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2-02-20 18:39:31
마음에 담아놨던 말 쓰기에 광고판 3장은 너무 좁아
<쓰리 빌보드>, 스포일러 없이 추천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김추자의 노래 가사 중 하나다. 옛 과거부터 그리움과 회한이라는 소재는 문학에서 흔히 쓰여왔다. 내 경험상 역시 사람에게 가혹한 아픔 중 하나는 역시 이별에 의한 것이었다. 이걸 보면 나 개인적으로도 그런 소재가 많이 쓰였다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이 뿐인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가슴속에 이별한 이들을 그리워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을 이별한 것도 역시 가슴 아플 수 있겠지만 그중 마음 아픈 것은 많이 사랑했거나, 받았던 사람이 떠나는 것일 테지. 하지 못한 말이 마음에 남았다는 것은 사람을 참 아프게도 만든다. 당연히 그만큼 사랑해줄 사람도 없고 줄 만한 누군가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그 떠나갔다는 공허함을 채우려고 사람에게 동기부여가 생기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랬고, 내 주위의 친구들도 그랬다. 이게 없으면 나에게 지장이 생긴다는 걸 깨닫는 거지. 사실 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간단하다. 있을 때 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중요한 줄 모른다. 나를 사랑하고 존경해도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쩐지 마음이 안 가는 사람도 있지 않나. 그럼 누군가는 또 그 간극에 상처받겠지. 또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이동에 민감하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 결과로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점점 쌓이기 시작한다. 왜 그가 떠났는가.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이 마음속의 잔여물은 사람을 참 괴롭게도 만든다. 그것 때문에 무서워서 내 모든 걸 다 갖다 바쳐도 결국 없다는 건 나를 더 강하게 압박하니 삶은 참 어려운 순간의 연속이다. 내가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은 참 어렵다. 그게 이성(내지는 동성) 간의 연애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있을 때 잘하면 되는데 그때를 허무하게 놓치는 것이다. 또 같은 걸 반복하기 싫어서 많이 주면 외로워진다. 이런 삶의 괴로움이 그게 단적인 에피소드로 쨘하고 그나마 홀가분할 텐데, 사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 같다. 내가 친구가 진짜 없는 걸까. 아니면 있는데도 내가 다들 갖고 있는 고독함에 빠지는 것인가. 이 난제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 대화하고 싶어 진다. 이 세상과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영화가 있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2월 신작으로 어마 무시한 작품을 가져왔다.

1. 어떤 것에 대한 작품인가요?
딸이 죽었다. 원인은 강도살해다. 친구 집에 놀러 간다는 말에 다퉜는데, 그때 홧김에 '오다가 강도라도 당해버려라'라고 했던 것이 정말 현실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을 잃었다. 아직도 주인공에겐 가족과 직장, 그리고 집과 아들이 있지만 사실 모든 걸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 밀드레드는 광고판을 게시한다. 범인을 왜 잡지 못했냐고 경찰서장 윌러비에게 항의하는 것이다. 당연히 해당 소관 경찰서는 뒤집힌다. 경찰서장 윌러비는 불같이 화를 낸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밀드레드에게 항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죄자가 잡히는 것은 아니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행동으로 이어지는 밀드레드는 확실히 과격하고 거친 사람이다. 그녀가 품은 분노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과연 그녀의 방식이 옳았는지는 따지고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동네방네 망신을 준 대상은 앞에서도 썼듯 윌러비다. 윌러비에게는 마음속에 품은 비밀이 있다. 윌러비는 이 비밀 때문에 매일을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근데 그에겐 가족까지 있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가장인 윌러비. 말 못할 사정이 있지만 누구보다 좋은 사람인 그에게, 밀드레드는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책임을 묻는다. 선하게 삶을 살아온 그가 경찰으로서의 본업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창피를 당하는 것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좋은 사람이고 경찰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불가항력의 무엇 때문에 그냥 소시민이었던 한 여자에게 창피를 당한다라는 것이다. 좋은 아이러니 아닌가. 영화는 제목 <쓰리 빌보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광고판으로 생긴 아이러니를 소재로 다뤘다. 선함이 분노로 이아지고.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만들고. 어떻게든 해결된다 믿었는데 또 다른 무언가를 야기하고. 영화는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이 역설이 이뤄지는 과정을 다룬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역설만 보여주고 끝나지는 않는다. 영화가 주는 따뜻한 순간이 있는데, 이 순간에 대해 염두하고 보시라. 그럼 감상이 깊을 듯.
2.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사랑과 용서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밀드레드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밀드레드는 후회와 미련을 다른 방식으로 푼다. 안타까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서러움을 타인에게 해결하는 것이다. 영화 내내 그녀가 따뜻해지는 순간이란 몇 없다. 물론 영화 내에서 제시되는 한 사건으로 인해 흑화 한 것도 맞다. 단순히 이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입장에 서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변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나는 주인공 밀드레드가 원래 온정을 베푸는데 능하지 않은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인물이 그런 끔찍한 사고까지 겪었으니 더더욱 어두워지는 것이다. 영화는 플롯을 끌고 가며 이 사람이 어디까지 흑화 했는지를 묘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 없는 따뜻한 순간이 더더욱 도드라진다. 영화는 이 순간(온정)을 주요 사건으로 설정하며 '분노가 결국 인간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와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도와준다. 난 좋은 영화와 책의 조건 중 하나가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런 기능을 충실히 한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비범함이 눈에 뜨이는 것처럼 용서와 사랑이 한 인물의 행동을 통해 두드러지는 것이다. 뭐 사실 주인공 밀드레드에게만 이런 특징이 나타나는 건 아니다. 경찰 딕슨에게도, 레디 월비에게도 사랑이 인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다.
