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1-23 16:38:08
1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
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
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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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더 글로리> 파트2, 3월 10일 공개 확정
ⓒ 넷플릭스
3주 연속 넷플릭스 전 세계 TOP 10 TV(비영어) 순위권에 등극하고, 공개 후 누적 시청시간
1억 4800만 시간으로 K-콘텐츠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더 글로리>의 파트 2가 3월 10일
공개를 확정했다.
진선규 <카운트>, 2월 개봉 확정
<범죄도시>, <극한직업>, <공조2: 인터내셔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흥행을 이끈 배우
진선규는 <카운트>를 통해 새로운 변신을 예고했다. <카운트>는 오는 2월 개봉을 확정했다.
<헤어질 결심>, 아카데미 감독상·외국어영화상 최종후보
ⓒ 네이버 영화
영국영화TV예술아카데미(BAFTA)에 따르면,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감독상과 외국어
영화상 2개 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오는 2월 19일에 개최된다.
<j-hope IN THE BOX>, 2월 17일 디즈니+ 전 세계 동시 공개
ⓒ 디즈니+
지난해 7월 발매된 제이홉의 첫 번째 공식 솔로 앨범 'Jack In The Box'의 앨범 제작 과정 및
다양한 활동을 담아낸 음악 다큐멘터리 <j-hope IN THE BOX>가 오는 2월 17일 오후 5시에
디즈니+와 위버스를 통해 전 세계 동시 공개될 예정이다.
해외
<M3GAN 2.0>, 제작 확정
ⓒ 네이버 영화
북미 개봉 첫날 <아바타: 물의 길>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팬데믹 이후 시리즈
제외 호러 영화로는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메간>은 글로벌 흥행에
힘입어 속편 <M3GAN 2.0> 제작을 확정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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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사랑할 결심
결심은 미완이다.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마음을 먹었다고해서 완성을 보장할 수 없다.
서래는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쓰레기같은 남자만 골라 결혼을 했다. 물리적으로라도 떼어내야 충동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더 우아한 방식이니까. 해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일테니까. 해준은 깨끗한 사람이라서 늘 선을 지킨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잠복을 하고 창 너머로 살펴보고 중식 볶음밥을 해준다. 그것이 해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살인과 피가 있어야 행복한 해준에게 서래는 영원히 피의자여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게 사랑할 수 있다. 해준은 서래를 끊임없이 의심해야한다. 그러면서도 붕괴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좇아야 한다. 서래는 끊임없이 무고를 증명해야한다. 감방에 들어가면 해준을 아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건이 종결되지 않기 위해 고의적으로 해결을 지연시켜야 한다. 두 사람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건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해준은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 서래는 감방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두 사람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사건이 미결되기를 바란다. 깨끗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수 살인사건이 해결되고 해준은 붕괴했다. 왜. 사건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건이 잘못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해결되므로써 해준은 서래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서래가 사무쳐서 해준은 괴롭다. 사건이 잘못 해결되므로써 해준은 품위를 잃었다. 여자에 미쳐서 직업윤리를 잊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나서 고생했을까. 경찰에 신고를 하면 되었을 것을. 왜 경찰을 믿지 못해서 직접 사람을 죽이고 이 지경까지 왔는가. 해준은 여기서 멈춘다. 서래의 과오가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라고 말한다. 그래도 서래의 안녕을 바랐기 때문일까. 죄책감과 수치심에 몸부림치면서 지난날을 부정한다. 서래는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서래는 아직 '우리'의 일을 바다에 봉인할 생각이 없다.
서래는 해준 앞에 다시 나타났다. 새로운 쓰레기 남자와 함께. 그리고 그 남자를 또 죽인다(죽게 만든다). 해준은 서래에게 다그친다. 이러려고 이포에 왔느냐고. 해준은 복잡해진다. 왜 또 쓰레기같은 남자를 만났을까. 그 쓰레기 남자는 왜 또 내 관할구역에서 죽었을까. 나를 또 무너뜨리려고 이러는 걸까.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걸까. 서래는 비슷한 방식으로 무고를 증명한다. 해준은 더 엄격한 방식으로 서래를 의심한다. 이번에는 해준이 승리한다.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서래는 명백한 살인범이 됐다.
핸드폰 두 개가 해준에게 돌아온다. 하나는 서래의 과오가 담긴 것, 다른 하나는 해준의 사랑이 담긴 것. 해준은 서래를 지키기 위해 과오가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버리라고 했다. 서래는 해준을 지키기 위해 사랑이 담긴 휴대전화를 바다 깊은 곳에 버리라고 했다. 바다 깊은 곳에 빠져 아무도 찾지 못하면 우리 둘 만 아는, 영원한 사랑이 될 테니까. 그리고 서래는 제 자신을 바다 깊은 곳에 묻는다. 자신이 몰고 온 모든 사건을 미결로 남기기 위해서. 해준에게 영원한 피의자로 남기 위해서. 더 이상 헤어질 결심을 할 필요가 없기 위해서.
