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2022-02-15 22:17:42
루는 죽지 않았어!
영화 리뷰,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하시모토 나오키 / 일본 / 2022 / 126분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루가 봄과 함께 떠났다 사야카는 처음 겪는 이별이 낯설기만 하다 오래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와 함께 헤어진 이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그곳에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재일 한국인 2세인 작가 이주인 시즈카(본명 조충래)의 동명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아쿠타가와상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대중소설 작가에게 수여하는 가장 높은 상이기도 한 나오키상 수상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단행본 소설이다. 하시모토 나오키 감독은 소설을 처음 접하고, 영화화하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마음을 아리게 만들기에 변함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는 죽지 않았어-
영화는 난생처음 상실과 이별을 경험하게 된 8살 소녀 사야카(니이츠 치세)와 오래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오이다 요시)의 만남을 10년 후 사야카의 내레이션(아리무라 카스미)을 통해 들려준다. 소중한 관계의 상실과 이별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야카가 맞이하는 이별은 작별인사 기회조차 주지 않는 어린이에겐 너무 어려운 경험의 연속이다. 이렇게까지 잔인한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기엔 영화는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살랑한 봄의 여행길 같다.
좁은 문을 통해 강아지 루를 따라 들어간 벽으로 둘러싸인 들판은, 말 그대로 둘만의 공간이었다. 유일한 친구인 루만이 함께하는 공간은 그 어디보다 외롭지 않고 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가장 자유로운 공간처럼 느껴진다. 벽 너머로 수평선까지 보이는 듯한 바다조차 맑은 하늘에 푸르게 반사되지만 사야카 혼자 다시 들판에 갔을 때는 벽의 헤드룸을 좁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일반 공터로 만들어버린다. 그만큼 세상을 다르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에 대해 보여준 덕에 사야카의 상실감의 폭은 더욱 크게 와닿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첫 장면이다. 첫 장면이 강렬한만큼 후반부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사야카가 느끼게 된 소외의 너무 짧은 전사나 스토리 전개의 속도, 카메라를 바라보는 듯한 사야카의 시선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적어도 루와 사야카의 관계는 의심할 수 없는 꾸밈없는 관계였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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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태어나도 풀 수 없었던 '나'라는 숙제와 원죄
두 번의 결혼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야자키 현에서 문방구를 운영하고 있는 리에와 그의 손님 타니구치다. 리에의 옆은 허전하다. 남편은 리에의 곁을 떠났고 사랑하는 아들은 이제 이 이 세상에 없다. 텅 비어버린 삶. 혼자 정리하는 문방구에는 빈 공간이 많다. 지인들이 리에의 문방구에 도착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리에와 사람들. 그럼에도 리에의 일상이 바뀌기엔 시간이 좀 필요한 듯하다. 그녀의 문방구를 들락날락하던 손님 타니구치는 주인 리에의 어두운 그림자를 잘 알고 있다. 사실 타니구치는 리에를 마음에 두고 있다. 어딘가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던 타니구치. 문방구점에서 미술도구를 사는 일로 리에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잔잔한 로맨스물처럼 보이던 영화는 갑자기 장르적인 긴장감을 덧붙인다. 리에와 타니구치는 오래 걸리지 않아 마음이 통하게 된다. 용기를 내는 타니구치. 리에 역시 마음을 열게 된다. 리에의 상처를 위로할 줄 알았던 타니구치. 리에는 이런 타니구치와 사랑에 빠진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미래. 둘은 결혼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두 사람. 큰 상처가 있던 리에에게 타니구치는 선물 같은 존재다. 어느 날. 남편 타니구치가 일 하러 나갔다. 벌목업을 하던 타니구치. 안전장비를 단단히 챙겼다. 나무를 베는 타니구치. 혼자서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갑자기 사고가 벌어진다. 벤 나무가 잘못 떨어져 타니구치에게 향했다. 나무에 깔려 사망한 타니구치. 타니구치가 세상에 떠났다. 장례식 당일. 타니구치의 친형이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는 리에와 타니구치의 형. 그런데 타니구치의 형은 뭔가 이상한 말을 한다. “잠깐, 이 얼굴 제 동생 아닌데요?”
들끓는 내면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핵심은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인생을 톺아보며 ‘어떤 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영화 제목으로 설정한 ‘한 남자’는 작품의 이야기에 대한 은유다. 이 다방면으로 등장하는 남자들은 각기 다른 인물임과 동시에 후반부의 무언가를 암시한다. 일본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영화의 이면에 전적으로 깔려있는 것과 동시에 단지 제대로 살고 싶었던 한 남자의 비명이 각기 다른 인물들에게 투영되어 있다. 이 여러 인물의 내면을 한 사람으로 수렴하는 연출은 후반부까지 집중하지 않는다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 주인공 키도의 시점에서 이어진다는 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인물(키도)이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다른 캐릭터는 과거에 큰 상처가 있으며 정반대로 규정지을만한 무언가 역시 키도와 이어진다는 점이 이야기에서 핵심으로 작동한다.
영화는 조용하다. 감정적으로 대놓고 폭발하는 장면이 없다. 하지만 진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품 내적으로 품고 있는 고요함 때문이다. 이 고요함이라는 정서는 영화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인물들의 속성이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속으로 평가할 때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한다면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생 이면에 가려져 있는 것을 전부 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교류하며 살아감과 동시에 ‘지엽적인 접근’으로 행복해진다. 영화는 냉정할 정도로 인간이 가진 이 아이러니를 묘사한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이 직접적인 화법보다 더 설득력이 붙는다.
