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2-05 17:17:09
아카데미에서 외면당한 수작 영화 25편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작품들
버라이어티 선정 [아카데미에서 외면당한 수작 영화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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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메모리
아일린
페어플레이
더 킬러
솔트번
에어
카산드로
올 덜트 로드 테이스트 오브 솔트
블랙베리
플로라 앤 썬
위대한 유산
패시지스
오브 언 에이지
모니카
폴라이트 소사이어티
쇼잉 업
드림 시나리오
출처_ variety
https://variety.com/lists/oscar-snubs-2024-movies-zero-nominations/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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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영화리뷰/반전리뷰]
#반전영화#추리영화#탐정영화
▼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
▼무비워크 먹여살리기???
https://toon.at/donate/637245550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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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티저 예고편
완전 기대된단~마리오! 전 세계가 사랑하는 '슈퍼 마리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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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런칭 예고편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네 번 낙선한 정치인 ‘김운범’ 앞에
그와 뜻을 함께하고자 선거 전략가 ‘서창대’가 찾아온다.
열세인 상황 속에서 서창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선거 전략을 펼치고
‘김운범’은 선거에 연이어 승리하며, 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까지 올라서게 된다.
대통령 선거를 향한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되고 그들은 당선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던 중 ‘김운범’ 자택에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로 ‘서창대’가 지목되면서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치열한 선거판,
그 중심에 있던 두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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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에게 관람을 권함
7★/10★
지푸라기가 깔린 사무실에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문을 두르리며 문을 열라고 소리친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남자를 부르는 소리가 점차 커진다. 사무실 안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창틀 위로 올라간다. 몸을 던진다. 즉사한다.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비밀경찰로 일하는 볼코노고프 대위는 ‘쿵’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자신과 함께 반역자를 고문하던 소령이 죽은 채 늘어져 있다(소령 사무실의 지푸라기는 고문자의 피가 바닥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깔린 것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다른 대원들은 소령 근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소령의 시신을 수습한다. 볼코노고프가 건물 위를 올려다보자 누군가 고개를 내밀고 괜한 소란을 내지 말라는 의미로 입에 검지를 갖다 댄다. 볼코노고프는 직감한다. 상황 파악을 마친 그는 빠르게 결단한다. 문서 하나를 들고 건물과 조직을 탈출한다. 경찰은 바로 대위를 쫓기 시작한다. 대위의 주변 인물과 동료들은 볼코노고프가 반역자를 대하던 방식으로 심문받는다. 당과 조직의 충성스러운 하수인이었던 볼코노고프는 하루 아침에 자신이 좇던 반역자가 된 것이다.
과거 언젠가, 볼코노고프는 반역자들이 왜 끝까지 잘못을 부인하고 결백을 주장하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는 상관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천진한 얼굴로 자기 나름의 생각을 말하는 그에게 상관이 웃으며 말한다. 그들이 진짜 결백하기 때문이라고. 그럼 왜 결백한 사람들을 부러 반역자로 몰아 처벌하는 걸까? 그들이 ‘믿을 수 없는 분자’들이기 때문이다. ‘예비 간첩’에 대한 예방 조치로서 의심 분자들을 척결하는 게 그들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이 반역자라 지목하면 그 사람은 반역자가 된다. 자살한 소령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볼코노고프의 차례다.
때문에 볼코노고프는 애초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탈출할 때 챙긴 서류를 들고 자신이 고문해서 받아낸 ‘자백’으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유족을 찾는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지금껏 자행되어온 반역자 처벌이 아무런 근거 없는, 공포를 낳기 위한 기계적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반역자로 몰림으로써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볼코노고프의 모습과 그를 좇는 비밀경찰 조직원을 교차로 담아내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서사의 핵심은 볼코노고프가 과연 진정한 용서를 구하고 그를 밑절미 삼아 구원받을 수 있느냐다. 당연히 쉽지 않다. 파시스트도 버텨낸 아빠가 당신네들은 견디지 못했다는 한 피해자 가족의 말이 알려주듯, 용서를 구하는 일은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야기하는 죄책감이 주는 통렬한 고통을 마주하는 일, 즉 자기 자신의 영혼을 찾아나서는 일이기도 하다. 체제의 당위성을 방패 삼아 마비된 채 잠자고만 있던 그의 영혼이 깨어나자 오랜 기간의 침묵이 고통스러운 윤리적 비용을 청구한다. 하지만 볼코노고프는 도망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그는 가해자고,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용서에는 둘 이상이 필요하다. 용서를 구하는 자와 용서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용서를 갈구하는 볼코노고프의 여정이 쉽지 않은 건 그의 윤리적 각성이 야기하는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용서해주겠다는 사람의 부재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에는 경찰에 쫓기며 만신창이가 된 볼코노고프가 한 아파트에서 경찰에 의한 고문으로 반역자로 몰려 피해를 당한 주민이 있는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볼코노고프를 철저히 외면한다. 괜히 그와 엮였다가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들을 잃은 한 남자는 볼코노고프를 보듬는 척하며 그를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한다. ‘대중독재’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자의 폭력적 의지 관철은 독재의 한 축일 뿐이다. 독재는 그런 권력자에게 소극적‧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대중이 있어야만 완성된다.
