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서2023-05-07 01:07:30
<토리와 로키타/Tori et Lokita, 2023>
영화 <토리와 로키타>
다르덴 형제의 신작 <토리와 로키타>를 시사회를 통해 관람하고 왔습니다. 요새 씨네랩에서 좋은 영화들의 시사회를 많이 열더라고요. 덕분에서 좋은 작품들을 일찍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껏 탁월한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왔던 다르덴 형제인 만큼, 이번 <토리와 로키타>도 굉장히 훌륭한 영화입니다.
<토리와 로키타>는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애절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벨기에 체류증을 두고 벌어지는 남매의 모습을 담은 이 이야기는 내내 처절하다가 끝내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할 무력감을 선사하는데, 이제껏 희망과 성장을 이야기했던 다르덴 형제가 사회의 치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렇다고 일종의 해답을 내놓지 않는 다르덴 형제의 태도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법을 꿰뚫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바로 전작인 <소년 아메드>에서는 파죽지세로 달리는 듯하다가 갑작스레 희망을 보는 듯한 태도가 약간은 아쉬웠는데, <토리와 로키타>에서는 이 둘의 발자취를 담담하게 따라가는 카메라의 활용이 굉장히 탁월합니다. 그저 목격자의 역할을 하는 듯한 <토리와 로키타>의 카메라는 그들이 겪는 풍파를 옆에서 고스란히 바라보는 듯이 만듭니다. 마치 <아들>에서 보여주었던 카메라의 경이를 다시 목도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다르덴 형제는 <토리와 로키타>에서 이전의 작품과 달리 사회의 악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영화 내내 토리와 로키타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을 착취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들을 벨기에로 들여보내 준 브로커, 심지어는 그들의 엄마까지 토리와 로키타를 돕기는커녕 그들의 돈만 원할 뿐이죠. 이 둘은 결정적인 순간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이후 맞이하는 영화의 가장 아릿한 장면이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다르덴 형제는 이 영화를 통해 사회 곳곳에 만연한 무시와 단절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을 담담하지만 강하게 피력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가 데뷔작이기도 한 파블로 쉴스와 조엘리 음분두의 연기는 매우 생생하고 탁월하게 영화에 깃들여져 있어 이 감동적인 이야기에 생동감을 더합니다. 이외에도 종종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 모습을 비추었던 조연들도 좋은 연기로 작품을 탄탄하게 받쳐줍니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만큼이나 훌륭한 영화고, 매번 전작들 사이에서 다시금 변주해 흥미롭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5월 10일에 개봉하는데, 꼭 보셨으면 하는 작품 중 하나네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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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는 주인을 삼킬 수 없다.
승리한 사람의 시각으로 쓰이는 역사는, 언제나 승자 외엔 관심도 없는 것처럼 차가워 보일 때도 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 역시 그렇다.
승자는 손을 번쩍 들어 웃고 패자는 울며 다음을 기약하지만 가끔은 과연 승리란 것이 무엇인지. 패배란 것이 정말로 정치생명의 끝을 말하는지 아리송할 때도 있다.
마치 나의 답답함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에 선거 뒤엔 사람과 신념도 있다고 소리치는 영화가 있다. 빨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을 잡고 멀리 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려주려 하는 영화 [킹메이커]가 바로 그것이다.
각각 김운범과 서창대를 연기하는 설경구와 이선균을 앞세워 2022년 설날 극장가에서 왕좌의 자리에 앉을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을지. 영화 [킹메이커]가 주목받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너무 진지한 정치극은 아니다.;이토록 댄디한 영화라니.
정치 이야기는 건조하기 쉽다.
낯선 단어로, 복잡한 이야기로, 혹은 이야기만큼이나 무거운 분위기를 잔뜩 얹은 인물들의 등장으로 관객을 따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검은 양복 군단으로 점철된 영화로 빠지기 쉬운 작품을 [불한당]의 변성현 감독은 올드하지 않고 스타일리시 하게 잘 꾸며냈다. 덕분에 1960년대부터 시작하는 영화가 낡아빠졌다거나 너무 예전 이야기처럼 느껴져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출한 덕분에,
영화가 매우 오랜 시간을 거슬러올라 오고 있다는 피로감도 주지 않는다. 시대 배경에 따라 인물을 배치한 것이 아니기에, 인물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관객들에게 주는 셈이다.
영화의 큰 축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도전을 하는 김운범(설경구)과, 그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은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의 이야기가 이루고 있다. 또한 [이태원 클라쓰]의 유재명, [내부자들]의 조우진까지 합세해 그 어떤 곳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둥을 세워 영화를 지탱한다.
뻔하거나 예상 가능한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 모든 배우들의 연기 덕에, 그들이 만나고 부딪치고 합을 이루는 장면들에서 느껴지는 시너지는 이들이 여태 연기해왔던 기존의 작품들을 모두 잊게 하기 충분하다.
체스의 목적;두 사람의 앙상블이 이뤄내는 갈등의 묘미
서창대와 김운범 모두. 자신들이 임하고 있는 이 선거가 체스와 같은 게임임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목적은 승리로 같았으나, 그들의 신념은 정 반대였다.
