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혁2022-12-25 13:19:24
한국 극장의 영웅으로 내세울 순 없다!
#영웅 / Hero, 2022
마침내라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영화 <영웅>도 "코로나19"로 개봉을 기다린 작품이다. - 재밌는 건. 개봉 경쟁작이 얼마 전에 개봉했던 <인생은 아름다워>이다!
동명의 뮤지컬을 그대로, 영화로 가져왔기에 기대치도 있겠지만 문제는 "윤제균"이라는 이름이다.
<해운대, 2009>와 <국제시장, 2014>으로 천만 관객들을 넘겼지만, 반응이 "진정한 천만 영화"로 반응이 썩 좋지 않다. - N회차가 없다는 이유로...
조선 말기.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침략을 겪는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비롯해 주권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독립운동을 펼치는 이들이 존재했고 "안중근" 역시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는데...
1. 음악 방송도 가사는 보여준다.
동명의 뮤지컬을 옮긴 <영웅>이기에 기대치도 있겠지만 우려 또한 존재한다.
혹자는 이를 '가사가 한국어'라는 이유를 언급하겠지만, <라라랜드, 2016>를 보는 "미국인"과 <레미제라블, 2012>을 듣는 "프랑스인"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결국, 해당 장르의 문제는 "한국어"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건데 영화 <영웅>도 "뮤지컬"보단 다른 문제들이 눈에 보인다.
결국, "뮤지컬"을 떠나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주체는 "캐릭터"이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는 것이 "넘버"이다.
<겨울왕국, 2013>의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듀엣)'만 살펴보면, 닫혀있던 왕국의 문을 열려는 "안나"의 설렘과 "엘사"의 비밀이 대비적으로 그려져있다. - 그리고, "Let It Go"로 "엘사"의 매력이!!!
그런 점에서 이번 <영웅>에서 인상적인 넘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에는 필자가 해당 원작 뮤지컬을 챙겨보지 않았다는 점도 있겠지만, 음악의 가사가 보이지 않다는 것이 크다.
이전에 개봉한 <인생은 아름다워>도 가사가 보이지 않았지만, 크게 돋보이지 않는 이유에는 기존 곡들을 활용한 "팝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웅>은 오리지널 뮤지컬로 부르는 노래들 역시 새로이 만들어졌기에 앞서 <겨울왕국, 2013>을 생각하면 이런 세심함이 있어야만 했다!
2. 새로운 캐릭터들이 나왔음에도...
앞서 말했듯이 <영웅>은 "도마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영화나 뮤지컬이 아니더라도 그 마무리는 알 거다.
그렇기에 그 과정에 살이 붙여나가 관객들의 흥미를 돋우려는 것이 가장 초점을 둘 것이고, 새로운 캐릭터들이 해야 한다.
이는 "설희(김고은 분)"와 "진주(박진주 분)"에게 향하지만, 앞서 말한 가사 문제를 비롯해 이야기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영화에서 이들을 살펴보면, "궁녀"에서 "을미사변"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정보국 요원으로 활동하는 "설희"와 "진주"는 "동하"와 로맨스 라인을 형성한다.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큰 상관은 안 하나 이들의 이야기 톤이 널뛰며 달라지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이 많다.
무엇보다 "설희"는 극에서 "안중근"과 이야기를 양분할 만큼 큰 분량을 할애하는 데에도 매력 없이 소비된다. - 그리고, "진주"는 모두가 걱정한 눈물로 희생된다.
결국, 이런 부족한 설명력은 극 중. 그에게 감동한 일본 교도관이 대신해 사과하는 실제 역사를 허구로 느껴지게 만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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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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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행하기 딱 좋은!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추천 모음_zip
1. 종이의 집 - 알렉스 피나
[시즌 4개]
" 1명의 천재, 8명의 공범. 철저히 준비한 세기의 강도. 스페인 조폐국에서 인질극까지 벌인 이들은 과연 포위 경찰을 따돌리고 거액의 돈과 함께 달아날 수 있을까?"