언젠가 한 역사학자에게 한국은 유독 가해자의 반성과 성찰이 없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근현대사 내내 반복되었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지금까지도 횡행한 시대인데도 ‘부역자인 내가 반성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볼코노고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기꺼이 품어줄 대중의 용기도 필요하다. 용서를 구하는 볼코노고프의 용기를 외면하거나 악용한 사람들과는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공산주의자’, ‘빨갱이’, ‘체제 위협’ 등의 말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과거로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던 시대가 우리가 뽑은 최고 권력자의 호명을 통해 다시금 소환된 것이다.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영화 속 비밀경찰이 그러했듯, 의심 가는 사람들을 모조리 범죄자 집단으로 몰아간다. 볼코노고프의 비극을 막으려면, 이런 유의 구분선 긋기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한번 전선이 만들어지고, 그에 기반한 폭력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이를 되돌리기 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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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의 어느 구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연출: 김동령, 박경태 | 제작: 웃음과바늘, ㈜시네마 달 | 배급: ㈜시네마 달 | 출연: 박인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누구보다 죽음을 많이 본 미군 ‘위안부’ 출신 박인순이 스스로 자신의 복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저승사자들에 맞서는 오드 판타지 영화다. 김동령, 박경태 감독이 <거미의 땅>(2013)에 이어 기지촌 미군위안부 박인순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나는 사전에 이 영화가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는 일에 꽤나 애를 먹었다.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초청되었다고 하니 다큐멘터리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허구의 인물들이 나와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라 극영화로 볼 요소도 다분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두 감독은 아마 관객과 평단, 영화를 받아들이게 될 이들의 혼란을 일부러 유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기지촌 미군위안부는 우리나라 정부에 의해 자발적으로 벌어진 국가폭력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이들의 보다 많은 이야기를 접하기보다 새어나오는 일부의 선택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영화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듯 기지촌 미군위안부 박인순의 이야기를 더 많이 보여주려는데 애쓰기보다 오히려 허구의 이야기를 씌운다.
영화가 파격적인 형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 까지는 유효했다. 장르 자체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모호한 구분을 유영하지만 이야기 역시 기존의 문법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질서에 의해 왜곡되어야 했던 기지촌 미군위안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데 있어서 들어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력적이지 못한 이야기 자체의 문제와 연기에서의 아쉬움이 이 모든 형식적 도전을 영화에 착 달라붙지 못하게 하고 표류하게 만든다.
우선 난해한 구성의 이야기는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빨아들이지 못한다.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고 박인순 주변의 등장인물들도 별다른 역할 없이 흩날려버린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제목이지만 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고, 박인순이 모든 저승의 관문을 통과하는 후반부도 뜬금없게만 여겨진다. 거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에 놓인 영화의 불균질함이 잘 드러나서 오히려 좋아할 사람도 있겠으나 내게는 그저 인내하고 보기 어려운 연기들일 뿐이었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얼마나 주류 중심적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형식적 시도를 장착했다. 그러나 이 창의적인 현대사의 어느 구전(口傳)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부족하다. 영화가 영화 자체의 만족도를 주지 못할 때 그 작품이 지닌 메시지의 가치도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도발적이지만 표류하고 만 형식적 시도 앞에 그래서 더 아쉬운 마음이 크게 느껴진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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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번 믿어 보고 싶은 감독 '최동훈'
첫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인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마음을 열고 대하게 된다. 아, 너무 괜찮네…하고 느꼈던 사람의 다음 만남 그 다음 만남이 계속해서 좋으면 호감은 복리로 쌓이게 되는 법이다.
충격적으로 좋았던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나서,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작품이 누군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 찰진 대사, 속고 속이는 사건들. 잘 짜여진 구조와 세련된 연출.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한 새내기PD였던 시절.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을 넘어선 충격이었던 것이다. '천재가 나타났네.’ 내게 최동훈 감독은 첫인상이 좋은 그런 감독이었다.
타짜, 도둑들, 암살까지 …데뷔 후 10년동안에 연이어 대박을 터트리며 천만 영화를 두 작품이나 만든 감독. 그 작품들이 나의 취향에도 잘 맞아 믿고 보는 감독이었는데 외계+인 1부를 보고 나오며,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포스터를 보며 어쩐지 서늘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래도 감독 이름 하나만 보고 선택한 영화였는데… 알 수 없는 배신감과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외계+인> 1부는 잘되면 속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다른 시리즈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2부가 존재함을 드러내 놓고 개봉했다. (아니 이럴거면 OTT시리즈로 만들었어도 되었지 않나)
2022년 현재의 세계에 ‘가드’’와 ‘썬더’는 인간의 몸에 가두어진 외계인 죄수를 관리하며 지구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서울 상공에 우주선이 나타나고 형사 ‘문도석’은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한편, 630년 전 고려에선 얼치기 도사 ‘무륵’과 천둥 쏘는 처자 ‘이안’이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신검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속고 속이는 가운데 신검의 비밀을 찾는 두 신선 ‘흑설’과 ‘청운’, 가면 속의 ‘자장’도 신검 쟁탈전에 나선다. 그리고 우주선이 깊은 계곡에서 빛을 내며 떠오른다. 고려와 현재, 그리고 외계의 세계가 뒤섞여 스토리를 이해해야 한다. 2022년 인간 속에 수감된 외계인 죄수를 쫓는 이들 그리고 1391년 고려 말 소문 속의 신검을 차지하려는 도사들 사이 시간의 문이 열린다.
사실 1부는 자..이제 배경을 설명해줄게…정도의 느낌이랄까. 선명하게 줄거리를 말하기에 세계관이 복잡하지만 이상하게도 참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기이함. 미래형 SF와 오리엔탈 판타지가 섞인 영상은 어딘가 어수선하고, 캐릭터는 어디선가 본 것 같았고, 스토리는 뻔했다. ‘저기요 …감독님…왜그러셨어요?어디서 부터 잘 못 된건가요?’ 이해가 되지 않아 붙잡고 물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까지 감독에 대해 고민하는 나는 또 뭔가…나는 왜 그를 좋아했는지 반문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암살> 창작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소재에서 시작된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 왔다. 인물을 충분히 탐구하고 인터뷰하며 디테일을 놓치지 않아 캐릭터가 살아있었다. 영화적이지만 사실적인 그런 인물들이 어우러져 촘촘하게 극이 진행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외계+인>은 어쩌면 최동훈 감독이 ‘하고 싶은 거 다해’ 본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오롯이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세계관과 타임슬립이나 썬더, 하바와 같은 장치들. 아마도 내가 <외계+인>을 보고 그토록 당혹스러웠던 것은 화려한 CG나 숨막히는 액션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최동훈 다운 작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의 정체성이 명확히 보이지 않은 작품 인 것은 그가 변했기 때문이거나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 그가 만든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 그는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게다가 이 영화는 둘로 나뉜 영화의 겨우 1부 일 뿐이었으니까. 그가 펼쳐 놓은 것들을 어떻게 마무리 하려고 하는지. 나는 아마도 또 한번 그를 믿고 2부를 보러 갈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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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가 무너진 세계에서
2010년대부터 스마트폰의 이용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며, 인류의 삶은 예전과 달라졌다. 이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고화질의 사진과 영상을 찍히고, 보호자는 자신들이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는 시간엔 패드를 쥐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스마트폰을 가지는 이들. 직전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대를 경유한 세대라면,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태어난 알파 세대의 인생에 있어 스마트폰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소년의 시간>은 13살 소년 제이미를 주인공으로 삼는 시리즈이다. 마시멜로우가 들어간 핫초콜릿을 좋아하는 소년은 동급생 여자 아이 케이티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용의자이기도 하다. 4편의 리미티드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긴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 CCTV에는 명백한 물증이 남았고, 제이미는 사건의 범인임이 틀림없다. 누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가는 이미 밝혀진 바, 이제 질문은 ‘왜’ 제이미가 살인을 저질렀는가이다.
