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7-07 13:46:25
대중이 바라보는 이효리, 대중이 바라는 이효리
영화 <사람냄새 이효리> 리뷰
꾹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담배 연기를 뱉어내는 영화는 우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표정만이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코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르지만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코피로 살아간다. 사소한 꿈으로 살아가지만 노란 텐트만이 그들을 반긴다. 그러던 중 그들은 이효리의 혈서 요청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효리의 집으로 들어간다. 곳곳에 피를 묻히며 들어가는 교환, 그 뒤를 따라가는 달기와 시영은 사람 냄새나는 이효리를 집 안에서 직접 마주한다. 그리곤 혈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된다. ‘코피’를 말하지만 달기는 ‘커피’로 알아듣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복선은 과거의 효리가 햄스터라는 손을 보여주는 그런 장면에서 이어지는 것이 모든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의미까지 전달한다.
직접적인 피해를 준 건 아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펼칠 수 있는 친절이 대중의 입장으로 옮겨 갔을 땐,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방송에 나간 후에 펼쳐진 현실에 고통받아야 했던 삼 남매는 원망을 바탕으로 과거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효리는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과한 친절과 위선에서 조금은 벗어나 진정으로 ‘사람 냄새 이효리’가 된다. 축축한데, 서늘하기까지 한 영화의 연출과 의도적인 관찰자적 시점을 통해 영화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연예인’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사람’으로서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을 후회 없이 영화에 쏟아낸 것 같아서 참 인상 깊었다. 자신이 행한 잘못이 아님에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단지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 감정이 조금 더 짙게 느껴졌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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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당신에게
!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감독) 오시야마 키요타카
주연) 카와이 유미, 요시다 미즈키
작년 9월, 5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개봉한다. 만화 천재 ‘후지노’와 그녀를 따르는 ‘쿄모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룩백>이다. 일본 현지 반응이 심상치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성공한 애니메이션인 <체인소맨>의 원작자 ‘후지모토 타츠키’의 작품이기 때문에 <룩백>은 개봉 전부터 꽤나 큰 기대를 받았다. 개봉 직후부터 입소문을 탄 <룩백>은 탄탄한 팬층을 형성하며 30만 관객을 모집하는 큰 성과를 거둔다.
그렇다면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이 작품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룩백>은 학교에서 네컷 만화를 연재하는 ‘후지노’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녀에게 만화는 ‘잘하는 것’ 정도이다. 친구들의 칭찬을 받으면서도 만화가가 되는 것을 열망하진 않는다. 그러던 그녀의 삶에 ‘쿄모토’가 등장한다. 쿄모토의 만화는 이렇다 할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도와 묘사를 보았을 때 대단한 실력자가 그린 것만은 확실했다. 자극을 받은 후지노는 만화 그리기에 열중하지만 좁혀지지 않는 간격에 만화를 그만두어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후지노는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쿄모토의 집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열성팬인 쿄모토를 마주한다.
