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9-14 23:11:18
막연한 두려움이 일으킨 불안감의 파도.
영화 <졸업> 리뷰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벤자민은 주변의 기대와 막연함으로 인해 내면의 불안감이 휘몰아친다. 그렇게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던 그는 고민에 빠질 새도 없이 1차원적인 쾌락에 빨려 든다. 잘못됐다는 생각은 어느새 그 욕망에 잠식되어 소거된다. 대화 없이도 충분한 잘못된 만남은 언젠간 거리를 두어야 할 테지만 익숙해진 시간으로 인해 전과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삶의 형태는 지속된다. 금단의 관계는 그의 일부분이 얽히게 만들며 동시에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허비한 시막 간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잃고 물 위에 부유하던 벤자민은 일레인을 만나며 서서히 변화를 맞이한다. 매번 선택의 순간의 기로에 놓이며 '사랑'과 연관된 일레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끝내 쟁취하고도 벤자민의 공허한 표정과 그를 바라보는 일레인의 모습을 통해 계속해서 펼쳐질 흔들리는 불안함을 500일의 썸머의 '썸머'는 그 감정을 느꼈기에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수동적으로 자라왔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졸업이라는 묵직함으로 다가온 순간을 목도한다.

그의 방황에 휩쓸린 이들에게 밀려오는 불안감의 파도는 청춘이라는 막연함으로도 덮을 수 없었다. 세대를 막론한 진정한 '졸업'은 불안감과 두려움이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인생은 정해진 답이 없는 큰 시험지 같다. 영화의 동화같은 이야기와 현실적인 이야기가 잘 버무려진 영화였다. 약간의 아쉬움은 분명히 있지만 청춘의 막연함을 물에 비유한 방식이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Relative contents
-
- 지금까지 이런 경찰은 없었다.
이 글은 영화 [범죄 도시 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범죄 도시]는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마동석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인생작을 선사했고, 작품에 출연한 무명에 가까웠던 수많은 배우들에게 연기의 지변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변변한 스타 배우 하나 없이 입소문 만으로 역주행을 했던 작품이었던 [범죄 도시]는 한국 영화에서는 어쩌면 금기시되는 시리즈(혹은 유니버스) 영화로의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몇 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우리에게 1편에 버금가는 2편을 가지고 돌아왔다.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하지만. 마동석 배우의 이두박근만큼이나 안정적인 시리즈라는 소문이 벌써부터 들리는 영화 [범죄 도시 2]는 장첸이 떠난 자리를 어떻게 메웠을지. 그리고 마석두가 살고 있는 한국의 고담시티는 또 얼마나 소란스러울지 궁금해지게 한다.
우리는 왜 마동석에 열광하는가.;포지셔닝의 승리.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 [이웃 사람]에서 마동석 배우가 연기한 안혁모는 천하의 타노스도 주차만큼은 똑바로 하게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무서웠다. 주연은 아니었지만, 마동석 배우는 가진 몸집만큼이나 확실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 뒤로 이 배우의 역할은 영화에서도 일회용에 가깝게 소비될 때가 많았다. 소위 말하는 "몸빵" 정도의 역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거나. 다른 역할을 맡은 영화는 그다지 큰 흥행을 불러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속상했을 것이다."그런"역할이 아니면 쳐다봐주지도 않고. 같은 역을 하면 지겹다는 말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테니.
[범죄 도시]가 개봉했을 초반만 해도 반응은 비슷했다. 또 비슷한 역할로 나오겠지.라는 목소리도 많았다. 하지만 이 배우의 진심은 드디어 통하기 시작했고. 전직<아파트 단지 내 주차 똑바로 하기 운동> 위원장이자 <아트박스 사장님>을 겸하고 있던 마동석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에게 가장 알맞으면서도 어울리는 옷을 찾게 되었다.
마석도 역할은 마동석이라는 배우의 영화계 포지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할이라 생각한다. 범죄보단 멀고, 경찰보다는 가까우며. 상대편이 되면 골치 아프지만 내 편이 될 때는 그 누구보다 든든할 수밖에 없는 존재. 쌍욕과 구슬리는 기술을 동시에 탑재해 헷갈리지 않게 정확한 타이밍에 선택할 수 있는 사람.
누군가는 단점이라 말했던 그의 애매한 위치를 극대화해서 자신만이 소화할 수 있는, 마치 토르의 묠니르 같은 존재를 지니게 된 마동석은. 이 유니버스 안에서만큼은 최강자이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그가 여태 해왔을 수많은 고민과 아쉬움 들을 이 영화를 통해 완벽히 날려버릴 수 있길 바란다.
