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ellow2022-04-11 15:54:43
내가 나로 자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벚꽃이 만개하고 하늘엔 몽실한 구름이 떠다니는, 어엿한 봄이다. 다만 그 봄이 조금 과하게 느껴진다. 한낮의 온도는 거의 30도에 육박하고, 꽃잎은 쉴 새 없이 흩날리다가 떨어진다. 바닥에 물든 분홍과 빨강들. 이제 실감한다. 계절 또한 순간이다. 금세 지나갈 것을 알기에 그리 구경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순간을 붙잡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
봄이면서도 초여름. 애매한 중첩을 보니 주인공의 이름이 떠오른다. 춘희. 기쁠 희, 좋을 희, 즐거울 희. 온갖 의미 중에서도 그의 이름 말은 봄 춘春, 계집 희姬. 봄의 계집이다. 출생등록을 할 때 잘못 입력한 한자. 동시에 탓하기 좋은 변명거리다. 일이 꼬이고 꼬여 문제만 생길 때에 문득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원래 이렇게 되었으리라고.
자기 자신을 운명이란 이름에 가둬둠으로써 탄식하고, 연민하고, 모순적이게도 위로받는다. 춘희의 삶도 엇비슷한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여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던, 누구에게나 있을 처연한 시기. 다만 춘희에게는 그 시간이 꽤, 길었을 뿐이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는 춘희의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중학생 춘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사촌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동갑내기 여자애는 쌀쌀 맞고, 그의 보호자들은 교묘하게 차갑다. 마치 떠안기 싫은 짐을 어쩔 수 없이 진 것처럼. 몸만 겨우 누일 수 있는 자그마한 다락방. 여러 이불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게 최선인 독방. 춘희에게 허용된 크기와 위치는 딱, 그 정도다.
지금의 춘희는 어떨까. 여전히 같은 방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알록달록한 전구도 놓고, 창가와 벽에 사진도 붙이고, 나름 아늑한 공간이다. 춘희는 살면서 많은 것을 갖지 못했을 테지. 특별히 안타깝다거나 불쌍하다는 둥 가치판단을 멋대로 내리고 싶진 않다. 단지 그 공간에 대한 춘희의 애착이 느껴졌을 뿐이다.

춘희의 일과는 퍽 단순했다. 일어나서 수경을 끼고, 마늘을 한 알씩 까고, 2kg는 족히 되는 것 같은 양을 어깨에 이고 식당을 찾아간다. 사촌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 노동의 대가는 3만 원. 이런 일 말고 홀서빙을 하라는 제안에도 춘희는 고개를 젓는다.
춘희는 하루 3만 원을 통장에 차곡차곡 모으는 중이다. 이 같은 성실함은 간절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다한증 수술. 땀이 많아 금세 손이며 발이며 축축해지는 것이 춘희에겐 오래된 스트레스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모든 공간엔 자신의 흔적이 남았다. 사람들은 그 흔적을 불쾌하게 여겼고, 춘희는 찌푸린 얼굴이나 날 선 목소리 따위를 빼곡히 기억했다. 어릴 때야 무덤덤한 표정에 가려 잘 드러나진 않았겠지만.
벼락과 천둥이 치던 날, 춘희는 평소처럼 할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중에 벼락을 맞는다. 검댕이가 묻은 얼굴로 집에 들어가 쓰러지듯 잠들었는데 웬걸. 제 몸 위로 이불이 덮였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 없는 집인데 말이다. 의아한 상황은 곧 믿을 수 없는 일로 이어진다. 어린 춘희, 그러니까 중학생 춘희가 지금의 춘희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같이 마늘을 까고, 라면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춘희의 기억과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의 자신에게 있는 손의 흉터가 중학생 춘희에겐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다한증인 자신이 싫고 미워서 소각장 앞에 불씨에 손바닥을 가져다댔는데 말이다.
춘희가 깊게 생각하지 않은 건 또 다른 일상의 변화 때문이겠다. 얼결에 참여한 모임에서 주황을 만났다. 말을 더듬는 주황과 땀이 흥건한 춘희. 자기 자신의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점을 그대로 드러낸 관계. 솔직해서인가,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춘희는 술김에 말도 안 되는 일을 들려주겠다며 중학생 춘희 이야기를 스리슬쩍 꺼낸다.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무얼 하겠느냐고.
주황은 아버지의 폭력에 매번 맞기만 하지 말고 한 번은 덤비라,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반면 춘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던가. 그 애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모든 것이 나름 순조롭게 흘러갈 무렵 사건은 하나둘씩 생겨난다. 하나, 중학생 춘희가 사라졌다. 둘, 사촌오빠가 춘희에게 새로운 집을 구하라고 통보한다. 그 집을 매물로 올려놨다고. 셋, 모임 세미나에서 거금을 사기당했다. 다한증을 치료하려고 모아두었던 돈이 몽땅 사라진 셈이다. 모든 것을 잃기만 한다.
그러나 춘희는 침묵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 집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의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목소리를 낸다. 물론 사촌에겐 얼토당토않는 얘기다. 집에 누가 거주하느냐에 따라 임대인 자격을 얻고 잃는 건 아니니까. 사실을 바꿀 만한 힘은 없었다. 애초에 그건 춘희의 목적이 아니기도 했다.
그저 중학생 춘희가 꾹꾹 눌러 두었을 진심을, 집에 대한 애착을, 자신의 보호자들을 향한 그리움을 발화하고 싶었을 테다. 수수깡으로 정성스레 만든 집이 제 허락도 없이 망가져 버려진데도 오히려 사과를 건네야 하는 시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상처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지금의 춘희로.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아이는 그때로부터 자라나지 못한다고. 10년이든 20년이든 시간만 흐를 뿐이라고. 몸만 커져서 어른처럼 보이지, 여전히 아이라고. 춘희는 자라지 못한 자신을 알아주기로 한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다 싫어하고, 미워하고, 불쾌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며 오롯이 견뎌온 상처들 또한 끌어안는다. 자신에게 남은 손바닥의 화상을 어린 춘희에게 되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지켜내기 위하여.
영화에서도 내내 보였다. 춘희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자 기이한 지점. 춘희를 진심 어린 눈으로 걱정했다가 날카로운 말씨로 돌변했다. 순식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여기서 카메라의 담긴 시선이 달랐다. 부드러운 상황을 보여줄 땐 상대방의 모습을, 춘희를 비난할 땐 춘희의 상처받은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춘희가 기억하는 타인의 모습은 일부일 뿐이라고. 모두 춘희를 미워하고 싫어한 게 아니라, 아끼는 마음도 존재했다고.
나 자신을 다독여준 후에야 춘희는 새 집으로 새 출발을 한다. 이제는 사촌 집의 다락방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갈 춘희. 자신의 점액질로 흔적을 남기는 민달팽이처럼 꿋꿋이 제 길을 걸어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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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에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참석 후 기고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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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소설과 비교분석하는 영화 '그것2' 리뷰
스티븐 킹의 동명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비교
그리고 소설에서 빠진 설정과
이에 따른 영화 "그것:두 번째 이야기"의 개연성 논란#그것2리뷰 #그것2 #영화그것두번째이야기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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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괴물 복싱 챔피언과 견자단의 대결 시간 순삭 무술 액션의 끝판왕 엽문2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2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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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저주받은 자들> 예고편
이스라엘의 '지바티 여단'은 새로운 지역의 탐사를 수행하고,
'토머'와 '마카쉬'는 현장 취재를 온 IDF 대변인인 '아비브'와 팀을 이뤄 옛 베두인족의 정착지였던 지역을 탐사한다.
하지만 아들을 찾는 미스테리한 여인의 등장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꼬마와 개가 나타나고,
세 명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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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큐페이션 2 레인폴> 메인 예고편
드디어 전면전이 시작된다!
외계의 침공으로 지구가 점령된 지 2년
살아남은 저항군들은 반격을 준비한다.
한편, 평화를 원하는 동맹군들로 인해
외계 세력 내부의 분열이 일어나고
전쟁의 종식을 위해 손을 잡은 인류와 외계 동맹군은
거대한 전쟁을 끝낼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기회는 단 한번!
인류의 미래를 건 최후의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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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ㅎ 초성 별 최고의 영화
우연히 유튜브에서 ㄱ~ㅎ 초성 별 최고의 영화를 하길래 재밌을 거 같아서 한 번 해봐요 ㅋㅋ 여러분들도 해보시면 재밌을 듯 하네용. 쭉 훑어보니까 성격상 하나만 고르기는 불가능할 거 같아서 팬심(주관)과 객관 나눠서 해봤어요.
1. ㄱ
객관: <그래비티>
-최고의 우주 영화면서 개인적으로 알폰소 쿠아론의 최고작으로도 꼽는 영화입니다. 집에서 봤는데도 정말 몰입해서 봤고, 엔딩에선 진짜 미치는 줄 알았네요 ㅋㅋ 워낙 유명해서 안 보신 분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라도 안 보셨다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ㅎㅎ
주관: <겨울왕국>
-이미 블로그에 여러 번 언급해서 몇몇 이웃님들은 아실 수도 있지만.. 전 <겨울왕국>의 미친 팬입니다 ㅋㅋㅋㅋ <겨울왕국>은 극장에서 4번인가 5번인가 봤고, <겨울왕국 2>도 2번이나 봤죠 ㅎㅎ 그래서 안 뽑을 수가 없는.. 그런 작품입니당.
