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4-05-19 16:55:12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더 에이트 쇼>
지난주 넷플릭스에 공개된 <더 에이트 쇼>는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특정 공간으로 삶의 패배자들을 몰아넣고 벌어지는 쇼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더 에이트 쇼>에서의 죽음은 곧 쇼가 끝나는 것이고, 등장인물들이 더 이상 그 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다. 1층부터 8층까지를 등장인물들이 무작위로 부여받으며 시작되는 이 쇼는 우리 사회에 관해 꽤나 많은 메시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우린 계층 없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최대한 공평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로, 어떤 사람들은 사업가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번다. 평등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그 시스템이 한참 돌아가고 나서 보면, 어느새 각자가 가진 돈은 모두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당 버는 돈의 양도 달라지고, 그 돈의 양에 따라 개개인이 가진 삶의 태도와 지위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평등했던 사회는 점점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간다.
<더 에이트 쇼>는 패배자 8명을 모아 특정 공간으로 넣는 순간부터 기존 사회에서의 직업, 계급, 자본 등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다. 만약 기존에 부자였거나 힘이 있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어도 그 쇼의 공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 여기에 한 가지 무작위로 자신이 지낼 공간을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방은 1층부터 8층까지 각 층마다 자리한다. 각 방은 1분이 지나면 특정 금액만큼 쌓인다. 그리고 쇼가 끝나면 그 금액을 현실로 받아갈 수 있다. 그 쇼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선 평등함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절망으로 가득한 8명이 모였다. 이들은 돈이 없거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별다른 힘이 없는 이들이다. 쇼의 주최자들은 이들의 옷을 똑같이 입히고, 똑같은 밥을 준다. 그리고 똑같은 노동을 하게 만들었다. 단 각 층의 방에 차별점을 두었다. 1분이 지나면 1층은 1만 원, 2층은 2만 원, 3층은 3만 원, 4층은 5만 원씩 올라가고 8층은 34만 원이 1분당 더해진다. 파보나치의 수열이라는 규칙을 통해 각 층마다 올라가는 금액을 한정했고, 방의 크기도 8층으로 갈수록 더 커지게 만들어두었다. 그러니까 그 쇼의 공간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무작위로 정해져 있는 불평등을 만들어둔 것이다.
사실 이 설정은 우리가 사회에 태어나 얻게 된 자신의 가족이 가진 지위나 자본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 가지게 된 배경환경은 나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그걸 다시 바꿀 수는 없다. 그냥 주어진 것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규칙에 적응해서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더 에이트 쇼>가 보여주는 쇼는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커지는 불평등
다른 모든 것이 평등하지만, 그 공간에 처음 부여받은 부의 조건이 다르다. 모두가 신사 같은 젠틀함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서로를 돌봐주지만, 맨꼭대기 층인 8층이 가진 힘이 그 평등함에 균열을 가한다. 8층에는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방이다. 그리고 하루 한 번씩 제공되는 물과 도시락 10개가 그 방에 최초로 배달된다. 방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줘야 모두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마치 스페인 영화 <더 플랫폼>의 설정처럼 위에서 먹고 남은 음식이 밑에 내려가는 구조다. 그래서 층이 높을수록 더 많은 걸 가지게 된다.
꼭대기 층의 주인인 8층(천우희)은 예측불가능한 인물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량을 내려보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다른 층의 사람들은 생사를 위협받게 된다. 그리고 방 안에서 해결하던 대변과 소변 봉투도 아래로 내려온다. 결국 최하층인 1층(배성우)이 그걸 도맡아 처리하지만, 위층에서 내려오는 부담을 아래층이 계속 나눠서 떠안아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방 안에서 원하는 물건을 인터폰으로 주문할 수 있는데, 지불해야 할 가격은 실제 금액의 100배 수준이다. 이건 결국 기존에 자본이 많았던 사람들에겐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릴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8층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춘다. 총 8부작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에서 이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8층은 여왕이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아래층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과 음식을 제공받는다. 이 쇼의 기본 룰에 누군가 죽음을 당하면 쇼가 끝난다. 그러니까 8층을 죽인다는 것은 모두가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마치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 기업이나 사회의 우두머리를 끝장내면 모두가 돈을 벌 수 없는 혼란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 쇼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춤으로서 이미 만들어진 계층 사회가 계속 지속되게 만든다.
