 동시대의 다른 이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카라바조'라 불렸을 수도 있다.
그의 그림은 동시대의 그림과는 다르게 어두운 배경에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비를 이용하여 그림 속 형상에 극적인 효과를 보여준다. 이런 카라바조의 기법은 테네브리즘이라 일컫는 17세기 양식의 기원이 되었다.
어둠으로 존재하는 그림자
영화는 카라바조가 살인죄로 인해 로마를 떠난 뒤를 보여주는데, 교황청에서 그의 사면을 판가름하기 위해 조사를 하며 그의 행적을 좇는다. 우리는 조사관과 함께 그의 삶을 파헤쳐 나간다. 그 과정에서 보게 된 카라바조의 삶은 방탕하며 폭력적이고 오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거리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고,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해 여러 번 재판대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카라바조의 그림을 사랑하는 권력에 의해 그의 죄는 여러 번 눈 감아진다.
조사관은 늘 카라바조의 발아래 있는 그림자가 되어 그의 삶을 샅샅이 살핀다. 이런 조사관의 평가는 가차없다. 그를 감싸주던 가문들, 종교인들 역시 타락했다 비난하고 성인들을 종교의 엄숙함과는 맞지 않게 묘사한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 타락을 재촉한다 말한다.
우리를 집중시키는 빛
카라바조의 문란한 삶은 결국 그를 도피의 길로 이끌었고 끝끝내 젊은 나이에 죽게 만들었지만, 그는 이런 거리의 삶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부분으로는 극명한 명암 대비도 있지만 인물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매춘부, 노숙자 등을 자신의 모델로 세우며 그의 그림 속 성인들로 묘사한다. 그들에게서 삶의 괴로움과 고통을 읽어내고 더 나아가 성인들의 고뇌와 역경을 본 것이다.
삶의 고통과 시련, 그리고 실제 하는 현실에서의 죽음을 바로 옆에 둔 카라바조는 그것을 그의 그림에 담길 주저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 위험하다 평했지만 당대 많은 귀족들과 심지어 종교인인 추기경까지 그의 그림에 매혹된다. 교회에서 거절당한 그림들은 불태워지기는커녕 나오는 족족히 다른 이들에게 팔려 나갔고, 불경하고 방탕한 그림이라 칭해지면서도 동시에 아름답고 강렬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조사관 역시 위험한 그림이라 평하면서도 그의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한다. 위험한 그림이라는 평가는 신성모독적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를 부정하다 여기는 이 조차도 매혹시킬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매혹시키는 그림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카라바조의 방탕한 삶과 그의 예술적인 그림을 보여주면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해서 그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지, 카라바조의 작품도 그의 죄로 봐야 할지에 대해 물어보는듯하지만 끝에 가면 이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가 사면은 잊고 그가 무질서한 삶 속에서 찾아낸 성인들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들에 매료된다. 관객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보며 미술관에서 몇 줄의 문장으로 적혀있는 설명만으로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를 통해 그의 삶을 몇 개의 작품과 함께 훑어보다 보면 어느 순간 카라바조의 작품에 빠져들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카라바조의 그림자>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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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의 씁쓸한 뒷면
이 글은 영화 [판의 미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기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에 혼자서 책조차 읽을 수 없었습니다. 받아쓰기는 늘 30~40점을 오갔죠. 엄마는 속이 터져 한글 개인 과외라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속 편한 아빠는 그런 거 다 때 되면 한다며 저를 품에 안고 파란 물고기가 바다로 간 이야기를 서른마흔다섯 번째로 읽어주셨죠.
딸이 드디어 한글을 깨우친 그날. 아빠는 신이 나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제게 동화책 다섯 권을 선물해 주셨고 그 책은 부부 싸움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그림보다 글자가 많은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동화의 실제 모습. 그러니까 팥쥐와 팥쥐 어머니의 알고 싶지 않은 결말이 담겨있는 '잔혹동화'였기 때문입니다. (참고 1)
덕분에 저는 생애 최초로 받은 조기 교육의 결과 동화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게 되었고 산타 따윈 없다는 것을 너무도 일찍 알게 된 시니컬한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사준 동화책에서 아는 글자가 나왔다며 환호성을 치는 저를 보며 쟤를 어쩌누.라는 말을 늘 하셨었는데. 결국 이렇게 커 버리고 말았죠.
영화 [판의 미로]는 스페인 전쟁(내전) 상황에서 오필리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제 겨우 한글을 깨친 제가 읽은 진짜 동화처럼 잔혹하고 또 잔인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기이함과 신비함이 섞여 정말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죠.
