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Choice Movie2022-11-08 14:50:12
11월 2주 최신 개봉영화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첫번째 아이, 내 친한 친구의 아침식사
2022년 11월 2주 개봉영화!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Black Panther: Wakanda Forever , 2022
가장 혁신적인 히어로 ‘블랙 팬서’가 돌아온다.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와칸다'의 왕이자 블랙 팬서 '티찰라'의 죽음 이후
거대한 위협에 빠진 '와칸다'를 지키기 위한 이들의 운명을 건 전쟁과 새로운 수호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블록버스터입니다.
1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와칸다'의 모습과 깊은 바닷속 신비로운 세계인 '탈로칸'이 압도적인 비주얼로 펼쳐지는 동시에
이들이 대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이전보다 확장된 스케일과 강렬한 액션을 예고하며 기대감을 상승시키고 있습니다
2022년 대미를 뜨겁게 장식할 최고의 마블 스튜디오 기대작 와칸다와 탈로칸의 확장된 세계관!
이번주 추천영화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입니다.
첫번째 아이 FIRST CHILD , 2021
2022년 올해의 소셜 리얼리티 드라마
영화 "첫번째 아이"는 육아휴직 후 복직한 여성이 직장과 가정에서 겪는 무수한 딜레마를 통해
의지할 수도 홀로 설 수도 없는 세상과 마주한 우리 시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소셜 리얼리티 드라마입니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후 배우 박하선의 섬세한 연기와 신예 허정재 감독의 절제된 연출과 묵직한 촬영이 주목받은 작품이죠
드라마, 영화, 라디오, 예능 프로그램 등을 망라해 다양한 매체와 장르, 작품에서 활약하고 있는 배우 박하선의 스크린 주연작입니다
또한 우리 시대의 소셜 딜레마에 대한 사려 깊은 접근이 돋보이는 신예 허정재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전작 단편영화들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과 감각을 입증받으며 차세대 감독으로 떠오른 허정재 감독의 탄탄한 각본과 연출이 빛을 발하는 작품입니다.
우리 시대의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올해의 소셜 리얼리티 드라마!
이번주 추천영화 "첫번재 아이" 입니다.
내 친한 친구의 아침식사 我吃了那男孩一整年的早餐 , My Best Friend's Breakfast , 2022
대만 박스오피스 1위!, SNS 신드롬 실화 로맨스 원작
영화 "내 친한 친구의 아침식사"는 2015년 대만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D card에 '난 1년 동안 그 소년의 아침을 먹었다'라는 제목으로
한 여대생이 올린 실제 남친과의 귀여운 러브스토리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업로드된 게시글은 댓글과 좋아요가 5만 개를 넘으며 계속해서 입소문이 났고,
2016년에는 소설로 각색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 및 출판되며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실제 주인공은 2018년 결혼에 골인하며 대만 SNS를 강타한 실화 로맨스는 "내 친한 친구의 아침식사"로 탄생했습니다
1020 관객들의 취향 저격 영화! 첫사랑 먹방 로맨스!
이번주 추천영화 "내 친한 친구의 아침식사" 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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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토피아, 그리고 손쉬운 희망
장담한다. 디스토피아 장르는 앞으로 잘 팔릴 수밖에 없다고. 자극적인 소재를 버무리기 좋다는 것도 이유이긴 하나, 무엇보다 환경이 뒷받침해준다. 답답하고, 끔찍하고, 지긋지긋하고,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새로운 세상에 동화되고 싶은 마음. 평범한 주인공의 숨겨진 능력을 지켜보며 왠지 모를 기대감과 희망을 얻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테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살아갈수록 살 만한 게 아닌지라 현실 외의 세상, 특히 더 끔찍한 환경의 세상을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그런 곳에선 악바리로 살아갈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 영화의 무수한 주인공처럼. 이번에도 질문을 안고 <나이트 레이더스>를 보았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보고자 하는 대로 본다. 자신의 바람이나 욕망과 좀 더 맞닿은 지점에 눈길을 주고, 그 부분을 확장하여 생각한다. 영화나 드라마, 웹툰 등을 '해석'한 영상들도 같은 결이다. 타당한 이유와 논리적 근거가 덧붙여있다고 해서 사실인 건 아니니까.
관람자가 영화를 되새김질한다는 건 적어도 서너 번 이상 잘 만들었다고 인지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빠져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는 영화도 있다. 애석하게도 이번 영화가 그랬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경험이 그러하듯 쓸모없는 건 없다. 감탄할 만한 요소가 없다고 해서 할 말이 없지도 않다. 어떤 영화든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나이트 레이더스>는 그간 보았던 디스토피아 장르 영화와 겹치는 씬이나 설정들이 종종 보였다. 무슨 디스토피아 전문가는 아니라지만, 내 눈에 보였던 건 짚어내고자 한다.
짧은 줄거리
서기 2043년, 새로운 전쟁을 일으켜 대제국을 세우려는 국가 에머슨.인간병기를 양성하기 위해 모든 아이들을 납치하고,외딴 숲에서 칩거하던 '니스카'도 결국 사랑하는 딸을 빼앗긴다.10개월 후, 예기치 못한 비밀이 하나둘 드러나고,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던 '니스카'는딸을 되찾고자 국가의 중심부를 습격하기로 결심하는데…*아래부터 스포일러
시작은 숲이었다. 버석하게 마른나무들은 왠지 모르게 으스스했고, 그곳을 거니는 여자 아이의 모습도 심상찮았다. 그 애는 작은 새를 공격하려는 듯 손에 쥔 새총의 겨누다가 힘을 푼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말을 뱉으며 손을 뻗었다. 말보다는 주술이었다. 새는 조종당할 것처럼 굴다가 날개를 가볍게 움직이며 날아갔다.
처음부터 보여준 것이다. 여기 나오는 이 아이, '와디즈'는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그게 지금은 통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때에 힘이 드러날 것이란 것쯤은 명백히 보였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서 <유전>을 떠올렸다. 물론 기이하고도 서늘한 분위기는 다르긴 했으나, 비슷한 나이대의 주인공과 새, 그리고 능력의 복선이라는 점까지. <나이트 레이더스>도 스릴러 장르라는 게 한몫했으리라.
