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2-02-13 19:32:59
나는 아마 다음 생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리코리쉬 피자>, 스포일러 없이 추천합니다!
다들 연애들 많이 하고 산다. 시샘 반 부러움 반의 목소리 톤으로 혼잣말을 한다. 누구는 결혼을 해 애까지 낳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제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것 같기도 하다. 몇몇은 나이 차이가 꽤나 나는데도 연애를 한다. 나는 컴활 어려워서 졸업이 빡센데도 어느새 다른 사람들은 제2,3막의 삶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냥 나 할 일 하는 것도 바빴는데 다들 연애는 언제 했대? 인스타그램 속 피드 안을 들여다보면 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웃픈 거리감이 든다.
근데 사실 이것도 내가 야기한 것이라 할 말이 없긴 하다. 나의 인간관계는 거의 위기탈출 넘버원과도 비슷하다. '결별 플래그'라고 하면 이상하려나? 아무튼 이런저런 사람과 다방면으로 틀어져봤기 때문에 요즘도 이불을 발로 뻥뻥 걷어차곤 한다. 허튼 마음을 품지 않았는데도 상대방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만한 행동을 해서 언팔로우당한 적도 있고. 내가 가진 마음이 돌이켜보면 짝사랑이었던 적도 있었으며 그 사람도 나를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이 있기도 했다. 뭐 그거 아니어도 은근히 폐쇄적인 나라 친구도 새로 사귈 기회가 없는 건 맞지만 거의 대부분의 나는 '와 나 진짜 미친놈이었구나' 싶기도 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누구와 새로운 인연을 싹 튀워서 행복하게 사는 청사진을 그리기엔 난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아이. 지금 카페에서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앞자리는 솔로인데 옆자리는 커플이다. 저 혼자서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는 사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펀치 트렁크 러브>처럼 사랑의 힘을 받고 성장하는 미래가 머릿속에 있을까? 여자 없이 잘 살고 있는 나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삶에서 그런 요소들이 있으면 더 풍요롭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 아쉬움을 채워주는 대리만족이 영화인 거지 뭐. 알고 보면 사랑 영화 잘 만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이런 솔로들을 위한 신작을 갖고 온 듯하다. 정식 개봉일은 2월 16일인데 나는 개봉날 전에 미리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10대와 20대 청춘들이 돌고 돌아 마주한 사랑 이야기를 극장에서 보도록 하자.

1. 어떤 것에 대한 영화인가요?
15살 남자 주인공 개리. 아마 한국 나이로 치면 중학교 2학년쯤 됐을 것이다. 학교 졸업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잘 나와야 한다. 그렇게 사진사가 학교에 왔고 그 조수인 여직원도 촬영장에 도착했다. 개리는 그 사진사의 조수 여직원을 보고 반하게 된다. 그 조수의 이름은 알리나다. 알리나는 25살이라고 한다. 15살 개리는 무작정 알리나에게 대시하기 시작한다. 저랑 데이트 어때요?부터 시작해 얘가 대체 무얼 알고 하는 말일까? 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무려 10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받는 관심에 '너 데이트할 돈은 있니?'라고 응수하는 알리나. 그렇게 개리를 애 취급하는 알리나지만 왜인지 데이트 신청은 받아들였다. 한 식당에서의 대화에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 개리는 지금 아역배우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또 집안도 잘 산다고 한다. 그뿐인가? 자기 이름으로 된 사업체도 있는 CEO다. 심지어 배우 일이 자기 천직이라고까지 말한다. 보기 드물게 자기 확신과 자존감이 높은 10대인 셈이다. 다음 알리나는 그 반대다. 25살이 됐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고 꿈도 없다. 집안이 잘 사는 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집에서 나고 자란 알리나다. 둘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계급차에 알리나는 '나는 몇 년이 지나도 애들 사진이나 찍어주고 있겠지'라며 자조한다. 첫 만남은 나이 차이라는 격차 때문에 애 취급을 했던 알리나지만 정작 데이트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해보니 입장이 역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엇갈린 처지 때문에 개리는 알리나를 직원으로 고용하게 된다. 영화는 이 둘의 비즈니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언제는 물 침대를 팔고, 또 언제는 핀볼 사업장도 하며 어떤 정치인의 캠페인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자기의 마음을 알기도 하고, 질투가 느껴지게끔 다른 애인이 생기기도 하며 싸우고 화해하는 일이 반복된다. 영화는 이 것을 소재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코미디와 달달함(?)이 일품이다.
2.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 잘 만드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한 땀 한 땀 장인정신 플롯 구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떤 식의 장인정신이냐면. 영화 안에서 '오인'이라는 키워드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냥 철없고 발랑 까진 15살 소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금수저였고. 나랑 맞는 줄 알았던 남자가 알고 보니 큰 결함이 있었고. 내 마음을 확실하게 정의하지 못해 방황하고. 이렇게 오인하고 오해하며 두 주인공은 서로를 사랑하는 과정 속에 놓인다. 근데 이게 사랑의 속성과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나는 극본이 이 영화의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속성이라. 한 200개쯤 되겠지만 그중에서 몇 개만 뽑아보자면 역시 짝사랑이 대표적일 것이다. 짝사랑이라고 하면 한 사람이 누군가를 혼자서 좋아하는 것을 뜻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랑은 이것이 선행되어야 이뤄진다. 이 짝사랑이 극에서도 나타난다. 남자 주인공 개리가 알리나를 짝사랑하기 시작하고 나서 동네방네 다 소문내고 다닌다. 자기 동생한테도 말하고 다니는 둥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다. 그런데 이후로 바로 개리가 어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갈 뻔한 장면이 나온다. 사랑에 빠지고 난 다음, 오인으로 인해 감옥에 가는 것이다. 중간에 물침대라는 키워드가 숨어있긴 하지만 이 둘의 논리관계만 봐도 어느 정도는 사랑에 대한 키워드로도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짝사랑은 감옥에 빠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못 나와 사람을 영원히 가둬놓는 것이다. 이에 대한 비유는 개리가 혐의가 없는 쪽으로 결론이 난 다음 알리나에게 가는 것과도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인식해서 용의자가 아닌 것을 알게 됨 - 바로 또 다른 감옥/사랑인 알리나에게로 향함'이라는 것은 왠지 감독 PTA가 두 사건을 동일시해서 배치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전적으로 나의 해석에 달려있긴 하지만, 영화는 이런 식으로 사랑에 대한 은유를 다양한 장면과 장소에 배치해놨다. 그 메타포는 결국 마지막 엔딩신에서의 알리나의 선택이 어떤 것을 근거하고 있는지와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사랑의 속성을 비즈니스와 대인관계에서 탐구한 영화.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감독의 전작 <팬텀 스레드>는 조용한데 강했다. 마지막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압박하는 듯한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또 <마스터>의 경우에서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만 극에 나온다. 와킨 피닉스와 필세호의 퍼포먼스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둘은 뭔가 극이 무겁다. 그런데, 이 세 작품을 연출한 사람이 같은 감독이라고 하는 점은 놀랍다. 이 영화는 앞 두 작품과는 다른 통통 튀는 소소한 유머와 달달한 로맨스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장점은 2에서 언급한 사랑에 대한 은유다. 이게 쉽게 생각하면 '과연 사랑이 어떤 것일까' 결론 내리는 게 어렵지 않다. 근데 극을 두 번 세 번 생각하다 보면 또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다. 감독의 다른 작품들처럼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구석이 많은 것이다. 세번째 장점은 색감이다. 내가 예전 영화를 자주 보던건 아니라서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색감이 70년대 영화를 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인 코디의 느낌과 뒤 세트장의 조화도 좋았다. 또 빨강-초록이라는 색을 통해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은유한 듯 한데, 이런 연출도 효과적이었다. 네 번째 장점은 5에서도 언급할 것 같으니 5번으로 넘어간다!
