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02-16 18:30:04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영화 시사회 후기 - 외톨이의 유일한 친구들이 떠나간다면?
사야카에게 유일한 친구는 강아지인 루뿐이다. 둘은 넓은 들판이 있는 곳인 비밀 장소에 자주 간다. 사야카가 루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과 똑같은 외톨이라는 공통점에서 의미를 찾아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사야카는 등에 있는 심각한 피부 질환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왕따였고 루는 주인에게 버려진 개였다. 하지만 루가 죽게 되자 사야카는 루를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날 사야카는 루와 닮은 개인 루스를 보게 되고 따라가게 된다. 사야카가 도착한 곳은 레이디버드라는 선술집이었는데 루스의 주인이 후세라는 할아버지란 것을 알게 된다. 루스가 루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야카와 후세는 친해진다. 사야카는 후세에게 기적과 하느님의 존재를 믿느냐라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후세의 아들인 고이치로가 죽었는지 물어보는데...
죽는다는 게 과연 무엇일까?
만약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존재가 떠난다면?
하니엘의 철학적인 생각
어린아이에게 소중했던 존재들이 사라진다는 건 얼마나 큰 슬픔일까?
어린아이가 바라보는 죽음이란?
레이디버드라는 선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후세는 고이치로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야뇨증으로 죽었다. 후세는 자신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죽은 아들에 대한 집착이 컸고 사야카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외톨이였던 사야카에게 유일한 친구란 루와 할아버지인 후세였다. 그러나 자신의 곁에 함께하던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사야카는 많이 슬퍼한다. 어린아이에게 소중했던 존재들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필자가 이 영화를 보기에는 내 곁을 아껴주는 사람들도 언젠가 모두 떠나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기에 삶은 유한하다. 그리고 사야카가 떠나가 버린 후세와 루를 기억하지만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어린아이의 심정이란 게 얼마나 슬펐을지 공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후세도 죽은 자신의 아들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야카가 루를 잃었을 때처럼 큰 상실감을 갖는다. 그렇기에 우리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라도 소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가버린 열차도 잡을 수 없듯이 떠나간 사람도 붙잡을 수 없다. 그래서 사야카는 어린아이지만 자신의 유일한 친구들이었던 후세와 루가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을 일찍 안 것이다.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바라본 친구들의 죽음이 이렇게나 안타까운 건지 나는 알게 되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나는 어린 나이에 소중한 친구들을 잃은 사야카의 기분을 알게 될 것 같다.
일찍 외톨이가 되어버린 사야카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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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앰뷸런스>의 질주에 담긴 치유의 드라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암에 걸린 아내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윌(야히아 압둘 마틴 2세)'. 그러나 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막대한 치료비를 구할 길이 막막해지자 그는 외면한 채 지냈던 이복형 '대니(제이크 질렌할)'를 찾아간다. 배 다른 동생의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들은 대니는 역으로 그에게 한 가지를 제안한다. 자신이 계획한 은행 금고 털이에 참여하라는 것. 이에 함께 자랐지만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형제는 오랜만에 한 팀을 이룬다. 그러나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계획이 엉망이 되자 두 형제는 앰뷸런스를 강탈해 탈출을 시도하고, 부상당한 경찰을 치료하기 위해 앰뷸런스에 타 있던 구급대원 '캠(에이사 곤살레스)'을 인질로 삼아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LA 도심을 질주하기 시작한다.
<진주만>과 <트랜스포머> 시리즈, <6 언더그라운드>를 만든 마이클 베이는 할리우드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스타 감독이다. 카메라 워킹, 구도, 공간감과 조명 등을 이용해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 놓는데 탁월한 그의 영화는 설령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하고,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언제나 보는 재미가 있다. 2005년에 공개되었던 동명의 덴마크 영화를 리메이크한 그의 신작 <앰뷸런스>도 마찬가지다. 제이크 질렌할, 야히아 압둘 마틴 2세, 에이사 곤살레스와 같은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작품은 격렬한 액션과 휘몰아치는 추격전으로 중무장하고 있다. 그러나 <앰뷸런스>가 유달리 인상적인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마이클 베이 감독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앰뷸런스'라는 소재의 특성을 살려낸 드라마와 캐릭터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앰뷸런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액션이다. 최소한의 도입부와 마무리를 제외한 러닝타임이 앰뷸런스를 쫓는 추격전으로 가득하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마이클 베이 감독의 변화, 혹은 초심으로의 회귀가 자아내는 재미다. 사실 베이 감독은 난장판을 뜻하는 단어 'Mayhem'과 그의 이름 'Bay'를 합친 'Bayhem'이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폭발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히트작인 <트랜스포머> 시리즈나 가장 최근작인 <6 언더그라운드>에서는 폭발하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눈이 피로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앰뷸런스>에서는 폭발씬의 비중이 크지 않다. 대신 영화를 가득 채운 것은 베이 감독의 또 다른 전매특허인 카 체이싱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찍을 때도 매번 한 차례 이상 선보였던 그의 카 체이싱 시퀀스는 계속되는 폭발과 액션, 화려하나 어지러운 CG의 향연 속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번에도 그의 특기는 빛을 발한다. 특히 드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구도와 장면을 더한 점이 인상적이다. LA 도심 상공과 지상을 1인칭 시점으로 자유롭게 오가면서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추격전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하고, 앰뷸런스나 다른 차들에 직접 타고 달리는 듯한 속도감을 체감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걸음 더 발전한 카체이싱 액션에 집중한 덕분에 폭발씬의 비중이 적은 <앰뷸런스>는 전작들에 비해 피로감이 덜할 뿐만 아니라, 아날로그 방식으로 촬영된 폭발 그 자체의 임팩트를 더 강렬하게 선보인다.
이러한 <앰뷸런스>의 액션은 구급차 안에서 운전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캐릭터와 그들의 드라마가 단단하게 받쳐주기에 더욱 빛난다. 특히 액션이 이동수단으로서의 앰뷸런스에 주목했다면, 드라마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수송하는 앰뷸런스의 기능을 조명하기에 더욱 그렇다. 구급차를 타고 거친 추격전을 펼친 끝에 세 주인공이 제각기 자신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받는 이야기이기에 그들의 앙상블은 인상적인 것이다.
실제로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인 은행 침입이 시작되기 전에 영화는 그들이 품은 상처를 짧지만 확실하게 짚어주고, 앰뷸런스가 병원으로 향하는 마무리는 그 상처가 어떻게 치유됐는지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일견 프로페셔널한 구급대원인 캠의 경우, 그녀는 의사를 꿈꿨지만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과거를 품고 있었다. 한 맺힌 과거 때문인지 캠은 다른 대원들과 일절 교류를 하지 않고, 본인이 목숨을 구한 이들에 대해서도 직업적인 관심 그 이상은 결코 주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는 납치된 앰뷸런스 안에서 수술 집도를 통해 직접 생명을 구하는 경험이라는,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고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날 분기점을 마주한다.
