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9-03 14:49:44
제주 바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스르고 접붙여
〈물꽃의 전설〉
87년 동안 물질을 해온 현순직 해녀와 이제 막 해녀 일을 시작한 30대의 채지애 해녀. 〈물꽃의 전설〉은 두 해녀 사이에 놓인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스르고, 접붙인다. 해녀 일에 대한 현순직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녀는 물질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았고, 그곳에서 항상 능력을 인정받았다. 현순직은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종종 바다로 나가 지난날을 회상한다. 이미 중년이 된 막내아들은 혹시나 어머니가 또 바닷속에 들어갈까 걱정되어 전화로 신신당부하고, 현순직은 속내를 들켰다는 듯 웃는다. 현순직에게 바다는 삶 그 자체다.
채지애 해녀는 사회생활을 해녀 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채지애의 어머니는 대학을 나오고 직장에 다니던 딸이 해녀 일을 하겠다는 게 영 마뜩잖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해녀 일은 “낭만적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고된 노동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채지애의 어머니는 아기 우윳값이라도 벌겠다는 절박함으로 수십 년간 물질을 해왔다. 제주의 해녀라면 눈 내리는 바다에서 물질한 후 외로이 숨비 소리를 낼 때의 고독함과 친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녀 물질의 목표였던 딸과 같은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지난 삶에 대한 딸의 이해와 공감이라는 형태로 돌아왔음에 대한, 즉 그녀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았음에 대한 떳떳함의 발로일 것이다.
해녀가 경력이 쌓이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상군 해녀’라 불린다. 현순직은 상군 중의 상군인 ‘대상군 해녀’였다. 대상군 해녀는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닷속 지도와 지형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해녀에게만 허락된 이름이다. 현순직은 지금도 그 풍경이 눈에 훤하다는 듯 바다별 특징과 그곳에서 잡을 수 있는 해양 생물을 줄줄이 읊는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황홀한 바닷속 ‘들물여’로 채지애와 함께 향한다.
그러나 현순직의 기억과 지금 제주 바닷속 정경은 일치하지 않는다. 채지애는 현순직이 일러준 곳에 들어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물꽃을 찾아 헤매지만 끝내 실패한다. 바다가 예전 같지 않다는 채지애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내 들물여에 가면 물꽃을 볼 수 있다고 고집스레 자신만만해하던 현순직은 아쉬움에 탄식한다. 들물여뿐만이 아니다. 제주의 해녀들이 자주 물질을 나가는 바다도 공장에서 배출된 폐수로 시야가 뿌예지는 일이 잦다. 제주 바다는 해녀들에게 이전만큼 많은 것을 내줄 수 없다. 그만큼 병들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는 두 여성이 목격하고 기억하는 일터의 모습이 이토록 다르다. 이는 현순직과 채지애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현순직은 짙은 제주 사투리를 구사한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영화에서 자막과 함께 나온다. 섬이라는 제주의 지역성과 그녀가 일터에서 습득한 언어의 특성상 표준어를 쓰는 일반 대중이 매끄럽게 듣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채지애는 현순직의 말을 자막 없이도 알아듣고, 현순직과 능통하게 소통한다. 그런 그녀조차 현순직의 기억과 경험을 온전히 따라갈 수 없다는 데서, 영화는 아릿함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대체 해녀도, 제주도민도 아닌 사람들에게 현순직이 목격한 것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물꽃의 전설〉이 두 해녀를 함께 들물여로 보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두 해녀의 관계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들물여로 보낸다. 현순직이 가진 것이 채지애를 경유함으로써만, 즉 ‘번역’을 거쳐야만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해 다큐멘터리의 장르 특성을 고려했을 때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장면을 삽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언급했듯, 〈물꽃의 전설〉은, 채지애는 끝내 현순직의 기억 속 풍광에 접속하지 못한다. 제주 바다는 이 모든 실패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혹은 실패의 아픔마저 보듬겠다는 듯 처연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이 영화가 자아내는 아릿함을 더한층 부각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현순직과 채지애 사이의 시간을 곱씹게 한다. 점점 오염되가는 제주 바다에서, 들물여의 뭋꽃은 현순직과 그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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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로부터 '보편'으로
여성들의 관계‧감정‧경험을 포착해 섬세하게 재현함으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온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관점은 퀴어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 인물 중에는 여성인 동시에 퀴어인 자들이 많다. 감독은 이들이 마주한 고난과 그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의 강인함을 놀라운 관찰력으로 포착해 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규범성 너머를 상상하게끔 한다. 슬픔이 깃든 퀴어 존재가 어떻게 삶을 이어가는지를 그녀의 영화를 통해 따라가 보자.
