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2-03-10 11:49:19
이념의 화합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 전쟁 댄스 영화
영화 <스윙키즈> 리뷰
도경수가 나와서 탭댄스를 춘다! 이 한 가지 정보만 알고 보러 간 영화 <스윙키즈>. 영화관에서 가서야 한국전쟁 때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고, 도경수의 연기력이 정말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에 가려졌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스윙키즈> 시놉시스
“여기서 댄스단 하나 만들어 보는 거 어때? 포로들로”
1951년 한국전쟁, 최대 규모의 거제 포로수용소. 새로 부임해 온 소장은 수용소의 대외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전쟁 포로들로 댄스단을 결성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수용소 내 최고 트러블메이커 로기수, 무려 4개 국어가 가능한 무허가 통역사 양판래, 잃어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유명해져야 하는 사랑꾼 강병삼, 반전 댄스실력 갖춘 영양실조 춤꾼 샤오팡, 그리고 이들의 리더, 전직 브로드웨이 탭댄서 잭슨까지.
우여곡절 끝에 한 자리에 모인 그들의 이름은 스윙키즈! 각기 다른 사연을 갖고 춤을 추게 된 그들에게 첫 데뷔 무대가 다가오지만, 국적, 언어, 이념, 춤 실력, 모든 것이 다른 오합지졸 댄스단의 앞날은 캄캄하기만 하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스윙키즈>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다 죽다니!
아니 이렇게 꼭 다 죽여야만 했을까? 영화 결말을 보면서 동공지진이 났다. 영화기에 조금 판타지스럽게 성공적으로 공연도 하러 다니고, 환호도 받고 그랬으면 좋지 않았을까, 영화에서만이라도 좀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친구와 함께 영화 <스윙키즈>가 끝나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내내 너무나도 안타까워 했다.
하지만 인과관계로 보자면 단순히 댄스단으로 보여주기용이었고, 댄스단이 또 다른 반란의 계기로 이용될 바에는 싹을 잘라내버리는 것이 통솔자의 생각인 것이고, 깊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도 다 죽는 게 맞는 설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었다.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력이 찰떡이었던 영화 <스윙키즈>
영화 스토리상 이념이 상당히 많이 등장했지만 영화 <스윙키즈>는 충분히 웃을 수 있었던 유머러스한 작품이었다. 초반 웃음을 담당한 아내 찾는 병삼씨와 뚱둥한 데 영양실조인 중국 댄서, 그리고 4개국어 능통녀 양판례와 트러블메이커 로기수까지 모두 찰떡같이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었다. 캐릭터가 배우와 정말 잘 어울려서 몰입해서 보다 보니 캐릭터가 더욱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커지지 않았나 싶다.
매력적인 탭댄스와 그 위의 가치 이데올로기
탭댄스 자체로만 보면 영화 <스윙키즈>는 탭댄스의 매력을 정말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저 영화를 보기만 했을 뿐인데 영화가 끝나고 다리가 아플 정도였으니 말이다. 춤은 배우가 췄는데 왜 내 다리가 아팠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영화 초반 탭댄스가 화합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 틈새에서 그 이념은 잊어버리고 그저 춤이 좋아서 춤을 출 때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 속 캐릭터들을 보면서 영화에서만큼은 탭댄스가 이데올로기를 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탭댄스는 그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의 해체를 의미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스윙키즈 멤버들을 한치에 망설임도 없이 죽이는 것을 보면서 최상위의 가치가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스윙키즈>는 생각보다 이념의대립이 크게 등장해서 놀랐고, 주인공들이 다 죽어서 또 놀랐고, 영화가 끝나고 눈만 움직였을 뿐인데 다리가 아파서 더 놀랐던 작품이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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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경성크리처> 예고편
1945년 봄 모든 의심의 끝, 옹성병원 그곳에 인간과 괴물이 있었다 《경성크리처》 파트1 12월 22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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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메인 예고편
기다림은 끝났다!
전 세계가 기다려온 단 하나의 액션블록버스터!도미닉(빈 디젤)은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형제 제이콥(존 시나)이 사이퍼(샤를리즈 테론)와 연합해
전 세계를 위기로 빠트릴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다시 한 번 패밀리들을 소환한다.
가장 가까운 자가 한순간, 가장 위험한 적이 된 상황
도미닉과 패밀리들은 이에 반격할 놀라운 컴백과 작전을 세우고
지상도, 상공도, 국경도 경계가 없는 불가능한 대결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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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국내 박스오피스]
디즈니 100주년 영화 <위시>가 개봉 첫 주말 44만 관객을 동원하며 1위에 올라섰습니다.
한편 <노량: 죽음의 바다>는 400만 명을 돌파하면서 2위, <서울의 봄>은 총 관객수 1250만명을
기록했고, 대한민국 최초 41일 연속 일일 관객 수 10만 이상 동원, 총 217회 차의 무대인사를 기록하여
기존 영화계의 흥행 기록들을 갈아 치웠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티모시 샬라메 주연 <웡카>가 다시 한 번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전 세계 매출액 4억 6000만
달러를 넘겼습니다. <웡카>는 개봉 첫 주말 1위에 올랐으나 2주차 주말엔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에
밀려 한 계단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3주차 주말에 다시 박스오피스 정상을 되찾고 4주차 주말에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편 제임스 완 감독의 새로운 공포영화 <나이트 스윔>이 2위,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3위에 머물렀지만 글로벌 박스오피스 2억 6천만불을 넘긴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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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음모를 말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
- 씨스피라시 (Seaspiracy, 2021)
감독 : 알리 타브리지 │ 각본 : 킵 앤더슨
제작 : 영국, 다큐멘터리 │ 러닝타임 : 1시간 30분육식에 대해 맨 처음 생각해보게 된 건,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었을 때였다. 채식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진 요즘에 와서는 다소 뻔한 이야기다. 동물이 우리 식탁으로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으며,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때 나는, 잠시나마 내가 내 식습을 조절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으로 채식을 실천해보기도 했었다. 물론 얼마 가지 못했다.
그 이후로 채식을 해 본 기억은 없다. 살면서 영원히 고기·생선을 안 먹을 자신이 없었다. 물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먹는 동물들이 피를 뿜고 절단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고기를 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그게 나 스스로의 절제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씨스피라시>를 보고 난 이후, 나는 내가 품고 있던 생각 세 가지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첫째는, 인간이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비단 동물보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환경 문제로까지 연결된다는 점. 둘째는, 이런 문제를 알고도 채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단지 ‘개인의 절제력’ 문제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 셋째는, 우리가 채식을 이야기할 때 주로 포커싱하는 육지동물만큼이나 해양동물들도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의 제목 ‘씨스피라시(Seaspiracy)’는 ‘바다(sea)’와 ‘음모(conspirac)’를 합쳐 만든 말이다. 바다의 음모.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우리를 오해하게 만들었던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고발성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사람은, 감독 ‘알리 타브리지’다. 알리는 어린 시절 돌고래와 바다를 좋아했고, 그래서 바다에 대한 작품을 만들려다가 우연히 이 ‘바다의 음모’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는 의식 있는 사람답게, 바다를 더럽히는 플라스틱을 줍고 다녔다. 이는 우리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태평양에 모여 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빨대가 바다거북이의 콧구멍을 찔러 죽이고 있다는 사실들 말이다. 그래서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로 바꾸고 커피 매장에서 유리컵 사용량을 늘리면, 다시 바다가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우리 모두 힘쓰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게 바로, 음모였던 것이다.
우선 이 다큐멘터리가, 감독 자신이 직면한 사실들에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흥분을 하여, 몇 가지 통계적 오류와 극적인 편집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는 걸 밝히고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대단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분명 방향성 때문일 테다. ‘어류 섭취’와 ‘해양 보호’에 대해 우리가 까마득하게 모르던 뒷면이 이 다큐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으니까.
