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1-10 17:10:26
그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남주
허광환전엔 금성무였고, 티모시 샬라메 전엔 디카프리오였다 ⭐️ 나이가 들어도 멋있는 그시절 남주들. 제방에는 아직도 타락천사 금성무 포스터가 붙어있답니다. 마음한켠에 자리한 남주들이 있으신가요? 댓글로 공유해주세요. 눈호강 하게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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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돌리지 말고 이 고통을 응시하라
쾌락은 짧지만, 임신중지로 인한 고통의 시간은 길다. 쾌락은 둘 사이의 일이지만, 임신중지는 여성의 몫이다. 임신중지가 법으로 금지된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책 《사건L’événement》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레벤느망〉은, 대학 졸업 시험을 앞둔 대학생 ‘안’이 겪는 임신중지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담아낸 영화다.
임신중지를 선택한 안이 겪는 철저한 고립을 좇는 이 영화에서 가장 화가 났던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도움을 청한 동료 남학생이 ‘임신했으니 안전하다’며 관계를 요구하는 장면이다(원작에서는 남자가 아니 에르노의 ‘도덕성을 알아보려고’ 그런 제안을 했다고 핑계를 대는 나온다). 둘째는 임신중지를 도울 것처럼 굴었던 의사가 사실은 임신중지에 반하는 자신의 신념에 기반해 거짓으로 유산방지제를 처방하는 장면이었다. 임신중지를 기대하고 허벅지에 주사를 찔러 넣었던 안이 느꼈을 박탈감과 분노에 함께 몸을 떨었다. 이 두 장면은 편견과 ‘불법’이 서로를 강화하며 증폭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이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개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부당함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임신중지의 순간 안이 느끼는 고통을 비추는 영화의 방식이다. 안은 뜨개질바늘을 사용해 혼자서 한 번, ‘불법’ 시술소에서 두 번 임신중지를 시도한다. 영화는 이 고통의 순간을 비껴가지 않는다. 안의 거친 호흡과 고통스러운 신음, 날카로운 시술 도구가 안의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럼으로써 ‘불법’이라는 추상적 규범이 초래하는 위험과 이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수치심을 고발한다. 얼굴이 찌푸려지고 몸이 움츠러들더라도 안의 고통을 마주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우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응시함으로써 그녀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으로 전이되는 순간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안의 고통을 타자화하지 않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방식이다. 안의 고통을 수동적 응시의 객체로 놔두지 않고 관객을 그 고통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써 〈레벤느망〉의 적나라한 임신중지 시술 장면을 독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2019년 낙태죄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나왔으나 여전히 대체입법이 되지 않고 있다. 국가의 무능과 낙태 반대론자의 집요함이 합쳐진 결과다. 누군가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데 사회적 합의가 있다면 어떻게든 사회적 대책이 도출된다. 코로나 시국의 자영업자가 좋은 예다. 때문에 3년이 다 되어가는 낙태죄 입법 공백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아직 임신중지로 인한 여성의 고통이 우리 모두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 이런 의미에서 〈레벤느망〉의 개봉은 시의적절하다. 〈레벤느망〉이 보여주고 느끼게 해준 ‘고통으로 매개된 정동의 공동체’가 임신중지를 “여자만 걸리는 병”,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로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길 바란다.
*원작에는 아래의 구절이 나온다. 이를 통해 영화가 아니 에르노가 품은 문제의식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시각화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소설들이 임신 중절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 일이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지는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 실용적인 정보들을 찾을 수 있길 바랐건만 기사들은 ‘불법 중절 시술’의 뒷얘기들만 언급했고, 그런 사실들에는 관심 없었다.”(아니 에르노, 《사건》,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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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웬디 (Wendy, 2020)
개봉일 : 2021.06.30 (한국 기준)
감독 : 벤 제틀린
출연 : 데빈 프랑스, 야수아 막, 게이지 나퀸, 개빈 나퀸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웬디>는 피터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피터팬이 아닌 웬디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네버랜드 모험기를 담은 영화다. 등장인물들과 아이들의 세상 네버랜드라는 공간,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라는 설정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원작 동화, 2003년작 영화 <피터팬>과 <웬디>는 닮은 점보다 서로 다른 점이 더 많다. 재해석한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원작 그대로의 분위기나 동심과 환상의 나라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과 환상적인 모험을 바라는 소녀 웬디와 오빠 더글라스, 제임스. 그리고 해적이 될 거라며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순수한 소년들은 깊은 밤, 유령 기차에 올라탄다. 작은 식당 안에서만 지내던 웬디와 더글라스, 제임스에게 기차는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다. 아이들은 피터팬과 함께 세상의 끝에 위치한 네버랜드에 도착하는데, 여기까진 정말 환상적이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저 깊은 곳에 눌러뒀던 동심이 기차 기적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듯했다.
근데, <웬디>에서 보여주는 아이들의 모험은 예상외로 현실적이고 험난하다. 이전에 봤던 <피터팬>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무기를 들고 뛰어다녀도 그다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조금 다르다. 네버랜드가 어째 환상의 나라라기보다는 길들지 않은 정글처럼 느껴졌고 소년들은 어딘가 어른들의 손길이 필요한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피터팬은 그런 아이들을 네버랜드로 이끄는데.. 이 모험이 환상적이고 특별하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아이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웬디의 엄마처럼 로데오 타기에 대한 꿈을 버리고 아이들에게 모든걸 걸게 되는, 결국은 꿈을 잃는다는 의미인 걸까. 유난히 작은 그림자를 가진 소년 피터팬과 모험을 꿈꾸는 소녀 웬디의 또 다른 모험이 담긴 이 영화가 반갑고도 아쉽게 느껴진다.
