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파로2023-01-27 12:24:53
추억으로 살아나는 부녀의 시간
영화 애프터썬 리뷰
‘문라이트’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배리 젠킨스 감독이 제작에 나서고 샬롯 웰스 감독이 본인의 경험이 담긴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데뷔작으로, 2022년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해 전 세계 유수 영화제 56개 부문 수상, 154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애프터썬입니다. 성인이 된 주인공 소피가 낡은 캠코더에 담긴 20여 년 전 아버지와 함께한 빛바랜 튀르키예 여행 영상들을 보며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부녀간의 추억과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억을 곱씹어 그리워하는 통속적인 구조를 그리기보다 그때 여행에서 자신이 못 보았던 모습을 돌이켜보며 묘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여기서 비롯된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이 깃든 미묘함은 극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관객에게 평범하지만 독특한 경험을 만들어주죠. 그렇기에 지루할지도, 특별할지도 모르는 추억 여행은 아마 보는 분들마다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것 같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우리 여기 놀러 온 거 맞지?”
어느 날, 소피는 꿈속에서 아빠를 만나고 다음날 아침에 자신이 11살 때 아빠와 함께 떠난 튀르키예 여행지에서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꺼냅니다. 부모님의 이혼 후 떠난 부녀의 여행, 버스를 타고 어느 휴양지 리조트로 향해 일주일간 함께한 여정. 밥을 먹고, 수영도 하며, 포켓볼을 치거나 오토바이 게임도 했던 여름날의 행복해했던 추억을 천천히 돌이켜봅니다.
예고편│Trailer
원제: Aftersun│감독·각본: 샬롯 웰스
출연진: 폴 메스칼, 프랭키 코리오, 실리아 롤슨-홀 외 多
장르: 드라마│상영 시간: 101분
국가: 영국, 미국│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왓챠피디아 예상 3.4, 로튼토마토 신선도 96% 팝콘 82%, IMDB 7.8, 메타 스코어 95점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상영 일정: 개봉일 2023년 2월 1일
수상 내역: 48회 LA 비평가 협회상(편집상), 87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신인작품상), 57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감독상), 48회 도빌 아메리칸 영화제(그랑프리, 국제 비평가 상), 39회 뮌헨 국제영화제(시네비전상) 등 유수 영화제 56개 부문 수상, 154개 부문 후보
“가장 사적이고 평범한 이야기의 특별함”
성인이 된 한 여성이 20여 년 전 아빠와 함께 떠났던 여행의 추억을 꺼내보는 내용은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에 두고 있어 지극히 사적이고 사소합니다. 시간이 지나 사회의 경험을 쌓은 지금에 다시 떠올려보려 보니 각별한 의미를 가진 추억이 되었다는 전개는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부모님의 그림자를 알아간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 봤을 삶의 이야기지요. 그렇게 일주일 간의 튀르키예의 한 리조트에서 지내며 보낸 아주 사사로울 수 있는 순간이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확장됩니다. 소피의 기억과 상상한 장면들은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른,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어린 소녀는 훨씬 더 성숙했었기에 그때 느낀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행복을 그리워하거나 지금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마음을 담아 어떤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클럽 조명 사이로 어른이 된 딸과 과거 아버지 모습이 몇 번 교차할 뿐 오롯이 어린 11살의 모습만이 스크린에 전달되죠. 정신없이 살아온 시간에 잠시쯤 쉬어갈 수 있는 존재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혼재된 시간의 기억에서 잠시나마 자신에게 빛이 되어준 아빠를 찾아가는 여정임을 상징하는 것인 굉장히 모호한 부분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상상 속 시끄러운 클럽을 벗어나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찾아오는 여백은 그저 진실한 마음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하려 했던 부녀의 이야기, 그렇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영화 애프터썬은 가타부타 할 자초지종은 생략하고 오로지 어린 시절 여름날의 애틋하고 따뜻한 기억을 담는데 집중합니다. ‘노멀 피플’로 멋진 모습을 선보인 폴 메스칼은 캘럼 역으로, 8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프랭키 코리오는 소피 역으로 그러한 부녀의 온기를 세세한 표현으로 전합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받았던 사랑의 소중함을 헤아리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빛바랜 영상을 보며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그녀의 추억처럼 뒤늦은 깨달음을 함께하는 묘한 분위기를 말입니다. 감춰진 불안감이 무엇인지 느끼고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며 더 깊어지는 애틋함일지도 모르는 그러한 평범한 기분, 감독이 느꼈던 개인적인 감정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잔잔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안하기도 한 그때의 감정, 그러나 일반적으로 관객에게 어디까지 전해질지는 의문이 드네요. :)
한 줄 평 : 빛바랜 영상, 되살아나는 기억, 스며드는 애틋함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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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곱씹어야 할 대상은 전두환이 아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군사반란이 발생했다.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이 자기 휘하 사조직 하나회를 이용해 육군참모총장 '정상호'(이성민)를 체포하고, 정국을 장악하려 한 것. 하지만 반란은 전두광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대통령은 협조하지 않고, 정 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반란 계획이 들통난 것. 이에 전두광은 절친 '노태건'(박태준)을 통해 최전선 전방 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반란군은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한다. 비록 육군 본부는 패닉에 빠지고, 국방부 장관도 행방불명이 되었지만 최후의 보루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 그는 서울 근방 전 부대에 반란 진압 명령을 내리고, 육군특수전사령관 '공수혁'(정만식), 헌병감 '김준엽'(김성균) 등과 진압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걸고 전두광과 전면전을 펼치기 위해.
<서울의 봄>, 박제가 아닌 거울이 되다
한국 영화 속 전두환은 공공의 적이다. <26년>, <1987>, <택시운전사>, <헌트> 등에서 그는 직간접적으로 타도의 대상, 응징해야 할 목표물로 등장했다. 영화라는 집단적 환상에서 사회 정의를 바로 잡는, 일종의 영화적 징벌인 셈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나치와 히틀러가 고통받는 것처럼.
다만 이 '환상'을 삐딱하게 볼 수도 있다.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35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는 민주화 신화를 박제할 뿐이라고 느낄 수 있다. 단순히 민주화 운동 에피소드를 담거나, 전두환을 처단하는 내용이면 더 그렇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났기 때문.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민주적 정당성이 전무했다는 사실은 부정하면 안 되는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즉, 당연한 일에 영화적 심판이 필요한 당위성도 약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서울의 봄>의 위치는 퍽 흥미롭다. 물론 여전히 관성적인 대목이 있다. 총 쏘듯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전두환 정권의 비정상성을 비판한다. 자연히 민주화 항쟁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결정적인 순간 다르다.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아픔에 주목한다. 전두환을 막으려고 몸을 던진 이들과 그들의 실패에 초점을 맞춘다. 달리 말해 <서울의 봄>은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거울에 가깝다.
실화를 전격적으로 공략하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다. 역사적 평가가 끝난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 사실 어렵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사죄를 못 받은 만큼, 전두환에 대한 앙심은 불처럼 뜨거울 테니. 이에 <서울의 봄>은 일단 관객의 혼을 빼놓은 후, 서서히 관점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그래서인지 초중반부는 마치 전격전을 보는 듯하다. 좋은 의미로 정신이 없다.
<서울의 봄>은 우직하다. 별다른 설명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선다. 전두광과 노태건, 그들에 맞서는 이태신과 정상호의 존재감만 보여준 후 바로 쿠데타 현장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진행 과정도 명쾌하다. 복잡한 작전 설명은 없다. 주요 군부대 한 두 개와 지휘관의 현황만 콕 집어 보여주고, 간단한 그래픽으로 상황을 다시 인지시킨다. 컷 전환도 망설임이 없다. 필요한 장면을 보여주면 곧장 다음 씬으로 넘어간다.
이는 실화가 스포일러라는 근본적인 약점을 역이용한 각본, 연출, 그리고 편집이라 할 수 있다. 12.12 군사반란은 결과보다 과정이 낯선 사건이다. 학교에서 현대사를 배울 때 이 쿠데타의 결과와 영향은 외워도, 구체적인 과정은 시험에 잘 나오지 않으니까.
<서울의 밤>은 이를 이용해 스포일러로 향하는 과정을 전부 물음표로 바꾼다. 그 덕분에 작전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막을 수 있을 듯 없을 듯하는 일련의 과정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도대체 이 작전이 어떻게 성공한 거지?'라는 의문이 강력한 서스펜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울의 밤>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며 국군과 반란군의 역사적인 밤을 생중계한다.
