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4-02-15 00:00:22
달콤한 초콜릿을 한입 문 것 처럼 행복한 기분
꽉 닫힌 해피엔딩 <노팅힐> 리뷰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다. 아름다운 시절을 지나고 있는 남녀가 우연히 만나 호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 때문이거나, 혹은 작은 사고가 생기거나 하는 사소하거나 혹은 크나큰 오해와 위기를 맞이하지만, 결국은 마침내 사랑을 확인하는 것.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살았습니다. 라는 한 문장의 자음과 모음 사이에 수 많은 생활의 고단함이 묻어 있는 것을 아는 나이지만, 그래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슬픈 로맨스나 쿨하게 열린 결말보다는 꽉닫힌 해피엔딩이 좋다. 달콤한 초콜릿을 입안 가득 만족스럽게 먹은 것 처럼 행복해지는 기분.
주기적으로 이 행복함을 채워주는 것은 ‘노팅힐’이다. 런던 노팅 힐이라는 마을에서 작은 여행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이혼남 ‘윌리엄 태커’ 어느 날 세계적인 스타 ’애나 스콧’이 다녀간다.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이 엄청난 일에 당황하던 그는 주스를 사러 다녀오다가 그녀와 다시 한번 마주치는데 들고 있던 오렌지 주스를 그녀에게 쏟고 만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16.5m앞에 있는 파란 대문의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는데,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떠나기 전에 갑작스럽게 그에게 키스를 하고, 그는 이 일을 내내 떠올린다. 며칠 뒤 애나는 윌리엄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와달라고 하고, 윌리엄은 ‘승마와 애견’의 기자인것처럼 인터뷰를 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며 호감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날 밤 여동생 생일파티에 참석하는데, 윌리엄의 친구들과 평범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파티 이후 둘은 더욱 가까워지고 공원도 함께 산책하고 데이트를 하고 호텔에 올라가게 되는데 미국인 남자친구가 와 있다. 룸서비스직원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숨기도 돌아오는 윌리엄.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를 잊지 못하는 윌리엄.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애너의 누드사진이 공개되고, 애너가 윌리엄을 찾아온다. 그리고 가난했던 무명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애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윌리엄을 찾아왔다는데, 윌리엄은 그녀를 배려하며 자신의 집에서 지내자고 한다. 하지만 윌리엄의 룸메이트 스파이크의 실수로 애너의 위치가 알려지고 기자들이 몰려든다. 애너는 배신감에 화를 내고 윌리엄을 떠나 버린다.시간은 흐르고, 애너와 윌리엄은 오해가 쌓이고, 설레는 감정이 서로에게 닿을 듯 닿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애너의 기자회견, 윌리엄은 다시 한번 기자인척 그녀에게 질문을 가장한 사랑고백을 하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둘은 한 기자가 던진 ‘영국에 얼마나 더 머무를 예정인가요?’ 라는 질문에 ‘영원히’ 라고 답한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은 순식간에 열애설의 현장으로 바뀌고, 둘은 마침내 결혼하고, 몇 개월뒤 공원벤치에서 임신하여 윌리엄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애너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도 모르게 웃게 되는 결말.
슈퍼스타와 서점직원이라는 서로 다른 상황에 갈라지고 멀어지지만, 소년 앞에 사랑을 구하는 소녀일 뿐이라는 애너의 고백처럼, 그저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 가는 과정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윌리엄이 처음 애너를 만났던 날 했던 말처럼 ‘비현실적인지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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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최악은 나의 최선일 수 있다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삶에는 단계가 있다. 가령 내 삶의 단계를 거칠게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막연하게 자라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나는 뭐든지 될 거 같았다.
대학 새내기: 수능을 망친 이후 흑화했다. 나는 여전히 오만했고, 내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다.
대학 헌내기: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친구가 많이 생겼다. 인맥도 넓어졌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 좀 별나지만 똑똑한 애 정도로 인식되었다. 내가 부족하단 건 알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대학원: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엔 나보다 잘난 사람이 너무나 많고, 나는 너무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 나는 꽤 오랫동안 절망했다.
사회인(현재):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떻게든 취업을 했고, 그렇게 어수룩했는데 어떻게든 적응했다. 나는 지금 내 일이 좋고, 내 삶에 만족한다. 또 어떤 불행과 우울이 나를 지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시 일어날 준비가 되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특히 10대와 20대 시절에 더욱 그랬다. 학업, 진로, 연애, 교우 관계 등 모든 것이 내게는 해결해야만 하는 거대한 과업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그것에 힘겨워했다. 돌이켜 보면 사실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그때는 그 모든 일이 처음이고 익숙하지 않아서 두렵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이건 말하자면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어둠에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길찾기는 한결 쉬워진다. 나는 삶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주인공, 율리에 역시 이러한 지독한 방황기를 겪는다. 그는 성적에 맞춰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가, 나중에는 심리학자가 되고자 했고, 그리고 또 얼마쯤 지나서는 사진 작가를 꿈꾸는 서점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에는 그 숱한 번복과 탐색의 과정에서 무엇 하나 뾰족하게 되고 싶은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40대의 만화 작가인 악셀이다. 그녀의 거의 곱절을 살아온 그는 '능숙하다'. 그러면서도 20대의, 아직 무엇 하나 이루어내지 못한 율리에를 원하고,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악셀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되고 싶은 것이 된 사람'으로서의 롤모델이자, 그토록 '완성된' 사람이면서도 미숙한 자신을 포용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연인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살았다. 소울메이트를 찾았다는 일종의 환상에 휩싸인 채.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더 정확히는 외면한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인생의 단계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악셀은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고, 율리에는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악셀과 그의 친구들의 삶은 율리에의 삶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악셀은 때때로 일에 매몰되어 율리에를 바라보지 않고, 율리에는 그것이 야속하다. 환상의 베일이 걷힌 어느 시점부터, 율리에는 두 사람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만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에이빈드는 율리에와 닮았다. 율리에가 악셀의 부속처럼 살아갔듯이, 에이빈드 역시 연상의 여인과 함께 살면서 그녀의 삶의 한 부분으로써 살아갔다. 그리고 둘 모두, 무엇도 명확하지 않은 어느 삶의 단계에 서 있다.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리라. 서로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강렬한 사건이지만, 이는 그와 동시에, 비이성적인 충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연인과 헤어져 서로의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순간의 열정은 금세 사라지고, 두 사람은 다시금, 환상 너머의 상대를 발견한다.
그러나 으레 그러하듯,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율리에는 우연한 기회에 텔레비전 쇼에서 여성 혐오적인 내용을 비판 받는 악셀을 보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악셀의 암소식을 듣고서 그를 만나러 갔다. 그 텔레비전 너머에서, 그리고 그 병동에서, 율리에는 언제나 어른처럼 느껴졌던 악셀의 민낯을 바로 본다. 20대의 율리에와 30대의 율리에가 보는 악셀은 서로 다른 존재인 것만 같다. 그것은 그녀 또한 인생의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즈음 율리에는 에이빈드와의 사이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악셀은 '당신이 좋은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율리에가 진정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삶의 흐름을 거부하고 자아를 찾기 위해 끝없이 방황하던 사람이 아닌가?