4.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크게 어렵지는 않을 듯. 아. 난 영화 보다가 살짝 딴생각을 해서 잠깐 끊어진 부분이 있었다. 극에서 한국의 산이 나오는데 그 부분을 여러분은 집중해서 보길 바란다;; 난 왜 갑자기 저게 튀어나오지? 싶었다.
5.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완전 초짜 배우들이다. 여자 주인공 알리나 하임은 그냥 본업이 가수다. 당연히 노래와 연기는 다른 분야다. 그런데 왠지 배리 키오건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 시네마'를 잘 구현해냈다. 그렇게 예쁜 편도 아니고. 성격이 엄청나게 착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평범한 20대 중반 청춘의 사랑이야기를 이렇게 멋지게 결론 낸다는 것은 배우의 본인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다른 주인공 개리 역을 맡은 쿠퍼 호프만 역시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 동글동글한 비주얼로 무작정 들이대지만 자존감은 높은 10대 청소년을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앞에서 쓴 바와 같이 전적으로 평범한 두 남녀에 대한 이야기다. 근데 이 둘의 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배우들이 호연도 이유가 되겠지만 감독 PTA의 디렉팅도 탁월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외에도 브래들리 쿠퍼의 코미디 연기는 반짝반짝 빛났으며 숀 펜의 액션 연기도 훌륭했다. 베니 샤프디와 마야 루돌프도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물 같은 느낌이 있다.
6.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무조건 알아야 하는 것들은 아니다. 사실 모른다고 해서 크게 이해에 무리가 있지는 않다. 첫 번째는 주인공 개리 역의 쿠퍼 호프만이 PTA의 페르소나 필립 셰어 모어 호프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또 제목 <리코리쉬 피자>의 의미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던 작품에서 나왔던 가게 이름이라는 점이나 인물들이 죄다 실존인물이었다는 것도 알고 가면 좋긴 할 듯. 근데 뭐 앞에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꼭 무조건 알아야 이해가 쉬운 것은 아니다.
7.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이게 상영관이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킹메이커>를 보고 <나이트메어 엘리>를 대기하고 있으며 <더 배트맨>을 기대하기 이전에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분들이라면 추천하고 싶다. 깔끔하게 볼 수 있는 로맨스 코미디 영화다. 킬링타임 용으로도 제격이라는 뜻이다. 또 나와 같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연애세포가 깡그리 죽은 사람들은 이것이라도 봐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우리 이거라도 보면서 분발해야 한다;; 아무튼 관객 분들은 어디에도 없는 사랑이야기에 흐뭇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분들도 좋은 영화가 될 것 같다.

우리 근데 언제 연애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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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니스 엔드
저니스 엔드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는데, 어느 순간, 이 영화는 매우 '개인적'이고 '연극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었고, 영국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선택했다.
영화를 다 보고 영화정보를 찾아보니, 내 느낌이 정확하게 맞아서 신기했다. 이 영화는 R. C. 셰리프가 1928년에 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셰리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다.
잘 알려진 것처럼, 1차 세계대전은 재래식 무기로 싸운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쟁이다.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이 이 기록을 깨지만, 불과 20년 사이 무기의 발달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연합군은 4천3백만 명이 참전했고, 사망자와 실종자(사망으로 추정)를 합하면 1천만 명이 넘었다. 즉, 4명 가운데 한 명이 전사한 것이다. 여기에 부상자가 1천2백만 명이었으니 사상자로 보면 4명 가운데 2명은 죽거나 다친 것이다.
동맹국은 2천5백만 명이 참전했는데, 사망자와 실종자가 8백만 명이고, 부상자도 8백만 명 정도다. 사상자가 1천6백만 명이니 통계로 보면 동맹국 군인의 피해가 더 컸다.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당연히 2차 세계대전이 훨씬 많지만, 2차 세계대전의 무기는 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파괴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는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전선을 따라 참호를 길게 파고, 진지를 구축한 다음, 적과 대치한다.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상대 참호를 점령해야 하고, 그렇게 병사들의 몸뚱이를 갈아넣으면서 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으로 변해갔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문학작품이 많다. 가장 유명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비롯해 최근에 개봉한 영화 '1917' 그래픽노블 '1914-1918' 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 가운데 존 엘리스가 쓴 '참호에 갇힌 1차 세계대전'을 보면, 이 전쟁이 '참호전'이라는 특징을 얻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참전 군인 대부분은 참호에서 생활한다. 전선을 따라 길고 복잡하게 만든 참호는 아군의 기지 역할을 하고, 안전한 방어진지이면서, 적을 공격할 때도 빠르게 기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적과 아군의 참호 거리는 불과 50미터여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으며, 상대방에게 심리전 - 음악, 방송 등 - 을 펼칠 수 있고, 심지어 적군이어도 임시 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참호는 안전하지만 매우 비좁고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발이 빠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여기에 쥐가 들끓고, 미쳐 거두지 못한 아군 병사의 시신을 참호 바깥쪽에 땅을 파서 메워 벽을 만들기도 했다.
영화는 참호 생활의 어려움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개인적'이고 '연극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가 참호생활의 묘사였고, 다른 하나는 군인들 - 장교와 사병 - 특히 장교들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롤리 소위는 이제 막 장교 훈련을 마치고 임관한 앳된 소위다. 그는 전방 연대로 전입 인사를 하러 왔다가 사단장을 찾는다. 사단장은 롤리 소위의 삼촌(외삼촌)이다. 이 정도 빽이면 좋은 보직을 받아 안전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롤리 소위는 최전방 대대로 배속해달라고 요청한다. 스탠호프 대위가 대대장으로 있는 그 대대로 꼭 배속을 해달라는 롤리 소위의 부탁에, 사단장도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한다.
