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9-06 07:46:55
나를 억누르는 문제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겠다는 결심
〈어느 멋진 아침〉 리뷰

파리에서 통역사로 일하며 생활을 꾸려가는 산드라. 그녀에게는 여덟 살 난 딸이 있고,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가 있다. 오랜 친구인 클레망과 새로운 사랑을 싹틔우는 중이기도 하다. 행복과 슬픔이 수시로 교차하는 평범한 일상이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요양원에 들어가야만 할 상황이 된다. 철학 교수로 제자들에게 존경받아온, 집안을 온통 책으로 채운 아버지의 현재는 산드라를 슬프게 한다. 그녀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떤 책을 버리고 어떤 책을 남길지를 고민하는 장면은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부모의 삶을 자식이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을 던진다. 수많은 책으로 빼곡히 채워진 아버지의 서재는 그가 평생을 걸쳐 모아온, 즉 아버지 선택의 누적이다. 즉 아버지의 장서는 아버지의 삶 궤적의 일부다. 때문에 어떤 책을 버리고 간직할지의 문제는 아버지 삶 중 무엇을 취하고 기억할지의 문제다. 기억을 잃고 기본적인 활동에마저 돌봄이 필요해진 아버지 앞에서, 산드라는 그녀가 받은 돌봄을 되갚는 동시에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 삶을 갈무리하는 책임을 부여받는다. 많은 사람이 정답을 알지 못하고 현실에서 끙끙거릴 수밖에 없는 문제에 놓인 것이다. 요양원 비용과 건강 상태에 따른 요양원 변경 등의 현실적인 문제도 그만큼 어렵다. 돈이 넉넉하다면 고급 사설 요양원을 택하면 되고, 공공 요양원 인프라가 넉넉하고 탄탄하다면 별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산드라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산드라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그러나 산드라의 일상에는 기쁨도 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첫째다. 연애, 성애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산 지 오래지만 산드라는 딸과 주고받는 사랑에서 전자의 결핍을 메운다. 클레망은 그런 그녀에게 오랜만에 설렘을 선물한 남자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클레망은 유부남이다. 산드라와 사랑을 나눈 후 늘 그의 법적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둘은 클레망의 일정이 허락할 때만 만날 수 있고 부인과 이혼하겠다는 클레망의 약속은 자꾸만 유예된다. 그는 어느 날 갑작스레 가족을 버릴 수 없다며 이별을 선언하고는 이내 역시 너 없인 못 살겠다고 돌아오는 영 미덥지 않은 남자다.
문제는 산드라의 마음이 클레망의 변덕에 쉬이 휘둘리는 취약한 상태라는 점이다. 산드라는 자주 눈물 짓는다. 아버지 때문이기도 하고 클레망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 마음의 면역력은 극도로 떨어진 상태다. 감당하기 벅찬 문제는 우리를 배려하지 않는다. 순차적으로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로 인해 씨름해야 하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수시로, 제멋대로,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수시로 솟구치는 산드라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일상의 자극에 민감하며, 최선이 아닌 대상에게도 끌릴 때가 있다. 당장 내게 위안을 주는 존재는 그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산드라의 문제를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안락사를 논의해야 할 만큼 상황이 악화되고, 클레망은 여전히 가족과 산드라를 동시에 갖겠다는 듯 군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어느 멋진 아침’의 풍경이 나쁘지만은 않다.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산드라를 수시로 눈물 흘리게 하는 상황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인데도 그렇다. 도대체 왜일까? 많은 평범한 사람이 산드라와 같은 삶을 산다. 대체로 괴로워하고 드문드문 행복해하는 그런 일상 말이다. 감독은 그런 삶이 반드시 고통으로만 가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도 종종 기억할 만한 멋진 아침이 찾아온다. 우리는 그 순간을 만끽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또 하루를 살아가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할 수 있을 테니까. 나를 짓누르는 문제가 내 삶을 온전히 잠식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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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영상
#1 [네오는 테스형♪] https://youtu.be/gckW2TYRFMc
#3 [빨간 옷의 여자] https://youtu.be/X_fQcoytk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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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미스는 왜 졌을까] https://youtu.be/Uas0KZDCQec
*추천영상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리저렉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 라나 워쇼스키
각본: 라나 워쇼스키, 알렉산드르 하몬, 데이비드 미첼[1]
제작: 라나 워쇼스키
음악: 조니 클라이맥, 톰 티크베어
촬영: 존 톨
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앤 모스 외
제작사/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1년 12월 22일, 한국 12월 22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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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돌아온 공룡!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이렇게 맥없는 퇴장을??
?Rabbitgumi 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공룡들이 다시 극장에 찾아왔습니다.
90년대에 만들어진 쥬라기 공원 시리즈도 엄청난 사랑을 받았었는데요.
2015년 부터 시작된 쥬라기 월드 시리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쥬라기 공원과 동일한 세계관에서 발생된 일이다보니,
이번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에서는 오리지널의 세 박사님들도 등장하게 되죠.
과연 이번 영화는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었을까요?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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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원피스> 공식 티저 예고편
오다 에이이치로가 그린 사상 최고 인기 만화를 실사로 옮긴 작품, 그 대망의 첫 영상을 지금 공개한다. 《원피스》, 8월 31일 출항.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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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 티저 예고편
화났을 때 더 귀여운 [메이의 새빨간 비밀] 티저 예고편 공개!
메이 진정해! 아냐 진정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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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와 연대 사이의 사랑
6★/10★
2023년, UN 자문기구에서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핀란드를 꼽았다(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인 57위다).* 무려 6년 연속 1위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을 테다. 지상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을 비춘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국제비평가연맹이 선정한 2023년 최고의 영화로 꼽히기도 했다.
안사는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홀라파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안사와 기계로 무언가 작업을 하는 홀라파의 표정은 건조하고 권태롭다. 색깔에 비유한다면 무채색의 느낌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어 보이고, 조금은 염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한 술집에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낀다. 통성명도 없이 데이트를 이어가던 둘. 그러던 중 안사가 홀라파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며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런데 홀라파는 그만 그 종이를 잃어버린다. 홀라파는 둘이 함께 있던 곳을 돌며 안사를 수소문하고, 홀라파의 연락 없음에 실망하고 있던 안사를 다시 만난다.
영화에서, 노동 현장에서의 생기 없는 표정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때의 표정은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닌, 안사와 홀라파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이들은 일할 때는 활력을 잃고, 사랑할 때는 기운이 샘솟는다. 불안정한 직장에서 당장 눈앞의 생계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설렘과 애타는 마음으로 감정이 들끓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이토록 선명한 대비의 공존은 둘의 사랑을 ‘연애’인 동시에 ‘연대’로 만들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비정규직이다. 그들의 고용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의미다.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관리직원에게 자그마한 트집이라도 잡히면 바로 해고다. 실제로 둘의 직업은 수시로 바뀐다. 안사는 마트에서 버리는 물건을 챙겨가다가 해고당하고, 고용주가 마약 거래를 하다가 체포돼 직장이 사라져 일거리를 잃는다. 홀라파는 항상 조금은 술에 취해 있는 것이 걸려서 해고당하고, 장비 노후화로 산재를 당해도 그 원인이 술로 돌려져 해고당한다. 그럼에도 빈털터리인 둘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는 흐릿하게만 보이던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연애와 연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라디오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채널을 바꾸거나 꺼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지만,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방송을 들으며 같은 감정을 느낀다. 커다란 폭력은 사람들의 유대와 연대, 일상을 파괴하며 개별 인간을 단절시키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위축된 채 서로 떨어져 있다는 공통적인 처지에서 무언가를 벼려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연출이다. 투박하고 고전적인 화면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는, 종종 능청스럽고 뻔뻔하며 동시에 비장한 대사와 만나 웃음을 자아낸다. 사회적 체면이나 가식 따위에 대한 고려 없이, 때로는 ‘망상’에 가까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은 영화가 그려내는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과 그럴듯하게 어우러져 잔잔하면서도 파격적인(?) 코미디의 효과를 자아낸다. 산재로 병원에 입원한 홀라파에게 안사가 키스한 후, 그가 눈을 뜨는 장면은 이와는 또 다른 패러디의 효과를 낸다. 연애와 연대 사이의,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일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들이 거주하는 세계로부터 반전될 수 있음을 무채색 세계에 따뜻한 유머를 곁들여 알려준다.
*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31210010002697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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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후회, 미련, 아쉬움, 기대, 그리고 헤어질 결심
어느덧 꾸준히 글을 쓰기로 한 지 1년 가까이가 되고 있다. 어찌 보면 영화평론가라면 평론가인 나다(무려 내가 쓴 글로 돈 받아본 적 있음). 사실 이 아이디어를 주위의 그 누구에게도 받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덧붙여서 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난 세상이랑 대화하려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 영화라고 하는 것이라면 꾸준히 뭔가 세상과 대화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그래도 세상 사람들 다수에게 설명할만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있구나!'라는 걸 눈으로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가끔 이야기보다 영화가 더 중요한 작품을 몇 번 만난다. 작년엔 <드라이브 마이 카>, <노매드랜드>, <당신얼굴 앞에서>, <소울>이 그랬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소설가의 영화>나 <우연과 상상>이 그럴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사실 수다 떠는걸 더 좋아하는 쪽에 가까운 나. 장르적으로 엄청난 영화를 보고 느끼는 소름보다 반응이 좋은 것에 행복해지는 나라 가끔은 이게 일 같이 느껴진다. 뭐 실제로 그런 축에 속하기도 하겠지? 회사도 잘되고 나도 잘되면 그게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일일 테니.
