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중독2022-05-05 14:12:11
마법 같은 순간을 포착한 3개의 이야기, <우연과 상상> 리뷰
(偶然と想像,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배우 후루카와 코토네, 현리, 나카지마 아유무, 모리 카츠키, 시부카와 키요히코, 카이 쇼우마,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
※개봉 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시사회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개봉일 : 5월 4일
개인 평점 : ⭐️⭐️⭐️⭐️+0.5 (4.5/ 5)
우연과 상상 리뷰 3줄 요약
1. 3개의 단편 영화로 구성된 영화
2. 제목처럼 우연과 상상이 존재하는 순간들을 다룬 스토리
3. 우연과 상상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연과 상상> 포스터 [출처: 씨네랩 제공]
-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핫한 감독
최근에 먼저 개봉했던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감독님으로 그보다 앞서 <우연과 상상>이 베를린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해피아워>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상영시간이 무려 317분이라 차마 보진 못했다.
<우연과 상상>이 <드라이브 마이카>보다 먼저 나온 영화지만 <드라이브 마이카>는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이랑 골든 글로브 비영어영화상까지 받아서 먼저 개봉하고 뒤이어 우연과 상상이 개봉하는 것 같다.
<우연과 상상> 스틸 컷 [출처: 씨네렙 제공]
- 우연과 상상에 대한 3개의 이야기
영화 속 등장하는 3개의 단편 모두 우연과 상상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
단편이라는 사전 정보 없이 보러 갔었기 때문에 첫 번째 이야기는 뒷이야기가 궁금했는데 홀연히 끝나버렸다.
그에 반해서 두 번째 이야기는 조금 더 닫힌 결말에 가까웠는데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렀던 것 같다. 두 번째 이야기가 가장 기승전결이 다이나믹 했는데, 중간에 극장 내 웃음소리가 들릴만큼 피식하는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는 스토리는 아니었다.
마지막 이야기쯤 되니까 이번 스토리에서는 어디에 ‘우연’과 ‘상상’이 있을지 예상하면서 영화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우연’도 ‘상상’도 예기치 못한 부분이었고 3개의 스토리 중 가장 훈훈했던 내용 같아서 여운이 있던 마무리였다.
가장 재밌게 보았던 건 첫 번째 이야기로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꽤나 복잡한 심리묘사가 보는 재미를 더해서 좋았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첫 번째 이야기에는 미모의 한국계 배우분께서 출연하셨다.
- 우연과 상상 30초 예고편
*단편으로 구성된 영화이기 때문에 예고편도 스포일러가 꽤 크다고 생각해서 30초 버전으로 가져왔다. 딱히 반전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예고편도 보지 않고 보러가는 것을 추천하는 편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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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파된 가부장 신권정치
9★/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167분의 상영 시간 동안 내내 긴장감으로 들끓는 이 놀랍도록 강렬한 영화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가부장 신권정치를 내파한다. 테헤란 거리에서는 시위가 한창이다.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 체포되었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공식 사인은 ‘뇌졸중’. 그러나 이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한 가족이 있다. 수사 판사로 승진한 아버지 이만은 법원에서 총기를 지급받는다. 시위자를 처벌하는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에게 공격받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의 아내 나즈미는 남편의 충실한 조력자다. 나즈미는 남편의 승진으로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기대에 부푼다. 그러나 두 딸 레즈반과 사나는 다르다. 나즈미는 시위 소식을 TV 뉴스로 접하며 혀를 차지만, 두 딸은 SNS에서 검열되지 않은 시위 현장을 접하고는 분노한다. 이 ‘평범한’ 가족은 가부장 신권정치의 관계성을 대변한다. 이만은 체제의 권력자를, 나즈미는 보수적 신민을, 두 딸 레즈반과 사나는 아직 힘이 약하지만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시민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가족이 나라와 체제의 은유이기에, 히잡 시위는 국가의 위기인 동시에 가정의 위기다. 부모와 두 딸이 갈등하던 와중 레즈반의 친구가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진압하던 경찰이 발사한 산탄총에 큰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나즈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레즈반 친구의 소식을 남편 몰래 알아보려 하지만 무산되고, 결국 레즈반이 아버지에게 직접 친구의 행방을 묻는 지경에 이른다. 이만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레즈반이 항의한다. “그럼 누가 아는데?” 통치자의 무능과 무책임, 폭력성에 대한 피통치자의 불만과 저항 의식이 점차 고조된다.
그러나 ‘모른다’는 이만의 말은 진실이다. 그 역시 시위를 빠르게 진압하고 주동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공포 정치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만은 그에게 주어진 일, 즉 시위대에게 속전속결로 사형을 판결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해고될 것이다. 처음에는 도덕적 가책을 느꼈지만 이젠 그럴 새도 없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이만은 점차 불안에 휩싸인다. “내 집인데도 안심이 안 돼.” 이만은 권위와 힘을 가졌지만 가부장 신권정치 체제의 부속품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 국민 앞에서 이를 인정할 수도 없다. 그는 늘 ‘신성한 권위’를 수호하는 ‘근엄한’ 인물이어야만 한다. ‘법’으로 ‘죄인’을 단죄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에게 호신용으로 지급된 총의 의미는 중의적이다. 한편으로 총은 반항자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이만에게 쥐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총은 체제가 모든 시민의 마음 깊은 곳까지는 지배하고 있지 못하다는 가부장 신권정치의 편집증적 불안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미 사람들이 불복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만이 총이 없어진 걸 확인하고 크게 당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총을 분실하면 징역형을 받는 건 표면적인 이유다. 총을 잃어버린 이만은 누군가를 단죄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고, 들켜서는 안 되는 불안을 들켜버린 것이다.