문제는, 빨대도 미세 플라스틱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들도 해양생태에 문제를 야기한다. 하지만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건 ‘상업적 어획’에서 오는 문제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먹는 고등어를 잡기 위해 바다사자나 돌고래가 그물에 함께 걸려 죽는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모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부수어획’에 의해 죽는 해양생물들이 엄청나다고 한다. 고등어를 잡기 위해 걸린 거북이, 상어, 돌고래, 바다사자 등등 대다수의 부수어획 생물들은, 원래 잡으려던 대상이 아님에도 그물에서 올려지면서 죽는다고 한다. A를 먹기 위해 B, C까지 포획하게 되는 것이 바로 어업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충격적이었던 건, 바다를 오염시키는 주범이라고 알고 있던 플라스틱에 ‘어구’가 포함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물을 포함한 이 어구들은 모두 플라스틱이며, 매해 엄청난 양의 어구들이 바다에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바다거북이를 떠올리며 사용을 자제하는 플라스틱 빨대에 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양이다. 하지만 그간 어디에서도 바다를 오염시키는 플라스틱의 상당수가 ‘어구’라는 것을 말해준 적 없었다. 바다의 음모가 아니면 무엇일까.
나는 단지 이 영화가, 인류가 생선을 너무 먹어대서 고갈되고 있다는 이야기쯤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류 섭취가 생각보다 복잡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놀랐다.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한 어류 개체수 감소는 물론이고, 부수어획으로 걸려드는 다른 생물들의 불필요한 죽음, 바다에 버려지는 어마어마한 플라스틱 어구, 어류 감소로 인해 바다의 산소배출량이 줄어드는 점, 그게 지구의 온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까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필연적으로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는 정말로 하나의 유기체이고, 우리 인류가 전적으로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커다란 지구를 보호하는 데에 개개인에게 그 무거운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인류의 숫자는 자그마치 70억이다. 그 많은 숫자로 빚어진 인류는 이를 통제해 줄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 있다. 위에서의 강력한 통제 없이, 개개인의 어류 섭취 중지를 요구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 방향일까. 지구가 고통받고 있으니 당장 채식해!라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본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말을 몇 마디 인용해보겠다. 「해산물을 더 이상 소비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진정한 힘은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할 때 빛을 발합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변화를 일으키려면 세계 여러 국가 정부에 압박을 넣어야 합니다. 바다를 위한 정책과 규제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죠. 바다에게는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
내 생각도 그렇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고등어 한 마리를 구워주고 싶었을 엄마, 부모님에게 참치회를 사드린 여느 자식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만이 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느낀다. 조금 더 조직적인 힘, 시스템의 강력한 변화 등을 통한 ‘위에서 아래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는 인류가 고기와 생선의 단백질 섭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온 세상 사람들이 지구를 위해 채식을 감행하는 날이 올 리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어류 섭취 제한에 대한 정치적 제도를 마련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월화수목금 살 수 있던 생선을 월수금만 살 수 있다면, 까다롭고 투명하게 포획된 어류만이 우리의 식탁에 오를 수 있다면, 어업종사자들이 플라스틱 어구를 모두 친환경 어구로 바꾸어야만 바다로 나갈 수 있다면. 툴툴대더라도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그 궤도를 결국 따라가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개고기 시장을 없앴고, 미세 플라스틱 제조를 금지했으며, 플라스틱 빨대와 컵 사용량을 줄여왔으니까.
환경도 채식도 페미니즘도 모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무지만 탓해서는 아무것도 바뀔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운동은, 올바른 사회 시스템에 개인의 의식이 더해져야 완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바다를 지키는 일도 분명히 그 선상에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 거대한 문제들 속에서도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하나가 있다면, 그건 바로 ‘샥스핀’을 먹지 않는 것이다. 지느러미만 잘린 채 바다 밑을 동동 굴러다니다 죽어가는 상어의 모습을 검색해보시라. 우리가 참치는 당장 못 끊어도, 상어 지느러미를 소비하지 않는 것쯤이야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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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이토록 뚝심 있고 암울하며 끈적한 조폭 영화라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독] 김창훈 KIM Chang-hoon
출연] Xa-bin HONG 홍사빈 Joong-ki SONG 송중기 Hyoung-seo KIM 김형서
KOREA|2023|124 min|DCP|Color|Special Premiere
시놉시스
명완시에 나고 자란 18세 고등학생 '연규'(홍사빈). 중국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의 꿈은 엄마 '모경'(박보경) 함께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는 것. 하지만 현실을 녹록지 않다. 새아빠 '정덕'(유성주)의 딸 '하얀'(김형서)을 도와주려다 일진과의 싸움에 휘말리고, 졸지에 합의금 300만 원을 토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이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명완시를 떠나 본 적 없는 '치건(송중기)'이 선뜻 300만 원을 준 것. 이를 계기로 연규는 치건처럼 명완시에서 살아남으려 한다. 치건이 중간 보스인 조폭 조직에 합류해 이것저것 일을 배우는 연규. 그러나 연규가 치건에게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치건이 연규를 신뢰하면 신뢰할수록 그들에게는 점점 더 위험한 일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갱스터 영화의 사회적 맥락
갱스터 영화는 필연적으로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영화다. 지나치게 남성적, 마초적이라고 비판받고, 높은 수위 때문에 불쾌하다는 지적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폭력성은 갱스터 영화에 남성 판타지 이상의 사회적 의의가 깃드는 힘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갱스터 영화의 전성기가 두 차례 있었다. 금주법이 시행된 대공황 시기,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사회가 혼란했던 70년대다. 갱스터 영화의 폭력성과 선정성은 당대의 사회 구조적 불안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비정상적인 시스템 하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 몸짓인 셈이다. 한편으로는 그 폭력성과 선정성을 스크린 안으로 제한하면서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기제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제76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스페셜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된 <화란>은 장르의 본분을 충실히 해낸 수작이다. 신인 감독 김창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마지막까지 톤을 유지하는 뚝심, 달라붙은 껌처럼 찐득한 장르적 쾌락이 돋보인다. 조폭의 가장 말단에 위치한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한국 조폭 영화의 익숙한 틀을 깨부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부인 오프닝
사실 <화란>은 오프닝이 전부인 영화다.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남학생 일진 무리. 연규가 그들에게 다가간다. 무리 중 한 명을 붙잡더니 돌덩이로 머리를 내리친다. 그러고는 돌덩이를 내려놓는다. 이때 운동장에 고여 있던 물덩이에 피 묻은 돌이 떨어지고,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사이 흙탕물이 된 물덩이 표면에 제목 <화란>이 나타난다.
아무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마주한 오프닝은 충격적이다. 예상치 못하게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 물론 영화는 그 직후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규연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매 하얀을 돕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학교 내 일진이 여자 속옷을 거래하는 일에 휘말려서 협박당하고 있었기 때문.
대신 충격만큼 <화란>의 주제는 간명히 드러난다. 고요한 물덩이가 피로 물들고 파동 치기 시작한 이상, 흙탕물을 되돌릴 수 없다고. 즉, 폭력의 굴레에 발을 내딛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고. 실제로 영화는 현실 속 온갖 폭력으로 가득하다. 연규네 가족은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에 시달린다. 불법 사채업자 치건은 오토바이 절도 사업을 병행하고, 정치인 뒤를 봐주는 조폭이다. 심지어 사회적 혐오와 책임회피 같은 이슈도 끼어들어 있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이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일절 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를 감싸 안으려고 하지 않는다. 연규도, 치건도, 하얀도, 새아빠도 모두 폭력이 잘못된 것인 줄 안다. 심지어 부패 정치인 '정의석'(서동갑)도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화는 더 냉혹하다.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말이 빈말로 느껴지는 암울한 사회상과 폭력의 굴레를 고발하겠다는 의지도 강렬하다.