그리고 2022년 6월 29일, <헤어질 결심>의 개봉날이 왔다. 어떤 말을 해야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뭐 영화에 대한 불호 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 강하게 압박하는 듯한 영화였다.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 치밀한 감정, 각본의 완성도까지 이 영화는 글로 쓰는 게 두렵다고 느껴질 정도로 걸작 중 걸작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그렇게 느꼈었다. 근데 이 영화는 그 마음이 더 커진 채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글 쓰는 게 무섭다. 내가 다 담아내지 못할까 봐; 또 이 영화를 보고 먼저 생각나는 것은 주위 사람들과 감동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먼저 생각난 셈이다. 2022년 여름, 칸을 경유해 우리나라에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깐느박'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산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 살인 사건에 형사가 출동했다. 동료이자 부하인 수완과 함께 등장한 해준. 피해자는 등산을 좋아하는 공무원 출신의 아저씨다. 높은 바위에서 몸이 두 번 부딪혀서 사망한 게 사인이었다. 수사를 지속하는 해준과 수완. '굳이 이렇게 해야 할까?'라는 말이 무색하게 해준은 우직한 사람이다. 무얼 하든 책임감이 있는 해준. 경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용의자를 하나둘씩 찾아보려 한다. 그런데 막상 용의자라고 할 사람도 한 명 밖에 없었다. 피해자 기도서의 아내였던 서래. 기도서는 서래에게 그렇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도서는 자기 물건에 이니셜을 새기곤 했는데, 아내 서래의 몸에도 그 인장을 박아놓았다. 또 가끔 손찌검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이유인가? 서래는 남편의 죽음에 단 조금도 개의치 않는 느낌이다. 무덤덤한 서래. 해준은 이상함을 느낀다. 베테랑 형사의 촉이 발휘되는 것 같다. 이상한 게 있어. 용의자 심문을 통해 한 두 마디 나누는 서래와 해준. 해준은 다시 한번 촉이 왔다. 이 여자, 뭔가 있다.
이 '뭔가 있다'라는 촉은 금세 행동으로 이어졌다. 차와 망원경 하나를 가지고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 먼발치의 아파트 밖에서, 그리고 차 안에서 서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수면장애가 있는 게 도움이 됐나? 밤에 잠들 틈도 없이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 원전에서 일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해준은 미행에 형사 일에 몰입하게 된다. 이 호기심과 관심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스마트워치에 일기처럼 서래의 행보를 저장하는 해준. 근데 서래도 이상하다. 해준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놔두기 시작한다. 마치,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이 둘의 사랑은 그렇게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진행됐다. 멈추기엔 너무나도 멀리 온 상황 속에서.
필모그래피가 갖고 있는 장점 그대로
박찬욱 감독이 워낙 유명하신 분이다. 한국영화의 팬이 아니더라도 <올드보이>는 한 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작품으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으니 <기생충> 이전에 한국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어느 정도 이끌었다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왜 인기가 많았나?라고 생각하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초반부 특정 인물의 자해, <올드보이>에서 장도리 액션신, <친절한 금자씨>에서 '너나 잘하세요', <박쥐>에서 '해피 버스데이, 태주 씨'까지 박찬욱은 아름다운 장면을 넣어 관객의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게 하는 것에 특화된 인물이다. 이때 기억에 남게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올드보이>처럼 인물에게 감정 이입시켜 후반부에 폭발하는 에너지도 가능할 것이다. 또 <박쥐>처럼 색감을 잘 활용할 수도 있고 <복수는 나의 것>처럼 무미건조함으로 극을 시종일관 이끌 수도 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이영애 배우에게 그런 에너지를 만든 것도 감독의 장점을 새기는 훌륭한 디렉팅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장기가 전부 들어갔다. 우선 대사를 잘 썼다. 일단 이 영화를 다양한 매체에서 검색하면 '마침내'라는 단어가 주요 한줄평에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 처음 서래의 입에서 나올 때 이질감 느껴진다. 금세 <종이의 집 : 공동 경제구역>이 생각난다. 직접적인 대사와 이질감이 드는 대화 톤이 단점으로 발현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닌데 아쉬운 감은 있다는 뜻이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는 위 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영화 이야기 전개는 익숙하면서도 굉장히 색다른 방식이라 '마침내'라는 결론을 내기 충분하다. 어찌 보면 엥? 싶은 대사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 셈이니 정서경-박찬욱 두 사람의 설계가 꼼꼼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엔딩으로 달려가는 힘은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썼지만 '마침내'라는 단어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그렇게까지 이야기 전개가 빠른 편은 아니다. 얼핏 보면 서래와 해준이 알듯, 말듯하게 마음을 꺼내 보이는 장면의 연속이다. 이 두 사람의 미묘하게 꺾이는 감정선의 힘이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잉크가 서서히 퍼지듯 영화에 녹아들게 된다. 뭐 사람에 따라 어떤 영화의 이야기가 빠르다 느리다 주관적으로 갈릴 순 있겠으나, 중후반부까지 달달했던 영화의 이야기가 후반부까지 전력질주로 달리며 강력한 에너지로 치환되는 느낌마저 든다. 이는 <올드보이>에서 하이라이트 신을 위해 오대수의 입장이 변화되는 부분이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잔잔하고 심심한 듯 하지만 오히려 이게 관객에게 압박 비슷하게 작용하는 지점이 감독의 특장점이 발휘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해일-탕웨이 두 배우의 퍼포먼스 역시 탁월했다. 일단 해준 역을 맡은 박해일 배우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서래가 중국인이고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대가 말을 이해하기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패널티가 있다. 근데 이건 우리 관객에게도 적용된다. 관객이 보기에도 '이 사람이 정말 서래에게 마음을 열고 있구나'라고 느낄만한 순수한 비주얼이 장점이 되어 극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눈빛 하나, 행동 하나가 정말 사랑에 빠진 인간이라고 보기 충분하다.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 사람의 입장 헤처 나가기는 점점 난이도가 올라간다. 이를 소화하는 좋은 연기였다. 또 탕웨이 배우의 연기는 전 세계에서 이 사람만 가능한 연기다. 목소리 톤,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맞이하는 인간, 역시 로맨스 영화의 여주인공까지 우리가 탕웨이라고 기억하는 이미지에서 한 단계 스탭업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아마 우리나라 영화 팬들에게 탕웨이 배우의 인생작으로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는 연기였다. 이 부분(서래의 캐릭터성)을 설명하는 건 영화에 굉장히 중요해서 직접 보시는 걸 추천한다. 그녀의 입장을 견지한 채로 그에 맞게 영화를 봐도 이 작품은 걸작이다. 아, 두 배우 말고 다른 분들도 연기 잘했다. 특히 김신영 배우 인상깊었다. 취조하는 신 멋있었다. 일단 표정부터 '나 이 영화 피해 안 끼치게 잘해야 함'이 묻어나와서 귀엽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이 천재는 영화 판에서 자주 쓰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중요한 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수도 없이 봤던 미장센의 힘이다.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의 3색이 영화의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산속에서 낑낑대며 등산하는 장면, 서래의 집 벽지, 해준의 집 벽지, 바다 두 곳, 석류 자르는 모습, 통역 앱 등등 영화 장면 장면마다 장인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들어가 있다. 또 메타포도 적절히 들어간다. 일단 위치에 의한 비유다. 위에 누가 있고, 아래에 누가 있는지를 염두하고 보시면 영화의 감상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언어에 대한 비유도 상징적이다. 언어가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감독이 뭘 보여주고 싶었을까?를 생각해보시라. 이 아이러니에서 오는 감정이 여러분도 마음속에 깊이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님은 갔지만 난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영화가 탁월한 또 다른 지점은 제목에서 온다. 제목을 잘 짓기도 했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헤어질 결심>이라는 마음 그 자체다. 내가 경험하거나 주변인에게 들었던 사랑 이야기는 참 헷갈린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날 사랑했을까? 아닌가? 그 사람에게 나는 도구였던 걸까? 아니면 잠깐 불탔던 무책임함일까? 이 얄궂은 마음의 엇갈림은 인간에게 오랜 과제처럼 남는다. 정말 사랑했을까?
이 영화는 이 엇갈림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강점이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이거 설명할 수 있을까? 할 수는 있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 공통점이라는 것도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022년 6월 29일 18시 10분에 사랑에 빠짐'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공통점이 이거여서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말할 수는 있겠지. 근데 둘의 입장이 정확히 딱 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서로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 심지어 첫눈에 반한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공통점을 보고 사랑이 깊어지는 경우가 다수였다. 그 깊어진 사랑을 재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 맞지?' 식의 배타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근데 무슨 솔로몬도 아니고 그걸 일일이 직접 다 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모호함이 사랑이 주는 낭만과 비극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이 알듯 말듯한 마음의 차이점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어떻게? 듬성듬성 설명하는 방식으로. 가타부타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설명을 일일이 다하고 서래가 얼마큼 이쁘고 해준이 얼마나 착하고 구구절절이 다 쓰면 재미가 없다. 영화에서 해준-서래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영화에 제시되는 장면이 전부다. 그냥 단지 감정선만 따라가는 형식으로 오히려 영화가 완벽한 설명을 성사시키는 셈이다. 이 '듬성듬성 보여줘서 완벽한 설명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지 않은 분들이 극장에서 확인하시면 좀 더 폭넓은 감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마음의 엇갈림'이라는 모티브를 작품이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는 각자가 보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다.