총을 가져간 건 가족 중 하나다. 이만은 총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가져갔다는 사람이 없다. 이만의 불안과 의심은 점차 커져만 간다. 결국 이만의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불안에 휩싸인 그는 가족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대피한다. 이만은 시골집에서 무너진 권위와 가족애를 회복하고 싶다. 그러나 두 딸은 이만에게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 이만은 아내와 딸을 감금하고 총의 소재를 밝힐 때까지 풀어주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만/국가의 ‘보수적 신민’이었던 나즈미가 돌아서는 건 이때다. 그녀는 지금껏 주로 이만의 편에서 두 딸을 엄하게 훈육, 훈계하는 데 집중했지만, 두 딸이 극한으로 몰리자 마침내 비난의 화살을 남편/국가에게 돌린다. 이제 두 딸과 이만은 모두 더 물러설 곳이 없다.
이 모든 일에 막내딸 사나가 있다는 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이란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을 넘어, 또 다른 정치적 혼란에 놓인 한국의 관객에게도 시의성을 획득한다. 사나는 대체로 언니의 편에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항했지만 언니보다는 소심했다. 어른들은 사나를 애 취급했다. 자기 친구가 다친 레즈반에 비해 사나의 감정이 덜 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나는 가장 긴박한 순간에 가장 큰 용기를 낸다. 아버지가 수사 판사가 되기 전, 그러니까 편집증에 빠져 불안에 떠는 사람이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환기해 ‘회복’되어야 할 것은 자신들이 아닌 이만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나아가 대담한 용기로 아버지가 감금한 어머니와 언니를 빼내 도피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족이 도달한 어느 빈집 터. 미로를 닮은 이곳에서 네 가족은 추격전을 벌이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족들을 좇던 이만은 끝내 추락하여 흙에 파묻힌다. 가장 어린 여성의 기지와 용기가 아버지를, 가부장 신권정치를 땅에 묻어버린다. 이란에서도, 한국에서도 변화의 최전선에는 ‘어린’ 여성이 있다. 202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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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웬디>는 없다.
피터팬 탄생 110주년, 어린 시절 애정하는 소설 중 하나였던 피터팬. 어른이 되어 다시 본 피터팬은 또 다른 시선으로 의문과 불편함을 만들어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 어린이들의 낙원 네버랜드로 날아가는 웬디와 친구들의 모습은 종종 꿈꾸는 환상으로 남아있었다. 전작 <비스트>(2012)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고, 가장 큰 독립영화제 선댄스 영화제에서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 대상 수상,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색상에 노미네이트된 벤 자이틀린 감독이 '피터팬'이 아닌 '웬디'를 주인공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거기에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휩쓴 <노매드랜드>(2021)와 <캐롤>(2015)의 제작진이 더해져 <웬디>를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날 수 있는 마법의 가루를 뿌려주는 팅커벨과 째깍째깍 시계를 울리는 악어는 어떻게 보여주었을까.
앞서 언급했듯, 전작 <비스트>로 큰 주목을 받은 감독인지라 전작의 연출 스타일과 비교하며 보게 되었다. <캐롤>의 제작진이 함께한 덕분일까, 영화 <캐롤>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들에서 '기차'는 훌륭한 메타포를 지닌다. 동시에 매우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기도 한다. <웬디>에서또한 벤 감독은 기차를 다가오는 거대한 모험으로 보여준다. 흔히 공포물 혹은 괴수물에서 대상을 공포스럽거나 미지의 존재로 그려낼 때 대상의 전체가 아닌 일부의 모습만 클로즈업샷으로 보여준다. <웬디>에서도 기차가 웬디를 부를 때, 웬디의 시선에서 그 대상인 기차의 일부만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파악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궁금한 모험과 같던 기차, 그리고 웬디는 그 부름에 응답하고 거대한 기차는 멈출 수 없는 모험의 세계로 웬디를 데려간다. 이제는 다른 삶을 살기에 예전의 꿈을 이제는 잊었다는 말을 들으며 나이듦(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웬디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존재인 시간을 마주하듯, 한번 출발하면 멈출 수 없는 기차를 올라타고 ‘시간(나이듦)’이라는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차는 웬디를 네버랜드로 데려가 '나이듦(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려준다.