2. ㄴ
객관/주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건 뭐 이견이 없을.. 정말 최고의 작품입니다. 안톤 쉬거는 많이 들어봤음에도 정말 소름 돋는 캐릭터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코엔 형제의 최고작으로 꼽지만 개인적인 의견에서 그치지 않고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3. ㄷ
객관: <데어 윌 비 블러드>
-PTA 작품 중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가장 압도적인 힘이 넘쳐흐르는 영화를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고를 거 같아요. 특히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가 폭발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빠졌습니다 ㅋㅋ
주관: <다크 나이트>
-만약 이웃분들이 이걸 하신다면 'ㄷ' 리스트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할 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그만큼 인기도 있고 작품성도 있는 대작이죠 ㅎㅎ 놀란에 빠지게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4. ㄹ
객관/주관: <라라랜드>
-인생영화.
5. ㅁ
객관: <매그놀리아>
-진짜 곱씹어 볼수록 역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입니다. 추천드리는 PTA 작품들 중 하나. 여담이지만 9.5점에서 만점으로 올렸습니다 ㅋㅋ
주관: <미드나잇 인 파리>
-이제 곧(아마도 데이빗 핀처 끝나고) 우디 앨런 도장 깨기 할 건데 이 영화 땜에 우디 앨런 영화가 더 기대되는 중이에요. 그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ㅎㅎ 이거 외에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메멘토> 등이 있었어요.
6. ㅂ
객관: <분노의 주먹>
-마틴 스콜세지의 또 다른 명작. 개인적으로 확 와닿는 부분은 없었지만 스콜세지 최고작 중 하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거 같아요. 이거랑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랑 많이 고민했네요 ㅋㅋ
주관: <블레이드 러너 2049>
-이것도 여러 번 언급했던 제가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세계관부터 영상미 연출까지.. 진짜 안 좋아할 수가 없어요 ㅠ
7. ㅅ
객관/주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제일 좋아하는 지브리 작품. 이상하게 그리운 애니메이션입니다. 볼 때마다 괜스레 요상한 기분이 드는.. 지브리 감성의 집합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살인의 추억>, <쇼생크 탈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등 ㅅ에도 좋은 작품 많더라구요.
8. ㅇ
이건 진짜 도저히 못고르겠어서 추리고 추린 리스트만 알려드릴게요.
-<아이리시맨>, <어벤져스: 엔드게임>, <업>, <월-E>, <위플래쉬>, <이터널 선샤인>, <인사이드 르윈>, <인셉션>
9. ㅈ
객관: <조커>
-진짜 엄청난 에너지의 영화였어요. 이걸 극장에서 봤어요! ㅋㅋㅋㅋ 2019년에 좋은 영화 많았네요,,
주관: <주토피아>
-<겨울왕국>과 맞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ㅎㅎ 블로그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주토피아에 빠졌었죠.. ㅋㅋㅋ
10. ㅊ
객관/주관: <칠드런 오브 맨>
-이거 또한 역대급 영화입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진짜 영화 잘 만드네요 ㅋㅋ 이 작품이랑 <천공의 성 라퓨타>랑 고민 좀 했는데, <칠드런 오브 맨>이 더 좋았습니다.
11. ㅋ
객관/주관: <킬 빌>
-이거 안 봤으면 어떡할 뻔했는지.. 진짜 상상 이상으로 재밌어서 충격 먹을 정도였던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론 1편이 오락적인 측면에선 정점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네요 ㅋㅋ
12. ㅌ
객관: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세지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때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는 정말.. 여기 나오는 소녀가 조디 포스터인지도 몰랐어요 ㅋㅋ
주관: <타이타닉>
-인생 로맨스 영화. 개인적으로 명성만 듣고 갔다가 조금 실망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로맨스 영화 많이 안 보기도 해서 걱정 좀 했는데, 그 걱정을 한 번에 날려버린 영화입니다.. 이 계기로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 그리고 로맨스 영화에 좀 빠진 거 같아요 ㅋㅋ
13. ㅍ
객관: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것도 안 봤으면 어쩔 뻔했는지.. 강력 추천해 주신 타라님 감사합니다 ㅠㅠ
주관: <펀치 드렁크 러브>/<펄프 픽션>
-둘 중에 하나 못 고르겠습니다. 둘 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작품들이라서.. 그냥 둘 다 꼭 보세요 ㅋㅋ
14. ㅎ
객관: <헬프>
-생각보다 ㅎ이 없더라구요;; 그중에서 젤 좋았던 작품이 바로 <헬프>입니다. 좀 아쉽긴 하지만 좋은 작품이죠.
주관: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많이 등장하시는 쿠아론 감독님..ㅎㅎ 해리포터 시리즈도 너무 좋아하는데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ㅋㅋ 아즈카반의 죄수 감독이 쿠아론인지 최근에 알았는데 제 취향이 확실하다는 점을 다시금 깨달았네요,,
이렇게 모아보니 재밌네요. 아직 안 본 영화들도 많아서 좀 부족한 부분도 있긴 한데, 더 많이 보게 되면 고르기 힘들 거 같기도 하구요 ㅋㅋ 더 많이 보면 A-Z 리스트로도 한 번 해볼게요 :)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팬서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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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Verdens verste menneske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씨내랩으로부터의 초청을 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여 이번 달 최대 기대작이었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를 개봉 전에 보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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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의학을 공부하던 스물아홉 율리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찾아 세상으로 나온다.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진 율리에, 하지만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걸 원했고 조금씩 어긋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율리에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달려나간다.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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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영화를 보기 전, 영화의 제목만 보고 주인공이 처절한 사랑을해서 최악의 모습이 되는 내용일거라 예상했지만, 실제 줄거리는 내 예상을 빗겨갔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을 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말에서의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가 행한 모든 선택은 사실 고고한 연인간의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성적을 증명하기에 흥미에도 없는 의대를 들어간 모범생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학문들에 이것저것 발을 딛고,
자신의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벼운 원나잇도 즐기고,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셀이랑 교제를 하고,
그리고 이어서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택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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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쉬운 부분 /
영화의 앞부분은 흡입력이 좋았는데 뒤로 갈수록 뒷심이 딸린다.
마지막 11장과 12장은 어느정도 예상가능한 부분이라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영화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2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한 8장 정도로 컴팩트하게 만들었다면 감독이 말하고 싶은 의미도 관객들에게 더 잘 다가오고, 영화도 힘있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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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한 평 /
본인을 사랑하기에 의대를 포기하고 사진을 시작했고,
본인을 사랑하기에 내 옆의 연인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에게 갔고,
본인을 사랑하기에 내 몸 속의 아기가 떨어진 후 미소가 나왔다.
사랑하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
'나'를 사랑하면 누구에게나 '최악'으로 비춰질 수 있다.
별점은 10점 만점에 6.5점 드립니다.
그래도 좋은 영화이니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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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2018) 비평
<앙: 단팥 인생 이야기>와 일련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출연하며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배우 기키 키린이 2018년 9월 15일 향년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30대부터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할머니 역할을 도맡아왔던 그녀는 유작 <어느 가족>에서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그녀는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실제 배우의 육체와 겹쳐 묘한 감상을 길어 올린다. 그러나 죽음을 암시하는 배우의 신체와는 별개로 시바타 하츠에의 죽음은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을 차근히 밟아온 나에겐 다소 의문스러운 죽음이다. 이전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사망한 가족의 자장을 좇거나, 결말부에 가족 구성원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담아왔다. <어느 가족>의 하츠에처럼 서사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은 그의 영화 목록에서는 이례적이다. 특히 그 대상이 그간 그의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온 어머니라는 점에서 더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하츠에는 왜 영화 중간에 죽어야 했으며, 왜 하필 그녀가 죽어야 했는지 영화 전반을 둘러보며 그녀의 사인을 밝혀보자.
히로카즈 감독은 국내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어로 ‘만비키’(万引き)라는 ‘shoplifters’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동시에 ‘그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있다.”(<씨네21>, 2018.5.30.)라고 밝혔다. 후자의 의미를 따르면, 원제 <万引き家族>은 ‘훔쳐진 가족’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훔쳐진 가족인가. 시바타 가족은 혈연이 아닌 사회 혹은 실제 가족에게서 버려진 구성원들로 이뤄진 유사 가족이다. 유리(사사키 미유)와 쇼타(죠 카이리)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를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진 않지만, 가족 외부의 사람은 쇼타와 함께 거리를 지나가는 노부요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의 형상을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형태만 충족한 이 가족은 사회 시스템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해진다. 사회는 영화 종반부에 그들을 프레임 속 각자 다른 자리에 불러 세우고 유사 가족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시바타 가족을 해체한다. 즉, 사회는 혈연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유사 가족을 훔쳐낸다. 그런데 그 역도 성립한다. 시바타 가족은 동기의 무고함을 차치하고 보면 진짜 가족에게서 구성원들을 훔쳐 온 가짜 가족이다. 오사무는 차에 방치된 쇼타를 주워오고, 노부요는 유리에게 폭력을 가하던 진짜 가족에게서 아이를 법적 절차 없이 입양한다. 하츠에 역시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전 남편의 손녀인 것을 알면서도 아키의 가족에게 묵인하고, 시바타 부부도 오사무가 노부요에게 폭력을 가하던 남편을 죽인 뒤 사회적 계약 없이 맺어진 관계다.