따가운 피부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영화 포스터에 등장하는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이다. 영화는 이 그림을 초반부에 중요하게 등장시켰다. 사실상 이 그림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은 본질적으로 모순이다. 한 남자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근데 거울이 비추는 것은 뒷모습이다. 당시 유행처럼 불었던 초현실주의 화풍과 프로이트의 연구결과가 이 그림에 큰 영향이 갔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꿈, 욕망, 우연성 등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키포인트라고 봤다. 르네는 인간의 뒷모습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표현하는 단초가 된다라고 생각하고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앞(표면)이 아니라 뒷(이면)을 보겠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영화의 핵심으로도 이어진다. 그 사람에 대해 정보를 얻는다. 근데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건 아니다. 단지 뒷모습을 보고 키도가 어떤 인간인가 생각할 뿐이다. 영화 내적으로 일본 사회가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행위가 단지 앞만 봤기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작품의 형식이 이 그림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름이라는 소재를 영화가 이야기를 함축하는 데 사용됐다는 점이 그렇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영화가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핵심으로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인물의 내레이션을 위시로 한 직접적인 감정 묘사 없이 ‘뒷모습을 보는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인물들과 거리 두고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영화 중반부 즈음에 주인공 키도가 유리를 앞에 두고 누군가와 만나는 신에서 극대화된다. 사실상 이 두 인물은 거의 유사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인물 간의 거리 두기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이 두 사람이 어떤 히스토리를 가진 인물인지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 등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부분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달려 있다. 영화가 러닝타임이 끝날 때 자연스레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의 답을 ‘금지된 재현’이라는 그림으로 한 듯하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건 사회가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영화가 어떻게 사회적인 문제를 ‘잘’ 다룰 수 있을까? 이번주에 개봉했던 <타겟>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경우에 속한다. 중고거래라는 설정보다 ‘여성이 혼자 사는 것의 위험함’이 훨씬 중요하고, 이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과한 표현도 몇 보인다. <한 남자>는 감정적으로 들끓는 순간에 물음표를 친다. 그리고 인물이 처해있는 입장 역시 거리를 두면서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 근거를 둔다. 그 이면에 일본 사회에 만연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알려져 있는 범죄 묘사가 그대로 영화에서 중요하게 삽입된다. 이 역시 영화에서 반복되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소모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닌 이야기를 작동하는 원리가 됐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이 영화를 격렬한 스릴러/미스터리물로 보기 어렵다. 실제로 이와 관련한 대사가 후반부에 제시되기도 한다. 영화의 편집과 음향은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다. 장면은 그림을 그린 것처럼 통제되어 있다. 이런 연출이 영화를 문학적으로 읽히게 만드는 요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르적으로 쫀쫀한 긴장감을 기대하고 가는 관객들이라면 영화를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거리를 둬 관객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몰입감을 유발하기 충분하다. 안도 벚꽃을 위시로 한 배우들의 감정연기가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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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 나오는 한국 영화 '옥자' 스포일러 포함
옥자
2017.06.29 개봉
모험/액션, 12세 관람가
한국, 120분
감독: 봉준호
출연: 안서현, 틸다 스윈튼 등
넷플릭스가 유명하지 않던 시절
봉준호 감독님의 '옥자'로 인해 넷플릭스 존재를 알게 되었었는데요
띄엄띄엄 아는 장면들은 많았는데
영화를 풀로 본 건 6년 만인 바로 오늘이었네요 ㅎㅎ
아무래도 상업적으로 만든 영화도 아닌 것 같은 데다가
동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 깊은 울림도 없을 것 같았는데
역시... 봉준호 감독님 작품이라 그런지... 작품성은 개쩔어요
설국열차와 기생충 그 사이를 잇는 다리 같은 느낌의 영화랄까요?
스토리부터 영상미까지 봉준호 감독님의 향이 느껴집니다
'옥자'가 특히 좋았던 이유는
친구이자 가족 같은 옥자를 구하려는 순수한 아이와
그런 옥자를 자원으로 이용하려는 기업
그 둘만의 리그가 아니었다는 점이었어요
비밀 동물 보호 단체 ALF가 끼어 삼파전으로 가면서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옴과 동시에
긴장감 넘치는 구도가 완성된 느낌이랄까요?
원래 영화 같았음 미자를 돕는 인물은 당연히~ 안 나오고
동물 보호 단체라고 하다가도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주인공을 배신하는 게 클리셰인데
ALF의 리더는 끝까지 미자와 옥자를 생각해 주더라고요
게다가 시위, 작전을 하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게 규칙이라는 게... 너무 감동적
이렇게 착하고 완벽한 캐릭터로 설정하고 가는데도
절대 쳐지지 않고 오히려 감동만을 이끌어내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옥자'는 감정선을 잘 건드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건 역시나 엔딩이랄까요......
지금껏 빌런의 역할을 했던 루시 미란도는 어디로 가고
그의 언니 낸시 미란도가 최강 빌런 역할로 나섭니다
그러고도 미자가 옥자를 사겠다고 금돼지를 주니까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바로 옥자를 줘 버려요
아무리 돈을 욕망하는 캐릭터라고 해도
엔딩이 힘이 없고 허무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스토리도 이리 좋은데 영상도 나쁘지 않아요!