이복형제인 윌과 대니에게도 마음의 흉터가 있다. 범죄 조직을 운영하던 양부로부터 벗어나고자 군 입대를 선택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윌.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의 암조차 치료하지 못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고,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대니가 계획한 은행털이에 가담한다. 한편 오랜 기간 자신과 연을 끊고, 아내와 조카조차 만나게 하지 못한 이복동생에게 말 못 할 서운함을 느끼던 대니. 그에게 은행 강도 침입은 자신의 사업 수단이자 동시에 뒤틀린 방식으로나마 윌과의 관계와 가족애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렇듯 세 주인공이 제각각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한 치료를 받는다는 점에서 구급차가 보여준 136분간의 질주는 모두에게 해피 엔딩은 아니어도 충분히 치유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치유의 드라마는 감정적으로 영화의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주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의 상처와 치유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면, 앰뷸런스 안에서 펼쳐지는 인질극은 자신의 상처를 승화시켜서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과 상처를 분노로 폭발시키고자 하는 이들 간의 갈등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갈등이 중심에는 윌이 위치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형의 위험한 계획에 휘말린 윌은 자신과 가족의 미래, 그리고 형제지간까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동시에 그는 부상당한 경찰관, 의도치 않게 인질이 됐지만 그저 옳은 일을 하려는 캠과도 감정적 관계를 맺는다. 그러다 보니 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 주인공의 심경 변화는 액션 못지않게 흥미를 자아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앰뷸런스>가 어디까지나 리메이크 작품이기에 마이클 베이 감독도 전작들과 달리 단단한 드라마를 보여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스케일도 작고, 각본도 단순한 가운데에서도 영화의 구성이나 연출력이 진일보한 점을 고려할 때, 원작이 있다고 해도 캐릭터성과 드라마를 적절히 살려낸 것은 충분히 유의미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사소한 설정으로도 순간적으로 위기를 조성하고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뛰어난 연출력을 과시한다. 예를 들어 캠이 의사들과 화상통화로 응급수술을 진행하던 중 화상 연결이 갑작스럽게 꺼지고,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속출하면서 극의 흐름이 요동치는 식이다.
또한 인물의 특징을 상황적 맥락과 결부시키기도 한다. 대니의 경우, 무엇이든 저지르며 일을 키우는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특성을 지닌 인물이다. 영화는 그런 그를 앰뷸런스에 탄 사람들을 압박해오는 상황에 집어넣으면서 아이러니한 장면들을 만들고, 덩달아 상당한 긴장감도 조성한다. 당장 경찰에게서 벗어나야 하지만 경찰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인질로 잡힌 부상당한 경관을 치료해야 하고, 그로 인해 오히려 구급차의 속도를 늦춰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대니와 윌을 압박한다. 또 그 경관을 치료하기 위해 대니는 자신이 캠을 인질로 잡고 이용하는 와중에도 그녀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물론 <앰뷸런스>는 단점들도 많은 영화다. 일단 완급 조절에 실패하고 있다. 영화 내내 카체이싱 액션이 쉴 틈 없이 몰려오는 데다가, 평범한 대화 장면에서도 화면 전환이 매우 많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과하다 보니 분명 피로감이 적지 않다. 단순한 각본을 2시간 11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으로 다루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덜하다는 게 위안일 뿐이다.
초반부의 범죄극에서 중반부 인질극으로 넘어갈 때 잔뜩 조여진 서스펜스에 순간적으로 구멍이 나기도 한다. 이전까지는 대니와 윌, 그리고 캠에게만 포커스를 맞췄다가, 그들을 쫓는 경찰에게까지 초점을 넘기다 보니 극의 흐름이 늘어지는 것이다. 경찰의 대사나 분량이 베이 감독 특유의 과한 유머로 점철된 것도 문제를 악화시킨다. 또한 응급 구조 요원이 구급차 안에서 응급수술을 집도하는 것처럼 언뜻 생각해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전개도 몰입을 방해한다.
그러나 위의 단점들은 다행히도 <앰뷸런스>를 즐기는 데 결정적인 방해가 되지 않는 듯 보인다. 우선 기본적으로 전격전을 펼치듯 직선적인 에너지로 무장한 영화이기에 강렬한 액션을 기대할 경우 단점이 오히려 장점도 될 수 있다. 또한 영화의 선택과 집중이 탁월하기도 하다. 당장 범람하는 액션 사이사이에 깊숙이 스며든 세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들과 함께 앰뷸런스의 뒷문을 열고 순식간에 드라마의 끝을 맞이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예상치 못한 선물, <앰뷸런스>의 매력은 뇌리에 깊이 남는다.
