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야기2022-09-19 07:35:57
여자였던 엄마의 고백
영화 로스트도터가 안겨준 여운
-로스트 도터-
엘레나 페란테의 '잃어버린 사랑'을 영화로 만든다기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별조차 불분명한, 실명조차 확실치 않은 엘레나 페란테의 아름다운 글을 어떻게 스크린에서 구현해낼지 궁금했다. 영화 '로스트 도터'는 잔잔한 수면 아래 요동치는 소용돌이 같은 영화다. 레다 역의 올리비아 콜맨의 눈빛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보여줬고 젊은 레다를 연기한 제시 버클리의 극사실주의적 연기는 온전히 경이로웠다. 영화는 엄마이자 여자로서 모든 것을 다 잘 해내고 싶었지만 불완전한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레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그리스의 어느 해변으로 홀로 휴가를 떠난 레다 앞에 미모의 젊은 여성 니나(다코타 존슨)가 눈에 띈다. 니나가 아기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바라보던 레다는 쉽지 않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린다. 대학 교수 레다는 학업과 두 딸의 육아를 병행하는 고된 나날을 보냈다. 레다는 이제 훌쩍 커버린 자신의 딸들을 떠올리며 "자식은 골칫덩어리"라고 니나에게 말한다. 옛 기억 속에서 마주하는 원색적인 진실들과 함께 레다에겐 수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영화 '로스트 도터'는 베일에 싸인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을 스크린에서 소름 돋을 만큼 정확히 재현한다. 엄마이자 여성이며 희생과 욕망 속에서 갈등하는 인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의 여운은 아주 오래 지속된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며 이내 등을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쯤이 되면 주인공에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어지지 않을까? 유명 배우 매기 질렌할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것이 더욱 놀라움을 선사한다. 또 하나의 배우 출신 명감독의 탄생을 알리는 영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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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과의 안녕이 정말 이별은 아니겠지요
갑자기 분위기 아담 워록
어느 날의 노웨어. 가오갤 멤버들은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딱 한 명은 다르다. 가모라를 떠나보낸 스타로드. 타노스와의 일전 도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이다. 사실 가모라는 살아있다. 다른 평행우주선의 가모라일뿐. 스타로드와 사랑에 빠졌던 적이 없던 세계의 가모라. 스타로드를 보더라도 모르쇠 한다. 마음에 구멍이 난 스타로드. 수많은 은하수들 속에서 별이 되어 반짝였던 가모라는 이제 추억이 되어버렸다. 술로 하루를 지내는 스타로드. 그 어떤 일로도 상실감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노웨어. 로켓은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트라우마처럼 피어오르는 기억들. 로켓은 애써 머릿속을 지우기로 한다. 무작정 스타로드의 zune에 이어폰을 연결한다. 들리는 노래는 라디오헤드의 ‘Creep’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 로켓의 시선에 맨티스와 드랙스가 보이고, 네뷸라와 그루트도 보인다. 그래. 현재에 집중하는 거야. 스타로드와 mp3인 zune을 건드리지 말라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는 로켓. 시간이 지나 로켓도 일과를 마치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노웨어에 쳐들어온다. 빠른 속도로 달려온 아담 워록. 느닷없이 로켓을 공격한다. 당황하는 노웨어 사람들. 네뷸라가 대응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드랙스 역시 마찬가지다. 겨우 상황을 정리했지만 로켓이 치명상을 입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뭉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스타로드는 가오갤의 리더로서 로켓을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나자고 독려한다.
퇴사 5분 전
6년 만에 돌아온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동안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와 <어벤저스 : 엔드게임>으로 나름대로의 서사를 이어갔던 가오갤 멤버들. 최근 마블이 새로운 히어로들을 출시함에 따라 이들의 행보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제임스 건이 메가폰을 잡는 게 확정이 됐고 이내 이 작품이 시리즈를 끝내는 작품이 되는 것이 확정됐다. 이 말은 즉슨 제임스 건이 이 영화를 마무리하고 MCU에서 하차한다는 말이 된다.