먼저 〈톰보이〉(2011)다. 주인공은 10살 ‘소년’인 미카엘이다. 짧은 머리에 날렵한 체구를 가진 미카엘이 새로 이사 온 동네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축구, 수영, 힘 싸움 등을 능숙하게 해내자 친구들의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정작 놀이에 나가기 전의 미카엘은 걱정 투성이다. 축구를 하는 남자아이들은 상의 탈의로 팀을 나눈다. 미카엘을 불안케 하는 건 자신이 윗옷을 벗은 팀과 그렇지 않은 팀 중 어디에 속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미카엘은 로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생물학적 여성’이다. 그래서 상의를 벗었을 때 자신의 가슴이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라 보일까 걱정한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수영복 앞섬이 문제다. 원피스 수영복을 잘라 남자 수영복처럼 만든 미카엘은 수영복 앞섬이 불룩 튀어나오지 않자 고민 끝에 찰흙을 길게 만들어 페니스의 대용물로 수영복 속에 넣는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괜히 놀이 도중 침을 뱉는 것도 찰흙으로 만든 페니스와 더불어 미카엘이 ‘부족한’ 남성성을 메꾸는 방식 중 하나다. 이런 것들이 뛰어난 놀이 실력을 가진 미카엘을 위축되게 만든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흥미로운 건 미카엘이 찰흙 페니스를 보관해 두는 장소다. 미카엘은 찰흙 페니스를 자신의 빠진 이와 함께 보관한다. 빠진 이는 ‘자연’이고 찰흙 페니스는 ‘인공’이지만, 몸에서 떼어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선 같다. 그러나 미카엘에게는 빠진 이와 별 차이가 없는 찰흙 페니스가 누군가에게는 ‘결핍’의 기호로 읽힌다. 미카엘의 ‘진짜 이름’이 로레임이 드러난 후, 친구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미카엘의 성별을 확인한다. 미카엘을 ‘남자’로 알고 좋아했던 리사가 직접 미카엘의 성기를 만져 보게 함으로써 말이다. 미카엘의 페니스 ‘없음’은 그저 놀러 나가기를 망설이게 하는 일상적 불편함이었으나 성별 이분법이 군림하려 드는 상황 속에서는 수치심의 근거가 된다. ‘있고 없음’의 차원이 아닌 신체의 다름으로 독해되어야 할 미카엘의 음부가 결정적 낙인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잘못 짝지어진 인과관계다. 엄마의 강압으로 파란 원피스를 입고 친구 집에 찾아가 자신의 성별에 관한 ‘사실’을 말하는 미카엘을 수치심에 휩싸이게 하는 건 그/녀의 성기 모양이 아닌 그 모양에 대한 세상의 폭력적인 독해다. 미카엘은 눈물 흘리며 파란 원피스를 숲에 버린다. 찰흙 페니스와 마찬가지로 파란 원피스 역시 쉽게 몸에서 떼어 낼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아무것도 아닌 찰흙 페니스와 파란 원피스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리사가 미카엘이 미카엘인 동시에 로레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말을 걸어 주기 전까지 미카엘/로레가 감당해야 할 슬픔은 너무 커다란 것이었다.
미디어는 늘 아이를 과잉보호의 대상으로 표상하지만, 성별이 모호하게 읽히는 아이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아이는 어긋난 결핍감으로, 부모는 편견 가득한 수치심으로 괴로워할 뿐이다. 〈톰보이〉는 성별 이분법이 존재에게 얼마나 큰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다음은 성적 지향과 이성애규범성의 문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굉장히 세련되고 치밀한 방식으로 성적 지향과 평등의 문제를 사유한다. 관계의 평등을 위해 영화가 주목하는 건 시선이다.
마리안느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의뢰받는다. 결혼에 대한 거부감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포즈 취하기를 거부하는 엘로이즈에게는 산책 친구로 거짓 소개된다. 마리안느는 자신에게 주어진 6일 동안 엘로이즈를 면밀히 관찰한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사소한 동작까지도 관찰의 대상이다. 일상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사소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된 것처럼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엘로이즈의 성격과 몸짓, 표정을 자신의 몸에서 재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꼼꼼한 관찰과 다른 존재 되기의 과정을 거치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사랑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전개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왜 이 집에 왔는지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리고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인다. 그런데 엘로이즈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이게 나에요?”라고 되묻는다. 생명력, 존재감이 없다고 냉정히 평가한다. 마리안느는 발끈하여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규칙‧관습‧이념을 철저히 따라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러다 보면 엘로이즈가 제기한 문제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마리안느의 자부심은 회복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스스로 망치고 엘로이즈의 어머니에게 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이번에 주어진 시간은 5일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첫 번째 6일이 익숙하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엘로이즈를 관찰하고 그려 내는 시간이었다면, 두 번째 5일은 마리안느만이 그릴 수 있는 엘로이즈를 그리는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외양, 습관뿐만 아니라 감정을 읽는 법까지 배운다.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깊어지는 건 마리안느가 엘로이즈 또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후다. 엘로이즈는 화가가 그림을 완성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시선의 객체가 아니었다.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 동안 그녀를 관찰했다. 화가와 대상이라는 일방적인 관계는 허물어지고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신중히 탐구하는 상호적 시선이 생성된 것이다. 둘의 사랑이 만개하는 건 바로 이 평등한 시선 위에서다. 이성애자들이 젠더 권력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 사랑에 실패하고, 그러면서도 규범적 사랑 바깥에 있는 성소수자의 사랑을 경멸하는 동안,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모든 위계적 시선을 거부하고 서로를 동등하게 만드는 시선을 교환함으로써 평등한 관계에 기반한 사랑을 창조해 냈다. 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만큼 사랑 문제에 있어 이성애자의 무능과 레즈비언의 유능을 극명하게 대비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공유하는 평등한 응시의 의미와 가능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장면이 있다. 