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8-25 09:59:04
우연함에 상상을 더해 웃음을 만드는 영화.
영화 <육사오> 리뷰
어디에선가 날아온 로또는 바람을 타고 말년 병장 천우의 앞에 떨어진다. 반신반의하며 맞춰보는데, 아니 이럴 수가 1등 당첨 로또 종이였다. 인생 펼 일만 남은 천우는 온 세상의 기쁨을 맞으며 방실방실 웃는다. 하지만 찰나의 실수로 로또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천우는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다.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간 로또는 북한군 용호 앞에 떨어진다. 천우는 무사히 1등 로또를 되찾을 수 있을지 영화를 통해 확인해보면 좋을 듯하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구조가 생각나기도 하는 이 영화는 남과 북의 병사들이 경계선에 서서 1등 로또를 두고 대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남북을 주제로 하는 만큼 정치적인 선입견이 들어가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보았는데, 거리를 두며 적정선을 유지한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인해 어떠한 거리낌 없이 영화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토록 가벼운 재미와 우연함에 상상을 더한 황당한 전개가 또 있을까. 시사회를 통해 보고 온 ‘육사오’는 시종일관 웃기려고 작정한 영화 같았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코믹을 노린 듯했지만 영화의 등장인물들끼리 웃고 떠드는 모습이 마치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시간도 티켓값도 아까워져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웃음을 작정한 이 영화에서는 통 크게 웃겨주어서 재미있게 보았다. 너무 가벼운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TV에서 틀어주면 몇 번을 봐도 재미있었던 코믹영화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악당과 티키타카가 오가며 상당히 웃기고 계속해서 기억나는 영화였는데, 작품성이 떨어지더라도 기억에 남고 재미있는 영화가 어느새 신파와 진지함에 묻혀 사라진 것 같다. 언제쯤이면 다시 ‘강철중 : 공공의 적 1-1’ 같은 영화가 나와 브라운관을 가득 채워줬으면 좋겠다.
Relative contents
-
- 떠도는 표면에서 찰나의 만남으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왕가위의 영화는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두 편이 떠오른다. <중경삼림>(1994)과 <타락천사>(1995)다.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타락천사>다. 의외의 선택처럼 보일 수 있겠다. <중경삼림>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영화지만, <타락천사>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비운의 작품이다. 두 편의 영화는 같은 듯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두 영화는 모두 청춘들의 몸부림이 스며든, 홍콩의 중국 반환 직전의 세기말 감성이 물씬 피어나는 90년대를 공유한다. 사실 <중경삼림>엔 경찰 663과 페이의 이야기 뒤에 이어졌어야 할 세 번째 에피소드가 있었다. 하지만 두 개의 에피소드만으로 장편 분량을 충족하자, 왕가위 감독은 후속 에피소드를 덧붙이지 않고 영화를 내놓았다. 그렇게 <중경삼림>에 편입되지 못한 이야기가 <타락천사>의 근간이 된다. 덩그러니 남은 세 번째 에피소드를 각색하고 살을 붙여 만든 영화가 바로 <타락천사>다. 그래서 묘하게 <타락천사>는 태생적 배경에서부터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소외감과 주변을 배회하는 외로움 따위가 묻어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떠도는 표면
<중경삼림>이 낮의 영화라면 <타락천사>는 밤의 영화다. 대도시의 밤은 언제나 외롭다. 컬러풀한 네온사인의 잔상이 밤거리의 쓸쓸함을 더욱 짙게 만들고, 번화가 주변부에선 마음 둘 곳 없는 영혼들이 술로 밤을 지새운다. 도시가 밤으로 물들어가면 평상시에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종종 출현한다. 컴컴한 뒷골목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사람들도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쉬거나 자고 있을 때 움직이기 시작한다. 직업이 없이 부유하는 사람들도 밤이 되면 이곳저곳에 기웃대며 나름대로 존재감을 표출한다. <타락천사>의 인물들은 한적한 도시의 밤을 누비는 외로운 방랑자들이다. 마음 놓고 쉴 곳을 찾지 못해 계속해서 떠도는 유령들. 이들의 피상적인 몸부림, 표면적인 움직임은 왕가위의 광각 렌즈 속에 갇혀 진한 고독과 상실 등의 파편들로 형상화된다.
<타락천사>는 불친절하다. 인물의 사연을 펼쳐놓긴 하지만, 어쩐지 관객을 설득하기보다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볼지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왕가위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스치는 인연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자들의 부유하는 떨림만을 포착하는 작업이다. 어쩌면 이런 시선은 미국 독립영화계의 상징인 존 카사베츠의 눈과 맞닿아 있다. 언젠가 왕가위가 카사베츠의 영화를 인상깊게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카사베츠는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1976) 속 비텔리를 그려낼 때도 이미지의 잔상들과 조명, 인물의 인생관을 펼쳐놓는 듯한 장황한 대사들, 도통 의뭉스러워 보이는 클로즈업을 활용해서 삶의 표면과 심연을 오가는 시선을 드러냈다. 비텔리에게 마냥 몰입할 수만은 없지만, 그의 사연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타락천사>의 인물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날 것의 감정들이 내게 전해지긴 하지만, 어쩐지 쉽사리 공감하기는 힘든 이야기들. <타락천사>가 <중경삼림>과 유사한 스타일이 묻어나는 영화임에도 지지층이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타락천사'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표출하는 카메라
<타락천사>에는 고독과 불안함, 공허와 갈망, 회상과 아련함, 애정, 사랑, 연민 등이 뒤얽힌 복잡한 감정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이 영화는 시청각적 표현력 혹은 영화 기법으로 빚어낸 전달력 등에 있어서 그 어떤 왕가위의 영화들보다도 직관적이고 강렬한 효과를 유도해낸다. 시작부터 끝까지 광각 렌즈를 피사체(주로 인물)에 들이밀면서, 삐딱한 구도를 통해 프레임 내부를 맴도는 인물의 공간을 왜곡한다. 인물들은 과장되고 뒤틀린 형상으로 주변 공간을 점유한다. 특히나 버스 내부, 단골 술집, 식당 등의 장소에서 킬러와 파트너의 얼굴을 통해 그들의 황량한 내면이 극단적으로 표출된다. 작정하고 도시 주변부 방랑자들의 외로움을 담아내는 영화다. 그러니까 왕가위는 영화를 찍는 순간부터 이미 무엇을 담아낼지, 어떻게 표현할지 계획된 공식 아래 솔직하게 드러내고 가감 없이 표출한다.
킬러와 파트너는 늘 엇갈린다. 작업을 마친 킬러가 비밀 아지트로 복귀하고 휴식을 취한 뒤 다른 작업을 위해 자리를 뜨면, 파트너는 킬러가 머문 자리를 청소하고 정보를 건네는 등 중개인처럼 킬러를 돕는다. 두 사람은 유대감이나 이성 간의 호기심이 아닌 비즈니스로 얽힌 사이이므로, 서로가 맡은 일에만 충실하면 잘 맞은 부품이 쉼 없이 돌아가듯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파트너는 킬러를 마음에 품게 되고, 더는 엇갈림을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킬러는 얼굴을 보자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한다. 일과 감정이 섞이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킬러와 파트너는 모두 각자의 사정과 나름의 사연으로 고독에 파묻힌다. 파트너의 수음 행위가 적나라하게 프레임에 두 번째로 담기는 신을 떠올려 보자. 이 장면은 킬러와 베이비(염색한 여자)가 같이 있는 모습 이후 제시된다. 이때 왜곡된 구도 및 광각 렌즈, 음악을 통해 킬러와 엇갈리기만 하는 파트너의 상황과 그녀의 참담한 심리를 아주 짙은 고독감으로 환원한다. 시작부터 광각으로 프레임을 구획하던 왕가위의 카메라는 숨김없이 인물의 표면과 심리를 함께 포착하고 드러낸다.