갱스터인 척하는 멜로드라마
악의 굴레를 멜로드라마로 바꿔서 보여주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 두 남자의 브로맨스 덕분에 폭력의 의미와 역할이 더 잘 전해진다. 연규는 아버지가 없다. 친아빠는 어릴 적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엄마는 새아빠와 결혼했다. 하지만 새아빠는 술만 마시면 연규와 엄마를 두들겨 팬다. 하얀이 말려야 간신히 말을 들을 정도다.
자연히 연규에게는 머리를 다친 일진에게 줄 합의금 300만 원을 마련할 재주가 없다.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로는 택도 없다. 그런 그에게 치건이 나타난다. 연규에게 홀연히 300만 원을 선물하더니 결코 자기를 찾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던 연규는 끝내 치건을 찾아간다. 어떤 힘이든 있어야 맞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런 그를 보면서 치건은 망설이다 못해 자기만의 생존 방식을 하나 둘 알려준다. 그 역시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가정폭력 피해자였으므로.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과 그럴 수 없는 일. 더 나아가 손가락 하나, 손톱 한쪽으로 책임지는 방법에 대해서도. 그렇게 처한 상황도 성격도 다르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본 두 사람은 형과 동생, 가족이 된다. 이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멜로 같다.
연규와 치건의 관계는 뻔해 보이기도 한다. 절망에 빠진 주인공에게 의지할 대상이 홀연히 나타난다. 주인공은 그를 닮고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 길을 걷는다. 여느 갱스터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관계다. <신세계> 속 이자성과 정청,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속 재호와 현수 관계를 자연히 떠올릴 순간도 스쳐 지나간다.
'화란' 속에 '화란'이 있는가
하지만 연규와 치건 사이에는 낚시찌에 걸린 물고기 마냥 애매한 대목이 있다. 그들의 관계가 특별한 이유다. 서로에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 치건은 연규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아픔을 알아본다. 그래서 그가 자기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그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연규도 치건의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물론 폭력의 달콤함에 잠시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큰 형님 '중범'(김종수)의 살인 지시에 불복할 만큼의 사리 분별은 한다. 이처럼 원치 않지만 자기 모습을 발견한 형과 잘못을 알지만 형이 되고 싶은 동생. 영화는 쌍방이 빚어내는 애매한 긴장감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터뜨린다. <화란>의 멜로가 다른 갱스터 영화 속 브로맨스와 차별화되는 이유다.
그 중심에는 제목이 있다. '화란'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재앙과 난리를 뜻하는 말이자 네덜란드의 한자어다. 이때 전자는 현실의 유의어다. 연규와 치건이 사는 세상은 그 자체로 지옥이니까. 후자는 희망의 유의어다.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는 게 연규의 꿈이니까.
두 형제 사이의 긴장감은 두 번째 화란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연규에게 화란은 두 가지 의미이지만, 치건에게 화란의 의미는 하나뿐이다. 연규의 금속 보관함이 비상금과 네덜란드 여행 가이드북으로 꽉 차 있는 반면, 치건의 나무 보관함은 끝내 비어있듯이. 이 차이가 둘의 말로를 갈라놓는다. 동생은 화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울 의지가 있지만, 형에게는 그럴 화란이 없기 때문. 이는 영어 제목이 <Hopeless(희망이 없는)>인 이유다.
한국 영화의 클리셰를 거부하다
이러한 멜로드라마는 <화란>이 한국 조폭 영화의 틀을 탈피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실 배경은 유사하다. 한국 조폭 영화는 주로 재개발 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비열한 거리>, <강남 1970>, 심지어 1달 전쯤 개봉한 <보호자>까지도. 조폭은 철거민을 밀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이는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뤄낸 한국 사회의 집단적 욕망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조폭 영화 속 신축 부동산은 중산층으로 발돋움하려는 평범한 서민의 욕망을 보여준다. 이는 장르는 달라도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궤를 같이 하는 지점이다. 조폭 또한 부동산 재개발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조직 내외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 조폭 영화는 정치인, 기업인, 조폭의 삼각관계를 주로 반복한다. 조폭인지 정치인인지 분간하는 게 의미 없는 <아수라> 속 박성배 시장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 삼각관계에는 올드하다는 이미지와 클리세 범벅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인 감독은 과감한 시도를 한다. 정치인, 기업인, 조폭이 아닌 조폭의 말단, 막내에게 집중한다. 치건의 큰 형님은 재개발 사업 이권을 두고 국회의원 선거를 주무르려 한다. 그러나 연규에게 이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윗사람이 어떤 이익을 두고 싸우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조폭 영화에 담긴 새 세대의 현실
대신 영화는 새로운 세대의 고민에 집중한다. 치건은 연규에게 묻는다. "언제 여기 왔어?" 연규가 답한다. "태어날 때부터요." 이는 단순히 명완시에 언제 왔는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언제부터 폭력의 굴레에 빠졌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린 연규 입장에서는 답이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이 문답의 연장선상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성년을 앞둔 고등학생이 이미 존재한 카르텔, 폭력의 굴레를 어떻게 버텨내는지, 책임 지고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지. 이미 자리 잡힌 사회 구조, 상승할 희망조차 찾기 힘든 시스템 안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한다. 이는 <화란>의 분위기가 여느 영화보다도 암울하고 처절한 이유다.
그렇다고 <화란>은 그저 냉혹한 현실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한 가닥 응원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치건과 헤어진 후 집에 돌아온 연규는 새아빠에게 맞아 죽은 엄마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새아빠에게 복수하는 대신 하얀과 함께 집을 나온다. 다른 도시로 떠난다. 자기 손으로 폭력을 거부하고, 굴레를 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화란>은 고여 버린 장르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물론 마지막 장면이 마냥 희망적이지는 않다. 과연 연규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완전히 떠날 수 있을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두 주인공의 표정도 홀가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들이 새 출발을 알린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화란>은 회의감을 떨치지는 못해도, 이제 막 성년이 될 두 주인공에게 마지막 응원은 보내려고 노력한다.
좋고 싫은 이유가 같다
분명히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다. 15세 관람가치고 잔인한 장면이 꽤 많다. 완성도 문제도 있다. 여기저기 생략된 지점이 많다 보니 뒤로 갈수록 영화가 버거워한다. 특히 조직 상부에서의 의사결정과 음모, 하부 조직원과의 감정선과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 하얀처럼 점점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캐릭터도 생긴다. 정교한 스토리텔링 대신 배우들의 연기력과 분위기에 기대기 때문. 서사의 빈 공간을 유추해야 하는 불친절한 작품인 셈이다.
다만 역설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인 영화이기도 하다. 반지하방의 습기처럼 답답하고, 운동화에 달라붙은 껌처럼 찐득한 분위기는 근래 한국 영화에서 맛보기 어려운 개성이다. 도를 넘는 듯한 잔혹함은 그 분위기와 현실을 강조한다. 그 덕분에 송중기의 새로운 모습, 홍사빈과 김형서라는 신인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 나아가 웃음을 단 한순간도 허용하지 않는 뚝심까지 고려하면 <화란>은 근래 한국 영화 중, 특히 갱스터(조폭) 영화 중 보기 드문 수작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들짐승처럼 맹목적이고 폭력적이며 진득한 갱스터 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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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함께라면 그깟 오류 쯤이야
* <글리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글리치 (2022)
연출: 노덕
극본: 진한새
출연: 전여빈, 나나, 이동휘, 류경수, 백주희 등
장르: SF, 스릴러, 코미디
공개 회차: 10부작
유년 시절의 ‘지효(전여빈)’는 괴짜로 통했다. UFO를 추종하며 전세계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는 중학생 소녀에게 이해 혹은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여느 날처럼 학교 옥상에서 전자파 탐지기를 손에 쥔 채 음악을 듣고 있던 ‘지효’ 앞에 처음으로 말을 거는 소녀 한 명이 나타났다. ‘지효’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영혼의 친구, ‘보라(나나)’와 ‘지효’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외계인과 사이비 종교. 작품을 관통하는 거대한 소재들이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집요한 자아 탐색과 성장의 과정, 그리고 두 여자의 우정이다. 작품이 미스터리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외계인이나 비과학적인 사건들을 파고드는 데 열중하지 않는 것은 주인공을 둘러싼 ‘믿음’의 실체를 확인하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변화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감정들이 더 중요하게 다뤄 지기 때문이다.