영화 전체가 암울하고 어둡지만 오필리아의 환상과 현실의 대비로 인해 더더욱 아름답고 슬픈 영화입니다.
이게 어찌 15세란 말이요
나도 무섭다고요.
사진출처:구글 YTN Science/익숙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개봉 당시,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였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동화 같은 분위기의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했기에 많은 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을 방문했죠. 그 결과 개봉관마다 학생이고 보호자고 할 것 없이 울어 젖혔다는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동화의 기본 공식을 익히 알고 있죠.
착하고 순진한 주인공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만나며 시련을 겪지만 결국 극복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야 디폴트죠.(인어공주 제외)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큰 줄기 자체가 스페인의 내전 이야기를 하고 있죠. 한국 영화 [밀정]을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내부의 스파이가 있고 그를 통해 정보를 얻어 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이야기가 주가 되죠. 그 혼란 속에서 어린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와 낯선 환경 속에 있게 되고. 그 안에서 만난 요정들과 작고 큰 모험을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동화에 나오는 "의붓"이라는 단어가 붙은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지만. 이 영화의 대위는 그 수위를 이미 진작에 넘어버린, 너무도 잔인한 사람입니다. 의심 하나만으로 멀쩡한 사람을 활자 그대로 때려죽이는.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뱃속의 아들만을 사랑하는 남자입니다. 고지식하고 자신의 명예를 누구보다 생각하는 그런 자존심 밖에 남지 않은 사람 말입니다. 그가 벌이는 살인 혹은 살육의 행각은 지금의 제가 보아도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오필리아의 모험 속에 나오는 괴물들 마저 기괴하기 짝이 없죠. 콩쥐팥쥐에서 나왔던 두꺼비는 귀여울 정도로 험악하게 생긴 두꺼비와 오물은 물론. 모든 아이들을 울리기 충분했던 그 "손바닥 괴물"까지 나옵니다. 요정이 잡아먹히는 건 뭐 말할 것도 없죠. 저는 정말 이걸 다 오필리아가 겪었다면 다시 기억을 찾아 공주가 된다 해도 PTSD에 걸릴 것이라는 걱정이 더 앞섰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제가 어릴 적 접했던 동화의 진짜 모습, 혹은 숨겨진 동화의 잔혹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진 달의 앞면이 아닌 숨겨졌던 달의 못생긴 뒷모습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우리가 몰랐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 영화는 그런 동화나 판타지가 가진 아름다움을 걷어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동화를 잃어버린지 오래인 어른들 틈바구니의 오필리아를 통해서 말이죠.
물론 배급사는 진짜 반성(?) 해야 합니다. 15세라뇨.
제가 보면서 먹던 딸기가 목에 걸렸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무서웠어요.
기예르모 델 토로, 세계관 최강자
역시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사진 출처:구글 etoland/이걸 디즈니가 받아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제겐 팀 버튼 감독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입니다. 음울하고 어둡죠.
제가 색깔과 냄새로 이 두 감독을 구분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팀 버튼 감독은 총천연색에 가깝고, 녹기 시작한 눅진한 사탕에 가깝습니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텁텁함이 있죠.
그에 반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달빛에 비치는 물체의 그림자 같은, 무언가 생명력이 빠져 가는 죽음과 삶 그 경계에 가깝습니다. 대충 꿈도 희망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덕후들에겐 늘 시련이 존재합니다. 이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고 우리에게 그들의 유니버스로 올 수 있는 초대장을 꾸준히 날렸죠. 기괴하지만 각인되기 쉬운 그들의 예술세계는 이제 그들의 이름을 딴 장르로 기억이 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원더랜드가 되었습니다.
기예르모 감독의 취향(?)은 괴수물이었습니다.
물론 장르의 특성상 취향을 심하게 타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재능이 점점 영화 안에서 발휘되는 것을 보는 맛이 있는 감독이었죠. 다른 세계, 혹은 차원에서 불러들인 것 같은 생명체가 튀어나올 때마다 저는 환호성을 지른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감독 특유의 감성을 제가 좋아하나 봅니다.
이 영화의 판(Pan)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염소(혹은 양)가 악마 혹은 나쁜 기운을 불러오는 장난의 정령 같은 느낌의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로테스크 한 (혹은 쏘우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현해 낸 감독을 보며 저는 또 한 번 내적 댄스를 춰야 했죠.