찰싹 달라붙는 각본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미장센의 힘을 강점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느꼈다. 실제로도 장면 전환이나 촬영 구도나 우리나라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 함이었다. 그러나 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직도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왜 <헤어질 결심>일까. 이 영화는 굉장히 외로운 방식으로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해낸다. 그리고 그 외로운 설명 방법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마침내 행복한" 결론으로 마무리짓는다. 이 아름답고 품격 있는 사랑 이야기는 여러분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서래의 사랑에 빠져버렸다. 난 이 영화를 나이가 들어서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각본이 갖고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카데미에서 볼 수 있기를
이 영화로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의 팬으로서 경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오래 기다려서 봤다. 솔직히 아쉽다. 감독상도 큰 상인데, 심사위원대상이나 황금종려상까지 받을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아카데미를 기대하고 싶다. 글쓴이는 충분히 국제영화상을 비롯해 작품상이나 감독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걸작이라고 봤다. 이 영화는 사랑했기 때문에 남겨있던 감정 모든 것을 괄호 치기의 미학으로 설명한다. 이런 사랑영화는 본 적이 없다. 걸작이다. 내가 생각하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다. 그리고 이는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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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을 향한 발걸음
글은 영화, 소설 [파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과]를 읽었는데 [파쇄]를 안 읽었다? 읽고 오십시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보통 소설을 원작으로 한 제2 창작물이 만들어질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정말 충직하게 원작을 따른 사실주의 그림처럼 되거나, 내가 분노하다 못해 매번 거론하는 [나는 전설이다]처럼 완전히 다른 작품과 색깔로 피카소식 해석을 하거나. 그리고 그 어디에의 중간에 걸쳐져서 감독이 모자이크처럼 여기서 저기서 조금씩 떼어 붙이거나. 그러나 세 가지 방법 중 어떤 특별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영화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원작을 어떻게 그리느냐. 혹은 원작에서 관객들이 원하는 것을 얼마나 살리느냐. 에 제2 창작물의 승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파과]가 선택한 방법은 마지막 방법이었다. 작품의 전반부는 원작의 서사를 잘 압축하고 적절하게 베어 넣어 배치했으며,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소설의 분위기도 눈앞에서 안개처럼 펼쳐진다. 물론 거기에도 변주라고 할 법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슬릴 정도의 큰 프레임의 이동은 없으며, 그 변화로 인해 주요 메시지가 숨거나 해석되지 않게 가면을 쓴 채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나마 사람에 가까웠던 이름인 [손톱]이었던 시절이건, 이젠 짐승만도 못한 인간에 가까워 보일 이름인 [조각]으로 살고 있는 지금이건. 그녀는 여전히 한쪽 마음에는 깊은 상실을, 그리고 발걸음에는 우울한 쇠퇴함을 잔뜩 묻힌 채 목표물을 향한 관심도, 시선도 거두지 않았으니까.
사진 출처:다음 영화
변주라고 부를 법한 감독의 모자이크는 후반부 1/3 지점부터에 포진되어 있는데. 여기서 아마도 이 영화의 승패 까지는 아니더라도 선호도 정도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원작의 시점은 철저하게 그녀의 시점에서 풀이되고 있다. 그녀의 독백(방백이려나)을 따라가다 보면 으스러지는 것은 그녀의 타깃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마음마저도 함께 조각조각 찢어져 나부끼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원작과 노선을 달리 하는 그 순간에는 “늙고 쓸모없는”과 ”상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전설의 위대함”, 그리고 “관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덕분에 책에서는 그다지 강조되지도, 그렇다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액션 장면들이 으스대며 들어설 자리가 생기고, 지나가기 바빴던 인물들도 한 번씩 고개를 돌려 관객들과 눈을 맞출 시간이 생긴다. 또한 자신을 생의 마지막 1분이 남은 시점에서야 알아보고 투정을 부리는 듯한 투우(김성철)의 모습을 보면서. 이 두 사람 간의 애증에 대해 좀 더 느낄 수 있도록 여운을 얹는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하지만 마치 구전설화처럼 전해지던 그녀의 위용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순간은. 독백을 고집했던, 혹은 그녀의 시각으로만 해석되던 전반부의 장면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후반부에 갑자기 강조된 투우의 시점 덕에 그녀에게만 향하던 집중력이 조금 흩어진다고 느꼈다. 그리고 [파쇄]에서 따온 듯한 킬러양성 법칙 101의 마지막 단계(?)는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아 삼켜 내는 것이 조금은 껄끄러웠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은 손톱이자 조각이며, 누구에겐 더 이상 만들지 않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대모님이 되어버린 그녀. 이혜영에 의해 완벽하게 정리된다. 눅눅하기 그지없는 영화 속에서 날이 바짝 선 칼 같은 예리함으로. 바스러질 것만 같은 육신으로도 냉담하게 일을 해내는 원작 속의 조각을 정말 눈앞에 가져다 놓다 못해 애초에 이 업계(?)에서 한평생을 산 것만 같은 모습인 그녀 덕에 말이다.
그녀는 영화에서 톡톡 튀어나온 부분을 친절히 잘라내고 얇게 저미고 천천히 갈아 내게 내밀었고. 나는 가루약을 받아 든 어린 투우가 되어 고개 한 번 끄덕인 채 쓴 약을 꼴깍꼴깍 삼켜낼 수 있었다. 그녀가 이제 곧 사탕을 줄 거야.라는 기대와 함께.
마치면서
사진 출처:다음 영화
엔딩 크레딧이 이렇게 반가우면서도 아쉬울 일인가 싶었다. 이 생각과 함께 찾아온 안도와 동시에 배어 나온 깊은 한숨은, 마치 영화 내내 긴장하고 있던 나의 모든 신경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는 토닥임처럼 다가왔다.
영화의 본체가 되는 소설 [파과]와 함께 스핀오프 같은 소설 [파쇄]까지 일 하는 척하면서 단번에 읽어 내려갔던 이후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기쁘면서도, [원작 잘 살리기] 위원회(같은 게 있다면) 상무(자리 정도는 차지했을 나 같은 인간)인 나에게는 마치 조각 그녀가 지니고 다니는 비녀의 날 끝처럼 나를 쿡쿡 쑤셔댔다. 고통이라 불러야 할지. 희열이라 느껴야 할지. 조각(이혜영) 그녀가 류(김무열)에게 품었던 마음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아슬아슬함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영화를 기대하기도. 그러면서도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가 가져다준 만족감은 소설 말미에 조각이 느꼈을 해방감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감정과 제법 닮아 있었기에, 새로운 시작 앞에 당도하고 나서야 내보인 킬러 조각의 뒷모습에 대고 슬며시 웃을 수 있었다.
킬러의 뒷모습이 이렇게 반가워서 될 일인가 싶지만. 바뀐 그녀의 마음 때문에 기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매번 상실을 안겨야 할 상대의 모습만을 바라보던 그녀는. 등을 돌려 자신이 상실해 온 것을 향해 달려가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일 테니까. 스스로에게는 어쩌면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했을 부분을 대담하게 드러낸 그녀가 더 강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용이 너무 귀여워(?)
[이 글의 TMI]
1. 인간적으로 빵 어떻게 끊는지 아시는 분?
2. 인바디 체중계 산 뒤로 매일이 충격의 연속임.
3. 오예 연휴 시작
#파과 #민규동 #이혜영 #김성철 #연우진 #김무열 #한국영화 #액션장르 #소설원작영화 #구병모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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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으로의 끝없는 도피
26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
* 본 게시글은 시사회를 통해 개봉 전 관람한 후 작성한 후기이며,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크리에이터로써 참여하였습니다. 줄거리의 일부가 기재되어 있으니,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나는 도망친다. 광신도 엄마와의 주일 봉사에서 도망쳐 어린 딸을 보러 가지만, 때로는 짐짝처럼 느껴지는 딸로부터 도망치기도 하고, 고객의 불평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헤드셋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나는 미혼모가 된 이후에는 음악으로부터 도망쳤고, 위탁 가정에서 딸을 데리고 오기 위해 엄마로부터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대회에서 우승해 베를린으로 가고 싶은 열망 또한, 성취보다는 도피에 가까운 감정임을 이나는 알지 못한다.
이나에게 대화는 고통과 동의어로 작용한다.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억압하고, 때로는 벼랑 끝으로 내몬다. 갖은 불평을 토해내는 엄마와, 빨리 아이를 입양보내자는 위탁 아주머니의 말들은 언제나 너무 아프다. 서로가 피로해지는 대화는 단절되는 편이 낫다. 그래서 그는 전화를 피하고, 헤드셋을 쓴다. 콜센터의 한가운데에 앉아 파티션에 입이 가려진 동료들을 보며, 이나는 마치 그들도 자신과 함께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바닥이 울릴 만큼 선명한 음악만이 이나를 붙잡아세운다. 그러니 이나는 계속해서 외면하고, 도망친다.
그마저도 완전한 도피는 불가능하다. 엄마의 망치질 소리는 신경을 긁고, 음악으로 가득찬 공간에서 휴대전화 진동음은 맥락을 끊어 버린다. 이나를 음악으로 대표되는 인물로 상정했을 때, 엄마의 전화는 불편하고 이질적인 장애물로 작용한다. 어쨌거나 이나의 최종 도피처는 돌고 돌아 결국 음악이다. 음악은 존재 자체로 숨을 틔우고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는 듯 보인다. 그토록 바라던 음악으로 다시금 돌아왔건만, 그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음악이 즐겨지지 않는다"며 베를린으로 꼭 가야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이나는 이러한 괴리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음악이 즐겨지지 않는 이유는 이나가 음악을 '꿈'이 아닌, '도피처'로 택했기 때문이다.