무리수까지 역이용하다
사실 전격전은 여러 무리수를 낳는다. 일단 캐릭터가 하나같이 평면적으로 묘사되고, 그저 장기짝으로 이용된다. 전두광의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권력만 좇는 악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태신은 대쪽같이 원리 원칙만 쫓는 인물이다. 그들은 두 진영의 충돌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똑같이 패배하는 역사를 다뤘고, 두 인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남한산성>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또 전두광, 노태돈, 이태신, 김준엽, 공수혁 다섯 캐릭터를 빼면 반군이든 국군이든 수동적이다. 도망치기 바빠서 직무를 유기한 국방부 장관, 전두광의 영도 없이는 아무런 대책도 못 내놓는 반군 장성, 상황 파악도 못하고 선제 조치를 못 취하는 국군 장성, 국군 통수권자로서 군을 통솔할 생각조차 안 하는 대통령까지. 총체적 난국이다. 그러니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억지로 고구마를 입에 쑤셔 넣는 느낌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울의 봄>은 쌓아 올린 긴장감과 분위기를 한 순간도 무너뜨리지 않는다. 답답하고,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지지만 작위적이라거나 과하다는 인상은 없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조연 캐릭터의 무능은 실화를 묘사했다는 변호가 가능하다. 국방부 장관 '오국상'(김의성) 등의 행적은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의 행적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 오히려 이 대목은 블랙 코미디로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기능도 맡는다.
곱씹을 대상은 전두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의도적인 빌드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두광이 악마처럼 보일수록 이채신의 선과 정의의 화신이 되고, 장성들의 무능함은 탄식을 자아낸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상황에서 탄식은 헛웃음으로, 이내 분노로 변한다. 이채신과 전두광이 경복궁 앞에서 대치할 때 국방부 장관이 재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울의 봄>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비로소 풀어놓는다. 단순히 전두환을 비난하는 대신, 왜 마침내 찾아온 봄을 잡지 못했는지 되묻는다. 개인의 권력욕과 일탈을 막을 시스템이 있었는데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질문한다. 규칙을 깬 사람에게는 이미 돌을 던졌으니, 실패한 원인을 되짚어보자고 말한다.
<서울의 봄>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는 특정한 이미지를 통해 나름대로 그 답을 내놓는다. 답은 시민이다. 특히 자기 책무를 저버린 시민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군인이 권력을 탐내 반란을 일으켰지만, 군인 역할을 맡은 시민 개개인의 힘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한 시대를 상징하는 군인의 이미지 안에서 절망과 희망이 크게 충돌할수록 영화의 울림은 커진다.
이채신이 행주대교에서 반란군의 서울 진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가 총까지 겨눈 부관의 만류도 무시하고 소규모 병력과 무기를 모아 결사적으로 전투에 나서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정만식, 정해인, 이준혁 같은 카메오를 활용해 반군에 맞서다가 쓰러진 군인에게 짧게라도 강렬한 임팩트를 준 이유이기도 하다.
제목이 '서울의 봄'이어야 하는 이유
이렇게 보면 영화 말미에 군가 '전선을 간다'가 삽입된 이유도 유추할 수 있다. 노래 속 "상처 입은 노송"과 "이끼 낀 바위"라는 가사는 죽어간 전우를 추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라는 후렴은 과거 장병들이 사투를 벌인 후 죽은 자리에서 그들을 잊지 말자는 노래로 들리기도 한다.
<서울의 봄>은 12.12 군사반란을 군가 속 전장에 비유한다. 설령 군사 정권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이채신의 패배를 되풀이자지 말자고 노래하는 셈이다. 또 열의를 고취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누군가 어떤 방식으로든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침해하려 들면, 시민 개개인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저항하자고.
이채신의 퇴장 장면에서도 그 함의를 읽을 수 있다. 이채신이 체포되어 서빙고 분실로 끌려갈 때, 러닝타임 내내 칼같이 전환되던 화면이 그 순간만큼은 천천히 페이드 아웃되며 그의 퇴장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제목으로도 '12.12 군사 반란'이 아니라 '서울의 봄'이 더 적절해 보인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만 원망할 게 아니라, 봄이 떠나간 이유를 곱씹어야 봄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
마지막 스타일만 좋았다면
다만 <서울의 봄>은 용의 눈동자까지 그려 넣지는 못했다. 2시간 넘게 쌓아 올린 감흥을 마지막 순간 날려버린다. 영화는 하나회 기념사진을 보여주고, 하나회 일원이 각각 역임한 직책을 알려주며 막을 내린다.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내린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마무리는 다소 교조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감독의 말을 일방향적으로 전달하는, 시대를 역행하는 프로포간다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제작자나 감독이 관객을 믿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담긴 처연함과 답답함을 곱씹어 볼 여유만 챙겨 줬어도 <서울의 봄>은 더 오래, 은은하게 뇌리에 남았을 테니까. <서울의 봄>은 그럴 자격이 충분한 영화고, 2023년은 관객이 역사 속 선악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대이므로.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눈 내리는 겨울날, 봄이 떠나간 이유를 되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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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병기 카터도 결국 구해내지 못한 영화
아닌 밤중에 잠 안 자고 글을 쓰고 있다. 잠이 안 온다. 사회복무요원 근무지에서 꾸벅꾸벅 졸면 되는 일이라 사실 그렇게까지 급하진 않은 것 같다. 뭔가를 볼까? 하다가 갑자기 어제 본 영화가 생각난다. 제목은 <카터>. <비상선언>이 나에겐 영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엔 괜찮을 거야 하며 재생 버튼을 누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몇 주 전 <그레이 맨>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넷플릭스 발 때리고 부수는 영화에 나름의 신뢰가 생겼다.
그렇게 도입부가 시작된다. 팬티 바람의 주원 배우가 보인다. 뭐지? 갑자기 몸 좋은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자기 몸 옆에 있는 핏자국에 놀란다. 그리고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단다. 그렇게 카터에 이입해서 어리둥절한 상황을 같이 느낀다. 갑자기 폭탄이 터진다. 엑스트라 중 한 명의 머리가 터진 것으로 보인다. 뭐야?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한국영화 스타일에 화들짝 놀라 '계속 봐야지'싶다. 그런데 이 호기심은 점점 안타까움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북햔 출신의 전직 CIA 요원이 있다. 싸움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요원 카터는 정해진 임무에 따라 미션을 해결해야 한다. 근데 미션의 결과와는 별개로 참 속상하게 됐다. 8월 5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카터>로 가보자.
멀지 않은 미래
한국의 어느 도시. 지금 대한민국은 어수선하다. 왜? 바이러스 때문이다. 이름은 DMZ 바이러스. 바이러스는 전 세계를 강타해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 치료제는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초반부에 이 치료제가 개발됐다는 뉴스가 나오기 때문이다. 남한의 한 과학자가 발견한 바이러스 항체. 남북이 협력해서 치료제를 만들 계획이었지만 무슨 이유엔가 여자아이가 실종됐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을 알려주는 뉴스를 뒤로하고 주인공 남자는 한 모텔의 침대에 누워 있다.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기상한다. 뭐지? 속옷 한 장만 달랑 입고 허리를 펴 일어나려는 찰나 총알이 TV에 박힌다. 주인공이 누워있던 침대 근처에 총기로 무장한 용병이 와르르 달려든다. 정병호 박사 어디 있어? 방금 TV에 나온 뉴스는 관객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목적이지 주인공 들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서 다짜고짜 모르는 사람을 묻는 상황에 이게 뭔가 싶었다. 주인공에게 보이는 건 핏자국이 군데군데 있다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것 같은 상황. 맨발바닥에 피를 묻히며 잡생각에 빠질 찰나 전화가 울린다. 받는 주인공. 전화의 상대는 남자의 이름을 ‘카터’라고 설명한다. 전화 상대는 남자에게 뒤에 있는, 총기로 무장한 여자에게 전화를 바꿔달라고 말한다. 전화를 바꿨다. 그리고 폭탄이 터져 전화를 받은 이의 머리가 날아간다. 속옷만 입은 채로 옆 건물로 뛰어내린 카터. 귀에 들리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하다. 전화랑 상관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여러 가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쏟아지는 대답에 카터는 경악한다. 뛰어내린 옆 건물에 있던 수많은 이들을 비롯해 엄청나게 많은 인원들이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고, 위험천만한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카터는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DMZ 바이러스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에서 남과 북 그리고 인류를 구해낼 수 있을까?
