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3-11-17 22:38:25
불안보다 포용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앵그리 애니> 리뷰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것과 본능적인 거부감이 부딪히는 순간에 받았던 충격을 기억한다. ‘임신중단’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제도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분노했다.
나는 결혼과 출산이 생애주기 중 꼭 거쳐가게 되는 어떤 대단한 경험이나 의무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신중단’이라는 단어는 임신이 여성 신체에 일어나는 어떤
일시적인 현상임을 시사한다. 나의 신체를 사회가 아닌 나의 시점, 내가
통제할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순간 알게 되는 것들은 어떤 배신감과 너무나 많은 질문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가장 먼저 화가 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권력과 정치의 힘이,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살아있는 나의 신체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다. 그래서 <앵그리 애니>라는
제목은 분노의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 영화 속 애니와는 다소 다름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손을 뻗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배신감과 너무나 많은 질문은
나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로르 칼라미 감독의 <앵그리 애니>는 이미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임신을 원치 않고, 그래서 낙태
시술을 받으러 온 애니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병원이 아니라 서점에 들어선 그녀는 의사와의 면담 대신
‘모임’ 참석 안내를 받고 뒷방으로 들어선다. 알음알음 정보가 공유되는 듯한 이 모임은 낙태 시술의 합법화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누구에게나 무료로 의사가 집도하는 낙태 시술을 제공한다. 그리고
활동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기에 비밀 유지도 필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 과정, 그러니까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임신중단 이후의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다. 임신중단을 경험한 후 애니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던, 자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은 친구가 낙태 시술 도중 사망하는 사건에 직면한다. 너무나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과 같은 문제를 마주했지만 정보와 환경적 조건의 부재로 인한 죽음을 마주한 것이다. 그래서 애니는 분노에 그치지 않고 합법화를 위한 활동에 동참하기로 한다. 그렇게
<앵그리 애니>는 대양에 홀로 된 섬처럼 동떨어진
개인적 경험인 줄로만 알았던 임신중단이, 사실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앵그리 애니>는 처음 제목을 알았을 때 어떤 내용인지 유추하기가 다소 어렵다. 언뜻 생각하면 ‘애니’라는 인물의 드라마나 성장담을 다룬 영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애니는 왜 화가 났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보기 시작한 영화는 반대로 현실을 보여 주려고 애쓴다. 가령 옆집에 살던 친구가 애니와 같은 이유로 허망하게 죽게 되는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 부자연스러울지언정 임신중단이 목숨을 걸 만큼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선택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전달한다. 인력이 부족할 만큼 많은 여자들이 모임에 찾아오기 시작해 서점에 발 디딜 틈도 없게 되는 상황에서는 ‘정말로 저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임신중단을 선택할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말 ‘다양하고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죽고 있다. 제도화를 하면 의료 시술이 서비스처럼 변질될 것이라는 핑계는, 그 여성들의 존재를 가린다. 제도가 없으면 보호도 없고, 위험한 방식으로 임신을 중단하는 시도는 계속된다. 여성들은 과거에도 그렇게 죽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현재에도 통계 속 숫자로만 겨우 대변할 수 있는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스펙터클이나 거대한 드라마를 주지 않고도, <앵그리 애니>는 관객의 현실까지 뒤따라온다. 그리고 종결이 아닌 확장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관객 각각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 임신중단을 다루는 다른 영화들처럼 임신중단을 간절히 원하는 여성 주인공의 등 뒤에 붙어 그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담아내기보다는 공동체 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임을 알도록 해준다. <앵그리 애니>는 그렇게 자신만의 따스함과 포용력으로 관객의 현실에 다가온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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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증의 모녀에게 멀티버스가 필요했던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중 국세청 조사에 시달리기 시작한 '이블린(양자경)'. 국세청에 제출할 수많은 관련 서류를 검토하던 그녀는 남편 '웨이먼드(케 후이 콴)'의 이혼 요구와 연애 중인 여자 친구를 인정해달라는 딸 '조이(스테파니 수)' 때문에 대혼란에 빠진다. 그때 이블린의 눈앞에서 멀티버스가 열리고, 알파 지구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를 만난 그녀는 수많은 자신이 다른 우주를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알파 웨이먼드는 이블린에게 그녀가 무한한 다중 우주의 절대 악 조부 투파키에 대항할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녀는 수많은 이블린 중 가장 최악의 선택만 한 이블린이기에 모든 멀티버스의 이블린으로부터 능력을 빌려 온다면 위기의 세상과 가족을 구할 수 있다는 것. 또 알파 지구의 이블린이 딸 조이에게 권위적으로 윽박지른 결과 조이가 흑화 해 조부 투파키가 되었으니, 이블린만이 조부 투파키를 막을 수 있다는 점도 알려준다. 이에 이블린은 멀티버스의 운명과 딸과의 관계를 모두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참신한 소재라면 가만두지 않는 창작자들 덕분에 '멀티버스', 다중 우주 개념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익숙한 소재를 선택하는 것과 그 소재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멀티버스도 마찬가지다. 필연적으로 다양한 설정을 필요로 하는 다중 우주 개념은 마치 복어와도 같다. 당장 지난 10년 간 할리우드의 정점에 있던 MCU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제외하면 이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 두 명의 다니엘이 만든 액션 코미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원>)는 다르다. 시작부터 멀티버스 세계관을 숨기지 않으며 러닝타임 내에서 완벽하게 소화한다. 영화는 이블린이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뒤적이는 가운데, 거울에 비친 그녀를 담아내면서 시작된다. 두 명의 이블린을 함께 잡아주던 카메라는 이내 거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치 지금 보이는 이블린 말고도 다른 이블린이 있다는 걸 암시하듯이. 거울을 활용한 도입부는 흥미롭게도 <에에원> 속 멀티버스만의 한 가지 특징을 암시한다. 영화에는 다중 우주의 다양한 이블린이 등장하지만, 마치 거울 안에 갇혀 있듯 그들이 직접 만나는 장면은 없다.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모든 것(Everything)"이 있는 멀티버스, 인터넷
<에에원>의 멀티버스는 MCU를 비롯한 다른 영화의 멀티버스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멀티버스 영화는 우주 간의 경계가 없어져 '내'가 다른 '나'를 만나는 사건을 다룬다. 반면에 <에에원>의 멀티버스에서는 다른 우주의 '나'에게 있는 능력과 특징의 일부를 '내' 우주로 끌어올 수 있다. 실제로 이블린은 필요한 순간마다 적재적소의 능력을 다른 우주의 이블린으로부터 빌려온다. 괴력의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에게 쫓기자 쿵후 마스터 이블린의 격투 실력을 끌어온다. 다수의 적과 싸워야 할 때는 피자집 아르바이트생 이블린의 광고판 돌리는 능력을 가져온다. 조부 투파키도 마찬가지다. 불의의 사고로 모든 우주에 접속할 수 있게 된 그녀는 각종 기상천외한 능력을 끌어다 활용한다. 이 아이디어는 <에에원>의 연출과 프로덕션이 특히 인상적인 이유다. 사실상 세탁소와 국세청 건물 안에서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는데도 <닥터 스트레인지 2> 못지않은 스케일을 뽐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에에원>의 멀티버스는 낯설지 않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필요한 순간 모든 것을 가져다 쓸 수 있는 멀티버스는 어딘가 친숙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멀티버스는 인터넷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주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요리 레시피부터 지하철 배차 시각에 이르기까지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암기하거나 알지 못한다. 대신 필요한 순간마다 인터넷에 접속해 가장 적절한 정보를 찾아내 활용할 줄 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이블린과 조부 투파키의 갈등은 단지 멀티버스의 운명을 건 대결이 아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서로 다른 세대의 갈등이다. 멀티버스를 처음 접한 이블린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에서는 인터넷을 비롯해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세계를 처음 접한 기성세대를 엿볼 수 있다. 반면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멀티버스를 다루는 조부 투파키에게서는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을 서핑하던 새로운 세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다니엘은 <에에원>이 "세대 차이와 인터넷,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잠재된 공포를 담고 있는 영화"라고 말한다. 당장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고 다니던 사람들의 눈에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치 다른 우주에서 온 사람을 보는 것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숨 쉬듯 당연한 삶의 방식이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들처럼 숨 쉬고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인해 정보가 넘쳐 나고, 같은 시공간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시대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일상이 아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골라하는 철천지원수 간의 싸움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이블린이 동성애자인 조이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이블린이 막아야 하는 빌런 조부 투파키가 알파 지구의 조이인 이유다.
