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2-02-03 09:27:27
학교 내부를 관조하기에도 벅찼던 <지금 우리 학교는>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때와 같이 평범하게 흘러가던 효산고등학교의 일상. '온조(박지후)', '청산(윤찬영)', '남라(조이현)', '수혁(로몬)'이 복잡한 애정전선을 형성하는 사이, 은지는 늘 그랬듯이 '귀남(유인수)'과 그 패거리에게 가혹하게 괴롭힘 당한다. 그러나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병찬의 과학 실험실에 감금되었던 '현주(정이서)'가 풀려나면서 효산고등학교의 일상은 파괴된다. 한 번 번지기 시작한 좀비 떼는 삽시간에 학교와 효산 시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하고, 가까스로 좀비들의 공격을 피해 교실로 되돌아온 온조와 청산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좀비들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그러나 '나연(이유미)'을 필두로 좀비보다 무서운 의심과 편견이 교실 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간신히 되찾은 안전마저 사라지기 시작한다.
좀비물은 기본적으로 사회비판적 요소를 갖는 장르다. 좀비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묘사하며 인간 본성에 대해 고민하고, 인간군상의 원인을 잘못된 사회적 시스템에서 찾아 비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각각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좀비 영화, 드라마라 할 수 있는 <부산행>과 <킹덤> 역시 좀비의 출현 원인을 사회적 모순으로부터 포착한다. <부산행>은 주인공 석우(공유)가 다니는 증권회사가 수익에만 집착해 되살린 부실기업이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진실을 통해 성장 중심 사회를 비판했고, <킹덤>은 <아신전>을 통해 조선이라는 국가의 모순이 어떻게 좀비 아포칼립스로 되돌아왔는지를 묘사한다.
특히 좀비에 대한 설정이 어느 정도 확립된 이상 좀비에 관한 드라마 파트의 중요도는 더욱 크다. 바이러스 형태로 전파되고, 소리에 민감하며 인육을 탐닉하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최근 좀비 영화의 트렌드는 수렴해 가고 있다. 따라서 아주 새롭거나 획기적인 볼거리를 보여줄 수 없다면, 좀비물은 감정적 측면에서 관객 혹은 시청자를 흡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동명의 웹툰 원작을 영상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안타깝게도 잠재력을 온전히 꽃 피우지 못한 유망주라고 할 수 있다. 학교라는 장소와 배경, 환경에 좀비물을 접합한 발상과 착안 자체는 (원작 웹툰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흥미롭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방법이 과하고 올드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학교와 좀비를 결합해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학교라는 공간 자체의 구조를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라는 공간 안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좀비와 인간의 싸움에 대입하는 것이다. 우선 드라마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일상적 풍경의 모습을 전환시켜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처절한 싸움을 만들어 낸다. 도서관, 과학실, 음악실, 강당 등 학교의 시설들을 이용해 펼쳐 보이는 액션은 <부산행>에서 KTX 속 액션신을 보는 듯 신선하게 다가온다. 초반 급식실에서의 대규모 감염이나 중반 이후 나오는 도서실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한국 고등학교의 보편적인 구조를 활용한 연출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의 많은 학교는 넓은 운동장과 그 주위를 ㄱ자 내지는 ㄷ자로 감싸는 직사각형 건물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문은 극히 드물며, 문을 제외하면 많은 경우에 울타리나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형태를 띤다. 쉽게 말해서 한국의 고등학교는 근본적으로 군대 건물이나 교도소 건물과 다르지 않다. 즉 탈출하기에 가장 어려운 형태를 띠는 건축물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학교 내에 출연한 좀비는 탈출할 수 있는 경로가 제한된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부지불식간에 습격할 수 있고, 이러한 연출은 좀비물로서 상당히 효과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학교 내부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판옵티콘이라는 사실 역시 엄청난 공포감을 자아내는 데 기여한다.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고개만 돌려도 모든 수형자들의 방을 볼 수 있는 구조의 감옥이다. 한쪽 벽면에 쏠려 있고, 복도 쪽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교실로 가득한 학교는 복도에서 학생들을 감시하기에 최적화된 구조인 것이다. 이는 학교 내부에서 교실에 숨는 데 성공하더라도 언제든 들킬 수 있다는 급박함을 자아내며, 창문과 학교 외벽을 이용하는 등의 다채로운 액션을 가능케 한다.
또한 판옵티콘 형태의 학교 건물은 액션을 단순한 볼거리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교육 시스템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액션에 담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판옵티콘 구조는 수형자가 언제 어디서든 감시당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게 만들고,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든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첫 에피소드에서 학생들이 핸드폰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출하는 범주 내에서 꼼수를 부리는 것, 학교과 학생들이 구조의 최우선 대상이 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가운데 학생들이 학교를 탈출할지 말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과도 오버랩된다. 따라서 학생들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학교 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 속 액션은 몇십 년째 변하지 않는 구시대적이고 근대적인 교육관에 기반한 학교 시스템 그 자체에 대한 저항이자 사투로 볼 수 있다. 단지 그 형태가 좀비와의 싸움일 뿐이다.