새를 잡지 않고 놓쳤다며, 와디즈의 엄마 '니스카'가 가볍게 핀잔을 준다. 먹을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씩씩대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덫에 걸린 와디즈의 다리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에게 위치가 발각돼 캠핑카 같은 집을 태우고 둘은 어디론가 떠난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덜컥 본 터라 이쯤 보았을 때 느꼈다. 세계관 설명이 부족하다고. 대충 이 사람들이 도망자 신세라는 건 알겠는데 '하필' 이 상황에서 다리를 다친 건 꼭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 같았다. 결과와 과정이 거꾸로라고 해야 할까.
인물에게 공감이 가면 근거는 이유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근거는 수단이 된다. 숲 속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사람들과 감시자들의 눈이 득시글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아직 뭐가 뭔지 파악이 덜 되었는데 장소가 휙 바뀌었다. 강가로.
이 장면에서는 <버드 박스>가 또렷이 생각났다. 산드라 블록-역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과 그의 아들 딸로 나오는 두 명의 아이들도 이 상황과 비슷했다. 물결을 타서 멀리 도망가는 중이고, 당장이라도 비가 올 듯 하늘은 우중충하고,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이함이 깔렸다. 작은 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어떤 느낌만 주었을 뿐.
배를 거꾸로 엎어두고서 걷다 보니, 폐허가 되었다 해도 무방한 마을이다. 니스카는 와디즈의 얼굴을 눈만 빼고 꽁꽁 숨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는 애쓴다는 건 와디즈의 존재를 다른 사람이 알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왜? 답은 곧 나온다.
그들이 어떤 집에 들어가려고 주변을 살피자마자 사람이 불쑥 나타난다. 잔뜩 경계한 니스카에게 남자는 안심하라는 듯 자신의 아들을 보여준다.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는 모양새다. 와디즈에겐 생전 처음 보는, 제 또래로 보이는 인간이었을 테다. 다만 영화에서는 그 새로운 상황을 주목해서 담지 않는다. 그 남자애 또한 일종의 수단으로 쓰였다.
4살이 된 아이들은 모두 아카데미로 보내진다.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볼 수 없다. 와디즈를 잃기 싫은 니스카가 단둘이서 숲을 전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몰랐다. 단순히 '앞으로 보지 못한다' 쯤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강제로 끌려간 아이들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날카로운 덫에 찔린 다리의 상흔을 약 없이 고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니스카는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아카데미는 좋은 곳'이라는, 오랜 친구의 해맑은 믿음을 믿기로 한다. 와디즈를 제 딸이라고 밝힐 수 없어 '미성년자가 쓰러져있다'는 신고만 툭 던지고 자취를 감춘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났다.
와디즈는 철창 같은 곳에서 묵묵히 나날을 보낸다. 아이들의 놀림과 비꼼을 무시하면서 건물의 구조를 몰래 파악해본다. 침대 틀 사이에 종이를 끼워두고 연필로 슬슬 끄적이는 와디즈. 꼭 이런 것 같았다. 능력 있는 자는 난관을 묵묵히 헤쳐나가니까 와디즈는 이곳을 탈출해야 하고, 그러려면 나가는 길을 알아야겠고, 적당한 컷 하나를 넣어야지.
언젠가 <월요일이 사라졌다>를 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차했는데, 이와 비슷한 감상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설명한다. 그런데 설명이 모호하다. 문장으로 쓸 순 있는데 이해할 수는 없다. 인물의 감정이나 상태, 혹은 생각과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아서겠다. 그저 인물들은 무언가를 하고, 사건은 생긴다. 알맹이는 없는 채로.
니스카가 아카데미의 실체를 깨닫고, 와디즈를 꺼내려할 때 만난 건 크리족 사람들이다. 영어보다 훨씬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들. 특히 그들을 이끄는 여성은 자기 민족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 긍지가 보이는 말투와 표정이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던 니스카와는 정반대의 생활양식이었다. 무리를 지어 유대감을 키우고, 서로 돕고 지키는 관계라는 건. 이들이 영화 끝자락에서 나오는 게 꽤나 아쉬웠다. 조금 더 일찍 니스카나 와디즈와 만났더라면. 감독의 의도인진 모르겠으나 그들 주변 사람은 마치 일회성 역할인 것처럼 쉽게 죽음을 맞이했다.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려는 찰나, 죽음을 맞이하는 허무함.
그래서 크리족과 완전히 대비된 것이긴 하다. 다만 대조를 극명히 보여줌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와디즈의 초능력으로 모든 사건이 종결되었던지라 다음 장면을 기대할 수 없도록 끝이 났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게임으로 만들면 훨씬 재밌겠다고. CG가 많이 나오니,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해도 자연스럽지 않을까. 영화에서는 와디즈와 니스카가 절반 비중이었는데, 와디즈의 시점에서 극이 전개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능력이 생기게 된 계기나 첫 발현, 엄마와 둘이 지내게 된 과정 등 사건 대신 흐름이 들어갈 여지가 많아질 듯하다.
혹은 사건을 섬세하게 다듬는 것도 방법이겠다. 척박하고 메마른 디스토피아의 배경과는 달리 주인공의 앞 날은 단순하기만 하다. 우리가 사는 현실보다도 가벼운 방식으로 끝을 낸 건 이 장르에서 가장 아쉬운 결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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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는 죽지 않았어!
하시모토 나오키 / 일본 / 2022 / 126분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루가 봄과 함께 떠났다 사야카는 처음 겪는 이별이 낯설기만 하다 오래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와 함께 헤어진 이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그곳에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재일 한국인 2세인 작가 이주인 시즈카(본명 조충래)의 동명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아쿠타가와상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대중소설 작가에게 수여하는 가장 높은 상이기도 한 나오키상 수상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단행본 소설이다. 하시모토 나오키 감독은 소설을 처음 접하고, 영화화하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마음을 아리게 만들기에 변함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는 죽지 않았어-
영화는 난생처음 상실과 이별을 경험하게 된 8살 소녀 사야카(니이츠 치세)와 오래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오이다 요시)의 만남을 10년 후 사야카의 내레이션(아리무라 카스미)을 통해 들려준다. 소중한 관계의 상실과 이별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야카가 맞이하는 이별은 작별인사 기회조차 주지 않는 어린이에겐 너무 어려운 경험의 연속이다. 이렇게까지 잔인한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기엔 영화는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살랑한 봄의 여행길 같다.
