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2-08 16:57:51
2023 크리스마스 영화 편성표 미리보기
다들 준비됬는가~? 영화 하루종일 볼 준비 말일세.....
사실 에디터가 크리스마스날 하루종일 영화보고싶어서 준비한 편성표...같이보면 좋고 혼자보면 더 좋은 크리스마스 특집 TV 편성표 가지고왔어요~! 미리 저장해 놓고 다가올때 열어보아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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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고 변화하는 게 삶이라면, 우리는
심리적 거리가 먼 것은 평소에 의식하기 어렵다. 당장 오늘 먹고 입고 일하고 잠드는 일에 기민하게 반응하느라 그러한 일상 속에 불쑥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단 걸 의식하긴 어렵다. 무디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가.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며 살아간다면, 불안과 동요로 마음이 날뛸 테다. 일상에 치여 산다고들 표현하는데 되려 그 덕에 삶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 ‘산드라‘는 두 갈래의 경계를 오간다. 동시 번역 일을 하고,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등 해야 할 일로 꽉 찬 하루. 여기에 죽음과 맞닿은 존재를 돌보는 일도 포함된다. ‘벤슨 증후군’. 명칭마저 생소한 이 질병을 앓고 있는 그의 아버지. 신경 이상으로 시각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감각을 서서히 잃어간다. 열쇠구멍을 찾아 한참 헤맬 정도로.
철학 교수로 오랫동안 재임한 아버지는 시각과 기억을 잃어가는 변화에 적응 중이다. 사실 발병은 5년 전이라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거 같지만, 서서히 사라지는 기억과 시력은 언제고 익숙함과 거리가 멀다.
산드라가 사별한 남편도 얼추 비슷한 햇수인데, 그는 어떨까.
홀로 여덟 살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도 충분히 바쁜 하루다. 친절하게 아버지를 찾아뵈며 도움을 건네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난 순간부터는 제게 걸려오는 전화를 애써 무시한다. 마치 일터에서 퇴근한 사람처럼. 하지만 으레 엄마 역할이 그러하듯 끝이 아니다.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그렇게 살아가고.
와중에 아버지가 더는 요양인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하자, 비용과 시설이 적절한 요양원 찾는 일도 생겼다. 할 일 투성이인 산드라에게 다른 주제로 떠들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 친구 클레망이었다.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클레망. 그런 클레망과 산드라는 가까워지고, 그 거리는 어느새 입을 맞닿을 정도에 다다른다. 한 번은 손쉽게 두 번, 세 번, 새로운 일상이 된다. 딸은 기묘한 변화를 금세 눈치채고 이러한 변화에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는다. 놀러 올 때마다 자신과 다정히 놀아주는 존재가 달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산드라는 괜한 기대감을 주지 않으려 클레망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가장 설레고 기대하는 사람은 그다. 이 사랑이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클레망이 현재 가정을 정리한 후 자신에게로 완전히 정착할 것이라고. 이곳과 저곳을 오가던 클레망은 단언한다. 다 끝내고 돌아오겠다고.
그 말을 믿으며 기다리던 산드라. 기다리는 와중에 아버지의 집안에 가득한 책 일부를 제자들에게 보내고, 원하는 요양원에 자리가 날 때까지 매번 아버지는 머무르는 거처가 바뀐다. 여전히 클레망은 소식이 없다. 서서히 직감한다. 아, 그가 날 떠났다.
아버지는 가끔 기억을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러 온 건지. 그러다 산드라도 잊어간다. 이혼한 전처를 잊어버렸듯.
숱한 이동과 변화의 반복. 영화는 이 모든 일을 아주 잔잔하게 풀어낸다. 극적인 음향이나 이미지도 없다. 그저 붉고 푸른색을 선연히 드러내고, 클로즈업으로 세밀한 표정을 보여주고, 구체적인 서술 없이 내레이션이나 오가는 짤막한 대화에 맥락을 넣는다.