살인의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관계자들은 제이미와 케이티가 맺어온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10대의 소년 소녀가 맺어온 관계는 기존의 문법과는 다르다. 둘 사이에 있어 오프라인 상의 교류는 쉽게 찾아볼 수 없으나, 온라인 상의 SNS에는 두 사람이 나눈 소통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들에게 SNS란 무엇인가. 알파세대에게 있어 SNS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학창시절부터 스마트폰을 이용해온 앞세대로서 SNS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까지. 친구들이 사용하는 SNS의 계정을 자연스레 만들었다. 일상을 담은 사진을 올리고, 온갖 생각들을 기록했다. 친구들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고, 친구들에게 좋아요를 받기도 했다.
성인이 되었다. 페이스북의 시대는 어느새 저물어갔고, 인스타그램은 대세가 되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찍고, 친구들을 태그하고, 태그당한 스토리를 리그램한다. 인스타그램은 하나의 연락처가 되기도 한다. 지인들과 번호 대신 계정을 교환하는 일도 왕왕 있다. 카톡은 하지 않아도 댓글을 달고 dm을 나누는 사이도 있다. 현시대에 SNS를 이용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를 넘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의 관계자들은 이같은 문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CCTV에 남은 물증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인스타그램의 댓글뿐인 상황에서 이들의 분석은 끝없이 현실과 어긋난다. 첫 번째 면담의 시간, 경찰은 케이티가 제이미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친구라고 유추한다. 임상 심리학자도 SNS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제이미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물으며, 여럿이 찍어 올린 사진 속 태그의 의미에 대해 묻기도 한다. 디지털 네이티브에겐 그저 일상에 불과한 일들이 기성 세대에겐 의문이 되고, 제이미와의 소통은 끝없이 실패한다.
태어나자마자 디지털과 연결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는 흐릿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오프라인에서 배제된 이들의 삶에 있어서는 온라인의 삶이 더욱더 선명한 삶일 수도 있다. 케이티에게 ‘인셀’로 칭해지고, 또래 집단에서 따돌림을 받았던 제이미의 삶이 그랬을 것이다. 제이미는 인스타그램의 세계에서 노출이 심한 여성 모델들의 사진을 리포스트하고 댓글을 남겼다. 스냅챗을 통해서는 남학생들과 함께 케이티를 비롯한 같은 학년 여자애들의 반나체 사진을 돌려보기도 했다. 그는 이같은 디지털 성폭력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모두 동참한 일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흐리고, 사진을 유출한 동급생은 안쓰러워한다. 한 번 사진을 유출했으니, 신뢰를 잃어 다시는 그런 사진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온라인 세계에서 그가 습득한 여성의 모습은 편향적이기 그지없다. 성인 여성들은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된 이미지로 비춰지며, 또래 여자를 바라보는 모습 또한 인셀의 논리와 맞닿아있다. 그는 자신이 인셀이 아니라 주장하나, 여성을 일부 남자만 얻을 수 있는 ‘트로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런 그에게 연애와 살인은 게임 같은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케이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진이 유포된 뒤 마음이 약해졌을 그녀를 얻을 ‘영리한 전략’을 세웠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러자 홧김에 그녀를 죽인 것이다. 명백한 물증에도 무죄를 주장하는 제이미. 여성을 소유물이자 트로피 정도로 생각하는 그는 실제로 자신의 행동이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라 해야할까. 결말부에 이르면 제이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그가 유죄를 인정하게 되었는지 작품은 보여주지 않는다. 변한 것은 현실세계와 분리되어 스마트폰을 잃은 채 몇 달을 보냈다는 것 정도일테다. 어쩌면 그는 스마트폰이라는 ‘연결된 신체’를 벗어나, 비로소 오롯한 자신으로 사유하게 되었을 때 죄를 인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문화비평가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 메시지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미디어가 다루는 내용이 메시지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이나, 내용을 담는 그릇인 미디어 자체도 메시지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언제나 손에 쥐고 있는, 어쩌면 신체의 일부라 보아도 무방한 스마트폰을 켜면 여성혐오적인 메시지는 시청각적으로 체화된다. 그렇게 소년들은 자연스레 여성혐오를 배운다. 그리고 이는 온라인 세계를 넘어 오프라인 세계에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소년의 시간>은 단순한 픽션이라 보기엔 현실과 닮아있는 작품이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최근 호주에서는 16세 미만의 아동, 청소년에게 SNS 이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과연 이같은 조치가 무엇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이들은 우회하는 경로를 발견하거나,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연령이 지나면 SNS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즉,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나아가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고 할지언정, 미디어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제이미 이전에 직간접적으로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해온 가부장적인 제이미의 아버지가 있었고, 여성 임상심리학자를 낮잡아보는 남성 경비원이 있었다. 미디어는 사회가 이야기하는 메시지를 품고 발화한다. 기성 세대가 새로운 세대의 관계의 문법을 넘어, 삶의 문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노력만으로는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적인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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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2차 송환(The 2nd Repatriation)
South Korea/2022/156min/김동원 감독 작품
북한에서 지령을 받고 남한에 파견되었다 검거되어 오랫동안 전향하지 않은 사람을 비전향 장기수라 한다. 수십 년간 감옥 생활을 한 이들 중 일부는 양국의 협의를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1차 송환).
