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10-13 15:05:05
봉준호 감독의 cine pick
<퍼스트 카우>
봉블리, 디테일 봉 등 수많은 별명을 갖고 있는 '봉준호 감독'은 세계에서 인정받은 말이 필요 없는 거장인데요. 최근 열린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인터뷰어로 나서, 100분에 달하는 영화 문답을 이어나가며 찐 영화광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저는 12살의 나이에 영화 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은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고, 이 트로피를 손에 만지게 될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라는 수상소감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한국 영화계에 많은 충격을 안겨 왔던, 그리고 이젠 세계에 그 충격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이 지난 2019년, 북미 매체 인디와이어에서 발표한 '영화감독 35인' 중 한 명이 되어 그해의 베스트 무비를 선정하였습니다. 특히, 35명의 감독 중 유일한 한국 감독으로 자리를 빛낸 '봉준호 감독'은 그해 개봉작을 포함하여 총 8편의 영화를 선정하였는데요.
출처 : IndieWire
과연, 봉준호 감독이 선정한 최고의 영화에는 어떤 작품들이 있으며, 어떤 작품들이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을지 지금부터 같이 만나볼까요?
잇츠 CINE PICK!!
<아이리시맨> (2019.11.20 개봉)
범죄, 드라마, 스릴러 | 미국 | 209분 | 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 마틴 스코세이지 | 출연 :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 95% ? 86% (로튼 토마토)
전후 미국에 드리운 범죄 조직의 그림자.
이제 한 거물 암살자가 입을 연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가 선사하는 장대한 범죄 드라마.
봉 says : "영화 공부하던 시절, 책에서 보고 가슴에 새긴 말이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그 말을 했던 사람은 바로 마틴 스콜세이지다."
<결혼 이야기> (2019.11.27 개봉)
코미디, 드라마 | 미국 | 137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노아 바움백 | 출연 : 스칼릿 조핸슨, 아담 드라이버, 로라 던
? 94% ? 85% (로튼 토마토)
파경을 맞았지만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한 가족을
예리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
봉 says : "올해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
<아사코> (2019.03.14 개봉)
드라마 | 일본 | 120분 | 12세 관람가
감독 : 하마구치 류스케 | 출연 : 히가시데 마사히로, 카라타 에리카
? 78% ? 72% (로튼 토마토)
I. 강렬했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그렇듯…
첫사랑 ‘바쿠’와 함께하는 모든 날이 특별했던 ‘아사코’.
설레지만 불안하고 뜨겁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바쿠는
어느 날, 다시 돌아온다는 짧은 말만 남긴 채 아사코를 떠나갔다.
II. 편안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우연일까? 운명일까?
첫사랑 바쿠와 똑같은 외모의 ‘료헤이’를 만나게 된 아사코.
겉모습만 같을 뿐 공통점 하나 없는 모습에 혼란스럽지만,
자상하고 따뜻한 료헤이의 사랑으로
아사코는 다시 설레는 사랑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나간 첫사랑 바쿠가 갑자기 나타나고
아사코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봉 says : "내가 불안의 감독이라면, 하마구치 감독은 확신의 감독"
<퍼스트 카우> (2021.11.04 개봉)
드라마 | 미국 | 122분 | 12세 관람가
감독 : 켈리 라이카트 | 출연 : 존 마가로, 오리온 리
? 96% ? 63% (로튼 토마토)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봉 says :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답고 시적인 영화"
이외에도 <미드소마>, <강변호텔>, <언컷 젬스>, 그리고 드라마 [마인드헌터](시즌 2)까지 총 8편의 봉준호 감독의 pick이 앞서 국내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것처럼, 이후 개봉작 또한 기대되는데요.
코로나 이전 개봉작들을 돌아보며,
그리고 위드 코로나 시대 개봉작을 바라보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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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흑인 보스는 눈부신 사람 / 영화 그린 북
영화 그린 북(Green Book) 2018
-대여, 소장 https://serieson.naver.com/search/sea...
-Music Midorii(미도리) - 野芥(노케) N04
Artist : Midorii(미도리)
Album : 七隈線 (나나쿠마선)
Song : 野芥(노케) N04
Link : https://youtu.be/jazSBo2r9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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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사제들의 뒤를 잇는 "검은 수녀들" / 단순하지만 독특한 설정 / 크게 무섭지 않은 순한 맛 호러 /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검은 수녀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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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네 집에 누군가 있다> 공식 예고편
컨저링》 시리즈와 《기묘한 이야기》의 제작진이 전하는 이야기. 고등학교 졸업반 소녀(시드니 박)와 친구들에게 가면을 쓴 살인마가 접근한다. 이들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고 있는 살인마. 그 비밀을 하나씩 폭로하며 목숨을 위협해오기 시작한다. 스테퍼니 퍼킨스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원작. 패트릭 브라이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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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블패티>
세상을 향한 이들의 뒤집기 한.판.승!
입 찢어지게 햄버거를 먹던 너냉삼에 소맥을 찰지게 말던 너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 이들의멋진 도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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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치게 영리했던 <로키>가 범한 MCU다운 실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 2012년 시점의 뉴욕으로 시간여행을 한 어벤져스 덕분에 어부지리로 테서랙트를 손에 넣은 '로키(톰 히들스턴)'. 그는 꼼짝없이 아스가르드에 죄인으로 송환될 위기 상황에서 테서랙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멀티버스가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우주의 시간선을 관리하는 조직인 TVA는 탈출한 로키를 즉시 체포하고, TVA 요원인 '뫼비우스(오언 윌슨)'는 로키에게 TVA와 함께 움직여 달라고 요청한다. 다른 우주의 로키인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가 우주의 타임라인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로키에게 그녀의 계획을 알아내고 막아달라는 것이다. 요청을 받아들인 로키는 실비를 쫓아 다양한 세계를 오가기 시작하고, TVA가 숨기고 있던 진실에도 한 발짝씩 다가간다.
캐릭터쇼라고 불릴 정도로 매력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를 선보여 왔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그중에서도 로키는 가장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빌런으로 등장했으나 마냥 미움을 사지는 않았고, 토르와의 애증 넘치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든든한 조력자로 변해가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경 앞에서도 끝끝내 살아남아 왔다. 심지어 완전히 퇴장했다고 생각한 와중에도 로키는 평행세계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설정으로 다시금 모습을 보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결정적 이유로 로키가 변수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전투 중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환영을 만들어 내었듯이, 그의 행동은 항상 눈에 보이는 목적과 그렇지 않은 목적이 혼재되어 있었다. 특히 본인만 아는 진짜 목적은 더 큰 혼란을 유발하면서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는 죽은 듯했지만 살아남아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었고,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도 토르 몰래 테서랙트를 훔쳐 나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서막을 열었다. 이처럼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끌고 가는 변수라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기에 로키는 사랑받을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 종잡을 수 없는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로키의 첫 단독 작품인 디즈니+의 드라마 <로키>는 만족스러움과 실망이 교차한다. <엔드게임>에서 사라진 로키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아이디어까지는 로키스러운 콘셉트였지만, 그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는 로키다운 재기 발랄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로키>의 에피소드 6개는 그의 첫 단독 작품을 접한 만족감이 MCU의 설명서를 보는 실망감으로 변하는 시간이 된다.
<로키>를 독립된 작품으로 보면 드라마의 전반부는 예상외의 고민과 성찰을 선사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다. <어벤져스> 1편 시점에서 평행세계로 도망친 로키는 우주의 시간선을 관리하고 멀티버스의 출현을 막는 TVA에서 그가 살았어야 할 미래와 그의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운다. 이때 드라마는 마치 마블 스타일의 <테넷> 마냥 로키가 느끼는 회의감과 허무함, 그리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세심히 살핀다.
로키는 이미 인생의 행보가 결정되어 있다면 오딘의 양자이자 두 번째 왕자로서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자신에게 자유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고, 스스로의 존재는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특히 그가 <인피니티 워>에서 장난의 신으로 죽어가면서 타노스에게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긴 점을 고려하면 그의 회의와 고뇌는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세상을 파괴하고 자신의 뜻대로 다시 창조하며 신의 행세를 하려고 한 타노스가 실패할 것을 확신했던 신조차도 그저 정해진 운명선을 착실히 걷고 있었을 뿐이라는 역설적인 전개가 아이러니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담아내면서 로키의 이야기는 시청자가 이미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확장되며, 왜 그의 스핀오프 작품이 필요했는지를 증명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로키>가 이룬 성과는 빛이 바랜다. 마블 세계관을 구성하는 조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지면서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로키의 존재감과 이야기의 비중은 급격히 낮아진 결과다. TVA를 탈출하려 하고 진통 끝에 모비우스와의 협력을 약속하던 때와 달리, 실비가 등장 이후 로키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기능한다. 수사물처럼 TVA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대부분의 사건은 실비가 주도하며, 핵심적인 이슈에 대한 결정 역시 그녀의 손에 달려 있다. 특히 마지막 순간 멀티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그 이전에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어필할 기회 역시 로키가 아닌 실비에게 주어지며 로키는 단지 그 여파에 휩쓸리는 데 그친다. 특히 빌런부터 토르의 조력자까지 정체성이 거듭 변화하는 와중에 단 한순간도 사건의 주도권을 놓지 않은 캐릭터가 바로 로키였다는 점에서 드라마는 큰 괴리감을 유발한다.