좁은 문을 통해 강아지 루를 따라 들어간 벽으로 둘러싸인 들판은, 말 그대로 둘만의 공간이었다. 유일한 친구인 루만이 함께하는 공간은 그 어디보다 외롭지 않고 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가장 자유로운 공간처럼 느껴진다. 벽 너머로 수평선까지 보이는 듯한 바다조차 맑은 하늘에 푸르게 반사되지만 사야카 혼자 다시 들판에 갔을 때는 벽의 헤드룸을 좁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일반 공터로 만들어버린다. 그만큼 세상을 다르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에 대해 보여준 덕에 사야카의 상실감의 폭은 더욱 크게 와닿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첫 장면이다. 첫 장면이 강렬한만큼 후반부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사야카가 느끼게 된 소외의 너무 짧은 전사나 스토리 전개의 속도, 카메라를 바라보는 듯한 사야카의 시선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적어도 루와 사야카의 관계는 의심할 수 없는 꾸밈없는 관계였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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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속 '드 윈터 부인'을 닮은 <레베카>(2020)
소설 속에서도 뮤지컬에서도 '나', 1940년 영화에서는 '두 번째 드 윈터 부인'이라고 명명하는 주인공. 2020년 작품에서는 '드 윈터 부인'이라고 칭한다. 예나 지금이나 작품 <레베카> 속 화자는 이름이 없다. 이렇게 작품 밖에서부터 레베카의 위력이 느껴진다.
작품 특성상, 이 글에서 작중 화자를 지칭할 때 결혼 전은 '나', 결혼 후는 '드 윈터 부인'이라고 지칭하겠다.1. 순진함: 4점 _ 순진함을 앞세운 눈새의 정석.
2. 매력: 2점_ 설득력을 취하고 매력을 버렸... 나?
3. 로망: 4점_ '해본 것' < '해보고 싶던 것'
4. 자존감: 0점_ 유령은 믿지 않지만
5. 서포트력: 5점_ 서포트가 필요한 상황에서만 발현되는 존재감
순진함, 순진함을 앞세운 눈새의 정석
화자는 '반 호퍼 부인'의 말동무이자 길동무로 동행할 때도 순진한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맥심 드 윈터'와 몬테카를로의 호텔 인근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들이었다.반 호퍼 부인 말마따나, 정말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할 줄 알았던 걸까?
옆방에 있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까내리는 사람, 그런 사람의 말동무로 일하면서 이렇게까지 경계심이 없었다니.
좋게 말하면 순진함, 나쁘게 말하면 눈새.
매력, 설득력을 취하고 매력을 버렸... 나?
1940년 작 <레베카>에서 맥심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반한 건 당신의 외모가 아니라 꾸미지 않은 순수함이 좋아서였어"
그 대사를 들으며 생각했다.뻥 치시네. 저 얼굴을 보고 그런 말을 해? 못 믿을 사람이네.1940년 작에서 '나'는 호리호리하고 예쁘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맥심의 말에 코웃음을 칠 수밖에.
그러나, 2020 작에서는 '드 윈터 부인'의 외모가 아름답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관객들에게 고구마를 퍼 먹이듯 답답한 말과 행동을 하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어 '레베카와는 다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는 맥심의 말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하지만, 다이아 수저에게만 예뻐 보이는 매력인가 보다.
난 도무지 부인이 왜 매력적인지 모르겠어....
로망, '해본 것' < '해보고 싶던 것'
부인이 되기 전, '나'는 호텔에서 맥심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한 날 이래로 황홀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예쁘게 차려입고 호텔 로비며 테라스로 향하면 직원 중 한 명이 다가와 맥심의 쪽지를 건네준다.
쪽지에는 오늘의 데이트 코스가 적혀 있다. 그러고 나서 맥심과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나'가 맥심과 시간을 보내며, 혼잣말을 하는 장면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가본 곳보다 많고, 해본 것보다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맥심으로부터 받은 쪽지를 모아 두고 다시 쪽지를 받을 때로 돌아간 듯, 행복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나'.
"For me?(저한테요?)" 하고 쪽지를 집어 드는 모습을 보면 예측해볼 수 있다.
'나'는 귀한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구나. 꿈꾸는 듯하겠구나.
자존감, 유령은 믿지 않지만
맥심을 따라 맨덜리 저택으로 간 드 윈터 부인은, 유령 따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별한 전 부인 '레베카'에 대해서는 도통 말해주질 않는 맥심, 드 윈터 부인 앞에서 레베카를 회상하고 비교하듯 언급하는 고용인들과 맥심의 친척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레베카의 존재감에 압도된다.무엇보다도, 저택에 처음 왔을 때부터 위기 상황이거나 평화로운 분위기이거나 상관없이 레베카의 이니셜 "R"이 표기된 물품들에 둘러싸여 있다.
실체는 없지만 사람들의 기억과 저택에 남은 흔적들을 통해 레베카와 마주하는 드 윈터 부인은 시종일관 주눅 들어있다. 자신이 아닌 레베카를 '드 윈터 부인'이라고 칭하는 집사 '댄버스'에게도 "이젠 내가 드 윈터 부인이야"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한다.
서포트력, 서포트가 필요한 상황에서만 발현되는 존재감
드 윈터 부인의 전 직업은 나이 든 귀부인의 말동무 겸 심부름꾼. 그래서였을까?
맥심과 결혼한 후, 저택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내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모습만 보여주던 드 윈터 부인이 영화 후반부에는 돌변한다.
맥심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냉철하게 판단하고, 화끈한 행동력까지 보여준다.
영화를 직접 감상하실 분들을 위해 이 부분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누군가를 도와야 하는 때에만 초능력처럼 발휘되는 냉철함, 판단력, 행동력. 그 모든 능력들이 드 윈터 부인을 더 이상 무기력한 인물이 아닌 존재감이 강한 캐릭터로 자리 잡게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히치콕 감독의 동명 영화 1940년 작 <레베카>,
그 영화의 원작인 소설 <레베카>,
댄버스 부인 역의 위협적인 아우라로 유명한 뮤지컬 <레베카>,
그리고 이 작품,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벤 휘틀리 감독의 2020년 작 영화 <레베카>.1940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리메이크 작품을 깐깐한 시선으로 감상했다.