슈퍼돼지인 옥자의 움직임도 스무스한 게 괜찮고
특히 지하상가를 헤집어 놓을 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은데요 ㅎㅎ
죠니의 실험실에서 옥자가 당하던 모습도 기억에 남습니다
강제 짝짓기를 시키던 그 모습은......
굉장히 마음이 아프지만 영화에선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이었죠
그런 모습을 보면 참
동물원이랑 아쿠아리움 같은 게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인기 있는 푸바오도 ㅠㅠ,,
아무리 직원분들이 잘 챙겨 주신다고 해도
우리 안에 있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숨막힐지 상상도 못하잖아요
게다가 인기 얻은 이후엔 손님도 바글바글 할 거구요
사실 저도 올 상반기에 과천 동물원에 다녀왔는데
동물들이 죄 힘이 없고 축 쳐져 있는 모습을 보고......
현타가 왔거든요
그 이후로 동물원, 아쿠아리움은 안 가야겠다고 생각 중입니다 ㅠㅠ
동물들아 미안해 . . .
제가 뽑은 '옥자'의 최고 명장면은
미자와 옥자가 한국으로 돌아가려 직원들을 따라 갈 때
울타리 밖으로 자기 새끼를 몰래 밀어넣던 슈퍼돼지 부모의 모습 ㅠㅠ
죽으러 가는 거 뻔히 알고 자식이라도 살리기 위해
생판 모르는 미자와 옥자에게 새끼를 맡겨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은 정말 헤아릴 수가 없이 슬픕니다
주인공인 미자는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났지만
수백 마리의 슈퍼돼지들은 죽임 당했으니
이건 새드 엔딩이나 마찬가지예요......
*스토리: 3/5점
*연출: 3/5점
*영상미: 2/5점
*OST: 1/5점
*연기: 3/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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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담아, 뜨거운 안녕
* <인생은 아름다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인생은 아름다워 (2022)
감독: 최국희
출연: 류승룡, 염정아, 옹성우, 박세완
장르: 뮤지컬, 드라마
상영시간: 122분
개봉일: 2022.09.28
내 생애 마지막 생일, 첫사랑을 찾아줘!
자상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편 ‘진봉(류승룡)’과 무뚝뚝하고 철 없는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오랜 세월 자신을 잃은 채 살아온 ‘세연(염정아)’. 어느 날 병원에서 2달 시한부 인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런데 웬걸. 남편이라는 사람은 아내가 곧 죽는다는데 여전히 자신을 종 부리듯 하고 걱정이나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는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생일마저 가족들에게 무시당한 ‘세연’은 ‘진봉’에게 마지막 생일 선물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다. 당당하게 으름장을 놓는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 없던 ‘진봉’은 결국 ‘세연’의 첫사랑을 찾아 그들의 찬란했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국내 첫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 안전한 각본 선택
<인생은 아름다워>는 국내 최초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로 ‘이문세’, ‘이승철’, ‘토이’ 등 많은 세대가 즐겨 들었던 유명 가수들의 음악을 뮤지컬 넘버로 활용했다. 아직 국내에서 뮤지컬 영화는 성공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시도만으로도 큰 도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험적인 장르를 시도한 대신 각본은 전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안전한 가족 드라마를 택했다. 두 주인공이 로드무비처럼 전국 곳곳을 다니며 장소에 깃든 과거를 추억하고, 그 시기에 유행했던 명곡을 해당 신의 뮤지컬 넘버로 사용해 스토리와 음악의 편안한 결합을 이뤄낸 점은 호평할 만하다. 그저 맥락 없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 인물들의 서사에 걸맞게 음악을 활용해 뮤지컬 신에 설득력을 더하고, 대사와 노래의 전환이 매끄럽게 이어져 화려한 퍼포먼스와 신나는 뮤지컬 넘버가 분위기 환기를 톡톡히 해낸다.
작위적인 캐릭터 구성, 그럼에도 훌륭한 염정아의 연기
개봉 전 우려했던 뮤지컬적 연출은 의외로 준수했으나 장르 특성상 감성적인 요소를 터치해야 하기 때문인지 캐릭터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다. 특히 ‘류승룡’이 연기한 ‘진봉’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중반부까지 시한부인 아내에게 지독하게 못되게 구는 비호감으로 비춰진다. 생일날 술에 취해 들어와 선물이랍시고 손가락 하트를 내밀고 옷이 덜 말랐다며 셔츠를 툭 던지는 행태는 충격을 금치 못할 정도다. 이는 불쌍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인 ‘세연’의 감정에 관객들이 이입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일 터. 하지만 제아무리 이들이 젊을 적에 열렬한 사랑을 했다 할지라도 현재 ‘진봉’의 행동들을 보고 이들의 사랑에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감정에 호소하기 위한 어쩔 수 없이 반영한 설정이라 감안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쳤다. ‘진봉’의 이러한 모습들 때문인지 아빠 못지 않게 엄마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두 자녀는 그나마 귀엽게 봐 줄 만한 수준이었다.