〈2차 송환〉의 주인공 김영식은 ‘전향 장기수’다. 즉 그는 오랜 수감 생활 끝에 북한의 사회주의 사상을 ‘버렸고’ 이후 석방되어 쭉 남한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김영식이 정말 전향한 것은 아니다. 모진 고문과 끝을 알 수 없는 수감 생활이 그를 지치게 해 전향서를 썼을 뿐이다.* 김영식이 2000년에 발표된 6‧15 남북 공동 선언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내용의 어깨띠를 매고 지하철을 돌며 선전 활동을 하고, 자신을 촬영한 감독의 이전 영화가 민족의 아픔을 다루지 않았다며 혀를 차는 모습에서도 그가 여전히 외세에 의한 민족 분열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십 년의 수감 생활과 그 이후 또 수십 년의 남한 생활. 영화는 남북한의 경계에 선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펼쳐낸다. 언젠가 북한에 돌아갔을 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강제 전향시킨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노인, 송환을 위해 남한에서 만난 부인과 이혼 절차를 진행 중인 노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어느새 익숙해진 남한 생활에 마음이 복잡한 노인, 남편이 ‘계속 남아서 싸워라’라고 말할지 ‘얼른 고향으로 돌아와라’고 말할지 상상해보는 노인 등등. 한 시민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는 김영식의 주장에 혀를 찬다. ‘쓰라린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놈만 저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장기수가 상상조차 어려운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는 점에서 이 비난은 공허하다.
2차 송환을 신청한 장기수 46명의 복역기간을 합치면 898년이다. 장기수들은 죽기 전 고향 땅을 밟아보겠다는 마지막 바람으로 이 시간을 버텼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절에도, 엄혹했던 시절에도 이들의 기다림은 늘 뒷전으로 밀렸다. 남북한의 위정자들이 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먼저 고민했기 때문이다.
2차 송환 운동은 20년 넘게 이어졌다. 그사이 많은 장기수가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 대부분은 90대가 되었다. 장기수 문제는 도대체 언제쯤 남북관계의 시급한 의제로 취급될 수 있을까? 영화의 내레이션이 말하듯 누군가는 장기수를 ‘빨갱이’라 부른다. 다른 누군가는 ‘국가와 민족을 운운하는 국수주의자’, ‘그저 불쌍한 노인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감독은 장기수를 당당하고 치열하게 삶을 살아간 사람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공감한다. 나 역시 ‘민족의 아픔’과 ‘미제‧일제 척결’을 외치는 김영식보다 오랜 세월 집요함으로 자기 삶을 꾸려온 김영식이 더 좋았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장기수 2차 송환 문제가 시급히 해결되길 바란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김진언의 구술사를 담은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양경인, 2022)에는 남한 당국이 비전향 장기수를 어떻게 고문했는지가 잘 나와 있다.
*이 글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 받아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기자단으로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제는 9월 29일까지 이어지며 상영작은 온오프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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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姓)을 찾아 스스로 새장을 박차고 나가는 해방 서사
1. 주제
이 영화의 주제는 ‘진정한 자유는 본래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왕실 안, 상황 별로 입어야 하는 옷마저 정해져있는 구속과도 같은 삶을 사는 주인공 ‘다이애나’가 자신의 성(姓)이자 정체성인 ‘스펜서’를 찾아가는 이야기인 파블로 라라인의 영화 <스펜서>. 한시라도 몸을 담그고 살 수 없을 정도의 압박 그 자체의 왕가 세계인 ‘샌드링엄 하우스’와 ‘스펜서’의 모든 옛 추억이 담긴 ‘샌드링엄 파크 하우스’. 크리스마스에 그 두 공간에서 요동치는 스펜서의 내면을 다룬다. 여왕은 텔레비전에서 ‘자유 국가’라며 자유의 의미에 관한 연설을 하지만, 정작 왕실 안에서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죽하면 다이애나가 아들에게 규칙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것은 ‘기적’이라 칭할 정도이다. 영화 초반부, 어릴 적 고향임에도 길을 잃어 혼란스러웠던 다이애나는 샌드링엄 하우스 근처에 도착하여 아버지 외투가 입혀진 허수아비를 보고 이제 조금씩 기억이 난다는 말을 한다. 그렇게 영화 후반부, 허수아비에 입혀져있던 아버지의 외투를 가져오는 행위는 아버지의 성 ‘스펜서’로 살던 시절, 즉 자유를 되찾아 오는 의미가 돋보인다.