착취로 이어지는 쇼
이 쇼에서 시간은 꽤 중요하다. 공용공간에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의 시간이 0이 되면 쇼는 끝나고 각자 방에 있는 전광판에 적힌 금액만 가져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그 시간을 늘리려고 최대한 애쓴다. 맨 처음 하는 것은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8층은 다른 사람들에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시간이 늘어난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몇 번하자 시간이 늘어난다. 이후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시간을 늘리는 노동을 시작한다.
노동 과정도 재밌다. 매일 모두가 하기 힘드니 4명씩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1층을 도와 대신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힘든 과정 이후 분란이 생기고 팀이 갈라진다. 계단 노동 이후엔 시간을 늘리는 행위가 무언가 재미있는 상황을 보여줘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장기자랑부터 다양한 게임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중요한 전환점이다. 노동이 재미로 대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인데, 애초에 노동은 모두가 같이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누군가를 위해 1층에서 4층까지의 인원이 대신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니까 착취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 행위가 게임이라는 행위로 대체되면서 재미로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잔혹하거나 선정성을 높여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폭력과 착취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각 층의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배신을 한다. 7층(박정민)이 대표적이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상황판단이 좋은 엘리트로 보였던 그가 8층과 6층(박해준)의 지배행위에 협력하면서 1층, 2층(이주영), 3층(류준열)이 속한 집단은 계속 가학적인 게임에 참여해 폭력을 당한다. 7층은 이 시리즈에서 강남 좌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7층은 가진 것이 많은 것에 비해 하층인 1-4층의 편을 많이 들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시리즈에서 7층이 누구 편에 서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돈과 판단력을 가진 7층의 선택이 무엇인지에 따라 시리즈 내내 이야기의 온도를 차갑게 하기도 하고 뜨겁게 하기도 한다.
독재에 이어지는 혁명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3층이다. 가장 평범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이면서, 겁도 많고 가진 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각을 독백으로 관객에게 던진다. 즉, 관객이 3층의 입장과 거의 비슷하게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이야기 안에서 3층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다. 그저 당하고 또 당할 뿐이다. 하지만 최상위 계층인 8층을 시작으로 7층, 6층에 의한 독재가 시작되면서 그는 계속 방법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3층이 끝까지 중심 화자인 건, 그가 절망 속에서도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안다. 작은 욕심을 부릴 때도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 마치 밟아도 일어나는 민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리즈의 이야기가 후반부로 달려가면 점점 독재의 경향성이 짙어진다. 8층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모두에게 고문까지 하는 지경까지 간다. 이 잔혹무도한 독재는 결국 혁명을 부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3층과 같은 힘없는 민초, 그리고 그를 돕는 여러 사람들. 그들이 부른 혁명이 후반부를 장식한다.
그 혁명은 화려하지 않다.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잔혹한 쇼를 어떤 방식으로든 끝을 낸다. 더 잔혹한 행위들이 나오고 같은 편을 배신하는 반전들은 쇼의 시간을 늘리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결국 쇼는 끝이 난다. 단지,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원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하고 어쩌면 그 불평등함을 그저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에이트 쇼>를 다 보고 나서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불평등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미 높은 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이고,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민주적이고 평등을 내세우고 있는 정치인들과 상위계층들은 표를 얻기 위해 좋은 말들로 나쁜 행위들을 포장한다. 보이지 않는 착취와 고문은 계속 이어진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쇼를 끝낼 수 있는 건, 결국은 평범한 민초들일 것이다.
이 시리즈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은 <관상>, <더킹>, <비상선언> 연출 이후 이 시리즈를 만들었다. 잘 짜인 미장센과 독특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화면의 비율을 늘리고 줄이면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쇼의 축소판을 만들어냈다. 사회적인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시청률에 매몰되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대중매체의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시리즈다. 또한 설정뿐 아니라 각 캐릭터에 대한 해석도 각기 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나 8층 역할을 맡은 천우희는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가 얼마나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정민, 류준열, 박해준, 이주영, 이열음, 배성우, 문정희 배우들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를 보여준다.
