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4-01-28 17:19:30
'범죄도시'로는 성공, '콘크리트 유토피아'로는 실패
<황야> 스포일러 없는 리뷰
사랑하는 수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망가진 세상 한가운데에 살고 있는 지완(이준영)이다. 활을 메고 있는 지완. 눈앞에 악어괴물이 보인다. 활시위를 당긴다. 악어에게 적중한다. 죽은 것 같다. 악어에게 다가가는 지완. 하지만 악어가 갑자기 살아나서 지완에게 달려온다. 질겁하는 지완. 근처에 있는 차에 잽싸게 숨는다. 위기에 처한 지완을 도와주는 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남산(마동석)이다. 악어의 목을 자른 남산. 악어 사체를 가지고 가서 마을 사람들과 식량을 나눈다. 남산 덕에 위기를 넘긴 지완. 지완과 남산은 가족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친한 사이다. 지완이 턱없이 어린 탓에 둘이 친구야?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남산은 정이 많다. 한편 지완이에겐 짝사랑하는 여자 애가 있다. 바로 수나(노정의)다.남산은 어릴 때 수나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어 안면이 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지완의 연애 이야기는 남산과 대화하기에 적합하다. 남산에게 수나 이야기만 하는 지완. 이 두 사람에 일상에 큰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수나가 양기수(이희준)에게 납치된 것이다. 무너진 세상. 남산과 지완, 그리고 또 다른 손님이 기수 일당의 본거지로 직진한다.
형은 좀비를 찢어
<황야>는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한 영화에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을 200% 활용한다. 우리가 마동석 배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가 액션스타라는 점이다. <황야>는 마동석 배우가 구현 가능한 액션을 전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각종 ‘~파이팅’이 다 있다. 총기액션, 나이프파이팅, 맨손 격투 등 온갖 방식으로 나쁜 놈들을 두들겨 팬다. 영화 줄거리도 이 액션 역량을 다 보여줄 수 있게끔 짜여 있다. 가령 빌런 무리들에겐 특별한 점이 있다. 이 부분을 주인공 일행이 금방 간파한다. 그러나 이 약점을 공략하기 전엔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이 과정을 마동석 배우의 액션연기로 채웠다. 그리고 디스토피아라는 설정은 주인공 남산이 총기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음과 동시에 나쁜 놈들이 활개 치기 좋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자잘한 요소들을 나름 근거를 제시하며 살려 액션 보는 맛이 좋다. 이 액션이 와일드하기만 하면 뭔가 맥이 빠질 것이다. 이에 당위성이 생긴 폭력 묘사가 극의 재미를 돋군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나름 ‘마동석 액션영화’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인다. 바로 이은호 역을 맡은 안지혜 배우의 등장이 이것의 근거다. 후술하겠지만 이 영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설정 자체를 잘 살린 편은 아닌 것 같다. 이것 때문에 생기는 이야기의 느슨함을 안지혜 배우의 액션연기로 끌고 간다. 처음부터 영화가 연출로 이 인물이 ‘중요해!’라고 강조한 것이다. 가령 이 이은호 캐릭터가 처음 등장할 때 장면을 보면 강렬하다. 사실 영화의 줄거리에서 이은호 캐릭터가 이렇게 등장할 이유가 크게 있는 건 아니다. 장영남 배우가 맡은 캐릭터 처럼 초반부에 등장해도 큰 무리는 없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관객이 신선함을 느껴 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연출을 보여줬다. 이후에도 <황야>의 이은호는 이 신선한 동력을 충분히 이행한다. 글쓴이는 첫 번째 공간을 바꾸고 나서 이 인물 중심으로 테이크를 길게 짠 장면을 최고로 뽑는다. 확실히 허명행 감독이 무술감독 출신이라 어떻게 해야 생동감이 사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이 배우의 이 장면은 여태까지 본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 액션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용감한 시민
글쓴이는 이준영 배우를 좋아한다. 왜? 이 분 잘생겼는데 연기도 잘한다. <D.P>와 <마스크걸>에서 양아치 연기를 생각해 보면 뭔가 스테레오 타입의 나쁜 놈 같으면서도 자기만의 색이 굵었다. 그러나 글쓴이는 두 드라마보다 <용감한 시민>에서의 연기를 더 좋아한다. 이 <용감한 시민>에서 한수강이라는 인물 역시 액션이 중요했는데 시원시원하게 잘 소화한다. 본작 <황야>에서도 똑같이 액션연기를 보여주는데, 남산과 안지혜와는 다른 결의 액션을 보여준다. 이 두 인물과의 차이점을 눈 크게 뜨고 보면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는데 글쓴이는 이준영 배우가 디테일을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여기는 황궁아파트
사실 액션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디스토피아 묘사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답게 이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용하는 것은 대지진이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구. 당연히 온 세상은 폐허가 됐다. 시각적인 묘사에 있어 이 난장판을 잘 묘사했냐? 고 묻는다면 글쓴이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노란색으로 색감을 뺀 부분이나 무너진 건물을 구성하는 적지 않은 요소들까지 나름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글쓴이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부산행>과 겹쳐 보이는 점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폐허가 된 세상을 묘사하는 데에는 좋았지만 고유의 색이 흘러넘친다고 보긴 어렵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디스토피아 묘사가 개성이 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관객들에겐 비판 요소로 읽힐 수도 있다.
어디서 봤는데
사실 이 영화에 대해 글쓴이가 가장 아쉽다고 느끼는 부분은 문제 해결 방식이다. 이 영화의 플롯을 대략적으로 써보겠다. 주인공이 있다. 이 주인공을 둘러싼 세상은 온갖 나쁜 놈들 천지다.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한다. 푸근하지만 주먹 하나는 살벌한 주인공이 이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다. 우리는 비슷한 플롯을 알고 있다. 바로 ‘범죄도시’ 시리즈다. 마동석 배우가 속해있는 빅펀치 엔터테인먼트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시그니처를 못 보고 지나가도 ‘이거 그거 아닌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황야>가 개성이 뚜렷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물론 마동석 배우가 가진 매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그러라고 캐스팅한 것 아닌가? 하지만 글쓴이는 ‘범죄도시’ 시리즈와의 기시감을 문제 해결 방식에서만 근거를 찾고 싶지 않다. 바로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가 있다. 이 캐릭터는 수많은 빌런들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이는데, 마동석 배우의 전작에서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심지어 유행어가 돼서 인기도 끌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 <황야>를 보고 생각한 점 중 하나는 이야기가 텅 비어 보인다는 점이다. 왜? 이 영화는 무언가를 시도하려다가 말았다. 이 시도하다 만 것은 장르적인 특성이다. 우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리즈의 전작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해 써볼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라는 공간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국사회를 탐구한다. 이 아파트를 둘러싼 사람들을 양분해서 ‘한국 사람들은 이곳(아파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분명 의도가 있다. 바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윤리의식을 한 집단 하의 두 사람(명화/영탁)을 중심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이것을 왜 아파트라는 배경을 통해 질문할까? 바로 우리 한국사회는 사는 곳으로 서로에게 편견과 혐오를 표현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출을 통해 사회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영화 중 <블레이드 러너 2049>나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도 각각의 철학적인 물음을 건네는 영화다.
하지만 이 <황야>에는 그런 장르적인 특성이 안 보인다. 물론 몇 번 시도는 한 것 같다. 양기수(이희준) 배우의 캐릭터의 대사 몇 줄이나 영화에서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면 분명 어느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 대사 몇 줄 빼고는 문제를 심화시킨다거나 하는 장치가 많이 부족하다. 단지 주인공 일행을 위기에 더 밀어놓는 것 말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면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 <황야>의 내적 논리는 플롯 안에서 구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물들이 하는 몇 마디로 끝낸다. 이렇게 나사 빠진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사건의 끝마무리가 깔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느껴졌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마무리가 된 것이다.
반쪽짜리 성공
이러다 보니 이 영화가 굳이 디스토피아라는 배경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만약 이게 범죄도시 7쯤 돼서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뒤집어 패버리는 마석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솔직히 그렇게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영화의 기획의도에 구멍이 생기는 결함이 된 것이다.
반대로 영화의 액션은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범죄도시 2>의 액션이 극찬받았던 이유는 사운드 덕분이다. <황야>는 <범죄도시 2>처럼 사운드를 살리고, 또 촬영에서도 카메라를 흔들지만 나름 동선도 잘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허명행 감독이 액션 하나는 정말 잘 살렸기 때문에 글쓴이는 <범죄도시 4>가 기대된다. 뭐 어차피 이 영화 각본 쓴 사람이 <범죄도시 4> 각본 쓴 것 아니잖아? 드라마가 어떻게든 보완이 됐을 테니 K-채드 스타헬스키(<존 윅 4>의 감독)가 허명행 감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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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치'는 아버지 '웬우'의 밑에서 암살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샹치'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습격으로 더 이상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어머니가 남긴 가족의 비밀과 내면의 신비한 힘을 일깨우게 된다.
벗어나고 싶은 과거이자, 그 누구보다 두려운 아버지 '웬우'를 마주해야 하는 '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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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의 새로운 시대, 세상에 없던 힘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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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졸트> 메인 예고편
사랑하는 남친을 잃은 그녀.
더 이상의 통제는 필요 없다.
제대로 돌아버린 자.
그녀의 숨은 능력이 깨어난다!
백만 볼트 짜릿한 액션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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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내 안에서 영화의 개념화는 서양, 특히 유럽과 미국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 시절 영화를 제대로 전공해보자고 결심한 이후 처음 수강한 강의가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영화들로 모든 역사적 자취를 설명하는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영화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존재했는지, 하다 못해 아시아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수업을 탓할 수는 없다. 영화가 설명되는 방식이 으레 그랬으며, 눈을 돌려 관심을 가지더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정보는 알기 어려웠다. 서양 국가를 주제로 한 발표와 그 외 국가들에 대한 발표는 분량부터 차이가 났다. 유수한 영화제라 불리우는 국제영화제들은 모두 일부 국가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그럴 만했다.
영화를 더욱 넓고 깊게 소비하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나 또한 변함 없이 몇 국가의 작품들과 그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었고, 다양한 국가영화를 접하고 싶던 차에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감독이 여성 주연들과 함께 연출한 작품이었기에 더욱 눈이 갔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나 그들의 녹록치 않은 삶을 멀리서나마 접해왔기에 영화로 만나는 인도 여성들은 어떤 모습일지 하루 빨리 알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는 게 어려워요”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 뭄바이,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에겐 해결되지 않는 사정들이 있다.
