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3-07-28 16:24:04
'파리'는 어디 도망 안 가요
영화 <파리로 가는 길>
“파리는 어디 도망 안가요”
서둘러 파리에 가야 한다는 앤에게 자크가 말한다.
마음이 조급해지거나, 여유가 없을 때면 문득 이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대사이다.
영화 제작자로 성공한 남편 마이클을 따라 칸에 온 앤은 귀가 아파서 다음 행선지인 부다페스트를 포기하고 파리로 가기로 한다. 마이클의 지인인 자크도 파리까지 갈 일이 있다고 하며, 앤을 데려다 주기로 하고, 그렇게 칸에서 차로 7시간 거리인 파리까지 함께 가게 되는데…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닌 여정을 여행으로 만드는 이야기는 감독인 엘레노어 코폴라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남편의 지인과 가는 7시간의 긴 여정은 상상만으로도 부담스럽다. 빨리 달려 목적지에 도착해 쉬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을 것 같다. 앤도 그렇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크는 자꾸만 샛길로 빠진다. 예정에도 없던 기나긴 식사와 와이너리 투어, 낡은 자동차가 멈추는 상황에서도 피크닉을 즐긴다. “마네 그림 속에 있는 척하죠. 풀밭 위의 점심” 같은 피크닉이라니. 어떤 상황에서도 낭만의 순간을 발견하는 사람의 태도에 영화를 보는 나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그 웃음에 마음이 행복함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한다.
영화는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경 속을 달린다. 프로방스를 거쳐 리옹을 지나 부르고뉴를 들러 파리로 가기까지 프랑스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 영상에 스토리를 입힌 것처럼 생 빅투아르 산, 엑상프로방스, 라벤더, 가르수도교, 오벨리스크, 비엔 리옹 뒤미에르 박물관, 베즐리에 성 막달레나 대성당, 폴보퀴즈 시장…
가 본 곳을 추억하고 가고 싶은 곳을 찬찬히 들여다 보게 만들며, 그 여행에서 영혼을 달래줄 음식을 먹고, 마네와 르누아르의 그림속에 있는 것 처럼 순간을 즐기고,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보며 인생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중년의 사랑이나, 불륜에 대한 이야기 일수도 있다.
하지만…나는 이 영화에서 행복과 자아에 대한 질문이 더 크게 다왔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온 여정이 다르기에 현재 가지고 있는 가치관도 다르고 추구하는 이상향도 다르다.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삶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 특히 내가 나를 얼마나 알고 사랑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오늘은 자크가 앤에게 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자
뭐가 당신을 꿈꾸게 하죠?
행복해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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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분동안 숨 못쉬게 질문하는 마스터피스
마음이 찝찝하다. 왜? 방금 붕어빵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가격이 1000원이라 쌌기 때문에 내면의 변명을 대고 먹었다. 근데 맛을 보고 난 한 중간쯤에 '아놔'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냐면 난 오늘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었기 때문이다. 500원이라는 가격에 혹해 사치 아닌 사치를 부렸다. 밑도 끝도 없이 당뇨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다. 건강검진에서 당뇨의 ㄷ자도 볼 수 없었지만 유달리 단 걸 좋아하는 나의 성격이 왠지 모르게 화를 부를 것 같다.
근데 사실 이 불안감은 익숙하다. 왜냐하면 밤에 자기 전에 뭔가를 먹는 습성을 고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근데 또 안 먹으면 뭔가를 입에 넣기 전까지 잠이 안 온다. 여러모로 나 자신에게 지는 듯한 나. 매일 밤이 될 때마다 작은 불안감이 든다. 이러다가 사고를 치면 어떡하지? 진짜 당뇨에 걸리면 어째? 강박증이라는 트리거가 의심에 불을 붙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찜찜해진다. 어느덧 여름이다. 2022년이 되고 <매그놀리아>에 대해 쓰며 나 자신에게 뭔가 말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되어버렸다. 콜린성 두드러기 때문에 여름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같이 스테디 한 영화는 종종 생각이 난다. '올 때 XXX'라는 유명한 밈이 있지 않나. 그 아이스크림의 제품명처럼 이 영화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현대인의 공포로 자리 잡을 것 같다. 또 정식 개봉이 처음으로 이뤄진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 맛집이 될 것이다. 아마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당신의 머릿속에 서늘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영화 정말 무섭고, 빠져나오기도 어렵다. 텅 비어버린 내면을 가진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당신. 누구야? 극장에서 무슨 영화 볼 거야?"
끔찍하고 찝찝한 살인사건
베테랑 형사 타카베는 한 사건이 일어나서 머리가 아프다.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인했다. 그런데 그 살인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목에 X자를 그려 끔찍하게 살인했다. 경악하는 타카베. 첫 번째 피해자는 매춘부였다. 옷이 발가벗겨진 채로 피투성이인 시체를 바라보는 타카베. 벌거벗겨진 채로 도망갔다는 부사수의 말에 호텔 구석구석을 찾아보기로 한다. 소화전 문을 연 타카베. 가해자는 다 벗은 채로 벌벌 떨며 숨어 있었다. 심문을 시작하는 타카베. 이 살인사건들이 더 끔찍한 건 가해자들의 기억이 죄다 사라졌다는 점이다. 왜 죽였는지, 피해자에게 갖고 있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잃어버린 범인들. 잔혹했던 범죄 수법이었는데 이걸 기억 못 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근데 이런 일이 한 번이 아니었다.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가지도 피해자들이 만나지도 않았는데 마치 우연처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점이다.