한 번 시작하면 단숨에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달려갈 수 있는 시리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고, 담긴 메시지도 다층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최근 한국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사회적이고, 다층적이고, 흥미로운 시리즈가 등장했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Relative contents
-
-
- 넷플릭스 뮤지컬 영화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NETFLIX, 22.12.25 공개)
감독: 데니스 켈리
출연: 알리사 위어, 엠마 톰슨 등
무려 크리스마스에 개봉한다고 해서 한 달 전부터 두근두근 기대하고 있던 작품입니다.
1997년 개봉한 영화 '마틸다'와 내용 같고요, 거기에 뮤지컬을 추가했다고 생각하심 될 듯해요
근데 기대를 너무 많이 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지루하고 유치한 느낌이 많이 났답니다 ㅠㅠ
전체 관람가다 보니 아이들도 보기 쉽도록 단순하게 연출했겠지만,
아무래도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거라며 과대 홍보를 하여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여 놨던 것도 있는 거 같아요. 일반 영화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은 이야기 진행이랄까요?
사실 '마틸다'에서도 이야기가 너무 뒤죽박죽이라고 생각한 1인입니다만... 학대당하는 아이, 그러나 어딘가 천재성이 있는 아이, 입학하게 된 학교의 교장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그 와중에 초능력을 부릴 수 있단 걸 알아챈다, 게다가 아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이 거둬 주기까지... 소재가 하나인 게 아니라 다양한 소재가 뒤엉켜 하나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이야기잖아요.
'마틸다'에서는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에서는 마틸다가 머릿속에 상상한 소설이 한 편 등장하는데요. 그 소설의 주인공은 사실 허니 선생님이에요
임신한 채로 곡예를 부리던 엄마는 자신을 낳고 돌아가시고, 이모 손에 맡겨진 허니 선생님은 학대를 당하죠 그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의 아빠는 대응하려다가 아마도, 이모 손에 죽게 된 거 같고요. 그 이모가 바로 트런치불 교장!
자신에게 이런 끔찍한 과거가 있기에 마틸다를 거둬 주기로 한 건데요... 마틸다와 겹쳐지는 허니 선생님의 어린 시절 연출이 굉장히 슬프고 감동적이긴 했지만 사실 영화의 엔딩 치고 그닥 완벽해 보이진 않아요. 마틸다는 행복해졌지만, 시청자가 개운하진 않은...?
하지만 또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본다면 전 사실 이 모든 게 마틸다의 상상 같기도 합니다. 학대를 당하던 마틸다는 이미 죽었을지도요.
자신을 방임하는 부모에게 염색약, 본드 등으로 복수하는 것도 작고 힘 없는 마틸다의 상상이었을지도 모르고요. 트런치불 교장이 있는 그 학교는 어쩌면 고아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학교에 있는 아이들은 마틸다와 달리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정작 트런치불 교장의 학대에 소리치는 부모는 등장하지 않아요. 아니, 그냥 그들의 부모는 등장하지 않아요
오로지 허니 선생님만이 교장의 학대를 막아 줄 뿐 이 모든 게 상상이라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초능력' 때문이겠죠. 그 초능력만 있었다면 마틸다는 부모의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지긋지긋한 트런치불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거든요.
엔딩쯤에서 아빠가 마틸다에게 '딸'이라고 하는데요 평생을 '아들'이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에야 딸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마틸다가 듣고 싶던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많이많이 기대한 것보다... 훠얼씬 실망했다는 게 저의 총평이랍니다 ㅠㅠ 노래를 듣는 맛은 있었지만 귀에 착 감기는 넘버는 없었고, 뮤지컬 '마틸다'로도 공연 중이기 때문에 그걸 한번 보고 싶다는 욕심은 생겼네요~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재관람의사: ★
-
- 평범함이 약점인 뉴 캡틴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과거로 떠났다. 그의 방패를 이어받아야 할 사람은 의외로, 그와 함께 싸워왔던 팔콘 샘 윌슨(안소니 마키)이었다. 사실 스티브 로저스는 캡틴 아메리카로서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가를 고민하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동료들이 다른 의견을 내세울 때도, 혹은 정부가 자신의 신념과 충돌할 때도 스티브는 흔들리지 않는 그의 확고한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에게는 슈퍼 혈청이 선사한 강인한 신체와, 동료인 버키(세바스찬 스탠)와 함께 지켜 온 수많은 전장이 존재했다. 이러한 슈퍼솔저의 힘 덕분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 자체가 일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티브 로저스가 자신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떠남으로써, 그 자리는 공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누구든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는데, 바로 샘 윌슨이 그 방패를 쥐게 된다. 이미 디즈니 플러스의 시리즈 <팔콘과 윈터솔져>에서 그는 “내가 과연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번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정적 축으로 이어진다.