더 나아가 학교라는 건축물을 활용한 메시지는 학교라는 공간 속 학생들의 드라마와 더해지면서 그 강도가 더해지기도 한다. 학교는 지식 전달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사회화의 공간이기도 한데, <지금 우리 학교는> 속 좀비와 인간의 사투는 집단 괴롭힘을 비롯한 학생들 간의 갈등 및 충돌과 연계되어 과연 현재 우리 학교가 그 기능을 적절히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작중 좀비 바이러스가 단순한 재난, 혹은 우연한 재앙이 아니라 왕따 피해자로부터 발생한 것만 보더라도 이 작품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다. 또 일행 중 누군가가 좀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과 의심의 근간에 기초생활수급자의 준말인 '기생수'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편견과 차별 심리가 깔려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교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아야 하는 '희수'도 유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드라마는 학교의 사회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와 지식 전달이 더 강조되는 세태를 함께 지적한다. 그 중심에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으나 좀비가 되지는 않은 이른바 '절비(절반만 좀비)' 은지, 귀남, 남라가 있다. 작중 좀비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두려움으로부터 배양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들은 좀비보다도 학교 자체에 더 큰 두려움을 지녔기에 좀비가 되지 않는다.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인 은지는 좀비들보다도 자신의 치부가 주위에 전파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또 좀비가 된 다른 학생들을 내려다볼 때 이번에도 자신은 따돌림을 당했다면서 좀비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자조한다. 가해자인 귀남도 출몰하는 좀비보다 자신이 다른 일진들의 장기짝이나 다름없다는 열등감이 노출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남라도 좀비보다 학교라는 공간을 더 싫어한다. 전교 1등이고 반장이지만 정작 같은 반 학생들과 소통할 줄도 모르는 남라에게 좀비는 오히려 친구를 만들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좀비를 이용해 좀비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는 학교 시스템을 역설적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가까스로 학교를 탈출한 주인공들이 향하는 곳이 폐교도소에 마련된 임시 수용 시설인 것은 아이러니함을 배가한다. 좀비 떼보다도 끔찍한 학교라는 현실로부터 벗어난 주인공들이 다시금 학교와 다를 것 없는 공간에 갇히는 비극의 물레바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결말의 모닥불에 담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수용소를 벗어나 폐허가 된 학교로 다시 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학교라는 공간과 제도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다만 그 학교가 통제받고 감시당하고 사회로부터 묘하게 방치되며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좀비 아포칼립스 같은 학교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효산고등학교 옥상에 피워진 모닥불에는 진정으로 친구를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며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달라는 외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교는>이 보여주고자 하고, 들려주고자 하는 학교 제도에 대한 다양하고도 중요한 목소리는 단발적인 아이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 느껴진다. 드라마가 학교라는 염불보다 사회 풍자라는 잿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좀비물은 사회 비판과 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미 학교과 교육이라는 사회 시스템을 주된 타깃으로 설정한 상황에서 굳이 학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스토리텔링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리 영리한 선택은 아니라고 보이는 것이다. 근래 재난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렉카 유튜버나 개인방송 이야기를 삽입한 것이나 사회 지도층의 모순, 왜곡된 개신교 및 님비현상을 비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덕분에 전형적이고 진부한 캐릭터 클리셰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장점이 될 수는 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면서도 진짜 시민을 생각하는 정치인,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결정에 죄책감을 느끼는 군인처럼 기능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입체적인 캐릭터는 분명 극에 신선함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는 각 부분을 조각으로 쪼개 볼 때의 장점일 수는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분량 및 비중 배분의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총 12개인 에피소드 개수를 절반 내지는 2/3 수준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아무리 고등학교가 배경이라고 해도 로맨스의 비중이 크고 삽입되는 타이밍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점, 비록 해외에서는 한국 콘텐츠의 특징이자 신선한 점이라 평가받는 대목이라 해도 거의 매 회차마다 신파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것 역시 완주를 힘들게 만든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넷플릭스의 2022년 한국 콘텐츠 중 첫 스타트를 끊은 작품이자, <부산행>과 <킹덤>에서 촉발된 한국형 좀비물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실제로 설 연휴 직전에 공개된 후 플릭스 패트롤(FlixPatrol) 월드 랭킹에서 TV 쇼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흥행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확실하게 갈리는 장단점을 고려하면, <지금 우리 학교는>의 성공에 있어서 잠재력을 충분히 발현하지 못한 작품의 내용 및 결과물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P(Poor 형편없는)
선택과 집중의 실패. 학교 안에만 집중했으면 그래도 유의미할 뻔했던.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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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괴의 바다에 울려 퍼지는 세이렌의 노래
이 글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보다 복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복수의 세계는 때론 잔혹했지만 아름다워 몰래 훔쳐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고. 눈을 가리면서도 쉬쉬하며 들여다본 복수들은 우리에게 크고 작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이제 복수를 버리는 카드 마냥 내려놓은 그가 야심 차게 다음 "믿을 구석"으로 집어 든 카드는 사랑인 듯하다. 복수가 끝나고 낫지 않을 것만 같은 상처들만 가득한 마음을 이제야라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뭉툭한 막대기로 마음껏 긁어놓은 모래사장의 흉터도 모조리 끌어안는 바다처럼. 조용하고도 깊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가 늘 그랬듯 모질고 지독한 면으로 가득하기도 하다.