해준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은 끝이 났고, 해준의 사랑이 끝났을 때 서래의 사랑이 시작됐다. 해준은 붕괴하면서 사랑을 남겼고, 서래는 그 붕괴를 단서삼아 사랑을 틔웠다. 다시 서래는 해준을 재건하고자 소멸을 택했고, 해준은 안개 속 영원한 사랑을 받았다.
깨끗한 사람과 꼿꼿한 사람. 결심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 미수에 그칠 뿐 선을 넘지 않는 사람. 비겁하지만 우아한 사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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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세계
대만 뉴웨이브를 부상시킨 대표적인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세계를 소개드립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1947년 소수민족인 객가(客家) 출신으로 중국 광둥성 메이 현에서 태어나 이듬해 대만으로 이주해 성장했습니다.
국립예술전문학교 영화연극과를 졸업한 뒤 시나리오 작가, 조감독을 거쳐 1980년 <귀여운 여인>으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로맨틱 코미디 3부작’인 <바람이 춤춘다>(1982), <고향의 푸른 잔디>(1983)로 안정적인 연출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에도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동일한 주제로 영화를 연출하는 것을 이어갔는데요.
그의 자전적인 내용을 담아 이른바 ‘성장기 4부작’이라 불리는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 <동동의 여름 방학>(1984), <동년왕사>(1985), <연연풍진>(1986)을 만들었고,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비정성시>(1989)를 포함한 <희몽인생>(1993), <호남호녀>(1995)를 연출해 ‘현대사 3부작’을 완성 시켰습니다.
2000년대에 <밀레니엄 맘보>(2001), <카페 뤼미에르>(2003), <쓰리 타임즈>(2005)로 ‘현대 3부작’을 선보인 그는 "이제 내가 취해야 할 방법을 알게 됐고,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더 이상 형식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소재로 돌아가서 아주 소박한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 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후 2016년 <자객 섭은낭>을 연출한 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차기작 <수란 강>을 작업하는 것 으로 알려졌으나 투병으로 인해 영화계를 떠났습니다.
에드워드 양과 함께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선두 주자인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밀레 니엄 맘보>가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오는 12월 31일 극장 개봉합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현대 3부작의 서막을 연 <밀레니엄 맘보>를 극장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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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의 얕은 숨소리와 가족의 밥 씹는 소리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얕고 낮게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 뒤이어 들려오는 남녀의 불안하고 높은 언성.
열두 살의 여름을 보내고 있는 하나(김나연 분)가 매일 호흡하는 곳은 위태롭다.
매일같이 높은 언성으로 다퉈대는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내쉬는 게 하나의 아침이다.
아이들보다 더 아이들처럼 다투고, 어쩌면 초등학생의 말싸움보다도 더 유치한 어른들의 언쟁.
이 전장 같은 곳에서 얕고 낮게 색색거리는 하나의 가쁜 숨소리에는 그 모든 고민과 상처, 난감이 담겨있다.
영화 <우리집>에서 (하나의) '우리집'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하나의 불안한 숨소리로 모든 걸 설명한다.
늘 품 안 가득 무거운 짐을 양손으로 안고 다니는 하나는, 어린 나이에 세상의 모든 짐을 떠안은 것처럼 보인다.
일찍이 걱정 가득한 얼굴을 가져버린 하나는 우리 가족이 이대로 사이가 완전히 나빠질까 봐 무섭다.
액자에 끼워져 있지 않았더라면 기억조차 희미했을 시절에 찍은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하나.
우리 가족의 표정이 온전히 담긴 바다여행 사진이다.
'이날 이후로 우리 가족 다 같이 여행 간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 하나, 엄마와 아빠에게 문득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 가족여행 가요. 바다로"
일곱 살 유진(주예림 분)이의 유일한 친구는 언니 유미(김시아 분)다.
그래서 언니는 친구요, 엄마이자, 언니 자체다.
엄마와 아빠는 일을 하러 먼 곳에 계신다고 했고, 이 자매를 보호할 수 있는 건 집과 그들 자신뿐이다.
그나마 전화로 잠깐씩 엄마 목소리를 듣는 건 작은 안심이다.
열한 살 유미는 유진이 배고프면 먹을 걸 줘야 하고, 사라지면 찾아야 하고, 울면 달래줘야 한다.
그래도 둘에게 조금 넓은 '우리집'은 왠지 막연하고 유일하게 그들을 영원히 보호해줄 것만 같다.
요 며칠 새 잦아진 주인아줌마의 부름.
우리집인데 자꾸 모르는 사람들이 드나들고, 방 안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우리집인데 우리집이 아닌 이 상황을 유진이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미 여섯 번인가, 일곱 번 정도 이사를 해왔지만 이사는 늘 싫고 두렵다.
크고 작은 박스를 모으는 걸 좋아하는 유미는 집 안에 박스로 만든 또 하나의 집을 지을까, 생각한다.
"우리집은 진짜 왜 이러지?"
"내가 지킬 거야 우리집, 너네집도"영화 <우리들>로 아이들에 대해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사려 깊은 시선을 보여준 윤가은 감독의 신작, <우리집>은 '가족'과 '집'에 관한 이야기다.
