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30 21:29:14
[SIWFF 데일리] 새처럼 왔다 가는
영화 <쇼잉 업>
SYNOPSIS
재능 있는 조각가인 리지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족, 친구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리지는 사는 집의 주인이자 예술가 라이벌이기도 한 조와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전시 개막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리지는 과연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웬디와 루시〉(2008),〈퍼스트 카우〉(2019) 등 미국 사회의 현재적 삶을 내밀한 시선으로 다뤄 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PROGRAM NOTE
〈쇼잉 업〉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굴곡진 서사나 드라마틱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를 앞둔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술가 동료이자 리지가 사는 집의 주인이기도 한 조는 보일러 고장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흩어져 사는 가족은 저마다 리지에게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업에 집중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짜증과 불안이 쌓여가지만, 주변에 그걸 알아채 주는 이는 없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이 줄곧 그랬듯 리지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다. 오리건과 몬태나의 풍광 속을 확신 없이 지나던 이들처럼 리지 또한 삶의 어느 시기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고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하나인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로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바라본 뒤,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과 끊임없이 무언가 만드는 삶의 모습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쇼잉 업〉에서 두드러지는 건 찰흙, 직물, 실 같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재료를 계속해서 만지는 손짓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예술이란 그처럼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단하고 유명한 대가가 아니라, 매일 끈기 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은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와 공명한다. 〈쇼잉 업〉을 통해 매일 무언가 만지고, 걷고, 돌보고, 일하는 움직임들로 지켜지는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영화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는 동안 ‘한동안 내가 피곤했군…’ 깨달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살풋 감기는 걸 참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성격상 푹 잠들지는 못하고 아주 잠깐 졸다 깨다 반복하면서, 그래도 흐름을 놓치지는 않을 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게 되는 영화들. 공교롭게도 그런 영화들이 내게는 다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애프터썬>의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춰 같이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퍼스트 카우>도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걷고 움직이는 동안 그 소리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 다 내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붙어 있는 영화들이다.
<쇼잉 업>도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벽면 가득,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여성 상들이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흙을 주물러 이 여성들의 모습을 현실로 데려오느라 바쁜 예술가, 리지가 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료가 떨어졌다고 역정을 내는 고양이 리키(연기를 진짜 잘하는 천재 고양이이다)의 사료 그릇도 채워 주어야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하게는 못해도 기본 할 도리는 또 해 주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집에 온수는 안 나오는데, 집 주인이자 동료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마음이 없으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또 헤매야 한다. 결국 전시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연차를 낸다.
(으레 그렇듯) 모처럼 작정한 하루는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고양이 리키의 습격을 받은 새를, 죽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 밖에 내보낸 새를 친구 조가 구조할 줄이야. 전시를 두 개나 앞두고 있는 조의 부탁에 따라, 엉겁결에 떠맡은 비둘기 한 마리를 돌보는 것이 그 날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둘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작업실을 두고 2층에 올라가서 고양이를 가둬 둔 채로 작업을 한다.

결국 작업의 속도나 방향은 삶에 생겨나는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아랑곳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이 코앞이어도 고양이와 비둘기에 둘러싸인 하루를 보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사무실 동료가 낄낄거리며 말했듯이, 비둘기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음이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세상에 가시적이지 않았던 느낌과 마음과 감정과 에너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이 세계에 끌어오는 일이다. 다른 데 가서 죽었으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선 끝에 그 형상이 걸려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은 마음이고, 손은 손이다. 바삐 작업하는 리지의 손, 그리고 리지가 일하는 학교 곳곳의 학생들이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진다. 그리거나 오리거나 붙이거나 칠하거나 짜거나 뜨는 그 모든 일에 단 한 순간도 재능이 있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자차분히 손을 놀려 보고 싶어진다.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것이다.
책상 위의 작업물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느낌을 안다. 고되고 행복한. 외롭지는 않지만 고독한. 기쁘지만 덜컥 겁이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은 답답함도 안다. 그래도 리지는 직업인이 될 만큼 익숙하고 실력이 좋은 예술가니까, 가마에서 잘못 타버린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있어서는 더없이 초연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해서 하나하나 동동거리기만 한다. 그런데, 이거 죄다 행복한 고민이다. 인생은 절대, 작업물과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이자 예술가로 어엿하게 인정받는 리지에게도 신경 쓸 게 많은 남루한 일상이 있다. 파티에 빠져 온수기를 모른 체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는 날들. 가뜩이나 가족이며 전시회의 치즈까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비둘기의 건강까지 신경이 쓰이고. 예술가의 삶이라 해서 예술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삶은 으레 그렇다.
그러나 푸드덕거리는 힘찬 날갯짓으로 그 모든 답답한 대화를 탁 끊는 비둘기처럼, 그런 새처럼 나에게 왔다 가는 것들이 있다. 예술가의 삶이든, 예술가가 아닌 나의 삶이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반복 위로, 사뿐 날아올라 반짝 빛나는 것. 내겐 영화가 그렇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를 틀어박아 두고 잠시 빛나는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나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답답하던 감정의 맥락이 끊겨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서도 또 걸어가는 리지와 조의 뒷모습을 본다. 작업은 계속되고 인생도 계속된다. 오고 가는 것들과 답답한 것들 사이,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는 계속 끈질길 것이다. 앞으로도 쭉.