● 역대급 스케일의 범죄극, 종이의 집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스페인 작품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리메이크되어 더욱 화제가 된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유지태,김윤진,전종서,박해수,이주빈,장윤주,김성오,김지훈 등 캐릭터마다 그야말로 찰떡 캐스팅을 이루어서 더욱 기대가 되는 작품인데요, 리메이크작을 보기 전에 원조 종이의 집 정주행 어떠세요?
2. 킹덤 - 김은희, 김성훈, 박인제
[시즌 2개]
"병든 왕을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 어둠에 뒤덮인 조선, 기이한 역병에 신음하는 산하. 정체 모를 악에 맞서 백성을 구원할 희망은 오직 세자뿐이다."
● K-좀비 하면 어떤 작품을 떠올리시나요? 부산행, 반도 등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저는 킹덤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싸인, 시그널을 쓴 김은희 작가님의 좀비물 킹덤은 시즌 1,2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전지현 출연'으로 화제가 된, 킹덤 : 아신전 이 7월 23일 공개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아직 킹덤 1,2를 보지 못한 분이 있다면 강.력.추.천 드립니다!
3.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 정리사입니다 - 김성호,윤지련
[시즌 1개]
"유품에는 생전의 삶이 깃들어 있다. 작은 흔적도 세심히 챙기는 유품정리사. 그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삼촌이 나타난다. 함께 일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 고인이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 '유품 정리사'의 이야기를 다룬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 정리사입니다>는 김새별 작가의 에세이 집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이제훈, 탕준상 배우들의 연기력이 더 돋보여 작품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고 하는데요. 지친 하루를 보내셨다면,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 정리사입니다>로 위로를 받는 건 어떨까요?
4. 브리저튼 - 크리스 밴듀즌
[시즌 1개]
"진실한 애정과 끈끈한 유대로 맺어진 브리저튼 가문의 8남매. 그들이 런던의 상류사회에서 사랑과 행복을 향한 여정을 떠난다. 줄리아 퀸의 베스트셀러 소설 시리즈 원작."● 줄리아 퀸의 소설 시리즈 중 <공작의 여인>을 각색한 <브리저튼> 은 런던의 상류사회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극을 이끌어나가는 나레이션의 주인공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 '줄리 앤드류스'로, 영상미와 연출력 그리고 나레이션이 주는 힘까지 세 박자가 어울려 영상을 보는 내내 마치 그 시대 런던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요, 이번에 시즌 2가 나온다고 하니, 아직 시즌 1을 보지 못한 분들이 있으시다면, 추천드립니다!
5. 루머의 루머의 루머 - 브라이언 요키
[시즌 4개]
"친구의 비극적인 자살 후, 미스터리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가슴 아픈 사건들의 중심에 서는 클레이 젠슨. 고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 동안 이어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10대 청소년들이 겪는 폭력들을 다룬 드라마로 팬덤이 두터운 작품입니다. 시즌 4를 마지막으로 드라마는 막을 내려 정주행 하기 딱! 좋은 드라마입니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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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영화, 예능 신작
넷플릭스 2022년 4월신작
야차
비밀공작팀과 팀의 악명 높은 리더를 감찰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도시로 날아간 검사
정직하게 살아온 그가 스파이들 사이의 치명적인 전쟁속으로 뛰어드는데...
감독: 나현
출연: 설경구, 박해수, 양동근, 이엘, 송재림, 이케우치, 히로유키, 박진영, 이수경, 진경 등
장르: 액션, 스파이, 영화
공개: 4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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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
사랑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인생은 좋을 때도 슬플 때도 있는 법
바쁘게 돌아가는 섬 제주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크리에이터: 노희경, 김규태
출연: 이병헌, 신민아, 차승원, 이정은, 한지민, 김우빈, 엄정화,
김혜자, 고두심, 박지환, 최영준, 배현성, 노윤서, 기소유 등
장르: 드라마
공개: 4월9일 새로운 애피소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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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내일
사고로 반은 인간, 반은 영혼이 된 남자
저승사자가 운영하는 지하세계 회사에 채용되고,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러 나서는데...