그의 또 다른 영화인 shape of water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와 합쳐졌기 때문에 더더욱. 저는 이 불행한 결말과 크리처를 사랑하는 감독에게 홀라당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저랑 똑같이(?) 음울한 동화를 보고 자랐지만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고. 저는 그냥 덕후가 되었네요.
이게 나라냐.그래서 결말은 해피엔딩인가요?
꼭 해피엔딩 이어야 하나요.
사진 출처:구글 뉴스 포인트/오필리아 너무 사랑스러움. 드레스 입었을 때 너무 깜찍했다.
오필리아는 마지막에 죽습니다. 의붓아버지가 될 뻔했던 대위가 쏜 총에 맞아서.
그리고 그녀의 피가 지하세계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 닿아 그녀는 지하 세계 공주로 있었던 기억을 되찾고 백성들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이 영화의 끝입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녀는 죽은 상태죠.
결말의 해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오필리아가 실제 지하 왕국의 공주였다는 사람들과 전쟁 때문에 힘들었던 아이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만든 판타지일 뿐이라는 부류로 말입니다.
저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오필리아는 아직 아이입니다. 엄마의 죽음을 비롯한 자신 주변에서 생긴 많은 변화들이 아이에겐 방어 체계를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것이 극대화된 것이 자신이 만든 판타지 속의 세계인 것이죠.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고 목소리를 냈다 해도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이 조그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들은 정보를 통합해 그 세계 안으로 자신이 숨어버린 것이죠.
그렇기에 결말은 더더욱 안타깝고 아픕니다.
오필리어는 고통만 가득한 기억을 안고 죽어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죠. 이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작은 아이는 살아있는 동안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영화관을 찾았던 아이들이 울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공주님이 죽어버렸으니. 자신들에겐 익숙한 결말이 아니었던 것이죠. 해피엔딩이 디폴트가 아닌 동화는 그들에겐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을 테니까요.
슬프고 아름답고. 그럼에도 이해가 간다.
동화가 당신을 부를 때.
한글을 제대로 쓰지도, 읽지도 못하던 아이는. 잔혹 동화를 읽고 나서 더 잔혹한 세상을 조금은 더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도피하는 방법을 배워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오필리아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지금도 악착같이 동화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제가 처한 현실이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아이의 모습으로 본 전쟁의 힘듦과 무서움을 잘 그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씁쓸함과 행복함이 공존하는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더욱 그러하죠. 이젠 오필리아도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판타지가 아닌 현실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말입니다.
참고 1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말 글이 그림보다 많은 책이었고 나는 내용보다는 내가 아는 글자를 찾아 읽기 바빴음. 근데 엄마의 입장에서는 다섯 살짜리 애가 "엄마 이거 젓갈!! 엄마 팥쥐가 젓갈!! 젓갈 되었대!!! 맞지!!"라고 하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그 말에 엄마는 아빠를 베란다로 쫓아냈다고 함.
참고 2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 중 크림슨 피크, shape of water, 판의 미로 이 세 편을 가장 좋아함. 감독은 멕시코 사람이었나 그런데 우리나라 전래동화처럼 거기 민화? 도 장난 없다고 한다.
[이 글의 TMI]
1. 정형외과 갔다 옴. 의사 선생님이 운동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안 할 거면 병원도 오지 말라고 함.
2. 집 꾸미는 재미에 폭 빠짐. 아 물론 며칠 안 가겠지.
3. 패딩 찾아야 하는데. 까먹었다.
4. 택배가 하도 와서 이젠 나도 움찔움찔 놀랄 지경.