2023.08.24 17:30-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
2023.08.27 20:00-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2023.08.29. 13:30-15:1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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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씨는 다운증후군 정신으로 갓생사는 셀러브리티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옥 역을 맡은 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영희로 출연한 배우가 화제이다. 장애 당사자가 직접 다운증후군 역할을 맡아 열연하였는데, 화면에 등장하는 초상화 그림을 모두 직접 그렸음이 알려지며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본명은 정은혜이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태로 담은 <다섯 개의 시선, 2005>의 단편 극영화 <언니가 이해하셔야 해요>로 데뷔하였다. 1990년생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 영화를 찍었고, 다큐멘터리 영화 <니 얼굴>은 20대 후반에서 30대에 들어서는 초상화 작가 정은혜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영화 <니 얼굴, 2020> 포스터
<얼굴은 가장 처음 남에게 보여주는 나의 정체성>
마스크를 쓰고 사람을 만나는 일상이 보편화되어 남들에게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현저히 줄었지만, 얼굴은 가장 처음 남에게 보여주는 나의 정체성이다. 은혜의 얼굴은 은혜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은혜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각자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꺼내 이리저리 조합해보며 판단하는데, 머릿속에 다운증후군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경우 생채기를 내는 오류를 산출하기도 한다.
은혜는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으면 휴대폰 카메라로 사람들의 얼굴부터 찍는다. 그리고 약 20분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얼굴을 종이 위에 선으로 옮긴다. 북한강이 보이는 양평 문호리 리버 마켓에서 비, 바람, 눈과 맞서며 손이 툼툼(!)해질 때까지 더운 날에는 시원한 것으로, 추운 날에는 따뜻한 것으로 속을 달래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가 그린 초상화는 2000장을 넘겼고, 아직도 매일 그 수는 증가하고 있다. 은혜는 사람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하며 관계의 부재로 외로웠던 시간들을 20분씩 달랜다. 20분 동안 은혜를 채워준 사람들은 은혜의 눈으로 본 각자의 얼굴을 보며 꽤 오랫동안 은혜를 떠올릴 것이다.
은혜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그리며 성장한다.
<신파 없이 장애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
다운증후군은 혈액 검사를 통해 비교적 쉽게 진단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임신 중에도 검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예비 엄마들은 다운증후군이라는 단어에 마음을 졸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약간의 확률로 다운증후군일 수도 있다는 수치를 받아 들면 아직 태어난 아이에게 세상의 빛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법적으로 다운증후군인지 아닐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확률이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된 태아는 죽어도 괜찮은 생명이다. 확실히 다운증후군인 아기가 어쩌다 운이 좋게 죽음을 면하고 엄마 뱃속을 나온다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들은 울음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버린다. 사람들은 발전된 의학 기술을 두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며 엄마의 게으름과 무능을 탓하는 말을 먼저 내뱉을 수도 있다.
영화 <니 얼굴>은 장애를 가진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희생이나 비장애 형제자매의 상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다니다 무너져 내린 가정 경제 시스템 등이 보이지 않는다. 은혜를 중심으로 카메라를 들이댔고, 그러다가 자연히 딸려 나와버린 것들은 잔가지 쳐내듯 잘라내 버렸다.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화, 영화, 글, 시위 등으로 이미 이전에 충분히 세상에 이야기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명하지 않아 우리가 잘 몰랐던 것일 뿐.
영화 <작은 여자 큰 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 2006>
<다운증후군 정신으로 갓생사는 셀러브리티>
1996년 제49회 칸 영화제에서 다니엘 오떼유와 파스칼 뒤켄이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다니엘 오떼유는 프랑스 출신이지만, 파스칼 뒤켄은 벨기에 출신으로 칸의 장벽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영화 <제8요일, 1996>에서 비장애인과 다운증후군 장애인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직업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사회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파스칼 뒤켄은 배우라는 직업으로 사람들에게 다운증후군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람들은 성찰을 약속하는 박수로 화답하였다. 대한민국은 장애인을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업주가 의무고용률에 못 미치는 장애인을 고용한 경우 장애인 고용 부담금을 납부하도록 법에 명시하였다. 2021년 한 해 동안 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대신 정부에 납부한 돈이 모여 7000억이 넘었다. 장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을 달라고, 가족들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 달라고, 장애를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고 외치느라 은혜 엄마는 하얗게 세는 머리를 기를 새가 없었다.
정은혜 작가가 삽화를 그린 발달장애인을 위한 <보람씨의 행복한 직장생활>
앞으로 은혜씨는 청소 담당 직원, 작가, 배우, 크리에이터 등의 사회적 언어로 '다운증후군 정신으로 갓생사는 셀러브리티'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힘들 때는 짜증을 내고, 신이 날 때는 소리 내어 웃고, 마음이 복잡할 때는 폭풍 뜨개질을 하는 별 것 아닌 것들을 보고 우리들은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면 된다. 인기가 많아서 피곤한 셀러브리티의 숙명을 은혜씨는 투덜대면서 즐길 것이다.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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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은 약사에게, 멀티버스는 '스파이디'에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파이더 우먼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면서 가족도, 친구도 잃은 '그웬 스테이시'(헤일리 스타인펠드). 그녀는 다른 평행세계의 스파이더맨이자 유일한 친구인 ‘마일스 모랄레스’(셔메이크 무어)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빌런과 싸우던 그웬. 그녀는 또 다른 스파이더맨 '미겔'(오스카 아이작)과 '제시카(이사 레이)'를 만나고, 그들에게 합류해 우주를 넘나드는 빌런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마찬가지로 그웬을 그리워하며 하루를 보내던 마일스. 그의 앞에는 자기도 의도치 않게 만들어 낸 빌런 '스팟'(제이슨 슈워츠먼)이 등장한다. 스팟 덕분에 마일스는 그웬과도 재회한다. 그웬 역시 스팟을 감시하러 왔기 때문.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그들은 스팟을 쫓아 다른 우주로 이동하고, 수많은 스파이더맨을 만나면서 예상치 못한 우주의 균열을 마주한다.