율리에는 악셀이 임종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키면서, 그를 모델 삼아 사진을 찍는다. 병들어서 마르고 창백한 전 남자친구를 카메라 렌즈에 담는 그의 자세는 사뭇 진지하다. 악셀은 결국 유명을 달리했고, 율리에는 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샤워를 한다.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너무 슬퍼서일까? 그녀의 다리 사이로는 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율리에는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유산했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그것은 비극임과 동시에, 또다른 의미에서의 해방이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 율리에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사진 작가가 되어 숱한 사람들을 피사체 삼아 플래시를 터트린다.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언뜻 보기에, 율리에의 삶 전반은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는 인생처럼 보인다. 서른이 되도록 진로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남자와의 연애도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도 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멍청한 짓을 한다. 설령 우리가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때로는, 다른 누군가의 최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무력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끝내 율리에가 제가 '되고자 한 것이 된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의 자아를 찾아나갈 것이다. 삶의 단계를 넘어서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으레 그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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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사랑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은 시사회에서 감상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내게 일은 이미 일어났다, 그것은 금지된 무엇이었다.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에서 본 이 구절에 오랫동안 매료되었다. 특별하고 아름답다는 말이 더럽고 수치스럽다는 말과 만나 빚어진 독특한 매력이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너무 좋았다는 감정은 확실했다. 소설에서 저 말은 레오폴트라는 소년이 동네의 남자들과 몰래 한 ‘랑데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대전이 뒤덮은 끔찍한 세상에서 소년에게 중요한 건 동성애라는 비밀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죄책감이 드는데도 ‘금지된 무엇’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소년의 마음이 저 한 문장에 완벽하게 담겨있다.
좋아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저 문장을 좋아하기만 했지,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오히려 그 이해 불가능성 때문에 저 문장을 여태 좋아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내 마음에 간직되던 문장은 최근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퀴어>를 보고 갑자기 막연하게 예쁜 문장에서 처절한 문장으로 달라졌다. <퀴어>를 보고 생각했다. 원래 사랑은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내가 빠져든 건 네 찬란함일까, 젊음일까” 1950년대 멕시코시티. 미국에서 도망친 뒤 마약과 알코올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작가 리.
함께할 수 있는 상대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던 리는 태양이 마지막 열기를 태워내며 타오르는 오후에 아름다운 청년 유진을 만나 첫눈에 빠져든다.
노골적인 관심과 구애 끝에 유진과 특별한 밤을 보낸 리. 하지만 마음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유진의 태도에 리는 점점 더 그를 갈망하며 집착하게 되는데…
루카 구아다니노가 빚어내는 사랑
<퀴어>의 줄거리 정보와 예고편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역시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대표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일 것이다. 똑같이 두 남자의 사랑을 다뤘고, 뜨거운 여름을 배경으로 복고 감성의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인 점,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소설을 원작으로 다뤘다는 점이 그러하다. 나 역시 영화를 보기 전까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기대하고 있었다. 초반부는 예고편에서 느낀 감상과 비슷했지만, 비슷한 건 겉으로 드러나는 연출 분위기일 뿐 오히려 정반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여름 한 철에 피어오른 불꽃 같은 사랑 이야기다. 아빠의 연구 작업에 따라간 엘리오와 엘리오의 아빠와 연구를 함께하는 올리버. 두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사랑을 찾았고, 열병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별을 맞이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만이 기록된 사진과 같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 영화의 여운을 즐기는 것도 찬란함만 남은 미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퀴어>는 시작부터 다르다, 미국에서 도망쳐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주인공 '리'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남자를 찾느라 바쁘다. ‘예상치 못한 운명적 사랑’은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리는 사춘기 소년 엘리오처럼 젊고 아름답지도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앤드루 숀 그리어의 소설 <레스>가 떠올랐는데, 두 작품 모두 중년 게이의 자기연민을 다루기 때문이었다(직업도 모두 작가다). <레스>에서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나온다.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선배 게이들은 모두 일찍이 에이즈에 걸려 죽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어질 삶의 레퍼런스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리에게도 똑같은 불안을 느꼈다. 1950년대에 리의 롤모델이 되어줄 선배 게이가 나타날 리가 없다(아예 없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위험천만한 삶을 지탱한 건 젊음이었는데, 이를 잃어버린 삶은 끔찍할 정도로 불안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만 보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특별한 이끌림을 준다. 동성애자가 아닐 수도 있는 유진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부터 리가 그를 한순간의 쾌락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유진과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을 펼치나? 아니다. 오히려 리는 유진과 가까워질수록 자신과 달리 젊고 찬란한 그를 보며 불안하고 조급해진다. 가닿았다고 느끼면 발을 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유진은 존재 자체로 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물론이고 아들의 친구를 사랑한 <아이 엠 러브>, 식인종의 사랑을 다룬 <본즈 앤 올>, 테니스를 소재로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두 친구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보여준 <챌린저스>까지 그동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빚어낸 사랑은 형태는 다양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이라는 것만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퀴어>는 아니다. <퀴어>에서 유진은 철저히 타자화되고, 리의 감정만이 선명하게 전달된다.
유진을 사랑하고 난 뒤로 ‘방탕한 소설가’에 지나지 않았던 리는 한없이 찌질해지기도 하고 비굴해지기도 하고 불안해지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그에게 집착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어떤 사랑을 했느냐’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리가 어떻게 변하느냐’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앞선 영화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감각적으로 묘사했다면, <퀴어>는 더 깊이 들어가 사랑이라는 게 뭔지, 사랑에 빠진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추잡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지 질문한다.
리와 함께 이 질문을 파고들던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느꼈다. 사랑은 원래 추잡하구나. 사랑은, 특별하고, 더럽고, 아름답고, 수치스러운 것이구나.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유
<퀴어>는 제목 그대로 정말 기묘한 작품이다. 사랑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괴로운 것도 처음이었다. 영화를 볼 때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요소인데, 리는 매번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과 행동만 골라서 했다. 그가 중년 게이라서가 아니다. 사랑에 대한 태도가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난 사랑 앞에서 저렇게 처절해지고 싶지 않다.
멜로 영화는 대부분 사랑의 아름다운 점을 보여주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내가 사랑을 기피하는 포인트를 알게 되었다. 나는 리가 마음을 알 수 없는 유진에게 집착할 때, 유진의 곁에서 약물 부작용으로 추한 모습을 보일 때 제발 그만하라고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사람은 무언가를 좋아할 때보다 싫어할 때 진심이 드러난다. 리의 특정 행동이 괴로울 때마다 영화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확신할 수 없는 상대에게 애정을 쏟아붓는 게, 타인에게 내 밑바닥을 보이는 게 너무 괴로워서 사랑이 두려웠다. 나는 사랑 때문에 그 무엇도 감수하고 싶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리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로 사람은 외로운 것보다 괴로운 게 나은 걸까?
나의 지나간 사랑을 생각하면 방어적으로 군 기억밖에 없다. 나 자신이 너무 싫으니까 상대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며 함부로 그 마음을 과소평가하고, 나의 결핍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숨기기에 급급했다. 괴로운 것보다 외로운 게 나은 나는 상대가 누가 되었든 내 결핍을 모를 수 있는, 안다고 해도 내가 개의치 않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유진과 함께할수록 오히려 더 처절해지고 외로워지는 리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마음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사랑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반성했다거나 앞으로 열렬하게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진 않았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고, 난 지금 내 삶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다만, <퀴어>를 통해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사랑의 심연을 확인하고, 저런 형태의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필모그래피 중에서 <퀴어>는 지난 작품에서의 사랑을 모두 종합해서 결론을 낸 느낌이 든다(물론 그는 이후로도 왕성하게 활동할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아이 엠 러브>의 위태로운 금기의 사랑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여름 한 철의 낭만적인 사랑, <본즈 앤 올>의 끔찍하고 절절한 사랑과 <챌린저스>의 자극적인 사랑을 지나 당도한 <퀴어>의 사랑이 내게 말한다.
사랑은 원래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답다고. 그건 너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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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인지 자작인지 뭣이 중헌디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이름마저도 '응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나 영국 출신!' 이렇게 얘기하는 것만 같은 넷플릭스의 <브리저튼>. 19세기 영국판 <가십걸>이라고 해서 시대극이나 사극을 좋아하는 편이라 가볍게 보기 시작했다. 그전에 <에밀리, 파리에 가다>와 <루팡>을 보고 넷플릭스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져있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 포함 모두들 시즌 2가 얼른 다시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시즌 1의 여덟 편을 보는 내내, 나는 브리저튼 집안 8남매 중 다섯째인 엘로이즈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게 보면서도 아래와 같은 의문들이 지속적으로 떠올랐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결혼에 목숨을 걸어야 하지?'