누군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사랑이 없다. 혹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찬찬히 훑어보면. 사실 사랑이란 테마는 언제나 그와 함께였다.
사랑해야. 미워할 힘도 얻는 법이니까 말이다.
언어로 표현하는 사랑의 단절;언어와 사랑을 둘 다 배워가는 두 사람.
사진 출처:다음 영화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을 시어머니로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마블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닉 퓨리를 지고지순한 효자로 만들어버린 엔드게임의 한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기념비(?) 적인 사건이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해석하는 데 있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는지 알려주는 사건임과 동시에. 번역(혹은 통역) 실력이 단어의 뜻만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닌 의역, 혹은 맥락에 있어서도 통달해야 함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 정확히 마음에 와닿게 해야 하는 것. 거기에 승패가 달린 셈이다.
그렇기에 영화가 서래와 해준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언어의 차이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으로 선택한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덕분에 두 사람은 영화 내내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에 대해 답답해하고. 왜 이 말을 지금 자신에게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마음을 심장으로밖에 번역할 수 없는 앱 하나에 겨우 의존해 자신들의 마음을 어렴풋이 전달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비언어적 표현들은 누가 뭐라 해도 사랑임을 말하고 있지만. 온전하고 정확하게 "그 단어"를 내뱉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약간의 원망도. 또는 거기까지 해석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지만 이미 몇 번이고 과대 해석과 오역을 끝낸 채 자신에 대한 마음을 멋대로 키워놓은 상대방의 눈을 봐야 하는 고통도.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완벽하게 메울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을 언어적 장벽에 빗댄 설정은 최선의 방법임과 동시에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래의 노래는 세이렌의 목소리를 닮았다;붕괴의 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세이렌의 노래
사진 출처:다음 영화
서래와 해준의 관계는 세이렌의 신화가 진행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서래는 자신에게 살인자 판결을 받게 하고도 남을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해준을 온몸으로 유혹했다. 나의 바다에 어서 빠지라고 손짓하는 서래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기꺼이 홀린 채. 해준은 붕괴의 바닷속으로 스스로 풍덩.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몸을 던졌다.
이미 한 번 죽어버린 해준은 예전의 모습을 거의 잃었고. 자신의 목숨 값으로 서래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을 맞바꾸었다고 생각했지만. 서래의 노래와 서래는. 마치 이포의 안개처럼 없어지지도 않고 계속해서 해준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서래는 이제 두 번째 해준을 상대해야 했다.(참고 1) 이번만큼은 너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겠노라는 의지와. 그때처럼 자신을 확신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 눈빛을 가진 해준 앞에서. 먼저 흔들렸던 것은 아마도 서래였을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두 사람이 이포를 배경으로 벌이는 마지막 혈전(?)은 서래와 해준이 벼르고 별러 온 13개월 만큼이나 치열하고 가슴 아프다. 어떻게든 상대방의 마음속에 생채기를 내려는 말들은 아프고 날이 서 있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 이 서걱서걱 썰려 나가는 것 같기만 하다.
결국 서래는 마지막 전투(?)에서 진 죗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이포에 바쳐야 했다. 마치 해준이 한 번 빠졌던 붕괴의 바다처럼 유난히 차갑고 거친 이포의 바다에서. 서래가 최후의 순간에 읊조린 노래는 세이렌의 빛바랜 마지막 절규처럼 느껴졌다.
결심의 순간과 만조가 맞아떨어지는 마지막 5분;모든 것을 뒤집는데 필요한 시간 단 5분
사진 출처:다음 영화
서래와 해준은 각각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한 과정들을 겪는다.
무언가를 결심하기까지의 고민. 또는 결심을 미루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와 답보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영화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는 드라마틱 해 보이지 않고. 약하다 못해 자신들의 결심이 무엇인지도 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영화 전반부의 그들은 그렇게 우유부단하고. 때로는 휘청거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연민을 벗어나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속에서도 그 들은 쉽사리 결심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약한 의지들이 기어코 쌓여 이미 발목까지 차올랐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두 사람의 결심도, 그리고 결말을 담은 만조도 가까워졌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결심과 만조의 순간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이 바닷물을 받아 들여야 할지. 혹은 지금이라도 살려달라며 소리를 쳐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만조 때의 바다는 다짐 전의 모든 것을 수면 아래로 휩쓸어 버리고는 시치미를 뗀다.