롤리 소위와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 전에 함께 살던 사이였다. 롤리 소위의 집안은 명문가로 부유한 - 아마 귀족일 수도 있다 - 집안이었고, 그런 롤리의 저택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던 사람이 스탠호프였다. 스탠호프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입대해 지금은 대위가 되었고, 사단에서 유명한 전설적인 대대장이 되었다.
반면 롤리 소위는 학군장교였다가 최근 8주 훈련을 마치고 이제 막 전방부대로 배속받은 신참이었다. 롤리 소위의 기억으로 스탠호프는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롤리, 롤리의 누나와 함께 셋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추억이 있었다.
프랑스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는 대대는 이제 막 직전 부대와 임무 교대를 하고, 앞으로 6일 동안 참호에서 대기하며 독일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방어 임무를 맡았다. 전선은 벌써 몇달 째 교착상태에 있었고, 소문으로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소문 속에서 이미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롤리 소위는 전쟁 전의 스탠호프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참호에서 본 대대장 스탠호프는 롤리 소위의 기억에 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전입인사를 하러 온 롤리를 바라보는 스탠호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친동생 같은 롤리였지만, 최전선에서 만나는 롤리를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그의 내부에서 뒤섞이며 심한 내적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눈동자의 흔들림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전설적인 군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탁월한 지휘관으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지휘관으로 누구보다 병사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승리하지만, 그만큼 많은 병사를 잃은 스탠호프 대위는, 부하 병사들 한 명, 한 명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료가 그렇게 허무하게 주검으로 변하는 장면을 보면서 비통한 감정과 그 감정을 누르고 전투를 치러야 하는 지휘관으로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결국 스탠호프 대위는 견디기 힘든 감정을 억누르려 술을 마시게 되고, 거의 알콜중독에 이르게 된다. 롤리 소위가 스탠호프 대위를 만난 이후, 이야기는 스탠호프 대위를 둘러싸고 측근인 부하 장교들과 연대장의 대화, 갈등을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영국군은 첩보를 통해 3월 21일, 독일군이 공격할 거라는 정보를 얻지만, 확실한 정보를 알기 위해 스탠호프 대대에 독일군을 생포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스탠호프 대위는 더 어두워진 다음 공격하자고 주장하지만, 연대장은 상급부대에 보고해야 한다며 오후5시에 공격하라고 다그친다. 이는 분명 병사들이 더 많이 죽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스탠호프 대위는 연대장에게 반발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친다.
두 명의 장교와 여덟 명의 병사로 침투조를 짜는데, 지휘장교로 스탠호프 대위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가장 친하게 지낸 오스본 중위가 차출되고, 롤리 소위는 자원한다. 그렇게 독일군 생포작전이 시작되고, 열 명의 군인이 독일군 참호로 뛰어들어 독일군 한 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하지만, 살아돌아온 군인은 롤리 소위와 네 명의 병사였다.
전쟁에서 군인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적군을 더 많이 죽이는 방법이 유일했던 전쟁이 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런 잔혹한 전술 앞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스탠호프 대위의 심정은 갈갈이 찢겨나간다.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장교들의 갈등, 장교와 사병의 갈등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스탠호프 대위는 마치 햄릿처럼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전쟁에 끌려들어온 '개인'이며, 명분이라고는 오로지 '국가의 이익'인데, '국가'는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단지 '애국심'만으로 명분을 찾기에는 이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개개인에게 깊은 내면의 상처를 입히고 있다.
스탠호프 대위의 대대가 참호로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독일군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나중에 알려지지만, 이날의 공격은 독일군의 '춘계 대공습'으로 기록되었고, 단 사흘의 전투로 양쪽에서 무려 7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롤리 소위는 등에 부상을 입고 스탠호프 대위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스탠호프 대위는 포탄이 어지럽게 터지는 참호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다. 그렇게 참호에 있던 영국군 대대는 전멸한다. 포연이 그치고, 전멸한 영국군 사이를 걷는 독일군은 방독면을 쓰고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썼다는 주장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쳐가듯 잠깐 독일군이 방독면을 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참혹성을 알리고 있다.
전투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극한 상황이라 결코 낭만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없고,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기 때문에, 군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런 대규모 살상전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고 우연이라면, 전사한 병사 역시 그의 죽음은 우연일 뿐이다. 문제는, 인간의 존재가 이런 불분명한 명분 때문에 도구로,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딜레마를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 개개인은 전쟁의 거대한 구조를 깨뜨리지 못한다. 결국 구조의 틀에 갇힌 개인은 자신의 삶,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죽음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며, 이런 모순과 갈등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인 것이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인간의 존재와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내면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보편적 공감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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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독일] 한스의 선택
<거대한 자유(Grosse Freiheit)>(2021, 세바스티안 마이저)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1969년 서독, 몇 번째인지 모를 옥살이를 하던 한스 호프만은 ‘175조’ 폐지 목소리를 담은 기사를 보게 된다. 출소한 후 어느 바 앞에 다다르고, 두 남자가 스스럼없이 애정표현을 하며 그곳을 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간판에 적힌 이름은 ‘거대한 자유’. 들어가 홀로 있던 한스는 낯선 남자를 따라 계단을 내려간다. 미로같은 공간, 남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 카메라는 그들을 비추지만 집중조명하지는 않는다. 꿈꾸는 듯한 시선과 리듬으로 한스를 따라간다. 이내 미로를 빠져나온 그는 자판기에서 담배를 뽑고, 밤거리로 나와 상점 쇼윈도를 깨 물건을 대강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여유롭게 서성이다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번의 카메라는 길 건너편에 고정된 채 먼발치에서 원테이크로 그를 담는다. 화면은 어둡고,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바 시퀀스에서 가득 울려 퍼지던 음악은 멎은 채다. 단조로운 경보음이 귀를 파고든다. 엔딩크레딧에서는 그마저도 사라지고 고요만이 남는다.
침묵 속에서 관객은 생각에 빠진다, 한스는 왜 교도소로 돌아가기로 했을까. 그에 대한 두 갈래의 해석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포스터 아트 또한 다른 정서로 읽히게 될 것 같다.