3.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각본이다. 이야기 구성이 정말 촘촘하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인물 설정을 예시로 들 수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딸을 끔찍한 사고로 잃은 엄마다. 당연히 세상에게 분노를 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이 딸의 가해자를 찾는 방식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서장의 이름을 걸고 광고판을 내세웠다. 여기부터가 굉장히 특별한 방식의 전개라고 생각한다. 경찰이 부패하거나 무능력했기 때문에 이를 위한 복수극을 벌인다는 영화는 자주 봤었던 것 아닌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경찰은 최선을 다했다는 전제가 극 내부에 계속해서 깔리고 있으며 윌러비는 더도 없는 좋은 사람이라는 묘사가 나온다. 윌러비는 모든 것을 걸고 노력했지만 광고판에게 비난을 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또 윌러비에겐 그가 겪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런 인물 간의 설정들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제까지 봤던 범죄/스릴러물과는 다른 방식의 비틀기로 '과연 이 행동에 끝이 있을까?'라는 물음을 건네준다. 사실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이 질문의 답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좀 다르다. 무작정 '분노를 용서해야 큰 사람이 된다' 식의 말이 아니다. 보다 객관적인 견지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오로지 당신을 위해. 또한 코미디로서도 탁월하다. 극의 소재는 굉장히 무겁다. 그런데 그렇게 극이 무작정 무겁게만 전개되지는 않는다. 소소한 유머와 블랙코미디도 있으니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철학적 물음이 관객에게 좋게 작용한다. 다음은 여주인공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샘 록웰의 퍼포먼스인데 5번으로 넘어가면 될 듯.
4.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아니오! 무난하게 볼 수 있다.
5.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2021년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홈리스의 세계에서 재회를 고대하는 주인공 역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2018년에 이 <쓰리 빌보드>로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난 이 두 번의 수상 중 후자 쪽이 더 난이도가 어렵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시얼샤 로넌이나 마고 로비, 메릴 스트립 같은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의 대진도 나름이었지만 연기할 때 붙는 조건이 많다는 점에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밀드레드는 겉으로는 센 척 하지만 내면은 약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딸과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서툴렀다는 것도 역시 특이점이다. 이 인물의 성격을 바탕으로 관객에게 딜레마를 전해줘야 한다. 분노가 납득이야 되지만 이런 방식이 이 주인공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퍼포먼스는 아주 훌륭했다. 거친 어머니에 맞는 코디와 비주얼, 또 섬세하고 여린 내면에 맞는 애처로운 눈빛까지 대배우의 카리스마가 유감없이 드러났다. 다음은 샘 록웰이 맡은 딕슨 역이다. 샘 록웰 역시 이 역할로 아카데미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딕슨은 뭔가 나사가 빠져있다. 경찰 근무하다가도 갑자기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화나면 사람을 주먹부터 나가는 둥 좋은 경찰이라 보긴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런데 이 인물이 변곡점을 지나 갑자기 성장하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이 묘사가 좋다. 완전 싹 바뀌지 않는다. 사람 성격이 다음날 바로 바뀌면 그게 더 이상하다. 당연히 서서히 바뀐다. 이 바뀌고 나서 '인물의 내면이 성장함+기존의 성격이 이어짐'을 표현하는 디테일이 좋았다. 이 외에도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던 우디 해럴슨의 세상 좋은 아재 연기나 사미라 위빙의 눈치 없는 연기도 좋았다.
6.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무난하게 볼 수 있다. 아, 현재(2022년 2월) 디즈니 플러스와 네이버, 티빙,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7.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간단하다. 잘 만든 영화 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지루하지도 않고 코미디도 있으며 철학적인 물음까지 있으니 완전 일거양득이다. 다음은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분들이다. 여러분에게 무작정 이해하고 넘어가라고 하지 않겠다. 나 역시 큰 구멍이 있으니 그게 얼마나 해선 안 되는 말인지는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걔보다 승자가 되어야만 한다. 분노에 의한 동기부여?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지지한다. 그런데 그런 쪽으로 무작정 결론이 나는 게 우리에게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우리는 행복한 쪽으로 귀결을 내야 할 것 같다. 그게 그렇지 못할때의 우리 모습을 여러번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다음은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도 추천한다. 손예진이나 현빈 배우같이 잘생기고 예쁜 얼굴 구경하는 게 작품의 재미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맥도먼드의 연기를 보는 것도 꽤 큰 감상 포인트(?)다. 또 디즈니플러스 유저들 중 MCU 작품들이나 토이 스토리 시리즈,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고 난 다음 '뭐 보지?'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웨이브나 네이버, 티빙에서 5천 원 주고 볼 바에 이럴 때 보는 게 좋지 않겠어? 당당히 디즈니플러스 추천작으로 강조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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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질주 시리즈 순위
분노의 질주 시리즈 순위
#10 : 외전 홉스 & 쇼 (Fast & Furious Presents: Hobbs & Shaw, 2019)
<데드풀2>의 데이빗 레이치는 드웨인 존슨과 제이슨 스타뎀의 출연작에 대한 메타유머를 활용하고, <007 시리즈>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한다. 런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모아로 공간적 배경을 옮겨 다니고, 007의 국제 범죄조직'스펙터'에서 영감을 받은 '에테온'을 등장시킨다. 또 런던 리든홀 활강 장면은 <미션 임파서블>의 부르즈 할리파 장면을 오마주했다.
<홉스 & 쇼>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라기보다는 '버디 액션 코미디'에 가깝다. 또 이야기가 허술한 것은 이해한다 손치더라도 액션조차 히어로영화스럽다. 또 '해티 쇼(바네사 커비)'는 등장할 때마다 빛나지만, 블랙 슈퍼맨 '브릭스턴(이드리스 엘바)'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진다.
#9: 2편 패스트 & 퓨리어스 2 (2 Fast 2 Furious, 2003)
전편의 답습, 마이애미로 이사 간 브라이언은 새로운 파트너 로만 피어스(타이리스 깁슨)와 콤비를 이루지만, 빈 디젤의 공백을 메우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테즈(루다크리스)가 코믹하게 등장한다.
1시간 반 남짓한 2편은 드라마를 듬뿍 덜어낸 대신 존 싱글턴은 '스트리트 레이싱'에만 집중한다. 문제는 자동차 추격 장면이 속도감은 있지만 우스꽝스럽다. 아무리 저예산 B급 액션 영화라고 해도 동선조차 조잡하다. 이상 2편은 1편과의 연계성도 거의 없고, 엉성한 캐릭터와 부실한 볼거리, 뼈대만 남은 앙상한 스토리라인이 아킬레스건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로만과 테즈 콤비를 득템했다.
#8 : 3편 도쿄 드리프트 (Fast And The Furious: Tokyo Drift, 2006)
그야말로 프랜차이즈의 정체성인 ‘스트리트 레이싱’에만 올인한 3편이다. 특히 ‘드리프트’의 속도감과 긴박감을 살리기 위해 현역 드라이버 중심으로 구성된 스턴트 스태프들이 온몸을 불사른다. 이쯤 되면 <트리플 X>와 <분노의 질주>를 제작한 닐 오비츠의 성향이 나온다. 플롯, 캐릭터, 드라마, 리듬은 약하지만, 속도감과 볼거리만큼은 끝내준다. 설계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설득력을 갖춘 캐릭터가 없다. 이것이 패착이다.