영화는 감독의 이 입지를 잘 활용하듯 기존 마블영화에서 약간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 우선 첫 번째. 영화에서 액션 비중이 덜 중요하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다른 시리즈물들에 비해서는 살짝 약하긴 하다. 이는 여태까지 만들어진 페이즈 4,5의 영화들이 갖고 있던 패턴을 깨려고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 그 액션 쾌감을 어디서 채웠나? 로켓의 과거회상과 SF적 상상력이다. 전자 로켓의 과거회상은 영화가 갖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를 표현한다. 이 전자도 중요하지만 후자 'sf적 상상력'은 특히 더 중요하다. 사실 4 페이즈 이후 마블 영화들이 시각적 상상력이 약했다는 것은 아니다.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의 탈로칸,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에서 만다린이 이끄는 마을,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에서 양자역학 월드 등 나름대로 성의 있는 묘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갖고 있는 시각화의 단점은 뭔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다. 탈로칸은 <아바타> 시리즈에서,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은 할리우드가 바라본 동양문화에 대한 동경을 어느 정도 따라왔다는 점이,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는 <스타워즈>에서 봤다는 기시감이 느껴진다. 글쓴이는 이 작품이 이 영화들과 다른 차이점을 갖는다는 것이 예상이 안 됐다는 점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뭐 일부 크리처는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 <제5 원소>에서 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어떤 소재를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개성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우주선에서 어떤 파일을 가져가기 위해 도착한 한 장소가 그렇다. 여기서 전개되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클리셰를 뒤집는다. 이렇게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시각화가 영화의 중심이고 가장 큰 장점이 된다고 해서 액션이 약하나? 그건 또 아니다. 아담 워록이 갖고 있는 액션은 생각해 보면 좀 익숙하다. 멀리 안 가도 '이터널스'의 이카리스나 '캡틴 마블'이 갖고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빨리 달리기형 빌런중에서는 이 아담 워록이 가장 매력적이었을 정도로 영화는 상상력을 충분히 가진 채로 질주한다.
또 히어로 무비의 기본문법을 살짝 벗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동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선 빌런의 활용법이다. 본작의 빌런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원래 슈퍼히어로 영화 하면 빌런이 선량한 인물들을 공격하거나 이야기의 전개를 뒤엎는 경우가 많다. 가령 같은 mcU에서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아이언맨이 캡틴아메리카에 대응했던 방식은 빌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아이언맨이 얼마나 정의로운 인간인과는 별개로). 또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도 버키가 스티브의 오랜 친구인 것과는 별개로 작중에서 빌런 롤을 맡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이언맨이나 버키처럼 무력이 강한 인물도 빌런이 될 수 있지만 반대의 측면도 있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어벤저스 간의 분쟁을 조장하는 인물 제모 남작은 무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난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치 혀 놀리는 능력과 뛰어난 기획력으로 어벤저스 간의 갈등을 유도한다. 이런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서 빌런 활용법은 연작들이 첩보/스릴러 영화같이 느껴지게 만드는 연출방식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변박을 주는 빌런 연출법은 이 영화에도 쓰인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후반부의 한 대사가 있다. 또 어떤 장면이 반복됨으로써 주는 감동이 있다. 이 두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빌런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봤는지를 주목해서 관람한다면 영화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측면에서 이 지점은 영화의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가오갤 멤버들의 서사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슈퍼히어로 장르의 특성을 어느 정도는 취한 듯 보이지만 빌런의 존재감이 약하게 느껴진다는 건 기대에 못 미치는 지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함께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어벤저스'시리즈들을 좋아했다. 글쓴이가 좋아했던 이유는 '액션을 잘 뽑아서'였다. 그러나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들은 '연대'라는 가치에서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뭐 대표적으로 <어벤저스 : 엔드게임>의 일부 장면이 생각난다. "어벤저스! 어셈블" 장면은 타노스와의 전투를 앞두고 슈퍼히어로들이 하나 결집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다. 바로 전작이었던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슈퍼히어로들이 사라지는 장면은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관객들 역시 봐왔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선이었다. 이 작품은 어느 부분에서는 슈퍼히어로물의 클리셰를 부쉈지만 한 편으로는 그 어떤 영화보다 강하게 특색을 유지했다. 무슨 말이냐. 영화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 그리고 내지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행동이 있다. 당연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데, 이 장면은 온갖 판이한 세상이 판치는 영화의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행위라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가진다.
이 공감대는 제임스 건이 얼마나 변태적인 인간(?)인가를 느끼게 한다. 첫째.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사람으로 국한 짓지 않았다는 점'이 그렇다. 아니 뭐 sf영화에 등장인물이 사람이 아닌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것이 강점처럼 느껴진다. 왜냐. 이 낯선 세상을 몰입시킬 공감대는 전적으로 인간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의 이해가 쉽다는 이점이 되고, 또 간단한 이미지인 원형(O)의 형태가 인물들끼리 반복되기 때문에 주제적인 측면에서도 관객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한다. 이 연대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소재인 동물 실험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과 동물이 큰 차이가 없어서 이런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역시 윤리적인 문제에 부딪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뜻한 가족 영화
뭐 다른 마블의 시리즈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작품 역시 가족영화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마니아>에서의 찐 부녀관계나 <블랙 위도우>에서의 대안가족적인 특성이 그 예시다. 당연히 온 가족이 가서 보기 좋은 영화를 목표로 이런 작품들을 만들어 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모름지기 칭찬도 1절만 해야 한다. 사실 마블이 페이즈 4에 돌입하고 나서 이런 가족영화적인 특성을 사골국 우려먹듯이 반복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그래서 가족의 해체를 다뤘다는 점에서 <문나이트>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매번 반복되는 지루한 루틴을 제임스 건은 어떻게 주파했을까? 이 아저씨는 동물과 인간의 연대, 그리고 캐릭터 간의 떡밥수거로 해소했다.