스파이더맨의 멀티버스는 다르다
또 한 번 멀티버스다. DCEU의 마지막 작품인 <플래시>가 개봉한 지 일주일 만에 멀티버스 히어로가 또 등장했다. 2018년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속편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스파이더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플래시>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멀티버스는 이미 관심을 끌기 어려운 소재가 됐다. 평행 우주든, 다중 우주든, 평행 다중 우주든 상관없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과거나 현재를 바꾸려다가 다른 우주의 '나'를 만난다. 그 만남을 통해 현실의 '나'는 현재의 중요성을 배우고, 한층 성장한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기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파이더맨'이니까. 수많은 우주의 스파이더맨이 한 데 만나는 사건인 '스파이더버스(Spider-verse)'는 멀티버스의 상징과도 같으니까. 전편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실사 영화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멀티버스를 능숙하게 다룬 전력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스파이더맨>은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북미에서 개봉 9일 만에 2억 달러를 돌파하는 흥행을 기록한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다. 멀티버스를 소재로 삼은 최근 히어로 영화 중 가장 뻔뻔하고, 감각적이며, 통쾌한 데다가 감동적이다. 마치 멀티버스를 다룰 줄 아는 셰프는 '스파이디' 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멀티버스라는 공식을 깨부수다
멀티버스 영화는 대체로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MCU의 피터 파커도, 닥터 스트레인지도, 완다 막시모프도, 가장 최근에 공개된 플래시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주인공은 과거나 현재의 특정 사건을 바꾸려는 욕망이 가득하다. 하지만 멀티버스를 경험하면서 한 가지 가르침을 깨닫는다. 인생에는 필연적인 지점이 있으며, 그 사건이 현재의 나와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 운명에 순응하고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
얼핏 보면 <스파이더맨>도 다르지 않다.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인 미겔 오하라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그는 '스파이더맨 소사이어티'라는 팀을 결성해 차원을 넘나드는 빌런을 체포한다. 그들이 우주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전에. 특히 그는 '공식설정 사건(Canon event)'을 수호하려 애쓴다. 모든 스파이더맨은 삼촌처럼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경찰서장을 잃어야만 한다.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미겔 본인이 공식설정 사건을 바꾸려다가 가족을 모두 잃는 가슴 아픈 경험을 했으므로.
그래서 그는 마일스를 질책하고, 통제하려 든다. 전편에서 마일스가 차원 이동기를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차원을 넘나들며 우주의 균형을 위협하는 빌런 스팟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마일스가 '스파이더 인디아'(카린 소니)의 우주에서 싱 경감을 구한 것도 문제다. 스파이더맨과 가장 친한 경찰서장이 죽어야 하는 공식설정이 깨졌으므로.
공식대로라면 마일스는 이쯤에서 변해야 한다. 자기 행동이 미성숙하다고 반성해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를 살릴 수 없더라도 우주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가슴이 아프더라도 정해진 운명을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 <스파이더맨>은 공식을 거부하고,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마일스는 미겔에게 말한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고, 무슨 일이든 처음은 있다고.
무슨 일이든 처음 있다
<스파이더맨>은 마일스의 선택에 힘을 싣는 반전도 선사한다. 미겔은 고집불통인 마일스에게 숨기고 있던 진실을 알려준다. 전편에서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이 된 마일스. 알고 보니 그 거미는 지구-42라는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것으로 밝혀진다. 즉, 본래 마일스는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부터가 우주를 파괴할 수도 있는 원인인 셈이다.
이에 마일스는 미겔과는 반대로 행동한다.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자기가 스파이더맨이 됐다면, 공식설정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면서. 그래서 그는 이틀 뒤면 경찰서장으로 진급해 죽을 운명인 아버지를 구하러 간다.
"내 이야기는 내가 쓸 거야!"라는 마일스의 결심은 <스파이더맨>을 독보적인 영화로 거듭나게 하는 1등 공신이다. 앞서 봤듯이 멀티버스 영화에는 어느 정도 고정된 틀과 스토리가 있다. 그런데 이를 전면에서 부정한 결과 강렬하면서도 색다른 쾌감에 빠져들 수 있다. 모두가 운명 앞에서 겸손해지고 무거워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영화니까.
마일스의 결단은 멀티버스를 통해 더욱 확장된다. 그웬은 공식설정을 따르지 않을 이유를 찾아낸다. 경찰서장인 아버지가 경찰을 그만뒀는데도 공식설정이 어긋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웬. 그녀는 전편에서 한 팀이었던 스파이더맨들을 모아 마일즈를 돕기로 결심한다. 새롭게 등장한 스파이더펑크, '호비'(대니얼 칼루야)도 인상적이다. 그는 마일스와 그웬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며 펑크록에 심취한 아나키스트 스파이더맨다운 활약상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마일스의 정체를 한 번 더 비틀어서 충격을 선사하는 결말도 인상적이다. <스파이더맨>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을 연상시키는 클리프 행어로 마무리된다. 그 덕분에 3편인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에 대한 기대치는 한껏 커진다. 결말만 놓고 보면 2023년 영화 중 최고나 다름없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스파이더 그웬
숙명을 거부한 마일스의 선택은 그웬의 이야기를 만나 더 풍부해진다. 그들은 고집 센 부모님과 부딪힌다. 스파이더맨이 청소년 히어로의 대표주자라는 걸 고려하면 일종의 세대 갈등처럼 보인다. 마일스의 부모님은 그가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경찰서장인 조지 스테이시는 스파이더 우먼이 딸의 절친을 죽였다고 믿는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딸의 말은 무시한다. 그웬의 정체를 알게 되자 딸을 체포하려 들 정도다.
