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7-10 20:34:02
[BIFAN 데일리] 유예된 항해의 빛
영화 <열화청춘 감독판>
감독] 담가명Patrick TAM
출연] 장국영Leslie CHEUNG, 하문석Pat HA, 엽동Cecilia YIP, 탕진업Kent TONG
프로그램 노트] 홍콩의 영화평론가 스티븐 테오는 <명검>(1980)으로 데뷔한 담가명의 작품들을 두고 “홍콩 뉴웨이브 작가들 중 가장 덜 언급된 인물이지만, 서극이나 허안화 등과 비교해 가장 ‘성숙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 말했다. 더불어 “그는 동료 감독들에 비해 가장 세련되고 모던한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도 덧붙였다. 담가명의 색깔이 가장 짙게 담겼다고 할 수 있는 <열화청춘>(1982)은 ‘왕가위의 <아비정전>의 전편’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우리가 기억하는 장국영의 상처받은 청춘의 이미지를 앞서 보여준 영화다. ‘장국영 비긴즈’라고 불러도 될 이 영화에서 그는 ‘노마드’라는 요트를 타고 언제나 먼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는,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을 섬세하게 연기하고 있다. 또 하나, 당시 담가명 감독의 영화가 동료 뉴웨이브 감독들의 영화와 비교해 가장 남다른 점이 바로 탁월한 프로덕션 디자인이었는데, <열화청춘> 등 여러 작품을 함께한 장숙평 미술감독은 그가 직접 발굴한 인재나 다름없다. 1980년대 모던 홍콩 영화의 진면목이 <열화청춘>에 담겼다. (주성철)

*영화 <열화청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콩의 여름은 덥고 습하다
영화는 덥고 습한 홍콩의 한 대금업자 집에서 시작한다. 대금업자를 찾아와 통 사정을 하는 빚쟁이에게 밉지 않게 퉁을 놓으면서도, 대금업자는 정작 ‘실무자’에게 모두 중국인이니 살살 하라고 하지 않았냐며 꾸짖는다. 우리 모두 중국인, 하다 못해 이 물건도 중국 물건… 이런 대사들은 홍콩 영화라서 의미심장하다.
같은 홍콩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저택도 있다. 호젓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있는 집. 그가 결혼을 통해 이 집에 들어오기 전의 집 주인이었을 여성, 그러니까 앳된 얼굴의 장국영이 연기하는 루이의 어머니는 라디오 DJ였다. 루이는 그 시절의 소리를 녹음해 자꾸만 듣고 있다. 소리를 죽여 놓은 텔레비전 위로, 라디오에서 베토벤 교향곡이 흘러나온다. 더없이 동양적인 풍경 위로.
“동서양이 뒤섞인” 매력은 홍콩에 대한 교과서적인 표현이지만, 그 덥고 습한 여름은 단순히 동서양의 조화 뭐 그런 말로만 두루뭉술 담기지 않는다. 이 여름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그냥 홍콩만의 무드다. 비록 이 영화 속 청춘들은 쇼핑과 보석에 대한 구문을 익히며 일본어 회화를 열심히 배우고, 가부키 춤이나 액자 속 일본 가면 같은 문화를 즐기지만, 이들이 다른 장면에서 보여주는 홍콩 무드에 비하면 그 어설픈 흉내들은 어쩐지 조금 우스워 보인다. 홍콩만의 무드는 지켜져야 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신스케를 대하는 아퐁의 입을 빌려 왜색에 일갈을 던지기도 한다.
이렇게 일본 문화에 매력을 느끼는 순간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뒤섞이는 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홍콩 무드가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진짜로 홍콩 무드가 더 좋아서 그렇다. 일본의 여름도 덥고 습하지만, 일본 영화나 만화 속 모습은 언제나 맑고 청량한 연둣빛이라 좀 거짓말 같은 데 비해 홍콩의 여름은 벽면의 곰팡이까지 사실적이다. 강렬한 색감, 거기 놓인 물건들, 홍콩을 담은 여름 장면들이야말로 진짜 여름 같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면면들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왜 그 시절의 홍콩 영화는 이토록 매혹적인가?