가사노동을 돕는 하녀 소피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하려 한다. 이에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소피를 돕는다. 18세기 프랑스에서 낙태는 큰 위험을 동반하는 의료 조치였다. 마리안느는 괴로워하는 소피를 보고 고개를 돌리지만, 엘로이즈는 그런 마리안느를 돌려세우며 그녀의 고통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엘로이즈에게 시선은 사랑하는 존재를 탐색하는 관능적인 수단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윤리적 도구이기도 하다. 레즈비어니즘과 그리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낙태라는 주제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시선으로 인해 주목할 만한 고통, 즉 동등하게 다뤄져야 할 정치적 의제로 부상하는 것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러나 누구보다 뜨겁고 윤리적인 사랑을 나눈 둘은 끝내 함께하지 못한다. 엘로이즈는 예정대로 결혼을 해야 하고, 마리안느는 새로 완성한 초상화를 넘긴 후 눈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다. 그들이 구축한 세계는 확장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남은 건 둘이 함께한 11일의 기억과 그 아름다운 시간을 기록한 그림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림으로 남겨진 사랑을 ‘보며’ 서로를 추억한다. 그럼으로써 기억을, 서로가 나눈 경험과 관계를 연장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연상케 하는 압도적인 엔딩 장면은 엘로이즈가 마리안느가 일깨워 준 감각을 여전히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들어 보지 못한 소리를 들려주었고, 엘로이즈는 몇 년 후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를 들으며 격하게 흐느낀다. 마리안느가 일깨운 엘로이즈의 감각이 여전히 닫히지 않은 것이다. 불평한 젠더 권력에 기댄, 편견에 가득 찬 이성애규범성은 여기서 또 한 번 조롱당한다. 사랑이 개인의 의도가 배제된 정략 이성애 결혼이 아닌 이를 금지당한 레즈비언 연인 사이에서 피어올랐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랑에서 배제된 레즈비언에 의해 ‘보편’의 경지로 승화된 사랑이라는 테마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품은 황홀한 아이러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셀린 시아마의 영화에는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비추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을 비추는 방식은 다른 영화와 확연히 다르다. 셀린 시아마는 이성애 남성의 시선으로 늘 과잉 성애화되어 온 여성 신체를 퀴어 슬픔과 수치심, 여성의 고통, 쾌락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담는다. 그녀의 영화에서 여성의 몸은 멋대로 분절되어 흩뿌려지지 않고 몸의 주인이 느끼고 감각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 충실하다. 그리고 이런 재현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 이어진다. 그녀가 담아낸 밀도 높은 여성들의 세계가 다른 관점으로 여성을 촬영한 장면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란 소리다.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가 어깨에 힘만 들어간 채 헛발질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이와 반대로 셀린 시아마는 페미니스트답게 구체적 삶 경험에서 추상적‧보편적 명제로 나아간다. '보편'이란 게 정말 있다면, 이는 관념과 공상이 아닌 구체적 경험과 감정에서만 도출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렇지 못한 보편은 구체적 경험과 감정을 억누르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셀린 시아마 영화 속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규범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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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과 용기 사이, 지금의 나를 만든 그때의 ‘사소한 것’들
▷한줄소감 : 침묵과 용기 사이, 지금의 나를 만든 그때의 ‘사소한 것’들
▷영화/책 :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 Claire Keegan, 2023.11월
결정적인 순간에야 본 모습을 드러내는 나의 본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서 침묵하지 않을 용기,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최근 영화로 개봉된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의 그 기억들을 소환해내고 있다.
1985년 실업과 빈곤으로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뉴로스에서
석탄 배달업으로 아내, 딸 다섯 가족을 이끌고 있는 빌 펄롱(컬리언 머피 역),
무엇보다도 딸들이 각자 자신의 재능을 찾아 성장해 나가는 것이 기쁘기만 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과 함께 케이크를 만들고 산타클로스에게 보낼 카드를 쓰는 일상이 행복하기만 하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헤쳐 나온 그였기에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기 스스로를 그저 운이 좋을 뿐이라 생각한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p20)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p22)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p24)
그렇다고 하루하루 지치고 힘든 일을 버텨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 일을 하고 저녁 늦게서야 식탁에 앉아 가족을 대하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p44)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을 다 잡아준 것은 그 옛날 어머니조차 일찍 돌아가시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가 되었을 때,
자신을 돌봐 주었던 집 주인 미시스 윌슨 아주머니의 따뜻한 격려 때문이었다.
미시즈 윌슨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 미시즈 윌슨이 말했다.
그날 종일, 그 뒤로도 얼마간 펄롱은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를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 다녔다.(p37)
그런 영향인지 빌 펄롱은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한없이 친절한 사람이다.
사업체 직원들의 일상을 돌본다든지, 동네 사람들 중 어려운 집에 장작을 몰래 가져다 놓는다든지,
지나가다 친구 아들을 보고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푼이라도 꺼내 준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강 건너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창고에 갇혀 있던 어린 소녀 세라를 발견한다.
수녀원장은 친구들끼리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고 둘러댄다.
오히려 그 사실이 외부에 발설되지 않도록 무언의 압박을 보낸다.