낯선(?) 배우들의 반란.;이런 반란은 언제나 즐겁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소위 말하는 "대형 배우"가 많지 않은 이 영화의 성공에는 스타들의 그늘에서 묵묵하게 일해오며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온 배우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전편에서 실제 조선족이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던 진선규 배우의 수상소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배우로서 이름과 얼굴을 알린다는 것이 반드시 연기력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을 테니까. 이 영화에서도 배우들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범죄 도시 2] 속 모든 배우들은 이를 갈며 다져온 내공을 마음껏 펼친다. 덕분에 영화 속 인물들은 그 어떤 때 보다 친근하고. 잔인한 강해상에게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그 어떤 인물도 영화를 편안하게 관람하는 데 해를 가하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들은 가상의 이야기를 실제 일어난 일처럼 실감 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완벽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주인공 하나로 이뤄진 작품이 아닌. 소위 "보통"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영화는 현실과도 너무도 닮아 있어서. 스타 하나 없어도(?) 영화관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강하다 할 수 있다. 이 영화 시리즈(?)가 찬사를 받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러 나온 자리에서도 쭈볏거리고 어정쩡한 세 배우(마동석, 최귀화, 박지환 배우)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한껏 다듬어져 세련된 답변을 쏟아 내는 배우들보다도 더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자신을 빛내기 보다 영화를 빛내기 위해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많은 배우들을 위한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이런 반란은 언제나 즐거우니까.
그럼에도 만족할 수 없었던 포인트.;잔인하다. 잔인해.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 [더 배트맨]이 개봉했을 때 가장 많았던 우려 중 하나는 놀랍게도 주인공인 배트맨 대한 이야기보다 사상 최악의 빌런이었던 조커의 부활에 있었다. [범죄 도시] 역시 장첸의 재림에 많은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악역을 더 악역답게 그리는 방법에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영화는 조금은 안전(?) 하게 그 방법들 중 하나로 "잔인함"을 선택했다.
안타깝게도 그 잔인함은 탄수화물이 지닌 화력 같은 잔인함이다. 말 그대로 끔찍하기까지 하다.
총을 사용하는 장면이 있었면 스케일 자체가 커졌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은데. 강해상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악역(?)들은 칼을 주로 사용한다. 총을 보거나 다뤄본 경험은 없지만.작게는 연필을 깎다가, 일상 적으로는 요리를 하다가 칼에 베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기에. 영화 내에서 길고도 자세하게 보여주는 살육(!) 장면들은 눈과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잔인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집요함과 고집불통. 혹은 돈 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강해상(손석구)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러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개인적으로는 강해상이 가진 "집요함"이 장첸이 가진 서늘한 잔인함보다 더 무섭게 다가왔기에. 오히려 피 칠갑하는 장면들을 줄이고, 악역의 끈덕짐을 강조하는 장면들을 더 넣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블 영화처럼 유니버스의 확장이 히어로의 안위보다 중요한 영화가 아닌. 한 편 한 편마다 주인공의 승리가 예정된 영화에 가까운 [범죄 도시 2]의 긴장감은 오히려 전편보다 조금은 적다.
주인공의 패배를 예상하기에는 마동석 배우의 주먹은 영화 [리얼]에 나온 김수현의 주먹, 혹은 원펀맨의 느낌이 너무 강해져 버렸고. 앞서 본 마석도의 위대한 이두박근의 힘을 본 사람이라면 강해상은 겁도 없이 거기 까분 악역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면서;재밌긴 하다.
이야기의 구조 자체는 1편보다 오히려 허술하다. 여러 웃음 코드도 많았지만 내겐 낮은 타율로 다가왔다. 그리고 잔인함도 지나쳐 보는 내내 긴장감보다 잔인함에 눈을 감고 싶은 순간들도 많았다. (이건 솔직히 내가 쫄보라서 그럴 수도 있음.)
그럼에도 이 영화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그건 누가 뭐라 해도 배우들의 힘이 매우 크다. 이보다 무사하기를 바라는 형사들을 본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은 어쩐지 애드리브도 있는 것 같고.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정말로 큰일을 마무리하고 시원함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기분 좋았다.
배우들의 노력 때문이라도. 이 시리즈가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추신.
영화에 나오는 명대사(?) 중 하나인 누가 5야?는 김윤석 배우 주연의 영화 [거북이 달린다]에 먼저 나왔던 대사임.
[이 글의 TMI]
1. 메가박스 VIP인데 왤케 포인트가 많이 쌓였나 봤더니 수요일마다 포인트 더 주는 걸 나만 몰랐네.
2. 웃음 코드가 맞는 분들은 빵빵 터지심.
3. 칼 쓰는 장면마다 귀 막고 눈 가리고 혼자 난리 블루스였음.
4. 왜 내일 월요일이죠.
