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2022-02-16 10:58:15
깊은 상실 뒤에는 사실 사랑이
[리뷰]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한 소녀가 건널목 앞에 앉아 있다. 이윽고 전철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올 거야.” 옆에 누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돌리며 말하는 소녀. 옆에는 아무도 없다. 전철이 건널목에 다다랐을 때쯤 소녀는 전철을 바라보며 자신의 왼손을 쭉 펼친다. 마치 뭘 잡고 있는 것처럼. 여덟 살 이 소녀의 이름은 사야카(닛츠 치세). 사야카의 왼손에 예전에 있었던 건 반려견의 산책 줄이었다. 사야카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반려견 루를 잊지 못하고 있다.
17일 개봉하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하시모토 나오키)는 이별과 상실을 겪은 사람들을 느릿하게 그린 드라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떠나보냈으나, 여전히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야카도 마찬가지다. 그는 루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다. 사야카가 우연히 만난 술집 마스터 후세(오이다 요시)도 아들 고이치로를 먼저 떠난 보내 아픔을 가지고 있다. 사야카가 고이치로가 죽었냐고 물었을 때 후세는 “안 죽었다”며 버럭 화를 낸다. 사야카도, 후세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가, 고이치로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다. 이런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던 둘은 결국 마음을 나누게 된다.
죽음과 이별, 그로 인한 상실감 등의 키워드로 풀어내는 영화이지만 사실 이 둘에게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사랑이다. 누군가를 마음에서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는 건 그만큼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 상상조차 안 되는 애정의 깊이. 오죽했으면 떠난 게 사실임에도 그걸 믿지 않고 오히려 부정하려고 하는 걸까.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인생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여덟 살 소녀나 백발의 노인이나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사랑.
사야카와 후세는 조금 달라진다. 자신들이 기다린다는 그 ‘무언가’를 찾으러 작은 여행을 떠나면 서다. 그곳에서 둘은 꿈을 꾸고 환상 같은 일을 겪으며 아픔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품는다.
사야카를 연기한 닛츠 치세는 2010년생으로 2014년 뮤지컬 '미스 사이공'으로 데뷔했다. 국내에서 379만 명이 본 흥행작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딸이다. 배우 아리무라 카스미가 영화에서 10년 뒤 사야카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일본 문학상인 나오키상을 받은 동명의 단편소설이 원작.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영화 시사회 참석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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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 있느냐’가 아닌 ‘어디를 택했느냐‘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운 좋게 브루클린으로 홀로 이주하게 된 에일리스의 이야기는 겉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이민자의 성장 서사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 그리움 속에서 미화되는 아일랜드의 풍경.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집일까 새롭게 뿌리내리려 애쓴 곳이 진정한 집일까? 벗어나고 싶었으나 막상 떠나오니 그리워진 아일랜드와 새로운 땅 브루클린 사이에서의 고민은 두 남자와의 관계에서 갈등하는 에일리스로 그려지는데,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벗어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듯한) 토니, 곧 브루클린에 다시 돌아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민자의 정체성 혼란과 ‘집’에 대한 고찰을 따뜻하게 그려냈다고 평하기 전에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브루클린에서 혼자 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이 에일리스의 진정한 집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둘째, 에일리스는 과연 한번이라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자신이 속했던 환경과 맥락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적이 있는가? 반대로, 규정되는 정체성에서 자유로워야만 비로소 ‘자기 자신’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브루클린에서 만난 이탈리아 남자, 토니가 에일리스 그 자체를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각종 조건과 상황에서 자유로운 사랑만을 진정한 사랑이라 보는 것에 대한 반박은 논외로)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아마 아일랜드에서 둘이 만났다면 사랑은 차치하고 친구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에일리스에게 토니는 능동적으로 택한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타지에서 너무 외로웠던 나머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가까워보인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루한 아일랜드를 벗어나기 위해 대서양을 가로질러 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녀에게 더욱 선명해졌다. 아일랜드에선 똑똑하고 예쁜 언니의 그늘에 가려졌다면 브루클린에선 어디를 가도 무뚝뚝하나 심성은 착한 ‘아이리시’ 여자였다. 애초에 토니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이유도 그녀가 ‘아일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일랜드에 돌아가 만난 짐이 에일리스에게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다. 언니의 죽음과 미지의 땅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주목을 받는 것 또한 썩 유쾌하진 않았으나 최소한 짐 앞에서의 에일리스는 더 이상 ‘아일랜드’ 여자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결국 에일리스는 아일랜드에서뿐 아니라 브루클린에서도 주어진 환경과 맥락 속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다. 그렇기에 영화에서처럼 브루클린이 에일리스의 진정한 고향이라 결론 짓기도 애매하다. 영화는 브루클린이 에일리스의 삶에서 ‘정답’이자 일련의 사건들을 끝으로 에일리스가 골라낸 최종적인 해답인 마냥 결말을 지으나 사실 그 어느 곳도 그녀에게 정답이 되어줄 수 없다. 다시 말해 이주민에게 ‘진정한 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집’이라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고른 곳이 그 순간 나의 ‘집’이 될 뿐, 있지도 않은 정답을 고르기 위해 끙끙댈 필요는 없다.