멀티버스 속 "모든 곳(에브리웨어)"의 의미
그렇다고 해서 <에에원>이 어머니, 부모님, 기성세대가 마주한 놀라움과 혼란에만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멀티버스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울 조이의 내면을 장악한 공허함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녀는 멀티버스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역으로 무의미하다. 이는 SNS와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곳에서 접하는 정보에 압도되거나 좌절하거나 공허함을 느끼는 일이 많아진 현대인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 결과 조부 투파키가 된 조이는 모든 것을 파괴할 블랙홀, 검은 베이글을 만든다. 세상을 휩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서. 이렇게 조부 투파키는 이름만 다른 같은 공간에 사로잡혀 삶의 의미와 이유를 잃어버린 인물을 대변한다.
조부 투파키의 캐릭터성은 <에에원>을 단순히 코미디와 액션으로 점철된 오락 영화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진중함까지 맛볼 수 있는 깊이감 있는 영화로 만든다. 삶의 의미를 잃은 조부 투파키는 바위만 존재하는 우주에서 비로소 평온해진다. 모든 것들에게 개입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우주의 고요함만이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이블린의 생각은 다르다. 그녀는 모든 일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생생히 흘러가는 지금 이 순간의 경험과 선택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뜻깊은 것이고, 당장 옆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부 투파키처럼 모든 멀티버스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이블린은 무위의 우주에서 딸을 끄집어 내려한다. 자신에게 권한 검은 베이글을 거절하고, 돌이 된 우주에서도 딸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블린과 조부 투파키의 논쟁은 두 다니엘이 <에에원>에 "가족 드라마용, 공상과학용, 철학용 답이 각각 따로 있다"는 말로 이어진다. 철학적, 종교학적 사유가 함축되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모녀는 마치 해탈의 경지에 올라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모녀의 갈등은 깨달은 자가 현실 세계를 무의미하다고 여겨 도덕적 규범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해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며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주며 살 것인지에 대한 논쟁인 것이다. 그래서 이블린이 끝까지 조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모성애이자 멀티버스의 붕괴를 막는 히어로의 자세이지만, 동시에 종교 철학적 선택이기도 하다. 특히 이블린이 제3의 눈을 개안하는 것, 불교 미술 양식인 탱화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메인 포스터, 부처의 깨달은 마음을 상징하는 원불교의 일원상처럼 생긴 베이글의 존재는 오랜 시간 종교를 막론하고 이어진 논쟁을 다시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단 번에(All at once)" 모든 것의 의미를 알게 된 사람의 마무리
이렇게 조부 투파키와 조이의 마음을 읽은 뒤 영화는 이블린의 시점으로 되돌아온다. 그녀가 온갖 우주를 경험하며 단 번에 깨달은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에블린은 마침내 딸을 이해한다. 그녀는 조이가 레즈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딸과 매번 싸웠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문제일 뿐 핵심은 자신과 딸의 세상이 같지 않으며 모녀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설령 딸의 세상이 두렵고 혼란스럽더라도, 발을 내디뎌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고, 딸의 관점에서 딸의 고충에 공감하되 먼저 살아 본 이만이 알 수 있는 변치 않을 삶의 지혜를 일러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터득한다. 이렇게 먼저 다가가서 위해서 그저 평범할 수 있었던 가족 드라마에는 멀티버스가 필요하다.
이처럼 <에에원>은 두 다니엘의 말마따나 수많은 혼란 속에서 "가족에게 관심 갖는 법을 배우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딜도와 애널 플러그, 장난감 눈깔 등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등장하는 B급 코미디 요소는 익숙함에 신선함을 더하는 양념일 뿐이다. 영화는 줄곧 딸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엄마가 딸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를 마침내 깨달은 후 화해하는 익숙한 흐름을 따라간다. 그래서 온갖 장르적 특징을 다 섞어 놓아 왁자지껄하고 정신없던 멀티버스는 결국 눈물 한 방울과 함께 가족 드라마로 귀결된다.
이는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시작만큼이나 인상적인 이유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사정을 알게 된 이블린이지만, 그녀는 멀티버스 속으로 빠지지 않고 눈앞에 있는 세무국 직원 디어드리에게 주목한다. 설명을 제대로 못 들었으니 한 번만 다시 말해달라면서 디어드리에게 관심을 쏟는다. 서류에 눈이 고정되어 있을 뿐 정작 가족이나 손님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오프닝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 나는 변화다. 멀티버스가 이름만 다른 인터넷 공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작은 관심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다만 <에에원>에도 단점이 없지는 않다. 우선 뒷심이 부족하다. 사실 영화는 템포가 상당히 빠르다. 세탁소에서의 오프닝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쇼트 하나하나가 굉장히 짧고, 화면 전환도 빠르다. 그런데 러닝타임도 짧지 않다. 2시간 19분에 달한다. 그 결과 영화는 상대적으로 길게 체감되고, 피로감이 쌓인다.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이블린과 조이의 화해 장면이 생각보다 늘어진다는 인상이 남는 이유다. 확실한 임팩트를 주려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전개를 의도적으로 끈다. 말 한 마디면 종결될 상황에 굳이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듯 느껴진다. 그래서 누적된 피로감에 약간의 지루함이 더해지면서 감흥이 덜해진다.