창대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빠른 승리를 원했고, 운범은 자신의 군사를 지켜가며 정당한 승리를 원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왕은 운범 하나였고, 창대는 늘 자신이 원하는 것에서는 한 발짝씩 멀어진 채 구경해야 했다. 그 덕에 승리에 대한 갈망은 그가 지닌 아쉬움만큼이나 커져만 갔다. 마치 운범이 자신의 마음은 알아주지 않는, 혹은 모른체하는 것만 같아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범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창대가 없었다면. 그는 연거푸 승리한 선거의 끝에 있는 대통령 후보라는 자리에는 손조차 뻗을 수 없었을 테니. 단지 자신은 왕좌에 올랐을 때 부끄럽지 않은 승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부딪칠 수밖에 없는 두 인물을 영화는 조명과 의상으로 극명하게 드러낸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들의 옷이 흑백으로 나뉘는 것도.
운범의 그림자에 창대의 모습이 가리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창대가 어둠에서 등장하는 연출로 말이다.
이런 장면으로 영화는 간접적으로나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운범과 창대가 가진 사상은 절대 공존할 수 없음을.
그리고 그림자는 주체를 절대 삼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제갈량의 재림일까.;이선균의 재발견.
영화는 1960,7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전략가였던 엄창록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중앙정보부에서조차 엄창록의 선거전략을 보고했을 만큼 효과적인 선거 전략을 펼쳤던 인물이다.
마치 넷플릭스 시리즈인 [종이의 집]의 교수, 혹은 삼국지의 제갈량처럼 명쾌한 답과 지략으로 김운범의 선거를 승리로 이끈 서창대 역할을 이선균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게 재탄생시켰다.
이선균이 연기한 서창대는 지조의 높이만큼이나 야망을 쌓아 올리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의 입지와 인정에도 목마른 연약함도 내포하고 있다. 가진 능력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운범에 대한 존경도 가슴 한가득 품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마치면서
좋은 영화였다.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영화들이 많이 개봉하고 있는 것 같아 보는 내내 감정선을 따라가며 행복했다.
선거라는 것에 희생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주목받는 영화였기에 더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말 할 것도 없었고, 보여주는 모든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연출도 매우 행복했다.
안전하고 편안한 시간 속에서 감정 안에 풍덩 빠져 만끽할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영화였다.
[이 글의 TMI]
1. 그 와중에 커피 먹으면서 영화 보겠다고 기어코 커피를 사서 1분 전에 입장함.
2. 연기는 말해 뭐 하나.
3. 마음도 따뜻해지고 생각도 많아지는 영화였다.
#킹메이커 #설경구 #이선균 #유재명 #조우진 #변성현감독 #영화추천 #영화리뷰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내일은파란안경 #0119_많관부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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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아'들의 조우, 사랑, 일탈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스터]
[감독]
니콜레트 크레비츠
[출연]
소피 로이스, 우도 키어, 밀란 헤름스
[시놉시스]
한동안 연기 활동을 하지 않은 배우 아나, 골칫덩이로 여겨지는 고아 아드리안. 서로를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거리를 거닐며 담배를 나눠 피우는 사이로 발전한다. <와일드 Wild>(2016)로 사랑의 범위를 확장하는 시도를 했던 니콜레트 크레비츠 감독의 신작이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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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때로 일탈을 꿈꾼다. 삶이 메마를 때,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그 옛날 세차게 흐르던 강이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아에이오우: 사랑의 빠른 철자법>의 주인공 '아나' 역시 그러한 일탈을 꿈꾼다. 남편과 사별한 그에게 삶의 낙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직장에서는 '나이에 비해서는 매력적이나 그럼에도 한물 간 퇴물'로 취급 받고 사회는 그를 도움이 필요한 노부인으로 바라본다. 그의 젊음은 시들었고 그는 더더욱 위축되어 간다.
아나의 꿈은 한 어린 소매치기, '아드리안'과의 조우에서부터 실제가 되었다. 어수룩하게 가방을 훔쳐 달아나던 아드리안을 처음 보았을 때, 아나는 무언가 형용키 어려운 싱그러움을 느낀다. 그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운명은 지독하게도 그 두 사람을 이어주었고, 두 사람은 어느 복지국 재활 프로그램에서 재회했다.
'아'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떠한 동질감을 느낀다. 과잉행동장애로 말을 더듬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는 아나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다. 부모 자식뻘의 나이 차가 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게 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드리안은 온몸으로 아나를 원하노라 표현한다. 매일 같이 그를 찾아가고, 남의 물건을 훔쳐서라도 그를 위한 선물을 마련한다. 그리고 아나는 소외된 소년인 아드리안에게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사람으로서, 같은 눈높이에서 조언한다. 그는 말한다. 잘 안되면 어떠냐고, 네가 잘하는 다른 걸 해보라고. 각자의 방식으로 고여만 있던 서로의 삶을 흐르게 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는 막을 수 없는 소리, 항상 뻗어나가는 소리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르던 것을 깨달을 때, 감탄할 때, 오르가슴을 느낄 때... ... 그 모든 순간, 가장 먼저 내뱉는 소리가 바로 '아'라는 것이다. 아나와 아드리안, '아'로 이름이 시작하는 두 사람은 어쩌면 서로에게 이러한 '처음' 혹은 '깨달음'을 선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방식일지언정, 서로에게는 각별하다. 그들은 그토록 꿈꾸던 일탈이라는 과업을 완수했으므로.
사회적 관습에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나이든 여자와 도벽이 있는 소년의 결합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숱하게 위법을 저지르고, 그로 말미암아 형사에게 쫒기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맞이하면서.