작품의 진주인공 ‘세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임신한 아내에게 굶으라는 소리나 했던 남편과 20년 넘게 함께 산 그에게 대체 무슨 사랑이 남은 걸까. 감독은 ‘세연’의 불쌍한 처지를 강조하기 위해 캐릭터를 과도하게 수동적으로 만들었고, 다른 가족들에겐 매몰차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세연’의 안타까움을 강조할수록 결말부에 가족들의 슬픔과 후회는 더욱 커질 것이고, 비극적인 상황에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이입시킴으로써 눈물과 감동을 유도한 것이다. 차라리 ‘세연’이 초반에 신용카드로 명품 코트를 지르고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나가버렸다면 어땠을까. 감독은 그녀를 마지막 버킷 리스트조차 남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성으로 만들어 버렸고, 아련하고 풋풋했던 첫사랑의 추억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열 일곱의 첫사랑을 엇갈린 관계로 그림으로써 결국 ‘세연’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은 ‘진봉’ 뿐이라는 것을 부각한 셈이다. 하지만 앞서 아내를 향한 감정적인 학대를 일삼는 ‘진봉’의 행동들을 지켜보게 해놓고 어떻게 이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보란 말인가.
영화는 후반부에 가서야 급하게 ‘진봉’이 사실은 아내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음을 꺼내 놓는다. 겉으로는 화를 내고 툴툴거렸지만 사실은 아내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뒤편에서 애를 썼다는 ‘츤데레’로 포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캐릭터의 비호감적 속성을 상쇄시키려는 시도로 느껴질 뿐이며 스토리의 진부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시한부를 알게 된 이후 남편이 뒤에서 챙겨줬다고 한들, 그동안 받았을 ‘세연’의 상처는 지워낼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입하기 어려웠던 캐릭터 설정과는 별개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을 쏟는 감정신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푼수 끼 넘치는 코믹한 면모까지 다채로운 매력을 뽐낸 ‘염정아’의 연기력만큼은 눈부시다. 엄마의 시한부 소식을 알게 된 후 전화를 건 자식들의 목소리에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세연’의 눈물에 많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고 출중한 실력은 아니지만 진솔한 감정을 담아 노래한 담백한 목소리에 기쁨과 슬픔을 모두 느꼈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성량과 안정적인 가창력을 지닌 ‘류승룡’이 뮤지컬 신에서 중심을 잡아주었다면 ‘염정아’는 절륜한 연기력과 놀라운 몰입감으로 작품 전체를 이끌었다.
시대 고증보다는 뮤지컬적 연출에 집중
두 주인공의 10대부터 50대까지의 이야기가 모두 등장하는 만큼 작중 다양한 시대상이 배경으로 나온다. 하지만 감독이 시대 고증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지는 않다. 가령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는 1980년대이지만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난 90년대 초반의 배경으로 활용된다. 90년대 초반 대학생이었을 두 주인공의 의상 또한 1970년대 배경의 <써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촌스럽다. 이는 뮤지컬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대의상처럼 원색의 화려한 의상들과 시대착오적인 스타일링을 택한 게 아닐까 싶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IMF’ 등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사건들은 단지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 줄 배경으로 활용될 뿐이며 고증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은 것을 보면 배경 자체에서 큰 의미를 끌어낼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그 시기를 경험했던 관객들로 하여금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기능적 요소로 쓰일 뿐이다.
음악으로 아름답게 포장, 장르적 도전에서만 건진 의미
캐릭터의 구성과 스토리 자체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전형적인 가족애의 이야기가 가져다 주는 감동은 유효한 듯하다. 시한부라는 설정상 신파적 요소가 강한 부분이 있지만 해당 장면에서 관객이 눈물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은 평상시에 가족에게 잘하고, 존재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하는 고루한 메시지가 아직까지 먹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평소 아내에게 무심했던 중년의 남편, 엄마의 뒷바라지를 당연하게만 여겼던 철없는 자녀들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면 작중 가족들의 이별에 감정적으로 이입하는 바가 남다를 것이다.
낡은 스토리에 춤과 노래가 색깔을 입혀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반부에 무거운 감정을 질질 끌고 가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이 모인 파티에서 함께 ‘뜨거운 안녕’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 작품이 뮤지컬 장르의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부분이다.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유쾌한 멜로디에 모두의 사랑을 담아 ‘세연’을 떠나 보냄으로써 그녀의 덧없던 인생에 한 줄기 아름다움을 덧씌운다. 끝내 반전은 없었지만 영화가 음악을 통해 형성한 감흥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래도 세연의 인생은 아름다웠지’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그녀와의 쿨한 이별을 받아들이게 한다.
주크박스 뮤지컬 영화의 시도는 좋았으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걸작의 이름을 빌려올 것이었다면 음악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한 것이 아닌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부를 봤어야 하지 않을까. 추억의 명곡과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한국형 뮤지컬’ 영화에 대한 편견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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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트> 시대를 바꿀 개인의 역동성을 담은 액션의 향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 일정 중 예상치 못한 테러 공격을 받고 가까스로 범인을 제압한 안기부 해외팀 팀장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 팀장 ‘김정도’(정우성). 뒤이어 도쿄에서도 북한 고위 관리의 망명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직 내에 북한의 간첩인 '동림'이 침투했음을 확신한 박평호는 스파이 색출 작전에 돌입하고, 상부의 지시를 받은 김정도 역시 뒤질세라 동림을 쫓기 시작한다. 서로서로를 용의선상에 올려둔 채 조사에 박차를 가하던 해외팀과 국내팀은 먼저 찾지 못하면 첩자로 지목될 위기 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한다. 그러던 중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 숨기고 있던 은밀한 비밀에 접근하고,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의 실체를 깨닫는다.