딸들이 다니려고 하는 세인트마거릿 여학교의 운영자이기도 한 수녀원이기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수녀원장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현찰이 든 봉투를 내밀었을 때 그냥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p99)
자괴감에 빠져 있는 그를 바라보는 아내 아일린이나, 수녀원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던 음식점 주인 미스즈 케호는 그저 모른척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 중 하나라면" 펄롱이 말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아일린이 다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p57)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교단은 다르지만 다 한통속이야. 어느 한쪽하고 척지면 다른 쪽하고도 원수 되는거야.”(p105~106)
그러나, 크리스마스이브날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깎고, 아내에게 줄 구두를 찾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
펄롱의 하루는 지금 무언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p113)
결국 그는 다시 수녀원으로 가서 창고에 갇혀 있던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지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수녀원이었기에 자신의 사업체와 가족에게 닥칠 최악의 상황이 떠올라 두려웠지만
더 이상 물러서지 말아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p119)
빌 펄롱에게 이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순간 어려웠던 시절, 집주인 미시즈 윌슨 아주머니와 같은 집 일꾼이었던 네드의 보살핌의 손길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을 이루게 한 것은 그분들의 배려, 친절, 격려들 때문이었다.
때로는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때로는 사소한 것(Small Things)들로.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p120)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p120)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121)
지금 주인공 빌 펄롱에게 침묵에 맞설 '용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어릴 적 자신을 일으켜 세웠던 '사랑'과 '보살핌'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뿌려진 씨앗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들은 결코 사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소녀를 구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그 첫 발걸음은 사소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를 나되게한 '사소함'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의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 무수히 많은 사랑의 손길이 떠오른다.
내가 살아갈 '용기'는 나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불빛이 반짝거리며 떠오르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막달레나 세탁소’는 아일랜드 가톨릭교회와 정부 지원하에 1922년부터 1998년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3만 명 이상의 젊은 여성들을 감금, 강제 노역과 착취로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곳이다.
2013년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진상조사를 마치고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막달레나 세탁소(Magdalene laundries)’ 또는 ‘막달레나 수용소(Magdalene asylums)’는
타락한 여성 교화라는 명분하에 1344년경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아일랜드에서는 1767년부터 10여 개 시설에 약 1만 명의 여성이 수용되었고, 잉글랜드는 1758년 이후 300개 이상의 세탁소가 운영되었으며,
1800년 미국 필라델피아, 1848년 캐나다 토론토, 1852년 스웨덴, 1890년 호주에서 운영되었다.
노동 착취와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최후의 막달레나 세탁소가 1996년에 이르서야 폐쇄되었다.
각 나라의 막달레나 세탁소 / ①아일랜드(1767년), ②잉글랜드(1758년), ③미국(1800년), ④캐나다(1848년), ⑤스웨덴(1852년), ⑥호주(1890년)
20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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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코리쉬 피자> 사랑의 탈을 쓴 힘과 위치의 변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15세 소년 '개리(쿠퍼 호프만)'. 어느 날 그는 학교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 아름다운 햇살과 함께 등장한 연상의 여인 '알라나(알라나 하임)'를 만나고, 첫눈에 반한다.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데이트를 청하며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개리. 그러나 서로 다른 나이와 환경, 직업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좀처럼 진전되지 못하는 사이, 연인과 친구 사이에 있는 그들이 비즈니스 파트너로 엮이면서 이들의 연애사는 더욱더 험난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리코리쉬 피자>는 할리우드의 젊은 천재 감독인 폴 토머스 앤더슨(PTA)의 신작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상 후보에 오른 것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제와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되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리코리쉬 피자>에서 진정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시상식에서 받은 상의 숫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작품이 겉보기에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와는 결이 다소 다른 듯 느껴지지만, 그 속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간 앤더슨은 설령 스타일은 다를지언정 유사 가족 관계, 폐쇄된 집단, 사이비 종교, 깊은 상처를 가진 캐릭터 등의 소재에 집중하며 불완전한 인간 내면을 낱낱이 파헤치는 드라마를 만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영화는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며 미국의 어두운 부분들을 샅샅이 파헤치는 메시지로 가득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1973년 미국 10대, 20대 청춘의 로맨스를 다룬 <리코리쉬 피자>는 필연적으로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첫 장면부터 앤더슨이 그려내는 로맨스가 평범한 사랑 이야기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당장 <리코리쉬 피자>의 시작을 보자.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십 대 소년 개리 앞에 알라나가 등장한다. 따스한 햇살, 그리고 로맨틱한 음악은 그녀의 등장을 더 화려하게 꾸며준다. 사진 찍는 일을 돕는 알라나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개리는 대화를 이어가고, 그 대화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이름과 나이, 사는 곳 등을 알아가며 조금씩 하나의 관계로 묶인다. 알라나의 등장부터 개리의 퇴장까지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리코리쉬 피자>는 그 어떤 하이틴 로맨스와도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간질거림과 살랑거림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롱테이크의 말미에서 영화는 본색을 드러낸다. 시종일관 나이가 더 많다는 무기를 내세워서 개리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알라나. 그러나 개리 앞에서는 여유 넘치던 그녀도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는 촬영 기사 앞에서는 불쾌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약자로 변하고 만다.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찰나에 그 리듬과 분위기를 아주 효율적인 방식으로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눈부신 사랑의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희롱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자 본 작의 테마를 날카롭게 소개한다.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 내에서 그들을 둘러싼 배경과 환경에 따라 그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2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알라나와 개리의 로맨스는 우위를 점하기 위한 싸움으로 가득하다. 알라나는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돈을 만지는 개리를 부러워한다. 반면에 개리는 미성년자라는 한계 때문에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고, 이에 알라나는 개리의 매니저가 되어준다. 또 개리의 촬영장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개리와 알라나에게 서로 다른 남녀가 번갈아가며 데이트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코리쉬 피자>는 우선 앤더슨의 사랑에 대한 정의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사랑은 감정의 교류, 추억의 공유, 뜨거운 육체적 교감이 아니라 위계의 형성을 뜻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리코리쉬 피자>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남녀 사이에서 더 우월한 지위와 주도권을 점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접근법을 걷어냄으로써 <리코리쉬 피자>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보다 현실적이며 깊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단순히 남녀와 사랑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대신, 그 관계를 매개로 보다 다양한 역학관계의 전복과 치열한 재전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성의 섹스와 산업 사이의 역학관계다. 영화를 보다 보면 앞서 본 오프닝 시퀀스처럼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불균질 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애인과 친구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개리와 알라나 사이에 비즈니스가 끼어들고, 그로 인해 알라나의 성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물침대 사업을 시작한 개리는 박람회에서 한 여성에게 섹시한 의상만 입힌 채 물침대를 홍보하게 하며 알라나는 그 여성에게 관심을 표한다. 바로 그 찰나에 개리는 용의자로 잘못 지목되어 경찰에게 체포되는데, 이 대목에서의 장면 전환은 굉장히 사나운 인상을 남긴다. 특히 경찰이 개리를 거칠게 다루며 그의 사업을 일시적으로 막는 모습에서는 마치 여성의 성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는 듯한 느낌도 준다.
