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30 21:29:14
[SIWFF 데일리] 새처럼 왔다 가는
영화 <쇼잉 업>
SYNOPSIS
재능 있는 조각가인 리지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족, 친구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리지는 사는 집의 주인이자 예술가 라이벌이기도 한 조와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전시 개막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리지는 과연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웬디와 루시〉(2008),〈퍼스트 카우〉(2019) 등 미국 사회의 현재적 삶을 내밀한 시선으로 다뤄 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PROGRAM NOTE
〈쇼잉 업〉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굴곡진 서사나 드라마틱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를 앞둔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술가 동료이자 리지가 사는 집의 주인이기도 한 조는 보일러 고장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흩어져 사는 가족은 저마다 리지에게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업에 집중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짜증과 불안이 쌓여가지만, 주변에 그걸 알아채 주는 이는 없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이 줄곧 그랬듯 리지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다. 오리건과 몬태나의 풍광 속을 확신 없이 지나던 이들처럼 리지 또한 삶의 어느 시기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고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하나인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로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바라본 뒤,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과 끊임없이 무언가 만드는 삶의 모습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쇼잉 업〉에서 두드러지는 건 찰흙, 직물, 실 같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재료를 계속해서 만지는 손짓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예술이란 그처럼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단하고 유명한 대가가 아니라, 매일 끈기 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은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와 공명한다. 〈쇼잉 업〉을 통해 매일 무언가 만지고, 걷고, 돌보고, 일하는 움직임들로 지켜지는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영화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는 동안 ‘한동안 내가 피곤했군…’ 깨달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살풋 감기는 걸 참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성격상 푹 잠들지는 못하고 아주 잠깐 졸다 깨다 반복하면서, 그래도 흐름을 놓치지는 않을 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게 되는 영화들. 공교롭게도 그런 영화들이 내게는 다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애프터썬>의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춰 같이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퍼스트 카우>도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걷고 움직이는 동안 그 소리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 다 내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붙어 있는 영화들이다.
<쇼잉 업>도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벽면 가득,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여성 상들이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흙을 주물러 이 여성들의 모습을 현실로 데려오느라 바쁜 예술가, 리지가 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료가 떨어졌다고 역정을 내는 고양이 리키(연기를 진짜 잘하는 천재 고양이이다)의 사료 그릇도 채워 주어야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하게는 못해도 기본 할 도리는 또 해 주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집에 온수는 안 나오는데, 집 주인이자 동료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마음이 없으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또 헤매야 한다. 결국 전시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연차를 낸다.
(으레 그렇듯) 모처럼 작정한 하루는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고양이 리키의 습격을 받은 새를, 죽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 밖에 내보낸 새를 친구 조가 구조할 줄이야. 전시를 두 개나 앞두고 있는 조의 부탁에 따라, 엉겁결에 떠맡은 비둘기 한 마리를 돌보는 것이 그 날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둘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작업실을 두고 2층에 올라가서 고양이를 가둬 둔 채로 작업을 한다.

결국 작업의 속도나 방향은 삶에 생겨나는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아랑곳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이 코앞이어도 고양이와 비둘기에 둘러싸인 하루를 보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사무실 동료가 낄낄거리며 말했듯이, 비둘기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음이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세상에 가시적이지 않았던 느낌과 마음과 감정과 에너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이 세계에 끌어오는 일이다. 다른 데 가서 죽었으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선 끝에 그 형상이 걸려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은 마음이고, 손은 손이다. 바삐 작업하는 리지의 손, 그리고 리지가 일하는 학교 곳곳의 학생들이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진다. 그리거나 오리거나 붙이거나 칠하거나 짜거나 뜨는 그 모든 일에 단 한 순간도 재능이 있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자차분히 손을 놀려 보고 싶어진다.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것이다.
책상 위의 작업물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느낌을 안다. 고되고 행복한. 외롭지는 않지만 고독한. 기쁘지만 덜컥 겁이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은 답답함도 안다. 그래도 리지는 직업인이 될 만큼 익숙하고 실력이 좋은 예술가니까, 가마에서 잘못 타버린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있어서는 더없이 초연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해서 하나하나 동동거리기만 한다. 그런데, 이거 죄다 행복한 고민이다. 인생은 절대, 작업물과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이자 예술가로 어엿하게 인정받는 리지에게도 신경 쓸 게 많은 남루한 일상이 있다. 파티에 빠져 온수기를 모른 체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는 날들. 가뜩이나 가족이며 전시회의 치즈까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비둘기의 건강까지 신경이 쓰이고. 예술가의 삶이라 해서 예술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삶은 으레 그렇다.
그러나 푸드덕거리는 힘찬 날갯짓으로 그 모든 답답한 대화를 탁 끊는 비둘기처럼, 그런 새처럼 나에게 왔다 가는 것들이 있다. 예술가의 삶이든, 예술가가 아닌 나의 삶이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반복 위로, 사뿐 날아올라 반짝 빛나는 것. 내겐 영화가 그렇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를 틀어박아 두고 잠시 빛나는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나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답답하던 감정의 맥락이 끊겨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서도 또 걸어가는 리지와 조의 뒷모습을 본다. 작업은 계속되고 인생도 계속된다. 오고 가는 것들과 답답한 것들 사이,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는 계속 끈질길 것이다. 앞으로도 쭉.
2023.08.24 17:30-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
2023.08.27 20:00-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2023.08.29. 13:30-15:1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Relative contents
-
- 추하지만 아름다운 꿈, 영화를 사랑한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0년대 할리우드. 무성 영화의 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의 저택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벌어진다. 파티는 난잡하다. 그러나 매혹적이다. 영화에 출연하거나, 영화를 찍고 싶거나,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멕시코에서 막 LA에 입성한 '매니(디에고 칼바)'와 스타가 될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찬 '넬리(마고 로비)'도 다르지 않다. 우연히 만나 영화에 대한 열정을 공유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촬영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그렇게 꿈을 이루고 스타가 되는 것도 잠시. 유성 영화가 등장하면서 세 주인공은 각자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꿈을 버리고 살아가거나, 꿈을 이룬 채 퇴장하거나.
<바빌론>으로 돌아온 꿈과 현실의 마술사, 데이미언 셔젤
<위플래쉬>, <라라랜드>, <퍼스트맨>으로 연이은 성공을 거둔 데이미언 셔젤 감독. 사실 그의 특징을 콕 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의 작품은 매번 장르도, 분위기도, 소재도, 연출 방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음악 영화 전문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우주를 배경으로 한 전기 영화를 찍었다. 빠른 편집과 몰아치는 연출이 장점인 줄 알았더니 담담하고 느릿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도 증명해 보였다.