잘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은 누군가에겐 평생의 과제일 것이다. 찾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두 가지가 일치하기는 더욱이 어렵다. 재능이 있다고 믿은 분야에서 진짜 재능을 만나 벽을 느끼기도 하며, 좋아하는 일이 싫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후지노에게는 만화가 그러했을 것이다. 쿄모토의 만화를 본 그녀는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노력하지만 쿄모토를 따라잡지 못한다. 만화를 그만두는 후지노의 선택은 현실과의 타협이었다. 그러던 그녀의 앞에 나타난 쿄모토가 그녀의 오래된 팬임을 밝혔을 때, 후지노는 지금까진 없었던 새로운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후지노와 쿄모토는 공동 작업을 시작한다. 쿄모토는 후지노가 짜놓은 이야기 속의 배경을 그린다. 그들의 포지션은 그들의 관계성과도 닮아있다. 쿄모토는 후지노의 배경이다. 쿄모토는 후지노를 선망해왔다. 후지노의 방에서의 그들의 위치 또한 의도되어있다. 바닥에 앉아있는 쿄모토가 책상 앞 의자에 앉아있는 후지노의 등을 바라보는 구조인 것이다. 후지노의 입장에서 쿄모토는 자신을 빛내주는 사람이며, 든든한 지원자이자 팬이자 동기부여의 대상이다. 그녀는 이제 만화에만 몰두할 수 있다. 그녀의 배경은 풍요롭게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차 성장해간다. 그러면서 각자의 꿈을 키워나간다. 결국 후지노와 쿄모토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자연스럽게 쿄모토의 시선으로 시작된 Look Back의 주체는 후지노에게 넘겨진다. 쿄모토의 Look Back이 후지노의 등을 보는 것이라면, 후지노의 Look Back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허나 책상 앞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뒤쪽은 신경쓰지 않아도 될 부분이다. 쿄모토는 항상 뒤에 있을 것이며 지금 집중해야하는 것은 눈 앞의 만화이다. 그런 그녀에게 쿄모토와의 이별은 아쉽지만 이겨낼 수 있는 사건이다. 그녀는 더이상 뒤돌지 않는다. 이젠 뒤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인기 작가가 된 후지노는 어느 날 한 가지 사건을 전해 듣는다. 쿄모토가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충격에 빠진 후지노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녀가 그 날 쿄모토의 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쿄모토는 지금 살아있을 것이다. 그녀는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자책한다. 어쩌면 그녀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건, 쿄모토가 신경쓰지 않아도 될 존재가 아닌 등을 내어줄만큼 믿을 수 있는 존재였고, 떨어진 후에도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지노의 Look Back은 공간적 차원에서 시간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후지노의 배경이 되어준 쿄모토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쿄모토와 함께한 시간들은 후지노의 삶에 생생히 남아있다. 후지노는 깨달았을 것이다. 쿄모토가 그린 배경은 훨씬 장대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이제 그녀는 쿄모토를 위해 만화를 그린다. 쿄모토가 그려준 배경에 어울릴만한 솜씨를 갖기 위해서, 그리고 쿄모토가 채워준 삶의 배경에서 씩씩하게 살아갈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후지노의 작업실 창문에는 네컷만화가 붙어있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시선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 놓인다. 그 선택의 결과는 당장은 알 수 없으며, 우연과 필연 사이의 운명과 같은 사건들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통제할 수 없는 삶은 가혹하며,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고통을 수반한다. 그때 그 선택을 했더라면 또는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후회는 먼지보다도 작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눈은 앞만 볼 수 있어서, 뒤를 돌아보면 다시 앞을 볼 수 없다. 정확히는 원래는 앞이었던 뒤를 볼 수 없다. 그리고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내가 보는 방향이 앞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렇게 역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
<룩백>은 공교롭게도 ‘룩백(Look back)’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담긴 작품이다. 등을 본다는 의미에서의 <룩백>은 누군가의 뒤를 지켜준 이들에 대한 감사 표시일 수 있겠다. 부모님, 배우자, 은인 등 각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쿄모토가 그 대상일 것이다. 뒤를 돌아본다는 의미에서의 <룩백>은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놓친 것들에게 대해 후회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이다. 우리가 볼 수 없었던 뒷편의 모습들을 충분히 사유하고 기억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도로 다가왔다. 앞을 보고 살아왔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것들이 있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다. 후지노는 자신이 쿄모토를 구하는 이야기를 만화를 통해 그려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룩백>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57분간의 짧은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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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에서 튀어나온 무색무취함의 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릴 적 헤어진 형 새뮤얼 드레이크가 남겨준 추억과 반지를 간직한 채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네이선 드레이크(톰 홀랜드)'. 어느 날, 그는 늘 그렇듯이 손재주를 발휘해 손님의 귀중품을 훔치던 사이 ‘설리’(마크 월버그)로부터 인생을 바꿀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잠적한 형의 소재를 찾고, 동시에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마젤란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자는 것.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네이선은 설리와 함께 마젤란과 그의 선원들이 남긴 기록을 살피며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찾을 힌트들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막대한 보물을 노리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고, '몬카다(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위협과 추격 속에서 네이선과 설리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에 발을 내딛는다.