내내 도망치기만 하던 이나는 미친 것 처럼 보이던 엄마가 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사건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엄마에 대한 모난 감정들은 점차 깎여 나가고, 음악에 자전적인 요소들을 녹여냄으로써 둘의 갈등은 해결되는 듯 보인다.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나는 마지막에 걸려온 전화가 베를린 컴피티션의 합격 전화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나가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음악을 도피처로 여기지 않고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똑바로 마주보고자 다짐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나는 현재 아이와 엄마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기에 베를린은 더 이상 이나에게 해결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나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졌을까?
<둠둠>은 이나와 엄마의 갈등으로부터 점철된 한국 사회 내 미혼모의 위치에 관한 메세지를 계속해서 던진다. 나는 이나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나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찾았다고도 할 수 없다. 이나는 여전히 미혼모 가정 지원금을 받지 못할 것이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양육비를 대기 위해 더 힘겹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국적과 연령이 서로 다른 세 여성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엮인다. 이나가 베를린으로 갔다면, 태국인 여성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고, 이나가 나이가 든다면 엄마와 유사한 사회적 지위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나는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다. 엄마 또한 이나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나는 엄마의 애정을 거부하고, 어긋난 애정은 독이라 치부한다. 엄마는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며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나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며 지안이(이나의 딸)의 존재를 부정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기에 이나와 엄마는 끝없이 상처를 낸다.
<둠둠>에서는 플래시백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은 현재의 사건들만 두고서 이나를 응원하거나 탓할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일들은 책임지기로 한 이의 잘못이 아니기에, 논외의 것으로 밀린다. 계속해서 문제상황이 제공되고, 건조하다못해 바스라지는 이나를 보며, 관객은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자꾸만 도망치는 그에게 자연스레 이입하게 된다. 무엇이 그를 도망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는지 사유하는 과정에서 <둠둠>이 단순히 꿈을 찾아 떠나는 유토피아적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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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감정들이 불타지 않고 사그러든다
디즈니의 대표적인 고전 애니메이션을 꼽을 때, <백설공주>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1937년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 관객들에게 ‘하얀 피부에 순수함을 지닌 공주’와 ‘거울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는 여왕’이라는 대비를 각인시켰다. 이 이야기는 사실 독일의 그림 형제 동화를 기반으로 하며, 옛날부터 ‘권선징악’과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장치로 활용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버전으로 재탄생된 <백설공주>는 디즈니 고유의 색채와 어우러져, 뮤지컬적 요소와 마법같은 판타지가 더해져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최근 디즈니가 과거 애니메이션들의 실사화를 적극 추진함에 따라, 이번에는 <백설공주>가 그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다양한 논란이 있었듯, 원작과 달리 백인이 아닌 라틴계 배우(레이첼 지글러)가 백설공주 역을 맡았고, 마녀 여왕은 기존과는 다른 이미지의 갤 가돗으로 캐스팅되었다. 디즈니의 ‘새로운 시도’라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관객들은 “이 캐스팅이 과연 어울릴까?”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무엇보다 <백설공주>라는 고전 서사가 가진 익숙함이 이미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이 실사화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감정을 전달하는지가 관건이 됐다.
[첫번째 감정] 여왕의 욕심
이번 영화에서 백설공주(레이첼 지글러)는 새로 등장한 여왕(갤 가돗)과 대립 구도를 이룬다. 그러나 과거 애니메이션에서 여왕이 가진 욕망이 ‘왕국을 넘어 더 큰 세상까지 지배하겠다’는 식으로 느껴졌다면, 이번 실사판에서 여왕의 욕심은 의외로 꽤나 좁게, 사적인 영역에 머무른다. 여왕은 왕에게 접근해 미모를 무기 삼아 결혼에 성공하고, 결국 왕을 죽음에 이르게하고 왕국을 쥐락펴락한다. 표면적으로는 “정말 사악한 인물”이란 인상을 주지만, 커다란 비전을 가지기보다는 지금 손에 쥔 왕국과 아름다움만을 지키려는 데 급급하다.
이 때문에 여왕의 행동은 치졸하고 쪼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백설공주가 조금 더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든다든가, 성에서 내쫓는 장면은 ‘저게 전부인가?’ 싶은 의문을 남긴다. 물론 동화 속 원전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은” 여왕의 욕망을 보여주지만, 영화 속에서 조금 더 깊은 내면이나 거대한 야망이 드러났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갤 가돗처럼 강인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맡았기에, 여왕의 욕망을 좀 더 웅장하게 그려줄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전반에서 여왕은 끈질긴 악의를 유지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스케일이나 동기에 있어 확장성이 부족하다. 미모 유지에만 집착하고, 백설공주를 질투하는 모습은 너무 전형적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캐릭터성이 관객에게 통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하는 의문만 남기고 만다. 조금만 더 과감한 설정이나 다른 인물들과의 역학을 보여줬더라면, 여왕이 가진 욕심이 제대로 살아났을 텐데 말이다.
[두번째 감정] 조나단의 당당함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왕자가 백설공주를 구하는 존재로 그려진다면, 이번 실사판에서는 조금 다른 감정적 구도가 펼쳐진다. 백설공주의 호감을 얻는 인물은 조나단(앤드류 버냅)이라는, 다소 의외의 캐릭터다. 그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없는 인물로, 더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기 위해 여왕의 음식을 훔칠 정도로 소신 있고 선량하다. 용기와 선함을 겸비했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고 자신도 산 속에서 도적 생활을 하는 처지이다 보니, ‘진정한 리더’로 나아가기엔 장애가 많은 캐릭터다.
백설공주가 조나단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그의 ‘당당함’ 때문이다. 이는 기존 원작에 비해 변화된 지점이기도 하다. 원작 속 왕자는 다소 수동적으로 백설공주와 ‘운명적 사랑’을 맺었지만, 실사판의 조나단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필요한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안다. 그래서 백설공주가 힘들어할 때도 말없이 곁에서 지탱해주며, 사실상 그가 ‘동화 속 왕자’의 역할을 대체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당당한 성격 덕분에 조나단은 백설공주가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결정적인 활약을 보인다. 여왕의 위협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는, 기존 ‘백마 탄 왕자’ 서사를 약간은 새롭게 변주해 낸다. 다만, 도적 신분이라는 설정 때문에 “과연 그가 왕이나 귀족에 비해 충분히 매력적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영화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당당함과 선함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새로운 ‘남성 캐릭터상’을 제시한다.
[세번째 감정] 백설공주의 배려심
이번 실사판의 핵심은 역시 백설공주라는 캐릭터다. 과거 작품들에서 백설공주는 순수하고 착한 인물로만 부각되었다면,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을 기억하고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점이 크게 강조된다. 일곱 난쟁이는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 심지어 적대적인 존재에게도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해볼게” 같은 시선을 보이니, 그 선함의 폭이 훨씬 확장된 셈이다. 사실상 백설공주가 지닌 가장 큰 무기는 ‘배려심’이며, 주변 인물들이 그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후반부를 보면, 백설공주는 여왕과 대결 구도에 서게 된다. 다만 힘이나 마법으로 압도하기보다는, 그녀의 배려심과 공감 능력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의외로 여왕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계기가 되는데, 이를 보고 있으면 “정말 이 정도로 끝나나?” 하는 허전함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동화적 감수성을 생각하면, 백설공주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선함이 “정의로운 벌” 못지않은 힘으로 여왕을 몰아붙인다는 설정을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배우 레이첼 지글러가 이 배역에 완전히 어울리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영화는 그녀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으로 비추며 감정선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지만, 워낙 백설공주의 ‘백인 이미지’가 우리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이 많을 듯하다. 레이첼 지글러가 나쁜 연기를 펼친 건 아니지만, 캐릭터 해석과 비주얼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상을 준다. 이는 어디까지나 관객 개개인의 선입견과 기대치가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결국 애니메이션 원작을 완전히 뛰어넘진 못하는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실사화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 <백설공주> 실사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기본 줄거리는 애니메이션과 동일하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뻔한 전개를 다시 보게 된 느낌이 강하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캐릭터 설정이 조금 바뀌었고, 뮤지컬 영화라는 점에서 새로운 노래들이 추가되었다는 정도다. 하지만 디즈니가 의도한 혁신적 변화라고 하기엔, 이야기 자체가 이미 너무 익숙해 긴장감이나 신선함을 크게 찾기 어렵다.
이번 캐스팅에 대해 반감이 있는 사람들은 “백설공주가 왜 백인이 아니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일곱 난쟁이가 실사로 표현된 어색함까지 지적한다. 실제로 난쟁이들이 전부 ‘작은 키를 가진 배우들’로만 구성되지 않았고,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오가는 모습에서 몰입이 깨진다는 반응도 꽤 많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 조합이 어색한 지점이 존재하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연출을 맡은 마크 웹 감독은 과거 <500일의 썸머> 같은 작품에서 아름다운 화면과 섬세한 감정선을 잘 살려낸 바 있다. 이번에도 화사한 색감과 동화적 분위기를 적절히 배치해, 시각적으로는 꽤 매력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각적 아름다움’에 머문다. 영화 전체의 매력을 완전히 끌어올리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고루하고, 캐릭터 간 호흡 역시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백설공주> 실사판은 디즈니가 최근 시도해온 실사화 프로젝트 중에서도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작을 사랑했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기엔 부족하고, 캐스팅 논란이나 난쟁이 표현 문제로 인해 호불호도 극명해질 듯하다. 물론 뮤지컬적 요소나 화려한 색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굳이 추천하고 싶을 만큼 눈부신 성취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래된 감정들로 가득한 이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불타오르지 못하고 사그라져버린 느낌이 짙다.