이처럼 로키가 멀티버스로 인해 자신의 서사와 정체성, 그리고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로키>와 마블 페이즈 4의 설정집으로서의 <로키>가 충돌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로키마저 예상치 못한 속임수를 보여주는 실비나 아스가르드의 환영을 만들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선보이는 클래식 로키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키의 단독 이야기로 멀티버스를 소개한다는 선택은 역으로 로키라는 캐릭터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고, 지나치게 영리한 꾀에 스스로 넘어가 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로키>는 여러 한계점을 노출한다. 우선 야심 차게 막을 연 멀티버스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멀티버스는 또 다른 마블의 드라마인 <왓 이프...?>처럼 다양한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지만, 후속작이 개연성이 떨어지는 무리한 전개를 남발하더라도 이를 합리화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페이즈 3에서부터 줄곧 지적되었던, 하나의 영화나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보다는 시리즈로서의 완성도를 우선시해 점점 더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를 키운다.
한편 <이터널스>에서도 본 것처럼 MCU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설정된 다양성을 녹여내는 방식도 아쉬움을 남긴다. 사실 로키는 젠더 이슈와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제를 펼쳐 보이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신화와 전승에서 엄연히 여신과 결혼한 몸이지만 암말로 변신하여 오딘이 타고 다니는 다리가 8개 달린 말 슬레이프니르를 낳기도 하는 등 분명 양성애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 데 인색하다. 세 번째 에피소드 속 실비와의 대화와 그 대화를 장식하는 무지갯빛 조명에서 성적 정체성을 암시할 뿐이다. 또 결국 실비와 로키의 관계가 이성 간의 로맨스로 이어지다 보니 그 진의마저 의심스러워진다.
<로키>를 멀티버스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분명 영리한 한 수였다. 우주의 균형이 무너지는 대사건을 풀어내기에 존재 자체가 속임수, 변수, 반동분자인 로키는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확립하고 세계관을 확장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최적의 주인공이었다. 또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를 복귀시키고 추가적인 등장 여지도 남기면서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늘 로키의 잔꾀와 속임수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왔듯이, <로키>의 결과물 역시 지나치게 영리했다. 이전까지의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의 간격을 가능한 한 좁혀 놓겠다는 선택은 로키를 주인공으로서 서사의 중심에 놓는 대신 거대한 세계관을 지켜보기에 급급한 목격자로 만들었다. 페이즈 4에서 단독 작품보다는 하나의 부속품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는 실수를 반복하던 마블의 고질병이 또 도진 셈이다. 이에 더해 부수적으로는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지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남겼다.
과거 케빈 파이기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 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과연 현재 마블은 페이즈 4와 그 이후를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의 작품을 걱정하고 있을까? 시즌 2를 확정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우려를 달랠만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듯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팬들은 계속해서 MCU를 좋아하겠지만, 영화팬도 앞으로 그럴지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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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룩 업> 진짜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제니퍼 로렌스)'와 담당 교수 '랜들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박사는 한 혜성이 100% 확률로 지구와 직접 충돌할 것이라는 경악스러운 사실을 발견한다. 이에 두 사람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대통령 '올리언(메릴 스트립)'과 그녀의 아들이자 비서실장 '제이슨(조나 힐)'의 집무실 방문부터 '브리(케이트 블란쳇)'와 '잭(타일러 페리)'이 진행하는 인기 토크쇼 출연에 이르기까지 불편한 진실을 전달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거대 IT 기업의 회장 '이셔웰(마크 라이런스)'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각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진실을 곡해하며 극심한 갈등을 빚고, 그 사이 지구와 인류는 하루하루 종말에 가까워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돈 룩 업>의 겉모습은 애덤 맥케이 감독의 전작인 <빅쇼트>와 <바이스 중 후자와 매우 유사하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부통령(vice president)이었던 딕 체니를 '악(vice)'으로 규정하고 신랄하게 비꼬았던 <바이스(Vice)>처럼 <돈 룩 업> 역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당장 올리언 대통령이 철저히 표에 따라 혜성에 대비하는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것이나 정치적 능력이 전무한 아들 제이슨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트럼프의 포퓰리즘 정책과 가족 인사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올리언이 명백한 자연재해인 혜성의 접근을 부정하는 것도 지구온난화를 부정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평가절하했던 그의 실책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 룩 업>을 정치 풍자 영화로만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정치 비판은 외관과 달리 단순히 한 개인의 실정을 비난하거나 좌우 진영 논리에 빠지는 대신, 더욱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돈 룩 업>이 진정으로 문제시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부재한 사회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기능에 따라 분화된 현대 사회의 시스템들 사이에 가교가 부재한 현실의 결점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각자 고유한 기능을 전담하는 시스템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중세 시기만 하더라도 사회의 모든 기능은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치와 법, 경제, 문화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신성하지 못하거나 악마적이라고 여겨지는 대상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나 도덕은 부정선거, 주가 조작, 논문 표절, 스포츠 선수의 도핑처럼 정치, 경제, 법의 시스템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은 경우 각각의 시스템은 철저히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권력의 크기와 경제적 이윤이 직접 연관될 수는 없으며, 돈이 많다고 재판에서 무조건 이기지는 못하며, 정치적 이유로 예술 창작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된다.
문제는 이처럼 독립된 시스템들이 각자 영역 내에서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만 몰두할 뿐 전체 사회 구조의 유지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 협력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현재 경제나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암호화폐의 등장과 같은 새로운 혁신이 발생하고, 학문이나 문화의 영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그러나 각 시스템 간의 소통의 부재는 법과 정치의 시스템이 그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게 하며, 더 나아가 빠르게 발전한 시스템이 뒤처진 시스템의 기능을 침범하게 한다. 그 결과 현실에서는 자본이 사회적으로 유일한 진리가 되거나, 정책 설계에 있어서 전문가의 의견보다도 정치적 유불리가 중시되는 등 사회 전체의 구조가 무너진다. <돈 룩 업>은 바로 이 대목을 풍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환기하려 한다.
실제로 <돈 룩 업>은 사회적 시스템 간 소통 부재와 그로 인한 문제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혜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게이트와 민디 박사가 올리언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민디 박사가 천문학적 용어를 동원해 혜성이 지구에 충돌할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말해도 정작 해당 언어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전무한 백악관 대통령실의 분위기는 그저 평온하다. 참다못한 케이트가 지구와 혜성이 부딪히면 모든 생명체가 죽을 것이라고 가장 쉬운 방식으로 경고해도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과학적 발견은 정치의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득표를 위한 수단으로 치환되고, 실질적으로 정치인과 과학자 간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과학자는 언론인과도 소통하지 못한다. 대통령의 반응에 실망한 케이트와 민디 박사는 차선책으로서 언론을 통해 진실을 알리고 여론을 움직여 보려 한다. 그러나 토크쇼에서는 그들의 발견을 그저 수많은 가십 중 하나로 취급할 뿐이다. 정작 토크쇼에서 건져낸 것은 아무도 그 진실과 미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 경악하고 분노한 케이트를 조롱하는 각종 밈과 짤, 그리고 랜들의 외모에 주목하는 인기에 불과했다. 신문사에서도 자체적인 팩트 체크를 이유로 그들의 과학적 발견을 기사화하는 것을 거절한다. 이에 더해 과학과 경제, 정치와 시민사회 사이에서도 시스템의 소통 부재가 여실히 드러난다. 혜성 충돌마저도 경제적 효용으로 계산하는 거대 IT 기업의 회장 이셔웰은 민디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는다. 정부가 좀처럼 혜성 관련 정책 변화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의심이 자라나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진다.