<언차티드>는 너티 독이 개발한 플레이스테이션용 액션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MCU의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와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마크 월버그가 각각 네이선 드레이크와 빅터 설리번 역을 맡았고, <좀비랜드> 시리즈와 <베놈> 1편을 연출한 루벤 플레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많은 게임 원작 영화처럼 <언차티드>는 기대보다 우려가 큰 작품이었다. 물론 화려한 배우와 감독의 면면과 본편만 4개고 외전도 2개나 출시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끈 원작의 존재는 기대를 키우는 요소였다. 그러나 게임을 원작으로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 중 성공적이라고 할만한 선례가 많지 않은 것, 신선함을 담보하지 못하는 액션 어드벤처 장르인 점은 그 기대를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예상대로 <언차티드>의 결과물은 본편에서 잔뜩 예고하는 속편이 왜 필요한 지조차 설득시키지 못하는 무색무취함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우선 <언차티드>는 유명 게임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다는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영화는 원작 게임 시리즈의 스토리 라인이 시작되기 이전을 그려내는 일종의 프리퀄 같은 위치에 있다. 실제로 오프닝과 동시에 등장하는 비행기 화물 클라이밍 씬, 게임 음악을 변형한 메인 테마곡, 네이선의 형인 샘이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는 등의 부분적인 유사점을 제외하면 철저히 오리지널 스토리로 진행된다. 그래서 영화는 네이선과 샘의 관계, 샘과 설리의 관계, 네이선의 반지와 같은 주요 소품 등에 대한 설정을 원작과 다르게 묘사한다. 문제는 과한 각색과 오리지널 설정의 삽입이 팬들의 비토를 이끌어내는 주된 원인이 되고, 이는 게임 원작 영화가 실패하는 결정적인 이유라는 사실이다. 자연히 <언차티드>는 굳이 게임의 이름을 달고 나올 정도의 영화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언차티드>가 오리지널 작품이라는 이점을 적절히 활용한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안전한 길만 답습하기 때문이다. 당장 영화는 마젤란의 세계일주에 보물 찾기라는 상상력을 더하고 있는데, 이 상상력은 예측 가능한 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마젤란이 여행 중 필리핀 막탄 섬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는 점만 알아도 보물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마젤란의 보물이 숨겨진 장소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는 의미의 제목인 '언차티드(uncharted)'는 물론, 보물을 쫓는 주인공들의 겪는 고생과 역경은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 같은 문제는 영화의 쿠키 영상에서도 반복된다. 쿠키 영상은 나치의 숨겨진 보물을 언급하며 속편을 암시하는데, 나치가 찾거나 감춘 보물은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레드 노티스> 같은 작품에서도 곧장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진부한 소재다.
한편, 액션 어드벤처 영화로서도 <언차티드>는 다른 시리즈와 차별화되는 대목을 찾기 어렵다는 패착을 둔다. 일반적으로 <인디애나 존스>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로 대표되는 액션 어드벤처 영화들은 다음의 스토리 진행을 공식처럼 따른다. 전설 혹은 역사 속 미스터리 속에 숨겨져 있던 보물이 실재함을 깨달은 주인공은 팀원과 의기투합하여 그 보물을 추적하지만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끝에 실패를 맛본다. 그러나 그 역경까지도 극복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향한 신뢰를 회복하고, 반드시 보물이 아니라 해도 그에 못지않은 마지막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이는 결국 어드벤처 영화가 무언가 변화를 주거나 자신만의 매력을 뽐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뜻이며, 그나마 화려한 볼거리를 뽐내거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 시도할 수 있는 선택지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차티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일단 잔뜩 힘을 준 듯 보이는 액션은 무미건조하다. 네이선과 설리가 보여주는 육탄전은 그 구성이 아주 재치 있거나 유머러스하지도 않고, 색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두 인물의 특성이나 성격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지도 않는다. 그나마 클라이맥스 장면은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듯 보인다. 헬리콥터가 범선을 인양해 가는 가운데 범선의 구조를 역이용하거나 배에 딸린 대항해시대 당시 무기나 대포를 이용하는 액션은 분명 생동감을 불어넣기 충분한 장면이다. 다만 이조차도 분량이 얼마 없고 짧게 지나치기에 순간적인 서프라이즈로서의 기능은 할지 언정 그 이상의 임팩트를 남기지는 못한다.