아쉬운 점이 많았다.1940년 작과 비교하며 혹평만 가득 담은 리뷰를 작성하게 되진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다.
그래서 대작을 리메이크할 때 느꼈을 법한 고충을 상상해봤다.
'스릴러에서 중요한 요소인 발생 에피소드는 이미 알려져 있는 상황. 더군다나 스산한 스릴감을 멋지게 전달해준 작품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겠지. 힘들었겠다.'라고 생각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야.
풍성해진 사운드와 볼거리
인물들의 대화 뒤에 잔잔히 깔리는 파도소리, 드 윈터 부인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비트 등 청각 효과가 풍성해져 상황 전달이 잘 된다.
게다가 시각적으로 볼거리도 굉장히 많아졌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맨덜리 저택 가면무도회 장면이었다.
레베카를 아는 듯 한, 저택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그 속에서 유일하게 레베카를 모르는 드 윈터 부인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함, 불안함을 1940년 작품보다 설득력 있게 표현한 장면이라고 생각해, 유일하게 옛 영화보다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는다.
훨씬 친절해진 상황 설명, 그러나 비교적 약해진 스릴감.
줄거리를 완전히 혹은 대충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영화를 감상할 때 연출, 즉 상황 표현에 집중케 된다.
그런데, 영화 전체를 통틀어 1940년 작에 비해 스릴러에서 느낄 수 있는 서늘한 분위기가 많이 약해졌다.1940년 <레베카>에서는 댄버스의 침묵과 시선처리, 인물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화면 연출 등을 통해 관객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그에 비해, 2020년 <레베카>에서는 침묵, 화면 연출보다 인물들의 대사 비중이 늘었다.
말이 많아진 댄버스, 처음 보는 캐릭터인 시할머니 등 여러 인물들의 대사로 상황을 설명해주니 편리하다.
하지만, 아무 정보 없는 상태에서 작중 화자와 시선과 정보 공유를 함께하며 느끼던 스릴감은 현격히 떨어졌다.
이런 이유로 컬러, 사운드 등의 기술적 발전은 했으나 연출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생각이 든다.스릴러도 로맨스도 아닌 채 어중간한 곳에서 오락가락하는 영화.
그래서, 언제나 맨덜리의 파도소리가 따라다닌다는 음향 표현이 이해는 가도, 인상 깊지 않았다.
오히려 뮤지컬 음원을 통해 듣는 파도 소리가 훨씬 더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영화에서는 파도 소리보다도, 히치콕 감독의 <새>를 오마주한 듯한 '철새들의 움직임'이 더 인상 깊었다.
시대 배경 표현에 있어서 안 꾸민 듯, 꾸민 듯?
초반부를 감상할 때는 시대 배경을 현대로 재해석한 작품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등장하는 자동차 디자인과 '얼마 전 찍었다'는 결혼사진이 흑백 가까운 세피아 빛인 것을 단서로 삼아, 소설 레베카의 시간을 따르고 있다고 이해했다.그러나, 시대상에 대한 단서를 몇 가지 발견한 뒤에도 어색함이 느껴져 이상했다.
고전영화 <레베카>에 너무 익숙해져 그런가? 하고 반문해보다가 떠오른 영화가 있다.바츠 루어만 감독의 2013년 영화 <위대한 개츠비>.<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유행했던 재즈 음악들을 2013년에 맞추어 리메이크했다.
또한, 당대 파티 문화, 의상, 배경이 되는 공간들과 소품들까지 '이 시대가 아니라 그 시대 이야기'라는 점을 명확히 전달해줬다. 영화가 컬러인가 아닌가는 아무 상관없었다.
시대 배경을 단번에 감지할 수 있었다.그에 반해 2020작 <레베카>는 시대 표현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당대 시대상이 개츠비만큼 중요한 작품은 아니라도, 지금과 다른 시대적 특성을 더 살려줬다면 좋았을 텐데.
리뷰를 마무리하며 돌아보니, <레베카>가 '두 번째 드 윈터 부인'이 되어 버렸다.
작중 '나' 또는 '드 윈터 부인'처럼, 2020년 <레베카>는 1940년 <레베카>와 힘겨운 싸움을 했다.취향 따라 결과 판정은 달리 할 수 있지만,
일단 내게 있어서 이 싸움의 결과는 1940년 작품의 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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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당신을 채울 수 없다는 것, 영화 <님포매니악 1,2>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포스터를 보면 뭐 이런 영화를 다 만들었네 싶을 수도 있다. 또 영화의 결말을 보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다. (결말 밖에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러나 두가지 '뭐 이런게 다 있다'는 평을 하는 느낌은 영 다르다. 포스터는 마치 이런 영화를 보면 내가 '님포매니악'이 된 것처럼 볼까봐 걱정이 들 수도 있겠다.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성에 개방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건 여전히 어색함이 더 크다. 그러나 주의할 건 포스터가 보여주는 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원초적 본능>과 그런 면에선 맥락이 같다. 화끈하고 질펀한 걸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허전하고 쓰라리다.
제목은 아무 잘못이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이 영화를 못살게 군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바닥에 널부러진 조와 우연찮게 길바닥에서 만난 샐리그먼이 밤새 이야기하는 것이 영화의 전부다. 다만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님포매니악(여성 색정증 환자)라고 불렀고 그는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칭한다는 것. 섹스 중독자와 섹스가 1도 동하지 않는 두 사람의 섹스에 대한 대화.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만나면 이렇게 차분한 대화가 가능하다니 신기하다. 조의 일대기는 꽤 길고 복잡하다. 그녀의 생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그녀는 차를 마시며 침대에 누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샐리그먼은 그녀의 '경험'을 그래서 자신의 '지식'으로 공감하고 이해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낚시, 음악 등 각종 지식으로 맞장구를 친다. 때때로 이야기가 끊어지면 그들을 둘러싼 방의 인테리어, 벽에 남아있는 자국, 방의 구조, 조명 등으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됐다. 만담이라기엔 잔잔하고 대담이라기엔 독백이 길고, 독백이라기엔 응하는 사람이 있는 독특한 밤이었다. 샐리그먼의 뜬금없고 박학다식한 지적 공감은 자칫 19금썰 혹은 사랑과 전쟁이 될 뻔한 한 이야기를 꽤 담백하고 흥미롭게 탈바꿈해준다. 다른 남자였다면 이렇게 클래식 평론하듯이 말하진 못했겠지. 그는 영화를 끝까지 흥미롭게 만드는 존재인데 그건 차차 얘기하는 것으로.