매일 위태롭게 다투는 엄마 아빠를 보며 불안을 삼키는 유미, 멀리 떨어진 엄마 아빠와 또다시 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삼키는 유미와 유진.
세 소녀의 우연 같은 만남 이후, 하나는 가장 언니로서 우리집과 유미유진집(너네집)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명을 갖는다.
이 세 소녀의 시선, 그중에서도 하나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만 영화는 흘러간다.
윤가은 감독이 말하길, 이번 영화를 찍을 때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카메라의 시선이라고 한다.
카메라의 시선을 아이들의 눈높이와 최대한 맞도록 하고, 그 아이들이 보지 않는 것을 굳이 따로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는 거다.
그 말은,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으로서 체험한 불안과 착잡이 곧 결국 아이들이 온전히 느꼈을 감정이란 말과 같다.
영화 <우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어른과 가까워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보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예민하고 섬세하지 않을까.
그렇담 이 세상에 무뎌져 버린 우리보다, 그들에게 이 세상의 문제들이 눈에 더 잘 보이지 않을까
. 그래서 그만큼 그들이 세상의 문제를 고스란히 겪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집>을 보고는 이 생각에 대해 확신이 들었다. 아이들은 아프고, 나도 아팠고, 세상의 생채기가 무뎌질 때 즈음 나는 아이의 시선과 기억을 잃었다.
집이라는 세계
"그건 어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실례 좀 할게요"
서울에 상경하고 혼자 살 자취방을 구하러 다니는 일이 잦았다. 우리집이 아닌 우리집에 사는 일은 물론, 우리집이 아닌 우리집을 구하러 다니는 일은 더욱 고통이었다.
계약이 끝나가는 집을 중심으로, 집주인과 함께 타인의 온기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을 둘러보는 건 왠지 모르게 (집주인이 아닌 집주인에게) 매번 죄송스러웠다.
게다가 그 집에 살던 이가 잠시 외출이라도 했을 때라면, 집주인은 고민 없이 마스터키로 집 문을 열고 대수롭지 않게 방에 들어와 구경시켰다.
'집주인이니까 뭐 어때..'라는 생각은 자칫 위험하게 느껴졌다.
또한 이사를 위해 역시 우리집이 아닌 우리집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도 역시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이사를 가기 위해 누군가에게 우리집을 보여주는 것은 편치 않았다.
어색하게 정돈된 우리집 구석구석을 여러 명이 와서 버선발로 훑어보는 건 괜스레 이상하고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집은 세계다. 특히 아이들에겐 완전한 세계다.
가령 핵폭탄이 터져도 문 잘 닫고 침대 밑에서 이불 덮고 잘만 숨어 있는다면 안전할 것만 같은, 집은 날 완전히 보호해주는 세계인 것이다.
그런 세계를 침범하는 건 폭력적이다.
아이들에게 완전한 안전과 안정으로 느껴져야 할 집이 더 이상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린다면, 누구나 우리집 문을 활짝 열고 침범해올 수 있다고 느껴져 버린다면, 그것은 폭력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을 그런 집에 방치한 어른들의 무책임함이다.
"여기서 살자. 우리끼리만"
"근데 우리 뭐 먹고살아?"
더 이상 우리집이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 때, 세 소녀는 집을 벗어난다.
그리고 하나하나 조심스레 쌓아 만든 모형 집을 세차게 부순다. 새로운 세계로 날갯짓하기 위하여 기존의 세계를 짓부쉈던 <데미안>의 이야기처럼, 세 소녀는 용기 있는 걸음으로 발을 내딛는다.
물론 과정은 맘처럼 되지 않고 어린 감정도 늘 서툴다.
그러나 무책임이란 역할을 맡아버린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은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들이에요."라 말하지 않는다.
우연히 하룻밤 머물게 된 안락한 공간에서의 세 소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따뜻하고, 편하고, 먹을 것도 좀 있는 공간에서 소녀는 농담처럼 뱉는다.
여기서 살자고, 그것도 우리끼리만.
각자의 허공을 응시하며 까르르 웃는 소녀들에게 이 순간은 가장 편안해 보인다.
불안해 보이지도, 두려워 보이지도 않는다.
어른들의 세계와 우리집이 아닌 우리집에서 벗어나, 오직 세 소녀만 있는 작고 우연한 공간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전한 곳처럼 보인다.
여기서 가장 어린 7살 소녀 유진이 대답한다.
"근데 우리 뭐 먹고살아?" 그들은 다시 까르르 웃는다.
그들도 안다. 여기서 우리끼리만 살자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완벽한 농담인지를.
내일이면 떠나온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 어린 소녀들은 각자의 맘 속으로 이미 알고 있다.
티 없는 해맑음이 유독 아프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가족'이라는 관계
"우리 밥 먹자. 든든하게 먹고 진짜 여행 준비하자"
우린 식구(食口)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 있다.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영화 속 하나가 왜 이렇게 그토록 같이 밥을 먹고 싶어 할까 의문이 들었다면, 나는 '가족'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 오직 이 어린 소녀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 밥 같이 먹자"는 말은 가족의 문제를 누구보다 예민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본 하나가, 조금이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생각해낸 간절한 구호였다.