웬디 시놉시스
기찻길 옆,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는 내면에 차오르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매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나타나고 ‘웬디’와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 ‘제임스’를 이끌고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대걸레와 빗자루 따윈 들지 않겠어!
기찻길 옆, 작은 식당에서 엄마를 도우며 새로운 모험을 꿈꾸는 소녀 웬디와 천방지축 쌍둥이 오빠 더글라스와 제임스는 깊은 밤, 소문으로만 듣던 유령 기차를 만나게 된다. 창문을 가득 비추는 붉은빛과 알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에 웬디와 더글라스, 제임스는 급하게 신발을 신고 기차를 따라잡는다. 유령 기차 위엔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 누워있다.
눈에 빛을 품은 아이들은 그곳을 벗어난다.
아이들은 세상의 끝, 네버랜드로 떠난다. 네버랜드엔 피터팬과 그를 따르는 몇 아이들, 그리고 실종된 친구 토마스가 있었다. 작은 식당 속 세상에 만족하지 않고 해적이 되어 세상을 누비겠다던 꼬마는 웬디보다 먼저 기차에 올라타 네버랜드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었다.
네버랜드는 어른들의 마을과 아이들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원작에서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섬으로 표현되는데 <웬디>의 네버랜드는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화산과 거친 정글을 품고 있다. 사실 환상의 섬이라기보단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 가까운 모습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절대 늙지 말자’고 다짐하며 밤낮없이 아이다운 놀이와 장난을 반복한다.
아이들은 어떤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다음 끼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내일 비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오늘 밤은 어떤 자리에 누워 몸을 보호해야 할지.. 어른들이 말하는 현실적인 고민같은 건 하나도 하지 않는다. 네버랜드에서는 고민과 슬픔의 감정을 갖는 순간 빠르게 늙어버리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를 직면했을 때 머뭇거리거나 다시 생각하는 건 금지된다. 아이는 고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인 걸까.
네버랜드의 대장 피터팬은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이다. 그는 나이 드는 것을 안 좋은 것이라고, 어른들은 가까이해선 안될 존재라고 생각한다. 피터팬은 웬디가 오기 전, 가장 친한 친구를 잃고 어른이 되어버린 버조를 어른들의 마을로 내쫓고, 더글라스를 잃고 변해버린 제임스의 손을 가차 없이 자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다 밑에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를 어머니라 믿으며 오랜 시간 네버랜드를 지켜온 <웬디>속 피터팬의 모습은 동화에 나오는 요정 같다기보단 다가온 위험과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고집쟁이의 모습과 가깝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내가 생각했던 ‘피터팬’의 이미지가 깨져버리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원작과 이전에 나왔던 영화들에서 비친 피터팬은 순수하며, 거칠고 공격적이기보단 어린 고집이 있는 소년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웬디>에서 만난 피터팬은 다소 독단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피터팬의 생각을 바꿔주는 사람은 바로 웬디다. 원작에서의 웬디는 피터팬에게 의지하고, 후크에게 잡혀가 피터팬이 구해주길 기다리는 인물이었으나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 다르다. 피터팬은 아이들에게 닥친 문제를 외면하고 어른들을 피하기만 하지만 웬디는 제임스를 구하기 위해 어른들의 마을로 향하고 숨겨진 상상력을 발휘하라며 어른들의 손을 이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먼지 쌓인 바에서 어른들에게 상상 속 술을 내놓고, 춤을 추는 웬디의 모습은 어른이 된 후, 오래 묵혀두었던 상상력을 가볍게 자극한다.
상상력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 그리고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보단 옆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환상이 아닌 현실로 스며들며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게 된다. 피터팬과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늙어가는 건 상상력을 잃는 것이며 해적이 아닌 식당 주인이 되는 것이며 즐거움을 잃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웬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웬디는 늙어가는 건 잘못이 아니며 나이와 상관없이 상상력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늙어가는 건 꿈과 상상력을 잃는 게 아닌 어릴 적 꿈과 상상력을 품고, 가끔은 아픈 감정도 함께 느끼며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피터팬과 아이들, 그리고 네버랜드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다 함께 기찻길 옆 식당에서 들었던 엄마의 자장가를 부르며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고 모든 동심과 상상력을 잃는 것이 아님을, 늙어가는 것 또한 위대한 모험임을 알게 된다. 원작에서는 요정을 믿는 것으로, <웬디>에서는 잊지 않은 자장가를 통해 어른들의 사라지지 않은 동심을 표현한다.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어른이 되고, 빠른 시일 내에 오겠다고 했던 피터는 시간이 지나 ‘잠자리에 들기 전 읽는 동화 속에서 나오는 인물’로 변한다. 피터는 결국 네버랜드에 남았고, 웬디의 딸을 네버랜드로 데려간다. 네버랜드에서 몇 아이들과 피터팬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울 때, 피터팬의 그림자는 유난히 더 작게 표현되는 장면이 있다. 실제 덩치는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피터팬의 그림자가 유난히 더 작게 표현된 건 피터가 가진 ‘늙지 않겠다’는 마음이 그만큼 강력하며 피터는 결국 네버랜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 아니었을까싶다.
아픔과 상실의 슬픔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유지하고 영원히 맑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슬픔과 눈물, 망설임을 알게 되고 어른이 된다 해도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피터팬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꿈처럼 피터팬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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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매튜 본의 불완전한 자기 복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어 전쟁 도중 아내를 잃은 '올랜도 옥스퍼드 공작(랄프 파인즈)'는 아들을 보호해달라는 아내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가급적 '콘래드(리스 딕킨슨)'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그도 전 유럽을 덮친 1차 세계 대전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 올랜도는 군에 자진 입대하려는 콘래드와 갈등을 빚지만 끝내 아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그렇게 콘래드는 전쟁터로 향한다. 이에 옥스퍼드 공작은 아들을 지키고, 더 나아가 무의미한 희생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믿음직한 유모 '폴리(제마 아터턴)'와 집사 '숄라(자이먼 운수)'와 함께 자체 비밀 정보기관을 운영하며 러시아 황실을 조종하는 '라스푸틴(리스 이반스)'처럼 전쟁을 장기화하려는 흑막들을 처단할 불가피한 임무에 나선다.