곧 에일리스는 아일랜드와 달리 브루클린에서 더 자유로웠기 때문에 브루클린으로 돌아간 게 아니다. 오히려 브루클린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각종 정체성과 맥락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졌다. 에일리스의 주체적인 선택 이후로 타인이 규정하는 그녀의 정체성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 고로 영화 <브루클린>의 핵심을 진정한 집의 의미가 아닌 에일리스 개인의 ‘선택’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에일리스가 ‘어디에 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 ‘어디를 택했느냐’가 그녀를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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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장을 찢어버리듯 붕괴시키는 클리셰의 밭
이상한 초대장
초대장이 왔다. 초대장의 목적지는 정치인 클레어 디발라다. 그녀는 정치인이다. 한창 상원의원 선거 도중인 미국의 어느 날. 한창 바쁜데 난데없이 파티 초대장이 왔다. 초대장을 받는 와중에도 선거운동 중인 클레어. 클레어의 후원자는 초대장을 건넨 억만장자 마일즈 브론이다. 이 마일즈는 클레어에게만 다리를 뻗지 않았다. 과학자 라이오넬, 트위치의 인기 스트리머 듀크와 여자친구 위스키, 모델 겸 디자이너 버디와 페그에게도 초대장이 온다. ‘살인 미스터리 게임’을 해결해야 한다고? 마일즈 브론이 또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나 보다. 원래 우리 주위에서 헛소리를 하는 친구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파티에 참석하는 마일즈의 친구들. 서로 반갑게 인사한다. 포옹은 안 된다. 마스크를 낀 채로 인사한다. 그런데 좀 낯선 얼굴이 있는 것 같다. 어? 저 사람?
브누아 블랑이다. 이 ‘살인 미스터리 게임’에 미국 최고의 탐정 브누아 블랑도 초대받았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브누아 블랑은 자기도 초대장을 받았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이 사람들과 블랑은 단 조금의 관련이 없는데 말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블랑. 이 불편한 손님은 브누아 블랑만이 아니다. 갑자기 등장한 이들의 친구 ‘앤디’. ‘앤디’는 등장만으로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쟤가 왜 여기에 왔지?’ 아연실색하는 일행들. 그래도 파티는 파티니까 즐기기로 한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 살인 미스터리 추리 게임을 즐기기 위해 파티장 마일즈 브론이 개최사를 연다. 그러나 그 개최사를 연 마일즈도 예상할 수 없는, ‘살인 미스터리 게임’이 벌어진다.
전편을 승계하다
영화에서 중요한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승계다. 전편 <나이브스 아웃>에서 주인공 소설가의 자식들과 그 가족들로 다양한 사람들이 묘사됐다. 이와 유사하게 마일즈의 초대장에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있다. 직업이 의미심장하다. '남성 인권 운동가'로 묘사된 듀크. 이 듀크는 '트위치'라는 곳에서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이다. 마일즈는 억만장자다. 그런데 이 억만장자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다(물론 후반부가 되고 나서야 알 수 있다). 다른 친구 중 하나는 주지사 출신 정치인이다. 어떤 친구는 모델이고 과학자다. 1편이 다양한 세대와 계층을 품어서 미국이 갖고 있는 이민자들을 대하는 태도의 이중성을 보여준 것과 유사하게 이 영화는 이 상위계층이 품고 있는 위선을 조롱하고 있다. 결국 이 친구들을 움직이는 것은 극에서 중요하게 나오는 '어떤 단어' 때문이었다.