#범죄도시2 #마동석 #손석구 #최귀화 #박지환 #영화추천 #최신영화 #네이버인플루언서 #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브런치작가 #액션영화 #마석도 #진실의방으로 #영화리뷰 #Munalogi
-
-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 2021
미국, 그리스, 드라마, 122분
감독: 매기 질렌할
감출 필요가 없는, <로스트 도터>
<로스트 도터>는 매기 질렌할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자 여성이 여성의 삶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하지만, 여성이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분출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포착하고 이를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 당연하다 여겼던 지침서(가령 모성애라든지, 또 모성애라든지-)를 강제로 품어야 했던, 여성의 심리를 어떠한 생략과 축약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나 페란테 작가가 '잃어버린 사랑'(<로스트 도터>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조건으로 매기 질렌할 감독의 연출을 요구한 건, 이러한 원작의, 나아가 영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해 보여주는 것보다 여성이 여성의 언어를 해체할 필요 없이 쭉 늘여놓는 것이 감정적 동요와 이해를 더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주는 매력보다, 방법이 갖는 의미를 음미하는 게 <로스트 도터>를 보는 첫 번째 각도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고요한 해변에 돌연 보트가 침범한다. 이미 해변을 점령한 대가족의 막무가내식 태도도 눈감아줬는데, 자기 집 앞마당에 차를 끌고 들어오듯, 보트를 밀고 들어오다니. 모처럼 그리스로 휴가를 온 레다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평온한 하루를 모아서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풀고자 했는데, 쉽지 않다. 레다는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생각하며 차분히 휴가를 즐기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꾸만 시선이 불청객들 사이로 향한다. 니나와 엘레나, 젊은 엄마와 어린 딸이 서로에게 꼭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레다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깊게 묻어놨던 기억이 불쑥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니나와 엘레나의 모습과 젊었던 레다와 어린 두 딸(비앙카, 마사)의 이야기는 시도 때도 없이 겹쳐진다. 엘레나가 니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떼를 쓸 때, 비앙카는 레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엄마의 머리를 때린다. 엘레나가 갑자기 해변에서 사라졌을 땐, 바다에서 마사를 안고 애타게 비앙카를 찾는 (패닉 상태에 빠진) 레다의 모습이 펼쳐진다. 레다는 자꾸만 젊었던 때로 돌아가 두 딸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고 지치게 했는지 떠올린다. 그럴수록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끝까지 휴가를 휴가답게 보내고자 한다.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도, 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던 레다는 고집스럽게 휴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니나와 엘레나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공중분해됐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레다는 잠에 빠져있다가 침대를 점령한 매미에 화들짝 놀라고, 해변에서 자리를 바꿔 달라는 캘리(니나의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고 욕을 먹는다. 그날 저녁엔 누군가가 던진 솔방울에 등을 크게 다치기도 한다. 관리인의 추파를 불편해하면서도 여자로서의 욕망을 참지 못해 벙찐 유혹을 날리고 도망친다. 사라진 엘레나를 잘 찾아주고는 엘레나의 인형을 훔쳐와 아이를 돌보듯 인형을 품고 있기도 한다.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가 엄마(니나)와 가족들을 미치게 만드는 걸 보고도 레다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라 말하며 침묵한다. 대체 레다는 왜 이러는 것일까. 휴식을 즐긴다고 해놓고 왜 이리 예민하고 초조해하는 걸까. 나아가 왜 그렇게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못되게 구는 걸까. 답은 정해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로스트 도터>는 이를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젊은 시절의 레다는 일곱 살 비앙카와 다섯 살 마사를 두고 집을 나갔다.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아봐 주고, 존재 이유를 본능적으로 일깨워 준 남자에게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불륜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고 정당화하지도 않았다. 그저 즐기고 또 누렸다. 아이들과 통화를 하고 나면 매번 참았던 (속마음을 비집고 나오던) 말들을 쏟아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은 레다에게 자유로, 해방으로, 망가졌던 나를 다시 원상 복귀하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그녀에게 불륜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두 딸을 버린 일은 나를 온전히 존중해주는 사랑을 위한 일이라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니나는 그때의 레다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영화의 두 번째 각도는 니나와 레다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지점에서 더 눈에 띄고 그리하여 관객이 모성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다.)
<로스트 도터>는 레다의 과거를 그녀가 스스로 자백하기 전까지 드러내지 않는다. 레다가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숙소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등대의 불빛과 바닷바람과 함께 노출한다. 비앙카와 마사를 홀로 키워야 했던 레다가 점차 이성의 끈을 놓을 때마다 현재의 레다에겐 태풍이 불어닥친다. 과거의 정신적 고통이 현재의 신체적 고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지쳐버린 니나의 눈에서 중년의 레다는 그때의 파편들이 비바람과 함께 몰려오는 걸 느낀다. 그녀는 니나를 이해하고 동정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혐오한다. 현재의 니나와 과거의 자신을 잇는 걸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답답해하면서도, 그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 레다는 두 딸을 버렸던 자신의 선택을 바닷물에 쉽게 흘러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쓰인 이야기를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레다는 몸에 새긴 선택의 결과들을 지울 수 없었다. 솔방울에 맞은 상처를 굳이 치료하지 않은 점이 대표적이다. 레다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죄다 자신에게서 출발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모성애. <로스트 도터>에서 모성애는 감출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너무 많이, 또 빈번하게 여러 인물과 사건, 장치, 나아가 상징으로 쓰이는데, 전부 사실적이고 날카로워서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뎌지기 힘든 화두이기도 하다. 어렵게 임신한 캘리에게 당신도 아이를 낳아보면 알 거라는 마치 저주와 같은 말을 내뱉는 레다부터 레다 자신과 현재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니나, 레다가 엄마에게 받았던 인형(미나), 엘레나의 인형, 솔방울, 인형 속에 든 지렁이, 끊기지 않은 과일 껍질까지 영화에서 모성애는 다양한 형태로 속을 내보인다. 엘레나가 인형을 끝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자식을 향한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엄마의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앙카가 레다에게 과일 껍질로 뱀을 만들어 달라 조르는 행위와도 일치한다.