그렇지만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그의 특징을 하나 찾을 수 있다. 데이미언 셔젤은 언제나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이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의 주인공은 가족, 사랑, 일상, 주변인의 관계를 포기한 채 꿈을 좇거나, 반대로 꿈을 포기해야 한다. 둘 모두를 갖는 해피엔딩은 없다. 인상적인 엔딩 장면들 이면에 늘 냉혹함이 깃들어 있는 이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꿈과 현실의 매개체는 늘 매혹적이다. 현실을 잊게 하고, 찰나의 순간이라도 꿈을 이루어주기에. 꿈을 잊고 현실을 살더라도 단 한 순간 동안은 아름다웠던 꿈속으로 되돌아갈 문을 열어 주기에. 그래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했던 그 열정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다. 재즈와 뮤지컬, 그리고 달이 아름다운 것처럼.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 무성 영화의 시대가 끝나고 유성 영화의 전성기가 도래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바빌론>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꿈'을 쟁취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모인 사람들이 벌이는 이 역동적인 이야기는 셔젤 감독의 이전 작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주제를 담은 매개체가 영화이고, 무대가 할리우드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영화'라는 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바빌론>은 더욱 특별하다.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가득하기에 셔젤의 작품 중 가장 야심 차고 강렬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전 필모그래피에 비해 길고 거칠며 덜 정돈된 인상이 가득하더라도.
할리우드, 추하고 난잡한 꿈의 공장
<바빌론>의 오프닝만 봐도 셔젤의 야심이 느껴진다. 잭 콘래드의 파티는 마치 배즈 루어먼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파티를 보는 듯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재즈 연주만큼 화려하고 정신없고 난잡하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술을 들이켜고, 마약을 빤다. 소파 위, 테이블 위, 계단 아래에서 정신없이 섹스한다. 누군가는 어이없이 죽고, 또 누군가는 다음 영화에 캐스팅되기 위해 영화 제작자에게 추파를 던진다. 언제 터져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넘쳐 나는 자극 속에서 사람들은 마비되어 간다.
30여 분간 이어진 오프닝 다음에 등장한 영화 촬영 현장도 파티 못지않은 아수라장이다. 파티에서 갑작스럽게 캐스팅된 넬리의 촬영장은 무슨 영화를 찍는지 알기 어렵다. 서부 시대 선술집 옆에는 아무런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시대와 공간을 재현한 세트장이 즐비하다. 아무 준비 없이 촬영에 투입된 넬리가 기대 이상의 눈물 연기를 선보이자 영화감독은 즉석에서 시나리오와 콘티를 수정해 가며 촬영하기 바쁘다. 바로 뒤 촬영장에서 불이 나 모두가 대피하는 와중에도.
한편, 에픽 영화를 촬영하는 잭의 촬영장은 유혈이 낭자하다. 대규모 전투 시퀀스에 참여한 엑스트라는 창에 찔리고, 마차나 말굽에 짓밟힌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케스트라는 해당 장면에 맞는 곡을 연주하고 감독은 필요한 카메라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대기실에서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잭은 지루함에 지쳐 술을 진탕 마시기 시작한다. 마침내 잭의 순서가 찾아왔을 때, 술에 취한 주연 배우는 촬영장까지 걸어가지도 못한다. 한편 영화감독의 수중에는 카메라가 없다.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 매니가 카메라를 대여해 오자 간신히 그날 촬영을 끝마친다. 밤이 찾아오면 그들은 촬영장에서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또다시 술과 마약과 섹스에 빠져든다. 또 아침 해가 뜨면 또다시 새벽부터 촬영하러 나선다. 얼핏 보기에 1920년대의 할리우드는 추잡하고 흉하다.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게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빠져나올 수 없는 영화의 아름다움
하지만 정신을 쏙 빼놓는 <바빌론>의 오프닝과 초반부는 마냥 저속하지 않다. 파티와 촬영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꿈'이다. 매니는 영화계에서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하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넬리는 기회만 준다면 스타가 될 수 있다며 파티장을 자기 무대로 만든다. 잭 역시 할리우드의 톱스타로서 지금처럼 화려한 삶을 계속해서 누리고자 한다. 파티 음악을 담당하는 색소폰 연주자 '시드니(조반 아데포)' 역시 위대한 아티스트가 되는 꿈에 부풀어 있다. 이처럼 꿈들이 모여 열망을 분출하기에 더럽고 추잡하고 혼란스러운 이 파티는 사랑스럽다.
촬영장도 다르지 않다. 촬영 장비는 항상 망가지고, 사람은 죽어 나간다. 지금이라면 난리가 날 사건 사고가 쏟아지는데도 사람들은 매일매일 영화를 찍기 위해 모인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코끼리 똥을 맞으면서도 기어코 코끼리를 잭의 파티장에 데려가기 위해 애쓰는 매니처럼, 그들은 영화 촬영장을 떠나지 않는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여배우의 춤과 눈물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만취한 할리우드의 스타가 하루의 마지막 태양 빛을 배경으로 운명적인 서사시를 완성하는 광경을 보기 위해서. 혼돈의 끝에서 마주한 한순간의 절정을 찍을 때 찾아오는 황홀경을 붙잡기 위해서. 그렇기에 모든 영화 촬영장도 파티만큼이나 아름답다.
실제로 꿈이 없는 파티와 촬영장은 추하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또 한 번의 파티 장면만 봐도 오프닝 파티와는 묘하게 다르다. 여전히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지만, 차이점이 있다. 이 피티에는 꿈이 없다. 무성 영화의 스타로 등극한 넬리와 잭, 그리고 잭의 매니저로 영화계에 입성한 매니에게는 꿈이 없다. 유성 영화가 등장하자 그들은 촬영장 안팎에서 불안에 떤다. 과연 자기가 여전히 스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또 영화계에서 종사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녹음 스튜디오가 갖춰진 새로운 촬영장의 모습도 아름답지 않다. 사람이 죽는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다르지 않으나, 배우와 스태프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촬영할 만한 매력이나 보람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파티는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한 공간이자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 꿈을 잃은 이들은 코앞의 자극에만 심취한다. 이제 그들의 놀이는 아름답지 않다.