그러나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
미리 말해두겠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여성영화는 아니다.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라는 문장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떠올릴 수 있는가? 여성들이 모여서 함께 주거공간을 꾸려 나가거나, 기혼/미혼/비혼 여성들의 각 가치관들이 모여 건강한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라 감히 예상해본다. 그렇다면 해당 작품을 관람하고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오히려 남성과의 연애와 결혼이 자연스럽게 스토리의 주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 내에 만연한 종교에 따른 가치관과 여성을 억압하는 뿌리 박힌 것들에 맞서는 요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도 여성'들에게 동일시되어야 조금 더 잘 보이는, 하지만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는 섬세한 작품임은 명확하다.
* 뭄바이를 느낄 수 있는 오프닝 시퀀스
극의 첫 장면은 누군가가 인터뷰를 하는 듯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뭄바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겪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른 목소리들이 짧게 풀어낸다. 그리고 배경은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의 밤을 그대로 담아낸 샷들이 나온다.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가운데 수많은 빛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자동차 전조등, 조명, 기차 혹은 지하철이 뿜는 빛. 고스란히 빛을 받는 사람들은 어쩐지 지쳐보인다. 이렇다 할 주인공 없이 도시 그 자체를 담으며 꽤 긴 시간동안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는 흡사 다큐멘터리 영화 같기도 하다.
그만큼 도시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복잡한 도로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의 행렬은 베트남 하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하노이에서 잠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언어를 공부하며 영상도 제작하고자 했던, 도시를 마음껏 즐기다 떠나면 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문득 외로움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버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이렇게 상상만 하던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느낌이었다. 눅눅한 공기와 도로의 소음, 즐비해 있는 길고 얇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도시의 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샷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여성들의 사소한 일상 또한 상세하게 묘사된 덕분에 그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는 극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 감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
초반부가 다큐멘터리 같았다면, 중반부는 실험영화 같은 면모를 보인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프라바'와 '아누'의 일상이 리드미컬한 사운드와 함께 독특한 편집으로 표현된다. 하루종일 좁디 좁은 사무실에서 고객 응대를 하고 있는 '아누'가 종종 나누는 문자 텍스트가 자막으로 화면에 보이는 호흡은 여느 극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힙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장난기 서린 음악이 본능적인 호감을 자아냈다. '아누'가 단독으로 나오는 사무실 몽타주는 아주 귀엽고 익살스러운 연기가 매우 돋보인다.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는 주로 밤으로 표현되었지만 모든 걸 뒤로 하고 바닷가 마을로 모인 세 주인공의 시간들은 대부분 낮으로 구성된다. 어둠에 잡아먹힌 도시와 달리 한적한 바닷가는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차 있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뻗어 나가는 빛줄기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화면에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세 주인공이 모인 장면에서는 ㅡ 알게 모르게 쌓아 두었던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린 채 ㅡ 새까만 하늘과 밤바다 속에 별과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비로소 그들의 주변 환경을 이루던 모든 빛이 한 데 만난 것이다.
다만, 극영화로서의 힘은 약하다. 각 등장인물의 서사는 미약하며, 접점은 모호하다. 현재진행형의 일상을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연락이 오지 않는 남편을 기억하는 '프라바'와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도 숨겨야 하는 '아누', 일평생 살아왔던 공간을 집이라고 인정 받지 못하는 '파르바티'. 각 사건들의 앞뒤상황이 제시되지 않는 만큼 그들의 감정선에 이입하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플롯 자체는 느리고 차분하게 진행된다. 명확한 대사보다는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비유적 표현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흐름에 탑승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면 수작이라고 판단했을 거 같다.
***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극중 '빅 클로즈업' 샷이 자주 사용되는 특징이 눈에 띄었다. 특히 얼굴, 그리고 얼굴 중에서도 눈 주위를 중심으로 샷을 잡는다. 눈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의 상을 담는다. 그리고 그 눈은 항상 빛이 있다. 주인공 자체가 빛이기에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에도 자연스럽게 빛이 옮기는 건지, 눈이 향하는 모든 곳에 빛이 있었고 그대로 담아냈을 뿐인지 알 수 없다. 정확한 건, 빛은 어둠이 있기에 인식될 수 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나자신 혹은 어둠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빛 그 자체였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독이 바라보는 인도, 여성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드러낼 줄 알고 그들의 우정이 존재하는 한, 그곳은 애써 빛을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애초부터 희망이 함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당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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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개수작을 부리는 감독이 있다?
나는 가끔 글을 쓸 때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어떤 주제로 쓸 때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만 한다. 정성일 씨가 와도 절대 쓸 수 없는 그런 것을 추구한다. 근데 막상 까 보면 타인의 것들과 별 다를 것 없다. 예를 들어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리뷰한 글을 보자. 나는 이 영화를 '아무것도 없는 영화'라고 썼다. 정말 솔직히 말해보자면 나는 이 문장을 쓰고 '와 진짜 전다. 내가 천재긴 해. 이거 아무도 생각 못할 듯.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쓴 거 읽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안 했다. 이미 알고 있거든. 영화 보고 느끼는 감정이야 사람들 간에 별 다를 바 없고, 홍상수 감독도 이걸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글은 별로 특별한 것 없을 거라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타인의 리뷰들을 읽지 않았다. 내 글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오로지 내 욕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 스스로가 특별해지고 싶은 순간을 나는 찌질함이라 부른다. 이 감정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찾을 수 있다.
난 어디에서 자기 계발서를 대차게 깐 적 있다. 근데 사실 내가 영화를 보고 쓰는 글은 크게 보면 자기 계발서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라 느끼는 외로움이나 자아 찾기 뭐 그런 것들을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장르의 책들 중 몇몇 권은 이런 것들을 토픽으로 삼지 않는가? 또 나는 1달 전에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었다. 일상 속 대화에서 소통능력이 구린 나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리면서 양심에 심각하게 찔린 나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좋다고 주변인에게 칭찬했다. 이렇게 나에게 합리화의 이유를 붙인다는 걸 뻔히 아는 것 역시 찌질함이라 부른다. 가끔 내 머릿속에서 내가 해온 허튼짓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 머릿속에 딱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나에게서 이 두 가지의 찌질함을 빼놓으면 시체라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찌질함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네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다. 이 네 편에 세명의 주연인 정유미, 이선균, 문성근 배우가 나온다. 지금이야 정유미-이선균 배우가 인기도 제법 있고 우리에게 친근하지만 이때의 이들은 풋풋한 모습이다. 풋풋함. 감독 홍상수는 이 풋풋함이라는 감정 머리 위에서 관객을 갖고 논다. 네 편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20대거나 대학 교수같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지만 행동하는 건 초등학생의 풋풋함이 느껴진다. <주문을 외울 날>을 보자. 주인공 영화감독 진구는 송 교수에게 '당신 소문이 안 좋은 걸 아느냐?'라고 묻는다. 근데 곧이어 있을 GV에 누가 나타나서 '당신이 내 친구의 인생을 망쳤다.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질문을 듣는다. 전자 상황에서 진구는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라고 합리화를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선 '이 상황에서 이 질문이 맞냐?'라고 역정을 낸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합리화를 한 것이다. 두 번째. 키스왕이다. 친구 옥희를 좋아하는 진구. 진구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숙맥이지만 아무튼 옥희가 좋다. 옥희는 이런 진구의 마음을 전해 듣는다. 송 교수와 진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옥희. 친구에게 송 교수와 함께 있을 때 즐겁다고 말해 이쪽을 택할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진구와 함께한다. 엔딩부에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옥희가 진구에게 말하는 대사가 압권이다. '나는 네가 착해서 좋아'라는 말에 '착할게'라고 답한다. 아무튼 나는 너를 위해 착해질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 쪽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 합리화를 했다. 세 번째. 폭설 후는 굉장히 짧다. 송 교수는 누구보다 수업에 진심인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학생이 안 오니 우웨엑 토와 함께 애정을 뱉어낸다. 이 단편에도 스스로를 위한 합리화가 이뤄진다. 네 번째.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옥희의 영화>다. 주인공 옥희는 젊은 남자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나이 든 남자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옥희는 나이 든 남자를 고르지 않았다. 산을 왔다 갔다 하는 거 빼곤 별거 없었던 추억이지만 옥희는 함께 했던 시간을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관객이 보기엔 그냥 진구와 송 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 떠나가는 추억을 회상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옥희는 스스로에게 특별했으면 하는 순간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영화는 4편의 이야기를 연달아 붙이며 인간이라면 있을법한 찌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타 감독들이 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이 찌질함과 합리화는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한다. 남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 자신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로남불'이 찌질함이라는 것의 본원이겠지. 첫 번째 <주문을 외울 날>은 이 자기모순에 대한 이야기다. 소문은 근본적으로 내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자기의 소문에 관해 들을땐 이게 뭔 소린가? 싶다. 자기는 자기가 제일 잘 알거든. 근데 또 막상 믿기는 쉬워서 타인을 어렵지 않게 의심한다. 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 때 특정한 가치관 아래에 모든 것을 결정하며 사나? 아닐 것이다. 내가 직관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고 거기에 우리 스스로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면서 산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자기모순에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이런 모순은 <키스왕>에서도 나타난다. 어쩔 줄 몰라 옥희의 집 앞에서 소주를 마시는 진구. 이 앞에서 했던 말이 재밌다. '나는 너랑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아'와 '착할게' 이 두 마디다. 이 말과 진구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거면 성격이 잘 맞는 거고. 착할 게는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맞춰주겠다는 것 아닌가? 이 말을 들으면 진구는 옥희를 배려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근데 진구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런 거 없다. 숨기고 그럴 것도 없이 옥희와 입을 맞춘다. 연애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진구의 이런 화법과 행동은 개연성을 갖긴 하지만 그냥 주인공은 무작정 옥희랑 사귀고 싶은 거다. 그래서 앞 뒤가 다른 행동을 일단 저지르고 본다. '내가 이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지'같은 체계가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확실히 대비가 된다. 그러니까 소문의 속성과 짝사랑-연애로 이뤄지는 과정을 대치시킨 셈이다. 난 이 지점이 분명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모순을 느끼기 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원래 앞 뒤 다르다. 신나게 전 애인 험담하다 그들의 전화에 혹하는 게 우리 똑은 우리 친구들의 이야기 아닌가? 또 남을 욕할 때의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남 험담하는 사람이라고 욕먹는 주위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타인과 갈등하거나 자기혐오의 빠질 때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살다 보면 이 경험들 한 번씩은 해봤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 인생에서 절대 별개가 아닌 이기심이란 감정을 일상의 에피소드로 표현해 공감을 얻는다. 즉 구로사와 기요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이야기로 <큐어>를 썼고 봉준호 감독은 어머니의 모성에 관한 작품으로 <마더>를 만들어 관객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면 홍상수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한 코미디를 그냥 배우 세명에 4천만 원 제작비가 든 4편의 단편영화로 끝내버린 것이다. 일상 속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화로 다가올 때 어떤 느낌인지를 500%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완전히 미쳐버린 천재성인 셈이다.