더 나아가 이 장면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물침대 상점 오픈식에서 비키니를 입고 홍보를 하던 알라나는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개리를 본 후 좌절한다. 개리가 물침대를 사려는 고객에게 섹시하게 응대하라고 요구하자 알라나는 개리가 말한 것 이상으로 고객을 유혹하기도 하고, 또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후 에이전트와 오디션을 보던 중 개리의 조언을 무시한 채 작품 내에서 노출도 감수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하면서 개리와 격렬하게 싸우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는 개리와 알라나의 관계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려는 찰나마다 섹스를 매개로 빛에서 어둠으로, 환희에서 절망으로 급격하게 분위기를 전환한다.
그러나 <리코리쉬 피자>의 로맨스는 여성의 몸을 성적인 대상을 활용하는 세태에 대한 일차원적인 비판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알라나의 이야기 속 성역할과 성위계를 고정되지 않은 시선으로 고찰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알라나가 성을 이용하는 사회와 산업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위치한다. 성공에 대한 열망을 지닌 그녀에게 성적 매력은 유용한 도구다. 그녀는 촬영장에서 남자 배우를 유혹하고, 자신의 매니저가 된 개리가 불평하자 가슴을 보여주기도 하고, 시장 후보인 조엘이 밤에 호출하자 곧장 달려가기도 한다. 이처럼 단순한 수동적 캐릭터가 아닌 알라나의 모습은 중요한 메시지를 남긴다. 설령 기존의 사회 질서가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더라도, 알라나의 주도적인 선택과 참여가 없다면 그 질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즉, 그녀에게는 개리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듯이 선택권과 주도권이 있다.
이는 알라나가 기름이 떨어진 트럭을 끌고 내려가는 후진 장면이 러닝타임 중 가장 시원하며 황홀한 순간인 이유다.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선택권을 다르게 활용한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자신을 성적으로 이용하려는 세계에 편입되고자 했던 알라나. 그랬던 그녀는 이제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처럼 마초적인 남성의 공간에서 개리로 대변되는 또 다른 남성이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 운전대를 잡고서 스스로를 구해낸다.
또한 이 장면은 작중 한국 전쟁의 영웅을 연기한 왕년의 스타 '잭 홀든(숀 펜)'이 오토바이를 탄 채 그의 세계로 빠져들어갈 때, 알라나가 오토바이에서 뒤로 추락했던 장면과 정반대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잭 홀든에게 알라나는 과거 파트너였던 그레이스의 대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잭 홀든이라는 마초적인 영웅의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없던 그녀는 오토바이 뒤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뒤로 추락했던 그녀가, 이제 오히려 후진을 통해 존 피터스와 잭 홀든이 상징하며 그녀가 편입되고자 했던 기존의 남성적 질서를 전복한다. 그러니 이 장면 직후 세상을 바꾸겠다는 시장 후보 조엘의 선거캠프에 알리나가 합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넓게 보면 미국 사회의 그림자를 들춰내는 앤더슨의 장기가 발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리코리쉬 피자>의 메시지는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보다 많은 이들을 향해 뻗어 나간다. 알라나가 보여주는 주도성과 저항력은 개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리는 성공을 갈망하는 알라나만큼이나 사회 속으로 편입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그는 설령 알라나와의 관계가 뒤틀린다 해도 배우로서 성공을 꿈꾸고, 또 물침대 상점에 이어 핀볼 게임장을 오픈하면서 물질적 성공을 이루고자 한다. 이렇게 주류 질서에 편입되고자 하는 개리의 열망은 그보다 모든 면에서 사회적 위치의 우위를 점하는 남성인 존 피터스에게 조롱당하자 분노하고 또 복수하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 말미에 그는 막 오픈한 게임장을 뒤로한 채 알라나를 향해 달려간다. 마치 알라나가 기존 질서에 순응하며 동성 연인을 지키지 못하는 조엘과 달리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개리에게 달려가듯이. 이렇게 개리도 주류 질서로 편입되고자 하던 과거와 달리, 자신을 감싸고 있던 힘과 권위를 주도적으로 뒤집는다. 사회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본인이 원하는 것을 깨닫고 이루어낸다. 영화는 이러한 커플의 탄생과 변화를 세 번의 달리기를 통해 보여준다. 알라나는 경찰서에 갇힌 개리를 꺼내 주기 위해, 개리는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알라나를 향해 달린다. 이는 두 주인공의 달리기가 스크린 상에서 서로 다른 방향이고, 곤경에 처한 사람도 정반대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위계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에 둘은 그들의 역학관계에서 마침내 평형점을 찾았다는 듯 같은 방향을 보면서 전력으로 질주한다. 이렇게 역학 관계의 변화로 사랑과 연애를 정의하면서 앤더슨은 사랑을 매개로 보다 넓은 사회상까지도 통찰해낸다.