사극이나 시대극을 보다 보면 유달리 영상화가 잘 되는 특정 시기가 있다. 여말선초가 대표적이다. 조선이라는 새 국가가 설립되던 혼란기를 배경으로 정도전, 이방원, 이성계, 정몽주와 같은 인물들의 피 튀기는 암투는 수없이 조명되고, 또 재조명되었다. 사무라이의 전성기가 열렸던 일본의 전국시대, 한나라가 무너지고 긴 혼란기의 시작을 알린 중국의 삼국시대, 이에 더해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도 수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시대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질서가 무너지고, 국가와 법의 영향력보다 주먹과 칼, 총의 힘이 더 강하며, 개인들의 역동성이 두드러지는 시기다. 격동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본래 지녔던 신념과 명분을 고수하거나 포기하는 이들의 대립, 과거의 질서를 따르는 이와 새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갈등. 이러한 분열과 싸움은 심지어 한 개인 안에서도 치열하게 펼쳐진다. 그저 시대에 순응하여 장기 말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설령 꺾기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주체로서 시대에 맞설 것인지. 그 덕분에 이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는 감독 이정재의 첫 연출작인 첩보 액션 영화 <헌트>에서 화려한 액션보다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두 주인공의 에너지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이유다. 1980~83년을 관통하는 팩션 영화인 <헌트>는 '이웅평 대위 미그-19기 귀순 사건'과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사건들을 선보인다.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도 잠시 스쳐 지나가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 역시 한 축을 차지한다. 이에 더해 작중 북측 간첩을 지칭하는 암호명 동림은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간첩 조작 사건인 '동베를린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들은 여말선초만큼이나 혼란했던 전두환 신군부 초반부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안기부의 고문 및 간첩 조작은 전두환 정권 치하의 불안정성을 상기시킨다. 간첩을 침투시키고 전면전을 준비하는 북한은 군사 정권을 위협하면서도 그들에게 명분을 주는 양날의 검이다. 대학 운동권들은 뚜렷한 목표나 수단에 대한 합의도 없는 뜨내기일 뿐이고, CIA로 대변되는 미국은 인권보다는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유지에만 관심 있는 존재다. 이들은 한데 모여 좀처럼 올바른 선택지를 알 수 없는 카오스와도 같은 무채색의 시대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헌트>는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이지 않는다. 영화는 특정 사건에 대한 정치적 입장에 관심이 없다. 그저 사건에 휘말린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고, 그들이 어떻게 시대의 풍파에 맞서고 있는가에 주목한다.
덕분에 <헌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파도를 헤쳐 나가는 개인들의 발버둥에 주목할 수 있다. 당장 <1987>, <택시 운전사>, <화려한 휴가>, 그리고 살짝 앞선 시간대의 <남산의 부장들> 등만 보더라도 생사와 옳고 그름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개인들을 그려낸 바 있다. <헌트>도 다르지 않다. 그 결과 <헌트>는 첩보 액션 영화 중에서도 <007> 시리즈보다는 시대극과 스파이 장르물을 오가면서 개인의 고뇌와 선택에 주목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 가깝다.
이 혼란의 중심에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가 위치한다. 안기부 해외팀 팀장인 ‘박평호’는 조직 내 침입한 스파이 동림으로 인해 도쿄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실체를 맹렬히 쫓는다. ‘김정도’는 안기부 국내팀 팀장으로, 안기부 내에서의 스파이를 색출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이행한다. 박평호는 김정도를 동림으로 몰아가기 위해, 김정도는 박평호를 동림으로 몰아가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본 적 있는 2인자가 되기 위한 두 세력의 다툼이 이어진다. 이때 <헌트>는 영화 내외의 다양한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갈등의 양상을 다채롭게 변주한다. 우선 스타의 존재감을 활용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23년 만에 한 작품에서 조우했다는 화제성을 오프닝부터 영화의 동력으로 삼아 두 주인공의 관계를 단숨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첩보 영화의 정체성을 모범적으로 살려낸 구현해낸 구성과 연출도 인상적이다. '첩보'는 '상대편의 정보나 형편을 몰래 알아내어 보고'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잘 만든 첩보 영화는 극 중 인물들에게 언제 정보를 공개할지 그 타이밍을 정확히 잡아, 긴장감을 지속시킬 줄 안다. 또 스토리텔링이 결국 관객들에게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걸 고려하면, 정보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첩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그래서 안기부 내의 첩자인 동림의 정체를 두고 전반부와 후반부가 극명히 갈리는 <헌트>의 구성은 영리하다. 서로 다른 의미의 '사냥(hunt)'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대책 없이 부딪히는 전반부의 박평호와 김정도는 양극단에 서서 다른 극단을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된 권력의 장기짝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림의 정체라는 정보가 공개된 이후 그들은 같은 목적을 쫓는다. 서로가 감추고 있던 '불꽃 작전'과 '베드로 사냥' 계획의 일부에 대해 알게 된 두 주인공은 이제 동시에 1호라는 사냥감을 추적한다. 그런데 박평호와 김정도가 한 팀이 되었는데도 영화의 갈등선은 오히려 입체적으로 변한다. 북한의 전면전 계획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마지막 사냥의 목적과 의미를 두고 서로 다르게 판단하고 선택한다. 두 인물 간의 외적 갈등에 자기 자신을 쫓는 내적 갈등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사건 사이에서 권력의 장기 말이었던 이들이 시대를 거스르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움직이는 새로운 페이지의 시작을 알린다. 그렇기에 영화가 박평호와 김정도의 비밀을 공개할 때 그들이 문자 그대로, 또 상징적으로 손을 맞잡으며 사냥의 의미가 달라지는 장면의 임팩트는 대단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 사냥의 중심에 위치한 두 인물의 타협할 수 없는 신념 간의 충돌, 곧 영화의 메시지에는 자연히 힘이 실린다. 