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2-11-28 00:42:58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되다
영화 <유포자들> 리뷰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되다
영화 <유포자들> 리뷰
감독] 홍석구
출연] 박성훈, 김소은, 송진우
시놉시스] “핸드폰이 사라지고, 나는 N번째가 되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던 남자 도유빈. 자신의 오랜 친구 공상범의 유혹에 이끌려 클럽에서 잊지 못할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사라진 전날 밤의 기억과 핸드폰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수화기 너머 범인은 3천 3백만 원을 구해오지 않으면 그 영상을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한다. 오늘 밤,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이 잠금해제 된다.
몰카범의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꾸준히 영화화 되고 있는 시점에서 영화 <유포자들>이 비슷한 소재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걱정반 기대반으로 영화관을 찾아갔다. 사실 뻔한 내용이기에 이미 그동안 많이 접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피해자의 성별을 교차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질감을 전해주어서 새로웠던 작품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이 가진 압박감을 표현하다
미래에 사회를 이끌어나갈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인 학교. 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전담하는 이는 교사다. 그렇기에 모범을 보여야하고 위험한 행동을 해선 안되는 직업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형적인 선생님의 상이 있기에 이에 벗어나면 시정 요청이 쉽게 들어오는 직업군 중 하나다. 그래서 일까? 몰카 유포와 관련된 다양한 영화들에서 피해자로서 종종 볼 수 있는 직업이 바로 교사였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피해자인 유빈의 직업이 고등학교 교사다.
교사로서 교단에 서서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면서 유빈은 동영상이 언제 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면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동영상이 공개되는 망상을 겪기도 하고, 이로 인해 아이들이 자신을 비웃고 욕하는 것까지 상상을 하며 힘들어한다. 모범을 보여야하는 직업에서 스스로의 행동이 그렇지 못했다는 자책과 빠르게 자신의 행실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갈 수 있다는 집단이라는 공포감이 주는 압박이 굉장히 클 수밖에 없다는 직업군이라는 점이 이번 영화에서도 잘 표현이 되고 있었다.
피해자에는 성별이 없다
이제까지 많은 작품들에서 피해자는 여성, 가해자는 남성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사례를 보면 여성 피해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 피해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번 작품 <유포자들>에서 몰카 피해자로 남성과 여성 모두를 설정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성범죄의 피해자에는 성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이 작품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 방법이 바로 주인공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인물로 설정한 것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 유빈의 성적 취향은 관계를 가지면서 영상을 찍는 것이다. 그런 그의 취향을 알았던 친구 상범은 유빈의 핸드폰을 고쳐준다는 핑계를 가지고 유빈의 핸드폰에 있었던 동영상들을 불법 음란 사이트에 업로드했고, 여자친구는 이로인해 일상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 여자친구에게 유빈은 3,000만원이라는 돈을 내밀며 ‘우리 인간적으로 해결하자’라며 비인간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유빈은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클럽에서 만난 여자들의 꼬임에 넘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찍힌 몰카 동영상으로 인해 자신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과연 유빈은 남성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러한 몰카 동영상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흔들릴 것이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자신이 여자친구와의 관계 영상을 찍으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도, 절대 피해자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자신에게 닥친 이 상황에 더욱 멘탈이 붕괴되고 정상적인 해결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진범을 잡고 자신의 몰카를 유포한 이와 마주본 장면에서 ‘인간적으로 해결하자’는 말을 들으며 과거 자신이 했던 말과 똑같음을 깨달은 유빈은 얼굴이 일그러진다. 가해자의 얼굴에서 피해자인 자신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는 가해자 유빈과 피해자 유빈이 서로 마주보며 마무리된다. 그만큼 이 작품은 성범죄의 피해자와 가해자에는 정해진 성별이 없으며, 가해자 역시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한 작품이었다.
영화 <유포자들>은 불법 촬영이라는 무거운 소재였지만 기존에 통용되던 성별을 역전시킴으로써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인물로 설정함으로써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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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화한 강형욱
"개의 가장 큰 단점은 인간을 믿는다는 거죠"
개는 늑대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지만, 유전적으로 가장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다. 개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을 사랑하는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 야생동물을 가축화하는 과정에서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잘 따르는 개체를 선별하고 키우고, 인간과 동일한 탄수화물 식단을 먹게 되면서 그렇게 바뀌었다고 보고 있다. 절대 길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여우도 그런 방식으로 개처럼 사람을 잘 따르게 만든 사례가 방송에 나온 적도 있다.
뤽 베송의 영화 <도그맨>은 인간에게서 철저히 외면받고 개에게서 위로를 받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뤽 베송의 귀환이라고 해서 <존 윅>같이 개와 함께하는 엄청난 액션을 기대한다거나, 영화 초반의 모습으로 인해 <크루엘라> 혹은 <조커>와 비교하게 되기도 하는데, 사실 이 영화는 예상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떤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는 한 백인 남성이 경찰에게 잡힌다. 그런데 그는 백여 마리의 개를 트럭에 싣고서, 피를 흘리며 여장을 하고 있는 기괴한 모습이다. 무언가 섬뜩한 느낌을 감지한 경찰은 총을 겨누며 내리라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담배를 꺼내 피운다. 여장을 한 더글라스(케이럽 랜드리 존스)는 그렇게 유치장에 갇혀, 흑인 여성 의사인 에블린(조조 T. 깁스)과 심리 면담을 시작한다.
범죄자와의 면담을 통해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화는 <데드맨 워킹>이나 <양들의 침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사람이 범죄자라면, 그 범죄에 서사를 씌우게 되는 영화인가? 범죄자가 미화되는 영화인가? 혹은 광기의 탄생을 그린 영화인가? 하고 관객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꽤나 흥미로운 사람이다. 아주 신사적이고 당당하다. 그가 두 다리에 보호대를 차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대체 어떤 범죄를 저질렀으며 왜 이렇게나 자신만만한 모습인지 궁금해진다. 에블린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폭력과 혐오의 신과 사도
더글라스는 투견을 하기 위해 개를 기르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따르는 형, 아버지에게 맞고 사는 어머니에게서 자랐다. 아버지의 폭력이 지배하는 가정 분위기는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돈다. 특히 아버지는 투견에게 먹이나 정을 주는 걸 극도로 꺼린다. 아버지는 개에게 먹이를 주고 정을 주는 더글라스를 개 우리에 가둔다. 형이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을 이기지 못한 어느 날 어머니는 도망간다.