호불호가 나뉠 가능성도 크다. 장르를 하나로 단정 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에에원>은 기본적으로 가족 드라마와 코미디 영화의 혼합이다. 그런데 이 코미디가 미국식 B급 감성을 적잖이 풍기는 관계로 취향에 어긋나는 순간 영화는 전반적으로 혼잡하다. 조부 투파키가 남성 성기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장면이나 성인 기구를 활용한 코미디가 대표적이다. 관객을 웃기겠다는 목표 충족에는 적합한 아이디어일지 몰라도, 그 자체로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질 여지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개개인의 취향 차이를 제외한다면 <에에원>이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120% 살려낸, <탑건: 매버릭>과는 또 다른 의미로 올해의 '시네마'라는 점에 동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다 보니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붙잡고 고생 중인 MCU 입장에서는 다소 쓰라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의 감독인 루소 형제가 <에에원>의 제작자이니, 그들과 재계약하지 못한 걸 땅을 치며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마블이 보고 배워야 할 멀티버스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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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 다섯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이동욱 X 임수정의 <싱글 인 서울>이 오는 29일 개봉합니다. 선남선녀 배우의 케미로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요. 뿐만아니라 제 76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퀴어 종려상을 수상한 일본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의 개봉소식을 알렸는데요.
사카모토 류이치의 유작이 담겨져 있는 <괴물>은 어떤 내용일지, 그 외의 개봉소식까지 같이 알아볼까요?
괴물
12.12: THE DAY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스릴러 | 일본 | 1427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안도사쿠라, 나가야마 에이타, 쿠로카와소야, 히이라기 히나타 등
개봉: 2023.11.29
배급: (주)NEW
시놉시스
“우리 동네에는 괴물이 산다”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행동에서 이상 기운을 감지한다. 용기를 내 찾아간 학교에서 상담을 진행한 날 이후 선생님과 학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흐르기 시작하고. “괴물은 누구인가?” 한편 사오리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미나토의 친구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신이 아는 아들의 모습과 사람들이 아는 아들의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데…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아무도 몰랐던 진실이 드러난다.
CINE PICK!
제76회 칸영화제 각본상과 퀴어 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괴물>은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의 자신의 어린 시절 체험을 바탕으로 각본을 집필한 영화로 지난봄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영화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영화음악이 담긴 작품이기도합니다.
싱글 인 서울
Single in Seoul
ⓒ 네이버영화
개요: 멜로/로맨스, 코미디 | 한국 | 103분
감독: 박범수
출연: 이동욱, 임수정, 이솜, 장현성, 김지영 등
개봉: 2023.11.29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시놉시스
“나한테 딱 맞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싱글이 답이다!” 혼자 걷기, 혼자 쉬기, 혼자 먹기, 혼자 살기… 혼자가 좋은 파워 인플루언서 ‘영호'(이동욱) “사실 혼자인 사람은 없잖아요” 혼자 썸타기, 나 홀로 그린 라이트… 유능한 출판사 편집장이지만 혼자는 싫은 ‘현진’(임수정) 싱글 라이프를 담은 에세이 <싱글 인 더 시티> 시리즈의 작가와 편집자로 만난 ‘영호’와 ‘현진’. 생활 방식도 가치관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은 책을 두고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은데…? 서울, 혼자가 좋지만 연애는 하고 싶은 두 남녀의 싱글 라이프가 시작된다!
CINE PICK!
<레드카펫>을 연출한 박범수 감독과 이동욱, 임수정이 만난 <싱글 인 서울>은 최근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연애에 대한 관점이 다양해진 현실을 반영해 만든 로맨스 영화로 예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합니다. 역주행에 이어 장기흥행까지 이끌어낸 로맨틱 코미디 영화 <30일>의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레슬리에게
To Leslie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미국 | 120분
감독: 마이클 모리스
출연: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오웬 티그, 마크 마론 등
개봉: 2023.11.29
배급: 진진
시놉시스
“말해주세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술에 빠져 수억의 복권 당첨금까지 잃은 레슬리는 몇 년 후, 사이가 틀어진 아들 제임스와 재회하지만 달라지지 못한 모습 탓에 그와 다시 멀어진다. 그런 레슬리에게서 과거를 떠올린 모텔 주인 스위니는 레슬리에게 모텔 청소부 일을 제안하는데… 지난 잘못을 돌이킬 수 없을 때 찾아온 새 출발의 기회! 흔들리는 세상의 모든 <레슬리에게>
CINE PICK!
제33회 런던비평가협회상 영국여우주연상 수상,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주연의 <레슬리에게>는 가족의 화해와 이해, 공감의 드라마로 수많은 후회를 거쳐 끝내 용서받기를 원하는 한 인간이 자립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관객들에게 따듯한 용기를 건네는 영화입니다.
아줌마
Ajoomma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싱가포르, 한국 | 90분
감독: 슈밍 히
출연: 후이팡 홍, 정동환, 강형석, 여진구 등
재개봉: 2023.11.29
배급: 싸이더스
시놉시스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 가슴으로 낳은 한류스타 ‘여진구’의 나라 한국으로 떠나다! 평생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싱가포르 아줌마 ‘림메이화’(홍휘팡) 한국드라마 촬영지 투어를 위해 인생 처음으로 나 홀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꿈 같은 시간도 잠시, 그녀를 두고 떠나버리는 관광버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홀로 남겨진 그녀의 여행은 뜻밖의 인연들을 마주하며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여진구’ 찾아 떠나온 곳에서 진짜 ‘나’를 찾는 여행을 시작하다! 어서와~ 싱가포르 아줌마는 처음이지?
CINE PICK!
<아줌마>의 연출을 맡은 허슈밍 감독은 실제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았으며 본인의 어머니가 늘 3~4개의 한국드라마를 챙겨보았다며 중년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기에 한국이 완벽한 장소라고 생각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네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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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담아, 뜨거운 안녕
* <인생은 아름다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인생은 아름다워 (2022)
감독: 최국희
출연: 류승룡, 염정아, 옹성우, 박세완
장르: 뮤지컬, 드라마
상영시간: 122분
개봉일: 2022.09.28
내 생애 마지막 생일, 첫사랑을 찾아줘!