남한과 더 나은 평화 협상을 끌어내기 위해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북한 간첩 동림과 대통령을 암살하고 독재를 청산하여 광주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넋을 달래주고 민주주의 실현을 꿈꾸었던 군인. 이들은 정당하지 않은 국가의 폭력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고, 대규모 유혈 사태가 필연적인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도 남북의 군사적 대립과 유신정권의 붕괴, 쿠데타와 실패로 귀결된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헌트>가 진정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저 한 명의 독재자가 아니다. 서슬 퍼런 권력과 혼돈 앞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한 개인의 무기력함이야말로 숨어 있던 진짜 내부의 적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방콕 테러 사건은 이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풀어낸다. 블록버스터에 걸맞은 액션으로 가득한 클라이맥스이자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한 곳으로 집약된 고통의 현장을 그려낸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인물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기는 데 실패한다. 한 명은 우려했던 대규모 살상 사태를 막아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온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는 실패한다. 다른 한 명은 죄책감을 씻어낼 암살 미션의 성공을 목전에 두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모래 마냥 놓치고 만다. 하지만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너져 잿빛 가득한 테러 현장에서 기어코 다시 총을 쥐고, 또 총을 쥔 이를 막아서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신념이 강렬하게 전해진다. 권력에 충실했던 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동적인 개인들의 에너지가 스크린 위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박평호와 '조유정(고윤정)'이 바통 터치하는 <헌트>의 에필로그는 희망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혼란한 시대의 파도 앞에서 개인의 신념과 뜻이 꺾이는 듯 보이더라도, 끝내 한 발 더 나은 세상과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포기하지 않으며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줄 아는 개인들의 역동성을,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를 극복하지 못한 개인들의 실패가 담아낸다. 이처럼 1980년대라는 시대의 틀에 갇히지 않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확장되는 영화의 끝은 강렬한 액션만큼이나 여운이 길다.
이러한 구성과 주제, 메시지는 <헌트>가 상당히 영리한 영화이기에 더욱 눈에 띈다. 사실 <헌트>는 단점도 적지 않다. 전반적인 이야기 구조가 꽤 복잡할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한국 현대사를 일정 수준 알지 못하면 100%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또 쉬어가는 틈이 없이 전력으로 내달리는 영화라서 피곤할 수도 있다. 스릴러라 하더라도 긴장감과 압박감을 조절하는 리듬감이 있어야 마지막까지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데, 끝없이 정보와 사건이 쏟아지기에 벅차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이에 더해 폭발음과 총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사를 알아듣기 힘든 고질적인 음향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는 데 온 힘을 쏟은 결과 위와 같은 단점은 눈에 크게 띄지 않는다. 액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헌트>의 액션은 기본적으로 양도 많고, 현장감을 잘 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부닥친 주인공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채 상황에 끌려가는 장면이 대다수라서 긴장감도 상당히 높다. 보여주기 위한 액션이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암시와 복선을 액션에 담아낸 것도 인상적이다. 액션씬을 보다 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의문점이 있는데, 그 의문점들이 한데 모이다 보면 영화의 반전과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에 더해 핵심적인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에 변화를 주는 분기점을 액션으로 표현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대표적인 것이 박평호와 김정도가 한데 뒤얽혀 싸우고, 계단을 뒹굴며 떨어지는 모습으로 끝나는 사내 난투극이다. 작중 유일한 일대일 맨몸 액션으로, 둘 중 누가 우위에 있고 누가 감정적으로 쫓기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의 모든 메시지가 집약된 방콕에서의 테러 장면도 개인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숱한 폭발 장면을 통해 분출시킨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자연히 숨어 있는 단점을 굳이 들춰내는 것보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장점에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감독 이정재의 데뷔작은 묵직하고 씁쓸한 첩보 액션의 참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총성과 폭발음 안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장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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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가지 짧지만 강렬한 공포
단편 영화들을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시절은 이제 지난 것 같다. 올해 6월에는 문병곤 감독의 <밤낚시>가 단편 한 편을 단독으로 극장에 개봉하기도 했고,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던 단편들을 특정 장르나 주제로 묶어서 상영하는 <숏버스>나 <기기묘묘> 같이, 극장에서 일반적인 상영 방식으로 단편 영화들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기기묘묘는 2022년에 1편이 공개되었고 올해 2편으로 다시 관객들을 만난다. 제목부터 기묘한 이 단편 영화들은 공포 영화에 목마른 관객들이라면 흥분할 것이고 이런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단편으로 만나는 공포라는 신선함을 제공할 것이다.