'타락천사'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찰나의 만남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짙은 고독에 신음하는 <타락천사>의 무드는 하지무가 나오는 에피소드로 인해 살짝 달라진다. 킬러와 파트너, 하지무와 아버지, 킬러와 베이비, 하지무와 찰리의 에피소드가 뒤섞이다가 마침내 영화는 파트너와 하지무가 만나면서 끝으로 향한다. 하지무는 아버지를 잃고 찰리를 떠나보냈으며, 파트너는 킬러를 잃었다. 광각 구도에 갇힌 파트너의 뒤에 피를 흘리는 하지무가 있다. 상처받은 두 사람은 상실과 고독을 잠시 뒤로하고, 같이 오토바이에 몸을 맡긴다. 왕가위는 마지막에 두 사람을 이어준다. 상실의 흔적, 고독을 지우려는 몸부림, 오토바이 등이 두 사람 사이를 매개하면서 두 사람의 조우는 아슬아슬하게 잠시나마 지속된다. 인물 간의 만남이 짧게나마 유지되는 이 순간이 <타락천사>뿐만 아니라 왕가위 영화에선 특히 중요하다. 영원한 이별이나 영원한 만남은 없다. 우리가 <타락천사>에서 포착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건, 어지럽게 흩어지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아주 잠깐의 순간들이다. 따라서 터널을 빠져나오는 마지막 쇼트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오토바이를 타는 두 사람을 영원히 담지 않고 하늘로 향한다.
하지무는 <중경삼림>의 경찰 223과 묘하게 겹친다.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을 뱉는다든가, 파인애플 통조림에 관한 에피소드라든가. 223과 하지무를 연기하는 배우가 같다는 점 또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소소한 재미를 준다. 그렇다고 두 영화를 매개하는 이런 요소들을 가볍게 흘려보내기에는 어딘가 아까운 구석이 있다. 두 영화는 사실 한 편의 영화로 기획됐었다. 경찰 223과 마약 밀매상의 관계가 삐삐로 인해 강화됐던 것처럼, 하지무의 캠코더에 담긴 영상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유대가 강화되는 듯 보인다. 이때 인물과 매개물 사이의 실질적인 만남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삐삐 속 목소리와 캠코더 속 영상은 휘발되지 않고 남아 있다. 게다가 파트너와 킬러는 단골 바의 주크박스 속 음악(망기타[忘記他])에 의해 매개되기도 한다. 음악은 인물이 바를 떠난 뒤에도 계속 필름에 남아 킬러와 파트너의 상황적인 괴리를 강조하고 있다. 형식과 내용의 경계를 짓이기는 기묘한 매개가 펼쳐진다.
어쩌면 이 영화는 찰나의 만남을 매개하는 것들에 관한 영화가 아닌가. 하지무가 끊임없이 제공하는 아이스크림 덕분에 장발 남자의 가족이 한데 모여 잠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가족이 다 모여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은 아이스크림이 만들어낸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 이렇듯 클로즈업과 왜곡된 앵글을 동원하는 뒤틀린 표면의 탐닉은 피상적인 조우의 순간들과 스치는 만남을 담아내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휘발되는 순간들을 매개하는 몇몇 요소들이 이 영화를 표면과 심연을 넘나드는 매력적인 텍스트로 가공하고 있다. 왜곡된 듯한 표면적인 움직임과 심연 어딘가의 보존된 추억,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매개물을 통해 공존할 수 있다. 그래서 순간을 가두려는 스텝 프린팅 기법이 왕가위의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게 아닌가. <타락천사>는 그 표면과 심연을 오가는 움직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영화다. 스쳐가는 만남이 자아내는 자그마한 위안과 추억들을 잠시나마 머금으려는 솔직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원한 낭만도, 영원한 고독도 없이 오로지 찰나의 마주침에서만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이게 바로 <타락천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타락천사'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
- [JEONJU IFF 데일리] 결국 세상은 품위를 잃지 않을 것, <슬로바키아의 희망, 주자나 차푸토바>
민주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 흔히들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공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해진 세상이 왔다. 사람들은 기존의 것들을 복잡하고 지루한 것으로 여기고, 짧은 길이의 자극적인 콘텐츠들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조금 더 쉽게, 간단하게, 자극적으로 사람들의 귀에 메시지를 집어넣는지의 전쟁터가 됐다. 이 흐름에서 우리는 어떻게 품위있는 모습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품위는 지켜질 수 있을까. <슬로바키아의 희망, 주자나 차푸토바>가 보여주는 슬로바키아 정치의 모습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슬로바키아의 희망, 주자나 차푸토바
Ms. President
Cast
감독: 마레크 술리크
출연: 주자나 차푸토바
시놉시스
주자나 차푸토바는 위기에 처한 슬로바키아에서 5년 동안 더러운 정치판을 품위 있게 헤쳐 나가며 가장 신뢰 받는 대통령으로 자리 잡았다. 제작진은 5년 동안 그녀를 따라 다니며 밀착 취재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경쟁하는 고위 정치계에서 인간적이고 열린 접근 방식을 취하려고 노력한 한 여성에 대한 놀랍도록 친밀한 초상화.
<슬로바키아의 희망, 주자나 차푸토바>는 주자나 차푸토바라는 제5대 슬로바키아 대통령의 대통령 선출부터 퇴임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차푸토바는 진보 슬로바키아당 출신의 인물로, 정치계와 범죄 조직 간의 유착 관계를 밝히려던 얀이라는 기자가 암살당하면서 일어난 사회적 반발심을 업고 대선에 출마한다. 차푸토바가 출마하면서 내세웠던 핵심적인 가치는 ‘품위’였다. 민주주의는 품위로 지켜져야 하며, 품위 있는 정치가 바로 선 슬로바키아를 만든다는 것이다. 품위보다는 오히려 천박함, 수사적인 말들보다 쉽고 저급한 메시지들이 표심을 흔드는 현시대에 적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로바키아 국민들은 품위에 손을 들었다. 범죄 조직과 유착한 정치인들을 주류에서 밀어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5년, 그녀에게 대통령이라는 직위와 함께 심판의 시간이 찾아왔다. 영화는 대통령으로서의 차푸토바가 임기 동안 어떻게 일했는지를 다큐멘터리적으로 잘 담아낸다. <저항의 기록>에서는 서류철을 순서대로 꽂아 정리한 셈이었다면, <슬로바키아의 희망, 주자나 차푸토바>는 하나의 이야기를 잘 정돈한 것으로 느껴진다. 원제가 Ms. President라는 점에서, 여성 대통령이라는 특성을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낸 점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차푸토바는 민주주의의 품위, 품위있는 정치를 앞세워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정치권은 금세 차푸토바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한다. 모두가 예상할 법한 전개로 이어진다. 차푸토바가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해 ‘여론 흔들기’를 시작한다. 차푸토바의 정책과 노력의 방향에 오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정치권이나 음모론자, 미디어의 급부상으로 핵심 세력이 된 ‘사이버 렉카’들은 차푸토바가 여성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성적 모욕은 물론이고, 차푸토바가 한 가정의 어머니라는 점을 이용한다. 그들은 사저 앞에서 차푸토바 가족, 특히 자녀들을 향해 위협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만약 차푸토바가 남성이었다면, 정치권을 비롯한 속칭 ‘차푸토바 반대세력’은 이런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특히 성적 모욕에 관한 부분에서 말이다.
<슬로바키아의 희망, 주자나 차푸토바>는 그런 점에서 그녀의 임기 동안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로서의 가치를 지니면서도 여성이 정치권에서 겪는 고충을 잘 담아내기도 한다.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로 볼 수 있는 것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겪는 고난들을 기반으로 그 속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고충이라는 부가적인 이야기를 그 층위에 잘 쌓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원제와 시놉시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시피, 이 영화는 차푸토바의 대통령으로서 업적을 치하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여성이 할 수 있는 것들, 겪을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중점인 영화인 셈이다.