우선 로켓이 개조실험을 받기 전후에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이 동물 친구들은 종류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가족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네 캐릭터가 쌓아 올린 서사는 <블랙 위도우>의 대안가족을 연상케 한다. 사실 이 네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던 인물 서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물들이 왜 이런 상황에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변주를 줬다는 걸 알게 한다. 단순히 동물보호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 그런데 이게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특히 마블 영화가 이런 플롯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가족영화로서의 틈새시장을 잘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송태섭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짠 것과 궤를 비슷하게 하는 셈이다.
이 부분은 대조적인 측면에서도 이어진다. 가오갤 멤버 중에 유일한 사람이 누굴까? 스타로드다. 스타로드는 사실 비극적인 가족사를 갖고 있다. 이기적이었던 친부와 실질적 아버지 역할을 했던 욘두와의 서사는 우리가 1,2편을 보고 난 다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아버지 같지도 않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서사는 영화에서 반복되는 지점이 있다. 이 부자관계 모티브는 위에서 서술했던 영화의 원형 이미지와 시너지가 있다. 인물들 간의 대비를 더 강조시키는 느낌? 이 대조를 활용한 함께의 이미지는 영화의 쿠키영상까지 이어지는 따뜻함과 이어진다. 이렇게 정석적인 가족영화 클리셰의 반대지점을 정확하게 찔러서 이야기를 펼쳤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나 가오갤 멤버들의 개성과도 어울린다는 점은 제임스 건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알게 한다.
그나마 뽑자면
오랜만에 마블 영화의 정수가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지점은 있다. 바로 빌런인 하이 에볼루셔너리다. 이 사람의 내면묘사가 조금 더 들어가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이 인물이 이런 능력과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는 건 대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인물이 몇 없는 패턴으로 후반부까지 끌고 간다는 점은 이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철학적인 소재들이 더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인물들이 살짝 연극적인 느낌이 있다. 특히 스타로드 쪽이 그렇다. 영화를 보면서 살짝 끊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어떤 대사들은 마음을 알린다. 후반부 그루트와 워록의 대사가 그렇다. 그러나 워록과 하이 에볼루셔너리 이야기나 트랙스 쪽의 연기나 서사는 살짝 작위적인 느낌? 그러나 앞서 두 가지가 영화 관람에 있어 발목을 잡지는 않는다.
‘제임스 건’ 해버렸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음악이다. 이 부분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처팝송의 p도 모르는 글쓴이마저도 알고 있는 제일 첫 번째 삽입곡부터, 극후반부까지 영화를 더 따뜻하게 만드는 연출 지점이 된다. 글쓴이는 이런 음악의 활용을 보면서 제임스 건이 영화라는 매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마블이 다시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까? 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제임스 건 같은 인재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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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울을 쫓은 대가
한 밝고 명랑한 여자가 한 파티에서 재벌을 만난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 이름, 구찌, 마우리치오 구찌. 그 때부터 평범한 서민 여자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한다. 돈이 눈이 멀어 시작한 유혹은 탐욕이 되고, 그 탐욕은 결국 그녀를 잡아먹어 버린다.
1. 배우진들의 연기가 살린,
사실 이 영화의 내용은 익히 알려진 실화 기반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두 예상이 가능하다. 캐릭터의 설정이 살짝 바뀔 수 있지만 결국 파트리치아의 탐욕이 한 가문을 망쳤다는 메인 플롯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였는지 내용에 대한 기대치는 크게 없었다. 예상가능한 선에서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는지 배우진들의 연기가 굉장히 잘 보이는 효과는 있었다.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각자의 몫을 하고 있었다. 집안의 간섭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마우리치오의 욕망, 파트리치아는 구찌라는 가문의 후광을 방패삼아 신분상승을 하고싶은 욕망, 알도는 자신이 일궈온 구찌 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서라면 불법이라도 저지를 만큼의 추진력,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알도 아들의 욕망까지 각자의 욕망이 개성적으로 잘 드러난 연기였다고 생각한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된 스토리지만 각 인물들의 캐릭터가 선명하게 그려진 점이 좋았다. 혹자는 실제 스토리와 동떨어지는 면모도 없지 않다고 하지만 실제 스토리 속 캐릭터와 영화화가 되었을 때의 캐릭터는 차이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거슬리는 부분은 아니었다.