작품 세계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모성애'로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성애를 인간의 본능이라 선뜻 말하기 어렵다.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인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영화가 품은 모성애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건, 현실 속 모성애도 같은 껍데기와 내용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이고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인간의 습성 중 모성애는 무엇일까. 차곡차곡 쌓여가는 감정이나 규칙들의 합인가? 처음부터 생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인가? 모성은 여성에게 어떤 자기 확신과 자기만족을 주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다의 말처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알 수 없지만,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알아도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레다에게 모성은 자기 발목을 잡는 사랑이 되었을까.
모성과 '나'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레다가 끝내 어린 두 딸을 두고 집을 나간 건, '나는 늘 나인가'란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스트 도터>가 지속적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레다의 얼굴에 집중하는 것 또한 물음에 대한 일종의 해석본(세 번째 각도)이다. 복잡 미묘한 니나의 표정과 모성에 확신하는 캘리의 태도까지 여성에게 모성은 '나'를 만드는 하나의 요소다. 또한 모성은 일방적인 표현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가 서로에게서 주고받는 표현으로 작동된다. 정석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란 건 분명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모성이 여성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가를 조명한다. 모든 엄마가 모성을 똑같은 각도와 동일한 태도로 인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모성을 뒤틀거나 자신만의 모양을 찾는다. 그리하여 모성은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경험했다고 해도 오롯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없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따라서 "절 나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하면서 "지나가긴 해요?"라 묻는 니나의 말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 상반된 시각을 제시한다. 레다가 자신을 이기적인 엄마라고 소개하고, 니나에게 훔친 인형을 돌려주며 "난 비뚤어진 엄마니까요"라며 자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레다는 니나를 함부로 나쁘게 판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조차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엄마라 말하지만, 그녀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식을 끔찍한 부담이라 말하던 레다는, 본인의 판단으로 선을 넘었고, 그 결과 허울뿐인 자유를 얻었다.
여성에게 모성이 들어오는 순간, 엄마란 존재가 불쑥 튀어나와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도, 좋지 않은 징조도 아닌 자식을 낳은 여성이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미 엄마의 자식이었을 내가 느끼는 불변의 것이다. 레다는 엄마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했다. 그녀에게 엄마는 엄마의 의무를 저버린 여성이었다. 따라서 두 딸에게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겠다 다짐했고, 잠시 동안 그녀는 '나'를 제외하고 '엄마'가 됐다. 엄마가 '나'를 이루는 수많은 자아 중 하나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현실에 치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검열했고, 그 힘마저 빠져나가자 질식할 것 같다며, 엄마이길 포기했다. 엄마로 일할 능력이 되지 않아 그만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엄마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인 듯이.
<로스트 도터>가 말하는 모성애는 다양하다. 레다는 모성을 한때 악으로 설정했다. 다른 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모성은 그럴 수 없는 범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니나는 레다의 모성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범죄이자 태만이었다. 딸의 인형을 일부러 훔쳤다는 레다를 보며, 순간 니나는 그녀에게 이해받기를 거부한다. 왜? 니나의 모성은 다른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니나의 모성은 켈리가 가진 모성과 같은가. 아니다. 그들의 모성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없다. 각자의 모성이 남기는 진득한 진액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출처: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다음)
각도를 세우고 끝을 달리던 영화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모성으로 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만큼 모성을 이해할 존재는 없다.
(남성들의 역할이 크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가 풍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여성에게 놓인 현실과 그들의 입장, 그리고 그들이 분출하는 감정에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임을 지고 나서는 또 어떤가. 잊을 수 있는가? 잊을 수 있었다면, 레다는 해변에서 니나와 엘레나를 보고도 인자한 미소를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니나가 들고 있던 긴 핀에 찔릴 일도 없었겠지. 그리스를 떠나지 못하고 해변 자갈밭에 쓰러지는 레다의 뒷모습. 관객은 레다가 흘리는 피를 보며 그녀가 선택한 모성애의 결말을 봤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다는 그런 상흔을 갖고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두 딸의 엄마로 살았고, 앞으로도 살 예정이다.
