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6-01 23:53:17
사랑 안에서 다르지 않으므로
영화 <너와 나> 리뷰
SYNOPSIS.
“오늘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오후, 세미는 이상한 꿈에서 깨어나 하은에게로 향한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마음을 오늘은 반드시 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넘쳐흐르는 마음과 달리 자꾸만 어긋나는 두 사람. 서툰 오해와 상처를 뒤로하고, 세미는 하은에게 진심을 고백할 수 있을까?
POINT.
✔️ 배우로서도 뛰어나지만 감독으로도 이미 많은 기대를 받고 있던 조현철 감독의 첫 장편
✔️ 세월호를 '논하는' 영화가 아니라 '느끼게 하는' 영화. 마음 앓게 하는 영화.
✔️ 각본과 연출이 매우 섬세합니다. 여고생의 삶을 이토록 여고생답게 표현한 작품도 흔치 않은 듯해요.
✔️ 필터를 뽀얗게 쓴 화면 위로 흐르는 오혁의 음악. (너무 좋은데 음원 왜 안 내주세요?)

누군가의 사랑이 깃든 자리는 언제나 은은한 빛이 난다. 아주 많은 관객을 만나지 못했어도 애정을 가득 받은 영화들 또한 그렇다. 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상영 시기를 놓쳐 못 보았던 이 영화를 결국 보게 된 건, 세월호에 관한 다큐를 보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보인 진득한 애정 때문이었다. 너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서술이 너무 어렵다. 딱 떨어지는 문장과 내 마음을 가장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고르기가 매우 어려워 "하..." 혹은 "너무 좋아요." 따위의 말이나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서 익숙한 표정과 문장을 본 날,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자려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거나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내가 왜 이러지. <러브레터>를 처음 봤던 17살 이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눈물이 난 적은 많아도, 보고 나서도 그 감정이 너무 얼얼하게 내 안에 남아 계속 울게 되다니.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이 마치 내상 같았다. 간접 경험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이 마음으로 10년을 살았다니, 살고 있다니. 그 주간 내내 세월호 관련된 영화를 두세 편 보았는데, 나중에는 약간 몸살 기운마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건 그러므로, 자학이 아닐까. 너무 좋았지만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도 다시 보고 싶었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두 번째 영화관에 들어섰을 때,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세월호를 정면으로 품고 있고, 그렇기에 아프지 않을 방법이 없지만, 그래도 이 아픔을 뒤덮는 넉넉한 사랑을 함께 품고 있다. 그래서 아프지만 아름답다. 이래도 저래도 아플 거라면 아름답게 아프고 말겠다.

꿈과 현실이 뽀얗게 엉킨 자리
언급했듯 이 영화는 세월호의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다. 영문 자막 버전으로 영화를 보면 아예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까만 화면 위로 텍스트를 띄워 세월호 사건을 설명한다. 그리고 2014년 4월의 어느 봄날, 이라는 말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다리를 다쳐서 수학여행을 갈 수 없는 하은(김시은)과, 이상한 꿈을 꾸고 나서 불안한 마음에 하은을 찾아가 수학여행을 같이 가자고 하는 세미(박혜수)의 하루를 담은 영화다. 한동안 수학여행이라는 단어 자체에 움찔하던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로서는, 이 수학여행의 비극을 피부로 알고 있고, 그렇기에 두 아이의 뽀얀 하루를 따라가는 기분이 매우 기묘하다.
그래서일까. 두 아이의 뽀얀 하루는 현실인 듯 꿈인 듯 아룽아룽거린다. 시계와 거울이 유난히 많고 곳곳에 나비가 붙어 있고 필터가 2000년대 일본 영화처럼 뽀얀... 그 자리에서 너무나 현실적인 여고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꿈과 현실의 경계가 아득하게 흐려진다. 어쩜 이 모든 게 거대한 꿈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때쯤, 죽음 너머 아득한 미래에서 보기엔 이 현실도 꿈같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언젠가 내가 죽은 후에 지금 이 시간을 누군가 영상으로 재생해 보여준다면, 꿈처럼 보이겠지.

내일을 모르고 오늘을 사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여기, 관객의 자리가 그 아득한 미래다. 내일을 알아버린 자들이 내일 너머에서 보고 있기에 모든 순간은 더 영롱하게 빛난다. 물에 빠지면 누구 먼저 구할 거냐는 흔한 질문도 그렇지만, 모든 말이 사무친다. 왜 죽는 걸까 하는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빵을 우걱우걱 먹으며 "정답!"을 외치고는 '늙고 병들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늙지도 병들지도 않은 아이들은 왜 죽음을 건너가야 했을까. 흉 지면 안되니까 물 닿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하셨는데 물에 닿아 버려서, 흉 지지 않게 아껴주고만 싶었던 손에 물이 닿아 버려서 어쩌지.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다.
실제로 이 영화 속에서 꿈과 현실은 원을 그리듯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된다. 이 영화는 그렇게 우리를 세월호 안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날 떠난 건 너만도 나만도 아니고 우리였음을, 너와 나였음을 깨닫게 한다.