영화의 형식도 전편 느낌이 난다. 사실 이 시리즈에서 사회적인 맥락과 블랙코미디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장르적인 재미다. 이 영화들은 그냥 재미있는 스릴러/후더닛 무비다. 두 영화는 1차적인 목표와 2차적인 목표, 또 3차 목표가 다른 영화처럼 들린다. 2편이 어떤 목표를 두고 있는지는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면 되기 때문에 쓸 수 없겠지? 그러나 1편이 어떻게 이 목표를 설정했는지는 쓸 수 있다(1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편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 소설가를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 / 그 이후 벌어진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 영화의 엔딩이라고 볼 수 있는, 흑막의 결론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전복을 묘사하기 위해 인물의 다각도에서, 적당히 핍진성이 성립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비튼 라이언 존슨의 역량이 돋보였다. 아직도 그 주인공을 죽였던 방식을 묘사하는 방법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다른 주인공 마르타의 지병, 크리스 에반스의 호연은 영화에서 입체감을 부여하는 좋은 매개체였다. 본작 2편은 후더닛 무비의 형식은 살리면서 이야기의 토대를 바탕으로 허점을 찌르는 플롯을 보여준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팬더믹 직전 후를 겪으며 겪었던 몇몇 사건이 떠오른다. 이를 입체감 있게 잘 넣었기 때문에 이 영화의 장르적인 쾌감은 역시 생생하다. 그러나 추리물로서 범인을 쫓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재미는 좀 약할 수도 있다. 영화가 조명하는 것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1편만큼 강력하게
영화에서 ‘우와’ 싶은 부분이 있다. 바로 로케이션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제목에도 있는 ‘글래스 어니언’이다. ‘글래스 어니언’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한다. 이 모티브가 무엇인지는 역시 후반부에 제시되기 때문에 안 본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물론 후반부가 아닌 완전 초반부에 제시되는 요소도 몇 가지 있다. 마일즈 브론이 불쌍할 때 친구들과 함께 술을 먹던 곳의 술집 이름이 글래스 어니언이다. 또 글래스 어니언은 브누아 블랑을 위시로 한 파티 초대자들이 행동하고 살인극을 벌이는 극의 무대로 볼 수 있다. 당연히 억만장자가 만들었으니 미장센을 예쁘게 뽑아야 한다. 영화는 이 모든 속성을 설득시키는 집 구성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주요한 모티브는 내실의 부족이다. 이를 유리라는 소재로 활용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또 전편에서 30개국에 출간되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특징을 활용한 것처럼 색감을 활용한 연출이 돋보인다. 가령 마일즈의 수영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다. 여기서 수영장 의자는 노란색이다. 두 여성 캐릭터가 입은 것은 노란색 비키니다. 조명도 노란 색으로 쐈다. 전체적으로 누리끼리한 화면. 두드러지는 것은 파란색의 블랑이다. 이는 공간 안 실내로 들어와도 마찬가지다. 의상으로 변박을 주며 인물을 강조하는 연출이 돋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어떤 인물들끼리의 감정적인 연대도 의상으로 배치하고, 속 마음은 다른 동상이몽의 누군가도 피부색과 의상으로 표현하는 감독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영화에서 이야기 내적으로 서서히 떡밥을 뿌리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사소한 것들로 영화의 이야기를 수거하는 연출은 가히 장점이라고 뽑을 수 있다.
딱지 뒤집기
영화의 플롯 뒤집기는 영화를 두번 보면 무릎을 칠 정도다. 그 말은 '괜히 인물이 이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영화를 볼 때 글쓴이는 브누아 블랑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에 의문점이 생겼다. 이걸 이렇게 유치하게 한다고? 이 사소한 의문점들은 서서히 쌓였다가 후반부에 전말이 드러나면서 쾌감을 준다. 이는 뭔가 허전한 인물묘사가 아닌 1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이야기만으로도 설득이 되는 각본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야기가 전복되기 전까지 나름대로의 영화가 전개되는 것, 그리고 그 이후를 뒤집는 감독의 선택은 칭찬받을 만하다. 후더닛 무비의 문법에서 과감히 탈피한 선택지가 된 것이다. 모든 장면이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미투운동과 반지성주의를 풍자하면서도 큰 그림을 그렸으니 아마 생각 많이 하고 이야기를 쓴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가끔 보면 좀 신기한 영화감독들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복을 드러내기 이전에 두 사람은 정말 극을 이끌고 갔다고 말할 만하다. 한 명은 이 영화의 번역가 황석희다. 물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더 두드러지겠지만 모든 외국어를 다 한글처럼 들을 수는 없는 일이다. 뉘앙스의 차이로 이 대사들을 전달해야 한다. 그 대사를 생동감 있게 재창조한(?) 황석희 씨에게 박수를 보낸다. 역시 구강액션엔 황석희다. 그리고 주인공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는 영화에서 반전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억양과 제스처만으로도 영화의 절반을 책임진다. 이런 연기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흑막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뭐 그만한 충격은 당연히 아니지만 궤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다.
실망할 수도 있어
영화 후반부까지 보면서 글쓴이가 느낀 핵심 키워드는 미투운동과 반지성주의다. 주인공 마일즈 브론이 미국의 유명한 기업가와 기업가였던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그렇다. 단순히 어떤 집단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과학이고 논리고 지식이고 다 무시하는 요즘 몇몇 장면은 인물들이 단체로 무얼 하는 것과 겹쳐 보인다. 인스타그램과 틱톡, 트위치로 대표되는 '보이는 것'에 관한 요즈음의 세태도 영화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극에서 흑막이 어떻게 범죄방식이 들통나는가?를 보면 라이언 존슨 감독이 이를 분명히 의도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글래스 어니언'같은 세태를 꼬집기 위해서 1편의 추리물과 유사하면서도 살짝 다른 노선을 탔다. 그래서 이런 걸 기대하고 본 관객분들이라면 살짝 실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이야기의 왔다 갔다 하는 전개치고 후반부의 어떤 이미지가 좀 약한 느낌? 좀 더 찰지게 만들 수도 있을 걸 그냥 덩그러니 그 행동만 카메라에 찍어서 좀 비어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뒷맛이 깔끔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영화가 후더닛 무비의 장르 이전에 '재미있는 (그냥) 영화'라는 점을 상기해주셨으면 한다. 또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풍자에 관객분들이 들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것을 생각하며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글쓴이도, 어쩌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마일즈와 친구들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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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기록이 다큐멘터리의 본질일까, <저항의 기록>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는 또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저항의 기록>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영화의 정의’에 관해 묻는 것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즉 문서화와 기록화에 중점을 둔 장르의 영화들은 여전히 국내에서 명확한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기록할 것인가. 제작자의 관점이 개입된, 설득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실을 활용할 것인가. 그 질문 위에서 저마다의 필름을 찍어냈던 수많은 다큐멘터리 상영작의 감독들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답을 내린다. <저항의 기록> 또한 그렇다.