따라서 이 작품을 보러 갈지 고민 중인 사람들에게, “거창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전한다. 디즈니의 과거 명작을 실사로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혹은 백설공주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싶다면 시도해볼 만하겠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놀라움은 찾기 힘들다. 일상의 무거움을 잠시 내려놓고, 화려한 색감과 노래가 있는 동화 한 편을 보고 싶을 때 정도에나 가볍게 즐기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오래된 감정들은 더는 뜨겁게 타오르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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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시작점을 다시 쓴다는 것
- 겨울이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가? 누군가에겐 <이터널 선샤인(2004)>일 수도, <러브레터(1995)>나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일 수도 있겠다만 내 대답은 <윤희에게(2019)>이다. 왜일까. 푹푹 내린 눈으로 뒤덮인 흰 풍경 속에서 검은 코트를 입고 선 윤희(김희애)가 막막한 세상의 단독자처럼 보여서일까. 혹은 스무 살을 앞둔 딸을 키우는 중년 여성 윤희가, 외면했지만 여전히 여린 상처를 보듬고 나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라면, 찬 겨울의 중심부에서 찾아낸 이야기의 절단면을 어루만지며 그 시절의 선명했던 감정을 담담히 긍정하는 모습이 찬연했던 탓일지도. 아무튼 2023년 1월의 끝물에 나는 다시 <윤희에게>를 보았다.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영화 <윤희에게>는 과거와 바다, 꿈의 경계를 횡단한 편지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다. 조금 더 풀어내자면 이렇다. 지금은 일본에 사는 윤희의 20여 년 전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이 쓴 고백이 예산에서 지극히 수동적인 자세로 일상을 견디는 윤희에게 도착한다. 정확히는,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에게. 새봄은 몰래 편지를 읽고서 엄마에게 일본 오타루 여행을 제안하고, 오타루에선 쥰의 편지를 몰래 보낸 장본인 마사코(키노 하나)와 합심해 두 사람의 재회를 이끈다.여느 영화가 그렇듯 <윤희에게>를 읽어내는 방법은 무수하기 그지없다. 우선 젠더가 가장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윤희를 억압했던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고, 영화의 구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표류하던 개인의 성장 서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테고, 윤희와 새봄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뤄봄직하다. 당연하지만 쥰에게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그중에서 내가 집중하고 싶은 건 윤희 개인의 내면적 성장 – 그러니까, 스스로가 다시 쓰는 개인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퀴어라는 주제를 깊게 다루지 않는 까닭은 그러한 소수자성이 없는 내가 함부로 꺼내도 괜찮은 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으로, 어쩌면 내 부족함을 유야무야 덮어버리는 회피인지도 모른다.)영화 초입에서 우리가 만나는 윤희는 공허하다. 공장으로 향하는 봉고차에 탄 눈빛엔 힘이 없고, 식당 배급을 하는 그의 일상은 지겨운 굴레처럼 보인다. 심지어 담배를 피우는 가로등 옆의 건물마저 곧 무너질 듯 초라하다. 인생이 그를 어찌나 가혹하게 휘둘렀던지, 이따금 윤희는 자신의 목을 일찌감치 내놓은 연약한 초식 동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윤희가 자아내는 고독이다. 윤희는 대화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마다 단절하는 쪽을 택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기다리고 관찰하기만 한다. 오죽하면 딸인 새봄이 윤희의 태도를 비꼬아 “나 자꾸 신세 지게 만들지 마, 그거 다 빚이야.”라고 말했을까. 그러하니 전 남편인 인호(유재명)가 윤희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한 평가가 완전히 틀리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윤희의 안전거리 확보는 자신을 돌보기 위한 방편이다.윤희가 과거 사랑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는 분명 참담한 배반이었다. 쥰을 사랑한 윤희가 도달한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가족이 윤희를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내어준 선택지는 ‘괜찮은 남자’와의 이른 결혼이었으며, 윤희를 사랑했다던 전 남편은 술에 취해 윤희의 집에 돌아오는 불편한 폭력을 거듭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족은 사진을 향한 윤희의 애정을 알았지만 대학교 사진학과에 진학한 이는 윤희가 아니라 윤희의 오빠였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가 그를 억압할 때, 숨죽여 삶을 이어가야 하는 개인이 가장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결코 전복일 수 없다. 전복엔 적지 않은 용기와 지지가 필요하다.이러한 윤희에게 용기를 더해준 사람은 두 명이다. 쥰이 부치지 않은 편지를 한국에 전한 쥰의 고모 마사코와, 편지를 읽고 대담한 여행 계획을 세운 딸 새봄. 쥰의 고모가 없었더라면 쥰의 편지는 윤희에게 닿지 않았을 것이며, 새봄이 없었더라면 윤희는 오타루로 향하지 않았을 터다. <윤희에게>의 쥰은 의도적으로 편지를 부치지 않았다. 자신은 흘러넘친 마음으로 버거워하면서도 수신인이어야 했을 윤희를 배려한 셈이다. 어쩌면 전윤호 시인의 시구처럼, 쥰이 “때를 놓친 마음은 재난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절절하게 이해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쥰의 고모는 그의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그런데 쥰의 편지는 윤희에게 닿기 전, 새봄에게 먼저 도착한다. 잘못 도착한 것일까? 아니, 결코 아니었다.봄은 그 자체로도 새로움의 상징인데 굳이 새롭다는 의미가 더해진 이름을 가진 윤희의 딸 새봄은, 어린 윤희를 많이 닮았다고 소개된다. 사진에 재능이 있고, 엄마와의 첫 번째 해외여행에 남자친구까지 비밀리에 불러내는 걸 계획할 만큼 배짱이 두둑한 그를 통해 관객은 윤희의 어린 시절을 엿보게 된다. 쥰이 동경했을 사람,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자 친구와 연애한다고 밝혔을 소녀를 스크린 너머로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새봄은 윤희의 후세대인 만큼, 그와 완전히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새봄은 새롭게 쓰이는 과거인 동시에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찬란한 미래인지라, 언뜻 막막해 보이는 윤희의 길을 명랑하게 안내하는 데에 성공한다.이러하니 마사코와 새봄 두 사람의 존재는 일상 속에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항상 우리 곁에 있었기에 낯설지 않은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두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른 윤희와 쥰에게 다시금 사랑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되돌려주는 이들이다. 마사코와 쥰이 포옹하는 씬이나, 일순 새봄이 윤희를 사진에 담아내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은 찰나이고 거창한 수식어도 거대한 감정의 해일도 없지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삶 앞에서 휘청이는 개인을 버티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 건 그런 마음들의 합집합이라는 걸, 또한 알게 된다.잿빛에 가까운 일상에 금이 간다. 금 간 곳엔 항상 빛이 들어온다고 누군가 말했듯, 계기를 획득한 윤희는 공장 조리사로 일하던 기존의 삶을 정리한다. 삭막해 보이는 아스팔트 길을 해방된 얼굴로 걸어가던 그에게 이윽고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삿포로 근방에 있다는 오타루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의 첫 문장을 연상시킨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하얗게 쌓인 눈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을 듯하다. 보내지지 않았던 고백이 편지로 켜켜이 쌓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희고 고요한 오타루에서 검은 코트를 입은 윤희가 남긴 매 순간의 궤적조차 자신의 온 마음이 담긴 편지였으리라.그럼에도 한 번 훼손되었던 마음은 손쉽게 발화되지 않는다. 같은 땅에 있음에도 윤희는 쥰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반면 쥰의 고모와 새봄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끊어진 시간을 잇는다. 애타는 마음으로 꿈에서만 만나던 두 사람이 현실에서 만난다. 동경으로 싹을 틔웠던 마음이 사랑을 거쳐 막연한 그리움으로 변한 시점의 재회였다. 눈 내리는 도시에서 20여 년간 녹색 숲(綠の林)이라는 동물 병원을 운영한 쥰이 새봄이라는 딸과 도착한 윤희를 만난 건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존 버거의 책 『A가 X에게』를 부분 인용하고 싶다. “(…) 나의 하루는 당신의 부재로 시작하지 않거든요. 그건,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을 하기로 했던, 우리가 함께 내렸던 그 결정으로 시작해요.” 모든 걸 견딜 수 없는 순간, 꾹꾹 닫아 두었던 마음의 둑이 터지는 순간조차 부칠 수 없는 편지의 글귀로 남겨두는 두 사람에게 선택지가 다시금 돌아온다. 어떻게 매일을 시작할 것인지, 어떻게 개인의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인지.쥰과 윤희가 숨겨두어 먼지 쌓였을 기억과 마음을 현재로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치유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지 궁극적으로 사랑이 실현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랑이란 감정은 인생의 모든 것처럼 착각되는 강력한 순간을 우리에게 종종 부여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전부로 치환되기는 어렵다는 걸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다만, 자의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했을 그 시절의 감정에 제대로 된 결말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두 사람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 감히 단언한다. 여행을 끝마친 윤희는 예산을 떠나 이력서를 적는다. 고졸이라는 짧은 단어에 햇살이 드리우고 윤희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언젠가 직접 식당을 운영하겠다는 꿈은 윤희의 미소와 새봄의 사진 속에 남는다. 그는 더 이상 삶을 멀찍이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변화 앞에서 움츠려들지 않는다. 지난한 현실의 고달픔은 여행 전과 후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나 그가 가진 삶의 이력만큼은 더 이상 남루하지 않으므로.윤희와 마찬가지로 쥰 역시,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태생조차 숨기며 살아야 했던 시간에 종막을 고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자신의 취약했던 한 시절과 화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지 못할 리 없다. 다리 위에서 윤희를 불렀던 만큼의 용기가 있다면, 내가 꾸는 꿈이 실은 상대방도 꾸는 꿈인 세상을 사는 게 어째서 두렵고 힘들기만 하겠나.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리추얼의 종말』을 통해 "예술의 본질은 삶에 지속성(멈춤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에게 <윤희에게>는 그 본질을 너무도 명징하게 실천한 영화일 터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무언가를 꿈꾸기 전, 내가 쓰려는 이야기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돌이키게 만드니까. 나를 멈추게 만드는 이 영화의 후유증이 반갑다. 깊은 호흡을 몇 번 한다.그리고 발견한다. 세상에,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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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4」시리즈 속 모든 상징과 철학 뽀개기 #02 | 매트릭스 인문학 리뷰 | 매트릭스 리저렉션 리뷰 | 매트릭스4 리뷰 | 매트릭스4 해석 | 매트릭스 리저렉션 해석 |
?《매트릭스4 리저렉션》(2021) 영화리뷰 / 매트릭스4 리저렉션 리뷰
《매트릭스 1~3》 인문학 결말포함 영화리뷰 #2
*후속영상
#1 [네오는 테스형♪] https://youtu.be/gckW2TYRFMc
#3 [빨간 옷의 여자] https://youtu.be/X_fQcoytk70
#4 [오라클은 악마다?] https://youtu.be/fLgWf7NWkn8
#5 [스미스는 왜 졌을까] https://youtu.be/Uas0KZDCQec
*추천영상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리저렉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 라나 워쇼스키
각본: 라나 워쇼스키, 알렉산드르 하몬, 데이비드 미첼[1]
제작: 라나 워쇼스키
음악: 조니 클라이맥, 톰 티크베어
촬영: 존 톨
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앤 모스 외
제작사/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1년 12월 22일, 한국 12월 22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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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돌아온 공룡!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이렇게 맥없는 퇴장을??