크리에이터: 김태윤, 성치욱, 박란, 박자경, 김유진
출연: 김희선, 로운, 이수혁, 김해숙, 윤지온 등
장르: 웹툰 원작, 판타지, 드라마
공개: 4월2일 새로운 애피소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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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마더스 클럽
초등학생 학부모 커뮤니티의 다섯 엄마들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 질투심과 비밀들이 얽히고 설키는데
때로는 적을 가까이하기도, 서로 더 가까워지기도 하며
각자의 삶을 헤쳐 나가는데...
크리에이터: 라하나, 신이원
출연: 이요원, 추자현, 김규리, 장혜진, 주민경, 최덕문, 윤경호, 최재림, 임수형, 최광록 등
장르: 드라마
공개: 4월 7일 새로운 에피소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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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어른이 된 후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단조로운 일상에 지친 세 남매
한없이 평범한 삶 속에서 특별한 성취와 자유를 찾아 나서는데...
크리에이터: 김석윤, 박해영
출연: 이민기, 김지원, 손석구, 이엘, 천호진, 이기우, 박수영, 정수영, 전해잔, 이경성, 김로사 등
장르: 드라마
공개: 4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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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렙은 회의중
개그우먼으로 구성된 걸그룹 셀럽파이브가
코미디 스페셜 회의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개그와 콩트가 난무하는 무대 밖 모큐멘터리가 시작되는데...
감독: 김주형, 고민석
출연: 김신영, 송은이, 신봉선, 안영미
장르: 코미디, 예능
공개: 4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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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괴물’
13살 때부터 동생들의 생계를 위해 ‘창녀’ 생활을 했지만, 정작 사실을 알게 된 동생들로부터 쫓겨난 에일린에게는 꿈이 있다. 우연한 계기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마를린 먼로처럼,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봐주고 사랑해주는 남자가 나타나줄 것이라는 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없었다. 에일린에게 쾌락을 구매하는 남자들은 그녀가 꿈꾸던 남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에일린 자기의 꿈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절망적으로 깨닫고 자살을 시도하기로 한다.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맥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 한 클럽에 들어간다. 영화 〈몬스터〉는 이렇게 시작한다.
에일린이 들어간 곳은 퀴어들이 모이는 클럽이었다. 그곳에서 셀비라는 이름의 여자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에일린이 질색하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흥분하자 셀비 역시 ‘그런 의도’로 말을 건 게 아니라고 답한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셀비는 에일린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 호감이 에일린의 모든 것을 바꾼다. 에일린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의 매력을 알아봐주고 다가와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의 매력은 늘 이성애 남성들의 돈과 치환 가능한 것으로만 여겨졌고, 빠른 시간 동안 소비된 후 버려졌기 때문이다. 셀비가 자신에게 수작을 건다며 잔뜩 흥분해 화를 내던 에일린의 마음이 바뀌는 이유다.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이 갈급했던 에일린에게 성적 지향의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모두로부터 버려진 사람에게 관습적 섹슈얼리티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제 에일린에게는 셀비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만이 중요하다.
행복. 참 골치 아픈 말이다. 무엇이 행복일까? 에일린에겐 돈으로 셀비를 호강시켜주는 게 ‘행복’이다. 에일린은 셀비의 관심과 호감, 즉 비물질적인 것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하지만 그 구원을 지속하는 방법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는다. 최초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평생 ‘창녀’로만 일했던 에일린이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쉬울 리가 없기에 돈을 매개한 ‘행복’을 위한 에일린의 계획은 시작부터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에일린을 믿고 가족을 떠난 셀비의 불안‧불만도 점차 고조된다. 결국 에일린은 급한 대로 다시 ‘손님’을 구하러 거리로 나선다.