'가족여행'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누구보다 바쁜 엄마 아빠에게 자신의 부탁이 철없는 어리광처럼 들릴 줄도 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기꺼이 철없는 어린 딸도 감수하는 하나의 모습은 영화 속 그 누구보다 성숙해 보인다.
물론 하나는 고작 5학년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어린 아이다.
아빠의 핸드폰을 비롯해 엄마의 여권 등 자신에게 골칫거리들만 모아놓은 상자처럼,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당연히 서툴고 무력하다.
그 무거운 상자를 언제나 양 손으로 짐처럼 품은 하나는 명백히 여린 소녀다.
그런 소녀가 자꾸 가족들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것 또한, 이 가족의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거란 걸 우리 모두는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불안한 눈에서 느낄 수 있다.
가족이 한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는 게 어쩌면 하나에게 '가족여행'보다도 간절한 소원일 수도 있었겠다는 것.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잠시 이 식탁에서 만큼은 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같은 것.
하나는 말한다. "든든하게 먹고 '진짜 여행'을 준비하자"고.
여기서 '진짜 여행'이란 말의 의미를 마치 온 가족이 각자 마음으로 알아챈 듯, 영화는 가족이 식탁에 앉아 말없이 밥을 먹는 소리만 남긴 채 떠난다.
영화는 하나의 얕은 숨소리로 시작해 네 가족이 말 한마디 없이 밥을 씹는 소리로 끝맺는다.
여기에 하나의 '진짜 여행'이란 말이 한 소녀의 깊은 체념을 담은 말처럼 느껴져 더 아팠다.
스크린에 담긴 순간은 끊겼지만, 그들은 어디선가 지금도 얕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어느 것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위태로운 공간에서 걱정스런 눈빛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크레딧이 올라가고는, 내가 이 여린 세 소녀들에게 그 무엇도 해주지 못하고 그 위태로운 세계에 남겨두고 와버린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약간의 생각 이후 든 생각은 죄책감보단 자책감이었다.
그들이 사는 곳은 항상 '우리집'이었을 테고, 그들은 원래 거기에 있었다. 항상 그곳에 남겨져 있었다.
나의 무뎌진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걱정스럽고 위태롭게.
그렇기에 죄책감보단 그들을 보지 못한, 그들의 시선으로 보지 못한 나에 대한 자책감이 괴로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책임을 떠맡게 돼 방치하는 어른들과, 뭐라도 행동하는 아이들이 이제 동시에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길 바랄 뿐, 마찬가지로 무책임을 떠맡은 어른에 가깝다.
누군가는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 말했다. 가족 하면 '화목'이 강제 덕목처럼 세뇌되었듯, 가족이란 모름지기 달큰한 사랑의 향이 풍겨야만 하는 것처럼 요구된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의 시선으로만 봐도 이 시선은 무척 단편적이다.
현대사회에서 관계로 인해 생긴 다양한 숙제 중에서 가장 고질적이고 특수한 형태가 바로 가족이다.
너무 사랑하면서 동시에 너무 미워하기 때문에 쉽게 풀리지 않을 실타래.
그렇기에 이 영화는 완전히 '가족영화'다.
영원히 풀기 어려울지도 모를, 그러나 영원히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가족의 실타래.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우리는 우리가 잠시 잊고 지낸 시야로 세상을 봤을 뿐
이것이 바로 이 세상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진은영 <가족>
원글 주소 : https://brunch.co.kr/@3mon9/27
메일 주소 : wlstkdau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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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들만의 리그(1992)> 리뷰
평생 스포츠와 관계 없는 일상을 살았고, 올림픽 시즌엔 늘 소외감을 느꼈으며, 올해에도 어김없이 도쿄 올림픽 열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소시민이지만, 시즌이 시즌인 만큼 스포츠가 주요 골자인 영화를 감상했다. 바로 페니 마셜 감독의 《그들만의 리그(1992) 》다. 미국 의회도서관 선정 영구 보존 영화로도 꼽혔다고 하는 만큼 영화 내에서 문화적, 사회적 텍스트를 구석구석 살피는 것도 영화를 감상할 때의 한 가지 재미일 것이다. 물론 ‘신예로만 꾸려진 스포츠 팀’과 ‘급작스럽게 몰락했으나 어쨌든 유능하긴 한 코치’의 조합에 질렸을 수도 있고, 세월이 흐른 만큼 영화의 세련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이런 지점은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그들만의 리그》가 다큐멘터리인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가볍게라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의 스토리적 배경인 AAGPBL의 창립 과정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단 것이 아니라, 여성 프로 야구 경기가 미국을 휩쓸게 된 까닭엔 세계대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단 이야기다. 세계 2차 대전. 아마 의무교육기간에 모두가 들었을 서구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점이 이 때였다. 