영화는 차푸토바의 인간적인 면들을 담아내는 데에 힘을 다한다. 나는 영화가 시작할 무렵에 스크린에 비쳤던 차푸토바의 미소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통령 당선이 유력해진 상황, 당선 소감을 밝히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인 모습이었다. 긴장한 모습과 은근한 부담감이 엿보이는 미소였지만, 그 자체로 그녀도 한 사람이었음을 단 1초 남짓한 시간에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유독 차푸토바의 임기는 순탄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임기 동안 사회적 고난들이 거세게 그녀를 향해 덮쳐왔다. 팬데믹이 찾아왔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LGBT 커뮤니티 일원이 살해를 당하는 테러가 일어났다. 고난이 연속으로 찾아오는 그 과정에서 영화는 차푸토바가 쉴 틈 없이 보좌관들과 끊임없이 일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는다. 보는 사람들마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상황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차푸토바는 대통령으로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녀를 여성으로서 무너지지 않은 것을 위대하게 평가하고자 하지 않는다. 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그녀의 강인함을 자연스럽게 영화로 녹여낸다. 여성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아닌 점은 메시지의 설득력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점이라고 본다. 최근 세계적으로 PC주의, 정치적 올바름에 싫증을 내고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점에서 그들에 일말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푸토바는 대통령으로서 그 강인함을 보여줬고, 슬로바키아의 희망으로서 일어섰다. 그러나 흔들기는 금세 그 효과를 보여준다. 내각은 투표를 통해 마피아 연루에 핵심이었던 피초 총리의 것으로 되어갔고, 대통령 또한 피초 총리가 대표로 있는 사민당 출신의 펠레그리니가 당선되면서 차푸토바의 후임이 됐다. 정치적 스캔들이 있었던 정당이었지만, 팬데믹을 계기로 정치적 격변이 다시 한 번 사민당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차푸토바는 그런 사회의 변화 속에서 재선을 바라는 지지자들에게 그녀의 가치를 재차 강조한다. 품위, 그것은 차푸토바를 만들었고 슬로바키아의 현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차푸토바는 업무 스트레스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퇴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희망의 메시지를 잃지 않는다. 차푸토바는 품위와 품격을, 상식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딛고 대통령이 됐다. 그녀도 퇴임 연설에서 그 사실을 강조한다. 세상은 결국 올바르게 돌아갈 것이다. 여성으로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닌, 국가를 위한 리더로서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차푸토바가 올라선 것처럼. 그리고 그녀를 대통령으로 임명한 국민의 높은 의식이 있기에. 상식은 지켜질 것이고, 품위는 그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차푸토바는 퇴임하면서 사민당의 그들을 지켜주기를, 존중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들도 민주주의라는 질서 안에서 기회를 얻었으니, 그들에게 품격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품위는 느리더라도 강한 힘을 가질 것이다.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차푸토바도 우리도 영화의 끝에 서서 다짐해야 한다. 세상은 결국 진보할 것이라는 것을.
상영 일정
2025. 05. 01(목) CGV전주고사 2관 13:30
2025. 05. 05(월) CGV전주고사 2관 13:30
2025. 05. 09(금) CGV전주고사 2관 17:00
전주국제영화제는 4월 30일~5월 9일 동안 개최됩니다. 자세한 일정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
- <캐롤>의 인물의 감정과 욕망을 구축하는 영화적 방법
Ⅰ. 서론
<캐롤>은 2015년, 감독 토드 헤인즈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화 <밀회(Brief Encounter, 1945)>의 장면과 형식을 오마주로 시작하는 <캐롤>은 로맨스 영화의 계보를 이어가 보이면서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는 감독의 의도와 다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1950년대 뉴욕에서 평범한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와 딸을 두고 남편과 이혼 소송중인 캐롤(케이트블랜챗)이 만나 서로에게 빠져들고 일반적이지 않은 사랑에서 감정적 혼란을 겪기도 하면서 사회적 시선들을 뒤로한 채,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테레즈의 성장드라마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작고 어린 소녀의 의상에서 숙녀로 성장한 듯한 의상들과 화장법. 캐롤을 통해 성숙해지는 테레즈. 프레임의 변화도 있다. 화면의 앵글 또한 테레즈를 양각으로 잡는 장면이 많아진다. 또, 영화 내용 면에서 테레즈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비교적 수동적인 인물에서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도적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내면과 외면의 모두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캐롤>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원작은 <The Price of Salt, 1952>로, 미국의 유명 스릴러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레즈비언 소설이다. 작가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주석-미국정신의학협회가 동성애를 사회병질적 인격장애로 분류한 1952년)를 감안하여 필명(클레이 모건)으로 출간하여 100만 부 이상 팔렸다. 주목할 점은 당시의 레즈비언에 대한 인식이다. 캐롤의 감독 토드 헤인즈는 영화 캐롤을 평범하지 않은 사랑의 이야기로, 사회적 마이너 그룹의 사랑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영화를 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i] <Velvet Goldemine>, <Far from Heaven>과 같은 감독의 전작들과 그의 커밍아웃도 작품을 관찰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이다.
<캐롤>은 영화의 주 인물인 캐롤과 테레즈 뿐만 아니라 캐롤의 남편 하지, 테레즈의 남자친구, 친구 등 주변인물까지의 욕망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이 자연스레 표출되는 감정들을 얼마나 잘 조절하느냐의 제한의 중요성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방과 함께 하게 되기까지 과정들에서의 미세한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적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감독이 인물들의 감정과 욕망구축의 표현방법을 살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캐롤>은 테레즈의 성장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제목이 ‘캐롤’인만큼 캐롤이 주인공 아니냐는 주인공의 대한 논란도 있었다. 이 또한 본고가 진행됨에 따라 연출적 분석을 통해 밝혀가도록 하겠다. 본고는 감독의 인터뷰만을 참고하여 필자가 영화를 분석하는 방향으로 분석을 수행한다. 감독이 어떤 영화적 방법들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욕망을 나타냈는지 분석한다.
Ⅱ. 본론
1. 색상으로 나타낸 인물들 개인의 욕망
영화를 보면 주로 적색과 녹색이 대비되는 듯하면서 어우러지도록 나온다. 영화의 시기적 배경이 크리스마스라는 점과 인물의 이름이 ‘캐롤’이라는 점에서도 두 색의 관계와 등장인물들의 관련됨을 떠올릴 수 있다. 감독은 인물의 욕망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인물에게 색상을 부여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물들은 본인의 욕망을 색상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가장 강렬하게 본인의 욕망, 색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캐롤이다. 우선, 캐롤은 첫 등장부터 거의 주로 적색의 의상, 또는 그런 소품들과 함께 화면에 나온다. 이는 캐롤의 욕망과 동시에 캐롤의 강한 캐릭터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캐롤의 평소의상>
캐롤은 영화 주 부분에서 적색의 의상을 입음으로써 그렇지 아니한 때의 감정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색상의 변화는 캐롤의 네일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진1>은 캐롤을 만나고 캐롤과 잠시 헤어지기 전까지의 캐롤의 네일 색상이다. 테레즈를 거리를 두고 서로를 전화와 같은 방식으로 소통할 때까지만 해도 캐롤의 네일 색상은 붉은 계열이다. <사진2>와 <사진3>은 캐롤과 떨어져있는 기간 동안의 캐롤의 네일 색상이다. 붉은 계열의 색상이 아닌 거의 하얀색이다. 캐롤의 네일 색상을 통해 테레즈와 완벽하게 분리되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진4>는 캐롤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 테레즈를 만나는 장면이다. 캐롤의 네일 색상으로 캐롤은 다시 본인 자신을 찾았음을 나타낸다.
테레즈의 색상은 캐롤만큼 명확하게 색을 나타내고 있진 않지만 주로 연한 색, 혹은 녹색 계열의 색을 띠고 있다. <사진5>를 보면 테레즈의 옷과 커튼이 연하게 푸른색을 띠고 있다. <사진6>은 캐롤과 떨어지게 된 후 본인의 집, 벽을 도색하는 장면이다. 색상이 없던 연한 색 벽에서 연하지만 녹색을 띠고 있는 색으로 도벽을 하며 본인의 색을 찾아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물들의 색상은 인물 자신의 감정과 캐릭터를 성명해주기도 하지만 둘의 관계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사진 7>은 테레즈가 캐롤과 여행을 가기로 한 후, 짐을 챙기는 장면이다. 테레즈는 적색 니트를 곱게 접어 넣은 뒤, 하얀 이너웨어를 가방 안쪽에 넣음으로써 여행에서의 캐롤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사진 8>과 같이 서로의 색이 바뀜으로써 서로의 감정적인 교류와 서로가 동화되어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캐롤과 테레즈의 첫 정사씬 직전의 <사진 9>장면에선 공간 전체를 적색 조명과 적색의 벽지로 둘로만 가득 찬 공간을 나타낸다
색상에 대한 추가적인 분석은 뒤에서 공간별 분석 시, 좀 더 분석하도록 한다.
