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3-12-21 14:32:12
자선(charity)이 아닌 연대(solidarity)
<나의 올드 오크> 리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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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입 금지된 곳이라서 낙원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에는 기쿠지로가 정확히 마츠리 날 밤에 죽었고 그 후 소년 마사오는 천사들 귀신들 도깨비들(을 방불케할 정도로 이상하리만큼 친절한 어른들)과 한껏 즐거운 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패싸움 후 이상한 꿈을 많이 꾸는 마사오의 도깨비 꿈, 최고로 많이 다치고 해진 기쿠지로의 모습, 그리고 천사의 종을 열심히 울려댄 오후 덕에 더 굳게 믿었다.
영화를 다시 보니 기쿠지로는 굳이 그 마츠리가 아니라 어디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찻길 위에서 히치하이크하려다 뺑소니 차에 치었을 때든, 호텔 수영장에 빠졌을 때든, 싸움난 길거리(들)에서든, 훔친 택시에서 운전 미숙으로 연기가 났을 때든, 심지어 경륜으로 한탕하고 아가씨들 있는 술집에서 진탕 퍼마신 여행 첫날밤이든.
<탑건 : 매버릭>의 오프닝에서 마하 10을 넘긴 매버릭이 바로 그 사고에서 이미 죽었고, 나머지 2시간은 그의 아름다운 인생을 기리는 주마등이라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같은 간편하고 모호한 표현을 끌어오지 않고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단호히 가정한) 김병규 평론가의 글처럼. <기쿠지로의 여름>도 초반부 새벽 풀밭에 세워진 택시와 거기서 사람이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장면이 너무 피안 같아서, 혹시 이전에나 이후에 기쿠지로가 이미 죽은 건 아닐지 계속 의심했다.
그러니까 이건 언제 어디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기쿠지로가 “너도 나와 같구나”를 말하더니 소년을 어떻게든 엄마에게로 또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애쓰는 얘기. 자기는 엄마를, 유년기를, 제대로 된 인생을 되찾는 데에 실패했지만 소년에겐 조금 이른 화해를 선물해주려고 하는 얘기. 그렇게 기쿠지로는 어른이 된다, 마사오를 아이로 만들어주기 위해.
그래서 이 영화가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라 ‘기쿠지로의 여름’일 거란 걸 새삼 느꼈다.
또 예전엔 마사오를 놀아주는 후반부가 다소 지루할 만큼 길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왜 마사오를 놀아주려 하는지는 알았지만 왜 자기들이 더 신난 것마냥 그렇게 필사적으로 분장까지 해가며 온몸으로 놀아주는지는 몰랐고, 그래서 더 그들이 명계에서 온 상상친구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알 것 같다. 오프닝부터 여름 방학을 맞이한 마사오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아이는 축구교실을 친구들 집을 길거리를 찾아다니지만 모두 돌봐줄 가족이 있고 저만 혼자다. 엄마가 정말 돈을 벌러 갔다면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방학 중 하루도 못 빼고 가게에서 일할 것까진 없었을 텐데. 어쩌면 엄마가 새살림을 들었단 것까지 마사오는 어른스레 다 직감하고 있었을 테고…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된 엄마를 처음으로 보면서 애가 (불쌍하게도) 별로 안 놀라보였으니까.
놀아주는 어른들이 생겼기에 ‘무슨 애가 저렇게 울상이냐’던 마사오는 히힛 히힛 밝게도 잘 웃는 애가 된다. 애어른 아니고 진짜 애. 마사오가 달려갈 때마다 하늘에서 지켜봐준 누군가도 더이상 걱정되지 않을 만큼 해맑은 애.
왜 마사오가 얼마나 외로운지 예전에는 제대로 몰랐을까? 어떤 시기는 완전히 지나오고 나서야 그게 남들 눈에 어때 보이는지 알 수 있어서겠지.
그보다도 정말 미치겠는 건 기타노 타케시의 표정들.
피를 닦아주는 마사오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처음 말하는 표정
요양원에 모셔둔 괴팍한 어머니를 창 너머로 바라보던 표정
소년 마사오를 그러니까 소년 기쿠지로를 보내주던 마지막 표정
(그러니까, 우두커니 선 기타노 타케시의 얼굴이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도 하나비에서도 소나티네에서도 왜 이렇게 사람을 울리는가. 더이상 마사오의 엄마가 아닌, 더이상 스기모토가 아닌 요시무라 사토코를 멀거니 바라볼 때에도. 사고 때문인 건 알지만 기타노 타케시의 파르르 규칙적으로 떨리는 왼쪽 눈마저도 마사오 대신 울기 위한 것 같다.)
현실의 타케시란 폭력적이고 자주 막말하고 틀린 구석도 있는 노인네란 거 알지만. 어떤 사람의 얼굴은 타인의 슬픔을 너무 깊이 너무 깊이 깊이 깊이 이해하고 있어서, 그걸 대신 짊어져주고 있어서 도무지 미워할 도리가 없다는 거..
바로 이런 얼굴
그리고 또 하나의 마음에 걸리는 얼굴 - 마사오가 올려다본 밤하늘 별자리에 비친, 옛사람 혹은 도깨비 정도로 분장한 기타노 타케시의 표정. 딱 세 컷 지나간 그 얼굴이 이전에도 이상하게 계속 오래 남았었는데, 전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제는 좀 알겠다. 곱게 화장하고 자신만만하게 눈을 치뜨는 그 얼굴이 너무 자부심에 가득찬 희극인의 것이라 그랬나보다.
봐주는 사람 없어도 계속 뭘 새로 배우고 연습하고 선보이던 기쿠지로. 수영과 탭댄스와 저글링, 맹인 흉내와 직접 고안한 그 모든 놀이까지.