과학의 영역 안에서도 세부 분과별로 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케이트의 발견을 두고 나사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이나, 이셔웰이 혜성을 파괴하고 혜성에 존재하는 여러 광물 자원을 활용할 대책으로 제시한 신기술이 동료평가(peer review)도 거치지 않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진정한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심지어 종말이 임박한 순간 올리언 대통령이 아들인 제이슨 비서실장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은 위에서 열거한 모든 문제점을 한 장면에 함축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화가 후반부에 종교적 심성으로 회귀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민디 박사의 가족과 친구가 모두 모여 마지막 식사를 할 때, 그들은 모인 이들 중 종교를 믿는 이가 없는데도 케이트의 남자 친구인 '율(티모시 샬라메)'의 도움을 받아 신에게 기도한다. 이는 기도하는 방법도 모를 만큼 과거와 달리 탈종교화된 현대 사회의 일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개선하지 않으면 현대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체계가 실패하고 끝내 종교에 기댈 수밖에 없는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구를 멸망시키는 것은 혜성이나 지구온난화 같은 자연재해나 특정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체계적 문제라고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 룩 업>은 애덤 맥케이 감독의 장점이 잘 발휘된 작품이자 <바이스>보다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인을 착실하게 추적한 <빅쇼트>에 가까운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빅쇼트>는 비판의 대상을 철저히 미국 경제 시스템의 모순과 병폐에 국한한 영화였다. 애덤 맥케이 감독은 특정 개인의 사악함이나 불행함에 초점을 두고, 악한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거나 분노를 터뜨리며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는 손쉬운 길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케이트 블란쳇이나 티모시 샬라메처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들을 제각기 언론인, 정치인, 과학자와 같은 조연으로 캐스팅한 선택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여러 스타 배우의 존재가 특정 캐릭터에게 쏠릴 시선을 분산시키는 사이, 영화는 친숙한 스타의 얼굴을 통해 정치, 언론, 과학, 경제와 같은 서로 다른 시스템 간의 단절된 관계성을 직관적으로 제시하고 메시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만 몇몇 단점으로 인해 사회적 시스템 자체를 풍자하려는 <돈 룩 업>의 의도는 다소 희석되는 감이 있다. 일단 과학자들이 재난을 경고하며 울분을 토한 뒤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무시하는 전개가 몇 차례에 걸쳐 반복되는 것은 결코 짧지 않은 영화의 러닝타임(139분)을 고려할 때 다소 과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애덤 맥케이 감독이 SNL 작가로 일한 경력이 있는 만큼 이는 SNL의 한 코너를 가능한 길게 늘여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토크쇼 출연처럼 전체적인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으로 인해 극의 집약도와 완성도를 전체적으로 하락시킨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지나치게 일차원적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풍자의 방식도 호불호가 갈릴 여지를 남겨놓는다. 해당 묘사 자체는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주제와 통찰에 쏠려야 할 주의와 관심이 분산되면서 영화의 의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하면 공감할수록 그 전달 방식은 역으로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애덤 맥케이 감독 특유의 코미디 연출 센스, 시간선을 꼬아놓는 식의 화려한 편집과 날카로운 사회적 메시지가 만난 케미스트리보다 크지는 않기에 <돈 룩 업>은 여전히 호평이 아깝지 않을 작품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바보야 진짜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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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은 내가 마음먹기 나름
내 인생은 내가 마음먹기 나름
- 영화 <체리향기> 리뷰 -
'내 인생의 체리 한 알은 무엇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체리향기>는 한 편의 로드 무비이다. 바싹 마른 흙과 먼지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풍경, 주인공 '바디'와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차 안에서 주고 받는 대화가 이 영화의 전부이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연출은 정적, 생략, 절제되어 있어서 영화보다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 강했다. 롱테이크와 정적인 움직임, 관찰자적인 시점이 주를 이루었고, 음향 역시 인위적인 음악 대신 자연의 소리만 등장한다. 때문에 인물들의 대화나 표정,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직접적인 감정 표현 대신 그들의 표정, 특히 눈빛을 통해 감정이 섬세하게 전달되는 듯 했다.
바디가 바라보는 세상
영화 속에서 카메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통해 바디의 내적 외로움과 적막함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바디가 사는 동네는 나무 한 그루도 보기 힘든 허허벌판이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공허한 풍경들은 자신의 감정을 함께 나눌 사람도, 쉬어갈 곳도 없던 바디의 내적 외로움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이 곧 바디의 시점인 것이다. 바디에게 있어 몸과 마음의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그가 죽음을 계획했던 '나무 아래의 구덩이' 뿐이다.
영화의 중반부 쯤, 바디는 어느 공사장에 도달한다. 공사장 한복판에서 힘 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들이 화면에 잡히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돌 위로 바디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바디는 그런 돌과 흙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공사장 한 편에 주저앉은 채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싼다. 쉴 새 없이 낙하하는 흙과 돌의 모습은 현재 바디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끝 없는 추락을 반복하다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어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고, 이를 계획한 자신의 인생을 고뇌하던 바디의 감정이 가장 잘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노인의 이야기
이름 모를 '노인'은 바디의 제안을 유일하게 받아들인 인물이자,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넘어 죽음의 문턱에서 바디를 데려오고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존재이다. 극 중 노인은 자연사 박물관에서 동물 박제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박제사는 살아있는 생명을 멈추게 하는 직업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인은 박제된 동물처럼 정지할 뻔했던 바디의 삶에 다시 움직임을 불어넣는다. 두 인물의 대화 장면에서 노인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체리 한 알'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바디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겪는 내면의 고통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노인만큼은 바디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기에 서로 깊은 내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바디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노인은 바디가 제안한 금전적 보상에 처음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만, 그 돈을 자신의 물질적 욕구가 아닌 아픈 자식의 치료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노인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물질적 보상보다도 한 사람에게 인생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는 일이었고, 어쩌면 그는 체리 한 알을 통해 금전적 풍요보다 내면의 충만함이 더 값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디의 이야기
바디는 자살을 결심한 한 남자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노인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다.
극 중 노인을 다시 찾아간 바디는 찬찬히 동네의 풍경을 바라본다. 노을이 지는 풍경,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하늘의 색감 등, 지금 현재 살아있기에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차분히 관찰한다. 이 순간은 바디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이전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공간’으로 여겨졌던 세상이 이제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공간’으로 다가온 것이다. 노인이 '체리 한 알'로 인해 인생이 달라졌던 것처럼, 이 순간은 바디 인생의 '체리 한 알'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디는 구덩이 안에 누운 채, 구름 낀 캄캄한 밤 하늘을 조용히 응시힌다. 그의 눈빛을 통해 깊은 생각에 잠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디는 결국 스스로 삶을 끝냈을까? 이에 대한 결과는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나는 바디가 다시 삶을 선택했으리라 생각한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는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도와줄 사람보다 그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혹은 죽기로 마음먹은 자신을 붙잡아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혼자일 수 없는 존재이자, 존재의 의미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바디는 그 짧은 만남 속에서 ‘살아 있음’의 가치를 체험했고, 그 깨달음은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체리 향기>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용하지만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연출과 많은 생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노인이 말했듯, 같은 하루라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시간에 쫓기고, 피로에 지쳐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곤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이들에게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저 흘려보낸다면 의미를 갖기 어렵겠지만 마음가짐을 조금만 바꾸고 하루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한다면, 지금 이 시기가 내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내 인생 역시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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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친 관음증에 가려버린 야심 찬 재해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노마 진(릴리 피셔)'은 정신병에 시달리던 엄마에게 학대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 그녀는 아버지가 할리우드에서 일했다는 말 한마디를 간직한 채 보육원에서 지내게 되고, 노마는 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꿈을 키워 나간다. 이후 염색한 금발 머리와 섹슈얼리티가 두드러지는 외모를 무기 삼아 '마릴린 먼로(아나 데 아르마스)'로 거듭난 그녀는 스타덤에 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공허함 때문에 먼로는 남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아울러 스타로서 화제의 중심에 서야 하는 독특한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그녀는 마릴린과 노마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앤드류 도미닉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아나 데 아르마스가 마릴린 먼로를 연기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블론드>는 개봉 전부터 숱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제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이라는 점과 아나 데 아르마스의 높은 싱크로율은 기대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반면 원작인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 소설이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라는 점을 두고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미국의 영화 평론가 그레이스 랜돌프가 이 작품을 "전기 영화인 척하는 강간 판타지"라며 평론을 거부했다. 마침내 공개된 <블론드>는 이처럼 상반된 기대와 우려가 모두 옳았음을 보여준 영화였다. 시대의 상징을 재해석하려는 감독의 야심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지만, 야심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아쉬움을 넘어 불쾌한 대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론드>는 자칫 단순히 금발의 섹스 심벌이라는 이미지에 갇힐 수 있는 마릴린 먼로를 더욱 입체적인 인간상으로 그려내려 한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과 루머가 너무나도 유명한 만큼 과감한 접근법을 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빛나는 할리우드 스타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며 먼로를 치열한 정체성 싸움을 펼치는 역동적인 캐릭터로 재해석하려 했던 야심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마릴린 먼로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뿌리 없이 자란 꽃과도 같은 그녀의 괴로움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정신병에 걸린 엄마와 함께 지난 유년 시절을 보여주면서 배우 이전에 자연인 '노마 진'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자세히 묘사한다. 할리우드에서 일한다는 아버지는 사진만으로도 엄마의 폭행과 학대에 시달리는 어린 노마에게 큰 위안이 된다. 더 나아가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그녀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영화는 마릴린 먼로라는 스타와 노마 진이라는 자연인의 간극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무섭게 열광하는 레드카펫의 군중들과 카메라를 비추는 모습. 그 유명한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는 먼로를 찍는 사진기들까지. 마릴린 먼로에 가까워질수록 노마 진이 사라지는 삶, 유명세를 감당하고 시대의 심벌로 거듭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커리어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LA를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그녀처럼 노마 진의 흔적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여성을 역으로 포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블론드>는 어릴 적 트라우마, 스타로서 소비되는 이미지, 이중적 생활로 인한 불안 심리 상태에 초점을 맞춰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새로이 구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염문과 가십은 단순한 스캔들의 영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노마 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강조한다. 그녀가 여러 남편을 '아빠 Daddy'라고 호칭하는 것이 단적이 예시다. 노마 진은 거듭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쫓고, 그 아버지와 행복할 가정을 이룰 아이에게 집착하며 공허한 자신의 뿌리를 채워 넣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마릴린 먼로의 가십을 항상 날아갈 듯한 희망과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의 이미지로 대비시켜 보여준다. 스타가 아닌 한 개인의 시점에서 제시하기에 그 명암은 더 짙다.