2. 공간을 통한 인물들의 감정구축
백화점은 모두의 욕망의 공간이자 사회적 억압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테레즈가 근무하는 곳으로써 테레즈가 놓은 사회적 환경이라고도 볼 수 있다. 행사용 모자, 정부의 지시를 받는 경비원, 인형들에게 둘러싸인듯한 강압적인 분위기는 주인공을 억압하는 상황과 사회를 드러낸다. 또한, 백화점은 캐롤과 테레즈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소로 붉은 모자, 붉은 스카프, 붉은 립스틱,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미지의 캐롤이 백화점 직원인 테레즈와 극명한 대비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
캐롤과 테레즈의 첫 사적인 만남의 장소인 레스토랑은 캐롤의 욕망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캐롤의 붉은 옷이 겉옷으로 가려져 있고 인물들의 주변인 의자와 메뉴판, 전체적인 느낌인 적색을 띠고 있다. 이를 통해 캐롤은 테레즈를 본인의 욕망으로 만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캐롤의 욕망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의 욕망을 발현해보려는 테레즈와 사랑의 욕망을 발현해보려는 캐롤이 대비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캐롤의 집에선 캐롤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은 하지의 욕망도 드러난다. 부러진 크레파스를 붙인다던가, 싱크대를 고치다가 본인의 의도대로 되지 않음에 분노하기도하며 욕망을 드러낸다. 캐롤의 집은 캐롤의 딸 린다를 향한 욕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캐롤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하지와 캐롤의 대화 중 가정부를 화면에 잡음으로써 사회적 시선에 대한 캐롤의 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캐롤과 테레즈가 자동차를 타고 터널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자 중요한 감정선을 영화적으로 잘 나타낸 장면이다. 자연적인 배경 사운드를 없애고 드라마틱한 빛과 어둠의 과장으로 인물들의 감정을 구축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강조한다. 또한, 푸른 빛의 라이트를 이용하여 테레즈의 감정도 명확해져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호텔은 캐롤과 테레즈 둘의 공간이다. 그러한 호텔의 외부와 내부를 조명의 대비로 차갑고 냉정한 현실과 따듯한 그들만의 세상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이러한 공간들은 캐롤의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른 호텔 씬에서 캐롤과 테레즈를 보여주기 전에 벽에 하지와 캐롤의 딸 린다를 떠올릴 수 있을만한 사진을 걸어두어 캐롤이 집을 벗어나도 하지와 린다(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러한 연출들을 통한 감정구축을 한 덕분에 후에 캐롤의 선택에서 관객들이 캐롤의 감정을 증폭시켜 느낄 수 있게 한다. 또, 영화가 테레즈의 성장이야기로도 볼 수 있을만큼 테레즈는 캐롤을 만나면서 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의 테레즈 <사진 10>와 영화의 후반부의 테레즈 <사진 11>의 의상이라던가 화장법에서 차이가 나는데 호텔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들을 보여줌<사진 12>으로 테레즈의 성장이 캐롤의 영향이었음을 나타낸다.
테레즈와 떨어진 후, 캐롤은 하지와 시댁에 가는데 이곳에서도 감독은 캐롤의 감정을 서서히 구축한 후 증폭시킨다. 인물들이 잡히기 전, 정치적 내용의 TV를 계속 보여줌으로 시대적 억압을 보여준다. 캐롤의 시선과 시댁보다 웨이터에게 더 밝게 웃어줌으로써 캐롤이 그 자리를 불편해하고 어울리지 못함을 나타낸다. 캐롤의 주변을 막고 있는 답답한 구도의 앵글과, 캐롤의 목과 잔마다 둘러져 있는 금색 띠를 통해 억압받는 캐롤의 상황을 관객들에게 더 긴장되게 만든다. 이런 감정들이 구축한 후 린다를 만나는 장면으로 캐롤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린다를 안고 다시 실내로 들어가려는 캐롤과 시댁을 밝은 조명과 어두운 조명으로 한번 더 대비시킨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장면들 중 캐롤이 친정에 가는 장면은 가장 복합적인 연출이 담겨있고 하나의 씬 안에서 감정의 증폭이 가장 잘 나타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의 장면은 위치선정에 의해 권력관계를 표현한다. <그림 1>을 보면 위치적 우위는 이미 하지의 우위를 나타내주지만 캐롤이 화살표와 같이 이동을 함으로써 주도권을 잡는다. <사진 13> 참조. 정에 온 캐롤은 붉은색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고 앵글 또한 특이하다. 기본적으로 쓰이는 방식이 아닌 방법으로 법정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 긴장감을 높였다. <사진 14>참조. 장면에서는 다른 장면들에 비해 긴 대사로 주제를 배우의 입에서 풀어내는데, 진부할 수 있는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스테이징이라던가, 화면적 효과, 배우들의 연기력 등으로 감정을 구축해놓고 실행함으로써 전달력이 있는 장면으로 만들었다.
캐롤과 테레즈가 재회하는 레스토랑 장면에선 레스토랑 바닥의 적색과 하얀벽의 조화로 캐롤(적색)과 테레즈(하얀색)이 동등해짐을 보여준다. 캐롤의 의상에서도 적색이 많이 빠졌고 테레즈의 의상도 진하게 하였다. 꽃으로 비교적 앵글이 안정적인 캐롤과 주변을 비워 공허한 테레즈, 인물의 상태가 드러나도록 구도를 잡았다.
3. 영상표현을 통해 나타낸 감정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장면을 인상적이고 파격적으로 봤을 것이다. 캐롤을 찾아 캐롤의 친구 애비를 찾아갔는데 애비의 차가운 태도와 자신의 대한 캐롤의 입장을 듣고 절망적이고 불안한 하지의 상태를 화면이라는 큰 프레임 속의 작은 프레임을 통하여 나타냈다. 이와 비슷하게 막히는 도로와 빽빽한 뉴욕의 건물들을 통해 캐롤의 복잡한 속내를 표현하였다.
그런 반면, 공허한 인물의 감정을 나타낸 장면들도 있다. 넓고 조용한 거리를 인물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잡아 인물의 텅 비어있는 내면과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보여지고 싶지 않은 인물의 감정을 표현했다.
비슷하게 캐롤과 테레즈가 여행을 떠나고 차안에선 둘만의 애정을 나누지만 밖의 도로는 말라 비틀어진 도로를 잡아 현실과 대조됨을 나타냈다.
영화를 보면 <사진 15>와 같이 인물을 한쪽 귀퉁이에 몰아넣은 듯한 느낌을 받을 만한 장면이 꽤 많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러한 구도를 통해 서로의 옆자리가 비어있음을 통해 외로움을 나타내고 합리화 시키고 있다. 테레즈와 캐롤이 만나기 시작한 후엔, <사진 16>처럼 소품 등으로 빈 공간이 채워져 있음을 나타냈다.
영화에서 감독은 프레임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나누기도 한다. 캐롤과 테레즈가 떨어지고 캐롤이 테레즈를 그리워하던 중, 캐롤은 우연히 택시를 타고 가다 테레즈를 본다.
캐롤이 테레즈를 보는 시선을 흔들리게 촬영하고, 테레즈를 건물의 벽에 의해 의해 사라졌는데 캐롤은 택시 창문의 마지막 필러에까지 들어가면서 테레즈를 보려고 한다. 테레즈가 인파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단절됨을 극화시켰다. 이런 식으로, 차의 필러라든가 창문의 창살을 이용해 프레임을 나누고 그 안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인물의 감정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비교적 자주 표현하고 있다.