수사를 지속하는 타카베를 뒤로하고 카메라는 어느 해변으로 이동한다. 어딘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남자. 남자는 26살의 교사다. 교사인 남자는 뭔가 창백해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 교사에게 남자가 말을 건다. "오늘이 며칠이지?" "2월 26일이요." 교사와 남자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이상한 질문을 건네는 남자. 교사는 이끌리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대답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도와줘. 부탁이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교사는 남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서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남자의 이름이 마미야인 건 어렵지 않게 알았지만 남자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의 이야기를 한 교사. 교사는 마미야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라고 답한다. 마미야는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난 바다에 있던 적이 없다"라고 답한다. "난 아무 생각도 안 나"라고 답하는 마미야. 금세 이야기의 화두는 교사의 아내로 향한다. 아내는 하는 일 없는 전업주부라고 답한 교사. 그 말을 듣고, 마미야는 라이터를 켠다. 그리고 말한다. "부인 이야기 더 해봐." 교사는 초점을 잃었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됐다. 가해자는 교사였다.
형사 타카베
타카베는 가정을 꾸리고 있다. 아내가 있다. 아내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아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카베는 아내를 사랑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집에 올 때마다 돌아가는 빈 탈수기는 아무렇지 않다. 쉬운 길도 잃어버리는 것도 별일 아니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겪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았던 타카베. 타카베는 친구 정신과 의사인 사쿠마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하나, 둘 씩 파헤쳐나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신 왔다 간 듯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감정은 살기다. 이 영화는 살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연쇄살인을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압도적인 서스펜스를 서서히 목을 조르는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죽기 전을 유지한다. 일단 첫 번째,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다카베의 아내가 어느 병원에서 책을 의사 앞에 낭독한다. 그리고 한 남자가 발가벗고 있는 여자를 파이프로 무차별 폭행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서 물이 쏴-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디선가 귀염 뽀짝 한 노래가 들린다. 세상 졸려 보이는 타카베의 표정과 함께 'CURE'라는 자막이 나타난다. 배경음악과 장면이 대조되는 연출 방식은 거의 정석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서 25년 전 영화의 연출 방식이 지금까지 먹힌다는 걸 생각하면 이 영화가 가진 놀라운 지점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귀염 뽀짝 한 삽입곡을 지나고 나면 처음 가해자가 카메라가 잡힌다. 이 가해자가 처음 제시된 이후부터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대사 작문이나 장소 설정, 연기 디렉팅까지 거의 신기가 들린듯한 탁월한 연출 능력을 선보인다. 별 것 아닌 거 같은 이미지에서 만드는 기괴함이라는 정서가 영화 전반을 이끄는데, 이것은 영화를 단순히 범인이 사이코패스여서 오는 공포감으로만 영화가 구성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처음 가해자는 옥내 소화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체였다. 타카베가 취조하는 장면이다. 이것도 타카베의 시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심지어 모니터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화면에 갇힌 가해자의 모습이 비친다. 확실히 답답하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라는 답변과 잘 어울린다. 사실 간단한 비유다. '관객이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직간접적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없다' 혹은 '타카베 역시 구체적인 무언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와 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감독은 메시지와 장면 구성이 이질적이지 않게, 꼼꼼하게 설계했다.
이는 다음 장면과도 이어진다. 바다에서 무언가를 그리는 교사. 해안가에서 그렇게 멍-때리고 있는데, 마미야가 교사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모래사장 안에서 먼발치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냥 바다에서 사람들이 하는 대화다. 마미야는 교사에게 먼저 말을 건다. "여기가 어디야?" "XX 해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마미야가 사라진다. 다시 또 먼발치에서 카메라가 교사를 찍는다. 다시 등장하는 마미야. "오늘 며칠이지?" "여긴 어디야?" "내가 누군지 알아?" 이상한 질문을 한다. 근데 더 이상한 건 이 질의를 하는 인물들의 자세한 부분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얼핏 보면 바다에서 남자 둘이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게 전부라 이상할 게 없다. 이상한 건 단 하나뿐이다. 마미야가 하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은 굉장히 아무렇지도 않게 쓱 묘사된다. 얼마나 쓱 묘사되냐면, 살인이 벌어지고 나서야 관객이 '아 이래서 이랬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이런 상황을 차곡차곡 쌓아올라 후반부까지 이야기가 점점 폭주하게끔 만든다. 행동 하나, 하나 단적으로 잘라서 보면 ? 싶은 순간을 점점 차곡차곡 누적해서 광기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순간은 이 영화가 호러 분위기를 내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일상 속에 내재되어있는 두려움을 노린, 구로사와 기요시의 창의적인 발상이 뒷받침됐다고 볼 수 있다. 신기한 영화다. 조그마한 균열이 모여 목을 조르는 서스펜스가 만들어진다. 문장만 보면 러닝타임이 한 네 시간쯤 되려나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111분이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영화 상영시간 안에 모든 에너지를 집약시켜 관객을 홀리게 만든다. 아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이 영화의 신에 홀려 연기 디렉팅, 청각 효과, 시각효과, 장소 섭외까지 저세상의 명작을 만든 게 아닐까 싶다;
무섭고 두려운 것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와 이거 미쳤다'라는 생각과 함께 숨을 굉장히 오랜만에 쉰다는 느낌이었다. 초중반부에 두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는 그냥 아예 눈을 뗄 틈도 없이 집중해서 봤다. 이는 몰입감이 뛰어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몰입감이 왜 뛰어날까? 내가 이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리고 나 역시 내면의 한 구석에게 정복당해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나 역시 살아오며 내면에 품고 있는 분노가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잠식당해서 끔찍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 했었다. 당연히 영화는 영화고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는 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일상적인 방식으로 일반적인 호러영화의 문법을 탈피했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우리 내면에 갖고 있던 분노를 상기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장면이 주는 공포감보다 내면의 두려움이 먼저 떠오른다. 이 두려움이 영화를 이끌다 보니 평범한 일상이 제시돼도 너무 무섭다. '너 이거 무섭지?'가 아니다. '네가 무서워하는 거 알아서 일일이 말해라'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몰입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우리 단점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일본 송강호
글쓴이가 일본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야쿠쇼 코지 이 아저씨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바벨>에서도 본 적 있다. <세 번째 살인>이나 <도쿄 소나타>에서도 본 적 있다. 뭔가 일본의 거장들 픽을 몇 번 받으신 게 뭐랄까 우리나라의 송강호 배우가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이 느낌은 연기가 엄청 다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송강호 배우의 장점은 감정연기가 입체적이라는 것이다. <사도>에서 영조 역을 맡으며 "미쳐-서~"라고 톤을 변조하는 송강호 배우의 열연은 창의적이면서도 깊이가 있는 연기였다. 이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면 긴장감이 한번 터지는 부분이 있다. 아마 영화를 본 후라면 잊히지 않을 장면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때 야쿠쇼 코지의 연기는 압권이다. 물론 이 하이라이트 신의 연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톤을 왔다 갔다 하는 참는 연기가 극의 생기를 부여한다.