‘지효’에게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괴짜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며 평범한 친구들처럼 살아가기 위해 어린 시절의 자신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환각인지 실재인지 알 수 없는 외계인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잠시 눈을 질끈 감고 안 보이는 척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사회 속에 숨어든 채 불완전한 평화를 유지하던 찰나 외계인의 흔적이 턱 끝까지 쫓아오고, 급기야 헤어진 남자친구 ‘시국(이동휘)’이 실종된다. 안정적인 일상은 깨졌고, 오류(Glitch) 상태에 놓인 ‘지효’는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나 외계인이 보여.’ 누가 이 문장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순수하게 믿어줄까? 소통이 불가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지효’를 더 답답하게만 만들 뿐이다. 시청자들마저 답답하게 할 정도로 그가 입을 꾹 닫은 이유는 애초에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국’의 실종으로 외계인과 UFO에 대한 ‘지효’의 생각은 의심에서 확신으로 변했다. 남자친구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보다 믿음의 실체를 꼭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증명하는 길일 테니까.
‘지효’를 혼란에 빠뜨린 미스터리는 그를 외계인도, 남자친구도 아닌 오래 전 사이가 틀어진 친구 ‘보라’에게 데려다 놓는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었던 친구, 함께 아지트를 만들고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영혼의 단짝. 한때 ‘보라’는 ‘지효’의 오해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지만 관계의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거침없는 태도와 담대함을 무기로 친구를 둘러싼 기이한 사건들의 실체를 독종처럼 파고든다. ‘지효’가 겁에 질리거나 깊은 생각에 잠겨 고장이 날 때마다 ‘보라’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앞으로 이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순간에 부딪힐 지라도. 정상의 궤도를 걷고 있던 ‘지효’에게 찾아온 혼돈은 그를 얼어 붙게 했고, 공룡만한 크기의 외계인에게 쫓기며 두려움을 경험했다. 이 상황을 해결해야 했지만, 자신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지효’는 온전히 혼자였다. 그런데 겉으로는 트러블 메이커 같아도 능수능란하게 위기를 넘기며 해결사를 자처하는 ‘보라’가 자신의 기묘한 운명에 같이 뛰어들었다.
비록 하나 뿐이지만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지효’는 주저 없이 외계인과 사건들의 연관성을 파헤친다. ‘시국’의 납치, 외계인과 UFO, 정신병원과 ‘하늘빛들림교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던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지효’는 자신과의 연관성을 찾아내기 위해 사이비 종교단체에 잠입하고, 호산나를 연기하는 위험까지 감수한다. 이 모든 과정을 감내한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찾기 위해서다. 비록 제3자에게 ‘미친년’ 소리를 들을 지라도 ‘지효’는 자신의 두 눈에 보이는 외계인이 환각인지 실재인지 이번 기회를 통해 꼭 확인해야만 했다. 자신이 믿고 살아온 현실이 허상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은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꽤 오랫동안 자기부정을 거듭하며 거짓된 자아를 만들고 평범함을 지키고자 애썼던 ‘지효’는 상상치도 못했던 스케일의 모험을 겪으며 자신이 봉인했던 과거의 자아를 되찾고 진짜 ‘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사실 사이비 종교나 외계인은 단지 ‘지효’의 자아 탐색과 성장을 위한 배경이자 수단이었을 뿐이다. 주인공이 범상치 않은 인물인 탓에 본의 아니게 그 과정이 스릴러에 판타지 장르가 되어 버렸지만.
외계인의 존재를 목도하기 전, 종교 의식의 호산나로 낙점되어 손발이 묶인 채 광신도들 앞에 전시되어 있던 ‘지효’는 자신의 신념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무너질 뻔한다. 하지만 ‘보라’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를 구하며 자신의 믿음을 보여준다. 눈물을 흘리며 ‘지효’를 끌어안는 ‘보라’의 눈빛에는 그를 향한 확신이 서려 있다.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무한한 신뢰를 주는 조력자이자 동반자의 등장. 진실과 자아를 찾겠다고 나선 친구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싸울 수 있는 친구가 얼마나 있겠는가. ‘보라’의 존재만으로도 ‘지효’는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친구와 함께한 모든 여정을 통해 자신에게 불어 닥친 오류를 극복했다. 어쩌면 고생 끝에 입증한 자신을 향한 믿음보다 누구보다 자신을 믿는 친구와의 조우가 ‘지효’가 외계인 사태를 통해 얻은 가장 값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1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만난 두 친구이지만 마치 늘 함께였던 것처럼 의기투합하여 이들 앞에 폭탄처럼 터지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영리하고 용감하게 헤쳐 나간다. 누구보다 나를 믿어주는 친구가 곁에 있다면, 사이비 종교 단체나 외계인 따위와 맞서는 것도 두렵지 않다. 어딘가 모자라고 나사가 하나쯤 풀려 있는 것 같은 두 주인공의 모험과 ‘지효’의 성장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너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여자들의 우정이 빛난다. ‘보라’는 ‘지효’를 오류 속에서 꺼내 구원하였고, ‘지효’는 삶의 권태에 빠진 ‘보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헛된 신념에 빠진 사이비 종교인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저마다의 구원을 찾았지만 무한한 믿음으로 형성된 벗을 통한 구원 앞에 이들의 허황된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혼자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을 때, ‘나’를 완전하게 믿어주고 ‘나’를 위해 주저 없이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 한 명을 곁에 두는 것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그 존재로부터 확신을 얻은 ‘지효’는 무너지지 않았고, 스스로의 삶마저 완벽하게 구원했다. 오합지졸 같던 두 주인공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분투하는 과정은 허접하고 유쾌하다가도 어느샌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공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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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난 강박증이 있다. 이 덕에 일상생활에서 애먹는 부분이 많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10년 전 고등학생 친구의 이름을 기억한다던가. 친구의 전 근무지를 기억하고있다던가. 주변인들 반려동물 이름 기억하는건 일도 아니다. 이렇게 세세하게 무언가를 기억했을때 따라오는 단점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 기억하기 싫은 것들도 강박이 되어 계속해서 생각난다는것이다. 필요할때 무언가에 집중을 못하는건 되게 귀찮은 일이다. 사람들과 말하다가도, 비행기를 타더라도, 맛있는걸 먹을때도 내 시간을 오롯이 못쓴다. 두번째.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 고3때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에 대해 일일이 다 기억했다가 한꺼번에 '선생님은 멋져요'라고 말한 적 있다. 그러고 나서 크게 혼났다. 누군가의 자그마한 사실이라도 다 기억하고 있거나 알려고 한다는게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한다는걸 그때야 알았다. 얼핏들으면 사생활의 모든걸 알려고 든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 굳이 이런 사람이란 인식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내 머릿속은 내 삶을 바꿔놨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 머릿속에서 음성이 들린다거나 했던 적은 없다. 요즘에서야 강박증에 대해 주변에 말한다.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니까. 내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걸 앓는게 아니잖아?
되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땐 선을 지켜야한다. 생각이 많아질때의 나를 설명하면 이해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행히도 요즘은 그런 편견이 많이 없어져서 강박증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적다. 요즘 공황장애라던가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유명인들이 많아져서도 좋은 영향인 것 같다. 내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는 경우가 많이 줄어서인것도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물론 몇년 전에는 주변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도 있었다. 이 때 생각하면 굉장히 부끄럽다. 그래도 나는 이 병 때문에 삶에 엄청나게 지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이 덕에 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쉬워졌다. 어차피 인생사가 맘대로 되는건 아니니까. 나처럼 자기 의지랑은 상관없이 머릿속이 복잡해질때가 사람에게 언젠간 온다. 그럴 때를 알아서인지 가끔 지나가다 인터넷에 뜨는 사연들이 남 이야기 같지 않다. 내 기억의 어느 순간을 꺼내오는 것 같았다. 저 사람도 저러고 싶지 않았을텐데. 뭐 그런 기분이 먼저 든다.