2. 관계를 망친 건 쌍방과실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을 하곤 하지만 그전에 사랑의 대상이 물건인지, 사람인지 구분을 지어야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호르몬적 착각에 빠져 자신이 이 사람에게 전부를 바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파트리치아는 마우리치오를 사랑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녀는 마우리치오의 배경과 돈을 갖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마우리치오는 그저 피해자이기만 할까. 아니다. 그는 그가 가진 배경의 힘을 무시한 나머지 자신에게 평범한 사랑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아둔했다. 순수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난 아무것도 몰라요, 파트리치아가 다 그런거예요.'식의 태도는 그의 멍청함을 더 부각시킬 뿐이었다. 순수함으로 포장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결국 그도 아둔한 인간일 뿐이었다. 여자에게 휘둘렸다가 사치에 휘감긴 그런 나약하기만 한 인간말이다.
3. 자신을 모르고, 통제하지 못한 대가
구찌 가는 선량한 척했지만 결국 모두가 조금씩은 악인이었다. 파트리치아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악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선을 넘어서 제일 나쁜 사람 같아 보였지만 사실 모든 인간들이 도긴개긴으로 보였다.
결국 세상은 학생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착한 사람이 호구되는 요즘 세상에서 오히려 나쁜 것=똑똑함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파트리치아도 한 때 자신이 속한 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우같은, 똑똑한 여자였지만 가속페달을 장착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위치설정이 아닌, 자신이 가고 싶은 위치를 설정해 주변인을 갈아넣고, 맘대로 안되자, 문제가 되는 대상을 제거할 수단으로 살인을 선택하는 것은 갈데까지 가겠다는 의지표명이기 때문이다.
영리하다고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멍청하다고 당하고만 사는 것도 아니다. 딱 파트리치아와 마우리치오 두 커플이 그랬다. 어쩌면 그들은 환상 호흡을 자랑한 환장의 커플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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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스 카락스의 스타일 총집합, 황홀한 눈과 귀!
필자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전작인 홀리 모터스를 본 사람인지라, 이 영화에서의 뮤지컬 씬을 알기에 "이 감독이 뮤지컬 영화를 만든다니 대체 어떤 걸 보여줄 생각이지?" 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아네트를 관람했다. 그렇게 처음 관람하는 아네트를 보면서 놀랐던 점은 영화가 상당히 대중적이었다는 점이다. 난해하거나 그런 부분이 특별히 없어 뮤지컬 영화 답게 누구나 노래와 함께 서사를 편하게 따라갈 수 있다. 연출들이 다양한 스타일로 나오는데, 여러 장르를 해온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지금까지 보여준 기교를 실험적으로 총집합한 느낌이 들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최고작으로 뽑는 홀리 모터스 보다는 아니지만, 난 여전히 레오스 카락스 감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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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 서포터즈들의 축구 사랑을 볼 수 있다!
시놉시스
수카바티는 산스크리트어로 극락이라는 뜻이다. 나바루 감독은 3살 때부터 지금까지 안양에서 쭉 살았다. 나바루 감독이 말하길 안양은 매우 평범한 곳이라고 하는데 1997년 안양에는 RED 서포터즈들이 있었다. 그 서포터즈들이 안양의 축구 선수들을 응원했고 시간이 지나자 안양 FC는 서울 상암 FC로 옮기게 된다. 그 이후로 RED 서포터즈들은 안양에 축구단이 다시 생기기를 안양 시에 건의를 했고 매일 부결이 됐지만 포기하지 않는 RED 서포터즈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RED 서포터즈들은 붉은빛을 내는 폭죽을 들고 응원을 하며 다소 과격한 행동을 하지만 그건 안양 RED 서포터즈들이 다른 팀과의 차별화를 두기 때문이다. 안양은 1000년 전에 태조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안양에서 잠시 터를 잡았는데 오색구름이 나타나길래 지나가는 스님에게 물었더니 여기가 극락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도시이다. 그만큼 안양 RED 서포터즈들의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데 80년 전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3S 정책에 의해 스포츠가 활성화되자 한국 축구는 더욱더 발전한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서는 하이텔 같은 PC 통신의 발달로 각종 동호회가 창설되는데 그중에 축구 동호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2002년 전 국민을 들썩이게 만든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진출에는 붉은 악마 응원단이 있었는데 그 주역에는 RED 서포터즈가 있었다. RED 서포터즈는 단순한 축구 동호회를 넘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안양 LG 축구단이 서울 상암 FC로 이전하면서 RED 서포터즈들이 분노를 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안양에는 축구단을 다시 만들라는 RED 서포터즈들의 반발이 올라왔고 10만 명의 시민 청원을 받아 안양 시의회에 건의하기도 했다.
최대호 안양 시장은 자꾸만 부결되는 안양 축구단 설립을 안타깝게 보고 여러 당 시 의회 의원들에게 동의를 받아내고자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안양에도 축구단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시 의회에서 과반수로 득표를 얻었고 가결된다. 안양 축구단이 다시 만들어지고 안양은 K-LEAGUE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과거의 RED 서포터즈들은 자신의 축구단이 기죽지 않게 많은 격려와 아낌없는 응원을 해주었다.
과거의 안양 축구단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른 건 필요 없고 자신들의 일상에 기쁨을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승패를 떠나 그저 축구 팬으로서 즐거웠으면 되는 것이다.