추잡함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맹목적인 사랑, 영화
이처럼 <바빌론>은 1920년대 영화 산업의 명암을 가리지 않은 채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치부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사랑한다. 달리 말해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을 고백한다. 사막에서 시작한 할리우드를 건물 가득한 도시로 키워낸 열정은 물론, 그 열정이 선을 넘어버린 광기도 함께 사랑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빌론>은 신선하다. 할리우드는 가끔 자기 역사를 미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지름길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연애편지가 아닌 애증의 편지라서 특별하다.
영화는 이 맹목적인 사랑을 매니의 눈빛에 담아낸다. 카메라는 그가 영화와 눈이 맞는 순간을 포착한다. 첫 번째 순간은 잭의 파티 장면이다. 막 LA에 온 매니는 온갖 잡일을 한다. 파티에 서프라이즈로 등장시킬 코끼리를 데려오고, 술과 마약을 배달하며, 대리운전을 한다. 그러던 중 매니는 넬리를 본다. 입장을 거부당하던 그녀를 몰래 파티장에 넣어주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둘 다 열렬히 영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넬리가 파티의 무대를 휘어잡고,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곧장 캐스팅 제의를 받는 걸 본다. 그렇게 그는 넬리와 사랑에 빠진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영화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두 번째 순간은 멕시코로 탈출하기 전 우연히 들린 파티 장면이다. 영화 제작자가 된 매니는 여러 문제로 꼬여 버린 넬리의 커리어를 되살리려 한다. 그러나 도박에 빠진 넬리는 이미 '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가 이끄는 LA 지역 갱들과 문제를 겪고 있다. 넬리를 도와주던 매니 역시 자연히 그들과 갈등을 겪고, 끝내 그들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갱을 피해 도망치던 매니와 넬리는 이동 중 작은 마을에서 열린 파티에 우연히 참석하고, 파티를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서 함께 춤을 춘다. 바로 이때 그는 다시 영화의 매력에 빠진다. 영화의 추잡함을 온몸으로 체감했고 넬리와 영화가 인생에서 피해야 할 골칫거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는 이번에도 영화에게 함락당한다. 이 두 장면만 보더라도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어떤 느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온몸을 던져 사랑해서 진정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셔젤 감독의 작품답게 <바빌론> 속 사랑도 현실 앞에서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무성 영화의 사람들인 세 주인공 앞에 유성 영화가 등장하고,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가 새로운 시대에 발굴된 신흥 스타를 비춘다면, <바빌론>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는 이들을 그려낸 셈이다. 톱스타였던 잭은 미숙한 목소리 연기 때문에 이제 관객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와 몇십 년간 같이 일해온 에이전시는 그에게 더 이상 흥행 작품의 배역을 맡기지 않는다. 라이징 스타였던 넬리의 커리어도 순식간에 꺾인다. 허스키하고 거친 게 매력인 그녀의 목소리가 유성 영화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체계가 잡혀간 것도 그녀에게는 독이다. 거칠고 야생적인 넬리의 성격은 사교 파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음악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알린 매니도 끝내 현실의 벽에 부닥친다. 그는 넬리의 커리어를 살리려다가 본인 경력도 끝날 위기에 처한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자기 꿈을 지킨 채 찬란히 부서지든가, 현실을 인정하고 꿈을 내려놓든가. 세 주인공은 제각기 달리 선택한다. 잭은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판단한다. 더 추해지기 전에 스스로 자기 시간을 끝낸다. 넬리는 잭과 비슷한, 한편으로는 그녀다운 선택을 한다. 함께 도망치자는 매니의 제안을 거부한다. 처음 등장할 때처럼 춤을 추면서 거리 저편으로 사라진다. 매니는 도망치기 직전 갱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다. 그러더니 영화라는 꿈을 포기한다. 할리우드를 떠나 평범히 살아간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또 위로한다. 온몸을 던져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라는 꿈을 꾼 이들의 마지막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잭에게 그의 시대가 끝난다고 알려준 기자 '엘리노어(진 스마트)'의 대사에 모든 게 함축되어 있다. 그녀는 잭이 "천사와 유령들과 함께 영원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온몸을 던져 영화를 만든 넬리와 매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영상과 이름으로 살아남은 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새로운 관객과 친구가 될 것이므로.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다시 한번 매니의 눈에 주목한다. 시간이 흘러 LA로 돌아온 매니는 극장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본다. 작중 등장인물인 리나 라몬트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유성 영화 시대에 전성기가 끝나버린 여배우를 보며 넬리와 무성 영화의 전성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내 경탄에 가득 찬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동시에 영화를 보면서 자기가 사랑했던 대상이 넬리라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넬리를 담아낸, 꿈과도 같았던 영화의 한 장면에 매료됐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동시에 자기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자기처럼 한순간의 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고생했고, 고생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영화를 보며 배운다.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부터 이크란을 타고 제이크 설리가 하늘을 나는 순간까지. 자기가 몸담았던 할리우드는 달라졌어도, 할리우드는 계속된다는 걸 직감한다. 멸망한 후에도 시대에 따라 아름답고 위대한 나라와 도시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어 살아남았던 바빌론처럼.
영화를 사랑하게 만들다
이 모든 사랑 고백은 데이미안 셔젤이 직접 실천했기에 더 인상적이다. 사실 <바빌론>은 <위플래쉬>나 <라라랜드>, 심지어 <퍼스트맨>에 비해서도 대중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일단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지나치게 길다. 파티 장면이나 몇몇 에피소드는 단축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몇몇 캐릭터도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셔젤은 그러지 않았다. 자기 비전을 전부 스크린으로 옮겼다. 애초에 이 영화를 제작하자고 배급사를 설득할 만한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전작들을 만들었다고 했던 만큼, 타협하지 않았다. 모든 영화와 영화계 종사자들을 향한 찬가를 온전히 들려준다. 하지만 그렇기에 <바빌론>의 메시지는 강력하다. 영화를 향한 애정, 심지어 할리우드의 부끄러운 과거까지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설령 이전 필모그래피에 비해 길고 거칠며 덜 정돈된 인상이 가득하더라도.