새로 합류한 저스틴 린 감독은 시리즈의 전통인 '길거리 경주'와 '자동차 문화', '범죄' 등 향후 프랜차이즈를 구성할 방향성을 대폭 수정한다. 바로 '다민족 캐스트'를 강조하고, '해외 로케이션'을 적극 반영할 준비를 이미 3편에서 끝마쳤다. 향후 블록버스터로 나아갈 기초공사를 마친 셈이다.
#7 : 8편 더 익스트림 (The Fate Of The Furious, 2017)
프랜차이즈를 책임지는 작가 크리스 모건과 범죄영화에 특화된 F. 게리 그레이는 사망한 폴 워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분노의 질주>만의 포뮬러(공식)을 깨버린다. 리더 돔 토레토(빈 디젤)이 자신의 패밀리를 배신하는 영리한 조치를 취한다. 그 과정에서 한을 살해한 데커드 쇼(제이슨 스테이섬)에게 별다른 속죄 없이 면죄부를 부여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특유의 가족드라마가 깨졌지만, 홉스(드웨인 존슨)와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워커의 부재로 말미암아 실종될 버디 코미디를 되살렸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캐릭터쇼와 볼거리가 다양하고 액션 규모를 키운 반면에 메인 빌런인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5편부터 그 조짐이 보였지만, 액션 스타일이 007시리즈를 자꾸만 연상시킨다. 레티(미셸 로드리게즈 분)가 차량을 비스듬히 기울여 운전하는 장면은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를, 설원의 카 액션은 <007 다이 어나더 데이>를, 최종 병기로 잠수함을 활용한 클라이맥스는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 <007 언리미티드>을 떠올리게 한다.
#6 :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F9: The Fast Saga, 2021)
유니버설은 ‘더 패스트 사가(The Fast Saga)’로 명명된 지난 시리즈를 정리하고 후속작(F10, F11)에 쓰일 복선을 미리 깔아놓는다. 그래서 9편은 드라마 비중이 상당하다. 또, 5편에서 '드웨인 존슨'을, 6편에서 '제이슨 스타뎀' 같은 유명 배우를 추가해서 얻은 효과를 존 시나를 통해 노리고 있다. 그래서 토레토의 가정사부터 3편<도쿄 드리프트>의 등장인물 백스토리까지 캐릭터 개발에 공을 들인다. 동창회처럼 시리즈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총집결한다.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인 터무니없는 액션과 캐릭터 쇼로 끊임없이 팬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존 시나를 추가하는 바람에 페이스가 느려졌다. 가족 드라마를 그리기 위해 긴박감과 박진감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야기 얼개가 탄탄해진 것도 아니다. 이 시리즈는 불가능한 것이 없도록 스스로 세계관을 바꿔왔다. 이제 이 전략이 한계 지점에 다다른 것 같아 불안하다.
#5 : 4편 더 오리지널 (Fast & Furious, 2009)
4편은 사실상 리부트에 가까운 '기능적인 영화'다. 저스틴 린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 모건은 폴 워커와 빈 디젤을 다시 등장시키며 1편을 리뉴얼한다. 초기 영화(1·2·3)의 스트리트 레이싱 드라마와 후기 영화(5·6·7)의 액션 블록버스터 사이 어딘가에 끼어있다. 이런 불균질한 영화의 톤이 몰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차량 투척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액션이 별 특색이 없다.
1편의 전개와 구도, 캐릭터를 동어반복한지라 작품 자체의 개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특히 레티(미셀 로드니게스)에 대한 부주의한 대접은 <분노의 질주> 특유의 가족 드라마를 방해한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이후부터 저스틴 린은 캐릭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유일한 장점은 ‘한(성강)’을 도미닉의 친구로 등장시켜 외전에 가깝던 3편을 시리즈의 세계관에 편입시켰다는 정도다.
#4 : 1편 분노의 질주 (The Fast And The Furious, 2001)
이 저예산 범죄영화가 이후에 21세기 초 가장 중요한 영화 프랜차이즈 중 하나가 될 것을 알았을까?1편의 줄거리와 캐릭터, 설정은 <폭풍 속으로 (1991)>을 참조했다.
1편의 진정한 가치는 ‘길거리 레이싱’이라는 프랜차이즈의 정체성을 세운 점이다. 먼 훗날, 탱크와 핵잠수함, 헬기, 우주선, 슈퍼 카들을 고려하면 스케일은 소박하고 싱겁다. 하지만, 속도감 있는 아날로그 액션만큼은 프랜차이즈에서 가장 순수하고, 날 것 그대로의 쾌감이 살아있다.
#3 : 6편 더 맥시멈 (Fast And Furious 6, 2013)
레티 오티즈(미셸 로드리게스)를 복귀시키기 위해 기억상실증으로 엉성하게 처리한 것처럼 이 영화는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다. 이제 질주는 뒷전이고, 고급차를 마구마구 ‘파괴’하는 분노에 집중한다. 게다가 이번 빌런도 '도플갱어'다. '팀 돔과 팀 오웬의 단체 대결'이 줄거리 전부이고, 슈퍼 카(심지어 탱크, 수송기까지도)들을 즐비하게 등장시키고 그것을 아낌없이 때려 부순다.
지젤(갯 가돗), 엘레나 네베즈(엘사 파타키)이 퇴장하거나 어정쩡해졌지만, 이 재밌는 난장판을 통해 도미닉 일당은 동료애를 넘어서서 '가족애'로 승화되고, 쿠키 영상으로 3편(도쿄 드리프트)와의 연결 고리도 확보한다. 007시리즈를 본받아 프랜차이즈는 '저예산 레이싱 영화'에서 '첩보 블록버스터'로 체급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2 : 7편 더 세븐 (Furious 7, 2015)
7편은 촬영 중 사망한 폴 워커에 대한 진심 어린 송사와 더 많은 캐릭터와 물량의 인해전술로 밀어부친다. 아제르바이잔 오프닝부터 관객의 시선을 뗄 수 없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액션 시퀀스를 쏟아 붓는다. 제이슨 스타뎀, 토니 쟈, 커트 러셀, 론다 라우지 같은 액션배우 올스타를 동원하고, 관객들이 지루할만하면 중력의 법칙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물량공세가 시청각을 장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질주 7>은 뒷골목 레이싱에서 벗어나 판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슈퍼 카들의 무한질주'라는 초심을 놓지 않는다.