이 천재성은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에서 더 뒷받침된다. 진구가 묻는다. '무얼 원하고 사세요?' 송 교수가 답한다. '오늘의 내가 원하는 것과 내일의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앞에서 내가 썼던 이야기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바로 다음 장면에 '학교 때려치우기 잘했다'라고 말하는 송 교수의 대사가 웃겼다.) 네 번째 이야기는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냥 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가 끝이다. 근데 이 등산과 하산만으로도 영화라는 예술의 전부를 보여준다. 남이 보기엔 그냥 에피소드인 이야기를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무언가와 비교한다. 그리고 항상 무언가를 골라 다른 것과 작별한다. 이걸 겉으로 드러내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티를 내면 찌질함이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것을 보며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라며 자위한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 공감을 얻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의 행동이 나와 닮았기 때문에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 상황이니까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외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우리라고 해서 꼭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찌질해서인지 그 영화의 장면과 과거의 에피소드 하나를 같다고 여기거나 '내가 저거보다 낫지'라며 조소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를 해 버리는 것이다. 또 내 어떤 것과 현재의 어떤 것을 비교해서 우선순위를 정한다. 비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네 번째 영화의 등산과 하산을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왜 홍상수의 영화 내지는 영화라는 장르를 보며 공감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닿아있다. 제목이 <옥희의 '영화'>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세 가지 질문의 답은 굉장히 쉽다. 우리는 대체로 못나고 찌질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고 모두에게 소심한 구석 하나쯤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거나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라고 여긴다. 잠깐, 이거 우리 모르나?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게 엄격하고 상처를 호소하며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최면을 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공감을 얻는다. 그래.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스스로와 합리화를 한 채로 무언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또 영화를 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것들을 떠나보낸다. 무한 반복이다. 우리는 이 지루하고 귀찮은 일상 속에 산다. 내가 찌질하지 않다는 변명과 함께 말이다. 감독 홍상수는 이렇게 모순적인 우리의 모습을 포착해 또 네 개의 단편영화로 접근한다. '너 이런 거 내가 다 알아!'라는 말과 함께 관객의 마음을 얻는다. 하나의 장편이 아닌 네 가지의 단편을 통해 전체로서의 의미는 버리고 순간순간 느껴지는 공감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개수작 같은 영화다. 사실 까고 보면 되게 별거 없는데 그저 이성을 꼬시기 위해 사용하는 개수작 화법인 셈이다. 영화 전면에 주제의식은 사실 별거 없고 느끼는 감정만을 따르라는 대사가 나온다. 난 그것마저도 개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나 너희들 마음 다 알아.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안다고. 그러니까 내 영화에 의미 같은 거 찾지 마. 이건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냥 니들 이야긴 거 아니까 너희들 마음은 이미 내 거야.' 뭐 이런 식의 개수작인 셈이다. 우리 대부분의 영화 아니 문학작품은 메시지란 게 있지 않은가? 근데 홍상수는 감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있어 보이는 말로 주류와는 다른 본인의 세계를 확고히 한다. 내가 만든 세계를 관객에게 주입시켜 '와 이 사람 전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우리는 이 논리에 설득당하는 바보들이다. 조명도 별로고 화장도 안되어있고 관통하는 서사도 심심하며 예산도 작은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에게 꼬인 물고기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이기적인 우리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무엇을 비교하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신다. 홍상수는 우리에게 좋은 솔루션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진짜 인정하기 싫은데 나도 그에게 설득당했다. 아마 신작을 우리 지역에서 볼 수 있다면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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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따뜻하고 애틋한 애니메이션 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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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좀 들어줘
8살 소년 아웬은 얼룩진 멍투성이 얼굴로 법정에 앉아있다. 아웬의 아버지 에릭 발로는 사실 아동학대 가해자이다. 그리고 발로 부인도 그런 아웬을 방치시켰다. 그래서 혐의를 받은 에릭 발로와 발로 부인은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나온 것이다. 아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의 부모가 괴롭히고 방치시켰어도 말이다. 그러나 아웬이 할 수 있는 건 법정에서 난동을 피우는 거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건 그 방법밖에 없기에...
2. 달과 천국
마오마오는 올챙이를 키웠는데 하루가 지나자 죽어버린다. 그 올챙이를 계속 기억하는 마오마오에게는 오직 죽은 올챙이 생각뿐이다. 올챙이의 죽음에 슬퍼한 마오마오가 할머니에게 올챙이는 죽으면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그러자 할머니는 올챙이가 죽으면 달에 간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마오마오는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지만 할머니가 들려준 노래를 생각하며 모든 생명체는 윤회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후에 올챙이를 키웠는데 그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었고(사실 두꺼비지만) 창문 밖으로 나간다. 그 광경을 본 마오마오는 할머니가 개구리로 환생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3. 사진이 살아있다
피터는 가족과 함께 할머니가 있는 시골로 내려간다. 시골 풍경이 낯설고 불편한 게 많지만 재미있는 일들도 많다. 피터는 시골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같이 놀면서 친해진다. 하지만 피터에게 큰 숙제가 있으니 바로 다락방에서 혼자 자는 것이다. 혼자 자는 게 무섭지 않지만 사진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걸 보고서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사진과 맞서 싸우기로 한다. 알고 보니 그 사진은 전쟁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사진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원혼은 사실 오줌이 마려워서 참아왔던 것이다. 그걸 안 피터와 친구들은 할아버지 사진을 화장실에 둔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 사진은 원한이 풀리게 된다. 조금 웃긴 이야기지만 어린이에게는 처음 보는 시골 풍경이 무섭고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4. 성인식
진정한 성인이란 무엇이고 그 기준은 무엇일까? 어른들은 성인이 되려고 하는 어린 사람들에게 기준을 맞춰 세운다. 박재민 감독은 성인식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사회가 정한 성인식의 기준에 맞서고 싶어 했다고 한다. 과연 일찍 철든다는 게 진정한 성인을 말하는 걸까? 또한 이 4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5. 별을 담은 소년
조선시대에 상민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어린 결이 할 수 있는 일은 물을 퍼다 나르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결에게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는 부모가 없는 고아인 반아를 데리고 온다. 결은 그런 반야를 싫어하고 내쫓으려 하지만 할아버지는 불만이 많은 결에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당시 조선시대에서 양반에게 상민이 상놈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모진 괴롭힘도 많이 받았다. 결이 왜 그렇게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2023.09.17 (일) 13:00 롯데시네마 은평(롯데몰) 4관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기간: 09월 13일 - 0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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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섬가이즈 | 잘생긴 이유를 찾는 공포 코미디 오컬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칭 터프가이 ‘재필’(이성민)과 섹시가이 ‘상구’(이희준). 하지만 실상은 한 번 보면 겁을 먹지 않을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첫인상의 소유자들. 그들은 이사 온 첫날부터 험악한 인상 때문에 동네 경찰 ‘최 소장’(박지환)의 의심을 사지만, 그간 꿈꾸던 유럽풍 저택을 수리하며 새 출발을 고대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재필과 상구는 의도치 않은 위기에 처한다. 펜션에 놀러 왔던 대학생 '성빈'(장동주) 및 친구들과 마트에서 갈등을 빚고, 그들 중 하나인 ‘미나’(공승연)를 호수에서 구하다가 납치범으로 오해받기까지 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이사 오던 길에 죽은 걸 발견해 집 뒤 야산에 묻어준 흑염소가 오래전 봉인됐다가 탈출한 악마 '바포메트'로 밝혀진다. 그렇게 재필과 상구는 이사 첫날부터 혹독한 신고식을 마주한다.
한국 영화에 수혈된 새 피
올해에도 어김없이 들리는 말이 있다. '한국 영화의 위기'. 팬데믹이 끝난 후로 여전히 관객 수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상황이다. 천만관객을 돌파한 <파묘>와 <범죄도시4>를 제외하고 100만 관객을 넘은 한국영화는 <시민덕희>, <외계+인 2부>, <그녀가 죽었다>, <건국전쟁>까지 4개에 불과하다. 200만 명을 돌파한 작품은 없다. 중박 영화가 사라진 채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주된 이유로는 비싼 영화값과 OTT 영향력의 확대가 꼽힌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원인이 더 있다. 그중 하나가 새로움의 부재다. <범죄도시> 같은 브랜드 파워는 갖추지 못한, 스타 배우와 익숙한 소재 및 구성으로 무장한 텐트폴 영화의 실패가 그 방증이다. 반면에 <잠>, <파묘>처럼 다소 낯선 장르나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작품은 의외로 성공했다. 즉, 흥행 공식을 반복하는 권태로움이 영화관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키운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핸섬가이즈>는 박수가 아깝지 않다. 오컬트, 코미디, 고어, 심지어 뮤지컬까지 그간 한국 영화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장르와 소재만 골라 모았다. 그러면서도 마냥 가볍지는 않은, 뼈 있는 웃음을 자아낸다. 치지 말라는 공만 때렸는데 보기 좋게 장타를 만든 셈이다. 비록 마이너 한 장르라서 당장의 흥행은 어려워도, <핸섬가이즈> 같은 도전과 실험이 이어지면 관객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낯선 맛으로 가득한 한 상
<핸섬가이즈>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상술했듯이 장르다. 쉽게 다루기 어려운 장르만 골랐다. 우선 눈에 띄는 장르는 오컬트다. 과거 외국인 선교사가 간신히 봉인해 둔 '바포메트'가 전해져 오던 예언대로 깨어날 때, 그를 막을 세 명의 사도 혹은 천사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다. 소재 자체는 <검은 사제들>과 비슷하지만, <천박사: 퇴마 연구소>처럼 무겁지는 않은 비슷한 톤 앤 매너를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서도 오컬트 공포 영화 이상으로 놀랄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원작인 <터커 & 데일 Vs 이블>의 색채를 빼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고어한 연출이 꽤 빈번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분쇄기에 빨려 들어가거나, 나무에 찔려 죽은 시체에 구멍이 나는 식이다. 그 앞뒤로 코믹한 연출을 더해서 충격을 상쇄하고는 있지만, 15세 이상 관람가가 맞나 싶은 수준으로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묘사인 것은 분명하다.