그 안에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두 고등학생의 사랑과 성장 이야기이기도 한데, 보는 내내 어떻게 십 대 여고생의 사고체계와 관계 방식은 물론 말투와 머리 묶는 방식까지도 저렇게 현실성 있게 구현했는지 감탄했다. 뭐 나도 십 대 여고생이었던 시절에서 많이 멀어져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의 모양이나 양상은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현실감 있게 그려낸 여고생 캐릭터들을 통해, '너와 나'는 그 비극 안에 놓인 것이 숫자나 사건이기 이전에 사람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마음은 두둥실 떠오르는데, 그 마음을 건네는 일은 너무나 어렵고, 그 서툰 모습에 스스로 괴로워질 때도 있고... 내 감정조차 이리저리 탁구공처럼 튀는 나이. 그 느낌이 무엇인지 너무 알겠어서, 기쁨도 괴로움도 양극단으로 치닫는 첫사랑의 타격을 마음 어딘가 깊이 기억하고 있어서, 세미와 하은은 내게 남이 아니었다.
같은 이유로 나는 세미가 노래방에서 <체념>을 부르는 장면이 너무나 슬퍼, 그 장면부터 펑펑 울기 시작한다. "널 보내는 게 널 떠나보내는 게 아직은 익숙하지가 않"다면서도, "그래 더 이상 묻지 않을게 내 곁을 떠나고 싶다면 돌아보지 말고 떠나가" 하고 노래하는 그 장면이... 어떻게 보면 우스울 만큼 진지한 그 장면이 나는 너무 슬펐다. 사랑하면 원래 모든 사랑 노래가 자기 이야기가 된다지만... 혼자서 좋아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이별하고 웃었다 울었다 하는 그 풋풋한 사랑.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 있고 싶고, 더 받고 싶어서, 솔직하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마음. 게다가 "다신 사랑 같은 거 하지 않을래 내 마지막 사랑은 돌아선 너에게 주고 싶어서"라는 가사가 이들의 내일과 묘하게 겹치면서 더욱 슬퍼지고 만다.

<체념> 장면에서 울었다는 말을 들은 주변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내 두 번째 눈물 버튼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모두의 눈물 버튼이다. 바로 세미와 하은이가 진식이를 따라간 컨테이너 박스에서, 진식이 아니 똘똘이 주인(정해연)이 울면서 강아지를 부르는 장면. 하은이는 보지 못하고 세미는 본 그 컨테이너 박스 안, 말간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강아지들이, 엄마랑 같이 집에 가자고 우는 목소리가, 어떤 배와 겹쳐서 누구라도 울지 않을 수 없는 장면 말이다.
세월호의 이미지는 이 영화 속에서 여러 차례 변주된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바다도 배도 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다. 그날의 처참했던 기억을, 어떤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죽어 누워 있음을 처참하게 깨달았던 그 시기를.

사랑한다는 말 하나로 일깨워지는
그 괴로운 상처를 이 영화는 넉넉한 사랑으로 뒤덮는다. 사랑한다는 말 하나로 일깨워지는 작고 소중한 순간들. 언젠가 하나하나 다 사무치게 될 줄 아직 모르기에 더 영롱하게 빛나는 순간들 위로, 그 모든 순간들을 깨뜨린 비극 위로, 사랑이 속살거리며 내려앉는다.
아픔은 쉬이 위로되지 않을 것이다. 상처는 쉬이 낫지 않는다. 올 4월은 세월호 이후 10주기라는 기억할 만한 해였음에도, 곧 있을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 방송은 취소되었고, 10주기를 기하여 나온 다큐멘터리들은 정작 몇 년 전의 다큐멘터리들보다도 상영시간표 찾기가 힘들었다. 누구를 탓할 수는 없지만, 개봉 시기에 맞추어 특정 감독의 기획전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티겟 파워가 있는 다른 중요한 행사들도 있었겠지만, 관객 입장 또 시민 입장에서 몇날며칠 상영시간표를 뒤적거리면서 일정을 가늠해 보다 한숨 쉴 만큼 속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만난 이 영화는 사랑한다는 말로, 모든 아픔은 아니더라도 어떤 아픔은 확실히 녹여냈다.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싶지 않아서 어느 순간부터 조금은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이제는 다시 마주할 것이다. 그 배에 있던 것은 숫자가 아닌 사람이므로. 그 사람 각자는 사랑한다는 말에 감싸인 귀한 존재들이므로. 아주 먼 미래에서 보기엔 지금 나의 현실 또한 꿈처럼 아득할 것이므로. 너와 나는, 사랑 안에서 다르지 않으므로.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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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 참을 수 없는 부담?
2018년. 국내에 개봉한 영화 <마녀>는 318만명의 성적을 기록했다.