저항의 기록
Resistance Reels
Cast
감독: 알레한드로 알바라도 호다르, 콘차 바르케로 아르테스
시놉시스
페르난도 루이스 베르가의 유일한 연출작 <로시오>(1980)는 민주주의 초창기 법적 검열의 대상이 된 후 많은 이들에게 저주를 받은 다큐멘터리다. 베르가는 그 이후 다른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고, 우리는 이 실현되지 못한 영화들이 저항의 몸짓으로서 현재에서 생명을 얻기를 꿈꾼다.
<저항의 기록>은 파편화에 그쳤을까
이 영화는 베르가 감독이 끝내지 못한, 기획 단계에서 머무르다 피지 못한 이야기들을 그 뒷선에 선 감독들이 피워내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가장 큰 의미 관계의 대립으로 보이는 것은 저항과 그 반대에 선 이들이다. 이 영화의 제목과도 같다. 베르가 감독이 만들었던 <로시오>를 비롯해 기획 단계에서 그쳐 버린 모든 이야기는 어쩌면 그 저항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기록을 이 영화가 신중히 담아 정리한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다큐멘터리의 정의,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평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의문은 바로 <저항의 기록>이 가지는 특징에 있다. <저항의 기록>이 러닝타임 동안 보여주는 모습은 어쩌면 파편화에 가깝다.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잡동사니처럼 흩어져 있던 서류철들을 정리함에 꽂아 정리한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관객들의 부정적인 평이 있었다.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고, 설득하는 힘이 부족하며 이야기가 파편화되어 있다”라는 것이 중론으로 보인다.
짚어볼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영화는 베르가 감독이 구상 단계에 그쳤던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후발주자 격인 감독들이 ‘구현’하는 과정이다. 다큐멘터리의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영화가 담아내야 할 이야기가 대단히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품이 가지는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베르가 감독의 일생도 짚어야 할 것이고, 탄압에 관한 베르가 감독의 시선이 담긴 영화를 구현해내고 그것을 보여주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제목을 <저항의 기록>이라고 정해둔 것은 아닐까. 일일이 영화 내에서 마치 ‘챕터’의 개념처럼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닐뿐더러 모든 이야기를 통해 관객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애초에 제작 과정에서 염두에 뒀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기록에 그 무게를 두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 영화가 지니는 의의 또한 작품의 제목에서 미루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저항한 이들을 기록하는 게 중점이었던 것은 아닐까. 베르가 감독과 감독이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구현된 다큐멘터리 속에서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은 모두 저항한 이들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한 이들이다. 챕터들마다 등장하는 이슈들, 그리고 인터뷰이들이 저항했던 모든 것은 면담과 사실 기록으로 구체화된다. 베르가 감독이 해내지 못했겠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들이었을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이 전한 평가 중 ‘번잡스러움’에 관한 지적은 그럴듯하다. 충분히 그 지적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별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아 전하는 것은 큰 부담이 따른다. 말 그대로 번잡스러워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독들은 그 부담을 짊어지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번잡스럽더라도, 베르가 감독이 하고자 했던 것을 이렇게나마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미처 정리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서류 정리함에 정갈하게 꽂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의미는 일종의 애도에 관한 개념으로 확장된다.
기록에서 애도까지의 확장
저항을 기록하는 것은 애도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저항의 역사는 뿌리 깊다. 민주화를 위한 항쟁과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수차례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국민이 쓰러졌다. 국가 권력이 행한 국가 폭력에 의해서다. 그렇다면 그들을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 과거가 있었다는 그 사실을 영상화하는 것은 일종의 애도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항의 기록>은 ‘애도하는 기록’인 셈이다.
이는 또한 베르가 감독을 애도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베르가가 일생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탄압받으며 구차한 삶을 살다 끝내 생을 마감한 것은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런 베르가의 미완성된 작품들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만으로,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저항이며 애도가 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저항의 기록>은 가치를 지닌다. 저항하는 이들을 담아내고, 저항의 순간들을 기록해냈으며 그와 동시에 애도해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또 세계 각지에서 시간의 흐름에 묻혀 그 생명을 잃었던 저항의 순간들이 되살아나기에 이른다.