하지만 마일스와 그웬은 요즘 애들답다. 자신감과 쿨함으로 무장해 자기 꿈을 실현한다. 기존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나 역동적인 삶을 그려 나간다. 차원 이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마일스. 자기 밴드를 만들고 싶어 하는 드러머 그웬. 그들은 스파이더맨답게 꿈을 이룬다. 마일스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스파이더 인디아를 돕는다. 그웬도 마일스를 비롯한 다른 차원의 옛 동료들과 재회해 자기만의 밴드를 꾸린다.
두 거미 인간의 패기는 감동도 안겨준다. 그들이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때,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가득 느껴진다. 끝까지 자기 정체를 숨기던 마일스.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언제나 아들 편이라고 말해준다. 더 넓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한다. 조지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집에 온 그웬과 화해한다. 아빠는 경찰을 그만뒀고, 딸의 선택을 전적으로 믿는다고.
이처럼 다른 듯 보이지만 맥락과 함의는 같은 그웬의 이야기 덕분에 마일스의 이야기는 더욱 진해진다. 그들의 유대감이 로맨스 코드로 자연히 이어지는 재미도 있다. 또 투톱 주인공 수준으로 늘어난 그웬의 분량이나 비중도 자연히 납득된다.
주제에 충실한 볼거리와 스타일
전편보다 발전한 볼거리와 스타일도 <스파이더맨>만의 개성을 한 층 끌어올려 준다. 전편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기법이었다. 픽사와 디즈니 스타일의 3D 애니메이션 트렌드를 거부하고, CG와 2D 애니메이션을 합성한 기법을 선보였다. 그라피티 스타일의 그림을 조합하고 프레임도 낮게 잡으면서 스크린으로 만화책을 보는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도 과감함은 이어진다. 스타일은 유지하되, 한 가지 변화를 꾀했다. 색채다. 역동적이고 화려한 그림체에 다양한 색감을 더해서 이야기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도 환기했다. 그웬과 아버지의 대화 장면이 대표적이다. 부녀 관계가 경색되어 있을 때는 화면이 전반적으로 푸른빛이다. 하지만 부녀가 포옹을 하거나, 둘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 영화는 분홍이나 노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스크린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이에 더해 스파이더버스의 스케일을 키웠다. 덕분에 영화 곳곳에 팬서비스가 빼곡하다. 게임 시리즈 속 스파이더맨, 레고 스파이더맨 등 온갖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 스파이더맨 실사 영화 시리즈도 스파이더버스에 포함됐다. 일례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 중 몇몇 장면이 영화에 직접 등장한다. MCU와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도 합류한다. 미겔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속 사건을 언급하고, <베놈> 속 조연인 첸 부인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음악도 계승했다. 'Sunflower'나 'What's up danger' 같은 블랙 뮤직을 이번에도 적극 활용했다. 특히 메트로 부민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해서 OST 간의 통일성이 높아졌다. 대니얼 펨버턴이 1편에 이어 참여한 스코어도 인상적이다. 드럼이 인상적인 그웬의 테마를 적극 활용해 영화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한계
다만 애니메이션이라서 남는 아쉬움도 있다. 길다. 러닝타임이 140분이다. 전편에 비해 23분가량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특히 그웬과 마일스의 가족 이야기가 중심인 초중반부가 상대적으로 지루하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액션과 허를 찌르는 전개로 만회하려 하나, 길다는 인상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러닝타임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화려한 그림체도 종종 어지럽게 보인다. 특히 액션씬은 호불호가 갈릴 만한 여지가 있다. 프레임이 자주 끊기고 스파이더맨들의 그림체가 제각기 다르다 보니 정리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이에 더해 1편의 임팩트를 넘어서는 OST가 없어서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스파이더맨이 소모된다. 잠시 엑스트라로 스쳐 지나가다 보니 스파이더맨 하나하나의 임팩트는 크지 않다. 미겔과 제시카 드루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 모든 스파이더맨이 특유의 매력을 발산한 전편에 비하면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호불호와 취향의 영역이라서 영화의 완성도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독보적인 성취는 모든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다. 과감한 스토리텔링, 신선한 스타일, 팬 서비스와 세계관 연계까지. 이보다 완벽한 중간 다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1편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놀라운 기록을 써 내려갔다. 2019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석권했다. 평가에 비해 흥행이 조금 아쉬웠다. 국내에서는 관객 70만 명을 겨우 넘겼다. 그래도 북미 약 1억 9,000만 달러, 월드와이드 약 3억 8,4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흥행 성적은 이미 전편을 뛰어넘었다. 벌써 북미 2억 달러, 월드와이드 4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니 궁금하다. 과연 국내에서는 어디까지 질주할 수 있을지, 시상식 시즌에는 또 어떤 뉴스를 들려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Outstanding 출중함
정점에 다다른 스파이더버스의 황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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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약돌로 마녀를 쓰러뜨릴 때
이 글은 영화 [블랙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예고편만 보면 공포영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블랙폰]은 성장 드라마에 조금 더 가깝다.