A(Acceptable, 무난함)
줄어든 스케일과 제작비에 반비례해서 늘어나는 만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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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브스 아웃 2> 추리물로 위장한 블랙 코미디의 정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팬데믹 속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탐정 '브누아 블랑(대니얼 크레이그). 어느 날, 억만장자 '마일스 브론(에드워드 노튼)'의 갑작스러운 초대를 받은 블랑은 마일스의 친구들과 함께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 '글래스 어니언'이 위치한 그리스의 한 섬으로 향한다. 마일스의 전 동업자인 '앤디 브랜드(자넬 모네)', 코네티컷 주지사 '클레어 디벨라(캐서린 한)', 과학자 '라이오넬 투생(레슬리 오덤 주니어)', 패션 스타 '버디 제이(케이트 허드슨)'과 유명 스트리머 '듀크 코디(데이브 바티스타)'까지. 블랑은 낯선 이들과 함께 마일스가 준비한 괴상한 살인 미스터리 추리극에 투입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글래스 어니언이 숨기고 있는 진짜 미스터리를 감지하고, 은폐된 살인극의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은 2019년 개봉 당시 클래식한 추리물의 쾌감을 선사하며 평단과 관객 모두의 호평을 끌어냈다. 이는 <나이브스 아웃>이 애거사 크리스티가 정립한 추리물의 정석을 착실히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일 강의 죽음> 같은 그녀의 추리물은 캐릭터의 개인사와 내면을 묘사하며 그들의 심리적 동기와 반응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쌓아 올린다. 그래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극은 사건 발생 이유와 경과를 추적하는 데에 중점을 둔 <셜록 홈즈>와는 결이 다르다. 누가 사건을 벌였는지 그 사연에 주목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모든 인물이 모인 자리에서 진상을 폭로하는 탐정은 내레이터, 더 나아가 스토리텔러의 역할까지도 맡는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도 전편처럼 정도를 착실히 걷는다.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가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것과 달리 블랑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점, 영화의 반 이상이 지난 후에야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 정도가 전편과 유의미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도 초반부는 사건에 관련된 캐릭터를 한 명씩 소개한다. 사업의 방향성을 두고 마일스와 관계가 틀어진 앤디, 마일스에게 정치자금을 후원받는 현 코네티컷 주지사 클레어, 마일스의 사업 비전에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 라이오넬, 마일스에게 투자받은 모델 출신 패션 디자이너 버디와 마일스에게 투자를 요구 중인 인플루언서 듀크까지. 그들이 마일스가 보낸 괴상한 퍼즐을 해결하고, 한자리에 모이는 과정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어떤 캐릭터이고 마일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그들의 관계가 곧 살인 미스터리의 복선이자 해결의 실마리로 기능할 예정임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가 다른 맥락에서도 애거사 크리스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고딕 로맨스와 슬래셔 장르를 더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스파이물과 연쇄 살인마 스릴러를 조합해 <ABC 살인사건>을 써 내려간 바 있다. <나이브스 아웃>도 마찬가지다. 라이언 존슨은 추리물과 다른 장르를 결합해 자신만의 추리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브스 아웃>은 단순히 살인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추리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추리물의 탈을 쓴 채 사건을 둘러싼 캐릭터들에 주목한 블랙 코미디였다. 카메라는 미국 사회의 구성원을 상징하는 영화 속 각 캐릭터를 적나라하게 비췄다. 이민자 출신인 마르타를 배려하는 듯 보이는 트롬비 가문 사람들이 정작 마르타의 출신 국가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들은 마르타의 출신을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그저 중남미 국가 중 하나로 꼽는다. 그들에게는 외국인 노동자인 마르타의 국적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므로.
마르타를 도와주는 척 배신했던 '랜섬(크리스 에반스)'도 선조들의 집과 물려받은 권리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블랑은 애초에 랜섬의 할아버지가 파키스탄인 재벌로부터 구입한 집이 트롬비 가문의 저택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의 주장을 비웃는다. 이는 지난 몇 년 사이 미국에서 불거진 인종주의, 배타주의, 고립주의에 비수를 꽂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이민자 가문 출신인 마르타가 트롬비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고, 정작 트롬비 가족은 저택에서 쫓겨나는 결말로 쐐기를 박는다. <나이브스 아웃>은 미국 사회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비판하는 한 편의 풍자극이었던 셈이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역시 전편의 블랙 코미디를 계승한다. 단지 비판하는 대상을 바꾼다. 미국 사회의 폐쇄성 대신 자본에 중독된 사회상을 비판한다. 부제이기도 한 '글래스 어니언'이 대표적이다. 작중 글래스 어니언은 까야할 껍질이 매우 많은 양파이기만, 동시에 유리로 만들어져서 텅 비어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 자체로 돈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많은 사람은 돈을 권력으로 생각하고, 명성으로 여기며, 현실과 세상을 조종할 수단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냉정하게 돈을 관찰하며 그 돈은 그저 교환수단이고, 삶을 영위하기에 필요한 많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즉, 영화는 화려한 외관에 현혹될 것인지, 아니면 투명하게 보이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볼 것인지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행동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특히 자본이 흑막에 숨은 채 조종하는 사회 시스템을 직시하고, 그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으며, 체제 자체를 파괴할 용기가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화는 마일스와 그 친구들을 비웃는다. 스스로를 '붕괴자들'이라고 일컫는 그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기존의 시스템에 천착되어 있다. 마일스는 자기 돈을 무기 삼아 원하는 대로 과학자, 정치인, 셀레브리티, 유튜버를 조종한다. 그들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일스의 자본에 매달린다. 블랑의 말대로, 그들은 진정한 붕괴의 의미를 모른다.
반면에 블랑과 함께 움직이는 또 다른 주인공 '헬렌 브랜드(자넬 모네)'의 존재는 이질적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행동할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마일스에게 종속되지 않았고, 마일스의 허영심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글래스 어니언을 파괴해 버린다. 특히 헬렌이 명석한 두뇌, 화려한 외모, 뛰어난 재능은 없는 평범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천재도, 정치인도, 재벌도 아닌 한 개인의 힘으로도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붕괴의 의미를 모르던 마일스의 친구들이 헬렌이 글래서 어니언을 파괴하자 마침내 종속에서 벗어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의 주제 의식이 새롭지는 않다. 자본주의 체제가 정립된 이래로 항상 제기됐던 비판이다. 그러나 영화가 팬데믹이라는 사회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상 이 메시지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이래로 세계의 양극화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은 작년 5월 ‘고통으로 얻는 이익’(Profiting from Pain) 보고서에서 지난 2년간 노동자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지만, 에너지, 식품, 제약 기업 등은 막대한 이익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작중 마일스가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 제시한 게 다름 아닌 소수 활용 에너지 자원이라는 점, 또 그가 방글라데시와 같은 개발도상국 노동자를 착취해 부를 쌓은 게 그저 허구는 아닌 셈이다.
특히 영화의 전반적인 톤 덕분에 이 메시지는 더욱 눈에 들어온다. 냉혹한 현실을 코미디로 풀어낸 아이러니한 결과다. 사실 영화 속에 한데 모인 사람들은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들다. 억만장자 IT 거물, 패션 스타, 록스타 과학자, 인플루언서와 주지사까지.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하지만 너무 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소 날카롭고 직설적일 수 있는 영화의 주제나 의도가 더 부드럽게 느껴지고, 재고할 여지가 존재하는 측면도 있다. 어몽어스를 플레이하는 블랑이나 마스크를 쓸지 말지 다투는 친구들의 모습처럼 코로나로 인한 변화를 반영한 유머도 윤활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를 일상과 맞닿아 있는 감정적 측면과 결합해 미스터리라는 소재 속에 녹여내는 데 제 역할을 해낸다. 그래서 팬데믹을 겪은 시청자, 또 앤데믹을 헤쳐 나가야 할 관객에게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더욱 의미심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에 라이언 존슨의 재담이 더해지면서 이번 속편은 형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아우로 거듭난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통통 튀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특히 분위기를 한 차례 풀었다가 조이면서 긴장감을 고조하고 살인 사건을 암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마일스가 준비한 추리 게임을 블랑이 손쉽게 끝낼 때 분위기는 한 차례 가라앉는다.