손익분기점 230만명을 살짝 넘기는 수준으로 인상적인 흥행은 아니었지만, <신세계, 2013> 이후 <대호, 2015 - V.I.P., 2017>의 연달은 실패를 겪었던 "박훈정 감독"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V.I.P., 2017>에서 "여성"을 상대로 한 일부 장면들의 묘사에 비난까지 받았던 그이기에 "여성 캐릭터"를 앞세운 <마녀>의 성공은 그에게 변화이자 도전이었다.
그리고 이에 한껏 고무된 감독은 이내 속편 제작을 밝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긴가민가했다. - 그도 그럴 것이 <신세계2013> 도 "프리퀄"의 형식으로 속편 제작을 말했지만, 이내 "시퀄"의 드라마까지 언급되었지만, 무산되었으니까...
여기에 판권을 가진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와의 제작비 규모에 따른 이견이 존재했고, 아시다시피 "워너"는 한국 영화 투자를 철회했다.
이후 "NEW"가 <마녀>의 라이선스를 가져옴에 따라 <마녀 2>는 <신세계 2>보다 먼저, 그의 첫 시리즈가 되었다.1. 김다미가 없는데, 마녀라굽쇼?
제목에도 쓰여있는 '넘버링(2)'은 이 영화가 시리즈이자 후속작임을 알려준다.
이는 전작과의 비교는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로 '잘 계승했을까?'라는 전작 팬들의 기대 혹은 걱정 섞인 질문으로 연결된다.
결과부터 말하면, 이번 <마녀 2>는 전작보다 아쉬움이 많았다.
이런 이유에는 결국, 기존 판권을 가졌던 "워너"와의 주요 갈등 원인이었던 '이야기의 스케일(혹은 제작비의 압박)'로 보인다.전작의 주인공 "자윤"을 살펴보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양부모의 손에서 자란다는 설정이 있다. - 이는 <롱 키스 굿 나잇, 1996>부터 시작해 <본 시리즈, 2002-16>까지 '클리셰'적인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를 하나의 반전으로 적용했고 이 과정에서 "김다미"라는 배우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며 그녀의 영화라고 각인까지 시켰다.
근데, 이번 <마녀 2>에서는 "김다미"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무슨 상황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카메오 수준이다)2. 언니랑 싸우면 되겠어? 안되겠어?
근데, 이런 방식은 처음이 아니다.
"M. 나이트 샤말란"이 선보인 <23 아이덴티티, 2017>만 보더라도, 이후 쿠키에서 <언브레이커블, 2000>의 "브루스 던"이 등장하는 "이스트레일177 트릴로지"가 그런데, 서로 다른 영화의 주인공으로 선과 악을 대표하는 두 캐릭터는 이후 <글래스, 2019>에서의 대결을 예고시켜 관객들의 기대치를 끌어모았다.
이처럼 이번 <마녀 2>의 주인공 "소녀"와 전작의 "자윤"의 만남은 3편에서의 대결을 그리는 것은 아닐까?하지만, 이번 <마녀 2>의 "소녀"는 전작의 "자윤"보다 못한 느낌이다. (언니보다 못한 느낌이랄까?)
이런 이유에는 극 중. "백총괄"이 "자윤보다 소녀가 더 강하다"라는 설정상 정리도 있지만, 한국 혹은 한 시골과 연구소에 그친 전작에 비해, 전 세계적으로 넓혀진 스케일도 있다.
극 중. 연구소에서 나온 "소녀"를 쫓기 위해 본사의 "조현"과 "장"외에도 중국, 미국(조력자) 등 다채로운 언어들을 보듯이 캐릭터들까지 많아진 규모 확장은 <마녀 2>뿐만이 아니라 후속작들이 으레, 밟아온 규칙이다. (오히려, 작아졌다면 그게 더 섭섭하다) - 그러나, 그만큼 이야기의 밀도가 옅어지는 건 어쩔 수 없던 것일까?3. 파워 인플레에 희생된 배우님
전작에서 "자윤"을 구해준 양부모와 동네 친구 등의 캐릭터들은 그녀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기도 했지만, 이내 "반전(능력 각성)"이라는 장치에 효과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속편의 "경희 - 대길 남매"의 역할도 이와 다를 것이 없지만, 어째서인지 똑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전작과 똑같은 레퍼토리에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피로한 점과 "연구소를 나갔다"라는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시작한 이유가 크다.그래서, 이들을 주역으로 올리기 위해 "용두"라는 악당을 등장시킨다. - 특히, 본사의 "조현"과 "장"이라는 악당들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함에도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더 강한 악당들의 존재에 위상마저 깎이는 "파워 인플레이션"까지 보여줘 아쉬움만이 가득한 행보를 보여준다.