특수한 프로그램 '신의 눈'을 가진 테러리스트 '제케이드(자이먼 혼수)'를 찾기 위해 '데커드 쇼(제이슨 스타뎀)'을 만났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쇼와의 대결로 치닫는다. 7편부터 시리즈의 스토리가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개별 장면의 뛰어난 완성도에 비해 전체적인 맥락과 개연성은 희생되었지만, 도미닉 패밀리의 캐릭터 드라마만큼은 확실히 챙겼다는 점에서 제임스 완으로써도 쉽지 않은 임무를 훌륭히 처리했다.
#1 : 5편 언리미티드 (Fast Five, 2011)
5편은 프랜차이즈의 '포뮬라(공식)'을 확립된 작품이다. 첫째, <분노의 질주>는 뒷골목 레이싱에서 벗어나 판을 크게 키운다. 둘째, 홉스(드웨인 존슨)가 합류하면서 도미닉 일당의 윤곽이 확립된다. 셋째, 적과 맞써기 위해 '가족' 같은 일당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질주한다가 줄거리의 전부다.
넷째, 레이스 자체는 볼거리중 하나로 축소되고, 대신에 여타 장르(5편은 하이스트 장르, 6편은 첩보물, 외전은 버디물, 9편은 SF물)를 도입한다. 그밖에 5편의 금고 장면 이후 탱크, 비행기, 드론, 헬기, 잠수함, 우주선을 추가되면서 테스토스테론 연료를 새로이 주입한다. 이로써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현대 액션의 총아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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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블로그 영혼아이 TER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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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이라는 노동의 세계
#디올 #오트쿠튀르 #라프시몬스
먼저 자기반성? 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패션에 관심이 있었지만 패션에 탐닉할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사람이란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은 가져야 하지만 그 정도가 명품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지면 안된다고 생각해온 사람이었다. 그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면 사람을 천박한 허영심의 노예로 바라보게 된다고 믿어왔다. 결국 나는 명품 브랜드라는 존재에 대해서 하나쯤은 갖고 싶지만 사람의 허영을 자극하기도 하는 것으로 폄하하면서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디올 앤 아이,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명품 브랜드에 관한 상반된 감정 중에서 전자, 브랜드에 대한 동경 때문에 내면 속 허영심을 자극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낯선 인물이 등장한다. 라프 시몬스. 패알못은 주섬주섬 핸드폰을 들어 라프 시몬스를 검색한다. 오호, 질 샌더 디자이너였군. 그럼 질 샌더는 무슨 브랜드이지? 패션에 대해서는 정말 1도 모른다는 사실을 통감한 채 검색을 포기하고, 영화를 계속 본다. 보다보니 이 영화, 잘 골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 오트쿠튀르의 정신
Ready to wear, 남자 기성복만을 만들어온 라프 시몬스에게 디올 오뜨꾸뛰르는 정말 큰 도전이었다. Haute Couture, 고급 맞춤복을 만드는 컬렉션을 기성복을 만드는 과정과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귀족, 부르주아 상류층을 위해 존재해왔던 오뜨꾸뛰르가 산업 혁명을 거쳐 일반인들을 위한 패션, 즉, 대량생산이 가능한 패션인 기성복 라인과는 옷을 만드는 목적과 방식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 라프 시몬스의 작업 방식은 영화 초반까지도 "For only one"을 위한 의상이 아니라 "For every people"이었기 때문에 수석 디자이너가 고객 때문에 파리에서 뉴욕까지 비행기로 날아가는 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의 개인에게 특별함을 부여해주는 오뜨꾸뛰르의 정신은 돈을 많이 써주는 고객에게 올인할 수 밖에 없는, 예술성을 추구하지만 수익을 포기할 수는 없는 아이러니를 포함하고 있다. 한 고객이 쓰는 어마어마한 돈에는 오뜨꾸뛰르가 제공하는 익스클루시브, 특별한 대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대우 속에는 '당신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유일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오뜨꾸뛰르의 예술성을 누리기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일반인들을 왕따시키는 개념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인식 속에서 라프 시몬스가 해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2. 오뜨꾸뛰르의 원동력
영화 속에 등장하는 디올 하우스의 수많은 직원들은 진정 예술가로 인정받을 만하다. 모든 컬렉션을 총괄하고, 구상하는 역할은 라프 시몬스가 담당했지만 라프 시몬스가 구상한 옷을 물리적으로 표현해주는 사람들은 디올 하우스의 수많은 재봉사들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들이 2D의 그림을 3D의 현실로 구사해내는 과정을 보면, 신의 손은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컬렉션이 끝나면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디자이너에게 쏠리게 되지만 실제적인 노고는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의문점이 들었던 것이, 그들은 자신만의 디자인을 표현해내고 싶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디올의 오뜨꾸뛰르 작품들은 라프 시몬스만의 디자인이 아니라 디올 하우스의 모든 직원들이 감성이 표현된 작품이라는 알게 된 이후부터는 그 궁금증이 사라지게 된다. 작업 과정 중에서 개개인의 감각이 녹아있는 옷 하나하나에 애정을 갖고 일하기 때문에 디올 하우스가 유지되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디올 하우스의 직원들이 디올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모습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
3. 크리스찬 디올과 라프 시몬스
이 영화 속에서 나레이션으로 크리스찬 디올의 자서전의 대목들은 라프 시몬스의 상황과 묘하게 일치한다. 하나의 컬렉션을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 총괄자로서 직원들을 채찍질해야 하는 라프 시몬스의 상황이 아주 오래전 크리스찬 디올이 느꼈던 감정과 일치하곤 한다. 이런 감정은 이 둘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모든 창작자들의 감정과도 동일시될 것이다. 크리스찬 디올은 자신의 "샴 쌍둥이"라고 표현한 내면적 자아와 사회적으로 드러나 있는 자아로 자신의 자아를 분리시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영화 속 라프 시몬스의 언론에 노출되기를 꺼려하는 내면적인 자아와 디올이라는 브랜드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사교계 인사로 남아야만 하는 상황을 대비시키다 보면 이 상황은 결국 예술가들이 맞이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일반인들도 이런 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얼핏 보면 크리스찬 디올과 라프 시몬스 둘 만이 비슷한 고뇌를 공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내 진짜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우리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좀 더 특별한 직업을 가진 것일 뿐.
