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9-14 23:11:18
막연한 두려움이 일으킨 불안감의 파도.
영화 <졸업> 리뷰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벤자민은 주변의 기대와 막연함으로 인해 내면의 불안감이 휘몰아친다. 그렇게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던 그는 고민에 빠질 새도 없이 1차원적인 쾌락에 빨려 든다. 잘못됐다는 생각은 어느새 그 욕망에 잠식되어 소거된다. 대화 없이도 충분한 잘못된 만남은 언젠간 거리를 두어야 할 테지만 익숙해진 시간으로 인해 전과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삶의 형태는 지속된다. 금단의 관계는 그의 일부분이 얽히게 만들며 동시에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허비한 시막 간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잃고 물 위에 부유하던 벤자민은 일레인을 만나며 서서히 변화를 맞이한다. 매번 선택의 순간의 기로에 놓이며 '사랑'과 연관된 일레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끝내 쟁취하고도 벤자민의 공허한 표정과 그를 바라보는 일레인의 모습을 통해 계속해서 펼쳐질 흔들리는 불안함을 500일의 썸머의 '썸머'는 그 감정을 느꼈기에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수동적으로 자라왔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졸업이라는 묵직함으로 다가온 순간을 목도한다.

그의 방황에 휩쓸린 이들에게 밀려오는 불안감의 파도는 청춘이라는 막연함으로도 덮을 수 없었다. 세대를 막론한 진정한 '졸업'은 불안감과 두려움이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인생은 정해진 답이 없는 큰 시험지 같다. 영화의 동화같은 이야기와 현실적인 이야기가 잘 버무려진 영화였다. 약간의 아쉬움은 분명히 있지만 청춘의 막연함을 물에 비유한 방식이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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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 사건(2020)> 리뷰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쉽게 지나갈 수 있을까. 내가 넷플릭스에서 <당신의 눈을 속이다: 세기의 미술품 위조 사건(이하 당신의 눈을 속이다)>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다큐멘터리를 튼 건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예술의 역사만큼 위작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기실, 인간의 욕망과 돈이 결합된 분야라면 스캔들이 없을 수가 없다. 가치가 높은 대상이라면 스캔들의 폭은 더욱 넓고 깊어지리라. 당장 떠오르는 스캔들만 해도 적지 않다. 베르메르 위작으로 유명한 반 메헤렌은 물론이요, 올해 미국 올랜도 미술관에서 발생한 바스키아 위작 스캔들도 있다. 시선을 국내로 돌린다 해도 이중섭과 박수근의 작품으로 인해 미술계가 크게 흔들렸던 적이 고작 5년 전이다. 어쩌면 위작 스캔들은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갤러리라면 어디든, 또한 누구든 안고 있는 점화되기 전의 폭탄일 터다. 그러하므로 내가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기 전 가장 궁금해했던 건 이런 것이었다. 165년 전통을 자랑하는 갤러리가 위작 스캔들에 휘말렸던 이 사건을 대체 왜 공개했을까? (만일 다큐멘터리의 목표가 갤러리의 무고함을 밝히는 것이라면) 이미 자취를 감춘 갤러리의 결백을 주장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출처: Netflix
일단 <당신의 눈을 속이다>가 다루는 사건은 위에서 언급한 노들러 갤러리 스캔들이다. 이 사건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노들러 갤러리는 1846년에 문을 연, 긴 역사를 지닌 명망 있는 갤러리인데, 본디 1950년대 추상 표현주의에 퍽 취약했다. 그런데 어느 날, 노들러 갤러리의 전 직원이 글라피라 로잘레스라는 (자칭) 미술품 중개인을 노들러 갤러리의 전 관장이었던 앤 프리드먼에게 소개하였고, 글라피라는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과 등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화가의 그림을 거뜬히 가져왔다. 가문의 힘조차 업지 않았던 글라피라의 수완은 정말이지 대단했던 모양이다. 노들러 갤러리는 그를 통해 거의 20년 동안 60여 개의 위작을 판매하며, 총 8천만 달러(약 1,054억 원) 규모의 사기에 발을 디뎠다. 단순한 개인과의 거래였다 해도 문제가 작지 않을 텐데, 일류 컬렉터와 유명한 미술관들도 노들러 갤러리에서 위작을 구매했으니 미술계가 발칵 뒤집힌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앤 프리드먼이 Freedman Art라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사안은 종결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는 수사극, 추리극의 형태라기보단 일종의 인터뷰의 연속체로 기능하는 듯하다. 제작진은 영리하게도 시청자에게 결정권을 넘겨주는 방법을 택했다. 사법부가 호명한 피의자가 이미 명확히 존재하는 만큼, 굳이 다른 이를 지목하는 자극적인 방식을 택하지 않고, 어떻게 이 ‘파렴치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느슨하게 재구성한다. 이를테면 그들의 태도는 이런 식이다. 사건은 이미 발생했다. 사기꾼이 있는 건 분명한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기꾼의 범주인지를 밝히는 게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부분을 재조명하고 싶다. <당신의 눈을 속이다>에는 그렇게 초대받은 예술계 인사들과 심리학자가 있으며 모두가 한통속이라며 억울함을 강력히 호소하는 피해자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첨언하는 기자가 있다.