작중 처음으로 마음의 안식처로 생각했던 '찰스 채플린 주니어(제이비어 새뮤얼)'와의 관계는 사랑하던 아이를 포기해 두고두고 그녀의 원죄가 되어 버리는 낙태로 귀결된다. 그녀가 가장 화려한 스타로 발돋움하는 찰나에, 또 아버지를 만날 거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순간 마주해야 했던 '조 디마지오(바비 카나베일)'의 프러포즈는 노마를 학대받던 어린 시절로 되돌려 보낸다. 극작가인 '아서 밀러(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정작 아서가 그녀의 사연을 영화 시나리오의 한 조각으로 활용하는 사실을 알게 되자 깊이 좌절한다. '존 F. 케네디(카스파르 필립손)'와의 루머를 풀어내는 대목은 마릴린과 노마 사이에서 결국 체념해버린 그녀의 모습을 암시하듯 고통스럽고 기괴하다.
그렇기에 원작 제목 <블론드 Blonde>를 고수한 것 역시 도미닉 감독의 야심이 집약된 선택으로 보인다. 마릴린 먼로가 금발로 염색해서 이미지를 확립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는 통념과 달리 마릴린 먼로로 변모하는 과정 이면에 숨어 있던 심상을 금발에 투영한다. 섹슈얼리티한 이미지의 구축보다는 노마 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노마 진으로 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필사적인 노력을 제목에 담는다.같은 맥락에서 흑백과 컬러를 오가고, 현재 영화 제작 시 사용되는 대부분의 화면 비율을 한 번 이상 활용하며, 심리 변화에 따라 화면이 늘어지거나 휘어지는 연출도 눈에 띈다.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노마 진과 마릴린 먼로의 내면을 영상으로 풀어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감독의 야심이 시청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느냐다. 여기서 <블론드>는 패착을 두었다. 다만 영화 속 마릴린 먼로와 실제 먼로의 삶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원작자인 조이스 캐롤 오츠부터 자신의 책이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라고 공언한 만큼, <블론드>의 내용이 실제 사건과 다르다고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창립 스토리를 다룬 <소셜 네트워크>가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데도 실제 사건과 여러 차이점이 있다는 것, 그런데도 봉준호나 타란티노와 같은 감독들이 이 작품을 201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작품 속 묘사가 실제 사건과 다를 경우 그 이유는 제시되어야 한다. <소셜 네트워크>가 실제와 다르게 표현한 대목은 마크 저커버그라는 캐릭터가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으면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고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 덕분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연결해줄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한 SNS를 탄생시킨 주인공의 주변에 정작 친구도, 연인도, 동료도 남아있지 않는 아이러니한 엔딩의 비극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소셜 네트워크'라는 제목의 이중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데 톡톡히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블론드>는 실제와 달라야 하는 그 이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영화는 아버지와 가정의 부재가 남성들과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라는 캐릭터의 고통을 더 과장하고 그녀의 내적 혼란을 부추겼다. 실제로는 없었던 사건인 먼로의 낙태가 스토리 라인에 삽입되고, 연인 관계가 아니었던 남성들과의 관계나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적잖은 분량을 부여받은 것은 극적 전개를 위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을 보여주는 방식은 영리하지 않다. 2시간 30분이 넘는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각 에피소드 사이에서 널뛰는 먼로의 감정선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의 부재와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는 한 원인에서 모든 이야기가 비롯되었다는 단순한 불행 포르노를 답습하는 데 그친다. 그 결과 왜 먼로가 몇십 년 동안 그토록 불안정한 상태여야 했는지를 전혀 납득시키지 못한다.
더 나아가 마릴린 먼로를 소비해 왔던 기존의 시각을 비판하면서, 정작 감독 본인도 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내로남불에 빠지고 만다. 영화는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카메라의 압박, 그녀를 착취하는 영화 업계 사람들의 무자비한 태도, 그녀를 성적으로 소비하고 활용하는 언론과 대중들을 마치 굶주린 괴물처럼 묘사한다. 결국 먼로의 내밀한 이야기를 드러내어 결과적으로 그녀를 자극적으로 탐닉한 이들이 한 여성을 비극으로 몰고 간 과오를 비판하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영화는 먼로가 캐릭터를 재해석해서 원작자인 아서 밀러조차 깨닫지 못했던 캐릭터의 이야기를 보충하는 장면처럼 숱한 스캔들의 주인공이기 이전에 연기에 진심이었던 여배우의 모습도 단편적으로나마 제시한다.
문제는 <블론드>의 시점도 먼로에 대해 마찬가지로 선정적이고, 소비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관음증적인 앵글과 시선을 통해 집중적으로 포착된 마릴린 먼로의 사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그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물로 그려낸다는 인상을 준다. 또 그녀가 단지 성적인 존재로만 남겨졌다는 식의 묘사 역시 불쾌함을 남긴다. 그래서 이러한 연출에 대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해명과 반론은 케네디와 먼로의 만남 장면처럼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불필요한 대목에 힘을 준 순간 의미를 잃어버린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그저 불편하고 찝찝할 뿐, 재해석의 의도나 야심은 작품을 곰곰이 따져보지 않는 한 와닿지 않는다. 그렇게 넷플릭스 <블론드>는 그 모든 고통을 표현해 낸 아나 데 아르마스의 열연만 남긴 채 막을 내린다.
P(Poor, 형편없음)
야심 찬 재해석에 절제의 미덕만 갖추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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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다발같은사랑을했다_리뷰
스다마사키가 나오는 로맨스물이라고 해서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리뷰 작성함~~평범한 대학생 키누와 무기는 각자의 일상을 보내던 중 막차시간을 놓치게 되고 거기서 우연히 만나게 됨. 둘은 어느 식당에 들어가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소름돋을 정도로 비슷한 취향에 놀라게되고 점점 썸을 타기 시작함. 영화에서는 이 썸 단계가 진짜 설레게 그려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명대사가 있음. 키누가 무기집에 처음 갔다가 집에 와서 "아무 말도 하지 마, 내 감정을 덮지 마 아직 어젯밤의 여운 속에 있고 싶단 말야"라고 말하는 장면인데 사실 누구나 한번쯤 왠지 썸탈 것만 같은, 뭔가가 시작될 것만 같은 그런 설렘이 있잖아, 그 설렘을 영화에서 그 과정을 잘 보여줬는데 이런 대사까지 딱 쳐주니 뭔가 나까지 그 여운에 남은 느낌이라 좋아하는 대사임. 여튼 그렇게 몇번의 만남을 계속 가지다가 결국 사귀게 됨. 그렇게 어느 커플들과 다를 것 없이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감. 하지만 둘이 취업을 하게되면서 관계가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서로의 가치관 차이가 들어남. 꿈을 좇는 키누와 반대로 현실을 좇는 무기... 이런 다름이 나중에는 잦은 다툼으로 이어지고, 더이상의 얘기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되고 결국 5년간의 연애를 끝으로 헤어지게 됨.
나의 평 :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연애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생각함. 그렇다보니 내가 다 연애하고 내가 다 헤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 영화임. 키누와 무기의 사랑과 영화의 따뜻한 색감이 더해져 더 설렜고 만남과 헤어짐까지의 과정을 영화에서 잘 표현해내서 마음고생을 좀 함. 그리고 영화를 다 본 뒤, 저런 이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함. 너무 잘 맞았기에 서로 더는 바랄 것도 더 부족한 것도 없으니 저런 이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음. 다만 아쉬웠던게 있다면 주인공 두명의 취향이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음. 오랜만에 괜찮은 일본 영화 발견한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았음. 리뷰 끝.
에디터 - 고삼조
에디터:고삼_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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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쁘진 않았는데 낯설어서 그래
내가 만약 돈이 무진장 많으면 난 어떻게 변할까? 예쁜 여자 만나 행복하게 살겠지. 그럼 나도 감사함을 몰라 점점 이상하게 변할까? 26살쯤 되니 내가 한 건 없고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서 이 생각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종종 들 곤 한다. 이제까지 만났던 부자들은 다 성격 좋았다. 남들 배려할 줄 알고. 따뜻하고. 근데 이 세상 사람들 다 성격 똑같은 것 아닌 거처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내가 만난 부자들이 못돼먹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그런 존재가 된다는 보장이 있나?