소위 말하는 '유교걸(유교 사상에 찌든 여자)'인 필자로서는 이들의 일탈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모든 부도덕함을 기꺼이 무릅쓰고 마침내 서로에게로 가 닿는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기존의 고루하고 메마른 일상에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혹은 우리가 꿈꾸는 어떤 판타지를 스크린 너머에서 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의 해석은 관객이 생각하기에 달려있겠지만.
'아에이오우-사랑의 빠른 철자법', 22.08.26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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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히 생산되는 '나' 속에서 진정한 내 이름을 찾기.
자본과 번호, 이름과 사랑
퇴근하고 잔뜩 지친 몸을 이끌어 지하철에 오른다. 각자의 온도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의 뜨끈한 등과 어깨를 꾹, 꾹 밀며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 본다. 한 정거장 지나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간, 당신의 눈이 드물게 번쩍 빛난다. 그러나 옆에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던 중년 여자가 당신보다 훨씬 빠르게 엉덩이를 붙여버린다. 당신은 미간을 팍 구기고 다시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다. 유해한 도파민이니, 뇌세포를 파괴한다느니의 말들은 쓸모없다. 무의미한 작은 직사각형의 세상으로 당신은 있는 힘껏 오늘로부터 도망친다.
결국, 21 정거장 내내 서서 온 당신은 길거리에서도 핸드폰에 눈을 떼지 않는다. 아무리 편한 운동화를 신어도 언덕을 오르는 종아리는 풍선처럼 부풀어 터질 것만 같다. 당신은 길고도 긴 여정 끝에 엘리베이터를 타 버튼을 누르다가 무심코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한다. 그 속의 사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당신의 자리가 아닌) 당신의 자리를 뺏은 중년 여자와 얼굴이 겹쳐지면서, 핸드폰으로 겨우 외면했던 질문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내가 원래 이런 표정이었나?"
나는 정말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름 모를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거울 속 나는 몇 번째 '나'일까?
블랙 코미디 + SF + 우화의 공식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지독히 사실적이면서도 어쩐지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블랙 코미디 + 우화' 공식으로 성공한 작품을 말하자면 당연히 <기생충>(2019)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자본과 계급으로 분명하게 나뉜 두 가족의 이야기를 보면 속이 울렁거리면서도 어쩐지 헛웃음이 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싹 젖는 감각이 생생한 동시에 몽롱한 동화 같으니 말이다. 한국 SF 장르와 봉준호 감독 세계관에 한 획을 그은 <설국열차>(2013)도 디스토파이 세계관에서 아주 긴 열차 칸으로 나뉜 계급 이야기다. 위와 아래, 앞과 뒤. 뒤집으면 언제든 서로가 될 수 있는 구조. 그는 열과 행의 이미지로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잠식된 현재와 미래를 그리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그의 대표적인 크리처 무비인 <괴물>(2006)과 <옥자>(2017)도 전체적인 세계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빠질 수 없다. 이렇게 계승한 블랙 코미디 + SF + 우화로 더욱 견고해진 봉준호 감독의 작가 주의 세계관을 통해 <미키 17>(2025)이 세상에 나왔다.
<미키 17>은 지구가 멸망을 앞둔 디스토피아적 근미래 배경이다.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나자고 주장하는 이들과 망가진 지구를 어떻게든 고쳐서 쓰자 주장하는 정당의 대립이 이루어지는 혼란함 속에서, 친구 '티모'와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진 주인공 '미키'는 빚쟁이를 피해 지구를 떠나려고 한다. 얍삽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티모와 달리 자존감도 낮고 기술도 없었던 미키는 어떻게든 영토 개척 프로젝트 우주선에 탑승하기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접수를 받는 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원서를 제대로 읽었는지 몇 번이나 물어봤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익스펜더블은 진짜 '극한 직업'이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모두 미키를 앞세운다. 우주선을 고치는 줄 알았더니 사실 방사능 실험이었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몸이 망가지는지 설명해줘야 한다. 4년의 항해 끝에 도착한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을 수도 있으니, 당연히 미키가 먼저 땅을 밟고 있는 힘껏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피를 토한다.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몇 번이고 죽음은 미키'들' 덕분에 다른 요원들도 마음껏 차가운 입김을 볼 수 있게 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은 꽃핀다. 주변 사람들의 무시와 일상에 도사리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미키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나샤'의 사랑이다. 미키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곁을 지켜주는 나샤를 사랑하면서도, 최고의 요원인 그녀가 왜 하찮은 자신을 사랑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그녀를 내조한다.
그날도 17번째 미키는 추락사로 몸이 반토막이 나 죽었어야 했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얼떨결에 살아남아 지나가던 티모에게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티모는 떨어진 무기만 챙기고 다친 그를 향해 재수 없는 질문만 툭 던진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그렇게 덩그러니 남은 미키는 행성의 주인인 '크리퍼'에게 잡아 먹히며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크리퍼는 잡아먹긴커녕 미키를 질질 끌고 가 얼음 동굴 밖으로 내보낸다. 크리퍼가 자신을 눈밭에 던져 얼려 죽일 작정이라고 생각한 미키 추위에 떨며 힘겹게 함선으로 돌아온다. 잔뜩 지친 몸을 침대에 내던지는 순간, 어떤 인기척에 이상함을 느끼고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른 자신, 미키 '18'과 마주한다.