특히 “미국 정부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을 국방 산업과 경제 전역으로 호출(서재철, 2016)”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장려한다 한들 ‘Rosie the Riveter’는 분명 통념에 위배되는 일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여성 스포츠, 흙 위를 달리고 굴러야 하는 야구 경기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겐 어처구니가 없는 처사다만- 몹시도 여성적이지 못한 일로, 권장한다는 건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선수단에게 주어지는 여러 제약은 우리에게 영화적 장치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 선수들의 증언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선수의 몸을 보호하기 어려워 보이는 스커트형 유니폼, 숙녀가 되기 위한 필수 교양 수업, 상당히 강력한 사적인 생활 제재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유감스럽게도 언론의 태도나 일부 유니폼 규정은 20세기로부터 특별히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일 때도 있으나, 최소한 아들을 데리고 원정을 다녀야만 하는 에블린(비티 슈람)같은 선수나, 외모가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았음에도 스카우트되지 않는 일은 감소했으리라 믿는다-혹은 믿고 싶다-. 이중에서도 마라 후치(메간 카바나프)가 스카우트 되던 장면과, 여성 프로 야구를 홍보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요구되었던 여러 ‘노력’ 에 관해선 선수 개인의 항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존재한다는 걸 실감케 한다. 확실히, “여성과 스포츠는 결국 여성과 남성의 문제, 혹은 여성과 사회의 문제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통적, 관습적인 이유가 있다(김은영, 이혜란., 2004)”고밖에 말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특히 구조적인 요소를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선수들에게 사실상의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위에서 짧게 이야기한 스커트형 유니폼을 입지 않을 때엔 더 이상 선발된 야구 선수일 수 없으며, 신문사 촬영팀의 인터뷰에 기꺼이 응하지 않는다면, 여성 프로 야구 리그는 존속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가정이 그들을 몰아붙인다. 이밖에도, 더불어 선수들이 심각하게 자각하진 않았으나,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장면 역시 있다. 전미 여성 프로 야구라는 이름이 붙어있고, 자작곡 가사엔 캐나다와 스웨덴을 비롯한 국가 이름이 등장하는데도 미국에 사는 흑인 여성은 모집 대상조차 아니었던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은 능력이 출중하다면 어떤 인재든 등용한다는 능력주의가 기실 미국 사회의 백인 남성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브레히트까지 인용할 생각은 없으나, 《그들만의 리그》는 영화 내에서 이들의 여정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껄끄러움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가 지닌 사회문화적 가치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스토리에 진입하기 전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젠 《그들만의 리그》의 주인공 격인 도티&키트 자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언뜻 보기에 둘은 야구 경기를 한다는 것 외에 크게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야구를 향한 태도 역시 크게 다르다. 언니인 도티 힌슨(지나 데이비스 & 트레이시 레이너)은 능력이 출중하나 야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동생인 키트 켈러(로리 페터 & 캐슬린 버틀러)는 도티에 비해 실력이 뛰어나진 않으나, 야구에 대한 열정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이 외, 자매의 연결고리를 부각시킬만한 외모가 닮았다던가, 공유하는 습관이 있다던가 하는 장면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도티와 키트의 관계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키트가 언니에 대해 열등감을 품고 있다는 점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키트는 강하게 불만을 토로한다. 도티와 함께 있을 때 스포츠 실력에 대한 비교를 당하는 것은 물론, 외모에 대한 비교까지 당하는 경우가 잦다고. 그러던 와중 게임에 임하던 순간, 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언니에게 키트는 불만을 품는다. 길게 이끌 수 있었으나, 제법 짧게 묘사된 이 갈등은 결국 키트가 트레이드 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편의상 도티와 키트를 주인공격의 인물이라 명명하긴 했으나, 영화가 이 둘의 서사에만 오롯이 집중했다고 보긴 어렵다. 우리는 키트가 트레이드 된 후 라신느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아 부었는지 알 수 없고, 남편인 밥(빌 풀만)이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야구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도티가 어떤 결심을 하고서 경기장으로 복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키트가 도티에게서 승리하는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그의 노력이 촘촘히 쌓여지는 순간을 삽입하여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순간,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시퀀스를 넣었어야 했는데, 페니 마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티가 감독인 지미 듀간(톰 행크스)의 말을 듣고 야구에 대해 숨겨진 자신의 열정을 깨닫고 돌아오는 모습을 삽입하지도 않았으며, 키트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크게 좌절하는 모습을 넣지도 않았다. 감독이 잡아주는 숏이란 그저, 도티가 놓친 공과 승리를 만끽하는 도티를 멀어지는 샷으로 넣어준 것이 전부다.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투수에게 높은 공을 치라고 했던 도티가 자신의 실수에 대해 크게 자책하는 모습 역시 없다.
