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티2022-01-09 19:26:56
펜데믹 시대, 모두를 위한 음악 선물 <씽2게더>
2022년 새해를 활짝 열어준, 올해 첫 애니메이션 <씽2게더>를 만나고 왔다.
<씽2게더>는 지난 2016년 개봉해 국내 17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애니메이션’이라는 수식어에 완전히 자리 잡았던 <씽>의 6년만의 속편이며 전편 개봉 당시 매튜 맥커너히, 리즈 위더스푼, 스칼렛 조핸슨, 태런 에저튼 등 화려한 성우진으로 팬층을 두텁게 쌓았었다. 이번 <씽2게더>는 1편의 오리지널 성우진에 더해 가수 퍼렐 윌리엄스와 할시까지 합세하며 최강 성우진 군단을 한층 더 단단하게 구축했다. 이번 <씽2게더>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아낌없이 활용을 잘한 작품이다. ‘노래’와 ‘춤’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다채로운 방면으로 승화시키는데, 우리가 흔히 뮤지컬에서 보던 세트와 의상, 특수효과, 무대 장치들에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있는 힘껏 녹였다. 각 캐릭터마다의 설정과 사운드트랙에 맞게 그래픽 효과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더욱더 영화의 즐거움을 한층 높여준 느낌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도시 ‘레드쇼어 시티’에 대한 표현도 정말 센스있다. 가지각색의 건물들과 네온사인, 아기자기한 도심 속 풍경들의 포인트들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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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2게더>는 ‘무한한 즐거움’이라는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자신 있게 설득한다. 고로 애니메이션의 ‘비현실적’이라는 의문을 완전히 없애버린다. 개인적으로는 소소하게 드러내는 단점들을 덮을만한 장점 요소들이 더 많은 작품이었다. 사실, 애니메이션에 ‘질주’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질주하는 즐거움’이라는 표현이 정말 알맞다. 눈과 귀가 꽉 차다 못해 벅찰 정도로 신나고, 유쾌하고, 흥겹다. 아무래도 <씽> 시리즈의 장점은 그동안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히트곡들을 다시 재해석한다는 점인데, 1편의 케이티 페리, 샘 스미스, 테일러 스위프트, 존 레전드, 엘튼 존의 노래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빌리 아일리시, 아델, 숀 맨데스, 콜드플레이 등 다채로운 팝스타들의 노래로 꽉 채워졌다. 평소 팝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노래가 어떤 식으로 재탄생했을지 눈 여겨 봐도 좋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씽2>에서 ‘Gather’이라는 단어가 붙어 <Sing Together>가 되었다. 전 세계적인 펜데믹 시대에 함께 모여 노래한다는 것, 함께 열기를 느낀다는 것에 의미와 그리움을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씽2게더>는 ‘공연’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넘쳐나는 요즘 같은 펜데믹 시대에 선물과도 같은 영화가 될 것이다. 이제는 ‘음악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씽> 시리즈의 활약을 계속해서 기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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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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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 앤 몬스터스 후기
넷플릭스 영화 러브 앤 몬스터스 후기
넷플릭스에 들어가자마자 등장하는 예고편은 처음 보는 작품이라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그 작품이 인기 Top 10에 들어가 있다면 더욱 궁금해진다.
<러브 앤 몬스터스>도 그런 영화였다.
어느 날 갑자기 영상이 화면을 채웠고, 인기 순위에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릴리즈 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였다.
오랜만에 해외 영화가 인기 순위에 올라가 있어서인지 보고 싶어졌다.
다만 예고편을 보면서 무언가 아동용 같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다.
결론적으로 아동용 영화 같다는 느낌은 맞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Positive.
1.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왔을 때 펼쳐진 자연 환경이 아름답다.
마치 자연환경 홍보 영화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드넓은 자연을 아름답게 담고 있다.
2. 지구가 멸망한 이유로 등장하는 설정도 독특했다.
3. 괴물들의 모습도 적당히 괜찮다.
너무 끔직하거나 잔인하게 나오지도 않고, 너무 코믹하게 나오지도 않는다.
아동용 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곤충과 갑각류, 파충류들이 괴물로 변했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았다.
4. 영화가 기본적으로 밝고 가볍다.
5. 애인을 찾아 떠나서 애인을 만났을 때의 상황 설정도 나쁘지 않았다.
6. 액션 장면은 괜찮은 편이다.
괴물과의 액션은 적당히 속도감과 긴장감을 준다.
7. 주인공인 딜런 오브라이언은 캐릭터를 잘 연기하고 있다.
Negative.
1. 인류를 전멸시켰다고 하기에는 괴물들이 그렇게 강해보이지 않는다.
2. 괴물들이 넘쳐나는 지역을 주인공은 너무 쉽게 지나간다.
3. 보통 이런 영화가 그렇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너무나도 쉽게 찌질이에서 전사로 바뀐다.
4. 마지막 괴물과의 싸움 부분은 완전 아동영화다.
5. 노인들만 있는 야외 기지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괴물들이 가득한 지구라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6. 중간에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장면들이 꽤 많이 보인다.
총평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눈은 시원하다.