복제의 사이클
'익스펜더블'은 사뭇 다른 원작과 영화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의 '복제 인간'과 다른 점은 미키가 자신이 익스펜더블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이것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징그럽고 코믹한 정치인 마샬 부부의 영토 개척지 정책의 핵심은 좋은 유전자로만 구성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몇 번이나 복제된 미키는 불량품에 불과하다. 나샤와 카이, 과학자 도로시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도 미키가 느낄 고통과 죽음을 경시한다. 죽음에 대한 무례한 질문을 던지고, 누구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살피지 않는다. '그게 네 쓸모고 직업이야.'라는 폭력적인 말 한 마디면 미키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니까. 과학자와 의료진도 처음엔 프린팅 되는 몸을 잘 받아줬지만, 나중에는 바닥으로 꼴사납게 떨어져 구겨진 몸에 주사 바늘을 꽂을 뿐이다.
시체, 쓰레기 등 자본과 사회의 찌꺼기는 모두 '사이클러'에 던진다. 용광로처럼 생긴 사이클러는 단순히 쓰레기를 소각하는 게 아닌, 단백질을 다시 분해하고 재생산해서 다음 미키를 만들어내고 선원들의 식사가 된다. 익스펜더블이 아닌 인물들도 자기도 모르게 이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셈이다. 미키는 끊임없이 소각되고 다시 출력되며, 권력에 의해 멸시받는 노동자들의 응집된 몸이 된다.
꼭 프린터기에 들어가야만 복제 인간의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마샬 부부는 특히 우수한 가임기 여자 요원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궁, 아니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샬 부부를 향한 카이의 날카로운 질문처럼 그들에게 여성은 다른 의미의 '인간' 프린터다. 인류 번식과 자신들의 부를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를 출산할, 인간이지만 프린터의 역할을 해줄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퍼와 인간의 첫 대면에서 미키가 아닌 제니퍼가 죽었을 때 추악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카이와 제니퍼가 연인 사이인 줄도 모르고,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성과 결합해 아이를 생산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거란 편견도 끼얹으며 말이다.
다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일파 마샬은 이상하리만치 '소스'에 집착한다. 살아있는 베이비 크리퍼의 꼬리를 잘라 바로 믹서기에 갈아버리는 장면은 경악스럽다. 굳이 손가락에 찍어 맛을 보라고 권유하고, 배양육인지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는 미키에게 메인 디쉬가 아닌 소스 맛이 어떤지 묻는다. 이렇듯 소스는 일파가 강력하게 표현하는 권력의 상징이자 일개 노동자들과 자신의 차이다. 효율을 위해 정해진 칼로리 안에서 구역질 나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닌, 맛과 건강을 추구하고 음미하는 삶이 최고의 권력인 것이다. 미키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긴 하지만, 마샬 부부의 눈에는 다른 노동자들도 비슷하다. 노동자 1, 노동자 2, 비위를 잘 맞추는 노동자, 말을 안 듣는 노동자. 선원들은 자신들을 미키와 달리 분명한 이름과 존엄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부의 시선에선 언제든 대체 가능하고 휴지 조각 같은 존재들일뿐이다. 생존을 인질로 잡고 있는 자본의 힘이 있는 한 사이클러는 무엇보다 뜨겁고 부지런히 권력을 위해 움직인다.
인간보다 나은 크리퍼
’Creepy’에서 유래된 이름인 ‘크리퍼‘는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완전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 인간의 시선에선 낯선 외형이 두렵고 징그럽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니플하임에 마음대로 정착해 들쑤시고 다니는 인간이야 말로 외계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 이름도 꽤 무례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크리퍼들은 인간을 잡아먹는 생명체도 아니었고, 유일한 친구인 티모마저 외면한 위험에 빠진 미키를 구해준다. 미키는 크리퍼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나샤는 '크리퍼가 구해줬다'라고 정확하게 짚어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2000)를 본 사람들이라면 크리퍼를 보자마자 ‘오무’가 떠올랐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 나라와 나라의 대립을 그린 영화로 주인공 ‘나우시카’가 전쟁을 멈추기 위해 오무 무리들과 소통하는 장면은 미키가 통역기를 사용해 크리퍼에게 곧 가스가 살포될 테니 도망치라고 알리는 장면과 비슷하다. 크리퍼가 본격적으로 서사에 등장하는 시점부터 영화는 어쩐지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이러한 지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장르 믹싱 기법이 눈에 띈다.
크리퍼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소통하며 정보 공유가 가능하다. 미키의 이름도 잡혀있는 베이비 크리퍼 ‘조코’를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마마 크리퍼는 외형이 똑같은 두 베이비 크리퍼의 이름을 정확히 구분한다. 죽은 아이는 ‘로코’, 잡혀 있는 아이는 ‘조코’.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명확하게 각자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으며 공동체가 힘을 합쳐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잘 알고 있다. 외형도 전부 다르고 고유한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치환되는 인간들이, 정작 동료가 위험에 빠진 순간 힘을 합치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마 미키가 크리퍼였다면 마마 크리퍼는 단순히 그의 이름에 번호를 붙여 구분하는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익스펜더블이라는 비윤리적인 직업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더 앞서 삶의 터전인 행성을 그렇게 오염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넘나들며 과학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으니 당연한 대가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받은 만큼만 되갚고, 선의를 보이는 이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태도. 이러한 크리퍼의 자세에서 우리는 진작 갖추어야 할 인간성을 배운다.