어쩌면 이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보는 뼛속까지 예능인(‘게닌’ 비트 타케시)의 자기충족적 실험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친숙하고 가장 순진하며 가장 날카로운 관객인 어린아이를 데려다놓고 한 극 무대에서의 실험. 그리고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난 그 표정으로 유추해보건대 다케시와 눈에 익은 극단 출신 후배 배우들은 성공한 무대에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마사오라는 아이 자체도 기타노가 자기 유년기에 보내는 연민의 상징물이나, 성숙으로의 관문보단 ‘곧 내(창작자)가 될 너(관객)’와의 합일을 위해 심어둔 것 아닌가? 싶지만. 그러니까 이 극이 그려내는 좋은 어른이니 성장이니 우정이니 하는 것에 계속 집중하기보다도, 끝에는 ‘감독으로서의 나’를 우위에 두는 메타영화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질 법도 한데 끝까지 그래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결국 예술품이 다룬 무언가 중 어떤 게 가장 귀중한가를 따질 때, 그 무엇보다 시간에 구애받는 영화라는 매체는 어느 씬에 얼마 정도의 시간을 할애했는가로 일차적 판단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사오의 감정 묘사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 - 걸 넘어 오로지 그 감정을 매만져주고 위로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마냥 애쓰는 - <기쿠지로의 여름>은 정말이지 모범적으로 다정한 성장 동화다.
물론 기쿠지로는 여자를 사고 팔고 사람을 갈취하고 패고 죽이는 일을 여전히 우습게 아는 전직 야쿠자일 테지만. 적어도 영화 속에선 기쿠지로가 저지르는 모든 폭력, 절도, 강탈, 사사로운 시비까지도 아이인 마사오를 저 멀리에 두고 진행된다. 기쿠지로는 언제나 마사오에게 “꼬마야 저기 가있어”라고 하는 대신 “꼬마야 여기서 기다려”라고 말하고 자기가 (카메라 프레임 바깥의) 폭력의 자리로 돌아가서 일을 해치우고 온다. 그것이 어른의 태도니까.
물론 마사오도 종종/영영 세상의 잔혹함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살면서 한 번도 안 겪어보는 게 무조건 나을 끔찍한 일이 있다면, 당연히 최선을 다해 네가 그 일을 겪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하듯 든든한 보호자처럼 개입한다. 여행 초입 보호자 기쿠지로가 잠깐 취한 사이, 소아성애자 대머리 중년을 만나면서 중학생 형들보다 훨씬 위험한 폭력에 노출된다. 그때 영화는 현실은 이런 거야,라는 듯이 뻐기며 폭력의 정밀 묘사에 공들이지 않는다. 또한 폭력적 응징의 과정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보인다. 굳이 너의 상처를 훈장 삼을 일도 없고, 세상의 가장 어두운 쓰레기장이 얼마나 끔찍한지 입 아프게 말 얹을 것도 없단 듯한 태도.
사실 이 영화에서 폭력은 대부분 무자비하게 생략/압축된 슬랩스틱 코미디의 결과물로서 소비될 뿐이다. 다케시는 아이에게 좋은 웃음을 선물하고 싶었던 어른-코미디언의 태도로서 그정도가 딱 적절하다고 여긴 것 같다.
그러니 다시.. 예전에는 기쿠지로가 죽었다고, 단지 마사오를 안전히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유령처럼 남아있었던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기쿠지로를 마사오에게 딸려보낸 그 이웃집 친절한 여자는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면 좋나 괜히 걱정도 됐는데.
다시 생각해봤더니 혹시 기쿠지로가 죽었더라도 부인은 그냥 잘 살아갔을 것 같다. 그 사람도 기쿠지로가 어디서 어떻게 죽든 어쩔 수 없단 것쯤 알고 살았을 것이다. 세 번째 결혼이기도 했고… 남자들의 사라짐에 그냥 그렇구나 할 것 같은 어른.
그리고 그보다 먼저 기쿠지로는 안 죽은 것 같다. 소리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발자국도 없고 미련도 없어보여서 마치 귀신같고 이상한 움직임이 줄곧 나왔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기쿠지로다, 빠가야로 라고 해줬으니까.
건강하라고, ‘다음에 또’ 엄마 찾으러 가자고 말해줬으니까,
그리고 멀어지는 기쿠지로가 아니라 힘차게 달려가며 멀어지는 마사오가 막의 마무리를 장식했으니까.
귀신이고 도깨비고 천사고 꿈이고 뭐고 .. 그냥 안 죽었을 것 같다 그냥.
마사오에게 다 큰 마사오가, 기쿠지로에게 어린 기쿠지로가 함께 노는 일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는 게 영화의 목적지였으니까.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삶은 결국, 출입금지인 풀밭에 연못에 밭에 해변에 마구 헤집고 들어가더라도 함께 있는 순간의 재미를 찾아내는 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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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 제대로 풀린 캐릭터 영화 모음
통제불가 ⚠️ 사회의 규율 못지키는 아니 안지키는 영화 속 캐릭터들
찝찝하기도 묘한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자유분방한 캐릭터들 같이 만나 보아요.
노숙자 폭행, 집단 싸움, 차량 절도, 주택 침입… 10대 소년 ‘알렉스’는 친구들과 어울려 극악한 비행을 저지르고 다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 저택에 침입해 주인과 싸우고 달아나려던 순간 경찰에 검거된다.
살인죄가 적용되어 14년 형을 살게 된 ‘알렉스’. 좀 더 빨리 감옥을 탈출하고자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에
자원한다. 루도비코 실험은 재소자에게 약물과 충격요법으로 각종 범죄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교화 방법이다. 과연 알렉스의 범죄 본능이 치료될 수 있을까?
펑크밴드에서 만난 시드와 낸시, 이 당시의 펑크밴드는 기존의 질서에 반기를 들고 나선 문화이다. 이들에게는 전통이나 과거는 통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오직 반기와 저항만이 가득하다.
이런 문화 속에서 만난 두사람은 일반인들에게는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랑을 나눈다. 시드와 낸시의 사랑은 절망적이고 격렬해서 결국 78년 뉴욕의 첼리사 호텔에서 운명의 막을 내린다. 헤로인에 중독된 이들은 호텔에서 시드가 낸시를 살해함으로써 국제적인 뉴스가 되었다. 시드 비셔스(Sid Vicious)는 약물과다로 1979년 2월 2일 사망했다.