이 집안에서 아버지가 가장 나빠보일 수 있지만, 더글라스가 가장 안 좋게, 위협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형이다. 아버지가 폭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식을 개 우리에 몇 년이나 가두고 학대하는 인간 같지 않은 아버지지만, 그래도 그것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 나름의 정당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형은 폭력을 즐기는 인간이었고, 동생과 어머니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없었으며 아버지의 폭력성을 존경했다. 아버지는 삐뚤어지긴 했어도 아들을 우리에 가두는 것을 나름 교육이라 여긴 반면 형은 그저 동생이 고통받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거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아들을 총으로 쐈다는 생각에 멘탈이 붕괴된다. 그런 모습을 본 형은 아버지를 감싸고 또 동생에게 잘못을 돌린다. 이후 감옥에 가자마자 자살까지 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더글라스는 '그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그 집에서 폭력의 신이라면 형은 폭력의 사도인 셈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을 자처하는 숭배의 대상 그 자체가 자신을 신격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종교를 만들고 제자들이 해당 존재를 신격화시켜 자신들의 세력과 종교를 만든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를 신격화하고 그의 철학을 정립한 것은 플라톤이었다. 예수를 신격화하고 행적이나 말을 기록한 것은 12사도였으며, 사실상 그리스도교를 정립한 것은 예수를 생전에 본 적이 없는 바울이다. 아버지라는 신은 폭력이라는 교리를 자신만의 합리성으로 행했지만, 형이라는 사도는 폭력이라는 힘에 취한 사도-추종자일 뿐이다. 더글라스가 갇힌 철창에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를 붙인 것이 그가 폭력의 신인 아버지의 사도역할을 한다는 걸 여실히 드러낸다.
성경에서 개는 하등하거나 나쁜 것으로 종종 묘사된다.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가, 개 철창 안에서 더글라스가 본 시선으로는 뒤집히고 가려져 'DOG MAN'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형에게 개와 친한 더글라스는 교화해야 할 대상이며 형에겐 단죄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변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 총맞은 일로 경찰에게 구조되고, 형은 감옥에 갔다. 감옥에 간 형이 출소하면 아버지의 죽음까지 몰아 동생을 죽이려 할 것이 자명했다. 더글라스가 형을 죽인 것은 복수였을 뿐 아니라, 혐오와 폭력에 대항하는 정당방위처럼 그려진다. 이 세상은 폭력과 혐오의 세상이고, 아버지는 폭력의 신이며 형은 폭력의 사도다. 더글라스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신에게 대항하는 적그리스도인 도그맨으로 다시 태어난다.
차별에 대항하는 법
아버지가 자살하고 형도 감옥에 가 있는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더글라스는 이후 청소년 보호소에서 자라게 된다. 애매하게 하반신이 마비된 채, 그곳에서도 폭력과 혐오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더글라스에게 교사인 샐마(그레이스 팔마)와 연극은 한줄기 빛이었다. 연극 속 세상은 자신을 무엇으로든 만들어줄 수 있었고, 그곳엔 폭력과 혐오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차별이 가득했다. 장애인이자 보호소 출신인 더글라스는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개를 돌보는 것이 가장 적성에 맞는 듯했지만 이마저도 국가에 의해 쫓겨난다. 현실은 약자에게 가혹하다. 결국 샐마에게 가졌던 연정마저 짓밟히고 나자, 자신도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더글라스가 자신을 차별하고 혐오했던 이들을 단죄하기 시작했다면 다른 영화 속 범죄자와 다름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차별하고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갖지 않는다. 그에겐 그를 위로하는 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행이 있는 곳마다, 신은 개를 보낸다"라는 말은 더글라스에게 딱 맞는 말이다. 그는 백여 마리의 개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더글라스가 불행에서 벗어나 자신을 긍정하게 된 계기는 드랙퀸으로서 무대에 서게 된 후다. 드랙퀸은 화려하게 여장을 하고, 립싱크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며 무대를 만드는 크로스 드레서들을 말한다. 드랙퀸이 겉보기에는 트랜스젠더나 게이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하기도 하지만, 그냥 이성애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하기도 한다. 드랙퀸으로 유명한 공연은 <헤드윅>이 있고, 유명한 사람은 인어공주의 우르술라의 모티브였던 '디바인'이 있다. 연극을 하면서 남녀역할을 바꾸는 것에 거부감이 없던 더글라스는 드랙퀸의 무대에 푹 빠지게 된다. 그리고 드랙퀸들도 사회에서 차별받는 존재라, 더글라스의 마음을 잘 이해해 줬다. 결국 그는 무대에 서며 불행에서 치유된다.
여기까지 오면, 더글라스 - 도그맨은 크루엘라나 조커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루엘라나 조커는 자신의 극악한 범죄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범죄자의 서사가 들어가 있다. 물론 상처 입은 영혼이라는 점은 비슷하나, 도그맨은 자신의 상처를 너무도 훌륭한 방법으로 극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쯤 되면 도그맨은 대체 어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이길래, 기괴한 모습으로 피를 흘린 채 잡히고 정신감정을 받고 있는 걸까.
도그맨은 누구인가
누군가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개를 도그맨에게 데려온다. 도그맨은 그 유기견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을 듣는다. 이 지역의 악질적인 조직이 세탁소 아줌마를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다. 도그맨은 마치 늘 이런 일이 있던 것처럼, 개들을 이용해 약자들을 보호해 준다. 그 모습이 꽤나 능숙하다. 그리고 부의 재분배라는 명목아래, 부잣집에서 개들을 이용해 몇 보석을 훔쳐낸다. 부의 재분배를 외치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보석을 빨리 팔아치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도그맨 자신을 죽음으로 위협하는 사람들을 정당방위로 죽였다.