?Rabbitgumi 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공룡들이 다시 극장에 찾아왔습니다.
90년대에 만들어진 쥬라기 공원 시리즈도 엄청난 사랑을 받았었는데요.
2015년 부터 시작된 쥬라기 월드 시리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쥬라기 공원과 동일한 세계관에서 발생된 일이다보니,
이번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에서는 오리지널의 세 박사님들도 등장하게 되죠.
과연 이번 영화는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었을까요?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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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원피스> 공식 티저 예고편
오다 에이이치로가 그린 사상 최고 인기 만화를 실사로 옮긴 작품, 그 대망의 첫 영상을 지금 공개한다. 《원피스》, 8월 31일 출항.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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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 티저 예고편
화났을 때 더 귀여운 [메이의 새빨간 비밀] 티저 예고편 공개!
메이 진정해! 아냐 진정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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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와 연대 사이의 사랑
6★/10★
2023년, UN 자문기구에서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핀란드를 꼽았다(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인 57위다).* 무려 6년 연속 1위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을 테다. 지상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을 비춘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국제비평가연맹이 선정한 2023년 최고의 영화로 꼽히기도 했다.
안사는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홀라파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안사와 기계로 무언가 작업을 하는 홀라파의 표정은 건조하고 권태롭다. 색깔에 비유한다면 무채색의 느낌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어 보이고, 조금은 염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한 술집에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낀다. 통성명도 없이 데이트를 이어가던 둘. 그러던 중 안사가 홀라파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며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런데 홀라파는 그만 그 종이를 잃어버린다. 홀라파는 둘이 함께 있던 곳을 돌며 안사를 수소문하고, 홀라파의 연락 없음에 실망하고 있던 안사를 다시 만난다.
영화에서, 노동 현장에서의 생기 없는 표정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때의 표정은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닌, 안사와 홀라파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이들은 일할 때는 활력을 잃고, 사랑할 때는 기운이 샘솟는다. 불안정한 직장에서 당장 눈앞의 생계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설렘과 애타는 마음으로 감정이 들끓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이토록 선명한 대비의 공존은 둘의 사랑을 ‘연애’인 동시에 ‘연대’로 만들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비정규직이다. 그들의 고용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의미다.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관리직원에게 자그마한 트집이라도 잡히면 바로 해고다. 실제로 둘의 직업은 수시로 바뀐다. 안사는 마트에서 버리는 물건을 챙겨가다가 해고당하고, 고용주가 마약 거래를 하다가 체포돼 직장이 사라져 일거리를 잃는다. 홀라파는 항상 조금은 술에 취해 있는 것이 걸려서 해고당하고, 장비 노후화로 산재를 당해도 그 원인이 술로 돌려져 해고당한다. 그럼에도 빈털터리인 둘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는 흐릿하게만 보이던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연애와 연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라디오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채널을 바꾸거나 꺼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지만,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방송을 들으며 같은 감정을 느낀다. 커다란 폭력은 사람들의 유대와 연대, 일상을 파괴하며 개별 인간을 단절시키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위축된 채 서로 떨어져 있다는 공통적인 처지에서 무언가를 벼려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연출이다. 투박하고 고전적인 화면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는, 종종 능청스럽고 뻔뻔하며 동시에 비장한 대사와 만나 웃음을 자아낸다. 사회적 체면이나 가식 따위에 대한 고려 없이, 때로는 ‘망상’에 가까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은 영화가 그려내는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과 그럴듯하게 어우러져 잔잔하면서도 파격적인(?) 코미디의 효과를 자아낸다. 산재로 병원에 입원한 홀라파에게 안사가 키스한 후, 그가 눈을 뜨는 장면은 이와는 또 다른 패러디의 효과를 낸다. 연애와 연대 사이의,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일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들이 거주하는 세계로부터 반전될 수 있음을 무채색 세계에 따뜻한 유머를 곁들여 알려준다.
*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31210010002697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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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후회, 미련, 아쉬움, 기대, 그리고 헤어질 결심
어느덧 꾸준히 글을 쓰기로 한 지 1년 가까이가 되고 있다. 어찌 보면 영화평론가라면 평론가인 나다(무려 내가 쓴 글로 돈 받아본 적 있음). 사실 이 아이디어를 주위의 그 누구에게도 받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덧붙여서 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난 세상이랑 대화하려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 영화라고 하는 것이라면 꾸준히 뭔가 세상과 대화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그래도 세상 사람들 다수에게 설명할만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있구나!'라는 걸 눈으로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가끔 이야기보다 영화가 더 중요한 작품을 몇 번 만난다. 작년엔 <드라이브 마이 카>, <노매드랜드>, <당신얼굴 앞에서>, <소울>이 그랬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소설가의 영화>나 <우연과 상상>이 그럴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사실 수다 떠는걸 더 좋아하는 쪽에 가까운 나. 장르적으로 엄청난 영화를 보고 느끼는 소름보다 반응이 좋은 것에 행복해지는 나라 가끔은 이게 일 같이 느껴진다. 뭐 실제로 그런 축에 속하기도 하겠지? 회사도 잘되고 나도 잘되면 그게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일일 테니.
그리고 2022년 6월 29일, <헤어질 결심>의 개봉날이 왔다. 어떤 말을 해야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뭐 영화에 대한 불호 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 강하게 압박하는 듯한 영화였다.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 치밀한 감정, 각본의 완성도까지 이 영화는 글로 쓰는 게 두렵다고 느껴질 정도로 걸작 중 걸작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그렇게 느꼈었다. 근데 이 영화는 그 마음이 더 커진 채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글 쓰는 게 무섭다. 내가 다 담아내지 못할까 봐; 또 이 영화를 보고 먼저 생각나는 것은 주위 사람들과 감동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먼저 생각난 셈이다. 2022년 여름, 칸을 경유해 우리나라에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깐느박'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산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 살인 사건에 형사가 출동했다. 동료이자 부하인 수완과 함께 등장한 해준. 피해자는 등산을 좋아하는 공무원 출신의 아저씨다. 높은 바위에서 몸이 두 번 부딪혀서 사망한 게 사인이었다. 수사를 지속하는 해준과 수완. '굳이 이렇게 해야 할까?'라는 말이 무색하게 해준은 우직한 사람이다. 무얼 하든 책임감이 있는 해준. 경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용의자를 하나둘씩 찾아보려 한다. 그런데 막상 용의자라고 할 사람도 한 명 밖에 없었다. 피해자 기도서의 아내였던 서래. 기도서는 서래에게 그렇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도서는 자기 물건에 이니셜을 새기곤 했는데, 아내 서래의 몸에도 그 인장을 박아놓았다. 또 가끔 손찌검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이유인가? 서래는 남편의 죽음에 단 조금도 개의치 않는 느낌이다. 무덤덤한 서래. 해준은 이상함을 느낀다. 베테랑 형사의 촉이 발휘되는 것 같다. 이상한 게 있어. 용의자 심문을 통해 한 두 마디 나누는 서래와 해준. 해준은 다시 한번 촉이 왔다. 이 여자, 뭔가 있다.