나를 마주하기
영화는 미키 ‘17’과 미키 ‘18’이 대면하면서 본격적인 위기에 닥친다. 미키 18은 지금까지 누적된 미키의 정보를 다운로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키 17과 완전히 반대의 성격이다. 뭐만 하면 죽여버린고 말하며 높은 폭력성을 띄고, 대책 없이 충동적이며, 엄청 밝힌다. 17은 자신을 가차 없이 죽이려는 18과 몸싸움을 하면서 나샤에게 전해 들었던 지금까지의 미키와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라는 걸 실감한다.
시간을 앞당겨 익스펜더블이 윤리적 논란에 휩싸였을 때로 돌아가본다. 악용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 주장하자마자 한 미친 과학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멀티플'을 만들어 노숙자를 죽인다. 둘도 아니고 셋이나 만들어 무고한 이들을 잔인하게 죽인 사건을 계기로, 익스펜더블은 공식적으로 지구 안에서 시행이 금지되며 멀티플은 중범죄가 된다.
다시 돌아와 미키 18을 죽이려고 나름 노력해 보는 미키 17의 눈을 보자. '또 다른 나'와 처음 마주한 그는 이제 곧 세상에서 사라지고 죽을 거란 공포와 자신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는 놀라움, 혼란 등에 빠져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채 몸이 반쯤 사이클러 속에 들어간다. 반면, 미키 18은 17에 대한 확실한 반감이 있다. 거울을 보듯 겁에 질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모습에 17은 더 혼란스럽다.
비슷하지만 미세한 차이점이 있는 얼굴로 나란히 서있는 둘의 모습은 마치 자아 분열의 가시화된 것 같다. 얼음 동굴에서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듯 던진 티모의 질문은, 실험쥐처럼 수없이 이용당하는 미키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자기 방어와 누적된 폭력성을 발현시킬 트리거로 작용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미키 17이 처음으로 욕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18이라는 점이다. 처세술에 강하고 얍삽한 티모를 비꼬는 발언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무례함에 대응한 적 없던 미키 17은 나샤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화를 참지 못한다. 심지어 마샬 부부와의 만찬에서 입에 올리지도 못할 끔찍한 고통과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7이 씩씩 거리는 대상은 다름 아닌 18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호기심에 빨간 버튼을 눌러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미키는 죄책감에 모든 우선순위에서 자신을 제외한다. 17의 이러한 위축된 태도는 18의 화를 키운다. 만찬에 초대해 놓고 실험 중인 배양육을 먹인 것도 모자라, 타인의 목숨보다 카펫이 소중한 부부에게 뭐라고 하고 나왔냐는 질문에 17은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저녁 식사 감사하다고... 하고 나왔어."
그런 수모를 겪고도 감사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냐고 불같이 화를 낸 18은 당장이라도 케네스를 죽이겠다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정말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눈다. 폭발하는 공격성이 온전히 '나'를 지키기 위해 표출될 때, 관객은 17을 향한 18의 반감이 애증이었음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미키 18은 17과 대치하던 중 티모를 보자마자 사이클러에 던져 죽이려 든다. 비록 분열된 두 사람이지만 미키가 처음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시도한 순간이었다.
내가 너라서 알 수 있는 열등감과 자기혐오, 그리고 트라우마. 빨간 버튼 따위로 사고가 날 만큼 자동차를 엉망으로 만든 회사 잘못이라는 18의 말은 평생 미키가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그는 무모하고 폭력적인 또라이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용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뻔해도, 결국 우리를 구하는 건 사랑
서로 으르렁 거리는 17과 18 사이에서 혼자 신난 사람은 다름 아닌 연인 '나샤'다. 지금껏 다양한 미키를 봐온 나샤는 정반대 성격의 두 미키를 보며 굉장히 흥분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날 수 있냐는 미키 17의 질문에 그녀는 '반대 상황이라면 너도 나처럼 좋아할걸?'하고 가볍게 받아친다. 멀티플인걸 숨겨줄 테니 미키를 나누자는 카이의 말에는 불같이 화를 낸다. 16이든 17이든 18이든, 나샤에게 미키는 오로지 단 한 명이니까.
나샤는 엉뚱한 면이 있지만, 인정받은 소수 정예 엘리트 요원으로서 단단한 내면과 외면을 갖춘 인물이다. 미키는 다방면에서 월등한 그녀가 대체 왜 가장 낮은 계급인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바이러스와 각종 실험으로 죽어가는 미키를 두고 볼 수 없던 그녀는 직접 진공복을 입고 실험 캡슐 안으로 들어간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서 희생하는 자를 돌본다.
베이비 크리퍼를 구하기 위해 몸이 묶인 채 이로 밧줄을 잡은 나샤는 미키에게 신호를 받고 'C3' 전략을 펼친다. C3는 아기를 안는 것 같은 자세로, 미키와 나샤의 섹스 체위 중 하나이다. 칼로리마저 철저히 계산하고 먹어야 하는 우주선 안에서 섹스는 가장 비효율적인 에너지 활동이다. 마샬 부부는 생존을 빌미로 니플하임에 완전히 정착할 때까지 섹스를 금지시키지만, 그들은 장난으로 체위를 그려가며 계속 몸을 겹친다. 나샤가 미키의 전략으로 베이비 크리퍼를 구해 눈밭을 달리는 장면은, 그들의 섹스가 결여된 존중과 냉소적 자본주의로 만들어진 노동과 권력보다 더 가치 있음을 증명한다.