2. 모티프
1) ‘꿩’과 ‘총’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길바닥에 널브러진 ‘꿩’의 시체를 로우앵글의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군용차량에 아슬아슬하게 밟힐 듯하지만 피해 간다. 마치 아슬아슬한 다이애나의 상황처럼 말이다. 왕가에서는 그저 ‘재미로’ 유희를 위해 하는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재미’는 매번 다이애나를 옭아맨다. ‘몸무게 재기’ 그리고 ‘꿩 사냥’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꿩’은 재미를 위해 길러져서 총을 맞아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내내, 다이애나는 사냥(유희)을 위해 길러진 이 ‘꿩’처럼 길러진 미물로써 묘사된다. 영화 중반부, 붉은 옷을 입은 다이애나가 카메라에 둘러싸인 시점샷은 파파라치들에 둘러싸인 대중의 사냥감 다이애나 역시 유희의 도구로써 사용됨을 명확히 보여준다. 총으로 꿩을 겨누는 것이 파파라치가 다이애나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과 겹쳐진다. 극중 다이애나는 문학 작품에서 객관적 상관물과 같이 ‘꿩’에게 자기 자신에 빗대어 말을 걸기도 한다. “날아가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래서 영화 후반부, 다이애나가 아버지의 외투를 걸친 채 두 팔을 새처럼 들어 올려 사냥 중인 아들과 군인들 앞에 서서 상황을 어그러뜨리는 장면이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를 벗어나는 꿩처럼 보이는 것이다. 자유를 찾기로 결심하고 행하는 신에서 다이애나가 ‘꿩’에 투영되어 극적으로 묘사되었다. 롱 샷으로 다이애나와 두 아들이 손을 잡고 뛰는 모습을 팔로잉하는 샷은 관객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2) 검은색 8번 당구공
영화 중반부. 광각으로 당구대를 사이에 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거리감이 드러나는 신, 당구대에 아주 정교하고 계산적으로 공들이 놓여있다. 리버스 샷에서 두 인물 모두 정중앙에 위치하고 아주 천천히 달리 인하며 숨을 조여온다. 찰스 왕세자 앞에 날카롭게 삼각형으로 놓인 붉은색 공들은 다이애나의 모든 가능성이 다 찰스 왕세자 손안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찰스는 진짜 나의 모습과 그들이 찍는 내 모습, 두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다이애나에게 검은색 8번 공을 굴린다. 그리고 8번 공을 잡은 다이애나가 검은 공을 떨어뜨리는 걸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당구는 검은색 8번 당구공을 홀 안에 넣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 8번 공이 당구대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애초에 둘의 게임은 찰스 왕세자로 승자가 정해져있는 공평하지 않은 게임이고, 공을 떨어뜨리는 것은 다이애나가 더 이상 그 게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행위이다.
3) 진주 목걸이와 앤 불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진주 목걸이는 다이애나에게 채워진 목줄과도 같다. 이 진주 목걸이는 찰스의 내연녀 커밀라와 같은 것이다. 다이애나는 극 중 꾸준히 제인 시모어 책을 읽는다. 간통은 헨리 8세가 했지만, 정작 간통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앤’과 자기 자신을 빗대어 보고, 그녀의 환영을 자주 마주한다. 영화 중반부, 식사 자리에서 여왕과 찰스 왕세자가 다이애나를 감시하듯 바라보는 다이애나의 시점샷이 반복되고 앤 불린의 환영이 나타난다. 연주되는 음악 역시 격정적으로 고조되며 숨통을 조여와 다이애나는 진주 목걸이를 뜯어 씹어 삼키는 환상을 본다. 그렇게 다이애나는 식사 때마다 음식물이 입에 들어오자마자 게워낸다. 다이애나의 시점샷은 영화 중반부, 크리스마스 당일 세인트폴 성당 앞에서도 볼 수 있다. 복잡한 다이애나의 마음이 투영되듯 핸드헬드로 찰스 왕세자의 내연녀 커밀라에서 찰스 왕세자로 초점이 맞는다. 반복적인 시점샷은 불안정한 다이애나의 심리를 극대화한다. 영화 클라이맥스, 옛 추억이 담긴 샌드링엄 파크 하우스에서 자살을 고민하던 운명적이고도 위험한 상황, 어둠 속에서 ‘앤 불린’ 의 환영이 나타나 말한다. 남편이 내연녀와 똑같은 초상화를 자신에게 선물했다고 말이다. 뜯고 도망치라는 앤의 음성이 들리자, 다이애나가 발레를 하고 싶던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이 춤을 추는 시퀀스가 이어진다. 그렇게, 본래 자신에게서 자유를 찾고 결심을 하는 순간, 진주 목걸이를 뜯는다. 올가미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4) 차 번호판
영화 초반부,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는 길을 잃은 채 샌드링엄 하우스를 찾기 위해 차를 몬다.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던 다이애나의 내면이 현실 상황에 투영된 듯이 말이다. 그러고는, 내내 혼란스럽고 어두운 표정으로 “Where Am I?”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자신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물음, 마치 다이애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초반부, 붉은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채 길을 잃은 다이애나는 ‘G580SGT’ 번호판의 차를 운전하고 있다. 운전하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롱 샷으로 잡혔고, 영국 특유의 구름 낀 날씨에 탁한 색감을 띈다. 야외임에도 자동차에 햇빛과 조명이 거의 비추는 양이 적어 콘트라스트가 낮은 차분하고 글루미한 분위기다. 외화면에서는 격식 있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다이애나는 지도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리고, 별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 갓길에 사선으로 세운 다이애나의 차. 그때의 차 번호판은 ‘J548LRP’이다. 하늘은 구름에 완전히 뒤덮여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콘트라스트가 거의 없고, 인물들의 얼굴 역시도 그림자가 거의 지지 않아 창백하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후반부, 꿩 사냥에서 아이들을 데려온 캐주얼한 진과 플랫슈즈 차림의 다이애나가 왕실 안에서 출발할 때의 번호판은 ‘J548LRP’이지만, 왕실에서 벗어난 직후 차의 번호판은 ‘G580SGT’이다. 롱 샷으로 다이애나와 그녀의 아들들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잡고. 구름 낀 날씨임에도 햇빛이 스펜서와 아이들이 탄 차를 비춰 활기찬 분위기를 형성한다. 심도가 얕지 않지만, 가운데 빛이 강하게 반사되는 차를 탄 다이애나와 아이들에게 초점이 간다. 내화면에서 ‘All I Need Is A Miracle’ 틀어 자유롭게 노래 부르며 드라이브한다. 이제는 정확한 행선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는 확신에 가득 찬 모습으로 아들에게 말한다. “Trust me.” 이제까지 본 중에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초반부 고향에서 왕실로 들어갈 때는 ‘G580SGT’에서 ‘J548LRP’, 후반부 왕실에서 나올 때는 ‘J548LRP’에서 ‘G580SGT’이다. 진정한 스펜서의 정체성은 ‘G580SGT’, 통제받고 억눌린 다이애나의 삶은 ‘J548LRP’에 빗대고 있는 것으로, 인물의 긍정적인 변화를 직관적으로 그려낸다.