출처: IMDb
사기꾼의 경계를 결정하기 전, 시청자라면 앤 프리드먼을 딱하게 여기든, 수상쩍게 여기든 ‘어떻게 그들이 취급한 작품이 위작이라는 걸 모를 수가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앤 프리드먼은 누구든 자신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위작임을 알 수 없었으리라고, 자신 역시 많은 노력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폐쇄적인 예술계의 특성상 특별한 이유 없이 감정을 맡기는 것 자체를 노들러 갤러리의 명성에 흠이 간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갤러리의 주인 측에서 압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또한 위작은 인류의 역사 내내 번번하게 유통되었고 카렐 아펠 등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때로는 작가들조차 진품과 가품을 판별하지 못하니, 그의 말이 정당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이었던 토머스 호빙조차 자신이 15년간 살펴본 미술품 중 40%가량이 위작이었다고 말한 바 있지 않은가. 만일 프리드먼이 명예욕과 금전욕에 의해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그의 잘못은 앤의 말마따나 ‘미술품과 사랑에 빠져’ 관습적으로 일을 처리한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명예욕에서든, 금전욕에서든 그가 “위험 신호를 무시”했다는 사실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IFAR에서의 감식 결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 허술한 프로비넌스를 눈 감은 것, 친분 있는 학자에게만 기댔던 것, 피상적인 몇 개의 견해에만 귀 기울이며 모든 신호들을 대수롭지 않지 여긴 시간들은 단숨에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그러나 앤 프리드먼의 동기가 어떠하든, 위작 구매자이자 사건의 피해자인 아트 컬렉터 데 솔레 부부의 분노를 달래는 데엔 역부족이다. 소더비, 톰 포드 인터내셔널 회장이라는 명성과 자부심에도 흠집이 생겼고, 금전적으로도 손해를 보았으며,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에서 시간 싸움까지 진행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동시에 미술계의 특수성에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때로는 이렇게 믿을만한 이력서조차 없는 작품을, 화랑의 명성 혹은 딜러와의 친분만으로 거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왜곡된 시장이지 않은가? 작품 감별을 위해 활용하는 방법이 고작 프로비넌스를 확인하며 극장의 우상에 기대는 것에 불과하다니. 무려 하나의 작품에 800만 달러를 지불하면서!
물론 미술계가 위작에 대해 늘 침묵하는 건 아니다. 당연하지만 모든 갤러리가 이토록 허술하진 않을 것이며, 위작 감별에 관한 전문가들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위작 거래를 최소화하기 위해 투명한 거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엄정한 처벌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일까?
출처: IMDb
값어치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던 그림은 위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 앤 프리드먼의 변호사의, 루크 니카스의 사무실에 걸린 벽화가 되어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 정교한 위작이라는 걸 알기 전 감상자들이 경험했다는 작품의 아우라는 대체 언제 증발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노양진의 해석을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물리적 대상은 유기체의 기호적 경험, 즉 우리의 ‘기호적 사상’을 통해서 비로소 기호적 해석의 대상인 ‘기표’가 된다(노양진, 2020)”고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작품의 가치는 작품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작품 외부에 있다는 이야기다. 위작이 활개를 치는 미술시장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미술품 외부에 있는 우리의 인식을 해체하고 바꾸는 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시장이 예술을, 혹은 예술이 시장을 적극적으로 삼켜버린 시대이므로. MZ세대의 아트테크 열풍과 같은 기사가 신문의 경제면을 휩쓸고, 이제 손에 쥘 수도 없는 토큰인 NFT를 이용해 작품을 쪼개어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동시에 예술은 뒤샹과 워홀의 등장 이후 소비 이데올로기 하위에 존재하던 온갖 상품까지 넉넉하게 받아들였다. 보드리야르의 입장을 알고 있었다지만, 예술의 종말은 진작부터 거론되었다지만, “예술이 그저 상품으로만 남을 것인가?”따위의 질문이 아니라, “어쩌면 미술품이란 ‘상품’이라는 속성이 본질임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 많은 가치를 입혀 두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야말로 피부로 느껴지는 듯하여 나는 두렵다.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능력을 꺾어버리고, 사유를 헐값에 거래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가 어떠한 도덕적 양태를 잉태하거나 공유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출처: IMDb
같은 작품이라 해도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메시지를 읽어낸다.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읽어낸 메시지는 앤 프리드먼이 운 좋게 풀려난 범죄자가 맞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었다. 21세기의 미술품은, 그 어느 때보다 상업 기호에 가까워졌다는 것. 어쩌면 ‘기호’조차 사라지고 예술이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당신은, 아니 어쩌면 나는, 한때나마 예술이 존재했다는 흔적만을 쥔 채,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오로지 그뿐이다.
참고문헌
노양진 "기호의 역전" 담화와 인지 27.3 pp.47-62 (2020)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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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이 곧 믿음이다「콘클라베」
"내 믿음에 회의가 들어요.."
영화 「다우트」의 마지막 즈음에, 돌처럼 굳건하고 단단한 믿음으로 일관하던 수녀 알로이시스는 눈물을 흘리며 얘기한다. 교구 신부의 성추문을 파헤치고 난 직후였다. 그 제목부터가 의심(doubt)인 「다우트」를 위시해, 종교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의 실질적 주제는 대부분 '의심'이다. '종교'는 그 의미상 '믿음'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만들자면 필연적으로 '의심'이라는 키워드가 녹아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로맨스 영화에서 남녀 간의 다툼을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따라서 에드워드 버거의 「콘클라베」가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의 의심을 적극적으로 다룬 것은 특별하지 않다. 다만 「콘클라베」의 미덕은 영화에서 그 '의심'이 드러나는 형태가 매우 세련됐다는 것이다.