다큐멘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단순히 사실들을 기록하고 나열하는 것은 진정으로 가치가 없는 것일까. 다큐멘터리는 모호한 존재다. 영화의 영역과 저널리즘의 영역까지 모두 아우르게 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다른 극영화처럼 영화로서 그 가치를 더 무겁게 지닌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적 가치를 더욱 가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저널리즘은 그 사실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데에 주목한다면, 그 가치가 가장 중시된다면 <저항의 기록>은 그 자체로 가치 있을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저항의 기록들은 이제 베르가의 손아귀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만났다. 호다르, 아르테스 감독은 그 기록들에 마침내 생명을 주었다. 그 생명이 관객들 앞에서, 어떤 힘을 가지게 될지는 관람하는 관객들의 손에 달렸다. 평가의 여지는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설득력인가, 사실에 관한 기록인가.
상영 일정
2025. 05. 01(목) CGV전주고사 7관 21:30
2025. 05. 04(일) CGV전주고사 7관 14:30
2025. 05. 06(화) CGV전주고사 7관 14:30
전주국제영화제는 4월 30일~5월 9일 동안 개최됩니다. 자세한 일정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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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나를 위한,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가
하나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사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잘 나오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매 화의 대사 하나하나가 공들여 쓰여졌다는 게 느껴지는 드라마 정말 오랜간만에 찾았다. 어느 대사 하나 예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은데, 최소한 나에게는 너무나 취향이다. 그래서 난 이 드라마가 너무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덕질하자고 꼬셔보려고 한다. 과연 내 구구절절한 글로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1. 폐부를 찌르는 대사의 향연
이 드라마의 장르를 나눠본다면, 휴먼 80/로맨스 20 정도가 될 것 같다.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 드라마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관계에 대한 고찰이 너무 잘 느껴지는 드라마이다. 관계가 가진 성질은 다양해서 가족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연인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동료와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연인 간의 관계의 실패로, 질투와 시기가 난무하는 동료와의 관계 등으로 관계 자체에서 염증을 느끼는 두 남녀, 구씨와 미정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 대한 '추앙"을 시작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새로운 사람에게서 치유받고자 하기 위함일까. 결국 인간은 사람에게 질리면서도 사람 간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대사 하나하나에서 내 인생을 돌아볼만한 묵직한 대사들이 많았다.
“싫을 때는 눈 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말을 걸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을 들어줘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 내야 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나도 그런데.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두시간 되나? 나머지는 다 견디는 시간.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이 대사가 내가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든 폐부를 찌르는 대사였다. 처음 만나서 어색함에 아무말이나 해야 할 때, 상대가 하는 말도 아무말이구나 싶을 때, 이 어색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오는 현타. 그리고 그 상황이 종료되고, 한창 말 잘하고 나와서 '내가 그런 말을 하고 나왔지. 쓸데없는 말이었는데."하는 자책에서 비롯된 두 번째 현타. 구씨의 대사에서 이런 내 모습이 투영되어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요 근래 내 자신을 왜 좋아할 수 없을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어서 이런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한 대사에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남이 하는 이야기가 가끔 지칠 때가 있다. 그들의 일방적인 이야기에 지치면, 그 지친 감정은 곧 짜증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리곤 후회한다. 그 사람은 이 이야기가 재미가 없었을 텐데,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저 들어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또다시 미안해진다. 내 이기적인 마음을 비판하며, 또다시 나는 나를 미워하게 된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으면서 남을 비판했을 때, 내가 나에게 느끼는 위선적 혐오감, 나는 오늘도 마음으로 삭히지 못하고, 또 감정을 표출해내고야 말았다는 후회 그리고 내 말을 들어주느라 지쳤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하나의 인간 관계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불안함. 그렇게 쿨한 척 하지만 한없이 소심한 내 자신에 대한 끝없는 자책. 이 생각의 잔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을 싫어하고, 인간에게서 내 자신을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인간들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신경쓰는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 결국 나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인간을 상대하는 게 힘들어서 인생은 혼자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결국 온전히 혼자서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완전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공허함을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대사를 통해 '맞아, 나도 그런 비슷한 느낌 받았었어'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좀 덜 외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2. 왜 하필 추앙일까.