또 하기와라 마사토의 연기는 '돌아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울린다. 이 인물을 연기하는 난이도는 아마 높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텅 비어버린 내면이라고 하는 게 말이 쉬운 거지 사실 상상이 그렇게 잘 되는 모습은 아니다. 근데 글쓴이는 이 '텅 비었다'라는 속성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광기로 가득 차 있다. 뭐 자기 이름도 모를 수 있고 얼굴도 모를 수 있다. 근데 이 사람은 최면으로 살인을 교사한 연쇄살인마다. 아닌 거다. 텅 빈 인물이 살인을 교사한다? 나머지는 다 비어있어도 내면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 가져야 할 연기 준비물이 있다. 순수한 척하는 연기다. 어찌 보면 이중적인 이 역할을 내면의 광기로 잘 소화해낸다. 이 두 배우의 연기가 극의 배경이 되어 전반적인 서스펜스를 이끈다.
마스터피스가 어울려
우리는 호러영화의 걸작 두 작품을 알고 있다. 바로 <곡성>과 <유전>이다. 전자 <곡성>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지점에서 불행에 스며든 인간의 발악을 다뤘다. 이 발버둥은 참 여러모로 관객의 기를 빨아버린다. 뭐가 옳지? 선택을 고민하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 <곡성>을 본 분이라면 이 영화의 엔딩을 선명하게 기억할 것 같다. 이는 우리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난 아니라고 믿었지만 사실 미끼를 물었다는 두려움은 우리 삶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는 <큐어>와 <곡성>이 오컬트 소재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일상 속, 내면의 두려움을 다뤘다는 점에서 <곡성>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마음에 들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을 딱 골라서 유효타를 쳤다.
또한 이 <큐어>는 이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을 극을 이끄는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유전>역시 <큐어>의 후배 격인 영화다. <유전>의 공포 중 하나는 예상이 간다는 점이다. '설마 이렇게 되는 거 아니겠지?' 생각하면 바로 그게 이뤄진다. 근데 그게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클리셰를 부수며 이뤄진다. 즉 운명론적인 관점이 작용한다. 이 <큐어>의 공포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뭔가 똑 부러지고 똘똘한다고 해서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직업 다 좋다. 열심히 살았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뭔가를 피할 수 있었냐? 아니다. 이는 인물들이 삶의 선택지를 고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선택지를 고른다는 건 당연히 단점이 딸려온다. 그러니까 이 단점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은 어찌 보면 인간에게 필연적일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쓴 바와 같이 <유전>의 공포와 일맥상통한다. 아마 <유전>을 좋아하셨던 분 역시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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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남 못 준 제 버릇
[주의사항]
이 글은 영화 [엘리멘탈]과 비교하는 영화인 [에에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세요. 구독과 댓글은 미천한 리뷰어에게 참 많은 힘이 됩니다.
어린이들에게도 다양성, 혹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는 보편화되어야만 하는 가치를 가르쳐줘야 할 때가 있다. 꽤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무거울 수도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안내자의 역할은 애니메이션이 도맡고 있었다. 물론 메시지보다 포장이 재빨리 가닿는 바람에 거의 모든 아이들이 푸른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렛잇고를 열창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애니메이션만큼 아이들에게 빠르게 메시지가 흡수될 수 있는 매체는 아직까지는 없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
스펀지에 비유되곤 하는 아이들의 습득력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다른 작품들보다 꽤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PC(Politically Correct)라 불리는 많은 "넘어야 할 산"들을 다루느라 고전적으로 내려오는 동화들도 다시 들여다보는 기회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픽사에서 만들어낸 [엘리멘탈]은 과감하게도 이민 2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메인 줄거리로 내세웠다.
언뜻 보면 [에에올]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픽사의 이번 선택은 그다지 현명하지도. 그렇다고 새롭지도 못했다.
소수자, 혹은 이민 2세로의 삶
그림출처:다음 영화
비록 원소의 형태를 빌리긴 했지만. 엠버의 가족은 앞 구르기를 하면서 보아도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부모(이민 1세대)의 모습, 옮겨 온 새 터전 안에서도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는 모습들. 그러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불꽃의 정수가 집에서 타오르고 있는 장면들에서는 일종의 슬픔마저도 느낄 수 있다.
부모 세대의 인생을 남김없이 빨아먹고 자란 가게인 파이어 플레이스는 불이라는 족속(?) 들에게야 쉼터처럼 보일 수 있었겠지만, 사실 도시에서 주류의 삶을 살았을 다른 원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저 흔한 잡화상에 불과한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소수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았을 도시에서의 기회들은 엠버에게도.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보이지는 않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벽이 되어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넘을 수 없는 좌절감과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는 아버지의 자긍심은 주류를 향한 날카로운 칼이 되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기도. 또한 가족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엠버가 사는 동네가 물난리가 났을 때 가장 취약한 곳이라는 점에서는 영화 [기생충]이 떠오르기도 한다. 삶의 터전이 배 한 척의 움직임 한 번으로도 완벽하게 몰락해 버릴 수 있는 곳. 다수를 상징하는 물이 소수민족인 불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는 설정만 보더라도 엠버의 주거 환경이 화려한 도시 속에서도 슬그머니 응달에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소수자의 삶을, 더 정확하게는 엠버의 일상을 브이로그 마냥 보여주는데 쏟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가뜩이나 집중력이 짧은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가진 이 단점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치명적인 결점을 갖게 한다.