이야기는 예상 그대로이고 중간중간 지루하긴 하지만, 가볍게 볼 수 있는 TV용 영화이다.
러브 앤 몬스터스 평점 5.5 (작품 6, 재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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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스완 (2011)
-이 글은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블랙스완>은 이야기 자체의 매력보다도 이야기를 영상으로 다루는 방식이 강렬한 영화다. 영화 <블랙스완>은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과 고뇌, 그리고 자아의 분열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방식이 압도적이다. 믿을 수없는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하는 한편, 16mm의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후 디지털화하여 영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상의 노이즈들과 극적인 긴장감을 더하는 웅장한 ‘백조의 호수’, 흑조와 백조를 오가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한데 섞인 이 영화는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괴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렇듯 압도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영상으로 짜여진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완전히 영화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는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강렬한 방식이 눈에 띄는 영화로, ‘완벽’이라는 허상의 것을 좇는 개인의 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다소 앞서가는 것이거나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통해서 완벽주의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이 너무도 강해서 이 영화의 지엽적인 메세지에 불과한 완벽의 추구와 그 허무에 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화두를 뜯어 고치지는 않겠지만, 다소간 확장시키게 될 지도 모르겠다.
1. 보이지 않는 고통들을 드러내는 <블랙스완>.
영화 <블랙스완>이 다루는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은 ‘나탈리 포트만’이 <블랙스완> 시사회 인터뷰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발레 무용수들이 겪는 내적 고통과 유사하다. 아름다운 발레 무용수들의 무대 위 모습과는 달리, 토슈즈를 벗으면 드러나는 성하지 못한 그들의 발과 한번의 무대를 위한 압도적인 연습량으로 닳고 닳은 깡마른 그들의 몸은 그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들이다. 한편, 예술가들이 하나의 보기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쥐어짜내는 고통 역시 보이지 않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고통을 모두 짊어진 ‘니나’를 통해서 두 개의 고통을 포개어 놓는 것으로 그 고통의 상징성을 강화한다. 이렇듯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서 모티브를 받아 구상되었고, 감독의 누이가 발레 무용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술가와 발레 무용수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의 상징을 함께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우연치 않게 두 가지의 상징이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우연이고 필연이고를 떠나서 상징을 중첩시켜 인물의 고통을 강화한 이 영화의 각본은 굉장히 현명했고, 특별하다.
1-2. 분신(Dvoinik)과 분열된 자아.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 Dvoinik>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나, 그것과는 상당 부분 다르다. <분신>속 자아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한 인간의 덧없는 파멸만을 그려내어 탐구가 다소 얕은 반면, 영화 <블랙스완> 속 분열된 자아는 완벽주의에 이르고자 하는 예술가의 심리적 고통과 함께 파멸과 성장의 이미지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의 주체의 역할을 맡은 ‘백조’는 그동안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두 자아 모두가 니나의 자아라는 점이다.
영화는 발레무용수가 자신이 가진 것 이상(以上)의 연기를 소화해내기 위해 이제껏 가져왔던 자아를 버리고, 백조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자아를 꺼내어 자신의 이상(以上)에 이르고자 한다. 물론 그 이상(以上)의 상태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적인 상태는 아니기에, 이 발레 무용수는 완벽한 예술을 위하여 이전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과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결과적으로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흑조)과 이전까지 유지해온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백조)은 두 가지의 자아로 나타나며, 두 자아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백조’는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다.
영화 <블랙스완>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두 자아의 대결을 다루며 이야기의 장력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또 한편으로 ‘니나’의 자아가 분열되어가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각적 긴장감을 더하여 ‘시각매체로서’ 영화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2. 완벽이라는 이름의 허상
지금 현재, 존재하는 존재들은 모두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것들은 정해진 운명이 없기에,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관한 이론으로 현존재를 해석하자면, 지금 나의 무수히 많은 선택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무수히 다른 나를 만들기 때문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 중 우위성을 차지할 수 있다. 반면, 시간에 얽매어있는 현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이 무수히 많은 가능함이라는 결과 자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간대에 놓인 무수히 많은 선택지중 하나의 선택지를 택하면, 다른 모든 선택지가 닫혀버리기 때문에, 현존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얽매어있는 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을 뜻하는 단어 Perfect {per(모두) + fectio(하다)} 는 시간의 속성에 얽매인 존재들은 도저히 이를수 없는 허상의 단어이다.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간은 헛된 일일 수밖에 없으며 완벽을 말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거짓이자 자기 기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지나친 완벽의 추구는 허상의 것을 끊임없이 좇는 일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가 보여주듯이, 완벽한 연기를 위해 겪는 고통과 자멸, 그리고 전락을 암시하는 결말은 허상의 것을 추구하는 행위의 덧없음과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고통을 엿볼수 있다. 그렇다면, 완벽을 추구하는 일이란 결과적으로 한없이 허무할 뿐인가?