캐롤의 집에서는 벽을 통한 프레임으로 테레즈의 입장에서 다가가기에 쉽지 않음을 표현했다.
캐롤과 애비의 장면에서는 화면에 다른 뭔가가 함께 나온다던지 답답한 앵글로 당당하지 못한 그들을 나타냈다. 대화하고 있는 둘을 불빛으로 비추면서 대화가 끝나는 것으로 범죄자들과 라이트의 관계를 나타냈다.
비슷하게 캐롤이 테레즈에게 여행을 제안하면서 카메라를 선물하는 장면에선 화면에서 인물들이 일부만 나올 정도로 화면을 일부만 할애하여 찍었다. 당당하지 못한 사랑의 시작을 나타냈다.
전화하는 장면에서는 서로 마주보는 듯하게 장면을 연결하여 캐롤과 테레즈의 대비와동시에 그리움을 나타낸다.
4. 상징적인 표현들
종종 주변의 인물, 제 3자들은 비춰 인물이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감독은 소품들을 이용하여 서로에게 서로가 물들어감을 나타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캐롤이 맥주를 병째로 마심과 동시에 테레즈는 전용 잔에 담아 서로 건배를 한다. 또, 초반에는 담배를 잘 피지 않던 테레즈가 캐롤을 만나고부터 흡연자가 되도록 하였다.
배경이 겨울이다 보니 눈이 오는 것이 당연할 수 있지만, 감독은 눈을 이용하여 같이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였을 때, 둘이 여행을 떠났을 때와 같이 인물들의 깊어지는 감정을 나타냈다.
테레즈는 영화에서 포토그래퍼로 나오는데, 인물사진은 찍지 않던 테레즈가 사진의 대상이 사물에서 사람을 찍어 테레즈의 성장이라고도 보여주고 테레즈의 욕망의 대상이 캐롤이라는 것도 보여준다.
영화의 맨 시작부분에서 모형기차가 돌아가고 작은 모형 기차이지만 관객들이 실물 크기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안에 있는 것처럼 엄청 크게 잡았다. 그리고 남색 사람 모형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기차가 지나간다. 이것을 복선으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테레즈가 캐롤을 만나러 가려고 발걸음을 돌릴 때, 기차소리가 난다. 장난감 기차의 작동을 켠 후, 그것을 바라보는 테레즈와 백화점을 오픈시키고 캐롤이 등장하여 실수로 그 장난감기차의 버튼을 건드려 기차를 세운다. 그렇게 캐롤과 테레즈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기차에 대해 ‘달리는 기차는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진행되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라고 말한 적 있다. [ii] 원작 소설인 <The Price of Salt>에선 캐롤이 인형을 사가지만 영화에선 캐롤이 기차를 사간다. 그런 점에서 감독은 기차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고 <캐롤>은 하나의 달리는 기차와 같은 이야기다.
Ⅲ. 결론
감독은 욕망과 감정구축의 표현에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덕분에 이러한 감정과 욕망구축의 표현들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인물들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크게 전달 할 수 있었다. 한템포 쉬고 연기를 한다던가 배우들의 연기도 감정강조에 큰 역할을 한다. 감독은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감정을 구축시키고 증폭시키는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비교적 교과서적인 방법보다는 새로운 방법들을 많이 사용했다. 그로 인해 중요한 부분들을 더 강조 할 수 있었다.
토드헤인즈 감독의 전작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다소 있었지만 <캐롤>은 시청을 거듭하며 볼수록 경이로웠다. <캐롤>은 다양한 부문에서 상을 받은 만큼 다양한 부문에서 섬세한 연출이 느껴지고 한 장면 장면, 단 하나도 의미 없는 연출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섬세한 연출과 인물들의 감정이 영화적 표현으로 나타난 영화이다. 다양한 영상표현방법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있다. 분석을 하면서도 빠져들 수 밖에 없었고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영화의 표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Closer
이 매혹적인 영화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캐롤과 테레즈가 마셨던 올리브 넣은 마티니를 따라서 마시고 테레즈가 쓰던 수첩에 글을 적는다면 어떨까.
한창 <캐롤>에 빠졌을때의 내 모습을 보니 갈색 털코트에 노란색으로 탈색한 단발머리였다. 당시엔 너무 달라서 생각도 못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캐롤을 어렴풋하게 무의식적으로 따라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좋아하는 영화를 곱씹으며 체험하는 것은 영화팬으로서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혼자서만은 영화의 세계를 실현시키는 것이 어려웠지만 배급사 하이스트레인저의 클로저가 영화 속의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스크린 밖으로 꺼냈다.
상영회가 끝나고 마티니 한잔과 함께 <캐롤>의 굿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위의 굿즈를 포함한 다양한 상품들은 온라인 및 오프라인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굿즈를 설명하는 담당자님에게서 영화를 향한 진한 애정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앞으로의 상영회도 기대가 된다. #클로저상영회
*본 상영회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i]
Sight & Sound.
토드 헤인즈 인터뷰
[ii]
Sight & Sound.
토드 헤인즈 인터뷰
-
-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난 강박증이 있다. 이 덕에 일상생활에서 애먹는 부분이 많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10년 전 고등학생 친구의 이름을 기억한다던가. 친구의 전 근무지를 기억하고있다던가. 주변인들 반려동물 이름 기억하는건 일도 아니다. 이렇게 세세하게 무언가를 기억했을때 따라오는 단점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 기억하기 싫은 것들도 강박이 되어 계속해서 생각난다는것이다. 필요할때 무언가에 집중을 못하는건 되게 귀찮은 일이다. 사람들과 말하다가도, 비행기를 타더라도, 맛있는걸 먹을때도 내 시간을 오롯이 못쓴다. 두번째.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 고3때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에 대해 일일이 다 기억했다가 한꺼번에 '선생님은 멋져요'라고 말한 적 있다. 그러고 나서 크게 혼났다. 누군가의 자그마한 사실이라도 다 기억하고 있거나 알려고 한다는게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한다는걸 그때야 알았다. 얼핏들으면 사생활의 모든걸 알려고 든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 굳이 이런 사람이란 인식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내 머릿속은 내 삶을 바꿔놨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 머릿속에서 음성이 들린다거나 했던 적은 없다. 요즘에서야 강박증에 대해 주변에 말한다.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니까. 내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걸 앓는게 아니잖아?
되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땐 선을 지켜야한다. 생각이 많아질때의 나를 설명하면 이해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행히도 요즘은 그런 편견이 많이 없어져서 강박증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적다. 요즘 공황장애라던가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유명인들이 많아져서도 좋은 영향인 것 같다. 내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는 경우가 많이 줄어서인것도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물론 몇년 전에는 주변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도 있었다. 이 때 생각하면 굉장히 부끄럽다. 그래도 나는 이 병 때문에 삶에 엄청나게 지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이 덕에 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쉬워졌다. 어차피 인생사가 맘대로 되는건 아니니까. 나처럼 자기 의지랑은 상관없이 머릿속이 복잡해질때가 사람에게 언젠간 온다. 그럴 때를 알아서인지 가끔 지나가다 인터넷에 뜨는 사연들이 남 이야기 같지 않다. 내 기억의 어느 순간을 꺼내오는 것 같았다. 저 사람도 저러고 싶지 않았을텐데. 뭐 그런 기분이 먼저 든다.