영화의 부제를 짓는다면 <님포매니악: 어느 고독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붙이고 싶다. 주인공 조는 성보다는 사람을 탐닉하고, 쾌락보다는 외로움을 채우려 애썼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부제를 지어본 건 갑자기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가 떠올랐기 때문.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 심지어 관객들마저 주인공과 자기 자신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암만, 우리는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처럼 살인자도 아니고, 조처럼 님포매니악도, 섹스중독자도 아니니까. 그러나 정말 전혀 다른가. 외로움과 공허함이 비슷해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면 이상한걸까. 조는 유일하게 사랑했던 제롬에게 속마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자신의 모든 구멍을 채워달라고 하면서. 애틋한 말이었다. 늘 내 빈 곳을 누군가 채워줄 수 없다고 수없이 회의적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더 슬펐다. 정말 섹스로, 혹은 제롬같은 누군가가 내 안의 모든 빈 곳들이 채워진다면 같은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걸 걸고서.
조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모르고 시작하는 바보가 어딨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욕구란 끝이 없고 만족을 느끼는 만큼 허전함 역시 크다. 맛있는 음식들, 아는 맛이지만 그 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는 사람들. 바깥에서 사먹는 음식 중에서 나에겐 떡볶이가 늘 그렇다. 치킨도, 피자도, 그 무엇 보다도. 정말 아는 맛이지만 집집마다, 가게마다 다르다. 내 입맛에 찰떡인 떡볶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숙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떡볶이 비유는 너무 가볍나.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는 사랑에 대한 욕구도 있겠다. 외로워서, 궁금해서, 이유가 뭐든간 다신 사랑하지 않겠다면서 그 달달하고 몽글거리던 날이 그리워 다시 찾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이 사랑에 함몰되어 있는 동안 조에겐 섹스가 그랬을 것이다. 아는 즐거움이었지만 즐거웠고 쉼없이 필요했다. 하루에 7-8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만나 늘 그 사람들에게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그건 분명 본인도 많이 노력해야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아는 맛의 끝을 보고 싶었던 것, 그게 조와 우리의 작은 차이점일 것이다.
유부남이 아내와 함께 찾아왔다(feat. 질척거림)
그녀를 철면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 갈수록 그런 생각은 잦아든다. 죄의식이나 자책감 따위는 저버린 듯이 말했지만 그녀는 아주 오래 자신의 삶을, 자신의 선택을 '죄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와 '미끼'가 되어 누가 더 기차에서 많은 사람과 잤나 내기하느라 유부남을 유혹할 때도, 사랑하지도 않는 유부남이 자신 때문에 20년지기 아내와 아들 셋을 버리고 왔을 때도, 음성사서함에 올라온 수많은 남자들과 만날지 말지를 주사위를 굴려 결정할 때도, 그녀에게 닥친 불감증이라는 위기에 다시 쾌락을 되찾기 위해 폭력적인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아이와 남편을 버릴 때도. 그녀가 사랑한 제롬이 자신과 함께하는 여자아이와 엮이게 되어서 질투심에 총으로 쏘려고 했을 떄도. 그게 다 죄라면서.
그녀가 여러 사람을 만났던 것은 그녀가 사랑한 대상이 섹스가 주는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흥분은 섹스에 필요한 기본적 요소였고 사랑마저도 그녀에게 섹스를 완성해주는 비밀의 레시피였다. 그럼에도 샐리그먼에게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배수진을 친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들릴 이야기는 부도덕하고, 저는 나 좋자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못돼 처먹은 사람이에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도 아닌데. 죄라고, 부도덕하다고, 못된 사람이라는 인식은 전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정말 못된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인간의 본성을 위선이라고 말하는 건 그런 그녀가 위선적이라는 것에부터 출발 한 것은 아닐까.
젊은 여자 둘이 기차에 타면
모르는 사람에게 한두번 해본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샐리그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는 자신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된다. 샐리그먼은 그녀에게 '날개가 있는데 좀 날면 어떤가'라며 여성으로서,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서 조를 긍정적으로 해석해주었다. 조가 남자였다면 이 모든 건 지금보다 큰 문제가 아니었을거라면서. 젊은 여자 둘이 기차에 타면 눈을 맞추고 웃기만 해도 남자와 잘 수 있지만 젊은 남자 둘이 그러면 똑같이 가능하겠냐면서. 아이를 버리고 자신을 택한 건 그녀의 남편 제롬도 마찬가지였다고 말이다. 하다 못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제롬에게 총을 쏘려다 실패한 것 역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죽일 생각이 없어서 총을 제대로 장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답해준다. 그러니 죄책감 갖지 않아도 된다고.
한마디 더해 '혼자 박수칠 수 있던가'라고 곁들여주고 싶었다. 그녀를 함부로 말할 수 있겠나.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이건 단독범행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착각아닌가. 자기 자신 좋자고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했다는 말. 그녀만 좋자고 했나, 상대방도 좋자고 했지. 그 사이에 상처가 있었다면 그건 둘의 책임이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 그녀가 추구하는 섹스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근데 그 섹스가 그녀 말대로 쉬웠다. 그건 그녀가 사람 환장하게 하는 팜므파탈이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늘 응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이상해하는 사람들보다 그녀에게 이끌리듯 응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를 싫어하는 건 여자들이었다. 그 이유가 신기했다. 자기 남자들을 건드릴까봐. 그녀를 거절하려던 철벽 같던 유부남도 있었다. 똑같이 신기했다. 그녀를 피하려던 이유가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끊으려고도 해볼만큼 해봤거든요
조가 변하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건 청춘을 다바쳐 쾌락을 좇아 해볼 만큼 해보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누가 섹스 중독을 고쳐보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몸이 아프게 되어 '못'하게 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섹스 때문에 사랑하던 제롬과 극단으로 치닫고 상처를 받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자고 올 땐 보이지 않던 게, 눈 앞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여자와 그가 자는 걸 보면서 제대로 상처받았을 것이다. 제롬은 그녀의 이야기 중에 유일하게 F, G, K, B 같은 이니셜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그리고 처음 만난 샐리그먼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지 않았나. 자신이 그렇게 견딜 수 없었던 욕구 없이도 사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편견 없이 보아주는 사람이 있고,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사회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녀 역시 사회를 받아들일 수 없다 생각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친구가 생긴 것이다. 처음으로.