3. 완벽이라는 환상의 추구와 그 당위성없는 행위의 당위성.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은 우리가 짊어진 숙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해소되지 않을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가 완전해지고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가는 것, 그 것이 결과론적으로 허상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마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수메르의 바빌로니아에서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여행을 떠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동시대 바빌로니아인들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왕이자 “깊은 곳을 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여정이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해도, 그 과정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앞서 말했듯이 완벽은 허상의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의 추구. 절대로 구해지지 않을 것을 구하는 이 일은 어떤 당위성을 얻게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삶의 당위성을 그 목적지에서 찾는 그 전제가 애초에 들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시작하자. 삶의 목적지는 결국 죽음이다. 완벽한 끝. 삶의 문제를 벗어나, 모든 목적은 그저 ‘완벽한 끝’이므로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삶의 의미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오해되는 전제를 깔아놓고, 결말만을 두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모든 행위는 당연 무의미하고, 당위성을 잃는다. 그렇기에, 완벽의 추구 또는 이상의 추구,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이룰수 없는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 당위성 없는 행위의 당위성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각 개인의 몫이므로, 나는 다만 삶의 의미란 의미를 찾아가는 삶속에 있다고 말할 수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단순히 추구하는 것이 아닌 집착하는 것이다.
4. 추구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블랙스완>의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지만, 그 과정속에서 “깊은 곳”에 닿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니나가 완벽한 흑조가 되어 마주하는 것들은 혼란과 고통, 전락, 그리고 결과에 대한 구체적이지 못한 자기만족―나는 완벽했어, 그 모호한 한마디―에 그친다. <블랙스완>의 니나는 결과적으로 완벽에 집착할 뿐인 광적인 예술가의 군상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보자면, 그녀는 흑조가 되기 이전부터 기술적으로 완벽한 무용수였고, 이미 ‘백조’의 순수함과 순종 결백 등에 집착하고 있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다 큰 그녀가 어머님의 말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모습이나 지나치게 순수한 모습들은 그녀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흑조의 날개가 자라나는 환각을 보는 장면이나, 자신의 피부에서 흑조의 깃털이 돋아나는 환각을 보는 것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여 다른 모든 자아와 의지를 억누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이미 백조에 대한 심한 집착과 몰입을 보여준 예술가 니나가 ‘흑조’ 역할을 맡으며 흑조에게 집착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아에 또 다시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니나가 예술가로서 완벽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무대는 완벽했다. 하지만, 백조의 추락과 백조의 죽음을 의미하는 마지막 엔딩씬은 광기어린 무용수의 집착이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파멸을 야기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읽힌다. 물론, 이전까지 니나를 가두었던 백조의 이미지가 죽어버리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니나가 ‘성장’한 것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게 감독의 의도이고, 옳은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존재의 공허함을 채우는 과정에서 이전까지의 미숙한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 완전한 존재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의 결핍된 모습들마저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결핍된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니나가 백조를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해하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은 니나 자신을 가두는 백조의 틀을 깨버리는 일인 동시에 니나의 미덕이었던 백조의 모습들마저 버리는 것으로, 흑조로 성장하기보다는 흑조로 ‘변이’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니나가 매번 이렇게 변이만을 반복한다면, 그녀는 끊임없이 이전의 자신을 살해하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견뎌내야만 할 것이고, 이 편집증적 고통은 성장통의 고통과는 다르다. 그 고통은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동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스완>은 한 예술가가 성장해가는 서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블랙스완>의 니나가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의 광적이고 고통스러운 집착일 뿐이다. 다만 <블랙스완>이 다루는 이야기의 방향성과는 상관없이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졌으니, 이 영화의 이야기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작품의 완성도는 아주 높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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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의 권력과 폭력성을 직면하다
작품을 수입하여 부제를 붙이거나 새로운 제목을 붙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제목은 작품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선택은 작품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무척이나 어울리는 '분열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한국의 극장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는 어떤 ’분열‘이 벌어지고 있는가? 일차적으로는 ’내전‘으로 인한 분열이다. 한 나라의 국민임에도 갈라선 이들. 이들이 어떤 이념으로 인해 갈라서게 됐는지에 이 영화는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한 인물이 기자인 주인공과 동료들을 향해 묻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Which kind of American are you?”. 이 질문을 던진 뒤, 그의 총구는 아시아 출신 미국인들에게 먼저 향한다. 이차적으로는 ‘종군사진기자’들의 분열이다. 주인공인 이들은 내전 상황에서 내면의 분열을 겪으며, 이 작품은 후자에 초점을 둔다.