자상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편 ‘진봉(류승룡)’과 무뚝뚝하고 철 없는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오랜 세월 자신을 잃은 채 살아온 ‘세연(염정아)’. 어느 날 병원에서 2달 시한부 인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런데 웬걸. 남편이라는 사람은 아내가 곧 죽는다는데 여전히 자신을 종 부리듯 하고 걱정이나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는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생일마저 가족들에게 무시당한 ‘세연’은 ‘진봉’에게 마지막 생일 선물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다. 당당하게 으름장을 놓는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 없던 ‘진봉’은 결국 ‘세연’의 첫사랑을 찾아 그들의 찬란했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국내 첫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 안전한 각본 선택
<인생은 아름다워>는 국내 최초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로 ‘이문세’, ‘이승철’, ‘토이’ 등 많은 세대가 즐겨 들었던 유명 가수들의 음악을 뮤지컬 넘버로 활용했다. 아직 국내에서 뮤지컬 영화는 성공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시도만으로도 큰 도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험적인 장르를 시도한 대신 각본은 전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안전한 가족 드라마를 택했다. 두 주인공이 로드무비처럼 전국 곳곳을 다니며 장소에 깃든 과거를 추억하고, 그 시기에 유행했던 명곡을 해당 신의 뮤지컬 넘버로 사용해 스토리와 음악의 편안한 결합을 이뤄낸 점은 호평할 만하다. 그저 맥락 없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 인물들의 서사에 걸맞게 음악을 활용해 뮤지컬 신에 설득력을 더하고, 대사와 노래의 전환이 매끄럽게 이어져 화려한 퍼포먼스와 신나는 뮤지컬 넘버가 분위기 환기를 톡톡히 해낸다.
작위적인 캐릭터 구성, 그럼에도 훌륭한 염정아의 연기
개봉 전 우려했던 뮤지컬적 연출은 의외로 준수했으나 장르 특성상 감성적인 요소를 터치해야 하기 때문인지 캐릭터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다. 특히 ‘류승룡’이 연기한 ‘진봉’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중반부까지 시한부인 아내에게 지독하게 못되게 구는 비호감으로 비춰진다. 생일날 술에 취해 들어와 선물이랍시고 손가락 하트를 내밀고 옷이 덜 말랐다며 셔츠를 툭 던지는 행태는 충격을 금치 못할 정도다. 이는 불쌍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인 ‘세연’의 감정에 관객들이 이입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일 터. 하지만 제아무리 이들이 젊을 적에 열렬한 사랑을 했다 할지라도 현재 ‘진봉’의 행동들을 보고 이들의 사랑에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감정에 호소하기 위한 어쩔 수 없이 반영한 설정이라 감안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쳤다. ‘진봉’의 이러한 모습들 때문인지 아빠 못지 않게 엄마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두 자녀는 그나마 귀엽게 봐 줄 만한 수준이었다.
작품의 진주인공 ‘세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임신한 아내에게 굶으라는 소리나 했던 남편과 20년 넘게 함께 산 그에게 대체 무슨 사랑이 남은 걸까. 감독은 ‘세연’의 불쌍한 처지를 강조하기 위해 캐릭터를 과도하게 수동적으로 만들었고, 다른 가족들에겐 매몰차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세연’의 안타까움을 강조할수록 결말부에 가족들의 슬픔과 후회는 더욱 커질 것이고, 비극적인 상황에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이입시킴으로써 눈물과 감동을 유도한 것이다. 차라리 ‘세연’이 초반에 신용카드로 명품 코트를 지르고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나가버렸다면 어땠을까. 감독은 그녀를 마지막 버킷 리스트조차 남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성으로 만들어 버렸고, 아련하고 풋풋했던 첫사랑의 추억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열 일곱의 첫사랑을 엇갈린 관계로 그림으로써 결국 ‘세연’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은 ‘진봉’ 뿐이라는 것을 부각한 셈이다. 하지만 앞서 아내를 향한 감정적인 학대를 일삼는 ‘진봉’의 행동들을 지켜보게 해놓고 어떻게 이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보란 말인가.
영화는 후반부에 가서야 급하게 ‘진봉’이 사실은 아내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음을 꺼내 놓는다. 겉으로는 화를 내고 툴툴거렸지만 사실은 아내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뒤편에서 애를 썼다는 ‘츤데레’로 포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캐릭터의 비호감적 속성을 상쇄시키려는 시도로 느껴질 뿐이며 스토리의 진부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시한부를 알게 된 이후 남편이 뒤에서 챙겨줬다고 한들, 그동안 받았을 ‘세연’의 상처는 지워낼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입하기 어려웠던 캐릭터 설정과는 별개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을 쏟는 감정신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푼수 끼 넘치는 코믹한 면모까지 다채로운 매력을 뽐낸 ‘염정아’의 연기력만큼은 눈부시다. 엄마의 시한부 소식을 알게 된 후 전화를 건 자식들의 목소리에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세연’의 눈물에 많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고 출중한 실력은 아니지만 진솔한 감정을 담아 노래한 담백한 목소리에 기쁨과 슬픔을 모두 느꼈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성량과 안정적인 가창력을 지닌 ‘류승룡’이 뮤지컬 신에서 중심을 잡아주었다면 ‘염정아’는 절륜한 연기력과 놀라운 몰입감으로 작품 전체를 이끌었다.
시대 고증보다는 뮤지컬적 연출에 집중
두 주인공의 10대부터 50대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등장하는 만큼 작중 다양한 시대상이 배경으로 나온다. 하지만 감독이 시대 고증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가령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는 1980년대이지만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난 90년대 초반의 배경으로 활용된다. 90년대 초반 대학생이었을 두 주인공의 의상 또한 1970년대 배경의 <써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촌스럽다. 이는 뮤지컬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대의상처럼 원색의 화려한 의상들과 시대착오적인 스타일링을 택한 게 아닐까 싶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IMF’ 등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사건들은 단지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 줄 배경으로 활용될 뿐이며 고증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은 것을 보면 배경 자체에서 큰 의미를 끌어낼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그 시기를 경험했던 관객들로 하여금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기능적 요소로 쓰일 뿐이다.
음악으로 아름답게 포장, 장르적 도전에서만 건진 의미
캐릭터의 구성과 스토리 자체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전형적인 가족애의 이야기가 가져다 주는 감동은 유효한 듯하다. 시한부라는 설정상 신파적 요소가 강한 부분이 있지만 해당 장면에서 관객이 눈물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은 평상시에 가족에게 잘하고, 존재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하는 고루한 메시지가 아직까지 먹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평소 아내에게 무심했던 중년의 남편, 엄마의 뒷바라지를 당연하게만 여겼던 철없는 자녀들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작중 가족들의 이별에 감정적으로 이입하는 바가 남다를 것이다.
낡은 스토리에 춤과 노래가 색깔을 입혀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반부에 무거운 감정을 질질 끌고 가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이 모인 파티에서 함께 ‘뜨거운 안녕’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 작품이 뮤지컬 장르의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부분이다.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유쾌한 멜로디에 모두의 사랑을 담아 ‘세연’을 떠나 보냄으로써 그녀의 덧없던 인생에 한 줄기 아름다움을 덧씌운다. 끝내 반전은 없었지만 영화가 음악을 통해 형성한 감흥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래도 세연의 인생은 아름다웠지’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그녀와의 쿨한 이별을 받아들이게 한다.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의 시도는 좋았으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걸작의 이름을 빌려올 것이었다면 음악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한 것이 아닌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부를 봤어야 하지 않을까. 추억의 명곡과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한국형 뮤지컬’ 영화에 대한 편견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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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의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듯이
구사일생
경기 대기 중. 홍대의 머릿속에 생각이 많다. 홍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홍대. 홍대의 시선은 동료 축구선수 성찬으로 향한다. 인터뷰 중. 빅리그 입단이 확실시된 성찬에게 질문이 쏟아진다. 박성찬 선수! 이 경기는 어떻게 플레이할 생각이십니까? 뭐 빅리그도 물론 좋지만 지금 앞에 있는 경기에 집중해야죠. 겸손함을 보여주는 성찬. 그런 성찬을 바라보는 홍대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경기 시작! 주심이 호루라기를 분다. 갑자기 홍대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 성찬을 도와 팀의 승리를 이끌어야 할 홍대가 성찬이를 맨 마킹 한 것이다. 경기를 던져버리는 홍대. 당연히 라커룸에선 난리가 났다.