그런데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집으로 들인 사연은 불투명하다. 단지 하츠에가 그들을 선택했다는 대사만 주어질 뿐 구체적인 동기는 말해지지 않는다. 하츠에는 전 남편이 죽은 뒤에도 그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을 찾아가 위자료를 받아내는 속물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연금을 목적으로 집에 얹혀살며 그녀의 돈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시바타 부부를 가족으로 선택한 이유가 의뭉스럽다. 하츠에의 진짜 아들은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는 무심한 아들이고, 그녀는 보험을 들어서라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고를 전하고 싶어 한다. 정황상 그녀는 자신의 노후를 함께 해줄 가족이 필요했던 인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 가족에게는 '워크셰어(Workshare)'라는 공동의 규칙이 존재한다. 오사무가 쇼타에게 하는 “유리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같이 살기 편하지 않겠어?”라는 발언에서 시바타 가족은 암묵적으로 그 공모를 준거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금으로 경제적 자족성을 갖춘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받아들인 이유는 시바타 가족의 속물적인 규칙과 어긋난다. 이 불균질을 감수하고서라도 히로카즈 감독이 그녀를 유사 가족 안에 편입시킨 이유가 뭘까.
하츠에는 이름의 존재에서도 다른 가족들과 궤를 달리한다. 하츠에를 제외하고 시바타 가족의 구성원들은 가족 외부에서 불렸던 이름과는 다른 가명을 하나씩 갖고 있다. 유리를 찾는 TV 뉴스를 보고 그녀를 몰래 키우기로 합의한 가족들은 유리에게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그녀를 숨긴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보다 전이지만, 친부모에게서 받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쇼타 역시 오사무로부터 그의 본명인 ‘쇼타’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 시바타 부부와 아키 역시 본명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쇼타-오사무, 유코-노부요, 사야카-아키. 숨겨야 하거나 숨기고 싶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본명이 사회와 진짜 가족에게서 밀려났을 당시의 이름이라고 본다면, 그들은 가명을 지어 과거의 이름을 숨기려 한다(가족이 해체되는 취조실에서 사회로부터 숨겨진 이름이 끄집어내지는 귀결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하츠에로부터 이어진 ‘시바타’라는 성으로 묶인다. 즉, 과거의 이름들을 은닉하기 위해 지은 새로운 이름들은 하츠에의 성을 받아 온전한 이름으로 기능한다.
이름 외에도 아이들은 어른으로부터 무엇인가 유전된다. 쇼타와 유리는 각각 가족을 부양하려다 다친 오사무의 오른발과 가족으로부터 받은 노부요의 상처가 유전처럼 전해진 아이들이다. 오사무는 공사현장 텅 빈 공간에서 “다녀왔어” “어, 쇼타”라고 자문자답한다. 오사무의 본명이 쇼타라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관객들은 그가 불이 꺼진 곳에서 자신을 반겨줄 누군가를 바라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빠라는 호칭에 집착하던 오사무는 버려진 아이를 어린 시절 외로웠던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어, 쇼타”라고 반겨줄 아버지가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서 폭력을 당한 기억이 있는 노부요는 유리가 친부모에게서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욕실에서 자신의 상처와 닮은 유리의 상처를 보고 아이를 끌어안아 몸에 품는다. 어쩌면 시바타 부부는 아이들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가역적인 가족력처럼 쇼타는 다시 고아가 되고 유리는 다시 폭력적인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남은 하츠에로부터 아키에게는 무엇이 유전되었을까. 쇼타와 유리가 다시 시바타 가족이 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키는 아무도 없는 하츠에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섹스 노동을 할 때 가명으로 동생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아키는 동생에게 악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녀는 하츠에가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금전적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진짜 가족이 아닌 하츠에의 집에 다시 돌아올 정도로 실제 가족에게 감정의 골이 깊다. 그래서 그녀는 하츠에와 같이 실제 가족이 존재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살아가려 한다. 애정결핍이 있고 속물적인 가족의 규칙에 반감을 표했던 아키는 하츠에에게서 집을 이어받아 새로운 대안 가족을 만들어 하츠에의 자리를 대신할 혐의가 있다. 즉, 집의 소유주이자 재개발을 넌지시 바라는 부동산 업자로부터 집을 사수하는 하츠에는 아키에게 다른 가짜 가족이 거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집을 물려준다.
<어느 가족>에서 버려질 법한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집의 풍경은 마치 버려진 시바타 가족의 은유처럼 보인다. 일본 가족영화의 뿌리인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방처럼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집은 미학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가족은 그 단어의 피상적인 뜻처럼 집으로 묶인 집단이다. 따라서 사회 시스템 속 가족의 형성과 위기를 탐구해온 히로카즈의 영화적 관심사에서 집은 포기할 수 없는 무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은 사회의 공간과 대비하여 의미를 형성해왔다. <어느 가족>의 집도 사회와 시바타 가족을 구분하는 경계처럼 존재한다. 영화 초반부 집 내부는 가족의 형성이 주는 안온한 기운이 형형한 공간이다. 오사무의 자상한 얼굴과 노부요의 모성은 관객에게 시바타 가족 사이에 복류하던 도덕적 균열을 가리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그들은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윤리를 비껴가지만,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집 안에서는 문제없는 가족처럼 보인다.
과거를 숨기려는 이름들에 성을 주고 가족을 사회와 경계 지어주는 은닉처를 제공하는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 구성원들에겐 집과 같다. 그래서 집 밖의 공간인 해수욕장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며 가족이 되려는 그들을 보면서 하츠에는 마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안녕을 고한다. 그 이후 집에 묻힌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이 사회로부터 해체되는 취조실 시퀀스 도중 그녀 역시 집에서 꺼내진다. 하츠에가 집이고 그 집이 사회로부터 시바타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였다면, 하츠에의 죽음으로부터 가족이 사회에 노출되는 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어느 가족>은 집 내부에 편재했던 따스한 온기를 결말까지 안일하게 이어가지 않는다. 영화는 하츠에의 죽음 이후, 피가 아닌 마음과 유대로 연결되었다고 말하던 가짜 가족들의 옆구리 바짝 서늘한 공기를 밀어 넣는다. 하츠에가 죽자 오사무와 노부요는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녀를 묻기 위해 욕실 바닥을 판다. 양심의 가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얼굴은 벽 너머로 할머니의 시체를 쓰다듬는 아키의 슬픈 손짓과 대비되어 섬뜩하다. 뒤이어 시바타 부부는 하츠에의 유산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방치한 어머니를 악인으로 비추지 않음으로써 사회 시스템의 부재를 지목했던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선 어른을 포함한 가족 안으로 카메라를 끌고 와 문제를 가족내부에서도 진단한다. 단순히 사회를 적으로 두고 투쟁하는 가족을 숭고하게 그리지 않고 가족 내에 산재한 위태로움을 기어코 들춰내는 이 영화는 가족의 실패를 사회 시스템만의 잘못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유사 가족의 나체는 아이 쇼타에 의해 드러난다. 늙은 하츠에가 불온한 가족을 지탱하는 온기였다면 어린 쇼타는 태만한 가족의 폐부를 찌를 냉기다. 홍수정 비평가의 “누군가는 가족 모두를 경찰 앞에 불러모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영화가 한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이 진정 어린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는 것뿐인가."(<씨네21>, 2018.08.16.)라는 의견에는 함께할 수 없다. 쇼타는 도덕적 규범에 게을렀던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가족 외부에 호기심을 피력하는 인물이다. 하츠에가 죽자 그녀가 가려주던 가족의 불온을 감지한 쇼타는 유리에게 도둑질의 전이를 한 차례 막아준 문방구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래서 이제 아이는 두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선다. 마트에서 유리의 도둑질은 들키지 않았지만, 쇼타는 양파를 들고 도망치며 주의를 끈다. 다시 말해, 쇼타는 유리가 걸릴 걸 두려워한 게 아니라 도둑질하는 행위 자체를 막기 위해 도망친다. 그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자문했을 것이다. 결국 아이는 가짜 가족의 집이 아닌 막다른 다리를 선택한다. 홍수정 비평가의 의문이 생긴 이유는 상처를 피해의 흔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쇼타의 상처가 시바타 가족이 편안하게 이어가던 잘못된 내력에서 절연하려는 결연한 성장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가족을 예비할 어린아이 손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쇼타의 환부다. 영화는 쇼타가 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발을 오사무의 다친 발과 같은 오른발로 슬며시 겹쳐둔다. 오사무의 발은 사회 서비스인 산재보험에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쇼타의 다친 발은 쇼타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방치된다. 그들의 환부는 부위만 같을 뿐 각각 사회와 대안 가족에 의해 곪아간다. 즉, 영화는 쇼타와 오사무의 환부에 외면하는 방관자를 다르게 지목한다. 이 뒤바뀐 진술 사이에 하츠에의 죽음이 있다. 사회 시스템의 부재가 가족의 내부결함으로 도치되는 경계에서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이어주던 집으로서의 하츠에가 사라지는 건, <어느 가족>이 함께 지목하려 했던 두 의문을 스크린 위에 세우기 위한 서사적 결단인 셈이다.