오늘도 글을 쓰면서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을 한다. 사실 간단하다. 그냥 매일 염두하고 책 많이 읽으며 살면 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지금이라도 일단 부자가 되기 위해 비트코인과 주식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 싶지만 역시 돈은 일해서 벌어야 얻는 게 많아지는 것 아닐까 싶다. 그래야 사람 고마운 걸 알아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난 일 많이 해서 돈 벌거고 밥맛 떨어지는 나쁜 놈이 될 생각 없다. 이왕에 어려운 사람들 도우고 사는 게 재미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저번 주에 밥 맛 떨어지는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왔다. 다른 때 같으면 영화를 추천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사실 잘 모르겠다. 여러분들이 보고 어떤 작품인지 다들 생각해보길 바란다.
인생은 원래 생각지도 못한 것의 연속이지
남자가 느닷없이 한 건물 문을 연다. 시선을 어디로 둘 지 몰라 고정하지 못하는 이 남자. 집주인이 빈 시간에 딱 맞춰 올 정도로 주도면밀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남자는 뒤적뒤적 집주인의 물건들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남자는 도둑이다. 도둑이 들어간 이 별장의 주인은 IT업계의 억만장자 CEO다. 집주인이 외부 행사로 잠깐 비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도둑. 금세 주인장의 롤렉스와 현금을 찾아 도망치기로 한다. 그렇게 주섬주섬 모든 짐을 챙기고 도망치기만 하면 된다. 아. 그전에 오줌 한번 시원하게 누고 가야지. 마치 자기 집에 온 사람처럼 도둑은 최후의 끝마무리(?)까지 하고 문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원래 외부 행사로 별장 주인이 자리를 비워야 이치에 맞는데,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생겨버렸다. 당황하는 도둑. 그 주인 부부가 별장에 들어온 것이다. 도둑은 숨었다가 아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혼자 있던 아내. 아내는 인질로 잡혔고 부부는 이도 저도 못 가게 손발이 묶이게 된다. 도둑은 이 집에 있는 모든 카메라를 찾아 기록을 은폐하고 남편이 도주를 위해 제시한 금액을 위해 부부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이 이후의 영화가 작품의 줄거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묘하게 느껴지는 계급 차이
이 영화는 계층에 대해 다룬 영화다. 주인공 도둑은 최근에 어떤 일이 있어 빈곤을 겪는 것 같아 보인다. 이 덕에 인물은 도둑질을 계획하게 된다. 이 계획이 원래대로 이뤄졌다?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부가 들어와서 다 엎어지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세 명이 처해있는 처지를 대비시키며 계급 격차를 부각한다. 예를 들어 50만 달러라는 금액에 대해 논할 때, 도둑이 제시한 15만 달러를 남편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조소한다. 이 대사를 듣고 도둑이 답한 것이 있다. '우리 생각하는 삶의 질이 다르네'였다. 이를 기점으로 영화는 계속해서 남편과 도둑의 관점 차이를 보여준다. 빈곤과 부유의 뚜렷한 대조인 셈이다. 그리고, 계급과 입장에 대한 차이는 하나 더 있다. 이 부분은 영화를 보시는 분들이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엔딩과 관련이 있어서 더 쓸 수는 없을 듯하다. 각본의 완성도를 떠나 인물의 캐릭터 설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캐릭터의 대비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계급 갈등 문제를 묘사하는 데 있어 살짝 기시감이 드는 부분이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
좁은 공간. 계급 격차.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것 그리고 엔딩까지. 이거, 난 <기생충>에서 본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생충> 만큼이나 철저하지는 못하다. <기생충>은 계단을 비롯한 여러 도구와 '냄새'라는 모티브로 기득권층의 모순과 계급에 의한 전락을 탄탄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르다. 전적으로 주인공들의 대사에 의존하는 계급 격차를 보여준다. 이러다 보니 극 자체의 보는 재미는 좀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가 무난해도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뭐 다른 영화를 의식할 필요야 없겠지만 사전 조사가 좀 더 철저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는 감독도 관객이라 연출자가 제일 중요하나, 두번째로는 역시나 타인이 보기 때문에 염두해야 할 구석이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기생충>과는 다른 스탠스를 유지하며 이런 류의 영화들과는 다른 차이점을 찾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이왕에 미국의 계급 격차를 다룰 것이었다면 밑도 끝도 없이 도둑질하는 것부터 보여줄게 아니던가, 결말을 좀 수정하는 식으로 인물에게 감정 이입할 만한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 별장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굳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거 영화 배경을 바다나 성당으로 바꿨어도 크게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이 역시 뭐 영화를 보는데 심각하게 지장이 가는 건 아니나 극의 전개를 좀 더 천천히, 깊게 제시했으면 극이 충분히 꼼꼼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좀 더 꼼꼼하면 좋았을 걸
이 영화가 조명하는 문제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닐 것이다. 계급 문제 물론 심각하다. 당연히 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배려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이 극의 주인공이 벌였던 강도라는 범죄가, 사회가 만든 비율이 단 1%라도 없다면 거짓말 아닌가. 그러나, 한 처지에 있는 인간이기를 떠나서 영화 전체적인 전제들이? 쳐지는 구석이 많다. 빈곤하거나 부유해도 전적으로 사람 아닌가? 영화의 메시지를 위해 인물들이 희생된 느낌이 있다. 또 다른 '계급 격차'역시 묘사가 아쉽다. 이 갈등 역시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이 영화에 굳이 묘사되어야 했나?라는 것도 의문점이다. 결말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순 있으나 깊게 생각하면 몰입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기생충>이 선택과 집중으로 밀도 있는 이야기를 만든 반면 이 <윈드폴>은 분산으로 몰입도가 떨어진다. 배우들의 호연이 좋았고 메시지 자체도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이야기라 나쁘지 않았지만 극이 좀 구멍이 나있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부 둘의 좋은 연기
제시 플레몬스 연기 좋았다. 극을 보면서 주먹으로 한대 치고 싶었다. 자기밖에 몰라 부끄러움을 까먹은 후안무치의 CEO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또 아내 역의 릴리 콜린스도 내면에서 꾹꾹 참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이 둘의 연기만으로도 극을 보는데 무리 없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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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흑인 보스는 눈부신 사람 / 영화 그린 북
영화 그린 북(Green Book) 2018
-대여, 소장 https://serieson.naver.com/search/sea...
-Music Midorii(미도리) - 野芥(노케) N04
Artist : Midorii(미도리)
Album : 七隈線 (나나쿠마선)
Song : 野芥(노케) N04
Link : https://youtu.be/jazSBo2r9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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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사제들의 뒤를 잇는 "검은 수녀들" / 단순하지만 독특한 설정 / 크게 무섭지 않은 순한 맛 호러 /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검은 수녀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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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네 집에 누군가 있다> 공식 예고편
컨저링》 시리즈와 《기묘한 이야기》의 제작진이 전하는 이야기. 고등학교 졸업반 소녀(시드니 박)와 친구들에게 가면을 쓴 살인마가 접근한다. 이들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고 있는 살인마. 그 비밀을 하나씩 폭로하며 목숨을 위협해오기 시작한다. 스테퍼니 퍼킨스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원작. 패트릭 브라이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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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블패티>
세상을 향한 이들의 뒤집기 한.판.승!
입 찢어지게 햄버거를 먹던 너냉삼에 소맥을 찰지게 말던 너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 이들의멋진 도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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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치게 영리했던 <로키>가 범한 MCU다운 실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 2012년 시점의 뉴욕으로 시간여행을 한 어벤져스 덕분에 어부지리로 테서랙트를 손에 넣은 '로키(톰 히들스턴)'. 그는 꼼짝없이 아스가르드에 죄인으로 송환될 위기 상황에서 테서랙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멀티버스가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우주의 시간선을 관리하는 조직인 TVA는 탈출한 로키를 즉시 체포하고, TVA 요원인 '뫼비우스(오언 윌슨)'는 로키에게 TVA와 함께 움직여 달라고 요청한다. 다른 우주의 로키인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가 우주의 타임라인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로키에게 그녀의 계획을 알아내고 막아달라는 것이다. 요청을 받아들인 로키는 실비를 쫓아 다양한 세계를 오가기 시작하고, TVA가 숨기고 있던 진실에도 한 발짝씩 다가간다.