그리고 세탁소 아줌마를 보호하려고 폭력조직을 개로 위협한 일로, 조직이 도그맨을 죽이려고 찾아온다. 도그맨과 개들이 총을 든 조직과 상대하는 모습은 철저하게 준비되었다기 보단, 어설프고 처절하다. 도그맨은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세탁소아줌마를 위해 이런 위험한 짓을 했었단 말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더글라스의 말을 빌리자면, 더글라스 - 도그맨은 빌런도 안티히어로도 아니다. 그저 차별의 사회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한 장애인이었고, 자기를 따르는 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도둑질을 좀 하거나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을 개로 보호해 주는 일이 전부였다. 도그맨은 자신이 형과 보험조사원을 살해한 것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인정한다. 비록 정당방위라고 할지라도. 도그맨의 트럭이 쫓기며 경찰에게 잡히게 된 그 사건도, 사실은 조직이 총을 들고 쳐들어와서 대항한 것뿐이었다. 도그맨은 빌런이라기엔 너무 착하고, 안티히어로라기엔 너무 소박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도그맨을 크루엘라나 조커와 같다고 생각했을까? 영화 첫 장면에서 보여준 그 무시무시한 기운, 경찰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총을 겨누게 된 그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도그맨에게서 느껴지는 그 기괴함은, 사실 편견과 차별로 관객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가지는 편부 편모가정이나 가정폭력에 노출된 사람에 대한 편견, 장애인에 대한 편견, 성소수자나 크로스 드레서, 드랙퀸에 대한 편견 등 말이다. 특히 그가 잡힌 사건은 그가 무시무시한 가해자라서가 아니라, 사실 피해자에 가까웠다. 경찰도 그걸 알고 그에게 안쓰러운 마음으로 담배를 준다. 엄청나고 기괴한 무서운 범죄잔줄 알았지?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차별받는 소수자가 발버둥 치는 휴먼드라마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 흐르는 신-개-더글라스로 연결되는 기묘한 연출로 인해, 이것이 무언가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개통령 혹은 개의 신
앞서 말했듯 개는 인간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정을 주면 금방 사람을 따른다. 사람을 따르고 애정을 가진 개는 굶주린 야생개보다 살의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에 나오진 않았지만 더글라스의 아버지는 투견을 하기 위해 개들을 따로 훈련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방식은 달랐지만, 더글라스는 애정으로 개들과 소통했고 별다른 훈련이 없이도 원하는 행동을 개에게 부탁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10년 전, 동물농장에서 <천재견 호야>의 사연이 나온 적이 있다. 주인 아저씨가 별다른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사람처럼 부탁하는 것을 척척 잘 알아듣고 하는 것이다. 수도꼭지를 틀고 닫고, 냉장고에서 음료를 가져오고, 말하지 않아도 일 끝나면 수건과 물을 가져오는 등,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천재견 테스트도 최상위권 점수를 받았다. 영화 <도그맨>에서 더글라스가 설탕이나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할 때 개들이 알아서 잘 가져오거나, 눈빛만으로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호야도 주인아저씨와의 교감과 사랑으로 그런 일이 가능했고, 더글라스도 개들을 사랑으로 대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아버지가 개들을 함부로 다루는 집에서 자라, 개들을 사랑으로 대하게 된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개통령, 훈련사 강형욱이다. 강형욱은 개공장을 하는 집에서 자랐고,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아버지와 싸우기도 했으며 결국 개를 제대로 행복하게 키우는 일을 하며 살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더글라스는 흑화한 강형욱이며, 흑화한 천재견 호야의 주인이다. 더글라스가 흑화했다고는 해도 소소한 동네 로빈훗 느낌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도그맨>은 단순히 상냥한 훈련사, 혹은 애정 어린 개주인을 넘어선다. 이미 자신이 개 철창에 갇혔을 때, 형이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를 달아주고 그것이 뒤집혀서 DOGMAN이 된 시점부터, 그는 적그리스도가 되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가 개를 얼마나 사랑으로 대하는지는 사실 그렇게 많이 나오진 않는다. <도그맨>에서 의아한 지점은 이 부분이다. 영화에서 개들이 묘사된 모습이 철저하게 훈련받은 군대처럼 보인다. CG가 아니라 진짜 개들을 훈련시켜 그런 장면들을 찍었다곤 하지만, 교감보단 명령으로 느껴진다.
기독교에서는 신에게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 신과 인간은 대등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관계가 아니라, 신에게 순종하고 신이 하는 행동은 그것이 인간을 위한 큰 그림이라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래서 도그맨은 훈련사나 주인이 아니라, 개의 신인 것이다. 이렇게 신의 자유와 사랑을 순종으로 덧씌우는 것이 서양의 기독교서사에 자주 등장한다. 영화 중간중간, 더글라스는 스스로를 예수에 비유하는 행동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된다.
개 철창에서 손에 아버지가 쏜 총을 맞은 채 십자가 모양으로 쓰러진 더글라스는 그 일로 걷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버지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신에게 버림받은 것인지 구원받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그가 세상의 차별로부터 구원받아 드랙퀸으로 구원받는 모습은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을 연상시킨다. 가난한 더글라스는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도둑질로 일으킨다. 또 조직이 기관총을 들고 쳐들어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그는 굳이 걸어가서 포도주를 마시며 최후의 만찬을 한다. 그저 동네 로빈훗에 불과한 사람이 이런 사건을 거치며, 더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게 변해간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기우일까?
그는 결국 개들을 이용해서 유치장을 탈출한다. 그러나 그는 멀리 도망가지 않고, 하나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 걸어간다. 마치 십자가를 진 예수가 힘겹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듯, 바로 옆 성당의 십자가 그림자가 비치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정확하게 자신을 맞추려고 발걸음을 조금씩 조절하며 신에게 외친다. 십자가의 그림자는 더글라스에게 드리운다.
기독교의 4대 복음서 중 하나인 <루가의 복음서>와 외경인 <야고보 복음서>에 따르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는 장면을 '성령이 내려오셔서 너에게 그림자를 덮을 것이다(한국번역: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고 천사가 말하는 장면이 있다. 한국 성경에는 잘못 번역되었지만, 원문에는 성령이 임한다는 것을 그림자가 드리운 것으로 표현했다. 이 장면은 '그림자 수태'라는 모티브가 되어, 마리아의 수태고지 장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장면의 그림으로 많이 묘사된다.
더글라스는 세상을 지배하는 폭력의 신에게 대항하는 적그리스도로써 더 완전히 새로 태어나려고 한다. 그가 그림자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자기 연출은, 그림자로 드리워진 성령의 힘을 받아 더욱더 강한 도그맨이 되려는 의식이다. 단순히 오래 서있다가 쓰러졌다고 해서 더글라스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더욱 강인하게, 동네 로빈 훗에서 진정한 개의 신 도그맨으로 태어났다. 그러기에 불행이 있는 곳, 자신을 상담해 준 에블린에게 개를 보내지 않았던가. 왜냐하면 바로 자신이 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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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그맨>은 <크루엘라>나 <조커>, 혹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같은 빌런 서사 혹은 안티히어로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잔인하고 섬뜩한 장면이나 액션도 없고, 그의 수족이 된 개들은 CG가 아닌 실제 훈련받은 개들이라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 전혀 무섭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귀엽기까지 하다. 개를 죽이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귀여운 개들은 천하무적이다. 끔찍한 인물인 줄 알았던 더글라스는 사실 불쌍하고 착한 사람이다. 그런 것들이 영화의 좋은 메시지를 조금 흐린다고 생각한다. 과연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라면서. 오히려 마케팅에서 크루엘라나 조커 언급을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았을까?