<더 파더>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안소니 홉킨스가 주인공 '안소니'로, 올리비아 콜먼이 딸 역할로 출연한다. 플롯은 간단하다.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내는 돌아가신 것으로 보이고, 작은딸은 왠지 집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안소니는 거의 대부분 혼자다. 아버지로서의 삶을 보냈던 주인공은 딸이 없다면 기댈 곳이 없다. 사람이 외로울 때 말 걸면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한다. 작은 딸 루시의 이야기부터 간호인에 대해 '나는 돌볼 곳이 없다'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또 입어가며 병마와 싸운다. 영화는 타인들과 별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다른 작품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
영화는 플롯을 비튼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치매의 애환이 그대로 담겨진다. 내 딸이 딸인건 맞나. 딸의 남편이 사별하지 않았나. 이런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영화에 담긴다. 딸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두명으로 배치한다. 또 있다. 초입부 시계를 잃어버렸다고는 말하지만 뭐 하다 놓쳤는지에 대해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왜? 안소니는 어차피 시계를 잃어버린 기억 자체가 없거든. 안소니가 시계를 잃어버린걸 장면으로 보여주면 '이래서 잃어버린 것 아니냐'를 보여주는 셈이 되어 그에게 책임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안소니가 겪는 일들이 병으로 인한 현상 자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거다. 이 점에서 내가 뽑은 각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없다'라는 기억을 관객들에게 와닿게 하고 싶어서였을거라고 생각한다. 안소니에게 없는 기억이 이것만일까? 딸이 누군지. 작은 딸은 어떻게 지내는지. 딸이 이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뭐 그런 것들이 아버지 안소니에겐 중요했을거다. 분명한 사실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는 후반부의 이야기다. 초중반부는 무엇이 정답인지를 ?치고 미스터리로 극을 끌고간다. 어차피 감독은 관객에게 무엇이 사실인지를 말해주고 싶은 의도가 없었을거다. 치매 환자들에게 중요한건 '기억하고 싶은건 잊어버리고, 기억하기 싫은건 머리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이런 치매의 성격으로 인한 머릿속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연출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플롯이 혼란스러운 이유만큼이나 치매환자들과 주변인들이 왜 더 존중받아야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어쩔 수 없다.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는 것일테니까.
세상에 존중받지 말아야 할 인간은 없다. 심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강박증으로 특이한 행동을 해봤어서 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며 어느 순간의 내가 생각났다. 또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져야한다는걸 느꼈다. 이런 기분이 든 <더 파더>는 참 좋은 영화다. 주인공 안소니 홉킨스가 '양들의 침묵'보다 더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이유가 있다.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가 생각나는 연기였다. 엔딩신이 주는 묵직함이 어마어마한데, 나는 이 영화를 보려고 기대중인 분들에게 끝부분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좋은 영화였다.
-
- 우산과 낙하산과 시간
나는 홍콩을 딱 한 번 가보았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내식을 4번씩 먹으며 두 번의 경유를 거쳐 아프리카 남단을 일주일 만에 왕복하는, 짧고 굵은 여정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경유 시간이 떠서 홍콩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홍콩 공항을 종종 경유했지만, 공항 바깥으로 나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별유천지가 따로 없었다. 왜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라는 가사가 나왔는지 피부로 이해했다. 시간이 먼지처럼 소복소복 쌓인 골목은 어디를 툭 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스며 나올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양조위나 장국영이 고개를 내밀 것만 같은, 바라보면서도 더 바라보고 싶은 골목들이었다. 꼭 다시 와야지 생각했다. 밀크티 마시며 이 골목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참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몇 달 후. 홍콩은 당분간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페이스북 담벼락 기본 문구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깜빡깜빡, 빈 곳을 응시했다. 바라보고 싶었던 골목 대신. 삶의 아귀가 맞지 않는 기분이 들 때마다 열어보던 홍콩 영화들 대신. 우산과 까만 마스크, 거리에 나서면 누구나 닮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영화제마다 다큐멘터리에 홍콩 이야기가 있는지 둘러보며, 조각조각 찾아 헤맸다.
같은 질문을 품어 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2022년 10월 13일 국내 개봉한 다큐멘터리 <시대혁명>이다.
주제의 무거움에 한 번, 152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또 한 번 멈칫하게 될 이들을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당신을 무거운 감정 안에 혼자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폭력을 목도하게 될까 봐 멈칫하겠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것은 오히려 희망이었다. 홍콩에 대해서도, 시대에 대해서도.
시대혁명 속으로
거친 상황을 담은, 강렬한 포스터의 영화지만 당신에게만큼은 참 친절한 영화일 것이다. 152분의 러닝타임은 여러 챕터로 나뉘어 있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매우 적절한 소제목과 함께 각 장이 똑똑하게 분절되어 있다. 홍콩 상황을 잘 몰라도 충분히 씹어 삼킬 수 있도록, 한입 크기로 잘라 준다. 친절한 가공을 잔뜩 거쳤음에도 너무나 생생해서, 잠시 2019년 홍콩으로 시공간 이동을 하는 기분마저 들게 만든다. 연대하는 마음 외에는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였는데, 너무나 훌륭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2019년 홍콩에서 '범죄인 인도법'을 계기로 일어난 시위를 담았다. 홍콩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중국으로 송환되어 재판받게 된다는 조항은, 당시 들려오던 수많은 의문사와 실종 사건들과 맞물려 공포를 자아냈다. 홍콩 사람들은 최루액에 우산으로 맞섰던 2014년 '우산 혁명'을 기억하며 다시 거리로 나선다. 영화는 2019년의 거리와 홍콩 사람들을 촘촘하게 담아낸다.
지도부가 없음에도 시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착착 찾아낸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각자의 직업을 선택하듯이. 시위가 진행하면서 변해가는 상황에 이들이 얼마나 유동적으로 움직이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얼굴과 이름을 가리고 나오지만, 그들의 생각과 역할과 의미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던 이들을 한 명씩 만나게 된다.
버스도 지하철도 끊긴 도시에서 시위 참석자들을 집에 들여보내는 '승용차 부대', 시위 최전선에 서는 이들을 돌보는 '엄마'와 '아빠', 전경의 위치와 최루탄 정보 등을 파악해 전달하는 '감시 부대'... 시위 안에서의 역할 차이는 물론 시위 바깥에서도 체계적으로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만약 모든 것이 죽는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 누구의 행동과 말에 당신의 시선이 가장 깊게 머물렀을지 궁금하다. 돌아보면 나는 세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70대 노인 '찬 아저씨Uncle chen'. 그는 수십년 째 농부로 살아왔는데, 아이들이 죽어가고 끌려가는 걸 더 볼 수 없어 길을 나섰다. 경찰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너희가 들어가야 나도 들어간다"며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다른 노인들과 손을 맞잡고 경찰의 폭력을 막는다. 종내에는 경찰이 그의 노구에까지 손을 올리면서 더 이상 시위에서 '전력'이 되지 못하지만,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을 하는 노인의 존재에는 큰 울림이 있다. 더불어 홍콩을 향한 중국의 야욕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존재했는지도 살짝 보여준다. 중국은 주민들이 농사짓던 땅을 아무 합법적 절차 없이 집어삼키고 쫓아냈던 것이다.
14살 소년 모닝Morning. 그는 알레르기가 있어 최루 가스를 조금만 맡아도 기침이 나오는 몸이고 아직 어리지만, 구조대로 시위 현장을 뛰어다닌다. 최루 가스 때문에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결연한 얼굴로 제 방독면을 벗어 씌워주고 함께 안전한 곳으로 뛰어가는 모습은, 아직 어리지만 곧고 힘차다. 한국 웹사이트에도 영상이 퍼졌던, 경찰이 지하철 속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때리던 그 현장에도 그는 달려갔다. "총을 쏘든 때리든 다 맞겠으니 사람만 구하게 해달라"고 엉엉 우는 그의 모습을 보기 괴롭고 속상했다. 구조대를 막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이지만, 홍콩 경찰은 국제법과 관례를 어긴 지 오래다. 그러나 다시 그는 여전히 올곧은 눈빛이다. 그는 아마도 조슈아 웡처럼 자랄 것이다. 단단한 신념을 뿜어내는 눈으로
마지막으로는 영화에서 많은 인터뷰를 했던, 사회복지사 중년 여성 재키. 상황을 차분하게 조망하고 움직인다. 얼굴이 벌게진 백인 남성이 삿대질하며 "너희가 홍콩을 다 망치고 있다. 부동산도 경제도 망치고 있다!"고 천박한 욕 섞어가며 소리치는 앞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법 없이도 살 사람 같은 표정이지만, 시위 현장에 늘 서 있다. 그 차분한 시선으로 본질을 진작에 꿰뚫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죽고, 자유가 죽은 땅에서는 사회복지사도 없다고. 그 땅에는 인권이란 게 없을 테니까. 자유가 없는 땅에서는 돌봄도 죽는다. 그 지적은 '좋은 것이 좋은 것' 식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찌른다.