캐릭터쇼라고 불릴 정도로 매력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를 선보여 왔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그중에서도 로키는 가장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빌런으로 등장했으나 마냥 미움을 사지는 않았고, 토르와의 애증 넘치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든든한 조력자로 변해가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경 앞에서도 끝끝내 살아남아 왔다. 심지어 완전히 퇴장했다고 생각한 와중에도 로키는 평행세계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설정으로 다시금 모습을 보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결정적 이유로 로키가 변수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전투 중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환영을 만들어 내었듯이, 그의 행동은 항상 눈에 보이는 목적과 그렇지 않은 목적이 혼재되어 있었다. 특히 본인만 아는 진짜 목적은 더 큰 혼란을 유발하면서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는 죽은 듯했지만 살아남아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었고,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도 토르 몰래 테서랙트를 훔쳐 나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서막을 열었다. 이처럼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끌고 가는 변수라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기에 로키는 사랑받을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 종잡을 수 없는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로키의 첫 단독 작품인 디즈니+의 드라마 <로키>는 만족스러움과 실망이 교차한다. <엔드게임>에서 사라진 로키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아이디어까지는 로키스러운 콘셉트였지만, 그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는 로키다운 재기 발랄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로키>의 에피소드 6개는 그의 첫 단독 작품을 접한 만족감이 MCU의 설명서를 보는 실망감으로 변하는 시간이 된다.
<로키>를 독립된 작품으로 보면 드라마의 전반부는 예상외의 고민과 성찰을 선사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다. <어벤져스> 1편 시점에서 평행세계로 도망친 로키는 우주의 시간선을 관리하고 멀티버스의 출현을 막는 TVA에서 그가 살았어야 할 미래와 그의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운다. 이때 드라마는 마치 마블 스타일의 <테넷> 마냥 로키가 느끼는 회의감과 허무함, 그리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세심히 살핀다.
로키는 이미 인생의 행보가 결정되어 있다면 오딘의 양자이자 두 번째 왕자로서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자신에게 자유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고, 스스로의 존재는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특히 그가 <인피니티 워>에서 장난의 신으로 죽어가면서 타노스에게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긴 점을 고려하면 그의 회의와 고뇌는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세상을 파괴하고 자신의 뜻대로 다시 창조하며 신의 행세를 하려고 한 타노스가 실패할 것을 확신했던 신조차도 그저 정해진 운명선을 착실히 걷고 있었을 뿐이라는 역설적인 전개가 아이러니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담아내면서 로키의 이야기는 시청자가 이미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확장되며, 왜 그의 스핀오프 작품이 필요했는지를 증명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로키>가 이룬 성과는 빛이 바랜다. 마블 세계관을 구성하는 조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지면서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로키의 존재감과 이야기의 비중은 급격히 낮아진 결과다. TVA를 탈출하려 하고 진통 끝에 모비우스와의 협력을 약속하던 때와 달리, 실비가 등장 이후 로키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기능한다. 수사물처럼 TVA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대부분의 사건은 실비가 주도하며, 핵심적인 이슈에 대한 결정 역시 그녀의 손에 달려 있다. 특히 마지막 순간 멀티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그 이전에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어필할 기회 역시 로키가 아닌 실비에게 주어지며 로키는 단지 그 여파에 휩쓸리는 데 그친다. 특히 빌런부터 토르의 조력자까지 정체성이 거듭 변화하는 와중에 단 한순간도 사건의 주도권을 놓지 않은 캐릭터가 바로 로키였다는 점에서 드라마는 큰 괴리감을 유발한다.
이처럼 로키가 멀티버스로 인해 자신의 서사와 정체성, 그리고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로키>와 마블 페이즈 4의 설정집으로서의 <로키>가 충돌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로키마저 예상치 못한 속임수를 보여주는 실비나 아스가르드의 환영을 만들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선보이는 클래식 로키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키의 단독 이야기로 멀티버스를 소개한다는 선택은 역으로 로키라는 캐릭터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고, 지나치게 영리한 꾀에 스스로 넘어가 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로키>는 여러 한계점을 노출한다. 우선 야심 차게 막을 연 멀티버스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멀티버스는 또 다른 마블의 드라마인 <왓 이프...?>처럼 다양한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지만, 후속작이 개연성이 떨어지는 무리한 전개를 남발하더라도 이를 합리화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페이즈 3에서부터 줄곧 지적되었던, 하나의 영화나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보다는 시리즈로서의 완성도를 우선시해 점점 더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를 키운다.
한편 <이터널스>에서도 본 것처럼 MCU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설정된 다양성을 녹여내는 방식도 아쉬움을 남긴다. 사실 로키는 젠더 이슈와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제를 펼쳐 보이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신화와 전승에서 엄연히 여신과 결혼한 몸이지만 암말로 변신하여 오딘이 타고 다니는 다리가 8개 달린 말 슬레이프니르를 낳기도 하는 등 분명 양성애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 데 인색하다. 세 번째 에피소드 속 실비와의 대화와 그 대화를 장식하는 무지갯빛 조명에서 성적 정체성을 암시할 뿐이다. 또 결국 실비와 로키의 관계가 이성 간의 로맨스로 이어지다 보니 그 진의마저 의심스러워진다.
<로키>를 멀티버스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분명 영리한 한 수였다. 우주의 균형이 무너지는 대사건을 풀어내기에 존재 자체가 속임수, 변수, 반동분자인 로키는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확립하고 세계관을 확장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최적의 주인공이었다. 또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를 복귀시키고 추가적인 등장 여지도 남기면서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늘 로키의 잔꾀와 속임수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왔듯이, <로키>의 결과물 역시 지나치게 영리했다. 이전까지의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의 간격을 가능한 한 좁혀 놓겠다는 선택은 로키를 주인공으로서 서사의 중심에 놓는 대신 거대한 세계관을 지켜보기에 급급한 목격자로 만들었다. 페이즈 4에서 단독 작품보다는 하나의 부속품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는 실수를 반복하던 마블의 고질병이 또 도진 셈이다. 이에 더해 부수적으로는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지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남겼다.
과거 케빈 파이기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 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과연 현재 마블은 페이즈 4와 그 이후를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의 작품을 걱정하고 있을까? 시즌 2를 확정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우려를 달랠만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듯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팬들은 계속해서 MCU를 좋아하겠지만, 영화팬도 앞으로 그럴지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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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룩 업> 진짜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제니퍼 로렌스)'와 담당 교수 '랜들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박사는 한 혜성이 100% 확률로 지구와 직접 충돌할 것이라는 경악스러운 사실을 발견한다. 이에 두 사람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대통령 '올리언(메릴 스트립)'과 그녀의 아들이자 비서실장 '제이슨(조나 힐)'의 집무실 방문부터 '브리(케이트 블란쳇)'와 '잭(타일러 페리)'이 진행하는 인기 토크쇼 출연에 이르기까지 불편한 진실을 전달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거대 IT 기업의 회장 '이셔웰(마크 라이런스)'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각자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진실을 곡해하며 극심한 갈등을 빚고, 그 사이 지구와 인류는 하루하루 종말에 가까워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돈 룩 업>의 겉모습은 애덤 맥케이 감독의 전작인 <빅쇼트>와 <바이스 중 후자와 매우 유사하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부통령(vice president)이었던 딕 체니를 '악(vice)'으로 규정하고 신랄하게 비꼬았던 <바이스(Vice)>처럼 <돈 룩 업> 역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당장 올리언 대통령이 철저히 표에 따라 혜성에 대비하는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것이나 정치적 능력이 전무한 아들 제이슨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트럼프의 포퓰리즘 정책과 가족 인사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올리언이 명백한 자연재해인 혜성의 접근을 부정하는 것도 지구온난화를 부정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평가절하했던 그의 실책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 룩 업>을 정치 풍자 영화로만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정치 비판은 외관과 달리 단순히 한 개인의 실정을 비난하거나 좌우 진영 논리에 빠지는 대신, 더욱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돈 룩 업>이 진정으로 문제시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부재한 사회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기능에 따라 분화된 현대 사회의 시스템들 사이에 가교가 부재한 현실의 결점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각자 고유한 기능을 전담하는 시스템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중세 시기만 하더라도 사회의 모든 기능은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치와 법, 경제, 문화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신성하지 못하거나 악마적이라고 여겨지는 대상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나 도덕은 부정선거, 주가 조작, 논문 표절, 스포츠 선수의 도핑처럼 정치, 경제, 법의 시스템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은 경우 각각의 시스템은 철저히 자신의 영역 내에서만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권력의 크기와 경제적 이윤이 직접 연관될 수는 없으며, 돈이 많다고 재판에서 무조건 이기지는 못하며, 정치적 이유로 예술 창작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된다.
문제는 이처럼 독립된 시스템들이 각자 영역 내에서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만 몰두할 뿐 전체 사회 구조의 유지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 협력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현재 경제나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암호화폐의 등장과 같은 새로운 혁신이 발생하고, 학문이나 문화의 영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그러나 각 시스템 간의 소통의 부재는 법과 정치의 시스템이 그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게 하며, 더 나아가 빠르게 발전한 시스템이 뒤처진 시스템의 기능을 침범하게 한다. 그 결과 현실에서는 자본이 사회적으로 유일한 진리가 되거나, 정책 설계에 있어서 전문가의 의견보다도 정치적 유불리가 중시되는 등 사회 전체의 구조가 무너진다. <돈 룩 업>은 바로 이 대목을 풍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환기하려 한다.