드라마 잘 안 봐요
난 드라마 잘 안 본다. 그래서 사실 요즘 핫한 배우들 잘 모른다. 넷플릭스 순위권이 아니면 웬만하면 재생하지 않는 나. 그 유명한 <비밀의 숲>이나 <나의 아저씨>도 보지 않았다. 이에 호응하듯 당연히 <굿 닥터>도 보지 않았다. <앨리스>와 <엽기적인 그녀>라는 드라마도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제빵왕 김탁구> 말고는 사실 주원 배우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예전에 <1박 2일>에 출연한 거? 그거 빼고는 배우 주원의 이미지가 별로 없다. 그래서 주원이란 사람이 뭔가 연기를 하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상기한 <제빵왕 김탁구>도 출연한 사실만 알지 본방을 본 적은 없다). 근데 이 영화에서 정말 고생 많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몸 키우는 게 액션 영화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일단 그 몸도 예쁘게 키워야 한다. 그리고 몸 쓰는 게 어색하지 않아야 한다. 또 이 영화 액션 자체는 롱테이크 형식을 많이 쓰고 있어서 암기도 잘해놔야 한다. 떨어지고 부수고 쏘고를 2시간 동안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다치는 것도 많이 다쳤을 것 같다. 예전에 <굿 닥터>에서 좀 특별한 역을 맡아 연기 잘한다는 평을 들었던 것으로 아는데 내가 직접 그걸 확인할 수 있던 건 좋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좋은 게 뭘까? 바로 기존 배우들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주원 배우가 영화 필모그래피는 처참하던데 이 <카터>에서의 원맨쇼를 바탕으로 좋은 역할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올해 좋은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다. 다른 해 같으면 이름이 시상식에서 자주 불릴 텐데 올해가 워낙 죽음의 조라 이번 년에는 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술 할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주원 배우의 연기 하나는 정말 고생 많았고 박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묻히기엔 아까운 퍼포먼스였다.
칼 같은 여집합
얼마 전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그레이 맨>이 개봉했다. 여기도 조직의 비밀을 파헤지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근데 이 <그레이 맨>은 최소한의 서사가 있다. '비밀 발견 - 비밀 파헤치고 - 흑막과 전투 - 엔딩'이라는 전형적인 소재긴 하지만 루소 형제는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액션을 사용한 셈이다. 이를 위해 크리스 에반스라는 배우를 섭외했고 그의 퍼포먼스는 영화의 톤을 만들어 주는 좋은 연기였다.
이 영화 역시 액션이 중요하다. 초반부 속옷만 입고 맨몸액션을 보여주는 주인공. 촬영이 롱테이크 형식이기 때문에 쉬는 것은 없다. 액션을 열심히 보여준다. 낫 비슷한 것으로 빌런들을 무찌른다. 와. 이걸 한다고? 촬영과 주원 배우의 열일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피칠갑이 되는 카메라. 요리조리 흔들리며 카터의 처절한 싸움을 보여준다. 수십 명과 싸운 카터. 속옷만 입은 맨몸이었지만 왜일까 멀쩡하다. 이게 초반 20분 정도 되는 부분이다. 카터에게 과제가 있다. 바이러스의 전염병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아이를 구출하는 것이다. 그럼 혼자서는 안되니까 당연히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국정원과 접촉하는 카터. 그렇게 5분 대화한다. 그 5분 안에서 조용히 설명만 듣나? 아니다. 방해꾼들을 떨어트리는 장면이 몇 개 있다. 5분 대화하고 또 7분 정도 액션 신이 있다. 그러고 나서 또 주인공이 위기해 처한다. 대화하는 장면이긴 한데 총을 갖고 대화한다. 총을 갖고 대화하다가 도망가야 하니까 또 액션이 일어난다. 액션 하다가 지치면 멜로인지 드라마인지 모를 시퀀스가 있다. 근데 그 장면 중에서 갑자기 총을 맞는다. 보통 내가 아는 액션영화는 액션 비중이 엄청 높진 않았다. <범죄도시 2>나 <탑건 : 메버릭>만 봐도 전자는 강해상의 악랄함을 보여주는 시퀀스를 몇 개 넣었다. 후자는 아이스맨을 위시로 한 여러 인물 간의 이야기를 넣었다.
이렇게 서서히 쌓은 감정선을 부수고 난 후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 위해 액션 신을 넣었다. 근데 이 영화는 다르다. 러닝타임 중 한 70%을 싸우는데 쓴다. 그래서 서사는 30분 정도 할당하나? 그래서 같은 내용을 1시간 30분 넘게 보려니 지루할 수밖에 없다. 아 또 싸워? 난 이야기 좀 보고 싶은데. 근데 그 막상 만들었던 이야기가 잘 만들었냐? 그것도 아니다. 일례로 주인공의 정체성과 관련된 갈등이 있다. 이거 빼도 서사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게 무슨 긴장감을 주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어차피 러닝타임 거의 대부분이 액션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너무 큰 액션 비중 때문에 오히려 심심해 보인다. 인물끼리 대화하는 신을 볼 때마다 좀 방해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또 싸울 거면서 왜 대화하지? 갑자기 또 총알 날아들 것 아닌가? 형식의 간단명료함이 러닝타임을 지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1/10으로 감소했다. 또 후반부에 주인공과 관련된 반전이 있다. 이 반전도 좀 많이 억지로 구겨 넣었다.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근데 왜 작위적으로 느껴질까? 생각해보면 액션 때문이다. 액션에서 어떤 장면을 넣어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삐뚤빼뚤 엇갈린다. 이 외에도 거의 모든 게 다 불필요하다. 초반부 등장하는 마피아. CIA가 개입하는 이유. 굳이 넣어야 했던 남북관계까지. 바이러스라는 소재는 <테이큰>, <아저씨>와 비교하려고 넣었나?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인을 생각해보면 주객전도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많은 요소들이 액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극초반부를 제외한 나머지 러닝타임을 전속력으로 집어던진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무조건 장점도 아니야
근데 액션이 잘 뽑았다? 무작정 그렇다고도 볼 수 없다. 일단 초중반부에 오토바이 액션 신이 있다. 막 서로 쫓고 쫓기다가 어떤 사람의 오토바이가 폭발한다. 그럼 오토바이가 불타겠지? 오토바이가 불타면 주변 물질에 불이 붙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다르다. 옆의 그 어떤 것도 불에 그을리지 않는다. 또 카터가 오토바이 사이에 껴서 적을 상대하고 빌런들을 넘어트린다. 이때 오토바이 날아가는 형태가 CG 같다. 또 이 시퀀스에서 모든 인물이 다 검은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구분도 안 된다. 촬영도 롱테이크 형식을 빌려왔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엄청 흔들린다. 그럼 액션이 보이지도 않아서 화려한 것만 눈에 보인다. 이 영화의 액션 신은 이런 것이다. 자세히 보면 장점이라곤 주원 배우의 열연만 남는 부분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에서 카터가 비행기를 타는 장면이 있다. 이 시퀀스의 모든 것은 신기할 정도다. 일단 이 시퀀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갑작스러운 건 다른 우선순위를 두는 것으로 하자. 이 비행기엔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이 탑승한다. 그럼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외교란 게 있다. 만약 어떤 나라 사람이 다른 국가의 누군가를 죽인다. 근데 그걸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 죽인다. 난리가 난다. 근데 그 조금의 후폭풍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총만 쏴댄다. 그리고 그 무작정 총만 쏴대고 조직을 배신하는 일을 사람들이 너무 쉽게 넘어가준다. 얘들은 목숨이 아깝지 않나? 너무 극단적인 것만 계속 보여주는 것 아닌가?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비행기 아래로 떨어지는 시퀀스로 이동한다. 이 시퀀스는 모든 지점에서 CG 티가 난다. 하늘에 있는데 어쩜 그리 총을 잘 쏘는지, 떨어지는 속도 무시하고 총을 쏠 수나 있는지, 몸을 어떻게 저렇게 자유자재로 구사하는지, 저 높이에서 비행하고 살 수 있는지, 윤희는 과연 무슨 잘못인지 싶다. 떨어지는 인물들의 몸과 배경인 하늘이 안 맞는 건 둘째로 치고 나서라도 이 장면에 들어간 모든 부분이 이상하다. 이 지점에서 영화 창을 끄고 싶어질만큼.