감독의 장점과 배우들의 조화는 화룡점정이다.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은 여전하다. 넬리와 매니의 주제곡이나 잭의 주제곡은 미세하게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그때마다 필요한 감정을 기가 막히게 자아낸다. <라라랜드>에서 'City of stars'가 반복되지만, 들을 때마다 인상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 말할 게 없다. 특히 마고 로비가 눈에 띈다. 마치 할리우드의 얼굴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도 그랬지만, 그 시대의 할리우드를 또 한 번 생생하게 표현한다. 관객과 함께 광란의 20년대를 헤쳐 나가는 디에고 칼바의 신선한 페이스도, 작품 전반적으로 중후함과 위트를 불어넣는 브래드 피트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달리 말해 <바빌론>은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영화다. 설령 팬데믹을 비롯해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와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인생과 꿈 사이에서 영화는 계속된다
-
- 웨딩드레스로부터 도망가기
결혼식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신부의 웨딩드레스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리고 결코 빠지지 않는 장면이 그 드레스가 어떤 드레스인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유명 브랜드의 신상 드레스라거나(ex.<신부들의 전쟁>), 유명한 디자이너가 주인공만을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라거나(ex.<섹스 앤 더 시티>).. 제니퍼 로페즈의 신작 영화 <샷건 웨딩>에서도 어김없이 드레스가 주인공이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달시(제니퍼 로페즈 분)가 필리핀의 한 섬에서 치르는 결혼식에서 입는 드레스는 신랑 톰(조쉬 더하멜 분)의 가족에게서 전통적으로 물려 내려온 드레스다. 설정 덕분에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이 웨딩 드레스는 달시의 행동을 영화 내내 제약하는 장애물이다. 애초에 본인이 고른 것도 아닌, 신랑의 가족에게서 받은 드레스라는 점부터 이 웨딩 드레스는 달시에게 작용할 가부장제를 비유한다. 신랑의 어머니 캐롤(제니퍼 쿨리지 분)에 따르면 이 드레스는 캐롤이 입었고, 신랑의 동생인 지니가 이어서 입었다. 달시의 웨딩드레스는 달시를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조이면서 캐롤과 지니가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어야 할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대놓고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시의 결혼식은 인질극으로 변모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톰과 설전을 벌인 후 혼자 신부대기실에 돌아온 달시는 과자를 먹으며 어떻게든 웨딩드레스를 벗으려 애쓴다. 말 그대로 숨쉬기 힘들 만큼 조여오는 웨딩드레스의 코르셋은 달시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톰조차 이 드레스를 벗기지 못한다는 점인데, 와중에 톰은 드레스의 불편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시에게 주어질 여성으로서의 역할은 달시의 숨통을 조이지만 톰에게는 당연한 것이며, 달시가 호흡 곤란을 호소함에도 원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눈 앞에 문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이 다가와도 달시는 드레스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데 이는 톰과의 설전에서 집어던진 결혼반지와 상반된다. 달시는 쉽게 반지를 뽑아 톰에게 던지지만 톰은 가볍게 잡아내며 결국에는 그 반지를 달시에게 도로 끼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달시는 드레스에서 온전히 탈출하지 못하는데, 이는 아무리 달시가 발버둥쳐도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톰과 함께 해적에게 발각된 달시는 결국 같이 손목을 묶이는 신세가 된다. 반지를 집어던지고도 톰에게서 달아나지 못한 달시는 결국 드레스를 입은 채 톰과 함께 도망다니기 시작하는데,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이 모든 것을 가부장제의 비유로 본다면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편한 바지를 입은 톰은 도망다니면서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달시의 드레스는 계속해서 찢어지고, 달시의 머리에 얹어진 비싼 가발은 달시가 달리기 어렵게 만든다. 결국 가발을 벗어던지면서도 비싸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톰의 주머니에 쑤셔넣는 달시는 종국에 그 가발이 구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톰이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아마도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있었을 달시는 어느 순간 맨발이 되고, 결국 해적에게서 부츠를 벗겨내 신지만 드레스로부터는 여전히 도망치지 못한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달시의 드레스는 영화 내내 제니퍼 로페즈의 신체를 눈요깃감으로 활용하는 도구로 변모하고,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드레스의 가슴선 위로 로페즈를 잡아 관객으로 하여금 로페즈의 나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부엌에서 해적의 공격을 막아내던 톰과 달시는 자신들을 묶고 있던 끈을 끊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톰의 출혈을 수반하게 되고, 이는 톰의 신체적 약화로 이어지는 대신 달시의 약점(기절)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가부장제의 미약한 상징으로부터 탈출하면서도 달시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신체적인 자유를 얻는 대신 혼절하여 무방비로 노출되고, 톰의 도움이 없이는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비유된다. 이전 장면에서 용감하게 짚라인을 타고 수류탄을 적기에 던져 해적을 물리친 달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을 감안하면 이 장면이 상징하는 바는 다소 노골적이다. 톰은 달시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가부장제에 속박하기 위해 해적을 물리치며, 이 과정에서 약간의 출혈 정도는 감내한다. 달시는 결국 드레스의 일부를 찢어내지만 온전히 달아나지는 못하고, 결국 톰과 함께 가부장 그 자체를 상징하는 양가 가족들과 하객을 구하기 위해 풀장으로 돌아온다.
영화 내내 달시는 단곗수가 적은 계획을, 톰은 단곗수가 많은 계획을 선호하는 양상을 보인다. 달시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입는 데도, 벗는 데도 많은 단계를 요구하는 데다 드레스 이외에도 머리와 화장 등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달시가 단순한 계획을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결혼식에서조차 신랑에 비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신부인 달시는 나머지 계획은 단순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반면 탈착이 자유로운 정장을 입은 톰은 단순해 보이는 자신의 역할이 단조롭다고 느낀다. 또한 복잡한 단계를 거쳐 가부장제 속으로 달시를 끌어들여야만 달시가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단순한 계획을 선호하던 달시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계획의 단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지만, 실상은 단계가 몇이든 이미 가부장의 덫에 걸려든 달시에게 필요한 계획은 단 한 단계뿐인지도 모른다. 결혼을 포기하고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마침내 풀장에 도달한 톰과 달시는 그 곳에서 놀랍게도 결혼의 실체를 목격한다. 이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결혼이 모두 이상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상처입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시와 톰은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달시는 해적을 처단하는 영광마저 야구선수인 톰에게 돌린다. 아무도 보지 못할 때에는 적재적소에 수류탄을 던졌던 달시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수류탄을 톰이 쳐내도록 던지는 장면은 결혼제도 안에서 모든 영광은 신랑을 향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바다 위로 가서야 톰과 달시는 그나마 동등하게 마지막 적과 겨룰 수 있게 되지만 목격자는 본인들과 망자뿐이다.