물론, "소녀"의 각성을 위한 캐릭터라고 하나 '이를 위해서, 135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라는 군더더기 가득한 의문과 함께 향후 시리즈의 앞날도 불안하기만 하다.· tmi. 1 -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1개의 쿠키 영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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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일깨우는 ‘사랑’과 ‘공존’의 가치
▷한줄평 : 다시 죽음의 두려움조차 이겨낸 ‘소통’, ‘협력’, ‘사랑’, ‘희생’의 보편적 가치를 말하다
▷영화 : 미키 17(Mickey 17), 2025.2월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영화 <미키 17>에서 / 티모(스티븐 연), 카이 캇츠(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
우리 모두는 ‘익스펜더블’과 같은 존재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해도 매번 죽음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생체실험에 자신의 생명을 제공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 직군을 선택한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죽음을 피할 방도는 없다. “다시 만나!”라고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소각로(사이클러)에 뛰어들면 그만이다. 두려움도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다시 프린트하면 되니깐. 이 순간 ‘미키’는 미키1, 미키2… 미키n과 같이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달리 벗어날 방법이 없다. 2054년 우주 행성 개발 시대에서조차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하층 노동자는 ‘위험의 외주화’의 도구가 될 뿐이다. 미키n이 갖는 존재의 가치를 논할 필요가 없다.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지점에 슬픔조차 불필요한 감정이 된다. 죽는 기분이 어떤지 묻는 동료의 질문에 ‘항상 무섭다’라고 말할 것 밖에 없다. 고귀한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탄생 일조차 이제는 간단히 버튼 하나로 3D 프린터로 뚝딱 만들어내는 단순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말해주는 ‘탄생’과 ‘죽음’의 신비로움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미키는 이런 소모품으로 자신이 소비되고 있음이 후회스럽다.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까?
어쩌면 <미키 17>에서의 새로운 복제인간의 탄생은 우리가 매일같이 잠을 자고 새로운 날을 맞는 것과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는다. 미키가 과거의 자기를 폐기하고, 새롭게 탄생한 존재를 현재 살아있는 객체로 구분해 내듯, 우리는 연속된 생을 하루라는 날로 구분하여 매번 새로운 날들을 만들어 낸다. 3월 1일, 2일…n일 처럼 말이다. 시간의 영속적 흐름 속에서 특정 시간에 대한 의미 부여를 위해 강제로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어 쳇바퀴에 올려놓은 꼴이다. 매일매일 지옥과 같은 일상 속에서 자아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을 반복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교차하는 지점에 드는 아쉬움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쓸데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다. 그래서 미키n이든 제이바다n일이든, 이 세상의 모든 ‘익스펜더블(소모품)’들은 견디기 힘들 만큼 지루한 일상을 끊임없이 버텨내야만 한다. 그 짧은 간극 사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각 개인들의 몫이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소모품으로 소비되는 미키n의 존재들
봉준호 감독은 이 지점에 미키17이 자신을 복제한 미키18을 마주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17번째 미키가 크레바스에서 죽었다고 착각한 이들이 18번째 미키를 리프린트하게 된 것이다. 이 세계에선 동일한 익스펜더블이 공존하는 '멀티플'은 불법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상황이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존속이 행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마주해야 비로소 그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동안은 계속 사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달라. 내가 죽으면 네가 사는 거잖아.’ 영화 <미키 17>에서 / 미키 17(로버트 패틴슨)
현재는 과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결과물은 사뭇 다르다. 기억의 저장과 재생 과정에서 성품까지도 동일하게 반복 재생시키지는 못했다. 마치 기억의 저장소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끄집어내 나의 온전한 기억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다. 미키18는 다혈질의 성향을, 미키17은 온유한 성품을 가졌다. 어쩌면 순간마다 달라지는 우리들의 내적 자아의 분열과 같다.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는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
미키의 이러한 다른 성품은 둘 중 어느 하나가 살아남을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 둘은 처음에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격하게 부정한다. 서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소통’이 만들어낸 대결과 파멸의 극복
기록된 역사는 정복자의 관점을 투영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말 그대로 우연한 ‘발견’일뿐이지, 그 대륙에도 사람들이 이미 번성한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최근에는 유럽인의 시각에서 사용한 ‘발견’이라는 말 대신에 ‘만남(Encounter)’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지금도 정복자의 시선이 담긴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s)’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당시에도 문명국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잉카, 마야, 아즈텍은 대표적인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이다. ‘니플헤임’ 식민 우주 행성 개척은 생육과 번성을 꾀해왔던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외계인인데 왜 쟤네더러 외계인이래?" 영화 <미키 17>에서 / 나샤(나오미 애키)
이 프로젝트의 총사령관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과 일파 마샬(토니 콜렛) 부부는 이런 정복자 DNA의 야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행성에 이미 살고 있었던 외계 생명체, 크리퍼 (Creeper)를 ‘추악한 외계인’이라 부른다. 그 옛날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을 ‘인디언(Indian)’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크리퍼들이야말로 이곳 니플헤임의 원주민이며 외계인은 오히려 지구에서 찾아온 우리 인간들이다. 크리퍼에게는 그들만의 고유한 언어체계가 있었으며, 그 수많은 개체들마다 각자의 이름(루코, 조코, 등)이 있을 정도로 공동체성을 보유하고 있는 종족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케네스 일당은 여전히 그들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마샬은 벌레의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다며 식민지 개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크리퍼를 몰살할 계획을 세운다.