3. 결론
이 영화는 왕실에서 일거수일투족 구속받는 주인공 다이애나가 ‘진정한 나 = 스펜서’, ‘자유’를 결심하는 이야기이다. 호화로운 식사 자리에서 한 번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한 적 없는 스펜서가 아들 둘과 도망쳐 나와 간 곳은 다름 아닌 패스트푸드점 ‘KFC’이다. 다이애나에겐 이런 ‘평범한’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식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스펜서’가 자신을 투영한 존재 ‘꿩’과 ‘앤 불린’ 그리고 그녀를 옭아매던 ‘진주 목걸이’와 ‘검은색 당구공’ 마지막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다이애나의 진정한 정체성인 ‘스펜서’를 드러내는 번호판 ‘G580SGT’까지.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이 모티프들이 ‘자유로운 자신의 정체성’라는 하나의 주제 의식을 탄탄히 구축하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다이애나 비의 일생을 잠시나마 체험하고 싶다면, <스펜서>를 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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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기대된단~마리오! 전 세계가 사랑하는 '슈퍼 마리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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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메이커> 런칭 예고편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네 번 낙선한 정치인 ‘김운범’ 앞에
그와 뜻을 함께하고자 선거 전략가 ‘서창대’가 찾아온다.
열세인 상황 속에서 서창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선거 전략을 펼치고
‘김운범’은 선거에 연이어 승리하며, 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까지 올라서게 된다.
대통령 선거를 향한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되고 그들은 당선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던 중 ‘김운범’ 자택에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로 ‘서창대’가 지목되면서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치열한 선거판,
그 중심에 있던 두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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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에게 관람을 권함
7★/10★
지푸라기가 깔린 사무실에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문을 두르리며 문을 열라고 소리친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남자를 부르는 소리가 점차 커진다. 사무실 안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창틀 위로 올라간다. 몸을 던진다. 즉사한다.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비밀경찰로 일하는 볼코노고프 대위는 ‘쿵’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자신과 함께 반역자를 고문하던 소령이 죽은 채 늘어져 있다(소령 사무실의 지푸라기는 고문자의 피가 바닥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깔린 것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다른 대원들은 소령 근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소령의 시신을 수습한다. 볼코노고프가 건물 위를 올려다보자 누군가 고개를 내밀고 괜한 소란을 내지 말라는 의미로 입에 검지를 갖다 댄다. 볼코노고프는 직감한다. 상황 파악을 마친 그는 빠르게 결단한다. 문서 하나를 들고 건물과 조직을 탈출한다. 경찰은 바로 대위를 쫓기 시작한다. 대위의 주변 인물과 동료들은 볼코노고프가 반역자를 대하던 방식으로 심문받는다. 당과 조직의 충성스러운 하수인이었던 볼코노고프는 하루 아침에 자신이 좇던 반역자가 된 것이다.
과거 언젠가, 볼코노고프는 반역자들이 왜 끝까지 잘못을 부인하고 결백을 주장하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는 상관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천진한 얼굴로 자기 나름의 생각을 말하는 그에게 상관이 웃으며 말한다. 그들이 진짜 결백하기 때문이라고. 그럼 왜 결백한 사람들을 부러 반역자로 몰아 처벌하는 걸까? 그들이 ‘믿을 수 없는 분자’들이기 때문이다. ‘예비 간첩’에 대한 예방 조치로서 의심 분자들을 척결하는 게 그들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이 반역자라 지목하면 그 사람은 반역자가 된다. 자살한 소령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볼코노고프의 차례다.
때문에 볼코노고프는 애초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탈출할 때 챙긴 서류를 들고 자신이 고문해서 받아낸 ‘자백’으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유족을 찾는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지금껏 자행되어온 반역자 처벌이 아무런 근거 없는, 공포를 낳기 위한 기계적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반역자로 몰림으로써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볼코노고프의 모습과 그를 좇는 비밀경찰 조직원을 교차로 담아내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서사의 핵심은 볼코노고프가 과연 진정한 용서를 구하고 그를 밑절미 삼아 구원받을 수 있느냐다. 당연히 쉽지 않다. 파시스트도 버텨낸 아빠가 당신네들은 견디지 못했다는 한 피해자 가족의 말이 알려주듯, 용서를 구하는 일은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야기하는 죄책감이 주는 통렬한 고통을 마주하는 일, 즉 자기 자신의 영혼을 찾아나서는 일이기도 하다. 체제의 당위성을 방패 삼아 마비된 채 잠자고만 있던 그의 영혼이 깨어나자 오랜 기간의 침묵이 고통스러운 윤리적 비용을 청구한다. 하지만 볼코노고프는 도망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그는 가해자고,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용서에는 둘 이상이 필요하다. 용서를 구하는 자와 용서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용서를 갈구하는 볼코노고프의 여정이 쉽지 않은 건 그의 윤리적 각성이 야기하는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용서해주겠다는 사람의 부재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에는 경찰에 쫓기며 만신창이가 된 볼코노고프가 한 아파트에서 경찰에 의한 고문으로 반역자로 몰려 피해를 당한 주민이 있는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볼코노고프를 철저히 외면한다. 괜히 그와 엮였다가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들을 잃은 한 남자는 볼코노고프를 보듬는 척하며 그를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한다. ‘대중독재’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자의 폭력적 의지 관철은 독재의 한 축일 뿐이다. 독재는 그런 권력자에게 소극적‧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대중이 있어야만 완성된다.