레다는 스스로 긴 형벌을 준 셈이다.
마치 끊어지지 않게 깎은 과일 껍질처럼.
-
- 왜 모던걸 모던보이는 다 독립군이 되는 것일까?
또다시 김남길 때문에 본 영화로 실망을 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한 사람의 리뷰를 시작한다,,, 김남길이 나온 작품을 찾다가 대학원 시절 학기말 페이퍼를 제출하기 위해 그 교집합을 찾던 중 발견한 작품이었던 영화 《모던보이》. 일제강점기 영화 중 모던걸, 모던보이를 테마로 한 작품이 무엇이 있을까 찾다가 발견한 작품이었다. 정말 보다가 재미가 없어서 잠이 들 정도였는데 쓰고자 했던 페이퍼의 방향과 너무나도 일치해서 꾸역꾸역 분석하면서 봤던 영화였다.
영화 《모던보이》 시놉시스
1937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은 단짝친구 신스케와 함께 놀러 간 비밀구락부에서 댄서로 등장한 여인 조난실에게 첫눈에 매혹된다. 온갖 방법을 동원한 끝에 꿈같은 연애를 시작하지만, 행복도 잠시. 난실이 싸준 도시락이 총독부에서 폭발하고, 그녀는 해명의 집을 털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난실을 찾아 경성을 헤매는 해명. 그가 알게 되는 사실은 그녀가 이름도 여럿, 직업도 여럿, 남자마저도 여럿인 정체가 묘연한 여인이라는 것! 밀려드는 위기감 속에서도 그녀를 향한 열망을 멈출 수 없는 해명. 걷잡을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선 그는 또 어떤 놀라운 사건을 만나게 될 것인가! 사랑과 운명을 건 일생일대의 위험천만한 추적이 펼쳐진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모던걸과 모던보이를 조명하다
모던보이 영화의 의의라고 한다면 그동안 다양한 매체에서 경성의 거리를 조금 낭만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존재했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을 극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생각해보면 우리가 학교에서 받았던 공식적인 역사 속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인물군상이다. 역사 교과서에는 친일파와 독립군의 일부만 선택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모던보이에는 이렇게 역사에서 배제되었고 망각된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대중들에게 상기시키고 공식 영삭의 틈을 메꿔주는 문화적 기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알고보니 독립군, 갑자기 독립군이 된 그들
나름 의의가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영화 《모던보이》에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점은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알고보니 독립군이었고, 갑자기 독립군이 된다는 것이다. 역사 속 모던보이와 보던걸들을 보면 일부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유행을 쫓고 신식의 것을 몸에 두르느라 세상 정세에는 관심도 없는, 즉 독립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비판하는 대중가요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은 대부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던보이나 모던걸이라는 가면을 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지인의 영향으로 독립에 투신하는 경우로 그려지는 거시 대부분이다. 영화 《모던보이》 역시 로라이자 조난실은 알고보니 독립군의 주요 요원이었고, 조난실을 사랑한 이해명은 그녀의 죽음으로 갑자기 독립군이 된다. 모던보이라는 컨셉을 전면에 놓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영화 《모던보이》 역시 알고보니 조선의 독립을 그리기 위해 하나의 장치로서만 활용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영화가 넘어야할 민족주의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매체에서 그 당시 실제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온상을 그려내기 보다는 우리가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 바라는 것을 투영시키는 욕망이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는 지나간 과거지만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이기에 현재와도 같은 과거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에게 민족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워서 그들의 삶이 비극적이면서도 독립을 위해 살신성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이런 민족주의가 영화 스토리의 틀을 정해버리고 그 한계를 설정하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은 왜 영화 속에서 다 죽어야 하는 것일까? 폭탄 날리고 집에 돌아와서 행복하게 살 잘면 안되는 것일까? 왜 그런 영화를 볼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하다.
영화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크게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작품이었지만 분석용으로는 꽤나 분석할 거리를 제공했던 영화 《모던보이》. 일제강점기 시기에 관련된 영화 작품에 대한 공부용(?)으로는 추천하는 작품이다.