<리코리쉬 피자>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 중 유독 대중성을 염두에 둔 영화임이 분명해 보인다. 소재 자체가 많은 이들을 시간 여행에 빠트리고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유리한 소재이자 장르인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를 선택한 것부터가 그렇다. 비록 스토리라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듯 보이나, 공간과 음악을 활용해 석유 파동을 비롯한 히피 문화, 반전 운동 등으로 가득했던 70년대의 정취를 스크린에 가득 풀어놓은 것도 큰 몫을 맡는다.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에 현혹되서는 안 된다. 익숙하고 친숙한 사랑 이야기를 냉철하게 들여다보고 낱낱이 파헤칠 때 비로소 앤더슨의 로맨스가 품고 있는 이중, 삼중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사랑을 힘과 관계로 이해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전복의 짜릿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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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와 소피와의 추억은 캠코더 그 이상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런데...
소피는 자신의 엄마하고 이혼한 아빠와 며칠간 튀르키예여행을 한다. 엄마와 사이가 좋냐는 아빠의 질문에 서서히 나아지고 있다는 답을 하는소피가 캠코더로 여행의 일상을 찍는다. 튀르키예의 호텔에서 아빠와 함께 수영을 하고 자신과 똑같은 또래 남자애와 오락실에서 오토바이 게임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싶어 하던 성인들의 사랑 이야기도 화장실에서 들으며 아무리 어린애지만 성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 다분하다. 11살의 나이의 소피는아빠와 장난을 치며 아빠는 131살이라는 농담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아빠에게는 남모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아빠에게 무슨 과거가 있길래 딸에게는 다정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숨겨진 이면은 무엇이 있었을까?
아빠는 소피가 모르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다. 소피가 아빠에게 11살의 나이에 무엇을 했냐고 하니까아빠는 그때 생일이었는데 엄마에게 학대를 당하고 출생지인 스코틀랜드에서도 소속감이 없었다. 그래서 소피의 엄마와 이혼했지만 다시 잘 살아나가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소피가 아빠와 장기 자랑에 나가 노래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런 자신감조차 아빠에겐 없었다. 한마디로 무언가 수치심을 깊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소피도 튀르키예의 호텔에서 성인 남녀들이 키스하는 모습과 성적인 행위에 대한 동경을 하고 있었기에 자신과 오토바이 게임을 하던 또래 남자애와 키스를 할 수 있었다(그런데 또래 남자애가 먼저 덮치려고 장난침 그걸 저항하는 모습도 아버지한테 배웠음)
아빠는 자신도 공허하며 딸인 소피에게 잘해주려고 하지만 무언가 마음속에 남아있는 게 있었던 것 같다. 이혼하면서부터 딸인 소피를 다시 보게 되고 즐거운 추억도 함께 공유하려 했던 그런 아빠가 소피와 마지막 휴가를 보낸 후에 딸이 떠나는 모습을 캠코더로 찍으며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한다. 20년이 지난 후에 소피는 캠코더에 담긴 아빠와의 추억을 보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여운을 남기면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잔잔한 음악과 함께 올라가며 영화 애프터썬은 끝이 난다. 사실 소피와 아빠와의 추억은 사실 감독이 경험했던 실화라고 한다. 아마도
아빠와 함께했던 소피의 추억은 캠코더에 담겨있으며 다시 볼수록 눈물 나는 추억들이 많이 있기에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라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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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힘과 책임을 깨닫는 피터 파커의 이야기
이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청소년 시기를 거치며 성인으로 성장한다. 성장의 과정은 쉽지 않다. 호르몬의 변화로 신체도 변해가고 생각도 복잡해진다. 그래서 그 성장의 시기는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과의 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은 모든 청소년들이 겪는 과정이고 성인이 된 사람들도 그 과정을 거쳐 어른이라는 새로운 시기로 접어든다. 아직 주변에는 자신을 책임져 줄 수 있는 부모나 어른이 있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친구들과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 아이 자신의 탓도 있겠지만 부모가 그 책임을 대신하기도 한다.