안양에서 살고 자라 축구를 좋아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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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싱> 삼중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두 여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0년대 뉴욕, 남달리 밝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린(테사 톰슨)'은 이를 활용해 백인 전용 호텔이나 헤어숍을 드나드는 패싱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더위에 지쳐 들어선 한 호텔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클레어(루스 네가)'를 만난다. 자신처럼 밝은 피부색을 지녔고 이를 이용해 백인 남편 '존(알렉산더 스카스가드)'과 결혼한 후 흑인이지만 백인으로 살아가며 경제적으로도 어린 시절의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클레어. 그런 클레어를 보면서 아이린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클레어 역시 아이린을 보면서 마음만큼은 편했던 흑인으로서의 활기찬 삶을 그리워하기 시작하며 두 여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패싱>은 1929년에 발간된 넬라 라슨의 소설 <패싱>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아이언맨 3>, <트랜센던스>, <고질라 VS. 콩> 등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 레베카 홀의 연출 데뷔작이기도 한 <패싱>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은 바 있다. 이처럼 <패싱>이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제목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충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흔히 '패싱'(passing)은 흑인이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패싱을 원래 자신의 소속과 다른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양 행동하는 일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하며, 정체성을 구분하는 경계들과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발생하는 불안감을 차분하게 펼쳐 보인다.
실제로 영화는 크게 인종, 성별, 그리고 계급이라는 세 가지 경계를 오가는 패싱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포스터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경계를 넘어서는 패싱이다. 작중 흑인에서 백인으로의 자아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 곧 백인으로 패싱 가능한 중산층 흑인 여성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인물은 아이린과 클레어 두 명뿐이다. 흥미롭게도 <패싱>은 단 둘 밖에 없는 여성을 여러 측면에서 대조하며, 그것만으로도 98분 동안 극을 전개할 원동력을 이끌어낸다.
우선 아이린을 보자. 중산층의 흑인 남편과 결혼한 아이린은 시내에 나갈 때처럼 필요한 경우에는 백인으로 패싱하지만, 흑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백인으로 행세하는 클레어 같은 이들이 자신들의 출신과 인종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고 비판하는 기만적인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는 그녀가 패싱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인종의 구분과 차별을 내면화하고, 그 틀 내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려는 보수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아이들의 선물을 사러 간 서점이나 더위 때문에 잠시 들린 호텔 카페, 심지어 길가에서까지 항상 자신이 사실 백인이 아닌 흑인임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남편과 함께 있거나 무도회에서 춤출 때 성적인 매력을 숨길 생각이 없고, 금주법이 있는 시대에 술을 언제 어디든 갖고 다니는 클레어는 아이린과 정반대인 이국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녀는 과거사를 꾸며내고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절단한 후 백인으로 살아왔지만, 공허한 삶에 지쳐 다시 흑인 사회에 편입되려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즉, 본인도 패싱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백인과 흑인의 이분법적 구분을 떨치지 못한 아이린과 달리 클레어는 정해진 인종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으며 그 틀까지도 극복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린에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회적 기준을 전복하고 교란될 수 있는 클레어의 유동적인 정체성은 다양한 감정 안에서 인식된다. 분명 클레어는 호텔 카페와 스위트 룸, 그리고 아이린이 주최한 무도회 등에서 주변인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그들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는 위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린은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클레어를 보면서 부러움과 질투심, 또 앞서 본 것처럼 경멸감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불편해진다. 영화는 이처럼 패싱을 두고 비슷한 듯 서로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보이는 이들의 차이로부터 부각되는 미묘한 긴장감과 감정선을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이에 더해 아이린의 복합적인 감정선은 성적인 기제와 계급적인 차원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이야기를 층층이 쌓는다. 클레어와 아이린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동성애적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남편인 '브라이언(안드레 홀란드)'에게 클레어를 설명할 때 아이린은 그녀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얼버무리며, 남편이 그녀를 멀리 하라고 눈치를 줘도 식사나 무도회에 계속해서 초대며 클레어의 존재를 쉽사리 삶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지 못한다. 남편이 클레어와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가정부와 클레어가 따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자 굳이 가정부를 다시 일하도록 시키는 것 역시 클레어에 대한 애정이 단순한 우정 이상의 성적 매료 내지는 욕망으로 읽힐 수 있다. 클레어도 마찬가지다. 아이린에게 보낸 연애편지에 가까운 내용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거나, 그 편지에 답장하지 않는 아이린을 갑자기 방문해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이 대목 역시 상당한 성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또한 영화는 계급적 차원에서의 패싱도 간과하지 않으며 특히 계급 이동의 열망이 인종적, 성적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을의 한 흑인이 백인들에게 맞아 죽었고 시체가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브라이언은 아이들에게 흑인으로서 1920년대 미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 한다. 반면에 아이린은 철저히 그 현실을 아이들로부터 감추고자 한다. 흑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도 필요에 따라 백인이 될 수 있기에 그녀에게는 흑백의 구분보다도 안정된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이다. 본인이 비난하던 클레어조차 흑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상황에서 흑인으로서의 정신적 유산을 상실한 아이린의 이러한 패싱은 이 작품이 단순히 피부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자칫 100여 년 전을 살았던 두 여성의 이야기에 그칠 뻔했던 영화는 더욱 현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중 삼중의 패싱은 인종 정체성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성과 계층적 정체성의 구분을 가로지르면서 아이린과 클레어가 확신하고 있던 자아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든다. 곧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정의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 정의와 정체성을 결정해 온 기존의 사고방식에까지 의문을 던진다.