<더 파더>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안소니 홉킨스가 주인공 '안소니'로, 올리비아 콜먼이 딸 역할로 출연한다. 플롯은 간단하다.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내는 돌아가신 것으로 보이고, 작은딸은 왠지 집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안소니는 거의 대부분 혼자다. 아버지로서의 삶을 보냈던 주인공은 딸이 없다면 기댈 곳이 없다. 사람이 외로울 때 말 걸면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한다. 작은 딸 루시의 이야기부터 간호인에 대해 '나는 돌볼 곳이 없다'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또 입어가며 병마와 싸운다. 영화는 타인들과 별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다른 작품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
영화는 플롯을 비튼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치매의 애환이 그대로 담겨진다. 내 딸이 딸인건 맞나. 딸의 남편이 사별하지 않았나. 이런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영화에 담긴다. 딸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두명으로 배치한다. 또 있다. 초입부 시계를 잃어버렸다고는 말하지만 뭐 하다 놓쳤는지에 대해서는 보여주지 않는다. 왜? 안소니는 어차피 시계를 잃어버린 기억 자체가 없거든. 안소니가 시계를 잃어버린걸 장면으로 보여주면 '이래서 잃어버린 것 아니냐'를 보여주는 셈이 되어 그에게 책임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안소니가 겪는 일들이 병으로 인한 현상 자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거다. 이 점에서 내가 뽑은 각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없다'라는 기억을 관객들에게 와닿게 하고 싶어서였을거라고 생각한다. 안소니에게 없는 기억이 이것만일까? 딸이 누군지. 작은 딸은 어떻게 지내는지. 딸이 이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뭐 그런 것들이 아버지 안소니에겐 중요했을거다. 분명한 사실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는 후반부의 이야기다. 초중반부는 무엇이 정답인지를 ?치고 미스터리로 극을 끌고간다. 어차피 감독은 관객에게 무엇이 사실인지를 말해주고 싶은 의도가 없었을거다. 치매 환자들에게 중요한건 '기억하고 싶은건 잊어버리고, 기억하기 싫은건 머리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이런 치매의 성격으로 인한 머릿속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연출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플롯이 혼란스러운 이유만큼이나 치매환자들과 주변인들이 왜 더 존중받아야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어쩔 수 없다.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는 것일테니까.
세상에 존중받지 말아야 할 인간은 없다. 심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강박증으로 특이한 행동을 해봤어서 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며 어느 순간의 내가 생각났다. 또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져야한다는걸 느꼈다. 이런 기분이 든 <더 파더>는 참 좋은 영화다. 주인공 안소니 홉킨스가 '양들의 침묵'보다 더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이유가 있다.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가 생각나는 연기였다. 엔딩신이 주는 묵직함이 어마어마한데, 나는 이 영화를 보려고 기대중인 분들에게 끝부분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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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스포일러 주의!!!!!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파랑의 우울에 관해서 써볼까 한다. 드라마가 끝나고 난 뒤, 나는 파랑이가 별이라고 생각을 했다. 파란 별이 표면온도가 가장 높다는 말도 있으니까.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서야 자신을 봐달라는 식으로 밝게 빛나다가 폭발해서 사라져버린 별.
파랑이가 연극으로 선택한 작품은 신파랑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꺼져가는 태양 또한 파랑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로봇 세 명은 파랑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마지막 인류학자가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태양이 왜 꺼져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 질문을 했다면 아마 이런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더 이상 자신의 춤이 닿으리라 생각하지 못하겠고, 더 이상 자신의 춤을 봐줄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 그의 춤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연극을 준비하면서 느꼈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무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파랑이가 마지막으로 극단의 일원들을 만나고 다녔을 때, 닿지 않은 것이 아닌 머리카락을 태워 억지로 끊어버린 것이었단 걸 알았을 때 파랑이의 눈빛은 … 정말 깊고 어디론가 빠져버릴 것 같았다.
파랑이의 집 또한 나에게는 굉장히 인상 깊었다. 야외에는 어지럽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집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텅 비어있다. 나는 그것이 파랑이의 내면 같다고 생각했다. 파랑이의 우울한 파랑으로 가득 찬 것 같이, 퍼런 색의 소주병으로만 가득 차 있다.
파랑이는 모든 사진에서 항상 웃고 다녔다고 했다. 사실 나는 파랑이가 왜 계속 웃고 다녔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속은 너무 고칠 수 없이 망가져 겉옷이라고 주섬주섬 꺼내 입었던 것일까? 돈도 없고 망가져서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도 사지 못하고 근육통약으로 어영부영 상처를 덮었다. 그 사이사이 빈틈으로 우울의 파랑이 물 밀려오듯이 밀려왔다. 결국에는 죽을 사람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적어도 나에게는 닿았다고 말하고싶다.
우리는 각자 닿을 일 없이, 각자의 궤도를 떠도는 별들이다.
별과 별 사이 수억 광년의 거리.
속삭이듯 말해서는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난 온 몸으로 춤을 춘다.
그 별의 당신에게는 아직 판독 불가의 전파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간 당신의 안테나에 닿길 바라며,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춤을 춘다.
- 파랑이의 연출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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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경성크리처> 예고편
1945년 봄 모든 의심의 끝, 옹성병원 그곳에 인간과 괴물이 있었다 《경성크리처》 파트1 12월 22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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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메인 예고편
기다림은 끝났다!
전 세계가 기다려온 단 하나의 액션블록버스터!도미닉(빈 디젤)은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형제 제이콥(존 시나)이 사이퍼(샤를리즈 테론)와 연합해
전 세계를 위기로 빠트릴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다시 한 번 패밀리들을 소환한다.
가장 가까운 자가 한순간, 가장 위험한 적이 된 상황
도미닉과 패밀리들은 이에 반격할 놀라운 컴백과 작전을 세우고
지상도, 상공도, 국경도 경계가 없는 불가능한 대결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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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국내 박스오피스]
디즈니 100주년 영화 <위시>가 개봉 첫 주말 44만 관객을 동원하며 1위에 올라섰습니다.
한편 <노량: 죽음의 바다>는 400만 명을 돌파하면서 2위, <서울의 봄>은 총 관객수 1250만명을
기록했고, 대한민국 최초 41일 연속 일일 관객 수 10만 이상 동원, 총 217회 차의 무대인사를 기록하여
기존 영화계의 흥행 기록들을 갈아 치웠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티모시 샬라메 주연 <웡카>가 다시 한 번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전 세계 매출액 4억 6000만
달러를 넘겼습니다. <웡카>는 개봉 첫 주말 1위에 올랐으나 2주차 주말엔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에
밀려 한 계단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3주차 주말에 다시 박스오피스 정상을 되찾고 4주차 주말에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편 제임스 완 감독의 새로운 공포영화 <나이트 스윔>이 2위,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3위에 머물렀지만 글로벌 박스오피스 2억 6천만불을 넘긴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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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음모를 말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
- 씨스피라시 (Seaspiracy, 2021)
감독 : 알리 타브리지 │ 각본 : 킵 앤더슨
제작 : 영국, 다큐멘터리 │ 러닝타임 : 1시간 30분육식에 대해 맨 처음 생각해보게 된 건,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었을 때였다. 채식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진 요즘에 와서는 다소 뻔한 이야기다. 동물이 우리 식탁으로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으며,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때 나는, 잠시나마 내가 내 식습을 조절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으로 채식을 실천해보기도 했었다. 물론 얼마 가지 못했다.