세 가지 의심
우선 소재부터 흥미롭다. 「콘클라베」는 교황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영화를 시작하고,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로렌스' 추기경이 죽은 교황의 거처를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수습하는 씬으로 본격적인 포문(?)을 연다. 이때 로렌스 추기경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캐릭터를 만나면서 관객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데, 그 상황에서 교황 선출 의식인 '콘클라베'를 집전하는 일종의 진행자 역할을 떠맡게 된다.
이는 전형적인 추리 영화의 도입부와 유사하다. 어떤 사건이나 캐릭터에 관련된 충분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는 상황들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인데, 영화는 시종일관 철저한 '로렌스' 추기경의 관점으로만 진행되기에 영화 내내 관객들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
다만 「콘클라베」에서 '로렌스'가 쫓는 것은 범인이 아니라 일종의 '신앙'이다. 콘클라베의 집행관으로서 그의 역할은 미국 법정의 판사와 유사하다. 판결 자체에는 딱히 권한이 없지만 투표를 진행하는 과정에 있어 (특정 후보에 대한) 어떤 정보를 열고 닫을 수 있다. 그래서 영화 내내 로렌스는 정보/첩보의 바닷속에서 어떤 인물이 '교황에 적합한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가톨릭 문화에서 교황이란 신과 인간의 중간쯤에 위치한 (인간이라기보단) 강력한 종교적 상징이라는 점에서, 로렌스가 고민하는 '누가 교황에 적합한가'에 대한 고민은 사실 신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로렌스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의 진위를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그는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극의 중반부에 이르면 안 그래도 복잡한 진실게임에 숨겨진 한 층위의 베일이 더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건 바로 '로렌스' 저 자신의 욕망이다.
로렌스는 진보 진영 유력 후보인 '벨리니'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사실 로렌스 속엔 어떤 욕망이 있다. 로렌스가 "양이 있으면 목장을 관리하는 사람도 있어야 된다"라는 선대 교황의 애정 어린 조언을 반복해서 되뇌는 건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내심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콘클라베에 시작하기 앞서 짧은 연설을 하던 로렌스가 너무 존재감을 드러내버린 바람에 진보 진영의 표가 갈라져버리는데, "그렇게 야망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라며 비아냥거리는 '벨리니'추기경에게 로렌스는 (고의가 아니었다고)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 극의 중후반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투표를 하는 로렌스의 행동을 봤을 때, 공격적인 연설은 로렌스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콘클라베」가 의심을 드러내는 형식은 입체 / 다층적이다.
정보에 대한 의심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
신앙 자체에 대한 의심
세 가지의 의심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내는 어떤 긴장감은 위엄 있는 종교 의식이라는 느리고 지루한 소재 속에서 충분한 장력을 뽑아낸다.
인간에서 상징으로, 콘클라베
「콘클라베」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장대한 인서트(Inserts) 컷과 인물 클로즈업의 반복적인 대비다. 특히 거대한 종교화를 비추거나 특정한 성물을 제법 긴 시간 동안 비추는 등 인서트 컷을 일종의 종교적 상징처럼 사용하는데, 이는 로렌스의 시각에서 바라본 신성성의 모습이다. 선대 교황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지지하는 후보인 '벨리니'나 '베니테스'에게 순결의 프레임을 씌우는 등 로렌스에게 신앙이란 완전무결의 무엇인 셈이다. 이에 반해 감독의 카메라가 인물을 비출 땐 섬세한 표정이 드러나는 클로즈업을 선택한다. 결국 신앙을 체화하여야 할 인간은 로렌스가 기대하는 순결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며, 그것은 클로즈업 속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캐릭터들의 표정으로 드러난다.
극의 후반부 원인 모를 폭탄 테러 직후 이와 같은 도식은 살짝 뒤틀리는데, 투표장이 아닌 작은 강당에 모여 속에 있던 진솔한 이야기들을 꺼내는 추기경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지금껏 종교화를 비추던 그 롱숏으로 추기경들을 비춘다. 이때 처음으로 극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지금껏 조용히 있던 '베니테스'다. 마지막 남은 유력한 보수 후보 '테데스코'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순식간에 콘클라베의 중심으로 떠오른 '베니테스'를 비추는 카메라는 지금껏 인물들을 비추던 방식과는 다른 형태의 연출을 보인다. 역시도 베니테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한 로렌스의 연장일 것이다.
정리하자며 「콘클라베」는 일종의 추리 스릴러의 형태를 띤 로렌스의 내면 탐구(?)인 셈이다. 사실 소재가 콘클라베일 뿐 기독교의 교리나 개념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영화에서 '종교'가 있는 자리에 각자의 '믿음'을 넣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이 독해할 수 있을 테다.