하지만 비싼 가방을 드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듯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이용한 마케팅의 노예가 되는 것은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명품 브랜드는 비싸다는 이유로 종교처럼 신봉하는 사람들이나 비싸다는 이유로 폄하하는 사람들 모두 하나의 옷을 만드는 데에 드는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느껴보라고 권유하는 의미에서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명품에는 사실 크게 관심없고, 저렴하고, 알뜰한 쇼핑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실 이 영화 안 봐도 될 것 같다. 눈 호강하겠다는 의미로 본다면 또 모르겠는데, 눈 호강은 사실 막판 10분 정도가 전부라서 크게 재밌는 영화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샤넬, 디올, 루이비통 같은 명품 브랜드의 컬렉션이 허영심을 자극하는 것은 마케팅을 탓해야지 디자이너를 비롯한 아뜰리에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들만의 예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이들의 컬렉션 작품을 볼 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듯 해석해보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듣는 예술, 보는 예술, 먹는 예술을 넘어 입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작품을 입는다는 생각을 하면, 하나의 옷을 만들기 위해서 드는 인건비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오뜨 꾸뛰르 아뜰리에에서 요구하는 비싼 가격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는 늘 생각해요. 디올 하우스에서 디자이너들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아뜰리에라고. 디올 하우스의 모든 보배가 모든 소중한 뿌리가 아뜰리에에 남아있죠. 40년 또는 44년 동안 여기서 일하신 재봉사들도 계십니다. 함께 어울리고 서로 소통하고 그렇게 풍요로워지는 거죠."
디올 앤 아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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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의 숫자가 시간이 되는 순간
나이는 대부분 숫자에 불과하지만, '시간'이라는 의미를 품는 순간 그 이상이 된다. 11살의 키와 무게에서 보이는 것과 30대 초반의 시야는 다르므로. 어떤 시간은, 다시 말해 어떤 나이는, 직접 그때가 되어보아야 안다. 당시에 아무것도 모르고 넘긴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누구의 부족도 아니다. 그저 살아가는 시간대가 달랐다. 영화 속 소피와 그의 아빠 캘럼이 그러했듯.
*아래로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름.
그리고 여행.
생각만 해도 밝고 경쾌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시원한 밤바다, 기쁨으로 그득한 웃음소리와 유쾌한 감탄사들 따위가. 소피와 캘럼의 여행은 어딘지 차분하고 점잖다. 튀르키예에 도착한 둘의 여행은 피곤에 절은 몸을 침대에 눕히는 것에서 시작된다. 잠든 건 딸 소피 혼자다. 침대 2개라던 방엔 왜 하나밖에 없는 건지. 여행 첫날 으레 겪는 사소한 꼬임.
이날 밤, 캘럼은 베란다 창을 닫고 한참 담뱃불을 붙이려 애쓴다. 이때 관람객 귀에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잠든 소피의 평온한 숨소리. 들리지 않을 숨소리에 맞춰 폴은 몸을 움직인다. 팔을 들어 올리고 몸을 비틀어 유연하게. 팔에 닿는 바람을 느끼는 것인지 몰라도 몸에 밴 듯한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캘럼은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거나 오락실에서 쓸 돈을 챙겨 오는 등 보호자 역할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정신이 딴 데 팔린 모습이었다. 여행지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쉽게 낭만적으로 변하는지라 현실이 잘 들이닥치진 않아도 몇 상황으로 유추해 볼 순 있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려던 부녀. 캘럼은 한 구석에서 직원과 짧게 말을 섞는다. 이곳저곳 다 돌아다니다가 결국 고향이 그리워 돌아왔다던 남자. 고향은 그런 존재라던 말. 캘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옮겨 가 삶을 새롭게 시작 중이다. 그에게 출생지는 고향이 아니었다. 편하고 돌아가고 싶은 느낌이 들지 않아서 떠났는데. 뜻대로 잘 되진 않는 모양이다.
소피는 아이들이 자주 하는 '왜?'가 없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 침묵하면 침묵하는 대로, 답을 하면 답하는 대로, 그리 둘 뿐이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캘럼은 소피의 보호자이고, 보호를 받아야 할 소피는 캘럼보다 당차고 강해 보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언밸런스한 조화를 갖췄다.
영화엔 교차 전환이 많다. 소피가 찍는 캠코더 속 캘럼과 자신. 캠코더 안 소피는 장난스러운데 캠코더 밖에서 똑같은 상황을 보자, 묵묵부답인 캘럼이 주로 보인다. 표정이 자세히 보이진 않는다. 거울에 비친 그들을 마치 주변 조형처럼 조명하므로.
이것 못지않게 의미심장한 컷이 있다. 여행 드문드문 나오던 플리커 컷. 어둑한 공간에서 강하지 않은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한다. 미친 듯이, 그래서 미칠 듯이. 그곳에서 캘럼은 춤을 추었다가 경악했다가 절규했다가 울부짖는다. 그러다 같은 공간에서 캘럼의 나이대와 비슷한 여성, 어른이 된 소피가 캘럼을 바라본다. 마치 과거 캘럼의 마음속을 지금의 소피가 들여본 것처럼.
우울에 잠식된 게 캘럼이라면, 이질감에 혼란을 느끼는 건 소피였다. 소피는 또래 친구들이 아닌,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이들과 어울려 논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나이 대 아이라면 할 법한 행동이나 말, 태도가 전혀 없다.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을 가려할 줄 아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어찌 보면 캘럼보다 더 의연하게 상황을 컨트롤하는 것도 같다.
소피와 오락실에서 게임을 몇 번 하던 또래 남자아이. 마르코가 대뜸 소피에게 고백했다. 네가 좋다고, 너도 나를 좋아하느냐고. 소피는 아무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말한 후 둘은 입을 맞춘다. 소피는 눈을 뜬 채로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경험한다. 자신이 어울려 놀던 청년 무리에서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던 여성과 남성들을 흉내 내는 것처럼.
지금의 소피는 아내가 있고 함께 키우는 아이도 있다. 그해 여름, 가장 옆에서 있으면서도 아빠의 우울을 짐작하지 못했던 건 그가 어려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하기 바빠서가 아니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모습 중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맞고 맞지 않은지 분별하기 위하여.