바로 주인공의 매력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K-) 장녀?:주인공의 매력 없음에 대하여.
그림출처:다음 영화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
엄마 없으면 네가 엄마야. 그러니 (주로) 남동생 챙겨야 해.라는 말에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위치. 자신을 제대로 돌보거나 돌아볼 여유조차 없어 사춘기가 20대를 훌쩍 넘겨서 격하게 찾아오는, 부모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자 절대 아파서는 안 되는 손가락인 장녀.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엠버의 모습은 K-장녀의 삶을 고대로 빼다 박은 듯하다.
상대적으로 나약해 보이는 웨이드와 비교를 했을 때 모든 일들을 해결하는 듯 보이는 엠버의 모습이 씩씩하고 당차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엠버의 모습은 자신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영화 내내 뛰어다닐 뿐. 자신의 미래나 감춰진 능력을 알아내기 위한 고뇌를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엠버의 미래, 혹은 적성이 "정해지는"과정 또한 조금은 의문스럽다. 엠버의 능력이 정말로 특별한 것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엠버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에 대한 비교 대상조차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그녀만이 지닌 능력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때조차 그런 능력을 가지지 못해 단념하는 엠버와 같은 소수 집단을 소개하지도 않는다.
자신과 정 반대인 남자친구와는 절대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주류가 선사해 준 사다리를 얼떨결에 부여잡는 것을 보며, 과연 엠버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주체적으로 한 일이 있기는 한 걸까.라고 생각해 보면. 정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그저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엠버의 마음에 동질감 정도는 느낄 수도 있겠으나. 동화되기는 어렵다. 그렇다 보니 K장녀인 나조차 스스로의 기억에 기반한 공감의 눈물은 흘릴 수 있었지만. 감동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여전한 신데렐라 이야기;행복에 대하여.
그림 출처: 다음 영화
[엘리멘탈]은 앞서 잠시 언급한 에에올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극 중 에블린(양자경)은 쿵후 마스터가 될 수도, 유명한 배우로서의 삶도, 하다 못해 소수자로 치자면 이보다 더한 소수자가 있을까 싶은 손가락이 소시지로 된 인종(?)의 삶도 살 수 있었지만. 코인 세탁방을 하고 있는 현재의 삶 그대로 그 어떤 것도 바꿀 것 없이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에에올은 행복의 전형적인 조건을 구걸하지 않는다.
또한 삶의 변화가 필요할 때 누군가의 허락도 구하지 않는다. 또한 내 인생이 변화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 나를 구하러 와 줄 완벽한 왕자님이 아님을 명백하게 못 박는다.
아무리 거의 모든 동화의 끝이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 소수자의 삶에 대해 애니메이션에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결말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각오는 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행복의 조건으로 반드시 이성으로 이뤄진 커플이어야 할 것. 또한 주류의 삶으로 편입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일 것. 임을 결말에서 전시하듯 보여준다. 정 반대의 누군가에게 끌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에 불과 물이라는 원소의 형식을 빌리고는 있지만.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다.
현재를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개인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줄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 이 비루하고 못나 보이는 현재의 자신만이 조부 투바키와 싸워야 하는 유일한 사람임을 알고 무서워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뿐.
행복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알려줘야 한다.
마치면서
영화관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꽤 좋은 시간대였기에 아이들이 많은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더빙판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더빙판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였기에 나의 무신경함에 조금 짜증이 났고, 한 편으로는 과연 이 아이들이 금쪽이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슬그머니 내 옆자리에 앉힌 채 영화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지킬 수 있는 매너를 최대한 지키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영화를 즐겼다. 머릿속에서 나 스스로에 대한 바보 같음을 느낌과 동시에. 과연 이 결말을 아이들이 보아서 되는 것인가. 에 대한 의문도 떠올랐다.
마음이 복잡했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어 어느 정도의 필터링이 되는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싶)지만. 이 아이들이 과연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약간의 두려움도 들었다.
찝찝한 마음을 마음 한 구석에 담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의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나 역시 자라는 동안 몇 번이고 내가 읽은 동화에 담긴 의미를 곱씹고, 때로는 깨부수며 어른이 되었으니까.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이 아이들 역시. 영화를 보았을 때의 행복함과 즐거움은 오래 가지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이 영화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픽사의 게으른 선택에 조금은 입맛이 쓴 주말이었다.
[이 글의 TMI]
1. 대장 용종 떼내서 커피도 없이 영화를 봤다.
2. 이제 겨우 보식 끝나가는 중
3. 다행히 다음 주부터는 밥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엘리멘탈 #픽사 #피터손 #레아루이스 #마무두애시 #웬디맥렌던커비 #애니메이션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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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추운 곳에서 따뜻함과 열정을 만나다
파주 출판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어서 시사회에 있다고 했을 때 의무감으로 신청한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다른 작품들은 재밌어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로 시사회를 신청했었는데 이 작품은 현 직업이 북에디터다보니 북에디터인데 그래도 봐줘야 되는 거 아니겠어?하는 마음으로 시사회를 다녀왔다.
영화 <위대한 계약> 시놉시스
책을 만들면 구속되던 시절, 책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이 있엇다. 이들의 꿈에 새로운 도시를 희망한 건축가들이 동참했다. 위험한 계약이라 불리던 위대한 계약. 그 계약을 바탕으로 세계 어디에도 없던 도시가 파주에 탄생한다. 그리고 책에서 시작된 도시는 영상과 예술 문화의 허브로 발전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또다른 새로운 미래를 꿈꿔나간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위대한 계약>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선(善)이 지속되다
영화 <위대한 계약>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선'의 파급력이다. 건물들은 절대 4층 이상의 높이로 짓지 않는다, 자신 마음대로 건축가를 지정해 건물을 짓지 않는다 등 굉장히 공동체 정신이 강한 위대한 계약을 맺으면서 파주 출판 도시 1단계가 진행된다. 그리고 1단계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2단계에서 짚고 넘어가고, 그와 동시에 1단계의 그 선한 정신을 이어받는 모습을 보면서 자본의 논리에 굴복했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고 자신들이 설정한 그 선한 영향력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는 것에 경외심 마저 들었다.