'왜 남자들은 저렇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데 여자들은 못하지?'
언니인 다프네가 런던 사교계에 데뷔하여 좋은 신랑감을 찾기 위해 가면을 쓰고, 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참아내는 것을 보며 엘로이즈는 언니처럼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앞서고, 결혼보다는 본인이 좋아하는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시대가 시대이고 고증을 착실히 한 작품인지라 어쩔 수 없겠지만, (근데 그래 놓고 왜 굳이 다인종으로 캐스팅했는지는 잘 이해가 안되기는 함) 수많은 무도회에서 여자들은 춤을 신청하는 카드를 받아야지만 남자들과 춤을 출 수 있다. 남자들만 선택권을 가지고 있고 여자들은 선택받기를 기다려야 한다. 아, 물론 남자들에게 '어서 나에게 춤추자고 신청해!' 압박을 넣을 수는 있다. 그리고 남자들이 관심 있는 여성에게 구애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가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남자들만 여자의 집에 방문할 뿐, 여자들이 먼저 발을 떼는 장면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장면들은 특정 문화나 관습, 풍습이 후대까지 굉장히 길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줬다.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은 아직까지도 여자들이 먼저 고백을 하거나 프러포즈를 하는 것에 대해서 위의 관점에서 해석을 한다. 여자가 먼저 말을 꺼낼 만큼 매력이 없다거나, 혹은 멋지다거나라는 식으로 평가를 한다. 그 기저에는 아무래도 호감의 표시나 프러포즈는 남자가 먼저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런 생각들이 혹시 인간의 유전자에 박혀있어서 절대 빼낼 수 없는 건가 싶을 정도이다.
결국 우리의 1등 신붓감 다프네는 왕족 다음으로 높다는 공작의 부인이 된다. 조건만 최고인 게 아니라 둘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기까지 하니 일단 다프네의 결혼은 성공한 듯 보인다. 계속 보다 보니 당시 귀족 여성들이 왜 그렇게 결혼에 목을 매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들은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단지 공작부인 혹은 자작부인, 이렇게 누군가의 부인으로 불릴 뿐이다. 쓰고 보니 '취집'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배경을 생각하니 앞서 가졌던 의문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정도로 정리가 되었다. 실제 그 시대에 영국에서 살며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와 그녀의 자매들도 처음에 편견 때문에 남성 이름의 필명을 써서 책을 출간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당시의 시대상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그녀들을 정상 참작해주자.
우리나라는 은장도가 있을 정도로 여성이 순결이나 정조를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처럼 여겨졌다. 나는 이게 유교문화에서 파생된 것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영국 귀족 사교계에서도 떠받들어지는 가치였다. 미혼 여성들은 정원에 남자와 단 둘이 있기만 해도 스캔들에 휩싸여 혼사길 막힐 걱정을 해야 한다. 이 외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가장은 엄마가 아닌 첫째 아들인 점, 귀족 여성들의 생계와 삶의 질은 남편에게 달려있다는 점, 혼전임신이 굉장한 흠으로 여겨지는 점 등 여러 가지들이 내가 지금 사는 세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앞서 말한 관습이나 풍습이 19세기와 21세기, 영국과 한국이라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듯하다.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이렇게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다 비슷한 걸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마지막에 다프네는 본인을 괴롭혔던 가면을 벗고, '척'하지 않고 살기로 한다. 진실되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본인이 쓴 가면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프네는 물론 결혼과 출산을 인생의 과업으로 여기지만, 나름 주먹도 날릴 줄 아는 여성이었다. 내 남편이 공작인지 자작인지보다 중요한 건,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점에서 다프네에게는 본인의 부모님처럼 아이들을 낳고 잘 기르면서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엘로이즈는 피아노와 자수를 배우는 대신,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싶어한다. 이 고민에는 정답이 없으니 다프네와 엘로이즈처럼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면 그뿐이다. 내 해답도 찾아가고 있는 중! 가볍게 볼 수 있는 로맨스인 줄만 알았는데, 보고 나니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작품이었다. 얼른 시즌2가 나오길!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윤캔두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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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의 마지막 일주일, 그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6★/10★
영화 〈더 웨일〉, 그중에서도 주연을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를 향한 관심이 뜨겁다. 브렌든 프레이저는 1999년에 첫 개봉해 2008년까지 세 편이나 이어진 〈미이라〉 시리즈에서 주연을 맡으며 훤칠한 외모와 액션으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액션신을 촬영하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혼 후 거액의 위자료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 회장이었던 필립 버크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생긴 PTSD로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가 합성하여 제작한, 넋이 나간 표정과 충혈되고 눈물이 고인 눈의 그의 사진은 ‘모든 걸 포기한 남자’라는 이름의 밈으로 소비되기도 했다. 요컨대 브렌든 프레이저는 새로운 돌파, 즉 ‘구원’의 계기가 필요했다.
그런 그가 〈더 웨일〉에서 찰리 역을 맡았다. 찰리는 대학에서 에세이 과목을 지도하는 강사다. 그는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진행하는데 화면을 켠 학생들과 달리 홀로 카메라를 켜지 않는다. 찰리가 272킬로그램의 거구이기 때문이다. 살이 너무 많이 쪄서 보조 기구 없이는 걸을 수도 없는 찰리는 자신의 모습이 역겹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카메라가 고장 났다는 핑계로 강의 시간에 검은 화면만 띄워놓는다.
찰리와 그의 삶이 이렇게 망가진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결혼해 엘리라는 이름의 딸을 낳고 키우던 중 딸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가족을 떠났다. 동성 제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딸 역시 사랑했지만 그 당시의 찰리에게는 연인과의 사랑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모든 걸 버리고 선택한 애인은 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찰리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죄책감, 불안, 수치, 좌절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찰리는 이를 달래기 위해 미친 듯이 먹었다. 영화에는 섭식 장애로서의 폭식증과 그 위태로운 과정‧결과를 적확하게 포착한 장면이 종종 나온다. 폭식할수록 몸 상태는 안 좋아지고, 그러면 폭식을 초래한 부정적인 감정은 더 증폭된다. 이는 또다시 폭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찰리는 이 악순환을 멈출 수 없다. 그에게 폭식은 당장에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은 괴로움을 즉각적으로 달래줄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찰리의 몸 상태는 일주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상태까지 악화된다. 찰리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 이는 그가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다.