계속 궁금했었다. 왜 작가는 연애하자는 말을 추앙이라고 바꾸어 표현했던 것일까. 처음에 이 대사를 들었을 때, 읭?하던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때의 그 의문스러운 느낌 때문에 많은 뇌피셜 해석들을 찾아봤었는데,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들어갔다고 해석하신 분들이 꽤나 많았었다. 그 해석에 대해 많이 동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세계관이고 뭐고 그냥 단순하게 해석해서 누군가와 연애를 할 때,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 기분이 왔다갔다 하는 것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내가 좋으면 그냥 좋다고 표현할 거라는 대사에서 이 추앙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미정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신선하고, 미정이라는 캐릭터의 걸크는 여기에 핵심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 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이리저리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거 말고, 그냥 나는 그 때 상황에 맞추어 내가 하고 싶은 감정적 표현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존감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미정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술에 절어사는 상대(구씨)를 바꾸려 들지 않고, 그저 좋아한다는 표현, 그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미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시작한다는 개념이 너무 신박하다고 느껴졌고, 그런 담백하지만 묵직한 표현을 통해 구씨가 미정에게 스며드는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우면서 보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싫어도,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 명의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살 만해진다는 미정의 말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 간의 섹슈얼한 관계가 아니라 나를 응원하는 사람의 존재 덕분에 나는 오늘도 버틴다는 메시지가 너무 가슴 따뜻해진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인 로맨스는 참 많지만 내 영혼을 보듬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다. 나의 경우,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나부터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사랑해보는 연습부터 해봐야 겠다. 나는 그런 경험이 전무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치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나를 구원할 한 사람은 필요하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너무나 침체되어 있음을 느끼기에.
요근래 참 나에 대한 고찰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 나는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생각을 단순화시키려고 한다. 그냥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해야겠다. 남을 신경쓰지 않는 척했던 과거를 지나 정말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3. 삶이 힘든 그대에게
지금 이 시각,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아무래도 열린 결말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하수구에 떨어질 뻔한 위기의 동전을 구하고, 편의점에서 샀던 술을 노숙자에게 준 걸로 봐서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고, 새로운 챕터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가 화류계를 떠나고, 정말 술을 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술을 끊는 첫 스텝은 밟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구씨는 조금씩 미정의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을 거다. 아무래도 작가님은 각자가 원하는 결말을 알아서 상상하라는 의도로 그런 결말을 내신 것 같으니,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내련다.
삶이 힘들고, 연애가 지치고, 친구 관계도 염증이 날 때, 미정의 상황, 기정의 상황, 창희의 상황에 감정 이입하기 보다는 그들이 하는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보시기를 추천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통해 내 안에서 답을 내지 못한 답답함을 뚫어내는 잔잔한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해방일지에 스며들며, 이들의 말에 공감하며, 이들의 캐릭터가 대단히 성공하지는 못해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 드라마 속 모든 캐릭터들을 "추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응원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응원, "추앙"을 받고 싶다. 그렇게 여러분들도 세상의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추앙"받는 삶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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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단 호크, 마블의 새 빌런되다! 새 시리즈 <문나이트> 합류!
- 출처: 네이버 영화
마블 스튜디오가 신작 <문 나이트>의 악역을 찾았습니다.
미국 대중 매체 버라이어티는 ‘배우 에단 호크가 디즈니 플러스의 새로운 시리즈 <문 나이트>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으며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배우 오스카 아이삭이 맡은 마크 스펙터와 대결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에단 호크의 캐릭터에 대한 정확한 세부 사항은 비밀에 부쳐지고 있지만, 보도에 따르면 에단 호크는 <문 나이트>의 빌런을 연기할 예정입니다. 버라이어티는 이전에 오스카 이삭이 <문 나이트> 시리즈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할 예정이라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배우 에단 호크는 영화 <트레이닝 데이>, <보이후드>에서 남우조연상 그리고 영화 <비포 미드나잇>과 <비포 선셋>으로 각색상 총 4번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명배우입니다. 최근 작품으로는 영화 <매그니피센트 7>,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 그리고 <테슬라>가 있습니다.
또한, 배우 에단 호크는 최근 쇼타임 시리즈 <더 굿 로드 버드>에서 해방 주의자 존 브라운 역으로 주연을 맡았으며 에단 호크의 첫 TV 작품입니다.
<문 나이트>는 과거에는 CIA 요원, 현재는 잔혹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크 스펙터(오스카 아이작)가 이집트 달의 신 '콘슈'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고 이후 달의 4가지 모습과 대응되는 네 명의 다른 성격들이 그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싸우게 되면서 '콘슈'의 인간 아바타로서 범죄와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데스노트>, <엑소시스트>, <판타스틱4>의 각본과 넷플릭스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공동 제작을 맡았던 제레미 슬레이터가 이번 <문 나이트>의 작가이자 제작자를 맡았습니다. <문 나이트>는 모든 마블-디즈니 플러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될 예정입니다.
또 다른 미국 매체 더 랩은 '<문 나이트> 시리즈는 3월부터 부다페스트에서 촬영을 시작하며 마블 스튜디오가 향후 몇 년 동안 디즈니 플러스를 위해 제작하는 11개의 시리즈 중 하나'라고 전했습니다.
첫 번째는 얼마 전 북미에서 공개된 <완다비전>이 있으며 <팔콘과 윈터솔져>는 다가오는 3월, <록키>는 5월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또한 애니메이션 <왓 이프>, <미스 마블>, <호크아이>는 올해 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첫 공개됩니다.