고르지 못한 연출법
근데 그렇게 장면을 구상하다 못해 영화의 톤이 들쭉날쭉하기까지 하다. 일단 카메라가 엄청 흔들린다. 왜 흔든지 모르겠다. 근데 너무 흔들려서 사람에 따라 산만하다고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형식이 롱테이크 형식이다. 이거 롱테이크로 이야기 전개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장면 장면마다 이어 붙여도 영화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이 <카터>는 그런 촬영기법을 고수하다 보니 일단 보는 것 자체가 어지럽다. 만약 극장에 걸렸다? 멀미 느끼는 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 중간에 CIA 책임자로 나오는 배우 말고 대사 처리가 다 뭔가 안 맞는다. 일단 주인공 주원 배우 대사 처리하는 톤이 좀 이질감이 들었다. 이 배우 나오는 영상물 처음 보는데도 이질감이 느껴졌다. 목소리 톤에 쇳소리가 들어가니까 톤이 일정해서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강했다. 눈빛이랑 액션은 좋은데 대사 치는 톤만 유달리 이상한 것이 안 그래도 많은 장점을 부각하기까지 한다. 주원 배우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 배우들이 자주 나온다. 음.. 어.. 물어보고 싶다. 이 부분이 최선이었는지. 사실 외국인 배우만 뭔가 이상한 연기법을 갖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배우도 마찬가지다. 근데 외국인 배우들 중 쓸데없는 대사가 많았어서 그게 더 도드라지는 경향이 있다.
극장에 걸렸으면
이 글을 쓰기 전에 과연 내가 솔직하게 할 말을 쓰는 게 맞나? 싶었다. 한 영화에는 많은 사람들의 돈과 노력이 들어간다. 미술팀도 섭외 팀도 장소 로케이션 팀도 다들 고생해서 영화가 만들어진다. 물론 다들 고생 많으셨을 것이다. 근데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솔직히 올해의 한국영화 괴작 중 최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게 기대작 소리를 들었다면 주원 배우의 커리어에 영향이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물며 엔딩까지 이 영화는 과연 무엇을 위해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있다. 특히 엔딩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안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엔딩까지 보면 그래서 뭐?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 넷플릭스로 시원한 액션 보고 싶은 분들에겐 추천하고 싶다. 그 외의 분들에게는 솔직히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넷플릭스로 보는 재미를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렸다. 열연을 펼친 주원 배우와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그 대신 정병길 감독은 이 영화와 관련된 혹평을 잘 딛고 일어나시길 기원한다. 액션 연출 포트폴리오라면 이 영화는 교보재가 될 뻔했다. 아무튼 이 영화가 극장에 걸렸다면 아찔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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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윅' 시리즈의 총합체이자 진일보
복수는 나의 것
누군가 복수는 차갑게 해야 최고로 맛있는 반찬이라 했던가. 존 윅은 뭔가 연습하고 있다. 그의 주먹에서 대포 소리가 난다. 펑. 펑. 분노에 씌인 사람처럼 재활운동에 힘쓰고 있다. 카메라는 바워리로 향한다. 어딘가 향하는 바워리. 바워리의 도착지는 존 윅이 나무 허수아비를 샌드백삼아 쾅쾅 두드리고 있던 방이었다. 존에게 묻는 바워리. ‘준비 됐나? 존?’ ‘물론이지’ 존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머지않아 최고회의 장로를 암살한 존. 이제 시작이다. 시체 직전까지 갔던 존은 최고회의든 최저회의든 다 씹어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윈스턴과 카론. 도착한 곳은 그라몽 후작의 방이었다. 장황한 소리를 들어놓는 그라몽 후작. 결론은 간단했다. 자긴 결국 인내심이 다 됐다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난 그라몽 후작. 1시간 길이의 모래시계가 다 되자 뉴욕 호텔을 폭파시킨다. 당황하는 윈스턴과 카론. 그라몽 후작은 두 사람에게 파문을 선언한다. 위기에 봉착한 윈스턴과 카론. 두 사람은 두 사람 나름대로, 존 윅은 존 윅의 방식으로 최고 회의를 향한 복수극을 계획한다. 세명 다 알고 있다. 이런 식을 반복하다간 끝이 없다는 걸. 그래서 어떻게? 윈스턴에게 뭔가 대안이 있는 것 같다. 과연 이 길고 긴 복수극을 존 윅은 끝낼 수 있을까?
형 왔다
4년 만에 돌아온 시리즈의 신작이다. 기존 '존 윅' 시리즈 1,2,3편은 그야말로 액션 대잔치였다. 1편 처음부터 3편 끝까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액션은 다 때려 박은 이 시리즈. 이 시리즈에서 액션 중 어느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영화 전부 다 장난 아닌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상 깊던 장면을 뽑아보자면, 1,2,3편에 하나씩은 다 있다.
우선 1편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내를 병마로 잃어 슬퍼하던 존 윅이 그녀가 남겨놓은 자동차와 강아지를 뺏은 인간들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조직 하나를 깡그리 몰살시킨다. 추후 개봉하는 2,3,4편보다는 액션에 감정이 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구현하듯 서서히 하나하나 피격하는 존 윅의 사격솜씨가 느껴진다. 큰 저격용 총을 가지고 악당들의 머리통에 총알 박는 쾌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를 위해 총을 맞고 나서 난 후의 리액션 연기가 좋았다. 또 영화에서 좀 사족처럼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을 제외한 것도 이 액션 쾌감을 덧붙여준다. 무슨 말이냐? 존 윅이 아내랑 얼마만큼 친한지 그런 설명 필요 없다. 윈스턴과의 관계? 그냥 보면 안다. 이 사람이 얼마만큼 업계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나? 어차피 싸우는 거 직접 보면 안다. 빌런의 카리스마? 그게 왜 중요해? 내내 때려 부수는 쾌감과 키아누 리브스의 비주얼로 액션의 끝판까지 영화를 끌고 간다.
다음 2편이다. 2편은 영화의 형식이 눈에 띄었다. 영화 초반부에 윈스턴이 컨티넨탈 호텔에 대해 계속해서 강조한다. 존과 카론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당연히 관객에게 하는 말이다. 이 강조한 규칙은 영화 전반적으로 작동하는 핵심이 되어 극을 이끈다. 단순한 서사였던 1편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간단한 2편. 그러나 이 지점에서 영화는 서사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4편으로 이어지는 존 윅의 감정선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영화 곳곳에서 존(키아누 리브스의) 감정연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이 2편 <존 윅 : 리로드>의 액션도 굉장하다. 글쓴이가 뽑는 최고의 장면은 1편에 등장한 필기구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 떡밥을 회수했다는 것 자체도 나름 가치가 있지만 맨몸 액션의 쾌감이 이뤄 말할 수 없다. 또 이 작품 후반부에서 장소를 이동해 벌이는 격투신이 있다. 이 과정에서 나이프를 이용한 액션을 보여준다. 사실 ‘존 윅’을 위시로 한 액션 시리즈물에 사용되는 격투 연기는 행동이 재빠르고, 테이크가 짧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윈터 솔저와 블랙 팬서가 맨몸액션을 보여줄 때 샷이 짧게 구성되어 있다. 덕분에 장면이 확확 바뀌는 느낌이 들어 화려하다. 또 이 짧은 편집방식은 영화의 특성과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왜냐? 영화는 수많은 히어로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러려면 샷이 짧아야 히어로들을 잘 보여줄 수 있겠지? 그러나 반대로 ‘존 윅’ 시리즈는 다르다. 어떤 액션을 뽑을 때 테이크를 길게 길게 가져가서 생동감을 살린다. 이 말은 곧 배우들이 이 액션 동작을 일일이 다 외워서 찍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배우들과 촬영팀의 열일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다음은 3편이다. 3편에도 전작들과의 차이점을 부여한다. 바로 액션에 감정을 넣으려는 시도다. 이 영화의 서사 역시 단순하다. 규칙을 어긴 존 윅이 세계 도처에 깔려있는 킬러들과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이다. 이 단순한 이야기구조는 ‘존 윅이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처절하게 싸우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이 핵심을 앞에 두고 내내 주파하는 영화라 처절함을 점점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액션은 역시 총기 액션과 나이프 파이팅이다. 왜인진 잘 모르겠지만 사무라이라는 모티브가 영화에서 사용됐다. 좀 갑작스러웠던 설정 이긴 하지만 이런 설정들이 영화 나름대로 액션을 상징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시리즈의 총합체와 진일보
이 영화는 위에 상기한 1,2,3편의 장점을 그대로 다 때려 박았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도시 두 번 바꾼다. 첫 번째는 오사카, 두, 세 번째는 유럽으로 간다. 3편에서 동양적인 소재가 들어갔던 걸 암시라도 했던 듯이 이 작품에서 사 사무라이라는 이미지를 나름 멋있게 활용한다. 또 2부에선 존 윅이라는 킬러의 과거와도 관련이 있다. 사실 2편은 존 윅의 과거와 싸우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본작 2부에서는 존윅이 과거의 어떤 것을 청산하기 위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 있다. 3부는 존윅의 현재와 과거를 다뤘다. 과거에서 맺었던 인연이 영화에서 반동인물이 된다. 그러나 이 인물이 들이닥친 현재는 영화에서 존과의 공통점을 이루는 지점이 된다. 또 존 윅의 현재가 얼마나 치열하고 내내 들끓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도시에서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원형을 이루며 싸우는 액션 신을 본다면 3편 <존 윅 : 파라벨룸>의 절실함이 더 깊게 느껴진다.