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사진으로 다뤄내어 사람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진 인물들로 보인다. 그렇게 이들은 ’Great photo’를 찍기 위해 현장을 누빈다. 내전 상황 속에 펼쳐지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들. 그 순간 카메라를 들이밀어 극적인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총탄이 오가고 피가 솟구치는 순간들이 화면에 연속적으로 보여진다. 전쟁 영화에 어울리지 않게 울려퍼지는 파티에서나 나올법한 음악은 우리의 의식을 혼란하게 만든다. 그 현장을 좋은 구도로 포착한 이들은 현장을 떠나며 말한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그러나 목숨을 내놓고 일하는 이들은 집단 내부에서 동료의 죽음을 맞이하자 온전히 다른 반응을 보인다. 쾌감 속에 익명의 인물들의 죽음을 담아내던 이들은 자신의 동료를 ‘그들’ 정도로 칭하자 그들도 이름을 가졌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게다가 집단의 정신적 지주격인 이의 죽음에는 절망하며 고함을 쏟아낸다. 이 순간, 이들의 음성은 음소거되어 이미지로만 비춰진다. 즉, ‘분열의 시대’라는 부제 속에 담긴 의미는 단순히 ‘내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열의 시대‘는 이들 내부에서도 진행 중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찾아오고, 총과 카메라는 번갈아가며 보여진다. 그렇게 시선의 권력이 가진 폭력성은 상징적으로 재현된다. ’shoot’은 ‘총을 쏘다’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진을 촬영하다’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금 알려주는 순간이다. 그리고 찾아온 클라이막스의 이미지는 예상 가능함에도 충격적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했던 ‘결정적 순간’은 그순간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의 곁에 오랜 시간 머물러왔다. 그렇기에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을 때의 쾌감을 안다. 불행이 만드는 스펙터클은 끔찍하며 아름답다. 그때 나도 이들과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 일찍이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폭력이나 잔혹함이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스펙터클로 뒤덮인 사회에서 우리는 끝없이 폭력에 무뎌진다. 이는 온갖 매체들이 점점 더 폭력적인 이미지를 양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이상 예전 같은 자극으로는 대중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이 작품의 특장점은 그러한 스펙터클을 끝없이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스펙터클을 온힘을 다해 포착하는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여과없이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한 뜻이 있다는 곳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실 우리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데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장점이다. 충분히 교조적인 흐름일 될 수 있었을 것임에도, 시선의 권력과 폭력성에 대해 인정하고 직면하는 이 영화가 좋다. 그렇다면 보는 이이자 찍는 이로서 나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이 질문을 남긴 채 이 영화는 우리의 손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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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 계급, 여성
축구, 계급, 여성
잉글리시 게임. 넷플릭스 오리지널 미니시리즈 영화. 1부 6화. 여성(대부분)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가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는 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의 대부분 남성은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로만 일주일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국가대표 축구경기만 가끔 보는 나처럼,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남자라도 군대에서 축구를 한 경험이 있으며, 국가대표 선수와 해외에서 뛰는 한국선수들의 성적에 관해 대략은 알고 있다.
축구는 '럭비'에서 갈라져 진화한 새로운 스포츠로, 축구의 원형은 세계 여러나라에서 비슷하게 나타나지만, 그것을 하나의 '운동'으로 만든 것은 영국이다. 축구공의 재료도 돼지오줌보, 실뭉치, 새끼줄 뭉치, 천(옷)뭉치 등 다양하지만, 핵심은 둥근 공 형태로 만들어 그것을 발로 차며, 상대방의 골대에 공을 넣는 것이다.
'럭비'가 적대적 관계에서의 국가, 부족, 영주들 사이의 전투를 평화적으로 재현한 것이라면, 축구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팀을 만들어 다른 팀과 경쟁하거나 승부를 가르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전투의 '우호적 버전'이다. 작게는 마을과 마을의 경쟁과 친선, 우호적 관계를 위해 적대감을 해소하고, 우정을 쌓기 위한 동기로 '운동'의 형태로 벌어지며, 이것이 국가 단위로 커지면 올림픽과 월드컵이 된다.
럭비, 풋볼, 축구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투를 재연한다. 팀과 팀이 서로 마주보고, 땅을 뺐거나(풋볼, 럭비), 상대의 성(또는 고지)을 점령(골을 넣는 축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때 팀과 팀은 극도의 적대감으로 자신의 전투력을 고조하며, 육체와 육체가 부닥치면서 격렬한 몸싸움이 일어난다. 공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의 상징이자 현현이며, 창과 칼, 도끼, 화살, 낫, 망치처럼 잔혹한 무기는 아니어도, 상대방에게 충격과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분명한 무기가 된다.
현대 축구는 영국에서 1870년 이전부터 시작했다. 영국축구협회컵 대회(FA) 결승이 1871년에 있었으니 그때 이미 영국축구협회가 귀족과 부르주아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영국 전역의 지방에 축구팀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아스널'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팀이 최다 우승을 차지하고, 이 영화에도 나오는 '블랙번'도 6회 우승으로 상위권에 있다.
이 드라마는 영국에서 있었던 실제 축구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만들었으며, 당시의 축구와 계급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단지 축구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주제별로 나눠 보면 대략 이렇다.
축구
초기 영국축구협회를 구성한 사람은 모두 귀족이거나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팀을 만들어 운동도 하고, 다른 팀과 경기해서 여러 번 우승하기도 한다. 귀족과 부르주아의 권위와 권력은 대단해서 이들이 만든 규정에 따라 경기가 치러지고, 이들의 결의가 곧 축구협회의 권위였다.