결심이란 것이 그렇게 크고 단호한 것이며. 두 번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5분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허파마저도 물에 잠기는 것 같은 압도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면서
영화의 중간중간은 사실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늘어진다는 생각을 벗어나 영화가 “길다”라는 생각에 다다르는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마지막 5분을 보고 나면. 이 모든 과정이 왜 반드시 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최후의 5분을 보며. 정말로 말 그대로 숨이 막혔다.
머릿속에서 영화의 앞부분들이 순식간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리멸렬해 보이던 모든 모습은 사실 매 순간 사랑한다고 외치는 두 남녀의 모습이었고.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 위해 발톱을 세운 것이 아닌. 내가 여태 얼마나 아팠는지를 알아달라고 말하는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토록 지독한 사랑 이야기가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영화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7월에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참고 1
세이렌에 관한 일화가 많긴 한데.
어떤 곳에서는 밀랍으로 귀를 막은 부하들과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은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에 반응하지 않고 바다를 무사히 건넜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오르페우스가 세이렌보다도 훨씬 멋진 노래를 불러버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설이던 간에. 자신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세이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오디세우스의 설화를 더 좋아함.
[이 글의 TMI]
1. 한 달 내내 잇몸치료받은 6월.
2.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2킬로가 빠져버림.
3. 그런데 사랑니도 하나 남은 게 올라오기 시작함.
4. 지옥의 6월이 되어버림.ㅠ
5. 다들 더운데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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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광이 피에로 / Pierrot le fou
미치광이 피에로 / Pierrot le f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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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나름 재미있다.
역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른 고다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대책없이 행동하는 사랑에 빠진 막가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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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앤느와 사랑에 빠진 미치광이 피에로.
마리앤느가 자신을 배신하고, 이후 그녀의 존재를 본인이 없애버리니
항상 그녀의 선택에 따라 살았던 페르디낭(피에로)은 그녀의 부재가 자기자신의 부재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결말에 줏대와 신념없는 자기자신, 그리고 마리앤느를 죽음에 이르게한 자기자신이 바보같다고 말하며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에 파란페인트로 자신의 얼굴을 칠하는 장면은 그런 바보같은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마리앤느가 없으니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몰라서 세상을 등지고 숨어버리는 행동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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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색감이나 배경이 너무 예뻐서 프랑스에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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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마리앤느와 페르디낭(피에로)이 베트남전 뮤지컬을 미군들 앞에서 펼치는데.. 이 장면이 상당히 거슬리고 기분이 나쁘다.
마리앤느가 얼굴을 노랗게 칠하고 되지도 않는 외계어로 칭총총거리는데..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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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의 X가 파고드는 무수한 내면의 충동.
희망보다는 절규가 무수히 펼쳐지는 이 영화는 온통 공허한 소음으로 가득하다. 푸른 수염 이야기로 시작하는 소음투성이의 영화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통해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흠집 가득한 잿빛의 건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잿빛의 건물에서 핏빛 가득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공통의 특성을 가지는 이 사건을 파헤치던 다카베는 이 의문에 깊숙이 파고들며 누군가에 의한 살인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대면한다. cure(치료)라는 일념 하에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살인’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끔 만든다. 당신은 누구인지, 당신이 하고픈 이야기는 무엇인지, 아주 많이 사소하지만, 사람의 내면을 아주 깊고 면밀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걸까. 이름도 기억도 없는 그 남자는 집요하게 그 이상을 넘어 다카베에게도 끊임없이 질문을 내밀지만, 그 질문은 쉽사리 닿지 않는다. 마미야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솔직한 그의 속마음까지 새어 나오게 한다. “당신은 저놈들과 달라. 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잖아.” 다카베는 해결되지 않은 큰 사건에 빠져들면서도 안과 바깥을 구분하며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간다. 와이프가 빨래 없이 돌린 텅 빈 세탁기를 끄고 식탁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사건이 없으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빌 것만 같은 그에게 진정한 편안함이 다가온다. 