또한 시리즈의 진일보도 느껴진다. 영화를 보고 뭔가 알 수 없이 후련함과 우울함이 느껴졌다. 영화 전체적으로 존윅에게 깔려있는 처절함 때문이었다. 영화는 자유를 차지하려는 갈망을 3시간에 걸쳐서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총알 한 발 주먹한 방에 존윅의 마음가짐이 담겨있다. 이건 뭐 극후반부 하이라이트 신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초반부 어떤 사람을 암살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 인물이 혼자서 싸운다는 느낌이 들게 하고, 라디오를 등장시켜서 일대 다수의 갈등구조를 연상시키게 하는 부분이 그의 근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몇몇 장면에 ‘혼자’라는 느낌을 강화시켰고, 또 곳곳에 보이는 가족관계 묘사가 있어 존 윅이 얼마나 족쇄에 묶여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게끔 한다. 그냥 장르적인 쾌감으로 끌고 가던 전작과는 다르게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기 위해 액션이 쓰인 셈이다.
세계여행
영화는 아시아와 유럽을 이곳저곳 어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선 오사카를 공간적으로 설정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오사카 하면 일본에 속해있는 도시다. 일본과 액션 하면 생각나는 것은 사무라이다. 뭐 사무라이가 일본의 역사에서 일정 비중 차지했다는 것엔 여지가 없다. 뭐 넣을 수도 있지? 그런데 이 사무라이에 대한 묘사가 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는 것은 아쉽다. 아니 임진왜란 때 조총 쓰던 사람들이 너무 낡게 전투하는 것은 아닌가? 이 지역에서 킬러들의 존재감이 세서 망정이지 이 디테일은 영화에서 초반부를 설정하는 데 있어 크게 작용할 뻔했다. 물론 호평할 부분도 있다. 1부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두 부녀는 정말 멋있게 캐릭터를 설정했다.
다음은 2부다. 2부는 영화에서 어떤 분에 따라 좀 루즈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듯싶다. 이는 3부에서 1,2부를 상회하는 강력한 임팩트가 3부에서 찍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즉슨 2부가 약간 준비물같이 들린다는 점이다(물론 3부보다 못한다 뿐이지 여기서도 액션은 좋다). 그런데 뭐 3부도 마찬가지지만 방탄 정장을 무슨 치트키처럼 사용하는 감이 좀 있지 않았나 싶다. 다음 3부는 정말 굉장하다. 이 지역이 워낙 여행으로 유명한 도시다. 그래서 이 도시를 중심으로 우리가 잘 아는 랜드마크에서 액션신을 보여준다. 이때 묘사했던 도시의 풍광은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강점으로 묘사될 만하다. 또 이 도시의 문(?) 랜드마크에 실제로 가봤을 때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디테일을 구현하듯 세계의 명소들이 갖고 있는 특성들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이 3부에서 액션신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대단하다. 특히 어느 교회엔가 들어가서 액션 신을 벌이는 부분은 촬영이 어마어마했다고 느낀다.
캐릭터 쇼
이 ‘존 윅’ 시리즈를 액션 시리즈물로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시리즈의 강점 중 하나는 캐릭터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 1,2,3편에서 존 윅을 제외하고 기억에 남았던 캐릭터가 몇 있다. 윈스턴 캐릭터가 1편에서 존을 도와주던 방식, 2편에서 여성 캐릭터와의 맞대결, 3부에서 할리 베리가 맡았던 역할 등 이 시리즈는 캐릭터의 멋을 살리는 데 있어 공을 많이 들인다. 이 4편에서는 이런 지점이 유지 내지는 강화되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으로 1부의 아키라, 2부의 ‘미스터 노바디’. 3부의 케인이다. 이 세 사람은 서사에서 중요한 입장에 놓임과 동시에 사람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이 특성을 활용한 액션신을 명확한 촬영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서사에서 주요 인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캐릭터들 중에 견자단이 맡은 케인은 정말 훌륭하다. 60대 언저리의 나이와는 맞지 않는 날렵한 액션, 선글라스를 꼈지만 느낄 수 있는 황망함까지 액션 배우로서 이름을 날린 경험치를 톡톡히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으로 뽑는 부분인데, 아마 견자단의 액션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티켓 가격을 충분히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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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밀성 장인의 퀴어 외로움 탐구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친밀성‧사랑의 미묘한 감정을 포착해 극적으로 만드는 데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가진 감독 중 하나다. 상류층 중년 여인의 마음에 불어닥친 고요한 폭풍을 펼쳐내는 〈아이 엠 러브〉(2011), 치정癡情이 치사致死 사건에 이르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비거 스플래쉬〉(2017),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 사회가 금지하는 사랑을 ‘식인’에 빗댄 충격적이고도 강렬한 러브 스토리 〈본즈 앤 올〉(2022) 등등. 야심 차게 도전한 공포영화 〈서스페리아〉(2019)는 영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는 〈챌린저스〉(2024)로 다시금 ‘자기 주제’로 돌아와 그를 추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윌리엄 버로스의 원작 〈퀴어〉의 연출을 그가 맡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린 이유였다.
오래전에 읽은 원작의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퀴어》와 짝을 이루는 작품인 《정키》와 더불어, 우울하고 건조한 분위기만이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퀴어》는 어느 외로운 부자 게이가 젊고 아름다운 남성의 관심을 구걸하며 내내 괴로워한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줄거리가 없는 작품이니까.
퀴어 소설, 퀴어 영화에서 한물간 게이 남자들은 보통 주변부에서 조연 역할만 맡는다. 젊고 파릇한 주인공들이 눈앞의 사랑을 붙잡지 못했을 때 어떤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지 환기하는 부수적이지만 중요한 역할 말이다. 제임스 볼드윈의 퀴어 고전 소설 《조반니의 방》부터 몇 년 전 개봉해 호평받은 영화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까지. 게이 텍스트에서 ‘제때’ 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물들은 늘 되고 싶지 않은 미래만을 표상했다.
〈퀴어〉의 특이점은 여기서 출발한다. 주인공 리는 처음부터 젊고 예쁜 남자를 혈안이 되어 찾아다니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남자랑 ‘둘만 있으면 자려고 드는’ 리의 평판은 바닥이고, 그런 리의 외로움을 알아보는 몇몇 멕시코 청년만이 리에게 몸을 허락한다. 그러던 와중 눈부신 청년 유진이 나타난다. 리는 유진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부터 그에게 ‘영혼이 이끌린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유진을 욕망하는 리 영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유진을 사랑스럽게 다듬는 영혼과는 달리 제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육체다. ‘차갑고 미끄러워서 잡기 어려운 물고기’와도 같은 유진의 곁에서, 리는 내내 전전긍긍하고, 안달복달하며, 처연할 정도로 애절하다. 일주일에 두 번만이라도 내게 다정하게 대해달라는 리의 간청은 자유롭게 유진을 애무할 수 있는 영혼과 달리 대체로 그를 냉정하게 대하는 유진 육체의 호소와도 같다.