그러나 그 스펙타클한 조의 연대기보다도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몇 분에서 볼 수 있다. 샐리그먼은 아주 대단한 역할을 맡게 된다.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친구, 외로움과 중독을 벗어나보겠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고 다짐하는 조를 짓밟아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님포매니악이던 조가 섹스 없이 있는 힘껏 살아보겠다고 말한 그 직후, 평생 섹스와 담 쌓고 살아온 무성애자 샐리그먼이 그녀와 섹스하고 싶어진 것이다.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욕망의 전이?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가 정말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건 수많은 남자들이랑 자지 않았냐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는 그녀 앞에서 '남자'가 되었다. 과거 그녀가 자동문처럼 가리지 않고 남자들과 잤다고 해서 지금 이순간, 그와 거리낌없이 잘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와 그녀는 방금 전 이야기 하듯이 '인생 최초의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는 믿을 수 있는 친구 대신 욕망에 가득한 어느 남자가 된 것이다. 방금까지 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사랑하던 제롬을 죽이지 않아서, 안도하던 조는 망가졌다. 총은 제대로 작동했고, 친구라 부르던 셀리그먼이 그 총을 맞았다. 어쩌면 그녀는 살인자가 되었겠다. 혹은 급소가 아닌 곳에 총알이 박힌 채 그가 신음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총소리에 가장 많이 아파할 사람은 조일 것이다. 동이 텄고 문이 닫혔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녀의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을까.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그녀의 평생을 바친 단 하나의 실험, 단 하나의 목표가 얼마나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그녀의 구멍을 채워 줄 수 없었다. 채우려 애쓸수록, 기대하면 할 수록, 그녀에겐 짙은 외로움이 피어나는 구멍들이 커질 뿐이었다.
* 섹스 중독자와 님포매니악이 무엇이 그렇기 다르기에 조는 거듭 강조를 했나. 의미상 여성이란 점을 부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성 색정증은 사티리어시스라는 다른 표현을 쓰고 있으니까. 단어 중 님프는 영화에서 유충이란 뜻으로도 설명되었다. 실제로 낚시를 할 때 이 님프를 본따 님프 낚시를 하기도 한다고. 미끼가 되어 사냥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섹스중독자라고 칭하며 중독을 끊으려 할 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마음을 바꾸는데 그 때 그런 생각이 스쳐가지 않았나 한다. 자신이 여성으로서, 섹스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들과 다르다고. 그게 그녀를 흔하고 광범위한 섹스중독자가 아니라 '님포매니악'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라고.
* 조의 아버지의 '소울 트리'. 내 나무 찾기 이야기가 은근히 흥미롭다. 조도 절벽 위에서 그 나무를 찾게 된다. 아직 그런 느낌이 드는 나무를 찾지는 못했는데 나무를 찾았을 때 기분이 기대된다. 꽃을 들자면 제비꽃은 가능할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매년 반갑고 애틋하다.
*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욕망과 외로움을 어떻게 대할지가 아닌가 싶다. 욕망과 외로움의 방법론. 욕망의 끝을 알기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확실한 건 몸을 직접 내던지는 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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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엘라> 여자 오이디푸스의 화려하고 안전한 탄생
태어난 순간부터 특별해서 좀처럼 일반적인 삶에 녹아들지 못한 '에스텔라(엠마 스톤)'는 엄마 '캐서린(에밀리 비샴)'과 함께 런던으로 가서 패션 디자이너 교육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어머니와 이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런던에 도착한 그녀는 새로 만난 친구 '재스퍼(조엘 프라이)', '호레이스(폴 월터 하우저)'와 함께 런던 길거리를 주름잡는 도둑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패션 디자이너라는 어릴 적 꿈을 잊지 못해 무작정 리버티 백화점에 일자리를 구한 그녀는 운명처럼 런던 최고의 디자이너 '바로네스(엠마 톰슨)'를 만나고, 즉시 재능을 인정받은 후 특채로 채용되며 그 꿈을 이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바로네스의 끔찍한 과거와 진실을 알게 된 에스텔라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 크루엘라를 바로네스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모두를 놀라게 할 패션쇼를 준비한다.
악역을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들은 필연적으로 같은 난관을 마주한다. 어떻게 악역을 악인으로 남겨두면서도 관객들을 그에게 빠져들게 만들까 하는 문제다. 많은 영화들은 빌런에게 인간적인 뒷이야기를 선사한다. 어릴 적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사회적으로 피해를 당했던 경험들을 나열하면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용이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역으로 빌런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애매해진 캐릭터로 인해 영화의 전개에 좀처럼 흡인력이 붙지 않는다는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디즈니의 <말레피센트 2>나 DC의 <수어사이드 스쿼드> 같은 작품이 대표 사례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101마리 달마시안>에서 등장한 빌런 '크루엘라 드 빌'의 탄생을 그린 스핀오프 겸 프리퀄 <크루엘라>가 마주한 딜레마도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달마시안의 가죽을 벗겨서 코트를 만들려고 하는 잔혹한 패션 디자이너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을까. 이 난관을 넘어서기 위해 <크루엘라>는 누구나 접해 봤을 법한 한 영웅의 이야기를 빌려온다. 바로 오이디푸스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인 그는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라이오스는 아버지를 죽일 운명이라는 그의 미래를 두려워해 아들을 태어나자마자 버렸고, 가까스로 한 신하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오이디푸스는 다른 양부모를 만나 평화로이 살아간다. 어느 날 자신이 아버지를 죽일 운명이라는 내용의 신탁을 들은 그는 무작정 양부모를 떠나 여행길에 오르고, 우연히 만난 라이오스와 시비가 붙어 그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를 살해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의 인생사는 크루엘라의 그것과 유사점이 많다. 친엄마인 바로네스가 버린 딸, 크루엘라도 친모의 하인인 캐서린을 엄마로 안 채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엄마와 사별한 그녀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그 길 위에서 운명적으로 바로네스를 만난다. 그녀가 자신의 재능과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한 크루엘라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길을 막은 라이오스를 죽였듯이 바로네스의 명성과 경력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크루엘라는 오이디푸스만큼이나 기구하고, 크루엘라와 바로네스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부자의 관계에서 성별만 바뀐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와 크루엘라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스핑크스를 물리친 공로로 공석이 된 테바이의 왕좌에 앉은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밝혀 나가던 중 자신이 그 범인이라는 것을, 친불르 죽인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를 테바이에서 추방시키며 “그것은 아폴론이었소, 아폴론이오, 친구여. 나의 불행을, 불행을, 나의 고통을 완성한 것은. 하지만 눈을 직접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련한 나 자신이었소.”라고 외친다. 그는 신이 정해준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비극을 끝맺으면서 '친부를 죽인 파렴치한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웅 오이디푸스'로 거듭난다.