성장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자신이 가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다. 각자가 가지는 책임은 다를 수 있다. 아주 큰 힘을 가지게 된 경우에는 그 힘을 어떤 방식으로 써 나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힘은 공부를 잘하는 노하우가 될 수도 있고, 부모로 부터 얻은 재력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신체적인 힘이 그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각자가 가진 힘을 활용하는 것은 청소년 시기가 거의 처음일 것이다.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많은 청소년들은 그 책임의 범위와 자신이 가지는 힘이 어디까지 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장기 피터 파커의 고민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피터 파커(톰 홀랜드)의 이야기를 담는다. 피터는 우연히 거미에 물려 신비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힘을 친구들에게 신체적 우월함을 돋보이는 도구로만 사용했지만 주변에 나타나는 악당들을 처치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에서 자경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피터는 알지 못한다.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피터가 가장 좋아하는 영웅이었는데 그를 직접 만나면서 다른 영웅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기 시작했고 어벤저스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 그동안 마블 시리즈에서 스파이더맨의 역할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저 조금 어린 청소년 영웅으로서 어벤저스에서 감초 역할을 하고, 토니 스타크와 유사 부자 관계를 만들게 되면서 그저 어린 영웅 정도로 다뤄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토니 스타크의 죽음을 경험하고 본격적으로 홀로서기를 하면서 심적 괴로움이라는 고난을 맞게 된다. 전편이었던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본격적으로 마블의 스파이더맨이 정신적 고뇌를 겪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는 아버지 같은 영웅인 아이언맨이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렌할)를 통해 대체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스테리오는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정체를 공개함으로써 피터를 혼란의 정점으로 끌고 간다.
피터 파커라는 인물은 늘 청소년이었다. 나이가 어린 영웅이었기 때문에 가족의 죽음을 겪었고, 자신의 잘못으로 주변 사람을 잃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과거 샘 레이미 감독 버전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도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벤 삼촌을 잃게 되었고, 마크 웹 감독 버전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의 피터 파커(앤드류 가필드)도 벤 삼촌과 여자 친구 그웬을 잃는 상황을 맞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 안에서 심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는 과정이 영화 내내 이어졌다. 그 혼란은 어쩌면 그들이 얻게 된 힘을 쓸 때의 무게감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피터 파커가 겪는 혼란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의 피터 파커는 그런 혼란을 제대로 겪지 않았다. 토니 스타크를 잃기는 했지만 그 주변에는 그의 마음을 챙겨줄 사람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의 여자 친구인 MJ(젠데이아 콜먼), 절친 네드(제이콥 베털런)과 큰 엄마 메이(마리사 토메이)는 피터의 옆에서 그를 돕거나 그가 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스파이더맨의 정체가 전 세계에 공개되면서 그가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력이 뻗어나가게 된다.
아마 이번 스파이더맨 영화는 마블 유니버스 시리즈 중에서 피터 파커라는 인물이 겪는 가장 힘든 고통이 담긴 영화가 될 것 같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가진 힘이 가져올 안 좋을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고 자신이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축 처진 어깨는 그가 짊어진 짐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영화 내내 피터는 그가 가진 힘으로 파생된 부정적 영향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서는 피터가 자신이 겪을 부정적인 일들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비치)를 찾아가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주문을 부탁한다. 기억을 지우는 행위는 영화 속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어찌 보면 피터에게 가장 간단하게 자신이 가진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 주문에 문제가 생기면서 영화 속 세계는 붕괴 직전에 놓이고, 피터에게는 자신의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여러 문제들이 닥쳐온다. 각종 빌런들의 등장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피터의 모습이 담기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피터 파커가 가지고 있는 ‘선함’이 이 영화에서도 핵심적인 내적 도덕적 갈등으로 발현된다.
지금까지 여러 배우가 연기한 세 종류의 피터 파커가 있지만 이 캐릭터들이 가진 고민은 모두 자신이 가진 책임에 대한 것이었고, 그들이 가진 특유의 선함을 활용한 해결 방식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고수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포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선하고 악당들도 다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핵심적인 기재로 깔고 있다. 그래서 스파이더맨이 분노에 가득 차 누군가를 살인하게 되거나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고민들이 영화적 긴장으로 발현된다.
지난 <스파이더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팬들을 위한 헌사
피터 파커라는 인물이 하는 고민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청소년 시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을 슈퍼히어로 영화 안에 녹여놓았을 뿐이다. 이제 성인이 되기 직전인 청소년이 가지게 될 책임과 자신의 힘 때문에 받게 될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스파이더맨>이라는 시리즈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청소년들이 거미 능력을 가지게 되지는 않겠지만 모든 청소년은 그 자신이 가진 능력과 책임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를 반드시 거친다. 그런 성장기의 고민이 이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도 잘 담겼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과거에 제작된 토비 맥과이어 버전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나 앤드류 가필드 버전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만족할 만한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전 버전의 <스파이더맨>에서 등장했던 빌런들인 닥터 옥토퍼스(알프레드 몰리나), 그린 고블린, 일렉트로(제이미 폭스) 등이 모두 등장하고 과거 시리즈의 대사,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기존 팬들을 추억에 잠기게 할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명대사가 이번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또한 영화 음악도 기존 OST의 노래들을 활용하고 있는데, 특히 빌런이 등장할 때 각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빌런들의 테마가 배경으로 흘러 예전 영화를 보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를 연출한 존 와츠 감독은 <스파이더맨 홈 커밍>,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을 연출했었는데, 이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까지 연출하면서 성공적으로 마블에서 시작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향후 대학생 버전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이어진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연출자가 바뀔지 어떤 방식으로 시리즈가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피터 파커가 가진 고뇌와 책임을 제대로 정리했기 때문에 향후에 마블에서 시리즈가 더 이어진다면 그가 어떤 방식의 삶을 택했는지, 주변 사람들과는 어떤 식으로 생활하게 될지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와 이야기들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화를 관람할 계획이 있다면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야기의 플롯은 간단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는 과정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내용을 먼저 알기보다는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영화의 재미를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FZkg4Fdi4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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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은 규명되지 않지만 추락은 해부된다
7★/10★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프랑스의 산속의 별장. 한 남자가 추락사한다. 시신을 발견한 가족들이 소방 당국에 신고하고, 경찰 역시 출동해 현장을 살핀다. 그런데 죽은 사무엘의 아내 산드라에게 질문하는 경찰의 말투가 묘하다. 경찰은 사무엘의 추락사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 의심한다. 그리고 산드라를 핵심 용의자로 지목한다. 이제 산드라의 혐의를 입증하려는 수사 당국과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려는 산드라의 다툼이 시작된다.