영화 <미키 17>에서는 이 지점에서 외계인을 포함한 타인을 대하는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을 탐구한다. 아둔하고 차별적이며 폭력적인 케네스 마샬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독재자들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옆에서 이를 부추기며 소스(Sauce) 개발에 열을 올리는 등 사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아내 일파 마샬과 조력자들의 존재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들은 철저히 계급을 나누고 명령과 복종을 강요한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대화와 타협, 소통은 늘 뒷전이다.
이젠 미키17과 미키18에게는 극복해야 할 공공의 적이 생겼다. 어떤 식으로든 케네스 일당으로부터 크리퍼의 파멸을 막아보겠다는 미키 17과 미키 18은 외계인과의 메신저 역할을 자처한다.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 인류와 외계 인간의 공존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이렇게 ‘소통’과 ‘협력’은 파멸을 이겨내는 과정이 되었고, 종국에는 ‘희생’을 통해 희망이라는 미래를 만들어 내었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외계 생명체를 만나러 가는 미키
죽음의 두려움조차 이겨낸 ‘사랑’과 ‘희생’의 가치
이러한 분열된 자아와 같은 또 다른 미키의 등장으로 인한 혼란, 생사의 키를 쥐고 흔드는 독재자의 압박, 처음 마주한 외계 생명체와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미키17과 미키 18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케네스 마샬은 미키가 그동안 느껴왔던 ‘두려움’조차 이용하려 든다.
"너도 두려움을 느끼는 거지? 너도 인간이잖아, 중요한 존재지."
영화 <미키 17>에서 / 케네스 마샬 (마크 러팔로)
그러나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며 맞이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영원한 사라져야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다를 것이다. 이 ‘두려움’을 ‘희생’으로 치환 시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랑’과 ‘공존’에 대한 염원이다. 사랑이야말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가 가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멀리서 보이는 사랑하는 나샤(나오미 애키)와 미키 17을 바라보면서 ‘희생’을 선택한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나샤
봉준호 감독은 참으로 일관된 스토리텔러이다.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설국열차>의 멈추지 않는 기차와 <기생충>의 어두침침한 지하실에서 <미키 17>의 미래와 우주로 옮겨 놓았을 뿐,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보편적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설득해 내려고 한다. 그동안 인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등장해 왔던 독재자, 아메리카 신대륙을 정복하러 나섰던 콜럼버스와 같은 야욕가, 인간의 생명의 존엄 따위는 관심조차 없는 정치가 등 부와 권력의 위계질서는 인간 사회가 유지되는 한 지속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타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모색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도 같다. 영화 <미키 17>은 ‘사랑’, ‘협력’, ‘소통’, ‘희생’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낼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는 바로 우리, 여기,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영화 <미키 17> 포스터
20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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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까지 피해자가 조심하면서 살아야 되는가
영화 ‘걸캅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직접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동의 없는 동영상 촬영은 물론이고 그 동영상을 보고, 공유한 사람들 모두 처벌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한때 리벤지 포르노로 불리던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는 우리 생각한 것보다 꽤 깊다. 그 오랜 시간 속에 피해자들은 도움을 요청하기를 어려워하고, 가해자가 처벌 받은 경우는 미미할뿐더러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생활한다.
나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고 그 발달 속에서 많은 편의를 누리고 살았으나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이런 끔찍한 범죄로 인해 피해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여기고 극단적인 경우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영화를 볼 때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은 그저 일상을 즐기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던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은 불법촬영물과 이것을 공유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장면이었다. 만약 등장인물인 미영과 지혜, 그리고 다른 여성 경찰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피해자의 존재는 잊혀진채 가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이용해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개인적인 공간인 화장실에서 조차 혹시 불법촬영물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상황이 아니라 편하게 볼 일을 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일상적인 부분조차 포르노로 소비되고 있는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것은 이런 불법촬영물에 대한 규제를 더욱 명확히 해서 엄벌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규제가 없다면 가해자가 유포한 불법촬영물이 온라인 상에서 공유되는 동안 피해자는 불안에 떨며 살고 있을 것이고 이걸 본 누군가는 그런 행위를 모방하여 또 다른 범죄를 양산하게 되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죽어도 음란물은 죽지 않는다”는 이수정 교수님의 말처럼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으려면 이것을 처벌하고 예방할 수 있는 관련 법들을 만들어야 된다. 나는 이런 성과 관련된 범죄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온전히 존중 받고 보호 받아야 되는 '성'이라는 개념이 상품처럼 사고 파는 개념으로 인식 되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성범죄 문화를 근절할 수 있도록 죄를저지른 가해자가 그에 마땅한 벌을 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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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보다 포용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것과 본능적인 거부감이 부딪히는 순간에 받았던 충격을 기억한다. ‘임신중단’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제도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분노했다. 