실제로 <돈 룩 업>은 사회적 시스템 간 소통 부재와 그로 인한 문제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혜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게이트와 민디 박사가 올리언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민디 박사가 천문학적 용어를 동원해 혜성이 지구에 충돌할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말해도 정작 해당 언어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전무한 백악관 대통령실의 분위기는 그저 평온하다. 참다못한 케이트가 지구와 혜성이 부딪히면 모든 생명체가 죽을 것이라고 가장 쉬운 방식으로 경고해도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대신 과학적 발견은 정치의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득표를 위한 수단으로 치환되고, 실질적으로 정치인과 과학자 간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과학자는 언론인과도 소통하지 못한다. 대통령의 반응에 실망한 케이트와 민디 박사는 차선책으로서 언론을 통해 진실을 알리고 여론을 움직여 보려 한다. 그러나 토크쇼에서는 그들의 발견을 그저 수많은 가십 중 하나로 취급할 뿐이다. 정작 토크쇼에서 건져낸 것은 아무도 그 진실과 미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 경악하고 분노한 케이트를 조롱하는 각종 밈과 짤, 그리고 랜들의 외모에 주목하는 인기에 불과했다. 신문사에서도 자체적인 팩트 체크를 이유로 그들의 과학적 발견을 기사화하는 것을 거절한다. 이에 더해 과학과 경제, 정치와 시민사회 사이에서도 시스템의 소통 부재가 여실히 드러난다. 혜성 충돌마저도 경제적 효용으로 계산하는 거대 IT 기업의 회장 이셔웰은 민디 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는다. 정부가 좀처럼 혜성 관련 정책 변화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의심이 자라나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진다.
과학의 영역 안에서도 세부 분과별로 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케이트의 발견을 두고 나사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이나, 이셔웰이 혜성을 파괴하고 혜성에 존재하는 여러 광물 자원을 활용할 대책으로 제시한 신기술이 동료평가(peer review)도 거치지 않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진정한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심지어 종말이 임박한 순간 올리언 대통령이 아들인 제이슨 비서실장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은 위에서 열거한 모든 문제점을 한 장면에 함축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화가 후반부에 종교적 심성으로 회귀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민디 박사의 가족과 친구가 모두 모여 마지막 식사를 할 때, 그들은 모인 이들 중 종교를 믿는 이가 없는데도 케이트의 남자 친구인 '율(티모시 샬라메)'의 도움을 받아 신에게 기도한다. 이는 기도하는 방법도 모를 만큼 과거와 달리 탈종교화된 현대 사회의 일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개선하지 않으면 현대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체계가 실패하고 끝내 종교에 기댈 수밖에 없는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구를 멸망시키는 것은 혜성이나 지구온난화 같은 자연재해나 특정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체계적 문제라고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 룩 업>은 애덤 맥케이 감독의 장점이 잘 발휘된 작품이자 <바이스>보다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인을 착실하게 추적한 <빅쇼트>에 가까운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빅쇼트>는 비판의 대상을 철저히 미국 경제 시스템의 모순과 병폐에 국한한 영화였다. 애덤 맥케이 감독은 특정 개인의 사악함이나 불행함에 초점을 두고, 악한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거나 분노를 터뜨리며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는 손쉬운 길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케이트 블란쳇이나 티모시 샬라메처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들을 제각기 언론인, 정치인, 과학자와 같은 조연으로 캐스팅한 선택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여러 스타 배우의 존재가 특정 캐릭터에게 쏠릴 시선을 분산시키는 사이, 영화는 친숙한 스타의 얼굴을 통해 정치, 언론, 과학, 경제와 같은 서로 다른 시스템 간의 단절된 관계성을 직관적으로 제시하고 메시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만 몇몇 단점으로 인해 사회적 시스템 자체를 풍자하려는 <돈 룩 업>의 의도는 다소 희석되는 감이 있다. 일단 과학자들이 재난을 경고하며 울분을 토한 뒤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무시하는 전개가 몇 차례에 걸쳐 반복되는 것은 결코 짧지 않은 영화의 러닝타임(139분)을 고려할 때 다소 과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애덤 맥케이 감독이 SNL 작가로 일한 경력이 있는 만큼 이는 SNL의 한 코너를 가능한 길게 늘여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토크쇼 출연처럼 전체적인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으로 인해 극의 집약도와 완성도를 전체적으로 하락시킨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지나치게 일차원적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풍자의 방식도 호불호가 갈릴 여지를 남겨놓는다. 해당 묘사 자체는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주제와 통찰에 쏠려야 할 주의와 관심이 분산되면서 영화의 의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하면 공감할수록 그 전달 방식은 역으로 더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애덤 맥케이 감독 특유의 코미디 연출 센스, 시간선을 꼬아놓는 식의 화려한 편집과 날카로운 사회적 메시지가 만난 케미스트리보다 크지는 않기에 <돈 룩 업>은 여전히 호평이 아깝지 않을 작품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바보야 진짜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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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은 내가 마음먹기 나름
내 인생은 내가 마음먹기 나름
- 영화 <체리향기> 리뷰 -
'내 인생의 체리 한 알은 무엇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체리향기>는 한 편의 로드 무비이다. 바싹 마른 흙과 먼지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풍경, 주인공 '바디'와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차 안에서 주고 받는 대화가 이 영화의 전부이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연출은 정적, 생략, 절제되어 있어서 영화보다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 강했다. 롱테이크와 정적인 움직임, 관찰자적인 시점이 주를 이루었고, 음향 역시 인위적인 음악 대신 자연의 소리만 등장한다. 때문에 인물들의 대화나 표정,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직접적인 감정 표현 대신 그들의 표정, 특히 눈빛을 통해 감정이 섬세하게 전달되는 듯 했다.
바디가 바라보는 세상
영화 속에서 카메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통해 바디의 내적 외로움과 적막함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바디가 사는 동네는 나무 한 그루도 보기 힘든 허허벌판이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공허한 풍경들은 자신의 감정을 함께 나눌 사람도, 쉬어갈 곳도 없던 바디의 내적 외로움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이 곧 바디의 시점인 것이다. 바디에게 있어 몸과 마음의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그가 죽음을 계획했던 '나무 아래의 구덩이' 뿐이다.
영화의 중반부 쯤, 바디는 어느 공사장에 도달한다. 공사장 한복판에서 힘 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들이 화면에 잡히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돌 위로 바디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바디는 그런 돌과 흙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공사장 한 편에 주저앉은 채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싼다. 쉴 새 없이 낙하하는 흙과 돌의 모습은 현재 바디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끝 없는 추락을 반복하다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어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고, 이를 계획한 자신의 인생을 고뇌하던 바디의 감정이 가장 잘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노인의 이야기
이름 모를 '노인'은 바디의 제안을 유일하게 받아들인 인물이자,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넘어 죽음의 문턱에서 바디를 데려오고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존재이다. 극 중 노인은 자연사 박물관에서 동물 박제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박제사는 살아있는 생명을 멈추게 하는 직업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인은 박제된 동물처럼 정지할 뻔했던 바디의 삶에 다시 움직임을 불어넣는다. 두 인물의 대화 장면에서 노인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체리 한 알'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바디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겪는 내면의 고통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노인만큼은 바디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기에 서로 깊은 내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바디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노인은 바디가 제안한 금전적 보상에 처음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만, 그 돈을 자신의 물질적 욕구가 아닌 아픈 자식의 치료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노인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물질적 보상보다도 한 사람에게 인생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는 일이었고, 어쩌면 그는 체리 한 알을 통해 금전적 풍요보다 내면의 충만함이 더 값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디의 이야기
바디는 자살을 결심한 한 남자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노인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다.
극 중 노인을 다시 찾아간 바디는 찬찬히 동네의 풍경을 바라본다. 노을이 지는 풍경,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하늘의 색감 등, 지금 현재 살아있기에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차분히 관찰한다. 이 순간은 바디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이전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공간’으로 여겨졌던 세상이 이제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공간’으로 다가온 것이다. 노인이 '체리 한 알'로 인해 인생이 달라졌던 것처럼, 이 순간은 바디 인생의 '체리 한 알'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디는 구덩이 안에 누운 채, 구름 낀 캄캄한 밤 하늘을 조용히 응시힌다. 그의 눈빛을 통해 깊은 생각에 잠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디는 결국 스스로 삶을 끝냈을까? 이에 대한 결과는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나는 바디가 다시 삶을 선택했으리라 생각한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는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도와줄 사람보다 그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혹은 죽기로 마음먹은 자신을 붙잡아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혼자일 수 없는 존재이자, 존재의 의미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바디는 그 짧은 만남 속에서 ‘살아 있음’의 가치를 체험했고, 그 깨달음은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체리 향기>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용하지만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연출과 많은 생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노인이 말했듯, 같은 하루라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시간에 쫓기고, 피로에 지쳐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곤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이들에게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저 흘려보낸다면 의미를 갖기 어렵겠지만 마음가짐을 조금만 바꾸고 하루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한다면, 지금 이 시기가 내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내 인생 역시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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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친 관음증에 가려버린 야심 찬 재해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노마 진(릴리 피셔)'은 정신병에 시달리던 엄마에게 학대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 그녀는 아버지가 할리우드에서 일했다는 말 한마디를 간직한 채 보육원에서 지내게 되고, 노마는 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꿈을 키워 나간다. 이후 염색한 금발 머리와 섹슈얼리티가 두드러지는 외모를 무기 삼아 '마릴린 먼로(아나 데 아르마스)'로 거듭난 그녀는 스타덤에 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공허함 때문에 먼로는 남자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아울러 스타로서 화제의 중심에 서야 하는 독특한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그녀는 마릴린과 노마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다.