결국 영화에서 중요한 건 내가 믿는 어떤 순수성, 내가 믿는 성역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일 텐데, 극의 마지막 나름의 반전으로 기능하는 '최종적 진실'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의심해 보아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의심을 품지 않는 확신"이라는 작중 로렌스의 대사는 결국 영화가 말하고 싶은 최종적인 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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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깨어있든지, 다음이 되든지
데카메론(Decameron, 2021)
감독 : 쉬야수
상영시간 : 108분
시놉시스 : "역사는 단지 날짜의 문제가 아니다." 1997년 영국이 홍콩 행정부를 중국에 반환하기 직전, 크리스 패튼은 홍콩의 영국 총독으로서 마지막 연설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영화는 크리스 패튼의 연설을 포함한 역사적 자료들을 픽션과 결합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나는 한 번도 홍콩에 가본 적 없지만 홍콩을 좋아한다. 홍콩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제니쿠키와 몇 편의 홍콩영화만을 좋아할 뿐이다. 어릴 때 엄마가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로 시작되는 <홍콩 아가씨>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다. 내가 좋아했던 홍콩은 예술가들에 의해 잘 만져진 홍콩이고, 나는 홍콩을 모른다.
홍콩은 1841년 아편전쟁을 겪고,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근현대사에서 뭔가 구린내가 난다 싶으면 영국이 끼어 있다. 아무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영국은 홍콩을 계속 식민지로 둔다. 중국 본토에는 사회주의 체제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지만 홍콩만큼은 세계사의 흐름대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취한다. 그리고 중국의 부호들과 돈 좀 벌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홍콩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첨밀밀>의 이요와 소군처럼.
왕가위 감독은 홍콩 반환을 앞두고 그가 사랑하는 홍콩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1997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편입되었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로 홍콩의 민주자본주의를 50년간 유지하기로 했으나, 우리가 중국에 대하여 보고 들은 바와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우산을 들고 최루탄에 맞섰다. '우산혁명'이라 불리는 2014년 홍콩 민주화운동이다. 5년 뒤인 2019년에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맞서 시민들이 다시 거리에 나섰다. 우산혁명 당시에는 평화적 시위를 이어나갔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평화시위는 힘이 없었다. 1996년생인 조슈아 웡은 대한민국에도 홍콩과 뜻을 같이할 것을 호소했다.
영화는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총리 크리스 패튼이 연설하는 장면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교차편집하여 보여준다. 총리는 말한다. "역사는 단지 날짜의 문제가 아니"라고. 대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데카메론>은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소설의 제목이다. 흑사병이 돌고있는 도시를 떠나 교외의 별장에 머무는 귀족들이 떠드는 이야기. 홍콩의 민주화운동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굳이 '데카메론'이라는 제목을 차용했다. 21세기의 흑사병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겠다.
영화에는 홍콩 역사의 이모저모가 담겨있다. 100년 전인 1922년 홍콩 선원 파업 사건과 코로나 이후 홍콩 예술인들의 노조 설립을 병치하고, 1966년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던 스타페리호의 가격인상이 도화선이 되어 발생했던 1967년 폭동과 2019년 혁명,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광복홍콩 시대혁명'까지 영화는 홍콩의 큼직큼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훑어간다.
그 가운데, 코로나로 봉쇄된 도시에서 주부들이 화상회의로 만난다. 주부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코로나로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자 엄마들이 난감해졌다. 거시적으로도 난리가 났지만 미시적으로도 케파가 딸리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밖에서는 검은 옷만 입어도 전경에게 취조를 받아야 하고, 안에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가족을 돌보거나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경찰들 때문에 조마조마해야 하는 삶.
아무튼 <데카메론>은 홍콩의 과거와 현재다. 홍콩영화 특유의 찬란한 네온사인도, 화려한 액션도 없는, 홍콩 그 자체다.
'홍콩을 정말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제작했다는 엔딩 크레딧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작품은 공권력에 의해 살해되거나 실종된 수많은 홍콩사람들을 기억하는 일, 억울한 죽음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이는 일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마음 그 자체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기록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에서 교차편집하여 보여주었듯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홍콩 시위대가 남긴 "깨어있든지, 다음이 되든지(Be aware, or Be next)"라는 문구를 목격한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도 민주화운동이 있었고, 기록하는 사람들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곧 행안부 소속 경찰국이 신설될 예정이다. 어쩌면 다음은 우리일지도 모르겠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 스케줄
2022년 8월 27일 17:30~19:18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9관
2022년 8월 31일 16:00~17:48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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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늘 부탁하며 살아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주요 인물들은 싱글맘과 워킹맘이다. 그래서인지 이 제목은 굉장히 묘하다. 무거운 짐을 끌어안고서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해 고뇌와 피로에 찌든 여자가 마지못해 전화를 걸어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고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고.
'부탁'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이중적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며 상호 간의 신뢰와 유대감을 쌓는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상대에게 나의 짐을 얹어서 부담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이렇듯 영화는 부탁이라는 단어처럼, 같은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두 인물을 통해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에밀리는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것을 분출하며 살아가는 속 시원한 인생으로 보인다.
처음 스테파니를 초대한 후 옷을 벗는 장면에서 '에밀리'라는 인물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남들이 보기엔 완벽한 하나의 그림 같지만, 실은 작은 조각들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퍼즐 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완벽해 보였던 그림이 뒤집는 순간 와르르 수 백, 수 천 개의 조각으로 쪼개지며 쏟아진다. 에밀리의 삶은 그렇게 구축되어 있다.
"힘 있는 놈들한테는 세게 나가야 해. 아니면 우습게 봐."