그 이후로 채식을 해 본 기억은 없다. 살면서 영원히 고기·생선을 안 먹을 자신이 없었다. 물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먹는 동물들이 피를 뿜고 절단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고기를 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그게 나 스스로의 절제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씨스피라시>를 보고 난 이후, 나는 내가 품고 있던 생각 세 가지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첫째는, 인간이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비단 동물보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환경 문제로까지 연결된다는 점. 둘째는, 이런 문제를 알고도 채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단지 ‘개인의 절제력’ 문제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 셋째는, 우리가 채식을 이야기할 때 주로 포커싱하는 육지동물만큼이나 해양동물들도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의 제목 ‘씨스피라시(Seaspiracy)’는 ‘바다(sea)’와 ‘음모(conspirac)’를 합쳐 만든 말이다. 바다의 음모.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우리를 오해하게 만들었던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고발성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사람은, 감독 ‘알리 타브리지’다. 알리는 어린 시절 돌고래와 바다를 좋아했고, 그래서 바다에 대한 작품을 만들려다가 우연히 이 ‘바다의 음모’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는 의식 있는 사람답게, 바다를 더럽히는 플라스틱을 줍고 다녔다. 이는 우리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태평양에 모여 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빨대가 바다거북이의 콧구멍을 찔러 죽이고 있다는 사실들 말이다. 그래서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로 바꾸고 커피 매장에서 유리컵 사용량을 늘리면, 다시 바다가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우리 모두 힘쓰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게 바로, 음모였던 것이다.
우선 이 다큐멘터리가, 감독 자신이 직면한 사실들에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흥분을 하여, 몇 가지 통계적 오류와 극적인 편집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는 걸 밝히고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대단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분명 방향성 때문일 테다. ‘어류 섭취’와 ‘해양 보호’에 대해 우리가 까마득하게 모르던 뒷면이 이 다큐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으니까.
문제는, 빨대도 미세 플라스틱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들도 해양생태에 문제를 야기한다. 하지만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건 ‘상업적 어획’에서 오는 문제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먹는 고등어를 잡기 위해 바다사자나 돌고래가 그물에 함께 걸려 죽는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모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부수어획’에 의해 죽는 해양생물들이 엄청나다고 한다. 고등어를 잡기 위해 걸린 거북이, 상어, 돌고래, 바다사자 등등 대다수의 부수어획 생물들은, 원래 잡으려던 대상이 아님에도 그물에서 올려지면서 죽는다고 한다. A를 먹기 위해 B, C까지 포획하게 되는 것이 바로 어업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충격적이었던 건, 바다를 오염시키는 주범이라고 알고 있던 플라스틱에 ‘어구’가 포함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물을 포함한 이 어구들은 모두 플라스틱이며, 매해 엄청난 양의 어구들이 바다에 버려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바다거북이를 떠올리며 사용을 자제하는 플라스틱 빨대에 비해 상상도 할 수 없는 양이다. 하지만 그간 어디에서도 바다를 오염시키는 플라스틱의 상당수가 ‘어구’라는 것을 말해준 적 없었다. 바다의 음모가 아니면 무엇일까.
나는 단지 이 영화가, 인류가 생선을 너무 먹어대서 고갈되고 있다는 이야기쯤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류 섭취가 생각보다 복잡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놀랐다.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한 어류 개체수 감소는 물론이고, 부수어획으로 걸려드는 다른 생물들의 불필요한 죽음, 바다에 버려지는 어마어마한 플라스틱 어구, 어류 감소로 인해 바다의 산소배출량이 줄어드는 점, 그게 지구의 온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까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필연적으로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는 정말로 하나의 유기체이고, 우리 인류가 전적으로 지구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커다란 지구를 보호하는 데에 개개인에게 그 무거운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인류의 숫자는 자그마치 70억이다. 그 많은 숫자로 빚어진 인류는 이를 통제해 줄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 있다. 위에서의 강력한 통제 없이, 개개인의 어류 섭취 중지를 요구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 방향일까. 지구가 고통받고 있으니 당장 채식해!라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본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말을 몇 마디 인용해보겠다. 「해산물을 더 이상 소비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진정한 힘은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할 때 빛을 발합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변화를 일으키려면 세계 여러 국가 정부에 압박을 넣어야 합니다. 바다를 위한 정책과 규제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죠. 바다에게는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
내 생각도 그렇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고등어 한 마리를 구워주고 싶었을 엄마, 부모님에게 참치회를 사드린 여느 자식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만이 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느낀다. 조금 더 조직적인 힘, 시스템의 강력한 변화 등을 통한 ‘위에서 아래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는 인류가 고기와 생선의 단백질 섭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온 세상 사람들이 지구를 위해 채식을 감행하는 날이 올 리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어류 섭취 제한에 대한 정치적 제도를 마련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월화수목금 살 수 있던 생선을 월수금만 살 수 있다면, 까다롭고 투명하게 포획된 어류만이 우리의 식탁에 오를 수 있다면, 어업종사자들이 플라스틱 어구를 모두 친환경 어구로 바꾸어야만 바다로 나갈 수 있다면. 툴툴대더라도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그 궤도를 결국 따라가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개고기 시장을 없앴고, 미세 플라스틱 제조를 금지했으며, 플라스틱 빨대와 컵 사용량을 줄여왔으니까.
환경도 채식도 페미니즘도 모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무지만 탓해서는 아무것도 바뀔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운동은, 올바른 사회 시스템에 개인의 의식이 더해져야 완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바다를 지키는 일도 분명히 그 선상에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 거대한 문제들 속에서도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하나가 있다면, 그건 바로 ‘샥스핀’을 먹지 않는 것이다. 지느러미만 잘린 채 바다 밑을 동동 굴러다니다 죽어가는 상어의 모습을 검색해보시라. 우리가 참치는 당장 못 끊어도, 상어 지느러미를 소비하지 않는 것쯤이야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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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이토록 뚝심 있고 암울하며 끈적한 조폭 영화라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독] 김창훈 KIM Chang-hoon
출연] Xa-bin HONG 홍사빈 Joong-ki SONG 송중기 Hyoung-seo KIM 김형서
KOREA|2023|124 min|DCP|Color|Special Premiere
시놉시스
명완시에 나고 자란 18세 고등학생 '연규'(홍사빈). 중국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의 꿈은 엄마 '모경'(박보경) 함께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는 것. 하지만 현실을 녹록지 않다. 새아빠 '정덕'(유성주)의 딸 '하얀'(김형서)을 도와주려다 일진과의 싸움에 휘말리고, 졸지에 합의금 300만 원을 토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이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명완시를 떠나 본 적 없는 '치건(송중기)'이 선뜻 300만 원을 준 것. 이를 계기로 연규는 치건처럼 명완시에서 살아남으려 한다. 치건이 중간 보스인 조폭 조직에 합류해 이것저것 일을 배우는 연규. 그러나 연규가 치건에게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치건이 연규를 신뢰하면 신뢰할수록 그들에게는 점점 더 위험한 일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갱스터 영화의 사회적 맥락
갱스터 영화는 필연적으로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영화다. 지나치게 남성적, 마초적이라고 비판받고, 높은 수위 때문에 불쾌하다는 지적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폭력성은 갱스터 영화에 남성 판타지 이상의 사회적 의의가 깃드는 힘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갱스터 영화의 전성기가 두 차례 있었다. 금주법이 시행된 대공황 시기,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사회가 혼란했던 70년대다. 갱스터 영화의 폭력성과 선정성은 당대의 사회 구조적 불안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비정상적인 시스템 하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 몸짓인 셈이다. 한편으로는 그 폭력성과 선정성을 스크린 안으로 제한하면서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기제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제76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스페셜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된 <화란>은 장르의 본분을 충실히 해낸 수작이다. 신인 감독 김창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마지막까지 톤을 유지하는 뚝심, 달라붙은 껌처럼 찐득한 장르적 쾌락이 돋보인다. 조폭의 가장 말단에 위치한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한국 조폭 영화의 익숙한 틀을 깨부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부인 오프닝
사실 <화란>은 오프닝이 전부인 영화다.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남학생 일진 무리. 연규가 그들에게 다가간다. 무리 중 한 명을 붙잡더니 돌덩이로 머리를 내리친다. 그러고는 돌덩이를 내려놓는다. 이때 운동장에 고여 있던 물덩이에 피 묻은 돌이 떨어지고,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사이 흙탕물이 된 물덩이 표면에 제목 <화란>이 나타난다.