이에 더해 <언차티드>는 두 주인공인 네이선과 설리에게 어떠한 매력도 부여하지 못했다. 인디아나 존스, 툼 레이더, 잭 스패로우처럼 계속 보고 싶게 만들고 대체될 수 없는 캐릭터를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당장 네이선은 배우인 톰 홀랜드 혹은 그의 대표 캐릭터인 피터 파커로 보일 뿐이고, 설리 역시 그저 마크 월버그라는 배우로만 보인다. 두 캐릭터 모두 그저 기능적으로 소비되다 보니 그들이 주체적으로 사건을 이끌어간다기보다는 사건에 이끌려 간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작중 네이선과 설리의 파트너십 형성 과정 묘사가 단적인 예시다. 형의 영향을 받아 과거 탐험가들의 모험과 전설에 심취한 네이선은 모험에 나선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고, 보물을 찾는 것보다도 오래전 헤어진 형과의 재회에 더 기뻐하는 낭만파다. 반면에 설리에게는 그 어떤 낭만도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은 오로지 보물을 찾고 부자가 되려는 목표의 수단일 뿐이다. 가족의 죽음이나 죄책감마저도 그 욕망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영화는 이처럼 가치관이 극과 극으로 다른 두 인물이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점차 신뢰를 쌓아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언차티드>라는 제목은 설령 눈에 보이지 않아도 물질적 가치보다 더 뜻깊고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영화는 이 대목에 설득력을 불어넣지 못했다. 두 인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문다. 대신 원래 이 둘은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주입시키려는 듯 유사한 대사와 갈등, 반복되는 장면을 거듭 보여준다. 이렇게 평면적이고 작위적인 설명과 묘사 때문에 둘이 마지막 순간 서로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통해 메시지를 완성 지으려는 노림수는 너무나도 쉽게 간파된다. 결국 이들의 파트너십은 아무런 감흥도 깊이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귀결된다.
마지막으로 게임 원작 영화인 것이나 어드벤처 장르 영화임을 차치하더라도, 한 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어설픈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언차티드>는 좀처럼 관객들을 긴장시키지 못한다. 보물찾기 힌트가 지하 터널이 아니라 패스트푸드 음식점 혹은 클럽에 숨기는 식으로 클리셰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나, 완벽한 타이밍마다 등장하는 힌트와 조력자의 도움은 네이선의 여정을 너무나도 매끈하게 다듬어 준 나머지 오히려 몰입을 저해한다.
그럴듯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악역들의 드라마를 지나치게 얕고 빠르게 다루면서 그들을 손쉽게 소비하는 전개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강렬한 반전을 선사하거나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데 빌런 간의 갈등이나 배신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최소한의 암시만 주어진 채 배신을 일삼다 보니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영화에서는 허무함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지극히 무난한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영화를 보고 나서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어떠한 장점도 특색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작품이 뇌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사실 <언차티드>는 제작 과정 중에 수차례에 걸쳐서 제작진과 감독이 교체되는 난항을 겪은 바 있다. 심지어 주연 배우인 톰 홀랜드마저 GQ 인터뷰에서 "아주 터프하고 자신의 내면을 잘 보이지 않고 심각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는데(...) 내 근육이 제대로 나왔는지 등에 대해서만 신경 쓴 거 같았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언차티드>의 무색무취한 결과물이 아주 놀랍지만은 않다.
P(Poor, 형편없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 트레져 헌터 듀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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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든 못하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 영화라고 자부할 수 있다. 바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다. 제목만큼이나 굉장히 긴 여정과 포스터만큼이나 화려한 소재를 잘 버무려 놓았다. 그저 지나가는 시간을 넘기지 않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의 집합체로 변환시켜 사소함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선택들이 이곳으로 이끌었음을 잘 표현해주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소개한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힘겹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에블린에게는 남편과 딸이 원하는 다정함과 따뜻함보다는 우직함으로 가득했다. 자신이 처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던 에블린이 그 사실을 알리가 없었고 들이닥치는 세무당국의 조사에 임하게 된다. 그때부터 멀티버스에 연결되어 수많은 자신의 삶을 짧은 시간 내에 경험하게 되고 '조부투파키'의 지구 침공을 막기 위해 싸워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이야기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과연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딛고 '조부투파키'를 막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수많은 다른 우주의 나와 나를 연결하며 현재의 나보다 더 좋은 세계의 에블린을 발견한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세계는 서로가 없어야 행복한 세계였으며 현재의 에블린이 실패했기에 성공한 세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듭된 버스점프로 인해 무의미함과 부질없음을 느끼는 것도 잠시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리고 소홀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미안함 뿐만 아니라 사랑을 표하며 후회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긍정'과 '다정함'을 불러와 다른 길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에블린에겐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현재가 있었다는 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보여준다.