전작 <비스트>와 마찬가지로 감독은 어머니의 존재를 자연(주로 대지)으로 표현하며 아이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존재로서 작용시킨다. 원작 '피터팬'에서 각색된 부분이자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분명하게 보이는 지점이다. 또한 웬디에게 모성애를 요하던 원작과 달리 리더십이라고는 볼 수 없는 피터와 쌍둥이 오빠인 더글라스와 제임스의 문제를 해결로 이끄는 웬디의 모습에서 벤 감독은 웬디를 온전히 어린이로 만들어준다. 덕분에 강요받지 않은 '어른다움'에서 웬디는 온전히 경험하며 성장할 수 있게 된다. 피터팬의 세계에서 '빌런'으로 그려지던 후크 선장에게서 또 다른 캐릭터와 서사를 부여한다. 단순 '빌런'이 아니라 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지만 해결해야 하는 방법을 모르는 몸만 큰 어린이의 존재로 보여준다. 또한, <웬디>에서 흑인 배우가 ‘피터팬' 역할인 ‘피터'를 연기한 것뿐만 아니라 비전문배우들로 구성하였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이는 배우가 아닌 실제 인물들로 연기를 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노매드랜드> 제작진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렇듯 스토리라인뿐만 아니라 각 캐릭터별 섬세한 설정부터 비전문배우를 연기자로 쓴 대담함까지 벤 감독이었기에 <웬디>를 통해 관객들을 ‘현실판 네버랜드'로 초대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내가 기대했던 장면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허구의 환상보다는 벤 감독의 네버랜드를 통해 어떻게 ‘나이듦’이라는 시간을 마주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때론 몽환적이지만 또렷한 색감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자연이라는 존재는 시각적 만족을 넘어 감독이 전달하고자하는 바에 일조한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듯한 여아 웬디의 클로즈업된 손으로 시작하여 ‘Prison’이라는 티셔츠를 입고 기차 위에 올라 그 자그마했던 팔을 펼치는 웬디를 볼 때 느껴지던 해방감까지, 지금 어른이 된 이들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벤 감독에 의해 다시 꺼내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영화이다.
*사진출처 하이스트레인저**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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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확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깊이
명확한 시선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깊이
15살의 비교적 어린 나이지만 라라는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는 여자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여성이 되기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동시에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발레 학교에서 레슨을 받는다. 학교를 옮겨 새로운 학교에서 새 출발을 꿈꾸고, 발레 수업 또한 시작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그가 가야 할 길은 쉽지만은 않다. 다른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연마한 발레 기술을 15살에 시작하려니 굳어있는 몸의 관절과 근육들이 말썽이고, 잔뜩 감긴 테이프 아래 발에는 연습 과정에서 생긴 멍 자국이 가득하다. 주변 환경 또한 녹록지 않다. 설렘과 두려움을 가지고 등교한 첫날, 자기소개 시간에 선생님은 라라가 눈을 감도록 시키고 반 여학생들에게 라라가 여자 화장실을 쓰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지 거수투표를 한다. 학교, 발레학교의 주변인들은 얼핏 보면 그를 차별 없이 대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언행과 시선에는 차별적인 태도가 미묘하게 묻어난다. 발레 학교의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탈의실과 화장실을 같이 쓰며 그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들의 몸은 봤으면서 왜 네 몸은 못 보여주냐며 라라에게 아랫도리의 성기를 보여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이런 무의식(혹은 의식) 중에 차별을 가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트랜지션 중인 사람이 겪을 만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신체적으로 변화를 겪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주변인들의 이런 따가운 관심은 라라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라를 힘들게 하는 건 라라의 신체 자체다. 라라는 트랜지션을 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아빠와 함께 그 과정을 밟아간다. 수술을 위해서 호르몬 요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상황에서 눈에 띄게 달라지는 신체적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라라를 초조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몸선과 여성성이 강조되는 발레에서 신체는 가장 필수적이고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라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능력을 증명해 보이려 노력하지만, 호르몬 요법과 강도 높은 연습이 겹쳐지면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히고야 만다. 그러나 체력적 한계보다 훨씬 큰 문제는 라라의 내면에 있다. 그 자신이 자신의 몸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중심 갈등은 라라와 외부세계 간이 아닌 라라와 그의 몸 사이에서 일어난다. 라라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몸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피지만, 성기가 있는 부분은 절대로 보지 않는다. 특수 속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레를 할 때 성기 부위에 테이프를 붙여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샤워를 할 때도 속옷을 입고 하며 성기를 보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바람과 현실 간의 괴리 속에 라라는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보낼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런 라라의 얼굴과 몸을 카메라로 따라가며 변화를 겪으며 혼란스러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한다. 이 과정에서 라라의 감정은 관객에게로 공유되고, 관객은 라라의 내면에 간접적으로 동화된다. 