<킹스맨>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자 킹스맨의 기원을 다루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여러모로 기존 시리즈와 결이 다르다. 프리퀄 작품이니 만큼 시리즈의 두 주역 에그시와 해리가 모두 등장하지 않으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20세기 초가 배경이라서 기상천외한 신무기도 없다. 전반적인 분위기도 간단명료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잔혹한 액션마저 즐길 수 있게 만들 정도로 유쾌한 활극에 가까웠던 지난 시리즈와는 사뭇 대비를 이룬다. 몇몇 포인트를 제외하면 웃음을 유도하거나 B급 감성이 느껴지는 장면이 많지 않으며, 전쟁영화 혹은 정치극처럼 느껴질 만큼 시종일관 진중하다.
대신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매튜 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수작,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와 많은 부분 닮았다. 단순히 특정 시리즈의 프리퀄 작품이라는 포지션만 같은 것이 아니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스케일이 더 크다는 점만 제외하면 영화의 콘셉트부터 핵심적인 갈등 구도와 주제에 이르기까지 판박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우선 두 작품은 모두 대체역사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퍼스트 클래스>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 엑스맨이 개입했다는 상상력에 기반한다면, <퍼스트 에이전트>는 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전개, 결말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사건마다 킹스맨이 개입해 있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각 영화의 두 주인공이 폭력에 대한 대조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대립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는 뮤턴트라는 소수자가 생존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도 활용하는 것이 옳은지를 놓고 논쟁을 펼치며, 이는 마치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아버지인 올랜도 옥스퍼드 공작과 아들인 콘래드가 갈등을 빚는다. 보어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으로 인해 모든 폭력과 전쟁을 혐오하게 된 평화주의자 아버지와 귀족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위인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자진 입대하려는 아들의 충돌이 극의 중심에 위치한 것이다. 단지 이 대립 구도가 유지된 결과 엑스맨이 창설된 것과 달리, 갈등의 종식으로 말미암아 킹스맨이 조직된 것만이 두 영화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두 영화 간의 유사점이 필연적으로 비교를 낳고, 그 결과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완성도가 저해된다는 데 있다. 우선 한 가지 사건에 집중하고 미국과 소련의 충돌이라는 명료한 세계사적 배경을 제시해 갈등 구도를 단순화하고 극의 밀도를 높일 수 있었던 <퍼스트 클래스>와 달리, <퍼스트 에이전트>는 수년간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다 보니 등장인물과 갈등 구도가 모두 많고 복잡해지면서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옥스퍼드 공작 부자의 갈등이 중심을 잡아주는 가운데, 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참전국인 영국, 독일, 러시아 각국의 정치 상황과 세 나라의 군주이자 사촌관계인 조지 6세, 빌헬름 2세, 니콜라이 2세의 관계성이 또 다른 갈등구도를 이룬다. 이에 더해 세 군주를 조종하려는 흑막의 이야기도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하며, 뒤늦게 참전하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 이야기까지 묘사해야 하다 보니 영화가 좀처럼 균형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균형의 붕괴는 영화가 실존 인물들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러시아 제국의 비선 실세였던 라스푸틴이나 실제 능력과는 별개로 미녀 스파이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마타 하리를 그저 한 차례의 액션신을 보여주기 위한 엑스트라로 소비하는 것은 영화 한 편에 담기 어려운 분량의 한계를 여실히 내보인다. 또한 사라예보 사건부터 참호전과 러시아 혁명, 치머만 전보 사건에 이르기까지 워낙 방대한 사건들을 2시간 안에 녹여내야 하다 보니 당시 국제 관계와 개별 사건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영화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남아프리카에서 펼쳐진 보어 전쟁도 오프닝부터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진입장벽이 결코 낮지 않다.
한편 옥스퍼드 공작 부자의 갈등 구도는 공감을 살만한 힘이 부족하며, 특히 이야기적 측면에서 <킹스맨> 시리즈를 <킹스맨>답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을 놓치는 듯 보인다. 실제로 옥스퍼드 공작과 콘래드의 갈등은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대립에 비해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소수자로서 생존을 위해 폭력적으로 저항할지 말 지를 둔 갈등 구조가 직설적으로 자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반면, 평화와 반전의 가치가 참전이라는 귀족의 의무와 충돌하는 것은 그만큼의 강렬함이나 절박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연출적 측면에서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다. 작중 옥스퍼드 공작이 완고한 평화주의자가 된 이유는 그의 보어 전쟁 참전 당시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짧은 회상신을 제외하면 해당 경험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충분치 않으므로 옥스퍼드 공작의 신념이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고, 부자간의 갈등도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또한 옥스퍼드 부자가 어디까지나 영국의 최상위 귀족이자 젠틀맨이라는 점은 영국적인 매력을 더함으로써 <킹스맨> 시리즈의 영국적인 매력을 감소시키는 아이러니함을 낳는다. 흔히 <킹스맨> 시리즈의 영국적 특징이라면 킹스맨의 어원, 아서 왕 전설에서 차용한 코드 네임, 007을 의식한 설정과 대사들, 무기로 활용되는 양복, 구두, 우산 같은 외적 특징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킹스맨>의 영국적 특성은 하층 계급이었던 에그시가 해리를 만나 귀족과 젠틀맨들의 세계에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그 과정 자체에 담겨 있기도 하다. 에그시가 보여준 판타지는 아직도 왕실, 귀족과 평민 같은 계급 차이가 명백한 영국이기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관객 한 명 한 명이 에그시가 되어 신분상승의 로망을 영국적인 방식으로 충족하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킹스맨> 시리즈의 주요한 매력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옥스퍼드 부자가 누구보다도 영국적인 캐릭터지만 해리와 에그시의 관계처럼 로망과 판타지까지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인물은 아니기에 그들의 서사는 상대적으로 흡입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고, 이는 <킹스맨>이 <킹스맨>답지 못한 문제를 유발한다. 그 결과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매튜 본 감독의 작품으로서는 <퍼스트 클래스>의 하위 호환 격이라는 인상을 남김과 동시에 킹스맨 시리즈로서의 정체성도 명확히 챙기지 못한다.