‘대대로’ 퀴어의 피를 타고났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에 유진의 기분과 태도에 다라 삶의 모든 행복이 결정되는 또 다른 비참이 더해진 리의 가여운 외로움이야말로 이 영화가(그리고 원작이) 근본적으로 다루려 하는 것이다. 리가 공허함에 마약에 빠지고, 텔레파시를 가능케 해주고 심지어는 상대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게까지 해준다는 신비한 약초 ‘야헤’를 찾아 나서는 것은 모두 이 외로움 때문이다. 리가 유진과 함께 에콰도르의 어느 숲으로 들어가 야헤의 비밀을 탐험하는 부분은 전반부보다 몰입감이 현저히 떨어지고, 감독이 아직도 〈서스페리아〉에 미련이 남았나 싶은 불길한 짐작을 주기도 하지만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유진에게 절대적 타자일 수밖에 없는 리의 외로움에 초점을 맞춰본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리는 야헤 경험을 통해 이성애와 동성애를 오가는 유진 역시 나름의 불안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래봐야 그 대상이 리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나이든 리가 수십 년 후에도 여전히 유진을 갈망하고 있다는 듯한 결말의 장면은 퀴어의 외로움을 너무 감상적으로 해석한 것만 같아 아쉽다. 늙고 한물간 게이인 리의 외로움은 비단 유진의 거부에서만 기인하지 않는다. 이 외로움은 게이/퀴어 존재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엔딩 장면은 이를 유진을 향하는 개별적인 마음으로 축소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 장면에서, 문득 〈문라이트〉의 열린 결말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다시금 생각했다. 친밀성 장인의 퀴어 외로움에 대한 감각적인 이번 탐구는, 절반의 성공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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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보면 희극
소위 '사적 다큐' 작품들을 좋아한다. 나와 공통점도 별로 없는 개인의 삶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는데, 들여다보면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나 보편적인 마음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지점에서. 게임을 즐기지 않았어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보며 동년배의 마음을 뭉클 느꼈고, 영재교육이나 부동산 투자와 먼 삶을 살았지만 <디어 마이 지니어스>나 <버블 패밀리>를 보며 동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노력, 착잡함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박강아름 감독의 전작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도 재미있게 보았다. 오랜 세월의 영상을 잘라 모아, 박강아름 감독 자신을 둘러싼 외모 품평부터 소개팅 후기, 복잡한 시선을 담았다. 애정 어린 친구의 조언일 때도 있고, 학생들이 툭툭 뱉는 말일 때도 있지만, 이들 누구의 말도 낯설지 않다. 내게도 익숙한 지식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에는 다양한 방향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사실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강요받는 때가 훨씬 많으니까. 그나마 협소한 변주라도 이루어지며 조금씩 미의 기준이 확장되어 온 지금에 비해, 이전은 더했다. 우리는 참 야만적인 사회에 살아왔고, 살고 있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의 박강아름 감독을 담으며 마친다. 상대의 무례함을 갈라내어, 그들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몸무게를 재며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슬퍼했지만 거기에 카메라 무게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마지막에야 깨닫는다. 우리가 보는 우리에게도 그런 시선의 무게가 항상 달려 있겠지. 그리고 분명 카메라보다 무거울 것이다.
그리고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끝에 함께 있던 두 사람은 강아지 슈슈와 함께 프랑스로 향한다. 프랑스어를 아는 아름이 행정과 경제를 맡고, 프랑스에 큰 뜻이 없었던 남편 성만이 가사와 이후 육아까지 주로 맡게 된다.
한국에서 한 사람의 여성과 남성이 만나 결혼하는 풍경을 하나의 그림으로만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보편적인 스토리라인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흔히 말하는 보편적 삶의 모양새란 게 있기도 하고, 어쩐지 결혼이 가까워 오면 제각각의 연애담들이 소실점 따라가듯 비슷한 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박강아름 감독과 성만 씨의 결혼은 그 보편적 모양새와 조금 다르다. 프랑스로 떠난 영화감독과 그 배우자라는 점도 그렇지만, 맞벌이를 하면 했지 남편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경우는 확실히 드무니까. 그럼에도 이 영화에 그려진 정서는 보편적이다. 끝없는 가사는 전쟁 같고, 육아는 눈 뗄 틈조차 허락하지 않고, 생활비는 늘 빠듯하고, 일상은 숨 가쁘게 바쁘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에서 인물들의 말을 평가하고 또 나를 돌아보며, 박강아름 감독의 몸으로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를 깊이 비춰냈다면,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는 결혼과 결혼에서 파생되는 노동과 두 사람의 관계를 촘촘하게 이어, 질문을 던진다.
두 사람의 일상에도 먹구름이 낀다. 독박 육아와 끝없는 가사에 지친 성만은 주부 우울증을 앓고, 출산 이후 이전과 달라진 몸으로 (그리고 임신과 출산이 몸에 이런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걸 전혀 몰랐던 마음으로) 학교 생활과 영화 작업을 병행하는 아름은 너무 바쁘다.
결혼은 원래 이런 걸까? 왜 결혼을 한 걸까? 결혼이란 무엇인가? 박강아름 감독은 질문하기 시작하고, 그 질문을 해소하고자 자신의 기억도 돌아보고 사람들에게 질문도 던져 본다. 그 수단은 집에 차리는 한 테이블 식당, 외길식당이다. 성만의 주부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생활로 시작했다가 멈춘 프로젝트를 다시 굴려본 것이다.
수없는 질문과 대화가 해답을 찾아줄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다양한 부부 혹은 연인에게 그들만의 서사가 있고, 상황이 있고, 입장이 있으니까. 부분적으로 공명할 수는 있다. 프랑스인과 결혼해 프랑스에 거주한 한국인 여성이 성만의 깊은 외로움을 안쓰러워하는 장면에서처럼. 박강아름 감독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공명하며 질문을 던지듯이.
* * *
이 글을 쓰기 직전, 설문 요청을 하나 받았다. 한 문항은 현재 나의 상태와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라고 했고, 보기에는 결혼과 자녀 유무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가 들어 있었다. 500자로 서술하라고 해도 답하기 어려운 고민들이지만, 아무튼 질문은 '현재 나의 상태'에 '가장 가까운' 것을 물었으므로 나는 답했다. 결혼과 자녀 둘 다 원치 않는다,라고. 인생은 시시로 몸피를 뒤트니 앞으로 언제 내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보기 중 제일 가까운 선택지였다.
얼핏 단순한 객관식 선택지 같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질문과 고민이 깊다. 결혼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닌 지금 결혼 적령기로 분류되는 나이를 살면서 더욱 그렇다. 이십대 내내 생각했다. 결혼이라는 관계는 희망적으로 바라보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하기 위한 목적의 결혼은 할 마음이 없다고. 지금 품고 있는, 아직은 잗다랗게 반짝거리는 꿈의 궤도를 모두 수정해야 하는 결정이니만큼, 잘할 수 없을 바엔 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이 '잘'은 나의 인력으로 되지 않으니, 현재 나의 상태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원치 않는다'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보면서는 저런 결혼이라면 참 좋다, 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이 덩케르크의 바다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두 사람은 흐린 날 바다를 찾는다. 성만은 몸이 좋지 않아 불편하고, 아름은 성만이 투덜댄다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 가볍게 던지는 타박과 잠깐의 침묵. 익숙한 갈등의 언어들. 그러나 그 갈등 끝 두 사람이 하는 것은, 유모차가 슥슥 나가지 않는 모래사장에서 유모차를 들고 낑낑거리며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손발을 맞추고 수평을 맞춰 원활하게 척척 들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비바람이 맹렬히 몰아쳐대 바다는 오래 보지도 못했다. 우산도 들어야 하고 사진도 찍고 싶어 두 사람은 또 생각이 일치하지 않고, 소리 없이 멀리 보이는 조그만 모습으로도 두 사람이 티격태격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끝에 굳은 얼굴로 나란히 기차에 앉아있는 두 사람에게, 아기 보리는 스노볼을 내민다. 엄마가 흔들어준 스노볼을 보며 생긋 웃다가 아빠에게 그것을 내민다.
언젠가 스리랑카 바다에서, 나중에 누구 보여줘야겠다 생각하며 사부작사부작 사진과 영상을 몇 개 찍고 돌아섰던 적이 있다. 흐린 날 바다 아니라 맑은 날 청록빛 바다라도 혼자 보고 돌아서는 길은 조금 쓸쓸했다.
비록 당일에는 굳어진 입매와 편치 않은 침묵으로 기억되더라도, 언젠가 훗날 돌아보면 유모차를 들고 낑낑거리다 비바람에 휩쓸린 기억에 웃음 짓게 된다면. 결국 함께 있다는 것, 함께 산다는 것이 결혼 아닐까. 어쩌면 순적하고 매끄러운 삶은 유니콘처럼 환상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늘 우당탕쿵탕 굴러가는 게 삶이려니 받아들인다면, 초연하고 호젓하지는 못해도 스노볼처럼 작게 반짝이는 일상을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 꼭 비극과 대치하지 않더라도 맞는 말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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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져도 끝나지 않는 잔혹한 어른들의 게임
오징어 게임 (Squid game, 2021)
개봉일 : 2021.09.17 (넷플릭스 공개)
감독 : 황동혁
출연 : 이정재, 박해수, 오영수, 위하준, 정호연, 허성태, 아누팜 트리파티, 김주령
해가 져도 끝나지 않는 잔혹한 어른들의 게임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까지. 매번 다른 느낌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황동혁 감독의 신작 <오징어 게임>이 9월 1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채 삶의 끝에 서있는 456명의 참가자와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고도 남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상금 456억. 수많은 참가자들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굶거나 빚쟁이에게 찔려 죽느니 목숨 걸고 인생 한번 바꿔보자며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한 사람당 1억. 최후의 1인에겐 456억. 누가 이런 서바이벌을 벌였는진 알 수 없지만 참가자들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돈다발에 “이건 진짜다.”라는 믿음을 얻는다. 옆에 누워있는 참가자는 믿을 수 없지만 돈만큼은 착실하게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믿지 못할 경쟁자들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공격성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이 게임에서 죽는 게 나만 아니면 되니까. 생판 모르는 이의 목숨 vs 추가되는 1억 + 나의 생존 중 어떤 걸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당연 후자가 아닐까.