먼저, 13년 동안 여러 번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더 나은 삶을 바라기를 포기하게 됐고, 머릿속 감옥에 갇혀버렸다고 보는 방향이 있다. 앞서 한스는 레오를 교도소에서 내보내기 위해 그의 거짓 진술을 인정했었다. ‘왜 그랬냐’고 묻는 레오에게 ‘너와 달리 나는 이미 희망이 없다’며 자조했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대사는 오스카와의 미래를 꿈꾸던 십 년 전과 대조된다. 연인을 향한 열정으로 반짝이던 눈은 이제 생기를 잃고 일시적인 위안을 찾는다. ‘거대한 자유’에서 마음껏 서로를 탐하는 남자들을 지나며 제가 속할 곳이 아니라고 느꼈고, 자유를 반납한 후 ‘안락’하고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자판기에서 담배를 뽑은 것은 영혼이 억압에 중독되었음을 상징한다. 마침내 ‘거대한 자유’가 ‘(부분적으로)허용’됐을 때, 한스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린 채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좀 더 힘을 싣고 싶은 것은 두 번째 해석이다. (배우의 얼굴에 담긴 것이 이에 가깝다고 느꼈다.) 한스는 변한 적이 없다, 늘 사랑의 자유를 위해 망설임 없이 다른 모든 자유를 포기할 준비가 돼 있는 이였다. 십 년 전 오스카에게 동독으로 넘어가자고 말했던 그는, 이제 빅토르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기로 한 결정은 익숙한 억압으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빅토르와 같은 중독자의 패턴을 보인 것도, 체념하거나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한스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대한 자유’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자들을 지나치며 그가 느낀 것은 몸의 자유, 그리고 ‘너’의 부재. 그래서 쇼윈도에 돌을 던졌다. ‘너’와의 추억이 담긴 담배에 불을 붙이곤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 ‘네가 나올 수 없다면 내가 들어갈게.’, 그에게 자유는, 머무는 장소에 있지 않았다. 사랑에 있었고, 상대방에 있었다.
너무 낭만화한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라 해도- 한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짚어내려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늘 확실하지만은 않은 말과 행동, 몸짓과 표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뒤따르는 감상은 달라질 테다. 내가 한스 호프만의 눈빛에서 읽은 바는 위 두 문단 중 후자에 가까웠고, 그를 바탕으로 아래 문장들을 적었다.
1945년, 한스 호프만은 수용소에서 교도소로 ‘옮겨진’다. 파시즘 체제가 내린 형을 2차대전 후에 ‘이어’ 살게 된 것이다. 독일 제국 때 확립되고 나치가 강화한 ‘형법 175조’를 서독이 그대로 따르기로 해서다. 영화가 이 이상한 시대와 국가와 법을 고발하는 방법은, 한스라는 인물로 중심을 잡는 것, 그의 눈에 세계를 담고 세계가 그를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허구적 ‘위인’의 (자서전보다는)전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관계의 상대방들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 역시 그를 관찰하고, 시선으로 그에 대해 말한다. 1968년, 재판을 받고, 옷을 벗고, 신체 부위를 내보이는- 그의 행동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건 익숙함 때문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종종 자조와 체념을 내보이기는 하지만 한스의 태도는 늘 당당하다. 잘못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때도 지금도 ‘늘 방법을 찾아낸다’. 한스 호프만은 그 한결같음으로 주변의 폭력성과 비정상성을 선명히 드러내는, 드물게 빛나는 사람이다. (해선 안 될 것은 한스를 밀어낸 오스카나 거짓 진술을 한 레오를 섣불리 평가하는 행위. 레오를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한스 뿐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저화질 필름에 담긴 비디오였다. 장소는 공중화장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그곳에서 성행위를 하는 남자들을 촬영한다. 서독 경찰이 숨겨놓은 카메라에 찍힌 영상으로, 재판장에서 공개되어 한스가 ‘175조’를 어겼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쓰인다. 그러나 영화는 먼저 관객에게 그 자체만을 보여주길 택했다. 촬영된 까닭과 재생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본다면, 영상에 담긴 것은 그저 (불법이 아니어야 할 일이 불법인 세상에서) 순수한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일 따름이다. 오스카와의 추억 역시 유사한 비율과 톤의 프레임에 담겨 있다. 그리고 하나 더, 교도소 문에 달린 반입구가 있다, 빅토르가 한스에게 불을 붙여주던. 독방에서 한스가 피운 성냥의 불빛이 꺼지며 1945년으로 연결되는 연출은- 긴 세월 동안 여러 번의 옥살이를 하며 그가 찾은 자유가 무엇인지 탐구하려는 듯하다.
작품이 1945년이나 1969년이 아닌 1968년을 오프닝에 배치한 까닭은, 또다른 시작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래된 인연과, 새로운 사랑의 상대방으로서 재회한 해. 오스카의 죽음을 알고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빅토르가 십 년 후 마약중독으로 괴로워할 때, 한스는 그 포옹을 돌려준다. 당신의 괴로움을 다 내 피부에 새기겠다고, 내가 붙잡을 테니 당신은 놓아도 괜찮다고 선언하듯 촘촘하고 단단한 그 포옹들. 작품은 빅토르와 한스의 관계를 ‘편견을 넘어선 우정’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히 로맨스에 다다르도록 했다. 거기엔 빅토르가 처음부터 틀렸다는 암시가 있다. 어쩌면 먼저 상대를 좋아하기 시작한 쪽이었던 그는, 그 마음을 알아채고 꺼내어 준 한스의 사랑에 구원받았다. 구원은 (차별적 억압의 근거로 이용되곤 했던) 십자가와 성경에 있지 않았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남자와 데이트하는, 성경에 바늘로 구멍을 뚫어 러브레터를 쓰는, 그것을 찢어 담배를 말아 피우는 한스의- 조그마한 신성모독, 위대한 사랑에 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가끔 <거대한 자유>의 포스터를 들여다봤다. 누군가의 머리에 나 있는 문, 그 프레임 안엔 아마도 그 자신일 남자가 갇혀 담배를 물고 있다. 밖에서 불을 붙이는 손은 누구의 것일까, 어쩌면 그역시 자신의 손일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짐작하기도 했다. 영화를 관람하며 손의 주인이 빅토르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장면이 기억의 방으로 들어온 순간, ‘손은 그 자신의 것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1957년, 컴컴한 독방에서 한스는 오스카와의 추억을 재생했다. 성냥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나서야 담배에 불을 붙였다. 13년 동안 교도소와 독방을 들락거린 그를 살아남게, 아니 살게 한 것은 그 성냥불이었다. 찰나를 태우고 사그라들지만 기억 속에서 반복해 빛을 내는 그것은, 특정한 대상인 빅토르보다는 모든 사랑과 상대방들을 상징함에 더 가깝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한스는 사랑의 감정과 기억에서 얻은 연료로 삶의 불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둠 속 잠깐의 빛에 홀려 중독된 것이라 해도, 그 길에 사랑이 있다면- 나는 한스의 마지막 선택을 감히 안타까워하고 싶지는 않다.