-
- 감히 당신과 나를 ‘우리’라 부를 수 있다면
어릴 적, W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았다. 국제 사회의 사건 사고를 다루는 프로그램의 에피소드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시에라리온의 여성 할례 이야기였다. 성차별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던 나이였지만, 불합리함에 분노했던 기억은 선명하다. 그러나 고백하고 싶은 게 있다.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타자화에 의한 안도감이었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히잡 반대 시위를 촉발점으로 체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는 이란 사회의 풍경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한 가족의 모습이다. 국가를 위해 평생을 일한 이만은 수사 판사로 승진하며, 부와 명예에 한층 가까워진다. 그러나 독재 사회에의 고위직이란 체제에 복무하는 일로 조금이라도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제거하는 일을 수반한다. 이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는 이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족의 안전을 위해 받은 총을 집안에서 분실하며 이만의 가족은 차차 무너진다. 사라진 총에 가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이만. 그의 ‘거짓말쟁이’ 찾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사실 이 가족의 분열은 언제든 벌어질 일이었다. 그저 체제에 복무하는 이만의 공모자인 어머니 나즈메에 의해 유예된 일일 뿐이었다. 이 작품에서 이만은 구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며, 두 딸 레즈반과 사나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매일 같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두 세대가 바라보는 방식은 무척이나 다르다. 이만은 TV라는 레거시 미디어의 문법에 따라 반체제 시위를 폭동으로 바라본다. SNS를 통해 시위를 접하는 레즈반과 사나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 현재의 시위를 어떤 혁명이라고 바라본다. 어느 날, TV를 틀어놓고 가족들은 식사를 한다. 시민들의 행동을 폭동에 불과하다고 규정하는 목소리에, 레즈반은 반기를 들고 가족 내의 균열은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레즈반과 사나가 경험하는 시위의 모습은 스마트폰을 경유하여 전달된다. 시위대가 현실 속에 투쟁하며 보여주는 진실이 담긴 이미지들. 카메라의 기능뿐만 아니라, 동료 시민들에게 이미지의 확산을 가능케하는 스마트폰의 순기능이 여기에 있다. 이 작품에서 카메라가 긍정적인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만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떠나, ‘거짓말쟁이’ 찾기를 시작한다. 특이한 점은 이만이 격식을 갖춘 수사를 행한다는 것이다. 캠코더를 놓고 증언을 구하고 증거를 찾아 남기려는 이만. 그 또한 이미지의 힘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기록한다고 착각한 채 기록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성찰은 놓친다. 누가 어떤 시선을 가지고 카메라를 쥐었는가에 따라 이야기는 극적으로 달라진다. 이런 상황은 언론의 모순을 드러낸다. 발화의 주체에 따라 소거되고 강조되는 이야기가 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바라보게 만들지 않았는가.
가족들에 대한 불신이 쌓이며 이만은 결국 가족들을 가두기에 이른다. 이때 상황을 뒤집는 것은 막내 사나이다. 총을 훔친 범인이기도 한 그녀는 레즈반과 나즈메를 구한다. 그리고 우스운 숨바꼭질이 이어진다. 고향의 유적지로 보이는 공간에서 이만은 가족들을 찾아 헤맨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야 할 지점에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구멍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숨바꼭질. 이는 결국 현재의 이란이 가진 감시 체제는 허술하기 그지없고, 개인을 억압하기만 하는 사회는 언젠가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총을 든 사나와 이만은 대치 상황에 이른다. 이만에게서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과 체제의 모순에 내적 갈등을 하던 모습은 지워진 지 오래, 그는 사나를 도발한다. 이때 사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녀는 불안감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과감하게 이만을 역사의 무덤으로 보내기를 선택한다. 영화는 이렇게 구세대와의 단절을 명확히 선언하며 끝을 맺는다.
영화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한국 영화계에 정치성은 소거된 지 오래다. 소수의 독립영화를 제외한 영화들은 오락성에 매몰되어 있다. 한편, 억압적이기 그지없는 이란이라는 나라에서는 용기 있게 체제에 반기를 드는 영화가 등장했다. 감독은 용기가 없어서 결국 망명을 선택했다 말하지만, 이런 작품을 만든 것 자체가 용기라고 생각한다.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언정, 사람은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언젠가 세상도 바뀌지 않을까. 사회와 유리된 영화는 결국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여전히 부족하기 그지없는 나는 해외의 상황을 보는 순간마다 여전히 타자화의 욕망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싶고 바꾸고 싶고 연대하고 싶은 마음만은 이전보다 강해졌다. 나와 당신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내가 당신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대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다.