하지만 캐릭터 간의 오래된 갈등에 다시 불이 붙으면서 영화는 파국으로 달려 나간다. 이때 모나리자 보관함이 여닫히는 소리,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듯 요란한 휴대폰 알람, 파티에 어울리는 유쾌한 음악과 점점 짧아지는 컷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리듬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 하나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산만함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자연스럽게 숨기거나 강조하고 싶은 장치를 화면에 배치한다. 모든 진상을 알고서 이 일련의 상황을 다시 보면 그제야 철저한 계산과 반전으로 가득한 시퀀스가 눈에 들어올 정도다. 단 한순간에 라이언 존슨이 얼마나 추리물에 최적화된 이야기꾼인지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고전적인 작법과 현재를 읽는 통찰력의 시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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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씨왕후 | 특별하고 각별하고 유별난 사극의 등장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나라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고구려의 위신을 높인 '고국천왕'(지창욱). 하지만 전투 중 부상을 입은 그는 궁에 돌아와 치료를 받던 중 갑작스레 사망한다. 왕의 독살을 의심한 '우씨왕후'(전종서)는 국상 '을파소'(김무열)와의 상의 끝에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기로 결정하고, 궁 밖으로 나선다. 왕의 동생과 혼인하여 왕을 독살한 이들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왕의 넷째 동생 '고연우'(강영석)의 영지로 향하는 그녀의 여정은 순탄치 않다. 왕좌와 왕비족의 지위를 노리는 다섯 부족의 귀족 가문은 물론, 그녀의 언니이자 태시녀인 '우순'(정유미)마저 그녀를 노리기 때문. 이에 더해 왕의 셋째 동생 '고발기'(이수혁)마저 형의 자리를 탐내며 우씨왕후를 위협해 온다.
<우씨왕후>가 만족스러운 이유
TVING 오리지널 드라마 <우씨왕후>를 향한 기대는 컸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배경이 신선했다.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시대는 단연코 여말선초다. 그 외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숙종부터 정조까지의 시기 정도가 자주 등장한다.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가운데, 고구려 초기의 사건을 다룬 드라마라 하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도 눈길을 끌었다. 왕후 우씨는 한국사에 흔적을 남긴 몇 안 되는 여성 중에서도 독특한 인물이다. 어찌 보면 성골이라서 왕이 된 선덕여왕, 진덕여왕보다도 주체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인 고국천왕이 죽자, 자기 의지대로 상산왕과 혼인해 그를 왕좌에 올려 왕후 자리를 유지했다. 반란과 내전도 이겨냈고, 상산왕의 후계를 결정하는 데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했다. 이제야 영상화된 게 의아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공개된 결과물은 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삼은 사극으로서는 각별하고,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사극으로서는 특별하며, 더 나아가 한 편의 사극으로서도 유별나기 때문. 특히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실험과 도전을 꺼리던 한국 사극에 여러 충격파를 던져주기에 <우씨왕후>는 더욱 만족스럽다.
사극 속 고구려
한국 사극 속 고구려 묘사는 언제나 비슷했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지닌 대중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과 나라의 명운을 두고 펼친 수 차례의 전면전도 거뜬히 이겨낸 한민족의 강국. 일제강점기, 분단, 전쟁을 겪으며 생겨난 민족적 콤플렉스를 치유하는 수단으로써, 민족주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써 고구려만 한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구려 사극이 인기를 끌었던 시기도 2000년대 중후반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같은 작품이 우후죽순 제작됐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만 다를 뿐, 중국이라는 거대 제국에 맞서 민족의 기상을 드높이는 천편일률적 전개가 되풀이는 됐다. 10여 년 후에 개봉한 영화 <안시성>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졌다.
고구려의 실체에 근접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씨왕후>는 특별하다. 민족주의 관점이 없지는 않다. 고국천왕이 한나라와 펼치는 전쟁 시퀀스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한나라와 손 잡은 셋째 왕자 고발기에 맞서는 우씨왕후와 을파소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전개도 두드러진다. 그러나 드라마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내부의 정쟁이다. 대중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고구려 초기의 역사를 구체화하려는 노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우씨왕후>는 사료 너머에 숨은 실체적 진실을 불러내려 애쓴 티가 역력하다. 각본 곳곳에서 여러 가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본래 해씨와 고씨가 왕위를 나눠 가졌으나 태조왕부터 고씨가 왕좌를 차지했다는 내용의 '해씨 고구려 설'을 차용해 건국 초기 고구려 내부 사정을 현실감 있게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왕께서 하늘로 돌아가셨다"와 같은 대사를 통해 고구려만의 세계관과 종교관을 생생히 보여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우 씨, 어 씨, 좌 씨, 명림 씨 등 고구려의 여러 귀족 가문의 세력 구도를 그려냈다. 을파소처럼 생애의 일부만 알려진 인물의 과거사를 당대 시대상에 맞게 채워 넣은 상상력도 인상적이다. 다만 과욕이 넘친 대목도 여럿 있다. 고국천왕의 형제가 5명이 아닌 4명이라는 통설을 부정하거나, 고국천왕 시절에도 졸본이 독자 세력으로 남아 고구려의 멸망을 기도한다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대중적으로 인식된 이미지를 깨고, 고구려가 부족연합체에서 고대 왕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의미가 크다. 그 자체로 한국 사극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장하는 도전이기 때문이다. 설령 실제 역사와는 상이한 모습일지 몰라도, 상상력을 살려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려고 한 <우씨왕후>의 결과물에 박수가 필요한 이유다.
드디어 일보전진한 여성 서사
여성 서사로서도 <우씨왕후>의 성과는 남다르다. 솔직히 말하자. 한국 사극의 여성 활용법은 <선덕여왕>(2009) 이후로 크게 달라진 바 없다. 여성 주인공의 주체성을 억지로 강조하려는 시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하 사극을 표방한 <고려거란전쟁>만 해도 왕후들을 그저 질투에 눈이 먼 일차원적 캐릭터나 판에 박힌 교과서적 캐릭터로 묘사하면서 '고려궐안전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 속 여성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도 많지 않았다. 일례로 <육룡이 나르샤>의 경우 이방원의 아내로서 남편을 왕위에 올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원경왕후를 단순한 조연으로 삼았다. 대신 가상 인물인 '분이'에게 활약상을 몰아줬다가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우씨왕후>는 분명 진일보한 작품이다.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여성 정치인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특히 Part 2의 전개가 인상적이다. Part 1까지만 해도 가문의 생존을 위해 아버지와 을파소에게 떠밀리는 듯 보였던 우씨왕후가 알고 보니 본인 의지대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 <선덕여왕>의 미실과 덕만 이후로 보기 드물었던 묘사이기에 더욱 가치가 크다.