#떠나기 전에 가장 빛난다
이 영화는 감각적이다. 당연하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홍콩 영화 대다수를 맡은 미술감독 장숙평의 손이 닿았다. 왕가위에 비해 덜 알려진 이름이지만, 담가명은 홍콩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왕가위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왕가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담가명 영화는 아주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장국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장국영인데. 아직도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얼굴의 앳되고 싱그러운 시절에, 그에게 유독 잘 받는 '유약하고 고독한 부자 청년' 역할이다. 소품과 옷의 색감들도 하나 같이 예뻐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음악과 여름, 젊음과 색깔이 사방천지에서 튀어나온다. 팍팍한 오늘날의 세상에서 보면 그것은 얼핏 여유로 비친다. 오늘날의 우리가 옛 홍콩 영화를 사랑하는 데에는 그 감각도 한 몫 할 것이다. 세상이 당장 끝난다 해도 오늘은 여름을 즐기겠다는 듯이, 마치 이 여름이 영원할 것처럼 향유하는 감각. 현실감은 조금 없어도 좋다. 실제로 토마토의 낡은 여행가방에는 화려하고 나풀나풀한 옷가지 몇과 조악한 봉제인형 정도만 들어있지만, 고작 그 정도 물건만 끌어안고도 토마토는 딱히 살아갈 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 본다. 왜 여름과 청춘이 유독 옛 홍콩에서 빛날까? 그 세 단어 모두 시한부의 감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 <열화청춘>의 ‘청춘’들은 흘러 넘치는 정염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버스 안에서도 참지 못할 만큼 서로를 향한 사랑에 목이 마르지만, 부나방처럼 서로를 향해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만, 그럴수록 스크린 밖에서는 유한을 실감할 뿐이다. 사실 그들의 사랑은 이미 가족과 이웃의 방문으로 계속 호흡이 끊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쥐어 보려는 노력.
1994년작 <중경삼림>을 필두로 한 왕가위의 영화들이 1997년의 홍콩 반환을 목전에 둔 시점의 스산하고 각자 외로우며 알 수 없는 감각들로 붕 뜬 마음을 보이고 있다면, 1982년작 <열화청춘>은 그와 다른 결의 묘한 불안, 유한하기에 더욱 빛나는 순간의 감각들을 담고 있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 전, 그러니까 1970년대의 홍콩이 그랬으니까. 1990년대와는 다른 결의 묘한 불안이 깔려 있던 시기였다. 1971년, 중국의 UN 가입은 중국이 ‘중국’임을 인정받는 순간, 그러니까 대만의 ‘주권’을 밀어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99년의 할양 기간을 마치면 홍콩은 반드시 중국에게 반환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1970년대 홍콩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다시 요동쳤다.
1970년대가 가고 이 영화가 개봉하는 1982년은 마거릿 대처가 중국을 찾아 홍콩을 테이블에 올린, 그러나 아무 성과가 없이 결렬된 회담이 있던 해이기도 하다. 끝이라는 감각은 서서히 가까워 오는데, 아직 그 감각이 목을 턱 조이기까지는 한참 남아있을 때. 그렇다고 존재가 소진되지 않겠지만, '끝'의 이후에는 결코 지금 같지 않을 거란 예감을 목도할 때. 오후 4시 쯤의 햇살을 움켜쥐어 밤을 막아 보고 싶은 마음 같은, 그런 정염이 이 영화에 있다.

#항해는 유예된다, 그러나
루이의 방은 어쩐지 바다 같고 배 같다. 벽도, 이불도, 침대 옆의 등과 그 옆의 연필까지도 모두 짙은 푸른색이다. 심지어 루이가 잠시 냄새를 탐닉하겠다고 가져온 기름 통마저도. 텔레비전 위에는 배 모형이 놓여 있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나갈 것만 같은 무드의 방이다. 급기야 루이가 보트를 푸른색 페인트로 칠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정작 영화에 나오는 배 ‘노마드’ 호에는 어쩐지 ‘배’의 감각, 그 운동성과 생기가 없다. 분명 바다에 나가 있고, 정박하고 있던 배를 바다에 풀어놓은 것이건만, 루이의 방만큼도 운동성이 없다. 루이는 이 배를 타고 아라비아에 가고 싶다고 하지만, 여기서 아라비아라는 말은 과연 유토피아, 발할라, 샹그릴라와 얼마나 다른 이름일까 싶다. 이상향은 이상향일 뿐, 항해는 유예된 채였다. 유예된 항해는 성공할 수 없다. 배의 여정은 목적지에 다다를 때야 완성되므로.
청춘들이 노마드 호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한때 사랑했던 인연을 숨겨 보는 정도다. 이를 계기로 떠날 궁리도 해보지만, 항해가 유예된 동안 이미 가까워진 존재가 있다. 불시에 도적처럼 덮쳐온 자객의 존재. 극과 극은 통한다고, 난징 대학살을 벌인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과 역사적으로 척을 지고 있음에도,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중국과 아주 다른 모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는 아름다운 장면이 참 많았지만, 가장 꿈처럼 보였던 장면은 마지막으로 식탁을 같이 차리는 네 사람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 같”다는 말에, “사회가 뭔데?” 거칠게 되물으며 우리가 사회라고 대답하고, 바로 이어 네 사람이 같이 식탁을 차린다. 그 모습은 정말 ‘사회’ 같다. 누가 누구에게 군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누어 각각의 할 일을 하며 그 결과를 함께 누리는.