크루엘라는 다르다. 그녀를 키운 양모 캐서린은 그녀가 본래 모습인 '크루엘라' 대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인 '에스텔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깨달은 것처럼 바로네스와 캐서린, 자신의 관계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그녀는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 곧 크루엘라의 삶에 순응해버린다. 크루엘라라는 캐릭터 자체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이나 규범 등에 개의치 않는 저항적인 인물이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운명 앞에서 그 어떤 저항 의지나 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공유하는데도 크루엘라가 그와 달리 빌런이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면 죽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듣고도 트로이에서 용맹을 떨치다 죽은 아킬레우스처럼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란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추구한 존재다. 즉, 운명에 저항하는지 순응하는지를 기준으로 볼 때 크루엘라는 정확히 영웅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살짝 비튼 결과 <크루엘라>는 공감의 여지가 있는 설득력 있는 서사를 빌런에게 부여하면서도 빌런을 빌런답게 만드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크루엘라>의 메가폰을 잡은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자신의 광고 및 뮤직비디오 감독 경력을 살려 익숙한 듯 다른 이야기를 화려하고 강렬하며 매혹적으로 포장한다. 이는 단지 디즈니의 자본력으로 무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며, 패션과 음악을 통해 캐릭터의 정체성을 감각적으로 제시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선 크루엘라의 옷은 주어진 운명과 만들어 나갈 운명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녀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각각 '크루엘라'와 '에스텔라'를 의미하는 흑백의 조화가 두 정체성 간의 갈등을 암시하는 가운데, 포인트가 되는 빨간색은 쓰레기로 옷을 만들거나 옷을 불태우는 등 반항기 넘치는 그녀의 성정을 강조한다. 반면에 상류층에게만 허락된, 일류 디자이너가 만드는 고급스럽고 우아하며 예술성에 치중한 오트쿠튀르 패션에 충실한 바로네스의 옷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전무하며 안하무인인 그녀의 성품을 보여준다. 이렇게 작중 옷과 패션은 그 자체로 두 캐릭터의 상반된 정체성과 그들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킨다.
또한 적재적소에 존재감을 뽐내는 음악들, 특히 펑크 록 음악의 활용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1970년대 후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당시 영국의 노동계급은 오일쇼크, 이민자들의 증가로 인한 일자리 감소, 혁신 없는 기업과 자본가들로 인한 비효율적인 경제 구조 때문에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는 1970년대 런던이 반체제적인 가사와 강렬한 사운드, 허름한 듯 반항적인 패션 등으로 대변되는 펑크 록 음악의 열풍으로 가득한 도시였던 이유다. 따라서 영화 곳곳에 삽입된 펑크 록은 가진 것 없는 하층 계급으로서 살다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기존 체제에 도전하고 균열을 일으키는 크루엘라를 단적으로 표현할 최적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크루엘라의 패션쇼가 록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이 녹아든 결과다.
다만 작품의 매력과는 별개로 <크루엘라>를 보다 보면 한 가지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이 영화는 휘발성이 강하다. 전개는 매우 급하고 내실은 부족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크루엘라가 수많은 직업 중 왜 하필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그녀의 타고난 핏줄, 재능, 운명 외에 별다른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바로네스의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그녀가 자신의 선천적인 재능 외에 어떤 노력을 기울였지 그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화려한 옷들로 바로네스를 짓밟고 그녀에게 복수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화려하고 짜릿하지만 일면으로부터 느껴지는 공허함까지 떨쳐내지는 못한다. 성장 과정이 빈약하기에 그녀의 성취는 눈부시지만 진정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태생적인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크루엘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빌런의 기원을 다루는 동화와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 아이가 그들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1970년대 영국의 현실을 동시에 풀어내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당시 시대상의 한계를 조명하고 모순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일탈하게 되는지를 깊이 탐구하는 대신 그 시대의 분위기와 문화만을 취사선택해 동화를 뻔하지 않게 포장하는 데 몰두한다. 그 결과 마치 아웃사이더의 음악이자 문화였던 펑크 록이 주류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 정체성을 잃었던 것처럼, <크루엘라>도 디즈니의 안정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동화가 구체적인 현실의 맥락 안에 담기는 순간 빚어지는 모순을 피하지 못한다.
이러한 모순은 <크루엘라>에서 유독 배우들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쁘게 보면 배우들의 개인기에 의존하고 좋게 보면 그들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연출 덕분에 영화의 본질적인 한계와 단점이 효과적으로 가려지기 때문이다. 당장 영화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크루엘라가 출생의 비밀을 모두 깨닫고 마음을 다잡는 분수에서의 독백 장면을 보자.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철저히 엠마 스톤만을 원 테이크로 잡아내면서 그녀의 카리스마와 연기력에 모든 것을 맡긴다. 이에 <이지 A>나 <헬프>와 같은 작품에서 이미 기존 질서나 방식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캐릭터를 기가 막히게 소화했던 엠마 스톤은 기대대로 배신감, 충격, 혼란, 분노, 복수심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선을 손에 잡힐 듯이 표현해낸다. 그 순간 크루엘라가 대변할 수 있는 여러 현실과 상황, 맥락은 시야에서 제외되고 단지 그녀의 다음 행보와 선택만이 눈에 들어온다.