언젠가 한 역사학자에게 한국은 유독 가해자의 반성과 성찰이 없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근현대사 내내 반복되었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지금까지도 횡행한 시대인데도 ‘부역자인 내가 반성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볼코노고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기꺼이 품어줄 대중의 용기도 필요하다. 용서를 구하는 볼코노고프의 용기를 외면하거나 악용한 사람들과는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공산주의자’, ‘빨갱이’, ‘체제 위협’ 등의 말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과거로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던 시대가 우리가 뽑은 최고 권력자의 호명을 통해 다시금 소환된 것이다.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영화 속 비밀경찰이 그러했듯, 의심 가는 사람들을 모조리 범죄자 집단으로 몰아간다. 볼코노고프의 비극을 막으려면, 이런 유의 구분선 긋기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한번 전선이 만들어지고, 그에 기반한 폭력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이를 되돌리기 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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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의 어느 구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연출: 김동령, 박경태 | 제작: 웃음과바늘, ㈜시네마 달 | 배급: ㈜시네마 달 | 출연: 박인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누구보다 죽음을 많이 본 미군 ‘위안부’ 출신 박인순이 스스로 자신의 복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저승사자들에 맞서는 오드 판타지 영화다. 김동령, 박경태 감독이 <거미의 땅>(2013)에 이어 기지촌 미군위안부 박인순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나는 사전에 이 영화가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는 일에 꽤나 애를 먹었다.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초청되었다고 하니 다큐멘터리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허구의 인물들이 나와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라 극영화로 볼 요소도 다분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두 감독은 아마 관객과 평단, 영화를 받아들이게 될 이들의 혼란을 일부러 유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기지촌 미군위안부는 우리나라 정부에 의해 자발적으로 벌어진 국가폭력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이들의 보다 많은 이야기를 접하기보다 새어나오는 일부의 선택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영화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듯 기지촌 미군위안부 박인순의 이야기를 더 많이 보여주려는데 애쓰기보다 오히려 허구의 이야기를 씌운다.
영화가 파격적인 형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 까지는 유효했다. 장르 자체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모호한 구분을 유영하지만 이야기 역시 기존의 문법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질서에 의해 왜곡되어야 했던 기지촌 미군위안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데 있어서 들어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력적이지 못한 이야기 자체의 문제와 연기에서의 아쉬움이 이 모든 형식적 도전을 영화에 착 달라붙지 못하게 하고 표류하게 만든다.
우선 난해한 구성의 이야기는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빨아들이지 못한다.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고 박인순 주변의 등장인물들도 별다른 역할 없이 흩날려버린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제목이지만 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고, 박인순이 모든 저승의 관문을 통과하는 후반부도 뜬금없게만 여겨진다. 거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에 놓인 영화의 불균질함이 잘 드러나서 오히려 좋아할 사람도 있겠으나 내게는 그저 인내하고 보기 어려운 연기들일 뿐이었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얼마나 주류 중심적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형식적 시도를 장착했다. 그러나 이 창의적인 현대사의 어느 구전(口傳)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부족하다. 영화가 영화 자체의 만족도를 주지 못할 때 그 작품이 지닌 메시지의 가치도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도발적이지만 표류하고 만 형식적 시도 앞에 그래서 더 아쉬운 마음이 크게 느껴진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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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번 믿어 보고 싶은 감독 '최동훈'
첫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인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마음을 열고 대하게 된다. 아, 너무 괜찮네…하고 느꼈던 사람의 다음 만남 그 다음 만남이 계속해서 좋으면 호감은 복리로 쌓이게 되는 법이다.
충격적으로 좋았던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나서,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작품이 누군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 찰진 대사, 속고 속이는 사건들. 잘 짜여진 구조와 세련된 연출.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한 새내기PD였던 시절.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을 넘어선 충격이었던 것이다. '천재가 나타났네.’ 내게 최동훈 감독은 첫인상이 좋은 그런 감독이었다.
타짜, 도둑들, 암살까지 …데뷔 후 10년동안에 연이어 대박을 터트리며 천만 영화를 두 작품이나 만든 감독. 그 작품들이 나의 취향에도 잘 맞아 믿고 보는 감독이었는데 외계+인 1부를 보고 나오며,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포스터를 보며 어쩐지 서늘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래도 감독 이름 하나만 보고 선택한 영화였는데… 알 수 없는 배신감과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외계+인> 1부는 잘되면 속편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다른 시리즈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2부가 존재함을 드러내 놓고 개봉했다. (아니 이럴거면 OTT시리즈로 만들었어도 되었지 않나)
2022년 현재의 세계에 ‘가드’’와 ‘썬더’는 인간의 몸에 가두어진 외계인 죄수를 관리하며 지구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서울 상공에 우주선이 나타나고 형사 ‘문도석’은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한편, 630년 전 고려에선 얼치기 도사 ‘무륵’과 천둥 쏘는 처자 ‘이안’이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신검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속고 속이는 가운데 신검의 비밀을 찾는 두 신선 ‘흑설’과 ‘청운’, 가면 속의 ‘자장’도 신검 쟁탈전에 나선다. 그리고 우주선이 깊은 계곡에서 빛을 내며 떠오른다. 고려와 현재, 그리고 외계의 세계가 뒤섞여 스토리를 이해해야 한다. 2022년 인간 속에 수감된 외계인 죄수를 쫓는 이들 그리고 1391년 고려 말 소문 속의 신검을 차지하려는 도사들 사이 시간의 문이 열린다.
사실 1부는 자..이제 배경을 설명해줄게…정도의 느낌이랄까. 선명하게 줄거리를 말하기에 세계관이 복잡하지만 이상하게도 참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기이함. 미래형 SF와 오리엔탈 판타지가 섞인 영상은 어딘가 어수선하고, 캐릭터는 어디선가 본 것 같았고, 스토리는 뻔했다. ‘저기요 …감독님…왜그러셨어요?어디서 부터 잘 못 된건가요?’ 이해가 되지 않아 붙잡고 물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까지 감독에 대해 고민하는 나는 또 뭔가…나는 왜 그를 좋아했는지 반문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암살> 창작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소재에서 시작된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 왔다. 인물을 충분히 탐구하고 인터뷰하며 디테일을 놓치지 않아 캐릭터가 살아있었다. 영화적이지만 사실적인 그런 인물들이 어우러져 촘촘하게 극이 진행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외계+인>은 어쩌면 최동훈 감독이 ‘하고 싶은 거 다해’ 본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오롯이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세계관과 타임슬립이나 썬더, 하바와 같은 장치들. 아마도 내가 <외계+인>을 보고 그토록 당혹스러웠던 것은 화려한 CG나 숨막히는 액션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최동훈 다운 작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의 정체성이 명확히 보이지 않은 작품 인 것은 그가 변했기 때문이거나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 그가 만든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 그는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게다가 이 영화는 둘로 나뉜 영화의 겨우 1부 일 뿐이었으니까. 그가 펼쳐 놓은 것들을 어떻게 마무리 하려고 하는지. 나는 아마도 또 한번 그를 믿고 2부를 보러 갈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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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가 무너진 세계에서
2010년대부터 스마트폰의 이용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며, 인류의 삶은 예전과 달라졌다. 이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고화질의 사진과 영상을 찍히고, 보호자는 자신들이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는 시간엔 패드를 쥐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스마트폰을 가지는 이들. 직전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대를 경유한 세대라면,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태어난 알파 세대의 인생에 있어 스마트폰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소년의 시간>은 13살 소년 제이미를 주인공으로 삼는 시리즈이다. 마시멜로우가 들어간 핫초콜릿을 좋아하는 소년은 동급생 여자 아이 케이티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용의자이기도 하다. 4편의 리미티드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긴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 CCTV에는 명백한 물증이 남았고, 제이미는 사건의 범인임이 틀림없다. 누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가는 이미 밝혀진 바, 이제 질문은 ‘왜’ 제이미가 살인을 저질렀는가이다.