그렇기에 나는 도티가 마지막 순간 공을 놓친 건, 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의 유명한 대사, “결과를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처럼, 언니인 자신이 아니라 야구를 위해 온몸을 날리는 키트를 위해 기꺼이 손을 놓은 것은 아니겠는가, 하고. 전미 선수로 뽑혔을 때부터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도티는 지미가 감독직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때에도 나서서 게임을 지휘했을만큼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지미가 야구를 사랑했던 자신의 삶을 망친 5년에 대해 털어놓는 순간에도 감정적으로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미련없이 짐을 싸 고향으로 떠나고자 했으며, 진심으로 키트가 아닌 자신이 트레이드되길 원했다.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도티가 전미 야구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오로지 하나, 동생 키트가 떠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으며, 그가 남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경기 내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면서도 야구를 떠나면서까지 피하려 했던 것은 혹시 모를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의 기량이 떨어졌다던가, 부상을 입었기에 나오는 내적 갈등 때문이 아니라, 키트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키트를 밀어내면서까지 피치팀에 남으려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를 다시금 경기장으로 부른 건, 남들이 몇 번이고 말한 ‘숨겨진 야구에 대한 열정’때문이 아니라 ‘하나뿐인 자매 키트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야구를 향해 온 몸을 내던지는 동생에게서 야구를 떠나는 것 정도로 화답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돌아왔을 테니까. 그러하므로 도티와 키트는 모두 승리한 것이라 봐도 무방할 터다. 도티는 자매를 되찾았고, 키트는 야구를 되찾았으며, 둘 모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러하니 이 자매가 닮은 부분은, '야구를 한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선 누구보다 고집이 세다는 점이며, 어려운 시대임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에 있으리라.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끝으로, 영화 속 몇 남성 캐릭터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일 것이다. 예컨대 마라의 아버지, 마라의 남편이 되는 넬슨, 도티의 남편인 밥, 그리고 감독인 지미 듀간(톰 행크스)까지. 이 당시 여성들은 남성들의 트로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및 문화가 팽배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이들이 함께 증명하기 때문이다. 같은 여성마저 마라를 향해 ‘야간 선수로 세우라’고 이야기하지만, 마라의 아버지와 남편인 넬슨은 그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품고 있다. 지미의 말에 따르면 ‘흔치 않은', 몇 안되는 똑똑하고 괜찮은 남자 밥은 스포츠라는 전통적 여성상과 어긋난 일을 하는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포용한다. 단순히 남성들이 없는 자리를 '계집애'들이 들러리로 채웠다 생각하였으나, 선수들이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한 지미는 자신의 리딩 방식도 바꾸려 노력(!)하는 것은 물론 도티에게 찬사를 보내며, 다른 팀의 감독직이 왔음에도 거절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보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상대를 나와 동등한 인간이라 인정할 때 우리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달리 말하자면, 접점 없이 먼 자리에서 선수를 조롱하던 남성 관객은 성 차별주의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선수를 오로지 구경거리로만 취급하였고, 여성 프로 야구 리그를 창단했다 한들 자본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여성 선수를 경제적 손실을 방어할 대체물정도로만 인식했던 월터 하비의 태도는 인본주의적 사상에서 크게 어긋났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이 영화 내의 모든 여성과 남성 캐릭터는 각각의 위치에서 우리에게 성별과 인종을 떠나,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90년대식 인간적 온정을 사랑한다.
★★★★
참고문헌
김은영, 이혜란. (2004). 여성스포츠의 성립배경과 페미니즘적 제 이론 고찰. 한국여성체육학회지, 18(2), 35-45.
서재철. 2016. 영화《그들만의 리그(1992)》에 대한 여성스포츠역사 및 사회적 성 역할 관점의 `교육적` 읽기. 한국여성체육학회지 3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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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그 엉망 진창에 대하여.
이 글은 영화 [루이스 웨인;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 봄의 다른 이름이자 숨겨진 본심처럼 느껴지는 단어다.
오래 기다려온 아름다움으로 눈앞이 아찔해지는 경험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의 마음과도 같아서, 짧아서 언제나 아쉬운 마음도 더해져 계절 내내 우리를 웃고 울게 한다.
영화 [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는 마음이 솜털처럼 푹신해지는 봄과 사랑을 둘 다 담은 영화이다. 또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필모에도 봄바람이 부는 것 같은 영화이니 터지는 꽃망울처럼 거부할 수 없는 영화가 되기를 빌어본다.
돋보기를 프리즘으로 바꾸기;베니가 사랑에 빠지면 일어나는 일.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에서 제2의 주인공이라 불릴만한 요소는 당연히 고양이다. 무려 산책하는 고양이 피터의 귀여움을 앞세웠으며 루이스 웨인은 익숙지 않았던 고양이 그림으로 자신의 유명세를 날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영화에는 고양이만큼 폭력적으로(?) 존재감을 어필하지는 않지만 분명 다른 주인공이 하나 더 있다. 사랑을 속삭이는 두 연인의 대사에서도 빠지지 않는 대상인 "빛"이다.
루이스의 삶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단 한 곳, 삽화에 집중한 돋보기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성공적으로 종이의 한 부분을 태울 수 있었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 있어서는 그 어떤 요령도 터득하지 못한 채 살았다. 삽화를 그리는 행위 외의 모든 것은 그를 그저 괴롭히는 것들에 불과했고, "쓸데없는" 것들에 정신을 빼앗길수록 그림에 집중하려는 마음은 더 강해졌다.