선천성 청각 장애인 류에게 누나는 유일한 가족이다.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누나는 병이 악화되어 신장을 이식하지 않으면 얼마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누나와 혈액형이 달라 이식 수술이 좌절된 류는 장기밀매단과 접촉해 자신의 신장과 전재산 천 만원을 넘겨주고 누나를 위한 신장을 받기로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기로 드러나고.
그 때 병원으로부터 누나에게 적합한 신장을 찾아냈다는 전화가 걸려 온다. “천 만원 있다고 했지? 그거면 수술할 수 있어.” 수술 기회를 놓치게 되어 괴로워하는 류를 보고 그의 연인 영미는 아이를 유괴하자고 제안한다. “딱 필요한 돈만 받고 돌려주는 거야. 이건 착한 유괴야...” 우연히 알게 된 중소기업체의 사장 동진의 딸 유선을 납치하는 류와 영미. 그러나 돈을 받은 날, 류의 유괴 사실을 안 누나가 자살하고 동진의 딸 유선도 우연한 사고로 강물에 빠져 죽는다. 회사 일에만 몰두해 이혼을 당하고 회사마저 어려워진 후 딸에게 생의 전부를 걸었던 동진은 딸의 죽음 앞에 복수를 결심한다. 누나를 잃은 류 역시 자신이 유괴를 택하게 한 장기밀매단에게 응징을 준비하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폭력, 점점 더 잔혹해지는 복수의 반전. 그들의 결말은?
마약 중독자인 해리는 친구 타이론과 함께 근사한 사업을 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그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곤 애인 마리온을 창녀로 내보내는 것뿐이다.
해리의 팔은 더 이상 주사바늘을 꽂을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있다. 그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라곤 마약을 통한 환각뿐이다.해리의 어머니 사라의 삶도 마찬가지다. 다이어트와 TV 중독에 빠져 있는 사라의 유일한 낙은 TV를 통해 좋았던 시절, 젊고 예뻤던 시절의 자기 모습의 환각을 보는 것이다.
방리유에 사는 유대계청년 빈쯔, 아랍계 청년 사이드, 아프리카계 청년 위베르는 방리유의 이민자들이 벌이는 시위 도중 16살 소년 압델이 경찰에게 연행된 뒤 폭행을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경찰에게 증오심을 품는다.
그러던 중 빈쯔는 우연히 경찰이 두고 간 권총을 줍게 된다. 빈쯔는 총을 보여주면서 압델이 죽으면 경찰을 쏘겠다고 하지만 나머지 두 친구는 빈쯔를 말리며, 그렇게 세 사람은 총을 품고 파리 시내를 하루동안 돌아다니게 된다.
비싼 가구들로 집 안을 채우지만 삶에 강한 공허함을 느끼는 자동차 리콜 심사관 ‘잭’.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거친 남자 ‘테일러 더든’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싸워봐야 네 자신을 알게 된다”라는 테일러 더든의 말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잭. 두 사람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파이트 클럽’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고, 폭력으로 세상에 저항하는 거대한 집단이 형성된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파이트 클럽’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변질되고, 잭과 테일러 더든 사이의 갈등도 점차 깊어져 가는데…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간 오하이오의 소도시에서는 혐오와 폭력이 일상이다. 소년들은 동물의 사체를 판매해서 돈을 버는데 길고양이들을 노리는 경쟁자가 등장한다.
자전거를 타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고, 본드를 마시고, 이유없이 주먹다짐이 이어지는 아이들의 일상 너머에게는 자식에 총구를 들이미는 어머니, 딸에게 성폭행을 저지르는 아버지가 있다. 열광적인 지지와 극단적 혐오를 오가는 반응을 끌어낸 ‘퍽-큐 시네마’로 알려진 작품. - (재)영화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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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 게임 3 | 다음 딱지치기를 위해 희생된 완결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침내 드러난 공허한 큰 그림
<오징어 게임 2>는 '성기훈'(이정재)의 반란으로 끝맺었다. 오징어 게임 자체를 중단하기 위한 그의 반란은 처절히 실패했다. 인원도 부족하고, 탄알도 부족한 채로 시도한 무모한 반란이 유발한 참혹한 대가였다. 그는 게임장 밖에서부터 친구였던 '정배'(이서환)를 비롯해 봉기에 가담한 이들을 모두 잃었다. 이 반란의 실패는 단순한 물리적 패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훈의 신념과 소신이 완전히 패배했음을 방증하는 결과물이었다.
시즌 2 초입에 기훈과 '프론트맨'(이병헌)은 각자의 신념을 명확히 밝힌다. 프론트맨은 거대한 이익과 가혹한 환경 앞에서 사람들의 가치 판단은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면 악한 행위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징어 게임을 중단하고 상금을 나눠 가질 수 있도록 변경된 투표 규칙은 선택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장치이자 그의 신념이 반영된 제도였다.
반면에 기훈은 설령 오징어 게임처럼 극단적인 환경이라 해도 지켜야만 하는 선이 있다고, 타인이 그 선을 넘도록 부추기는 것 또한 그 자체로서 악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가 프론트맨과의 대립에서 승리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참가자들을 설득해서 투표로 게임을 끝내거나, 투표 자체의 진행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참가자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투표 진행 자체를 막기 위해 반란을 획책했으나 게임의 진행을 막지 못했다.
이제 기훈에게는 무슨 목표가 있을까? <오징어 게임 3>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의 목적은 더 이상 참가자들을 살리는 것도, 프론트맨에 맞서 이기는 것도 아니라고. 설령 프론트맨에게 패배했어도, 결코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훈은 사투를 벌여야 한다고. 문제는 '증명'이라는 테마가 서사적으로도, 장르적으로도 악수라는 점. 결국 <오징어 게임 3>는 공허한 큰 그림과 욕망만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성기훈의 마지막 반격
반란에 실패한 뒤 혼자만 살아남은 기훈은 절망한다. 게임 진행 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열변을 펼치던 지는 시즌과는 달리 아예 투표 자체를 포기할 정도로 목표를 잃어버린다. 자기 때문에 친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죄책감을 회피하려고도 한다. 탄창을 가져오려다가 겁에 질려 도망친 '대호'(강하늘)를 원망하고, 술래잡기 게임에서 그를 찾아내 죽이고, 그러고도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자 자살까지 시도한다.