유사 가족의 무력함 이전에 가족 내에 떠돌던 생기를 목격했던 나로서는, 취조실의 조사관이 시바타 가족에게 묻는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킨 게 양심에 걸리지 않았나요?”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해요.”와 같은 선명한 발언들이 시바타 가족에게 심정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사관의 물음은 언젠가 시바타 가족이 스스로 물었어야 하는 지연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오사무의 “가르칠 게 도둑질밖에 없었다.”와 노부요의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워왔을 뿐이다.”라는 답변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오사무가 아버지로서의 해야 한다고 믿었던 역할이 오인된 착각이었고, 자신의 상처가 아이에게 이어지지 않게 하려던 노부요의 애처로운 자기방어였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끝끝내 가족으로 불리지 못하고 다시 부모를 잃어버린 쇼타와 아파트 난간으로 내몰린 린의 얼굴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가족의 형성과 해체만 보여줄 뿐 아이들은 시작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이 막을 내린다.
<어느 가족>의 돌아온 결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바타 가족은 쇼타를 버리고 도주하려다 한 빛에 포착되는데, 조명을 든 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마치 객석에서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쇼타를 버리려는 시바타 가족의 이기심이 관객에게 들킨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 이어서, 취조실 장면에서도 시바타 가족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흡사 그들이 관객에게 답변하는 듯 보인다. 사회와 유사 가족, 두 집단 모두의 불완전함을 전시하며 끝나는 영화는 막연한 낭만주의적인 희망을 품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시작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리가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하고 스스로 난간 밖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쇼타가 이제는 아빠를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유리를 구해줄 새로운 가족의 부재와 쇼타의 속삭임이 오사무에게 닿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쇼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유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목격자로서 관객이 존재한다. 시바타 가족의 자기변호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언급한 영화는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유리와 쇼타가 자라 오사무와 노부요가 될지도 모르는 심증만 남은 재판에서 유일한 증인인 관객이 발언할 차례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헤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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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많은 평행우주에서의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감독: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진:양자경,스테파니 수,케 후이 콴,제임스 홍,제이미 리 커터스
시놉시스
에블린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웨이먼드와 결혼을 했다. 홍콩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세탁소를 차렸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딸인 조이가 대학을 자퇴하고 자신의 애인인 여자친구를 소개하며 나타난다. 그런 조이가 실망스럽기도 하고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 한편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에블린의 아버지와 함께 세무서를 가게 되지만 웨이먼드의 갑작스러운 돌방 행동에 놀라고 만다. 사실은 이 우주뿐만이 아니라 다중우주가 존재하는 것이었고 수천 명의 똑같은 자신들이 각각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과연 이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지만 각각 다르게 살고 있는 평행우주의 또 다른 나의 정신들을 이 우주에 불러오며 악당들과 싸운다.
에블린이 지금의 삶에 후회하는 이유
에블린의 아버지는 에블린이 웨이먼드와 결혼하기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고 미국으로 가서 세탁소를 운영했지만 자신이 나이가 들자 결혼한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 하지만 자신의 딸과 닮은 조부 투파키라는 이름의 빌런(악당)이 전 우주적 재앙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행우주에서 자신과 똑같은 에블린들의 정신을 이용하여 우주를 위협하는 자들과 맞서 싸운다. 사실은 웨이먼드가 말하길 다중우주를 넘은 알파버스가 존재하며 그간 에블린이 살아온 삶이 코믹하기도 하고 힘든 일들이 많아서 자신에게 더는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점점 괴이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극복해 나간다. 만약 자신이 선택한 삶이 수많은 선택 중에 하나라고 한다면 여러 갈림길이 생길 것이고 각각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게 평행우주 속 법칙이라고 하나 자신이 만족하지 못한 삶이라고 해서 그 삶이 무조건 안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그 선택을 한 것도 자신이기 때문에 후회할 수도 있으나 앞으로 또 다른 수많은 선택들을 골라야 하는 게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이기도 하다. 나도 지나고 보면 후회하는 것이 많지만 아쉽게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에블린의 입장에 공감이 되는 건 당연한 걸까?
수많은 선택과 갈림길 중에 나는 이 인생을 선택해 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의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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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퓨리오사 | 모래맛과 쇠맛은 덜고, 눈물맛은 더하고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명 붕괴 45년 후. 풍요로운 ‘녹색의 땅’에서 지내던 ‘퓨리오사’(안야 테일러-조이)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의 바이커 군단에 납치돼 가족과 행복을 모두 잃어버린다. 인질이 된 퓨리오사는 디멘투스의 어깨너머로 황무지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힌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날만을 기다리며.
그러던 어느 날, 퓨리오사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황무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가스타운'을 점령한 디멘투스가 '시타델'의 지도자 '임모탄 조'(러치 험)와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그녀를 임모탄 조에게 넘겨 버린 것. 믿음직한 동료 ‘잭’(톰 버크)의 도움을 받으면서 퓨리오사는 시타델의 전사로 거듭나고, 그녀는 아껴두었던 복수의 칼날을 마침내 꺼내든다.
형 만한 아우 여기 있다
2015년 여름에 개봉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는 신드롬이었다. 강렬한 모래맛 영상미와 쇠맛 액션은 센세이셔널했다. 드라마를 최소화하고 액션에 집중하는 <매드맥스> 시리즈 중에서도 유달리 액션에 힘을 잔뜩 준 덕분이었다. 전작이 <해피 피트>와 <해피 피트 2>인, 70세 노감독 조지 밀러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관객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국내에서는 390만 관객, 월드와이드 3억 7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했다. 평단도 다르지 않았다.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 분장상, 미술상, 편집상, 음향편집상, 음향효과상을 싹쓸이했고, BBC가 100대 21세기 영화에 선정하기도 했다.
자연히 속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를 향한 기대는 컸다. <퓨리오사>는 <분노의 도로>에서 주인공 맥스보다도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퓨리오사의 과거사를 다룬 프리퀄로, 제77회 칸 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됐다. 9년 만에 돌아온 프리퀄은 그 기대에 부응한다. 비록 전편만큼의 모래맛과 쇠맛은 아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는 퓨리오사의 눈물이 그 빈자리를 훌륭히 채우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
<퓨리오사>는 <분노의 도로>를 보고 한 번쯤 가졌을 의문점을 해소하는 데 주력한다. 늪지대로 변하기 전 녹색의 땅의 모습. 그곳에서 보낸 퓨리오사의 유년 시절. 그녀가 납치당한 계기와 시타델에서의 성장기. 그가 임모탄 조의 전적인 신뢰를 받는 장군으로 거듭나는 서사시와 의수를 달게 된 사연. '버자드'와 '바위 라이더'의 정체. 심지어는 맥스와의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까지.
과거를 단순히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도 않는다. 전편과의 연계점을 명확히 보여주며 퓨리오사의 전체 서사를 곱씹게 만든다. 어머니를 죽인 빌런 디멘투스에게 복수하는 퓨리오사. 그녀는 복수를 통해 그에게 빼앗긴 어머니와 유년 시절을 되찾고, 구원을 얻고자 한다. 이는 본편에서 그녀가 유독 임모탄 조의 여자들, 곧 엄마가 될 여성을 구원하려고 애쓴 동기로 작용한다.
또 그녀가 디멘투스를 응징하는 방식은 그녀가 시타델을 점령한 후 새로운 녹색의 땅으로 만드는 전편의 결말을 더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와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처럼 <퓨리오사>의 결말이 전편의 시작으로 곧장 이어지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분노의 도로>의 하이라이트가 삽입된 엔딩 크레디트 덕분에 그 감흥은 배가 된다.
모래맛과 쇠맛이 덜한 이유
물론 전편과의 차이가 작지는 않다. 전편이 퓨리오사의 탈출 계획이라는 사건을 쫓은 반면, <퓨리오사>는 퓨리오사를 캐릭터에 주목하기 때문. 전자가 직선적이라면, 후자는 곁가지 더 많고 서정적이다. 정키 XL이 다시 참여한 음악만 봐도 접근법의 차이가 분명하다. 웅장하고 공격적이었던 <분노의 도로>의 음악과는 달리 <퓨리오사>의 음악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이는 빨간 기타리스트의 존재감이 전편 같지 않은 이유다.