<거대한 자유>는 실재했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고발, 빅토르와 한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스 호프만과 그가 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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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독특한 감성의 한국식 멀티버스 영화가 궁금하다면
마블(Marvel) 사는 히어로 영화의 신대륙을 개척함과 동시에 수많은 관객에게 평행 세계와 다중우주(Multiverse)라는 개념을 알렸습니다. 저도 스파이더맨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닥터 스트레인지가 이 세계, 저 세계를 오가는 것을 보면서 평행 세계와 다중우주의 개념을 확실히 깨달았죠. 마블의 최근 행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알기 힘들었을 어려운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는 바로 이러한 다중우주 개념을 적용한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거대한 우주 속에 존재하는 여러 보통의 우주들의 이야기'라는 설정만으로도 산뜻하고 신선한 작품이었죠. 이 영화 속에서 찬란하게 빛난 보통의 우주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
Stars in the Ordinary Universe
<보통의 우주는 찬란함을 꿈꾸는가>는 현실의 일면에 상상력을 더한 흥미로운 3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됩니다. '우월한 유전자' 이론을 접하고 자율학습 대신 열등한 인간의 존재 가치를 찾아 방황하는 여고생의 이야기(<여고생의 기묘한 자율학습>), 크고 창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대통령의 꿈을 좇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마는 한 남자의 이야기(<거지의 왕>), 입에 지퍼를 잠가야 할 순간에도 눈치 없이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고충을 다룬 이야기(<진실을 아는 자>)까지. 같지만 다른 평행 세계 속 이야기답게, 등장인물들이 시공간을 오가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에 출몰하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중우주 속 세계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이야기들을 단순하게 연결한 작품은 아닙니다. 세 이야기는 분명한 하나의 공통된 주제, 삶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하죠. <여고생의 기묘한 자율학습>에서는 자기 자신이 열등한 유전자라고 믿는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고, <거지의 왕>에서는 대통령이라는 환상 같은 꿈만 뒤쫓다가 거지가 되어버린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깨달아 가며, <진실을 아는 자>에서는 괴로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진실을 이야기하고야 마는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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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이야기 모두 비참한 현실을 가벼운 웃음으로 비트는 블랙 코미디 요소를 갖추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삶의 의미를 고민하던 주인공은 '우월한 유전자건 열등한 유전자건, 땡땡이 치면 숙제가 많이 밀린다'는 허무하면서도 당연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큰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대통령을 꿈꾸었던 주인공은 거지가 돼버린 후에도 크고 창대하게 '거지의 왕'이 되겠노라 선언하죠.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진실을 이야기해 온 주인공은 별안간 진실을 말하는 입이 우월한 유전자로서 선택받은 것이라고 믿게 되고요. 삶의 의미라는 심오한 주제를 떠안은 세 주인공 모두 조금은 황당하고 우스운 결론에 다다른 셈입니다. 상영 후 진행된 GV에서 김보원 감독은 “현실을 리얼리즘으로 직시해버리면 고통이 배가 되기에 끔찍한 고통과 감정을 웃어넘길 수 있는 블랙 코미디 장르를 사랑한다"라고 밝혔습니다. 장르에 대한 그의 열정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작품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인 <진실을 아는 자>에는 실제론 아무 의미 없는 별들을 머나먼 지구에서는 찬란한 빛으로 보고 감탄한다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보통의 우주들도 참 별 볼 일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마찬가지죠.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지구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니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보통의 지구도 멀리서는 찬란할 겁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아주 작은 점일지라도 말이죠. 모든 일엔 배울 점이 있듯이, 이렇듯 허무맹랑함으로 범벅된 듯한 이야기 속에도 진득한 깨우침이 녹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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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화면비에서도 다중우주라는 개념을 재미있게 활용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세 번째 에피소드로 이어지면서 4:3 비율이었던 화면은 점진적으로 1.66:1 비율까지 확장됩니다. 또 세 우주가 전환되는 장면은 가장 큰 1.85:1 비율의 화면비를 사용하죠. 감독은 “우주가 다르니까 당연히 화면비도 달라야 하며, 평행 세계의 지구들이 모두 존재하는 화면은 마땅히 가장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변태 같은 설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관객은 이런 변태 같은 설정에 감동하지요.
철학과 과학, 존재와 사유, 진실과 탈진실. 블랙 코미디와 다중우주라는 외양 안에서 다양한 논제를 다루고 있는 <보통의 우주는 찬란하게 빛나는가>.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마블 사의 다중우주 영화와는 또 다른, 독특한 한국식 다중우주 영화를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Summary
무한한 다중우주에서 펼쳐지는 보통 사람들의 세 가지 이야기. 우주 #1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알게 된 한 여고생.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묘한 자율학습을 시작한다! 우주 #2 삶의 의미를 통달한 듯 보이는 거지. 험난한 여정 끝 얻게 된 진실한 행복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주 #3 진실은 계속해서 진실을 알린다.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다들 떠나갈까.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Cast
감독: 김보원
출연: 박서윤, 심규호, 오동민 외
Schedule in JIFF
2023.04.28(금) 메가박스 전주객사 6관 20:30
2023.05.01(월) CGV전주고사 4관 17:00
2023.05.02(화) CGV전주고사 6관 10:30
2023.05.03(수) CGV전주고사 4관 16:30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 04월 27일 - 05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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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에서 영웅으로
<트랜스포머> 영화 시리즈의 첫 편이 나온 지 15년이 넘었다. 하지만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이야기의 초점은 흐려지고, 오로지 파괴적인 액션 장면들이 나열되는 느낌을 준다. 초기의 신선했던 감동은 점차 사라지고,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 시리즈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포머의 세계관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그들의 고향인 사이버트론이라는 행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애니메이션 영화 <트랜스포머 원>은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사이버트론의 기원을 다루며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단순히 로봇 전투 액션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들의 정치적 성장과 계급 갈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사이버트론의 노동자 계급을 전면에 내세우며, 각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감정을 통해 관객에게 정치적 함의를 전달하는 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이제, 이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주요 캐릭터들의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첫 번째 감정] 오라이온 팩스(옵티머스 프라임)의 자유
영화 <트랜스포머 원>에서 오라이온 팩스는 사이버트론 행성에서 평범한 노동자 계층에 속하는 광부로 등장한다. 그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깊었으며,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가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사이버트론의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오라이온 팩스에게 큰 충격을 주며, 그는 시스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진실을 알게된 그 순간은 그의 내면에서 자유를 향한 열망이 싹트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오라이온 팩스는 시스템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는 자유를 위해 싸우되, 과격한 방법 대신 온건한 접근을 택한다. 그의 목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부패한 체계를 개선하고 바로잡는 것이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비둘기파에 가까운 온건한 이상주의자적 태도이며, 사이버트론에서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영웅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오라이온 팩스가 선택하는 길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타협과 대화를 중시하는 방식이다. 그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 안에서 변화를 모색하는 리더로 성장한다. 이는 그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단순한 전투영웅을 넘어선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이후 옵티머스 프라임으로 거듭나며 사이버트론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두 번째 감정] D-16(메가트론)의 분노
오라이온 팩스와 대조적으로 D-16, 즉 메가트론은 같은 노동자 계층에 속해 있지만, 그가 택한 길은 완전히 다르다. 메가트론은 처음에는 규칙과 질서를 중시하는 성향을 보인다. 오라이온 팩스와 함께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메가트론은 체제의 틀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내면에서는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메가트론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 체제를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변모한다. 그는 현재의 사회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고 믿는다. 메가트론의 이 파괴적인 성향은 그를 강경한 매파로 만든다. 그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오직 새롭게 탄생할 세계를 꿈꾸며 폭력적인 혁명을 추진한다. 이는 그가 오라이온 팩스와 갈등하게 되는 핵심 원인이 된다.