그리고 이 성장 드라마의 공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모티브를 많이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크게 아이들, 어른, 그리고 탈출의 수단.
총 세 가지의 갈등 요소들을 등장시키고. 각자 충실하게 영화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발로 밟아대며 꾹꾹 다지려 애쓴다.
명절 시즌이면 예상되는 영화 장르로 극장계가 점령되기 쉬운데도, 통상적이지 않게 공포 영화의 가면을 쓰고 관객들을 맞이하는 영화 [블랙폰]의 요소들을. 헨젤과 그레텔의 형식을 빌어 리뷰해보려 한다.
아이들, 헨젤과 그레텔;ignition sequence starts.
사진출처:다음 영화
최근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블랙폰]은 아이들의 서사나 일상을 보여주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덕분에 영화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로 이동한다. 아이들이 그 시기에 가진 가진 두려움도. 스스로에 대한 실망도. 또한 남에게는 말하기 힘든 비밀도 등장인물들의 순수한 입과 행동을 빌어 아무렇지 않지만, 비밀스럽게 이미 어른인 관객들에게 털어놓는 것만 같다.
관심이 있는 여자아이 앞에서 큰 홈런을 맞는 모습을 보여줘 버린 피니(메이슨 템즈)는 이런 고민들 외에도 학대와 엄격의 기로에 서 있는 집안 환경에 대한 우려도 함께 갖고 있다.
언젠가는 스스로의 찌질한 모습을 벗어나 자신만의 창공으로 솟아오르겠다는 집념처럼. 피니의 손에는 늘 작은 로켓이 쥐어져 있다. 당장이라도 날아오르고 싶지만. 아직은.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몇 번이고 모의 비행을 해보는 것으로 피니는 현실로의 아주 짧지만 확실한 도피를 하며 일상을 지탱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언젠가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스스로 믿었던 만큼. 이 유약해 보이지만 동시에 맹목적인 집념은 한낱 유괴납치 피해자 정도에 머물렀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아이들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데에 많은 힘을 싣는다.
영화 속 인물들을 통틀어 최약체로 불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피니는 결국 스스로 원하는 때에 맞춰 자신의 로켓을 쏘아 올린다. 초식동물의 눈에서 벗어난 피니가 지독히도 두려웠던 지하실을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장면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매우 크다.
[마녀];큰 솥에 빠지고야 말 운명.
숨참고 솥 Dive사진출처:다음 영화
의심할 여지없이. 마녀 역할은 영화 속에서는 어른들의 몫이다.
아이들은 치고받는 싸움의 현장도. 그로인 해 생기는 상처도 숨길 마음이 전혀 없지만. 어른들은 반대로 상처 또는 치부를 숨기려 애쓴다.
딸 그웬(매들린 맥그로)을 때릴 때조차 최대한 가릴 수 있는 곳을 선택해 학대의 징후를 감추려 하는 알코올 중독자 미스터(제레미 데이비스)만 보더라도. 사회생활 속에서 “번듯한”이미지를 고수하려고 자신의 본모습을 얼마나 애써서 숨기려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등장하는 어른들이 숨기고 싶은 면이 있고. 그 부분이 어른들 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영화는 악역 더 그래버(에단 호크)의 다양한 가면을 통해 보여준다.
아이들은 참 궁금했을 것이다.
가면 뒤에 숨은 더 그래버의 얼굴이 “얼마나” 상처 투성이인지가 아닌. “왜” 상처 투성이의 얼굴을 드러내고 걸어 다니는 것이 “안 되는” 일인지를. 만약 더 그래버가 자신들과 비슷한 나이었다면, 아이들은 아마도 얻어터져 딱지가 겨우 앉은 주먹을 슬그머니 보여주며 나도 그래.라고 씩 웃어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그것이 살아있는 아이들이건. 혹은 결국은 게임에 패배해 죽은 아이들이건. 그들은 상처를 숨기는 것에 두려움 없이 영화 중간중간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니까.
애초에 숨길 것이 없는 아이들을 더 그래버가 이길 수 없는 이유다.
빵조각이 자갈로 바뀌는 순간;기꺼이 화자가 되겠다는 태도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단절이 등장한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그리고 어른과 아이들.
이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전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대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명해 보이건만. 영화 초반부는 스피커처럼 일방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퍼붓는 식의 대화 방식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서로의 언어를 알아들을 기회도. 마음도 사라질 수밖에.
이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영화가 등장시킨 것은 다름 아닌 전화기의 존재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의 간극은 매우 컸다. 그들은 존재하거나 머무는 장소조차 같을 수 없었고. 더 그래버는 아이들에게서 이름도 빼앗았으며. 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인 전화기는 선이 끊어져 고장 난 것으로 묘사된다.
피니는 우선 피해자 아이들에게 이름을 돌려주었다. “너”는 죽었다. 가 아닌. 너희는 나에게 “이런” 존재였다. 를 깨우쳐준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였음을 온전히 깨달을 수는 없었다. 또한 그들이 남겨준 단서들은 처음에는 발길질 한 번이면 엉뚱한 길을 알려주고도 남을 것 같은 빵조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피니의 들으려는 태도는 결국 친구들이 짧은 생을 바쳐 놓아준 단서들을 빵조각에서 단단하고 확실한 조약돌로 바꿔주었다.
오빠가 망자와 살아 있는 자 사이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그웬은 오빠를 살리기 위해 욕설에 가까운 말을 퍼붓던 경찰의 명함을 집어 든다. 자신이 깊은 골을 파 놓은 어른과의 갈등을 스스로 메우기 위해 힘쓰려는 듯이.