그래서였다. 산드라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딘가 모르게 일상적으로 느껴졌던 건. 죽음도, 기억도, 변화도, 새로움도, 기대감과 눈물도,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아 보이던 일상에서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살다 보면 별난 이벤트도 생긴다. 다 끝난 것 같던 관계, 그러니까 클레망이 정말로 산드라에게 돌아와 머무는 것처럼. 이 새로운 가족이 얼마나 단단하게 형태를 유지할지 가늠할 순 없다. 하루하루가 그러하듯. 익숙한 모습을 띤 채로 조금씩 계속 무언가가 변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임을 영화의 ost가 말한다. 포옹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뻗어 완성하는 것처럼.
모든 망각과 변화와 새로움 앞에서도,
Love will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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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켜 주고 싶은 마음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본 영화는 얼마 없어서 이 참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정주행 하여 글을 남기고 싶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짧은 장면들만 기억나는 영화였고 어떤 주제를 가진 영화인지는 잘 몰랐던 영화였다. 솔직히 지브리가 특유의 따뜻하고 감성적인 색채와 분위기를 보는 재미이고, 특별한 주제를 찾으려고 보는 장르는 아니지만 그래도 '왜 그들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가?' 그 원인을 알고 싶었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스틸컷
전쟁
영화에서 등장하는 시기는 전쟁이 진행 중인 시대이다. 분위기를 보면 제1차 세계대전 시기와 비슷한 건축양식과 고풍이 느껴지지만, 그들의 무기는 현대 무기보다 발달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각종 무기들과 하울과 같은 마법사들까지 전쟁에 참전하여 화려해 보이는 도시들 사이로 하루하루 폭발 소리와 거친 잔해들이 난무한다. 영화 제목에서 알다시피 하울의 심장으로 만든 악마 켈시퍼가 조종하는 움직이는 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성은 고철들과 잡동사니 물건들로 덕지덕지 붙여 만든 성의 모습이다. 필자는 이런 모습을 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 이재민을 의미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전투 비행정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는 성의 장면, 특정한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는 장면은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을 떠오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성에 붙어있는 고철은 전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철이다. 이런 철로 성을 만들었다는 점은 그만큼 전쟁의 참담으로 곳곳에 철이 쉽게 볼 수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사랑과 심장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하울과 소피, 황야의 마녀의 삼각관계가 이루어진다. 황야의 마녀는 하울의 심장을 얻으려고 하울을 찾는다. 이는 하울의 마음을 얻기 위한 그녀의 행동이다. 하지만 하울은 소피를 좋아하고 소피 역시 하울을 좋아한다. 하울이 소피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녀가 성 안에 들어온 뒤부터일 것이다. 하울의 성을 고철과 잡동사니로 뭉쳐진 외관처럼 내부도 먼지투성이와 잡동사니로 더러운 환경이었다. 그리고 소피는 그 내부를 청소하고 관리하며 성 내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하울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켈시퍼가 성을 만든 것이니 즉, 하울의 마음을 소피가 치유해주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황야의 마녀가 켈시퍼을 갖고 있다가 소피한테 뺏겼을 때 황야의 마녀는 울면서 "소피가 또 마음을 뺏으려 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하울의 마음과 하울의 마음으로 만든 켈시퍼까지 소피가 가져갔다는 사실에 질투의 눈물이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감정을 심장이나 성 내부 등으로 물체화로 표현한다.
동심(童心)
영화를 보면 동심을 지켜주고 싶고, 기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등장인물들은 성숙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소피는 장녀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이으려고 하는 듬직함과 성숙함이 느껴지지만 그녀도 눈물이 많고 내면에 순수함이 있다. 하울은 전쟁도구의 수단으로 지쳐 보이고, 항상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설리번을 만나기 두려워하는 장면이나 그가 노랑머리를 고집하며 외모에 신경 쓰는 장면은 사춘기 시절 소년의 모습이 보이는 어리숙하고 귀여운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겉으로 나이 들어 보이고 성숙해 보이기 때문에 마음까지 그렇게 변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우리를 다독인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내면을 한 번쯤 보고 하울의 더러운 내부를 소피가 청소하여 말끔하게 차려놓은 듯 우리의 마음도 이 영화를 보며 마음의 청소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어쩌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아이들한테 순수한 동심(童心)을 보여주고 어른들한테는 동심(童心)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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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어쩌면 나만 섬인가봐
* 제목은 타블로의 노래 <airbag>에서 인용
절해고도(A Lonely Island in the Distant Sea)
감독 : 김미영
상영시간 : 110분
시놉시스 : 20대 때 청년조각상을 받았지만 지금은 인테리어 업자로 살아가는 40대 이혼남 윤철에게 10대 딸이 있다. 미술가로 장래가 촉망되던 딸이 어느 날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겠다고 한다. 윤철도 한때 예술가로 성공하지 못하면 신부나 스님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윤철은 자신이 꿈만 꾸고 가지 못한 길을 딸이 가는 것 같아 인생을 도둑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우스갯소리로 예술하는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말라고 한다. 소위 대박이 터지기 전까지 생활의 궁곤함은 차치하고, 기질적인 예민함과 높은 이상, 비대한 자의식이 가까운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일 거다.