발버둥 치던 기훈에게 실패를 만회할 기회가 찾아온다. 비록 반란이 실패했어도 기훈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금자'(강애심)가 그에게 '준희'(조유리)와 준희가 술래잡기 도중 낳은 아이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 유언이 된 부탁을 들은 기훈은 게임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죄도 없는 아기를 끝까지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게임 안에서 프론트맨을 이길 수 없다면, 모든 사람이 그와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결승전 전날 밤, 프론트맨은 칼을 건네며 다른 참가자들을 다 죽이고 아기와 함께 우승자가 되라고 제안하지만, 기훈은 유혹을 끝내 뿌리친다. '오일남'(오영수)이 똑같은 제안을 했을 때 수용한 프런트맨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에 더해 고공 오징어 게임에서도 기훈은 목숨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아기를 보호한다. 이렇게 그는 모든 인간이 자신과 같을 거라는 프론트맨의 믿음에 금을 내고, 가능한 유일한 반격을 가한다.
이 반격은 유효했다. 무엇보다도 돈이 우선시되고, 생명과 같은 가치도 돈으로 환원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추기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자, 인간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다시 한번 결말을 장식한다. 게임장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프론트맨이 아기를 챙겨서 상금과 함께 동생인 '준호'(위하준)에게 맡긴 것, 기훈의 유품을 LA에 있는 그의 딸에게 전해주는 것은 프런트맨이 패배를 인정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폭거'라는 진짜 적수
이렇게 보면 <오징어 게임 3>는 기훈의 서사를 잘 갈무리한 듯싶다. 문제는 이 마무리가 첫 번째 시즌의 결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 즉, <오징어 게임 3>는 기훈을 다시 한번 오징어 게임에 던져 놓은 근본적인 동기와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출발선으로 U턴한 셈이다. 심지어 기훈이 넘어서야 할 난관과 장애물을 짚어내고 직시하는 데 성공했는데도 답을 회피했기에 <오징어 게임 3>의 끝은 더 실망스럽다.
<오징어 게임 3>는 프론트맨과의 갈등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기훈을 조명한다. 그러나 시즌 2와 3에서 그의 적수는 사실 프론트맨이 아니었다. 바로 다른 참가자들이었다. 애초에 기훈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기 신념을 증명하는 데 집착하게 된 원인은 투표로써 이뤄진 다수의 폭거이기 때문. 만약 기훈이 투표에서 한 번이라도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다면, 그는 아기를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기훈은 왜 투표 결과 앞에서 무기력했을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권자 중 과반이 찬성한 투표 결과에는 누구도 부정 못 할 절대적인 권위가 깃든다. 설령 상금을 위해 인명을 죽이는 비윤리적인 일이 그 결과라 하더라도. 이는 게임 진행 요원이 매번 참가자들의 자유로운 투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다. 시즌 2에서 기훈은 이처럼 투표 결과가 권위를 낳고, 권위가 오징어 게임을 지지하는 메커니즘을 한 번도 논파하지 못했다.
시즌 3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눈앞에서 악한 일이 저질러져도 다수가 악을 지지하는 한, 기훈은 무력이 아닌 방법으로는 그 결과를 뒤집지 못한다. 고공 오징어 게임 도중에 참가자 9명 중 6명이 아기를 죽이고 상금을 나눠 갖는 데에 찬성으로 투표해도 기훈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다수의 폭거'라는 의사 결정 방식을 파괴하지 못하는 이상 그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게임은 중단되지 않는다"라는 프론트맨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칼은 뽑았는데 무를 안 썰었어
즉, <오징어 게임> 시즌 2와 3가 기훈을 다시 게임에 참여시킨 동기는 위와 같은 '다수의 폭거'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 비판물이라는 <오징어 게임>의 정체성에도 부합한다. '다수의 폭거'는 거부할 수 없는 미래의 사회적 모순이니까.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는 숫자가 많은 중노년층의 정치적 의사나 이익이 초과 반영되는 실버 민주주의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따라서 <오징어 게임 3>는 투표라는 규칙을 통해 화두에 올린 이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해 답을 제시해야만 했다. 다수결이라는 형식의 논리가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압도하며 본말이 전도된 상황에 대해 기훈의 입을 빌려 첫 시즌보다 진일보한 해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완전히 해결하거나 대안을 제시할 수 없으면 새 판을 짜기 위해서 오징어 게임을 완전히 파괴하는 식으로라도.
하지만 <오징어 게임 3>의 결말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환상에서 '새벽'(정호연)이를 본 뒤 다른 참가자 목에 겨눴던 칼을 거두고,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아기를 살리는 선택. 이 장면들은 첫 시즌 결말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가 돈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새벽이의 동생을 챙겨주고 남은 상금은 사적으로 한 푼도 쓰지 않은 시즌 1의 결말이 보여준 바 있다.
결국 기훈은 프론트맨에게 승리했을지언정 그의 논리와 세계는 못 이겼다. 기훈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오징어 게임은 언제든지 열릴 테니까.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인정한 채 고고히 자기 소신을 지키려고 은둔하는 역사 속 지식인들과 자기 증명에 집착한 기훈이 겹쳐 보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징어 게임 3>은 사회 비판물로써 얻은 명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비겁한 완결판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다
사회비판적 주제 의식이 쳇바퀴를 헛도는 사이, <오징어 게임 3>은 장르물로서의 쾌감도 놓치고 말았다. 데스 게임 장르의 본질적인 재미는 각 게임의 규칙을 역이용하거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한 장면들이 없지는 않다. 줄넘기 게임을 먼저 통과한 참가자가 다른 참가자들이 통과할 길목을 막고 그들을 제거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고공 오징어 게임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인 참가자들이 기훈과 명기를 설득하려고 가장 약한 참가자를 급습한 뒤 이른바 '도시락' 작전을 제안하는 순간도 유사한 대목이다. 기훈이 무기를 꺼내자 아기 친부임을 밝히며 동맹을 맺고, 그들만 살아남자 다시 기훈과 아기를 위협하면서 우승을 노리는 '명기'(임시완)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이 장면들은 극이 늘어지려는 찰나에 긴장감과 몰입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기훈이 그들의 전략을 방해하거나 제지하는 나머지 극의 흐름이 다시 끊긴다는 것. 시즌 3의 첫 게임인 술래잡기 이후 기훈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게임에 참여한다. 아기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도 불사한다. 그런데 정작 기훈의 서사에 담긴 의미가 안 돋보이다 보니 메시지 전달에 초점을 맞춘 기훈의 행적이 늘어날수록 도리어 생존 게임의 재미는 저해될 수밖에 없다.