물론 매튜 본 감독 특유의 감각이나 <킹스맨> 시리즈의 흔적이 느껴지는 대목들 덕분에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킬링 영화로서 최소한의 본분은 다해낸다. 예를 들어 라스푸틴과의 결투씬이나 절벽 엘리베이터 시퀀스는 역동적이고 시원하지만 동시에 잔혹한 매튜 본 특유의 액션 연출과 B급 감성이 빛을 발한다. 또한 독일군과 영국군 참호 사이에서 펼쳐지는 콘래드 전투와 결투 장면은 비교적 담백하게 묘사되어 가장 현실적으로 보이며,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정치와 무관하게 선제적으로 행동한다는 킹스맨의 창립 이념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전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적인 재치로 메우기에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구멍은 예상보다 너무나도 컸고, 시리즈와 매튜 본의 이름값을 고려할 때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P(Poor 형편없는)
잘못된 방향으로의 자기 복제가 낳은, 시리즈와 감독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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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억은 그 자체로 기록이 된다
당신은 매일 40개의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마치 모국어인 것처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한다. 그러니 우선 외워야겠지. 시험공부하듯 어디에 적을 순 없고, 머리에 담아 조그맣게 읊조리는 정도만 가능하다. 종일 외우는 데에 집중할 환경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설거지나 재료 준비 등 주방 일을 하며, 당신을 감시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잠들기 전 시간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기도문을 외듯 나지막이 웅얼거리는 당신을 핀잔할, 당신과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수백 명의 질타를 견디면서.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제2차 세계대전, 나치 수용소, 그리고 페르시안으로 위장한 유대인. 세 가지 키워드로 단박에 이해할 것이다. 영화 초반부의 방점은 '페르시안'에 찍혔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상황은 나치 수용소로 잡혀간 한 유대인이 페르시아인인 척하며 독일군 장교에게 알려줄 페르시아어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정확히는 '만드는' 과정. 그는 페르시아어를 할 줄 모르지만, 순간적인 기지는 뛰어났다. 거대한 거짓에 그럴싸한 작은 사실 몇 개를 섞으면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보인다던가. 앞으로 그가 겪을 일과 딱 맞는 말이다.
자, 어떻게 매일 40개의 단어를 만들며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도망가는 건 방법이 아니다. 지뢰밭에 발을 디디거나 독일군의 총을 맞거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살고자 하는 당신이 택할 게 못된다.
다행히 영화의 주인공, 그리고 실화를 기반에 둔 소설의 주인공은 다른 방법을 찾는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갈 때다.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 불길에 그을리는 종이. 종이 위 까만 글자들이 사그라진다. 그 위로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이름과 역할이 생겼다 사라지고 다시 생기길 반복한다. 암전. 이윽고 숲처럼 보이는 탁 트인 공간. 꼭 맞는 나무의 대칭 가운데,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절뚝이는 것도 같고, 무언가 위태로운 느낌이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커다란 코트를 짊어지고서. 걸음은 투박할지언정 무너지지 않고 계속 앞을 향한다. 영화가 끝나고, 본 것을 되새기면서 깨닫겠지. 복선 그득한 장면들이었단 걸.
'페르시아어 수업' 타이틀이 뜨고,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맺힌다. 덜컹대는 트럭 안,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다만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눈빛들. 키 큰 남자가 옆 사람과 작게 조잘거린다. 남자의 무미건조한 눈빛은 옆 사람이 샌드위치가 있다는 말에 마구 반짝인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아주 유서 깊은 책을 줄 테니, 이거랑 교환하자고. 엄청난 값어치의 물건을 얻는 거라며. 눈망울이 큰 남자가 샌드위치를 내밀자 키 큰 남자는 제 몫을 제외한 남은 샌드위치를 책과 함께 넘긴다.
페르시아어로 된 책. 키 큰 남자가 샌드위치를 욱여넣으며 말한다. 훔친 거라고. 그건 유대교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
지적하자, 대수가 아니라는 듯이 남자는 마저 씹어댄다. 눈망울이 큰 남자,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질'은 뒤이어 딴지를 걸지 않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 수 없다고 받아들였을까. 훗날 자신도 율법을 무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도적질 하지 말라의 다음 37, 거짓증거 하지 말라.
트럭이 멈추고 독일군의 명령으로 안에 있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우르르 내린다. 소지품을 한 곳에 내려놔. 가방이 툭툭 바닥에 떨어지고 총살이 시작된다. 이때 우리가 아는 액션 영화 같은 드라마틱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 즉 우리 관객들이 보는 화면은 고정되었다. 정적인 프레임. 비명이나 절규가 나올 새도 없이 모든 일은 끝난다. 단 한 사람, 질을 제외하고.
그는 품에 있던 페르시아어로 된 책을 내밀며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군인들이 믿을 리 없는 소리다. 그러나 많고 많은 언어 중 페르시아어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로 그들은 혹한다. 페르시안이라니. 장교 '코흐'에게 데려가면 포상으로 통조림 열 개를 받을 것이다. 아니면, 죽이면 되고.