드라마에서 귀족팀이자 영국축구협회 임원 대부분이 소속되어 있는 '올드 이트니안스'와 랭커셔의 면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다웬' 팀이 나온다. 주요 인물로 귀족이자 부르주아이며 '올드 이트니안스'의 주전 멤버인 아서 키나드가 있고, '다웬' 팀에서는 퍼거스 슈터가 있다. 이들은 각각 귀족(과 부르주아), 노동자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현대 영국축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초기 축구는 지금으로 보면 '동네축구'여서 이렇다 할 전술과 전략이 부족하고, 공을 따라 몰려다니는 형태였다. 여기에 전술을 도입한 사람이 퍼거스였고, 퍼거스가 이적한 '블랙번'은 이후 네 번이나 우승하게 된다.
축구에서도 계급간 차별이 있었지만, 그래도 귀족(과 부르주아)과 노동자가 함께 땀을 흘리며 어울릴 수 있는 스포츠였다는 점에서 영국 축구는 비교적 평등하게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다 할 스포츠가 없었던 영국에서 대중 스포츠로 축구가 인기를 얻게 되는데, 드라마에도 나오지만, 일주일에 6일을 힘들게 일한 노동자들이 주말에 축구 경기를 보면서 힘든 노동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다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지역마다 축구팀이 있었고, 지역주민들은 자기 팀을 응원하며 일종의 경쟁심과 내부적 단결, 화합을 이끌어내는 효과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도 힘겨운 임금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지역 축구팀을 후원하고, 팀은 팬을 위해 더 열심히 싸워 경기에서 이기려 노력한다. 이렇게 축구팀과 지역주민(대부분 노동자)이 단합하면서, 노동자가 많은 지역에서는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영국에서 극성팬을 표현하는 '훌리건'의 탄생 역시 이런 지역 기반의 축구문화와 관련 있다. 이들은 과격하고 비틀린 행동을 보여주는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하층 계급에서 느끼는 박탈감, 소외감이 폭력적으로 분출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영국에서 축구는 매우 중요한 스포츠이자 문화이며, 축구의 역사가 이미 150년을 넘어 역사가 되었다. 오랜 역사에서 쌓인 이야기는 대를 이어 내려오며 전설과 자부심, 자랑거리로 회자되면서, 지역과 가정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영국인들은 축구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기 팀을 응원하는 팬들과 함께 동질감과 연대감을 갖는다.
계급
19세기 영국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과정에 있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도 이미 자본주의 발달 양식을 받아들여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아시아만 해도 자본주의적 양식을 도입한 나라는 극히 드물었다. 한국은 여전히 봉건왕조 체제였으며, 외국과의 교류를 봉쇄한 채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것은 필연적 과정(마르크스)이었으며, 이것을 거부하는 국가는 강제로 주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대하는 사회주의가 탄생한 것 역시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달한 이후였다.
드라마에서 귀족(과 부르주아)의 생활과 노동자의 생활은 극과 극이다. 노동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마저도 일자리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해야 한다. 노동자는 쉽게 해고되거나 대체되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임금 수입이 없는 노동자는 사회안전망(복지)이 없어 당장 생계를 위협받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들의 생존과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해 자본가와 맞서게 된다. 자본(가)은 생산수단(토지, 공장, 시설)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력은 소유할 수 없다. 모든 이윤은 바로 노동을 통해 창출되는데-노동가치설(아담 스미스, 마르크스)-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노동자이므로,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해야만 한다.
드라마에서 귀족(과 부르주아)의 대표로 나오는 '아서 키나드'는 합리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노동계급의 어려움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그의 아내와 함께 극빈의 여성들을 돕는다. 하지만 이런 귀족(과 부르주아)은 극히 드물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기-1880년대-만 해도 엥겔스에 의하면-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아동 노동이 만연했고,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은 16시간에 이르기도 했다. 노동자의 평균 수명이 30년도 안 된다는 통계도 있는 걸 보면, 노동자는 자본의 착취에 쓰이는 단순한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축구팀을 만들고, 노동자들은 그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연대의식과 자부심을 갖는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이라는 단어에 자부심이 있으며,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노동자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노동자는 개인의 인격이 아니며,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부끄러울 일은 결코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여성
이 드라마에서 여성의 삶이 중요하게 드러나는데, 귀족 여성과 노동 계급의 여성이 대비되는 한편, 이들이 오로지 '여성'이라는 존재만으로 동질감을 갖는 장면도 나온다. 사실 젠더로서의 성(여성)보다는 사회적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현실인데, 아서 키나드와 그의 아내처럼 귀족이나 부르주아라도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먹고 살기 힘든 여성들이 모이는 '여성 쉼터'는 이때도 있었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15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는 부랑자와 빈민을 위한 '구호소'가 생기고 있었다. 중세 시대에도 귀족과 영주, 교회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부랑자, 극빈자가 된 농노, 민중이 많이 발생했고, 이들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왕과 교회는 이들을 사회에서 격리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때 유럽 전역에 있는 수많은 교회 공간이 수용소로 변하고, 부랑자와 극빈자, 미치광이, 병자, 고아를 수용하는 대가로 교회는 왕에게 지원금을 받는다.
초기의 이런 수용시설이 점차 감옥, 병원, 학교로 분화하는데-미쉘 푸코-이 드라마에서도 '여성 쉼터'에서 낳은 갓난 아이를 빼돌려 입양을 원하는 사람에게 돈을 받고 파는 장면이 나온다. 갓난 아이의 매매는 일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인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에도 갓난 아이 매매 장면이 나온다.