학교에서 낙제될 위기인 딸 엘리가 찾아오는 건 바로 이때다. 아빠인 찰리를 유독 잘 따랐던 그녀는 버림받았다는 상처로 괴로워했고, 지금은 엄마조차 ‘악’이라 부를 정도로 까칠하고 반항적인 청소년으로 자랐다. 찰리는 그런 엘리에게 손을 내민다.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지금 그가 사랑하는 딸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찰리의 죽은 연인의 동생이자 물심양면으로 찰리를 돌보고 간호하는 리즈, 종말론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교하는 청년 토마스의 서사가 더해진다. 찰리, 엘리, 리즈, 토마스는 모두 나름의 이유로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린 사람들, 즉 누구보다도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서로밖에 없다.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갖고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상태의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의 누군가를 구원하라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이 네 사람은 서로 간의 뒤얽힘에서 무언가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이처럼 〈더 웨일〉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구원의 길을 집요하게 질문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에세이 강사인 찰리가 늘 강조하던 ‘진실성’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아픔을 놀랍도록 섬세하고 강렬하게 풀어내던 영화는 구원의 내용에서는 그만큼의 성취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물론 구원의 문제에는 당연히 명확한 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구원이 어려운지, 무엇이 구원을 가로막는지를 질문할 수는 있다. 영화의 결말, 찰리는 끝내 구원에 도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갈구한 구원이 과연 찰리와 그 주변인 모두를 보듬을 만큼, 찰리가 환희에 젖은 표정을 지을 만큼, 무엇보다 영화에서 찰리가 내내 강조한 ‘진실성’을 온전히 담아낼 만큼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더 웨일〉은 감동적인 영화다. 생의 막다른 길에 몰려 절망하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환기하고, 그런 사람들끼리도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무엇보다 배우 브렌든 프레이저의 서사와 영화의 서사가 묘하게 포개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위로와 희망의 불씨를 전했다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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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하게 나를 안아줄 날 위한 한마디
지난 10여 년간 서울에 집중된 산업 인프라에 제한받지 않고 전주 지역을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우직하게 개성 있는 작품들을 꾸준히 이어오며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수상을 통해 그 역량을 인정받은 최진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으로, 죽었을 뻔한 여자가 자기의 자아와 마주하면서 자기혐오를 극복하고 벗어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 태어나길 잘했어 리뷰이자, 시사회 후기입니다. 전주영상위원회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최진영 감독만의 독특한 개성과 메시지가 담긴 로컬 작품으로서, 주인공 춘희를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관객들을 향한 특별하고 따뜻한 위로를 담아내고 있죠. 더불어 2008년 ‘초감각 커플’로 데뷔한 이래 지난 많은 작품들을 거쳐 최근 ‘한강에게’에게서 인상적인 모습을 선사하며 독립·예술계 대세로 자리한 강진아 배우가 인정받은 연기력으로 주인공 춘희를 맡아 상처받은 개인이 치유되는 동화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간결한 색채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장점들 때문인지 상당히 쉽고, 재미있었으며 상냥하게 풀어가는 전개 방식 또한 마음을 편하게 해줘서 즐거운 관람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태어나길 잘했어 정보
저는 좀... 쩔어있어요...
‘봄에 태어난 기쁨’이라 부르고 싶었지만, 출생 신고 담당 공무원의 실수로 ‘봄에 태어난 여자’라는 이름을 가진 춘희, 1997년 중학생 열다섯 그녀는 부모님과 집을 한꺼번에 잃는 사건을 겪고 홀로 살아남아 외삼촌 식구가 사는 집으로 오게 됩니다. 달갑게 여기는 이 하나 없고,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한 더부살이 다락방 인생은 그렇게 시작이 되죠. 이십여 년이 지나 외삼촌 식구들은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고, 그녀는 홀로 집에 남아 사촌 오빠의 식당에 마늘을 까서 팔며 생활을 이어갑니다. 한 푼 두 푼 모아온 돈으로 어릴 적부터 콤플렉스였던 다한증 수술을 하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말이죠. 그러던 중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진짜 떨어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과거 중학교 시절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The Slug│감독·각본 : 최진영│출연진 : 강진아, 박혜진, 홍상표 외 │장르 : 드라마│상영 시간 : 100분│개봉일 : 2022년 4월 14일│국가 : 한국│등급 : 12세 관람가│평점 : 기자·평론가 5.5, 왓챠피디아 3.1, IMDB 6.0│수상 내역 : 제16회 오사카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재능상)│시청 가능 서비스 : 현재 극장 상영 중(14일부터)
# 태어나길 잘했어, 어떤 이야기?
나를 온전히 구원하고 위로해 줄 사람은 나일뿐
작품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전하려는 최근 독립영화계의 흐름을 이어가듯 여성 주인공이 자신과 화해하고 긍정적인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오래된 가옥의 풍경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남매의 여름밤’처럼 관객에게 기분 좋은 토닥거림을 선사합니다. 그래서인지 과거 유명한 한 장면이 떠올려지는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대사는 조금 진부할지라도 거짓처럼 들리지 않고, 20년 전 자신을 끌어안아 현재까지 남아있는 자신의 슬픔과 트라우마를 지워내며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강진아의 믿음직한 모습은 빛을 발합니다. 일반적이라기보단 엉뚱한 매력과 발랄함을 간직한 채 본인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물인지 모르는 춘희를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로 완성시켰다 볼 수 있죠. 더불어 이러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어린 시절 춘희를 맡은 박혜진과 사랑으로 다가오는 주황의 홍상표는 그녀 옆에서 큰 힘이 되는 존재가 되어줍니다.
아마도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닿는 것을 기피하는 다한증을 가진 춘희를 통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을 비유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고된 일상을 살아가며 끝까지 자신의 안식처를 지키려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힘겹게 살아가지만 남들과 비교하며 내가 못난 것처럼 느끼며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가는 일반인들이 떠오르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용기를 얻으며 끝끝내 모두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끼며 겁먹었던 과거를 감싸 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과정이 극적이거나 주도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진 않지만, 누구에게도 찾아올 법한 전환점을 담담하면서 조금은 유쾌하게 그려내주므로 꼭 빨리 가는 것이 정답이 아니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가는 삶도 충분하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죠.
사촌 오빠를 통해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몰리면서 울분을 터트리며 쌓아왔던 분노를 표출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한 번 더 밀어내지만 그것이 곧 자신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안아주는 계기가 되어 스스로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결국 남들의 시선, 주변의 도움이 아니라 올곧이 본인을 소중히 안아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이여 음 깨닫게 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매체에서 나오는 잘 나가는 이들을 통해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현재의 세태를 어느 정도 투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못 났다고 생각한들 모두가 귀하게 태어나 누군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인 걸 잊어먹었을 뿐이죠. 그렇게 영화는 우리가 잊었던 마음들을 춘희라는 인물을 통해 조금은 엉뚱하고 투박하지만, 그 바탕만은 다가온 봄처럼 따뜻하게 위로를 전달해 줍니다.
엔딩곡이에요 강진아 배우님이 부르셨어요 :) 가사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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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와 광기가 만든 지옥에서, 진짜 죄를 묻다.
지옥 (Hell Bound, 2021)
개봉일 : 2021.11.19. (넷플릭스 공개)
감독 : 연상호
출연 : 유아인, 김현주, 박정민, 원진아, 양익준, 김도윤, 김신록, 류경수, 이레
공포와 광기가 만든 지옥에서, 진짜 죄를 묻다.
인간들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한 존재들을 초월적인 존재 또는 인간 사회를 벗어난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한다. 우리는 항상 인간 세계를 초월한 어딘가에 있을 존재와 우리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해 궁금해하고 반복해서 묻는다. 과연 인간을 초월한 존재, 신은 존재하는지, 존재하고 있다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 보고 있다면 어떤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맹목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만일 존재한다면 그는 어떤 존재일까. 궁금할 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은 신에 대한 궁금증 또는 불신을 품고 있는 인간들이 초자연적 현상을 마주하게 된 후 나타나는, 지독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들은 신의 심판이란 행위를 보며 고뇌한다. 신이 바라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이 초자연적인 현상은 신이 내린 심판이 맞는 건가. 신은 과연 옳은 심판자인가. 우리는 이 심판을 피해 가기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지옥>의 세계관 속 인간들은 맞설 수 없는 공포 아래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며 분해된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중심을 지키는 인물들을 무너트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공개된 시즌 1, 더 넓어진 연상호 유니버스
시즌 1은 화당 50분대의 러닝타임, 총 6화로 이루어져 있어 주말 하루를 투자한다면 무리 없이 정주행 가능할 만큼의 분량이다. 주제 특성상 다소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특히 반복되는 폭력과 이해할 수 없는 범위로 튀어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쾌감이 쭉쭉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주제에 맞는, 당연한 연출들이었지만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절대 정주행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정도였다. (개인적으론 1부에 해당하는 1-3화가 특히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지옥>의 제작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원작을 접했을 때 느꼈던 신선함과 충격을 영상을 통해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되다니, 거기에 박정민 배우님이 캐스팅되다니! 말 그대로 ‘지옥 공개까지 존버 모드’였다.