루이스의 삶은 에밀리를 만나면서부터 달라졌다.
그녀는 프리즘과 같은 삶을 살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총천연색 무지개로 바꿀 줄 알았다. 덕분에 루이스는 난생처음 보는 색의 축제 속에 삶을 내던질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집중할 줄 알았고, 서로에게 받은 마음을 여러 색으로 한껏 풀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 행복을 만들어가는 장면들에 유독 빛이 아름답게 촬영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영화이지만 화면 가득한 빛들을 보면 움츠러들었던 마음도 보송하게 마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랑.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것에 대해서.;하나의 사랑이 아닌 다양한 사랑.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타이틀에 내걸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단어에서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연인 사이에서 존재하는 감정"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천륜이라는 단어에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는 가족에 대한 애증에 가까운 사랑. 루이스가 직업에 대해 가진 사랑, 그리고 루이스의 작품으로 인해 많은 기쁨을 얻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함께 보여준다.
에밀리가 루이스에게 삶을 보는 태도를 바꿔준 것처럼.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루이스는 조금씩 자신이 알고 있는 형태의 사랑이 아닌 다른 모습의 사랑들에 익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책임감으로 착각했던 가족의 사랑과 인정을 조금씩 쌓아가고, 직업에서도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덕에 초라한 말로를 맞이할 뻔했던 한 예술가의 인생은 그나마 정상 궤도 가까이 올라오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영화에 등장할수록, 평생을 그 어떤 무언가에 눌려 살았던 루이스의 모습이 더욱 딱하게 느껴진다. 만약 에밀리마저 없었더라면, 이 모든 형태의 사랑은 그에게 평생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었을테고. 이로 인해 루이스는 에밀리를 만나기 전의 그 어벙하고 멍해 보이는 상태로 오늘도 길을 걸어가기 바빴을 것이다.
루이스는 눈치챘을까.
에밀리와의 달콤했던 시간 이외의 모든 순간들도 자신을 향한, 혹은 자신이 원한 사랑들의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던 삶이 존재했음을.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배우가 된 그 남자.;이젠 그냥 멋있음.
사진출처: 다음 영화
유튜버 [거의 없다]님의 최신 영상에 의하면.
배우는 크게 감정을 안으로 소화시키는데 능한 사람과 터뜨리는 것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영화 [신세계]가 흥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도 전자에 속하는 배우 이정재와 후자의 황정민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가끔 베니(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애칭)를 보고 있으면 이 희한한 배우는 대체 어디에 속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데뷔작에 가까운 상업 드라마가 국제적 대박을 치고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알고. 하는 작품마다 자신의 위치를 완벽하게 찾아들어가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는 연기를 하는 이 사람. 호통을 쳐도. 한숨을 내쉬어도. 이 배우 외의 다른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 물론 아쉬울 때도 있었다.
예전에도 리뷰한 것처럼 상실에 젖은 천재의 역할에 너무 자주 거론되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연기하는 모든 인물들은 다 다르게 느껴진다. 그들은 모두 각각 다른 슬픔과 고뇌를 가지고 있고 이 모든 역할들은 베니의 노력으로 우리에게 항상 마음의 이곳저곳을 울리곤 한다.
그가 어떤 곳에 속하는 배우이건 상관없이.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인해 우리에게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을 마음으로나마 전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베니는 루이스 웨인의 일대기를 연기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 한 편에서 보여주는 연기의 스펙트럼 만으로도 그가 영화사(史)에 해야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배우가 아닌 인간 베네딕트 컴버배치만큼은 사랑이 무엇인지 충분히 느끼고 마음 가득 머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마치면서
가끔 예고편이 영화를 좀 더 (효과적으로) 망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물론 예고편이 보여주는 모습이 인물들의 인생에 있어 가장 드라마틱 했기에 루이스와 에밀리의 모습을 영화 전면에 내세운 것이겠지만. 이 영화를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로 착각하면 매우 실망하기 쉽다. 또한 고양이가 엄청 나올 것이라 예상하면 더욱 재미없는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 웨인의 삶과 그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에 집중한다면. 단지 달콤하기만 한 영화는 아니지만 조금 더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 이제 정말 대배우가 되어버린 베네딕트의 연기도 가슴을 울리기 충분하다. 흔치 않은 그의 멜로 눈깔(?)을 감상할 수 있었기에 더 귀하기도 한 영화랄까.
카카오뷰도 있어요+_+
[이 글의 TMI]
1. 이제 어느 정도 일정이 정리되었다.
2. 응원해 주신 덕분에 좋은 조건으로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백수 처음 해보는데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음다.
4. 코로나 후유증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하다.
5. 그래도 그릭요거트 퍼먹으면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루이스웨인사랑을그린고양이화가 #베네딕트컴버배치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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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노동계급 소시민에게 구원의 모습은 어떠한가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Kike Will Hit a Home Run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Korea/2024/97min
*시놉시스
영태와 미주는 작지만 아담한 월셋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그런데 식당을 같이 운영하기로 했던 영태의 동업자 선배가 갑자기 약속을 깨뜨린다. 영태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고 미주가 혼자 남는다. 미주는 영태를 기다리며 자신도 열심히 살아간다.