심지어 뮤지컬 영화 요소도 일부 차용했다. 상구와 미나가 같이 설거지하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처럼 '설거지할 때 들으면 좋은 음악 3'이라는 테이프를 틀고 춤을 춘다. 강아지와 함께 합을 맞추기도 하고, 거실을 마치 무대 위처럼 누빈다. <킹스맨> 시리즈가 연상되는 B급 감성도 가득하다. 이처럼 <핸섬가이즈>는 한국 영화에서 실험적이라고 평가할 법한 화법만 모아둔 작품이다.
코미디라는 접착제
그런데도 <핸섬가이즈>는 난잡하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각 장르의 재미도 모두 맛볼 수 있다. 코미디가 그 원동력이다. 우선 코미디 자체의 타율이 높다. 원작을 보지 않은 이상, 클리셰를 끊임없이 비트는 웃음 포인트를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 일례로 <핸섬 가이즈>는 여름 여행을 간 친구들이 한 명씩 죽는다는 익숙한 펜션 괴담을 차용했다. 그런데 펜션 대신 서양식 주택과 기도실을 활용해 오컬트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변환한다.
주인공 클리셰도 비틀어서 유머로 활용한다. 무당이나 퇴마사 같던 재필과 상구가 사실 그저 전원생활을 꿈꾸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는 식이다. 작중 모든 사건이 우연한 사고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장면들은 급격한 장르 전환으로 인한 어색함을 감춰주고, 통일성과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소품을 허투루 쓰지 않는 디테일도 인상적이다. 한 번 등장한 소품은 어떤 식으로든 임팩트 있게 재등장한다. 부러진 기둥처럼.
배우들의 조합도 코미디를 역으로 강화한다. 사실 이희준, 이성민 두 주연 모두 악역이나 흑막의 이미지가 더 강한 배우다.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대통령과 경호실장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그런 그들을 푼수 동생과 츤데레 형 조합으로 활용하면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공승연 활용법도 남다르다. 20대 초반이라 가능한 독특한 입담이 또 하나의 웃음 포인트다.
코미디에 뼈가 있다
심지어 코미디는 단순히 코미디로 끝나지 않는다. <핸섬 가이즈>를 관통하는 모티브가 편견의 역이용이기 때문. 영화는 두 주인공을 억울한 상황에 던져 놓고, 당황한 그들의 리액션을 유머 재료로 삼는다. 상구가 마트에서 넘어진 미나를 일으켜 줘도, 상민이 호수에서 실족사할 뻔한 미나를 구하고 CPR을 시도해도, 그들은 성추행범으로 오해받는다. 로드킬 당한 염소 사체를 치워도 지나가던 경찰은 그들을 살인범으로 의심한다.
특히 타인들이 유독 그들만 의심하는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들의 행동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그들의 험악한 인상과 외모가 문제다. 재필과 상구는 자신들의 외모에 대해 콤플렉스도, 자격지심도 없다. 그러나 타인들은 그들의 얼굴만 보고서 가장 안 좋은 상황만 가정한다. 오직 외모 때문에 차별받는 것은 아니지만, 오해를 살만한 상황에서는 그들의 외모가 결정적인 심증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이처럼 코미디 뒤편으로 은연중에 깔린 메시지는 두 주인공과 대학생 일행의 대비를 통해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외견상 말끔해 보이고, 별장과 골프장을 골라 다니는 부유한 대학생들이 알고 보니 마약과 성폭력 범죄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 그 덕분에 재필과 상구가 겪는 해프닝을 보고 웃다 보면 마음이 슬며시 불편해진다. 대학생이 무고한 피해자일 것이라는 편견을 자각하게 되니까.
코미디와 오컬트의 연결고리
이에 더해 오컬트적인 전개와 코미디에 담긴 메시지가 예상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덕분에 <핸섬가이즈>는 더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가톨릭 베이스의 퇴마물인데, 영화의 메시지가 천주교 교리와 직접 맞닿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핸섬가이즈>라는 제목도 압축적이라서 흥미롭다. 외모에 대한 편견을 기독교적인 선악관으로 전환하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흔히 신약 성경의 예수는 구약 성경의 모세가 남긴 십계명 같은 율법을 단 두 조항으로 요약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특히 예수는 이웃 사랑을 강조한다. 소외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자기 가족처럼 아끼라고 가르친다. 설교뿐만 아니라 실천도 한다. 죄인, 여성, 세리, 사마리아 사람, 문둥병 환자 등 당대에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이들에게 그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핸섬가이즈>는 이를 미나를 대하는 태도와 연계해 오컬트적으로 풀어낸다. 성빈과 친구들은 미나를 철저히 무시하고 이용해 먹으려 한다. 지방 출신에 집도 가난하고 가진 것도 없다면서. 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병조'(강기둥)를 운전기사 겸 요리사로 부려 먹는다. 재필과 상구는 다르다. 그들은 귀찮거나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먼저 선행을 베푼다. 위기에 처한 미나를 구하고 도와줄 때도, 로드킬 당한 흑염소를 매장할 때도.
미나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성빈의 외모나 재력에만 주목하고, 겉모습만 보고 재필과 상구의 호의를 의심한다. 하지만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며 자기 편견을 반성한다. 영화는 이러한 차이를 오컬트적으로 풀어낸다. 예수의 말대로 선행을 베푸는 재필, 상구, 미나는 바포메트를 무찌를 예언 속 천사로 밝혀진다. 그들을 무시한 성빈과 친구들은 악마를 깨울 제물이 된다. 겉모습을 이용한 유머를 단순한 코미디로만 볼 수는 없는 이유다.
반 숟가락 남은 마지막 아쉬움
다만 <핸섬가이즈>라는 실험이 완벽하지는 않다. 원작 영화를 봤거나, 장르 영화 마니아라면 매끄럽지 않은 지점이 적지 않다. 더 잔인하거나 코미디 상황에서 더 뻔뻔하게 연출했어야 할 장면이 있다고 여길 수 있으니까. 이에 더해 애써 감추고 있지만, 장르가 변환되는 지점에서 서로 다른 장르의 문법이 충돌하거나 타이밍이 다소 어색한 지점이 순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또 원작을 리메이크하면서 한국적인 감성을 더하려고 했는데, 이 지점에서도 망설이는 듯한 지점이 있다. 일례로 박지환 배우를 경찰 역으로 캐스팅한 이상, <범죄도시> 속 '장이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묘사를 통해 더 강한 웃음을 유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신부님을 등장시킬 때도 <검은 사제들>을 오마주 하는 식으로 현지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점은 크게 눈에 띄지 않을뿐더러,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슷한 장르와 전개가 반복되는 한국 영화라는 호수에 꽤 묵직한 돌멩이 하나가 던져진 거처럼 보이니까.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핸섬가이즈>라는 돌멩이는 더 용감해 보이고, 그 파란이 더욱 멀리 퍼져 나가기를 바라고 싶어지기도 한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치지 말라는 공만 골라 쳐 만들어 낸 기대 이상의 3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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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 가장 손쉽게 불안을 감추는 방법
<독립시대>는 인상적인 자막으로 시작한다.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공자의 다짐과 그 이후엔 무엇을 해야 하냐는 제자의 물음. 곧바로 영화의 배경이 될 타이페이가 가난을 극복하고, 세계 부자 도시로 거듭났음이 텍스트를 통해 전해진다. 이어지는 이미지는 직전의 묵직한 말과는 상반된다. 빠르게 움직이는 롤러스케이트를 비추는 클로즈업. 그리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인물이 롱샷으로 비춰진다. 잘 나가는 연극의 연출가로 유추되는 한 남자는 롤러스케이트에 의지한 채 끊임없이 움직이며 기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다. 입도 발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 기자 또한 끝없이 몸을 움직인다. 언뜻 보기에 그는 무척이나 자유로운 예술가로 보인다. 기자들과 함께하는 공적인 자리에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라니.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 모습에서 그의 불안을 읽었다. 정박된 카메라, 끝없이 움직이는 인물. 풍요를 맞이한 대만 사회는 평온해 보이나, 실상은 혼란스럽다. 제자의 질문을 곱씹게 된다. 풍요, 그 다음엔 무엇이 오는가. 다음 컷은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표절 의혹에 휩싸여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절망한 인물. 그의 친구인 몰리는 묻는다. “그런 비극적인 몰골로 희극을 하겠다고?” 거창한 공자의 말로 시작한 이 작품은 전례 없던 풍요의 시대에도 여전히 불안한 청년들의 일상을 비추며, 본격적으로 당시의 대만 사회로 시점을 이동시킨다.
이 작품의 시작을 장식하는 인물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버디이나, 사실 작품에서 그의 비중은 크지 않다. 대신 이 작품은 부잣집 딸로 태어나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몰리, 그녀와 약혼을 앞두고 있는 재력가의 아들 아킴, 몰리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비서인 치치, 그리고 그녀의 보수적인 애인 샤오밍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이 작품을 얄팍하게 요약하기는 쉽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중심으로 흔들리는 네 사람의 일과 사랑, 그리고 우정의 이야기.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갈등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 이 정도로 이 작품을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그 너머의 이야기가 있다. 네 명의 주인공 중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은 치치다. 치치는 몰리의 비서로서 표절 사건의 해결사이자, 겉보기에 모난 데 없는 호감형의 인물로 모두의 환심을 사는 인물이다. 게다가 뛰어난 미모로 극중에서 말하는 ‘보조개 미소’를 항상 장착하고 다니는 치치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다. 언제나 친절한 그녀에게 수많은 남자들은 관심을 표하고, 몰리를 비롯한 여자들은 그녀에게 크게 의지한다. 이런 다정한 성격 탓에 그녀는 수많은 갈등 상황의 중재자가 된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도 아닌 갈등 상황들에 휘말려 들어가는 그녀. 어느새 그녀의 매력적인 ‘보조개 미소’는 타인에 의해 ‘위선’적인 미소로 재단 당한다. 표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몰리의 형부에게 그런 가식적인 미소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정도는 그녀에게 익숙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한 친구인 몰리마저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건넨다. “그 미소로 눈길은 끌겠지만, 미소 속에 숨겨진 속은 모르겠어.” 사실 이런 치치의 태도는 영화의 태도와 닮아있다. 치치가 언제나 ‘보조개 미소’를 달고 사는 것처럼, 이 영화는 웃음기를 잃지 않는다. 잠깐 진지한 생각을 해볼라치면 그런 시간은 사치라는 듯 관객을 웃긴다. 물론 몰리와 치치, 치치와 샤오밍의 관계에도 어두운 면은 있다. 그러나 작품은 주인공들의 얽히고설켜있는 관계를 이용해 진지한 순간을 손쉽게 빠져나간다. 가끔 인물들이 자신들의 고뇌를 논하느라 진지해질 법하면, 아킴과 버디를 필두로 한 인물들이 등장해 웃음을 주는 식이다. 뼈가 있는 웃음이더라도 웃음은 웃음이다. 참으로 희극적인 영화가 아닌가.