다만 <우씨왕후>의 여성 서사에서는 약간의 불협화음이 들린다. 극 중 우씨왕후는 정치인이다. 그녀에게 여성이라는 사실은 취수혼처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활용하할 수 있는 무기 중 하나다. 평범한 여인으로서 그저 고국천왕을 사모한 우순과의 갈등을 보면 그녀의 정치적인 면모가 더욱 부각된다. 그런데 드라마 말미에 우씨왕후는 돌연 여성으로서의 한을 토로하며 자기 욕망을 드러낸다. 그 결과 결말은 이전까지의 분위기와도 조화를 못 이루고,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느껴지면서 위화감을 자아낸다.
사극의 다양성과 잠재력
마지막으로 <우씨왕후>는 사극으로서도 색다른 작품이다. 일단 장르적으로 신선한 시도가 돋보인다. 24시간이라는 한계를 두면서 추격전의 박진감과 긴장감을 극대화한 선택은 영리했다. 또 추격전을 가급적 다양한 그림으로 구성하려는 아이디어도 돋보인다. 숲과 평야를 오가는 추격전, 산속에서의 전투, 산사태를 이용하는 지략과 강변에서의 전투 등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우씨왕후의 여정을 다채롭게 꾸며냈다.
전쟁 시퀀스도 인상적이다. 한국 사극에게 전쟁 시퀀스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 속 전투 장면은 실망의 연속이었으니까. <고려거란전쟁>처럼 아예 전쟁이 배경인데도 그럴싸한 전투 시퀀스를 보여주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우씨왕후>는 다르다. 고국천왕의 전쟁 시퀀스, 우씨왕후와 고발기의 군대가 대치하는 장면의 스케일, 묘사의 완성도, CG의 완성도를 보면 본격적인 내전을 다룰 시즌 2를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플랫폼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한 지점도 인상적이다. OTT에서 19세 관람가로 제작, 공개한 사극이다 보니 기존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사의 사극보다도 더 자극적인 묘사가 가능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잔혹한 묘사로써 전쟁이나 액션을 더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었고, 우씨왕후가 넷째 왕자를 고연우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에도 설득력을 더할 수 있었기 때문.
물론 전개와 무관하게 선정적인 장면으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국천왕의 부상을 치료하는 장면은 아무런 맥락이 없어서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 외의 장면은 비판보다는 호불호의 영역처럼 보인다. 우순과 고발기의 동기와 욕망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 분명한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우씨왕후>는 애초에 <스파르타쿠스>, <왕좌의 게임> 같은 해외 드라마처럼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창작물이기도 하다.
사실 <우씨왕후>는 몇몇 기술적인 문제를 노출한다. 야간 장면이 많다 보니 잘 보이지 않는 구간도 있고, 배경 음악의 활용이 적절한지도 의문이며, 주연을 비롯한 몇몇 배우의 경우 사극 연기나 발성이 익숙하지 않은 티를 숨기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점은 눈감아 줄 만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우씨왕후>의 결과물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시대를 배경으로 시대상과 인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애쓴 노력이 가득 느껴지기 때문. 공개 전까지는 의상 및 소품과 관련해, 공개 후에는 선정성과 관련해 논란이 있었던 것도 달리 말하면 그만큼 새로운 시도였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우씨왕후>는 8부작이라서 아쉽고, <우씨왕후>의 다음 시즌을 기대할 이유도 충분해 보인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찰이나 소재의 다양성처럼 '사극'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작품이 늘어나는 가운데, <우씨왕후>는 한국 사극계에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작품 같기 때문이다.
Acceptable 무난함
디테일의 문제는 눈감아줄 수 있을 정도로 별난 사극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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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카로운 조각별처럼
PROGRAM NOTE.
<시티즌포>(2014)의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의 최신작이자 2022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이 다큐멘터리는 두 줄기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나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낸 골딘의 지난 삶과 예술 작업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골딘이 오피오이드 진통제 옥시콘틴 중독에서 벗어난 뒤 이 약의 제약사 퍼듀와 그 배후에 있는 새클러 가문을 상대로 벌인 투쟁 과정이다. 영화는 골딘이 비극적인 가정사를 넘어 1960년대와 70년대 혁명적 시대와 결합하면서 예술가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의 대표적인 슬라이드 쇼들을 덧붙여 보여준다. 또한 그가 ‘에이즈 시대’에 벌였던 격렬한 투쟁이 골딘 예술의 본질 중 하나임을 드러낸다. 결국 포이트러스 감독은 골딘이 옥시콘틴 피해자 단체인 P.A.I.N과 함께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대학을 돌면서 벌였던 시위 투쟁도 그의 또 다른 예술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문석,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POINT.
✔️ 예술가들의 예술가 낸 골딘. 사진작가 낸 골딘을 잘 몰라도, 자비에 돌란이나 왕가위가 언급했음을 들으면 궁금해지실 거예요
✔️ 내부자이자 당사자로서 기록한 예술 세계의 아름다움. 사진과 음악이 동시에 펼쳐지면서 '아 이래서 영화가 종합 예술이지' 하고 만족스러워지는 영화입니다 (그러므로 꼭 영화관에서 보셔야 좋아요!)
✔️ 예술가인 동시에 투쟁하는 사람이라고? 예술가가 예술하는 이야기만은 아닌 영화랍니다. 보고 나면 우리 삶에 대해서도 생각거리들이 많아지는 영화
✔️ 근데 일단, 예술과 투쟁과... 이런 걸 다 떠나서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다큐멘터리
✔️ 전세계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52번 노미네이트되고 35관왕이 되었다는데...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이라는데... 이유가 있다!
날카로운 조각별처럼 터져나가는
사진작가 낸 골딘은 1970년대 미국의 "하위 문화"를 사진으로 담아 슬라이드쇼 형태로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선보이며 등장했다. 자신과 친구들의 세계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그 세계는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 예술가, 마약과 섹스가 혼재되어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배제되었던(marginalized) 동시에 세상을 배제하는 당대의 아웃사이더들의 세상이었다.
카메라를 여자가 들다니, 심지어 이런 "타락과 방종"을 담아내다니, 미술계에서는 낸 골딘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내부자이자 당사자의 시선은 강력하다. 낸 골딘의 예술세계는 깃발을 하나씩 꽂듯 '개저씨'들에 밀리지 않고 '맞다이' 뜨면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낸 골딘의 사진 속 친구들은, 70-80년대 사진에서 각자의 잰으과 상처로 날카로운 조각별처럼 반짝반짝 터져 나가던 그 빛은, 이내 90년대에 전혀 다른 빛 안에 담기게 된다.