그렇더라도 날것으로 드러내는 뤽 베송 감독의 스타일리시한 감각, 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만들어낸 더글라스의 캐릭터는 살아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별것으로 만들어내는 힘, 그리고 그 별것은 사실 우리가 만들어 낸 차별과 혐오에서 나왔다고 귀에 대고 소리치는 힘 말이다.
*여담으로, 주인과 그렇게 사랑으로 교감했던 천재견 호야의 주인아저씨는 4년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년 <단짝>이라는 방송에서 주인아저씨의 아들이 호야를 아직도 키우고 있는 모습, 아저씨의 생전 목소리를 듣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나와 많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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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을 한 신부님 (2019)
<문신을 한 신부님>
<기생충>과 함께 '2020 아카데미 시상식' 당시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폴란드의 영화로, 원제는 'Corpus Christi'다. 번역이 '문신을 한 신부님'이라고 의역되었는데, 종교에 문외한 사람들의 입장까지 고려하면 번역된 제목이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종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작품처럼 느껴지지만, 일반적인 기독교 영화와는 제법 거리가 있다. 폴란드인들이 유럽에서 알아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배경지식 정도만 알고 보면, 이해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훔친 사제복으로 하루아침에 신부가 되다
소년원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다니엘(바르토시 비엘레니아)'은 존경하는 신부 '토마시'의 도움을 받아 목공소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출소하고 목공소가 아닌 성당으로 먼저 향한 그는 훔친 사제복으로 신부인 척 행세를 시작하는데, 사제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는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주임신부로 인해 그는 곧 그 자리를 대행하게 되고, 보통의 신부들과는 다른 화법과 기도 방식으로 신도들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다니엘이 과거 마을을 휘감았던 비극적인 사건의 민낯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독실한 신앙심을 보이던 마을 사람들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파격적 설정, 신선한 스토리
소년원을 출소한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이 사제복을 훔쳐 신부 행세를 한다는 설정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파격적인 설정이다. 주인공 '다니엘'은 소년원에서 신부의 일을 도왔기에 신앙심이 강하고, 성직자의 역할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하루아침에 주임 신부가 된 그의 모습은 당연히 어설프다. 하지만, 위기나 당혹스러운 상황들을 매사 뻔뻔함과 재치로 넘어가며 제법 무거운 작품 분위기 속에서 소소한 유머를 일으킨다.
주인공을 맡은 '바르토시 비엘레니아' 배우의 연기 또한 상당히 강렬한데, 거친 범죄자의 삶을 살아온 비행소년의 서슬퍼런 눈빛을 지님과 동시에 신부로서의 따뜻하고 온화한 표정까지 동시에 보여준다. 기독교의 이중적인 면모를 비판하는 작품에서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 캐릭터를 소화하는 그의 연기는 작품의 의미와 더불어 굉장히 강한 인상을 준다.
예수에 빗대어 표현한 가짜 신부
가짜지만 누구보다 진짜 같은 신부의 모습을 보여준 '다니엘'의 행적에서는 마치 성경 속 예수의 행보와 유사한 흐름들이 느껴진다. 목공소에서 출발한 그의 여정은 성당으로 이어졌고, 기존의 성직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를 설파하며 사람들에게 신선한 반응을 일으킨다. 꽉 막혀 있지 않고, 형식에서 탈피하여 유연한 신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그는 위로가 필요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준다. 하지만, 마을을 덮쳤던 사고를 파헤치는 그의 행보는 마을 사람들이 감추고 있었던 오만과 모순을 드러내게 하는 시험으로 작용한다. 신부로서 양심을 따르고, 절대선을 추구하는 모습은 결과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겐 불편함을 유발한다. 결국 이 둘의 갈등은 다니엘이 직접 장례를 주관함으로써 그가 희생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악함은 끝내 반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첨예한 대립각은 두터운 신앙심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믿고자 하는 기독교 복음에 대한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왜 다니엘은 사고를 파헤치려 했을까
다니엘이 찾아간 마을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7명의 사람이 숨졌다는 비극이 불어닥친 곳이다. 총 사망자는 7명이지만, 6명의 청년들이 탔던 차와 충돌한 1명의 남성 운전자를 살인자 취급하며 그를 성지에 묻지도 못하게 하고, 그 남성의 아내는 집안에 틀어박힌 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하지만, 다니엘이 유족 중 한 명인 '엘리자'와 함께 사고의 진상을 알아보니 마을 사람들이 추모하는 6명은 술과 마약에 찌든 상태였고, 살인자 취급을 받는 남성 은 음주운전조차 하지 않았다. 시장도 이 사실을 아는 것 같지만, 어째 모두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는 느낌이다. 외부권력의 압박과 마을 사람들의 분노에도 다니엘은 계속해서 그 억울한 남성의 장례를 치러주고자 돕는다. 왜 이토록 이 사고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살인자 취급을 받은 남성 운전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일종의 낙인을 찍인 채 죽어서도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치 범죄자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혀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음에도 신부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다니엘'의 상황과도 같다. 다니엘은 낙인으로 인해 절대 악의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그 남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자신은 비록 신분을 숨기지 않고서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사람만큼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상황에서의 억 울함을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의 무고함을 밝히고, 장례까치 책임지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관계가 아예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그토록 신경을 썼던 것이다.
종교의 양면성, 사람들의 이중성
<문신을 한 신부님>은 종교가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공감을 살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매주 성당에 출석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하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표출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끄러운 면들이 밝혀질 상황이 되면 믿음은 이미 저 뒷편으로 사라져 있다. 겉으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모습으로 위선을 떨면서도, 뒤로는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고 악함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종교인들의 양면성과 더 나아가 인간의 이중성 자체를 신랄하게 저격한다. 믿 고 싶을 때만 믿고, 따르고 싶을 때만 따르면서 자신의 이익과 안정을 건드리는 순간 비인간적인 행태부터 일삼는 사람들의 신앙심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의문이 든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모습은 비단 종교에 관해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니고, 여러 집단과 사회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 자체를 고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편인데, 가짜 신부 '다니엘'에게 열광하는 신도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믿고자 하는 존재가 사실 무의미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사제복만 입었다는 이유로 기계적인 믿음을 표출하는데, 정작 그 사람은 방금 소년원에서 출소한 사람일 뿐이니 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 행태인가. 가짜 보다 더 진짜 같은 신부를 등장시킨 것은 이렇듯 종교의 허상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의 기능을 추가적으로 수행한다. 마을에서 선함과 긍정적인 메시지를 설파하는 것은 좋은 신학교를 멀쩡히 나오고, 출신 교구부터 따지고 묻는 베테랑 주임신부가 아닌 가짜 신부 다니엘이다. 이는 곧, 어디서 왔는지보다 어디로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극의 대사를 반영한 양상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들이 원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어디서 왔는지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진정으로 가려고 하는 앞으로의 방향이 더 중요할 뿐.