에밀리는 자신에게 불리한 조각은 모두 걷어내고, 가장 강력하고 완벽한 부분만 추출해서 퍼즐을 만든다.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무엇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션의 어머니에게서 훔친 반지나 사귀던 화가에게서 훔친 그림처럼. 훔쳐 온 조각들이나 자신의 일부만 떼어낸 조각들로는 완전한 하나의 그림을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스테파니와 에밀리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스테파니 역시 불편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불완전한 모습도 자기 자신임을 받아들이고, 때론 남들 앞에서 비웃음을 살지라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그녀의 인생은 하나의 그림처럼 천천히 칠을 더해간다.
스테파니와 에밀리에게 '부탁'이라는 단어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부탁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애썼다. 남들은 다 '왜 돈 안 받는 베이비시터 노릇을 해요?'라며 비꼬았지만, 스테파니는 그것을 현실에서 몸부림치는 엄마들 간의 유대감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에밀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결국 스테파니는 '부탁'의 긍정적인 힘을 이해하고, 그를 통해 상대와 함께 단단해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인 것이다.
당연히 그와 반대로 에밀리는 '부탁'이라는 단어를 순전히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상대방에게 그 부담을 떠넘김으로써 상대방을 짓밟고 올라가 승리자가 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부탁은 굉장히 폭력적이지만,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데에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스테파니가 에밀리의 옷을 입거나 에밀리처럼 과격하게 행동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에밀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에밀리처럼 포장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자기답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답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 애쓴다.
스테파니는 어떠한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혹은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방송을 켜서 상황을 공유한다. 그를 통해 함께 나아가는 것, 이 방식이야말로 스테파니를 승자로 만들어준 필승법이다. 스테파니는 과거에 사로잡히기보단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며 한 발자국씩 나아간다. 결국 정말 강한 사람은 현재의 자신을 믿고 자기 방식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테파니'라는 인물을 통해 증명한 셈이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추리,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두 여성 인물 중심으로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극찬을 받는다. 그 두 명의 인물이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사실 우리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밀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지향한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강하고 완벽하게 보일 수 있는 방법에만 집착하다 보면, 때론 놓치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현재의 나다. 나 자신을 믿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 그 믿음을 가진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
우린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부탁하며 산다. 하지만 그 부탁은 에밀리 식이 아니라 스테파니 식이어야만 한다. 상대방을 짓밟고 올라가기 위한 부정의 부탁이 아닌, 상대방과 함께 강해지기 위한 긍정의 부탁. 다르게 생각해 보면, 정말 강한 사람은 남의 부탁을 '들어' 준다.
자신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타인에게 부탁을 '하기만' 하는 사람이, 과연 강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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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
영화를 보기 전, 다르덴 감독이 한국 관객에게 남긴 메시지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토리와 로키타>를 보는 한국 관객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또 다른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온 ‘특별 기여자’들과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난민’이라는 단어는 그동안 건강한 담론보다는 혐오 표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래도 여론이 갈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일해 온 ‘특별 기여자’들인데 팽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의 의리가 불안을 이겨낸 목소리가 있었다. 여론이 이 정도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무사 귀환에 안심한 후로는 나도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친구들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독서모임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당시 특별 기여자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 기존 학생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하나씩 들려 보냈다고. 이것이야말로 아이히만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과 무엇이 다르냐며 분개했다. 차라리 옛날 반장 엄마들처럼 햄버거나 쫙 돌리는 게 낫지, 기존 학생들이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저자세로 들어가게 만드나?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경계를 넘어설 텐데 어른들이 먼저 선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들은 내가,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의 친구라 말할 수 있나. 지긋지긋한 내 안의 아이히만을 인지하며, 다소 무거운 감정을 안고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토리와 로키타의 행복과 무운을 비는 마음으로.
영화는 불안한 눈빛의 로키타에서 시작한다. 몇 마디 이야기가 오고 갔을 뿐인데, 관객은 금방 로키타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 있다. 로키타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와 함께 가다 보면, 로키타의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토리와 로키타는 각자의 이유로 아프리카 어딘가를 떠나 온 아이들이다. 벨기에에 정착해서 함께 살고자 하지만, 진작에 체류증을 받은 토리와 달리 로키타의 서류 발급은 계속해서 지연된다. 두 사람은 남매임을 증명해서 체류증을 받고자 하지만, 삶은 녹록하지 않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는다.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서 입국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는 브로커들이 있고, 고용주 또한 여러 모로 아이들을 착취하며, 심지어 로키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돈을 보내야 한다.
아이들은 피자도 배달하고, 식당에서 노래도 한다. 프랑스어로 노래하고 이어 이탈리아어로 노래한다. 이국의 언어로, 서사를 부여하면서 불러야 하면 노래도 노동이 된다. 이들의 일은 점차 위험해진다. 위험한 밤의 거리에서, 마약 배달까지 하고 있다. 아직 어려도 야무진 토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야무지게 챙겨 받을 줄 안다.
노동이 되어야 하는 노래와 대조적으로, 두 사람의 지친 밤을 위로하는 노래가 있다. 토리가 따라 부르는 로키타의 자장가. 실제 카메룬 언어로 된 자장가라는데, 내 귀에는 어쩐지 자꾸 익숙한 찬송가처럼 들렸다.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 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라는 한 구절처럼. 아무리 뒤져봐도 찬송가라는 말은 없던데. 그러나 진짜 찬송가였다고 해도 그 노래는 로키타를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브로커들이 로키타에게 만남을 요구하는 장소는 언제나 교회다.