액션도 마찬가지다. 물론 양과 질은 진일보했다. 4륜 이상 차량 35대와 바이크 110대가 동원된 액션 시퀀스의 스케일은 압도적이다. 연출도 더 입체적이다. 패러글라이딩과 차 아래 공간을 활용해 전편보다 더 입체적이고 공간감이 느껴지는 액션을 보여준다. 하지만 드라마를 다루는 분량이 늘어나다 보니 액션 시퀀스 사이 공백은 상대적으로 길다. 그 결과 전체적인 임팩트가 덜하고, 모래맛과 쇠맛이 약하다고 느낄 여지가 있다.
접근법의 변화는 캐릭터를 다룰 때도 일장일단이 있다. 퓨리오사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그녀만의 특별함은 사라지는 듯하다. 퓨리오사는 기존 할리우드 여전사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캐릭터였다. 싸우는 목적이 달랐다. 퓨리오사는 현재의 삶 대신 더 나은 삶과 구원을 찾았다. 그래서 맥스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임모탄 조의 여자를 빼돌려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땅을 향해 달릴 생각만 했다.
하지만 <퓨리오사>를 보고 나면 전편에서 목격한 퓨리오사의 서사가 장대한 복수극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곧 그녀 역시 빼앗긴 삶에 대한 복수와 모성애 때문에 싸우는 일반적인 여전사 중 하나로 전락한다. <에일리언>의 리플리나 <터미네이터>의 사라 코너처럼. 퓨리오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된 나머지 그녀의 신비감, 아우라까지 약해지고 만다. 프리퀄의 근본적인 한계까지는 넘지 못한 셈이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하지만 퓨리오사의 복수극을 곱씹어 보면 약간의 아쉬움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에 응축된 이야기를 뜯어보는 재미 덕분이다. 특히 새 빌런 디멘투스와 퓨리오사의 관계가 흥미롭다. 의외로 둘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가족을 잃었다. 디멘투스는 아이를, 퓨리오사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그렇게 악만 남은 둘은 복수와 생존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채 발악한다.
그런데 발악의 방향성은 정반대다. 디멘투스의 발악은 파괴적이다. 딸의 유품인 인형을 망토에 매단 채 사막과 황야를 헤집고 다니면서 약탈하고, 자기 같은 피해자를 다시 만들어낸다. 퓨리오사는 다르다. 그녀는 현재를 딛고 새 미래를 꿈꾼다. 고향에서 가져온 열매의 씨앗을 심어 새 나무를 키우려 한다. 즉, 디멘투스가 절망적인 현재에 갇힌 반면, 퓨리오사는 현재의 모래 폭풍을 뚫고 미래를 바라본다.
이 대목은 전편 못지않게 인상적인 여성 서사다. 디멘투스와 퓨리오사의 대립은 파괴적인 부성애와 재생산의 모성애의 대조나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퓨리오사는 아버지를 자처하는 디멘투스와의 관계를 끊어낸다. 그를 단순히 고문하거나 죽이지 않고 그의 몸 위에 나무를 심어 그를 살아있는 거름으로 삼는다. 그녀가 잭과 동료이자 연인이 되는 이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잭 역시 다음 세대를 먼저 생각할 줄 알기 때문.
액션을 넘어 정치극까지
더 나아가 퓨리오사의 복수극은 정치 드라마로 확장된다. 퓨리오사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임모탄 조와 디멘투스의 차이는 명확하고, 그 덕분에 그들의 합종연횡을 지켜보는 묘미도 커진다. 사실 퓨리오사는 디멘토스보다도 임모탄 조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단지 물과 같은 자원의 독점 여부를 두고 비전의 모습과 방법론이 달랐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임모탄 조는 퓨리오사가 그러했듯이 디멘투스와 싸울 수밖에 없다. 미래를 걱정하는 자와 현재만 사는 자의 충돌은 필연적이니까. 실제로 임모탄 조가 물, 가스, 식량, 무기 공급을 유지하며 장기적인 생존을 추구하는 반면, 디멘투스는 지금 당장 먹고살고 자원을 소비하기에 급급하다. 문명 붕괴 45년 후라는 시간대를 고려하면 이 전쟁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치극의 묘미는 <매드맥스> 세계관이 확장하는 데도 공헌한다. 두 빌런은 전편에서 짧게 언급된 공간을 오가며 전쟁을 펼치기 때문. 전작이 사막과 황무지라는 자연환경을 적극 활용했다면, 이번에는 세 개의 도시가 전면에 등장해 권력의 삼각형을 묘사한다. 재등장한 시타델은 물론, 유전 한가운데에 위치한 가스타운과 거대한 광산을 연상시키는 무기 농장의 이미지가 뇌리에 박히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두 주연의 연기도 일품이다. 안야 테일러-조이의 경우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약한 소녀부터 냉철한 여전사까지 더 폭넓은 이미지를 소화하며 미완의 퓨리오사를 성공적으로 탄생시켰다. 디멘투스는 잔인함과 유머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아낸 크리스 헴스워스 덕분에 임모탄 조에 비견될 만한 빌런이 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퓨리오사>는 전편 못지않은 걸작이다. 사건이 아닌 인물을 다루다 보니 덜 직선적이고, 그래서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다. 하지만 더 풍성해진 <매드맥스> 세계관을 맛보고, 퓨리오사의 복수극을 두세 번 곱씹어 보는 경험은 거부하기 어려운 영화적 경험이다. 전편에 열광한 관객이라면 더더욱.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분노의 도로> 그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래와 쇠를 달구는 그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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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캡틴
더 캡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지만, 비이성, 광기의 시대에서는 나타날 수밖에 없는 블랙 코미디. 영화는 매우 역설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입장에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마치 '세르비안 필름'처럼 세르비아인 감독이 자기 나라에서 저지른 폭력을 포르노에 빗대어 고발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헤롤트가 우연히 발견한 장교복을 입으면서, 제복의 힘에 경도되는 과정과 인간성이 파괴되는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4월, 헤롤트 일병은 탈영한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 시기에 독일군 탈영병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전쟁 끝무렵이니 완전히 수세에 몰린 독일군이 계속 후퇴하고 있었고, 여기서 죽는 건 그야말로 개죽음이라고 생각한 병사들이 하나둘 탈영을 시도했다.
독일 헌병대에서는 이렇게 탈영한 군인을 잡아들이거나 즉결 처형하기도 했는데, 이 와중에 헤롤트 일병의 실화가 발생한다. 헤롤트는 탈영을 하지만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막막하다. 그러다 우연히 길가에 세워진 군용 짚차에서 트렁크를 발견하고, 그 안에 공군 대위의 제복과 군화를 비롯한 훈장 등 완벽한 세트를 발견한다.
고작 스무 살의 어린 헤롤트였지만, 이미 1년 정도 전방에서 전투에 참전했었고, 초반에는 매우 영웅적인 군인이어서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로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 헤롤트가 어떤 이유에서 탈영을 한 것인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리지만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철십자 훈장까지 받은 경력을 보면, 나름 배짱도 있고, 머리도 있는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헤롤트는 장교 군복을 차려 입고, 스스로 장교가 된 것으로 자기 최면 및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탈영병을 모아 '헤롤트 부대'를 만든다. 그는 후방을 다니며 마주치는 탈영병을 규합하고, 농가에서 밥과 술을 얻어 먹으며 다니는데, 탈영병을 추적하는 헌병대를 만나 위기에 놓이지만, 헤롤트는 자기가 '최고지도자'의 직접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큰소리 치며 위기를 넘긴다.
헌병대 대위와 함께 탈영병들이 잡혀 있는 임시수용소에 도착해 수용소장 쉬테의 환대를 받는다. 쉬테는 탈영병들을 죽이고 싶지만, 그럴 경우 자신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불만만 터뜨리고 있는데, 헤롤트가 쉬테에게 '총통의 특명'을 받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탈영병들을 처리하겠다고 큰소리 친다.
헤롤트는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공군 장교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장교가 되었다는 확신에 차서 말하고 행동한다. 그가 일병이었을 때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판단과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탈영병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헤롤트와 그의 부대가 탈영병 약 90여 명을 대공포로 살해한다. 탈영병이라 해도 같은 독일인이고, 전선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임에 틀림없으며, 헤롤트 자신도 탈영병이었던 걸 생각하면, 헤롤트는 자신이 탈영병이라는 죄의식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헤롤트가 갑자기 장교복을 입고, 장교의 권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이때 헤롤트의 본성이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전투를 통해 선량한 청년이었던 헤롤트가 점점 괴물로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헤롤트의 행위가 자신이 의식하지 않고 있어도, 독일군이 같은 독일군을 살해한다는 점에서 나치의 폭력성, 전쟁광 히틀러와 독일군의 야만성을 풍자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헤롤트의 광기는 순박한 청년이 전쟁에서 미쳐가는 과정과 함께, 당시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광기와 폭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사건은 뒤에서 발생한다. 탈영병들을 살해한 헤롤트와 그의 부대는 신고를 받고 들이닥치 육군헌병대에 체포된다. 헤롤트도 이 과정에서 체포되며 그가 장교가 아닌, 일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헤롤트는 군사법정에 서게 되는데, 재판장은 장교사칭, 탈영병 학살의 죄를 물어 사형을 집행하려 하지만, 다른 장교가 헤롤트의 행동은 독일군인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행동이며, 독일이 전쟁에서 져도 나중에 독일군의 일부는 비밀 저항조직을 만들어 적들과 싸울 것이며, 이때 헤롤트 같은 군인이 필요한 인재라고 옹호한다.