[첫번째 감정] 샘 윌슨의 의구심
샘 윌슨은 자신의 평범함 때문에 끊임없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슈퍼 혈청을 맞지 않은 그에게 특별한 초인적 능력은 없다. 그저 혹독한 군사훈련을 통해 단련된 군인일 뿐이라는 사실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강력함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에서 샘은 방패나 팔콘윙 같은 장비 없이도 여러 번 직접 싸움을 치르는데, 그 장면에서 우리는 그의 평범함이 큰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내가 정말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자꾸만 자문한다. 모두가 기다리는 캡틴 아메리카는 거대한 힘과 이상적인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샘이 처한 불리한 상황은 그의 ‘평범함’을 더욱 부각시키며, 이는 관객들에게도 그를 향한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샘이 겉보기에 강력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관객이 ‘그래서 과연 그가 이기고 극복해 낼까?’라는 긴장감과 흥미를 품게 된다. 그의 평범함이야말로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치인 셈이다.
결국 영화는 샘 윌슨이 가진 ‘선함’과 ‘고집스러운 원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옳다고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방패를 든다. 그런 샘의 행동은 관객들에게 “과연 캡틴 아메리카로서 자격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조금씩 ‘그가 바로 캡틴이 맞다’라는 확신으로 바꿔 놓는다. 정작 샘 자신도 의구심을 거듭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 직책에 걸맞은 사람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샘의 평범함은 한계를 드러내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곧 이 영화의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감정] 로스의 두려움
두 번째 감정은 대통령이 된 로스(해리슨 포드)의 두려움이다. 과거 ‘불같은 성격’과 ‘군인의 기질’로 인해 여러 혼란을 일으켰던 그가, 이제는 국가 지도자의 위치에 서서 이미지 관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때문에 그에게 캡틴 아메리카는 정치적으로 유용한 홍보 수단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는 히어로들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통제하려고 애썼던 그가, 이제는 ‘캡틴 아메리카’의 명성과 상징성을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로스는 어디론가 아픈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어딘가에 극심한 통증이 있어 약을 복용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이것이 훗날 그가 ‘레드 헐크’로 변모하게 될 거라는 떡밥을 깔아 둔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로스의 진짜 감정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다. 임기 내내 강인하고 단호한 리더처럼 굴지만, 실상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로 인해 새로운 무기를 찾고, 빌런인 새뮤얼(팀 블레이크 넬슨)을 몰래 이용해 어떤 사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이 그를 더욱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가는 셈이다.
문제는 그가 정말로 ‘개과천선’했는지, 아니면 끝내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숨기지 못하는 빌런에 가까운 존재인지를 계속해서 헷갈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딸 베티(리브 타일러)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두운 결정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은 그의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가 가진 두려움이 인간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너무 이리저리 줄타기하는 태도 탓에 “정말 믿어도 되는 인물인가?”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이번 영화에서 로스가 보여주는 가장 큰 아쉬움이자, 동시에 다음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미묘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 감정] 새뮤얼의 분노
마지막으로는 메인 빌런인 새뮤얼(팀 블레이크 넬슨)의 분노다. 그는 감마선 노출 부작용으로 인해 뇌가 지나치게 발달해버린 인물이며, 이에 따라 미래를 상당히 높은 확률로 예측해내는 능력을 지닌다. 치열한 전투 능력을 갖춘 빌런이라기보다는, 제모 남작처럼 지능적이고 전략적인 면모로 상대를 교란하는 인물이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세계 파괴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정부(혹은 로스)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새뮤얼은 직접적으로 수많은 군대를 이끌거나 스스로 물리적 대결에 뛰어드는 대신, 미군이나 우군 세력 내에 스파이·세뇌 등을 활용해 정부와 대립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영화 후반부에는 로스가 촉발시키는 ‘대형 분쟁’의 장면이 펼쳐지고, 캡틴 아메리카인 샘 윌슨은 이러한 교묘한 갈등 속에서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물리적으로 샘이 ‘슈퍼솔저’만큼 강하지는 않아도, 정신적·도덕적 기준이 확고하다는 점이 새뮤얼의 지능적 공격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열쇠가 되는 것이다.