살아 있는 자들을 연결하는 방법은 그리도 쉽고 간단했다. 오빠의 전화기처럼 선이 끊어져 있지도. 그렇다고 원하지 않을 때 울리지도 않았다. 그저 전화기를 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그웬은 피니와 고장 난 전화기로만 통화할 수도 있었을 기회를 기꺼이 버렸다.
대화의 수단이자 자신의 죄를 고해할 수단인 전화기의 존재를 애써 무시한 더 그래버의 최후는 어찌 보면 가장 정당하고 타당하다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피니의 탈출 장면이 주는 쾌감은 크다. 그것이 피니의 눈빛이 주는 감정도 크지만. 피니가 맘껏 자신의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있도록 수신호를 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작은 조약돌 때문임을 간과할 수는 없다.
마치면서
겁쟁이 레벨 100인 사람의 입장에서. 일주일에 한 편 보는 영화의 장르를 공포로 고를 때까지 참 많은 시간과 고뇌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너무 과장된 공포를 주기 위해 쓰이는 점프 스퀘어가 이 영화에서는 꽤 적절하게 쓰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안 놀랬다는 건 아니지만. 과하다. 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또한 이런 장르에서는 보통 어른들의 수단, 도구에 머물렀던 아이들을 영화 전면에 앞 세운 점도 좋았다. 피니가 계단을 올라올 때의 결의에 찬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이 아역(?) 배우의 미래가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을 정도니까.
그러나 더 그래버의 행동이나 대사가 마치 복선을 던지는 것 같았지만 완벽하게 처리하지는 못했다는 점과. 공포라기보다는 밀실 탈출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쪽으로 영화가 흘러가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또한 마지막에 가면서 여동생의 능력 하나에 급물살을 타듯 사건이 후루룩 해결되는 점도 영화 전체의 완성도가 조금 떨어지게 하는 단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 시즌에 대담하게 공포라는 장르로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 글의 TMI]
1. 분명 한 분이 나 말고 예매를 하셨었는데. 안 오셔서 혼자 봄.ㅠ
2. 진짜 울 뻔했다.
3. 정말 심하게 깜짝 놀란 부분이 있었는데 거기서 꽥하고 소리 지름.
4. 네. 팝콘도 당연히 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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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하루를 음미하는 미식가와 그 하루만을 원하는 결식자 사이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퍼펙트한 미식가가 아닌 퍼펙트함을 간절히 원하는 결식자
- 카세트테이프, 필름 카메라, 소설책의 의미
-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 집 정돈을 깔끔하게 하는 이유
- 니코, 여사장의 남편. 그림자 밟기의 의미
- 엔딩 결말 해석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4)
평범한 하루를 음미하는 미식가와 그 하루만을 원하는 결식자 사이
개봉일 : 2024.07.03.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24분
감독 : 빔 벤더스
출연 : 야쿠쇼 코지, 에모토 토키오, 나카노 아리사, 다나카 민, 미우라 토모카즈, 이시카와 사유리
개인적인 평점 : 4.5 / 5
쿠키 영상 : 없음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부지런하고 구김 없는 사람이다. 히라야마는 해가 뜨기 전에 이불에서 일어나 집과 몸을 단장하고 일터로 나선다. 그는 커피 한 캔, 좋아하는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로 출근길을 채우며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밤새 더럽혀진 화장실을 최선을 다해 치우고 점심을 먹으며 살랑이는 바람과 햇살을 느끼고, 퇴근 후엔 따끈한 온욕. 마지막으론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는 단골 식당에서 반주를 하고 나면 그의 하루는 끝이 난다. 히라야마는 아침에 단정하게 게어 놨던 이불을 그대로 다시 펼치고 책을 읽다 잠에 든다. 그리고 또 비슷한 하루를 살아간다.
<퍼펙트 데이즈>는 평범하지만 충만한 히라야마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과묵한 그는 이런저런 말 대신 깊은 눈을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 햇살을 볼 때, 신호등을 건너는 작은 아이들을 볼 때, 아이가 손을 흔들어 줄 때,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 히라야마는 부드러운 웃음을 보인다. 흔히 잘났다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삶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는 매일 작은 행복을 찾으며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가끔씩 히라야마의 일상에 끼어드는 주변인들은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는 그의 삶에 궁금증을 가진다. 청소부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왜 청소부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나이에 혼자 살면 외롭지 않은지, ‘다음’이란 어떤 의미인지. 히라야마는 이에 정확히 답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공란은 이야기에 작은 틈을 만들었고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여러 상상을 해보았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퍼펙트한 미식가가 아닌 퍼펙트함을 간절히 원하는 결식자
카세트테이프, 필름 카메라, 소설책의 의미
<퍼펙트 데이즈>는 소소하고 평범한 하루를 완벽하게 음미하는 미식가 히라야마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에겐 히라야마가 미식가임과 동시에 그 완벽한 하루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배고픈 결식자처럼 느껴졌다.
히라야마는 건강한 삶의 루틴을 가진 사람이다. 처음 이 하루를 봤을 땐 평범하면서 아름다운 하루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히라야마의 동료와 가족들이 그의 일상에 몇 개의 질문을 던지고 그의 일상이 바뀌기 시작한 이후엔 내 감상도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히라야마는 자연스레 반복되는 삶을 완벽하게 즐기는 사람이라기보단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어떠한 상처를 받고 그걸 외면하기 위해 시간을 돌려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하루’에 안착하여 버티고 있는 사람 같다.