영원히 텅 빈 상태로 남아도 일시적 해방이 유일한 치료법이 된다. 하지만 그는 돌아갈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치유되지 않는 잘못된 방식을 전도사가 이용함으로써 이 망가진 세상의 망가진 치료제를 끊임없이 퍼뜨린다. 미지의 X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잠식하듯 무수한 공포를 가져다준다. 눈으로 보여주는 공포보다는 빠져들듯 관객을 장악하는 이 영화는 빛보다는 어둠에 너무나도 쉽게 스며드는 사회를 비추고 있다. 금방 찍은 듯한 느낌으로 특유의 서늘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배우들과 영화 전반의 이야기를 극대화한다. 구름 같은 분위기는 금방 사라지고 스산함만이 존재한다. 끝끝내 사라지지 않은 치료법이 다시 다른 이에게 손을 뻗치며 또 다른 순간을 만들어내어 결국 스며들 수밖에 없는 마지막을 장식하며 모두의 목을 조여 온다. 찰칵-뚝뚝-치 이익,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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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틀 포레스트>
<리틀 포레스트>
" 심심한데 맛있는 영화 한 편 보고 싶을 때 "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 <리틀 포레스트>. 사실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진 영화를 봤지만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아 끝까지 보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리메이크된다고 했을 때 보러 가려고 표까지 끊어놨건만 밀려드는 일이 바빠 보지 못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차차 잊혀 간 작품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 이런저런 영화를 보다 보니 자극적인 맛에 질린 때가 오고야 말았다. 액션은 너무 정신없고, 드라마는 너무 마음 아프고, 로맨스는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껴두었던 이 영화가 떠올랐다. 주저 없이 영화를 틀고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보았다. 103분이라는 적당한 러닝타임 동안 숨소리만 내고 영화를 즐겼다. 평화롭고 단조로운 아주 진한 여행을 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 이 영화를 특별하다고 정의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다만, 기존에 있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영화였다. 정말 <리틀 포레스트>만의 색깔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꽤 슬픈 일이다. 꿈을 위해 도시로 나선 사람들이 각박함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온다는 건 그리 현대사회가 가진 슬픈 이면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속 미디어는 귀농에 대한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장면들로 가득 채워 도시와 대비되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마치 그곳을 현실처럼 꾸며놓는다. 하나, 20년간 시골에서 자란 내가 생각하기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시골에서의 삶이란 영화만큼 완벽할 수 없다. 그렇기에 <리틀 포레스트> 완벽한 대리만족의 영화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어보지 않았기에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은 이럴 때 이점이 된다. 그저 낭만을 편집해 붙여놓은 장면들은 간접적으로 겪어 보기에는 행복한 꿈이지만, 현실은 이상적인 판타지가 아니다. 감독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조금 언질을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다.
그러니까, 현실성은 많이 떨어진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고 몇몇 관람객들도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틀 포레스트>가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아마 '힐링'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따듯한 난로를 켜고,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요리해먹고, 친구들을 만나 그저 수다나 떠들 수 있는 그런 환경은 현대인들이 가장 꿈꾸는 이상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도시로 모여든다. 도시에서의 삶은 다친 마음과 허무한 나날뿐이다. 도시를 떠나올 때 혜원(김태리 분)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아르바이트로 연명해가는 삶이란 결국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온 고향에서 누구에게도 재촉받지 않고 오로지 먹고살기 위한 것에만 집중한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괜찮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 이 단순한 문장으로 영화는 진짜 소중한 삶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무작정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요리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야' 맞는 말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음식으로 유명한 영화이다. 음식을 담아내는 컷들이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감독이 마치 어떻게 찍어야 예쁘게 나오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음식의 조리과정이나 맛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영화를 찾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음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정성을 다한다는 것, 온 마음을 전부 내비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 속 음식에 관한 의미는 깊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길거리에 파는 컵밥 같은 게 아니라 직접 수확한 재료로 시간을 들여 음식을 해 먹는다는 것은 그동안 잃어버렸던 삶의 본질적인 의미에 관한 '채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무하고 공허하기만 한 도심 속 삶에서 내 손으로 만들어본 적 없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보는 것. 음식은 사계절의 시간을 따라가며 마음속 엄마(문소리 분)를 불러일으키고, 때를 기다려 하루를 보내도록 유도한다. 영화 속 음식은 곧 혜원의 내적 감정을 좀 더 활성화하는 장치였을 것이다.