장점과 단점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은 것이라 장점도 았다. 예민한 사람들이 가진 다정함과 배려심, 감각적인 표현과 시선 같은 것들, 먹고 사는 문제나 돈 벌 궁리 말고 다른 이야기들을 밤새워 할 수 있다는 새로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전공자이기 때문이다.
<절해고도>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 혹은 작업하는 사람의 이야기, 예술과 재능과 운에 대한 이야기다. 먼 바다에 있는 외로운 섬, 한때는 유배지를 절해고도라 불렀다.
너무 멀리 있어서 눈에 보이지만 다다를 수는 없는 섬이 있다. 그런 섬을 상상해보자. 먼 바다 끝에 보물섬이 있다. 어떻게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헤엄을 쳐도 닿지를 않고 배를 타고 갈 수도 없다. 그 섬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거기에 있다. 어쩌면 그 섬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20대에 청년조각상을 한 번 받은 후에 그렇다할 작업물 없이 인테리어 업자로 살아가는 윤철에게 현업 조각가의 꿈은 먼 바다의 섬 같다. 한때 자기보다 못했던 후배도 개인전을 여는데, 조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아버지와 딸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듯 닮기도 한다.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렇고 야구선수 이대호의 딸도 그렇고 윤철의 딸 지나도 그렇다.
지나는 미술에 재능이 있는 아이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된다. 하필이면 질투는 경쟁자들보다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한다.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가.
같이 그림을 그리던 친구가 남긴 '쓰레기'라는 댓글은 예술하는 19세 청소년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의 무게를 지닌다. 지나는 예술가이므로 자기 감정을 학교 블라인드에다가 표현해놓고 학교를 떠난다. 그림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에 학교 선생은 지나의 부모를 호출한다.
학교에서 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윤철은 지나에게 '그림에 재능있기가 쉽지 않다'는 말만 주구장창 한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고 스님이 되겠다는 지나를 보며 한때 자기도 종교에 귀의하고 싶었던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금우스님의 말처럼, 윤철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지나는 윤철이 멀리서 보기만 해야 했던 그 섬에서 태어난 아이다.
지나는 머리를 깎고 '행자 도맹'이 된다. 이제 윤철과 지나의 관계는 부녀에서 행자-거사의 관계로 바뀐다. 이들은 남남처럼 서로 존대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윤철은 더 이상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지 않고 국숫집을 꾸린다. 술도 팔지 않는 국숫집이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가게 문을 열고 국수를 삶는 일은 행자의 수행과 다름없다. 이 부녀는 요원한 섬을 꿈꾸며 허우적거리는 대신 고독한 수행자가 되는 방식을 택한다.
절해고도는 유배지의 다른 이름이었다. 컨테이너 작업장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삶과 시장으로 나가 국수를 삶는 삶 중 어느 쪽이 폐쇄적인가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윤철은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쪽에 가깝다. 이전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끼지 못해 좌절감과 자격지심으로 괴로웠다면 이제는 잘 맞는 옷을 찾아 입은 셈이다.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러빙 하이스미스>라는 제목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 <캐롤>과 <리플리>의 원작으로 유명하다.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민음사, 2009)>라는 제목의 단편집이 있는데, 러닝타임 내내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생각했다.