결국 소피는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이이고, 캘럼은 성장기가 지난 어른이기에. 시간대가 다른 둘은 함께 있어도 다른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캘럼 또한 소피의 이런 과정은 알지 못했을 테다. 어떤 일을 하든 소피가 다 이야기해 주길 바라도, 설령 소피가 다 이야기를 해도, 나 자신만 알 수 있는 게 있으니까.
'그때 몰랐다'는 것. 몰라서 미안하거나 슬플 게 아니라 당연한 게 아닐까. 각자의 문제에 분투하던 와중에 곁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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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나더 라운드> 디오니소스와 함께 술 마시며 춤추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촉망받던 역사학도였으나 지금은 일상에 찌들어 무기력해진 고교 교사 '마르틴(매즈 미켈슨)'. 그는 각각 체육, 음악, 심리학을 가르치는 동료 교사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와 함께 한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 축하 자리에서 흥미로운 심리학 가설을 듣는다.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쯤 부족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정도를 채워주면 더욱 편안하고 창의적일 수 있다’는 것. 직접 실험에 나선 마르틴은 음주가 지루한 수업과 가족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후일담을 전해준다. 이에 네 친구는 언제나 최소 0.05%의 혈중 알코올 농도 유지하고, 밤 8시 이후엔 술에 손대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한 뒤 지루한 교사, 매력 없는 남편, 따분한 아빠에서 탈피하기 위한 본격적인 실험에 나선다.
현대 사회로 오면 올 수록 술에 대한 인식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술의 정(精)이여! 너에게 아직 이름이 없다면 앞으로 너를 악마라고 부를 테다"라고 외친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2011년에 술은 세계보건기구(WHO) 선정 1급 발암물질이 되기도 했다. 특히 술에 의존하는 경향은 구하기 쉽다는 접근성과 인간관계 형성을 위해 오래도록 쓰인 문화적 특징과 결부되어 사회적, 개인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해서인지 많은 창작물에서도 술은 흔히 파국을 불러오는 소재로 활용되어 왔다.
반면에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고, 지난 19일에 개봉한 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결이 다소 다르다. 덴마크 대표 배우인 매즈 미켈슨과 토마스 빈터버그 감독이 <더 헌트> 이후 처음 합작한 이 영화의 종착역은 쌉싸름함 속에 달콤함이 깃든 다크 초콜릿처럼 마냥 행복하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약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술 내음이 가시지 않는 데도 말이다. 실제로 술이 등장하기 전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의 일상은 잿빛이다. 그러나 보드카·와인·샴페인 등이 등장하자 스크린에는 활기가 돌고, 색채가 살아난다. 왜 그럴까? 이는 <어나더 라운드>가 단지 술 문화 그 자체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술을 매개로 흔히 간과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삶의 태도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때 <어나더 라운드>는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두 신의 이름을 빌려 술을 둘러싼 네 친구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폴론은 시와 음악의 신이자, 빛의 신이고, 또 질서와 진리의 신이다. 이처럼 다양한 아폴론의 신격은 그의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를 통해 하나의 의미로 수렴될 수 있다. 이 문구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로서 신들과는 얼마나 다른지를 알라는 격언으로, 인간의 본성적 한계를 강조한다. 달리 말해 아폴론은 한계와 한도를 통해 무질서에 맞서 질서를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세계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관장하는 예술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일정한 한도와 질서라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수단이나 다름없다. 즉, 시와 음악을 관장하는 그의 역할은 개인적으로는 몸을 훈련시키는 체육처럼 영혼을 갈고닦는 교육의 기능에 속하고, 더 넓게는 이성을 통해 세계의 진리를 인식하는 지성적 목적을 갖는다.
실제로 영화는 이러한 아폴론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영화의 주된 공간적 배경이 학교인 것만 해도 그렇다. 학교라는 공간은 이성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질서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울대학교 정장에 'VERITAS LUX MEA', 곧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것이 단적인 예시다. 네 친구가 각각 역사, 체육, 심리학, 음악 등 그의 신격과 관련된 영역의 교사인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질서와 진리를 강조하는 신의 가치가 지배적인 공간과 직업답게, 그 안에서 지내는 구성원들에게도 강력한 규칙과 규율이 적용된다. 제 몫을 다해내지 못하면 교사들은 면담을 통해 학부모들로부터 직접 컴플레인을 들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학업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학생은 졸업 대신 재수강을 반복해야 한다. 당연히 술의 존재 역시 학교에서는 언급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금기시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질서가 확고한 공간 안에서 작중 구성원들은 행복해지는 대신 오히려 피폐해진다는 점이다. 교사라는 직업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교사는 그 무기력함이 가족 관계로 번지는 것마저 막아서지 못한다. 육아와 직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아버지는 가중되는 스트레스를 토로한다. 졸업 시험에서 거듭 낙제를 경험했던 학생은 극도의 공포심에 휩싸이며, 축구팀 내에 스며드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한 어린아이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 이러한 공통의 좌절감은 이들의 이야기가 단지 학교 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처럼 강력한 질서와 규율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되는 기반이 된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술을 매개로 포도주의 신이자 축제, 광기, 야성의 신이기도 한 디오니소스를 불러온다. 디오니소스는 사람들을 산과 들로 이끌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게 하면서 열광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신이다. 그는 질서와 같은 이성적 틀이 사람들의 삶에 가하는 억압으로부터 자연스러운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춤과 노래의 인도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감정이라는 삶의 생명력으로부터 반지성적 목적을 이루려 한 것이다. 이는 그가 포도주로 상징되는 비이성적인 도취 상태로 사람들을 이끄는 신인 이유다.