공금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투명하게 하기 위해 개인의 사비로 처리를 한다든지, 1단계 2단계 도시 계획에서 영감을 받아 3단계를 진행할 때 아직 건물을 살 수 있는 여력이 안되는 예술인들에게 반값으로 임대를 해준다든지. 그 선한 영향력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 커지고 넓어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남한에서의 최북단 가장 추운 파주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파주 밖은 너무 춥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추운 곳에서 가장 선한 영향력으로 도시에 따뜻함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공동체가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다니
사실 북에디터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영화 <위대한 계약>을 보면서 정말 신기했던 모습은 어쩜 저렇게 열정이 넘칠까?였다. 저는 파주출판도시가 정부에서 만들어낸 것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출판인들이 모여서 정부와 싸우고, 군대를 설득해서 마련한 부지에 건축가들이 힘을 합세해서 만들어낸 도시였다. 그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존경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파주 출판 도시를 자랑하고 의의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이 도시를 건립하면서 출판인들과 건축가들의 실수를 스스로 설명한다. 이런 부분이 아쉬웠고, 저런 부분은 잘못됐고. 이렇게 스스로의 과오를 말하면서 이 도시를 조금 더 발전적으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아직까지도 모색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이 도시를 자신들이 세웠고, 출판과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의 과오를 직접 말하면서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그들의 모습이 멋있었고,출판의 미래를 그리는 그들의 모습에 열정이 조금이나마 생겼던 작품이었다.
미래의 파주출판도시는 어떻게 변화할까?
책으로 시작한 파주출판도시는 이제 영화인을 비롯해서 예술인, 그리고 그들을 교육하는 학교까지 들어와 있다. 예술 전반으로 확장된 도시를 보면서 그리고 지난 날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이 도시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실 사양산업이라고 일컫어지는 출판업의 미래도 파주에서는 조금 다르게 읽혀지고 있었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도시 파주는 북한으로 통하는 가장 빠른 길목에 위치해 있다.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교류되는 것은 활자와 영상매체다.”
이 말씀을 하신 도서출판 동녘의 이건복 대표. 굉장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물론 통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통일이 아니더라도 북한과 남한의 문화교류가 자유롭게 이뤄지는 날이 온다면 아마 가장 빛을 발할 매체가 활자와 영상일 것이다. 이러한 부분까지 염두해두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멀리까지 내다보는 확장된 시각에 사고가 넓혀지는 느낌이었다.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개인적으로 직업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어서 더 인상깊게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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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사랑에 빠졌을 뿐인데, 영화 주인공이 되었다
1996년 여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의 학교에서 믿기 힘든 스캔들이 일어납니다.
교사 메리 케이 르투어노는 당시 만 13살에 불과했던 학생 빌리 푸알라우와 사랑에 빠진 사실인데요.
르투어노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네 아이의 엄마였고, 푸알라우는 가족과 함께 사모아에서 이민을 왔으며,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르투어노는 그날 밤의 일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너무 그를 사랑했어요. 그리고 키스 정도면 뭐 어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체육관과 교실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맺은 두 사람은 같은 해 결국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르투어노는 2급 아동 강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3개월 후 조기 석방되었죠. 두 사람의 첫 딸은 1997년 아동 성폭행 혐의에 대한 유죄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태어나게 됩니다.
이 성범죄 사건은 지금도 여교사 남제자 성범죄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는데요.
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메이 디셈버>입니다.
제목의 <메이 디셈버>는 ‘나이차가 많은 커플’을 가리키는 영어 관용구입니다. 계절의 끝과 끝인, 봄과 겨울 같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표현인데요. 5월은 젊은 상대를 봄에 비유하고, 장년 상대를 12월인 겨울에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실제 피해자였던 빌리 푸알라우는 <메이 디셈버>가 자신과의 상의 없이 제작되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편, 국내 개봉 전부터 <메이 디셈버>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데요.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 및 런던, 뉴욕, 시카고 비평가협회상 등 무려 30관왕을 휩쓸고 국내에 상륙했습니다.
실화의 메리 케이 르투어노에 해당하는 '그레이시' 역은 줄리안 무어가, 그리고 작중에서 그레이시를 연기하려는 인기 배우 ‘엘리지베스’는 나탈리 포트만이, 빌리 푸알라우에 해당하는 '조' 역은 찰스 멜튼이 맡았습니다.
줄리안 무어와 나탈리 포트만의 만남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며, 언제 이 두 배우를 한 작품에서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더불어, <원더스트럭> <다크 워터스> 그리고 <캐롤>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감독 ‘토드 헤인즈’의 신작이라는 점도 눈에 띄는데요. <캐롤>에서 보여줬던 섬세하고 아름다운 연출이 이번 <메이 디셈버>에서도 녹여졌을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개봉 전 시사회로 미리 만날 수 있었습니다.
* 관람 전,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영화가 실화 내용을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실화 내용을 어느 정도 숙지해 가면 더욱 매끄러운 관람이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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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전 세계를 뒤흔든 전무후무의 만남, 줄리안 무어 X 나탈리 포트만
<메이 디셈버>의 핵심 감상 포인트는 두 배우의 열연인데요.
너무 두 대배우라 영화를 보기 전에 이 두 배우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오히려 부딪히면 어떡하지?라고 생각도 했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런 걱정은 싹 사라졌습니다.