히라야마가 어떤 아픔을 겪었고 어떤 시절을 그리워했는진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히라야마가 아이들을 눈에 담고 예뻐하던 모습, 다카시가 결혼, 가족에 대해 물어보던 대사. 그가 7-80년대가 깃든 물건들(카세트테이프, 20세기 중후반부 소설들)을 애용하는 걸 보면 사고로 가족(아내나 자식)을 잃었거나 모종의 이유로 가족(아버지와 여동생)에서 제외되고 그걸 부정하기 위해 문제가 생기기 전, 그가 젊었던 시절로 돌아가려 한 건 아닐까 싶다.
어제의 흔적을 지워내고 오늘을 사는 히라야마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 집 정돈을 깔끔하게 하는 이유
그는 카세트테이프를 되감듯 시간을 되감아 자신의 완벽한 하루에 안착한다. 그리고 그 하루가 어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반복적인 삶을 살다 보면 가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제 출근길에 본 것이 오늘 출근길에 본 건지 어제 본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시간의 흐름이 헷갈리는 그런 순간. 히라야마는 이런 착각을 통해 자신이 현재 즐기고 있는 완벽한 하루. 그 하루에만 머문다.
히라야마의 하루는 새 파일을 여는 느낌보단 똑같은 백업 파일을 다시 여는 느낌에 가깝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누워있던 이부자리 주변을 정리하고 간밤에 자란 수염을 깎고,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며 어제가 남긴 흔적을 지워낸다. (이때 다카시는 ‘어차피 더러워질 건데 왜 그렇게 열심히 청소하냐’고 묻는다. 젊은 그는 히라야마와 반대로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그는 미래를 위해 일을 그만두고 미래의 여자친구가 될 아야를 위해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턴다.)
세월의 흐름을 외면했던 히라야마
니코, 여사장의 남편, 다카시가 깨놓은 히라야마의 하루. 그림자의 의미
히라야마는 변화와 새로운 날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그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큰돈이 될 거라는 다카시의 제안도 거절하고 ‘다음 약속이 언제냐’는 니코의 물음에 그저 ‘다음은 다음’이라고 흥얼거리며 답을 피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생겼을 때 크게 흔들리거나 분노한다. 갑자기 조카 니코와 동생이 찾아왔을 때, 다카시가 일을 그만두며 자신의 하루 루틴이 깨졌을 때, 주말마다 들리던 가게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단골 술집의 여사장이 장사를 쉬고 헤어진 남편을 만나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이 변화들은 히라야마에게 세월의 흐름이라는 커다란 충격을 선사한다.
니코의 성장, 아버지와 술집 여사장 남편이 겪는 노화와 병, 오래된 건물의 철거, 평소보다 길게 일한 탓에 확실하게 느껴진 어제와 오늘이라는 차이. 초침만 달린 아날로그시계를 고집했던 히라야마에게 24시간 그 이상의 흐름은 낯설고 무거운 것이다.
여러 변화가 생긴 하루. 히라야마는 단골 술집에서 술을 먹는 것 대신 강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선택한다. 그때 술집 여사장의 남편이 다가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삶을 대화로 한 주제들. 그러다 여사장의 남편이 히라야마에게 묻는다. “그림자는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히라야마는 바로 직접 그림자를 겹쳐보면 알 거라며 남편을 이끈다. 그리고 촉촉해진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림자 두 개가 겹쳐지면 더 진해지듯 하루에 또 다른 하루가 겹쳐지면 이틀이고 그것이 모이면 세월과 인생이 된다. 지금까지 세월의 흐름을 외면해왔던 그가 드디어 모든 걸 인정하는 순간이다. 히라야마는 그다음날, 어제와 같은 하루가 아닌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두려움, 회한, 떨림이 뒤섞인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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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협화음의 극치
이 글은 넷플릭스 [브로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대체 무엇이 부서진 것일까.
죽은 동생 석태(박종환)의 마지막 자취를 밟아가며 동생이 겪어야 했을 안타까움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민태(하정우)의 마음이 부서진 것일까. 석태를 죽이고 싶었던 문영(유다인)의 고백(혹은 자백)이 생각나 민태와 앞다투어 그녀의 행적을 쫓았던 호령(김남길)의 불안한 마음이 그랬던 것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영화는 석태를 향한 친절함을 상실한 채 그대로 달리기만 한다. 민태는 시종일관, 이유 없이 화가 나 있고. 그 분노의 방향 끝에서 폭력을 행사하지만. 그 장면들이 석태가 예전에 '한가닥'했던 시절의 위용이나 시원함을 주지는 않는다. 그저 동네 개싸움 정도의 난잡함만 느껴질 뿐.
사진 출처:다음 영화
호령의 캐릭터 기용에 있어서도 의문이 많다.
한낱 소설가인 호령이 민태와 비등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 발 앞서거나 지름길로 가지 않고 민태와 동선을 따박따박 같이 한다. 사건의 흐름에 그저 앞 뒤만 있을 뿐 트위스터 따위는 없기 때문에. 이 추격전 아닌 추격전에서 "쫄깃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또한 호령은 애초에 문영의 뒤를 쫓아야 할 명분마저 흐릿하다. 아무리 상상력을 굴려서 본다 해도 둘 사이에 있었던 것은 내연의 관계 정도로 표현될 수 있을 정도의 교류일 뿐. 그 외에 증거를 호령에게 줬다거나 혹은 자백을 했다거나 하지도 않는데 어째서 호령은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그녀를 쫓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도 알 수 없다.