그래서 <어나더 라운드> 속 술 역시 단순한 일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형화된 삶 속에서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진정으로 삶을 살아있게 하는 그 의지를 일깨우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마르틴이 술을 마신 이후로 크게 세 가지의 삶의 의지를 되찾는 과정을 그려낸다. 우선 인생에서 지나가 버린 젊음이다.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 마치 젊은 적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워한다. 다음으로는 그간 손 놓고 있었던 관계다. 아내와의 관계, 아이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거나 오래간만에 가족 여행을 계획한다. 마지막은 잃어버렸던 열정이다. 수업 진도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시험 문제 출제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마르틴. 그러나 그는 이제 실험적인 강의 방식을 통해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과거의 본인이 품고 있었던 역사에 대한 열정을 전해주기까지 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의 신격과 그 함의는 마르틴이 항구에서 술 마시며 춤추는 마지막 장면에서 제대로 분출된다. 고대에 이루어지던 디오니소스 제의 중에는 “코레이아”(choreia)라고 불리던 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해당 장면이 바로 시, 음악, 무용의 원시적 융합 형태였던 코레이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디오니소스 제의에서 코레이아가 춤추는 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마르틴의 춤은 더욱 인상적이다. 매즈 미켈슨이 젊은 시절 기계체조를 배우고 무용수로 활동하던 경력을 발휘해 재즈 발레를 추는 사이, 무기력했던 마르틴의 삶에는 활력이 돌고, 그의 무채색 일상에는 빛이 들어오며, 그의 삶은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간다. 술로 인해 인생을 되찾아가는 이야기는 이처럼 아폴론의 가치에 눌려 있었던 디오니소스적 삶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에 비로소 완결된다. 이는 영화 속 술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대신, 영화가 끝날 때 제목대로 “한 잔씩 더(Another Round)!”를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다.
물론 <어나더 라운드>가 마냥 술과 디오니소스가 대변하는 삶의 태도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네 친구의 실험은 그들의 의도대로 흐르지 않고, 그들은 술을 통제하지 못하며 온갖 사고를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굳이 점차 터부시 되는 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현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때 인간의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본성에 대한 합당한 배려가 결여될 경우, 사람들은 삶의 의지를 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제나 술과 같은 쉼터, 혹은 탈출구를 경시하지 않고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술과 술의 신의 이름으로 통찰하면서 <어나더 라운드>는 사회적, 개인적 삶의 차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길을 보여준다.
A(Acceptable, 무난함)
아폴론의 빛을 견디기 힘들 때면, 디오니소스와 함께 마시고 춤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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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창의 서리로 표현된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
유리창의 서리로 표현된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
영화 <캐롤> 리뷰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시놉시스] 당신의 마지막, 나의 처음.. 모든 걸 내던질 수 있는 사랑
1950년대 뉴욕, 맨해튼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하나뿐인 딸을 두고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확신이 없던 테레즈, 각자의 상황을 잊을 만큼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둘은 확신하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처음으로 찾아온 진짜 사랑임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볼까해서 제목만 보고 시작한 영화 <캐롤>. 겨울옷을 입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과 캐롤이라는 영화 제목이 크리스마스 이야기라고 넘겨 짚고 보기 시작했지만 캐롤은,,, 내가 생각한 캐롤 음악이 아닌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그래도 계절적 배경은 눈내리는 겨울, 크리스마스이긴 했다. 영화 <캐롤>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두 여자, 캐롤와 테레즈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강한 끌림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다영화 캐롤은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굉장히 시각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테레즈와 캐롤의 첫만남에서 굳이 이렇게 오랫동안 대사도 없이 서로의 모습을 찍어야 했을까 할 정도로 굉장히 긴 시간을 테레즈의 시각에서 캐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할애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왜 저렇게 빤히 고객을 쳐다보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당연히 들 수밖에 없게 만들고, 캐롤과 테레즈의 평범한 대화 속에 오묘한 감정들이 전달되면서 이 둘이 서로에게 강한 끌림이 있음을 설명해준다.
더불어 클로즈업을 많이 활용하면서 상대에게 빠진 사람이 상대의 이목구비를 하나씩 뜯어보듯이 특정 부위만을 클로즈업 해서 보여주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등 한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카메라 워킹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있어서 테레즈와 캐롤의 관계가 점차 깊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리창에 낀 서리로 관계의 거리감을 표현하다
영화 캐롤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유리창에 낀 서리 연출이었다. 캐롤과 테레즈가 아직 친해지기 전, 호감만 있었을 때 함께 탄 차에서는 서리가 껴서 창문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하지만 함께 여행을 시작하고, 서로에 대한 마음이 진심임이 드러나고나서는 불투명한 장막을 사이로 그들을 비추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과의 이혼과정에서 양육권을 빼앗길 위기가 닥치자 캐롤은 테레즈를 떠나고 마는데, 테레즈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의 창문에서 다시 서리가 낀 모습을 볼 수 있고, 시간이 흘러 테레즈를 길가에서 본 캐롤 역시 서리가 낀 창문을 통해서 바라본다. 그리고 캐롤이 자신의 감정을 다시 깨닫고 테레즈에게 고백을 하지만 그 현장에서는 거절은 한 테레즈가 친구들과 함께 파티장에 가는 장면에서도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을 서리 낀 창문을 통해 비춰준다.
이렇게 서로가 소원해졌을 때에는 불투명하고 잘 보이지 않는 매체를 통해 이들을 보여주고 있고, 서로를 향해 진심을 표현하고 사랑을 할 때는 서로를 가리는 매체가 없게끔 표현한 것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영화 캐롤은 두 여자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캐롤은 남편과 딸이 있는 여성이었고, 테레즈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만난 이후 본능적으로 끌리는 마음때문에 테레즈는 혼란스러워하고, 캐롤은 이를 남편에게 숨기고자 한다.
캐롤은 아마 자신이 여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싶다. 하지만 남편과의 이혼 과정에서 이러한 사실이 알려질 경우 양육권을 지킬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를 숨기려고 했고, 테레즈는 이렇게 강한 끌림은 처음이어서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에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테레즈는 캐롤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버리고 양육권을 찾기 위해 떠난 캐롤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사랑을 복합적으로 느낀다.
캐롤은 딸 린디와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테레즈와의 관계를 정리했지만, 결국 이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결정임을 깨닫고 본인에게 불리할 수 있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자신의 이러한 정체성으로 양육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양육권을 포기하겠지만 린디를 한달에 한 두번 볼 수 있는 권리는 나아게 달라고 요청한다. 린디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영화 <캐롤>은 서로를 향해 빠져들어가는 연출이 인상적이었고, 그래서 결국에는 이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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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과 공존하는 사랑
SYNOPSIS.
여덟 살 난 딸, 투병 중인 아버지와 파리의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산드라는 어느 날 오랜 친구 클레망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일과 가족, 사랑 사이에서 삶은 계속되고 때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지만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찬란하게 찾아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당신은 곧바로 사랑에 빠질 것이다. 레아 세이두로 시작되는 이름들, 함께 나오는 음악, 레아 세이두가 걷는 거리가 담긴 색감… 이 모든 것이 더없이 ‘영화’롭다. 산드라(레아 세이두)가 마침내 도달해 두드리는 초록 문의 느낌조차.