19세기만 해도 그 이전보다는 나은 환경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자들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만큼의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이것은 오늘 날에도 최저임금 또는 그 이하의 임금을 받는 모든 노동자들의 삶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삶은 남성에게 종속적이고, 피동적이며, 열등한 존재로 인식된다. 가부장 사회는 고대 이래 지금까지 줄곧 이어졌고, 어느 체제를 막론하고 가부장 체제는 유지되어 왔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철저한 전략이었지만, 대중 특히 남성은 이런 지배계급의 전략에 동조한다. 그것이 남성의 생존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성은 사회 변화의 첨단에 섰고, 존재 자체가 진보적이며, 그들의 연대가 사회를 평화롭게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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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백을 채우면 나아질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
※ '독전' 1, 2편 스포일러가 담겨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빈틈없이 꽉 채워나가는 플롯이 좋지만, 때로는 공백을 두는 게 오히려 나아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독전' 제작사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욕을 부렸다. 1편에 남겨둔 스토리의 공백을 채우면 더 근사할 것이라는 믿음에 앞서 2편을 꺼내보였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그림이 되어버렸다.
'독전'은 아시아 최대 마약 조직의 보스이자 실체 없는 인물 '이선생'을 쫓는 형사 조원호(조진웅)와 이를 돕는 조직원 서영락(류준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독전'이 5년 전 개봉해 520여 만 명 관객을 동원했던 이유는 단순히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게 아닌, 영어제목에 걸맞게 '믿음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며 홀로 싸워나가는' 구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또 출연진들의 물 오른 연기력과 떼깔이 좋은 영상미, 음악 구성도 눈도장을 받았다.
이렇게 잘 마무리된 '독전'인데 2편으로 컴백했다. 이미 끝맺음을 맺었는데 새롭게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제작사인 용필름은 1편 스토리 중 용산역에서 펼쳐진 지독한 혈투 이후 노르웨이에서 원호와 영락이 재회하기까지 30일 간 사이 이야기를 채우는 '미드퀄' 형식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변화도 생겼다. 1편에서 서영락과 보령 역으로 존재감을 뽐냈던 류준열, 진서연이 하차하게 됐고, 이 자리를 오승훈, 한효주가 채웠다. 오승훈은 서영락 역으로, 한효주는 새로운 빌런 섭소천 역을 맡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전2'는 '독전'이 깔아 두었던 것들을 모조리 흩트려놨다. 2편으로 나오는 만큼, 전편과는 다른 차별점 혹은 개성이 있어야 하지만 시리즈로서 연속성을 이어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독전2'는 1편과는 동떨어진 느낌에 서사마저 따로 노는 느낌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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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잘 알아요 <별의 아이>
*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오프라인상영작)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의 아이 Under the Stars(2020)
일본, 드라마, 110분
감독: 오모리 다츠시
네, 잘 알아요 <별의 아이>
일본 한 가정집에서 아기가 자지러지게 운다. 미숙아로 태어나 약한 면역력 탓에 잦은 구토, 발진, 두드러기를 계속 달고 살았던 치히로. 부모는 딸을 위해 시도해보지 않은 의학적 치료방법이 없었고, 더 이상 해 줄게 없는 현실에 우는 자식을 바라보며 매일 밤 숨죽여 울어야 했다. 어린 언니까지 치히로의 뺨에 핀 붉은 연꽃이 사라지기만을 기도했지만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어두운 동굴에 갇혀버린 그들을 구원한 건, 의료기술이 아닌 '금성의 은총'이었다. 우주의 기운을 담은 물 한 병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아기를 뒤덮은 붉은 연꽃을 사라지게 했고, 부모에게 다시금 희망과 행복을 선물했다. 이후, 치히로는 '금성의 은총' 외에 수많은 제품을 파는 '우주 에너지' 매거진에 "우주의 은총이 구한 생명"으로 당당히 소개된다.
언니가 빠진 가족사진, 별의 아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출처: 영화 <별의 아이> 스틸컷(다음)
치히로를 낫게 해 준 금성의 은총은 사이비 종교가 가진 정교한 톱니바퀴 중 하나다. '우주 에너지'에 실린 수만 가지의 제품이 각각의 톱니바퀴로 우주의 무한한 공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대놓고 맞물려 움직인다. 본래 믿음의 시초를 복기하는 건, 믿기로 한 '개인'에게 한정된, 하지만 무한하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적어도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는 현재 자신들이 원하는 삶고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린 금성의 은총으로 시작된 그들의 '우주 에너지'를 향한 굳건한 믿음이 쉬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치히로가 그 강한 믿음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중학생 소녀가 된 치히로는 여전히 금성의 은총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어릴 적엔 미남을 보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얼굴까지 흉측하게 보인단 이유로 금성의 안경과 안약을 갖고 다니기도 했다. 부모는 작은 딸에게 생긴 문제의 답을 늘 '우주 에너지'에 찾았고, 문제의 작고 큰 차이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치히로는 이런 부모님의 요구를 지금까지 군말 없이 따랐으나, 그녀의 언니는 거부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집을 떠나 홀로 생활한 언니, 치히로는 언니의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입 밖으로 "언니는 가출한 거야."라고 내뱉는 순간 현실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생은 늘 "언니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뿐이야."라 얘기한다.