써놓고 보니 나는 '맞서 싸우는 힘'보다 '살리는 힘'에 마음이 기우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살리는 힘은 싸우는 힘과 연합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죽은 땅에서는 아무것도 살릴 수 없을 테니까. 죽이는 힘에 맞서야만 살릴 수 있을 테니까. 바로 그 마음으로, 흙을 바라보며 살아온 노인이, 단단한 눈빛의 소년이, 법 없이도 살 얼굴의 사회복지사가, 시위 현장에 서 있다.
우리의 무기, 기록과 희망
승산이 높지 않았다. 2019년의 시위는 결국 끝났다. 다만 흔한 역사 속 시위들처럼 '지도층의 내분' 같은 건 없었다. '지도층'조차 없이, 물방울 같은 각자가 모여 강처럼 흘렀을 뿐이다. 화염병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라서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던 (당연히 기름이 다 흘러 못 쓰게 되었다) 아이가 화염병을 던지게 하고, 구글 맵을 볼 줄도 모르던 아이가 지도로 경찰 정보를 보내는 첩보 작전을 펼치게 만든 홍콩 경찰은 마침내, 시민들을 전쟁 상대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캐리 람을 죽여도 또 다른 캐리 람이 나타날 테니 결국 보통 선거권을 쟁취해야 하는 싸움임을 똑똑하게 인지하고 있는데.
경찰은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사람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았다. 시위를 무력 진압하다 못해, 일반적인 국제관례를 어기고 퇴로까지 차단하고 정말 몰살시킬 각오로 공격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잔인하게 짓밟았다. 영화가 잔인한 장면을 자주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홍콩 경찰은 정말 잔인했다. (여담이지만 SNS에 홍콩 경찰 지지 의사를 올렸던 수많은 중국인 아이돌들이 떠올라 또 화가 났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돈 벌면서 최소한의 상도덕도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걔네가 지지한 게 이거라고요?)
시위의 마지막 순간은 홍콩 이공대를 배경으로 한다. 퇴로를 차단하고 시위대를 몰아세우는 홍콩 경찰 앞에서, 시위대에게 남은 길은 죽음 혹은 10년 징역형밖에 없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시민들이 움직이고, 수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내지만, 경찰은 동일한 스탠스를 유지한다. 수천 발의 최루액과 물대포로 사람을 날리고, 총을 쏘고, 끝내 아이들을 무릎 꿇리고, 구타하고, 질질 끌고 가고...
그렇게 홍콩은 국제 사회에서 조금 잊힌다. 미얀마에서도 괴로운 일이 생겼고, 우크라이나에도 전쟁이 났으며... 중국의 굴기는 계속되었다. 2020년에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을 시행했고, 가까운 시일 내에 대만을 무력으로라도 통일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고, 한국 문화와 역사에도 자꾸 손을 대서 우리를 불편하게 또 긴장하게 한다. 이 상황에서 우리 뇌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홍콩의 인상은, 진압되기 전 마지막으로 홍콩 이공대 벽에 누군가 남겼다는 짧은 편지다.
세상 사람들에게
중국 공산당은 당신의 정부에 침투할 것이고
중국 기업은 당신의 정치적 입장에 간섭할 것이다
위구르족에게 한 짓처럼
당신네 나라를 털어먹을 것이다
정신을 똑똑히 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당신 차례가 될 테니까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훗날 홍콩 역사에 아마 2020년에서 2022년 사이는, 2019년이나 우산 혁명의 2014년보다 고요하게 기록될 것이다. 사실 그래서 본 영화였다. 어둠 속에서 연대하는 마음으로. 최루액에 맞서는 우산을 함께 받치는 마음으로, 의문의 추락사로 사라진 이들에게 낙하산을 달아주고 싶었던 마음으로.
그런데 정작 내가 등장인물들의 우산 아래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10년 징역형을 받고 나와도 아직 이십 대 혹은 삼십 대라고 말하며 웃는 얼굴들. 또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더 잘 싸울 거라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들. 변조와 모자이크를 뚫고 여기까지 전해지는 그들의 생생한 에너지가, 젊음이, 푸른 꿈이 기묘한 희망을 주었다.
하긴 그렇다. 비루하고 추레하게 제국을 바라는 이들은, 푸른 자유를 꿈꾸는 이들보다 먼저 죽을 것이다. 아무리 경찰이 총을 쏘고 쇠봉을 휘둘러도 모든 시민 모든 아이를 죽일 수는 없으므로. 모든 관례를 부술 만큼 비겁해지지 않고서는 싸울 수도 없었던 그들과 달리, 시위대에 있던 이들은 모든 희생과 고민과 절망을 다 끌어안고도, "우리를 기록해 주세요"라고 울먹이면서 말하고도, 여전히 싸울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끝난 어둠 속이 아니라, 신발 끈을 다시 매면서 장기전을 바라보는 휴지기의 어둠 속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홍콩에 우산을 받쳐줄 수도, 낙하산을 달아줄 수도 없는 우리지만, 단 하나 희망의 시간만큼은 함께 보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 안에 있으므로. 힘들어하면서도 함께 지켜볼 것이다. 우리의 무기는 기록과 희망이고, 그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면 공유를 통해 힘이 부여된다는 점이니까. 전작에서 우중충한 향후 10년을 상상하며 <10년>을 만들었던 감독이 앞으로 새로운 <10년>을 상상해 펼칠 날을 기대하며, 촛불에서 촛불을 옮기듯, <시대혁명>으로 작은 힘을 함께 나누어 본다.
-
- 선택과 집중이 확실한 퇴마 판타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건에 천만 원씩 받고 가짜 퇴마극을 펼친다고 알려진 사기꾼 퇴미사 '천박사'(강동원). 여느 때처럼 특수효과 기술자 겸 유튜버인 '인배'(이동휘)의 도움을 받아 가짜 퇴마를 펼친 그에게 귀신을 보는 눈을 지닌 ‘유경’(이솜)이 찾아온다. 거액의 수임료를 제안한 그녀의 요구는 단 하나. 자기 여동생 '유민'(박소이)에게 붙은 귀신을 떨쳐달라는 것.
이번에도 가짜 퇴마극을 준비하던 천박사. 그러나 그는 곧 다른 기운을 감지한다. 귀신을 만나면 울린다고 알려졌지만 평생 울린 적 없는 방울이 울린 것. 그와 동시에 천박사는 무당을 사냥하는 악귀 '범천'(허준호)에게 습격당한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그에게 인배와 '황사장'(김종수)은 사건에서 손을 떼자고 제안하지만, 천박사는 다른 마음을 먹는다. 그간 애써 외면한 과거를 마주하고, 당주 무당의 장손으로서 악귀와 싸우겠다고.
웹툰 실사화의 딜레마
웹툰 원작 작품을 영화나 드라마로 옮길 때 항상 같은 딜레마가 있다. 바로 '톤'이다. 웹툰은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인 톤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원작을 지나치게 충실하면 작위적이거나 오그라들기 십상이다. 반대로 그렇다고 원작 색채를 과하게 빼 버리면 팬덤의 불만을 산다. 웹툰 원작 작품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와중에도 눈에 띄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지 않은 이유다.
<기생충>과 <헤어질 결심> 조감독 출신인 김성식 감독의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는 위 딜레마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후렛샤 작가의 '빙의'를 영상화한 이 작품은 철저한 선택과 집중의 미덕을 보여준다. 웹툰 느낌을 살린다는 목적을 위해 장르, 캐릭터, 볼거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질주한다. 뛰어난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은 없다. 그리고 그 계획은 결과물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가능한 신선하게 비트는 노력
<천박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개성은 장르다. 장르 자체가 신선하지는 않다. 몇 년 사이 오컬트나 퇴마물은 대중적으로 익숙해졌다. 최근 방영된 SBS 드라마 <악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형 오컬트'를 표방하는 작품이 꾸준히 제작됐다. 달리 말해 마을의 서낭당을 지키는 무당인 ‘당주무당’, 충청 지역 앉은굿에서 사용하는 무구 '설경'이라는 소재만으로는 확실한 차별화가 어렵다.