박송열 감독의 전작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엔딩신에서 받은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노동계급 소시민 남자는 응당 분노해야 할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가지만, 화를 표출하는 대신 분을 삭인 후 돌아선다. 이 장면의 정서는 패배감, 울분이라기보다는 구원이다. 노동계급 소시민의 삶을 지속 가능케 하는, 기묘한 낙관의 느낌을 전하는 체념으로서의 구원 말이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거창하고 영웅적인 행위로서의 구원과는 거리가 먼 박송열표 구원론의 인상적인 각인이었다.
〈키케가 홈런을 칠 거야〉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다음 이야기라 할 만하다. 등장인물이 같은 것뿐 아니라 주제 의식과 메시지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영태, 미주 부부는 여전히 퍽퍽한 생활을 하는 중이지만 이전보다 아주 조금 상황이 나아진 듯도 하다. 새로 들어간 월세집은 이전에 살던 집보다 더 나아 보이는, 임신을 계획 중인 두 사람이 터전을 닦기에 퍽 적절한 공간이다. 두 사람은 이 공간에서 만들어나갈 미래의 가능성에 들뜬다. 그러나 이러한 소박한 기대조차 늘 배반당하는 것이야말로 노동계급 소시민 삶의 특징이다. 영태는 동업을 하자는 선배와의 일이 틀어진 후 돈을 벌기 위해 떠나고,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더는 수업을 할 수 없게 된 미주 역시 여러 임시직을 전전하며 돈을 모으기 위해 분투한다. 전작에 이어 소시민적 고난과 애환이 펼쳐진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들이 마주한 고난의 스케일의 크기를 ‘축소’한다. 몇 년 전에 빌려준 50만 원, 300만 원이 필요한 동생, 미주에게 3만 원을 요구하는 영태……. 연일 부동산 가격을 두고 쏟아지는 뉴스에 비하면 주인공들이 울고 웃는 화폐의 단위는 지극히 ‘초라’하다. 이렇게 적은 금액에도 삶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영화적 환기는 모두가 공유하는 경제적 상승 욕망이 비가시화한 실재하는 삶의 양태를 드러내며 환상과 현실의 거리를 좁힌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비연속적인 장면, 독특한 리듬의 대사와 연출이 연달아 이어지는데도 박송열의 영화가 지독히 현실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이유다.
노동계급 소시민은 작디작은 체념을 체화하는 일상을 산다. 영화는 그 원인이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적대적 계급 현실이 영태와 미주가 겪는 고난의 원인이라는 점이 전작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동계급 소시민을 위한 정치적 요구가 직접 드러나는 장면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영태와 미주가 겪어야 할 고난이 커진 만큼 영화의 유머도 더한층 능청스러워졌다. 이것이야말로 박송열 감독 영화의 특이점이다. 일상적 고난은 이어지고 영태와 미주의 현실은 점점 꼬여만 가지만 두 사람은 결코 비통함, 원통함, 격렬한 울분을 표하지 않는다. 언제나 있어온 일이라는 듯 가벼이 체념한 후 바로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며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노동계급 소시민이 격렬한 감정으로 적극적으로 모색할 변혁은 도래할 국면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 상태로 일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체념하고 포기하고 한숨 쉬면서도 일상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삶의 양식(樣式)이 필요하다. 박송열이 자기만의 개성으로 포착하고 벼려낸 영화 속 이미지는 모두 이곳을 향한다.
박송열의 영화에는 노동계급 소시민의 삶이 어떻게든 이어질 것이고, 근근이 이어지는 그들의 삶이 대체로 비관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결코 그에 완전히 잠식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묘한 낙관이 깃들어 있다. 부동산 투자업에 실패한 영태와 유산한 미주에게 홈런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심지어 섹스 시도에서조차 격렬함을 소거한 채 느긋이 서로의 몸을 포개는 엔딩 장면은 두 사람에게 홈런이 ‘대박’이나 ‘인생 역전’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태도 그 자체일 수 있음을 환기한다. 우리는 이를 구원에 대한 소시민적 감각이라 부를 수 있을 터다. 모두가 고개를 꺾어 ‘위’만 바라보며 자기가 발 디딘 ‘아래’를 보지 못하는 지금, 박송열이 견지하는 노동계급 소시민의 일상적 구원의 태도는 무척이나 귀하다. 그리고 긴요하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노동계급 소시민의 삶을 다루는 박송열의 작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그가 아키 카우리스카미의 스타일과 주제를 한국에서 계속 펼쳐내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영화 매체 〈씨네랩〉 초청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 상영시간
10-05/20:0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10-06/20:00/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10-09/16:3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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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인터셉터> 공식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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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외계+인 2부> 메인 예고편
새해를 열 강력한 클라이맥스가 온다! [외계+인] 2부 메인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