어쩌면 이들이 ‘아라비아’에서 차리고 싶었던 식탁, 거기서 이루고 싶은 사회도 이런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살아남은 루이와 토마토가 이런 식탁을 차릴 수 있을까. 요원해 보여 더 꿈처럼 느껴지는 이 장면을, 언젠가 미래의 다른 영화에서 기시감으로 느끼고 싶다.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상영시간표
7월 2일 11:00-12:33 메가박스 부천스타필드시티 5관 (상영코드 412)
7월 5일 20:00-21:33 부천시청 판타스틱큐브 (상영코드 111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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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2주차 신작 개봉 영화
2022년 4월 2주 개봉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Fantastic Beasts: The Secrets of Dumbledore , 2022
덤블도어의 충격적 비밀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는 머글과의 전쟁을 선포한 그린델왈드와 덤블도어 군대의 대결 속 가장 거대하고 위험한, 세상을 구할 마법 전쟁을 그리는데요
‘신비한 동물사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 이어 J.K. 롤링이 각본을 썼습니다.
중국, 영국, 뉴욕, 독일, 오스트리아 알프스, 부탄 등을 배경으로 그린델왈드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덤블도어 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본격적인 그린델왈드와의 대결을 마법들과 함께 펼쳐집니다.
또한 호그와트 마법학교, 호그스미스 마을이나 마법 주문 등 ‘해리포터’ 시리즈 팬들이라면 반가울 장면이 곳곳에 등장해 재미를 더 해줄것입니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과거에 얽힌 충격적인 비밀이 마침내 밝혀지는
첫번째 추천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입니다.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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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임씨를 부탁해 Take Care of My Mom , 2021
한국영화 실력파들이 함께한 휴먼 가족 드라마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는 효자 코스프레하는 아들과 가족 코스프레하는 요양보호사 사이에 낀 85세 정말임 여사의 선택을 그린 휴먼 가족 드라마입니다.
대한민국 현역 최고령 여성 배우 김영옥의 65년 연기 인생 첫 주연작으로 영화에서 정말임 역을 맡아
연기 내공으로 현실 속에 엄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는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국 전통의 전통적인 부모자식 관계에서 더욱 공감할 수 있는 사실적인 정서를 전하는데요
효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고통스러워하며 다소 어긋나버리고 마는 아들,
그리고 그런 아들을 감싸는 어머니의 모습은 결코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 K-엄마를 비롯해 K-아들, K-모자, K-가족에 이르기까지 공감 100%의 캐릭터들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두번째 추천영화 "말임씨를 부탁해" 입니다.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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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식당 Awoke , 2021
사회곳곳 제도의 모순 덩어리를 파헤친다
영화 "복지식당"은 사회곳곳 제도의 모순으로 생(生)의 사(死)각지대에 놓여 인권과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장애인 감독의 자기체험과 비장애인 감독의 객관적 시선이 어우러져 빚어낸 진정성과 꾸밈없이 현실을 반영해 만들어낸 리얼리티 휴먼 드라마로
비장애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의 진짜 삶 속으로 관객들을 초대하며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문제적 질문을 던지는데요
몸의 장애가 삶의 장애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후천적 장애인 ‘재기’의 모습을 통해 장애인 제도의 실태와 현안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장애인 그리고 비장애인 감독의 공동연출이 빚은 투박한 진심의 하모니!
세번째 추천영화 "말임씨를 부탁해" 입니다.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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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길 잘했어 The Slug , 2020
최진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는 최진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손에 땀 마를 날 없는 ‘다한증’ 때문에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전부가 되어버린 ‘춘희’가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랑스러운 성장담을 그린 영화입니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을 시작으로, 서울독립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광주여성영화제, 대구여성영화제, 전북여성인권영화제, 서울구로국제영화제 등
국내 주요 영화제에 초청받았으며,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판타지아영화제 초청 및 오사카아시안영화제에서는 재능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한강에게' 강진아부터 '지슬' 홍상표, '족구왕' 황미영까지!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 총출동해 기대를 더 하고 있습니다.
전주 출신 감독이자, 전주를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최진영 감독의 첫 장편!