인생의 사소한 결정이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든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지금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잊게 된다. 영화로서 표현되지 않았다면 이 삶이 아닌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택으로 인해 정해진 길이 만들어진다 라는 소재의 '미스터 노바디'가 생각나기도 해서 현재의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한 영화를 만나 반가웠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모든 곳의 모든 것을 한 번에 무엇이든 못하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참으로 멋지다. 영화에서 그랬듯 '옳음'이라는 상자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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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엘 코엔의 <트레지디 오브 맥베스>
애플과 A24는 12월 25일 극장, 1월 14일 애플 TV 플러스에서 프리미어 공개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전 희곡을 조엘 코엔이 새롭게 각색한 "트레지디 오브 맥베스"의 예고편을 공개했다.
흑백으로 촬영한 코엔은 스코틀랜드 연극에서 맥베스 경 역할의 덴젤 워싱턴과 레이디 맥베스 역의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출연한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권력을 얻기 위한 그 부부의 살인적인 책략과 그로 인한 광기로의 추락을 뒤따르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불길한 분위기의 예고편은 하늘을 선회하는 크고 검은 새들의 흩어진 영상들, 사막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맥베스, 땅에서 왕관을 들어올리는 손,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맥베스 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상 속 유일한 대화는 마녀의 목소리이며, 연극의 가장 상징적인 대사 중 하나를 말한다.
덴젤 워싱턴과 맥도먼드가 출연진에 합류하는 것은 물론 코리 호킨스, 브랜단 글리슨, 모제스 잉그램 등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트레지디 오브 맥베스"는 코엔의 솔로 감독 데뷔작으로, 코엔과 그의 형제 에단 코엔없이 프로젝트를 지휘한 첫 번째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맥도먼드는 코엔 형제의 영화 '블러드 심플'과 '파고'에 출연했고 글리슨은 '카우보이의 노래'에 출연했다. 맥도먼드는 클로이 자오의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 '노마드랜드'에서의 출연했고, 이 작품으로 그녀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코엔의 작품은 오손 웰즈가 감독하고 주연한 "맥베스"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버전인 "거미의 성"을 포함한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 중 하나이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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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은 약속을 지키고 자비롭지 않지
감독: 데이빗 로워리
출연: 데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 조엘 에저튼, 사리타 초우드리, 랄프 이네슨, 케이트 딕키
러닝타임: 130분
국가: 아일랜드, 캐나다, 미국, 영국
*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관람 후에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옛날 옛적에 말이지... 이런 일이 있었단다.' 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딱 기사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귀족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아서왕의 조카가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를 받는다. 아서왕과 여왕, 원탁의 기사들이 모인다. 아서왕은 평생에 조카를 자신의 옆에 앉힌 적이 없었으나 그날따라 누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카를 옆으로 불렀다. 마녀라고 불리는 자신의 누이의 아들을 곁에 두기 부담스러웠으리라.
그리고 왕의 부부는 조카 가웨인을 부추긴다. 무릇 기사라면 무용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때 녹색 기사, 나무 기사가 나타난다. 아마도 어머니가 자식이 없는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만든 상황인 듯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 나무 기사는 가장 용맹한 자 앞으로 나와서 자신과 대결을 하라고 한다. 자신의 목을 베든 뺨에 상처를 내든 이기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재물을 줄 것이나 대신 1년 뒤 북쪽의 예배당에 찾아와 똑같은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조건이었다. 가웨인은 아서왕은 그 성스러운 검을 하사 받고, 대결에 나섰다. 말리는 듯 말리지 않고 부추기는 아서왕 부부의 의중은 알 길이 없었다.