먹는 것으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을 낸다면, 먹방과 다를 것 없는 한 편의 영상으로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본질은 이야기에 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영화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는 스토리면에서도 타 영화들과 비교되지 않는 탄탄한 구성을 선보인다. 서울살이에 지쳐버린 딸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오래전에 떠난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감독은 영화 초반에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그랬다' 식으로 이야기를 군데군데 던져두고 사건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는다. 관객은 백 스토리를 통해 '그랬겠구나'하고 암묵적인 내용만을 파악할 뿐이다. 하나, 놀랍게도 이러한 전개가 큰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읊조리는 주인공을 따라 천천히 가다 보면 어느새 결말에 당도해있다. 삶 속 여유에 대한 메시지를 이야기해주기 위해 비교적 느리게 스토리를 전개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마치 지루한 전개에 답답해하는 관객들에게도 여유를 가져라 하고 말하듯이 말이다. 유년시절의 주인공과 현재의 주인공, 시간의 순서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 이유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여백이 많은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극의 호흡을 느리게 다듬어 관객에게 쉴 시간을 주는 그 순간은 극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이러한 여백을 만드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여유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아름다워야 하며, 셋째는 흐름을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나가야 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이러한 여백의 공간을 천천히 메워나간다. 계절이 되었다가, 재료가 되었다가, 마음이 되었다가 말이다. 겨울을 시작으로 이어가는 계절 컷은 시간의 진도를 맞출뿐더러 각 계절이 가진 색과 향을 그대로 담아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과 초록색으로 도배된 봄, 찐한 햇빛을 머금은 여름과 갈색빛의 가을까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이해시키는 여백들은 영상미와 더불어 영화의 품질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주위 인물인 재하(류준열 분)나 은숙(진기주 분)의 모습을 보면 혜원을 만날 수 있다. 재하는 자존감을 갉아먹는 회사에서 뛰쳐나와 농사라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고, 서울의 삶을 꿈꾸는 은숙은 현실과 타협하고 고향에서 살아간다.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현실의 모든 삶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돌아와 그럭저럭 살아라가 아닐 것이다. 혜원이 선택해야 할 삶의 방향을 친구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적당히 괜찮게 타협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벗어나고 진짜 자신의 삶 근본으로 돌아올 것인지 말이다. 혼란스러운 혜원의 마음이 남 일 같지 않은 건, 20대라는 배경과 인물 설정이 현대 사회 취업준비생인 20대들과 지나치게 닮아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그냥 휘둘리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혜원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고한다. 때문에, 감독은 재하의 입을 통해 이야기한다. 혜원은 지금 아주심기를 준비중일 거라고. 아주 쓸쓸한 겨울 될 테지만 좀 더 단단해지고 견고해지는 시기가 오게 될 거라고 말이다. 당신도 아주심기를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
앞서 말했듯 영화가 단순히 귀농의 판타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다소 머니까 말이다. 임순례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만의 공간에서 당신만의 휴식'이 아닐까. 어린시절에 살았던 고향이 혜원에게 하나의 '공간'이 되었듯이 당신 또한 그러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집이 될수도 있고, 카페가 될수도 있고, 취미가 될 수도 있다. 오로지 당신의 공간에서 당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 성장하고 바뀌어나가는 것. 이러한 성장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근본을 찾아낼 것을 강조한다. 또한 감독은 20대 혜원의 모습을 통해 당신의 휴식을 권고한다. 바쁜 도시생활에서 벗어난 혜원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삶은 늘 뜻대로 되지 않고 버겁기만 하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서서 똑같은 위치에 맴돌고 있다면 그것만큼 비극적인 청춘이 없을 것이다. 영화는 말한다. 사회적 성공이나 명예에 집착하기보다, 혜원의 '배가 고프다'는 말처럼 인간의 기본 욕구에 좀 더 충실하라고.
무작정 좋은 영화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고, 너무 영상미에만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 사회 영화는 너무 맵고 짠맛에 길들여져 있다. 이것이 꼭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자극적인 것들로는 마음을 채우기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흥미롭지 않으면 관객들이 봐주지 않으니까, 소비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의 <리틀 포레스트> 열풍은 반가우면서도 낯설었다. 맵고 짠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순한 맛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컷들의 연속, 영상미가 돋보이고, 카메라를 통해 완성되는 요리와 맛까지 ... 현대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영화처럼 부작으로 나누어 상영했다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동시에 한 편으로 끝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만한 여지를 주었구나 라는 만족감이 든다.
출처 : <리틀 포레스트>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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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가정'이란 실제하는가?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참석한 영화 <노웨어 스페셜>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21세기는 아직도 '정상 가족'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상 가족'이란 중산층 이상의 이성애자 부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을 한다. 우리는 숱한 매체들에서 그린듯한 4인 가족에 대한 묘사를 접하곤 하지만, 이것이 급변하는 인간 사회와, 그만큼 다양해지는 가족의 형태를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21세기의 인간들은 여전히 '정상 가족'이 아닌 가족들에게 배타적이며, 그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안고 가야할 불운이자 과제이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에서는 이러한 '정상 가족'의 범주에 들지 못한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나의 이름은 존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네 살짜리 아들인 마이클이다. 이들의 형편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아빠는 프리랜서 창문 청소부에 러시아에서 온 엄마는 일찍이 도망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홀로 남은 아이가 무슨 수로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을까. 설상 가상으로 존은 병으로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인 존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위해 새 가족을 선물하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존과 마이클의 여정은 시작된다. 가장 부유한 인텔리 가정에서부터 주머니 사정은 넉넉치 않지만 형제가 많아 복작거리는 가정, 그리고 홀로 아이를 기르고 싶노라 이야기한 여인까지, 그들은 수없이 많은 가족들을 대면하지만 하나 뿐인 소중한 아들을 보내려고 하니 어느 곳 하나 눈에 차는 곳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존 역시 어릴 적에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던 과거가 있었으므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존은 고뇌한다. 어떤 것이 가장 마이클을 위한 선택일지에 대하여. 그는 아이에게 결핍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이는 아버지와의 이별이 예고되어 있으므로.