아직 어린 어깨에 책임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보호하기에도 어린데, 자기 세상을 지켜야 한다. 그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로키타에게는 토리, 토리에게는 로키타이다. 두 사람이 어떤 서사를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이런 유대 관계를 쌓게 되었는지 영화에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유독 힘든 날 보고 싶은 사람도 서로이고, 학교에서 ‘아는 사람’ 그리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도 서로일 뿐이다. 겁먹고 숨을 헐떡일 때 약과 물을 건네주는 한 사람, 대신 문을 두드려 따져 물어주는 사람, 착취의 세상 속에서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이다.
아이들의 깊은 우정에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피부로 감각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환영 못 받잖아.” 로키타가 시시각각 처하는 상황은 분명 비극이지만, 세상이 로키타를 그전까지 대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끌고 가고, 무슨 일이 생겨도 탈출구가 없는 건물에 들어가야 하고, ‘원한다 je veux’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로키타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데도, 흥청망청 사는 어른보다도 훨씬 똑똑하게 삶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들의 노동하는 등을 따라간다. <로제타> 때부터 일하는 누군가의 등을 다정하게 따르던 그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러나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가 만드는 영화의 감각에 안심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걸. 영화 속에도 친절한 개인은 있었다. 기꺼이 제 자리에서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잘 곳 없을 때 오라고 주소를 주는 쉼터 선생님도. 그러나 개인의 친절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문제를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는 말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 토리와 로키타의 이야기에서 조금은 마음에 남은 것이 있길 바란다고, 그래서 주변과 이야기를 나눠 주길 바란다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왜 다르덴 형제가 토리와 로키타의 친구가 되어 달라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세상만큼은 아니었으면, 사라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그 자리에만 있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이루어 갔으면.
그런 마음으로 잠을 자고 아침을 맞으니, 세상은 어린이날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얼마나 환대하고 있을까. <토리와 로키타>가 던진 질문을 계속 입 안에서 굴려 본다. 담담하여 다정하며, 더 깊은 담론을 끌어내는 이 영화는, 아마 남은 오월 내내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해맑은 노래와 함께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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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길이라는 도시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어요.” <브레이킹 아이스> 안소니 첸 감독 인터뷰 (1)
오늘(6/4),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가 개봉했습니다. 추운 겨울 중국 국경 도시 연길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을 담아낸 이 작품은 그 시절을 지나오고 있는, 이미 지나 온 모든 청춘의 얼어붙은 마음을 따듯하게 녹이며 공감과 위로를 전합니다. 지난 5월의 끝자락에, 영화에 담긴 마음만큼이나 따듯했던 안소니 첸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씨네랩 | 긴 여정에 앞서 우선 가벼운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주요 로케이션인 백두산의 도시, 연길은 매우 추운 도시인데요. 특히, 싱가포르 출신인 감독님께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혹시, 추운 날씨로 인해, 촬영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안소니 첸 | 그곳(연길)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전혀 없어 보이더라고요. 뭔가 시작부터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연길에서의 촬영은, 특히 야외에서의 촬영은 정말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 같아요. 정말 추웠기 때문이죠. 촬영 현장에는 항상 제 모니터와 텐트가 따로 설치되었고, 그 주변에 난방기도 많이 있었지만,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은 그런 게 없잖아요.
그래서 “테이크!” 하면 다들 바로 제 텐트로 달려와서 “으아아아~” 하면서 몸을 녹였죠. 사실 생각만큼 그렇게 힘든 환경은 아니었지만, 제가 그 상황에 완전한 준비가 안 되어 있었죠. 눈길을 대비한 부츠도 없었고, 적절한 방한 장비도 전혀 없었거든요. 제 인생에서 그렇게 온라인 쇼핑을 많이 해본 건 처음이었어요. 방한 부츠, 두꺼운 양말, 내복 같은 걸 다 새로 샀죠.
최근에 아시아로 돌아왔지만, 학창시절부터 런던에서 16년이나 살았거든요. 싱가포르에 비할 건 아니지만, 영국은 그렇게까지 춥지 않아요. 어떤 해는 눈도 전혀 안 오기도 하고요. 그런데 연길의 추위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덕분에 제가 배운 건, 여러 겹을 껴입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촬영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어요. 다만 백두산이나 장백산에서 촬영할 때는 눈이 너무 깊어서, 빨리 움직이려면 걷는 것보다 기어가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냥 네 발로 기어다니거나 넘어져서 굴러가는 게 훨씬 빠르더라고요.씨네랩 | 감독님께선 ‘불안한 청춘’, ‘이방인의 정서’를 전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의 문화가 어우러진 국경 도시 ‘연길’을 선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고려하셨던 후보 지역들이 있었는지, 연길이 더 특별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이전에 가본 중국 도시 중 가장 북쪽이 베이징이었고, 그 이상은 가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추운 곳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당시 떠올랐던 유일한 도시는 하얼빈이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하얼빈에서 촬영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연길이라는 도시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런 느낌의 중국 도시는 처음이었어요. 분명히 중국에 있는 도시인데도, 마치 중국 같지 않게 느껴지더라고요. 거리 곳곳의 간판이 모두 한국어로 되어 있기도 했고, 그 공간에는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마치 낯선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여기가 어딘지 감이 잘 안 오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저는 그런 국경 도시라는 개념이, 삶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정말 완벽하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와 물리적인 ‘국경 도시’라는 설정이 아주 잘 어우러졌죠.씨네랩 | <브레이킹 아이스>는 특히 저희에게 익숙한 한국어가 들리는데도,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문득, 한국에서는 조선족이 미디어에서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매우 의미 있는 설정이었지만, 감독님께는 무척 새로웠을 것 같은데요. 해당 설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와, 촬영 당시 어떤 점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저는 연길이라는 도시에 정말 매료됐어요. 그 도시가 주는 색채가 굉장히 강렬하다고 느꼈거든요. 그 색채의 상당 부분은 한국 문화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정말 옷을 잘 입고, 굉장히 세련된 패션을 하고 있었고, 다양한 즐길 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했어요.씨네랩 | 익조틱(이국적)한 느낌이었나요?