<오징어 게임>은 황동혁 감독이 2008년에 구상하고 2009년에 쓴 이야기다. 당시 일본 서바이벌 물인 <라이어 게임>, <배틀 로얄>과 같은 작품들을 보며 서바이벌 물의 요소를 한국적으로 접목해 내기 위해 고민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 <오징어 게임>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약간의 각색이 더해지긴 했지만 이런 소재를 10여 년 전에 이미 모두 구상해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쉬웠다. 그 당시에 바로 제작이 됐다면 지금보다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 사이에 영화 <헝거게임>이나 웹툰 <머니게임>처럼 돈과 명예를 건 서바이벌 물들이 지나간 후라 서바이벌 물 자체의 신선함은 조금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오징어 게임>은 아이들의 게임을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다른 서바이벌물들과 차별화를 둔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게임 참여자들은 서로를 의지하다가도 한순간에 의심하고 배신하고 결국엔 서로를 해하게 된다.’는 서바이벌 물 특유의 심리적 공포는 똑같이 존재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다른 서바이벌 물들과 다르게 조금 더 단순하고 귀여운 게임을 반복한다. 어릴 적 골목에서 친구들과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게임들 말이다. 9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엔 총 6종류의 추억의 게임이 등장하는데, 어떤 게임이 나오는지는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전부 언급하지 않겠다.
이 시리즈의 차별점이자 가장 큰 매력은 낯설고 아기자기한 세트장과 디테일한 요소들이다. 강박증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 만큼 완벽하게 딱 떨어지는 각진 물건들과 진짜 같은데 가짜 같은 공간들이 담고 있는 무게감, 그리고 눈에 딱 들어오는 일꾼들의 핑크색 슈트와 선물 상자처럼 포장된 관들. 기계처럼 움직이는 일꾼들이 만들어내는 동작의 흐름들이 주는 묘한 분위기가 특히 만족스러웠다. 내용은 아름답지 않지만 눈에 담긴 세트장은 빈틈없이 마음에 들었다.
서바이벌 물 특유의 설정들과 게임의 일부로 인해 앞서 나온 여러 작품들과 비교되며 표절 논란을 함께 안고 가고 있지만 작품 자체가 완전한 표절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 장르적 특성과 플래그, 일부 장면과 소재를 모두 독창적, 독보적으로 구성하기엔 이미 서바이벌 장르가 쌓아온 이미지와 개념,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사람의 심리라는 틀이 있기에 앞선 작품들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무조건 욕하기보단 개인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오징어 게임>은 간단한 룰로 이뤄진 추억의 게임들을 돈과 목숨을 건 피 튀기는 생존 게임의 주제로 이용하며 어릴 적 우리의 모습,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의 간극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끌어올린다. 어릴 땐 친구들과 골목에서 웃으며 게임을 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어 인생 한번 뒤집어보겠다고 피 흘리고 절규하며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이 씁쓸하고 슬플 뿐이다. 그때는 술래가 되거나 게임에서 져도 딱밤 한방이나 인디언 밥 한 번이면 패자 벌칙으로 충분했는데 이 게임에서 탈락하면 무조건 죽는다. 탈락한 자는 죽는다는 게임 특성상 아무래도 잔인한 장면들이 다소 많이 등장하긴 한다. 총으로 사람을 쏘거나.. 사람의 신체가 망가진다거나. 많이 고어한 편은 아니지만 반복해서 노출되다 보면 거부감이 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목숨을 걸고 참여하는 게임 속 약육강식의 법칙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은 초대장을 받고 자신의 손으로 참가를 결정한다. 사람들이 우수수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갔던 참가자들은 현실에 떠밀려 대부분 다시 게임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최후의 1인이 내가 될 수도 있다며 확률을 계산하고,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이기심과 폭력성을 여과 없이 내보인다. 사람이 많아지면 당연히 무리가 생기고, 권력을 잡는 힘센 무리가, 나쁜 무리가, 그에 대응하는 착한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생존이라는 본능 앞에서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기 위해 어떤 행동까지 벌일 수 있는지. 추악하고 추잡한 본능의 단면을 제대로 훔쳐본 기분이었다. 근데 웃긴 건 왠지 이해가 가더라는 것이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선 충분히 그들처럼 행동했을지도..
게임의 참가자들은 게임장 입소에 앞서 똑같은 옷과 신발을 신고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받는다. 이들은 게임장의 위치도 모르고 당장 다음에 펼쳐질 게임 종목도 알 수 없고, 옆에 서있는 참가자의 이름도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을 컨트롤하는 사람들은 참가자들의 모든 걸 알고 있다. 이름, 나이, 사는 곳, 학력, 특이사항을 포함해 이들 인생의 대부분을 알고 참가자들 머리 위에서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가면에 그려진 도형과 가면의 종류에 따라 철저한 계급제로 운영되는 오징어 게임이란 작은 사회에서 참가자들은 얼굴과 몸을 속절없이 노출한 채 장난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 이 게임에선 가면에 그려진 도형의 각이 많을수록, (네모>세모>동그라미), 상급자의 개념인 듯하다. *
끝나지 않는 게임에 대한 피로도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무력한 참가자의 모습이 우리 모습과,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게임이 우리 사회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같이 살자”고 말할 여유도, 그런 약속을 지킬 여력도 없이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지쳐버린 우리들. 그리고 465명 중에 1등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1인을 가리기 위해 자비 없이 반복되는 게임들. 이 게임은 지옥이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일부분을 아주 크게 확대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일부 후기들에선 반복되는 잔인한 장면들, 다소 느리게 느껴지는 전개에 대한 아쉬움을 볼 수 있었는데, 6번의 게임을 지나다 보면 다소 피로감이 몰려오는 건 사실이다. 단순한 게임이지만 믿었던 이들이 서로를 배신하고, 결국엔 1명만이 남아야 한다는 룰 아래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긴장감과 허탈함의 반복이 주는 감정 소모가 굉장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예상은 했지만 진짜 싫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생존 게임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함께 지쳐간 기분이었다.
이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어릴 때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하던 게임들은 해가 질 때쯤, 엄마의 “얘들아, 밥 먹어~”라는 말과 함께 끝났는데, 고립된 섬 안에서 펼쳐지는 생존 게임에 참여한 이들에겐 게임을 중지시켜줄 사람이 없다. 주최자들은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을 중지할 수 있다.”는 조항을 걸었지만, 참가자들은 머리 위에 쌓인 돈을 포기하지 못한다. 말려줄 사람도, 욕심을 포기할 사람도 없다.
한낮에 시작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부터 밤처럼 어두운 세트장에서 치러진 징검다리까지,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가는데 생존에 대한 긴장감을 놓을 틈이 없다. 게임 주최자들은 여러 극한의 상황들을 연출하며 참가자들을 몰아가고, 차후엔 제발 극단적인 선택을 하라며 부추기기까지 한다.
게임 안의 인물들
돈과 생존이 달린 게임 앞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변화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주인공 기훈과 상우, 새벽이 그 변화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새터민 새벽은 아무것도 없이 동생과 덩그러니 남겨진 세상에서 엄마를 데려올 돈을 모으기 위해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새벽은 아무도 믿지 못한다. 게임의 초반, 새벽은 어떤 무리에도 끼지 않으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기훈에게 마음을 열고 마지막 순간엔 기훈에게 동생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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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는 <오징어 게임>의 최고 브레인이다. 서울대 수석 입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는 정형화된 지략가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생존에 있어 가장 계산적인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왔던 인물은 상우였다. 상우는 처음 게임에서 쫓겨나왔을 때 알리에게 차비를 빌려주거나 달고나 게임 직전 우산을 고른 기훈에게 게임 종류를 말해줘야 할지. 같은 양심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한다. 자신을 믿은 알리를 배신하고, 부상을 입은 새벽을 찌르고 끝내 마지막 게임에선 기훈에게 칼을 휘두른다. 그는 보통 선하게 설정되는 주인공(기훈)의 편에 함께하면서도 생존을 위한 이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마지막 게임에서 상우는 기훈에게 우승을 양보하며 죽음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기훈에 대한 믿음, 사과의 의미 50%와 허공에 돈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결단 50%가 합쳐진 일부 계산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훈은 약삭빠르기보단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가족도, 동료도, 어머니도, 내 인생도 챙기고 싶었기에 무엇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그는 엉망이 된 인생을 되돌리기 위해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다. 그는 약자인 1번 일남과 혼자인 새벽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게임 안에서 경쟁자가 된 상우에게도 옛 추억을 얘기하며 적대감을 하나도 내비치지 않는다.