대결이 시작되었다. 자세를 잡는 가웨인가 달리 녹색의 기사는 자신의 도끼를 내려놓고 목을 내밀었다. 자존심을 지키고 목을 내리칠 것이냐, 1년 뒤를 생각해서 살짝 상처만 낼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가웨인에게 달려있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이 쏠린 적이 있었던가... 그는 아서왕에게 빌린 칼을 크게 휘둘러 녹색 기사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렸다. 가웨인의 승리였다. 하지만 잠시 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목이 잘린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목을 가지고 떠났다.
약속이라는 게 이렇게나 피 말리는 일이었던가. 계절이 지나고 날이 지나고 그동안 술을 마시고 무용담도 아닌 무용담을 늘어놓고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보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수록 초조함은 늘어만 갔다. 아, 왜 목을 베었을까?
그리고 아서왕이 찾아온다. 그냥 게임일 뿐이라며 부추겼으면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면서 녹색 예배당을 찾아가라고 말이다. 가웨인은 안 가고 싶은 것이 분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에도 등 떠밀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엄마가 메고 있으면 꼭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해준 허리띠를 멘 채로.
여행이라고는 모험이라고는 떠나본 적 없는 그의 여행은 순탄치 않았다. 다섯 가지의 시련을 겪는다고 했다지만 실제로 시련이 맞는지 싶었다. 시련인지 아닌지 하는 것들을 지나오다 보니 사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웅담들은 MSG를 팍팍 섞은 것이었다는 슬슬 깨닫게 된다.
중간에는 이미 데드 엔딩이 나왔다. 이것저것 빼앗기고 묶인 채로 시간이 흘러 가웨인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뼈다귀가 되어서!
하지만 시간은 거슬러 간다.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그 누군가가 아직은 이야기를 끝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거슬러 올라간 가웨인은 방법을 찾아낸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는 누가 누구에게 해주는 이야기인 걸까? 분명 화자가 있었는데 그 화자가 누군지 알 길이 없다.
동행하던 이 여우가 가장 유력해 보이기는 하다. 여우의 정체도 궁금하지만 녹색 기사의 정체도 궁금하다. 여우가 녹색 기사는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엄마나 아서왕이 아닐까 싶다가도, 가웨인의 숨겨진 여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이런저런 시련을 겪은 가웨인은 결국 녹색 예배당을 찾았고, 기사를 만난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서 자연치유 중인 그의 곁에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잠에서 깨어난 녹색 기사는 가웨인에게 준 것을 그대로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묻는다. 용감하게 자신의 목을 내주려던(사실 아닌 것 같지만) 잠시의 시간을 달라고 하고 달아난다.
달아난 시간 속에서 가웨인은 미래를 맞이한다. 배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전쟁도 하고, 자식을 잃고, 결국 패배의 앞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정신을 차린 가웨인은 도망가는 선택을 버리고 당당하게 목이 잘리는 엔딩을 선택한다. 아마도 자신의 용감한 모습에 녹색 기사가 감명을 받아서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모든 영웅의 서사가 그리했듯 말이다.
하지만 자연은 약속을 지킨다. 가웨인이 선몽으로 미래를 본 것인지, 혹은 많은 것을 겪고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목을 자르면 목을 자르고, 작은 상처를 내면 상처를 낸 뒤 명예도 주고 친구도 되어주기로 했던 약속은 약속이었다. 엄청 자세하게 다 설명해 줬음에도 목을 딱! 내리친 가웨인이니 녹색 기사는 자비가 없었다. 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그것은 약속과 별개의 문제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지만 지금 찾아온 위기처럼 자비롭지는 않다. 자연은 주는 대로 돌려준다. 지금 닥친 현실이 딱 그것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을 크게 훼손하고 다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거나 약속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 무두와 가웨인,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과 똑 닮아 있다. 그렇게 훼손했으면서 자연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도 매우 오만이다. 자연은 받은 그대로 돌려준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
흔한 영웅 서사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환경 영화였다. 그것으로 좋았다.