5. 오늘은 빨리 자야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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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병에 걸린 인물들의 허무한 결말
누군가를 무척 좋아하고 의지할 때가 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거나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일 수도 있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좋아하는 마음은 그 마음의 크기만큼 진심을 다해 상대방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사람에게 긍정적인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의 반응을 살핀다. 이런 구도는 사랑을 하는 연인, 직장 생활의 인간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로에게 감정적인 접점이 있다면 서로 기대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적정한 선을 넘어가면 그것은 집착이 된다. 상대방의 대단한 점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 정도라면 괜찮지만, 그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고 오로지 자신만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것은 그 상대방에게 만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만 보고 가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줄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그런 위험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좁아진 시야는 자신에게 불행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영화
영화 <독전 2>는 많은 인물들이 한 인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야기다. 사실 몇 년 전 개봉한 <독전> 1편 속의 인물들도 이선생이라는 미스터리 한 인물에 집착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선생이 누구인지라는 미스터리를 관객에게 던지면서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이선생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게 구성했었다. 마약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선생은 경찰에게는 소탕하고 싶은 갱단의 두목이고, 다른 범죄자들에게는 한 몫챙길 수 있는 기회를 줄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다. 이번 2편에서는 전편의 인물들이 대부분 재등장하면서 이선생을 향한 집착이 엄청난 광기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건 1편과 마찬가지로 형사 원호(조진웅)와 락(오승훈)이다. 여기에 브라이언(차승원)이 다시 등장하고, 큰 칼(한효주)이 새롭게 소개되면서 영화에 긴장을 불어넣으려 애쓴다. 이 중심인물 네 명의 공통점은 모두 이선생을 찾는다는 것이다. 사실 1편은 형사 원호의 수사로 시작되어 이선생은 누군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는 이야기다. 다양한 인물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섞이면서 벌어지는 난장 같은 상황들이 영화 끝까지 시선을 끌었고, 약간 모호하게 끝나는 결말부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의미에서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번 속편은 1편의 클라이맥스가 정리되고 꽤 시간이 흘러 보이는 마지막 결말 장면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원호는 여전히 진짜 이선생을 찾고, 락과 브라이언 그리고 큰 칼까지 합류하면서 이선생을 찾는 모든 인물이 서로 속고 속이는 대결을 벌인다. 이 정도면 도대체 이선생이 뭐길래 그렇게 모든 인물들이 매달리는지 질문을 하게 된다. 전편에서는 집착이라는 느낌보다는 집요한 추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속편으로 이어지면서 각 인물들이 모두 이선생에 너무 집착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선생이 그렇게 전지전능한 인물일까. 원호가 이선생을 잡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인물 락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이선생을 찾는다. 반면에 이 영화의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언과 큰 칼은 이선생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마약에 대한 사업권이나 부의 축적이라고 하기엔 그 동기가 너무 약하다. 게다가 여러 가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선생을 찾으려 애를 쓰는 인물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썬생은 누구인가
영화는 진짜 이선생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시킨다. 하지만 그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없었다. 영화는 그를 마치 특별한 인물인 것처럼 보여주려 하지만 그에겐 어떤 카리스마나 능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의 긴장이 가장 고조되어야 하는 부분에서 가장 긴장감이 떨어진다. 주요 인물인 락과 이선생의 대면은 분명 특별한 장면이겠지만 복수의 통쾌함이나 시원함을 느낄 수 없다. 이건 이선생을 추적하는 각 인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각 인물들은 적당히 무능하고 과하게 집착한다.
<독전 2>가 가장 실패한 부분은 새로운 악당인 큰 칼의 이미지다. 1편의 진하림(김주혁)이나 보령(진서연) 같은 강렬한 캐릭터를 추가하려 투입했지만, 큰 칼을 연기한 한효주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고 그저 이선생에 집착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캐릭터로 소비되고 만다. 그는 브라이언이나 락, 원호를 위협하긴 하지만 크게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허무하게 퇴장하고 만다. 이선생과 직접적인 연결점을 가지고 있는 빌런치고는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이썬생은 실제로 많은 사람을 돕는다. 새로운 마약을 만드는데 돈과 사람을 지원하면서 자신의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이선생은 그를 궁금하고 추종하는 수많은 범죄자들을 양산했다. 그들은 이선생을 사랑했고 존경했다. 그 마음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선생의 뒤를 따라가 집착의 모습으로 변했다. <독전 2>는 그렇게 집착하다 망가져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는 영화다.
영화는 1편에서 어느 정도 열어두었던 결말을 완전히 닫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선생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그 수많은 희생을 했을까.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은 이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아무도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뒷맛도 그렇게 좋지 않게 되어버렸다. 1편이 끝나고 나서 많은 살람들이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만들었고 여러 번 관람하면서 추가적인 흥행을 할 수 있었지만 이번 속편은 그렇지 못했다.