헐리웃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웨딩 로맨틱 코미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이성연애를 찬양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세지들을 읽어내는 관객이 있다면 언젠가 웨딩드레스는 폐기될지도 모른다. 다 찢고서야, 그리고 해적의 부츠를 빼앗아 신고서야 해변을 자유롭게 달리는 달시의 모습은 결혼식이라는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은 여성의 희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지만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 이미지 출처는 모두 다음 영화입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 패션계의 조커, 크루엘라!
아직 올해가 가지 않았지만, 현재로썬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다. <크루엘라>는 디즈니 원작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서 악당을 맡고 있는 '크루엘라'의 과거 삶을 다룬 영화다.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를 보지 않은 상태로 영화를 봤지만, 큰 각색이 없는 거 같아 원작을 안 보고 영화를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크루엘라>를 보고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를 본다면 크루엘라 매력에 더 빠질 듯하다. 그리고 영화는 마치 <악마는 파라다를 입는다>가 떠오르게 만든다. 패션이라는 키워드와 냉정하고 딱딱한 상사의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크루엘라> 네이버 스틸컷
패션
<크루엘라>는 197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대 배경을 살려 가풍이나 생활양식을 흩트림 없이 재연한다. 그중에서 패션이 엄청나다. 1970년대 패션 스타일을 완벽하게 재연할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펑크 문화로 생기는 펑크 룩 패션이 합쳐져 화려하고 독특한 패션을 선보인다. 1970년대 고전 패션 스타일을 선보이는 남작 부인 바로네스(엠마 톰슨) 패션과 1980년대 펑크 패션을 결합하여 새로운 패션 패러다임을 선보이는 크루엘라의 모습은 인물 관계 간의 단순한 외적 갈등을 패션이란 요소로 확장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립 구도를 표현한다. 또한, 거시적 관점으로 접한다면 당대 1970년대 패션을 가진 기성세대와 1980년대 펑크 문화와 함께 반문화를 선보이는 신세대간의 사회 갈등을 떠오르게 만든다. 자신만의 개성과 평등을 주장하는 펑크 문화의 특징처럼 크루엘라만의 아방가르드한 패션 스타일에 빠지게 된다.
패션쇼에서 '눈' 다음으로 즐거운 기관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귀'일 것이다. <크루엘라>는 다양한 각도와 샷을 통해 패션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선보이지만, 마치 영화가 아닌 패션쇼를 보는 것처럼 신나고 다양한 OST가 흘러나온다. 일부 OST는 기성 곡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러한 점이 더욱 <크루엘라>에 등장하는 패션을 바라보는 관객들을 흥분하게 만든다.
조커
필자는 크루엘라를 보면서 <조커>의 '조커'가 생각났다. 둘 다 빌런이거니와 어머니의 정신질환으로 힘든 가정환경도 있지만, 화장과 분장을 통해 자아를 드러내거나 각성하는 방법과 세상을 향한 자신의 외침이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유혈과 폭력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조커처럼 크루엘라는 유혈과 같은 자극 없이 남작 부인 패션쇼 때 자신만의 패션을 선보이며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효과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
- 기억해라, 너희 둘은 반드시 단 하나다
서브스턴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왕년의 스타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이다. 카메라 앞의 엘라지베스. 체조복을 입고 율동 같은 운동을 하고 있다. “Pump it up!”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덧붙이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던 대배우다. 압도적인 연기력과 고혹적인 비주얼로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엘리자베스. 지금은 인기가 한 풀 꺾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날. 엘리자베스의 유일한 일거리였던 에어로빅 쇼 진행자 역할에서 해고당한다. 해고만 당하면 모르겠는데 쇼의 총책임자 하비(데니스 퀘이드)의 험담마저 듣게 된다. “아카데미고 나발이고. 걔(엘리자베스)는 이제 끝났다고.” 심지어 면전에다가도 “50 넘은 여자는 끝났다”라는 막말까지 듣는다. 외로운 엘리자베스. 분명 세상 사람들이 날더러 아름답다고 해줬는데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겉돌던 엘리자베스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정밀검사를 받는 엘리자베스. 큰 문제는 없었지만 외상보다 그녀 마음에 있는 상처가 엘리자베스에게 더 치명적이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보던 남자 간호사.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 ‘서브스턴스’라는 것을 밀어 넣는다. ‘잘 되길 바랍니다’라는 쪽지와 함께 달려있던 usb. 엘리자베스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USB에 있는 영상을 재생해 본다. USB에 있는 영상은 허무맹랑했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내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뭔 소리야? USB를 버리는 엘리자베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선 왕년에 잘 나가던 내 모습이 반복재생되고 있다. 새로운 시작이 필요해. 다시 USB를 주섬주섬 꺼내는 엘리자베스. 서브스턴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육체의 이미지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육체의 이미지다. 육체를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는 영화의 주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와 추, 두 가치는 과연 별개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경계를 구분하는 행위의 타당성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 스파클이 체조를 하는 영상은 단순한 신체적 움직임을 넘어선다. "아름다운 육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각적으로 던지기 위함이다. 이는 반대편에 서 있는 수 역시 체조 같은 안무를 통해서 스파클과 대비되는 것을 택한다. 이들이 비슷한 의상과 동작을 반복하며 대조를 이루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두 인물의 신체를 클로즈업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둘 중 무엇이 더 아름다운가?*를 판단하게 만든다. 이러한 판단은 영화 후반부와 결말로 이어지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한다.
또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몸을 보여주는 영화기도 하다. 특히 스파클과 수의 관계를 보여주는 특정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서 두 인물을 카메라가 어떻게 비추는지가 영화의 후반부를 위해 중요하다. 카메라는 어떤 장소를 탐구하듯 인물들을 다룬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를 보여주듯 여기저기 자세하게 찍는다. 이 호기심을 형상화한 카메라 워킹이 두 인물의 처지를 동격으로 만들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수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스파클이 사실상 인간으로서 같은 처지에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나체의 인물들을 서서히 쌓아 올린 영화는 엔딩부에서 강력하게 폭발하며 그 모든 에너지를 분출한다. 두 인물이 나타내는 나이 듦과 젊음이 특정 인물의 핵심과도 닮아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할리우드
이 영화에서 역시 중요한 것은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 스파클이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순간이다. 글쓴이 같은 사람들에겐 인스타그램 릴스로만 볼 수 있는 별로 된 시그니처가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한다. 스파클이 단지 '이런 사람이었어'를 보여주려고만 묘사하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스파클은 아직도 엔터테이너 산업의 현역으로 뛰고 있고 하비와 함께 일하고 있다. 이 기본적인 설정을 중심으로 영화의 플롯이 정확히 할리우드의 룰 따라 움직인다. 이 장면들이 익숙하기도 하지만 두 인물 간의 처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켜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부각하기도 한다. 두 인물의 엇갈린 희비가 '원래 연예계란 그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좋은 것만 보는 연예계'와 '그를 뒷받침하는 할리우드의 룰'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수많은 스캔들이 할리우드를 오고 간다. 그 스캔들을 따라 수많은 팬들이 스타를 공격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를 생각해 볼 필요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면을 보고 스타를 지지하는 걸까? 엔터테이닝 산업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깊은 이해를 방해하는, 그러니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아닐까? 예쁜 것과 잘생긴 것 말고 나머지를 고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게 할리우드 아닐까? 하는 질문을 영화가 던진다.