에이즈. 후천적면역결핍증후군. 항레트로바이러스제요법이 알려지고 널리 퍼질 때까지 마치 "신의 저주"처럼 여겨졌던 그 질병 앞에 친구들은 말라 가고 스러지고 죽어간다. 세상은 그들의 "타락과 방종"의 결과라고 손가락질하지만, 낸 골딘의 눈빛은 그 앞에서 더욱 단호해져 간다. 단호한 눈으로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친구들의 예술을 전시로 구성한다. 여기에 던져지는 눈총에는 "이것은 매카시즘이자 예술가들을 블랙리스트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말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손목수술 후 처방 받은 약이 마약성이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래도 중독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어 "운이 좋았다"는 낸 골딘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같은 고통을 겪고 회복된 사람들 혹은 같은 고통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고통과 상처를 아는 사람들은 모여서 투쟁한다. 마약성 진통제를 아무렇게나 처방하여 사람들을 중독되게 하고 막대한 부를 쌓은 제약 회사와 그 오너 일가를 규탄한다. 영화는 낸 골딘의 삶을 선형적으로 담지 않으면서, 다른 축에서 이 투쟁을 담는다. 영화는 그렇게 명확히 보여준다. 삶과 투쟁이, 예술과 정치가, 그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 모든 것들은 한 줄기에서 태피스트리처럼 뒤얽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임을.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매끄럽고 티 없는 느낌으로만 아름다운 그런 것은 아니다. 매끄럽게 어떤 '규칙'에 따라 밟은 창작물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엔터테인먼트라 부를 수 있고, 그것도 우리에게 필요하고 정말 좋은 것이지만, 예술은 다르다. 예술은 작가의 속을 파먹고 태어난다. 어딘가 거칠고, 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그 모든 것인지 모를 무언가가 축축하게 얽혀 있고, 스크래치가 나 있고, 툭툭 걸거치는 무언가가 이따금 박혀 있고, 그래서 내가 그 결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매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게 예술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은 결코 당의(sugarcoat)를 입을 수 없다. 존경스럽고 그들의 존재에 감사하게 되면서도, 그의 운명을 내가 지고 살고 싶은가 묻는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김애란의 소설에 매번 감탄하지만 그가 눅눅하게 표현한 슬픔의 농도를 내 마음에 지고 살고 싶지는 않다. <토지>를 비롯한 박경리 소설을 읽을 때마다 대문호의 높이를 느끼지만, 이 대문호가 대작을 쓰면서 느꼈을 마음 속의 소용돌이를 내 것으로 지고 살 자신은 없다. 오래 소설가 황정은 인터뷰에서 "문학 작품 주인공이라니, 그런 것이 되고 싶을 리가 있냐"고 응답한 것과 마찬가지다. 낸 골딘의 작품 또한 내게 그렇다. 슈가코트를 걸치고 매끄러워질 수 없는, 툭 불거지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것들은 필연적으로 투쟁하며, 그 투쟁에는 절대 피상적인 구호가 끼어들 수 없다. 영화 속 제약회사와 오너 일가는 "기업 홍보 리스크"로만 이들의 싸움에 접근하지만, 낸 골딘과 단체의 목적은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싸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예술은 언제나 어떻게든 삶의 본질에 가 닿는다. 심지어 작가 스스로 알든 알지 못하든. 70년대 친구들을 담던 낸 골딘의 사진에 담긴 예술성도, 오너 일가에 맞서 투쟁하는 순간의 예술성도 결국 같은 본질에 맞닿아 있듯이.
오명과 낙인에 맞서는 아름다움
이 영화에는 스티그마(stigma)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오명'으로도, 때로는 '낙인'으로도 번역되는 이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가 아니지만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에이즈 환자라서, 성소수자라서, 여자라서, 고양이를 예뻐해서, 머리가 짧아서,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이라서... 각양각색의 이유들로 우리는 손쉽게 '낙인'을 찍고 그것으로 상대에 대한 평가를 끝내 버린다.
70-80년대 미국 "하위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분명 스스로의 몸을 도구화하고 있었다. 섬광처럼 터져 나가는 젊음을, 마약이든 섹스든 예술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러나 이는 타인의 몸을 도구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낸 골딘이 성매매에 대해서 "ugly"한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스스로의 몸을 도구화하는 것에 나는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자신의 주장을 위해 이들의 삶과 몸을 도구화하는 시각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타락과 방종"의 결과로 죽어가는 너희를 다 죽이면 이 병이 사라질 것이라고, 이 병은 신의 저주라고 말하는 마음. 그 마음에 깃든 생각들은 과연 "타락과 방종"이 아닌가? 그 심보를 그냥 두는 것이야말로 신의 저주가 아닌가?
그 모든 오명과 낙인에 맞서 깃발을 꽂은, 어떤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그래서일까, 낸 골딘이 참여한 시위들이 담긴 이 영화 속 장면들은 무척 아름답다.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목 놓아 외치는데 내가 여기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앉아 있어도 되나, 싶으면서도... 전단이 나부끼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순간 아름다워서 울컥하게 되고, 라임이 잘 들어맞는 투쟁의 구호에 감탄하고 있고, 체포되는 순간까지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는 왜 그들의 투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느낌 자체에 착잡해졌는가. 고민하다 보니 결국 그건 시민사회의 아름다움에 닿는다. 돌고 돌아 나에게까지 이어질 공공선에 대한 투쟁이더라도 (예를 들어 장애인 이동권이 보다 보장되는 사회는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며, 참사에 맞서 사회적 안전을 말하는 투쟁은 결국 우리 모두를 보호한다),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정치적"이라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비난을 던지는 사람들, 그들로 인해 더욱 그악스러워져야만 가까스로 기능하게 되는 한국의 투쟁들을 생각할 때, 그 아름다움 앞에 착잡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기에, 정치적인 것들 안에서 우리는 예술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어쩐지 이 영화 끝에서 나는 <아무튼, 데모>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이 투쟁기로 인해 중간중간 탐사 보도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 속 장면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대화거리와 고민을 안겨준다.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이따금 탐사 보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낸 골딘이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선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는 인물 다큐멘터리이면서, 슬라이드쇼 형태로 많이 '공연'되었던 그의 작업물을 넉넉하게 보여주는 종합 예술이기도 한 이 영화는, 아주 재미있는 작품인 동시에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인상을 남긴다.
시작부터 천명하고 시작한다. 삶을 이야기로 만들기는 쉽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고. 그 말은 낸 골딘이라는 인물에게서 사진작가, 예술가의 아우라를 일견 걷어낸다. 그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담길 정도의 고고한 인물의 일대기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냥 단순명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현실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임을,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구성된 이야기가 낸 골딘의 전부일 수도 없음을.