독일의 군부는 연합군에 패배한 다음에도 어떻게든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헤롤트 같은 인물을 독일군의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독일군부는 히틀러처럼 이미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헤롤트가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무사히 탈출해 숲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실제 헤롤트는 그로부터 얼마 살지 못하고 참수형을 당한다.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독일이 패하고, 헤롤트는 항구도시이자 해군주둔지인 빌헬름스 하펜으로 가서 굴뚝청소부로 일하며 살았다. 그가 욕심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다면 아마 늙어죽을 때까지 살았겠지만, 1945년 5월에 빵을 훔치다 영국 해군에게 체포된다. 당시 영국 해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단지 빵을 훔쳤다는 가벼운 죄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헤롤트는 자기가 군인이었을 때 저질렀던 장교사칭과 탈영병 학살까지 모두 밝혀졌고, 영국 해군은 헤롤트를 끌고 수용소가 있던 아셴도르퍼모어의 수용소 부지로 이송되어 학살당한 장소에서 195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영국 해군은 헤롤트와 그의 부대원들을 검거했고, 모두 여섯 명이 체포되어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헤롤트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1946년 11월 29일, 볼펜뷔텔 교도소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모두 참수되었다.
이때 헤롤트의 나이는 불과 스물 한 살. 전쟁이 헤롤트를 괴물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헤롤트의 내면에 있던 괴물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권력을 가진 자가 광기에 휩싸이기 쉽고, 이성을 잃으면 얼마나 위험해지는가를 헤롤트의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어리기만한 헤롤트는 그래서 더욱 쉽게 권력의 노예, 권력의 광기에 영혼을 빼앗겼을 수 있다. 당시 독일 전체가 이미 미쳐버렸고, 나치의 광기에 휩싸인 뒤여서 청년들의 생각도 그렇게 세뇌되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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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소설과 비교분석하는 영화 '그것2' 리뷰
스티븐 킹의 동명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비교
그리고 소설에서 빠진 설정과
이에 따른 영화 "그것:두 번째 이야기"의 개연성 논란#그것2리뷰 #그것2 #영화그것두번째이야기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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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괴물 복싱 챔피언과 견자단의 대결 시간 순삭 무술 액션의 끝판왕 엽문2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2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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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저주받은 자들> 예고편
이스라엘의 '지바티 여단'은 새로운 지역의 탐사를 수행하고,
'토머'와 '마카쉬'는 현장 취재를 온 IDF 대변인인 '아비브'와 팀을 이뤄 옛 베두인족의 정착지였던 지역을 탐사한다.
하지만 아들을 찾는 미스테리한 여인의 등장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꼬마와 개가 나타나고,
세 명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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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큐페이션 2 레인폴> 메인 예고편
드디어 전면전이 시작된다!
외계의 침공으로 지구가 점령된 지 2년
살아남은 저항군들은 반격을 준비한다.
한편, 평화를 원하는 동맹군들로 인해
외계 세력 내부의 분열이 일어나고
전쟁의 종식을 위해 손을 잡은 인류와 외계 동맹군은
거대한 전쟁을 끝낼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기회는 단 한번!
인류의 미래를 건 최후의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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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ㅎ 초성 별 최고의 영화
우연히 유튜브에서 ㄱ~ㅎ 초성 별 최고의 영화를 하길래 재밌을 거 같아서 한 번 해봐요 ㅋㅋ 여러분들도 해보시면 재밌을 듯 하네용. 쭉 훑어보니까 성격상 하나만 고르기는 불가능할 거 같아서 팬심(주관)과 객관 나눠서 해봤어요.
1. ㄱ
객관: <그래비티>
-최고의 우주 영화면서 개인적으로 알폰소 쿠아론의 최고작으로도 꼽는 영화입니다. 집에서 봤는데도 정말 몰입해서 봤고, 엔딩에선 진짜 미치는 줄 알았네요 ㅋㅋ 워낙 유명해서 안 보신 분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라도 안 보셨다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ㅎㅎ
주관: <겨울왕국>
-이미 블로그에 여러 번 언급해서 몇몇 이웃님들은 아실 수도 있지만.. 전 <겨울왕국>의 미친 팬입니다 ㅋㅋㅋㅋ <겨울왕국>은 극장에서 4번인가 5번인가 봤고, <겨울왕국 2>도 2번이나 봤죠 ㅎㅎ 그래서 안 뽑을 수가 없는.. 그런 작품입니당.
2. ㄴ
객관/주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건 뭐 이견이 없을.. 정말 최고의 작품입니다. 안톤 쉬거는 많이 들어봤음에도 정말 소름 돋는 캐릭터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코엔 형제의 최고작으로 꼽지만 개인적인 의견에서 그치지 않고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3. ㄷ
객관: <데어 윌 비 블러드>
-PTA 작품 중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가장 압도적인 힘이 넘쳐흐르는 영화를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고를 거 같아요. 특히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가 폭발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빠졌습니다 ㅋㅋ
주관: <다크 나이트>
-만약 이웃분들이 이걸 하신다면 'ㄷ' 리스트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할 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그만큼 인기도 있고 작품성도 있는 대작이죠 ㅎㅎ 놀란에 빠지게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4. ㄹ
객관/주관: <라라랜드>
-인생영화.
5. ㅁ
객관: <매그놀리아>
-진짜 곱씹어 볼수록 역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입니다. 추천드리는 PTA 작품들 중 하나. 여담이지만 9.5점에서 만점으로 올렸습니다 ㅋㅋ
주관: <미드나잇 인 파리>
-이제 곧(아마도 데이빗 핀처 끝나고) 우디 앨런 도장 깨기 할 건데 이 영화 땜에 우디 앨런 영화가 더 기대되는 중이에요. 그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ㅎㅎ 이거 외에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메멘토> 등이 있었어요.
6. ㅂ
객관: <분노의 주먹>
-마틴 스콜세지의 또 다른 명작. 개인적으로 확 와닿는 부분은 없었지만 스콜세지 최고작 중 하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거 같아요. 이거랑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랑 많이 고민했네요 ㅋㅋ
주관: <블레이드 러너 2049>
-이것도 여러 번 언급했던 제가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세계관부터 영상미 연출까지.. 진짜 안 좋아할 수가 없어요 ㅠ
7. ㅅ
객관/주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제일 좋아하는 지브리 작품. 이상하게 그리운 애니메이션입니다. 볼 때마다 괜스레 요상한 기분이 드는.. 지브리 감성의 집합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살인의 추억>, <쇼생크 탈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등 ㅅ에도 좋은 작품 많더라구요.
8. ㅇ
이건 진짜 도저히 못고르겠어서 추리고 추린 리스트만 알려드릴게요.
-<아이리시맨>, <어벤져스: 엔드게임>, <업>, <월-E>, <위플래쉬>, <이터널 선샤인>, <인사이드 르윈>, <인셉션>
9. ㅈ
객관: <조커>
-진짜 엄청난 에너지의 영화였어요. 이걸 극장에서 봤어요! ㅋㅋㅋㅋ 2019년에 좋은 영화 많았네요,,
주관: <주토피아>
-<겨울왕국>과 맞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ㅎㅎ 블로그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주토피아에 빠졌었죠.. ㅋㅋㅋ
10. ㅊ
객관/주관: <칠드런 오브 맨>
-이거 또한 역대급 영화입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진짜 영화 잘 만드네요 ㅋㅋ 이 작품이랑 <천공의 성 라퓨타>랑 고민 좀 했는데, <칠드런 오브 맨>이 더 좋았습니다.
11. ㅋ
객관/주관: <킬 빌>
-이거 안 봤으면 어떡할 뻔했는지.. 진짜 상상 이상으로 재밌어서 충격 먹을 정도였던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론 1편이 오락적인 측면에선 정점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네요 ㅋㅋ
12. ㅌ
객관: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세지 영화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때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는 정말.. 여기 나오는 소녀가 조디 포스터인지도 몰랐어요 ㅋㅋ
주관: <타이타닉>
-인생 로맨스 영화. 개인적으로 명성만 듣고 갔다가 조금 실망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로맨스 영화 많이 안 보기도 해서 걱정 좀 했는데, 그 걱정을 한 번에 날려버린 영화입니다.. 이 계기로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 그리고 로맨스 영화에 좀 빠진 거 같아요 ㅋㅋ
13. ㅍ
객관: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것도 안 봤으면 어쩔 뻔했는지.. 강력 추천해 주신 타라님 감사합니다 ㅠㅠ
주관: <펀치 드렁크 러브>/<펄프 픽션>
-둘 중에 하나 못 고르겠습니다. 둘 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작품들이라서.. 그냥 둘 다 꼭 보세요 ㅋㅋ
14. ㅎ
객관: <헬프>
-생각보다 ㅎ이 없더라구요;; 그중에서 젤 좋았던 작품이 바로 <헬프>입니다. 좀 아쉽긴 하지만 좋은 작품이죠.