별장에는 사무엘과 아내 산드라, 아들 다니엘 그리고 반려견 스눕뿐이었다. 사건 당일의 개요는 이렇다. 작가인 산드라는 별장에서 인터뷰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전날 언쟁이 있었던 사무엘은 음악을 크게 틀어 인터뷰 진행을 방해한다. 어쩔 수 없이 인터뷰어를 돌려보낸 산드라는 다른 일을 하다가 잠들고, 아들 다니엘은 스눕과 함께 산책을 나간다. 그리고 산책에서 돌아오던 다니엘이 사무엘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다. 경찰은 다니엘이 산책을 나간 사이에 산드라가 사무엘과 다투다 그를 살해했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산드라가 수사 기관에 말하지 않았으나, 사무엘이 녹음해두었던 두 사람의 말다툼이 공개되면서 산드라는 점차 불리해진다.
녹취에서 드러난 부부의 사정은 복잡하다. 산드라는 어느 정도 재능을 인정받은 성공한 작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작가를 꿈꾸는 사무엘은 그렇지 못했다. 교수 생활을 하긴 했으나 작가로서 성공하길 꿈꾼 그는 최근 별장을 수리해 렌트하고 남는 시간에 글을 쓰기 위해 교수직까지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글은 써지지 않는다. 자신이 쓰다 포기한 대목을 협의하에 가져다 쓴 산드라의 작품이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한다. 같은 꿈을 지녔으나 아내만 잘나가는 상황이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것이다. 결정적인 건 아들의 사고였다. 오랜만에 글이 잘 풀리던 어느 날, 사무엘은 하원하는 다니엘을 데리러 가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날 사고가 나 다니엘은 시력을 거의 상실했다. 무능한 남자라는 자괴감에 자식에게 장애를 안겼다는 자책감이 더해진다. 사무엘은 사고 이후에는 정신적‧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섹스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양성애자인 산드라가 다른 여성과 잠자리를 가진 것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상징적으로 거세당한 무능력한 남자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사무엘의 추락은 남성성의 추락이다. 그것도 더는 떨어질 곳조차 없는. 산드라는 그런 사무엘에게 ‘글을 쓰지 못해 일상으로 도망갔다’고 비난한다. 수사 당국이 제기하는 타살의 정황적 근거다.
녹취에는 둘의 갈등이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는, 즉 산드라가 사무엘을 살해할 동기가 충분했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맥락이 읽힌다. 그러나 이 모든 걸 고려해도 산드라의 ‘살해 동기’를 추궁하는 검찰의 집요함은 소름끼친다. 그 누구도 자신 앞에 서면 무죄일 수는 없을 거라는 서늘함을 주는 검찰 캐릭터는 산드라를 숨이 막힐 듯 몰아붙인다. 또 하나 문제가 된 건 산드라의 창작법이다. 그는 항상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해왔다. 산드라의 개인사적 굴곡은 늘 그녀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래서 남편의 사망(‘살해’)도 그 연장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추궁이 가해진다(사무엘의 녹취는 산드라의 창작법을 통해 글을 쓰고자 한 그가 아내 몰래 일상을 녹음해둔 것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자기 추론에 맞게 재조립해 공격하는 법정 공방 장면, 즉 검사가 파편화해 취사선택된 산드라의 일상은 우리가 늘상 ‘그럴듯하게’ 해내곤 하는 타인에 대한 그 모든 추론에 중대한 문제제기를 한다. 실은 여기에 자의적 해석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을 엄중히 환기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끝까지 사무엘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타살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산드라가 무죄라는 절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그를 향한 모든 의심은 어느 정도는 막 남편을 잃은 아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일 수밖에 없다.
진실은 규명하지 않되 추락은 해부하는 이 영화가 던지는 물음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퍼즐의 한 조각을 가지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데 너무 익숙하고 능숙하다. ‘추락한 남편의 남성성을 조롱하는 아내’라는 ‘팩트’는 여기에 불을 붙일 완벽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지배적 추론 한편에 존재하는 무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추락의 해부〉는 사무엘의 추락에 대한 해부인 동시에 산드라의 추락에 대한 해부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의 추락에는 안전망이 필요하다. 남성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찾지 못한 사무엘에게도, 자기 결백의 가능성을 지키고 싶은 산드라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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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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