결국 새뮤얼의 분노는 스스로를 더 파멸로 몰아넣고 만다. 그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풀어내기 위해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지만, 샘 윌슨이라는 존재가 그가 예상한 경로와 다르게 움직이며 그의 계략을 하나씩 차단해 나간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분노’와 ‘두뇌’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 정의와 올바름을 지키는 자의 의지가 결국 지능적인 빌런의 분노를 이긴다. 이처럼 새뮤얼의 이야기는, ‘힘’이 아닌 ‘정의’가 승리한다는 마블 특유의 주제 의식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장치가 된다.
무난하게 재미있는 마블 영화
결국 이번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샘 윌슨’이 진정한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나는 과정에 집중한다. 슈퍼 혈청 없이 평범한 군인이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라는 것이 샘의 강점이다. 그래서일까, 전체적인 액션의 강도나 임팩트는 과거 스티브 로저스 시절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보다 다소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대신 팔콘윙을 활용한 빠른 공중 액션이 그 공백을 메워주며, 정치적 긴장감과 첩보 요소가 강하게 녹아들어 있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대통령이 된 로스와의 관계를 다루는 장면들이 흥미롭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상징이 한 개인의 영웅성을 넘어, 국가적 정치적 무기로 활용되는 모습을 보면 ‘힘의 사용’과 ‘정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샘 윌슨은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로스를 이해하려 애쓰며 필요한 순간엔 협력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샘의 ‘포용력’을 확인하며, 그가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안소니 마키가 보여주는 샘 윌슨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는 스티브 로저스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다. 힘에 의존하지 않고, 대신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싸움을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마블 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진 관객들도, 이 영화가 주는 다른 매력과 새로운 시작점으로서의 의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개봉 전부터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받았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결과적으로 ‘무난한 재미와 새로운 정체성’을 동시에 잡아냈다고 평하고 싶다. 스티브 로저스의 시리즈에 비해 파괴력이나 액션 스케일은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와 정치적 긴장감을 잘 살려내며 마블 유니버스의 새로운 출발에 걸맞은 이야기를 완성했다.
만약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를 사랑했던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에서도 낯설고 새로운 캡틴이 만들어가는 서사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영화는 마블의 방대한 세계관을 잘 몰라도, 독립된 스토리로 충분히 이해하며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으니 부담 없이 관람해도 좋다. 샘 윌슨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고민과 성장 스토리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
- 죽음을 대하는 태도
죽음을 떠올리면 두려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죽음을 잊고 삶을 살아간다. 죽음이 느껴지는 순간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거나 큰 사고를 당하는 순간들일 것이다. 잊고 지내다가 그런 순간을 맞이하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죽음을 피하려 무척 조심하게 된다. 모두에게 결국 찾아오는 죽음은 두려운 존재이지만 그렇게 아주 가끔만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나의 목숨이 여러 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까. 죽음은 나라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완전히 소멸해 버린다는 두려움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죽었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용감하게 위험한 일에 도전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다른 도전을 하고 위험한 일들도 해나가다 보면, 어쩌면 하나의 생을 살아가는 것보다는 다른 것을 보고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목숨이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장화신은 고양이
영화 <장화신은 고양이:끝내주는 모험>의 주인공 장화신은 고양이(목소리:안토니오 반데라스)는 9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 그가 모험을 하는 모습에서는 두려움의 태도를 볼 수 없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고 위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유쾌함은 그런 두려움 없는 삶에서 오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확신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못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그런 삶을 즐긴다.