* 본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작품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작성한 것입니다
-
- 멈출 수 없는 마음 속 ‘둠둠’
- 우리나라에 다섯 군데뿐인 돌비 시네마관에서, 듣는 경험이 인상적인 영화 한 편을 감상했습니다. 돌비 시네마는 돌비 비전 HDR 영상과 돌비 애트모스 음향을 사용하는 돌비(Dolby) 사의 상영관입니다. 색다른 극장 경험을 제공하는 이곳에서 디제잉을 소재로 한 영화 <둠둠>을 만났습니다.<둠둠>은 ‘디제잉' 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사운드가 러닝타임 내내 귓가에 울리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토해내듯 터져 나오는 사운드와 달리,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하염없이 말을 삼킵니다. 여타 음악 영화와는 다른 분위기가 맴도는 <둠둠>. 이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9월 6일(화)에 진행된 <둠둠>의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둠둠>은 2022년 9월 15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둠둠Doom Doom<둠둠>은 DJ 출신 미혼모 ‘이나'가 엄마 ‘신애'에게서 벗어나 음악을 향한 열정과 자신의 아기를 되찾는 여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나'에게 엄마 ‘신애'는 끊임없이 반복되어도 절대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없는 음악 같은 존재입니다. 지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안전 염려증 환자 ‘신애'는 밤낮 가리지 않고 타카질을 하며 벙커를 만듭니다. ‘이나'는 동네 주민의 원성에도 으름장을 놓아버리는 엄마가 답답하지만, 어찌하지는 못합니다. ‘이나'는 끝없이 걸려 오는 안전 염려증 엄마의 전화를 무시하지만, 어찌하지는 못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엄마는 미혼모 ‘이나'의 아기를 입양 보내고 음악을 그만둘 것을 강요합니다. 이때도 ‘이나’는 어찌하지 못합니다. 결국 음악을 관두고 상담원으로 일하며, 엄마 몰래 위탁 가정에서 아기를 돌보죠. 그렇게 엄마를 견뎌오던 ‘이나’는 마지막으로 디제잉 대회에 도전함으로써 견딜 수 없는 ‘엄마'라는 음악을 꺼버리고, 음악과 아기를 되찾으려 합니다.<둠둠> 속 모녀 관계는 얼마 전에 감상한 <경아의 딸> 속 모녀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딸의 비극을 딸의 탓으로 몰아세우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딸. <경아의 딸>의 딸은 갑갑한 엄마와의 연을 끊어버렸지만, <둠둠>의 딸은 엄마를 견뎌냅니다. 웃어 보이지는 못하더라도,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아주죠. 생각해보면 엄마의 막말에 상식적인 대응을 한 건 <경아의 딸> 속 딸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엔 엄마의 막말을 견디며 살아가는 <둠둠> 속 ‘이나’ 같은 딸들이 더 많습니다. 엄마 ‘신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도 말을 삼키는 ‘이나’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 공감이 가는 이유입니다.딸 ‘이나'와 엄마 ‘신애'의 뿌리 깊은 갈등은 의외로 한순간에 해소됩니다. 엄마 ‘신애'의 팔에 못이 박히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말이죠. 태국에 있는 딸을 데려와 준다는 교회 사람들의 사탕발림에 ‘신애'의 집에서 하녀처럼 부림 당하던 이주 노동자 여성의 분노에 의한 사고였습니다. 이주 노동자 여성에게 엄마의 부정을 전한 '이나'는 엄마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신애'는 이주 노동자 여성의 분노로 말미암아 딸과 함께할 수 없는 ‘이나'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이나’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엄마를 조금씩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 음악을 만들며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죠.영화를 보면서 러닝타임 내내 고통을 겪은 ‘이나'가 너무 갑작스럽게 엄마를 용서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이야기더군요. '애증'으로 묘사되는 모녀의 싸움은 언제나 그렇듯 칼로 물 베기니까요.⊙ ⊙ ⊙무릇 힘든 일은 한꺼번에 찾아오곤 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니죠. 주인공 ‘이나'도 그런 상황에 부닥친 인물입니다. 딸을 데려오지 못하는 미혼모, 안전 염려증에 사로잡힌 엄마, 엄마로 인해 음악을 그만둔 DJ, 좋아하는 테크노 장르보다 화려한 EDM 장르가 인기인 시대, 자신의 오리지널 곡을 빼앗은 옛 동료, 귓가에 맺히는 이명. 이 모든 것이 <둠둠>의 주인공이 겪는 시련입니다.이러한 역경들은 ‘이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피어나는 비극적 상황을 묘사합니다. EDM의 시대에 비주류 음악인 테크노를 한다는 설정은 미혼모 '이나'의 소수자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인물에게 너무 많은 시련을 부여하는 바람에, 음악과 아기를 되찾는 ‘이나'의 여정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옛 동료와의 갈등과 갑작스러운 이명은 ‘이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장면들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죠.영화 말미, 온갖 시련을 무릅쓴 ‘이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현실로부터, 편견으로부터, 그리고 엄마로부터 도망치지 않겠다고요. 교회에서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 ‘신애’와 교회 신도들을 앞에 두고 디제잉을 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나'의 모든 시련과 제 아쉬움이 한 방에 해소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종교가 없는 저는 이게 교회에서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 궁금했습니다. 현실에서 벌어질 만한 갖은 역경들을 지나칠 정도로 가득 담은 영화의 결말이 과하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종교인 친구는 개방적인 교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팩트 체킹을 해주었답니다.)⊙ ⊙ ⊙<둠둠>은 듣는 매력이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둠둠거리는 비트가 고막을 자극하죠. 하지만 ‘둠둠’은 단순히 강렬한 사운드만을 묘사하는 말은 아닙니다.‘둠둠’은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음악을 향한 ‘이나'의 열망, 그리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아려오는 엄마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실제로 몇몇 장면에서 둠둠거리는 비트와 엄마 ‘신애'의 타카질 소리가 교차되어 들려오기도 하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둠둠'을 더는 감내하지 않는 ‘이나'의 여정은 사운드 그 이상의 울림을 전합니다.Summary자신에게 집착하는 엄마 때문에 전부였던 음악을 놓아버린 DJ '이나'. 길을 걷다 우연히 들려온 비트에 디제잉을 다시 하기로 결심하고, 베를린에 갈 수 있는 오디션에 참가하는데... "두려워도 도망치진 않을 거야" (출처: 씨네21)Cast감독: 정원희출연: 김용지, 윤유선, 박종환
-
- 2월 셋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금주에는 마블 스튜디오가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옵니다.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새로운 캡틴과 함께 관객들에게 찾아왔습니다.