이 영화가 발레를 묘사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발레라는 춤 자체보다도 그녀의 신체와 내면에 초점을 맞춰, 발레의 아름답고 우아한 동작들을 강조하기보다 반복적인 안무를 행하는 라라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이 영화가 보이는 발레 동작들은 하나의 무용이라기보다 동작의 반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동작을 수행하는 라라의 모습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특히나 공연 전날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연습하던 라라가 연습실을 빠져나와 쓰러지기 전까지의 모습을 타이트하게 보여주는 씬은 반복되는 안무를 통해 관객을 답답하게 만듦과 동시에 반복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에 좌절하며 고통받는 그의 내면을 체감하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제71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주목할만한 시선 부문)과 황금카메라상을 수상을 포함해 유수 영화제 수상경력이 다수 있어 훌륭하게 평가되는 영화지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출품 당시에는 미국의 트랜스젠더 비평가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으며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트랜스젠더 배우들의 입지 자체가 제한적인 환경에서 트랜스젠더가 아닌 시스 젠더 배우를 캐스팅한 것과 성기를 포함한 라라의 신체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트랜스젠더의 트라우마를 조성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러한 비판의 내용은 단순히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나, 후자의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실제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루카스 돈트 감독은 18세 당시 우연히 읽게 된 기사를 통해 그를 알게 됐고, 그 내용에 대해 영화를 구상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해 그에게 연락을 취했다. 처음엔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것을 거부하던 노라 몽세쿠흐는 감독과의 오랜 대화를 통해 이 영화의 제작 허가를 포함해 영화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 단계부터 최종 단계까지 약 9년간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그는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영화 속 라라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 영화의 시선과 방식에 대한 비판은 자칫 영화 속 이야기의 본래 주인공인 노라 몽세쿠흐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 인물을 중심으로 내세우는 여타 영화들과 다른, 뛰어난 영화가 되는 지점은 오히려 바로 이 주인공의 내면과 신체를 바라보는 집요하고도 분명한 시선에 있다. <로렌스 애니웨이>(2012), <어바웃 레이>(2015), <대니쉬 걸>(2015)과 같은 최근의 트랜스젠더 캐릭터 중심 영화들은 트랜스젠더 캐릭터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캐릭터 곁의 가족과 연인 같은 중요한 존재에 함께 초점을 맞추거나 그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풀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판타스틱 우먼>(2017)과 같은 예외의 영화도 있는데, 이 영화가 호평을 받은 지점은 <걸>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많은 영화들이 관객에게 좀 더 친숙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를 소수자 곁에 배치시켜 관객의 공감대를 끌어내려 하는 반면, 이 영화 <걸>은 영화의 모든 초점이 라라의 관점에 맞춰져 있다. 그의 곁에는 그를 든든히 지지하는 아빠라는 존재가 있지만 아빠는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라라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돕는 존재일 뿐 이 영화의 서사를 끌고 가는 인물은 아니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직면하고 해결하는 존재는 라라이며, 영화는 그런 그의 내면의 변화를 세밀하게 뒤쫓는다.
라라의 마지막 선택은 내면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 행위의 잘잘못은 중요치 않다. 자신의 신체에 해를 가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은 관객이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진정 봐야 할 것은 그 과정에서 그가 느끼는 고통과 인내의 순간들일 것이다. 병원 침대에 앉아 유리창을 바라보는 라라의 얼굴이 반사되는 씬은 마치 라라가 카메라 렌즈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을 응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지켜본 관객들에게 라라 본인이, 감독이, 영화가 질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의 이런 삶을 봤는데 당신은 어떻게 느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지. 바로 이어지는 마지막 씬에서, 라라는 사뭇 달라진 헤어스타일에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어딘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고 있다.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불안정하고 고통받던 모습은 비쳐지지 않는다. 라라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렇게 부정하던 자신의 신체를 이제는 받아들였을까. 이제는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 인정했을까. 수많은 질문이 머리를 스치는 중에 우리의 눈에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보이는 건 확신에 찬 듯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이며, 그 속에서 은은하게 보이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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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썬더볼츠* | 버려진 부품들이 이뤄낸 MCU의 시네마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드룸이 파괴된 후 CIA 국장 '발렌티나'(줄리아 루이드라이퍼스) 휘하 비밀 요원이 된 '옐레나'(플로렌스 퓨). 반복되는 임무와 외로움에 지친 그녀는 러시아 슈퍼 솔져이자 양부, '알렉세이/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을 찾아간다.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뒤 옐레나는 결심한다. 언니 나타샤처럼 양지에서 활동하기로. 발렌티나도 최근 중단된 프로젝트의 증거를 훔치려는 '고스트'(해나 존케이먼)를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조건으 그녀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지하 저장고에 잠입한 옐레나는 예상 못 한 상황을 마주한다. 본인과 고스트뿐만 아니라 '존 워커'(와이엇 러셀), '태스크마스터'(올가 쿠릴렌코)가 서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모인 것. 더 나아가 그녀는 저장고에 남은 자료를 통해 발렌티나가 어벤져스보다 강력한 영웅 '밥/센트리'(루이스 풀먼)를 만들어 냈음을 깨닫는다. 이에 그녀는 다른 이들과 협력해 저장고를 탈출한 뒤 발렌티나의 음모를 세상에 알리려 한다. 하원 의원이 된 윈터 솔져 '버키'(세바스찬 스탠)의 도움을 받아서.
MCU의 꼬리표
역대 영화 프랜차이즈 중 흥행 수익 1위를 기록하며 영화계의 한 획을 그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하지만 MCU에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을 빌리자면 MCU는 액션과 유머처럼 즉각적으로 휘발되는 쾌감을 먼저 추구하는 '테마파크'이지, 한 인간의 삶과 감정적 경험을 공유하거나 성찰하는 '시네마'가 아니라는 것.