그는 배부른 왕이나 영주를 괴롭힌다. 엄청나게 축적된 곡물과 돈을 훔쳐 하층민들에게 돌려준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위험에 처하고 실제로 그에게는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있기도 하다. 많은 사람에게 쫓기는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여유가 넘친다. 그런 그는 모험 중에 여덟 번째 죽음을 맞는다. 잠시 후에 다시 깨어난 그는 크게 신경 안 쓰는 것 같았지만 이제 한 번만 더 죽으면 완전히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달라진다.
그때부터 늑대 모습을 한 죽음은 장화신은 고양이를 따라다닌다. 처음 늑대를 본 장화신은 고양이의 반응은 겁에 질린 모습 그대로다. 털이 곤두서고 몸이 떨린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겪어보지 못한 공포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특유의 긍정적인 태도도 사라져 버린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던 그에게 죽는다는 공포는 일반 사람이 느끼는 것에 비해 훨씬 큰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죽음을 종종 겪는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소에는 죽음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죽음이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모두의 목숨은 하나지만 매번 죽음의 공포 속에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장화신은 고양이에게 죽음은 전혀 생각하거나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잠자는 것처럼 잠시 기절했다 깨어나는 과정이 죽음을 느낄 수 있는 전부였기에 8개의 목숨까지 그는 죽는다는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장화신은 고양이의 극복기
영화가 보여주는 겁에 질린 장화신은 고양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자신이 살아오던 삶의 모습을 포기해 버린다.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왔던 명성과 이미지를 모두 버리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그가 다른 고양이들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습 속에는 삶의 활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장화신은 고양이가 공포로 인해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과정이 무척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영화에는 강아지 페로가 장화신은 고양이가 같이 모험을 하게 된다. 페로는 어린 시절부터 버림받았던 캐릭터이다. 그런데 그의 삶의 태도는 무척 긍정적이다. 자신은 늘 버림받았고 운이 안 좋았으며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삶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친구들에게 버림받으면서도 친구들의 장점을 말하는, 다르게 보면 바보 같은 캐릭터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인지 그에게는 두려움이나 공포가 적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친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돕는다. 자신의 목숨은 하나뿐이지만 다시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지고 싶어 하는 장화신은 고양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돕는 페로의 모습은 무척 감동적이다.
장화신은 고양이가 자신의 삶에 처음 찾아온 죽음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모르는 캐릭터라면 페로는 그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약간은 달관한 듯한 페로의 모습은 오랜 삶을 살았던 장화신은 고양이보다 더 성숙해 보인다. 그에게 중요한 건 지금의 삶이고 자신의 옆에 있는 친구들이다.
드림웍스사가 오랜만에 내놓은 영화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은 <슈렉>의 조연으로 등장했던 장화신을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두 번째 영화다. <슈렉>의 세계를 좀 더 확장하여 보여주는 이 영화는 장화신은 고양이와 강아지 페로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삶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제 뉴스레터를 구독하실 수 있어요.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
-
- 낯선 세계를 엿보는 즐거움, 그리고 씁쓸함
경고: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낯선 세계와 그 속의 자신감으로 비롯된 즐거움
분명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다. 그러나 영화가 포르노 세계에 투신해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남자를 다루고 있단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은 왜 굳이 이 영화를 봐야 하나 생각이 들 것이다. 물론 소재가 소재인 만큼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부기 나이트>는 단순히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한 영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매력은 영화 속 배우들의 육체적 매력이 아니라 디스코 음악과 네온사인으로 치장된 1970년대 ~ 1980년대 미국의 분위기, 그리고 그에 편승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모인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 만들어진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이자 성공한 포르노 배우였던 더크 디글러(마크 월버그)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다. 그는 평범한 소년 '에디'로서 어떤 식당에서 알바를 하고 있을 때에도 길다란 물건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이었다. 마침 식당에 있었던 잭 호너(버트 레이놀즈)는 에디의 소문을 듣고 포르노 배우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다. 마침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에디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더크 디글러'라고 하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에 걸맞게 에디, 아니 더크에게는 새로운 삶과 잭을 포함한 스태프, 포르노 배우로 이뤄진 새로운 공동체가 찾아온다.