즉, <오징어 게임 3>는 기훈의 드라마를 살리기 위해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물의 쾌감을 의도적으로 줄인 작품인 셈이다. 시즌 1과 2에 비해 유달리 시즌 3에서 인상적인 게임이 없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다만 전쟁마저도 또 하나의 생존 게임 형태로 묘사하면서 메시지와 장르물의 정체성을 모두 살리는 데 성공했던 <헝거게임> 시리즈의 사례를 고려하면, 최선의 수단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너무 많고 무의미한 곁가지
그렇다고 기훈의 서사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지도 않다. 불필요한 곁가지가 너무 많기 때문. 준호의 섬 수색극은 없어도 스토리 전개에 영향이 없다. '민수'(이다윗)의 플롯도 마찬가지다. '세미'(원지안)를 못 지킨 자책감은 공감할 수 있으나, 다른 생존자와의 접점이 전혀 없다 보니 캐릭터의 필요성을 어필하지 못했다. 또 과거사가 안 밝혀졌던 대호, 게임마다 활약을 펼친 '현주'(박성훈)처럼 필요한 곁가지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남은 곁가지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금자와 '용식'(양동근) 모자가 대표적이다. 금자는 준희와 아기를 지키려고 용식을 직접 죽이고, 본인은 자살한다. 이 전개는 부모-자식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설득력이 없다. 인간성의 회복과 중요성을 역설하는 작품치고는 도리어 인간성에 대한 공감과 고찰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시즌 2부터 예측한 아들과 엄마의 가슴 절절한 신파극을 피하려다가 둔 악수인 셈이다.
'노을'(박규영)과 '경석'(이진욱)의 서사도 필요한 만큼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특히 노을은 비록 기훈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어도 그의 플롯에 담긴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경석의 절박한 상황을 아는 이상, 자신에게 돌아오는 손익과 무관하게 경석을 살리는 게 옳은 일이라서 옳은 일을 실천하는 또 다른 사람이 바로 노을이기 때문. 그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포함된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억지스럽다. 노을과 '부대장'(박희순)이 싸울 때, 부대장은 노을을 완전히 제압하지도 않은 채로 시가를 태우며 여유를 부린다. 또 몇 분 전까지 노을이 겨눴던 총의 존재를 잊었다가 허무하게 총살당한다. 이에 더해 앞뒤도 안 맞는다. 마지막에 경석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딸 치료비를 구했다고 말한다. 이는 애초에 그가 목숨 걸고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 동인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뱀의 꼬리도 아쉽다
결과적으로 <오징어 게임 3>는 근본적인 의문과 메시지에 힘을 실을 정도로 과감하지 못했고, 한 편의 독립된 작품으로서도 장점마저 못 살린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시즌 2의 첫 에피소드에서 공유가 죽을 때의 전율과 충격을 생각하면 용두사미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심지어 <오징어 게임>의 상징성을 스스로 불태워버렸기에 이 뱀의 꼬리도 실망스럽다. <오징어 게임>의 열풍은 게임의 재미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시스템을 고발하는 메시지에서 비롯됐다. 돈을 좇아 인간성을 포기하고, 그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을 다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이 메커니즘을 구조화해서 더 많은 돈을 창출하는 체계를 비판하는 드라마가 바로 <오징어 게임>이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 3>의 끝은 자신이 칼날 세워 비판한 그 시스템의 일부였음을 당당히 자백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갈라드리엘, <토르> 시리즈의 헬라인 케이트 블란쳇이 딱지녀로 등장하는 순간, 작품성과 완성도 이전에 세계관 확장 IP 수익 극대화에 힘을 쏟았다는 정황은 너무나도 명백해진다. 케이트 블란쳇이 딱지치기를 하고, 상대방 뺨을 때리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을 보면서도 실망감이 놀라움을 앞서는 이유다.
Dreadful 끔찍한
쌓아 올린 유산을 불태우고 새출발할 준비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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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 AI 시대에서 귀신들이란 누구일까?
귀신들이라는 영화는 이름 그대로 귀신들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미래에 우리의 실생활에 함께할 인공지능이 머문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다섯 챕터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 번째는 보이스피싱의 진화 수법인 AI 피싱을 담은 이야기인 보이스피싱과 두 번째는 AI가 미래에도 내 집을 구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기지와 세 번째는 버려진 고아 로봇을 찾아 돌아다니는 어느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음성인식, 네 번째는 미래에도 사후세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페어링 마지막으로 작가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AI 로봇을 만나본다는 업데이트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공포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간담이 서늘하다.
현실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인 심각한 학교폭력으로 인한 자살 문제와 돈이 많지만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독거노인의 실상과 내 집 마련의 꿈이 어려워진 대한민국의 현시점에서 황승재 감독은 시사회에서 현재 시대의 세태를 반영하여 이 영화를 연출했다고 말했다. 미래에는 이런 문제점들이 점점 진화되어 날로 갈수록 심각해진 사회적 문제들로 더욱 날카롭게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돈 많은 독거노인들에게 거액을 뜯어내는 AI 피싱과 정부에서도 함부로 목숨을 끊지 못하도록 자살 방지법을 만들어 오히려 더 노예로 살아야 되는 세상이 올 수가 있다.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이다.