웃음은 사실 불안을 숨기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다. 나 또한 그에 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나에게는 어떤 불행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능력, 심지어는 그 불행을 그저 웃음거리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나의 재능 중 하나다. 이렇게 불안을 끝없이 통제해 온 나는 내 삶이 내가 연출하는 영화이길 바랐다. 노력한다면 원하는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연극에 가까웠다. 아무리 불안을 웃음으로 감추어 봐도 변수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등장하고 NG가 난다. 영화라면 다시 찍으면 될텐데 연극은 그렇지 못하다. OK컷만을 건져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자꾸 많은 것이 어긋난다. 오프닝 시퀀스에 버디는 말한다. “인생은 연극이고, 연극이 곧 인생이에요.” 그의 말은 단순히 연극인으로서 자신의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은 연극이다. 매일을 연기하고, 매일을 실패한다. 그리고 실패를 감당하고 사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희극 같은 이 작품을 잔뜩 웃으며 즐기고 나면, 아름다운 엔딩이 우리를 반긴다. 서로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건네며 헤어짐을 말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의 얼굴에 아쉬움이라곤 없어 보인다. 치치는 말한다. “모두가 타인에게서 안정감을 찾는다면 자기 자신은 누가 지키겠어?” 이때 실질적인 주인공인 치치가 어떤 ‘독립’을 하는 엔딩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아름답게 어긋난다.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진 샤오밍에겐 어쩐지 후회가 느껴진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자, 치치가 그를 반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산뜻하게 말하는 치치. 샤오밍은 그녀를 꽉 안는다. 꽉 닫힌 해피엔딩 같은 결말. 그러나 이 아름다운 엔딩은 영화 <아사코>의 엔딩과 겹쳐 보였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음에도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두 사람.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했던 여자 주인공을 남자 주인공은 내치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구한 집의 베란다에 선다. 처음 집을 계약할 때는 아름답다고 말했던 강을 보며 남자는 다른 말을 한다. “더러운 강이네.” 여자는 답한다. “그래도 아름다워.” <독립시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둘 사이는 나아질까. 그것은 미지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샤오밍은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었다. 실패를 각오하고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사이에 두고 서있던 두 사람은 최소한 지금만은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매일을 연기하고 매일을 실패하는 나이고, 우리이다. 그럼에도 함께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나는 실패에 대해서라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굴 것이다. 또 바보같이 능숙한 연기를 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문 앞에 서겠지. 풍요도 관계에 대한 갈증과 불안은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독립’ 없는 ‘독립시대’의 흥미로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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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이런 영화들을 보며 자라긴 했었지
세계관 최강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용의 전사 겸 팬더 포(잭 블랙)이다. 지금의 포에겐 걱정이랄 것이 없다. 당연하지. 빌런도 세 동물이나 때려눕혀 이젠 웬만한 악당들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아 여러모로 충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근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친아버지 리 샨(브라이언 클랜스턴)까지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포는 매일이 축제 같다. 평범하게 악한들을 해치우고 인질이었던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난 어떤 날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동물들이 떼거지로 몰려든다. “포! 타이렁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있어!”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고 넘기는 포. 사실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맞다. 왜냐하면 포는 과거에(<쿵푸 팬더> 1편에서) 타이렁을 때려눕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 포. 하지만 포를 귀찮게 하던 여우 젠(아콰피나)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이건 분명 카멜레온(비올라 데이비스) 짓이야. 그녀가 누군지 아는 동물은 나뿐이지!” 귀가 열린 포. 용의 전사로서 카멜레온에게 승리해 평화의 계곡의 평화를 사수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런 영화들을 봤었지
<쿵푸팬더 4>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이 가진 근본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그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 글쓴이는 ‘어릴 때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자란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기획의도에 걸맞게 영화는 온갖 귀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가령 어린 동물들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은 다 재미있다. 혼자 노는 외로운 동물은 하나 없이 이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다 ‘아 저렇게 사이좋게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구나!’라는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것 같다. 또 그 아이들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세상을 이루고 있는가? 에 대한 부분도 흥미롭다. 영화에서 젠의 본거지로 갈 때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 어린 동물들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방식을 보면 이 영화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사소한 부분도 따듯한 필치로 이야기를 구성한 것이다. 어리다고 다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서 ‘엄마아빠 말 잘 들어야 해!’라고 말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충돌하고 어른으로서 좋은 역할을 이행하는 것 같지도 않다. <쿵푸 팬더 4>는 이 지점에서는 나름 매력 있는 화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클리셰에 천착하지도 않았고 그걸 부수려고도 하지 않은 채로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든 것이다.
영화에서 액션이 활용되는 방식 그러니까 시각적인 부분도 아이들을 고려한 듯하다. 우선 글쓴이는 이 <쿵푸 팬더 4>의 단점 중 하나가 액션영화로서 방점이 덜 찍혔다는 쪽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점은 반대로 돌아와 ‘아이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성’이란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고? 영화가 일부러 액션의 향만 첨가하고 세계관의 토대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는 뜻이다. 이 이유로 어떤 부분에선 영화가 기획의도를 잘 살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랑스러운 포와 젠의 모습을 보여주고 앞으로 시리즈를 예고하기만 하면 됐지 액션이 왜 필요해? 이 영화에서 쿵푸는 액션의 갈래로서 묘사하는 것이 아닌 그냥 서사에서 도구로서 작동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합 척척 주고받고 싸우는 모습보다 영화의 귀엽고 유머 가득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포일러를 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 아닌 선에서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의 일부 장면을 가져온다고 해보자. 윈터 솔저 vs 캡틴 아메리카의 맨몸 액션 장면을 보면 영화가 이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1편의 줄거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두 사람의 무력과 관계를 유추할 수 있게끔 맨목액션을 타이트하게 짜는 것이다. 실제로 글쓴이는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져>를 안 봤음에도 이 영화를 통해 캡틴 아메리카가 어떤 캐릭터인지, 그리고 왜 이 영화에서 액션이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 왜 멋있어? 당연히 이 장면 때문이지!로 요약이 가능한 것이다. 이 <쿵푸 팬더 4>는 이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에서 액션이 활용되는 방식이랑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포와 젠에게 쿵푸가 왜 필요해? 그거야 두 캐릭터 간의 관계 때문이고, 그 내밀한 부분은 영화 안에 있기 때문이지!라고 답하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사용된 색도 이를 성실하게 구현하듯 밝고 사랑스러운 톤이 중심이다. 아이들끼리 와서 무난하게 볼 만한 영화라는 기획의도를 충실히 살리는 것이다.
직구 뒤 슬라이더
이 영화에서 감독이 승부수로 던졌을 것 같은 요소는 두 가지다. 우선 아버지가 두 명이라는 점이다. 아버지가 둘인 이유는 간단하다. 어렸을 때 포가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그런 포를 핑(제임스 홍)이 키웠다. 이런 상태에서 친아버지를 찾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두 명이다. 요즘의 할리우드를 생각하면 이 두 사람이 동성애 로맨스로 향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1차적인 클리셰를 비튼다. 두 동물의 관계가 로맨스라고 보기엔 많이 어렵다. 하지만 이 두 동물을 연결하는 관계는 포를 통해 다진 견고한 우정이다. 이 두 설정을 영화 안에서 캐미로 살리는 부분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 이 영화의 감독은 ‘아버지가 두 동물인’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기까지 하는 친절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영화가 두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줄거리 내에서 굉장히 중요해서 이 부분이 이야기의 전부를 쓰는 꼴이 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다 쓰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이 두 캐릭터가 사실상 본 영화의 진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특정 캐릭터들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글쓴이는 메인빌런이 ‘카멜레온’이라는 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뱁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건 영화가 수도 없이 다뤄온 클리셰 중 클리셰기는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적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 “남을 따라 하지 말고 너 자신을 찾아라”라고 하면 와닿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을 염두하고 플롯을 짠다면 뭐부터 염두해야 할까? 따라 하려는 이유 / 따라 하고 난 다음 / 캐릭터가 가진 모순 이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왜? 남을 좇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이 캐릭터가 나약한 정도를 묘사할 수 있으니까. 영화는 이 세 부분을 나름 철저하게 묘사하면서 쉬운 화법을 통해 관객들이 ‘남을 따라 한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게 유도한다. 이것은 영화가 간단한 액션과 귀염뽀짝한 색감과 소소한 유머를 가졌다는 점과 시너지를 낸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듣기 거북하게 하면 역효과가 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은 영리함을 지닌 것이다.
허무한 마무리?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무기가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그냥 무난하다. 장르적으로 뭔가 태도를 취하지만 확실하게 어필하는 무언가가 없다. 액션? 윗문단에도 적었지만 이 영화에서 ‘쿵푸’가 들어가는 이유는 인물간의 관계를 연결 짓기 위함이다. 포의 시원한 쿵푸액션을 기대하기엔 모자란 점이 많다. 또 핵심 캐릭터인 젠의 덩치를 보면 시원시원한 액션을 구현하기엔 역부족하니 영화가 이것을 염두하고 기획한 흔적도 보인다. 코미디? 영화에서 소소하게 웃음이 나는 장면이 있기는 하나 이것이 장르적인 특성이라고 볼 정도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왜? 젠의 캐릭터성이 포의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잭 블랙의 개인기를 보기엔 영화가 이런 부분까지 보여줄 여력이 없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사랑스러움? 그렇다고 보기엔 이 영화가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의 이미지를 너무 대놓고 가져와서 구현한 느낌이 있다. 가령 카멜레온이 사는 동네를 보면 이 캐릭터들도 동양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는 점이 이야기의 핍진성의 관점에서 ‘너무 뻔한 거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화려한 볼거리? 후반부 카멜레온과 관련한 모든 장면들이 굉장하긴 하지만 드림웍스의 전작 <장화 신은 고양이 : 죽여주는 모험>을 생각한다면 역시나 심심하다. 대단히 신선하다던가 귀엽다던가 유머러스하던가로 승부 보는 것이 아닌 기괴한 맛만 있으니 영화가 시각적인 부분을 잡으려다 만 것이다.