영웅의 이야기이면서 장르에 액션이 없는지도 명확한 영화다. 그렇기에 '기사'라는 이름에 현혹되어서 액션을 기대하고 가서 본다면 아주아주 실망할 수 있으므로 그러지 않길 바란다.
영상은 정말 대단하다. 막 화려하다고도 할 수 없고, 밋밋하다고도 할 수 없지만 빠져드는 색감을 가지고 있다. 숲의 색과 마을의 색이 참 곱게 느껴졌다. 그리고 배경 음악은 신의 한 수라고 볼 수 있었다. 배경 음악들은 <그린 나이트>의 세계관과 매우 잘 어울렸고, 상황에 딱 들어맞았다.
그러나 구성이 정신산만한 느낌이 있었다. 다섯 가지의 시련을 좀 더 친절하게 알려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했을 때 나오는 영화의 설명이 사실 친절하지 않아서 영화를 한 번 본 것만으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칭찬해 마다하지 않는 영상미와 음향(+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괜찮다고 소문난 원작)을 생각하면 조금은 더 친절해도 되지 않았을까?
배우 얘기를 조금 하면, 주연배우 '데브 파텔'은 정말 엄청 고생했겠다. 얼굴이 익숙해서 어디서 본 배우인가 했더니 <슬럼독 밀리네어리>에서 나온 배우였다. 다른 작품들도 많이 했는데 기억이 안 나니 임팩트 있는 작품은 이게 두 번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놀랐던 배우는 '케이트 딕키'였다. 아서왕이 왕일 때 여왕의 역할을 맡았는데 암만해도 저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익숙하다 못해 찰떡이어서, 보자마자 기시감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떠오른 그 여인, '리사 아린'이었다. <왕좌의 게임>에서 미친 여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존 아린의 아내 그 리사 아린이 케이트 딕키였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에 중세시대의 의상은 그녀가 아서왕의 배우자인지 존 아린의 배우자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혹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왕좌의 게임> 인가 싶을 정도로. 그만큼 잠깐의 출연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내가 <왕좌의 게임>을 본 탓일 수도 있지만.
롯데시네마에서 받은 티켓은 메가박스 오리지널 티켓을 벤치마킹한 것인지, <그린 나이트>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소장용 굿즈로는 안성맞춤이다. 티켓은 사진 말고 실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한 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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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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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31]직쏘가 생각나게 하는 쏘우의 스핀오프 스파이럴 개봉!! 재밌다!
쏘우의 스핀오프 영화 스파이럴이 개봉했습니다.
배우 크리스락이 기획아이디어와 각본에도 참여했는데요.
주연 배우로도 활약하고 있죠.
코미디 배우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크게 어색하지 않게 연기하고 있어요.
영화도 쏘우 시리즈의 초기 영화들 처럼 너무 급하지 않게 서서히 발동을 걸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너무 쏘우 시리즈와 동일한 구성으로 진행되긴 하지만 보는 재미는 있네요.
기존의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재미있게 보실 수 있는 영화에요.
감독은 대런 린 보우즈만 인데, 쏘우 2,3,4편의 감독이었죠. 다시 원래 잘하던 시리즈로 돌아왔네요.
그동안 공포영화들을 찍어왔지만 사실 거의 B급공포에 머물러 있었거든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 전체를 봐주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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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꼭 봐야 합니다. 연기파 배우 총출동. 미친 반전 [영화리뷰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영화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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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를 깨우는 바람> 예고편
“우리는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여성이 삶에서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빼면, 처음 보는 사람들마저 대뜸 그 여성의 비참한 미래를 예언한다. 여성의 삶은 '아내'나 '엄마'로 마무리 되어야만 해피엔딩이라는 낡은 믿음은 2020년이 된 지금도 건재하다.
2020년이 된 지금, 많은 여성들이 낡은 관습을 버리고, 자신만의 세상을 향한 비행을 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비혼의 길을 걷고 잇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선택지가 둘이 되어 자유가 확장되고 그리하여 여성들의 일상이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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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클로즈> 예고편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레오와 레미는 친구들에게 관계를 의심받기 시작한다. 이후 낯선 시선이 두려워진 레오는 레미와 거리를 두고, 홀로 남겨진 레미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고 만다. 점차 균열이 깊어져 가던 어느 날, 레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