안타깝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행복을 돈에서 찾고, 돈을 벌기 위해서 별의별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에일린이 ‘더 좋은’ 행복을 찾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것이 곧 파멸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진짜 비극은 세상이 에일린을 대해온 방식의 연장에서 생긴다. ‘손님’ 중 한 명이 폭력적으로 굴자 생명에 위협을 느낀 에일린이 그를 총으로 쏜 것이다. 이 살인에는 정당성이 있었다.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죽었을 테니까. 그러나 셀비와 돈을 매개로 ‘행복’하고 싶다는 에일린의 뒤틀린 욕망은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살인을 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직장을 갖기 어려운 그녀가 ‘손님’을 살해한 후 차와 돈을 처분하여 버는 돈의 유혹에 굴복한 것이다.
셀비가 이 사실, 즉 에일린이 살인으로 돈을 벌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경찰의 수사망이 점차 좁혀오자 행복을 향한 에일린의 여정은 위기를 맞는다. “난 선택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어요.” 궁지에 몰린 에일린의 말이다. 누군가는 이 말이 틀렸다고 비난할 수 있다. 모든 가난한 사람이 몸을 팔거나 살인을 하지는 않으니까. 최초에는 에일린의 ‘선택’이 있었을 것이란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한 번의 선택이 만들어낸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을 전부 그녀 탓이라 하는 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첫 선택을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삶은 늘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나락으로 떨어져본 사람은 안다.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생존을 위해서는 ‘일반적’ 기준으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당연한 선택지’가 되기 마련이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사연의 주인공인 에일린은 12년간 사형수로 복역한 뒤 2002년에 사형당했다. 〈몬스터〉는 ‘괴물’이 탄생하는 과정, 사랑으로 인한 ‘괴물’의 갱생 가능성, 행복에 관한 편협한 전망이 잉태한 비극, ‘선택’을 박탈당한 이들이 마주한 잔혹한 현실의 문제를 훌륭하게 엮어낸 영화다. 에일린으로 분한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도 압권이다. 그녀가 죽기 전에는 진정한 구원과 위안을 얻었기를, 살인사건의 피해자에게 진정 어린 용서를 빌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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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상실감을 극복하는 방법
가족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간다. 비록 조금 관점과 사상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대화와 이해심으로 그 방향을 맞춰나간다. 어쩌면 태어나면서 맺어지는 가족과의 관계는 끊어지기 어려운 관계이고 그런 점에서 좀 더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에게 가족이 생기는 건 엄마의 뱃속에 자리한 순간부터다. 일방적으로 생성된 그 관계는 출산의 과정을 거쳐 현실 세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삶을 이어나가다 보면 큰 상실감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 상실감은 가족 전체를 흔들고, 각자가 바라보는 방향을 흔들어 놓는다.
갑자기 찾아온 상실감은 어떤 경우에는 가족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그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게 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가족을 흩어놓기도 한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극복해 나가느냐가 그래서 중요하다. 갑자기 찾아온 상실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실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가 그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직시하고, 또 어떤 방향으로 걸어 나갈지를 결정하고 나면 그 뒤에는 천천히 그 어려운 상황을 회복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은 더 단단해지고, 비록 다른 방향을 보았더라도 다른 곳에 서있던 가족을 이해하게 된다.
아이를 잃은 부부의 상실감과 회복에 대해 다루는 영화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출산 과정에서 아이를 잃은 부부와 그 주변 가족의 상실감과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특히 영화는 아내 마사(바네사 커비)와 남편 숀(샤이아 라보프)이 바라보는 길이 어떤 식으로 달라져가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초반 출산일이 임박한 마사와 숀의 관계는 매우 좋아 보인다. 출산에 대한 기대감과 아이를 빨리 보고 싶은 설레임으로 가득한 그들은 출산 신호가 오자 조산사를 집으로 부른다. 그들은 병원보다는 집에서 조산사와 가정 출산을 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그렇게 영화는 초반 30분 동안 그들이 진통과 출산하는 과정을 아주 세세하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출산의 과정은 대체적으로 안전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전문 인력이 있는 병원에서 출산을 한다. 개인적으로 출산을 하더라도 영화에서처럼 전문적인 조산사가 그 과정을 옆에서 돕는다. 출산의 과정에서 많은 부분은 부부가 원하는 부분이 반영된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 속 마사와 숀도 병원보다는 집에서 출산하는 것을 선호했고 그 방법을 부부가 선택했다. 그들의 방법 선택부터 출산의 최종 단계까지 무언인가가 잘못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원하던 조산사는 아니지만 꽤 친절하고 전문적으로 보이는 다른 조산사가 왔고 단계별로 출산 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어 마사와 숀은 큰 어려움 없이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지 몇 분 되지 않아 아이는 숨을 쉬지 못했고 구급요원을 불렀지만 아이가 거둔 숨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영화가 이렇게 초반 30분 동안의 출산 과정을 아주 디테일하게 다루는 이유는 이것이 주인공 마사와 숀의 심리상태를 변화하게 하는 아주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 30분의 그 과정을 보고 나면 사람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다를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그 일련의 출산 과정들에 대한 판단을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넘긴다.