주관: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많이 등장하시는 쿠아론 감독님..ㅎㅎ 해리포터 시리즈도 너무 좋아하는데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ㅋㅋ 아즈카반의 죄수 감독이 쿠아론인지 최근에 알았는데 제 취향이 확실하다는 점을 다시금 깨달았네요,,
이렇게 모아보니 재밌네요. 아직 안 본 영화들도 많아서 좀 부족한 부분도 있긴 한데, 더 많이 보게 되면 고르기 힘들 거 같기도 하구요 ㅋㅋ 더 많이 보면 A-Z 리스트로도 한 번 해볼게요 :)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팬서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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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Verdens verste menneske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씨내랩으로부터의 초청을 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여 이번 달 최대 기대작이었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를 개봉 전에 보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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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의학을 공부하던 스물아홉 율리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찾아 세상으로 나온다. 파티에서 만난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진 율리에, 하지만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걸 원했고 조금씩 어긋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율리에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달려나간다.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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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영화를 보기 전, 영화의 제목만 보고 주인공이 처절한 사랑을해서 최악의 모습이 되는 내용일거라 예상했지만, 실제 줄거리는 내 예상을 빗겨갔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을 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말에서의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가 행한 모든 선택은 사실 고고한 연인간의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성적을 증명하기에 흥미에도 없는 의대를 들어간 모범생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학문들에 이것저것 발을 딛고,
자신의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벼운 원나잇도 즐기고,
자신의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셀이랑 교제를 하고,
그리고 이어서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택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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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쉬운 부분 /
영화의 앞부분은 흡입력이 좋았는데 뒤로 갈수록 뒷심이 딸린다.
마지막 11장과 12장은 어느정도 예상가능한 부분이라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영화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2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한 8장 정도로 컴팩트하게 만들었다면 감독이 말하고 싶은 의미도 관객들에게 더 잘 다가오고, 영화도 힘있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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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한 평 /
본인을 사랑하기에 의대를 포기하고 사진을 시작했고,
본인을 사랑하기에 내 옆의 연인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에게 갔고,
본인을 사랑하기에 내 몸 속의 아기가 떨어진 후 미소가 나왔다.
사랑하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
'나'를 사랑하면 누구에게나 '최악'으로 비춰질 수 있다.
별점은 10점 만점에 6.5점 드립니다.
그래도 좋은 영화이니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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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2018) 비평
<앙: 단팥 인생 이야기>와 일련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출연하며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배우 기키 키린이 2018년 9월 15일 향년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30대부터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할머니 역할을 도맡아왔던 그녀는 유작 <어느 가족>에서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그녀는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실제 배우의 육체와 겹쳐 묘한 감상을 길어 올린다. 그러나 죽음을 암시하는 배우의 신체와는 별개로 시바타 하츠에의 죽음은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을 차근히 밟아온 나에겐 다소 의문스러운 죽음이다. 이전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사망한 가족의 자장을 좇거나, 결말부에 가족 구성원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담아왔다. <어느 가족>의 하츠에처럼 서사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은 그의 영화 목록에서는 이례적이다. 특히 그 대상이 그간 그의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온 어머니라는 점에서 더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하츠에는 왜 영화 중간에 죽어야 했으며, 왜 하필 그녀가 죽어야 했는지 영화 전반을 둘러보며 그녀의 사인을 밝혀보자.
히로카즈 감독은 국내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어로 ‘만비키’(万引き)라는 ‘shoplifters’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동시에 ‘그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있다.”(<씨네21>, 2018.5.30.)라고 밝혔다. 후자의 의미를 따르면, 원제 <万引き家族>은 ‘훔쳐진 가족’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훔쳐진 가족인가. 시바타 가족은 혈연이 아닌 사회 혹은 실제 가족에게서 버려진 구성원들로 이뤄진 유사 가족이다. 유리(사사키 미유)와 쇼타(죠 카이리)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를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진 않지만, 가족 외부의 사람은 쇼타와 함께 거리를 지나가는 노부요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의 형상을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형태만 충족한 이 가족은 사회 시스템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해진다. 사회는 영화 종반부에 그들을 프레임 속 각자 다른 자리에 불러 세우고 유사 가족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시바타 가족을 해체한다. 즉, 사회는 혈연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유사 가족을 훔쳐낸다. 그런데 그 역도 성립한다. 시바타 가족은 동기의 무고함을 차치하고 보면 진짜 가족에게서 구성원들을 훔쳐 온 가짜 가족이다. 오사무는 차에 방치된 쇼타를 주워오고, 노부요는 유리에게 폭력을 가하던 진짜 가족에게서 아이를 법적 절차 없이 입양한다. 하츠에 역시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전 남편의 손녀인 것을 알면서도 아키의 가족에게 묵인하고, 시바타 부부도 오사무가 노부요에게 폭력을 가하던 남편을 죽인 뒤 사회적 계약 없이 맺어진 관계다.
그런데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집으로 들인 사연은 불투명하다. 단지 하츠에가 그들을 선택했다는 대사만 주어질 뿐 구체적인 동기는 말해지지 않는다. 하츠에는 전 남편이 죽은 뒤에도 그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을 찾아가 위자료를 받아내는 속물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연금을 목적으로 집에 얹혀살며 그녀의 돈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시바타 부부를 가족으로 선택한 이유가 의뭉스럽다. 하츠에의 진짜 아들은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는 무심한 아들이고, 그녀는 보험을 들어서라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고를 전하고 싶어 한다. 정황상 그녀는 자신의 노후를 함께 해줄 가족이 필요했던 인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 가족에게는 '워크셰어(Workshare)'라는 공동의 규칙이 존재한다. 오사무가 쇼타에게 하는 “유리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같이 살기 편하지 않겠어?”라는 발언에서 시바타 가족은 암묵적으로 그 공모를 준거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금으로 경제적 자족성을 갖춘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받아들인 이유는 시바타 가족의 속물적인 규칙과 어긋난다. 이 불균질을 감수하고서라도 히로카즈 감독이 그녀를 유사 가족 안에 편입시킨 이유가 뭘까.
하츠에는 이름의 존재에서도 다른 가족들과 궤를 달리한다. 하츠에를 제외하고 시바타 가족의 구성원들은 가족 외부에서 불렸던 이름과는 다른 가명을 하나씩 갖고 있다. 유리를 찾는 TV 뉴스를 보고 그녀를 몰래 키우기로 합의한 가족들은 유리에게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그녀를 숨긴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보다 전이지만, 친부모에게서 받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쇼타 역시 오사무로부터 그의 본명인 ‘쇼타’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 시바타 부부와 아키 역시 본명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쇼타-오사무, 유코-노부요, 사야카-아키. 숨겨야 하거나 숨기고 싶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본명이 사회와 진짜 가족에게서 밀려났을 당시의 이름이라고 본다면, 그들은 가명을 지어 과거의 이름을 숨기려 한다(가족이 해체되는 취조실에서 사회로부터 숨겨진 이름이 끄집어내지는 귀결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하츠에로부터 이어진 ‘시바타’라는 성으로 묶인다. 즉, 과거의 이름들을 은닉하기 위해 지은 새로운 이름들은 하츠에의 성을 받아 온전한 이름으로 기능한다.
이름 외에도 아이들은 어른으로부터 무엇인가 유전된다. 쇼타와 유리는 각각 가족을 부양하려다 다친 오사무의 오른발과 가족으로부터 받은 노부요의 상처가 유전처럼 전해진 아이들이다. 오사무는 공사현장 텅 빈 공간에서 “다녀왔어” “어, 쇼타”라고 자문자답한다. 오사무의 본명이 쇼타라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관객들은 그가 불이 꺼진 곳에서 자신을 반겨줄 누군가를 바라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빠라는 호칭에 집착하던 오사무는 버려진 아이를 어린 시절 외로웠던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어, 쇼타”라고 반겨줄 아버지가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서 폭력을 당한 기억이 있는 노부요는 유리가 친부모에게서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욕실에서 자신의 상처와 닮은 유리의 상처를 보고 아이를 끌어안아 몸에 품는다. 어쩌면 시바타 부부는 아이들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가역적인 가족력처럼 쇼타는 다시 고아가 되고 유리는 다시 폭력적인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남은 하츠에로부터 아키에게는 무엇이 유전되었을까. 쇼타와 유리가 다시 시바타 가족이 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키는 아무도 없는 하츠에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섹스 노동을 할 때 가명으로 동생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아키는 동생에게 악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녀는 하츠에가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금전적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진짜 가족이 아닌 하츠에의 집에 다시 돌아올 정도로 실제 가족에게 감정의 골이 깊다. 그래서 그녀는 하츠에와 같이 실제 가족이 존재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살아가려 한다. 애정결핍이 있고 속물적인 가족의 규칙에 반감을 표했던 아키는 하츠에에게서 집을 이어받아 새로운 대안 가족을 만들어 하츠에의 자리를 대신할 혐의가 있다. 즉, 집의 소유주이자 재개발을 넌지시 바라는 부동산 업자로부터 집을 사수하는 하츠에는 아키에게 다른 가짜 가족이 거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집을 물려준다.