인공지능 로봇들에게는 인간처럼 노동도 힘들다고 느낄까? 영화 <귀신들>에서는 죽은 집주인의 대출을 껴안고 자신도 열심히 살아가는 로봇이 있는데 자신도 4대 보험을 들었으나 노동을 했음에도 다치고 힘이 들기만 하다. 그런데 집을 구하기는 너무나도 힘들다. 인공지능도 사람처럼 감정이 생긴다면 그것을 과연 로봇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란 주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로봇들의 거주 환경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고 로봇들도 사랑을 원한다는 점과 로봇들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는 것도 알아야 할 요소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고아가 된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 걸까? 미래에도 캣맘처럼 그런 버려진 고아 로봇들을 도와주기 위해 먹을 것을 주고 집에도 데려다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더군다나 고아 로봇들은 필요가 없어져서 길거리의 고양이들처럼 떠돌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래 정부에서는 비활성화를 시키기 위해 갖은 인력을 투입시킨다.
우리가 고양이들을 중성화 수술을 시켜 더 이상 번식시키지 못하도록 막고 생태계를 안정시키듯이 고아 로봇들이 더 이상 미래의 버려진 고철 더미 같은 곳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비활성화로 막는 그런 법을 만들게 된다. 그렇지만 캣맘이라고 해서 다 좋게 바라보지 않듯이 미래에도 이와 똑같은 시선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은 챕터였다.
사후세계는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크라우드 팜이라는 다른 우주에 죽은 사람들을 연결시켜 그쪽에서 살아가도록 만들게 할 것인가? 이번 챕터는 신선한 주제였다. 다중 우주에 관한 이야기였기도 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우주에서도 죽은 사람들을 고이 모실 수 있게 동양적인 의미인 종잣돈이나 영적인 의미를 둔 고양이 무리와 부적들을 붙인 영매 나무 등등
다시는 이전의 세계를 볼 수는 없지만 다른 우주에서라도 편히 살아가며 그곳에서도 새 시작을 한다는 그런 내용을 담은 챕터는 눈물 나기도 하고 많은 후회를 해봤던 필자에게도 뜻깊은 챕터였다.
완전히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닮은 로봇을 만나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것도 나를 더 잘 알고 나에 대해 지적을 끊임없이 한다면? 천재 작가 위기찬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들은 100년을 반복했고 똑같이 업데이트되며 작가는 외롭게 사람이 없는 산장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설을 쓰며 불멸된 삶을 이어왔다.
인간은 자손을 남기고 싶어 한다. 허나 자손을 남기지 않으면 대를 이어갈 수 없지만 여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로봇을 업데이트하면 자신도 불멸이 되어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이 영화 <귀신들>은 암울하며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며 불멸을 이어가는 인공지능에 대해 다룬 독립영화이다. 아마도 인류가 귀신이라는 주제로 과거에 공포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냈다면 이제부터는 인공지능이 그 자리를 대체하지 않을까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고전 설화에 귀신들이 있다면 미래 설화는 인공지능이 있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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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섬뜩한 감시자, <그린 나이트>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2021
미국 외, 판타지 외, 130분
감독: 데이빗 로워리
나의 섬뜩한 감시자, <그린 나이트>
우린 가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두 물음 사이에서 방황한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다니는 친구이지만, 현실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목적을 잃고 떠도는 방랑자였으면 하니까. 누군가에겐 길고 누군가에겐 짧은 어둠을 뚫고 나오면, 두 물음표가 사실은 하나의 느낌표였음을 깨닫는다. 이내 스스로 다시 묻게 된다. "난 이 세상을 살다 갈 나만의 주체적인 방식과 길을 갖고 있는가!" <그린 나이트>는 이 무시무시한 질문을 위해 탄생한, 매력적인 동시에 무서운 걸작이다.
주인공 가웨인은 뭐 하나 자의로 결정한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서왕의 조카로서, 왕의 자리에 오를 기회가 있는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명예와 무용담도 없다. 그는 수많은 전쟁 속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제집 드나들듯 했던 기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어린애'다. 그렇다고 가웨인이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가? 아니다. 현재로서 그에겐 애인 에셀의 따뜻한 품과 술만 있으면 된다. 물론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잘 알고 있는 눈치 빠른 자다. 하여 최대한 모른 척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말 그대로 '어떠한 준비도 하고 싶지 않은' 어린 가웨인으로 살고자 한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묻는 아서왕에게 말씀드릴 이야기가 없다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 가웨인.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도 없는 왕의 핏줄, 아니 한 인간. 그건 곧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영화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무용담이 없는 왕의 핏줄'이란 결핍을 덥석 받아들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는 덫을 놓고, 그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길 끈질기게 기다린 결과다.
가웨인의 손에 들린, 피 묻은 아서왕의 엑스칼리버. 그 검에 참수당한 그린 나이트는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1년이다."란 말을 남긴 후 유유히 떠난다. 어린 가웨인은 다들 가진 전설적인 무용담을 얻기 위해 그린 나이트의 게임 조건을 승낙했었다. 그러나 게임의 승자가 됐음에도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원탁의 기사들이 보내는 박수와 함성을 들으며 자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렸단 직감만 가질 뿐이다. 어떻게 살 거란 결정을 미루고 또 미뤄왔던 그는, 단 한 번의 감정적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1년 동안 가웨인의 일격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되어 나라 전체로 퍼져나갔다.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더는 어린애로 살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 가웨인은 자신의 즉흥적이고 가벼웠던 행동이 불러올 비극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웨인의 다리를 움켜쥔 덫은,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뒤흔드는 초자연적인 힘과 같다. 그건 우리가 선택한 길인 걸 알면서도, 때론 신의 횡포라 믿고 싶게 만드는 '운명'이다. 죽음이란, 이미 정해진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삶의 가치와 의미는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의 가웨인은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의 운명은 녹색 기사, 일명 '그린 나이트'와의 독대 말곤 없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1년은 짧았지만 빛을 집어삼키며 어둠을 낳는 이끼가 가여운 가웨인의 마음을 잠식하기엔 충분했다.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왕은 그에게 그린 나이트를 찾아갈 것을 권한다. 그는 가웨인이 위업을 달성할 것을 원했고, 그 목표를 위해선 반드시 목숨을 건 모험이 전제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가웨인은 1년이란 시간 동안 내면 깊숙이 깔린 이끼가 뿜어내는 두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이겨내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초조하기만 한, 여전히 자기 삶에 대책 없는 인간이었다.