물론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로는 MCU도 비평적으로 인정받은 감독들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며 꼬리표를 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역효과뿐이었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의 <이터널스>도,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타이카 와이티티의 <토르: 러브 앤 썬더>도, 슈퍼히어로 영화의 거장 샘 레이미의 <닥터 스트레인지와 대혼돈의 멀티버스>도 산만하거나, 유치하거나, 지루하다는 이유로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숱한 실패 끝에 MCU는 마침내 '테마파크' 밖으로 한 발짝 내디딘 듯하다. MCU에서 히어로가 될 수 없었던 낙오자들을 모은 팀업 무비, <썬더볼츠*> 덕분이다. 잘해야 MCU 판 <수어사이드 스쿼드> 혹은 지구 버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일 거로 전망한 <썬더볼츠*>는 현대인의 내면을 관통하는 섬세하고 야심 찬 서사를 선보이며 불완전하게나마 MCU의 '시네마'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옐레나의 그림자
<썬더볼츠*>는 첫 장면부터 이전 MCU 작품과는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드러낸다. 기존 마블 스튜디오 로고가 그림자로 물드는 연출이 대표적이다. 이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처럼 '비인가 프로젝트를 숨기려는 첩보 기관이 빌런들을 소집하고, 그들이 하나의 팀을 이룬 뒤 첩보 기관과 감당 못 할 적에 함께 대항한다'라는 전개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에 가깝다.
이어지는 옐레나의 내레이션은 그 선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녀는 쿠알라룸푸르의 한 고층 빌딩 옥상에서 낙하하여 실험실에 잠입한 뒤 증거를 지우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때 그녀는 언니 '나타샤'(스칼렛 요한슨)를 잃은 후의 외로움, 목적 없이 반복되는 삶에 마모되면서 느껴지는 공허함에 대해 내레이션으로 토로한다. 폭탄을 설치한 뒤 실험실에 혼자 남은 기니피그를 챙겨서 나오는 모습도 그녀의 고독함을 방증한다.
액션 시퀀스의 연출 또한 그녀의 내레이션을 시각적으로 치환하여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카메라는 그녀가 얼마나 멋지게 요원들을 해치우면서 실험실에 잠입하는지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긴 복도에서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옐레나가 아니라 옐레나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모습에 집중한다. 그녀가 임무를 수행하고, 사람을 죽이고,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그림자가 되어가는 그녀의 상황을 각인시킨다.
이처럼 옐레나의 시점에서 진행된 오프닝 시퀀스는 <썬더볼츠*>의 의도를 명확히 규정한다. 빌런이나 안티히어로가 모이는 이벤트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옐레나처럼 외롭고 공허한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다. 이는 인지도가 가장 높은 버키 대신 옐레나를 화자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발렌티나에게서 받은 임무 외에는 목적이 없고, 가족도 없는 그녀야말로 영화의 메시지에 가장 적합한 캐릭터니까.
버려진 부품들의 공허함
공허함과 외로움에 빠진 주인공은 옐레나뿐만이 아니다. 다른 썬더볼츠 멤버들도 그녀의 같은 상황에 부닥쳐 있다. 캡틴 아메리카 방패를 빼앗긴 이후 아내와 아이와 별거 중인 존 워커, 정보 당국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기 바쁜 고스트, 러시아가 만든 슈퍼 솔져이지만 리무진 택시 기사로 일하며 보드카에 절어 지내는 레드 가디언까지. 그나마 미 하원 의원이 된 버키가 예외지만, 그의 정신적 고통도 이미 전작에서 다뤄진 바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허함에 빠진 이유다. 바로 썬더볼츠 멤버들이 낙오자로 낙인찍히고, 버려진 부품이 되어 버렸다는 것. 그들은 주인공들의 서사에 필요할 때 사용되고 버려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MCU라는 세계관에서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이들. 국가에 의해서, 기관에 의해서, 기업에 의해서. 필요할 때는 부품으로 활용됐지만 가치가 다하자 폐기 처분된 이들이라는 것.
밥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으로는 썬더볼츠가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에 가깝다. 어려서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린 그는 목적 없이 살면서 삶의 의지도, 목적도, 희망도 잃었다. 우울증과 이중인격을 비롯한 여러 정신 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발렌티나의 실험은 돌파구였다. 어벤져스를 모두 합친 것보다 강력한 존재 '센트리'로 거듭나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되찾을 기회였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다시 한번 짓밟힌다. 본인이 창조한 영웅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 하자 발렌티나는 그를 폐기해 버린다. 문제는 실험 과정에서 밥의 이중인격이 센트리보다 강력한 존재, '보이드'로 거듭났다는 것. 또 한 번 버려질 상황에 부닥치자 3차원 그림자처럼 생긴 보이드는 폭주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절망과 공허함 속으로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그렇게 맨해튼 전체가 보이드가 만들어낸 그림자에 점령된다.
외계인보다 무서운 그림자
흥미롭게도 <썬더볼츠*>는 현대적 맥락을 덧붙여 주인공들의 공허함을 집단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그들의 역경은 단순히 허구의 세계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인의 현실적인 일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 무한한 성장과 생산이 목표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에게 끊임없는 경쟁을 요구한다. 개인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아야 하고,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활용되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진다.