이렇게 내내 슴슴한 영화인 탓에 편의적인 줄거리가 거슬린다. 대표적으로 영화가 젠의 행보를 그냥 편의적으로 설정했다. 클리셰에 기댔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좀 더 불친절했거나 무언가를 암시하거나 극적인 감정선이 들어가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었다. 왜? 이 영화는 내지는 시리즈가 이 영화를 통해 해소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려면 젠 입장이 다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 포를 상대적으로 영향이 받는 캐릭터로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이유로 주인공(포)이 핍진성이 떨어지게 묘사되는 것이다. 이에 연장선상에서 카멜레온이라는 캐릭터도 젠을 돋보이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사용됐다. 카멜레온의 액션이 더 들어갔으면 영화의 생동감이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어떤 행위'를 두드러지기 위해 캐릭터들을 소모적으로 쓴 감이 있으니 빌런의 매력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단점을 가진다.
개봉일 때가 선거날이었고 이벤트로 팝콘을 무료로 주는 이벤트를 했었다. 그럼 어머니 아버지들이 투표하고 아이들 손 잡고 영화관에 갔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여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아이들끼리 보기 좋은 애니메이션 영화.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나 이런 영화 보고 자랐지!’하며 자랐던 영화로는 제격이다. 뭐 데이트무비로 이 영화를 고른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영화고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것이 전부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 <슈렉> 시리즈나 디즈니의 <라푼젤>을 생각하면 영화가 51%짜리 성공을 거뒀다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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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영화 후기 / 매즈 미켈슨 주연 / 덴마크 영화 / 영화제목이 갱단 이름이었다니.. ^^;;;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작남의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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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램 해석 및 리뷰 - 램에서 아다가 가지는 의미 (결말 포함 및 스포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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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폭풍이 휘몰아치던 크리스마스 날 밤 이후
양 목장에서 태어난 신비한 아이를 선물 받은 '마리아' 부부에게 닥친 예측할 수 없는 A24 호러
독창적인 호러 명가 [미드소마],[유전] A24의 선택!
칸영화제, 시체스영화제 휩쓸고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강력 후보까지!
전세계가 주목하는 화제의 호러 [램]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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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30초 리뷰 예고편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텐 링즈'의 힘으로 수세기 동안 어둠의 세상을 지배해 온 '웬우'
'샹치'는 아버지 '웬우'의 밑에서 암살자로 훈련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샹치'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습격으로 더 이상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어머니가 남긴 가족의 비밀과 내면의 신비한 힘을 일깨우게 된다.
벗어나고 싶은 과거이자, 그 누구보다 두려운 아버지 '웬우'를 마주해야 하는 '샹치'.
악이 될 것인가? 구원이 될 인가?
마블의 새로운 시대, 세상에 없던 힘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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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졸트> 메인 예고편
사랑하는 남친을 잃은 그녀.
더 이상의 통제는 필요 없다.
제대로 돌아버린 자.
그녀의 숨은 능력이 깨어난다!
백만 볼트 짜릿한 액션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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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내 안에서 영화의 개념화는 서양, 특히 유럽과 미국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 시절 영화를 제대로 전공해보자고 결심한 이후 처음 수강한 강의가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영화들로 모든 역사적 자취를 설명하는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영화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존재했는지, 하다 못해 아시아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수업을 탓할 수는 없다. 영화가 설명되는 방식이 으레 그랬으며, 눈을 돌려 관심을 가지더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정보는 알기 어려웠다. 서양 국가를 주제로 한 발표와 그 외 국가들에 대한 발표는 분량부터 차이가 났다. 유수한 영화제라 불리우는 국제영화제들은 모두 일부 국가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그럴 만했다.
영화를 더욱 넓고 깊게 소비하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나 또한 변함 없이 몇 국가의 작품들과 그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었고, 다양한 국가영화를 접하고 싶던 차에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감독이 여성 주연들과 함께 연출한 작품이었기에 더욱 눈이 갔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나 그들의 녹록치 않은 삶을 멀리서나마 접해왔기에 영화로 만나는 인도 여성들은 어떤 모습일지 하루 빨리 알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는 게 어려워요”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 뭄바이,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에겐 해결되지 않는 사정들이 있다.
그러나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
미리 말해두겠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여성영화는 아니다.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라는 문장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떠올릴 수 있는가? 여성들이 모여서 함께 주거공간을 꾸려 나가거나, 기혼/미혼/비혼 여성들의 각 가치관들이 모여 건강한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라 감히 예상해본다. 그렇다면 해당 작품을 관람하고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오히려 남성과의 연애와 결혼이 자연스럽게 스토리의 주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 내에 만연한 종교에 따른 가치관과 여성을 억압하는 뿌리 박힌 것들에 맞서는 요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도 여성'들에게 동일시되어야 조금 더 잘 보이는, 하지만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는 섬세한 작품임은 명확하다.
* 뭄바이를 느낄 수 있는 오프닝 시퀀스
극의 첫 장면은 누군가가 인터뷰를 하는 듯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뭄바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겪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른 목소리들이 짧게 풀어낸다. 그리고 배경은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의 밤을 그대로 담아낸 샷들이 나온다.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가운데 수많은 빛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자동차 전조등, 조명, 기차 혹은 지하철이 뿜는 빛. 고스란히 빛을 받는 사람들은 어쩐지 지쳐보인다. 이렇다 할 주인공 없이 도시 그 자체를 담으며 꽤 긴 시간동안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는 흡사 다큐멘터리 영화 같기도 하다.
그만큼 도시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복잡한 도로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의 행렬은 베트남 하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하노이에서 잠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언어를 공부하며 영상도 제작하고자 했던, 도시를 마음껏 즐기다 떠나면 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문득 외로움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버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이렇게 상상만 하던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느낌이었다. 눅눅한 공기와 도로의 소음, 즐비해 있는 길고 얇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도시의 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샷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여성들의 사소한 일상 또한 상세하게 묘사된 덕분에 그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는 극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 감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
초반부가 다큐멘터리 같았다면, 중반부는 실험영화 같은 면모를 보인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프라바'와 '아누'의 일상이 리드미컬한 사운드와 함께 독특한 편집으로 표현된다. 하루종일 좁디 좁은 사무실에서 고객 응대를 하고 있는 '아누'가 종종 나누는 문자 텍스트가 자막으로 화면에 보이는 호흡은 여느 극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힙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장난기 서린 음악이 본능적인 호감을 자아냈다. '아누'가 단독으로 나오는 사무실 몽타주는 아주 귀엽고 익살스러운 연기가 매우 돋보인다.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는 주로 밤으로 표현되었지만 모든 걸 뒤로 하고 바닷가 마을로 모인 세 주인공의 시간들은 대부분 낮으로 구성된다. 어둠에 잡아먹힌 도시와 달리 한적한 바닷가는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차 있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뻗어 나가는 빛줄기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화면에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세 주인공이 모인 장면에서는 ㅡ 알게 모르게 쌓아 두었던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린 채 ㅡ 새까만 하늘과 밤바다 속에 별과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비로소 그들의 주변 환경을 이루던 모든 빛이 한 데 만난 것이다.
다만, 극영화로서의 힘은 약하다. 각 등장인물의 서사는 미약하며, 접점은 모호하다. 현재진행형의 일상을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연락이 오지 않는 남편을 기억하는 '프라바'와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도 숨겨야 하는 '아누', 일평생 살아왔던 공간을 집이라고 인정 받지 못하는 '파르바티'. 각 사건들의 앞뒤상황이 제시되지 않는 만큼 그들의 감정선에 이입하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플롯 자체는 느리고 차분하게 진행된다. 명확한 대사보다는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비유적 표현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흐름에 탑승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면 수작이라고 판단했을 거 같다.
***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극중 '빅 클로즈업' 샷이 자주 사용되는 특징이 눈에 띄었다. 특히 얼굴, 그리고 얼굴 중에서도 눈 주위를 중심으로 샷을 잡는다. 눈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의 상을 담는다. 그리고 그 눈은 항상 빛이 있다. 주인공 자체가 빛이기에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에도 자연스럽게 빛이 옮기는 건지, 눈이 향하는 모든 곳에 빛이 있었고 그대로 담아냈을 뿐인지 알 수 없다. 정확한 건, 빛은 어둠이 있기에 인식될 수 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나자신 혹은 어둠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빛 그 자체였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독이 바라보는 인도, 여성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드러낼 줄 알고 그들의 우정이 존재하는 한, 그곳은 애써 빛을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애초부터 희망이 함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당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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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개수작을 부리는 감독이 있다?
나는 가끔 글을 쓸 때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어떤 주제로 쓸 때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만 한다. 정성일 씨가 와도 절대 쓸 수 없는 그런 것을 추구한다. 근데 막상 까 보면 타인의 것들과 별 다를 것 없다. 예를 들어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리뷰한 글을 보자. 나는 이 영화를 '아무것도 없는 영화'라고 썼다. 정말 솔직히 말해보자면 나는 이 문장을 쓰고 '와 진짜 전다. 내가 천재긴 해. 이거 아무도 생각 못할 듯.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쓴 거 읽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안 했다. 이미 알고 있거든. 영화 보고 느끼는 감정이야 사람들 간에 별 다를 바 없고, 홍상수 감독도 이걸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글은 별로 특별한 것 없을 거라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타인의 리뷰들을 읽지 않았다. 내 글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오로지 내 욕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 스스로가 특별해지고 싶은 순간을 나는 찌질함이라 부른다. 이 감정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찾을 수 있다.