어머니가 주술을 걸어 만든 녹색 허리띠와 연인 에셀이 준 사랑의 증표(방울), 그린 나이트가 남긴 도끼를 갖고 긴 여정에 오른 가웨인. 크리스마스 날에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이 1년 전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벤 것처럼 똑같이 목을 내어주면 되는 게임. 단순한 게임일 뿐이지만, 그의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바꿀 절호의 기회다. 가웨인은 다섯 가지의 시련(기사의 덕목)을 맞닥뜨린다. 잘 와닿지 않는다면 왕, 기사, 왕위, 명예 등 영화가 제시한 (인간의 가치를 명예로 내세운) 특수한 시대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자. 가웨인이 겪는 고통이 우리가 매일 밤잠을 설친 이유와 같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삶은 고난과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과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린 인간답게 살 수 없다.
그 말은 인간답게 죽을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이 이를 깊이 깨우치길 바란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사기꾼 소년에게 베푼 작은 친절을, 배신으로 돌려받은 가웨인은 처음으로 극한의 순간을 경험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빼앗기고 온몸이 묶인 그를 중심으로, 카메라가 360도로 회전하자 해골로 싸늘한 시체가 돼버린 가웨인이 등장한다. 이후 카메라는 다시 반대로 회전해 사력을 다해 떨어진 칼로 기어가는 가웨인을 보여준다. 생을 향한 포기와 집착. 이 상반된 두 장면은 교차로 인해 더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힘겹게 죽음의 끝에서 벗어난 그를 보며, 우린 언제든 내 삶을 끝낼 수 있는 건 '내 인생의 주인인 나, 자신'밖에 없음을 다시금 유념할 수 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도 자기 자신뿐이다.
가웨인은 마침내 가장 나약한 상태로 고난의 길을 걷는다. 성 위니프레드의 시험을 통과해 도끼를 되찾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우와 동행한다. 미지의 존재(거인)와의 만남에선 여우의 도움으로 자신의 길을 잃지 않는다. 쉼터를 제공해 자신의 발을 묶은 버틸락성 성주에겐 잡혔던 여우를 돌려받고, 성주의 아내에겐 어머니의 허리띠를 받는다. 얼핏 보면, 그가 다섯 가지의 관문을 잘 통과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그는 다섯 관문을 통과하면서 지나치게 감정적이었고 중심이 흔들렸으며, 원초적인 본능에 무릎을 꿇기도 했고,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당일까지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지만 반드시 아서왕의 기사가 되어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였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성 위니프레드의 머리를 찾아준 건, 이후 똑같은 신세가 될 자기를 향한 연민과 동정의 읍소였다. 성주와 한 '획득물 교환 게임'에선 호의를 받았음에도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에셀의 얼굴을 한, 성주 아내의 유혹에 넘어갔다. 결전의 날 아침엔 그녀에게서 녹색 허리띠에 걸린 마법(허리띠를 하고 있으면 어떠한 외상도 입지 않는) 얘기를 듣고, 유일하게 꿋꿋이 지켜왔던 사랑의 지조마저 굽혔다. 그린 나이트의 도끼에 잘릴 자신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성주 아내의 비난에 정신이 번쩍 든 가웨인.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여우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고 녹색 예배당에 들어선다. 왜? 여기까지 와서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는 이미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아서왕 앞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무릎을 꿇고, 이끼로 더럽혀진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말하는 여우는 신의 뜻이 아니라 가웨인이 은연중에 남겨둔 그의 여지, 도망갈 구멍이었다.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을 1년 동안 기다린 그린 나이트를 보며 가웨인은 비로소 삶의 끝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운명의 시간, 그린 나이트는 무릎을 꿇은 가웨인에게 말한다. "자네가 했던 것처럼 한 번 내리치지." 그러나 여전히 죽음이란 공포에 휩싸인 가웨인은 정말 이게 끝이냐고 절규하며 되묻지만, "그럼 뭐가 또 있나?"란 차갑고 날 선 대답만 듣는다. 그래, 죽으면 끝이다. 무엇이 더 생의 공간에 남아있을까, 역사? 명예? 솔직해지자, 그런 건 모두 남은 자, 산 자들을 위한 위로와 희망의 노래이며 그들의 몫이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안돼, 죄송합니다!!"