이처럼 무한한 생산성과 성장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성과 사회'라는 형태로 구현될 때, 개인은 성과를 내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내적인 압박을 느낀다. 그 결과 사람들은 번아웃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고, 공허해지면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으로는 곪아 버린다. 이에 더해 사회가 개개인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공동체적 맥락을 제거해 버리기에 한 번 공허해진 현대인은 쉽사리 회복하지 못한다.
이는 정확히 옐레나가 겪은 일이다. 존 워커, 레드 가디언, 고스트, 그리고 밥이 경험하는 일상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그렇기에 보이드가 맨해튼을 집어삼키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어벤져스>에서 외계인이 뉴욕을 침공했을 때보다 더 섬뜩하다. 맨해튼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징임을 고려하면, <썬더볼츠*>는 현대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공허함이 공동체 차원의 경험일 때 생기는 일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음이 병들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폭주는 이미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진주 아파트 방화·살인 사건을 비롯해 조현병이나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범죄 소식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즉, 센트리/보이드는 만화처럼 묘사됐을 뿐, 이미 실존하는 현상을 보여주는 존재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썬더볼츠*>는 테마파크에서 벗어나 시네마로 나아간다. 그림자에 삼켜진 맨해튼은 옐레나와 밥처럼 속으로 곪은 현대인들의 공허함이 우리 사회를 점령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만국의 현대인이여, 단결하라!
그렇기에 썬더볼츠가 맨해튼과 시민들을 보이드로부터 구하는 방법도 일반적인 슈퍼 히어로 영화와는 다르다. <썬더볼츠*>의 클라이맥스가 주인공들이 각자의 초능력을 발휘해 빌런을 무찌르는 액션 시퀀스로 구성되지 않은 이유다. 그들은 보이드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보이드에게 제압당한 밥이 그를 집어삼킨 공허함으로부터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그 과정에서 각자의 공허함과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극복한다.
즉, 썬더볼츠는 타인과 협력하고 연대함으로써 각자의 공허함을 이겨내고, 더 나아가 썬더볼츠라는 새로운 가족과 삶의 의미도 발견한다. MCU에서 부품으로 사용되고 버려진 이들이 하나로 뭉쳤을 때 새로운 목적과 서사가 만들어진다는 것. 이는 현대 사회에서 과소평가되는 공동체와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전개이기에 파편화되고 부품화된 현대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절 작지 않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조하는 클라이맥스는 팀의 이름이 썬더볼츠로 명명된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썬더볼츠는 레드 가디언이 농담 삼아 붙인 이름이다. 옐레나가 데려온 멤버들을 본 뒤 그녀가 어릴 때 속했던 축구팀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 하지만 옐레나에게 썬더볼츠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알렉세이, 나타샤와 함께 지냈기에 혼자가 아니었고, 삶의 의미도 있었던 어린 시절을 일깨워 주는 이름이기 때문.
처음에는 레드 가디언의 말을 비웃던 다른 멤버들. 하지만 그들도 하나둘 자신들을 썬더볼츠라 지칭하기 시작한다. 옐레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에 썬더볼츠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발렌티나에 의해 '뉴 어벤져스'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지만, 여전히 썬더볼츠라는 명칭이 그들의 정체성을 더 잘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MCU의 부품
다만 <썬더볼츠*>를 특별하게 만드는 메시지와 스토리텔링은 후반부로 갈수록 빛이 바랜다. MCU의 일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조각으로서 기능하는 과정에서 완성도에 금이 가기 때문. 일례로 많은 캐릭터 중 일부는 허망하게 소모된다. 극초반에 퇴장하는 태스크마스터가 대표적이다. 전작들에서 닉 퓨리를 대체할 흑막처럼 묘사됐던 발렌티나가 갈수록 개그 캐릭터로 전락하는 묘사도 일관성이 부족하기에 실망스럽다.