살인의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관계자들은 제이미와 케이티가 맺어온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10대의 소년 소녀가 맺어온 관계는 기존의 문법과는 다르다. 둘 사이에 있어 오프라인 상의 교류는 쉽게 찾아볼 수 없으나, 온라인 상의 SNS에는 두 사람이 나눈 소통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들에게 SNS란 무엇인가. 알파세대에게 있어 SNS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학창시절부터 스마트폰을 이용해온 앞세대로서 SNS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까지. 친구들이 사용하는 SNS의 계정을 자연스레 만들었다. 일상을 담은 사진을 올리고, 온갖 생각들을 기록했다. 친구들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고, 친구들에게 좋아요를 받기도 했다.
성인이 되었다. 페이스북의 시대는 어느새 저물어갔고, 인스타그램은 대세가 되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찍고, 친구들을 태그하고, 태그당한 스토리를 리그램한다. 인스타그램은 하나의 연락처가 되기도 한다. 지인들과 번호 대신 계정을 교환하는 일도 왕왕 있다. 카톡은 하지 않아도 댓글을 달고 dm을 나누는 사이도 있다. 현시대에 SNS를 이용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를 넘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의 관계자들은 이같은 문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CCTV에 남은 물증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인스타그램의 댓글뿐인 상황에서 이들의 분석은 끝없이 현실과 어긋난다. 첫 번째 면담의 시간, 경찰은 케이티가 제이미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친구라고 유추한다. 임상 심리학자도 SNS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제이미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물으며, 여럿이 찍어 올린 사진 속 태그의 의미에 대해 묻기도 한다. 디지털 네이티브에겐 그저 일상에 불과한 일들이 기성 세대에겐 의문이 되고, 제이미와의 소통은 끝없이 실패한다.
태어나자마자 디지털과 연결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는 흐릿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오프라인에서 배제된 이들의 삶에 있어서는 온라인의 삶이 더욱더 선명한 삶일 수도 있다. 케이티에게 ‘인셀’로 칭해지고, 또래 집단에서 따돌림을 받았던 제이미의 삶이 그랬을 것이다. 제이미는 인스타그램의 세계에서 노출이 심한 여성 모델들의 사진을 리포스트하고 댓글을 남겼다. 스냅챗을 통해서는 남학생들과 함께 케이티를 비롯한 같은 학년 여자애들의 반나체 사진을 돌려보기도 했다. 그는 이같은 디지털 성폭력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모두 동참한 일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흐리고, 사진을 유출한 동급생은 안쓰러워한다. 한 번 사진을 유출했으니, 신뢰를 잃어 다시는 그런 사진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온라인 세계에서 그가 습득한 여성의 모습은 편향적이기 그지없다. 성인 여성들은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된 이미지로 비춰지며, 또래 여자를 바라보는 모습 또한 인셀의 논리와 맞닿아있다. 그는 자신이 인셀이 아니라 주장하나, 여성을 일부 남자만 얻을 수 있는 ‘트로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런 그에게 연애와 살인은 게임 같은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케이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진이 유포된 뒤 마음이 약해졌을 그녀를 얻을 ‘영리한 전략’을 세웠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러자 홧김에 그녀를 죽인 것이다. 명백한 물증에도 무죄를 주장하는 제이미. 여성을 소유물이자 트로피 정도로 생각하는 그는 실제로 자신의 행동이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라 해야할까. 결말부에 이르면 제이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그가 유죄를 인정하게 되었는지 작품은 보여주지 않는다. 변한 것은 현실세계와 분리되어 스마트폰을 잃은 채 몇 달을 보냈다는 것 정도일테다. 어쩌면 그는 스마트폰이라는 ‘연결된 신체’를 벗어나, 비로소 오롯한 자신으로 사유하게 되었을 때 죄를 인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문화비평가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 메시지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미디어가 다루는 내용이 메시지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이나, 내용을 담는 그릇인 미디어 자체도 메시지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언제나 손에 쥐고 있는, 어쩌면 신체의 일부라 보아도 무방한 스마트폰을 켜면 여성혐오적인 메시지는 시청각적으로 체화된다. 그렇게 소년들은 자연스레 여성혐오를 배운다. 그리고 이는 온라인 세계를 넘어 오프라인 세계에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소년의 시간>은 단순한 픽션이라 보기엔 현실과 닮아있는 작품이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최근 호주에서는 16세 미만의 아동, 청소년에게 SNS 이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과연 이같은 조치가 무엇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이들은 우회하는 경로를 발견하거나,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연령이 지나면 SNS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즉,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나아가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고 할지언정, 미디어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제이미 이전에 직간접적으로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해온 가부장적인 제이미의 아버지가 있었고, 여성 임상심리학자를 낮잡아보는 남성 경비원이 있었다. 미디어는 사회가 이야기하는 메시지를 품고 발화한다. 기성 세대가 새로운 세대의 관계의 문법을 넘어, 삶의 문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노력만으로는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적인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