또한 아예 내레이션을 맡을 만큼 감독이 적극적으로 등장하지도 않으며, 아예 카메라 뒤에만 존재하며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중간중간 아주 작은 순간에만 등장함으로 그 장면들을 주목하게 한다. 낸 골딘의 목소리도, 감독의 목소리도,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이야기 뒤에 펼쳐진 삶을, 현실을 놓치지 않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와, 수많은 주제로 가닥가닥 이어지는 생각거리들을 자분자분 펼쳐 보면서 생각한다. 영화에서 보여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고민하고 논의하는 데에서만 감상이 끝날 수 없다고. 이 감상은 결국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살아있는 영화들은 이렇게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살아가게 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5월 15일에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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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뤽 고다르 하고 싶은 대로
제목 <네 멋대로 해라>와 비슷하게 감독이 그 전에 본 고전 영화들과 다르게 기존 영화 문법을 깨트리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찍은 영화였다. 주인공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영화의 흐름과 스토리도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구성이었다. 영화의 컷들이 딱딱 끊기는 장면들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다가 뒤로 갈 수록 장 뤽 고다르 만의 새로운 스타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뉴 웨이브 영화라고 불려지는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점프컷이 너무 자주 나오고 뒤로 갈 수록 이 영화 속 스토리가 집중이 안되어서 나에게는 약간 지루하기도 하였다. 수업 때 보았던 영화들은 사회적인 의미가 있고, 대사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면, 이 영화는 대사도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하고, 개연성이 없다고 느껴져서 감독이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미셸과 패트리샤가 호텔에 있는 장면은 ,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고 대화를 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마지막 쯤 대사에서 각자의 얘기만 했다는 대사를 듣고 일부러 의도한 대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 영화가 1960년대여서 미셸이란 캐릭터를 만들어도 좋은 작품이라고 칭송 받 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의 시점에서 본 미셸 캐릭터는 자유분방함이 아닌, 허세가 있으 며, 여성을 외모와 성적인 존재로만 바라보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치마를 들추거나 계속 여성의 외모 얘기, 잠자리 얘기를 해서 오히려 불쾌했던 캐릭터였고 굳이 필요한 장면 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주인공에 이입하는게 아니라 주인공의 불행을 더 바라면서 영화 를 보았다.
결말에서 미셸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했었다. 여성 캐릭터 패트리샤는 미셸이 자신의 몸을 만지면 똑같이 때려주고, 브래지어를 안하고, 남성을 신고를 했다. 고전 영화에서 단지 성녀,창녀로 쓰이던 여성 캐릭터가 이 영 화 속 에서는 행동하고 자신의 생각이 있는 여성으로 나온 점은 좋았다. 이 영화의 기법과 진행 방식은 기존의 영화와 다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화로 자리매김했지만, 그 안의 스토리나 캐릭터들은 몰입하면서 보기 어려웠던 영화였다.
결말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패트리샤의 대사와 표정이 좋았다. 패트리샤와 미셸이 이어지는 결말 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미셸이 시키던 대로 하던 패트리샤가 미셸을 신고한다. 결 국 미셸은 총을 맞고 죽었지만, 패트리샤의 마지막 표정과 대사는 전혀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이 결말 이후 패트리샤의 삶은 사랑에 휘둘리는 삶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또 비도덕적이고 자유라는 면목하에 범법을 저지르고 다녔던 미셸이 죽음으로써 나에게는 오히려 통쾌한 결말을 맞이했다.
이런 스타일의 영화는 아직도 나에게는 어렵다. 개연성이 없고 틀에서 벗어난 영화는 나의 취향이 아니지만 , 이렇게 도전을 해보고 새로운기법을 창조하는 도전 정신은 예술 그리고 영화에 있어서 중요하고 그런 점에선 <네 멋대로 해라>가 가지는 상징성은 가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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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이런 영화제, 전 세계에 또 있을까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이동준 집행위원장 인터뷰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이동준 집행위원장은 1994년 ‘구미호’의 영화음악으로 데뷔해, 올해로 영화 인생 30주년을 맞았다. 지금껏 ‘은행나무 침대’, ‘초록 물고기’, ‘각설탕’,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탄생’, ‘1947 보스톤’까지 꾸준히 영화음악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동준 위원장은 제17회 청룡영화상 음악상, 제35회 대종상영화제 음악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3년 제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는 제천영화음악상을 받은 바 있다. 작년부터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영화제가 한창인 7일, 제천예술의전당에서 이동준 집행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로 영화인생 3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징그러워요. 30년 됐다고 하니까. (웃음) 본의 아니게 상징성을 가진 해여서 돌아보니 ‘어라? 얼추 그렇게 됐네’ 했죠. 징그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두 마음이 공존하죠.
영화 음악 꿈꾸기 시작한 계기가 있는지요.
-어린 시절 영향이 크다고 봐요. 정확한 년도는 기억은 안 나는데 ‘벤허’라는 영화를 봤어요. 영화에 압도되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음악적인 느낌이 제 감성에 새겨진 거죠. 유독 영화음악과 클래식을 좋아했어요. 음악가라는 방향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는데 사춘기 때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 일어났어요. 록 밴드도 했고요. 어렸을 때 엄마와 이모 따라다니면서 다닌 극장의 추억이 유난히 강렬했던 것 같아요. 그런 잔향이 제 미래를 결정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 같아요.
6일, 제천예술의전당에서 영화제와 마찬가지로 20주년을 맞은 ‘태극기 휘날리며’ 필름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공연 후 눈물을 보이셨는데요.
주책이죠. 자기가 만든 거에 자기가 뻑 가는 거. (웃음) 제 역사와 삶이 많이 응축된 눈물이었어요. 리허설할 때 되게 좋겠다는 확신은 들었어요. 장동건 배우도 그렇고 강제규 감독도 그렇고 눈물을 흘리면서 많은 걸 돌아봤죠. 그렇게 각자의 시선이 어우러져 수십 가지 감정이 올라왔어요. 감사함, 스스로에 대한 고마움, 미래의 도전에 대한 용기. 많은 감정이 교차하더라고요. 조명 활용 등에서 필름 콘서트의 정체성이 잘 전달되고, 퍼포먼스도 전달이 잘돼서 놀라기도 했어요.
예술인에게 도전, 초월은 평생의 과제
제천만이 제공할 수 있는 영화 경험 고민 중
작년 19회 영화제 슬로건은 ‘Da Capo(다 카포)’였고, 이번 영화제 슬로건은 ‘Superascendo(수페라스켄도)’입니다. 각각 ‘처음으로 돌아가다’, ‘초월하다’란 뜻이지요.