특히 영화의 결말은 그 질문을 형상화한 듯 보인다. 클레어를 향한 아이린의 감정이 어떤 의미로든 나날이 강렬해지고 격화되는 가운데, 영화는 끝내 흑인 사회로 편입되지 못한 채 끝나버린 클레어의 비극이 누구의 탓인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클레어에 대한 어떤 진실도 명료히 규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저 추측만 가능하도록 심증이 될 법한 장면들을 열거하고, 하얀 눈이 내리는 뉴욕이 내려다 보이는 가운데 눈송이가 화면을 가득 채워 온전히 하얗게 만들면서 끝난다. 마치 인종, 젠더, 계급과 그 외의 경계선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도화지에서 개인의 온전하고 진정한 정체성을 그려보라는 듯이.
따라서 영화 <패싱>은 사회적 차원에서 정의된 획일적이고 안정된 자아개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되고, 더 나아가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인 다중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시도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나날이 한 개인을 규정하고 그에게 덧입혀지는 정체성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문제제기와 메시지는 꼭 흑인이나 여성이 아니더라도 <패싱>을 곱씹어 볼만한 이유가 된다.
<패싱>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그 미묘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방식 덕분에 더욱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우선 일반적인 상업영화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1.33:1 비율을 선택한 것이 눈에 띈다. 이 화면 비율은 배우들의 얼굴과 표정을 오롯이, 또 집중적으로 가득 담아내면서 그들의 내적 혼란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또한 테사 톰슨과 루스 네가의 절제되어 있지만 깊이 있는 퍼포먼스가 유달리 빛나는 배경도 되어준다.
흑과 백을 외에 그 어떤 색채도 더하지 않은 연출도 1920년대 미국을 살아가는 흑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조명의 위치와 광원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순간마다 두 여성의 피부색을 조정하면서 패싱이라는 행위가 한 명의 개인에게나 사회적 차원에서 갖는 의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낸다. 단순히 피부색을 조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극명히 대비되는 명암의 효과를 활용해 아이린과 클레어의 빛과 그림자로 가득한 심정을 끄집어 내 보여주기까지 한다.
사실 <패싱>을 오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재밌다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와 경제 대공황 사이의 미국 역사, 사회, 경제에 대해 알아야 하듯이, <패싱> 역시도 대략적인 사전 정보를 요구하기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드라마틱한 전개 대신 일상의 모습을 담는 구성도 한몫하며, 설명보다는 관조가 주를 이루는 화법은 영화를 루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영화 기법이 주는 인상과 영향에 시선을 맡기다 보면 <패싱>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여성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그들의 급변하는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공감하면서 스스로의 모습까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고전적인 작법과 시대를 타지 않는 메시지의 조화로 되살려낸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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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가씨>, 미안해 하진 않을게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처음 아가씨를 봤을 때는 숙희와 히데코가 남았고, 오랜만에 다시 보니 코우즈키와 백작이 남는다. 처음엔 자유를 찾은 모습에 함께 설레고 들떴다면, 이번엔 그 자유를 빼앗은 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그렇다. 백작은 막판에 순진하면 불법이라는 업계 불문율을 어겨서 불행을 자초한 순정 사기꾼이라 치자. 코우즈키는 히데코의 이모부다. 가족끼리 왜 그러지? 가족끼리 이럴 수 있나? 아니, 가족이니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에게 취미를 물으면 독서와 책 수집이라 할 텐데, 혹여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제목을 묻지 않았다면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가장 아끼는 책을 나열해보자. <채찍은 말한다>, <도마뱀 가죽>, <타락한 속옷 판매원들>, <백합의 바다>, <장의사의 침실>. 제목부터 스멀스멀 느껴진다. 그렇다. 책을 좋아한다는 게 19금 문학이었다. 천일야화처럼 읽고 수집하고,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고 판매한다. 낭독회는 혼자만의 취미가 아니라 엄연한 사업이다. 수집한 책에 삽화가 2D였다면, 그는 낭독회에서 이를 3D로 구현한다. 가족의 일원을 연기도 전달력도 좋은 '낭독 전문 배우'로 양성했다. 처음엔 아내를 시켰고 아내가 세상을 뜨자 처조카인 히데코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아내는 자살한 것도 아니었다. 도망치려던 그녀의 마지막은 코우즈키와 지하실이 알고 있다.죽은 아내도, 히데코도 좋아서 낭독을 시작했을 리 없다. 코우즈키가 그 책이 그렇게 좋아서 햇볕도 들지 않도록 어두컴컴하게 만들고, 집은 쓸데없이 크기도 남다르게 만들어서 도망치기 전에 붙잡혀 갇히는 게 더 빠르다. 지하실에 있는 다양한 신체 부위나 특이한 도구들은 그가 이미 상상에서 그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혓바닥은 붓끝의 먹물이 스며들어 검디검다. 그 정도 열정이라면 2차 창작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가 작품을 외우기만 했을까? 낭독회에 올린 책 중에 자신이 쓴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 멀리 프랑스에서 책을 들여올 돈이 필요해 히데코와 정혼하고, 스스로를 더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노인이라고 말할 정도면, 참으로 대단한 인물일세.