작품 속에서 나타난 다양한 부모들의 모습은 저마다의 특색이 있다. 어떤 부부는 비록 부유하지만 아이의 개성을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의 야심에 맞추어 기르고자 하고, 또 다른 부부는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지나치게 많은 아이들을 수집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한 부부는 아이를 낳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입양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가 하면, 또 다른 부부는 마치 꼭두각시 인형 혹은 애완동물처럼 아이를 제 입맛에 맞추어 기르려는 것 같다. 결국 존이 고른 것은 소위 '정상 가족'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이성애자 부부가 아니라, 진실로 아이를 사랑하고 그가 원하는 바에 맞출 준비가 된 (예비)한부모 여성이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가 그토록 고수해왔던 '정상 가족'의 판타지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부모 아래 '평범한' 형제자매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유복하고 영리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고 한들 그것이 아이의 행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많은 형제자매가 있는 것이 아이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고도 볼 수 없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그러한 이성애자 남녀로 구성된 부부 아래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반드시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누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가족의 형태가 아니라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아이가 정말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아이가 원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존은 좋은 아버지였다. 비록 환경은 유복하지 못했고, 아이는 언제나 바쁘고 아픈 아버지로 인해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존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존과 마이클에게 유일한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그 둘이 남들보다 이른 이별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 역시 영원한 비극은 아니리라. 존은 언제나 마이클의 주변에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므로.
영화는 진솔하지만 솔직하게 현대 사회의 아픈 면을 꼬집고, 무엇이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마이클과 이별하는 존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아들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그 과정이 너무나 덤덤해서 도리어 가슴 아프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이런 슬픔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새로 자라날 행복을 위해 새 길을 닦는 일이기 때문이다. 존이 마이클을 위해 새로운 시작을 선물하려고 한 것처럼, 우리도 무언가 새로운 시작으로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어떨까? 하나의 온전한 부부에 집착하지 말고, 어떤 경제적 풍요와 빈곤에 눈길 주지 말고, 그것이 우리를, 인간을 어떻게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다. 당신은 가장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한 곳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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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왁킹과 농악의 이질적 결합으로 혐오를 비틀다
7★/10★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포즈〉는 북미 퀴어 하위문화의 유산인 왁킹 댄스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한편 트랜스젠더이자 드래그 아티스트인 모지민의 예술과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에는 그녀가 발레복을 입고 고향 집 경운기 위에서 포즈를 취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공작새〉를 보며 이 두 작품이 떠오른 이유가 있다. 〈공작새〉의 주인공 신명은 트랜스젠더 왁킹 댄서다. 동시에 호창농악(고창농악)과 굿을 계승하는 집안의 ‘장손’이다. 퀴어 문화와 전통적인 것의 이질적 조합. 〈공작새〉는 자칫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을 너끈히, 그리고 아름답게 해낸다.
신명은 간절하다. 1천만 원 상금이 걸린 왁킹 댄스 대회 결승을 앞두고 아버지의 부고 전화가 오지만 그녀는 신덕길(아버지)의 죽음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절연한 지 오래인, 이제는 남인 남자의 죽음보다 대회 상금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수술하지 못한다면 신명은 군대에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는 패배한다. “너만의 컬러가 없어”라는 심사평과 함께. 신명은 수술비를 마련할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때마침 신덕길의 제자인 우기가 신명에게 말한다. 신명이 신덕길의 추모 굿을 하면 유산을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신명은 어쩔 수 없이 죽을 만큼 떠나고 싶었던 고향으로 돌아와, 마찬가지로 죽을 만큼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과 마주한다. 트랜스젠더 왁킹 댄서가 작고한 호창농악 전수자이자 절연한 혈연의 추모 굿을 해야만 하는 기묘한 상황이다.
영화에는 신명이 왁킹 댄스를 추는 장면과 굿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서로 전혀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던 두 장르의 예술이 여러 사건과 신명의 몸을 경유해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든다. 마침내 엔딩에서 신명이 왁킹과 굿을 결합한 추모 굿을 할 때, 지금껏 그녀가 예술가로서 결여한 ‘컬러’와 함께 전통의 색다른 계승이 완성된다.
〈공작새〉는 개성 있는 예술가의 탄생과 변주를 곁들인 전통의 계승 과정을 짜임새 있게 채운다. 핵심 서사는 모두가 인정하는 호창농악의 후계자가 성별 정체성 문제로 완전한 외부자가 된 후, 다시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비난은 대개 ‘타고난’ 성별을 거부한다는 데에 대한 사회문화적 거부감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오래된 혐오의 문법을 비튼다. 신명이 호창농악 전수자라는 ‘타고난’ 운명을 트랜스젠더로서 되찾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신명의 할아버지이자 덕길의 아버지가 신명과 같은 존재였다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여성스러운’ 행동으로 ‘몸을 팔며’ 예술을 전수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밑에서 손가락질받으며 성장한 덕길은 자기 아버지와 같은 자식을 보면서 갈등하고 만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명이 ‘여자처럼’ 굴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받을 상처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는 혐오의 논리와 더불어 감정마저 비틀어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끔 한다.