라커룸에서만 난리가 나면 다행일 것이다. 홍대의 역주행은 금세 수많은 화제를 낳았다. 빗발치듯 따라온 기자들. 난감한 질문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깐족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유난히 눈이 맑은 기자 하나가 유달리 거슬리게 행동한다. "경기 중 역주행 퍼포먼스는 사기 혐의로 수배 중인 어머니에게 보내는 메시지인가요?" "현재 사기 혐의 수배 중인 어머니의 도주를 돕고 계신 건 아닌가요?" 홍대의 얼굴표정에 무언가 변화가 있다. 화가 난 홍대. 도발하던 기자의 눈을 찌른다. 이 장면은 뜨거운 감자가 돼서 홍대의 커리어에 직격탄을 날렸다. 축구선수로서 은퇴 5분 전인 홍대. 아예 축구계는 접고 연예게 입문을 노리고 있다. 그런데 좋은 걸로 이슈가 된 것이 아니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 이때, 홍대에게 제의가 들어온다. "너 감독해라. 월드컵 나갈 건데. 홈리스 월드컵이야. 다큐 제작팀도 붙을 거다."
감동 실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실제로 2010년에 한국 홈리스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 출전한 바가 있다고 한다. 이 한 줄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두 개다. 하나는 '홈리스'를 소재로 했다는 것과 스포츠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이다.
영화는 홈리스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영화 표면적으로 주인공 롤을 맡은 배우는 홍대 역의 박서준과 소민 역의 이지은 배우다. 이 둘은 영화에서 밑그림이 된다. 무슨 말이냐. 홍대는 홈리스를 하나의 축으로 모으는 역할이다. 또 이 사람들을 다독여서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야 하는 임무가 있다(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홍대 내적인 성장은 보너스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홍대가 영화의 핵심에 겹쳐지는 순간이 있다. 이는 영화 내내 제시되는 홈리스들의 입장과 홍대가 처해있는 상황이 병치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연출은 영화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영화가 다루는 핵심 소재는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홈리스와 같은 입장에 놓이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들을 보호해야 하는지가 영화에서 직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약간 부차적인 장면이긴 하지만 홈리스들에 대한 시선이나 '빅이슈'라는 잡지사가 등장하는 방식도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하하거나 희화하는 걸 지양하지만 소재를 다루는 것에 거침없었던 감독의 수가 돋보인다.
또 이 작품은 스포츠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갖고 있다. 2부에 축구 경기장이 등장한다. 이 축구장 시퀀스의 완성도를 떠나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흥미롭게 볼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스포츠영화로서의 장르성을 챙겼던 것이 어느 지점에선 강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중반부까지 홈리스들을 가르치는 홍대의 모습이 그렇다.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 갑자기 짠하고 잘하지 않는다. 누구는 잘하고 누구는 못하는 게 당연하다. 영화에서 홈리스들 간의 사연이 다양한 만큼 이 피지컬적인 재능도 각자 다르게 묘사되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홈리스들의 연령대를 생각해 보면 사실 당연한 건데 섬세한 연출방식으로 리얼리티를 더했다.
몇 명 퇴장당한 축구경기처럼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착한 영화'다. 홈리스에 대해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좋은 평을 받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와 상응하는 이 영화의 단점을 뽑자면 그 나머지다. 사실 영화에서 감정적으로 뭉클한 장면이 있다. 신인류의 OST가 들어가는 장면은 역시 감독의 감각이 젊다는 걸 체감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뻔했던 경기장 시퀀스에서 이 노래가 삽입되는 장면 하나만큼은 식상하지 않았다. 또 웃긴 장면도 있다. 홈리스들의 서사를 쌓아가는 과정이 약간 전형적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양현민 배우의 퍼포먼스는 인상 깊었다.
그런데 이 외의 지점에서 마이너스가 너무 많았다. 우선 첫 번째. 영화는 착하기만 하다. 이를 구체적으로 풀어서 써보자면 영화가 살짝 노골적이라고 느껴졌다는 점이다. 우선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생각난다. 션 베이커의 작품 세계가 그렇지만 영화에서 해결책이 없었다는 점은 우리 각자의 몫으로 설루션을 돌렸다는 점에서 그 작품의 강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 중에 깊이 있는 통찰을 다룬 작품은 많다. 후반부에 약간 김새긴 했지만 시스템이 만든 비극 자체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훌륭하다(물론 영화가 제시한 해결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드림>은 중반부 즈음에 어떤 인물이 누구에게 코미디 대사와 함께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이 인물이 축구대회까지 가는 길에 굉장히 중요한데 이 장면에서 갑자기 방점이 쾅 찍히고 존재감이 옅어지는 건 차치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사들이 너무 대놓고 들어갔다. 이병헌 감독의 진심이 느껴지긴 했다. 심지어 이 장면에 들어간 코미디 대사들 웃기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대사 하나가 너무 템포에서 임팩트가 커서 이 장면만 기억나는 느낌? 조연 홈리스들의 도전서사가 이 장면이 내포하는 메시지로 귀결이 나는 거면 모르겠다. 어차피 이 장면을 보여주려고 후반부가 있는 거면 이다음 시퀀스들이 굳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
또 인물을 설정하는 방식에서도 꼼꼼하지 못한 것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우선 홍대 쪽 묘사다. 홍대 역을 맡은 박서준 배우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뭔가 과한 초중반부를 이끌 만큼 본인이 갖는 스타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특히 초반부에 홍대가 사고를 치고 인터넷 밈으로서 주인공이 퍼지는 영상이 있다. 이런 건 배우가 박서준이고 그의 역할에 이입되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영상이다. 그러나 이 인물이 약간 과시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쌍쌍바가 등장하는 시퀀스다. 음.. 모르겠다. 박서준과 이병헌이라는 이름을 보고 극장을 가는 사람 중 이런 방식의 연출을 원했던 분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또 이 홍대는 중후반부 지점을 지나 터닝포인트를 맞이한다. 이 시퀀스는 좀 나사가 빠진 듯하다. 소민이의 직업적 역량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건가 싶다. 뭐 비단 홍대라는 캐릭터 자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도 이야기 몰입에 지장을 준다. 바로 홍대 어머니 캐릭터다. 이 홍대 어머니 캐릭터가 이야기에 있어서 기본 바탕이 된다. 이 인물의 어떤 행동들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의 문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으니 차치하기로 한다. 