코우즈키의 세계관은 이분법적이다. 그에게 조선은 추하고 일본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건 잔인하지만 조선은 무르고, 흐리고, 둔하기 때문이란다. 일본과 영국은 좋아하고 조선은 싫어하는 건 힘의 양상 때문이다. 역관이던 그가 성공한 건 일본이 흥하자 힘이 강한 편에 섰기 때문이다. 금광 채굴권을 비롯해서 전에는 상상하지 못할 부를 얻었다. 그의 취향대로 일본과 영국을 섞은 저택을 지었다. 하지만 사는 것과 입는 것만 바뀌는 것으론 부족하다. 그는 이렇게 가진 힘을 유지하고 싶었기에 아예 조선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일본 사람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애를 쓴다. 결국 조선인 아내를 버리고 일본인 아내와 결혼했다.물론 여전히 그 집의 실질적인 운영은 여전히 조선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조선의 아내는 그의 충실한 집사이자 정부처럼 지내고, 집안의 모든 음식은 조선인 시종들이 만들어준다. 그들은 믿을 수 있나? 조선은 추하다면서 그 조선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곁에 두고 쓸 정도는 되는 것인가. 여름에 냉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 완전히 일본인이 되진 못한 모양이다. 암만, 여름엔 냉면이지.
그의 처음이 궁금하다. 어떤 계기로 19금 책을 수집하고 낭독을 하기로 했을까. 같은 것을 보고도 상상은 다르니, 그 상상을 나눠보는 게 재밌다고 했다. 19금 문학을 즐기고 수집하는 건,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 낭독회도 크게 보면,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는 비공식 소규모 행사다.문제가 되는 건 자신만의 취향과 사업을 위해 가족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전처였던 조선인 아내는 의외로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 남편을 나리 마님이라고 부르고, 스스로 사사키라고 부르고, 일본인 아내나 히데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소소하게 즐기고, 낭독회에서 무대 효과와 연출을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낭독회에 출연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욕심으로 이어진 가족, 일본인 아내와 히데코는 19금 문학 낭독을 강요받았다. 원하는 대로 느낌을 살려 낭독하지 않으면 숨 막히는 체벌이 이어졌고, 도망치고 싶어도 깊은 서재에 무지의 경계선인 뱀을 두고 철창 앞에서 가로막히는 자괴감을 반복적으로 느껴야만 했다. 말대답을 하거나 분노를 표현하면 정신병원에 가두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땅속에 묻어버리거나, 개처럼 목줄을 하게 한다는 말에 사시나무처럼 떨던 히데코의 이모는 이미 경험이 있는 듯했다. 어린 히데코는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 중에 이모부만 좋아하는 책을 이모부만 좋아하는 방식으로 낭독하는 것만 배웠다. 무슨 훈육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남자를 봐도 돌 같이 느끼고, 심지어 싫어하게 되었다. 그놈의 낭독이 뭐길래. 이모부는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조종했다.