김미영 감독은 영화에서 '관계를 통한 성장'에 방점을 찍었으나 윤철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던 영지(강경현 분)의 존재는 이 텍스트와 어울리지 않아 생략했다. 관계보다는 작업하는(만드는) 인간으로서의 윤철에게 더 집중했다. 나는 윤철과 비슷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지나는 윤철에게 "평생 그렇게 살"라고 가시돋힌 말을 던진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자리를 찾아갔을 때, 마침내 윤철도 자기 자리와 할 일을 찾았으므로 절해고도 같은 유배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평생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다르게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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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8월 27일 | 16:00 - 17:50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2022년 8월 29일 | 19:30 - 21:20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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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뿌리에서도 혁명은 자란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대한 단상.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관객이 목격하기를 원한다. 더 나아가 관객이 상영관 바깥에서도 생각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새로운 세대를 어떻게 길러내야 할지, 어떻게 하면 연대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
-제목이 가리키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맨 땅에서 싹을 틔우지 않고 땅 속으로 뿌리부터 내리는 개체이다. 흙을 단단히 쥐고 나서, 다른 나무의 기둥을 타고 올라가며 자라나고 결국 먼저 존재하던 나무는 죽게 된다. 관객에게 이러한 제목의 의미를 먼저 알려 주는 이유 또한 연대해야 한다는 호소에 가깝다는 것을, 영화를 보는 동안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현관문 안쪽, 즉 가족 안에서 피어나는 갈등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동시에 주인공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거리 위 시위대와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을 관객도 함께 보게 만든다. 실제 푸티지를 보여주면 관객은 이야기에 몰입하던 것을 강제로 멈추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불편, 심지어 어떤 관객들은 일부러 피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한 이유는 이러한 구조적, 물리적 폭력이 실제로 존재함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목도하기 두려울 정도로 가혹한 실제 폭력, 권력에 부역하는 방식으로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던 가족의 도덕적 딜레마를 함께 담아낸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서스펜스와 함께 아주 선명하고도 통쾌한 엔딩을 선보이면서 관객을 영화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과 정치가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 미래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멈출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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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주하는 아이 도망가는 어른, <도주하는 아이>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주하는 아이> System Crasher , 2019 제작
독일 | 드라마 | 110분
감독: 노라 핑샤이트
도주하는 아이, 도망가는 어른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여기 어느 누구도 보호해 줄 수 없는 아이가 있다.
핑크 공주 베니.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 정신병원에는 너무 어려서 입원할 수 없고, 정부나 민간단체에서 운영하는 보호시설(기관)에서는 쫓겨나기 일쑤다. 어렵게 배정된 위탁가정에서도 아이를 향한 사랑 유통기한은 터무니없이 짧다. 초반부에 휘몰아치는 베니의 현실은 아이가 어른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인지, 어른이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한 베니의 거친 비명은 끝날 줄 모르고,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는 매 순간 충격적이다.
핑크색 옷을 입은 작은 발이 첫 장면으로 등장하고, 이후 온몸에 의료기구를 달고 있는 베니의 무표정이 비친다. 아이의 무표정은 맹수가 사냥을 하기 전의 고요한 움직임이다. 누구를 물어뜯기 위함일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질 때 그녀는 도끼 같은 눈을 한 채 고르지 못한 이빨을 드러낸다. 무표정의 베니가 사랑스러운 이빨을 내밀 때마다 <도주하는 아이>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심지어 반복적이다. 리셋 버튼이 주인공의 폭력에 의해 눌러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숨 가쁘게 진행된다.
이 작품은 출구가 없는 베니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양반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시스템에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이웃에게도 베니의 존재는 미쳐버린 개와 같다. 베니는 그들이 인정하기 싫은 인간성과 딱 정해놓은 도덕성의 한계를 폭로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 할 만큼 했어요. 제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네요."란 말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미 초록불에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넜기 때문에 매번, 불시에 빨간불에 뛰어드는 아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항변인 셈이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도 간단한 마음가짐인가.