액션 연출도 시간이 지날수록 임팩트가 약해진다. 지하 저장고에서 처음 조우한 썬더볼츠 멤버들끼리 각자의 능력과 무기를 활용해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이나 오토바이를 탄 버키의 액션 시퀀스는 오랜만에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센트리 대 썬더볼츠의 액션씬도 부활한 슈퍼맨과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이 맞부딪히는 <저스티스 리그>의 장면을 오마주 하면서 센트리의 압도적인 능력을 충분히 각인시킨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액션의 쾌감이 약해진다. 밥의 내면에서 보이드가 만든 트라우마의 미로에서 탈출하고, 밥을 설득하는 식으로 클라이맥스가 구성되면서 액션씬의 비중이 덩달아 낮아진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각 캐릭터의 서사, 특히 옐레나와 밥의 감정선을 잘 따라간다면 뜻깊은 방점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더우먼 1984>의 클라이맥스와 비슷한 결의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MCU라서 인상적인 장면도 많다. 샘 윌슨이 재건한 어벤져스와 뉴 어벤져스 간의 갈등, 판타스틱 4와의 만남을 예고하는 쿠키 영상은 <어벤져스: 둠스데이>를 향한 기대감을 키운다. 버키와 고스트를 제외한 썬더볼츠가 멤버 전원이 페이즈 4 출신이라는 점은 비로소 MCU의 새출발을 선언하는 듯하다. 단지 <썬더볼츠*>가 보여준 예상외의 스토리텔링에 담긴 함의가 다소 가려지는 것 같아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Expected Expectations 기대 이상
마블답지 않은 시작과 마블다운 끝이 만나 이뤄낸 MCU의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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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형벌, 징벌(Posessions, 2020)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벌을 준다는 의미의 징벌은 드라마에서 인물들이 자주 언급하는 말이자, 극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유대교의 신앙에서 간통죄에 대한 처벌로 여겨지는 표식을 나타낸다. 갑작스레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랑이 목이 베인 채 사망하게 되고, 칼을 들고 있던 신부 나탈리는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다. 이 메인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갈등과 대립, 진실을 파헤치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징벌>은 이스라엘/프랑스 드라마인 만큼 그 정체성이 다면적이고 기존에 봐왔던 드라마들과는 다른 독특한 면모가 있다. 신랑은 이스라엘인 용의자 나탈리는 프랑스인이고, 모두가 유대교라는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배경은 이스라엘이고, 불어, 영어와 히브리어가 등장한다. 6부작이라는 다소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전개 대다수에는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빠르고 시원시원한 전개를 원하는 시청자들에겐 다소 불편할 수 있으니 미리 주의를 바란다. 극 전체적으로 짙게 깔린 모호한 분위기와 답답한 감정선들은 후반부로 가서야 어느 정도 해소되기 때문. 다소 여성의 인권이 낮은 이스라엘 사회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유대교의 종교 사상 등이 반영되어 형사인 에스티가 주위 남 형사들에게 듣는 차별적 말들, 나탈리의 엄마가 집착하는 종교사상들과 주위 여론에 의해 희생양이 돼버린 나탈리의 상황들은 이스라엘 여성들의 입장을 잘 대변해 주는 듯하다. 게다가 주인공 나탈리의 행동과 미묘한 표정들은 사건을 더욱 미궁으로 빠지게 하는 미스터리다. 어느 날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누가 봐도 무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또 한때는 큰 비밀을 숨기기라도 한 듯 수상쩍은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마지막 화의 반전은 가히 놀라울 것이다.
물론 인물 간의 관계는 매우 촘촘하고 흥미롭다. 나탈리를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카림이라는 인물이 그중 하나인데, 프랑스 영사관 직원이자 아랍계 프랑스인이다. 영사관 직원이라는 직위답지 않게 그는 어느샌가 형사의 영역으로 넘어와 나탈리와 함께 숨겨진 비밀들을 찾아가고, 이스라엘 형사인 에스티와 함께 범인이 누구인지 같이 추적하면서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기도 한다. 카림이 이렇게까지 깊숙한 영역으로 들어온 이유에는 나탈리에 대한 연민이 어느 정도 적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을 설명해줄 중요한 인물들이 하나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수사에 혼선이 생기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범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고 잡혔을 때에도, 그에게는 통쾌함보다 연민이 제일 강하게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도 다 타의에 의한 압박과 비정상적인 통제에 의해서라는 생각이 확연하게 들기 때문인 것 같다. 마지막에도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 모든 건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두가 떠안고 가야 할,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새겨진 징벌이 된 것이다.
원제인 소유물로 결말을 해석해 본다면 나탈리는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야만 하는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행한 불가피한 선택들이 더 큰 파멸을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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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미국/2007)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사막처럼 건조한 염세주의자의 목소리
만드는 영화마다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코엔 형제는 퓰리쳐상 수상작가 코맥 메카시의 동명 소설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영화화했다. 미국 개봉 후 평단의 찬사를 받았으며 2008년, 제80회 아카데미상 8개 부문(작품상 포함)에 노미네이트되었고 4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을 석권하여 화제작이 되었다.
줄거리는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그리고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세 남자가 이끌어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황량한 사막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모스는 영양 사냥을 하고 있지만 총알은 자꾸만 빗나갈 뿐 별로 수확이 없다. 한편 보이스오버로 에드 톰 벨 보안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상은 자꾸만 흉악하게 변해간다는 그의 느릿느릿한 사투리에는 감정이 담겨있지 않고 문장에는 수식어도 없다. 건조하다. 사막의 열기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증발해버린 듯하다.
문득 모스의 눈에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어떤 물체가 들어온다. 망원경으로 보니 자동차들이다. 날렵한 동작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다가가니 멕시코인들끼리 대단한 총격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거래에 실패한 마약더미와 저만치 떨어진 나무 아래 앉은 채로 죽어있는 사내 옆에 돈가방이 놓여있다. 실패한 하루의 사냥과 대조적으로 돈가방은 그에게 큰 행운으로 보였을 것이다.
부상을 입고 물 한 모금을 원하는 한 명의 생존자를 뒤로한 채 돈가방만 챙겨 하우스 트레일러로 돌아온 모스는 생존자를 버려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 없다. 새벽에 물 한 통을 들고 다시 현장으로 가보니 그 생존자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고 마약거래와 관계 있는 갱단이 도착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만 그들에게 발각되고 만 코스는 트럭을 버리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아내 칼라(켈리 맥도널드)를 친정으로 보낸 뒤 자신은 돈가방과 함께 달아난다. 그런데 가방에는 추적장치가 들어있었다.