영화 <독전 2>는 1편의 박해영 감독 대신, 백종열 감독이 연출했다. 그는 1편을 보고 나서 채워지지 않은 이야기를 새롭게 채워 넣었지만 오히려 각 인물들을 모두 집착병에 걸린 사람들로 만들었다. 또한 실제 이선생을 공개하는 강수를 뒀지만 그마저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극적인 긴장감도 전편에 비해 많이 떨어지면서 스타일리시한 영상만이 유일한 장점이 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적정한 선을 넘는다. 이선생을 애타게 찾던 인물들은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면서 전편에서 보여줬던 매력을 대부분 잃는다. 무엇보다 1편의 락 역을 맡은 류준열이 오승훈으로 교체되면서 배우가 만들어냈던 특유의 아우라가 많이 사라져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점도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유일하게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점은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영화지만,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큰 손실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1편의 성공을 생각하면 무척 아쉬운 결과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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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속 감춰진 ‘WOW’ 한 인생 스토리
정말 ‘WoW’한 인생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제목 그대로 평범하지 않은 질환을 가진 한 청년의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 속 비범한 인생 스토리를 그린다. 가족도 몰랐던 이 청년의 삶은 저마다 고통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큰 의미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평생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게임을 즐기다 세상을 떠난 그의 인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년의 이름은 두 개다. 실제 삶은 마츠, 그리고 온라인 게임 내에서는 이벨린으로 불린다. 마츠는 태어나면서 뒤셴이란 근육 질환을 가진 채 태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이 더디고 자주 넘어지는 건 물론, 휠체어에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었으니 바로 ‘WoW’였다. 가족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있었던 그는 안타깝게도 25살로 생을 마감한다. 부모는 아들의 부고를 그가 생전 운영하던 블로그에 올리기로 하고, 아버지 로버트는 글 하단에 메일 주소를 남긴다. 이후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로버트의 메일함에는 마츠를 향한 고마움과 명복을 비는 소식이 도착하고, 이로 인해 가족들은 아들의 또 다른 인생을 알게 된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첫째는 손만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 둘째는 현실 세계가 아닌 온라인, 그것도 게임 내에서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마츠이자 이벨린의 믿기 힘든 삶을 오롯이 영상으로 옮기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두 고정관념에 쌓여 있는지를 확인시킨다. 그리고 주인공의 온·오프라인 삶 속 비범함을 일깨운다.
일단 마츠의 삶은 암울하다. 점점 죽어가는 근육처럼 마츠의 인생도 점점 행복을 잃어간다. 하지만 ‘WoW’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뒤바뀐다.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말처럼 그는 온라인에서는 실제 모습이 아닌 다른 역할로 살아갈 수 있다. 마치 <아바타>의 제이크(샘 워싱턴)가 아바타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자유롭게 걷고 또 다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그가 온라인상에서 탐정 이벨린으로 살아가면서 페이커처럼 영웅적 성과를 올리는 것에 주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함께 게임을 하는 유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했다. 게임을 통해 빚어진 부모와의 갈등을 봉합해 주고, 자폐증 아들과 소원해진 엄마의 고민을 듣고 이를 도움도 준다. 마치 대화하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말했던 이벨린의 고마움은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 그만큼 마츠는 이벨린이었을 때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친구를 사귀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긍정적 요소만 나오는 건 아니다. 마츠 또한 인간이기에, 자신과 달리 평범하게 사는 온라인 친구들에게 시기와 질투, 자격지심을 얻는다. 이로 인해 이간질을 서슴없이 하고,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불편한 행동을 일삼는다. 점점 죽음을 향해 가는 실제 삶의 고통이 온라인으로 번진 것. 이때 게임 속 친구들은 자신들이 받은 도움만큼 그에게 손을 내민다. 물론,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는 등의 과정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 이들은 다시 이전의 관계를 회복한다. 마치 현실 속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런 마츠의 숨겨진 인생을 좀 더 흥미롭게 따라가기 위한 형식도 눈에 띈다. 감독은 실제 가족의 인터뷰와 홈비디오 영상을 통해 가족이 생각하는 마츠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게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영상 구현과 마츠의 블로그 글, 온라인 친구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벨린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는 실제 그의 삶을 보여준 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삽입 후 게임에 접속해 몰랐던 이벨린의 생각을 엿보고, 감정을 느끼게 한다. 형식 자체로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나눠 표현한 건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하며 좀 더 마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마츠의 숨겨진 인생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거시적인 성과의 기폭제가 된 건 아니다. 그냥 한 청년의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삶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제목에 낚였다고 하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있을 듯하다.
마츠는 이벨린으로 살면서 평범한 현실 속 자신을 온라인 상에서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든 온라인이든 그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다는 걸 영화는 오롯이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모습을 비범하다고 표현한 건 앞서 말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의해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장애인으로서 이런 삶을 살 수 있구나, 너드 커뮤니케이션으로써 활용되는 게임에서 이런 일들일 벌어지는구나 하는 놀라운 그러나 편협한 생각들. 이 생각들로 마츠의 삶이 비범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하지만 비범함이 평범함으로 바뀌는 그 순간, 비로소 이 작품이 가진 비범함을 알 수 있을 듯하다.사진 제공: 넷플릭스
평점: 3.0 / 5.0
한줄평: 온라인에서도 인생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