<지옥>의 원작자(스토리 작가)이자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님은 <돼지의 왕>, <창>, <사이비> 등의 애니메이션 영화와 첫 실사 영화 <부산행>을 통해 ‘연상호 유니버스’를 차근차근 쌓아왔다. 조금 슬프게도 최근에 발표한 <염력>, <반도> 같은 경우엔 호불호가 꽤 강하게 나뉘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옥>은 그 호불호를 절반 이상 뒤집어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아인, 김현주, 박정민 배우 등 탄탄한 필모를 쌓아온 배우들과 원진아, 김신록, 류경수, 이레 배우 등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배우들로 구성된 라인업과 지옥의 사자들을 구현한 묵직한 CG, 그리고 신선한 스토리라인까지. 딱, 연상호 감독님이 담아내고 싶었던 것들을 욕심껏 밀어 넣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시즌의 엔딩을 보면서 웹툰의 스토리를 넘어 이 세계관을 더욱 크게 펼쳐나갈 시즌 2가 탄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지금 작품에 대한 반응도 뜨거우니 감독님이 더 욕심내서 시 즌2를.. 꼬옥 제작해서 ‘연상호 유니버스’를 더 넓혀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공포를 마주한 인간들의 군상과 믿음의 충돌
<지옥>은 신에 대한 궁금증을 따져 묻는 작품이라기보단 신이 행했을 거라 추정되는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만들어지는 인간들의 여러 모습에 주목한다. 그리고 신이 행하는 심판의 기준, 공포 앞에서 가진 믿음의 무의미함, 집단이 만들어낸 그릇되고 폭력적인 믿음에 대해 반복해 질문하고 이야기한다.
이 반복되는 질문을 던지는 인물과 폭력적인 믿음을 가진 인물들이 충돌하며 여러 군상을 만들어내고, 시간이 지나 <지옥>속 세상은 인간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지옥의 모습과 가까워진다. 몇몇 인물들은 신이 만든 세상이 아닌 이전과 같은 인간들의 세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침내 아주 작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희망, 누군가에게는 단단히 쌓아올린 믿음을 무너트릴지도 모르는 걸림돌. 지켜보는 입장에서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문득, 내가 <지옥>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명확한 방향과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공포에 둘러싸인 채, 어딘지 그럴싸한 그들의 교리를 들으면서, “난 어찌됐든 속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당장 내가 시연을 당할지도 모르는 공포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신의 교리를 외치는 사이비에게 홀리지 않을 자신이라... 그래서 이 작품이 이토록 찝찝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진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말하는 죄와 우리가 만든 심판 방식이 무조건 올바르다고, 잘못됐다고 말할 순 없다. 인간의 법 아래서 교묘하게 이득을 보는 나쁜 인간도 있고, 억울함에 피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있고, 그에 도움을 받은 인간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주 혹여라도, 아주 적은 확률로라도 완전한 존재인 ‘신’이 질서를 잡는데 개입한다면 인간 세계에 무조건적인 선과 질서가 찾아올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선과 악, 그에 대한 심판에 대한 100% 올바른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각자의 삶이 다할 때까지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살아야 한다. 어느 날 무거운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나타날 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 고민하고 선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의무가 아닐까.
지옥 시놉시스
예고 없이 등장한 지옥의 사자들에게 사람들이 지옥행 선고를 받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하고, 이 혼란을 틈타 부흥한 종교단체 새진리회와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이들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지옥> 1부, 지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다.
지옥은 크게 1-3화에 해당하는 1부, 4-6화에 해당하는 2부로 나뉜다. 1부에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첫 시연이 일어나고, 새진리회의 1대 의장인 정진수가 세상을 향한 경고장을 날리며 시작된다. 20년 전에 받았던 고지를 숨기고, 마치 지옥에 떨어진 듯 공포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정진수는 세상을 뒤집고 시연을 통해 죽음을 맞이한다.
1부의 주요 인물들은 정진수 의장, 이동욱(화살촉), 민혜진 변호사, 진경훈 형사와 그의 딸 희정, 박정자로 구성된다. 정진수 의장은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의 시연을 받는다’, ‘인간들을 심판하기 위해 신이 나섰다.’는 교리를 펼치며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그에 대립하는 인물은 민혜진이며 정진수의 교리에 아이러니를 더하는 인물이 진희정과 박정자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과연 공정한가, 죄에 대한 심판은 누가 내릴 수 있는가
진경훈은 몇 년 전, 끔찍한 사건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만의 지옥에서 살아왔다. 진경훈과 그의 딸이 다스리기 힘들 만큼 큰 고통과 분노에 쌓여있을 동안,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은 심신미약 판정을 받고 6년을 복역해 사회로 돌아온다. 범인은 모든 걸 잊고, 속 편하게 소주 한 병을 비우면서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인간들이 만든 법으로, 인간들이 내린 심판으로 그의 죗값을 치르기엔 턱없이 모자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 순간, 정진수는 그의 죄를 심판하는 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정진수는 희정의 범인을 잡아 불에 태워 사자들의 시연과 비슷한 모습의 시체를 만든다. <지옥>속 세계에선 새진리회의 말이 법이고, 그 집단을 이끄는 정진수는 신과 같은 존재다.
새진리회가 말하는 교리의 아이러니
정진수는 죄를 지은 사람들만 받는다는 시연의 순간을 맞이한다. 신과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가장 순결한 존재로 비치는 정진수 또한 새진리회의 믿음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외부로 퍼져나갔다면 새진리회의 교리는 순식간에 무너졌을 텐데, 다음 의장 정칠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 사실을 꽁꽁 숨긴다.
새진리회는 ‘죄를 지은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 신이 개입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들어가보면 그들은 맞는 말을 하는 게 아닌, 자신들의 말을 믿도록 상황을 꾸며내고 있을 뿐이다.
죄가 없는 박정자가 시연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시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온갖 추측을 내놓으며 그것을 기정사실화 시켜버린다. 모든 방송매체가 죄 없는 죄인을 화면 가득 담아낸다. 진짜 죄를 저지른 살인범의 모습은 피해자의 가족인 희정도 모를 만큼 꽁꽁 숨겨놓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죄 없는 박정자의 얼굴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만큼 널리 퍼져나간다. 진짜 죄인은 정진수의 손에 죽고, 죄를 저지른 적 없는 박정자는 시연을 받는다. 그리고 2부에 들어선 영재와 소현의 죄 없는 아기마저 고지를 받는다. 새진리회가 말하는 신의 심판이란, 정말 타당한 심판이 맞는 것일까.
공포 앞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인간들. 그들이 만든 지옥
새진리회는 시연이 시작되고 겁에 질린 대중들이 약해진 틈을 타 말도 안 되는 교리를 퍼트린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처음 겪는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중심 없이 팔랑팔랑 흔들리게 된다. 그로 인해 광신도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인간들이 앞서 정해둔 법의 선마저 가뿐하게 침범하지만 아무도 새진리회와 화살촉을 말리지 못한다. 그들이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들이고, 그와 동시에 미쳐버린 존재들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 존재들이 아닌 사자들에 대한 공포와 시연 대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인간들을 ‘인간답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끄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느 날 억울하게 일어난 사고처럼, 이유도 모르고 고지를 받은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고, 그들을 욕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배척시킨다. 정진수가 휩쓸고 간 세상은 어느새 지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의 심판이 어그러지는 순간
이 공포의 시연과 새진리회의 교리에 반하는 인물은 민혜진 변호사와 배영재 PD, 그리고 그의 아내 소현이다. 화살촉 때문에 어머니를 잃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민혜진은 소도의 일원이 되어 새진리회의 교리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1부엔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확 바뀐 모습으로 등장한 2부에선 이 영화의 액션과 흐름을 책임지는 큰 역할을 해낸다.
애초에 새진리회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배영재 PD는 선배의 죽음을 목격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이가 고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소도와 민혜진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은 대체 무슨 이유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걸까. 원망과 분노에서 시작된 이들의 물음은 결국 지옥 같은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을 틔우는 커다란 빛이 된다.