네번째 추천영화 "태어날길 잘했어" 입니다.예고편 보기
클릭------------------------------------------------------------------------------------------------------------------------------------------------
파일럿: 배틀 포 서바이벌 The Pilot. A Battle for Survival , 2021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을 리얼하게
영화 "파일럿: 배틀 포 서바이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외딴 숲에 불시착하며 생존을 위해 처절한 사투를 시작한 파일럿 니콜라이의 생존기를 그립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를 상대로 펼쳐진 전투의 현장을 리얼하게 재현하며
파일럿의 실화 바탕 생존 사투극을 그려냈는데요
적진을 뚫고 전쟁터로 향하는 파일럿인 주인공의 모습은 강인한 면모와 리더십이 느껴지는 한편,
매서운 추위와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내 실제 치열한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하는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달할 것입니다.
세계대전 당시 리얼한 현장을 담아낸
다섯번째 추천영화 "파이럿: 배틀 포 서바이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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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복수를 위한 한 어린 칼춤
김은숙 작가님의 드라마가 다시 돌아왔다. 신데렐라가 아니라 블랙 위도우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사실 소재에 이끌려 작가님의 전작을 보긴 했지만 지루함에 이탈했었는데 이번 드라마는 왠걸 한 순간의 정지 없이 봤다. 그만큼 흡인력 있었다는 얘기다
김은숙 작가님의 강점 중 하나를 꼽는다면 다양한 세상에서 살 법한 신데렐라를 그려 여자들의 환상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배경과 인물만 달라질 뿐 비슷한 스토리 포맷은 지루함을 낳는다. 전작 '더 킹: 영원의 군주'가 그 지루함의 한계에 도달했던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작가님은 돌파구가 필요했던 시점에 제대로 한 방을 선사해 주셨다. 아직까지 작가님의 작품 중 인생 드라마는 '미스터 션샤인'이지만 이 작품도 못지 않은 멋있는 작품이다.
1.신데렐라 스토리에서 한 단계 발전한
주인공 동은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 고데기로 지져진 그녀의 몸이 폭력의 증거였기에 동은은 자신의 몸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자신을 괴롭혔던 범인들을 처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손쉬운 방법들을 포기하고 동은은 돌고 돌아 18년을 기다린다.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폐부를 찌르기 위해서.
이번 드라마는 로맨스가 뒤로 빠져 있는 복수극이다. 로맨스보다는 복수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어 기승전 '왕자님의 도움으로 동은이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전개가 아니다.
작가님의 시그니처인 왕자가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이전과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동은에게 왕자와 같은 주여정은 동은에게 관심이 있지만 '칼춤 추는 망나니'가 필요한 동은을 위해 망나니가 되기로 한다. 이번 드라마 에서는 왕자가 주인공에게 조력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따라서 왕자가 주인공의 삶에 등장해 로맨스를 강제 주입시키지는 않는다.
2. 남자 캐릭터들의 매력 대결이 예고된 다음 시즌
다음 시즌에도 동은의 왕따 주동자 박연진의 파멸은 자명해 보인다. 더 비참해질 것이다. 하지만 다음 시즌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캐릭터가 있다면 하도영이다. 하도영은 동은의 조력자인지 악인인지 스탠스가 명확하지 않다. 동은을 보호할 만한 모습이 드러나긴 했지만 동은을 공격할 만한 요소도 갖춘 양면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정의 감춰진 폭력성이 다음 시즌의 드러날 것으로 예고되어 그 폭력성이 동은을 위해 쓰여지긴 할지. 쓰여진다면 어떻게 발현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만큼
다음 시즌은 동은의 이야기에 가려져 소극적으로 보였던 남자 캐릭터들이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남자 캐릭터들을 매력적으로 그리는 것은 작가님의 주무기이기에 기대가 된다.
하지만 이들의 매력 대결이 동은의 복수의 의미가 퇴색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았으면 좋겠다.
3. 남성상의 변화
확실히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남성상이 바뀌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결혼의 현실을 겪어내면 '동화 속 왕자는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어도 여전히 내 남자에게서 끝까지 나를 보호해주는 왕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우울을 느끼는 기성 세대 분들을 꽤나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확실히 세대가 바뀌며 왕자는 환상의 결합체임을 인지하고 조금은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왕자가 등장해야 한다면 나를 보호하고 간지럽게 사랑해주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캐릭터들이 각광받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랑의 표현 방식이 폭력, 살인이더라도 상관없다. 결국 여자 캐릭터의 삶의 방향을 제멋대로 바꾸지 않는 '최소한의 매너'를 보이는 캐릭터라면 환호를 받는다.
이런 남성 캐릭터의 다각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매너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생각도 좋지만 어떤 일을 하지 않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매너의 한 부분임을 상기시키며.