더크의 기대감을 반영이라도 하듯 그 공동체는 더크에게는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그 공동체의 리더 역할도 겸임했던 감독 잭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포르노도 예술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 말에 감화된 배우들은 더크처럼 열정을 다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잭뿐만 아니라 잭의 파트너였던 엠마(줄리안 무어)는 더크를 친아들처럼 대한다. 그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더크는 다양한 상을 휩쓰는 대스타로 거듭난다. 비록 그 속에서 마약을 너무 많이 해서 의식을 잃어버린 미성년자 여배우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지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 공동체 속의 밝은 분위기를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기 나이트>는 낯선 세계를 엿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영화다. 복고적이면서도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과 네온사인도 그렇지만, <부기 나이트>는 주인공 더크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고 포르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에 부응하듯 더크 역할을 맡았던 마크 월버그는 말 그대로 더크 그 자체가 되어 영화 안에서 마음껏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까 이야기했던 포르노 감독 잭, 프로 포르노 배우 엠마,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롤러걸(헤더 그레이엄) 등 포르노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잭의 매력에 기대지 않고 영화 속에서 각자만의 매력을 뽐낸다.
그곳도 현실과 별반 다른 게 없다는 씁쓸함
그런데 이 즐거움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화려한 분위기 속에 숨은 어둠을 끄집어내면서 씁쓸한 감정으로 바뀌게 된다. 잭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리틀빌이라는 스태프가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자살을 하게 된 뒤, 그 어둠은 마침내 더크를 포함한 '가족'들의 삶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잭은 비디오의 대량 생산 시대가 찾아옴에 따라 점차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성인 영화를 제작하는 게 손해가 되는 상황에 직면했고, 더크는 조니라는 젊은 배우의 합류로 인해 자신이 퇴물이 되어서 포르노 세계에서 버려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성공을 자신감 넘치게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이 시류에 어떻게든 적응하려는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끝내 잭의 곁을 떠나게 된 더크는 음반을 내려고 하는 등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간다. 더크가 떠난 뒤 잭은 종종 외로움에 빠진다. 사실 남겨둔 가족이 있었던 엠마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려고 하지만 포르노 배우라는 직업적인 한계에 부딪쳐 끝내 가족과 같이 살지 못하게 된다. 롤러걸은 우연히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던 남자를 만나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져서 홧김에 폭력을 행사한다.
세상과의 소통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들이 다시 공동체를 이루는 것밖에는 없었다. 이 결말은 표면적으로는 잭을 머리로 하는 가족의 회복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훗날 결말에서 개구리비가 내리는 이적을 통해 묘한 뜨거움을 자아내게 했던 <매그놀리아>와는 달리, 이 재결합은 불완전해 보인다. 가족 내부의 문제가 계속 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촬영 준비를 마친 더크가 거울을 보고 되뇌이는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 거울은 더크의 얼굴 대신 그의 물건만 비칠 뿐이다.
더크의 재빠른 부침은 어마어마한 육체적 능력만 있으면 큰 성공을 거두는 포르노 세계의 특성을 반영한다. 그만큼 화려하지만 세대 교체도 빠르고, 시대에 밀려 버려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몰락하는 모습, 그것 때문에 피해자든 가해자든 끝없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비극이 비단 포르노 세계와 1970년대 ~ 1980년대 미국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리라. 결국 <부기 나이트>를 통해 느꼈던 씁쓸함은 즐거움마저도 덮어버리지 못한 익숙한 비극성에서 비롯된다.
-
- 유쾌하고도 진솔한 러브
유쾌하고도 진솔한 러브
영화 <엘리멘탈>
감독] 피터 손
출연] 레아 루이스, 마무드 애시, 웬디 맥렌던 커비, 메이슨 베르트하이머
시놉시스] 불, 물, 공기, 흙 4개의 원소들이 살고 있는 ‘엘리멘트 시티’ 재치 있고 불처럼 열정 넘치는 ‘앰버'는 어느 날 우연히 유쾌하고 감성적이며 물 흐르듯 사는 '웨이드'를 만나 특별한 우정을 쌓으며, 지금껏 믿어온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스포일러 유의#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다영화 엘리멘탈은 불 속성을 가진 엠버의 가족이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를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엘리멘트 시티에서 물, 흙, 공기 원소들은 평화롭게 그들의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불들이 이주를 오면서 엘리멘트 시티 외곽에 불의 집성촌(?)을 만들어 생활하기 시작한다.