대신 <천박사>는 장르 자체를 변주한다. 우선 다른 오컬트 영화에 비해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취한다. <검은 사제들>, <사바하>, <곡성> 등 많은 오컬트 영화는 '신적인 요소가 실재한다면? '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전반적으로 어두운 톤을 유지한다. 그에 반해 <천박사>는 초반부터 <기생충>을 패러디한 도입부와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당의 사기극 같은 코미디를 적극 활용한다.
특히 코미디는 분위기 환기 이상의 용도로 영리하게 활용된다. 웃음은 <천박사> 세계관으로의 초청장에 가깝다. 웃음 포인트를 주로 인배가 맡기 때문. 극 중 인배는 천박사, 유경, 황사장과 달리 혼자만 무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영화는 이들의 괴리감을 주로 유머의 소재로 삼는데, 관객이나 인배나 처지가 다르지 않다. 그러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인배만 따라가도 <천박사>의 판타지에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 있다.
오컬트 영화의 일반적인 전개를 피해 가기도 한다. 퇴마물 주인공은 주로 희생자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악귀와 질긴 싸움을 펼친다. <천박사>는 다르다. 유민에게 퇴마 의식을 진행하는 천박사. 그런데 이때 악귀 범천의 선택이 흥미롭다. 그는 유민 대신 유경에게 곧장 달려든다. 또 그녀의 눈을 갖기 위해 여러 사람의 몸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천박사를 습격한다. 이 순간부터 <천박사>는 본격적으로 액션 활극을 펼쳐 보일 수 있다.
최소한의 설명
이처럼 각 장르의 장점만 모아 관객을 현혹하려면 내용을 최대한 압축해야 한다. 영화 내 설명이나 묘사가 간단하고, 빠르고, 가벼워야 한다. 진득하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상이한 장르 간의 충돌로 인해 단점만 부각될 수 있으므로. 실제로 <천박사>는 미묘한 불협화음을 알아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려 한다.
핵심 소재인 설경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자막 한 줄로 모든 설명을 대신한다. “설경은 귀신을 협박하고 잡아 가두기 위해 경문과 문양을 한지에 조각한 부적이다.” 어떤 효과가 있고, 언제 사용해야 하고, 누가 쓸 수 있는지와 같은 자세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소재와 설정에 대한 설명도 단순하기는 매한가지다. 당주 무당의 역할, 손가락을 잘라서 만드는 주문의 정체, 범천이 무당을 사냥하는 궁극적인 목적, 칠성검에 깃든 힘... 하나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소재이지만, 영화는 이 모든 것을 단순히 보여준다. 유경에게 신비한 눈이 있는 이유, 천박사에게 신기가 깃드는 묘사에 대한 설명도 없다.
내용 전개도 직선적이다. 천박사가 범천의 존재를 인지한 후 곧장 클라이맥스로 넘어가는 인상을 준다. 선녀 무당이라는 카메오를 활용해 '기승전결' 중 '승'을 생략하다시피 한다. 그 덕에 너무 단순한 장치들과 파훼법 같은 지점들이 여러 의구심이나 고민으로 떠오르기 전에 끝내버린다.
선택과 집중이 확실한 캐릭터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박사> 속 인물의 서사는 복잡하다. 풀어내야 할 내용이 적지 않다. 천박사의 집안 내력, 범천의 음모, 유경과 마을 주민들의 비극이 한 데 얽혀 있다. <천박사> 속 세계에 대한 설명도 필요로 한다. 여기에 중간중간 액션까지 곁들여 주려면 98분이라는 러닝타임은 꽤 촉박해 보인다.
이 대목에서도 <천박사>는 철저힌 선택과 집중을 보여준다. 모든 플롯을 천박사 중심으로 배치하면서 분량을 조절한다. 천박사의 개인사를 풀어낼 때 범천을 도우미로 이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의 집안과 범천의 악연을 보여주면서 두 주인공의 서사를 동시에 풀어낸다. 이에 더해 천박사의 할아버지와 동생을 단순한 희생자, 피해자로 설정하면서 영화를 전반적으로 단순한 복수 서사 내에 위치시킨다.
유경의 개인사도 과감히 생략한다. 그녀는 사건의 발단이 되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는 유경을 단순히 범천이 노리는 목적,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다루지 않는다. 그녀는 상황에 이리저리 휩쓸릴 뿐,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녀의 부모, 그녀와 마을 주민들의 관계, 범천이 마을 주민들을 악용한 방식 등도 퇴마 판타지다운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기 위한 배경으로 소비된다. 철저히 플롯의 도구일 따름이다.
몰입은 되지만 폭발력은 없다
초중반부까지는 <천박사>의 선택이 적중한다. 코미디, 오컬트, 판타지, 액션 모두를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다. 문제는 후반부다. 이전까지의 선택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화려한 CG가 천박사와 범천을 감싸고, 비장한 검투씬이 등장하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다. 물론 강동원이 기본적으로 액션을 잘 소화하는 배우인 관계로 액션을 보는 재미는 있다. CG도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기대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면서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하지만 범천을 물리치는 과정과 결과에는 쾌감이 없다.
중요한 원칙 하나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천박사>는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이듯이 액션도 서사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보인다. 전쟁이 국가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인의 행위라면, 액션은 인물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작가의 도구다. 즉, 서사가 쌓이지 않은 액션은 화려한 그래픽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천박사>는 인물의 서사를 쌓는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의 과거사를 단편적으로 알려준다. 범천을 향한 원한이 얼마나 크고 그가 사기꾼 행세를 하며 어떻게 복수의 칼날을 갈았는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즉, 천박사가 목숨 걸고 범천을 잡는 이유는 이해해도 그에게 공감하거나 몰입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모든 서사가 집중된 주인공이 이러니, 그에게 종속된 다른 캐릭터의 매력이 살아날 일도 만무하다.
결국 강동원이 장르다
그 결과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캐릭터가 아닌 배우들의 비주얼과 존개감뿐이다. 강동원은 다시 한번 스타로서의 가치를 증명했다. <전우치>, <군도: 민란의 시대>, <검은 사제들>에서 봤던 강동원의 이미지가 묘하게 한 데 합쳐져 있다. 대중적으로 인식된 배우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캐릭터에 이식한 느낌이다.
반대쪽에서는 허준호의 무게감이 인상적이다. 자칫 경쾌함 이상으로 가벼울 수 있는 분위기를 적절히 가라앉히는 데 최적화된 모습이다. 박정민과 지수, 두 카메오도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등장해서 특유의 연기력과 비주얼로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다.
결국 <천박사>는 캐릭터와 CG, 설정이 조금 독특할 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난한 명절 영화에 그친다. 실패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의도대로 시작부터 끝까지 경쾌한 톤의 코믹 액션 오컬트 영화를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 계획대로 결과물이 정직하게 뽑힌 듯 보여서 비판하기도 애매하다. 단지 아쉬울 뿐이다. 한국 상업 영화 중 나름대로 신선한 시도가 엿보이는 장르 영화이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
Acceptable 무난함
화려하나 어색한 CG만큼 오묘한 끝맛
-
-
-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영화리뷰/반전리뷰]
#반전영화#추리영화#탐정영화
▼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
▼무비워크 먹여살리기???
https://toon.at/donate/63724555002223...
-
- 영화 <베놈 2: 렛 데어 비 카니지> 1차 예고편
"우린 네가 그리웠어... 정말로."
-
- 디즈니+ <폭군> 캐릭터 예고편
누구보다 먼저 마지막 샘플을 차지해야 한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인 네 사람🔥 청소부 '임상' 설계자 '최국장' 추격자 '폴' 기술자 '채자경' [신세계] [마녀] 박훈정 감독 작품 [폭군] 8월 14일 디즈니+ 단독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