선생님들 역시 베니를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베니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베니와 거리를 둔다. 세상을 물어뜯는 아이는 착한 아이도, 착한 어른도 될 수 없으니까. 베니를 보호할 수 있는 어른이 부재한 건, 아이의 탓일까. 모든 아이는 어른의 관심과 사랑을 선택적으로 받는 존재인가? '착한 아이' 프레임과 '착한 어른' 코스프레가 어떠한 검증 없이 무차별적으로 견고해지자, 베니는 더 처절하게 소리 지른다. "전부 다 싫어!"라고. 그리고 그들에게서 미친 듯이 도망친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어렸을 때 기저귀로 얼굴을 눌린 후 트라우마를 갖게 된 베니는 엄마에게만 자신의 얼굴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엄마, 베니에게 엄마란 존재는 모든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속에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건 엄마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니까. 베니는 자기를 만나러 오지 않는 엄마를 보고자, 보호소를 탈출한다. 도로 위에서 한참 동안 세워주지 않는 차에 쓰레기를 던지고 미친개처럼 왈왈 짖어대고 나서야 겨우 히치하이킹에 성공한다. 그렇게 어렵게 집에 온 베니를 맞이한 건, 낯선 아저씨. 사실 엄마도 딸을 자기 삶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베니가 또 폭력적으로 변해 자신을 때릴 거란 두려움과 작은 아들이 베니와 같은 행동을 학습해 학습해고 있다는 불안이 원인이었다. 충분히 베니를 다시 집에 데리고 올 수 있음에도 엄마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겠다는 말로 딸을 외면하고 있었다. 베니를 향한 엄마의 모성애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했다는 비극 앞에, 배니는 또다시 리셋, 리셋된다.
엄마의 등을 조각상으로 내리치며 "죽여버릴 거야!! 개년!!"이라 욕하고, 낯선 아저씨의 주먹에 얼굴을 몇 번 구타당한 후 바닥에 질질 끌려 장롱 속에 처넣어질 때까지 말이다. 베니는 광기를 내뿜으며 희망을 줬던 엄마를 향해 울부짖는다. 아이는 자신의 손을 물어뜯지 않고서는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고, 또 엄마는 도망치고 베니는 또 홀로 남는다. 반복되는 리셋, 사실 베니는 보호소 직원들에게 끌려갈 때마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유통기한이 정말 다했음을 매번 온몸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또다시 엄마의 품이 그리워 몸을 잔뜩 웅크려왔다. 엄마와 함께 사는 꿈을 꾸고, 엄마가 좋아할 만한 가방을 가게에서 훔치고, 또 만나러 오지 않는 엄마에게 분노 대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던 딸이었다. 잔인하게도, 이것이 <도주하는 아아>가 주는 유일한 희망이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다행스럽게도 엄마를 제외하고, 베니의 웃음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두 명의 어른이 존재한다. '비파네'와 '미하'. 두 사람은 베니의 얼굴을 만져도 되는 어른이다. 비파네는 베니에게 안전한 가정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아동 보호사이고 미하는 비행청소년의 행동을 교정하는 일을 하는 전문가다. 이 두 사람만이 핑크 공주를 상처 입은 아이로만 바라본다. 함께 가슴 아파하고 안쓰러워하며 베니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비파네는 베니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어떻게든 아이를 위해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려 한다. 베니에게 엄마가 결국 너를 버렸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대신 흐느끼는 그런 어른이다. 그래서 아이는 비파네만큼은 두 팔 벌려 안아주고, 함께 하고 싶어 한다. 비파네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외적으론 무기력한 인간이지만, 베니에겐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품어주는 몇 안 되는 어른이니까.