영화 중반부, 신명이 무릎 꿇고 엎드린 채 냇가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고 있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신명에게는 오히려 물속이 숨쉬기 편안하다는 듯 오래도록 이어진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성별 이분법이 당연한 세계, 모두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계에서 신명이 숨 쉴 공간은 없다. 때문에 타인이 숨 쉴 수 없는 공간에서는 역설적으로 신명만이 호흡할 수 있다. 그런 세상에서도 신명은 떳떳하게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간다. 사촌 동생이 성소수자인 것을 감춰주기 위해 억울한 상황에서 누명을 쓰는 신명에게 사람들은 ‘부끄럽지도 않느냐!’며 비난한다. 하지만 정작 신명에게 부끄러운 것은 남들의 손가락질이 아니라 자신이 고통스레 경험한 적대적 세계에 사촌 동생을 던져버리는 일이다. 타인은 신명의 것이라 오인된 행위에 손가락질하지만, 신명은 근거 없이 비난받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공작새〉는 한 예술가가 자기 개성을 찾아나가는 이야기인 동시에 소수자의 윤리가 품은 가능성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얼핏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훌륭하게 엮어낸 영화의 울림은 신명이 추모 굿을 하는 강렬한 엔딩신에서 덕길의 의지를 담아 활활 불타오르는 신성한 나무를 닮아 뜨겁고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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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A, 스왓, LA 형사가 출동하면 생기는 일 [원조코미디/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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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워크 먹여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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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4」 시리즈 속 모든 상징과 철학 뽀개기 #01 | 매트릭스 인문학 리뷰 | 매트릭스 리저렉션 리뷰 | 매트릭스4 리뷰 | 매트릭스4 해석 | 매트릭스 리저렉션 해석 |
?《매트릭스4 리저렉션》(2021) 영화리뷰 / 매트릭스4 리저렉션 리뷰
《매트릭스 1~3》 인문학 결말포함 영화리뷰 #1
*후속영상
#2 [현실은 진짜일까?] https://youtu.be/wfvqm5HBRb0
#3 [빨간 옷의 여자] https://youtu.be/X_fQcoytk70
#4 [오라클은 악마다?] https://youtu.be/fLgWf7NWkn8
#5 [스미스는 왜 졌을까] https://youtu.be/Uas0KZDCQec
- 매트릭스1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댄 크라치올로, 캐롤 휴스, 리차드 미리쉬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외
제작사: 실버 픽처스,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아츠 엔터테인먼트, 그라우쵸 II 필름 파트너쉽
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미국 1999년 3월 31일, 대한민국 1999년 5월 15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6300만 달러 ~ 6500만 달러
상영 시간: 136분
북미 박스오피스: $171,479,930 (1999년 9월 23일), 월드 박스오피스 $463,517,383 (2003년 3월 10일)
상영 등급: 12세 관람가
- 매트릭스2 리로디드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38분
북미 박스오피스: $281,576,461 (2003년 10월 30일)
월드 박스오피스: $742,128,461 (2011년 11월 25일)
- 매트릭스3 레볼루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각본/원작: 워쇼스키 형제
제작: 조엘 실버, 비키 포플웰, 스티브 리처즈, 필 우스터하우스
음악: 돈 데이비스
촬영: 빌 포프
편집: 자크 스탠버그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앤 모스, 휴고 위빙, 글로리아 포스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해럴드 페리노, 모니카 벨루치, 랑베르 윌슨, 지나 토레스, 랜들 덕 김, 예성
제작사: 미국 빌리지 로드쇼 픽처스, 미국 실버 픽처스, NPV 엔터테인먼트, 하이네켄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호주 로드 쇼 필름 디스트리뷰터스
개봉일: 미국 국기 2003년 5월 15일, 대한민국 국기 2003년 5월 22일, 호주 국기 2003년 5월 16일
화면비: 2.39 : 1
제작비: 1억 5,000만 달러
상영 시간: 129분
북미 박스오피스: $139,313,948 (2004년 2월 26일)
월드 박스오피스: $427,343,298 (2004년 3월 28일)
- 매트릭스4 리저렉션 영화정보
장르: SF, 액션
감독: 라나 워쇼스키
각본: 라나 워쇼스키, 알렉산드르 하몬, 데이비드 미첼[1]
제작: 라나 워쇼스키
음악: 조니 클라이맥, 톰 티크베어
촬영: 존 톨
출연: 키아누 리브스, 캐리앤 모스 외
제작사/배급사: 미국 워너 브라더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미국 2021년 12월 22일, 한국 12월 22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0분
간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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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마녀식당으로 오세요> 티저 예고편
[2021년 7월 16일, 티빙 공개]
대가가 담긴 소원을 파는 마녀식당에서 마녀 희라(송지효)와 동업자 진(남지현), 알바 길용(채종협)이 사연 가득한 손님들과 만들어가는 소울 충전 잔혹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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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예언자> 메인 예고편
4월 2일 극장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