사설이 길었다. 하여간 사이다 전개의 통쾌함, 다음 시즌을 향해 기대감 혹은 긴장감 등 꽤나 다채로운 매력이 많은 드라마인 만큼 한 번쯤 볼만하다. 바둑이 등장하는 점도 매력적인데 바둑이 침묵 속 치열한 암투를 보여주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한 명의 전사와 같은 동은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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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러 '지알로' 장르 3대 거장 영화
이탈리아어로 노란색을 뜻하는 ‘지알로’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스릴러와 미스테리물 같은 장르 소설을
부르는 은어였는데, 당시 출판한 장르 소설들의 표지가 주로 노란색 계통의 색이 많아서였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지알로는 여타 호러영화와 차별점을 두고 있는데요 잔혹함과 예술성이 짙은, B급 스토리, 엉성한 더빙의 이탈리아 호러영화가 지알로 무비를 뜻합니다.
지알로 영화는 전반적으로 개연성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영상미와, 음악, 고어연출기법이 빼어나
상당한 골수팬들을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팀 버튼 감독은 지알로 장르를 탄생시킨 ‘마리오 바바’감독을 가장 진실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했고,
박찬욱 감독 또한 본인의 저서에 ‘마리오 바바’ 감독의 <블랙 선데이>를 걸작이라 극찬,
쿠엔틴 타란티노는 ‘루시오 풀치’의 오랜 팬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영화사를 통해 <비욘드>를
재개봉시키기도 했습니다.
한국 호러 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알로 장르’ 3대 거장 ‘마리오 바바’ ‘루시오 폴치’ ‘
다리오 아르젠토’의 대표작들을 가져왔습니다. 이번 여름은 지알로 무비 어떠세요?
마리오 바바 Mario Bava
<사탄의 가면> La maschera del demonio
19세기에 한 젊은 의사가 유령이 출몰하는 몰다브의 한 마을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카티야 바이다라는 여상속인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녀는 마녀로 처형당했던 조상 아사 바이다의 혼령에 사로잡혀 있다.
<킬... 베이비 킬!> Operazione paura
경찰에 자신의 살인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어떤 여자가 죽자,
검시의인 에스웨이 박사와 크루거 경위가 마을에 파견된다. 에스웨이 박사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연속살인의 범인이 20여년전에 죽은 그랍스 남작부인의 딸 멜리사의 유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을에 돌아온 의대생 모니카가 다음 표적이 되자, 그는 동네 마녀 루트와 함께
그랍스 부인의 저택으로 뛰어드는데..
<피와 검은 레이스> Blood And Black Lace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살인마가 패션 모델들을 죽이고 다닌다.
루시오 풀치 Lucio Fulci
<좀비 2> Zombi 2
표류되어 뉴욕 앞 바다까지 들어온 보트에서 좀비가 발견되자 이를 조사하러 행방된 아버지를 찾는 딸과 신문 기자가 함께 섬으로 떠난다. 그곳에는 섬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 좀비가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먹으려 달려들고, 먹힌 사람들은 곧 좀비가 되어버린다. 이 기이한 일들은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 그저 부두교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하는데, 이미 온 세상은 좀비로 가득차게 된다.
<시티 오브 더 리빙 데드> Paura Nella Citta Dei Morti Vivent
뉴욕의 한 아파트.메리는 영매술사들과의 모임에서 의식을 잃는다.의식을 잃는 중에 죽음을 체험하게 되는 메리. 그 죽음 속에서 던위치라는 저주 받은 도시에서 모든 성인의 날 자정, 지옥문이 열려 목을 메고 죽은 신부가 악령으로 되살아 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무덤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메리는 기자인 피터와 함께 신부가 자살한 던위치 마을을 찾는다. 그러나 이미 악마로 부활한 신부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데…
<비욘드> ...E tu vivrai nel terrore! L'aldilà
1927년 루이지아나. 어느 마을의 외딴 호텔에 투숙한 사람들이 차례차례 실종된 사건이 있은 후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호텔에 투숙한 화가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사지를 못박아 벽에 발라버린다. 그에 따르면, 4000년 동안 대를 거쳐 물려진 에이번이라는 책을 통해 이 호텔이 7개의 지옥으로 통하는 문 위에 세워졌다는 것. 그후 세월이 흐른 1981년. 폐쇄된 이 호텔의 상속자인 라이자가 그곳에 호텔을 다시 짓는데, 공사장 인부들의 의문의 죽음이 잇달아 일어난다. 이 호텔이 저주받은 지옥의 땅 위에 지어진 것이ㅊ라는것을 알게 된 라이자에게도 죽음의 악령이 다가오는데.