실제로 이 질문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역할이 흥미로웠다. 글쓴이는 이 영화를 보면서 미의 기준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을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에서 시점쇼트가 등장하는 장면이 이야기 상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주제로서나 이야기 전개상으로나 영화 안에서 밑줄 쫙 그 여질 때마다 영화 안의 판단을 유발하는 장면에 시점쇼트가 등장한다. 마치 '이 건 어떤데?'라고 관객에게 묻는 것처럼. 이 관객을 판단 대상으로 끌고 들어오는 연출은 엘리자베스와 수가 고르는 모든 선택을 인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와 관련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 역시 이 할리우드 시스템의 일부분으로서 그 룰을 철저하게 따른다. 이 선택이 영화에서 폭발하는 연기력, 또 야자나무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힙한 이미지와 함께 인물들을 틀 안에 가두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와 수가 별개의 인격처럼 느껴진다는 설정은 영화 안에서 공-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둘이 기억을 100% 공유한다고 생각해 본다. 이미 이 영화와 모순된다. 왜? 이 영화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영화니까. 어떤 것을 배격하고자 하는 태도와 이어지지 않는다. 또 이 영화에 존재하는 수많은 객체들과의 연결성과도 맞닿아있는 부분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똑 떼고 두 사람만 이어진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수와 엘리자베스로 국한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후반부로 대표되는 한 인물과 그 나머지 사람들은 사실상 동격으로 묘사됐다. 애초부터 별개로 설정했기 때문에 비유가 엄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면에서는 이 할리우드를 비판한다는 아이디어가 좀 얄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약물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라는 현실적인 문제는 아예 차치하기로 한다. 중요한 건 이 약물의 존재로 인해 나타나는 인물들의 행동이다. 엔딩으로 전력질주하는 영화의 에너지에 후반부의 전개가 보는 데 있어 큰 무리가 아니다. 연출의 통일성으로도 잘 살렸고, 논리적으로 어그러지는 연출도 아니며 감정선을 잘 탔다. 그런데 인물들이 1차원적이다. 특히 수의 내면이 그랬다. 나이가 엘리자베스에 비해 어려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엘리자베스에게 몇 장치를 부여한 것 치고 수는 빈약하다. 또 어떤 장면들은 여성의 성상품화를 목표로 짠 장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폭력을 고발하면서 오히려 인물을 폭력적으로 대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영화 밖의 세계를 비판하고, 내적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쌓아 올린 이미지를 폭발시키는 영화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자기혐오다. 이 영화는 자기혐오의 근원을 질문해 ‘당신은 당신과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나요?’라고 묻는 영화다. 이 영화가 이 질문을 보여주는 방식은 역시 연출력 덕이다. 영화 템포가 초반부부터 폭주해서 사운드와 카메라 숏으로 자극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템포를 늦출 때는 늦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어떻게 보면 이질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두 장면이 등장한다. 첫 장면은 초반부에 나온다. 이제 역사의 뒤안길이 된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바라는 것은 다시 거대한 명예를 되찾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런 줄 알았다. 이 영화의 사실상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 장면이 후반부로 돌아와서 극 중에서 가장 관객들의 마음을 깊게 찌른다. 동시에 이 인물과 장면들은 영화가 배태하고 있는 거대한 질문과도 이어진다. 과연 우리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 어디에 화려하게 쿵쿵쿵거리며 잔인한 장면만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 개인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마무리를 담당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감독의 연출도 훌륭했지만 이것을 뒷받침하는 데미 무어와 마가렛 퀄리의 연기가 압도적이었다. 마가렛 퀄리가 수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아노라>에서의 미키 매디슨이 슬쩍 겹쳐지기도 했다. 왜? 영화 후반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기가 서서히 등장한다. 납작한 캐릭터의 수를 마가렛 퀄리의 개인기가 살렸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마가렛 퀄리보다 더 강력한 존재감을 펼치는 건 역시 데미 무어다. 데미 무어의 연기는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데미 무어의 모습 그 자체다. 또 조디 포스터 같은 무어의 또래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와는 색달랐다. 특히 혼란스러워하는 연기가 압도적인데,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 다가왔던 관객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연기를 감독과 폭넓은 논의로 구현한 데미 무어의 역량은 충격적이다. 글쓴이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양자경이 키 호이 콴과 <화양연화>를 오마주 하던 장면이 생각났다(물론 데미 무어의 본작에서의 연기와 양자경의 연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간단한 상황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복잡하고 어두운 내면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구현했다. 아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너희 둘은 반드시 단 하나다
이 영화에 대한 글쓴이의 총평은 ‘나는 과연 어떤가’라는 반문이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사람을 볼 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같은 사람이 비단 나만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나도 마음 한 구석에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아름답다에는 정의가 없다는 것이다. 100만큼 예쁜 사람. 1000만큼 예쁜 사람. 30만큼 예쁜 사람이라고 수치화를 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장원영 씨가 예쁜 건 장원영처럼 예쁜 거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내가 이 기준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는 예쁘고 누구는 안 예쁘고 선을 그으며 타자화를 하는 순간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고 문득 들었다. 이 비극을 돈으로 환산시킨 산업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 영화 산업의 일부일지도 모르고. 이런 씁쓸한 성찰을 이면에 깔고 하드고어와 코미디 사이에서 내내 광폭하게 질주해 우리 모두가 엘리자베스와 수가 되게끔 만드는 충분한 수작이라고 생각하는 <서브스턴스>다.
-
- '모가디슈'의 친구이자 '교섭'의 형님쯤 되는
줄을 잘 서야 해
어느 날의 레바논. 두 사람이 차를 타고 있다. 임무 수행 중이다. 외교관 신분으로 타지에 온 두 사람. 치안이 불안정한 레바논이었기 때문에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재석에겐 가족이 있기 때문에 아무 탈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운전 중인 두 사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 실제로 이루어졌다. 차 앞에 갑자기 어떤 차량이 끼어들더니 총기를 든 괴한이 내린다. 재석은 납치당한다.