<기기묘묘2>의 막을 여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정경렬 감독의 <블랙박스>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코리안 판타스틱 섹션에서 소개된 바 있다. 늦은 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승무원, 그러나 택시 기사와의 분위기는 불편하기만 하고, 설상가상 내비게이션과 휴대전화까지 먹통이 된다. 그러던 와중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블랙박스라는 제목에 걸맞게 영화 내내 차량에 부착된 카메라들로만 전개가 된다. 이러한 촬영은 제한적이면서 기존 극영화들과는 다르게 아주 거칠고 동시에 현실적이게 느껴진다. 파운드 푸티지 장르를 좋아하거나, 근래 유행했던 아날로그 호러들(유튜브에서 유행한 바 있는 <백룸>, <LOCAL58'>)을 좋아한다면 아주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남순아 감독의 <탄생>이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코리안 판타스틱 섹션에서 소개된 바 있다. 요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환자 '미숙', 그러나 의료진과 가족들은 집으로 보내주지 않는다. 그런 미숙에게 수상한 다른 환자가 접근해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자신의 제안을 따른다면 말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하지만 동시에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젊은 시절의 자신과는 달라지는 외적, 내적인 것들이 두렵게 느껴지는 이들 또한 많을 것이다. 이미 누군가는 겪고 있고, 누군가는 곧 겪을 이러한 공포를 샤머니즘적인 요소들과 결합해 기괴하게 담아냈다. 여기에 무채도, 흑백에 가까운 영상의 색감은 명도를 더 명확하게 느끼게 해 독특하면서도 기괴한 영상미를 선보인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구자호 감독의 <과외 선생님>이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엑스라지 섹션에서 소개된 바 있다. 명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과외 선생님을 1 대 1 과외를 하기 위해 이곳저곳 전단을 붙인다. 그러다 '소연'이라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연락이 온다. 영어를 죽도록 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한 단어라도 쓰게 해달라는 어머니. 과외 선생님은 소연과의 영어 과외를 시작한다. 과외를 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인 이 에피소드는 이러한 제한된 설정을 통해 펼쳐진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제한된 설정들은 극 중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상황들을 더더욱 기괴하게 관객들을 미궁에 빠뜨리게 한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송원찬 감독의 <이방인>이다.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코리안 판타스틱 섹션에서 소개된 바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컨테이너 물류 단지의 선박 하역장. 이곳에서는 현장 관리직과 외국인 노동자 사이의 위계로 인해 불편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다. 그러던 와중 한 외국인 노동자가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고, 회사에서는 산재 처리를 거부한다. 그러던 와중 현장 관리직 '우진'에게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관한 사회 비판을 기괴한 연출로 담아냈다. 현실인지 악몽인지 모를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상업 영화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급의 연출로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누군가는 서류 한 장, 누군가에게는 가족, 이런 대조적인 시선이 존재하는 하역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진짜 공포는 무엇일까?
마지막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정재희 감독의 <기억의 집>이다.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코리안 판타스틱 섹션에서 소개된 바 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쓰러져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해봐도 반응이 없다. 그러나 엄마의 호출벨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엄마는 알 수 없는 것을 보며 두려움에 떤다.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지만, 깔끔한 아파트나 오피스텔 같은 공간과는 다른 전통적인, 한국적인 분위기의 가정집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사건들이 마치 해외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집들을 보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동시에 이런 제한된 공간이지만, 영화 속 시간과 사건들이 마치 악몽, 기억처럼 뒤섞이며 관객들에게 과연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것인가 고민하게 만들며, 충격적인 엔딩은 진실이지만 결코 편하지 않은 진실이 관객들을 덮칠 것이다.
다섯 개의 단편은 각자 색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한 문장이나 단어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장르로 구분하자면 '오컬트'라고 부를 수 있겠다. 괴물, 샤머니즘, 저주, 악몽과 같은 요소들을 각자 다른 감독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선보인다. 단편인 만큼 러닝타임은 짧지만, 영화의 충격과 여운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
*본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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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인한 인력과 다정한 척력
어렸을 때는 엄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엄마의 희생, 헌신, 모성애... 같은 단어들은 문자 그대로 단어로만 존재했다. 수업 시간에 문학 작품의 주제 의식과 소재가 무엇이라도 딱 못박아 배우듯, 그런 단어들을 나는 교과서적으로 배웠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내게는 너무 당연했기 때문이다. 산소를 의식하면서 숨 쉬는 사람은 없듯이, 엄마가 주는 사랑에 둘러싸인 세상에서만 살아본 내게 '모성애'라는 말은 마치 산소의 원소 기호 같았다.
엄마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건 아니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엄마, 하고 부를 때 언제나 손 닿는 거리에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늘 응, 하고 다정하게 대답했으니까.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니 막연하게 그려본 것들은 있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가 준다고 하는 기쁨도 고통도 내겐 상상 너머의 영역에만 존재한다. 어림잡아 보는 걸로는 근처에도 다다를 수 없는 깊은 감정일 거라 생각한다. 기쁨 쪽이든, 고통 쪽이든. 다만 기쁨 쪽이 더 깊고 거대하게 사람을 채운다면, 고통 쪽은 너무 사소해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것들이 바늘처럼 콕콕 찌를 거라, 빈도와 방식의 차이는 있을 거라고 상상해볼 따름이다.
<로스트 도터>는 '엄마가 된다는 것'을 상상만 해본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데까지, 실제의 언저리까지 사람을 데려간다. 성녀 같은 어머니도, 폭군 같은 어머니도 아닌, 다면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을 가진 인간들이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로스트 도터>는 <잃어버린 사랑>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원작 소설과 이야기의 얼개는 거의 비슷하나, 얼핏 작고 사소해 보이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들이, 원작 소설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이 영화를 데려간다.