아무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마주한 오프닝은 충격적이다. 예상치 못하게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 물론 영화는 그 직후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규연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매 하얀을 돕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학교 내 일진이 여자 속옷을 거래하는 일에 휘말려서 협박당하고 있었기 때문.
대신 충격만큼 <화란>의 주제는 간명히 드러난다. 고요한 물덩이가 피로 물들고 파동 치기 시작한 이상, 흙탕물을 되돌릴 수 없다고. 즉, 폭력의 굴레에 발을 내딛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고. 실제로 영화는 현실 속 온갖 폭력으로 가득하다. 연규네 가족은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에 시달린다. 불법 사채업자 치건은 오토바이 절도 사업을 병행하고, 정치인 뒤를 봐주는 조폭이다. 심지어 사회적 혐오와 책임회피 같은 이슈도 끼어들어 있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이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일절 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를 감싸 안으려고 하지 않는다. 연규도, 치건도, 하얀도, 새아빠도 모두 폭력이 잘못된 것인 줄 안다. 심지어 부패 정치인 '정의석'(서동갑)도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영화는 더 냉혹하다.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말이 빈말로 느껴지는 암울한 사회상과 폭력의 굴레를 고발하겠다는 의지도 강렬하다.
갱스터인 척하는 멜로드라마
악의 굴레를 멜로드라마로 바꿔서 보여주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 두 남자의 브로맨스 덕분에 폭력의 의미와 역할이 더 잘 전해진다. 연규는 아버지가 없다. 친아빠는 어릴 적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엄마는 새아빠와 결혼했다. 하지만 새아빠는 술만 마시면 연규와 엄마를 두들겨 팬다. 하얀이 말려야 간신히 말을 들을 정도다.
자연히 연규에게는 머리를 다친 일진에게 줄 합의금 300만 원을 마련할 재주가 없다.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로는 택도 없다. 그런 그에게 치건이 나타난다. 연규에게 홀연히 300만 원을 선물하더니 결코 자기를 찾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던 연규는 끝내 치건을 찾아간다. 어떤 힘이든 있어야 맞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런 그를 보면서 치건은 망설이다 못해 자기만의 생존 방식을 하나 둘 알려준다. 그 역시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가정폭력 피해자였으므로.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과 그럴 수 없는 일. 더 나아가 손가락 하나, 손톱 한쪽으로 책임지는 방법에 대해서도. 그렇게 처한 상황도 성격도 다르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본 두 사람은 형과 동생, 가족이 된다. 이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멜로 같다.
연규와 치건의 관계는 뻔해 보이기도 한다. 절망에 빠진 주인공에게 의지할 대상이 홀연히 나타난다. 주인공은 그를 닮고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 길을 걷는다. 여느 갱스터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관계다. <신세계> 속 이자성과 정청,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속 재호와 현수 관계를 자연히 떠올릴 순간도 스쳐 지나간다.
'화란' 속에 '화란'이 있는가
하지만 연규와 치건 사이에는 낚시찌에 걸린 물고기 마냥 애매한 대목이 있다. 그들의 관계가 특별한 이유다. 서로에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 치건은 연규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아픔을 알아본다. 그래서 그가 자기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그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연규도 치건의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물론 폭력의 달콤함에 잠시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큰 형님 '중범'(김종수)의 살인 지시에 불복할 만큼의 사리 분별은 한다. 이처럼 원치 않지만 자기 모습을 발견한 형과 잘못을 알지만 형이 되고 싶은 동생. 영화는 쌍방이 빚어내는 애매한 긴장감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터뜨린다. <화란>의 멜로가 다른 갱스터 영화 속 브로맨스와 차별화되는 이유다.
그 중심에는 제목이 있다. '화란'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재앙과 난리를 뜻하는 말이자 네덜란드의 한자어다. 이때 전자는 현실의 유의어다. 연규와 치건이 사는 세상은 그 자체로 지옥이니까. 후자는 희망의 유의어다.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는 게 연규의 꿈이니까.
두 형제 사이의 긴장감은 두 번째 화란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연규에게 화란은 두 가지 의미이지만, 치건에게 화란의 의미는 하나뿐이다. 연규의 금속 보관함이 비상금과 네덜란드 여행 가이드북으로 꽉 차 있는 반면, 치건의 나무 보관함은 끝내 비어있듯이. 이 차이가 둘의 말로를 갈라놓는다. 동생은 화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울 의지가 있지만, 형에게는 그럴 화란이 없기 때문. 이는 영어 제목이 <Hopeless(희망이 없는)>인 이유다.
한국 영화의 클리셰를 거부하다
이러한 멜로드라마는 <화란>이 한국 조폭 영화의 틀을 탈피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실 배경은 유사하다. 한국 조폭 영화는 주로 재개발 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비열한 거리>, <강남 1970>, 심지어 1달 전쯤 개봉한 <보호자>까지도. 조폭은 철거민을 밀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이는 고도의 압축 성장을 이뤄낸 한국 사회의 집단적 욕망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조폭 영화 속 신축 부동산은 중산층으로 발돋움하려는 평범한 서민의 욕망을 보여준다. 이는 장르는 달라도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궤를 같이 하는 지점이다. 조폭 또한 부동산 재개발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조직 내외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 조폭 영화는 정치인, 기업인, 조폭의 삼각관계를 주로 반복한다. 조폭인지 정치인인지 분간하는 게 의미 없는 <아수라> 속 박성배 시장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 삼각관계에는 올드하다는 이미지와 클리세 범벅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인 감독은 과감한 시도를 한다. 정치인, 기업인, 조폭이 아닌 조폭의 말단, 막내에게 집중한다. 치건의 큰 형님은 재개발 사업 이권을 두고 국회의원 선거를 주무르려 한다. 그러나 연규에게 이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윗사람이 어떤 이익을 두고 싸우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조폭 영화에 담긴 새 세대의 현실
대신 영화는 새로운 세대의 고민에 집중한다. 치건은 연규에게 묻는다. "언제 여기 왔어?" 연규가 답한다. "태어날 때부터요." 이는 단순히 명완시에 언제 왔는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언제부터 폭력의 굴레에 빠졌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린 연규 입장에서는 답이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이 문답의 연장선상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성년을 앞둔 고등학생이 이미 존재한 카르텔, 폭력의 굴레를 어떻게 버텨내는지, 책임 지고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지. 이미 자리 잡힌 사회 구조, 상승할 희망조차 찾기 힘든 시스템 안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한다. 이는 <화란>의 분위기가 여느 영화보다도 암울하고 처절한 이유다.
그렇다고 <화란>은 그저 냉혹한 현실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한 가닥 응원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치건과 헤어진 후 집에 돌아온 연규는 새아빠에게 맞아 죽은 엄마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새아빠에게 복수하는 대신 하얀과 함께 집을 나온다. 다른 도시로 떠난다. 자기 손으로 폭력을 거부하고, 굴레를 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화란>은 고여 버린 장르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물론 마지막 장면이 마냥 희망적이지는 않다. 과연 연규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완전히 떠날 수 있을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두 주인공의 표정도 홀가분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들이 새 출발을 알린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화란>은 회의감을 떨치지는 못해도, 이제 막 성년이 될 두 주인공에게 마지막 응원은 보내려고 노력한다.