영재와 소현은 서로를 껴안고 아이를 시연으로부터 지켜낸다. 시연을 고지 받은 아이는 살아남고, 고지를 받지 않은 부모가 지옥으로 갔다. 이쯤 되면 신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과연 시연이란 것이 ‘죄인을 골라내기 위한’ 심판의 순간이 맞는 걸까? 심판이라기보단 랜덤하게, 아무에게나 들이닥친 초자연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절대성과 믿음이 깨져버리는 순간이다.
공포로 만들어낸 선
우리는 모두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들 나름대로의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에 맞춰 살기 위해 노력한다. (아닌 악인들도 많은 세상이지만..)
새진리회의 1대 의장 정진수는 20년 전 받은 고지를 통해 공포를 느꼈고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바르게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신이라는 절대적인 공포가 있어야만 사람들이 선을 행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의 심판인 시연이 시작된 인간들의 세상은 전보다 더한 지옥이 되어있었다. 무자비하게 사람을 폭행하는 화살촉, 사람의 죽음을 생중계하는 방송과 그 앞에서 시청률을 챙기며 웃고 있는 새진리회 사람들. 시연자 가족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사고사와 자살을 선택하는 피해자들.
이것이 과연 정진수가 말하던 ‘선으로 가득 찬 세상’이란 말인가. 아니 이게 선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라니. 말도 안 된다.
결국 심판을 내릴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새진리회는 자신들이 신의 말씀을 전하는 존재라 말하며 사람들을 홀린다. 실상은 있지도 않은 권한을 부여한다며 정수리를 연속으로 쳐대고, 말의 앞뒤조차 맞추지 못하는 집단이지만 인간들은 처음 겪는 공포 앞에서 이성을 잃는다.
자신들이 말하는 신의 의도와 전혀 관련 없는 시연은 숨기고, 또 사람들을 탄압하며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던 그들은 ‘신의 심판’을 증거 삼아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 내가 만든 원칙이 있어야만 세상이 돌아간다고, 마치 자신들이 신인 것처럼 우기던 정칠의 모습에 치가 떨린다.
정칠과 새진리회가 주장하던 교리들은 결국 언젠간 탄로날 거짓말이었다. 사자들의 등장이 없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을 하찮은 거짓말. 새진리회는 심판을 내릴 자격이 없다. 또, 시연을 하는 초월적인 존재들조차 인간에게 심판을 내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시연자가 지옥에 가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없으니까.
민혜진이 아이를 안고 올라탄 택시 기사의 한마디가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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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7 노 타임 투 다이 '본드걸'에 대한 모든 것
007 노 타임 투 다이 - 새로운 본드걸
배우 '아나 데 아르마스' 완벽신상정리#007노타임투다이 #007본드걸 #007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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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가 만든 23 아이덴티티
23 아이덴티티(Split) / 2016
- bgm
Money (feat. Celeste Collins) by Pold
http://bit.ly/2PrkqnxBack Home by Ghostrifter Official
http://bit.ly/2PuYB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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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최악은 나의 최선일 수 있다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삶에는 단계가 있다. 가령 내 삶의 단계를 거칠게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막연하게 자라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나는 뭐든지 될 거 같았다.
대학 새내기: 수능을 망친 이후 흑화했다. 나는 여전히 오만했고, 내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다.
대학 헌내기: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친구가 많이 생겼다. 인맥도 넓어졌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 좀 별나지만 똑똑한 애 정도로 인식되었다. 내가 부족하단 건 알지만 그래도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대학원: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엔 나보다 잘난 사람이 너무나 많고, 나는 너무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 나는 꽤 오랫동안 절망했다.
사회인(현재):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떻게든 취업을 했고, 그렇게 어수룩했는데 어떻게든 적응했다. 나는 지금 내 일이 좋고, 내 삶에 만족한다. 또 어떤 불행과 우울이 나를 지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시 일어날 준비가 되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특히 10대와 20대 시절에 더욱 그랬다. 학업, 진로, 연애, 교우 관계 등 모든 것이 내게는 해결해야만 하는 거대한 과업처럼 느껴졌고, 실제로 그것에 힘겨워했다. 돌이켜 보면 사실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그때는 그 모든 일이 처음이고 익숙하지 않아서 두렵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이건 말하자면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어둠에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길찾기는 한결 쉬워진다. 나는 삶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주인공, 율리에 역시 이러한 지독한 방황기를 겪는다. 그는 성적에 맞춰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가, 나중에는 심리학자가 되고자 했고, 그리고 또 얼마쯤 지나서는 사진 작가를 꿈꾸는 서점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에는 그 숱한 번복과 탐색의 과정에서 무엇 하나 뾰족하게 되고 싶은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40대의 만화 작가인 악셀이다. 그녀의 거의 곱절을 살아온 그는 '능숙하다'. 그러면서도 20대의, 아직 무엇 하나 이루어내지 못한 율리에를 원하고,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악셀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되고 싶은 것이 된 사람'으로서의 롤모델이자, 그토록 '완성된' 사람이면서도 미숙한 자신을 포용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연인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살았다. 소울메이트를 찾았다는 일종의 환상에 휩싸인 채.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더 정확히는 외면한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인생의 단계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악셀은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했고, 율리에는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악셀과 그의 친구들의 삶은 율리에의 삶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악셀은 때때로 일에 매몰되어 율리에를 바라보지 않고, 율리에는 그것이 야속하다. 환상의 베일이 걷힌 어느 시점부터, 율리에는 두 사람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만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에이빈드는 율리에와 닮았다. 율리에가 악셀의 부속처럼 살아갔듯이, 에이빈드 역시 연상의 여인과 함께 살면서 그녀의 삶의 한 부분으로써 살아갔다. 그리고 둘 모두, 무엇도 명확하지 않은 어느 삶의 단계에 서 있다.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리라. 서로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강렬한 사건이지만, 이는 그와 동시에, 비이성적인 충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연인과 헤어져 서로의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순간의 열정은 금세 사라지고, 두 사람은 다시금, 환상 너머의 상대를 발견한다.
그러나 으레 그러하듯,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율리에는 우연한 기회에 텔레비전 쇼에서 여성 혐오적인 내용을 비판 받는 악셀을 보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악셀의 암소식을 듣고서 그를 만나러 갔다. 그 텔레비전 너머에서, 그리고 그 병동에서, 율리에는 언제나 어른처럼 느껴졌던 악셀의 민낯을 바로 본다. 20대의 율리에와 30대의 율리에가 보는 악셀은 서로 다른 존재인 것만 같다. 그것은 그녀 또한 인생의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즈음 율리에는 에이빈드와의 사이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악셀은 '당신이 좋은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율리에가 진정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삶의 흐름을 거부하고 자아를 찾기 위해 끝없이 방황하던 사람이 아닌가?
율리에는 악셀이 임종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키면서, 그를 모델 삼아 사진을 찍는다. 병들어서 마르고 창백한 전 남자친구를 카메라 렌즈에 담는 그의 자세는 사뭇 진지하다. 악셀은 결국 유명을 달리했고, 율리에는 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샤워를 한다.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 너무 슬퍼서일까? 그녀의 다리 사이로는 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율리에는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유산했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그것은 비극임과 동시에, 또다른 의미에서의 해방이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 율리에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사진 작가가 되어 숱한 사람들을 피사체 삼아 플래시를 터트린다.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언뜻 보기에, 율리에의 삶 전반은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는 인생처럼 보인다. 서른이 되도록 진로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남자와의 연애도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도 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멍청한 짓을 한다. 설령 우리가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때로는, 다른 누군가의 최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무력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끝내 율리에가 제가 '되고자 한 것이 된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의 자아를 찾아나갈 것이다. 삶의 단계를 넘어서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으레 그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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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사랑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은 시사회에서 감상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내게 일은 이미 일어났다, 그것은 금지된 무엇이었다.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헤르타 뮐러의 소설 <숨그네>에서 본 이 구절에 오랫동안 매료되었다. 특별하고 아름답다는 말이 더럽고 수치스럽다는 말과 만나 빚어진 독특한 매력이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너무 좋았다는 감정은 확실했다. 소설에서 저 말은 레오폴트라는 소년이 동네의 남자들과 몰래 한 ‘랑데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대전이 뒤덮은 끔찍한 세상에서 소년에게 중요한 건 동성애라는 비밀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죄책감이 드는데도 ‘금지된 무엇’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소년의 마음이 저 한 문장에 완벽하게 담겨있다.