케네스와 대치하던 18은 기어코 죽음의 순간을 마주한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은 케네스는 그런 감정이야 말로 인간성의 증거라고 자극한다. 그러나 미키 18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나샤와 함께 서 있는 미키 17을 보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줄 사랑이야말로 지금 모두에게 필요한 본성이라는 것을. 뒤에 붙는 거지 같은 숫자 따위는 집어치우고 미키 '반스'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지금까지 그들을 괴롭혔던 동그란 버튼을 꾹 누른다.
거대한 스케일의 SF 영화로 봉준호 감독은 사랑을 말한다. 너무 큰 서사와 화제성에 비해 작은 주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만 더 고민해 보자. 사랑이 조금 뻔하긴 해도, 작았던 적은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 나를 사랑하는 것도, 너를 사랑하는 것도 식상한 말처럼 느껴져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무수한 호칭에 짓눌려 더미 속에 묻혀버린 내 이름을 건져 먼지를 툭툭 털어주고, 어쩐지 낯선 내 얼굴도 한 번 바라보자. 그리고 힘이 남는다면 아끼는 이들의 이름도 찾아 숫자는 치워버리고 광이 나게 닦아보자. 미키와 나샤, 크리퍼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 가치를 배웠으니까.
무수히 생산되는 '나' 속에서 진정한 내 이름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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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비티>의 사운드 미학
영화 <그래비티>(2013)의 우주 비행사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은 우주 쓰레기 잔해 충돌로 인해 동료로부터 멀어진다. 우주에서의 고립은 무인도에서의 조난과 매우 다르다. <캐스트 어웨이>(2000)의 무인도 속 조난자에겐 소통의 대상이 있다. 살아 있지 않아도 괜찮다. 배구공에게 얼굴을 그려주고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 소통하면 된다. 이상해 보이겠지만 적어도 그 조난자에게 배구공은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 매우 소중한 존재다. 세상과 분리된 채 경험하는 철저한 고립, 완벽한 배제는 개체의 삶을 파괴시킨다. 그래서 <그래비티>의 우주는 무서운 공간이다. 스톤이 떠다니는 공간은 배구공은커녕 그 어떤 것도 없는 황량한 무(無)의 상태다. 이때 스톤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몇몇 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스톤이 소리에 반응하는 몇몇 중요한 지점들이 있다.
홀로 남은 스톤이 모든 걸 포기하려는 때마다 등장하는 목소리가 있다. 동료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의 목소리다. 우주 쓰레기 파편이 휩쓸고 지나간 뒤 혼자 남은 스톤이 좌절에 빠질 때 코왈스키의 목소리가 스톤을 붙잡는다. 프레임 중앙으로 멀어져 가는 스톤의 모습이 희미해질 때 즈음 지지직대는 소음과 함께 코왈스키의 목소리가 삽입된다. 코왈스키의 목소리, 이어서 그에 반응하는 스톤의 격양된 목소리는 깜깜한 우주 공간을 보며 희미하게 일렁이는 스톤을 찾으려는 관객이 그 순간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특징적이고 명확한 음향 표지이다. 이때 피어나는 스톤의 안도감은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전이된다.
스톤이 연료가 바닥난 소유즈에서 우주 관제 센터와 교신을 시도하는 장면도 떠오른다. 이때 스톤은 교신에 성공하지만, 상대는 우주 센터가 아닌 지구의 이누이트 통신사 아닌강이다. 서로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스톤과 아닌강은 소통에 실패한다. 하지만 스톤은 개 짖는 소리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서로 다른 문화권일지라도 이런 소리는 특징적인 표지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때 스톤과 아닌강은 불완전하면서도 모종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특별한 소통을 경험한다. 영화를 보는 상당수의 관객이 아닌강의 언어보다는 스톤이 구사하는 영어에 익숙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관객은 스톤처럼 아닌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개 짖는 소리나 아기의 울음소리는 관객들도 역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이렇게 <그래비티>는 우주에 고립된 스톤과 지구 어딘가에서 그와 교신하는 아닌강 간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특별한 유대감을 사운드를 매개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다시 코왈스키의 목소리다. 코왈스키는 스톤을 다시 한번 구해낸다. 아닌강과의 교신 이후 산소를 줄여 죽으려 했던 스톤은 정신을 잃어가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이후 제시되는 코왈스키의 환영과 스톤의 대화 신이 끝나는 지점은 스톤을 부르는 프레임 바깥에서 코왈스키의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이다. 극중 코왈스키의 목소리는 내재 공간에서뿐만 아니라 프레임 바깥에서의 외재적인 음향으로 자주 동원된다. 처음 스톤이 고립된 상황에서도 같은 내재 공간인 우주 속 어딘가에 있는 코왈스키의 목소리는 외재적 음향 표지로 등장해 스톤이 처한 고립된 상황을 강조하고 다음 플롯으로 넘어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 스토리 공간 속의 인물이 내는 소리를 내재적/외재적으로 적절히 변주하는 방식은 관객이 스톤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서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을 강조하는 수단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그래비티>는 이처럼 사운드가 유발하는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선보인다.