* 본 콘텐츠는 네이버 블로거 겔겔겔스타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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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웬디 (Wendy, 2020)
개봉일 : 2021.06.30 (한국 기준)
감독 : 벤 제틀린
출연 : 데빈 프랑스, 야수아 막, 게이지 나퀸, 개빈 나퀸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웬디>는 피터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피터팬이 아닌 웬디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네버랜드 모험기를 담은 영화다. 등장인물들과 아이들의 세상 네버랜드라는 공간,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라는 설정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원작 동화, 2003년작 영화 <피터팬>과 <웬디>는 닮은 점보다 서로 다른 점이 더 많다. 재해석한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원작 그대로의 분위기나 동심과 환상의 나라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과 환상적인 모험을 바라는 소녀 웬디와 오빠 더글라스, 제임스. 그리고 해적이 될 거라며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순수한 소년들은 깊은 밤, 유령 기차에 올라탄다. 작은 식당 안에서만 지내던 웬디와 더글라스, 제임스에게 기차는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다. 아이들은 피터팬과 함께 세상의 끝에 위치한 네버랜드에 도착하는데, 여기까진 정말 환상적이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저 깊은 곳에 눌러뒀던 동심이 기차 기적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듯했다.
근데, <웬디>에서 보여주는 아이들의 모험은 예상외로 현실적이고 험난하다. 이전에 봤던 <피터팬>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무기를 들고 뛰어다녀도 그다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조금 다르다. 네버랜드가 어째 환상의 나라라기보다는 길들지 않은 정글처럼 느껴졌고 소년들은 어딘가 어른들의 손길이 필요한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피터팬은 그런 아이들을 네버랜드로 이끄는데.. 이 모험이 환상적이고 특별하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아이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웬디의 엄마처럼 로데오 타기에 대한 꿈을 버리고 아이들에게 모든걸 걸게 되는, 결국은 꿈을 잃는다는 의미인 걸까. 유난히 작은 그림자를 가진 소년 피터팬과 모험을 꿈꾸는 소녀 웬디의 또 다른 모험이 담긴 이 영화가 반갑고도 아쉽게 느껴진다.
웬디 시놉시스
기찻길 옆,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는 내면에 차오르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매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나타나고 ‘웬디’와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 ‘제임스’를 이끌고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대걸레와 빗자루 따윈 들지 않겠어!
기찻길 옆, 작은 식당에서 엄마를 도우며 새로운 모험을 꿈꾸는 소녀 웬디와 천방지축 쌍둥이 오빠 더글라스와 제임스는 깊은 밤, 소문으로만 듣던 유령 기차를 만나게 된다. 창문을 가득 비추는 붉은빛과 알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에 웬디와 더글라스, 제임스는 급하게 신발을 신고 기차를 따라잡는다. 유령 기차 위엔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 누워있다.
눈에 빛을 품은 아이들은 그곳을 벗어난다.
아이들은 세상의 끝, 네버랜드로 떠난다. 네버랜드엔 피터팬과 그를 따르는 몇 아이들, 그리고 실종된 친구 토마스가 있었다. 작은 식당 속 세상에 만족하지 않고 해적이 되어 세상을 누비겠다던 꼬마는 웬디보다 먼저 기차에 올라타 네버랜드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었다.
네버랜드는 어른들의 마을과 아이들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원작에서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섬으로 표현되는데 <웬디>의 네버랜드는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화산과 거친 정글을 품고 있다. 사실 환상의 섬이라기보단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 가까운 모습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절대 늙지 말자’고 다짐하며 밤낮없이 아이다운 놀이와 장난을 반복한다.
아이들은 어떤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다음 끼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내일 비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오늘 밤은 어떤 자리에 누워 몸을 보호해야 할지.. 어른들이 말하는 현실적인 고민같은 건 하나도 하지 않는다. 네버랜드에서는 고민과 슬픔의 감정을 갖는 순간 빠르게 늙어버리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를 직면했을 때 머뭇거리거나 다시 생각하는 건 금지된다. 아이는 고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인 걸까.
네버랜드의 대장 피터팬은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이다. 그는 나이 드는 것을 안 좋은 것이라고, 어른들은 가까이해선 안될 존재라고 생각한다. 피터팬은 웬디가 오기 전, 가장 친한 친구를 잃고 어른이 되어버린 버조를 어른들의 마을로 내쫓고, 더글라스를 잃고 변해버린 제임스의 손을 가차 없이 자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다 밑에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를 어머니라 믿으며 오랜 시간 네버랜드를 지켜온 <웬디>속 피터팬의 모습은 동화에 나오는 요정 같다기보단 다가온 위험과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고집쟁이의 모습과 가깝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내가 생각했던 ‘피터팬’의 이미지가 깨져버리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원작과 이전에 나왔던 영화들에서 비친 피터팬은 순수하며, 거칠고 공격적이기보단 어린 고집이 있는 소년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웬디>에서 만난 피터팬은 다소 독단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피터팬의 생각을 바꿔주는 사람은 바로 웬디다. 원작에서의 웬디는 피터팬에게 의지하고, 후크에게 잡혀가 피터팬이 구해주길 기다리는 인물이었으나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 다르다. 피터팬은 아이들에게 닥친 문제를 외면하고 어른들을 피하기만 하지만 웬디는 제임스를 구하기 위해 어른들의 마을로 향하고 숨겨진 상상력을 발휘하라며 어른들의 손을 이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먼지 쌓인 바에서 어른들에게 상상 속 술을 내놓고, 춤을 추는 웬디의 모습은 어른이 된 후, 오래 묵혀두었던 상상력을 가볍게 자극한다.