이번 작품으로 삐그덕거리던 마블의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곧 개최될 아카데미 시상식의 강력한 후보로 점쳐지는 <브루탈리스트>도 개봉을 앞뒀습니다.215분이라는 러닝타임과 상영시간 내 인터미션이 존재한다는 정보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죠.
골든 글로브, 크리틱스 초이스 등 각종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고 있는
애드리언 브로디가 과연 이번 오스카에서도 남우주연상을 거머쥘 수 있을까요?
브루탈리스트
The Brutalist
개요: 드라마 | 미국 | 215분
감독: 브래디 코베
주연: 애드리언 브로디, 펠리시티 존스, 가이 피어스
개봉: 2025.02.12.
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줄거리
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미국에 정착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 미국 이민자의 냉혹한 현실 속에 전쟁의 트라우마를 견뎌내던 어느 날.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본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제안한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 빛의 경계를 넘어 대담하고 혁신적인 그의 건축 설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후원자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 주변의 비난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더 자신의 설계에 집착하던 ‘라즐로’.
혁신적인 브루탈리즘 건축에 자신을 투영하던 ‘라즐로’는 결국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는데...
발 디딜 곳 없는, 소속이 불분명한 삶의 연대기 트라우마가 예술로 승화된다!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Captain America: Brave New World
개요: 액션 | 미국
감독: 줄리어스 오나
주연: 안소니 마키, 해리슨 포드, 대니 라미레즈, 쉬라 하스
개봉: 2025.02.12.
배급: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줄거리
대통령이 된 새디우스 로스와 재회 후, 국제적인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 샘이 전 세계를 붉게 장악하려는사악한 음모 뒤에 숨겨진 존재와 이유를 파헤쳐 나가는 액션 블록버스터.
두 사람
Life Unrehearsed
개요: 다큐멘터리 | 대한민국 | 80분
감독: 반박지은
주연: 이수현, 김인선
개봉: 2025.02.12.
배급: 반박지은필름, (주)시네마달
줄거리
“가장 낯선 곳에서, 가장 깊은 사랑으로”
파독 간호사로 낯선 나라 독일에 이주한 뒤 지역 사회와 소수자를 위해 목소리 내는 일에 앞장선 ‘수현’.간호 학교를 졸업하고 신학 연구에 뛰어들며 이주민의 마지막 길을 동행하는 호스피스 리더 ‘인선’.
40여 년 전, 재독여신도회에서 운명처럼 만난 ‘두 사람’ 이민 1세대, 이주 노동자,그리고 레즈비언으로서 서로에게 쉴 곳이 되어주고, 곁에서 여생을 함께하기로 한다.
첫 황혼에서 두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의 무지갯빛 블루스가 시작됩니다!
아카디안
Arcadian
개요: SF | 미국 | 92분
감독: 벤자민 브루어
주연: 니콜라스 케이지, 맥스웰 젠킨스, 제이든 마텔
개봉: 2025.02.13.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줄거리
밤이 오면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온다! 쌍둥이 아들 ‘토마스’와 ‘조셉’과 함께 문명이 파괴된 세상을 살아가는 ‘폴’.밤마다 습격하는 정체불명의 괴물들 때문에 이들은 매일 긴장감 속에 전투를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일로 한밤중에 집을 나선 ‘폴’은 마주쳐서는 안 될 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
-
- 맞는 장면이 너무 많은데 전부다 100% 리얼로 한 영화 ㅋㅋ
두번다시 안나올 레전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 재밌게 봐주세요
-
- 영화 <캅샵 : 미친놈들의 전쟁> 메인 예고편
사기꾼 ‘테디’, 수배범 사냥꾼 ‘밥’, 사이코패스 '앤서니'
최악의 범죄자 셋이 제 발로 경찰서에 모이고,
이에 수상함을 직감한 신입 경찰 ‘발레리’는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한편, 같은 경찰서에 셀프 체크인한 그들의 목적이
절대 몰랐어야 할 진실과 함께 하나 둘씩 드러나는데..
미친 놈 위에 더 미친놈!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미친 전쟁이
경찰서에서 시작된다!
-
- 디즈니+ <형사록 시즌 2> 티저 예고편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강력계 형사 '택록'의 마지막 반격?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형사록 시즌2] 7월 5일, 오직 디즈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