처음 집행위원장하면서는 슬로건 안 하려고 했어요. 굳이 해야 되나 싶었는데 홍보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필요하다 그래서 했죠. 그래서 작년에는 영화제의 20대를 앞두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되살리자는 의도에서 음악용어인 다 카포를 썼죠. 20회인 올해에는 도전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걸 고민했죠. 제가 이름 짓기를, 라틴어 찾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뒤지다가 초월하다, 도전하다 이 말을 찾았죠. 슬로건을 정하니까 포스터 방향성도 도전적인 게 나왔어요. 초월하는 느낌으로요. 예술인들에게는 이런 도전, 초월의 방향이 평생 있지 않아야 하나 싶어요.
이전에 하이테크를 지향하는 영화제를 고민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영화와 멀티미디어가 공존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관이 제천에 최초로 생긴다면 그 자체로 랜드마크가 될 수 있겠죠. 콘서트도 하고요.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요. 영화를 포함해 음악과 다채로운 미디어 콘텐츠를 묶어서 재밌게 만들 수 있겠다 싶어요. 욕심은 있는데 조금씩 변화할 수밖에 없죠. 그런 공간에 대한 고민은 계속 있어요.
20주년을 맞아 영화제에서 사랑받은 작품을 다시금 관객에게 선보이는 ‘제천 리와인드’ 섹션을 기획하셨습니다.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너무 많은데 다 담지를 못했어요. 제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영화는 ‘서칭 포 슈가맨’이에요.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아요. 너무 신선했어요. 올해 개막작 ‘아바: 더 레전드’도 그렇고요. 올해에도 좋은 영화가 참 많아요. 음악영화제로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작년보다는 더 나았다 싶어요. 프로그래머가 일을 너무 잘하신 덕분이겠죠.
어제 진행된 팬과의 만남 행사도 직접 기획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위원장님뿐 아니라 심사위원, 영화제를 방문한 셀럽분들이 참석해주셨고요.
영화제에 셀럽이 많이 오는 게 대중의 영화제 선호도를 결정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역으로 셀럽이 영화제에 어떤 명분으로 올까 싶었죠. 작품이 노미네이트되면 오는데, 그냥 축하해주러 오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우리도 셀럽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숙제가 늘 있었는데 오히려 심사위원이라는 명분으로 셀럽분들이 오시면 좋을 것 같다 싶었죠. 그런데 그 귀한 분들을 모시고 심사만 시키기는 아쉽잖아요. 그런 분들이 제천에 왔다고 시민들께 알리며 가깝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픈 스테이지로 토크 진행했어요.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 없어
영화음악을 꿈꾼다면 진지하게 질문해봐야
감독님께서는 영화음악뿐 아니라, 드라마와 뮤지컬, 게임 심지어는 아시아축구연맹 공식 주제가까지 작곡하셨습니다.
음악적으로 욕심이 많아요.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두려움은 한 번도 없었어요. 계속 새로운 거 하고 싶은 마음은 늘 있어요. 제 음악적 스펙트럼을 규정하지 않고 확장하는 거죠. 제가 좋아하는 음악가 중 그런 성향의 음악가가 많아요.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 영역을 찾아야 해요. 더 많은 다양성을 추구하고 싶어요.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아닌 아티스트 이동준의 행보와 계획도 궁금합니다.
영화제 개막식 공연에 작년부터 늘 제가 만든 곡을 직접 연주했어요. 내년에도 할 거예요. 이 자체가 영화제의 정체성일 수 있거든요. 집행위원장이 직접 작곡한 곡을 개막식에서 연주하는 영화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할 테니까요. 그리고 개인 솔로 앨범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 지점이 앞으로의 숙제죠. 올해 개인 공연도 예정되어 있어요.
영화음악을 꿈꾸는 분들에게 조언해주시고 싶은 내용이 있으신지요.
내가 왜 음악을 좋아하는지를 질문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중간에 포기하게 돼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그냥 좋은 것 같아서요’라면 안 했으면 좋겠어요. 굉장히 진지하게 접근해야 해요. 잘 모르는데 어떻게 진지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미래에 자기 인생을 던질 일인데 진지하게 질문을 해야죠. 내 인생을 바칠 만하다는 자기 확신이 있을 때 해야 해요. 구체적으로 작곡하고 들어보고 대화해보고 부딪혀보고 평가도 받으면서요. 영화음악 말고도 다른 음악이 있는데 영화음악을 하려면 뭐가 필요할지를 따져보고 찾아봐야죠. 출발점에서 그런 진정성을 갖는 게 어떤 음악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체념’ 말고 ‘초월’하자
관객분들에게 받은 선물을 돌려드리고 싶다
메가박스 제천과 2022년부터 함께한 CGV 제천이 모두 작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상영관 확보에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듯합니다.
영화관 하나 건립하고 유지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아요. CGV 상황은 올 초 정도에 어느 정도 인지가 됐고 시나 저희는 여러 방법을 찾았죠. 영화제 기간만이라도 대관하는 방법을 고민했고요. 시에서 사줬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영화관이 있다고 해도 유지할 수 있는 플랜이 없다면 반복될 문제잖아요. 답은 계속 구해야겠지만 ‘이런 영화관이 있어?’ 할 정도의 도전적인 영화관을 꿈꾸지 않으면 그냥 기존 영화관처럼 될 거예요. 영화관의 새로운 방향성을 고민할 필요가 있죠. 영화 프로그램 자체도 다채롭게 하고, 영화관 자체가 복합 예술 공간으로 나아가는 방향도 고민해야죠. 제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관을 계속 생각 중이에요.
최근 재정 지원 문제로 여러 영화제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고, 한국 영화 역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영화제는 돈 많이 쓰면 잘 될 수 있어요.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소박한 영화제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올해 돈 줄었다’ 이런 거는 초월했으면 좋겠어요. 체념이 아닌 초월요. 제천에 맞는 영화제를 생각한다면 큰 예산 안 들이더라도 색다르게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현실적인 부분과 영화제의 가치에 대한 것들을 고루 고민해야죠.
마지막으로 영화제에 참석한 관객과 관계자분들께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영화제가 20대가 되기까지 유지될 수 있도록 와주신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께 너무 감사해요. 20회에 대한 고마움이 앞으로 또 10년 후까지 이어질 테고요. 영광스럽게도 20회를 맞이했는데 큰 선물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그리고 그 선물을 다 나누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미래의 선물 보따리도 준비하고 싶습니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박해민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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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불호가 갈린 베놈 완결판 액션(?)드라마 / 액션보다는 브로맨스 / 라스트 댄스 / 감동적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베놈: 라스트 댄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전에 1개, 끝나고 1개, 총2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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