<어느 가족>에서 버려질 법한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집의 풍경은 마치 버려진 시바타 가족의 은유처럼 보인다. 일본 가족영화의 뿌리인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방처럼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집은 미학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가족은 그 단어의 피상적인 뜻처럼 집으로 묶인 집단이다. 따라서 사회 시스템 속 가족의 형성과 위기를 탐구해온 히로카즈의 영화적 관심사에서 집은 포기할 수 없는 무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은 사회의 공간과 대비하여 의미를 형성해왔다. <어느 가족>의 집도 사회와 시바타 가족을 구분하는 경계처럼 존재한다. 영화 초반부 집 내부는 가족의 형성이 주는 안온한 기운이 형형한 공간이다. 오사무의 자상한 얼굴과 노부요의 모성은 관객에게 시바타 가족 사이에 복류하던 도덕적 균열을 가리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그들은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윤리를 비껴가지만,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집 안에서는 문제없는 가족처럼 보인다.
과거를 숨기려는 이름들에 성을 주고 가족을 사회와 경계 지어주는 은닉처를 제공하는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 구성원들에겐 집과 같다. 그래서 집 밖의 공간인 해수욕장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며 가족이 되려는 그들을 보면서 하츠에는 마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안녕을 고한다. 그 이후 집에 묻힌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이 사회로부터 해체되는 취조실 시퀀스 도중 그녀 역시 집에서 꺼내진다. 하츠에가 집이고 그 집이 사회로부터 시바타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였다면, 하츠에의 죽음으로부터 가족이 사회에 노출되는 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어느 가족>은 집 내부에 편재했던 따스한 온기를 결말까지 안일하게 이어가지 않는다. 영화는 하츠에의 죽음 이후, 피가 아닌 마음과 유대로 연결되었다고 말하던 가짜 가족들의 옆구리 바짝 서늘한 공기를 밀어 넣는다. 하츠에가 죽자 오사무와 노부요는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녀를 묻기 위해 욕실 바닥을 판다. 양심의 가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얼굴은 벽 너머로 할머니의 시체를 쓰다듬는 아키의 슬픈 손짓과 대비되어 섬뜩하다. 뒤이어 시바타 부부는 하츠에의 유산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방치한 어머니를 악인으로 비추지 않음으로써 사회 시스템의 부재를 지목했던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선 어른을 포함한 가족 안으로 카메라를 끌고 와 문제를 가족내부에서도 진단한다. 단순히 사회를 적으로 두고 투쟁하는 가족을 숭고하게 그리지 않고 가족 내에 산재한 위태로움을 기어코 들춰내는 이 영화는 가족의 실패를 사회 시스템만의 잘못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유사 가족의 나체는 아이 쇼타에 의해 드러난다. 늙은 하츠에가 불온한 가족을 지탱하는 온기였다면 어린 쇼타는 태만한 가족의 폐부를 찌를 냉기다. 홍수정 비평가의 “누군가는 가족 모두를 경찰 앞에 불러모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영화가 한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이 진정 어린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는 것뿐인가."(<씨네21>, 2018.08.16.)라는 의견에는 함께할 수 없다. 쇼타는 도덕적 규범에 게을렀던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가족 외부에 호기심을 피력하는 인물이다. 하츠에가 죽자 그녀가 가려주던 가족의 불온을 감지한 쇼타는 유리에게 도둑질의 전이를 한 차례 막아준 문방구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래서 이제 아이는 두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선다. 마트에서 유리의 도둑질은 들키지 않았지만, 쇼타는 양파를 들고 도망치며 주의를 끈다. 다시 말해, 쇼타는 유리가 걸릴 걸 두려워한 게 아니라 도둑질하는 행위 자체를 막기 위해 도망친다. 그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자문했을 것이다. 결국 아이는 가짜 가족의 집이 아닌 막다른 다리를 선택한다. 홍수정 비평가의 의문이 생긴 이유는 상처를 피해의 흔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쇼타의 상처가 시바타 가족이 편안하게 이어가던 잘못된 내력에서 절연하려는 결연한 성장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가족을 예비할 어린아이 손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쇼타의 환부다. 영화는 쇼타가 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발을 오사무의 다친 발과 같은 오른발로 슬며시 겹쳐둔다. 오사무의 발은 사회 서비스인 산재보험에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쇼타의 다친 발은 쇼타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방치된다. 그들의 환부는 부위만 같을 뿐 각각 사회와 대안 가족에 의해 곪아간다. 즉, 영화는 쇼타와 오사무의 환부에 외면하는 방관자를 다르게 지목한다. 이 뒤바뀐 진술 사이에 하츠에의 죽음이 있다. 사회 시스템의 부재가 가족의 내부결함으로 도치되는 경계에서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이어주던 집으로서의 하츠에가 사라지는 건, <어느 가족>이 함께 지목하려 했던 두 의문을 스크린 위에 세우기 위한 서사적 결단인 셈이다.
유사 가족의 무력함 이전에 가족 내에 떠돌던 생기를 목격했던 나로서는, 취조실의 조사관이 시바타 가족에게 묻는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킨 게 양심에 걸리지 않았나요?”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해요.”와 같은 선명한 발언들이 시바타 가족에게 심정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사관의 물음은 언젠가 시바타 가족이 스스로 물었어야 하는 지연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오사무의 “가르칠 게 도둑질밖에 없었다.”와 노부요의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워왔을 뿐이다.”라는 답변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오사무가 아버지로서의 해야 한다고 믿었던 역할이 오인된 착각이었고, 자신의 상처가 아이에게 이어지지 않게 하려던 노부요의 애처로운 자기방어였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끝끝내 가족으로 불리지 못하고 다시 부모를 잃어버린 쇼타와 아파트 난간으로 내몰린 린의 얼굴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가족의 형성과 해체만 보여줄 뿐 아이들은 시작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이 막을 내린다.
<어느 가족>의 돌아온 결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바타 가족은 쇼타를 버리고 도주하려다 한 빛에 포착되는데, 조명을 든 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마치 객석에서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쇼타를 버리려는 시바타 가족의 이기심이 관객에게 들킨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 이어서, 취조실 장면에서도 시바타 가족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흡사 그들이 관객에게 답변하는 듯 보인다. 사회와 유사 가족, 두 집단 모두의 불완전함을 전시하며 끝나는 영화는 막연한 낭만주의적인 희망을 품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시작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리가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하고 스스로 난간 밖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쇼타가 이제는 아빠를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유리를 구해줄 새로운 가족의 부재와 쇼타의 속삭임이 오사무에게 닿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쇼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유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목격자로서 관객이 존재한다. 시바타 가족의 자기변호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언급한 영화는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유리와 쇼타가 자라 오사무와 노부요가 될지도 모르는 심증만 남은 재판에서 유일한 증인인 관객이 발언할 차례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헤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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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많은 평행우주에서의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감독: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진:양자경,스테파니 수,케 후이 콴,제임스 홍,제이미 리 커터스
시놉시스
에블린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웨이먼드와 결혼을 했다. 홍콩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세탁소를 차렸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딸인 조이가 대학을 자퇴하고 자신의 애인인 여자친구를 소개하며 나타난다. 그런 조이가 실망스럽기도 하고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 한편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에블린의 아버지와 함께 세무서를 가게 되지만 웨이먼드의 갑작스러운 돌방 행동에 놀라고 만다. 사실은 이 우주뿐만이 아니라 다중우주가 존재하는 것이었고 수천 명의 똑같은 자신들이 각각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과연 이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지만 각각 다르게 살고 있는 평행우주의 또 다른 나의 정신들을 이 우주에 불러오며 악당들과 싸운다.
에블린이 지금의 삶에 후회하는 이유
에블린의 아버지는 에블린이 웨이먼드와 결혼하기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고 미국으로 가서 세탁소를 운영했지만 자신이 나이가 들자 결혼한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 하지만 자신의 딸과 닮은 조부 투파키라는 이름의 빌런(악당)이 전 우주적 재앙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행우주에서 자신과 똑같은 에블린들의 정신을 이용하여 우주를 위협하는 자들과 맞서 싸운다. 사실은 웨이먼드가 말하길 다중우주를 넘은 알파버스가 존재하며 그간 에블린이 살아온 삶이 코믹하기도 하고 힘든 일들이 많아서 자신에게 더는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점점 괴이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극복해 나간다. 만약 자신이 선택한 삶이 수많은 선택 중에 하나라고 한다면 여러 갈림길이 생길 것이고 각각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게 평행우주 속 법칙이라고 하나 자신이 만족하지 못한 삶이라고 해서 그 삶이 무조건 안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그 선택을 한 것도 자신이기 때문에 후회할 수도 있으나 앞으로 또 다른 수많은 선택들을 골라야 하는 게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이기도 하다. 나도 지나고 보면 후회하는 것이 많지만 아쉽게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에블린의 입장에 공감이 되는 건 당연한 걸까?
수많은 선택과 갈림길 중에 나는 이 인생을 선택해 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의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