난 어디에서 자기 계발서를 대차게 깐 적 있다. 근데 사실 내가 영화를 보고 쓰는 글은 크게 보면 자기 계발서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라 느끼는 외로움이나 자아 찾기 뭐 그런 것들을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장르의 책들 중 몇몇 권은 이런 것들을 토픽으로 삼지 않는가? 또 나는 1달 전에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었다. 일상 속 대화에서 소통능력이 구린 나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리면서 양심에 심각하게 찔린 나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좋다고 주변인에게 칭찬했다. 이렇게 나에게 합리화의 이유를 붙인다는 걸 뻔히 아는 것 역시 찌질함이라 부른다. 가끔 내 머릿속에서 내가 해온 허튼짓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 머릿속에 딱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나에게서 이 두 가지의 찌질함을 빼놓으면 시체라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찌질함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네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다. 이 네 편에 세명의 주연인 정유미, 이선균, 문성근 배우가 나온다. 지금이야 정유미-이선균 배우가 인기도 제법 있고 우리에게 친근하지만 이때의 이들은 풋풋한 모습이다. 풋풋함. 감독 홍상수는 이 풋풋함이라는 감정 머리 위에서 관객을 갖고 논다. 네 편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20대거나 대학 교수같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지만 행동하는 건 초등학생의 풋풋함이 느껴진다. <주문을 외울 날>을 보자. 주인공 영화감독 진구는 송 교수에게 '당신 소문이 안 좋은 걸 아느냐?'라고 묻는다. 근데 곧이어 있을 GV에 누가 나타나서 '당신이 내 친구의 인생을 망쳤다.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질문을 듣는다. 전자 상황에서 진구는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라고 합리화를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선 '이 상황에서 이 질문이 맞냐?'라고 역정을 낸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합리화를 한 것이다. 두 번째. 키스왕이다. 친구 옥희를 좋아하는 진구. 진구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숙맥이지만 아무튼 옥희가 좋다. 옥희는 이런 진구의 마음을 전해 듣는다. 송 교수와 진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옥희. 친구에게 송 교수와 함께 있을 때 즐겁다고 말해 이쪽을 택할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진구와 함께한다. 엔딩부에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옥희가 진구에게 말하는 대사가 압권이다. '나는 네가 착해서 좋아'라는 말에 '착할게'라고 답한다. 아무튼 나는 너를 위해 착해질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 쪽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 합리화를 했다. 세 번째. 폭설 후는 굉장히 짧다. 송 교수는 누구보다 수업에 진심인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학생이 안 오니 우웨엑 토와 함께 애정을 뱉어낸다. 이 단편에도 스스로를 위한 합리화가 이뤄진다. 네 번째.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옥희의 영화>다. 주인공 옥희는 젊은 남자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나이 든 남자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옥희는 나이 든 남자를 고르지 않았다. 산을 왔다 갔다 하는 거 빼곤 별거 없었던 추억이지만 옥희는 함께 했던 시간을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관객이 보기엔 그냥 진구와 송 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 떠나가는 추억을 회상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옥희는 스스로에게 특별했으면 하는 순간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영화는 4편의 이야기를 연달아 붙이며 인간이라면 있을법한 찌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타 감독들이 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이 찌질함과 합리화는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한다. 남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 자신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로남불'이 찌질함이라는 것의 본원이겠지. 첫 번째 <주문을 외울 날>은 이 자기모순에 대한 이야기다. 소문은 근본적으로 내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자기의 소문에 관해 들을땐 이게 뭔 소린가? 싶다. 자기는 자기가 제일 잘 알거든. 근데 또 막상 믿기는 쉬워서 타인을 어렵지 않게 의심한다. 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 때 특정한 가치관 아래에 모든 것을 결정하며 사나? 아닐 것이다. 내가 직관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고 거기에 우리 스스로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면서 산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자기모순에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이런 모순은 <키스왕>에서도 나타난다. 어쩔 줄 몰라 옥희의 집 앞에서 소주를 마시는 진구. 이 앞에서 했던 말이 재밌다. '나는 너랑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아'와 '착할게' 이 두 마디다. 이 말과 진구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거면 성격이 잘 맞는 거고. 착할 게는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맞춰주겠다는 것 아닌가? 이 말을 들으면 진구는 옥희를 배려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근데 진구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런 거 없다. 숨기고 그럴 것도 없이 옥희와 입을 맞춘다. 연애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진구의 이런 화법과 행동은 개연성을 갖긴 하지만 그냥 주인공은 무작정 옥희랑 사귀고 싶은 거다. 그래서 앞 뒤가 다른 행동을 일단 저지르고 본다. '내가 이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지'같은 체계가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확실히 대비가 된다. 그러니까 소문의 속성과 짝사랑-연애로 이뤄지는 과정을 대치시킨 셈이다. 난 이 지점이 분명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모순을 느끼기 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원래 앞 뒤 다르다. 신나게 전 애인 험담하다 그들의 전화에 혹하는 게 우리 똑은 우리 친구들의 이야기 아닌가? 또 남을 욕할 때의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남 험담하는 사람이라고 욕먹는 주위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타인과 갈등하거나 자기혐오의 빠질 때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살다 보면 이 경험들 한 번씩은 해봤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 인생에서 절대 별개가 아닌 이기심이란 감정을 일상의 에피소드로 표현해 공감을 얻는다. 즉 구로사와 기요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이야기로 <큐어>를 썼고 봉준호 감독은 어머니의 모성에 관한 작품으로 <마더>를 만들어 관객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면 홍상수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한 코미디를 그냥 배우 세명에 4천만 원 제작비가 든 4편의 단편영화로 끝내버린 것이다. 일상 속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화로 다가올 때 어떤 느낌인지를 500%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완전히 미쳐버린 천재성인 셈이다.
이 천재성은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에서 더 뒷받침된다. 진구가 묻는다. '무얼 원하고 사세요?' 송 교수가 답한다. '오늘의 내가 원하는 것과 내일의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앞에서 내가 썼던 이야기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바로 다음 장면에 '학교 때려치우기 잘했다'라고 말하는 송 교수의 대사가 웃겼다.) 네 번째 이야기는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냥 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가 끝이다. 근데 이 등산과 하산만으로도 영화라는 예술의 전부를 보여준다. 남이 보기엔 그냥 에피소드인 이야기를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무언가와 비교한다. 그리고 항상 무언가를 골라 다른 것과 작별한다. 이걸 겉으로 드러내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티를 내면 찌질함이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것을 보며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라며 자위한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 공감을 얻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의 행동이 나와 닮았기 때문에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 상황이니까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외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우리라고 해서 꼭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찌질해서인지 그 영화의 장면과 과거의 에피소드 하나를 같다고 여기거나 '내가 저거보다 낫지'라며 조소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를 해 버리는 것이다. 또 내 어떤 것과 현재의 어떤 것을 비교해서 우선순위를 정한다. 비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네 번째 영화의 등산과 하산을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왜 홍상수의 영화 내지는 영화라는 장르를 보며 공감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닿아있다. 제목이 <옥희의 '영화'>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세 가지 질문의 답은 굉장히 쉽다. 우리는 대체로 못나고 찌질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고 모두에게 소심한 구석 하나쯤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거나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라고 여긴다. 잠깐, 이거 우리 모르나?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게 엄격하고 상처를 호소하며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최면을 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공감을 얻는다. 그래.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스스로와 합리화를 한 채로 무언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또 영화를 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것들을 떠나보낸다. 무한 반복이다. 우리는 이 지루하고 귀찮은 일상 속에 산다. 내가 찌질하지 않다는 변명과 함께 말이다. 감독 홍상수는 이렇게 모순적인 우리의 모습을 포착해 또 네 개의 단편영화로 접근한다. '너 이런 거 내가 다 알아!'라는 말과 함께 관객의 마음을 얻는다. 하나의 장편이 아닌 네 가지의 단편을 통해 전체로서의 의미는 버리고 순간순간 느껴지는 공감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개수작 같은 영화다. 사실 까고 보면 되게 별거 없는데 그저 이성을 꼬시기 위해 사용하는 개수작 화법인 셈이다. 영화 전면에 주제의식은 사실 별거 없고 느끼는 감정만을 따르라는 대사가 나온다. 난 그것마저도 개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나 너희들 마음 다 알아.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안다고. 그러니까 내 영화에 의미 같은 거 찾지 마. 이건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냥 니들 이야긴 거 아니까 너희들 마음은 이미 내 거야.' 뭐 이런 식의 개수작인 셈이다. 우리 대부분의 영화 아니 문학작품은 메시지란 게 있지 않은가? 근데 홍상수는 감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있어 보이는 말로 주류와는 다른 본인의 세계를 확고히 한다. 내가 만든 세계를 관객에게 주입시켜 '와 이 사람 전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우리는 이 논리에 설득당하는 바보들이다. 조명도 별로고 화장도 안되어있고 관통하는 서사도 심심하며 예산도 작은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에게 꼬인 물고기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이기적인 우리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무엇을 비교하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신다. 홍상수는 우리에게 좋은 솔루션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진짜 인정하기 싫은데 나도 그에게 설득당했다. 아마 신작을 우리 지역에서 볼 수 있다면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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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따뜻하고 애틋한 애니메이션 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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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좀 들어줘
8살 소년 아웬은 얼룩진 멍투성이 얼굴로 법정에 앉아있다. 아웬의 아버지 에릭 발로는 사실 아동학대 가해자이다. 그리고 발로 부인도 그런 아웬을 방치시켰다. 그래서 혐의를 받은 에릭 발로와 발로 부인은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나온 것이다. 아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의 부모가 괴롭히고 방치시켰어도 말이다. 그러나 아웬이 할 수 있는 건 법정에서 난동을 피우는 거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건 그 방법밖에 없기에...
2. 달과 천국
마오마오는 올챙이를 키웠는데 하루가 지나자 죽어버린다. 그 올챙이를 계속 기억하는 마오마오에게는 오직 죽은 올챙이 생각뿐이다. 올챙이의 죽음에 슬퍼한 마오마오가 할머니에게 올챙이는 죽으면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그러자 할머니는 올챙이가 죽으면 달에 간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마오마오는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지만 할머니가 들려준 노래를 생각하며 모든 생명체는 윤회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후에 올챙이를 키웠는데 그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었고(사실 두꺼비지만) 창문 밖으로 나간다. 그 광경을 본 마오마오는 할머니가 개구리로 환생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3. 사진이 살아있다
피터는 가족과 함께 할머니가 있는 시골로 내려간다. 시골 풍경이 낯설고 불편한 게 많지만 재미있는 일들도 많다. 피터는 시골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같이 놀면서 친해진다. 하지만 피터에게 큰 숙제가 있으니 바로 다락방에서 혼자 자는 것이다. 혼자 자는 게 무섭지 않지만 사진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걸 보고서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사진과 맞서 싸우기로 한다. 알고 보니 그 사진은 전쟁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사진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원혼은 사실 오줌이 마려워서 참아왔던 것이다. 그걸 안 피터와 친구들은 할아버지 사진을 화장실에 둔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 사진은 원한이 풀리게 된다. 조금 웃긴 이야기지만 어린이에게는 처음 보는 시골 풍경이 무섭고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4. 성인식
진정한 성인이란 무엇이고 그 기준은 무엇일까? 어른들은 성인이 되려고 하는 어린 사람들에게 기준을 맞춰 세운다. 박재민 감독은 성인식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사회가 정한 성인식의 기준에 맞서고 싶어 했다고 한다. 과연 일찍 철든다는 게 진정한 성인을 말하는 걸까? 또한 이 4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5. 별을 담은 소년
조선시대에 상민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어린 결이 할 수 있는 일은 물을 퍼다 나르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결에게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는 부모가 없는 고아인 반아를 데리고 온다. 결은 그런 반야를 싫어하고 내쫓으려 하지만 할아버지는 불만이 많은 결에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당시 조선시대에서 양반에게 상민이 상놈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모진 괴롭힘도 많이 받았다. 결이 왜 그렇게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2023.09.17 (일) 13:00 롯데시네마 은평(롯데몰) 4관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기간: 09월 13일 - 0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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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섬가이즈 | 잘생긴 이유를 찾는 공포 코미디 오컬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칭 터프가이 ‘재필’(이성민)과 섹시가이 ‘상구’(이희준). 하지만 실상은 한 번 보면 겁을 먹지 않을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첫인상의 소유자들. 그들은 이사 온 첫날부터 험악한 인상 때문에 동네 경찰 ‘최 소장’(박지환)의 의심을 사지만, 그간 꿈꾸던 유럽풍 저택을 수리하며 새 출발을 고대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재필과 상구는 의도치 않은 위기에 처한다. 펜션에 놀러 왔던 대학생 '성빈'(장동주) 및 친구들과 마트에서 갈등을 빚고, 그들 중 하나인 ‘미나’(공승연)를 호수에서 구하다가 납치범으로 오해받기까지 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이사 오던 길에 죽은 걸 발견해 집 뒤 야산에 묻어준 흑염소가 오래전 봉인됐다가 탈출한 악마 '바포메트'로 밝혀진다. 그렇게 재필과 상구는 이사 첫날부터 혹독한 신고식을 마주한다.