나는 결혼과 출산이 생애주기 중 꼭 거쳐가게 되는 어떤 대단한 경험이나 의무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신중단’이라는 단어는 임신이 여성 신체에 일어나는 어떤 일시적인 현상임을 시사한다. 나의 신체를 사회가 아닌 나의 시점, 내가 통제할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순간 알게 되는 것들은 어떤 배신감과 너무나 많은 질문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가장 먼저 화가 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권력과 정치의 힘이,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살아있는 나의 신체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다. 그래서 <앵그리 애니>라는 제목은 분노의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 영화 속 애니와는 다소 다름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손을 뻗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배신감과 너무나 많은 질문은 나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로르 칼라미 감독의 <앵그리 애니>는 이미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임신을 원치 않고, 그래서 낙태 시술을 받으러 온 애니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병원이 아니라 서점에 들어선 그녀는 의사와의 면담 대신 ‘모임’ 참석 안내를 받고 뒷방으로 들어선다. 알음알음 정보가 공유되는 듯한 이 모임은 낙태 시술의 합법화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누구에게나 무료로 의사가 집도하는 낙태 시술을 제공한다. 그리고 활동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기에 비밀 유지도 필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 과정, 그러니까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임신중단 이후의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다. 임신중단을 경험한 후 애니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던, 자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은 친구가 낙태 시술 도중 사망하는 사건에 직면한다. 너무나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과 같은 문제를 마주했지만 정보와 환경적 조건의 부재로 인한 죽음을 마주한 것이다. 그래서 애니는 분노에 그치지 않고 합법화를 위한 활동에 동참하기로 한다. 그렇게 <앵그리 애니>는 대양에 홀로 된 섬처럼 동떨어진 개인적 경험인 줄로만 알았던 임신중단이, 사실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앵그리 애니>는 처음 제목을 알았을 때 어떤 내용인지 유추하기가 다소 어렵다. 언뜻 생각하면 ‘애니’라는 인물의 드라마나 성장담을 다룬 영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애니는 왜 화가 났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보기 시작한 영화는 반대로 현실을 보여 주려고 애쓴다. 가령 옆집에 살던 친구가 애니와 같은 이유로 허망하게 죽게 되는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 부자연스러울지언정 임신중단이 목숨을 걸 만큼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선택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전달한다. 인력이 부족할 만큼 많은 여자들이 모임에 찾아오기 시작해 서점에 발 디딜 틈도 없게 되는 상황에서는 ‘정말로 저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임신중단을 선택할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말 ‘다양하고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죽고 있다. 제도화를 하면 의료 시술이 서비스처럼 변질될 것이라는 핑계는, 그 여성들의 존재를 가린다. 제도가 없으면 보호도 없고, 위험한 방식으로 임신을 중단하는 시도는 계속된다. 여성들은 과거에도 그렇게 죽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현재에도 통계 속 숫자로만 겨우 대변할 수 있는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스펙터클이나 거대한 드라마를 주지 않고도, <앵그리 애니>는 관객의 현실까지 뒤따라온다. 그리고 종결이 아닌 확장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관객 각각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 임신중단을 다루는 다른 영화들처럼 임신중단을 간절히 원하는 여성 주인공의 등 뒤에 붙어 그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담아내기보다는 공동체 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임을 알도록 해준다. <앵그리 애니>는 그렇게 자신만의 따스함과 포용력으로 관객의 현실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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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PFF] 세바스티앙 (2024)
* 세바스티앙 (2024)
감독: 미코 마켈라
출연: 루아리드 몰리카, 조나단 하이드 외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10분
국가: 영국
매거진 회사의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주인공 맥스는 본인의 이름으로 장편 소설을 출판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영화의 제목인 '세바스티앙'은 바로 그가 집필 중인 장편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 맥스는 디지털 시대 속 성 노동자들의 삶을 소재로 한 '세바스티앙'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많은 남성과 잠자리를 갖는 주인공의 삶을 깊이 탐구하려 한다. 첫 장편 소설에 사활을 내건 그는 세바스티앙의 심리를 생생히 묘사하고, 행동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직접 '세바스티앙'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는 성 노동자로 이중생활을 시작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세바스티앙이 된 그는 작가 '맥스'가 아닌 성 노동자로서 유명 작가, 노년의 남성, 부유한 변호사 그룹 등을 상대하게 되고, 경험이 쌓여갈수록 글에 가속도가 붙어 편집자로부터 곧 소설을 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까지 듣게 된다. 하지만 맥스는 자신과 '세바스티앙'의 삶을 분리한 채 일상을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세바스티앙으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의 삶에 점차 균열이 일었기 때문이다. 