좋아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저 문장을 좋아하기만 했지,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오히려 그 이해 불가능성 때문에 저 문장을 여태 좋아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내 마음에 간직되던 문장은 최근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퀴어>를 보고 갑자기 막연하게 예쁜 문장에서 처절한 문장으로 달라졌다. <퀴어>를 보고 생각했다. 원래 사랑은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내가 빠져든 건 네 찬란함일까, 젊음일까” 1950년대 멕시코시티. 미국에서 도망친 뒤 마약과 알코올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작가 리.
함께할 수 있는 상대라면 누구든 상관없었던 리는 태양이 마지막 열기를 태워내며 타오르는 오후에 아름다운 청년 유진을 만나 첫눈에 빠져든다.
노골적인 관심과 구애 끝에 유진과 특별한 밤을 보낸 리. 하지만 마음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유진의 태도에 리는 점점 더 그를 갈망하며 집착하게 되는데…
루카 구아다니노가 빚어내는 사랑
<퀴어>의 줄거리 정보와 예고편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역시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대표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일 것이다. 똑같이 두 남자의 사랑을 다뤘고, 뜨거운 여름을 배경으로 복고 감성의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인 점,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소설을 원작으로 다뤘다는 점이 그러하다. 나 역시 영화를 보기 전까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기대하고 있었다. 초반부는 예고편에서 느낀 감상과 비슷했지만, 비슷한 건 겉으로 드러나는 연출 분위기일 뿐 오히려 정반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여름 한 철에 피어오른 불꽃 같은 사랑 이야기다. 아빠의 연구 작업에 따라간 엘리오와 엘리오의 아빠와 연구를 함께하는 올리버. 두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사랑을 찾았고, 열병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별을 맞이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만이 기록된 사진과 같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 영화의 여운을 즐기는 것도 찬란함만 남은 미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퀴어>는 시작부터 다르다, 미국에서 도망쳐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주인공 '리'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남자를 찾느라 바쁘다. ‘예상치 못한 운명적 사랑’은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리는 사춘기 소년 엘리오처럼 젊고 아름답지도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앤드루 숀 그리어의 소설 <레스>가 떠올랐는데, 두 작품 모두 중년 게이의 자기연민을 다루기 때문이었다(직업도 모두 작가다). <레스>에서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나온다.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선배 게이들은 모두 일찍이 에이즈에 걸려 죽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어질 삶의 레퍼런스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리에게도 똑같은 불안을 느꼈다. 1950년대에 리의 롤모델이 되어줄 선배 게이가 나타날 리가 없다(아예 없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위험천만한 삶을 지탱한 건 젊음이었는데, 이를 잃어버린 삶은 끔찍할 정도로 불안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만 보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특별한 이끌림을 준다. 동성애자가 아닐 수도 있는 유진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부터 리가 그를 한순간의 쾌락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유진과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을 펼치나? 아니다. 오히려 리는 유진과 가까워질수록 자신과 달리 젊고 찬란한 그를 보며 불안하고 조급해진다. 가닿았다고 느끼면 발을 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유진은 존재 자체로 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물론이고 아들의 친구를 사랑한 <아이 엠 러브>, 식인종의 사랑을 다룬 <본즈 앤 올>, 테니스를 소재로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두 친구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보여준 <챌린저스>까지 그동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빚어낸 사랑은 형태는 다양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이라는 것만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퀴어>는 아니다. <퀴어>에서 유진은 철저히 타자화되고, 리의 감정만이 선명하게 전달된다.
유진을 사랑하고 난 뒤로 ‘방탕한 소설가’에 지나지 않았던 리는 한없이 찌질해지기도 하고 비굴해지기도 하고 불안해지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그에게 집착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어떤 사랑을 했느냐’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리가 어떻게 변하느냐’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앞선 영화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감각적으로 묘사했다면, <퀴어>는 더 깊이 들어가 사랑이라는 게 뭔지, 사랑에 빠진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추잡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지 질문한다.
리와 함께 이 질문을 파고들던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느꼈다. 사랑은 원래 추잡하구나. 사랑은, 특별하고, 더럽고, 아름답고, 수치스러운 것이구나.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유
<퀴어>는 제목 그대로 정말 기묘한 작품이다. 사랑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괴로운 것도 처음이었다. 영화를 볼 때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요소인데, 리는 매번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과 행동만 골라서 했다. 그가 중년 게이라서가 아니다. 사랑에 대한 태도가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난 사랑 앞에서 저렇게 처절해지고 싶지 않다.
멜로 영화는 대부분 사랑의 아름다운 점을 보여주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내가 사랑을 기피하는 포인트를 알게 되었다. 나는 리가 마음을 알 수 없는 유진에게 집착할 때, 유진의 곁에서 약물 부작용으로 추한 모습을 보일 때 제발 그만하라고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사람은 무언가를 좋아할 때보다 싫어할 때 진심이 드러난다. 리의 특정 행동이 괴로울 때마다 영화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확신할 수 없는 상대에게 애정을 쏟아붓는 게, 타인에게 내 밑바닥을 보이는 게 너무 괴로워서 사랑이 두려웠다. 나는 사랑 때문에 그 무엇도 감수하고 싶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리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로 사람은 외로운 것보다 괴로운 게 나은 걸까?
나의 지나간 사랑을 생각하면 방어적으로 군 기억밖에 없다. 나 자신이 너무 싫으니까 상대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며 함부로 그 마음을 과소평가하고, 나의 결핍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숨기기에 급급했다. 괴로운 것보다 외로운 게 나은 나는 상대가 누가 되었든 내 결핍을 모를 수 있는, 안다고 해도 내가 개의치 않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유진과 함께할수록 오히려 더 처절해지고 외로워지는 리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마음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사랑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반성했다거나 앞으로 열렬하게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진 않았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고, 난 지금 내 삶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다만, <퀴어>를 통해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사랑의 심연을 확인하고, 저런 형태의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필모그래피 중에서 <퀴어>는 지난 작품에서의 사랑을 모두 종합해서 결론을 낸 느낌이 든다(물론 그는 이후로도 왕성하게 활동할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아이 엠 러브>의 위태로운 금기의 사랑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여름 한 철의 낭만적인 사랑, <본즈 앤 올>의 끔찍하고 절절한 사랑과 <챌린저스>의 자극적인 사랑을 지나 당도한 <퀴어>의 사랑이 내게 말한다.
사랑은 원래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답다고. 그건 너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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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인지 자작인지 뭣이 중헌디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이름마저도 '응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나 영국 출신!' 이렇게 얘기하는 것만 같은 넷플릭스의 <브리저튼>. 19세기 영국판 <가십걸>이라고 해서 시대극이나 사극을 좋아하는 편이라 가볍게 보기 시작했다. 그전에 <에밀리, 파리에 가다>와 <루팡>을 보고 넷플릭스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져있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 포함 모두들 시즌 2가 얼른 다시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시즌 1의 여덟 편을 보는 내내, 나는 브리저튼 집안 8남매 중 다섯째인 엘로이즈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게 보면서도 아래와 같은 의문들이 지속적으로 떠올랐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결혼에 목숨을 걸어야 하지?'
'왜 남자들은 저렇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데 여자들은 못하지?'