마블은 배우 에단 호크 합류에 대한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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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 단독 영화 1편 중에서 가장 최고
서론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집단 '텐 링즈'의 수장인 아버지 쑤웬우의 손에서 암살자로 자라난 쑤샹치. 그러나 끝내 암살자의 길을 벗어던지고 학창 시절 친구인 케이티와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던 샹치는 어느 날, 버스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곧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한다. 그렇게 자신과 함께 가려는 케이티와 함께 웬우를 만난 샹치는 가족의 비밀을 알아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벌이지는 일들을 다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5번째 작품이다. 일단 꽤나 재미있게 보았다. 괜한 반중 감정 때문에 저평가 받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운 수작이었다.
액션도 좋고 악역도 좋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당연하게도 액션이다. 개인적으로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포함한 모든 마블 영화들 중에서 가장 좋았는데, 초반에 나오는 버스 액션신부터 시작해서 중반에 빌딩 액션신, 그리고 후반에 텐 링즈를 이용한 액션신까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특히 초반에 볼 수 있는 버스 액션신은 역대급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잘 뽑혔고, 기가 막히는 OST를 적재적소에 깔아놓은 덕분에 쭉쭉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 액션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텐 링즈라는 무기를 굉장히 임팩트 있게 연출한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원작과는 달리 채찍과 비슷한 용도로 바뀐 것이 약간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화려하고 멋져서 눈 호강 하나만큼은 제대로 해준다. 그리고 양조위가 연기한 웬우라는 캐릭터는 마블 영화 역사상 최고의 악역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빌런이었다. 영화의 서사나 감정선이 샹치에게 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조위의 연기가 하드캐리를 한 덕분에 웬우의 이야기에도 굉장히 몰입을 하면서 볼 수 있었다.
훌륭히 그려낸 '아버지 살해 신화'
그리고 이야기 또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기본적으로 필자가 '샹치' 류의 스토리, 그러니까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는 스토리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꽤나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기초이자 바탕이 되는 서사인 '아버지 살해 신화'를 단순히 답습하지 않고 뒤틀었다는 점에서 좋았는데, 주로 아버지 살해 신화는 자의적이나 운명적인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전개이다. 그러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이 틀을 부수고, 샹치와 웬우의 갈등을 지극히 '복수'라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묶어놓았다는 점이 재미있다. 먼저 샹치는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가 필요했던 자신을 그저 암살자로만 키운 동시에 어머니의 고향까지 쓸어버리려는 급진적인 행동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고, 웬우는 빌런이 된 것부터가 아이언 갱에 의해 아내를 잃고 아내를 내친 고향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아내가 죽어갈 동안 방관만 하고 있던 자식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심이 이 영화 갈등의 중심이 된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대결을 단순한 선과 악으로 확실히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개인적인 복수심을 가지고 행동했고, 이들의 행동을 쉽게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입체감과 무게감이 늘어났다고 본다.
따뜻한 메시지
그리고 이 점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 또한 매우 좋았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주먹을 쥐고 상대의 눈을 마주 보기를 거부했던 사람이 주먹을 펴고 눈을 마주 보게 되는 과정을 마블식으로 뭉클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샹치와 웬우 모두 복수심에 눈에 멀어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는커녕 오히려 주먹을 쥐고 덤비기만 했지만, 그랬던 두 인물이 과거의 아픔(아내, 어머니의 사망)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고, 아들을 구한 뒤 손을 펼쳐 텐 링즈를 줌으로써 부자간의 갈등을 해소했다. 그리고 영화는 이 부분을 통해서 이 영화는 서로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서로'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마블 영화들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비극 스토리를 가장 따뜻하게 풀어낸 '착한 영화'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의미 있는 세대교체
거기다 웬우가 '어둠의 드웰러'한테 죽은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이 어둠의 드웰러는 과거의 아픔으로 인해 피어난 분노를 상징한다고 본다.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하고 있고, 무차별적으로 온갖 영혼들을 앗아가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온갖 영혼들을 앗아갔다는 점이 웬우랑 꽤나 닮아있다. 웬우 역시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대며 영혼들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매번 과거의 아픔을 지니며 영혼을 빼앗아가던 웬우가 아내가 진짜 죽은 것이었다는 진실을 알아채게 되고, 그 뒤 자신의 눈을 막고 족쇄처럼 끌고 다녔던 과거의 분노 '드웰러'와 함께 다음 세대들에게 미래를 맡기며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드웰러가 수면 위에서 죽는 장면, 마지막 장례식 장면) 그리고 웬우가 과거에 짊어지고 다녔던 무기인 텐 링즈가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면서 이 영화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의미 있는 세대교체를 이루어낸다. 