한국 영화에 수혈된 새 피
올해에도 어김없이 들리는 말이 있다. '한국 영화의 위기'. 팬데믹이 끝난 후로 여전히 관객 수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상황이다. 천만관객을 돌파한 <파묘>와 <범죄도시4>를 제외하고 100만 관객을 넘은 한국영화는 <시민덕희>, <외계+인 2부>, <그녀가 죽었다>, <건국전쟁>까지 4개에 불과하다. 200만 명을 돌파한 작품은 없다. 중박 영화가 사라진 채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주된 이유로는 비싼 영화값과 OTT 영향력의 확대가 꼽힌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원인이 더 있다. 그중 하나가 새로움의 부재다. <범죄도시> 같은 브랜드 파워는 갖추지 못한, 스타 배우와 익숙한 소재 및 구성으로 무장한 텐트폴 영화의 실패가 그 방증이다. 반면에 <잠>, <파묘>처럼 다소 낯선 장르나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작품은 의외로 성공했다. 즉, 흥행 공식을 반복하는 권태로움이 영화관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키운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핸섬가이즈>는 박수가 아깝지 않다. 오컬트, 코미디, 고어, 심지어 뮤지컬까지 그간 한국 영화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장르와 소재만 골라 모았다. 그러면서도 마냥 가볍지는 않은, 뼈 있는 웃음을 자아낸다. 치지 말라는 공만 때렸는데 보기 좋게 장타를 만든 셈이다. 비록 마이너 한 장르라서 당장의 흥행은 어려워도, <핸섬가이즈> 같은 도전과 실험이 이어지면 관객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낯선 맛으로 가득한 한 상
<핸섬가이즈>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상술했듯이 장르다. 쉽게 다루기 어려운 장르만 골랐다. 우선 눈에 띄는 장르는 오컬트다. 과거 외국인 선교사가 간신히 봉인해 둔 '바포메트'가 전해져 오던 예언대로 깨어날 때, 그를 막을 세 명의 사도 혹은 천사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다. 소재 자체는 <검은 사제들>과 비슷하지만, <천박사: 퇴마 연구소>처럼 무겁지는 않은 비슷한 톤 앤 매너를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서도 오컬트 공포 영화 이상으로 놀랄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원작인 <터커 & 데일 Vs 이블>의 색채를 빼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고어한 연출이 꽤 빈번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분쇄기에 빨려 들어가거나, 나무에 찔려 죽은 시체에 구멍이 나는 식이다. 그 앞뒤로 코믹한 연출을 더해서 충격을 상쇄하고는 있지만, 15세 이상 관람가가 맞나 싶은 수준으로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묘사인 것은 분명하다.
심지어 뮤지컬 영화 요소도 일부 차용했다. 상구와 미나가 같이 설거지하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처럼 '설거지할 때 들으면 좋은 음악 3'이라는 테이프를 틀고 춤을 춘다. 강아지와 함께 합을 맞추기도 하고, 거실을 마치 무대 위처럼 누빈다. <킹스맨> 시리즈가 연상되는 B급 감성도 가득하다. 이처럼 <핸섬가이즈>는 한국 영화에서 실험적이라고 평가할 법한 화법만 모아둔 작품이다.
코미디라는 접착제
그런데도 <핸섬가이즈>는 난잡하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각 장르의 재미도 모두 맛볼 수 있다. 코미디가 그 원동력이다. 우선 코미디 자체의 타율이 높다. 원작을 보지 않은 이상, 클리셰를 끊임없이 비트는 웃음 포인트를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 일례로 <핸섬 가이즈>는 여름 여행을 간 친구들이 한 명씩 죽는다는 익숙한 펜션 괴담을 차용했다. 그런데 펜션 대신 서양식 주택과 기도실을 활용해 오컬트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변환한다.
주인공 클리셰도 비틀어서 유머로 활용한다. 무당이나 퇴마사 같던 재필과 상구가 사실 그저 전원생활을 꿈꾸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는 식이다. 작중 모든 사건이 우연한 사고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장면들은 급격한 장르 전환으로 인한 어색함을 감춰주고, 통일성과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소품을 허투루 쓰지 않는 디테일도 인상적이다. 한 번 등장한 소품은 어떤 식으로든 임팩트 있게 재등장한다. 부러진 기둥처럼.
배우들의 조합도 코미디를 역으로 강화한다. 사실 이희준, 이성민 두 주연 모두 악역이나 흑막의 이미지가 더 강한 배우다.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대통령과 경호실장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그런 그들을 푼수 동생과 츤데레 형 조합으로 활용하면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공승연 활용법도 남다르다. 20대 초반이라 가능한 독특한 입담이 또 하나의 웃음 포인트다.
코미디에 뼈가 있다
심지어 코미디는 단순히 코미디로 끝나지 않는다. <핸섬 가이즈>를 관통하는 모티브가 편견의 역이용이기 때문. 영화는 두 주인공을 억울한 상황에 던져 놓고, 당황한 그들의 리액션을 유머 재료로 삼는다. 상구가 마트에서 넘어진 미나를 일으켜 줘도, 상민이 호수에서 실족사할 뻔한 미나를 구하고 CPR을 시도해도, 그들은 성추행범으로 오해받는다. 로드킬 당한 염소 사체를 치워도 지나가던 경찰은 그들을 살인범으로 의심한다.
특히 타인들이 유독 그들만 의심하는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들의 행동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그들의 험악한 인상과 외모가 문제다. 재필과 상구는 자신들의 외모에 대해 콤플렉스도, 자격지심도 없다. 그러나 타인들은 그들의 얼굴만 보고서 가장 안 좋은 상황만 가정한다. 오직 외모 때문에 차별받는 것은 아니지만, 오해를 살만한 상황에서는 그들의 외모가 결정적인 심증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이처럼 코미디 뒤편으로 은연중에 깔린 메시지는 두 주인공과 대학생 일행의 대비를 통해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외견상 말끔해 보이고, 별장과 골프장을 골라 다니는 부유한 대학생들이 알고 보니 마약과 성폭력 범죄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 그 덕분에 재필과 상구가 겪는 해프닝을 보고 웃다 보면 마음이 슬며시 불편해진다. 대학생이 무고한 피해자일 것이라는 편견을 자각하게 되니까.
코미디와 오컬트의 연결고리
이에 더해 오컬트적인 전개와 코미디에 담긴 메시지가 예상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덕분에 <핸섬가이즈>는 더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가톨릭 베이스의 퇴마물인데, 영화의 메시지가 천주교 교리와 직접 맞닿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핸섬가이즈>라는 제목도 압축적이라서 흥미롭다. 외모에 대한 편견을 기독교적인 선악관으로 전환하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흔히 신약 성경의 예수는 구약 성경의 모세가 남긴 십계명 같은 율법을 단 두 조항으로 요약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특히 예수는 이웃 사랑을 강조한다. 소외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자기 가족처럼 아끼라고 가르친다. 설교뿐만 아니라 실천도 한다. 죄인, 여성, 세리, 사마리아 사람, 문둥병 환자 등 당대에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이들에게 그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핸섬가이즈>는 이를 미나를 대하는 태도와 연계해 오컬트적으로 풀어낸다. 성빈과 친구들은 미나를 철저히 무시하고 이용해 먹으려 한다. 지방 출신에 집도 가난하고 가진 것도 없다면서. 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병조'(강기둥)를 운전기사 겸 요리사로 부려 먹는다. 재필과 상구는 다르다. 그들은 귀찮거나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먼저 선행을 베푼다. 위기에 처한 미나를 구하고 도와줄 때도, 로드킬 당한 흑염소를 매장할 때도.
미나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성빈의 외모나 재력에만 주목하고, 겉모습만 보고 재필과 상구의 호의를 의심한다. 하지만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며 자기 편견을 반성한다. 영화는 이러한 차이를 오컬트적으로 풀어낸다. 예수의 말대로 선행을 베푸는 재필, 상구, 미나는 바포메트를 무찌를 예언 속 천사로 밝혀진다. 그들을 무시한 성빈과 친구들은 악마를 깨울 제물이 된다. 겉모습을 이용한 유머를 단순한 코미디로만 볼 수는 없는 이유다.
반 숟가락 남은 마지막 아쉬움
다만 <핸섬가이즈>라는 실험이 완벽하지는 않다. 원작 영화를 봤거나, 장르 영화 마니아라면 매끄럽지 않은 지점이 적지 않다. 더 잔인하거나 코미디 상황에서 더 뻔뻔하게 연출했어야 할 장면이 있다고 여길 수 있으니까. 이에 더해 애써 감추고 있지만, 장르가 변환되는 지점에서 서로 다른 장르의 문법이 충돌하거나 타이밍이 다소 어색한 지점이 순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또 원작을 리메이크하면서 한국적인 감성을 더하려고 했는데, 이 지점에서도 망설이는 듯한 지점이 있다. 일례로 박지환 배우를 경찰 역으로 캐스팅한 이상, <범죄도시> 속 '장이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묘사를 통해 더 강한 웃음을 유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신부님을 등장시킬 때도 <검은 사제들>을 오마주 하는 식으로 현지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점은 크게 눈에 띄지 않을뿐더러,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슷한 장르와 전개가 반복되는 한국 영화라는 호수에 꽤 묵직한 돌멩이 하나가 던져진 거처럼 보이니까.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핸섬가이즈>라는 돌멩이는 더 용감해 보이고, 그 파란이 더욱 멀리 퍼져 나가기를 바라고 싶어지기도 한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치지 말라는 공만 골라 쳐 만들어 낸 기대 이상의 3루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