이 사람은 이야기의 핵심과도 영 닿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심지어 어떤 장면에선 몰입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홍대가 갖고 있는 내적인 문제는 초반부에 나온다. 홍대가 갖고 있는 이 문제를 영화는 후반부까지 계속 이어지게 장면을 구성했다. 이 부분에 집중하고 보는 게 부담스럽지 않고 깔끔한데 어머니의 이야기까지 들어오니 좀 난잡해진다. 하려고 했던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또 홍대와 홍대 어머니의 연출뿐만 아니라 홈리스와 소민 캐릭터도 영 아쉽게 느껴진다. 우선 소민 캐릭터다. 이 캐릭터는 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많다. 소민이가 하는 대사도 약간 예전 영화들 같다. “약 먹을 시간 됐어”같은 대사들 뭔가 아쉽다. 대사를 떠나서도 인물의 동선이나 움직임들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는 것은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소민 캐릭터에게 별로 마음에 드는 점이 없다. 그나마 이지은 배우의 미모 빼면 굉장히 전형적인 캐릭터와 평범한 대사들만 반복한다. 안 그래도 상투적인 화법을 더 진부하게 만든 것이다. 글쓴이가 이지은 배우의 팬임에도 불구하고 소민이라는 인물이 대사 할 때마다 눈을 감게 됐던 것도 여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지은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점에서 오는 단점이 이 영화에서 느껴졌다. 가수와 배우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카메라 드는 폼이 좀 이질감이 들었다. <브로커>에서 가수 커리어 내내 한 적 없는 쌍욕을 하는데 어색하지 않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홈리스 쪽 캐릭터에서도 아쉬운 지점이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전부 아쉽다. 그중에서도 장점과 단점을 뽑아보자면 양현민/고창석 배우는 이 작품의 윤활유가 된다. 소수자 다음으로 중요한 영화의 소재는 가족이다. 고창석 배우는 가족영화로서 가져야 할 뭉클함을 치트키라도 쓴 것 마냥 다 만든다. 또 양현민 배우는 비주얼과 말투부터 코미디적 요소를 잘 살린다. 글쓴이가 가장 많이 웃었던 부분이 이 양현민 배우 캐릭터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홈리스 서사에서 아쉽게 느껴졌던 건 이현우 배우가 맡은 인선 역이다. <영웅>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비슷한 문장을 썼었던 것 같다. 이 배우가 처음 등장할 때 '아마 이럴 거야' 생각했다. 그리고 정확히 다 맞아떨어져 갔다. 예상과 단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연기를 보여준다. 이 배우는 커리어에서 확실한 전환점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에서 인선 역의 입지처럼 이 배우의 등장만으로도 모든 줄거리가 예상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거 실화냐
그렇게 아쉬운 인물연출은 영화의 줄거리와도 이어진다. 1부 홈리스들을 모으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불균일함은 뭐 어쩔 수 없다고 치자. 2부는 약간 당황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다. 일단 실제 홈리스 월드컵의 규칙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규칙의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 있어 각색이라는 부분은 연출가의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은 영화 감상에 있어 내적인 모순을 스스로 보여주는 듯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홍대 일행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자 어떤 사람들과 대화하는 신이 있다. 이 사람들은 영화 후반부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이야기를 쉽게 푸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인물들에게 더 쉬운 접근법을 만들어준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사람들은 영화에서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동한다. 없어도 되는 존재를 떠나 팀의 조직력과 완성도의 측면에서도 강한 유효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최고 단점이다.
또 이 축구경기를 중계하는 중계진들은 영화의 리얼리티성을 떨어트린다는 악영향을 끼친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실화를 찾아보니 해설자들이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들을 실제로 했는지 안 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 상황이 있기 전까지 영화에서 한국의 홈리스에게 감정이입할 요소들을 넣었어야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는 영화 전체적으로 '굳이 말 안 해도 알 걸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습관'의 연장선상같이 느껴져서 이병헌 감독의 단순한 실수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홈리스들의 모습. 강박적으로 느껴지는 균형감각. 현실적인 어려움. 이런 큼지막한 덩어리들은 대놓고 때려 박았다. 그걸 잘 이어 붙이면 뭐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은근슬쩍 딱 갖다 놓아서 영화가 끊기는 듯한 느낌은 아쉽다. 이렇게 예상이 가는 장면들의 연속이라는 점은 영화 후반부에 있어 '언제 끝나나' 싶게 생각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좋은 영화는 맞지만 재밌지는 않았어
사실 이 <드림>을 기대했다. 글쓴이는 그냥 웃긴 영화, 재밌는 영화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품고 있는 좋은 시선에 대한 강박이 템포를 끊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하나의 이야기 같지 않게 들린다는 것. 상황을 전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나 이병헌이라서 이런 거 잘한다 다들 알지??' 같은 것들은 감독의 전작 <극한직업>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게 한다. 분명히 재기 발랄한 무언가가 있었는데 말이다. 박서준의 열연, 이지은의 사랑스러움도 이병헌이라는 감독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단점을 받쳐주지는 못했다. 좋은 의도로 착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완성도에 생긴 구멍을 메워주지는 않는데 말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박서준과 이지은 배우, 하현상과 신인류의 팬이라면 볼만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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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새벽의 모든’에서 새로운 경계선을 발견하다! 미야케 쇼 감독님의 관람 포인트
(기자회견에서의 미야케 쇼 감독)
5월 1일, 25주년을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가 드디어 개막하였습니다! 개막작은 미야케 쇼 감독의 '새벽의 모든'으로 선정됐는데요. 올해의 슬로건인 '우리는 는 선을 넘지(Beyond the Frame)'와 걸맞는 영화였습니다. 각자의 무수한 삶과 시간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까지 경계선을 넘어 모두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주연과 조연 그리고 엑스트라까지 각 인물의 하나하나가 궁금하고, 스며듦이 매끈한 영화였습니다.