상상력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 그리고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보단 옆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환상이 아닌 현실로 스며들며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게 된다. 피터팬과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늙어가는 건 상상력을 잃는 것이며 해적이 아닌 식당 주인이 되는 것이며 즐거움을 잃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웬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웬디는 늙어가는 건 잘못이 아니며 나이와 상관없이 상상력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늙어가는 건 꿈과 상상력을 잃는 게 아닌 어릴 적 꿈과 상상력을 품고, 가끔은 아픈 감정도 함께 느끼며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피터팬과 아이들, 그리고 네버랜드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다 함께 기찻길 옆 식당에서 들었던 엄마의 자장가를 부르며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고 모든 동심과 상상력을 잃는 것이 아님을, 늙어가는 것 또한 위대한 모험임을 알게 된다. 원작에서는 요정을 믿는 것으로, <웬디>에서는 잊지 않은 자장가를 통해 어른들의 사라지지 않은 동심을 표현한다.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어른이 되고, 빠른 시일 내에 오겠다고 했던 피터는 시간이 지나 ‘잠자리에 들기 전 읽는 동화 속에서 나오는 인물’로 변한다. 피터는 결국 네버랜드에 남았고, 웬디의 딸을 네버랜드로 데려간다. 네버랜드에서 몇 아이들과 피터팬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울 때, 피터팬의 그림자는 유난히 더 작게 표현되는 장면이 있다. 실제 덩치는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피터팬의 그림자가 유난히 더 작게 표현된 건 피터가 가진 ‘늙지 않겠다’는 마음이 그만큼 강력하며 피터는 결국 네버랜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 아니었을까싶다.
아픔과 상실의 슬픔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유지하고 영원히 맑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슬픔과 눈물, 망설임을 알게 되고 어른이 된다 해도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피터팬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꿈처럼 피터팬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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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 뒤의 얼굴
당신이 영원히 아름답기를 빕니다.
이 말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십대 한복판의 나였다면 축복이라 생각했을 지도. 아름다워지는 것으로 인생의 많은 것이 달라진다 생각했던 나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생각한다. 그 말은 축복보다는 저주일지 모른다고. 아름다움은 많은 것을 주겠지.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앗아가겠지. 그 목록을 헤아려보지 않은 채로 쉽게 해서는 안될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아름다움으로 찬양을 받다가, 사람들이 원한 모습이 아니라고 수군거림을 받던 이들을 많이 보았다. 사랑한다 생각해본 적 없던 이들이었는데 그 죽음에 마음이, 몸이, 시리듯 아팠다. 그들의 죽음을 오래 숙고한 끝에 생각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지 않기 위해서는 삶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고 긍정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얼마든지 "코르사주"를 벗어 던질 자유가 필요할 것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영원히 아름답기를 빕니다"는 인사를 들으며 정작 본인은 코르셋에 짓눌려 기절하던 엘리자베트 황후를 보고 한국의 여자 아이돌을, 또 그 영향을 받는 수많은 여자 아이들을 떠올렸다.
더없이 알려진 얼굴을 말하기는 쉬워 보인다
실존 인물 엘리자베트 황후의 삶은 어떻게 보면 여자 아이돌의 삶과 닮은 면이 있다. 당대에 가장 사랑받는 '미녀' 황후였고, '씨시'라는 애칭이 지금까지도 널리널리 전해져 온다. 뮤지컬 <엘리자벳>으로 이역만리 타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고, 그 얼굴은 지금까지도 관광 상품 한가운데 앉아 있다.
그러나 단순하게 사랑받는 존재구나 하고 넘기기엔 엘리자베트의 일상이 편치 않았다. 머리카락 무게만 1킬로그램에 달할 만큼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식단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프랑스어로는 코르사주 영어로는 코르셋이라 불리는 기괴한 장치를 허리에 대고 있는 힘껏 조여 신체를 압박해야 했다. "가짜 가짜 진심 없는 가짜"들에 둘러싸여 보낸 세월.
그 중에서도 영화 <코르사주>가 그리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순간은 마흔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한창 나이지만, 당대 유럽에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생이 저물어갈 날이 가까워지는 나이였다. 세간에는 자신을 운명적으로 사랑했다고 알려진 남편조차 그저 '얼굴'이 되기를 종용해 오는 세상에서 엘리자베트는 서서히 쇠해 가는 젊음, 그리고 거기 따라붙을 세간의 말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가 행해온 '철저한 자기 관리 노력'을 언급하는 문장들은 모두 기묘한 감정을 준다. 꼭 누군가의 기행을 수군거리는 말처럼 들린달까. 묘하게 그의 추락을 기대하고, 그의 나이 듦을 고소해 하는 듯 보인다면 착각일까. 코르사주를 너무 조이다가 쓰러지기까지 했대. 화장품에 엄청 집착했대. 머리 스타일에 자부심이 대단해서 머리카락 무게만 1킬로그램에 달하도록 길렀대. 그런데 글쎄 나이가 들수록 초상화 속 자기 얼굴을 보기 싫어해서 나중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지 뭐야. 어머나.
문장 뒤에서 어쩐지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세상은 여성에게 미를 강요하지만, 여성이 미를 향해 노력하는 순간 그 노력을 폄하한다. 세상이 강요하는 미의 전형도 정해져 있다. 살이 찌면 쪘다고 빠지면 빠졌다고, 성형을 했다고, 무표정했다고... 너무나도 많은 외면과 태도의 검열 조건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름다움이고, 그렇게 어렵사리 인정받은 아름다움은 너무나 한시적이다. 당대에 가장 사랑받는, 존재 자체로 센세이션이었던 연예인들에게 어떤 악질 루머가 따라붙는지, 작은 행동 하나에도 죽일 듯 달려드는 말은 또 얼마나 많은지 보라. 알려진 얼굴에 대해 말하기는 참 쉽다.
'알려진 얼굴' 뒤에도 사람 있어요
실존 인물을 활용한 시대극이라는 점에서 결말이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하고, 심지어 그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아예 제목부터 코르사주인 영화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엘리자베트라는 캐릭터의 주체성을 살릴 것인가 궁금했다. 바로 그 질문에 이 영화가 답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로웠다.