줄리안 무어가 맡은 ‘그레이스’는 굉장히 미묘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자신의 스캔들 그리고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가십거리들에 매우 의연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한 듯한데요. 자신의 스캔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고, 자신을 연기하게 될 ‘엘리자베스’가 찾아오면서 더욱 흔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참았던 울분이 언제나 남편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반면, 나탈리 포트만이 맡은 ‘엘리자베스’는 마치 그레이스를 망치러 온 구원자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요. 그레이스를 연기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매일 방문하고, 조사하고, 일상을 함께 보내면서 점점 그레이스의 가족에 스며들게 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불청객 같은 등장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그레이스 부부 관계의 진실도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는데요.
두 배우의 같은 듯 다른, 고요함 속 폭발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영화 전반에 걸쳐 퍼져 있으며, 긴장감을 수시로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과연 그레이스와 엘리자베스의 관계는 끝내 어떻게 남을지, 두 배우의 연기에 압도되다 보면 어느새 결말에 다다르게 됩니다.
# 사랑, 그 이면의 것들에 대하여
<메이 디셈버>는 어쩌면 실화의 자극에 이끌려 보게 됐더라도, 오히려 그 이면에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작품입니다.
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외모, 말투, 행동 등 겉으로 보이는 것은 시간의 힘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지만, 딱 한 가지 연기할 수 없는 게 있는데요. 바로 그 사람의 생각, 즉 내면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입장에서는 초등학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된 그레이스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레이스도 온전히 자신의 속마음과 생각을 엘리자베스에게 드러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심을 숨긴 채 의연한 척 연기하는 듯한 그레이스, 그리고 그런 그레이스를 연기하려고 하는 엘리자베스. 이런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 다방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해설도 꼭 들어보고 싶네요.
또한 삶의 모든 것을 내던진 그레이스. 그녀에게 과연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레이스와 조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얻을 수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미국 전역을 뒤흔든 세기의 스캔들, 그레이스와 조의 사랑. 그 이면에 남겨진 잔상들 또한 영화를 보면서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3월 13일 개봉 예정인 <메이 디셈버>에서 확인하세요.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해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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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베스(2015년)
박제욱
1. 맥베스 서사
'서양 문학은 결국에는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다.' 라는 우스겟소리가 있다. 그만큼 그둘은 역사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새로운 문학가들이었다. 그 중 셰익스피어는 여러 희곡들로 특히 4대 비극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아마 전세계 누구나 한번쯤 이름은 들어봤을 고전 중의 고전이 되었다. 내가 그 중 가장 매력적으로 끌리는 작품은 맥베스였다.
2015년에 저스틴 커젤 감독의 손에 의해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다시 한번 각색 되었다. 간단히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자비로운 왕 던컨 왕이 집권중인 스코틀랜드. 역적 맥도널드가 내란을 일으켜 던컨왕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다. 글래미스의 영주 맥베스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나선다. 맥베스는 맥도널드를 처치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전쟁이 끝나고 맥베스와 그의 동료 영주 뱅코우는 세 마녀의 예언을 듣게 된다. "글래미스의 영주이자, 코더의 영주, 그리고 장차 위대한 왕이 될 맥베스"라는 예언과 뱅코우는 "맥베스보다는 못하나 자손 대대로 왕을 낳을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느다. 그 예언에 의해 맥베스는 심한 고뇌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부인의 욕심에 못이겨 이내 던컨왕을 살해하게 된다. 왕이 된 이후에는 뱅코우의 아들에 대한 불안함과 심한 광기에 휩싸여 미쳐버리고 세 마녀를 다시 찾아가게 된다. "버넘 숲이 던시네인 언덕을 넘지 않는 이상 너는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가 낳은 남자는 맥베스를 해칠 수 없다."라는 예언을 받는다. 그 말에 맥베스는 다시 광기를 다스리게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버넘 숲이 던시네인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게 되고 맥베스는 어미의 배를 찢고 나온 맥더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단순한 예언에 의해 정의롭고 용감했던 한 영주가 광기에 휩싸여 한 나라의 왕이 되고 그 이후에는 폭군이 되고 자신의 동료들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을 맞이한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왕의 검을 들고 있는 왕궁 속에서의 멜컴 왕자와 전장 속 맥베스의 시체 앞에 있는 뱅코우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마무리 된다.2.미장센
영화 맥베스를 보게 되면 실제 스코틀랜드의 당시 시대가 이랬을 것이라는 기분이 들고 셰익스피어의 각본이 실제 이야기라면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라는 감동을 받게 된다. 그 만큼 감독이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도 여러 미장센과 연출을 통해 배우의 연기를 극대화 시키고 갈등 상황을 독특하게 표현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재 눈에 띄는 점은 불이다. 영화 초반 불의 이미지로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갈등 및 감정을 아주 탁월하게 설명해 낸다. 불이라는 이미지는 여러가지 의미로 계속 반복 제시된다. 영화는 맨처음 맥베스는 자신의 딸을 화장하면서 시작한다. 여기서 불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 이후 영화 중반부에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이 던컨왕 살해를 두고 심각한 고뇌와 갈등을 겪게 된다. 맥베스가 처음 예언을 들었을 때는 자신의 충성심과 죄책감 때문에 불안함에 빠져 왕을 살해할 수 없다고 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레이디 맥베스는 자신의 남편을 왕의 자리에 추대할 수 있다는 여왕이 될 수 있다는 탐욕에 빠지게 된다. 대립되는 두 인물의 대화 속에서 항상 레이디 맥베스쪽에 머무는 물체가 있다. 바로 빛, 불이다. 항상 레이디 맥베스의 등 뒤에는 횃불 또는 초 등이 비추고 있다. 왕위에 대한 도전과 그 의지가 그녀에게만 머물었지만 그 불이 맥베스 쪽으로 이동하는 순간 맥베스가 스스로 다짐하게 되고 던컨왕을 살해하게 된다. 영화 중반부 불은 곧 의지를 뜻한다. 극의 중.후반부 맥베스에게 반기를 든 맥더프의 가족 모두를 맥베스의 병사들이 잡아와 사형에 처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어린 아이까지 화형을 하는 이 장면은 아마 의지를 뜻하기도 하면서 맥베스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은 버넘숲이 던시네인을 넘어 오는 장면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는 맬컴 왕자와 맥더프 그리고 잉글랜드 군 1만명이 버넘숲의 나뭇가지로 위장을 하여 던시네인을 넘어오는 버넘숲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맥더프가 버넘 숲에 불을 지르고 그 불에 탄 버넘숲의 재가 던시네인을 넘어 맥베스의 성으로 향하면서 던시네인을 넘어서는 버넘숲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불은 맥베스의 최후를 뜻하는 종말이자 죽음이 될 것이다. 이렇듯 불은 영화 처음부터 죽음의 이미지를 담으면서 의지, 광기, 종말 및 죽음까지 이어졌다.3.등장인물