다리오 아르젠토 Dario Argento
<수정 깃털의 새> The Bird with the Crystal Plumage
로마에 사는 미국인 작가 샘은 우연히 비옷을 입고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남자가 화랑 주인 의 아내를 살해하려는 광경을 목격하지만 결국 그녀를 돕지 못한다. 다행히도 이 여자는 살아남아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의 희생자들 가운데 최초의 생존자가 된다. 사건 해결에 진전이 없자, 샘은 혼자 힘으로 용의자에 관해 조사하며 범인을 잡아보려 하는데...
<서스페리아> Suspiria
독일의 유명한 발레 학교로 유학 온 미국인 소녀 수지는 도착 첫날 밤, 겁에 질려 학교에서 도망쳐나오는 학생을 목격하고, 이튿날 아침 도망치던 학생과 다른 여학생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수지는 발레 학교에 적응하려고 애쓰지만 이상한 선생과 학생들, 밤에 기숙사에 울려퍼지는 기이한 소리들 때문에 힘들다. 그 지방 전설로 내려오는 마녀 이야기와 살인 사건이 관련있으리라 추측하던 수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흑마술의 표적이 되는데…
<딥 레드> deep red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낼 줄 아는 한 영매가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살인자의 생각을 읽어낸다. 그러나 영매는 곧 살해되고 만다. 영국인 재즈 피아니스트 마크 데일리(데이빗 헤밍스)는 그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신문기자 자나 브레지(다리아 니콜로디)와 함께 사건의 비밀을 캐기 시작한다. 새로운 살인자들로부터 사건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얻어나가는 동안에도 사건의 열쇠를 쥔 사람들이 한 명씩 살해당한다. 살인자가 그 실마리에 따라 새로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마커스는 살인자가 자기 주위에 있음을 느끼고 주변을 조사해 나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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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 어퍼컷을 날리다
제목과 브래드 피트만으로 영화를 접근했던 나에게 약간의 칭찬을 주고 싶다. 1999년 당시 젊은 브래드 피트의 연기 모습과 삶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이고 자칫 무식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배경 속 반전 결말과 함께 철학적이고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 더러 있는 영화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파이트 클럽> 네이버 스틸컷
파이트(Fight)
제목 그대로 <파이트 클럽>은 싸움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다. 스트레스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원초적인 수단으로 등장하는 파이트 클럽은 마치 우리가 UFC 경기를 보는 것처럼 폭력에 환호성 하고 희열을 느낀다. 사회에 반항하는 듯한 작은 규모의 파이트 클럽이 점차 미국 전역으로 성장 및 확대해가는 흐름을 볼 때 얼마나 반사회적인 감정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는지,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조금은 씁쓸한 영화 흐름이다. 파이트(Fight)라는 의미가 영화에서 단순히 사람과 사람 간의 주먹다짐만이 아닌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삶을 파이트(Fight)한다고 생각해도 된다. 그들이 이용하는 파이트 클럽은 바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새로운 힐링 모임이자 위로의 공간이 된다.
이후 영화는 파이트(Fight)의 영역을 키워나간다. 작은 주먹다짐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던 모임에서 전국적으로 활성화된 테러 조직으로 변질되어 사회에 저항한다. 인간이 가진 내재된 사회적 분노를 보여주는 것이 마치 테일러 더든이 <다크 나이트> 조커가 생각나게 한다. 이런 영화 흐름은 결말에도 영향을 끼친다. 테일러 더든이 신용 회사들의 폭파를 막기 위해 헐레벌떡 근처 빌딩으로 달려왔지만, 이후 폭파는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반사회적 요소가 들어간 영화에 어울리는 결말일 수도 있고,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라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영화 흐름과도 잘 맞는 결말 같다.
연출
<파이트 클럽>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에게 영화 촬영과 편집을 맡아준 거 같은 깨알 재미를 보여준다. 테일러 더든을 설명하는 배우 에드워드 노튼의 내레이션 장면부터 중간중간 테일러 더든이 영화 릴을 교체한 것처럼 등장하는 빠른 포르노 사진의 등장은 영화가 그 자체가 테일러 더든을 위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폭력 요소가 많은 영화라서 전체적인 톤이 어두워 보이는 촬영은 <파이트 클럽>과 어울리는 미장센을 뽐낸다. 그러나 암울한 색감이 드는 배경과 달리 빨강 가죽재킷이나 화려한 색상의 셔츠를 즐겨 입는 테일러 더든을 보면 그가 상상 속 인물이었다는 반전 결말에 납득이 가는 의상들이다. 이러한 연출을 볼 때,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엄청난 센스가 보이는 연출이다.