그러나 잠긴 문을 열어주는 일조차 쉽지 않은 아버지와, 차분하게 아버지가 문을 열어줄 수 있도록 대화를 이어가는 산드라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없이 영화로워 보였던 장면의 바로 뒷면에 현실이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중점을 두고 편집을 거친 결과물이다. 로맨스 영화는 두 사람의 로맨스 서사에, 성장 서사는 한 사람의 내면 성장 서사에 집중하여 인물의 일면들을 담아낸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로맨스 서사를 쌓거나 성장을 이루는 사건들은 절대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잡다한 일상과 갑작스러운 일들을 처리하면서 해나가야 한다. 수많은 감정과 사건들이 360도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니까. 복선과 맥거핀으로 곱게 준비해 둔 자리가 아닌, 어느 날 갑자기.
이 영화는 그 일면을 포착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산드라와 클레망의 사랑은 아무 전조도 상징도 없이, 작은 대화 하나로 시작된다. 갑작스럽게 만나지만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고, 마가 뜨지 않는 대화가 즉각적으로 가능한 사이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K-유교걸 정서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관계의 자장에 놓여 있다. 그 사실을 둘도 잘 알고 있어서, “나 이거 불장난 아니야”라고 진지함을 피력한다. 너무 쉽게 불장난으로 보일 위치라서.
우연한 재회와 가벼운 대화들 위에 번진, 불장난 아닌 사랑이 날로 자라나고 있다고 해서,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처럼 사랑의 면만을 담아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산드라에게는 돌보아야 할 딸도 있고, 무엇보다 큰 병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네 마네 하는 대화를 해야 하고, 철학 교수였던 아버지가 자신의 뇌리에서 길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든다. 우연히 만난 아버지의 제자가 안부를 묻는, 더없이 가벼운 대화 한가운데서 울컥 눈물이 터지기도 하고. 아버지의 짐을 챙기다 저항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클레망과의 사랑은 그 사이사이, 샌드위치 사이의 잼처럼 펼쳐진다. 빵 위에 쓱 발리듯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클레망과 산드라 사이의 대화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슬픔이 깔린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 붙일 수 있는 편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열정적인 키스 직후에도 딸 아이의 펜싱 수업에 가야 하고, 아버지의 짐을 정리해야 하고… 산드라의 일상은 그렇게, 시작되는 사랑과 사라져 가는 사랑, 다가와준 사랑과 다가가 돌보아야 하는 사랑 사이에서 굴러간다. 타오르는 육욕과 대조적으로 쇠해 가는 아버지의 육체 사이. 사랑을 그리워하는 밤과 아이를 재우는 밤 사이.
파리 한가운데서 레아 세이두의 얼굴을 하고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감정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과 위치를 저글링하듯이 돌리고 돌리면서 일상을 채워가는 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니까.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학생이나 직장인 같이 자기 일상을 채우는 일에 관하여, 등등… 더러 누군가의 부모 혹은 조부모 같은 역할이 더해지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영화 속 산드라의 아버지가 큰 병에 걸리신 것처럼, 기존의 역할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삶은 언제나 다각도의 감정과 사건 사이 놓여 있다. 진공 상태의 삶이란 없다.
거기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을 한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서 완벽하게 안정적인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소중히 여길수록 그 상실은 아프다. 아버지의 노트에 쓰인, “이 병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나를 벌한다”는 문장처럼. 가장 소중했기에 가장 아픈 상실이, 필연적으로 삶을 찾아온다.
아버지의 병증도 해결 방법이 없지만, 병이 없어도 인간은 무언가를 쉬이 상실하는 존재이다. 산드라와 딸 린은 이미 남편/아빠라는 가족 구성원을 (어떤 형태로든) 상실한 경험이 있고, 지금 아버지/할아버지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으며, 클레망과의 관계 귀추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의 삶은 시간에 따라 하나씩 많은 것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것.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것은 서른 즈음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병에 갇혀가는 아버지를 보며, 그 아버지의 어디를 붙잡아야 할지. 끝나가는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잃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이 늘어갈 때 그걸 어떻게 붙잡으려 애써야 하는지. 이 슬픔에서 파괴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방법은 별로 없다. 아버지를 위해 좋은 요양병원을 찾고, 좋아하시던 음악을 틀어 보거나 딸아이의 그림을 병실에 붙여 두는 각양각색의 노력을 하지만, 솟구치는 슬픔을 아주 사라지게 할 방법은 없다. 클레망과 서로 꼭 끌어안고, 아무리 사랑한다 말해도, 그 슬픔을 없애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위해 가끔 기꺼이 바보가 되어 줄 수 있다. 아이들을 방에 몰아넣고 최선을 다해 산타와 루돌프로 열연하는 어른들의 귀여운 모습처럼, 솟구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산드라에게 몸을 한 번 맞대어 끌어안는 것처럼. 삶에 상실은 끝없이 일어나지만, 그 거대한 슬픔을 버티고 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이런 귀엽고 사소한 순간들이다. 거대한 구멍을 단숨에 메울 수는 절대 없는, 그러나 얼기설기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순간들이 “어느 멋진 아침”을 선사한다.
높은 언덕에서 보면 에펠탑은 보여도 우리 집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듯이, 삶이라는 거대한 것을 조망하면 얼핏 거대한 슬픔에 비해 이런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살게 하고 쉬게 하는 곳은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가 아니라 집이다. 상실이 숱하게 일어나고, 슬픔의 얼굴도 영영 가시지 않을 것이다. 서울 어디서 보아도 보이는 거대한 건물처럼. 그러나 슬픔과 사랑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삶의 축복이 아닐까. 랜드마크가 있는 도시에 내 몸 뉘일 곳 또한 있다는 것이.
그러고 나니 영화가 끝나면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LOVE WILL REMAIN이라는 가사가 잔잔하게 위로가 된다. 잃어버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세계 속에서, 슬픔과 공존하는 사랑. 결국 그게 우리에게 영영 남을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9월 6일 개봉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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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스포일러는 없지만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상이나 글은 영화 관람 후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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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마블 영화의 팬이시거나 기존 스파이더맨 시리즈들을 좋아하셨던 분들에게는 선물같은 영화입니다.
그동안 모든 시리즈를 보셨던 분들이라면 그동안의 추억과 영화의 장면, 대사들이 많이 떠오르실 거에요.
마블이 작정하고 팬서비스를 해주는 영화 같기도 합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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