초반 그들이 이주를 할때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이들이 없었다. 불의 속성상 화르륵 주변을 태우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낯선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렌트할 수 없었던 그들은 엘리먼트 시티 외각에 아무도 살지 않는 쓰러지기 일보 직접의 집을 구해 그곳을 보금자리로 택한다.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집다운 집을 만들고, 불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식량과 자재들을 팔면서 점차 불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나간다.
엘리먼트 시티 내에 한 공간에 자리잡긴 했지만 엘리먼트 시티에서 함께 어울린다기 보다는 그저 한 공간에서만 그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기존 엘리멘트 시티와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아무래도 이민가정들이 항상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그 뿌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완벽하게 어울리기 힘들다는 모습을 이렇게 서로 다른 성질을 가닌 4원소 중 가장 대립적인 불을 통해서 이민가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
영화를 보는 내내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엠버와 그녀의 아빠 버니의 반목이다. 그 둘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너무나 사랑하여 서로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아빠 버니는 가게를 계속해서 이끌어오면서 이 가게를 딸 엠버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너무나도 다혈질인 엠버에게 넘겨주기에는 때가 이른 것 같아서 더 성장하면 이 가게를 물려주고자 한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엠버 역시 가게를 물려받는 것을 꿈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엠버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존재는 바로 물 '웨이드'다. 다른 이들이 불인 엠버를 무섭고, 다른 존재로 인식하며 거리를 둔다면 웨이드는 엠버를 전혀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의 원소로 봐준다. 버니의 가게가 그동안 법을 어기면서 운영을 한 것을 적발하고 공무원으로서 이를 시청에 고발하지만 버니와 엠버의 사정을 알고 진심으로 이를 도와주고자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엠버에게 투명하고도 강한 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웨이드는 그런 그녀에게 꿈을 찾아가라며 응원을 해준다.하지만 엠버는 자신을 키우기 위해 이제까지 희생을 한 부모님을 져버릴 수 없었다. 웨이드에게 모진 말을 해가며 가게로 돌아가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서로가 원하고 있는 것을 명확히 얘기하지 않고, 내가 이걸 사실대로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에, 그 사랑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계속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버니와 엠버는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결국 대홍수 속에서 엠버와 버니는 가게는 수단일 뿐 자신의 꿈도 목표도 아니라는 것을 서로가 알게 되면서 그동안 오해했던 묵은 감정을 풀어낸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서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으면 지레 짐작을 할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오해는 계속해서 커지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면서도 건강하게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결국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다른 원소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영화 엘리멘탈은 4원소의 이야기 중에서도 물과 불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공기와 흙은 조연급이랄까? 물과 불의 이야기에서 다름과 이민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던 것 처럼 과연 다른 원소 공기와 흙의 이야기는 또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혼자서 기대를 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사실 현실세계에서도 불은 다른 원소들과 그리 좋은 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은 나무를 태우고, 공기를 뜨겁게 가열시키는 존재니 말이다. 물과 불처럼 서로 상극은 아니더라도 나무와 공기 역시 서로에게 유익하게 무언가를 주고 받는다는 느낌은 아니다 보니 과연 다른 원소들과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지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멘탈 2가 나와서 1에서는 조연급에 불과했던 흙과 공기의 비중이 높아져서 그들과의 관계성에 대해서도 보다 풍족하게 이야기가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엘리멘탈은 이민가정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한 가족의 사랑 방법에 대해서 유쾌하면서도 진솔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었다.
-
-
-
- 영화 <자산어보> 파이널 예고편
“이 양반은 대역 죄인이니 너무 잘해줄 생각들 말어”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그 곳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되어 책을 쓰기로 한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너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지?"
그러던 중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정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정약전'의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결심하는데...
-
- 영화 <배드 가이즈> 1차 예고편
사상 초유! 바른 생활 #갓생프로젝트 ON!
최고로 나쁜 녀석들의 짜릿한 미션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