평자와 대중들은 공통적으로 <그래비티>가 훌륭한 우주 체험 영화라고 말한다. 우주 공간을 그려낸 수많은 영화와 <그래비티>를 비교했을 때, <그래비티>만의 영상미, 시공간 묘사와 촬영 기법 등은 분명히 이 영화를 매력적인 우주 체험 영화로 가공한다. 이때 여기에 사운드가 빠져서는 안 된다. 내가 말하는 사운드는 삽입된 사운드트랙, 작곡된 스코어, 믹싱으로 첨가된 음향 효과, 녹음된 인물의 대사 등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코왈스키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트는 팝송이나, 고증이 완벽하게 된 효과음 등도 물론 중요하고 우주의 공간감을 살리는 특수한 스코어나 음향 효과 역시 영화를 지탱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서사 전개의 스타일적 패턴이나 도구로 극을 이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사운드 미학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래비티>는 사운드만으로 관객이 인물과 시공간적 배경에 동화될 수 있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음향이 영화에 어떤 복합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할 수 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래비티>는 매력적인 사운드가 존재감을 뽐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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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내가 만드는 신의 뜻
삶의 방향성은 내가 직접 조정하며 가는 것이 맞을까? 정말 힘들거나 미래가 불확실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찾는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 답을 찾지 못할 때나, 정말 너무 힘든 상황이 닥쳐오면 우리는 신을 찾는다. 예수나 부처 등 다양한 종교들이 그 힘든 상황을 위로해 준다. 마치 신의 뜻이 있었던 것처럼 그 모든 불행과 행복이 신의 뜻이었다고 믿는다.
종교가 주는 힘은 크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위로를 받고, 힘든 상황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종교는 희망을 주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하지만 동시에 종교는 우리를 정적인 상태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다. 종교적인 분위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종교의 정적인 특성은 때로는 사람들에게 수동적인 태도를 유도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영화 <이매큘레이트>는 과연 신의 뜻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공포 영화다.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가면서 한 가톨릭 시설에 가게 된 주인공 세실리아(시드니 스위니)가 겪는 일이 스산하게 담겼다. 이매큘레이트라는 단어는 '무결점의', '순결한'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영화는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중심으로, 세실리아의 경험을 통해 신의 뜻을 탐구한다.
[첫 번째 감정] 세실리아의 믿음
세실리아는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아주 젊은 나이에 가톨릭의 수녀가 되기로 결정하고 종교에 귀의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래서 더욱 그녀는 신을 믿고 가톨릭을 믿는다. 그리고 그녀가 새롭게 만나게 되는 수녀들과 신부들을 전적으로 믿는다. 세실리아가 종교적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과, 그로 인해 형성된 강한 신앙심 때문이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녀에겐 남아있는 가족이 없었고, 오직 신에 의지하는 것만이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세실리아가 처음 이탈리아의 종교 시설로 갔을 때, 이탈리아어가 서툰 그녀지만 적극적으로 소통하려 하고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곳에 갔는지를 영화는 초반의 장면들로 보여준다. 종교 시설의 스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세실리아의 미소에 조금 밝아진다. 세실리아의 심리적 상태는 그가 가진 굳건한 믿음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잘못될 리 없는 신과 절대적 선인 수녀와 신부들을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찾아올 무서운 일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찾아오든 그녀가 그것을 극복하고 적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내 그 생각은 바뀌게 된다. 그녀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생기고, 몸이 이상한 것을 느끼게 되는데 세실리아는 그녀가 믿는 신부의 추천으로 산부인과 진료를 받게 된다. 오래된 초음파 기계 앞에 누워서 진료를 받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신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 주변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진다.
[두 번째 감정] 신의 뜻
세실리아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런 성적인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했다는 상황은 무척 공포스럽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주변 인물들은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믿고 말한다. 영화는 그것이 마치 진짜 신의 뜻인 것처럼 이야기를 몰고 간다.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고조될 때, 그 수도원의 나이 든 수녀에게 세실리아가 왜 자신이 임신했는지 묻는다.
수녀의 답은 충격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겠냐"는 답변이었다. 사실 멀리 가지 않아도 역사적으로 이런 일은 무수히 많이 일어났다. 과거 역사적으로 잘못된 믿음 때문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도 그러했다. 종교적 신념이 왜곡되면서 일어난 이 전쟁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그나마 현재는 과학적 연구와 사회적 이해가 발전하면서 덜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일은 발생한다.
그래서 이 수녀가 말한 신의 뜻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세실리아는 당연히 겁에 질렸고, 과연 그것이 신의 뜻인지를 본인도 고민하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과연 진짜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것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일까? 영화는 그런 애매한 상황 속에 세실리아를 밀어 넣고 관객에게 기괴한 서스펜스를 전달한다.
[세 번째 감정] 세실리아의 의지
영화는 늙은 수녀의 그 말 이후 달라지는 세실리아를 보여준다. 후반부의 세실리아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다. 그녀는 신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건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신해서 배가 불러오는 상황에서도 세실리아는 자신의 의지를 점점 강력하게 표출하기 시작한다. 그건 그 이상한 상황에서 느껴지는 공포심에 의해 발생한 본능 같은 것이지만, 세실리아 스스로의 의지가 없다면 실행이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 속 그 기도원은 이상한 믿음을 가진 집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잘못된 믿음은 깨뜨려야 할 장애물이 된다. 세실리아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을 통해 신의 뜻을 만들어간다. 무언가 일어난 그 일 모두가 신의 뜻이 될 수 있다. 여전히 신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의 뜻이 될 수 있다면, 세실리아가 의지를 가지게 된 그 상황 자체도 신의 뜻이 될 수 있다.