섹스 도중 마약에 취해 잠들어 미팅에 불참하는 바람에 중요한 일거리를 빼앗기기도 하고, 친한 동료를 실망시키거나 인터뷰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는 등 온전했던 맥스의 세계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맥스가 성 노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얻겠다는 단일한 목적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바스티앙'을 연기하는 자신과 '맥스'라는 실제 자아를 분리해 놓고, 섹스 경험을 글로 옮기면서도 자신을 한 발 떨어진 채 타자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구 목적으로 시작한 성 노동은 점차 그의 일상을 잠식하기 시작하는데, 초반의 맥스는 섹스 그 자체, 그리고 섹스와 소설을 연결 짓는 행위에서 적잖은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들과의 잠자리만으로 육체적인 쾌락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데다 이를 토대로 글까지 술술 잘 써지기까지 하니 그가 느끼는 감정은 강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중요한 인터뷰 자리를 박차고 나가 고객을 만나러 가는 모습은 그가 점차 이러한 행위에 '중독'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성 노동자로 생활하며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다른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 자체를 즐기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매혹적인 행위에 빠져드는 동시에 수치심 또한 함께 경험한다. 편집자의 1인칭 서술 제안을 망설이거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물의 심리를 실컷 묘사하다 '인터뷰를 참고했다'는 말을 꼭 덧붙인 것은 소설의 완성을 위해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스스로가 당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속 세바스티앙의 경험으로 분리하여 쓰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를 자신의 실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순간 픽션이라는 방어막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을 느꼈던 것이다. 특히 맥스로 참석한 일정에서 자신을 세바스티앙으로 알고 있는 상대와 우연히 마주친 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고, 어플에 올려둔 사진과 정보를 모두 삭제한 것은 성 노동자로서 느낀 수치심은 물론 물론 이중생활로 지켜온 자신의 일상이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극심한 불안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이중생활에 새로운 파장을 불러일으킨 건 니콜라스와의 만남이다. 그 역시 맥스를 성 노동자 세바스티앙으로 알고 만남을 자처한 인물이지만, 지금껏 만난 남성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대부분의 고객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의 육체부터 탐하려 했지만, 니콜라스는 진솔한 대화와 함께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길 원하는 젠틀한 노신사에 가까웠다. 돈을 지불한 쪽은 니콜라스 쪽이었지만, 안달이 나게 된 쪽은 오히려 맥스였다. 야릇한 눈빛과 능숙한 손짓으로 노골적인 유혹의 신호를 보내도, 니콜라스는 급속도로 치러지는 몸의 대화에 거부감을 보인다. 기껏 인터뷰 자리를 망치고,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려 간 자리였지만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맥스는 처음으로 섹스 없이 자리를 벗어나게 된다.
우연을 계기로 맥스와 니콜라스는 재회하고, 이 만남은 맥스의 소설과 삶 모두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맥스는 다시 그를 찾아준 니콜라스와 매주 시간을 보내고, 데이트를 하거나 예술을 주제로 깊은 대화를 나누며 다른 이에게서 경험하지 못한 환상과 로맨틱한 감정을 모두 느낀다. 니콜라스는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평가를 받았던 맥스의 소설에 신선한 영감이 되어주고, '디지털 성 노동의 현실'만을 다루고자 했던 소설에는 '로맨스'가 더해짐으로써 초반의 방향성을 벗어나게 된다.
이때까지도 맥스와 세바스티앙으로 분리된 그의 이중생활은 유효했다. 하지만, 그의 고객 중 한 명이었던 유명 작가 다니엘에게 소설을 들키게 되면서 두 자아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엉망이 되어버린 그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의 손길을 건넨 니콜라스로 인해 진실을 모두 털어놓게 된다. 니콜라스는 맥스가 신분을 속인 채 자신과의 관계를 대상화하여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됐음에도 그를 혐오하거나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소설을 궁금해하며 자신이 그의 뮤즈가 되었다는 것에 기뻐한다. 맥스는 자신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내는 니콜라스에 힘입어 다시금 새로운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글을 쓸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소설 속의 세바스티앙과 자신을 서로 다른 인물로 간주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망설임을 내비쳤던 초반과 달리 마침내 3인칭이 아닌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기 시작한다.
맥스는 마침내 자신의 작품인 '세바스티앙'을 출판하고, 작가로서 인터뷰 행사에 참석한다. 민감한 소재를 다룬 작품인 만큼 행사 담당자가 '질문이 너무 사적이지 않냐'는 우려를 표하지만, 맥스는 담담하게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다'고 응수하며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비록 픽션이지만, 가상의 인물 '세바스티앙'의 이야기는 곧 그 자신이 겪어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어떠한 질문에도 거리낌 없이 응하는 태도는 그가 세바스티앙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의 결말부로 보아 그는 작가가 된 후에도 성 노동자로서의 삶을 완전히 놓지 않고 있다. 다만, 더 이상 '세바스티앙'이라는 가명이 아닌 본명 '맥스'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극중 내내 성 노동자와 장가의 삶이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거듭된 혼란 끝에 니콜라스와의 관계 속에서 안정을 경험하며, 비로소 자신을 성 노동자이자 동시에 작가인 인물로 정의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세바스티앙'의 리서치가 끝났음에도 성 노동을 지속하는 이유는 낯선 남성과의 섹스에서 비롯된 쾌감, 계속해서 글을 쓰기 위한 신선한 영감, 그리고 자신을 상대하는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치는 스스로에 대한 만족을 모두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극중 소설의 내용이 '디지털 시대 속 성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려다 세바스티앙과 조너선의 관계로 빠진 것처럼, 영화 역시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는 성 노동을 사회적으로 접근하기보단 '맥스'라는 인물에게 초점을 맞춰 미시적으로 풀어낸 점이 꽤나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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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 로랑 / Saint Laurent
생 로랑 / Saint Lau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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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스물 한 살에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천재,
여성에게 바지 정장을 선사한 패션 혁명가, 하지만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린 외로운 예술가…
그리고 영화, 젊음, 아름다움, 부를 모두 가졌지만 고립된 세계에서 미를 추구했던 남자.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임과 동시에 파멸적이고 탄생적인 삶에 모든걸 걸었던 예술가 ‘이브 생 로랑’!