좋게 말하자면 살육 게임 안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선인. 나쁘게 말하면 바보 같은 오지라퍼. 그런 상우가 변하게 된 건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상우가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인 순간부터였다.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칼을 집은 상우를 경계하던 기훈은 새벽의 죽음과 함께 방어와 공생이 아닌 공격을 선택하게 된다. 6번째 게임인 오징어 게임에서 공수를 결정하라는 질문에 ‘공격’이라 답하는 기훈의 대사로 그의 확고한 심경 변화를 느낄 수 있다.
1화의 시작, 기훈과 상우가 오징어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9화에선 어른이 된 두 사람이 생존을 건 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함께 골목을 뛰놀고 서로를 의지하며 자란 기훈과 상우가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몰리게 된 걸까. 문득 슬퍼지는 장면이었다. 기훈과 상우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만 마지막 순간엔 다시 떠오른 추억과 기훈의 결단으로 둘의 사이가 잠시나마 회복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너무 많이 변해버린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지영의 말대로 “6.25이후 최대의 비극”같은 게임이었다.
게임 밖의 인물들
<오징어 게임>은 잔인하다. 자의로 참가하긴 했지만 어쨌든 돈과 생존을 필사적으로 바라는 참가자들을 마치 게임 말처럼 게임판 위에 올려두고 관찰하고, 가볍게 죽인다. 참가자들은 게임 내에서 서로의 이름과 추억을 나누며 나름의 동료애와 우정을 쌓아가지만 주최자들은 극적인 게임 연출을 위해 그 심리마저도 이용한다. 아침이 지나고 해가 져갈 때쯤, 이제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될 때쯤 주최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 1:1 게임을 붙여 참가자들의 작은 위로와 희망마저 빼앗는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건 게임에 함께 참여한 일남의 존재다. 구슬치기 게임을 하며 양심의 가책과 일남을 잃은 슬픔에 절어있던 기훈을 농락하듯 게임이 끝난 후 1년, 일남은 다시 기훈에게 카드를 보낸다. 일남이 게임에 참가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삶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보는 것이 하는 것보다 더 재밌을 수가 없지.”
그저 인생의 재밌는 것이 없어 참여했을 뿐, 기훈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일남을 지키기 위해 진심을 다했는데, 일남은 그저 재미 때문에 게임을 열고, 게임에 참가한다. 되짚어보면 일남은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임에도 큰 걱정 없이 게임을 해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할 땐 걱정 없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선두로 뛰어나갔고, 구슬치기 게임에선 미련이 없다는 듯 기훈에게 구슬을 양보한다. 그리고 참가자 간 큰 싸움이 벌어지던 날 밤. 일남이 높은 침대에 올라가 “그만해, 나 너무 무서워!”라고 소리치자 프론트맨은 이내 스페셜 게임의 중지를 선언한다.
일남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목숨이 달린 게임의 승리를 기훈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 그가 무섭다고 소리치자 상황이 종료되었던 것은 일남은 게임에서 지더라도 생명을 잃지 않기 때문에, 통제 못할 상황에서 일남이 생명을 잃는 걸 방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6화 깐부 에피소드에서 일남이 기훈에게 구슬을 양보하며 두 사람 사이의 믿음과 우정을 보여주는 장면에 울컥하긴 했으나 차후에 일남이 보여준 그 행동이 전혀 아름다운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결국 양심을 잃어버린 기훈의 모습에 대한 만족도를 구슬로 표현한 것일 뿐, 그 구슬 안에 담긴 진심이 무엇이었을지.. 더 이상 일남의 마음을 믿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일남은 기훈을 가장 우습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오징어 게임>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게임에 참가하거나 게임을 진행한다. 등장인물들 중 유일하게 게임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인물은 준호다. 경찰인 준호는 실종된 형이 남긴 명함과 기훈의 증언을 듣고 게임장 내부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가장 용감하고 정의로운 인물이다.
준호는 주최자, 참가자, 외부인의 삼각 구도를 만들어 이야기의 흐름을 팽팽히 당겨낸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하나도 파헤치지 못한 오징어 게임의 비밀과 프론트맨의 정체를 밝혀내고 새로운 궁금증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후 시즌 2가 제작된다면 준호의 생존 여부가 기훈에게 가장 큰 힘 또는 변곡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주최자들을 제외하고 그 해 오징어 게임에서 생존하거나 죽는 장면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이 유일하니 말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지킨 주인공
주최자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서로를 죽이고 탈락시키는 장면을 기대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이기심과 공격성이다. 기훈은 게임 내내 동료라 생각되는 인물들을 챙겼으며 마지막 라운드에서도 상우를 살리기 위해 게임을 중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이 끝나고 상금을 받았음에도 죄책감과 여러 감정들로 인해 여전히 돈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일남은 남다른 우승자 기훈을 불러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양심을 시험하는 마지막 게임을 제안한다. 하지만 기훈은 매번 일남과 주최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타인에 대한 믿음과 인간성을 지키고 일남과의 게임에서도 승리한다. 그는 인간들의 밑바닥을 훑으며 즐거워하던 주최자들에게 커다란 한방을 먹이고 이 게임의 진정한 승자가 된다.
이 게임은 정말 평등한 걸까
“게임 안에선 모두가 평등해.”
<오징어 게임>은 반복적으로 평등을 주장한다. 이들은 밖에선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모두 똑같은 위치에 놓고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며 참가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건 전혀 평등한 게임이 아니다. 참가자와 주최자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고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위계질서가 형성된다. 참가자들은 생존이 걸린 게임에서 본능적으로 서로를 해치고 죽지 않기 위해 숨는다. 목숨을 건 무한 경쟁을 끝내는 방법은 생명이 다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주최자들은 이 게임이 결국 평등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가자들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습을 하나의 내깃거리, 구경거리쯤으로 소비한다. 애초에 각자 다른 신체능력과 지능, 게임에 대한 경험치를 가진 400여 명의 사람에게 똑같은 게임을 제안하는 게 어떻게 평등할 수 있을까. 주최자로서 편의를 확보한 일남, 뽑기 게임에서 라이터를 사용한 미녀와 덕수, 일남 덕분에 게임을 통과한 기훈, 장기 적출로 미리 게임을 알았던 참가자 등.. 열심히 포장했지만 결국 평등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만약 456억을 얻을 수 있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꽉 잡겠는가? 묻는다면 나는 절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일확천금의 커다란 기회라면 그걸 놓쳤을 땐 그만큼 잃는 게 많을 테니, 큰 도박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말 내일 죽을 수도, 내일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또 다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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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남자]리뷰/해석:진정한 천만영화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작품
#왕의남자#이준익#천만영화
오래된 영화다보니 주로 줄거리를 중심으로 풀어봤습니다.영상에 사용된 BGM
?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Track : 겨울에 피는 꽃 - https://youtu.be/Vmrrd9nON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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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세계 - 아름다움과 아픔이 비례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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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만에 한 남자가 출소했다. 그가 본 세상은...
13년간 감옥에 복역 중이던 전직 야쿠자 미카미는 새로운 각오를 품고 출소한다.
변해버린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매번 트러블을 일으키지만
주변 이웃들의 작은 관심과 애정으로 자신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자신의 갱생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싶어 하는 진지한 청년과도 만난다.
하지만 13년이라는 시간의 공백과 범죄자라는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정상이라 말하는 이 세상은 자신이 소중히 지켜온 것마저 버리게 만들어 버린다.
이 세상은 과연 그가 꿈꾸던 멋진 세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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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시바 베이비> 메인 예고편
유대인 전통 장례식 '시바'에 강제로 끌려온 대니얼. 친척들에게 남친 유무, 취엽 여부 등 질문 폭격을 당하는 와중에, 평생의 비대상 마야, 스폰남 맥스, 그리고 그의 아내까지 마주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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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체스트넛 맨> 공식 예고편
감당할 수 있는가. 체스트넛 맨을 초대하면 벌어질 일들을. 《더 체스트넛 맨》, 넷플릭스에서 일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