음, “이국적”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사실 중국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연길에 대해 약간 부정적이거나 편견 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거든요. “가난한 도시”, “낙후된 도시”라는 인식이 있어요. 연길은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 도시도 아니고, 상하이나 베이징 같은 대도시도 아니니까요.
제가 친구들에게 “연길에 간다”고 말하면 대부분 “어휴, 난 거기 안 가고 싶어”라고 해요. 그런데 막상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와, 정말 색다르더라”라고 말하죠.연길에는 조선족 인구가 많잖아요. 그분들이 한국에 나가서 일을 하고, 다시 돌아오면서 음악, 패션, 커피, 음식 등 한국의 문화 요소들을 많이 가져와요. 그래서 연길은 동북지방의 다른 도시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죠.
중국 동북 지역은 대체로 회색빛이고, 낙후되고, 산업화만 되어 있고,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연길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굉장히 다채롭고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지는 도시였어요.씨네랩 | 한국어가 많이 등장하다 보니 현장에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소니 첸 | 현지인들과 한국 분들을 통해 배운 것 중 하나는, 연길에서 쓰이는 한국어가 우리가 아는 한국의 표준어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이었어요. 글자도 말투도 좀 더 옛 한글에 가깝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이 “만약 이게 한국 드라마였다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말해주곤 했어요.
그래서 현장에는 항상 한국어 대사를 도와줄 사람이 있었어요. 배우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니까요. 그 과정에서 한국어가 가지는 미묘한 특성을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게 어렵거나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오히려 재미있었죠.
그리고 이 도시(연길)에선 길거리 어디서든 한국어가 들려요. 조선족 인구가 많기 때문에, 거리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흘러나오거든요. 저는 한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한 경험이 있고, 또 요즘엔 전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가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인지, 언어는 잘 몰라도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또 낯설게 느껴지기도 해요. 분명히 한국어가 들리는데, 여기는 한국이 아닌 공간이고, 뭔가 “여기에 속한 듯하지만 완전히 속하지는 않은” 그런 이상하고 몽환적인 느낌이었어요. 제 말이 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연길이라는 도시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느낌을 주는 그런 도시였어요.
씨네랩 | 관련하여, 통번역가 분을 온전히 믿고 가는 작업 방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불안 요소는 없었을까요?
안소니 첸 | 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주동우 배우가 대사 두 줄 정도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부분은 나중에 ADR(후시 녹음)을 해야 했죠.
그리고 이건 중국 영화 시장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한데요. 아시다시피 중국에는 검열 시스템이 있잖아요. 그래서 영화가 검열을 통과하려면 특정 기준을 충족해야 해요. 특히 영화가 조선족 문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가 따로 들어오기도 했어요.
되게 흥미롭죠. 영화 속에 묘사된 요소들이 정확한지를 검증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런 절차가 꽤 인상 깊었어요. 그런데 이게 중국에선 일반적인 과정이에요.중국은 워낙 넓은 나라이고 다양한 민족과 방언이 존재하다 보니, 소수민족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항상 ‘오해의 소지’나 ‘왜곡된 묘사’가 없도록 철저히 점검하더라고요.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아요.
씨네랩 | 감독님께서는 다문화가 공존하는 싱가포르에서 성장하신 만큼, 중화권 문화에도 익숙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화권 배우들과 함께 협업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일 것 같은데요. 협업 과정은 어땠는지, 새로운 문화적 경험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저는 중국어를 읽고 쓰고 말할 줄 알기 때문에, 협업 자체는 수월했어요. 실제로 배우들이 끊임없이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중국어를 왜 이렇게 잘하세요?”라고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싱가포르 사람들은 중국어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배우들이 “외국인 아니셨어요? 근데 왜 이렇게 중국어를 잘하세요?”라고 자주 묻곤 했죠.
그 차이는 아마도 ‘남방’과 ‘북방’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제 조상들은 남중국 출신이에요. 아버지 쪽은 푸젠성, 어머니 쪽은 광저우 출신이죠. 실제로 싱가포르로 이주한 중국인 대부분이 남방 출신이에요.
하지만 이번 촬영은 북방에서 진행됐잖아요. 그래서 말투나 억양, 단어 선택 같은 게 많이 달랐죠.기억나는 게 있는데, 몇몇 배우들이 “감독님이 쓰신 대사나 문장이 대만스럽다”고 했어요. 남방식 표현이니까요. 북방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직접 몇몇 문장을 다듬어주며, 좀 더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씨네랩 | 더불어, 이후 영국에서도 학업을 이어가신 만큼 다양한 국가의 배우들과 일하는 것이 자연스러우실 것 같은데요. 각본 집필하실 때, 혹은 실제 현장에서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과, 그 차이를 줄여 나가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안소니 첸 |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어요. 하나는 중국 본토에서 만든 첫 중국어 영화인 <브레이킹 아이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럽에서 만든 첫 영어 영화 <Drift>입니다.