그의 인생은 일생일대 뮤즈들을 만나면서 더욱 혹독하고 뜨거운 탐미 속으로 빠져드는데…
- 네이버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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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말 안해도 다들 아시겠죠?
그렇습니다.. 가스파르 울리엘이 출연하기 때문에 본 겁니다..
줄거리에 적혀있는대로, 이 영화는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인생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상승하는 그의 주가와는 대비되는 그의 개인적인 삶에 집중합니다.
여러 뮤즈를 만나게 되는대도 불구하고 그는 점점 더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왜 자기의 커리어가 커지면 커질 수록 예술가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쾌락을 탐미하게 될까라는 근본적인 의문들이 샘솟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찾은 정답은..
밖에서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에 내가 미치지 못할까봐 생기는
자기의심과 회의
입니다.
이는 비단 이브 생 로랑에게만 해당되는 정답이 아니라 절망과 우울에 빠진 모든 예술가들에게 해당되겠지요.
솔직히 영화 자체만 보면, 이 영화는 그닥 잘 만든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랄까 이브의 삶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알겠는데...
그래서인지 엉성한 짜임새와 반복되어 강조되는 방탕함(?) 그리고 힘빠지는 후반부..
못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잘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물론, 저는 재밌게 보긴 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에 총 10점 만점에 6.5점을 주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가스파르 울리엘의 열연이 너무나도 빛났고,
미장센의 향연에 매료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브 생 로랑의 영화답게 진짜 미장센에 힘 좀 준 영화입니다.
색감활용도 예쁘고, 연출도 예쁩니다.
그리고 가스파르 울리엘...
연기를 어쩜 이렇게 잘할까요..
이브의 병약미와 그런 기교를 정말 잘 표현하고 연기해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반에 나오는 올 누드씬 + 누드 촬영씬...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그...진짜 가스파르 울리엘...이.. 직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기에는 직접한 것 같고...
이런 연기를 할 결심을 내린 것과 그리고 그걸 멋지게 해낸 것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위의 두가지 이유로.. 영화자체의 몇가지 미스에도 불구하고 6.5점의 점수를 주게 되었답니다.
인상깊은 씬은... 음...
가스파르 울리엘의 파격적인 씬(이부분은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뇌리에 박혀버림) 빼고는 딱히 인상깊은 씬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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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제가 엉성하고 영화자체로는 그다지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그래도 저는 나름 재미있게 봤습니다.
(근데 대부분의 평들이 안좋은 걸 보니, 제가 그냥 가스파르 울리엘을 좋아해서 재밌게 느낀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의 그 시절 컬렉션이 궁금하고, 가스파르 울리엘의 연기를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추천드립니다.
(아, 그리고 라인업들도 꽤나 화려해서 프랑스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배우들 보는 재미가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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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도 못 쉬고 봤습니다..... 충격 결말, 시간 순삭 영화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세인트아가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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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결산 - 리뷰는 못 했지만 추천하는 독립영화 7작품 l 상 1편 ( #로그인벨지움 #빛과철 #혼자사는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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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따뜻한 연말 보내고 계신가요!
또 1년이 이렇게 지나가네요...! 어느덧 유튜브를 시작한지도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올해도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죠!
시기가 많이 아쉽긴 하지만, 더 많은 작품들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서
이번 연말결산 영상에서는 제가 리뷰는 못했지만 극장에서 보고 추천드리는 작품들을 준비해보았는데요!
영상이 조금 길어서 3작품, 4작품 나누어서 올릴게요 :)
그럼 내일도 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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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이비자 스캔들> 공식 예고편
오스트리아를 발칵 뒤집은 정치 스캔들! 자유당 대표이자 오스트리아의 부총리 하인츠 크리스티안 슈트라헤가 이비자섬에서 뒷거래하는 영상이 세상에 공개되며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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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종착역> 메인 예고편
사진 동아리 '빛나리' 부원인 시연,연우, 소정, 송희는 '세상의 끝'을 찍어 오라는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신창역으로 향한다. 웃음이 끊기지 않던 친구들은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 여정에 점점 지쳐가고, 낯선 곳에서 14살 첫 여름방학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