그로부터 참혹한 범행현장에서 모스의 트럭을 발견한 보안관 벨, 갱단에게 고용되어 추적장치를 따르는 청부살인업자 쉬거, 돈가방을 든 모스 등, 세 남자의 쫓고 쫓기는 복잡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스크린은 거듭되는 살인으로 지옥 같은 이미지를 담아낸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매우 문학적이다. 아마도 소설을 영화화했기 때문이겠지만 코엔 형제가 만들어낸 은유적인 영상과 배우들의 연기력에 힘입은 바도 클 것이다.
황량한 사막과, 그 사막에서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별 망설임 없이 버리고 돌아서는 카우보이 모스는 무척 닮아있다. 불모의 사막에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로 장면이 바뀌어도 인간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관심이나 배려 등, 사랑을 표현하는 그 무엇도 담지 않는다. 기쁨의 웃음도 감동의 눈물도 배제한다. 그대신 건물들을 훑고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건축한 건물들 속에서 하나, 둘, 잔인하게 죽는다.
그들의 죽음에 꼭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살인청부업자 쉬거의 의무는 그를 고용한 사람에게 돈가방을 찾아주고 가방을 훔친 모스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는 자동차가 필요해서,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되어서, 혹은 그의 기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인다. 그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는 것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무기, captive bolt pistol(혹은 cattle gun)이다. 이는 주로 가축을 도살하기 전에 고통을 덜어주고 피흘림을 막아 좋은 육질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쉬거는 짐승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무기로 사람을 죽인다. 그에게는 효과적으로 그리고 단번에 상대를 죽임으로써 유혈이 낭자한 현장을 남기지 않는 효율성이 중요할 뿐이다.
쉬거의 앞에서 그에게 득이될 거래를 제시하거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생명 부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쉬거에게는 두 번째 기회를 용납하는 관대함이 없으며 생명을 중시하며 가치판단을 하는 도덕적 잣대도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예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이렇게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하는 쉬거라는 인물은 절대적인 악, 혹은 악마로 그려진다.
쉬거의 추격을 받는 모스에게서는 자유의지를 가졌으되 많은 선택의 가능성 사이에서 계속 실수를 저지르는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절대적으로 악하지도, 또 선하지도 않다. 다만 어쩌다가 양심과 도덕을 무시하고 욕심을 따르는 잘못된 선택을 한 후 결국 댓가로 목숨을 지불하게 된다. 베트남전에서 살아남은 용접공이기도 한 모스는 어쩌면 그를 따라붙은 쉬거라는 인간쯤이야 그가 물리칠 수 있는 만만한 상대로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대개 운명을 만만하게 보듯이 말이다.
벨은 아버지에 이어 보안관직을 맡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악을 응징하겠다는 위대한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사막의 바람에 그의 열정이 어쩌면 모두 말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하루하루의 평화를 바라며 은퇴를 기다리고 있는 노인에 불과하다. 그가 모스의 뒤를 쫓는 이유는 같은 마을 주민을 보호해야겠다는 최소한의 의무감 때문이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벨은 그의 직업에 필요한 상식,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자꾸만 악해지는 세상을 안타까워하는 도덕성,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경험으로 얻은 인생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건을 추리하는 전문가로서의 능력 등은 지녔으나 악에 맞서 싸우려는 열정과 끈기, 육체적 강인함 등은 없다. 악이란 끈질기게 싸워서 물리쳐야하는 대상인데도 말이다. 평화를 원한다고 악으로부터 피하면 피할 수록 악의 영역만 넓혀주게 될 뿐이다.
아무튼 악에 맞서 싸우기에 벨은 너무 나이를 많이 먹었고 또 나이만큼 지친 것 같다. 실력에는 도덕성, 전문성, 열정, 건강 말고도 신념 및 목표를 이룰 때까지 '지치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은퇴 후 벨은 아내에게 그가 꾼 두 가지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꿈에서 벨은 보안관이었던 아버지가 그에게 준 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두 번째 꿈에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눈 덮인 산에서 말을 타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머리를 숙이고 불을 든 채 벨을 지나쳐 앞서 갔다고 했다. 아마도 어둡고 추운 곳에 벨이 도착하기 전에 불을 피워놓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추측을 덧붙인다.
이제 우리에게는 벨처럼, 지켜야할 어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코엔 형제는 어쩌면 지독한 반어법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여지를 남기지 않고 단정적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보다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뜨겁고 건조한 사막처럼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인생에 지친 벨 같은 노인들이야 점점 거세지는 악에 대항할 의지를 잃었다 하더라도, 아직 기운 있는 젊은이들에게서만큼은 악을 상대하여 이겨내려는 끈질김, 열정들을 기대라도 할 수 있도록 말이다(©2021. 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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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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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시즌4> 1부 최종 예고편
이번 주 금요일,
전 세계가 뒤집힌 세계로. 시즌 4의 1부. 5월 27일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