우선 이 영화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알려진 얼굴" 뒤를 더듬는다. 물론 그가 1킬로그램에 달하는 머리를 고슬고슬 유지한 것도, 저체중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다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도 끊임없이 코르사주를 조이고 머리를 다듬는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영화는 '외면'의 노력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황제보다 강하다고 상호 알고 있었을 정도로 훌륭했던 그의 펜싱 실력, 방에 링을 설치해 둘 정도로 '홈트'에 열성이었던 그의 자세, 시어머니의 '극성'에 반해 '외부 세계'로 데리고 나갔던 딸을 잃은 후 그가 느낀 고통과 그 이후의 자식들에 대해 느낀 애정, 평생 느낀 우울증으로 인해 정신병동을 강화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는 점... 같은 "사실적" 요소들을 충분히 녹여 내면서도, "사실적" 기록에 기술되지 못한 그의 판단과 생각을 상상력으로, 그러나 충분한 설득력을 포함한 상상력으로 담아낸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온전히 전기 영화라 보기 어려움에도, 그 어떤 전기 영화보다 그를 가까이 느끼게 한다. 코르사주를 "조금 더!" 조이면서 그가 바라봐야 했던 현실을, 그 현실에서 그가 취해야 했던 태도를. 그러니 그를 사랑했던 이들이 보기에는 어쩌면 전기 영화보다 더 사실을 품고 있다 여겨질 것이다. 그의 코르사주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태도 또한 묘하게 현실적이다. 1킬로그램의 머리카락이 누군가에게는 '왜 저렇게까지 기르는 걸까' 의아한 것인 한편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역작이 되는 것처럼.
언젠가 시대를 등져야만 했던 어떤 아름다웠던,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추대되고 내쳐졌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타인의 기록으로 담긴다면 나 또한 이 점을 가장 주목해서 볼 것이다. 그를 둘러싼 상승과 하락이 아닌, 오롯이 그의 발걸음과 그의 마음이 잘 담겨있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어떤 전기영화보다 그 마음을 잘 담아냈으니, 잃어버린 어떤 여자들을 떠올리면 고마울 정도로 소중한 작품이었다.
얼굴 뒤의 얼굴을 본다면
사람마다 어울리는 삶의 양태가 제각기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그게 허용되지 않는 자리에서 종종 비극이 태동한다. 영화 속 엘리자베트는 가면 위에 가면을 덧써야 하는 자리에 앉아서도 자기 삶의 양태를 꿋꿋하게 지켜 나간다. 코르사주를 조이면서도, 머리를 기르면서도. 펜싱을 하고 말을 타고 사촌과 친하게 지내고, 비웃음만 사던 활동사진을 언젠가 사랑받을 거라며 긍정하고.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딛고 미래를 긍정하는 인물은 당대 여성에게 기대되는 인물상이 아니었다.
대신 당대 여성에게 기대되었던 "코르사주"는 이 영화의 공기에 묵직하게 담겨 압박감으로 전해져 온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옥죄었는가. 과연 오늘 이 영화를 보는 21세기의 여자들은 그 코르셋에서 자유로운가. 너무 과하게 익숙해진 나머지 가끔은 자신조차 미소에 감춰둔 얼굴 뒤의 얼굴이 없는가.
얼굴 뒤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아름다운 초상화로만 존재하던 엘리자베트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계단을 오르는 엘리자베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풀나풀 춤을 추는 엘리자베트까지. 다 보고 나면 이 영화는 새로운 초상 정도가 아니라 초상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온 수준의 존재감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비는 말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그 말이 축복이 아니어도 되는 세상에서 각자의 양태대로 행복한 세상이 오길. 그 날까지 이런 영화는 계속 나와야 할 것이다. 자유로워야 했고 자유롭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그 모든 위대했던 여자들을 위하여.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2022년 12월 21일 오늘! 개봉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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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제94회 아카데미 수상작은?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드디어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는데요.
과연 어떤 작품들이 수상을 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품상 - 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4회 아카데미에서는 영화 <코다>가 작품상을 수상하였습니다. OTT 사상 첫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하게 되었는데요.
영화 <코다>는 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감독상 - 제인 캠피온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감독상은 <파워 오브 도그>의 제인 캠피온 감독이 수상을 했는데요.
<파워 오브 도그>는 토마스 새비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1920년대 미국 몬태나를 배경으로 목장을 운영하는 카우보이 '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남우주연상 - 윌 스미스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남우주연상은 영화 <킹 리차드>의 윌 스미스가 수상을 하였는데요.
윌 스미스는 <킹 리차드>에서 세계 최강 테니스 제왕 윌리엄스 자매를 키워낸 아버지 리차드 '윌 리엄스' 역할을 맡았습니다.
여우주연상 - 제시카 차스테인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은 <타미 페이의 눈>의 제시카 차스테인이 수상하였는데요.
제시카 차스테인 TV 전도사이자 엔터테이너로 활동하며 인기와 명성을 얻은 '타미 페이 베이커' 역을 맡았습니다
남우조연상 - 트로이 코처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남우조연상은 예상했던 것처럼 <코다>의 트로이 코처가 수상하였습니다.
트로이 코처는 <코다>에서 어부이자 농인인 아버지 '프랭크 로시' 역을 맡았습니다.
여우조연상 - 아리아나 데보스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여우조연상 역시 전에 예상한 것처럼 영화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의 아리아나 데보스가 수상을 하였는데요.
아리아나 데보스는 <웨스트 사이트 스토리>에서 원하는 걸 투쟁으로 쟁취하려고 하는 불같은 성격을 지닌 캐릭터 '아니타' 역을 맡았습니다.
각색상 - 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4회 아카데미에서는 영화 <코다>가 각색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각본상이 아닌 각색상을 주는데요.
<코다>의 원작은 에릭 라티고 감독의 영화 <미라클 벨리에>입니다.
각본상 - 벨파스트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4회 아카데미에서는 영화 <벨파스트>가 각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벨파스트>는 1969년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를 배경으로 집 앞 골목과 짝사랑하는 소녀,
사랑하는 가족이 전부였던 소년과 사랑스러운 가족의 이야기를 흑백 화면 위로 그려낸 영화입니다.
촬영상 - 듄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4회 아카데미에서는 영화 <듄>이 편집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듄>은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자 전 우주를 구원할 예지된 자의 운명을 타고난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후계자인 폴이
황제의 명령으로 폴과 아라키스로 향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의상상 - 크루엘라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4회 아카데미에서는 영화 <크루엘라>가 의상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크루엘라>는 뛰어난 패션 감각을 이용해 완벽한 변장으로 도둑질을 하던 '크루엘라'가 꿈에 그리던 남작 부인 브랜드 디자이너로 들어간 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편집상 - 듄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4회 아카데미에서는 영화 <듄>이 촬영상에 이어 편집상까지 수상하였습니다.
<듄>에 대한 설명은 위에 촬영상 부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분장상 - 타미 페이의 눈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아카데미에서 분장상은 <타미 페이의 눈>이 수상하였는데요.