이 '뭔가 있다'라는 촉은 금세 행동으로 이어졌다. 차와 망원경 하나를 가지고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 먼발치의 아파트 밖에서, 그리고 차 안에서 서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수면장애가 있는 게 도움이 됐나? 밤에 잠들 틈도 없이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 원전에서 일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해준은 미행에 형사 일에 몰입하게 된다. 이 호기심과 관심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스마트워치에 일기처럼 서래의 행보를 저장하는 해준. 근데 서래도 이상하다. 해준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놔두기 시작한다. 마치,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이 둘의 사랑은 그렇게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진행됐다. 멈추기엔 너무나도 멀리 온 상황 속에서.
필모그래피가 갖고 있는 장점 그대로
박찬욱 감독이 워낙 유명하신 분이다. 한국영화의 팬이 아니더라도 <올드보이>는 한 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작품으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으니 <기생충> 이전에 한국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어느 정도 이끌었다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왜 인기가 많았나?라고 생각하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초반부 특정 인물의 자해, <올드보이>에서 장도리 액션신, <친절한 금자씨>에서 '너나 잘하세요', <박쥐>에서 '해피 버스데이, 태주 씨'까지 박찬욱은 아름다운 장면을 넣어 관객의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게 하는 것에 특화된 인물이다. 이때 기억에 남게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올드보이>처럼 인물에게 감정 이입시켜 후반부에 폭발하는 에너지도 가능할 것이다. 또 <박쥐>처럼 색감을 잘 활용할 수도 있고 <복수는 나의 것>처럼 무미건조함으로 극을 시종일관 이끌 수도 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이영애 배우에게 그런 에너지를 만든 것도 감독의 장점을 새기는 훌륭한 디렉팅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장기가 전부 들어갔다. 우선 대사를 잘 썼다. 일단 이 영화를 다양한 매체에서 검색하면 '마침내'라는 단어가 주요 한줄평에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 처음 서래의 입에서 나올 때 이질감 느껴진다. 금세 <종이의 집 : 공동 경제구역>이 생각난다. 직접적인 대사와 이질감이 드는 대화 톤이 단점으로 발현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닌데 아쉬운 감은 있다는 뜻이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는 위 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영화 이야기 전개는 익숙하면서도 굉장히 색다른 방식이라 '마침내'라는 결론을 내기 충분하다. 어찌 보면 엥? 싶은 대사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 셈이니 정서경-박찬욱 두 사람의 설계가 꼼꼼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엔딩으로 달려가는 힘은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썼지만 '마침내'라는 단어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그렇게까지 이야기 전개가 빠른 편은 아니다. 얼핏 보면 서래와 해준이 알듯, 말듯하게 마음을 꺼내 보이는 장면의 연속이다. 이 두 사람의 미묘하게 꺾이는 감정선의 힘이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잉크가 서서히 퍼지듯 영화에 녹아들게 된다. 뭐 사람에 따라 어떤 영화의 이야기가 빠르다 느리다 주관적으로 갈릴 순 있겠으나, 중후반부까지 달달했던 영화의 이야기가 후반부까지 전력질주로 달리며 강력한 에너지로 치환되는 느낌마저 든다. 이는 <올드보이>에서 하이라이트 신을 위해 오대수의 입장이 변화되는 부분이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잔잔하고 심심한 듯 하지만 오히려 이게 관객에게 압박 비슷하게 작용하는 지점이 감독의 특장점이 발휘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해일-탕웨이 두 배우의 퍼포먼스 역시 탁월했다. 일단 해준 역을 맡은 박해일 배우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서래가 중국인이고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대가 말을 이해하기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패널티가 있다. 근데 이건 우리 관객에게도 적용된다. 관객이 보기에도 '이 사람이 정말 서래에게 마음을 열고 있구나'라고 느낄만한 순수한 비주얼이 장점이 되어 극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눈빛 하나, 행동 하나가 정말 사랑에 빠진 인간이라고 보기 충분하다.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 사람의 입장 헤처 나가기는 점점 난이도가 올라간다. 이를 소화하는 좋은 연기였다. 또 탕웨이 배우의 연기는 전 세계에서 이 사람만 가능한 연기다. 목소리 톤,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맞이하는 인간, 역시 로맨스 영화의 여주인공까지 우리가 탕웨이라고 기억하는 이미지에서 한 단계 스탭업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아마 우리나라 영화 팬들에게 탕웨이 배우의 인생작으로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는 연기였다. 이 부분(서래의 캐릭터성)을 설명하는 건 영화에 굉장히 중요해서 직접 보시는 걸 추천한다. 그녀의 입장을 견지한 채로 그에 맞게 영화를 봐도 이 작품은 걸작이다. 아, 두 배우 말고 다른 분들도 연기 잘했다. 특히 김신영 배우 인상깊었다. 취조하는 신 멋있었다. 일단 표정부터 '나 이 영화 피해 안 끼치게 잘해야 함'이 묻어나와서 귀엽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이 천재는 영화 판에서 자주 쓰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중요한 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수도 없이 봤던 미장센의 힘이다.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의 3색이 영화의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산속에서 낑낑대며 등산하는 장면, 서래의 집 벽지, 해준의 집 벽지, 바다 두 곳, 석류 자르는 모습, 통역 앱 등등 영화 장면 장면마다 장인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들어가 있다. 또 메타포도 적절히 들어간다. 일단 위치에 의한 비유다. 위에 누가 있고, 아래에 누가 있는지를 염두하고 보시면 영화의 감상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언어에 대한 비유도 상징적이다. 언어가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감독이 뭘 보여주고 싶었을까?를 생각해보시라. 이 아이러니에서 오는 감정이 여러분도 마음속에 깊이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님은 갔지만 난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영화가 탁월한 또 다른 지점은 제목에서 온다. 제목을 잘 짓기도 했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헤어질 결심>이라는 마음 그 자체다. 내가 경험하거나 주변인에게 들었던 사랑 이야기는 참 헷갈린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날 사랑했을까? 아닌가? 그 사람에게 나는 도구였던 걸까? 아니면 잠깐 불탔던 무책임함일까? 이 얄궂은 마음의 엇갈림은 인간에게 오랜 과제처럼 남는다. 정말 사랑했을까?
이 영화는 이 엇갈림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강점이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이거 설명할 수 있을까? 할 수는 있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 공통점이라는 것도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022년 6월 29일 18시 10분에 사랑에 빠짐'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공통점이 이거여서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말할 수는 있겠지. 근데 둘의 입장이 정확히 딱 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서로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 심지어 첫눈에 반한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공통점을 보고 사랑이 깊어지는 경우가 다수였다. 그 깊어진 사랑을 재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 맞지?' 식의 배타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근데 무슨 솔로몬도 아니고 그걸 일일이 직접 다 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모호함이 사랑이 주는 낭만과 비극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이 알듯 말듯한 마음의 차이점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어떻게? 듬성듬성 설명하는 방식으로. 가타부타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설명을 일일이 다하고 서래가 얼마큼 이쁘고 해준이 얼마나 착하고 구구절절이 다 쓰면 재미가 없다. 영화에서 해준-서래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영화에 제시되는 장면이 전부다. 그냥 단지 감정선만 따라가는 형식으로 오히려 영화가 완벽한 설명을 성사시키는 셈이다. 이 '듬성듬성 보여줘서 완벽한 설명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지 않은 분들이 극장에서 확인하시면 좀 더 폭넓은 감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마음의 엇갈림'이라는 모티브를 작품이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는 각자가 보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다.
찰싹 달라붙는 각본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미장센의 힘을 강점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느꼈다. 실제로도 장면 전환이나 촬영 구도나 우리나라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 함이었다. 그러나 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직도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왜 <헤어질 결심>일까. 이 영화는 굉장히 외로운 방식으로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해낸다. 그리고 그 외로운 설명 방법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마침내 행복한" 결론으로 마무리짓는다. 이 아름답고 품격 있는 사랑 이야기는 여러분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서래의 사랑에 빠져버렸다. 난 이 영화를 나이가 들어서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각본이 갖고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카데미에서 볼 수 있기를
이 영화로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의 팬으로서 경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오래 기다려서 봤다. 솔직히 아쉽다. 감독상도 큰 상인데, 심사위원대상이나 황금종려상까지 받을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아카데미를 기대하고 싶다. 글쓴이는 충분히 국제영화상을 비롯해 작품상이나 감독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걸작이라고 봤다. 이 영화는 사랑했기 때문에 남겨있던 감정 모든 것을 괄호 치기의 미학으로 설명한다. 이런 사랑영화는 본 적이 없다. 걸작이다. 내가 생각하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다. 그리고 이는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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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을 향한 발걸음
글은 영화, 소설 [파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과]를 읽었는데 [파쇄]를 안 읽었다? 읽고 오십시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보통 소설을 원작으로 한 제2 창작물이 만들어질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정말 충직하게 원작을 따른 사실주의 그림처럼 되거나, 내가 분노하다 못해 매번 거론하는 [나는 전설이다]처럼 완전히 다른 작품과 색깔로 피카소식 해석을 하거나. 그리고 그 어디에의 중간에 걸쳐져서 감독이 모자이크처럼 여기서 저기서 조금씩 떼어 붙이거나. 그러나 세 가지 방법 중 어떤 특별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영화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원작을 어떻게 그리느냐. 혹은 원작에서 관객들이 원하는 것을 얼마나 살리느냐. 에 제2 창작물의 승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파과]가 선택한 방법은 마지막 방법이었다. 작품의 전반부는 원작의 서사를 잘 압축하고 적절하게 베어 넣어 배치했으며,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소설의 분위기도 눈앞에서 안개처럼 펼쳐진다. 물론 거기에도 변주라고 할 법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슬릴 정도의 큰 프레임의 이동은 없으며, 그 변화로 인해 주요 메시지가 숨거나 해석되지 않게 가면을 쓴 채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나마 사람에 가까웠던 이름인 [손톱]이었던 시절이건, 이젠 짐승만도 못한 인간에 가까워 보일 이름인 [조각]으로 살고 있는 지금이건. 그녀는 여전히 한쪽 마음에는 깊은 상실을, 그리고 발걸음에는 우울한 쇠퇴함을 잔뜩 묻힌 채 목표물을 향한 관심도, 시선도 거두지 않았으니까.