인생
당신에게 양자택일이 주어졌다. 안정적인 삶과 도전적인 삶.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파이트 클럽> 속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과감하다. 삶의 감사함을 얻기 위해선 죽음의 문턱 혹은 눈 앞에 다가온 위기를 지나야지 비로소 진정한 삶의 희망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것이 좋은 인생이고 올바른 인생이라는 답은 없다. "자기 계발은 자위행위일 뿐이야"라는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의 말도 이해가 간다. 한번뿐인 인생을 자기 계발로만 연연하기에는 허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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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오브 인터레스트: 사운드가 쌓아 올린 공포의 몽타주
존 오브 인터레스트: 사운드가 쌓아 올린 공포의 몽타주
( 위 이미지는 네이버 영화에서 제공한 공식 스틸컷입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2024)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지만, 전형적인 홀로코스트 영화가 아니다.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수용소 내부의 참상이 아니라, 담장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한
한 가족의 일상이다. 그러나 영화는 시각적인 정보만으로 이 가해자의 삶을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운드가 화면 위로 쌓이며 '수직 몽타주'를 통해 전율을 만들어낸다.
사운드의 대위법, 두 개의 세계를 가르는 수직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이 제시한 수직 몽타주 (Vertical Montage)는 영상과 소리가 단순한
동기화가 아니라, 각자의 리듬을 가지면서 충돌하거나 병치되는 방식이다. 그는
사운드를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독립적인 층위로 작동시키며 의미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글레이저는 수직 몽타주의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한다.
화면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정원을
가꾸고,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며, 아내는 수영을 즐긴다. 그러나 사운드는 이 평온한
풍경을 허락하지 않는다.
① 가시화되지 않는 공포: 들려오는 참상의 소리
관객이 듣는 것은 울타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처형 소리, 기차의 기적 소리,
희미한 비명과 절규이다. 하지만 인물들은 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수용소의 기계음과 끊임없이 타오르는 화염은 영화 내내 들리지만,
이 소리는 이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사운드의 병치는 시각적으로는 평온한 장면을 유지하면서도,
관객이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공포를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② 음향적 충돌: 대립하는 리듬과 감정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 중 '대위법적 사운드 몽타주'는 영상과 사운드가
조화되지 않고 충돌할 때 감정을 배가한다고 본다. 글레이저의 연출은 이러한 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잔디 위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가벼운 대화 뒤로
불길과 비명이 어우러진다. 이러한 음향적 몽타주는,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고 있는
장면과 청각적으로 경험하는 장면이 충돌하며 형성되는 불협화음 속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미니멀리즘적 이미지와 음향의 폭력성
이 영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공포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학살의 현장을 직접 담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형태로 우리를 압도한다. 시각적으로는 단순한 인물의 움직임, 가정집의 평범한
풍경이 담기지만, 청각적으로는 아우슈비츠의 거대한 산업적 학살이 무겁게 다가온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마치 우리가 장 폴 사르트르의 "지옥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명제를 변형해 "지옥은 타인의 귀를 통해 들려온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시각적 충격이 아닌 음향적 공포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환기한다.
정리하자면 조너선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사운드를 단순한 보조적 요소가 아니라,
의미를 창조하는 몽타주의 핵심 축으로 삼았다. 에이젠슈테인의 수직 몽타주 기법을 통해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의 간극을 통해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전쟁영화, 홀로코스트 영화처럼 강제 수용소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참상 속에서도 일상을 지속하는 가해자의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운드를 통해 구축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폭력을 내면화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듣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스크린이
아니라 관객의 청각 속에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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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을 수 없는 평범한 여행
일상을 살다 보면 문득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여행을 떠올릴 때가 있다. 수많은 여행 중에서도 그 여행의 공기와 분위기를 세세하게 떠올릴 수 있는 그 여행은 마음속 깊이 남아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때 겪었던 즐거운 기억과 부모와 다퉜던 기억까지도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 당시 부모의 나이가 된 자식의 입장에서 그 여행은 지금의 내 위치에서 그 당시 부모의 어려움과 감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추억이기도 하다.
사실 어린 시절, 특히 사춘기 시절에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것을 부모에게 바라지만 부모는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없다. 금전적인 문제도 있고, 그 당시의 상황이 그것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부모는 자신의 아이에게 좋은 것을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딘가로 같이 여행을 가는 것은 자신들의 휴양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아니 부모와 자식 모두가 같이 기억할 수 있을 만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비싼 여행비를 들여가면서 여행을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여행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식들은 그때 부모의 마음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된다.