비극적인 일 이후 서로 다른 대처 방식을 보이는 부부, 마사와 숀
출산 장면이 끝난 이후에야 영화 제목의 타이틀이 나오는데 영화를 보던 이들은 안타까움을 먼저 느낀다. 그리고 나서는 앞에서 본 사건에 대한 잔상을 통해 그것에 대해 판단하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전개되는 영화의 다음 이야기는 그 일의 원인 규명에 대한 일보다는 부부가 그 일이 벌어진 이후 대처하는 모습에 대한 것이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을 본다. 다르게 말하면 각자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먼저 마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출산 전 하던 활동을 이어간다. 사무실에 출근하고, 마트에서 장을 본다. 반면 남편 숀은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에 잠겨 울음을 터뜨리고, 그 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 애쓴다. 그의 노력은 결국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책임을 돌리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두 사람이 대처하는 방식 중 어떤 것이 더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방법으로 그 일을 잊고 털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각자의 방식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관계에도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보고 혼자의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 마사는 아이의 사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부검의의 말을 그저 말없이 듣고 있지만, 숀은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냐면서 화를 낸다. 마사는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며 조각들을 맞춰가는 반면, 숀은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여러 번 충돌한다. 그러면서 이 둘의 관계는 깨질 듯 말 듯 아주 위태로워 보인다.
영화 속에는 또 다른 시선이 등장한다. 바로 마사의 엄마 엘리자베스(엘런 버스틴)가 그녀의 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딸이 그 일의 책임이 마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려 노력한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책임을 조산사의 실수로 돌리려 애쓴다. 주로 법적 투쟁을 통해 조산사를 처벌하려는 노력이다. 엘리자베스는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딸이 좀 더 편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숀과 함께 마사를 설득하려 애쓴다. 그의 이런 시선은 어쩌면 제 3자로서 자신이 지켜낸 소중한 딸의 아픔을 최대한 덜어내려는 엄마의 모습인지 모른다. 영화는 이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엘리자베스와 마사의 충돌과 관계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마사의 심리를 정확히 전달하는 배우 바네사 커비의 연기
영화는 출산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것을 시작으로 중반에는 마사의 심리 상태와 주변 인물들의 심리를 보여준 후, 법정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마사는 긴 고민 끝에 그만의 해결방법을 찾는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관계는 깨지고 어떤 관계는 다시 더욱 단단해진다. 그가 여러 가지 일을 겪는 동안,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적인 변화 과정이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을 전달하는 것은 바로 배우 바네사 커비의 연기력이다. 그저 액션 블럭버스터 영화의 주연 정도로만 생각했던 바네사 커비는 이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력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눈물과 아픔을 억누르고 감정적인 반응을 내색하지 않으면서 그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마사의 심리를 정확히 표현한 그는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사실을 증명받았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울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는 관객들도 회복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완전한 회복은 아닐지라도 그다음 발걸음을 옮겨갈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을 영화가 전달하고 있다. 주인공 마사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사과향은 그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가 아프게 떠났다. 하지만 그 사과향은 완전히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 속에, 그녀의 사진 속에 그리고 그녀의 엄마인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에도 자리하며 마사의 다음 발걸음을 가볍게 할 것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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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조각들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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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임을 걷어낸다면 더욱 감동적일 한 여성의 이야기, 영화 <82년생 김지영>