사진 출처:다음 영화
변주라고 부를 법한 감독의 모자이크는 후반부 1/3 지점부터에 포진되어 있는데. 여기서 아마도 이 영화의 승패 까지는 아니더라도 선호도 정도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원작의 시점은 철저하게 그녀의 시점에서 풀이되고 있다. 그녀의 독백(방백이려나)을 따라가다 보면 으스러지는 것은 그녀의 타깃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마음마저도 함께 조각조각 찢어져 나부끼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원작과 노선을 달리 하는 그 순간에는 “늙고 쓸모없는”과 ”상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전설의 위대함”, 그리고 “관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덕분에 책에서는 그다지 강조되지도, 그렇다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액션 장면들이 으스대며 들어설 자리가 생기고, 지나가기 바빴던 인물들도 한 번씩 고개를 돌려 관객들과 눈을 맞출 시간이 생긴다. 또한 자신을 생의 마지막 1분이 남은 시점에서야 알아보고 투정을 부리는 듯한 투우(김성철)의 모습을 보면서. 이 두 사람 간의 애증에 대해 좀 더 느낄 수 있도록 여운을 얹는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하지만 마치 구전설화처럼 전해지던 그녀의 위용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순간은. 독백을 고집했던, 혹은 그녀의 시각으로만 해석되던 전반부의 장면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후반부에 갑자기 강조된 투우의 시점 덕에 그녀에게만 향하던 집중력이 조금 흩어진다고 느꼈다. 그리고 [파쇄]에서 따온 듯한 킬러양성 법칙 101의 마지막 단계(?)는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아 삼켜 내는 것이 조금은 껄끄러웠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은 손톱이자 조각이며, 누구에겐 더 이상 만들지 않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대모님이 되어버린 그녀. 이혜영에 의해 완벽하게 정리된다. 눅눅하기 그지없는 영화 속에서 날이 바짝 선 칼 같은 예리함으로. 바스러질 것만 같은 육신으로도 냉담하게 일을 해내는 원작 속의 조각을 정말 눈앞에 가져다 놓다 못해 애초에 이 업계(?)에서 한평생을 산 것만 같은 모습인 그녀 덕에 말이다.
그녀는 영화에서 톡톡 튀어나온 부분을 친절히 잘라내고 얇게 저미고 천천히 갈아 내게 내밀었고. 나는 가루약을 받아 든 어린 투우가 되어 고개 한 번 끄덕인 채 쓴 약을 꼴깍꼴깍 삼켜낼 수 있었다. 그녀가 이제 곧 사탕을 줄 거야.라는 기대와 함께.
마치면서
사진 출처:다음 영화
엔딩 크레딧이 이렇게 반가우면서도 아쉬울 일인가 싶었다. 이 생각과 함께 찾아온 안도와 동시에 배어 나온 깊은 한숨은, 마치 영화 내내 긴장하고 있던 나의 모든 신경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는 토닥임처럼 다가왔다.
영화의 본체가 되는 소설 [파과]와 함께 스핀오프 같은 소설 [파쇄]까지 일 하는 척하면서 단번에 읽어 내려갔던 이후로. 이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기쁘면서도, [원작 잘 살리기] 위원회(같은 게 있다면) 상무(자리 정도는 차지했을 나 같은 인간)인 나에게는 마치 조각 그녀가 지니고 다니는 비녀의 날 끝처럼 나를 쿡쿡 쑤셔댔다. 고통이라 불러야 할지. 희열이라 느껴야 할지. 조각(이혜영) 그녀가 류(김무열)에게 품었던 마음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아슬아슬함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영화를 기대하기도. 그러면서도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가 가져다준 만족감은 소설 말미에 조각이 느꼈을 해방감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감정과 제법 닮아 있었기에, 새로운 시작 앞에 당도하고 나서야 내보인 킬러 조각의 뒷모습에 대고 슬며시 웃을 수 있었다.
킬러의 뒷모습이 이렇게 반가워서 될 일인가 싶지만. 바뀐 그녀의 마음 때문에 기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매번 상실을 안겨야 할 상대의 모습만을 바라보던 그녀는. 등을 돌려 자신이 상실해 온 것을 향해 달려가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일 테니까. 스스로에게는 어쩌면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했을 부분을 대담하게 드러낸 그녀가 더 강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용이 너무 귀여워(?)
[이 글의 TMI]
1. 인간적으로 빵 어떻게 끊는지 아시는 분?
2. 인바디 체중계 산 뒤로 매일이 충격의 연속임.
3. 오예 연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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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으로의 끝없는 도피
26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
* 본 게시글은 시사회를 통해 개봉 전 관람한 후 작성한 후기이며,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크리에이터로써 참여하였습니다. 줄거리의 일부가 기재되어 있으니,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나는 도망친다. 광신도 엄마와의 주일 봉사에서 도망쳐 어린 딸을 보러 가지만, 때로는 짐짝처럼 느껴지는 딸로부터 도망치기도 하고, 고객의 불평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헤드셋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나는 미혼모가 된 이후에는 음악으로부터 도망쳤고, 위탁 가정에서 딸을 데리고 오기 위해 엄마로부터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대회에서 우승해 베를린으로 가고 싶은 열망 또한, 성취보다는 도피에 가까운 감정임을 이나는 알지 못한다.
이나에게 대화는 고통과 동의어로 작용한다.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억압하고, 때로는 벼랑 끝으로 내몬다. 갖은 불평을 토해내는 엄마와, 빨리 아이를 입양보내자는 위탁 아주머니의 말들은 언제나 너무 아프다. 서로가 피로해지는 대화는 단절되는 편이 낫다. 그래서 그는 전화를 피하고, 헤드셋을 쓴다. 콜센터의 한가운데에 앉아 파티션에 입이 가려진 동료들을 보며, 이나는 마치 그들도 자신과 함께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바닥이 울릴 만큼 선명한 음악만이 이나를 붙잡아세운다. 그러니 이나는 계속해서 외면하고, 도망친다.
그마저도 완전한 도피는 불가능하다. 엄마의 망치질 소리는 신경을 긁고, 음악으로 가득찬 공간에서 휴대전화 진동음은 맥락을 끊어 버린다. 이나를 음악으로 대표되는 인물로 상정했을 때, 엄마의 전화는 불편하고 이질적인 장애물로 작용한다. 어쨌거나 이나의 최종 도피처는 돌고 돌아 결국 음악이다. 음악은 존재 자체로 숨을 틔우고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는 듯 보인다. 그토록 바라던 음악으로 다시금 돌아왔건만, 그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음악이 즐겨지지 않는다"며 베를린으로 꼭 가야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이나는 이러한 괴리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음악이 즐겨지지 않는 이유는 이나가 음악을 '꿈'이 아닌, '도피처'로 택했기 때문이다.
내내 도망치기만 하던 이나는 미친 것 처럼 보이던 엄마가 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사건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엄마에 대한 모난 감정들은 점차 깎여 나가고, 음악에 자전적인 요소들을 녹여냄으로써 둘의 갈등은 해결되는 듯 보인다.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나는 마지막에 걸려온 전화가 베를린 컴피티션의 합격 전화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나가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음악을 도피처로 여기지 않고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똑바로 마주보고자 다짐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나는 현재 아이와 엄마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기에 베를린은 더 이상 이나에게 해결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나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졌을까?
<둠둠>은 이나와 엄마의 갈등으로부터 점철된 한국 사회 내 미혼모의 위치에 관한 메세지를 계속해서 던진다. 나는 이나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나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찾았다고도 할 수 없다. 이나는 여전히 미혼모 가정 지원금을 받지 못할 것이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양육비를 대기 위해 더 힘겹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국적과 연령이 서로 다른 세 여성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엮인다. 이나가 베를린으로 갔다면, 태국인 여성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고, 이나가 나이가 든다면 엄마와 유사한 사회적 지위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나는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다. 엄마 또한 이나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나는 엄마의 애정을 거부하고, 어긋난 애정은 독이라 치부한다. 엄마는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며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나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며 지안이(이나의 딸)의 존재를 부정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기에 이나와 엄마는 끝없이 상처를 낸다.
<둠둠>에서는 플래시백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객은 현재의 사건들만 두고서 이나를 응원하거나 탓할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일들은 책임지기로 한 이의 잘못이 아니기에, 논외의 것으로 밀린다. 계속해서 문제상황이 제공되고, 건조하다못해 바스라지는 이나를 보며, 관객은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자꾸만 도망치는 그에게 자연스레 이입하게 된다. 무엇이 그를 도망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는지 사유하는 과정에서 <둠둠>이 단순히 꿈을 찾아 떠나는 유토피아적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