불신, 권위에 대한 자존심과 자긍심, 똑똑하다는 자만심. 이 모든 성질을 뭉쳐 사람으로 빚으면 코흐가 만들어지려나. 아니다. 이건 독일군 사령관도, 다른 장교들도, 다른 군인들도 충분히 될 수 있다. 다만 코흐만 가진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간절함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동생이 있는 이란으로 넘어가 식당을 열 생각으로 그득하다. 독일을 벗어날 생각을 한다는 건 그가 당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독일의 패배를 예상하는 것이다.
질이 자신을 책의 주인인 '레자'라고 거짓말했듯 코흐 또한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당에 충성하는 척 해왔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큰 틀에선 그들은 차이점이 없는 듯했다. 코흐도 결국 전쟁 통에서 살고자 했을 뿐 아닌가? 각자의 배경과 상황은 제각각이므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무언가를 어기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매일 이어지는 교습. 하루에 4개로 시작했던 수업은 갑자기 하루 40개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질은 패닉 한다. 끝이라는 생각에 도망치려 든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기에 제 발로 돌아온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며, 최선을 다한 거짓말로.
여기, 또 변수가 생긴다. 코흐가 명부 작성을 담당했던 '엘사'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질을 앉힌 것. 엘사와 달리 질의 글씨체는 명필이기도 하다. 그의 일터는 이제 주방이 아니라 명부가 펼쳐진 책상 앞이다. 질에게 주어진 건 45분의 시간, 명부, 만년필과 잉크, 그리고 독일어 40개가 적힌 종이 한 장. 질의 머릿속은 온통 단어 만들 생각뿐이긴 하나, 코흐가 시킨 일부터 하는 게 순서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며 꾹꾹 종이에 눌러 적다가 문득, 기시감을 느낀다. 눈앞에 보이는 건 글자들. 독일군의 철저한 관리 하에 수감번호로 불리는 이름들. 이름은 곧 단어다. 그 이름들을 조금만 변형하면 금세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다. 이거면 살 수 있다. 질은 들뜬 마음으로 '페르시아어'를 조합해간다.
시간이 쌓일수록 몇몇 군인들은 질이 불만스럽다. 특히 주방을 감독하는 일로 쫓겨난 엘사와 그리고 처음부터 질이 유대인이라고 확신한 '맥스'가 보기에. 위계가 엄격하기에 그들의 농간에도 질은 레자로서 목숨을 이어나간다. 교묘한 줄타기가 잘해가던 레자. 실수로 페르시아어 수업 첫날에 말했던 '빵'을 '나무'와 똑같은 단어로 발음한다. 그리고 끝난 줄만 알았던 레자는 사경을 헤매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건 코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그러니까 레자가 만들어 낸 페르시아어였다. 거짓에 거짓을 더하자 더할 나위 없는 견고한 진실로 변모한다.
코흐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레자를 변호하며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라고 명한다. 내키지 않아도 그를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던 질, 아니 이제 레자라는 명명이 우리의 눈과 귀엔 더 익숙하다. 모든 것이 엇비슷하게 뒤섞이던 순간, 전환점을 맞이한다.
독일군은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을 단체로 이송하고, 그럴 때마다 레자는 코흐의 보살핌으로 농장에 피신한다. 그는 마치 독일군의 아군 같다. 텅 빈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코흐의 맞은편 침대는 이탈리아 형제가 차지했고, 저도 모르게 레자는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형제 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레자를 지켜낸다. 그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어쨌든, 레자는 목숨 하나를 직접적으로 빚진 느낌이다.
레자는 그 죽음들을 지켜보며 가라앉는다. 진짜 페르시안이라서 죽임을 당한 사람과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죽은 남자.
이 대목이 코흐와 그의 차이를 보여준다. 레자는 자신의 생존으로 직간접적으로 죽은 이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 또한 죽음으로써 모든 잘못을 짊어지려 한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애석하게도, 코흐는 제 부하들을 총으로 위협하면서까지 죽음을 목전에 둔 그를 끄집어내어 곁에 둔다. 그에겐 아직 레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드디어,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다. 코흐가 그토록 바라던 독일에서의 탈출 시기다. 처음 수용소에 왔을 무렵 질이 꿈꿨던 일이기도 하다. 아마 잡혀온 초반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그는 홀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도망갈 기회가 생기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듯이.
수용소 내 모든 문서들은 활활 타오른다. 레자의 손으로 적힌 무수한 이름들도. 이름의 주인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글자가 사라지면 모든 증거가 사라지는 셈이다. 피해가 없어지면 가해 또한 잿더미가 된다.
코흐는 혼란스러운 수용소에서 레자를 빼낸다. 자신은 공항에 가서 테헤란으로 넘어갈 거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레자를 등진다. 레자는 뒤돌아 자신 앞에 놓인 광경을 본다. 눈으로 뒤덮인 곳. 길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만들 모든 발걸음이 곧 길이 될 테다.
당연히 코흐는 국경을 넘지 못한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벨기에인 행세를 하려 들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그의 눈동자는 마구 흔들린다. 하지만 꿋꿋하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모국어처럼 익숙하게 말한다. 그는 알 수 없었을 테지. 단순히 속은 게 아니라, 그가 말한 것들은 모조리 사람의 이름이었다고.
마지막.
질은 영국군에게서 질문을 받는다. 수용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느냐고. 수천 명이라는 답. 살아남은 다른 생존자들 또한 쉬이 답할 질문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그중에서 기억 남는 이름이 있냐고. 기대가 담기지 않은 물음이다. 살아있는 게 기적인 그들에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있다. 2,840개의 가짜 페르시아어. 2,840개의 이름들. 2,840명의 사람들이. 그는 머릿속에 빼곡한 명부를 읊는다. 천막 안이 점점 고요해지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린다. 공간은 그의 목소리와 빠르게 놀리는 펜촉 소리만 들린다.