사건의 긴장감을 높이는 존재는 치히로의 언니 말고도 또 있다. 미나미 선생님, 어릴 적 에드워드 팔롱에 빠졌던 치히로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한 장본인. 치히로는 미나미에게 빠져 수업 내내 그의 얼굴을 그리며 영락없는 10대 소녀처럼, 다들 한 번쯤은 빠지는 지독한 짝사랑을 경험한다.
출처: 영화 <별의 아이> 스틸컷(다음)
미나미는 그동안 암암리에 숨겨왔던 사이비 종교에 대한 치히로의 의문을 폭발시키는 촉매로 등장한다. 가출한 언니의 기억과 미나미를 향한 짝사랑이 맞물리는 일은 치히로에게 언젠가는 일어나야 할, 예정된 길이었다. 운동장에서 초록색 운동복 차림에 흰 수건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금성의 은총을 뿌리며 나쁜 기운을 없애는 부모를 향해 "뭐하는 짓이야? 완전히 돌았네."라 일갈하는 미나미. 자신의 부모를 향해 조롱과 멸시를 주저하지 않는 짝사랑남을 지켜보던 치히로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무작정 어두운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너 때문이야. 맨날 아팠잖아."
언니는 초등학생의 치히로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와 별의 기운을 막는 커피를 마시며 '사랑'에 대해 털어놓는다.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선택한 건 그의 한숨 때문이라면서, 그의 한숨을 통해 나른한 안정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충분히 느꼈어야 했던 걸, 언니는 커피만 마시는, 통칭 '쓰레기'에서 찾은 것이다. 치히로는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란 쪽지를 남긴 언니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며 계속 달린다. 그리고 묻는다, 하늘로 붕 떠올라 소리 내 불러도 더는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존재에게.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언니! 이 모든 게 아팠던 나 때문이야? 언니!!"
평상시처럼 의식을 치르고 온 부모는 밥을 안 먹는다는 딸의 말에 만병통치, 흰 수건과 금성의 은총을 준비한다. 단 한 번도 저항한 적 없던 치히로는 그날 처음으로 격렬하게 거부한다. 머리에 얹어진 흰 수건을 악착같이 끌어내리며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당황한 엄마와 아빠의 눈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으나, 치히로는 그날을 기점으로 자신이 반드시 선택해야 함을 깨닫는다.
출처: 영화 <별의 아이> 스틸컷(다음)
'나는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치히로에게 우주 에너지의 균열은 어렸을 때부터 보였다. 그 작은 틈에 손가락을 넣고 크게 만들기 시작한 것도 치히로였다. 금성의 안경을 쓴 채, 그녀는 아픈 게 아니라 외모지상주의에 빠져있다는 뼈 때리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전에 금성의 은총을 공원 수돗물로 바꿔치기 한 삼촌과 언니의 만행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금이 간 믿음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있다는 친구의 우스갯소리도, 다른 사람들이 금성의 힘을 믿는 부모와 자신을 어떤 눈길로 보고 있는지도 전부 다 알지만,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떠한 때를 기다려서? 아니, 자식을 위해 사이비 종교를 믿는 부모를 외면할 수도, 가만히 이렇게 숨죽여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자리한 두 갈래 길에서 치히로는 계속 도망치는 중이었다.
<별의 아이>는 고요하면서도 날카롭다. '사이비 종교'를 숨기거나,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공포스럽게 포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된 이유를 '딸을 향한 사랑이었다' 밝히는 동시에, 금성의 은총을 지금까지도 맹신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임을 친철히 설명한다. 표면적으로 익숙하게 소비해왔던 사이비 종교의 민낯을 밝히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다룬 건 치히로의 마음이었다. 지금 사건 한가운데에 서 있는 소녀의 마음은 어떤가. 스토리가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다가오는 건, 그녀가 금성의 은총 덕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 허무맹랑한 사실을 알고서도 제삼자에게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어리석음을 확실히 결론 내지도 않으면서 주인공의 심리를 천천히 풀어내는 점이, <별의 아이>가 사이비 종교가 아닌 인생의 중대한 선택을 앞둔 소녀의 성장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린 담담해 보여, 애처롭게 느껴지는 치히로 때문에 치히로 부모를 보며 강렬한 혐오와 멸시보단, 답답함을 느끼는 동시에 모든 인물을 이해하게 된다.
치히로는 미나미에게 놀이터에 있던 이상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님이라 고백한다. 하지만 미나미는 이미 잔뜩 화가 나 있다. 학교 내에 치히로와 자신이 사귄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결국 그는 학생들 앞에서 치히로를 대놓고 저격한다. 그림에 몰두해 수업을 듣지 않고, 이상한 물을 마시는 치히로를 꾸짖는다. 그의 폭발로 인해 치히로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가까이는 하고 싶은 않은 동급생이 되어버린다. 미나미의 불같은 화에 심장이 멎을 듯 얼어버린 치히로.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는 두 친구에게 억울한 듯, 정말 부모님은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항상 품었던 물음에 친구는 멋쩍게 웃으며 "나도 감기 한 번도 걸린 적 없는데..."라며 대화를 끝맺는다.