또 과거의 분노를 상징하는 어둠의 드웰러가 주먹이 아닌 주먹을 편 손에 의해 죽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오리엔탈리즘 없음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이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동양인의 스테레오 타입은 한 번도 묘사가 되지 않으며 ('데스 딜러'에 대한 묘사가 지적이 되던데, 닌자 가면이 아닌 중국의 경극 화장 가면이다.), 심지어 동양인에 대한 편견도 강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 샹치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애가 샹치에게 '헤이, 강남스타일!'이라고 하자 '나 한국인 아니야, 멍청아.'라는 말을 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거기다 영화 후반부에 볼 수 있는 다양한 동양 생명체들과 설정들, 동양 신화를 잘 담아낸 걸 보면 제작진들이 사전조사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구미호를 미국 영화에서 보게 될 줄은...) 다만 의외로 오리엔탈리즘 범벅이라는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의견은 존중할 수 있으나 도저히 동의는 못하겠다.^^;; 동양 신화를 다루면 그걸 다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머리라고 해서 다 전두환이 아니듯이, 동양 신화를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 혹평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플래시백
더불어 플래시백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들 중 대부분은 지속적으로 나오는 플래시백이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필자는 첫 번째 볼 때는 플래시백의 문제를 잘 느끼지 못했는데, 두 번째 봤을 때서야 몰입감이 약간씩 뚝뚝 끊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플래시백을 마냥 비판만 할 수는 없는 게,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의 플래시백은 단순히 전개의 편의성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닌, 샹치의 심리를 묘사하는 장치 중 하나로 사용된다. 이 영화에서 샹치는 이야기가 진행이 되면 될수록 어렸을 적의 기억들을 하나하나씩 되찾아간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걸 반영하여 중간중간 플래시백을 넣어 작품 자체가 샹치의 머릿속을 담은 것마냥 과거 스토리와 현재 스토리를 교차편집하며 진행된다.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철저히 개인에 몫이지만, 필자는 현재의 의문을 과거로 답해주는 형식 같기도 해서 꽤나 마음에 들었다.
부족한 개연성, 지루한 중반부
이렇게 액션, 비주얼, 이야기, 메시지 전부 다 좋았는데, 아쉬운 부분도 당연히 있었다. 일단 첫 번째로 개연성의 부족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텐 링즈라는 조직은 대체 어떻게 해서 비밀은 지켜왔는지 모르겠다. 무려 샹치의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반인인 케이티를 비밀조직인 텐 링즈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훤히 보여준다던가, 얼굴 없는 생명체인 '모리스'는 대체 어떻게 해서 지하 감옥까지 오게 된 건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모리스가 사는 '탈로'에서부터 지하 감옥까지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 동물인 모리스와 인간인 트레버는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지, 텐 링즈는 또 어디서 난 건지를 영화가 제대로 설명을 해주질 않는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엄연히 영화의 부재가 '텐 링즈의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속편을 위해서 기원조차 다루지 않았다는 게 참 별로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야기의 템포가 느려지는 탓에 지루해지는 중반부다. 초반만 하더라도 영화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덕분에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완전히 몰입한 채로 봤는데, 주인공 일행이 텐 링즈로 가는 순간부터 이야기의 템포가 지나칠 정도로 느려지는 게 작품에게 큰 독이 되고 말았다. 물론 샹치의 내적 갈등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지루해졌다는 점에서 뼈아픈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전형적으로 변한 마블 서사 구조
그리고, 어쩌면 요즘에 나오는 모든 마블 영화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점인데, 바로 영웅 서사의 구조가 다른 마블 영화들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초반에는 주인공의 평범한 삶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다가, 중반쯤에 가서는 사건이 터지며 오로지 주인공만이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 내적 갈등이 나오고, 후반에 가서는 히어로가 각성하여 액션 한 방 터트려준 다음 해피엔딩으로 가는 구조가 이제는 너무나 지겨워졌다. 물론 누군가는 히어로 영화라면 이러한 구조는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불과 2018년에 이 구조를 탈피해낸 영화가 마블에서 나왔다. 바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인데, 25편이나 되는 시리즈에서 일반적인 틀을 깬 영화가 겨우 1편이라는 점이 참 아쉬울 따름이다. (다만 '인피니티 워'는 애초에 '엔드게임'을 위한 전편이기 때문에 배드 엔딩으로 가는 건 당연한 것이기는 했다.^^;;) 그리고 DC나 폭스로까지 나아가면 [다크 나이트]도 있고 [로건]도 있다. 거기다 심지어 [아쿠아맨]도 주인공을 시작부터 사기캐로 만들면서 이러한 서사 구조를 약간씩이나마 비틀었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도 돋보이는 면은 있다. 샹치라는 캐릭터의 능력치를 처음부터 최대치로 찍어놓은 덕분에 마블 1편에서 보기 힘든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초반부터 버스에서 무쌍을 찍는다거나, 3편에나 가서야 활용할법한 용이 나오는 등) 그러나 [아쿠아맨]을 통해서 이미 한번 본 탓에 큰 신선함은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참 아쉽다. 부디 이번에 나올 [이터널스]가 이러한 구조를 깨는 또 하나의 마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결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반중 감정 때문에 저평가 받고 있는 게 참 아쉽지만, 간만에 제대로 나온 마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블 단독 영화를 보고 만족한 적은 2018년 이후로 처음이라 개인적으로 더더욱 애정이 가고 기특해 보이는 작품이다.^^
평점: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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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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