죄책감, 고통, 미안함, 고마움, 공포, 안도. 뒤섞인 감정은 눈물이 되어 뚝 뚝 떨어진다. 그래도 그의 입은 계속 단어들을 뱉는다. 살기 위해 빌렸던 단어들에게 진실을, 원래의 이름을 돌려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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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추억은 어떻게 사람을 살게 하는가? <로봇드림>
살다보면 차마 잊히지 않는 인연들이 있다. 지나가버린 세월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각별한 사람과 그와 공유했던 시간들은 우리 뇌리에 오래도록 남는다. 추억 속에서 그들은 눈부시고, 우리는 때때로 '그'가 아니면 다시는 누리지 못할 행복을 가늠하곤 한다. 우리는 그때와 같은 경험을 다시는 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그게 우리를 아쉽게 한다.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우리는 어쨌거나 새 인연을 만나 새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나가 버린 추억은 무가치한 것인가? 그저 흘러가버린 인연은 우리 안에 무엇으로 남는가? 영화 <로봇 드림>은 우리가 흘려 보낸 수많은 인연과 삶의 단편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개'는 번화하지만 외로운 대도시에 사는 시민 중 하나다. 그는 외롭다. 그 많은 시민들 중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외로우신가요?'
어느날 텔레비전 광고는 그에게 묻는다. 그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가 반려 로봇을 들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연인은 조각한 피그말리온처럼 '개'는 반려 로봇을 조립한다. 로봇은 완벽하다. 그는 가장 순수한 눈으로 '개'를 바라보고, '개'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보다 더 절묘한 파트너는 없을 것만 같고, 둘에게 찾아온 찰나같은 여름은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나 운명은 잔혹하고, 둘의 행복은 지속되지 못한다. 바다에서 논 것이 무언가 잘못된 걸까? 즐거운 물놀이 후 로봇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개'는 고철로 된 친구를 해변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로봇을 되찾아오겠노라 다짐하지만, 여름철이 지난 해변은 입구를 걸어 잠갔고, '개'와 로봇은 단절되고 만다. 나중에 다시 여름이 오고, 해변이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로봇은 자취를 감춘 후다. 영원할 것만 같던 우정이 한순간에 스러지고 만 것이다. 이별은 예고없이 들이닥친다. 둘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운명이란 으레 그런 것이므로.
이별은 괴롭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도록 둘은 끝없이 서로를 그린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자꾸만 어딘가 삐걱거리는 것만 같다. 그럴수록 서로가 보고 싶다. 재회의 기쁨을 상상할수록, 오늘의 고독은 선명해진다. 다시는 그런 인연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도 싹튼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 야속하게도 그렇다.
결국 새로운 인연은 오고 만다. 로봇은 그저 고철로 마감될 수 있었던 그의 삶을 구원한 새로운 가족을 만났고, 개는 새로운 반려 로봇을 들인다. 그러는 사이 둘은 참 많이 변했다. 이별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삶도 저마다의 길을 따라 나아가버린 탓이다. 다시 봄이 왔고, 로봇은 스쳐지나가는 옛 인연을 알아보지만, 그의 손을 잡는 대신 그를 떠나 보낸다. 그와 함께 들었던 노래 한 곡과, 그 언젠가 나누었던 진실한 감정을 되새기면서.
My thoughts are with you
Holding hands with your heart to see you
Only blue talk and love
Remember, how we knew love was here to stay
Now December found the love that we shared in September
Only blue talk and love
Remember, the true love we share today
난 늘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과 한 마음이 되어서.
진한 농담과 사랑 뿐이었지만
기억하세요, 사랑이 지속될 거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제 12월이 되었고 저는 우리가 9월에 나누었던 사랑을 찾았어요.
진한 농담과 사랑 뿐이었지만
기억하세요, 오늘 우리가 나누는 진정한 사랑을.
지나간 추억은 오즈의 마법과도 같다. 그것은 찬란하지만, 우리가 추억하는 방식 그대로 재현되지는 못한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의 속성이 본디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나가버린 세월과 시간들은 무가치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그 향그러운 추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보다 성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중 로봇과 개가 그랬듯, 우리는 그 찰나 같은 기쁨으로 말미암아 살아갔을 것이다. 그 기쁨을 알기에 우리는 그것을 나눌 줄도 알게 되었을테고, 그 지나간 인연과 함께 하며 저질렀던 몇몇 실수들은 우리를 더욱 조심스러워지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을 때, 그를 더 소중히 여길 줄도 알게 되었으리라. 그러니, 이미 지나가버린 옛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유의미하다. 로봇이 개를 더는 붙잡지 않고 그를 그저 떠나보낸 것은 그가 이러한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이 이야기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경험과 정서를 생생하게 담음으로써 보편성을 가진다. '개'를 통해 드러나는 ;지독한 고독에 시달리며 나의 완벽한 이해자를 그리는 개인'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또 한편으로, 이것은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언젠가 매스컴을 타던 강아지 로봇 '아이보'를 떠올렸다. 부품이 절판되어 다시는 회생시킬 수 없어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는 그 반려 로봇들 말이다. 나는 또한 로봇과 개의 관계를 통해 우리 세계의 개와 인간의 모습을 연상했다.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개가 근원적인 고독을 이기지 못해 반려 로봇을 들인다는 설정은, 우리 인간이 개에게서 애정과 위안을 받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작중 반려 로봇들이 그 사회에서 받는 취급 역시 우리 사회의 '반려 동물'이 처한 현실과 닮아 보였다. 결코 우리 사회에 주류가 되지 못하는 소수자들의 삶도.