맥베스 원작 자체에서부터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서양 문학사 최고의 악녀라고 할 수 있는 레이디 맥베스를 탄생시키면서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갈등을 볼 수 있다. 위에 첨부한 맥베스 포스터를 보게 되면 마치 마이클 패스벤더(맥베스역)의 머릿 속에 마리옹 꼬티야르(레이디 맥베스 역)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극중에서 둘의 관계가 이러하다.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로부터 예언을 듣게 된 후로 완전히 맥베스의 머릿속에 들어서 그의 욕망과 탐욕을 일 깨우는 것에 노력한다. 하지만 맥베스의 광기는 통제 하지 못한 그녀는 이내 질병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필자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인물관계는 맥베스와 뱅코우의 관계이다. 맥베스와 뱅코우는 세마녀에게 예언을 듣게 된다. 재밋는 점은 왕이 될 사람이라는 예언과 자손 대대로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맥베스와 뱅코우가 동시에 같이 듣는 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맥베스는 자신의 탐욕에 의해 왕이 되려고 노력을 할 것이고, 그 후 자신의 왕위를 오래 간직하기 위해 뱅코우의 아들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뱅코우 역시 맥베스가 코더의 영주가 됬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이 예언이 진실일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되고 전우였던 맥베스를 멀리하고 아들과 함께 도망치려 할 것이다. 개개인에게는 축복이 될 수 있는 두 예언이 동시에 한 장소에서 들었다는 이유로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되어준다.4. 무엇이 맥베스를 타락 시켰는가
맥베스는 본래 신분이 명예롭고 위대한 장수이자 영주였다. 그런 지위와 명성덕에 그의 몰락이 더 돋보이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타락 시켰을까. 첫째는 바로 스코틀랜드의 기후 혹은 풍경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에 맥베스를 접할 때는 커젤 감독의 영화처럼 실제 스코틀랜드의 척박한 풍경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 높은 산 하나 외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없는 황량한 토지, 그리고 괴물이나 나올 것 같이 어두침침한 나무들로 빽빽한 버넘숲을 영화는 잘 표현해주며 심지어 흐릿하기만 한 스코틀랜드의 날씨까지 영화에서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둡고 우울한 기후와 배경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비롯하여 맥베스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까. 가장 맥베스를 타락시킨 것은 세마녀의 예언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말'일 것이다. 처음 맥베스를 혼동시킨 것은 예언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뱅코우와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두가지 예언을 듣게 됨으로서 두 인물은 서로 대립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곤경을 치루게 된다. 레이디 맥베스의 탐욕에 빠진 속삭임도 맥베스 그를 타락하게 만든다. 그 이후에 새로 듣게 되는 세 마녀의 예언 또한 다시 한번 맥베스를 안심시키기도 하지만 곧바로 그가 몰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간언이 될 수도 예언이 될 수도 있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맥베스를 혹은 맥베스의 주변인물들의 운명을 타락시킨 비극의 근원일 수도 있다.5.대사
맥베스는 역설의 영화로도 보인다. 영화의 초반 세 마녀로부터 우리는 한 대화를 들을 수 있다. "선한 것이 악한 것, 악한 것이 선한 것"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 속 전쟁이 끝난 전쟁터에서 빠져나오면서 맥베스가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흉하고도 좋은 날은 처음이오." 이 두 대사는 사실 말이 안되는 서로 상반 되는 개념들을 늘어 놓는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일 된다는 느낌을 우리는 받을 수 있다. 나는 이 대사를 통해서 세 마녀의 예언이 사실은 예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말은 사실 맥베스 내면의 욕구였을 수도 있다. 다만 선한 것이 악한 것이고 악한 것이 선한 것이 듯이 맥베스 또는 우리는 매사에 갈림길에 놓이지만 그 갈림길이 무엇인지도 그리고 우리가 어떤 갈림길에 들어서게 됬는 지도 모른다. 어떠한 선택지가 있는 지 모른채 자신의 욕구와 의지에 따라 역사가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치 스코틀랜드의 거대한 대자연 풍경처럼 인간 한사람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운명 그 운명에 거스르려고 한자의 비극을 맥베스라는 작품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6.고전이 주는 힘
고전이란 참 매력적인 존재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을 할 때 아마 처음 이런 질문에 스스로 빠질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것인가 혹은 성공한 사례들을 모방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완벽한 창조물을 새롭게 만들어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나도 예술가라면 당연 그렇게 해야된다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수세기전 과거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큰 호응을 끌어낸 작품들의 방식이 현대의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나는 이 질문의 답이 곧 고전의 가치가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 그 자체의 본성을 건드리는 예술. 그것이 고전들의 장점이 아닐까. 그 고전들을 현대의 기술과 멋으로 새롭게 각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또한 예술가의 재능이라고 생각 된다. 대표적인 예로 영화계에서는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B급이 되어버린 과거의 인기있던 장르들의 요소들을 섞어서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낸 감독이 쿠엔틴 타란티노이다. 또한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명한 건축물인 두오모 대성당 역시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왜 로마시대에 가능했던 돔 형식의 건물(판테온)이 왜 지금은 불가능할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장르를 막론하고 고전이 주는 힘은 예술에게 있어서 고귀한 가치이다. 그저 고리타분하다고 오래됬다고 밀어두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옛것을 바라보고 재창조하는 일도 예술의 긍정적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커젤 감독의 영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틀을 거의 건드리지 않는 선택을 취하면서 그 속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여러 시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새롭게 맥베스를 각색했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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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자들을 위한 소네트
반 년전, 왕따 당하는 삶에서 자신과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 개, 루를 그리워하는 조숙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어느 날 루와 산책을 하다 빈 공터를 만나게 된다. 그 공터에서 루와 쌓은 추억으로 가득하기에 루의 죽음 이후에도 사야카는 꾸준히 그 공터에서 멍하니 앉아있다. 루가 다시 와주길 기다리면서.