앤드류 도미닉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아나 데 아르마스가 마릴린 먼로를 연기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블론드>는 개봉 전부터 숱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제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이라는 점과 아나 데 아르마스의 높은 싱크로율은 기대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반면 원작인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 소설이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라는 점을 두고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미국의 영화 평론가 그레이스 랜돌프가 이 작품을 "전기 영화인 척하는 강간 판타지"라며 평론을 거부했다. 마침내 공개된 <블론드>는 이처럼 상반된 기대와 우려가 모두 옳았음을 보여준 영화였다. 시대의 상징을 재해석하려는 감독의 야심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지만, 야심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아쉬움을 넘어 불쾌한 대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론드>는 자칫 단순히 금발의 섹스 심벌이라는 이미지에 갇힐 수 있는 마릴린 먼로를 더욱 입체적인 인간상으로 그려내려 한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과 루머가 너무나도 유명한 만큼 과감한 접근법을 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빛나는 할리우드 스타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며 먼로를 치열한 정체성 싸움을 펼치는 역동적인 캐릭터로 재해석하려 했던 야심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마릴린 먼로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뿌리 없이 자란 꽃과도 같은 그녀의 괴로움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정신병에 걸린 엄마와 함께 지난 유년 시절을 보여주면서 배우 이전에 자연인 '노마 진'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자세히 묘사한다. 할리우드에서 일한다는 아버지는 사진만으로도 엄마의 폭행과 학대에 시달리는 어린 노마에게 큰 위안이 된다. 더 나아가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그녀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동시에 영화는 마릴린 먼로라는 스타와 노마 진이라는 자연인의 간극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무섭게 열광하는 레드카펫의 군중들과 카메라를 비추는 모습. 그 유명한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는 먼로를 찍는 사진기들까지. 마릴린 먼로에 가까워질수록 노마 진이 사라지는 삶, 유명세를 감당하고 시대의 심벌로 거듭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커리어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LA를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그녀처럼 노마 진의 흔적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여성을 역으로 포착할 수도 있다. 이처럼 <블론드>는 어릴 적 트라우마, 스타로서 소비되는 이미지, 이중적 생활로 인한 불안 심리 상태에 초점을 맞춰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새로이 구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염문과 가십은 단순한 스캔들의 영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노마 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강조한다. 그녀가 여러 남편을 '아빠 Daddy'라고 호칭하는 것이 단적이 예시다. 노마 진은 거듭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쫓고, 그 아버지와 행복할 가정을 이룰 아이에게 집착하며 공허한 자신의 뿌리를 채워 넣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마릴린 먼로의 가십을 항상 날아갈 듯한 희망과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의 이미지로 대비시켜 보여준다. 스타가 아닌 한 개인의 시점에서 제시하기에 그 명암은 더 짙다.
작중 처음으로 마음의 안식처로 생각했던 '찰스 채플린 주니어(제이비어 새뮤얼)'와의 관계는 사랑하던 아이를 포기해 두고두고 그녀의 원죄가 되어 버리는 낙태로 귀결된다. 그녀가 가장 화려한 스타로 발돋움하는 찰나에, 또 아버지를 만날 거라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던 순간 마주해야 했던 '조 디마지오(바비 카나베일)'의 프러포즈는 노마를 학대받던 어린 시절로 되돌려 보낸다. 극작가인 '아서 밀러(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정작 아서가 그녀의 사연을 영화 시나리오의 한 조각으로 활용하는 사실을 알게 되자 깊이 좌절한다. '존 F. 케네디(카스파르 필립손)'와의 루머를 풀어내는 대목은 마릴린과 노마 사이에서 결국 체념해버린 그녀의 모습을 암시하듯 고통스럽고 기괴하다.
그렇기에 원작 제목 <블론드 Blonde>를 고수한 것 역시 도미닉 감독의 야심이 집약된 선택으로 보인다. 마릴린 먼로가 금발로 염색해서 이미지를 확립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는 통념과 달리 마릴린 먼로로 변모하는 과정 이면에 숨어 있던 심상을 금발에 투영한다. 섹슈얼리티한 이미지의 구축보다는 노마 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노마 진으로 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필사적인 노력을 제목에 담는다.같은 맥락에서 흑백과 컬러를 오가고, 현재 영화 제작 시 사용되는 대부분의 화면 비율을 한 번 이상 활용하며, 심리 변화에 따라 화면이 늘어지거나 휘어지는 연출도 눈에 띈다.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노마 진과 마릴린 먼로의 내면을 영상으로 풀어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감독의 야심이 시청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느냐다. 여기서 <블론드>는 패착을 두었다. 다만 영화 속 마릴린 먼로와 실제 먼로의 삶이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원작자인 조이스 캐롤 오츠부터 자신의 책이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라고 공언한 만큼, <블론드>의 내용이 실제 사건과 다르다고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창립 스토리를 다룬 <소셜 네트워크>가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데도 실제 사건과 여러 차이점이 있다는 것, 그런데도 봉준호나 타란티노와 같은 감독들이 이 작품을 201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작품 속 묘사가 실제 사건과 다를 경우 그 이유는 제시되어야 한다. <소셜 네트워크>가 실제와 다르게 표현한 대목은 마크 저커버그라는 캐릭터가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지 않으면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고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 덕분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연결해줄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한 SNS를 탄생시킨 주인공의 주변에 정작 친구도, 연인도, 동료도 남아있지 않는 아이러니한 엔딩의 비극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소셜 네트워크'라는 제목의 이중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데 톡톡히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블론드>는 실제와 달라야 하는 그 이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영화는 아버지와 가정의 부재가 남성들과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라는 캐릭터의 고통을 더 과장하고 그녀의 내적 혼란을 부추겼다. 실제로는 없었던 사건인 먼로의 낙태가 스토리 라인에 삽입되고, 연인 관계가 아니었던 남성들과의 관계나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적잖은 분량을 부여받은 것은 극적 전개를 위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을 보여주는 방식은 영리하지 않다. 2시간 30분이 넘는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각 에피소드 사이에서 널뛰는 먼로의 감정선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의 부재와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는 한 원인에서 모든 이야기가 비롯되었다는 단순한 불행 포르노를 답습하는 데 그친다. 그 결과 왜 먼로가 몇십 년 동안 그토록 불안정한 상태여야 했는지를 전혀 납득시키지 못한다.
더 나아가 마릴린 먼로를 소비해 왔던 기존의 시각을 비판하면서, 정작 감독 본인도 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내로남불에 빠지고 만다. 영화는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카메라의 압박, 그녀를 착취하는 영화 업계 사람들의 무자비한 태도, 그녀를 성적으로 소비하고 활용하는 언론과 대중들을 마치 굶주린 괴물처럼 묘사한다. 결국 먼로의 내밀한 이야기를 드러내어 결과적으로 그녀를 자극적으로 탐닉한 이들이 한 여성을 비극으로 몰고 간 과오를 비판하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 영화는 먼로가 캐릭터를 재해석해서 원작자인 아서 밀러조차 깨닫지 못했던 캐릭터의 이야기를 보충하는 장면처럼 숱한 스캔들의 주인공이기 이전에 연기에 진심이었던 여배우의 모습도 단편적으로나마 제시한다.
문제는 <블론드>의 시점도 먼로에 대해 마찬가지로 선정적이고, 소비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관음증적인 앵글과 시선을 통해 집중적으로 포착된 마릴린 먼로의 사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그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물로 그려낸다는 인상을 준다. 또 그녀가 단지 성적인 존재로만 남겨졌다는 식의 묘사 역시 불쾌함을 남긴다. 그래서 이러한 연출에 대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해명과 반론은 케네디와 먼로의 만남 장면처럼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불필요한 대목에 힘을 준 순간 의미를 잃어버린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그저 불편하고 찝찝할 뿐, 재해석의 의도나 야심은 작품을 곰곰이 따져보지 않는 한 와닿지 않는다. 그렇게 넷플릭스 <블론드>는 그 모든 고통을 표현해 낸 아나 데 아르마스의 열연만 남긴 채 막을 내린다.
P(Poor, 형편없음)
야심 찬 재해석에 절제의 미덕만 갖추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