'새벽의 모든'은 동명 소설을 원작 각색한 영화이며, 공황장애가 있는 야마조에와 주기적으로 PMS를 겪는 후지사와가 작은 연구소에서 만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딪히며 각자의 결핍과 공백을 발견하고, 서로의 틈을 보게 됩니다. 그 틈에서 맞지 않았던 '어떤 사람'에서 어느새 곁을 내어주는 '동료'이자 '친구'인 관계가 확장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적 장애'에 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고 갖고 있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다시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가 갖고 있던 틀을 인지하고 그 선을 넘게 하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좋았던 부분은 야마조에와 후지사와가 단순히 '남녀관계'로 뭉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주변인으로 존재합니다. (마치 지구 옆에 있는 위성처럼요!) 또 작품에서 이웃, 친구, 동료, 시설의 보호자와 의사 등 '혈연'과 이어지지 않는 다양한 보호자의 형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야마조에와 후지사와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사회적) 보통적으로 '심리적 장애'와 관련해 간섭하고 지지하는 역할은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보호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림으로 바로 연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마조에는 가족과의 왕래가 뜸하고, 후지사와는 어머니가 신체적 장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마조에의 주변 동료들이 야마조에의 안부를 늘 묻고, 후지사와 어머니는 늘 후지사와를 위한 식제품들을 마련해 후지사와에게 보냅니다. '보호자-피보호자'라고 경계를 분명하게 나누는 일방적 관계가 아닌 경계선을 넘나드는 상호협력적 관계로 그려집니다. 야마조에는 후지사와의 PMS에 도울 수 있다며 설득하기도 합니다. 이에 서로의 느슨하지만 약간의 짐을 덜 수 있는 연대를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돌봄' 시스템에 관해 거대하게 혹은 사소하게 들여다보고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혈연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닌 대안적 관계들과 느슨하더라도 덜컥거리더라도 같이 짐을 나눠드는 느슨한 돌봄과 보호와 연대.
미야케 쇼 감독의 1일 기자회견 질의응답 시간에 간략히 주고 받은 질문과 답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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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원작이 있는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그 작품을 영화화하게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하다.
A) 원작 소설을 보면서 인물들의 행동에 큰 인사을 받았다. 자신의 상황에 그저 무력하게만 있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과의 질문과 답을 찾아냅니다. 이런 끈질긴 자문자답의 방식과 어떻게든 행동의 실천으로 이뤄지는 모습들이 우리가 갖고 있던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관해서 다른 시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든다. 더불어 현대의 질병이 불리는 것들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그 양상을 여러 시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마음처럼 일을 계속할 수 없으면서, 생각처럼 할 수 없는 것들에 그들을 조명하고 싶었다.
Q2> 작품에서 달력을 통해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런 '시간의 흐름'의 배치 관한 의도가 궁금하다.
A) 공황장애나 PMS 같은 병은 간단히 해결하기가 어려우며 장기간 내 삶과 같이 지내야 하는 고통이다. 이런 질병은 오랜 기간의 치료 기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매우 놀랬었다. 자신의 장애와 삶을 쭉 이어가야 하는 이들의 시간을 영화를 통해 같이 느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주'라는 시간을 가져와 거대한 흐름을 표현해보았다.
Q3>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불안이 찾아오면 강박적으로 하는 일로써 '잡초 뽑기'가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왜 '걸레질' 같은 무언가를 닦는 행동으로 교체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A) 책을 읽을 때 '잡초 뽑기'란 행동은 매우 유니크했다. 그러나 글로써 '잡초 뽑기'를 마주할 때 다가온 큰 인상이 영상에서는 잘 발휘되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래서 대체할 수 있는 행동으로 '움직임'이 있고 '소리'가 있는 행동을 찾아봤다. 그렇게 찾던 중에 '무언가를 열중하며 닦는 모습'을 가져와 표현해봤다.
Q4>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무엇인지 궁금하며, 캐릭터 빌딩과 캐스팅과 관련하여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A) 이번에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에 다양하고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이들을 단순히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닌 개성이 실린 인물로 만들고 싶었다. 가령 같은 '의사'라 해도 특유의 성격이 드러나도록 했다. 어떤 의사는 덤덤하고, 어떤 의사는 발랄해 보인다. 이렇게 개성이 잘 표현력에 주목하여 캐스팅하였다. 더불어 엑스트라에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 봤다. 그러니 등장이 많든 적든 다채로운 등장인물들에 주목해주시면 좋겠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고, 두 번, 세 번, 많이 또 봐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장애와 같은 것이 없는 사람을 지칭할 때, '일반(보통) 사람'이라는 표현이 많은데 나는 '일반(보통)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공황장애가 있거나 PMS를 겪고 있다거나, 그저 다른 특징으로서 있는 것일 뿐이다. 이것의 유무가 보통을 정의하고 특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Q5> 공황장애와 같은 불안장애는 각 문화별로 다르게 느껴질 것 같은데, 영화를 선보이기 위한 작업으로서 이 다양성에 관한 어떤 리서치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A) 일단, 리서치는 원작 소설 작가가 공황장애가 당사자인 점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이후 인터넷과 책을 찾아봤고 공황장애 당사자들과 일본에 있는 전문의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양성'에 관해 알아갈 수 있었다.
또 영화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시 여긴 지점 중 하나는 우리 영화에서 질병이 등장하고, 이것을 하나로 지정해버리는 것을 경계했다. 무수한 사례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가 일반화할 수 없다. 그리고 '공황장애'를 연기하는 순간들도 주의를 많이 기울렸다. 늘 현장에 의사가 대기된 상태에서 발작 연기를 촬영했고, 장면이 끝나면 배우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고 괜찮을 때에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배우에게 혼자 집에 있을 때는 발작 연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표현의 오류나 예측불가능함을 재현하는 과정을 경계하고 주의있게 임하고 싶었다.
Q6> 전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이번 개막작인 '새벽의 모든'의 공통점이 있다. 폐업 직전의 복식장과 AI 기술이 발전된 지금, 아날로그 연구소라는 공간이다. 한 마디로 두 공간은 소멸해가는 공간이라 느꼈는데, 감독은 이런 공간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했다. '소멸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A)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먼저 '영화관'이란 공간이 먼저 떠오르면서 가장 걱정되기도 하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영화관 수가 반이 줄어들었다. 그에반해 스크린 수는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펜데믹 영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우려가 많이 된다. 그래도 낙관적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화관'은 절대로 없어지진 않을 거라고 믿는다. 영화를 사랑하는, 지키길 노력하는, 이용하는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있는 이상 사라지지 않지 않을까. 이런 마음과 믿음을 반영하게 된 것 같다.
Q7> 한국 배우 중에 같이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있는지 궁금하다.
A) 개인적으로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배우 중 참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있다. 바로, 심은경 배우이다. 존경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몇 분이 더 계시지만, 부끄러우니 그만두겠다.
Q8> 기자분들에게 마지막 한 마디.
A) 많은 분들이 모여 주셔서 매우 감사하다. 질문을 주시면 우리는 이야기하고, (기자분들은) 일로써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이 과정도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온다. 같이하는 시간들이 너무너무 좋았다. 남은 기간 동안에도 관객들과 함께 영화제를 즐기고 싶다.