언니인 다프네가 런던 사교계에 데뷔하여 좋은 신랑감을 찾기 위해 가면을 쓰고, 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참아내는 것을 보며 엘로이즈는 언니처럼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앞서고, 결혼보다는 본인이 좋아하는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시대가 시대이고 고증을 착실히 한 작품인지라 어쩔 수 없겠지만, (근데 그래 놓고 왜 굳이 다인종으로 캐스팅했는지는 잘 이해가 안되기는 함) 수많은 무도회에서 여자들은 춤을 신청하는 카드를 받아야지만 남자들과 춤을 출 수 있다. 남자들만 선택권을 가지고 있고 여자들은 선택받기를 기다려야 한다. 아, 물론 남자들에게 '어서 나에게 춤추자고 신청해!' 압박을 넣을 수는 있다. 그리고 남자들이 관심 있는 여성에게 구애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가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남자들만 여자의 집에 방문할 뿐, 여자들이 먼저 발을 떼는 장면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장면들은 특정 문화나 관습, 풍습이 후대까지 굉장히 길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줬다.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은 아직까지도 여자들이 먼저 고백을 하거나 프러포즈를 하는 것에 대해서 위의 관점에서 해석을 한다. 여자가 먼저 말을 꺼낼 만큼 매력이 없다거나, 혹은 멋지다거나라는 식으로 평가를 한다. 그 기저에는 아무래도 호감의 표시나 프러포즈는 남자가 먼저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런 생각들이 혹시 인간의 유전자에 박혀있어서 절대 빼낼 수 없는 건가 싶을 정도이다.
결국 우리의 1등 신붓감 다프네는 왕족 다음으로 높다는 공작의 부인이 된다. 조건만 최고인 게 아니라 둘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기까지 하니 일단 다프네의 결혼은 성공한 듯 보인다. 계속 보다 보니 당시 귀족 여성들이 왜 그렇게 결혼에 목을 매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들은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단지 공작부인 혹은 자작부인, 이렇게 누군가의 부인으로 불릴 뿐이다. 쓰고 보니 '취집'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배경을 생각하니 앞서 가졌던 의문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정도로 정리가 되었다. 실제 그 시대에 영국에서 살며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와 그녀의 자매들도 처음에 편견 때문에 남성 이름의 필명을 써서 책을 출간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당시의 시대상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그녀들을 정상 참작해주자.
우리나라는 은장도가 있을 정도로 여성이 순결이나 정조를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처럼 여겨졌다. 나는 이게 유교문화에서 파생된 것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영국 귀족 사교계에서도 떠받들어지는 가치였다. 미혼 여성들은 정원에 남자와 단 둘이 있기만 해도 스캔들에 휩싸여 혼사길 막힐 걱정을 해야 한다. 이 외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가장은 엄마가 아닌 첫째 아들인 점, 귀족 여성들의 생계와 삶의 질은 남편에게 달려있다는 점, 혼전임신이 굉장한 흠으로 여겨지는 점 등 여러 가지들이 내가 지금 사는 세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앞서 말한 관습이나 풍습이 19세기와 21세기, 영국과 한국이라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듯하다.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이렇게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다 비슷한 걸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마지막에 다프네는 본인을 괴롭혔던 가면을 벗고, '척'하지 않고 살기로 한다. 진실되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본인이 쓴 가면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프네는 물론 결혼과 출산을 인생의 과업으로 여기지만, 나름 주먹도 날릴 줄 아는 여성이었다. 내 남편이 공작인지 자작인지보다 중요한 건,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점에서 다프네에게는 본인의 부모님처럼 아이들을 낳고 잘 기르면서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엘로이즈는 피아노와 자수를 배우는 대신,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싶어한다. 이 고민에는 정답이 없으니 다프네와 엘로이즈처럼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가면 그뿐이다. 내 해답도 찾아가고 있는 중! 가볍게 볼 수 있는 로맨스인 줄만 알았는데, 보고 나니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작품이었다. 얼른 시즌2가 나오길!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윤캔두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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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의 마지막 일주일, 그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6★/10★
영화 〈더 웨일〉, 그중에서도 주연을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를 향한 관심이 뜨겁다. 브렌든 프레이저는 1999년에 첫 개봉해 2008년까지 세 편이나 이어진 〈미이라〉 시리즈에서 주연을 맡으며 훤칠한 외모와 액션으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액션신을 촬영하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혼 후 거액의 위자료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 회장이었던 필립 버크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생긴 PTSD로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가 합성하여 제작한, 넋이 나간 표정과 충혈되고 눈물이 고인 눈의 그의 사진은 ‘모든 걸 포기한 남자’라는 이름의 밈으로 소비되기도 했다. 요컨대 브렌든 프레이저는 새로운 돌파, 즉 ‘구원’의 계기가 필요했다.
그런 그가 〈더 웨일〉에서 찰리 역을 맡았다. 찰리는 대학에서 에세이 과목을 지도하는 강사다. 그는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진행하는데 화면을 켠 학생들과 달리 홀로 카메라를 켜지 않는다. 찰리가 272킬로그램의 거구이기 때문이다. 살이 너무 많이 쪄서 보조 기구 없이는 걸을 수도 없는 찰리는 자신의 모습이 역겹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카메라가 고장 났다는 핑계로 강의 시간에 검은 화면만 띄워놓는다.
찰리와 그의 삶이 이렇게 망가진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결혼해 엘리라는 이름의 딸을 낳고 키우던 중 딸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가족을 떠났다. 동성 제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딸 역시 사랑했지만 그 당시의 찰리에게는 연인과의 사랑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모든 걸 버리고 선택한 애인은 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찰리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죄책감, 불안, 수치, 좌절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찰리는 이를 달래기 위해 미친 듯이 먹었다. 영화에는 섭식 장애로서의 폭식증과 그 위태로운 과정‧결과를 적확하게 포착한 장면이 종종 나온다. 폭식할수록 몸 상태는 안 좋아지고, 그러면 폭식을 초래한 부정적인 감정은 더 증폭된다. 이는 또다시 폭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찰리는 이 악순환을 멈출 수 없다. 그에게 폭식은 당장에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은 괴로움을 즉각적으로 달래줄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찰리의 몸 상태는 일주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상태까지 악화된다. 찰리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 이는 그가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다.
학교에서 낙제될 위기인 딸 엘리가 찾아오는 건 바로 이때다. 아빠인 찰리를 유독 잘 따랐던 그녀는 버림받았다는 상처로 괴로워했고, 지금은 엄마조차 ‘악’이라 부를 정도로 까칠하고 반항적인 청소년으로 자랐다. 찰리는 그런 엘리에게 손을 내민다.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지금 그가 사랑하는 딸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찰리의 죽은 연인의 동생이자 물심양면으로 찰리를 돌보고 간호하는 리즈, 종말론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교하는 청년 토마스의 서사가 더해진다. 찰리, 엘리, 리즈, 토마스는 모두 나름의 이유로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린 사람들, 즉 누구보다도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서로밖에 없다.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갖고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상태의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의 누군가를 구원하라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이 네 사람은 서로 간의 뒤얽힘에서 무언가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이처럼 〈더 웨일〉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구원의 길을 집요하게 질문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에세이 강사인 찰리가 늘 강조하던 ‘진실성’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아픔을 놀랍도록 섬세하고 강렬하게 풀어내던 영화는 구원의 내용에서는 그만큼의 성취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물론 구원의 문제에는 당연히 명확한 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구원이 어려운지, 무엇이 구원을 가로막는지를 질문할 수는 있다. 영화의 결말, 찰리는 끝내 구원에 도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갈구한 구원이 과연 찰리와 그 주변인 모두를 보듬을 만큼, 찰리가 환희에 젖은 표정을 지을 만큼, 무엇보다 영화에서 찰리가 내내 강조한 ‘진실성’을 온전히 담아낼 만큼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더 웨일〉은 감동적인 영화다. 생의 막다른 길에 몰려 절망하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환기하고, 그런 사람들끼리도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무엇보다 배우 브렌든 프레이저의 서사와 영화의 서사가 묘하게 포개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위로와 희망의 불씨를 전했다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