미하는 온몸이 묶인 채 병실에서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베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무엇이 저렇게 어린아이를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들었을까. 겨우 아홉 살인 저 아이가,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을 품고 있는 걸까. 결국 그는 베니를 숲 속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상담소)에 3주 동안 데리고 있겠다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그러나 베니를 경험한 자들은 미하를 믿지 않는다. '미하의 프로그램'이 아무리 효과적이어도 '베니의 리셋'은 막을 수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그들의 말대로 미하는 실패한다. 시종일관 베니와 베니를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를 확고하게 고수하던 <도주하는 아이>의 태도가 180도 바뀌는 순간이다. 영화는 이후부터 애매한 자세를 취한다. 일례로, 미하의 자발적인 포기가 정말 자의인지 아닌지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모두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미하는 베니의 리셋을 통제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됐다. 그가 베니에게 가족(아내와 자식)을 보여주고, 오두막이 아닌 자기 집에서 베니를 재워준 순간, 그렇게 결정됐다. 베니가 미하에게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니는 미하에게 아빠가 되어달라고 고집을 부리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부인과 아이를 죽이면요? 그럼 완전 제 것이 되는데?"라고. 오랫동안 느껴보지 않았고 어쩌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따라서 어떡해서든 갖고 싶었던 사랑, 베니에겐 반드시 필요했다. 미하는 평생 지켜오던 직업과 가족을 무참히 파괴해 버릴 것 같은 베니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비파네에게 고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베니에게 희망을 줬고, 그 결과 통제블능이 되어버렸다고. 그렇게 베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잃고, 비파네와 미하는 본인들 역시 도망가는 어른임을 인정한다. 어른들은 베니를 정신과 치료가 가능한 케냐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케냐로 떠나야만 하는 베니의 상황, <도주하는 아이>가 남긴 마지막 말줄임표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베니는 버려지기 전에 반드시 도주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시 도주할 수 있다. 잡히고, 또 잡히면서 크지 않으면 아이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이제 베니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고, 더 쉽게 칼을 휘두를 것이고, 더 잔인하게 자신의 얼굴을 만진 이들에게 폭력을 가할 것이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을지도 가늠할 수 없다. 반복되는 리셋에 스스로 폭주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 <도주하는 아이>가 처음부터 계속 보여줬던 명확한 진단이다.
아이를 포기한 어른의 탓인가. 어른도 포기하게 한 아이의 탓인가. 영화는 아이는 도주하고 어른은 도망간다는 결과만 내놓았다. 숲 속에서 베니를 향해 짖어대던 미친개만이 아이를 품어주는 장면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겠지. 그래서 도주하는 베니의 얼굴에 띈 웃음이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한다. 그 두근거림이 설렘이 아닌 두려움이란 사실을 <도주하는 아이>도,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또 한 명의, 도망가는 어른의 떨리는 두 눈을 봤을 테니까. 베니의 마지막 호소이자 세상을 향한 다신 없을 답변이 떠오른다.
"웃기시네!"
이제 베니의 얼굴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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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묘 |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야심 찬 살풀이 한 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액의 의뢰를 받아 미국 LA로 향한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 기이한 병을 앓는 갓난아이를 만나고, 아버지 '박지용'(김재철)과 대화를 나눈 후 화림은 지용의 조부가 묻힌 묫자리가 화근임을 눈치챈다. 이에 화림은 지용에게 이장을 권유하고, 자기가 아는 최고의 풍수사이자 지관인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묘지를 살핀 상덕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한다. 절대 사람이 묻혀서는 안 될 악지에 묘가 자리 잡았기 때문. 결국 본래 계획과는 달리 상덕과 화림은 파묘와 굿을 동시에 진행하기 시작하고, 모든 의식을 무사히 끝낸다. 그러나 하늘에서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자 화림은 그제야 깨닫는다. 파내서는 안 될 것까지 같이 파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파묘>, 장재현표 오컬트가 업데이트되다
한국 영화에서 오컬트 장르는 비주류다. 귀신이나 유령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는 적지 않지만, 오컬트의 정의에 입각한 작품을 찾으려면 어려움이 크다. 사전에 따르면 오컬트는 '주술이나 유령 등 설화·문헌으로 전승되는 영적 현상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에 원리나 규칙이 있다고 여기며 이를 이용하는 신념'이다.
핵심은 원리와 규칙이다. 오컬트 작품이 간혹 간과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단순히 유령이 등장한다고 다 오컬트는 아니다. 그들의 동기, 주술이나 의식의 목적을 유려하게 설명해야 한다. 설령 모호하고 헷갈리더라도 일관된 해석은 최소한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장재현 감독은 매번 주목받는다. 그의 작품은 오컬트라는 하위 장르 특유의 재미를 언제나 놓치지 않으니까. 거기에 더해 한국 관객의 입맛에 맞추는 법도 알고 있다. 한국적 풍경에 가톨릭 엑소시즘을 더한 <검은 사제들>, 불교와 기독교 세계관을 토속 신앙에 버무린 <사바하> 모두 마찬가지다.