작중 '개'는 250불짜리 연 대신 70퍼센트 할인되는 연을 사야하며, 싸구려 맥앤치즈로 끼니를 떼우고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의 주머니 사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그는 또한 친구를 사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보통 사람들 사이에 쉽게 섞여들지 못하고 스스로 친구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의 평안과 행복은 스스로 만든 ' 갈라테이아'에 의해서만 영위된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사리 찾은 인연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단절되고 만다. 개가 아닌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로봇은 그저 고철에 불과하고, 로봇은 토끼, 악어 등의 타인에 의해 처절하게 이용당하고 만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들에서 수많은 현실적인 장벽에 의해 와해되고 무너져 내리는 성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 마이너리티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비극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둘은 서로가 아닌 인연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새 사람은 온다. 흔치는 않지만, 어떤 사람은 온전히 고립된 또 다른 개인에게 기꺼이 손 내밀기도 한다. 그것은 가장 소박하지만 견고한 연대이자, 사랑이다.
사람은 참 외롭다. 오늘날처럼 개인과 개인의 삶이 단절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사리 만난 인연이 더 소중하고, 그래서 이미 지나쳐 버린 인연에 대한 미련도 쉽사리 버리지 못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외로운 삶은 끝없는 부침을 맞는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사이 우리는 때때로 행복하고, 때때로 비참하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삶의 속성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제의 좋았던 날들에 너무 빠져들 것도 없고, 조금 전의 나쁜 일에 잠겨들 필요도 없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오늘과 내일은 온다. 우리는 우리가 맞이할 그 많은 순간들을 어떻게 하면 충실히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오늘 좀 덜 충실하면 어떤가? 내일 조금 더 충실하면 된다. 내일이 영 시원찮으면 모레에는 그보다 올라갈 길이 많으니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부침 속에서, 자꾸만 밀려드는 그 파도와 해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요트를 타고서 돛을 올릴 뿐이다. 요트가 없으면 뗏목이라도 타면 된다. 그게 없으면 헤엄이라도 치는 것이다. 그러다 힘들면 남의 배 좀 얻어 타고, 가끔 외딴 섬을 만나면 거기서 몸도 좀 말리고, 나처럼 외롭고 처량한 사람에게 기꺼이 손도 내밀고. 그런 좋은 추억과, 소박한 연대가 서로 엮이다보면 인연은 오고, 해는 떠오른다. 우리는 다시금 그 햇발 아래 살아가게 된다. '개'와 '로봇'이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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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속으로...스웨덴] 알렉산더의 네버랜드는 도피가 아니라 저항이다
피터팬의 환상 세계를 넘어선, 상상의 윤리와 저항의 힘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피터팬은 현실을 등지고 네버랜드로 떠납니다.
그곳은 아이들이 어른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꿈을 꾸는 환상의 섬이죠.
잉마르 베르만의 영화 《화니와 알렉산더 (1982)》에도, 현실의 폭력과 권위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는 알렉산더. 어린 알렉산더 역시 피터팬처럼 환상의 세계를 원하지만, 그 목적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의 상상은 단순한 도피나 동심이 아닌 현실과 맞서기 위한 ‘저항’이자,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가까웠죠. 그에게 상상은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연극의 목적은 세상에 거울을 비추는 것이다. 선은 선대로, 악은 악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비춰내며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다.”
— 『햄릿』 3막 2장 16~19행
『햄릿』에서 “연극의 목적은 세상에 거울을 비추는 예술”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영화 속 주교는 오롯이 진실만이 옳으며 거짓을 행하는 행위는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세계에서는 연극도, 상상도, 작은 거짓말 하나 용납되지 않았죠.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진실’은 정말 정당했을까요?
스웨덴, 느린 진보의 시간을 거쳐 평등한 국가가 되기까지
작은 세계로 벗어나 알렉산더가 마주한 현실 세계는 우리가 아는 평등한 스웨덴의 이미지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적 배경은 1900년대 초. 신분제가 폐지된 지 수십년이 흘렀지만 스웨덴 사회의 계급 구조는 여전히 견고했고, 사회 곳곳엔 그 잔재가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국교였던 루터교는 절대적인 질서와 규율을 강조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교는 그 보이지 않는 질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자유롭고 예술적인 영혼을 지닌 에크달 가문의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적 억압과 대조를 이루며, 영화 속 갈등의 긴장감을 서서히 고조시켜 나갑니다.
에밀리와의 재혼을 앞둔 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집과 가구, 옷, 보석, 귀중품, 친구, 습관, 생각… 모두 두고 오란 말이오.”
이 말은 그녀에게 단순히 결혼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당신의 자아를 내려놓으라”는 요구와도 같았죠. 그리고 알렉산더는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봅니다. 그의 눈에 비친 현실 세계는 잔혹했고, 주교가 말하는 질서는 곧 폭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에밀리는 주교와 재혼을 하게 되었을까요?
오마주, 그러나 달라진 여성 서사
《화니와 알렉산더 (1982)》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연출과 상징 곳곳에서 『햄릿』을 연상 시키면서도 베르만 감독은 독자적인 메시지를 섬세하게 투영합니다. 마치 “오마주를 한다면 이렇게 하라”는 모범적인 예시처럼 읽히는 대목이기도 해요. 그러나 여성 서사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햄릿』극 중 극 <쥐덫>의 왕비는 남편의 죽음 이후 어떤 상대와도 재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루시아너스(Lucianus)라는 남성과 재혼하게 됩니다. 강렬했던 왕비의 맹세는 보잘것 없이 흩어졌고, 이는 그녀의 선택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고 말죠.