예고편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크루엘라>는 디즈니의 <조커>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았다. 흑백의 대비가 가득한 헤어스타일과 의상, 주위를 압도하는 주인공의 카리스마, 반사회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던 장면 하나하나의 첫인상은 그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큰 기대 속에 모습을 드러낸 <크루엘라>는 결코 <조커>가 될 수 없는 영화였다. 빌런을 빌런답게 묘사하면서 관객들과 캐릭터 간에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려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커>는 한 개인으로서 아서 플렉이 어떻게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조롱당했는지, 그의 분노가 얼마나 강렬했고 그의 공격적인 태도에 왜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는지를 관객들이 불편해할 정도로 깊숙이 들여다본 영화였다. 그러나 <크루엘라>는 그 불편함의 자리에 원작 애니메이션과 연결고리를 확보하기 위한 여러 팬서비스를 집어넣으며 <조커>와 대비를 이루는, 너무나도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크루엘라>는 큰 기대에 비하면 디즈니가 빌런을 주인공으로 삼아 제작한 영화들 중 가장 위험하고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데서 만족할 뿐, 그 이상의 성취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A(Acceptable, 무난함)
주인공도, 영화도 진짜 도전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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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서구 - 551분 이라는 시간, 그 안에 담긴 2년의 세월
영화중에서도 보기 힘든 영화가 있다. 여기에서 보기 힘들다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영화가 어렵거나, 수위가 높거나, 말 그대로 접하는 것 자체가 힘들거나. 왕빙 감독의 영화 철서구는 마지막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먼저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놀란 점은 이 영화에게 바치는 수많은 평론가들의 찬사와 호평도 있었지만, 특히 '러닝타임'이 놀라웠다. 필자가 과거에 러닝타임이 길었다고 평한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3시간 58분), '아라비아의 로렌스(3시간 48분)', '유레카 (3시간 38분)', '아이리시맨 (3시간 30분)'의 러닝타임 따위는 우습게 뛰어넘는 9시간 11분이라는 러닝타임은 필자에게 안 당황스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기가 들어서 더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필자말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건지, 2020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관객들의 선택 2위를 차지했다) 대체 감독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서 551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쓴 걸까. 보고 나서 느꼈다. 아, 551분을 날린게 아니구나. 그 시간을 써서 담고 싶은 게 있었구나. 이걸 읽어보고 괜히 러닝타임 기니 있어보이는 척 하고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하지 마시길. 단순히 러닝타임이 길다고 호평받는 거라면 '모던 타임즈 포에버 (2011, 10일)'는 시민 케인, 게임의 규칙을 뛰어넘는 걸작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철서구는 왕빙 감독이 2년 동안 철서구의 주민들과 직접 생활하며 공업지구의 쇠퇴와 그 주민들의 삶을 그대로 담은 영화이다. 왕빙 감독이 단순히 영화를 찍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진심으로 다가갔다는 것을 느낀 것은, 주민들이 카메라 앞에서도 꺼리낌없이 삶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1부에서는 카메라가 있어도 서로 싸우고, 씻고 나온 공장 직원의 성기가 그대로 보이기도 하니) 러닝타임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관객들에게도 감독 처럼 그들의 삶을 최대한, 가능한 직접 느껴보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시간 11분은 하루에서는 학교에 있는 시간, 근무 시간보다 조금 더 되는 시간이지만 2년이라는 세월에 비할바는 못된다. 다만 영화관에서의 9시간 11분은 긴 시간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어느새 그들의 삶을 직접보고, 직접 느끼게 되며 그들의 삶에 공감하게 된다.
필자가 본 영화들 중에 정말 잊지 못한 경험이 될 정도로 좋은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정말 보기 힘들다. 러닝타임이 긴 것도 그렇고, 애초에 정식 수입이 된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보기 힘들 수 밖에 없다. 영상도서관이나 필자처럼 영화제 상영으로 봐야하는 수 밖에. 현재 유튜브에 업로드도 되어있지만 집에서 보면 이 영화의 의미는 희석된다고 생각하기에 추천 하지 않는다. 어떠한 외부 요인의 개입 없이, 영화 스크린과 나만의 커뮤니케이션, 교감만이 있는 씨네마에서 봐야 감독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번 보기는 정말 힘들지만, 한번 꼭 본다면 분명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두 번 보기도 힘든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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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스마트 리뷰 -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북스마트 #하이틴 #B급감성
꿈도, 연애도, 다이어트도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은 스무 살이
가장 기대되는 나이 열아홉♥아이비리그에 합격한 ‘에이미’와 ‘몰리’는
대학과 스펙이 인생의 전부라 믿는 파워 범생이.춤은 글로, 파티는 책으로 배운 두 사람은
고3의 마지막 졸업 파티에서
잊을 수 없는 레전드 핵인싸가 되기 위해
사상 초유의 일탈을 계획하는데…
‘지금 이 순간 아니면 절대 할 수 없어’이 구역을 뒤.집.어.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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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원하는 Last Night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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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홈 리뷰」당신이 느꼈을 점을 세세하게 담아냈습니다ㅣ스포주의ㅣ자막을 위주로 봐주세용ㅣSweet home reviewㅣ
?"스위트홈 리뷰(*스포주의)"
뭐 저는 고민시 배우가
발레하는 거 봤으니까 만족입니다^^*- "스위트홈" 시놉시스1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10대 소년. 현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직은 사람이니까. 이웃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스위트홈" 시놉시스2
끔찍한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 고등학생 현수는 그린 홈이라는 낡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점차 그린 홈에 관한 비밀을 깨닫는다.
왜곡된 인간 욕망을 여러 가지 형태로 투영하면서 인류를 몰아내려는 괴물이 그린 홈을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해 그린 홈 주민들은 그 괴물들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스위트홈" 정보
공개일: 2020년 12월 18일
화수: 10부작
제작: 스튜디오 드래곤, StudioN
장르: 호러, 크리처, 생존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
연출: 이응복
극본: 홍소리, 김형민, 박소정
출연: 송강, 이진욱, 이시영, 박규영, 고민시, 고윤정
원작: 네이버 웹툰 스위트홈
시청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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