왕의 후계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맥 빠지는 말 한마디만 녹색 예배당에 남긴 채 가웨인은 도망친다. 이후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돌아와 모든 이의 보살핌을 받아 건강을 회복한다. 왕에게 기사 칭호를 받고, 죽은 왕을 대신해 새로운 왕위에 오른다. 사랑했던 연인 에셀에겐 돈 몇 푼으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들을 빼앗고 그녈 버린다.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그는 신분이 확실히 보장된 왕비를 얻고,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택한다. 수없이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고, 전쟁에서 아들을 잃는다. 마지막 왕국마저 적에게 함락되고, 그는 홀로 남아 그동안 자신을 지켜왔던 녹색 허리띠를 제거한다. 그린 나이트에게 도망친 이후로 일어난 비극은 전부 선택의 결과이자 책임이란 걸 가웨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은 주인 잃은 괴물의 폭주로 망가졌고,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어른 가웨인'의 이야기는 실패했다. 쿵! 마침내 가웨인의 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진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간결해 슬픔과 연민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대신 초점을 잃은 그의 동공이 읊조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다시 녹색 예배당.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 앞에서 눈을 번쩍 뜬다. 도망친 자의 말로를 보고 온 그는, 망설임 없이 녹색 허리띠를 제거한다. 달라진 그의 얼굴. 가웨인은 당당히 그린 나이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 "이제 준비됐다!" <그린 나이트>의 첫 장면과 대비되는 순간이다. 스스로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실토하는 가웨인이 변화한 것이다. 그린 나이트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짓는다. 잘했다 격려까지 한다. 그러나 그린 나이트의 손에 여전히 들린 도끼. "이제 네 머릴 가르마." 가웨인은 자신의 결함을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겐 어리석었던 그가 선택한 결과가 남아있었다. 그린 나이트와의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다. 게임을 끝낼 방법은 성공 아닌 실패, 단 두 가지 옵션뿐이다. 정도란 없는, 상승과 하강으로 우리 인생의 굴곡을 책임지는 희극과 비극처럼.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그린 나이트>는 처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을 찾는 데 성공한 가웨인의 목에 다시금 도끼를 들이밀며 막을 내린다. 가웨인은 이제 막 한 걸음을 뗐으며, 그의 이야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 바로 그의 두려움인 그린 나이트에게서 발휘됐다. 녹색 기사는 가웨인이 스스로 극한의 공포심에 휩싸인 채 만들어낸 존재였다. 지금까지 가웨인은 내면의 자아와 싸운 셈이다. 이후로도 그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기에 또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린 나이트 역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기 주인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직하게 기다리겠지. 그게 제대로 사는 방식이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왕좌에 앉은 그의 머리를 불태우며 강력하게 말했다. "이 영화는 왕의 이야기도, 왕을 노래한 이야기도 아니다."라고. 그렇다, <그린 나이트>는 왕이 아닌 죽음 앞에 놓인 인간, '가웨인'의 여정을 지켜본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떻게 자기 삶을 살고 있는지,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계획되지 않은 일과 새로운 일에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는지, 선택의 순간마다 그린 나이트를 만났는지, 이후 어떻게 죽음의 선로에서 빠져나와 다시 살아남고 있는지.
인간은 죽음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자신만의 목적과 가치를 세우고 이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얼마든지 잔인한 게임을 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나의 진정한 삶이 되고, 나의 유일한 죽음을 안내할 표지판이 된다. <그린 나이트>는 이를 확실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마지막 한 장면까지 모든 힘을 짜내 완성했고, 목적을 달성했다.
혹여라도 철학적이고 난해한 이야기에 파묻힐까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이야기를 쏙 빼놓고 봐도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하는 포인트를 무수히 갖고 있다.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영상미와 장엄한 기운을 내뿜는 음악에만 집중해도 좋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웨인의 여정에 동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그의 무용담 곳곳에 뿌려놓은 <그린 나이트>만의 향기가 너무나 매혹적이라 일부로 지나치기도 어려울 거다.)
가웨인의 새로운 선택을 앞둔 채 극장에서 돌아선 순간, 섬뜩함에 사로잡히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자기 내면의 감시자, 그린 나이트와의 만남이 번뜩! 떠오른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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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단호크, 이완 맥그리거 신작영화에서 만나다!
애플스튜디오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재회하는 이복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이완 맥그리거와 이단 호크가 함께 나오는 새 장편 영화 ' 레이먼드와 레이’로 돌아온다. ' Albert Nobbs '와 ' In Treatment '의 연출을 맡았던 로드리고 가르시아가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이완 맥그리거는 레이먼드 역을, 에단 호크는 레이 역을 맡아 까다로운 부모와의 어려운 관계 속에서 유산을 놓고 갈등을 겪는 인물들을 연기를 한다. 로그라인에 따르면, "그들은 여전히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의 장례식은 그들 자신을 재건할수 있는 기회이다. 분노도, 고통도, 어리석음도 있고 또 사랑이 있을 수도 있죠. 물론 무덤을 팔 수도 있습니다.”라고 전한다.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수상자인 알폰소 쿠아론(로마), 보니 커티스(라이언 일병 구하기), 모킹버드 픽쳐스의 줄리 린(앨버트 놉스)이 제작한다. 가브리엘라 로드리게스와 쉬 카머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는다.
“레이먼드와 레이 "는 애플의 최신작이다. 최근 애플 TV 플러스 스트리밍 플랫폼에는 앙투안 푸콰 감독과 윌 스미스가 함께한 'Emancipation',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로버트 드니로가 출연한 마틴 스콜세지의 'Killers of the Flower Moon', 톰 행크스와 함께한 'Finch' 등 여러 편의 영화가 공개됐다. 코엔형제의 ‘The Tragedy of Macbeth”에는 덴젤 워싱턴과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주연을 맡았다. 애플스튜디오는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출품한 이래로 2500만 달러(약 2500억 원)의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가족 드라마 '코다(CODA)'를 최근 공개했고, 행크스와 함께 2차 세계대전 드라마 '그레이하운드'도 프리미어 되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맥그리거는 최근 "Halston"에 출연하여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차기작으로 디즈니 플러스의 오비완 케노비 스트리밍 시리즈에 출연한다. 호크는 미국 쇼타임의 드라마 "더 굿 로드 버드"에 출연하여 극찬을 받았다. 그는 앞으로 블룸하우스의 "더 블랙 폰"과 "나이브 아웃 2"에도 출연할 것이다.할리우드에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두 레전드 배우의 연기를 하루빨리 보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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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18] 아동학대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
영화 고백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동학대를 다루도 있는 영화여서 어둡고 슬픈 영화인데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사회 제도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면서
주변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긎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도 알려주는 영화입니다.
박하선 배우의 연기와 하윤경 배우의 연기가 좋아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영화여서 많은 분들이 불편하겠지만 꼭 보면 좋을 것 같아요,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 하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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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영화감독 노동주> 메인 예고편
“사랑에 대한 힘이, 힘에 대한 사랑을 능가할 때 세계 평화가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시각이 단절된 채 시각적인 예술인 영화에 도전하는 ‘노동주’ 감독, 그가 도전하는 건 세상의 편견과 장벽들이다. 인간 노동주의 삶과 감독 노동주의 영화 제작기를 통해 바라본 우리 사회의 편견과 시선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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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엘리트들 시즌 4> 공식 예고편
[2021년 6월 18일, 넷플릭스 공개]
모든 것을 가졌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다.
6월 18일, 라스 엔시나스에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