소설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개봉 당시 이 작품이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프레임이 너무 씌여 있어서 솔직히 껄끄러웠던 작품이었다. 나는 솔직히 페미니즘이라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호명을 함으로써 차별을 종용하는 결과로도 이어지는 같아서 그 이념은 동의하지만 단어 자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영화 홍보가 너무 페미니즘이라는 틀로 이뤄져 있어서 조금 불편했는데 굳이 그렇게 홍보를 안했다고 하더라도 잘 됐을 너무나도 잘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시놉시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당신과 나의 이야기
1982년 봄에 태어나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동료이자 엄마로 2019년 오늘을 살아가는 지영. 때론 어딘가 갇힌 듯 답답하기도 하지만 남편 대현과 사랑스러운 딸, 그리고 자주 만나지 못해도 항상 든든한 가족들이 지영에겐 큰 힘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하는 지영. 대현은 아내가 상처 입을까 두려워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지영은 이런 대현에게 언제나 “괜찮다”라며 웃어 보이기만 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여자의 이야기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 답게 김지영이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사회 속에서, 집안에서 여성이 겪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 번씩 겪는 부조리함이 자극적이지 않게 드러나고 있어서 평범하지만 충분히 그 부조리함을 캐치할 수 있게끔 거슬리지 않게끔 연출을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저 평범하다고 보여졌지만 그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져서 중반부터 엄청 눈물을 쏟으면서 봤다.
남자의 이야기
여성 캐릭터가 타이틀롤이었지만 더 눈길이 갔던 부분은 남성캐릭터들이었다. 여성의 이야기라고만 홍보가 많이 돼서 남성 캐릭터의 역할이 아예 죽어있거나 정말 가부장적인 인물들만 등장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입체적이고 그 관계 속에서 고민을 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도 꽤나 많이 등장해서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았다.
그래서 왜 호보를 '여성'에 초점을 맞춰서 진행을 했는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연의 남편인 대편 캐릭터들의 경우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 속에서 전형적으로 '도와준다'는 접근을 하는 일반적인 남성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도와준다'가 아니라 '마땅히 자신이 해야할 일이다'라는 가치관의 변화를 잘 드러내고 있었고, 그 고민의 과정이 아내 김지영이라는 캐릭터에 묻히지 않아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
가장 펑펑 울었던 순간을 꼽자면 김지영이 스스로를 김지영이라고 부르는 장면이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지영'이라고 호명을 당하더라도 그 안에는 아내로서, 딸로서, 엄마로서, 친구로서 호명을 당해왔었다. 자신을 지운 채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대로 행동을 하다가 동생이 자신이 갖고 싶어했던 만년필에 '김지영'이라 각인을 하고 선물을 주자 그 만년필을 가지고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노트에 적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담담하게 자신의 이름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스스로 주체가 되는구나하는 느낌이 들어서 펑펑 눈물이 났다.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이밍을 걷어낸다면 충분히 한 가족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 수 있었던 영화 <82년생 김지영>. 누구가 감동을 받고 그 속의 부조리함을 불편하지 않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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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의 화원 - 평범한 여직원이 분노하면 벌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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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상은 씨네 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12월 15일 개봉한 작품
‘지옥의 화원’의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한 영상입니다.
압도적 격투 능력만 있다면 최강의 여직원으로 칭송 받는 대양아치의 시대… 왕년의 양아치, 폭주족들이 최강 자리를 놓고 사내 파벌을 형성하며 군웅할거하고 있는 혼란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회사 생활을 보내던 나오코는 새로 입사한 란과 우연한 계기로 친해지게 된다. 그러나 뛰어난 싸움 실력을 지닌 란이 사내 서열을 평정한 후 전국 양아치들의 표적이 되고 나오코 역시 주먹 세계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마는데… 회사원은 언제나 싸우고 싶다. 심장을 뜨겁게 할 오피스 코믹 액션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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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매트릭스 : 리저렉션> 전설의 컴백 예고편
모든 것이 시작된 곳, 전설이 부활한다! SF 액션 블록버스터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