좋고 싫은 이유가 같다
분명히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다. 15세 관람가치고 잔인한 장면이 꽤 많다. 완성도 문제도 있다. 여기저기 생략된 지점이 많다 보니 뒤로 갈수록 영화가 버거워한다. 특히 조직 상부에서의 의사결정과 음모, 하부 조직원과의 감정선과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 하얀처럼 점점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캐릭터도 생긴다. 정교한 스토리텔링 대신 배우들의 연기력과 분위기에 기대기 때문. 서사의 빈 공간을 유추해야 하는 불친절한 작품인 셈이다.
다만 역설적으로 좋아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인 영화이기도 하다. 반지하방의 습기처럼 답답하고, 운동화에 달라붙은 껌처럼 찐득한 분위기는 근래 한국 영화에서 맛보기 어려운 개성이다. 도를 넘는 듯한 잔혹함은 그 분위기와 현실을 강조한다. 그 덕분에 송중기의 새로운 모습, 홍사빈과 김형서라는 신인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 나아가 웃음을 단 한순간도 허용하지 않는 뚝심까지 고려하면 <화란>은 근래 한국 영화 중, 특히 갱스터(조폭) 영화 중 보기 드문 수작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들짐승처럼 맹목적이고 폭력적이며 진득한 갱스터 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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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함께라면 그깟 오류 쯤이야
* <글리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글리치 (2022)
연출: 노덕
극본: 진한새
출연: 전여빈, 나나, 이동휘, 류경수, 백주희 등
장르: SF, 스릴러, 코미디
공개 회차: 10부작
유년 시절의 ‘지효(전여빈)’는 괴짜로 통했다. UFO를 추종하며 전세계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는 중학생 소녀에게 이해 혹은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여느 날처럼 학교 옥상에서 전자파 탐지기를 손에 쥔 채 음악을 듣고 있던 ‘지효’ 앞에 처음으로 말을 거는 소녀 한 명이 나타났다. ‘지효’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영혼의 친구, ‘보라(나나)’와 ‘지효’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외계인과 사이비 종교. 작품을 관통하는 거대한 소재들이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집요한 자아 탐색과 성장의 과정, 그리고 두 여자의 우정이다. 작품이 미스터리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외계인이나 비과학적인 사건들을 파고드는 데 열중하지 않는 것은 주인공을 둘러싼 ‘믿음’의 실체를 확인하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변화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감정들이 더 중요하게 다뤄 지기 때문이다.
‘지효’에게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괴짜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며 평범한 친구들처럼 살아가기 위해 어린 시절의 자신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환각인지 실재인지 알 수 없는 외계인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잠시 눈을 질끈 감고 안 보이는 척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사회 속에 숨어든 채 불완전한 평화를 유지하던 찰나 외계인의 흔적이 턱 끝까지 쫓아오고, 급기야 헤어진 남자친구 ‘시국(이동휘)’이 실종된다. 안정적인 일상은 깨졌고, 오류(Glitch) 상태에 놓인 ‘지효’는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나 외계인이 보여.’ 누가 이 문장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순수하게 믿어줄까? 소통이 불가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지효’를 더 답답하게만 만들 뿐이다. 시청자들마저 답답하게 할 정도로 그가 입을 꾹 닫은 이유는 애초에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국’의 실종으로 외계인과 UFO에 대한 ‘지효’의 생각은 의심에서 확신으로 변했다. 남자친구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보다 믿음의 실체를 꼭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증명하는 길일 테니까.
‘지효’를 혼란에 빠뜨린 미스터리는 그를 외계인도, 남자친구도 아닌 오래 전 사이가 틀어진 친구 ‘보라’에게 데려다 놓는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었던 친구, 함께 아지트를 만들고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영혼의 단짝. 한때 ‘보라’는 ‘지효’의 오해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지만 관계의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거침없는 태도와 담대함을 무기로 친구를 둘러싼 기이한 사건들의 실체를 독종처럼 파고든다. ‘지효’가 겁에 질리거나 깊은 생각에 잠겨 고장이 날 때마다 ‘보라’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앞으로 이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순간에 부딪힐 지라도. 정상의 궤도를 걷고 있던 ‘지효’에게 찾아온 혼돈은 그를 얼어 붙게 했고, 공룡만한 크기의 외계인에게 쫓기며 두려움을 경험했다. 이 상황을 해결해야 했지만, 자신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지효’는 온전히 혼자였다. 그런데 겉으로는 트러블 메이커 같아도 능수능란하게 위기를 넘기며 해결사를 자처하는 ‘보라’가 자신의 기묘한 운명에 같이 뛰어들었다.
비록 하나 뿐이지만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지효’는 주저 없이 외계인과 사건들의 연관성을 파헤친다. ‘시국’의 납치, 외계인과 UFO, 정신병원과 ‘하늘빛들림교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던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지효’는 자신과의 연관성을 찾아내기 위해 사이비 종교단체에 잠입하고, 호산나를 연기하는 위험까지 감수한다. 이 모든 과정을 감내한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찾기 위해서다. 비록 제3자에게 ‘미친년’ 소리를 들을 지라도 ‘지효’는 자신의 두 눈에 보이는 외계인이 환각인지 실재인지 이번 기회를 통해 꼭 확인해야만 했다. 자신이 믿고 살아온 현실이 허상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은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꽤 오랫동안 자기부정을 거듭하며 거짓된 자아를 만들고 평범함을 지키고자 애썼던 ‘지효’는 상상치도 못했던 스케일의 모험을 겪으며 자신이 봉인했던 과거의 자아를 되찾고 진짜 ‘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사실 사이비 종교나 외계인은 단지 ‘지효’의 자아 탐색과 성장을 위한 배경이자 수단이었을 뿐이다. 주인공이 범상치 않은 인물인 탓에 본의 아니게 그 과정이 스릴러에 판타지 장르가 되어 버렸지만.
외계인의 존재를 목도하기 전, 종교 의식의 호산나로 낙점되어 손발이 묶인 채 광신도들 앞에 전시되어 있던 ‘지효’는 자신의 신념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무너질 뻔한다. 하지만 ‘보라’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를 구하며 자신의 믿음을 보여준다. 눈물을 흘리며 ‘지효’를 끌어안는 ‘보라’의 눈빛에는 그를 향한 확신이 서려 있다.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무한한 신뢰를 주는 조력자이자 동반자의 등장. 진실과 자아를 찾겠다고 나선 친구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싸울 수 있는 친구가 얼마나 있겠는가. ‘보라’의 존재만으로도 ‘지효’는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친구와 함께한 모든 여정을 통해 자신에게 불어 닥친 오류를 극복했다. 어쩌면 고생 끝에 입증한 자신을 향한 믿음보다 누구보다 자신을 믿는 친구와의 조우가 ‘지효’가 외계인 사태를 통해 얻은 가장 값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1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만난 두 친구이지만 마치 늘 함께였던 것처럼 의기투합하여 이들 앞에 폭탄처럼 터지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영리하고 용감하게 헤쳐 나간다. 누구보다 나를 믿어주는 친구가 곁에 있다면, 사이비 종교 단체나 외계인 따위와 맞서는 것도 두렵지 않다. 어딘가 모자라고 나사가 하나쯤 풀려 있는 것 같은 두 주인공의 모험과 ‘지효’의 성장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너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여자들의 우정이 빛난다. ‘보라’는 ‘지효’를 오류 속에서 꺼내 구원하였고, ‘지효’는 삶의 권태에 빠진 ‘보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헛된 신념에 빠진 사이비 종교인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저마다의 구원을 찾았지만 무한한 믿음으로 형성된 벗을 통한 구원 앞에 이들의 허황된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혼자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을 때, ‘나’를 완전하게 믿어주고 ‘나’를 위해 주저 없이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 한 명을 곁에 두는 것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그 존재로부터 확신을 얻은 ‘지효’는 무너지지 않았고, 스스로의 삶마저 완벽하게 구원했다. 오합지졸 같던 두 주인공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분투하는 과정은 허접하고 유쾌하다가도 어느샌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공식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