신작 <파묘>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할아버지 묘를 파헤치는 한 가족의 이야기에는 '파묘'라는 소재에 기대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오컬트 장르의 묘미를 집약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반부터는 한 층 담대한 야심을 꺼내놓는다. 전작에서 풍경에 머무른 한국적 배경이 전면에 등장한다. <파묘>가 역사적, 민족적, 민속적, 종교학적 맥락을 한 데 어우르는 세련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가족사를 묻으려는 파묘
<파묘>의 초반부는 올곧다. LA에 거주하는 부유한 한인 가족의 고민을 보여주며 군더더기 없이 곧장 파묘라는 의식에 집중한다. 지용은 상덕과 화림에게 파묘를 요청한다. 할아버지의 묫자리를 잘못 잡은 나머지 집안의 장손들이 현대 의학으로도 해결 못하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 영화는 지관인 상덕과 무당인 화림의 입을 빌려 땅의 의미와 음양오행에 대한 간략히 설명한 후, 곧장 파묘 의식을 보여준다.
이때 두 지점이 눈길을 끈다. 우선 <파묘>는 클리셰를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 파묘 의식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전개된다. 무사히 끝난 듯 보이는 순간, 누군가의 실수로 문제가 발생한다. 관에서 빠져나온 혼령이 복수를 시작하면서 학살극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클리셰는 반쯤 유지되고, 반쯤 파괴된다. 그 덕분에 영화의 흡입력과 서스펜스는 극대화된다. 상덕이 위험에 빠진 박지용을 급히 만나러 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앞선 시퀀스에 등장한 순서를 살짝 비틀며 문을 절대로 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역이용해 강렬한 긴장감과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비극의 시작점 또한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지용은 상덕에게 관례를 깨는 부탁을 한다. 할아버지의 관을 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염조차 하지 않고 관 채로 태워달라고 요청한다. 미국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기 위해서. 그는 후작 작위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친일파 할아버지의 정체를 숨기려 한다. 이처럼 <파묘>의 장르적 쾌감은 한국인의 흥미를 돋우는 서사 덕분에 더 강해진다.
민족정기를 깨우는 파묘
재현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박지용 조부의 파묘 의식을 쌉쌀하게 매듭 지은 후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면서 더 큰 야심을 드러낸다. 파묘 의식이 끝났는 데도 풀리지 않은 의문을 전면에 내세운다. 일본 귀족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 왜 여우가 들끓는 기운 안 좋은 산에 묻혀야 했을까? 그에 대한 답을 본격적으로 찾는다.
그래서 영화는 또 다른 소재를 들고 나온다. 바로 '일제의 쇠말뚝'이다. 백두대간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곳곳에 설치했다는 쇠말뚝. 그 순간 파묘의 의미는 개인의 범주를 넘어선다. 일반적으로 파묘는 한 개인, 넓게는 가족의 정기를 바로잡으려는 시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쇠말뚝'의 존재 덕분에 파묘는 이제 민족 전체의 정기를 바로 잡는 행위로 뒤바뀐다.
그 덕분에 <파묘>의 후반부는 전반부와 퍽 다른 맛이다. <검은 사제들> 후반부와 비슷하지만, 더 비장하다. 민족의 한을 풀어내야만 비로소 밝은 미래를 마주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 물론 혹자는 이를 두고 반일 감정을 조장할 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소재를 역이용하는 영리함
하지만 온당치 않다. <파묘>는 일본 정령 및 무속인과의 대립 관계를 부각하며 메시지를 철저히 오컬트적 세계관 내에서만 다루기 때문.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장르적으로 세련된 반일 영화라는 칭찬이 더 적절한 이유다. 특히 소재의 한계를 오컬트적으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다.