아빠와 딸의 평범한 튀르키예 여행을 따라가는 이야기
영화 <애프터썬>은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의 소피(실리아 롤슨 홀)는 이미 성인이 된 상태고 아이도 있다. 그가 과거 아빠의 캠코더에 녹화된 여행 영상을 보며 떠올리는 과거의 모습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영화 속 캘럼과 아내는 이미 이혼한 상태이고, 캘럼은 딸 소피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아빠 캘럼은 튀르키예의 한 호텔에 예약을 하고 딸과 휴가를 보내면서 시간을 보내려 한다.
캘럼이 예약한 호텔은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는 캘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호텔로 예약했고, 여행 내내 소피에게 미안해한다. 이제 막 사춘기가 된 소피는 그런 아빠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그런 아빠와 잘 지내려고 한다. 소피의 눈에는 주변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언니와 오빠들의 행동들에 관심이 더 가게 되고 그런 호기심이 자꾸만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쁜 짓은 아니고 여행의 일반적인 루틴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다.
수영을 하고, 선탠을 하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아주 일반적인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의 여행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이국적인 튀르키예의 풍광과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옆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빠와 소피가 영화가 담는 전부다. 때론 소피는 아빠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기분이 상한 아빠는 소피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이내 사과하지만 그만큼 그때의 아빠는 여유가 없어 보인다. 영화 후반부 침대에 앉아 펑펑 우는 캘럼의 뒷모습은 무척 공허하고 슬퍼 보인다.
어려움을 감추고 추억을 선사하려 노력하는 아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아주 행복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여행을 즐기는 모습은 꽤 보기 좋다. 서로의 모습을 캠코더에 담으면서 작은 농담을 주고받고 주변 여행지에 쇼핑을 다니면서 우스꽝스러운 스트레칭 동작을 같이 하기도 하는 두 사람은 여행지에서 만큼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특히나 영화 중반에 두 사람은 튀르키예 전통 무늬로 만들어진 카펫을 구경한다. 두 사람이 멍하니 같이 카펫을 보고 앉아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소피가 수영장에서 노는 사이에 캘럼은 혼자 카펫 가게를 찾아 한 카펫을 구입한다. 그 카펫을 자신이 가져갈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 선물할 것인지를 영화는 알려주지 않지만 영화 후반부에 비추는 성인 소피의 집에 깔려있는 카펫은 아빠가 구입한 그 카펫 무늬다. 그것이 실제로 아빠가 선물한 것이든 소피가 한참 뒤에 비슷한 무늬의 카펫을 산 것이든 그것이 아빠와의 여행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동영상 캠코터로 녹화된 그 당시의 영상을 보고 있는 성인 소피는 그 여행 즈음 아빠의 나이가 되었다. 조금은 지쳐 보이는 그 모습은 여행지에서 지쳐 보이는 아빠의 모습과 겹친다. 어린 소피가 아빠에게 ‘11살로 돌아간다면 뭘 하고 싶은지’ 묻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아빠 캘럼은 답을 하지 못한다. 그 당시 자신이 처한 현실은 11살로 돌아간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을 해주면서도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에게는 과거로 돌아가기보다는 지금 만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사춘기인 소피가 그 여행지에서 본 것들은 새로운 것들이다. 다른 커플들의 스킨십 장명에 특히 눈이 자주 가게 되는데, 그때 본 동성애 커플이나, 자신이 경험한 첫 키스 등은 평생에 걸쳐 성정체성과 행동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주 사소하게 스쳐 지나가지만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조금 적극적이고 과감한 장면들은 아빠와의 추억과는 별개로 소피의 기억에 남았다.
아련한 추억, 이제 여행 갔던 그때의 아빠 나이가 된 소피의 시선
소피의 11살 아빠와의 여행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소피는 과거의 영상을 보면서 그 당시 아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아빠가 최선을 다해 행복한 추억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는 아주 평범한 여행의 모습을 담는 것 같지만 그 여행은 소피가 자라면서, 또 성인이 되면서 계속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다. 영화는 어쩌면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순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한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샬롯 웰스 감독의 자전적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유년기 시절 빛바랜 사진같이 남아있는 기억들을 영화적으로 아름답게 담아 보여준다. 유년기에 받은 추억의 감정을 잘 살린 영화 <애프터썬>은 57회 전미 비평가 협회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39회 뮌헨 국제영화제에서 시네비전상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부모와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다. 또한 현재 아이를 키우고 있는 성인들이 과거 자신들이 부모와 갔던 여행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약간은 촌스럽고 투박해 보이는 화면을 보면서 관객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추억을 꺼내보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꽤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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