하지만 메가트론의 분노는 단순한 파괴적 욕구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기존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그가 오라이온 팩스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며, 이 영화는 메가트론이 가진 복잡한 감정을 더 깊이 파고들며 그의 폭력적 성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메가트론은 단순한 악역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인물로서 그의 캐릭터가 확립된다.
[세 번째 감정] 사이버트론 고대 조상들의 믿음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사이버트론의 노동자 계급에서 시작한 두 인물이 결국 각기 다른 정치적 길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사이버트론의 고대 조상들은 영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들은 각 영웅들에게 지혜와 힘을 부여하며, 그들의 성장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흥미롭게도, 고대 조상들은 자유와 정의를 상징하는 오라이온 팩스, 즉 비둘기파의 손을 들어준다. 그들은 사회를 파괴하기보다는 개선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개혁하는 것을 지지한다.
이러한 조상들의 믿음은 오라이온 팩스와 메가트론이 상징하는 두 가지 정치적 이념, 즉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을 더욱 부각시킨다. 영화는 결국 이 두 인물의 갈등을 통해 자유와 분노, 개혁과 혁명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들은 사이버트론의 미래를 두고 서로 대립하며, 그 과정에서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이라는 두 영웅의 정치적 성장과 충돌을 보여준다.
조상들의 역할은 단순히 전설 속의 존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혜가 현대의 갈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이 남긴 유산은 두 인물의 행동에 방향성을 제시하며, 영화 속에서 사회적 진화와 혁신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제공한다. 사이버트론의 고대 조상들은 이 갈등의 심오한 철학적 배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깊이
<트랜스포머 원>은 단순한 액션 애니메이션 이상의 깊이를 가진 작품이다. 영화는 사이버트론의 계급 갈등과 노동자 계층의 정치적 성장 과정을 그리며, 자유와 정의, 분노와 혁명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주제를 다룬다. 오라이온 팩스와 메가트론의 대립은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니라, 각기 다른 정치적 이념이 충돌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정의를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 영화는 특히 사이버트론이라는 세계의 기원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을 세밀하게 다룬 점에서 주목받는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단순히 로봇들의 전투 장면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에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인물들의 정치적 여정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논쟁이 되는 정치적 주제들을 트랜스포머 세계를 통해 풀어내며, 관객들에게 깊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번 영화의 감독은 애니메이션계에서 유명한 조시 쿨리다. 그는 <토이 스토리 4>를 통해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은 감독으로, <트랜스포머 원>을 통해 트랜스포머 세계관의 깊이를 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이클 베이가 이끌었던 실사판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달리, 조시 쿨리는 이번 애니메이션에서 서사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특히 캐릭터들의 내면을 탐구하며 그들의 성장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목소리 연기도 눈길을 끌었다. 옵티머스 프라임, 즉 오라이온 팩스의 목소리를 맡은 크리스 햄스워스는 특유의 남성적이고 강렬한 목소리로 프라임의 리더십과 결단력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메가트론의 목소리를 맡은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는 그의 분노와 카리스마를 잘 전달하며 메가트론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했다. 두 배우의 목소리 연기는 영화의 감정선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트랜스포머 원>은 트랜스포머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서사적으로 깊이가 있는 작품이다. 단순한 로봇 전투를 넘어, 정치적 성장을 그린 이 영화는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의 기원을 탐구하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트랜스포머 팬뿐만 아니라, 정치적 서사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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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베 얀손이라는 이름의 모험
토베얀손
줄거리
유명한 조각가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 자연스레 예술가로 성장한 토베 얀손.
흔들리고 불안정한 삶의 굴곡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녀는 어떤 예술가였을까?
토베 얀손이라는 이름의 모험
숨은 의미 찾기
무민은 하얗고 말랑하고 폭신하고 따스하며 무해하다.
언뜻 보기엔 곰인지 하마인지 헷갈리지만 사실 무민은 '무민 트롤'로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트롤을 토베 얀손만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무민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방공호 속에서다. 어둡고 암울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그녀의 염원이 무민이라는 존재로 하여금 그녀의 마음속에서 뛰쳐나온 건 아닐까.
영화는 혼돈 속에 빠진 예술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듬어 가는지에 대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루고 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토베 얀손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것 같지만, 실은 그녀의 예술이 어떻게 안정되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불안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녀가 느꼈던 날것의 감정들이 정제되어 모두 무민이라는 예술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이건 그냥 돈벌이야. 이 그림이 진짜 나야."
토베는 만화를 칭찬하는 비비카에게 정색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을 가리키며 저것이 진짜 자신이라고 말한다. 만화는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며, 자신은 순수 미술을 그리는 예술가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토베의 태도는 겉으로 보기엔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지는 게 싫어서 인정받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순수 미술에 대한 그녀의 열망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순수 미술에 대한 사랑은 토베가 초상화를 그릴 때 나타난다.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기는 힘든 추상화를 그리며 화산과 물줄기와 불꽃이라며, 이 중에 어떤 것이 자신일지를 묻는다. 자기 내면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지 토베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치열한 고민 끝에 얻어낸 정답을,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캔버스에 담아낸다.
"토베, 당신과 그림은 별개야."
"내 그림이 나야."
토베는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전시회에서 토베는 담배를 피우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빼라는 아버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게 예술가 지원금 선정 여부가 달린 전시회인데도 말이다. 그녀는 캔버스에 거짓을 담은 적이 없었다. 약간 숨기거나 꾸며낼 법도 한데, 멍청할 정도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낸 것이다.
'내 그림이 나'라는 말을 한 치의 거짓 없이 뱉을 수 있는 화가가 어디 있을까.