제가 싱가포르에서 자란 것의 특별함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는 점이에요.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저는 기본적으로 영어를 쓰며 자랐고, 동시에 학교에서는 중국어도 배우고 사용했어요.
다언어, 다문화가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살아와서 적응력이 강해질수 있었죠. 덕분에 저는 어느 나라에서든 일할 수 있고, 음식도 전혀 문제가 안 돼요. 맵고 자극적인 음식도 잘 먹고, 유럽이든 중국 북쪽이든 어디서든 문제 없어요.저는 싱가포르라는 ‘문화적 용광로’에서 자란 덕분에, 낯선 환경에서도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촬영 과정에서 특별히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다만 중국에서 일할 때는 한 가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죠. 바로 ‘검열’에 대한 민감성이에요. 중국 스태프들은 어떤 장면이 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고, 그 기준에 굉장히 익숙해 있어요.
그래서 촬영 도중에도 계속 “이 장면 진짜 촬영해도 괜찮은 거 맞아요?”라고 확인하더라고요.예를 들어, 배우들과 은밀한(감정적, 신체적) 장면을 촬영할 때 그 차이를 실감했어요. 주동우와 류호연 두 배우 모두 17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베테랑들이지만, 그런 장면에서는 굉장히 수줍어하고 긴장하더라고요.
저는 “당신들이 찍은 영화가 제가 만든 영화보다 훨씬 많잖아요. 이 정도는 익숙하지 않나요?”라고 물었죠. 그런데 그들은 “중국에선 실제로 이런 장면을 거의 안 찍어요. 키스하면 바로 장면이 전환돼요. 베드신 같은 건 거의 안 찍어요”라고 하더라고요.그래서 그들도 한편으로는 흥미로워 했어요. 미국 영화나 유럽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이 아주 감각적으로 보이니까요. 그런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까 “이거 완전 지루하잖아요?” 하는 반응이었어요. 왜냐하면 실제로는 굉장히 기술적인 작업이거든요.
“몸을 이렇게 움직여야 카메라에 이 부분이 안 보이고, 이쪽으로 틀어야 조명이 맞고…” 이런 식으로 아주 세세하게 조정해야 하니까요.
결국, 그렇게 경험 많은 배우들도 그 장면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수줍어했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여러 번 다시 찍어야 했죠. 저에게도 정말 흥미로운 경험이었죠. 결국, 문화적으로 ‘은밀함’이라는 것에 대한 접근 방식이 굉장히 다르다는 걸 실감했어요. 중국에서는 그런 장면이 거의 연출되지 않으니까요.(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에필로그)
안소니 첸 감독님과의 대화 중 연길에서의 한국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들으며, 한국 음식에 대한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연길의 ‘황우(노란 소)’에 대한 극찬이 이어졌는데요.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해집니다. (웃음)
저는 정말 다양한 음식을 시도해봤어요. 특히 떡을 정말 많이 먹어봤죠. 아마 제가 평생 먹어본 떡보다 이번 촬영을 하며 더 많이 먹었을 거예요. 떡은 정말 어디에나 있었고, 그래서 저는 떡이 얼마나 한국적인지를 실감했어요. 그리고 국수도 많이 먹었는데, 보통 소고기가 들어간 국물이었어요. 사실, 연길에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소고기가 있어요. 그걸 황우라고 부르는데, 한국어로는 '노란 소'라는 뜻이에요. 연변 황우라고도 부르죠. 이 지역에서 나는 소고기인데, 정말 훌륭한 품질의 고기예요.
이 소고기 중 많은 양이 한국이나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어요. 외관은 갈색을 띠는 소인데, 고기가 아주 맛있어요. 하지만 이 고기는 가격이 꽤 비싸요. 왜냐하면 고품질의 고기는 항상 비싸잖아요. 그리고 가장 좋은 고기들은 대부분 수출되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쉽게 접하기 어렵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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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낙엽을 타고] 끝장리뷰 | 결말해석 | 짐 자무쉬와 찰리 채플린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 노동자의 사랑 | 사운드의 영화 | 개와 기차 상징 | 아트시네마
(해당 영화는 씨네랩 측으로부터 초청받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2023)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어느 노동자들의 사랑 이야기, 개와 기차, 아트시네마 (짐 자무쉬) Chapter 2 사운드의 영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찰리 채플린 00:00 아키 카우리스마키 01:40 노동자들 03:23 개와 기차 04:52 아트시네마 06:25 사운드의 영화 07:17 러시아, 우크라이나 07:49 찰리 채플린, 결말해석 09:00 별점 및 한 줄 평 09:22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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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휴가> 메인 예고편
해고 5년차, 천막농성 1882일째
재복은 노조가 정리해고무효소송에서
최종 패소하자 열흘 간 집으로 휴가를 떠나온다.
오랜만에 가족들도 챙기고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며
잊고 있던 워킹&쿠킹 홀리데이로 일상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휴가의 끝이 보일 즈음 재복의 두 딸은,
아빠가 농성장으로 돌아가지 않길 바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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