이야기의 주축은 40대 여성인 레다.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이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해변가에는 휴가 차 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휴가 차 왔지만, 제법 지역 유지에 속하는 가족 전체가 우르르 몰려와서 레다와는 다소 다른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 사이, 이야기의 다른 주축 '니나'가 있다. 니나는 여섯 살쯤 된 작은 딸 엘레나와, 엘레나가 목숨처럼 끼고 다니는 인형까지 함께, 부산스럽고 자못 당당한 가족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조용하게 있다. 마치 딸과 자신만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듯이 정성스럽게 딸을 돌보면서. 두 사람은 이따금 눈이 마주친다.
그러면서 레다는 이따금 자신의 기억을 돌아보게 된다. 두 딸을 기르면서 육아에 지쳤던 시간을. 끊임없이 약해지기도 하고, 작은 아이에게 미친 듯이 분노하기도 하고,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 정말 괜찮은 걸까 의구심을 품기도 하고.
그런 레다를 니나도 바라본다. 이미 아이들을 다 키우고, 자기 일에서도 뚜렷한 성취를 했고, 지적이고 우아한 모습으로 해변에서 혼자만의 휴가를 즐기고 있는 레다를 보며, 니나는 애쓰고 버티다가 흘러나온 진심을 레다 앞에서는 털어놓는다. 지금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이 마음이, 지나가기는 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며.
얼핏 보면 이미 육아를 마친 여성과, 육아의 한복판에 놓인 여성의 다정한 대화 같지만. 육아에 지친 얼굴, 도망칠 곳을 찾는 마음, 그런 것들이 젊은 시절의 레다와 니나 사이의 공통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훈훈하게 풀어놓는 대화가 아닌, 자신이 잃어버린lost 것에 대한 대화가 된다. 레다는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을 두고 떠났던 날의 이야기를, 그래서 자신을 찾은 듯한 느낌에 행복했던 이야기를, 그러나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게 된 이야기를 한다.
니나는 레다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갔다는 결론에서 안심할 지푸라기를 계속 잡으려 하지만, 죽고 못 사는 아름다운 사랑만이 모성의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레다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그 모성의 다양한 얼굴을 너무나도 예리하게 구현해 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제시 버클리가 연기하는 젊은 레다가 너무 지쳐서 영혼마저 없는 상태의 엄마를 연기하는 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끊임없이 종알거리면서 말하고 놀고 움직이는 아이들의 존재는 육아 경험이 없는 사람들까지 그 공기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전달된다. 아이들은 단순하게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천사"가 아니라는 것. 육아는 단순히 아이들과 "노는" 게 아니라는 걸. 육아 속에서 왜 사람의 에너지가 그토록 빠져나가는지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펼쳐낸다.
그 안에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아이와 자신만의 언어를 구현하면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는 엄마의 모습도 있지만. 갑자기 아이가 머리카락을 삐죽 당길 때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나와 버리는 순간도 있다. 아꼈던 인형을 아이에게 주었는데 아이가 조금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자기 거라고는 주장할 때, 그 작은 아이가 너무나 못됐다는 생각이 솟아오르고 순간적인 분노가 폭발해 인형을 집어던지게 되는 모습도 있다.
이 영화에서 드러내는 날것의 모성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반짝이는 물보다 파도에 가깝다. 다정하기엔 너무 잔인한 인력과, 잔인하기엔 너무 다정한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공간. 모순적인 감정들이 수도 없이 오가는 해변가의 파도 같은 것. 그 파도에 몸을 담그다 이따금 서로를 바라보는 레다와 니나 같은 존재들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성은 모 아니면 도 식의 거친 프레임에 갇힌다. 피붙이에 대해 한없이 끌리는 인력 혹은 '모체를 뜯어먹는 악마'에 대한 척력. 그 안에서 여성은 숭배의 대상 혹은 혐오의 대상 자리에 쉽사리 내쳐진다. 사실 파도의 같은 감정들이, 다양한 인력과 척력에 이리저리 밀리고 있는데. 일방향의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들인데. 한없이 사랑하지만, 함께 있을 때 더없이 행복하지만, 이따금 모든 걸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싶다는 말도 거짓은 아닌데.
수많은 이들이 느끼는 감정임에도, 거친 프레임에 갇혀 있는 세밀한 감정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광장 하나가 없다. 니나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싶다는 말을 풀어놓는 것조차 어렵사리 해내고, 레다는 도망쳤지만 아주 도망치지 못해 그 감정의 편린을 여전히 안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광장을 찾지 못하고, 인력과 척력에 이리저리 휘몰린다.
그러나 영화는 광장으로 가는 문을 열어둔다.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마지막 대사는, 원작 소설에서 가장 크게 각색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올리비아 콜먼의 놀라운 표정과 파도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한 마디 말을 통해, 이 영화는 규정에 갇히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향한다.
그곳에서 파도 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온다. 이 잔인한 인력과 다정한 척력 속에서, 새로운 소통의 소리가 들려온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로스트 도터>는 7월 12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다소 뒤쪽에서 감상하시길 추천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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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유어 아이즈 텔>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해지는 얼굴,
너의 눈이 말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