이렇게 간략하게 미야케 쇼 감독의 '새벽의 모든'이란 작품에 관한 계기와 말하고 싶던 메세지를 살짝 들어 볼 수 있었습니다. '다양성'을 중점으로 인무들에 많은 공을 들인 영화라 느껴졌습니다. 그런 만큼 저는 여러 인물들이 말 그대로 눈에 밟히곤 했습니다. 또, 미야케 쇼 감독은 개막식에서 영화는 관객이 생각하는 것이니 각자의 생각과 이해를 마음껏 풀어주면 좋겠다고 말은 전했습니다. 경계선을 넘어 다양함을 마주하고, 분리되는 것이 아닌 이어짐으로, 분별이 아닌 스펙트럼의 속으로, 같이 존재함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의 삶 혹은 남의 삶에서 힘듦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어떻게 봐줘야 할지 고민된다면 '새벽의 모든' 영화를 관람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저는 어쩌다 보니 영화를 두 번을 보게 되었는데요. 두 번째로 감상하였을 때,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재밌었어요. 감독님 말대로 두 번, 세 번, 많이 볼수록 좋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상영 정보>
05.01. 19:30 개막식 + 개막작: 새벽의 모든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05.02. 13:30 새벽의 모든 + 전주대담
(CGV 전주고사관 3관)
05.05. 10:30 새벽의 모든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영화제 기간>
5월 1일~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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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게이 베어 커뮤니티에 강림한 뚱뚱한 천사 이야기
아기 천사(Cherub)
데빈 시어스/Canada/2024/73min/DCP/Color/Fiction/12세 이상 관람가/Asian Premiere
시놉시스
하비에 대한 인물 탐구 보고서. 이성애자이자 비만 남성인 그는 ‘덩치 큰 남자들과 그들을 흠모하는 사람들'을 위한 게이 잡지에 자신의 사진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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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이하게 사랑스러운 영화는 시선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탐구이자, 게이 베어 커뮤니티에 강림한 천사에 관한 이야기다. 이성애자 남성인 하비는 뚱뚱하다. 그것도 많이. 그래서일까. 하비는 누군가에게 욕망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지 않는다. 하비는 늘 남들이 다른 누군가를 은밀한 시선으로 욕망하는 걸 지켜보는 쪽이다. 결핍 때문일까. 보는 행위, 보여지는 행위를 매개로 한 욕망의 순환이야말로 하비가 갈망하는 것이다. 하비는 안경을 쓴다. 그는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기를 즐긴다. 그의 직업은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하비의 일상은 온통 보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하비를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하비를 외롭게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비는 혼자 들른 성인물 가게에서 〈커룹 Cherub〉*이란 잡지를 ‘본다’. 그러고는 충격에 빠진다. 잡지는 온통 자신과 같은 체형의 남자의 사진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벗은 몸이었고, 표정은 당신들의 ‘시선을 즐긴다’는 듯이 도발적이었다. 하비의 숨이 가빠진다. 수치심과 흥분이 중첩된다. 하비는 〈커룹〉을 몰래 가방에 넣고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온다. 하비는 집에서 다시 〈커룹〉을 펼쳐‘본다’. 세 단계로 밝기 조절이 가능한 스탠드 불빛을 가장 희미하게 맞춰놓고서. 하비는 이 기이한 잡지가 여전히 조금은 수치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잡지에서 자신에게도 남들의 시선이 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이는 누구보다 시선의 감각에 민감한 하비가 생애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가능성이었다.
영화에는 시각과 욕망의 얽힘에 관한 무수히 많은 이미지가 있다. 하비가 누군가를 응시하고 관음하는 장면이 많다. 〈커룹〉은 마침내 하비가 그 시선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계기가 되어준다. 꺼진 TV 화면과 거울에 하비의 몸이 비친다. 그전에는 감추고 싶기만 했던 몸이 시선의 굴절을 거치자 새롭게 보인다. 하비의 몸이 누군가 관음할 만한, 욕망할 만한 몸이 된다. 심지어 얼굴 모를 익명의 대중에게까지 말이다. 이름 모를 추종자가 보낸 하비 몸의 형상을 본뜬 화병花甁을 보고 마침내 웃음 짓는 하비는 이렇게 베어 커뮤니티의 새로운 스타로 하림下臨한다. 수치심과 자기혐오의 렌즈로 인해 늘 시선을 매개한 욕망 경제의 바깥에 자리할 수밖에 없었던 하비의 몸이 지금껏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욕망 경제의 한가운데로 진입하는 것이다.
한편, 영화 말미에는 하비가 자신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어느 베어 남성을 따라가는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은 화장실에 들어가고, 하비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성애 욕망을 넘어 새로운 욕망의 영토에 ‘발을 내디딘다’(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공중 화장실이 게이들의 성적 하위문화에서 갖는 상징성을 고려했을 때, 이 장면은 하비가 단순히 베어 커뮤니티를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그 하위문화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즉, 그의 욕망을 퀴어적으로 새로이 정립할 가능성이 샘솟는다. 이 영화가 시선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탐구이자 게이 베어 커뮤니티에 강림한 천사에 관한 이야기인 이유다.
대사 없이 전개되는 이 조용한 영화는 관객이 보는 행위라는 시각적 감각에 몰입하게끔 한다. 하비가 베어 커뮤니티에서 욕망의 가시성을 확보하는 과정은 몇 번의 축일祝日과 함께 전개되는데, 이는 영화 마지막의 환하고 성스러운 이미지와 결합해 그를 온전한 ‘천사’로 승격시킨다. 이 신성함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하비의 내적 환희이자 소수자 하위문화와 커뮤니티가 어떤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거룩한, 그래서 종교적인 감정을 촉발한다.
감독은 GV에서 자신이 베어 커뮤니티의 자장 안에서 성장했음을 밝혔다. 나아가 정체성과 외모, 인터넷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에 커뮤니티 없는 사람이 갖는 외로움과 고독을 하비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해보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이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정치적으로 첨예하고 또한 동시에 다정한 영화는 감독의 의도를 너끈히 초과해 퀴어 욕망과 하위문화, 이미지에 관한 기억할 만한 영화가 되었다. 석사 졸업 작품으로 초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가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진출한 것마저 ‘영화’같은 작품이다.
*〈더 팻 에인절스 타임스 The Fat Angel Times〉란 잡지에서 모티프를 얻은 잡지라고 한다.
상영 스케줄
2025.05.02 CGV 전주고사 7관 18:00(상영코드: 248)
2025.05.05 CGV 전주고사 7관 18:00(상영코드: 544)
2025.05.08 CGV 전주고사 7관 18:00(상영코드: 825)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05.09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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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자식이라고 생각했소?” / 사도 명대사 모음
#사도
-bgm
AshamaluevMusic - Rain-contact
93mar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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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위도우를 보고 아쉬움이 더 남는 이유 (블랙위도우 스포 리뷰, 쿠키해석)
#블랙위도우 #나타샤 #호크아이
2021. 07. 10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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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영상 타임라인*
00:00 마블다운 영화
01:15 나타샤의 마지막
03:47 호크아이가 만약..?
04:33 엔딩크레딧
05:33 걱정되는 세대교체
06:36 아쉬움과 더욱 여운이 남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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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타이타닉 : 25주년> 예고편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감동 [타이타닉: 25주년] 2월 컴백! 개봉 25주년 기념 4K 3D HDR 리마스터링 오직 극장에서 경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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