숙희는 처음에 히데코를 두고 가엾고도 가엾다 했지만, 가장 가엾은 사람은 코우즈키가 아닐까. 히데코, 숙희, 백작, 코우즈키 모두 가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세 명은 서로 속이고 속임을 당하면서 각자 생각하고 있는 상대방이 가짜라는 걸 깨달았다. 백작을 사랑했어야 할 히데코는 숙희에게 빠져들었고, 히데코가 백작과 사랑에 빠지게 도와주기로 했던 숙희는 히데코에게 반했다. 히데코와 사랑에 빠지는 척만 할 예정이던 백작은, 오히려 막판에 히데코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히데코는 숙희를 어리숙하고 순진한 도둑의 딸로만 알았지만,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하고 족쇄처럼 묶여있던 낭독 책을 찢어발기고 물에 적시는 박력이 있었다. 숙희도 히데코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으로 알았건만, 웬걸, 다년간의 19금 문학 낭독으로 다져진 연기력과 탁월한 배경지식에 놀라고 말았다. 백작은 남자에게 물새처럼 차가운 히데코임에도, 낭독회에서 공작부인 줄리에트로 연기한 모습과 그녀의 솔직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코우즈키가 마음을 빼앗긴 가짜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이고, 사람이 아닌 이야기다. 사람은 오해를 풀고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만, 이야기 속의 상상은 환상만 더해간다. 장르적 특성상 그에겐 모든 여자는 섹스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를 어떻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비해 코우즈키는 19금 소설의 인물로만 떠올린다. 자신의 전처인 사사키가 백작과 잠자리를 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며 부들부들 떨 땐,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그리 생각하는 게 신기하다. 어느 남자든 가리지 않고 좋아할 거였으면, 애당초 당신 곁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낭독하지 않는 히데코 역시 새로운 이야기 속에 '어떤 년'일 뿐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의심이 된다면 백작에게 묻던 그의 질문을 기억해보자. '히데코가 어떤 년인가? 부드럽던가? 조여오던가? 주름은 많이 접혔던가? 충분히 젖었던가? 애액의 점도와 탁도는? 저항하던가? 아니면 침을 뱉으면서 혐오스러워하던가? 어서 해달라고 애원하던가? ' 백작이 자신의 아내인 히데코와의 초야를 어떻게 떠벌이고 다니냐고 호통을 치거나 말거나 새로운 이야기 <처조카의 초야>에 푹 빠져있었다. 정신 차리게, 코우즈키. 히데코는 당신의 처조카야. 당신의 죽은 아내의 죽은 언니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딸이라고.
세상에서 책을 제일 좋아하는 부유하신 코우즈키 나리 마님. 일본인 귀족인 척했던 제주도 출신 백작과 하룻강아지 같은 하녀 숙희 덕분에 썩 즐겁지 못하다. 아끼던 책들은 처참히 망가졌고, 낭독을 맛깔나게 해 줄 배우도 없다. 히데코가 재산을 다 찾아갔으니 새로운 책을 사거나 관리할 경제적인 여유도 없어졌다. 함께 이야기를 들은 신사들 역시 아쉬움이 완연할 것이다. 그들은 상상에 푹 빠져 이야기 속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곤 했다. 얼마나 짜릿했을지 몰라도 우리가 보는 그들은 낭독이 울려 퍼지는 서재에서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때때로 주먹을 불끈 쥐거나 숨을 들이켜거나, 모자로 다리 사이를 가릴 뿐이다. 우리는 그들의 상상을 짐작할 뿐이고,
히데코와 숙희는 백작에게 '사기꾼이 사랑을 하나?'라고 물었지만 사기꾼이라고 왜 사랑을 하지 못하겠나. 거짓 속에서 진심이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데. 그리고 둘이 할 소리는 아닌 게, 사람 속이고 이용하는 게 사기꾼이니 그녀들도 백작과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이들의 작전은 성공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들이 하는 게 사랑이라면, 백작이 하는 것도 사랑이다. 코우즈키의 사랑이 픽션이라면, 세 사람이 한 사랑은 팩션쯤 될 것이다.코우즈키는 가장 좋아하던 책 5권에 맞춰 백작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고, 손에 구멍을 뚫고, 성기를 자르려 했다. 히데코와 숙희가 코우즈키의 집에 붙잡혀 왔다면 어땠을까. 히데코의 이모를 죽이고 벚꽃나무에 매달았듯이, 그 둘도 괴롭히고 벚꽃나무에 매달거나, 낭독을 할 정도로만 살려두고 온몸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추호도 몰랐다. 아름다움이 잔인하고, 무르고 흐리고 둔한 게 추하다고 말하던 그가, 푸른 수은 연기를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무르고 흐리고 둔해지면서, 지하실에서 눈을 감게 될 줄 말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잔인하고 추하게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그것도 히데코의 초야 이야기를 들으려고 안달이 나서, 자기 손으로 직접 백작의 입에 수은이 담긴 담배에 불을 붙여준 것 때문에. 심지어 그가 좋아하던 이야기를 그는 늘 감상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역시 이렇게 <아가씨>라는 이야기에 담길 줄 알았을까. 안타깝지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가 볼모로 잡았던 가족들의 삶을 생각하면, 스스로 불러온 결말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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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주 최신 개봉영화(싱크홀, 프리가이, 더 톨:함정, 암살자들, 생각의 여름)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8월 2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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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무파사: 라이온 킹> 예고편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에서 세상을 지배한 위대한 왕이 되기까지👑 라이온 킹, 그 시작의 이야기 [무파사: 라이온 킹] 12월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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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경관의 피> 1차 예고편
경찰 잡는 경찰의 위험한 수사. 조진웅X최우식의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강렬한 범죄드라마 [경관의 피] 1차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