세실리아가 보여주는 분노와 의지가 결국은 그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바로 신의 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실리아가 수도원의 괴인들에 반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행동은 단순히 개인적인 반항이 아니라, 잘못된 종교적 신념에 맞서는 용감한 도전이다. 그녀의 의지는 종교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강력한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영화 <이매큘레이트>는 기본적으로 공포영화로서의 긴장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공포 효과는 약했다. 공포 요소들이 충분히 무서운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들을 끝까지 몰입하게 만든다. 공포 영화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지만, 강렬한 공포 효과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
영화 <이매큘레이트>는 세실리아가 자신만의 믿음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공포라는 장르 안에서 보여준다. 배우 시드니 스위니는 이 역할을 통해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녀의 섬세한 감정 표현과 강렬한 연기는 세실리아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잘 담아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 마이클 모한은 과거 작품인 <깊은 관계> 등에서 보여준 섬세한 연출 스타일을 이번 영화에서도 이어갔다. 그의 연출은 캐릭터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며, 관객에게 긴장감을 전달한다. <이매큘레이트>에서도 모한 감독의 특유의 섬세함과 치밀한 연출이 돋보인다.
영화 <이매큘레이트>는 종교적 믿음과 개인의 의지, 그리고 신의 뜻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다룬다. 세실리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잘못된 믿음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실리아의 변화는 단순히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만의 믿음과 의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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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점이 아니야. 사랑이야.
<노웨어 스페셜>
개봉 2021.12.29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96분
감독 우베르토 파졸리니
출연 제임스 노튼, 다니엘 라몬트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하였습니다.
마지막이 아닌, 시작을 선물하는 법
창문 청소부인 존(제임스 노튼)은 시한부이다. 존은 4살짜리 자기 아들인 마이클(다니엘 라몬트)이 혼자 남지 않게 가정위탁을 하고자 한다. 시한부 아빠와 홀로 남겨질 아들의 이야기. 줄거리만 보고는 영화를 보는 동안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휴지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영화는 ‘너네 울어. 울어야 해’ 하지 않았다. 덤덤히 죽음과 남은 빈자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화 속에서 그 누구도 죽음이 두려워 오열하며 울지 않았고 제발 죽지 말라고 사정하는 장면도 없었다. 영화는 이미 수많은 울분과 체념을 반복했을 존의 초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고조되는 감정 없이 차분히 흘러간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이별을 준비하는 두 부자의 모습은 몇 번이나 울컥하게 했다.
마이클은 34살 아빠의 생일에 35번째 초를 건넨다. 컵에 주스를 따르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진 아빠에게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기도 한다. 입양이 뭔지, 죽음이 뭔지 모르지만 어쩌면 마이클은 다 직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내뱉는 짧은 말들이 다 뭉클했다. 특히 입양을 신청한 여자에게 “아줌마는 언제 죽어요?” 묻던 장면이 그랬다.
죽음은 한순간이지만 남은 빈자리는 평생 채워지지 않는다. 존이 어린 시절, 엄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 울었던 때를 고백했다. 그는 그게 자신의 약점이라 말했다. 자신처럼 가정위탁 가정에서 자라게 될 마이클은 죽음이 뭔지 모르고,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다정한 가정에서 자라길 바란다. 하지만 고백을 들은 동네 할머니는 그건 약점이 아니라 사랑이라 말한다. 엄마를 향한 사랑.
남편을 떠나보낸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얼마 전에야 남편의 칫솔을 버렸다는 할머니는 '죽었지만 그들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어. 우리 주위에 있어.' 라고 존에게 말해줬다. 할머니의 말에 존은 마이클에게 사랑을 남겨주고 싶어졌다.
존은 나중에 마이클이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 '기억상자'를 만든다. 그리고 마이클에게 자신의 죽음을 설명한다.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거란다. 네 주변의 공기 속에서, 널 따듯하게 감싸는 햇살 속에서"
"빗물에도?"
"그래, 널 적시는 빗속에도."
이른 아침, 아빠의 손을 붙잡고 씩씩하게 앞서 걸어가던 마이클이 멈춘 곳은 입양을 신청한 한 여자의 집이었다. 아이는 떼쓰지도 울지도 않았다. 이것이 아빠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 줄 아는 듯 아이는 아빠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서 난 <부러움>이라는 글을 적었다. 존의 어린 시절처럼 나 역시 따듯한 가족의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났다. 나도 이것이 나의 약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해줬다. 내가 흘린 눈물은 부러움과 나약함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었던 그때의 가족을 사랑해서였다. 특히 '마지막이 아닌 시작을 선물하는 법' 은 영화를 완벽하게 설명한 문구라고 생각한다. 끝과 마지막만 떠오르는 시한부 이야기에 시작과 선물이라는 역설은 가슴 아픈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짓게하고 행복을 떠올리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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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언맨이 마블에서 창조한 빌런들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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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7. 31 영상입니다.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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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쿨 아웃 포에버> 메인 예고편
최악의 팬데믹 발생!
전 세계 인구 95% 사망
오직 Rh-O형만 면역력 보유
세상이 진짜로 망해버렸다!
전염병과 난폭해진 사람들을 피해 학교에 모인 키건과 친구들
현실 생존에선 그동안 배운 것은 모두 무쓸모!
지금부턴 실전이다! 본능대로 살아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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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시스턴트> 메인 예고편
꿈에 그리던 영화사에서
보조 직원으로 일하게 된 ‘제인’
어떤 일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그녀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소한 사무실 정리부터 상사의 개인적인 스케줄 관리까지
하루 종일 몰아치는 잡다한 업무에 지쳐간다.
그러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
어느 날, 신입사원으로 채용된 한 여성이 찾아오면서
회사 내 부조리함을 마주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