반면 에밀리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을 겪지만, 두 아이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재혼을 선택합니다. 그녀의 선택은 약속의 배반이 아닌, 생존을 위한 강인한 결단입니다. 고전에서 파생된 서사를 현대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한, 베리만 감독의 섬세한 각색이 돋보이는 지점입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알렉산더는 주교의 세계에서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힙니다. 주교는 그를 다락방에 가두고, 십계명 중 하나인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교리를 근거 삼아 가혹한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에게 ‘거짓’이란 악의가 아닌, 상상력의 일부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술적 자유와 창작이 숨 쉬는 에크달 가문에서 자란 알렉산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상상과 이야기로 견뎌냈습니다. 하지만 주교는 그런 ‘거짓’조차 죄로 규정하며 아이를 단죄 하려 들었고, 결국 현실 세계의 권위적인 교주 앞에서 작은 세계의 어린이는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구원의 손길, 이방인의 등장과 주교의 파멸
다락방에 갇혀 있던 화니와 알렉산더를 구한 인물은,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이삭이었습니다. 유대인 상인으로, 스웨덴 사회에서 이방인처럼 존재하던 그는 어디선가 신비롭고 기묘한 골동품들을 수집하며 에크달 가문과도 교류를 이어온 인물입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병들어가던 화니와 알렉산더를 작은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을 감행합니다.
주교가 다락에서 마주한 아이들은 실체가 아닌, 그의 내면에 떠오른 환영이었습니다. 그 순간 주교는 처음, ‘작은 세계’ 안으로 발을 들입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 전환은 꽤나 흥미롭습니다. 처음엔 비어 있는 다락방 바닥을 비추며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공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황급히 다락방을 뛰어 들어오는 주교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공간을 다시 비출 때, 그곳엔 평온히 잠든 화니와 알렉산더가 누워 있습니다. 주교가 그들의 실체를 확인하려 손을 뻗는 찰나 에밀리는 단호히 말합니다. “건드리지 말아요!”
주교가 환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 틈을 타, 아이들이 무사히 도망치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이죠.
주교에게 환영은 단순히 경험했다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진실만이 선하다’고 믿어온 그가, 악이라 여겨온 세계 — 즉 ‘거짓의 영역’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순간이기 때문이죠. 다락방 한가운데, 십자가 아래에서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한편 이삭 야코비의 도움으로, 아이들은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잠들지 못한 알렉산더는 이삭의 집 안을 누비다 기묘하고 오싹한 기운이 흐르는 방 한가운데에서 아버지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미 여러 차례 나타난 환영이었지만, 이번 공간에서의 만남은 특별합니다. 이승과 저승, 현실과 비현실을 잇는 통로 같은 곳에서 알렉산더는 아버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눕니다. 죽어서도 늘 곁에 있겠다는 아버지의 위로는 차갑고 섬뜩하지만, 동시에 따뜻하고 다정합니다. 알렉산더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주교를 진정한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일지도 모르죠.
마음의 어둠을 들여다보는 사람
알렉산더는 이삭의 집에서 이스마엘을 만납니다. 그는 영적으로 강인하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초월적인 능력을 지녔으나, 오히려 그 능력이 세상에는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져 격리된 인물이었죠. 하지만 그런 이스마엘에게도 알렉산더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알렉산더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조심스럽지만 끈질기게 다가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알렉산더의 마음 속에 억눌려 있던 주교에 대한 증오를 발견하죠.
— 이스마엘은 알렉산더의 어둠을 건드려 끔찍한 환영을 보여줍니다.
불길에 휩싸인 숙모가 나타나, 고통으로 몸부림 치며 주교의 침실로 들어갑니다. 수면제를 먹고 깊이 잠든 주교는 불길 속에서 파멸을 맞이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환상이라면 좋았겠지만— 다음 날, 주교는 실제로 죽음을 맞습니다.
이스마엘이 속삭이던 모든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재미만을 추구하지 말라(El blot til lyst)”
“재미만을 추구하지 말라(El blot til lyst).” — 첫 도입부에 등장하는 메세지
이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예술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물음입니다.
알렉산더를 억압하던 주교의 파멸은 일시적인 통쾌함을 선사하지만, 곧 그 감정의 정당성에 대해서 곱씹게 되지요.
내가 느낀 이 통쾌함, 카타르시스는 과연 정당한가
남을 파멸시켜 얻는 해방은 진정한 해방일 수 있을까
영화는 유희와 감정적 해소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의 진실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예술은 때로 모두를 위로하고 숨 쉴 틈이 되어주지만, 결국 우리는 현실 세계를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작은 세계를 품고 살아가되 그 안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 영화는 마지막 순간, 날카로운 현실의 감각을 일깨웁니다.
오늘의 크레마 리뷰 어떠셨나요? ☕
하나의 장면, 한 잔의 크레마처럼 잔잔하고 진한 여운을 담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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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연이 다한 "리볼버" 후기 /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 / 느린 호흡에도 긴장감 넘치는 전개 / 배우들의 찢는 연기력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리볼버"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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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 좀비와 #살아있다 가 의미하는 것
영화 살아있다가 개봉했습니다.
저는 시사회를 통해 그럭저럭 봤던지라,
개봉 이후 관람객 평이 생각보다도 더 좋지 않아 조금 놀랐는데요.
이 콘텐츠는 영화 살아있다를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만들게 됐습니다.
오늘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살아있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살아있다 #유아인 #박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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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재벌집 막내아들> 공식 티저 예고편
재벌 총수 일가의 오너리스크를 관리하는 비서가 재벌가의 막내아들로 회귀하여 인생 2회차를 산다? 송중기 주연의 《재벌집 막내아들》 공식 티저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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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크로스> 공식 예고편
아내에게 과거를 숨긴 채 베테랑 주부로 살아가는 전직 요원 ‘강무’와 남편의 비밀을 오해한 강력범죄수사대 에이스 ‘미선’이 거대한 사건에 함께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넷플릭스 《크로스》 8월 9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