그렇게 상념에 젖어있던 어느 날, 사야카는 아들을 오래 전에 잃은 후세 할아버지와 친해진다. 소중한 존재를 잃어본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공유하며, 그들은 세대를 거스른 베스트 프렌드가 된다. 오랜 시간 동안 죽은 아들을 그리워한 할아버지와 많은 추억을 쌓은 개를 그리워하는 초등학생 소녀의 짧은 우정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면, 영화관에 방문해 볼 것.
1. 반칙이 난무한 등장인물
내가 아는 지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영화를 만들 때, 반칙했다고 평가받는 부분 게 뭔지 알아요? 아이와 개를 등장시키는 거예요. 웬만하면, 아이와 개는 흐뭇하게 바라보게 되거든요."
영화 내용이 루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야카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반칙이 난무하고 있지만 그 반칙 덕분에 사야카와 루의 관계성을 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고, 뭔가 세상에 믿을 만한 있을 지도 모른다고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을 갖게 한다. 진짜 사야카 본체와 사야카의 대사들이 너무 귀엽다.
"후세 상도 기다리고 있는 게 있나요?"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하거나 "소중한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라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주장할 때는, 애늙은이 같다가도 엄마, 아빠가 어디 갔다 왔냐는 질문에 (후세씨와) 데이트를 하고 왔다는 발칙한 답변을 하는 사야카의 모습이 어른인 척 하는 아이 같아서 귀여움이 배가 되었다.
그리고 사야카가 말을 걸 때마다 루 역할을 한 개는 표정으로 참 많은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어디서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 개를 찾아왔는지 영화를 보면서 그 점이 신기했다. 개도 연기 연습을 시키는 건가 싶을 정도로.
2. 독특한 카메라워크에서 느낄 수 있는 관찰자적 시선
카메라워크가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이 몇 군데 있었다. 비단 비행기가 지나가는 장면을 간단하게 찍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아래에다 배치함으로써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사야카의 뒷모습을 찍어 관객인 우리가 관찰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게 하였다. 또한, 사야카와 루가 벽으로 가로막힌 새로운 초원에 진입하기 전에 개구멍을 통과할 때, 개구멍 옆에 있는 공간에다 카메라를 넣어놓아 사야카가 불평을 하며, 개구멍을 힘겹게 들어가는 과정을 우리가 관찰하듯이 바라볼 수 있다는 점도 독특하게 찍어냈네 생각했던 점이었다. 사야카와 루가 행복하게 놀던 시간을 위에서 관망하듯이 찍어놓은 것도 관객들이 사야카를 관찰하듯이 바라보기를 감독이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하는 뇌피셜도 해본다.
사야카의 소중한 존재를 잃은 상실감을 그저 관망하듯이 바라보게 한 이유에 대해서 뇌피셜을 해본다면,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에 신도 우리를 그저 관망하면서 잃어버린 존재를 그리워하며, 고통에 잠겨 있는 우리들을 그저 응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이 신이 전지전능하기에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지만 정작 신은 우리를 관찰하며, 우리가 알아서 극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했다. 써놓고 보니, 그저 망상같긴 하지만 말이다.
3.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 기차역
어린이 사야카에게 기차역이라는 공간은 많은 의미를 담은 곳일 것이다. 애정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거나 다시 만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인 만큼 사야카와 후세 할아버지는 그 곳에서 자신의 그리움이 투영된 존재들을 만난다.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길을 간 사람들을 다시 만난 사야카의 경험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기차역이란 결국 몸은 멀리 떠나갔지만 주변인들의 기억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해 저승을 가지 못한 령들이 살아있는 이들의 기억으로 인해 매여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사야카가 후세 할아버지와 갔던 여행에서 루 뿐만 아니라 후세 할아버지의 오래전 죽은 아들까지 보였던 것을 보면, 후세 할아버지도 오래 전에 아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해 그 아들의 혼이 기차역에서 머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기차역은 죽은 이들을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해 마음 편히 떠날 수 없었던 혼령들이 집합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야카가 후세 할아버지의 아들과 루를 모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차역은 사람을 만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떠나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사야카가 루를 놓아주지 못하고, 후세 할아버지 또한, 아들을 놓아주지 못한 결과로 사야카와 후세 할아버지 모두 여행의 목적을 이뤄냈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최종 결정을 해야할 날이 올것이다. 헤어짐의 무게를 감당해야만 하는 날, 그 날 말이다.
총평
영화가 전체적으로 루즈한 면이 없지 않지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고 느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산자의 시간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영화였다. 많은 것을 공유하던 내 사람이 없어진 세상은 이처럼 공허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공허함을 떨쳐내려면, 내 마음 속의 기차역에서 그들을 언젠가는 보내주어야 산 자가 살아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남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죽은 자를 실컷 그리워하다가 언젠가는 툭툭 털고 일어나라고 말이다. 일본 영화만의 감성을 좋아하시거나 잔잔한 분위기에서 훈훈한 메시지를 가진 영화 보고 싶은 분들이 보시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이 훈훈하다고만 하기에는 중심이 되는 메시지가 죽음을 다루고 있는 만큼 킬링 타임으로 가볍게 보고 지나갈 정도의 훈훈함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면 좋을 것 같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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