쇠말뚝이라는 소재는 자칫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쇠말뚝을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사용했다는 게 정설이기 때문.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반일 감정과 풍수지리가 뒤섞인 결과물에 가깝다. 그런데 <파묘>는 비약일 수 있는 소재를 역이용해 세계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일례로 영화는 초반부에 뿌려 놓은 몇몇 복선을 일부러 회수하지 않다가 뒤늦게 환기시킨다. 과학적인 현실(양) 뒤에 숨은 또 다른 현실(음)이 존재한다는 화림의 내레이션이 대표적이다. 항공사에서 일하는 딸 이야기를 하며 천문학과 풍수지리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는 상덕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합리적,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부정된 가설이 그 너머의 세계에서는 진실이 될 수도 있다고 계속해서 암시한다.
그 덕분에 일제의 쇠말뚝은 현실에서는 부정된 가설이지만, 오컬트 세계에서는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다. 영화적 상상력을 강조하며 역사 문제를 피하고, 대중의 구미를 자극하면서 영화에 직관적으로 빠져들게 만든 셈이다. 더 나아가 한국 오컬트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원혼뿐만 아니라, 일본의 도깨비불 같은 또 다른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킬 계기도 마련하면서 세계관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끝내 못 넘은 한계
다만 <파묘>는 장르 영화의 근본적인 한계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다. 특히 후반부는 다소 불친절하다. 세계관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사건을 빠르게 전개하며 필요한 설정만 암시하기 때문. 특히 오행, 혼령과 정령의 차이 등을 설명하는 대목이 짧은 플래시백 혹은 대사로 언급되다 보니 흐름을 따라가기 벅찰 여지가 있다.
이에 더해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가 다소 늘어진다는 인상이 남는다. 1부에서 기승전결이 깔끔하게 끝났는데 2부에서 다시 기승전결이 펼쳐지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다. 특히 복수에 방점이 찍힌 전자가 대중적으로 익숙한 이야기인 반면, 일본 정령이 등장하는 후자는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커서 단점이 두드러진다.
그나마 탁월한 완급조절 덕분에 단점이 상쇄되기는 한다. 김고은의 마스크를 강조하는 굿 장면, 이와 대비되는 몇몇 유머가 섞이면서 134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사실 공개 전만 해도 <파묘>의 개봉일은 다소 의아했다. 아무리 <검은 사제들>, <사바하>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고 해도, 굳이 <듄: 파트 2>와 오컬트 영화를 붙일 필요는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결과물을 본 후에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장르 본연의 한계만 보다 너그럽게 용인할 수 있다면, 무엇을 기대하든 그 기대를 충족해 줄 한국형 오컬트의 정수가 등장했으므로.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개인과 민족의 아픔을 아우르는 한국형 오컬트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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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대학교X환몽씨네, 채널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 (feat. 최민식, 김윤석, 이병헌 외)
중앙사랑과 함께한 예능형 콜라보 콘텐츠입니다!
졸업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학교를 떠나기 전,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재밌게 즐겨 주신 중앙사랑 27기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본 영상은 지난 2월에 촬영한 콘텐츠입니다.)
#중앙대학교 #중앙대 #중앙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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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페이블> 메인 예고편
어떤 상대든 6초 안에 죽인다! 전설의 킬러 ‘페이블’!
살인 불가! 강제 휴업 중!전설의 킬러 ‘페이블’은 자신을 길러준 보스에게서 1년 동안
일반인으로 살 것을 명령 받아 파트너 ‘요코’와 함께 오사카로 떠난다.
이들은 난생 처음 ‘평범한’ 삶에 적응하려고 성실히 노력하지만
주변에서는 좀처럼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러던 중 페이블에게 소소한 일상을 가르쳐 준 직장 동료
‘미사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
페이블은 과연 보스의 ‘아무도 죽이지 말고 평범하게 사는’ 미션을 통과하고
미사키를 구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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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를 만나는 길> 메인 예고편
전 세계인에게 평화와 행복의 가르침을 남긴 이 시대의 스승 ‘틱낫한’ 스님
그가 프랑스 보르도 근교에 설립한 명상 공동체 ‘플럼 빌리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함께 걷고, 먹고, 일하고, 차를 마시는 그곳에서
3년에 걸쳐 최초로 기록한 마음챙김의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