프랑스에서 비비카가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토베.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연인과 웃음을 짓는 비비카에게 상처를 받는다.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지만, 정작 비비카가 하는 말은 자신을 위해 무민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을 써달라는 것. 토베는 그 말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희곡을 쓰기로 한다. 그 다음날, 아토스가 찾아와 결혼을 이야기할 때 토베는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캔버스에 하얀 덧칠을 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캔버스 살 돈이 없어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에 그녀가 붓과 물감 같은 미술용품을 서랍장 안에 처박아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보다 앞서서 이 장면을 통해 이미 토베가 순수 미술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상처받아서? 희곡을 쓰기로 해서? 아니다. 무민이 비비카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기에, 진짜 자신을 숨기고 비비카가 원하는 자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왜 마음을 바꾸셨죠?"
"왜냐면 제가 화가로서 실패했거든요."
토베는 본격적으로 신문에 무민을 장기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진다. 그토록 인정과 명예를 원했지만 그녀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불행해 보일 정도다. 시종일관 어둡고 가라앉은 토베의 표정은 항상 웃고 있는 무민의 표정과 상반되어 보인다. 계약서에 서명을 할 때 그녀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자포자기'였다.
비비카가 떠나고 그녀에게 남은 무민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한때는 사랑의 표현물로 여겨지던 사랑스러운 비프슬란과 토프슬란의 대화도 이제 그녀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힐 것이었다. 무민은 아버지의 말마따나 '낙서'일뿐이었다. 다만 좀 비싼 낙서였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었다.
돈벌이 수단이자, 비비카와의 마지막 남은 연결고리였다.
"너만큼 사랑한 사람은 없었어."
"난 프랑스만큼 사랑하는 게 없어."
프랑스에서 운명처럼 다시 재회한 토베와 비비카. 토베는 정착된 사랑을 원했지만, 자유분방한 비비카에게 토베는 스쳐가는 하나의 인연에 불과했다. 그녀와의 하룻밤을 보낸 토베는 결국 헤어짐을 택한다. 이 순간에 비비카는 평소처럼 토베에게 "가지 마."라고 명령하지만, 토베는 "더 이상은 안 되겠어."라며 결국 방을 나선다.
결국 토베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끈마저 사라져버린 상황.
토베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어머니에게서 두꺼운 공책 하나를 건네받는다. 토베의 기사가 실린 신문, 그녀의 작품이나 인터뷰가 실린 잡지 등을 정성스럽게 오려 붙인 공책은 바로 아버지의 것이었다. 무민을 희곡으로 써서 처음 무대에 올린 날, 연극이 끝나고 토베가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기도 전에 못마땅한 얼굴로 극장을 나섰던 아버지가 실은 애정 어린 눈으로 그녀의 모든 작품을 살펴보고 있었던 것. 토베는 그날 밤, 아버지의 조각품 하나와 공책을 펼쳐두고 와인을 마시며 울고 웃는다.
오랜만에 캔버스와 붓을 꺼내든 토베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린다. 때마침 찾아온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자기 초상화라고 말한다. 그들의 짤막한 대화와 함께 영화는 끝난다.
"제목이 뭔데?"
"시작하는 사람."
토베는 평생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쓰면서 살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비비카와의 헤어짐은 굉장히 중요했다. 헤어짐 이전까지 토베에게 무민은 그저 비비카와의 흐릿한 연결고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비비카가 자신과는 다른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서 떠나보내며 무민에 대한 그러한 마음도 내려놓는다. 그 이후에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확인한 토베는 무민을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온전한 자신의 예술로, 어엿한 하나의 작품으로.
모두가 무민에 강렬하게 이끌리는 동안 정작 작가인 토베는 무민을 거부해왔다. 토베의 아버지가 무민을 두고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며 무시하는 태도가 토베 자신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삶의 굵직한 언덕을 넘을 때마다 그녀가 눈을 돌렸던 것은 무민이었다. 무민은 토베의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투영한, 아름답지만 때로는 아픔과 슬픔이 담긴 그녀만의 숲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알게 된 아버지의 진심은 그녀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토베는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의 경계에서 갈등하고 고뇌했지만, 실은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결과물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비비카라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이나, 아토스처럼 전략적인 사랑이 아닌, 언제든 자리를 지키는 가족처럼 은은하게 데워주는 사랑의 관계도 존재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고, 그 모든 관계 속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으며, 그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라는걸, 토베는 알게 된 것이다.
토베는 더 이상 무민을 거부하지 않는다.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영화 마지막 장면의 초상화는 그녀의 심경을 대변한다. 초반에 그렸던 추상적인 초상화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녀는 이전까지 자신을 '자유롭다'라고 규정하길 원했다. 하지만 진짜 자유란 규정하고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유로우려고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진정 자유로워지기로 한다. 그리고 정해지지 않은 항로를 향해 나아가며 외친다.
"난 인생이란 멋진 모험이라고 믿어요."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건
감상평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무민에는 정말 관심이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릭터라는 점 외에는 아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막상 영화를 보려고 영화관에 딱 앉은 순간 약간 긴장이 되었던 것 같다. 놓치지 말고 잘 봐둬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점차 영화를 보면서 영화 내용이나 의미보다는, 토베 얀손이라는 한 명의 예술가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몇몇 장면들은 공감이 가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사인회를 하면서 침울해하는 장면이었다. 함께 예술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게 보일 때, 그리고 나 역시 예술보단 생업을 택했다는 게 느껴질 때. 그 순간들이 떠올라 나까지도 괴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센 바람에 창이 열리고 토베가 작업하던 무민 원고가 방안에 흩날리는 장면이었다. 토베는 잠에서 깨 이 장면을 그저 멍하니 지켜본다. 예술을 쫓기만 하던 토베에게 예술이 드디어 손을 내밀어 주었다는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것이 실은 다 하나였음을, 내 생각이고 작품이고 세계였음을 깨닫는 듯한 토베의 모습에 함께 벅차올랐다.
영화를 보고 무민보다는 무민을 만든 토베얀손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어떤 글을 써왔는지 궁금해졌다. 이제는 무민에게서 토베 얀손이 겹쳐 보인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하였으나, 솔직하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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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주] 달리는 것만으로도 재밌지만, 그 이상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문보다 재밌다’였다. 인친분들의 평도 많이 보았고, 실제로 지인들과 대화 중에 ‘탈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공통적으로 대부분 아쉬운 반응을 보였다. 이 영화를 시사회에서 만났거나 최대한 빠르게 보았다면 지금 쓰는 이 리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극장을 나오며 네이버 평점은 얼마인지, 소문보다 재밌다고 느꼈으나 어딘가 공허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했다. 이건 그에 대한 나만의 고민이자 리뷰다.