분명 앞길이 창창할 것 같았다. 외무관 민준. 온갖 고생해서 외무고시에 붙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찬밥 신세다. 제5 공화국 시기. 막상 합격했는데 예상만큼 미래가 밝지 않았다. 이왕 외무관 일 할 거면 미국 정도는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어림없다. 학벌에 밀려난 민준. 무려 서울대 출신에 몇 기수 아래인 후배를 부러워하기만 한다. 이러려고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뭐 방법이 없을까? 뾰족하게 떠오르는 수는 없다. 괜히 심술 나 후배의 책상 위 물건을 어지르는 민준. 속이라도 시원하면 다행이다.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 복도를 뚜벅뚜벅 걷고 있다. 갑자기 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민준. 수화기 너머에선 암호가 들렸다. ‘저는 대한민국 서기관 오재석입니다. 저는 살아있습니다’ 당황한 민준.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다. 외교관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또 그 스스로를 위해 주인공은 레바논 출국길에 오른다.
이 집 잘하네
<비공식 작전>은 김성훈 감독의 주특기가 적절히 잘 들어간 영화다. 전작들과 겹쳐지는 설정이 몇 있다. <끝까지 간다>에서는 두 남자가 대결구도를 이룬다. 이야기의 끝을 모를 정도로 강력한 서스펜스 역시 영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던 요소 중 하나다. 틈새마다 담겨있는 유머도 장르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음 작품 <터널>은 거대한 재난영화이면서 사회 시스템에 대해 코멘트하는 영화다. 터널을 둘러싼 설계,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보도윤리까지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사건들이 떠오른다. 이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사건’은 사실상 영화의 진주인공으로 기능한다. 주인공의 처절함과 터널 외부 환경에 대조를 둬 차이점을 부각했다.
이 <비공식작전>은 전작의 특성들이 이어진다. 영화는 후반부까지 서스펜스를 통해 관객들을 집중시킨다. 영화는 크게 두 소재(와 인물)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우선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인 ‘오재석을 구해라’다. 여기에 주인공 민준이 욕망하는 부분인 출세가 극 중에서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는 인물설정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판수 덕에 더 두드러진다. 그리고 다른 서스펜스 요소인 ‘오재석을 구할 돈을 구해라’도 있다. 이 영화에서 판수는 이야기에서 민준만큼 중요한 주인공이다. 장르적으로 톤 앤 매너를 가볍게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판수 스스로의 욕망이 이야기에서 핵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두 서스펜스를 적절하게 유지하다가 한 번에 합쳐 엔딩즈음에 어떤 장면으로 환기시킨다. 이를 위한 각본의 인과관계를 잘 설정했다는 점, 연출로 이를 살린 점은 김성훈 감독의 경험이 오롯이 들어간 부분이다.
두 주인공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네 사람이다. 주인공 민준, 납치당한 재석, 택시운전사 판수,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등장하는’ 한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판수는 실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인물의 어떤 특성은 후반부 사건전개에 큰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판수 서사는 이 영화에서 낯선 이야기에 넓이를 더한다. 익숙하기도 하다. 이 판수가 이야기에서 어떻게 역할하는지는 <끝까지 간다>에서 봤었다. 그러나 본작에서 둔 차이점은 판수가 자연재해같이 불현듯 찾아오는 악당이 아니라 ‘왜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는 점이었다. 영화의 소재 특성상 올해 개봉했던 <교섭>이 떠오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 <교섭>과의 차이점은 인물의 입체성에서 온다. 입체적인 판수, 그 판수만큼이나 입체적인 민준이 극의 생동감을 부여한다. <교섭>에서 황정민 배우가 맡았던 역할은 성자 같아서 재미가 없는 것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영화에서 빌런 캐릭터로서 활약하는 인물이 있다. 김응수 배우가 맡은 안기부장이다. 이 이야기에서 안기부 내지 제5공화국이라는 세팅은 겉도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2009년 즈음으로 옮겨도 이야기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안기부가 외교부에 하는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행정부처는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왜 안기부가 이런 역할을 하는가’라는 점은 ‘비공식 작전’이 제목인 이유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가 민준에게 던진 질문은 ‘네가 하는 고생 그대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 영화 내적으로 어떻게 코멘트하고 있는지를 사진만 등장하고 실질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캐릭터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안기부의 위상을 생각하면 더더욱 확실해진다. 이 영화가 공식적과 비공식적인 측면이 대조되어 위선적이었던 당시 시대상에 대한 코멘트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자매품 친구들
영화의 소재만 보면 <모가디슈>와 <교섭>이 떠오른다. 이 영화가 앞선 두 작품과 가지는 차이점과 공통점은 직업윤리를 다루는 방식과 액션에 있다. 영화에서 두 인물은 대비된다. 김응수 배우가 맡은 안기부장 역과 김종수 배우가 맡은 외교부 장관 역이다. 이 두 사람은 첫 등장에 입은 의상부터 대비된다. 이 대조는 영화 후반부에 어떤 장면을 통해 더 두드러진다. ‘외교부 내의 학벌로 인해 승진에 차질이 생겼다’에서 시작한 이야기라 이런 전개가 생뚱맞은 감이 없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이 장면이 엔딩부에서 ‘굳이 필요했을까’라는 점 역시 약간 의문점이 드는 구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연장선상에서 이 시퀀스는 꼭 필요했다. <교섭>에서 황정민 배우가 맡았던 역할의 단점은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이 인물은 내내 거룩하기만 해서 결함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유머가 적재적소에 들어간 것이 후반부의 직업윤리에 대해 감정이입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영화의 액션에 관한 부분 역시 <모가디슈>와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 우선 영화를 보고 나면 <모가디슈>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디테일에 관한 부분에서는 확실히 차이점이 느껴지기는 하나 <모가디슈>를 봤던 관객분들이라면 감흥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는 있다. 하지만 <끝까지 간다>를 봤던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에 등장한 액션들이 감독의 시그니쳐 유사하게 연출됐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후반부 액션과 별개로 총기를 사용한 시퀀스를 통해 영화에서 무난한 긴장감을 만들어줘 이 영화의 메시지 이전에 상업적인 노선까지 적절히 잘 잡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주지훈, 하정우 배우는 능청맞게 연기 정말 잘했다. 특히 하정우 배우는 전작 <수리남>에서보다 더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훨훨 날아다닌다. 반대로 조력자 캐릭터들이 살짝 작위적으로 연출된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다. 관람에 큰 영향이 갈 정도는 아니다.