이렇게 <별의 아이>는 계속 치히로가 바라보는 사이비 종교의 허점을, 그 틈을 그녀의 주변인들의 입술을 통해 폭로한다. 앞서 말했듯, 아주 고요하면서도 날카롭게 관객의 비난할 기회를 순식간에 앗아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사이비 교주가 돌연 치히로의 눈을 통해 등장하는 순간, <별의 아이는> 달라졌을 거다.
출처: 영화 <별의 아이> 스틸컷(다음)
엄마와 아빠 몰래 외조부의 장례식장에 홀로 나타난 치히로. 커피를 마시는 치히로에 놀란 삼촌은 조카만이라도 사이비 종교에서 구출하고자 마음먹는다. 치히로에게 고등학교를 삼촌네 집에서 다녀도 좋다는 말과 함께, 너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소녀의 선택은 단호하다.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살겠다는 것.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음에도 두 눈을 힘 있게 뜬 채, 치히로는 부모님을 선택한다.
"네 알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긴 고민 끝에 치히로가 받아들인 건, 자신을 위해 금성에 헌신하는 부모님이었다. 금성의 기운도, 은총도, 에너지도 아닌 이 모든 걸 신의 뜻으로 여기는 아빠와 엄마. 친구들과는 다른, 너무나 이질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으나 아이는 자신을 향한 가족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시에 더는 아팠던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이미 시간은 흘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부모님을 만들었으니까. 현실을 부정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다. 언니가 언젠가는 찾아올 거란 확신은 어리석고, 부모님에게서 도망치려는 건 무책임한 일임을 이젠 인정한다.
마지막, 치히로는 부모님을 따라 사이비 종교 예배에 참석한다. 사이비 종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믿길 정도로 엄청난 수의 신도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치히로. 신도들 사이에서 서로를 애타게 찾던 치히로와 그녀의 부모는 늦은 밤, 숲 속으로 들어간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함께 보기 위해.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아래, 하나로 똘똘 뭉친 치히로의 가족. 아기를 낳았다고 연락을 해온 언니의 소식을 전하면서 "참 잘 된 일이지?"라 말하는 엄마의 얼굴엔 행복만 보인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소름이 돋지 않는 건 왜였을까. 그들은 다 같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기 위해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거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야만 볼 수 있는 별똥별이 치히로와 부모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촌 오빠에게 "내 걱정은 하지 마."라고 웃으며 말하던, 삼촌 가족을 만난 뒤 홀로 해변에 서서 바다를 응시하던 치히로가 떠오른다. 가만히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며, 자신의 길을 생각했겠지. 받아들이는 순간, 다른 길이 보인다는 걸 알았을 거다. 물론 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 그러나 치히로는 달라졌다. 영화가 내놓은 건 객관식 보기가 딱 하나인 문제였고, 우린 답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럼, <별의 아이>의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게 보일 거다.
그리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혼란스럽겠지, 치히로는 모든 걸 알면서도 '선택'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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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우에게 즉석에서 더빙을 부탁하면 일어나는 일 | 씨네마사지 ?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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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7
꿀보이스 정재헌 성우님과 함께하는 너의 이름은. 리뷰 두번째 시간!
출연
황보 라이언 정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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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홈」 회당 제작비 30억(!)의 한국 넷플릭스 드라마 프리뷰ㅣ스위트홈 웹툰ㅣ결말포함 스포주의ㅣ여진구?ㅣ결말포함 영화리뷰ㅣ
? '스위트홈(2020)' 넷플릭스 드라마 보기 전 필수 시청
스위트홈 웹툰 스토리 요약(*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위트홈" 시놉시스1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10대 소년. 현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직은 사람이니까. 이웃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스위트홈" 시놉시스2
끔찍한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 고등학생 현수는 그린 홈이라는 낡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점차 그린 홈에 관한 비밀을 깨닫는다.
왜곡된 인간 욕망을 여러 가지 형태로 투영하면서 인류를 몰아내려는 괴물이 그린 홈을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해 그린 홈 주민들은 그 괴물들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스위트홈" 정보
공개일: 2020년 12월 18일
화수: 10부작
제작: 스튜디오 드래곤, StudioN
장르: 호러, 크리처, 생존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
연출: 이응복
극본: 홍소리, 김형민, 박소정
출연: 송강, 이진욱, 이시영 외
원작: 네이버 웹툰 스위트홈
시청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청소년 관람불가[2]#스위트홈 #스위트홈_웹툰 #스위트홈_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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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사이버 지옥 : n번방을 무너뜨려라> 공식 예고편
“이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학대다” 2019년 대한민국, 가장 끔찍한 지옥을 추적하다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5월 18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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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 우주적 모험 예고편
<소울> <토이스토리> 제작진이 선사하는 불가능을 뛰어넘는 스펙타클 어드벤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