<타미 페이의 눈>은 70, 80년대에 남편 짐 베이커와 세계적인 종교 방송망과 테마파크를 세운
TV 전도사 타미 페이 베이커의 흥망성쇠와 구원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미술상 - 듄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4회 아카데미의 미술상은 <듄>이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영화 <듄>의 미술은 약 17편의 영화에 참여한 아트디렉터 '톰 브라운'이 맡았습니다.
음향상 - 듄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4회 아카데미의 음향상은 <듄>이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영화 <듄>의 음향에는 맥 루스, 마크 만지니, 더그 헴필, 테오 그린, 론 바틀렛이 참여하였습니다.
음악상 - 듄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음악상은 <듄>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듄>의 음악 감독인 '한스 짐머'는
<라이언 킹>, <007 노 타임 투 다이>, <덩케르트> 등 140여 편의 영화에 음악 감독으로 참여한 거장이다.
주제가상 - 007 노 타임 투 다이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주제가상은 <007 노 타임 투 다이>가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주제가는 빌리 아일리시와 빌리 아일리시의 친오빠인 피니어스 오코널과 함께 작업을 했는데요.
빌리 아일리시의 'No Time to Die'는 빌보드 HOT 100에서 16위, 영국에서는 1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시각효과상 - 듄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음악상은 <듄>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듄>의 시각효과에는 브라이언 코너, 폴 램버트, 트리스탄 마일스, 제드 네프저가 참여하였습니다.
장편 애니메이션상 - 엔칸토: 마법의 세계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장편 애니메이션상은 바이론 하워드 감독의 <엔칸토: 마법의 세계>가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엔칸토>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마드리갈 패밀리의 마법의 힘이 사라질 위험에 처하자, '미라벨'이 나서서 구하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장편 다큐멘터리상 - 소울, 영혼, 그리고 여름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장편 다큐멘터리상은 아미르 "퀘스트러브" 톰슨 감독의 <소울, 영혼, 그리고 여름>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소울, 영혼, 그리고 여름>는 단지 흑인들의 축제라는 이유로 그 어느 곳에서도 방영되지 못한 '할렘 컬쳐 페스티벌'을 조명한 작품이다.
국제영화상 - 드라이브 마이 카
출처 | 네이버 영화
올해 국제영화상은 많은 분들이 예측한 대로 <드라이브 마이 카>가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 2014년 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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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의 전신 하이 스트레인저의 공동 배급 작품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아쉽게도 각본상과 국제영화상을 수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개봉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는데요.
올해 개봉 예정 중에 있으니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그럼 제94회 아카데미 수상작 정리 콘텐츠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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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명(呼名)의 영화
영화 <윤희에게>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최초 작품의 제목이 <만월>로 알려졌었다. 이에 대해 연출을 맡은 임대형 감독은 제목이 바뀐 이유에 대해, 영화 속 편지를 읽는 대목에서 “윤희에게”라는 내레이션 부분이 영화와 전체적으로 잘 어울린 것 같다는 설명으로 이유를 대신했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나면 작품의 제목이 ‘만월’보다는 ‘윤희에게’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임대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윤희에게>는 명백히 세상의 많은 사람을지칭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출처: 네이버영화
주인공 윤희(김희애)는 남편과 이혼을 한 아내이자, 하나밖에 없는 딸 새봄(김소혜)의 엄마이다. 영화 초반에서 보여주듯이 하루를 근심하게 보내고(그녀는 한 공장의 급식소에서 일한다), 집 앞 공터에서 몰래 담배 한 대를 피운 후 하루를 마무리한다. 누구 하나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없을 만큼, 사는데 아무 낙이 없어 보이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는 그녀이다.
본 줄거리가 시작되는 영화의 초반부는 일본 오타루로부터 윤희에게 도착한 편지로 시작한다. 정작 윤희 자신이 아닌 딸 새봄이 먼저 편지를 받아보며 ‘윤희에게’라는 새봄의 내레이션의 시작으로 편지는 읽힌다. 그리고 우리는 윤희의 과거를 조금이나마 유추하게 된다. 새봄이 엄마의 외로움의 원인 혹은 과거를 알고 싶듯이 우리도 새봄의 시선을 따라 윤희라는 인물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어른스러운 요구라고 해야 할까. (새봄은 제법 어른스럽고 똑똑한 인물이다) 마침내 새봄의 여행제안에 윤희가 응답함으로써 둘은 편지의 발신처인, 그리고 쥰이 살고 있는 오타루로 여행을 가게 된다.
출처: 네이버영화
그리고 두 번째 “윤희에게”는 편지의 발신처인 오타루에 살고 있는 윤희의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의 내레이션으로 읽히게 된다. 쥰은 과거의 윤희가 가장 충만했던 시절에 함께 했던 친구이자사랑했던 사람이다. 누구보다 윤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과한 짐작이 아닐테다.
윤희는 (어쩌면 과거의 자신과 비슷했을 법한) 밝고 당찬 딸 새봄과 오타루를 여행함으로써, 그리고 마침내 쥰과 재회함으로써 잊고 있던 (충만했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을 테고, 온전히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을 용서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일은 정말 용기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리고 윤희는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로 쥰의 편지에 답장하게 된다. (편지는 부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윤희에게는 자신을 투명하게 바라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이며, 더 많을 것을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네이버영화
되돌아보면 임대형 감독은 자주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아왔다. 시인 등단을 꿈꾸는 문학청년만일(배유람)이 등장하는 단편 <만일의 세계>에도, 쓸쓸한 중년 남성 모금산(기주봉)이 주인공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도 그들의 이름(또는 성)이 제목에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윤희에게> 또한 제목에서부터 윤희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이 인물에 집중하기를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호명(呼名)의 영화로 부르고 싶다.
늘 사회적으로 조금은 결함이 있는 쓸쓸한 이들을 그려왔던 임대형 감독에게는 그들을 호명하고 주인공의 자리로 가져오는 것이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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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시디어스 : 빨간문> 글로벌 런칭 예고편
요즘은 문단속을 진짜 잘해야 된다는데..? [인시디어스: 빨간 문] 7월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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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운드 오브 데스> 메인 예고편
실험적인 음악과 소리를 연구하는 알렉시스.
폭력의 소리를 수집하는 그녀는 끊임없이 목마름을 느낀다.
어느 날, 행인의 우연한 죽음을 목격한 그녀,
죽음의 소리만이 자신의 쾌감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후 죽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한 살육을 시작한다.
노숙자, 레코드 샵 오너, 하프 연주자…
알렉시스는 죽음의 비트를 찍어 나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