-
- 3000년을 기다려 깨달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약간 스포 있음)
세상 모든 이야기를 연구하는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한 고물상에서 우연히 구매한 유리병을 통해 정령 지니를 깨운다.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단 세 번. 마음속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랫동안 바라온 소원을 말하면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알리테아는 '소원에 관한 이야기는 경고가 담겨 있다'라며 그에게 소원 빌기를 거부하는데........ 지니는 무슨 사연으로 그 병에 갇혀 있었으며 알리테아는 무슨 소원으로 지니를 구원할까?
1. 내용은 많지만 어딘가 빈약한 스토리 라인
이 영화의 장점은 옛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려낸 미술에 있다. 전설 속 시바 여왕의 이야기부터 페르시아의 왕가의 생활상, 제피르의 발명품 등 흥미를 자극하는 신비로운 배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영화의 ost도 정말 좋아서 다시 듣고 있다.또한 이 영화에는 '알라딘'처럼 지니가 등장하는데 이번엔 램프가 아닌 유리병 안에 들어가 있다는 차이점도 재미있다.
여기서 지니는 정령으로서 등장하는데 알리테아는 정령은 실제로 있다고 믿고 있기에 지니가 등장했을 때 그는 지니의 천일야화에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흥미로운 세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떤 소원을 빌게 될지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게 왠걸 알리테아의 소원이 드러나는 순간 이 영화의 대한 기대가 하락한다. 이 때부터 갑자기 지니와 알리테아의 로맨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알리테아는 지니의 이야기를 잘 듣다가 뜬금없이 지니에게 사랑 고백을 해 당황스럽기만 했다. 알리테아의 소원은 '나를 사랑해달라'라는 것이었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녀가 사랑을 느꼈는지도 아이러니했다. 심지어 내 옆에 있던 어떤 관객 분이 '엥?' 하시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으니 이 의아함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겠거니 했다. 이후 두 캐릭터가 연인이 되면서 이야기의 국면이 전환된다. 고백씬이 뜬금없어서였는지 뒤이어 등장하는 연인으로서의 알리테아와 지니의 일상 장면에서도 이들의 사랑에 감정 이입하기가 힘들었다.
2. 사랑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일 때 성공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예상해본다면 '인생에서 사랑은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라는 것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던 듯하다. 그래야 상대를 자신의 열등함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온전히 상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니가 유리병 속에 3번이나 갇혀 있었던 이유는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바 여왕에게는 유일무이한 사랑이 되고 싶어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방해하기도 하고 한 번은 죽을 운명이었던 한 페르시아의 시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한다. 또한 가장 사랑했던 여인 제피르를 떠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소원을 말하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하지만 지니를 가두었던 세 여자들 모두 궁극적으로 지니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니의 사랑은 그들의 갈망을 이뤄주는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고 그들의 목적은 지니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다. 세 여자들은 지니를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도구로서 사용했을 뿐 목적이 아니었기에 관계 속에서 을일 수밖에 없었던 지니는 항상 관계에서 패배해 유리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지니는 소원을 통해 남을 구원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그를 사랑하겠으니 나를 사랑해달라는 직접적인 고백만이 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는 사랑 빼고 모든 것을 이룬 알리테아 뿐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것 빼고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던 그녀였기에 지니를 더이상 도구로써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서로의 이해 관계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3.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
사람들은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점들을 상대에게서 찾으며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은 이런 사람들이 찔릴 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의 부족함을 상대에게 채워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그저 온전히 나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것이다.결국 알리테아와 지니가 나눈 길고 긴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그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이 하고 싶다면 상대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일어서고 자립할 것, 그것부터가 사랑의 시작이다.
영화의 전개가 급작스러운 면이 있어 관객마다 해석이 다를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리뷰도 찾아보려고 한다. 왠지 내가 놓친 영화의 메타포가 있을 것 같고 정령인 지니가 전자파로 이뤄진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 남겨주시기를 바란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
-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리뷰 (스포일러 O) - 정답보다 중요한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정
-
“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야”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며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
그는 자신의 신분과 사연을 숨긴 채
상위 1%의 영재들이 모인 자사고의 경비원으로 살아간다.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학생들의 기피 대상 1호인 `이학성`은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수학을 가르쳐 달라 조르는
수학을 포기한 고등학생 `한지우`(김동휘)를 만난다.
정답만을 찾는 세상에서 방황하던 `한지우`에게
올바른 풀이 과정을 찾아나가는 법을 가르치며
`이학성` 역시 뜻하지 않은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
- [공드리의 솔루션북] 끝장리뷰 | 결말해석 | 상승과 하강 | 공드리월드 분석 | 해결-책(솔루션북) 상징 | 파편화된 의식의 총합
([공드리의 솔루션북](2024)은 씨네랩(cinelab) 측에서 제공한 시사회권으로 관람하였습니다)
[공드리의 솔루션북](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말하는 대로
Chapter 2 상승과 하강
00:00 공드리의 솔루션북
01:10 말하는 대로
03:12 해결-책
04:02 상승과 하강
06:04 결말해석
07:05 별점 및 한 줄 평
07:23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드리의솔루션북 #공드리의솔루션북리뷰 #공드리의솔루션북영화 #공드리의솔루션북해석 #공드리의솔루션북결말 #공드리의솔루션북후기 #영화공드리의솔루션북 #미셸공드리 #공드리월드 #TheBookofSolution #미셸공드리 #MichelGondry #피에르니네이 #PierreNiney
-
- 영화 <리디밍 러브> 메인 예고편
누구나 품을 수 있지만,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엔젤’
단 한 번도 원하는 삶을 살아본 적 없던 그녀에게
운명처럼 오직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무조건적인 그의 사랑에 ‘엔젤’은 매번 도망치지만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진정한 세상을 알아가는데…
사랑이 이끄는 순간, 눈부신 기적이 시작된다!
-
- 영화 <주토피아 2> 티저 예고편
주토피아를 뒤흔든 새로운 사건?! 혹은 짜릿한 파티? 더 새롭게 돌아온 [주토피아 2] 티저 예고편 전격 공개 11월, 환상의 도시 '주토피아 시티'로 놀러와💙 [주토피아 2] 11월 극장 대개봉 #디즈니 #주토피아2 #Zootopia2 #11월극장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