게다가 후반부에는 이 수건 돌리기(?)에 경찰까지 등장하는데 그저 영원히 자신의 앞에 있는 술래를 못 잡는 꼬리가 되어 존재감 한번 뽐내보지 못하고 무능함만 뽐낸 채 전화만 돌려댄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게다가 마지막에는 이 복수가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듯한 희망찬 민태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데, 이런 결말이 (의도되지는 않았겠지만) 마치 다음 편을 또 기대하라는 듯한 뉘앙스를 주는 것이 매우 불쾌할 지경이었다.
지금 벌려놓은 판조차도 제대로 수습하지 않은 채,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나가다 보면 온 세상 원수들을 다 만나고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 잡힌듯한 민태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걸 두 시간가량 지켜본 내 시간과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단 하나의 요소도 경쾌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불협화음의 극치를 경험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 글의 TMI]
1. 비 온다고 아주 몸이 부스러지는 중.
2. 마카다미아 멸종시킬 기세로 먹는 중
3. 쓴다, 반차. 간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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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스웨덴] 한 여름의 힐링
스웨덴의 하지 축제 ‘미드소마’는 본래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여름의 한가운데를 축하하는 밝고 따뜻한 축제다. 해가 가장 길고, 햇살이 풍성한 시기에 들판에 모여 춤을 추고, 꽃을 엮고, 음식을 나누는 모습은 스웨덴 하면 떠오르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아리 애스터 감독의 영화 <미드소마>는 이런 실제 축제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비튼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 속, 오히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기이하고 잔혹한 일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북유럽의 정서와 충돌하며 강한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환상처럼 맑은 풍경 안에서 무너져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그들이 목격하는 상식 밖의 의식들은 다양한 묘사와 메타포와 함께 묘한 긴장감을 더한다.
영화의 시작은 대니에게 닥친 끔찍한 비극으로 열린다. 여동생이 부모님의 방에 가스관을 연결해 부모님을 살해하고, 스스로도 가스를 흡입해 생을 마감한 것이다. 대니는 한순간에 가족 전체를 잃는다. 세상에 단 하나의 의지도, 이해자도 없는 상황. 그녀는 본능처럼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에게 매달리지만, 그는 이미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기댈 곳조차 없는 대니는 고립감 속에 갇혀 점점 더 외로워진다. 죽은 가족들의 환영은 그녀를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마음은 늘 눈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자극에도 울음이 터질 듯한, 그런 상태로 대니는 간신히 일상을 버텨낸다.
그때, 크리스티안의 친구 펠레가 자신의 고향에서 열리는 축제, ‘미드소마’에 그들을 초대한다. 대니도 덜컥 따라나서게 된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 그들만의 규칙과 전통이 지배하는 마을이었다. 이곳은 이성이나 합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일정 나이가 되면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때로는 제물을 바친다. 개인의 생명보다 공동체의 지속이 우선되는 사회. 개인이라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하나의 톱니처럼 기능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니는 이 기이한 마을에 점점 스며든다. 일행 중 유일하게 ‘선택’받으며, 마을의 축제의 여왕 ‘메이퀸’으로 추앙받는다. 처음엔 당황하고 두려워했지만, 그녀는 서서히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 봐야 또 상처받고 외면당할 뿐이라면, 차라리 이 낯선 공동체 안에서 위안을 찾고 싶어졌던 건 아닐까.
그녀는 결국,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 크리스티안에 대한 감정과 그간 쌓였던 울분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은 대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함께 울부짖는다. 그 울음은 그녀의 고통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의식의 일부였을까?
<미드소마>에서 당혹스럽고, 기괴했던 장면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이래서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울음은 나에게 공허하게 느껴졌고, 진심이 담긴 공감이라기보단, 형식적인 흉내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대니는 어쩌면 그런 울음조차 내심 받고 싶었던 건 아닐까. 세상 밖에서조차 남자친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대니. 그런 그녀에게는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이 그저 형식일지언정 큰 위로였을 수 있다. 적어도 누군가는 나의 고통을 ‘보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일까?
난 대니의 마지막 웃음이 이상하리만치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영화 초반부터 대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얼마나 이해받고 싶었을지를 따라가다 보니,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위로와 소속감을 이 낯선 공동체 안에서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그 방식이 잔혹하고 기괴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조차 아무도 그녀의 고통을 진심으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의 '함께 울어주는 행위'만으로도 대니에게는 그토록 간절한 공감이었을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밝고, 하얗고, 꽃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영화의 비주얼은 그런 심리적 불안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잔혹한 장면들과 기괴한 의식들이 가득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초원, 화사한 햇살, 평화롭기까지 한 풍경. 마치 동화 속 마을 배경의 만남으로 공포영화로서 독특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오히려 대낮에 대놓고 보여지길 강조하고, 강요하기 때문에 <미드소마>만의묘하고 강렬한 분위기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대니의 선택과 웃음이 완전한 해방인지, 혹은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인지에 대해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공감받고 싶었던 순간들, 이해받지 못해 외로웠던 시간들, 그리고 어딘가에라도 속하고 싶었던 간절함.
<미드소마>는 그 모든 감정들을 환하게 빛나는 한낮의 태양 아래, 너무도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무섭고, 그래서 더 슬프다.
* 북유럽의 여름과 예쁜 꽃들로 가득찬 행복한 축제를 느끼고 싶다면 <미드소마>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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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3. 23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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