영화가 생각보다 흥미로웠던 첫번째 이유는 ‘늪지대와 달리기’ 전략 덕분이다.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하고 주인공이 생각을 멈추거나 행동을 느리게 하는 순간은 극히 일부 장면만 존재한다. 설령 캐릭터가 침착한 태도를 일관한다 하더라도 상황 자체가 급박하게 돌아가며 약간의 움직임을 눈치채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흐름에 이탈하기 쉬운 전개였다. 주인공이 탈주하고자 숨 가쁘게 달리다가 지뢰밭 앞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인 것처럼, 영화도 동일하게 전반적으로 몰아치는 러닝타임 속에 몇몇 지뢰를 숨겨두고 지그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략 중 늪지대라고 말한 이유도 동일하다. 늪지대에서는 달릴 수 없다. 달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늪에 더 빨리 빠지는 멍청한 행동이다. 주인공이 탈주범이라는 사실을 관객은 시작과 동시에 알게 된다. 덕분에 다양한 상황에서 서스펜스와 스릴을 즐길 수 있지만, 오히려 빠른 전개와 반대하는 자체 브레이크 장치다. 관객이 이미 진실을 알고 있기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불안감과 무거운 압박감이 달리기를 짓누른 것이다. 스스로 발목에 쇠사슬을 묶은 죄수가 열심히 달리기를 하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전략이라 판단했다. 꽤나 어렵게 결정했을 전략이었다.
두번째로 영화가 재밌었던 이유는 연출이다. 영화 내내 얼마나 장면 하나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흔적이 느껴졌다. 남쪽으로 탈주하려는 주인공의 입장을 대변하듯 화면 자체가 세로선 보다는 가로선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눈치채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주인공의 처음 달리기와 마지막 달리기는 굉장히 대조적이고 결과에 대한 의도가 다분하다. 캐릭터들이 바라보는 방향과 시선 자체도 노골적인 수준으로 극명하게 갈리고 있었다. 한예종 영화과를 졸업하신 이종필 감독님의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감독님의 바로 전작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일부분 TV에서 본 적 있으나 전체 관람을 못 했는데, 이번 작품으로 더 궁금해졌다. 다시 ‘탈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자면, 어딘가 유쾌하지만 무서운 연출이 능청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제훈, 구교환과 만나면서 꽃을 피운다. 아쉽게도 이 부분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부분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상 두 배우가 꽤나 맛깔나는 수준 높은 연기를 선보인 것은 분명하다. 캐릭터와 캐릭터를 재창조하는 힘, 연출은 이 작품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쉬움도 존재한다. 앞서 설명했듯, 극장을 나오는데 어딘가 공허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밤새 나를 괴롭혔다. 언제나 그렇듯 곰곰이 생각하니, 이 공허함을 두 가지로 유추할 수 있었다. 첫번째는 평면적 캐릭터의 한계다. 영화 모가디슈가 나름 흥행한 이유는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과 숨 막힐 듯 조여오는 압박감이 시원하게 터진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남북한 주인공 모두 이념이란 경계에서 생존이라는 공동 목표로 변하며 성격이나 행동이 입체적으로 변한다. 반대로 본 작품에서는 성격이나 행동, 목표가 변화하는 캐릭터는 없었다. 이것 또한 북한 정권의 획일성과 사고의 결핍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면 인정이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처음부터 독종이자 능청거리는 주인공과 어딘가 사이코패스 성향의 주연은 점점 익숙해지고 계속해서 더 큰 자극을 주어도 제자리에 우뚝 선 초소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죽음의 이지선다를 몇 번이고 운으로 지나가는데, 성격이나 행동의 변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재미보다는 아이러니했다. 두번째는 떡밥은 미끼가 아니라는 것이다. 떡밥은 고기가 모이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 고기를 낚으려면 바늘에 걸린 미끼를 고기가 물어야 한다. 초반부에는 작은 반전이란 떡밥을 구교환 배우님이 뿌리고, 중반부에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활약한 배우님이 깜짝 등장하며 뜬금없는 떡밥을 뿌린다. 결말부에는 다시 구교환 배우가 해외에서 만났을 인연(?)에 대한 알 수 없는 떡밥을 뿌린다. 애초에 처음부터 커다랗고 맛있는 미끼를 날카로운 바늘에 걸어두었지만, 어지러운 떡밥들 속에서 미끼는 가려질 뿐이다. 분명 쉬어 가는 타이밍도 좋지만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구교환 배우와 이제훈 배우의 과거 이야기를 다시 밟는 것이 나아 보였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필요한 서사인 피아노 형이 왜 피아노 형인지, 어린시절 이야기는 온데간데없으나 개인사, 가정사는 보아야 한다니.
이미 개봉한 국내 영화를 다 보진 못했지만, 그리 나쁘게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흥행한다면 또다시 영화제에서 수상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제훈 배우와 구교환 배우의 합작이 성사됐다는 점에도 만족스럽다. 작년 이맘때 영화 ‘밀수’를 관람하고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당시에 ‘밀수’를 여러 번 재차 관람하시고 좋아하시는 분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본 작품을 관람하고 그분들이 떠오르며 공감했다. 어떤 사람은 영화 전체를 좋아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영화의 특정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색감, 향기, 서사를 좋아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마케팅 상품이자 거대한 자본의 역할이 아닌 예술로 남는 듯하다. 그런 생각과 고민으로 밤잠을 설쳤다. 결론적으로 둘 중 하나는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게 내 결론이다.
P.S 죽어 나가는 조연들 그리고 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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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쳐.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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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결산 - 리뷰는 못 했지만 추천하는 독립영화 7작품 l 상 1편 ( #로그인벨지움 #빛과철 #혼자사는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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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따뜻한 연말 보내고 계신가요!
또 1년이 이렇게 지나가네요...! 어느덧 유튜브를 시작한지도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올해도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죠!
시기가 많이 아쉽긴 하지만, 더 많은 작품들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서
이번 연말결산 영상에서는 제가 리뷰는 못했지만 극장에서 보고 추천드리는 작품들을 준비해보았는데요!
영상이 조금 길어서 3작품, 4작품 나누어서 올릴게요 :)
그럼 내일도 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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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진삼국무쌍> 티저 예고편
한나라 말기, 황건적의 난을 틈타 황궁을 장악한 동탁.
그의 폭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하고.
최강의 장수 여포까지 양아들로 들이며 그 세는 더욱 커진다.
한편 천하를 구하기 위해 영웅들은 뜻을 모으고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원소, 손견 등은
사상 최대 규모의 동맹군을 결성하는데…
영웅들이여, 최악의 적을 무너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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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트레인저> 예고편
낯선 사람을 구하지 마라!
황량한 시골마을,
청각장애 소년 웨슬리는 학교에서 돌아오던 중
총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한다.
그를 집 근처 헛간에 옮긴 후 음식과 약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낯선 남자의 정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