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삼2021-11-30 09:02:42
꽃다발같은사랑을했다_리뷰
"내 인생의 목표는 키누와의 현상유지야"
스다마사키가 나오는 로맨스물이라고 해서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리뷰 작성함~~평범한 대학생 키누와 무기는 각자의 일상을 보내던 중 막차시간을 놓치게 되고 거기서 우연히 만나게 됨. 둘은 어느 식당에 들어가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소름돋을 정도로 비슷한 취향에 놀라게되고 점점 썸을 타기 시작함. 영화에서는 이 썸 단계가 진짜 설레게 그려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명대사가 있음. 키누가 무기집에 처음 갔다가 집에 와서 "아무 말도 하지 마, 내 감정을 덮지 마 아직 어젯밤의 여운 속에 있고 싶단 말야"라고 말하는 장면인데 사실 누구나 한번쯤 왠지 썸탈 것만 같은, 뭔가가 시작될 것만 같은 그런 설렘이 있잖아, 그 설렘을 영화에서 그 과정을 잘 보여줬는데 이런 대사까지 딱 쳐주니 뭔가 나까지 그 여운에 남은 느낌이라 좋아하는 대사임. 여튼 그렇게 몇번의 만남을 계속 가지다가 결국 사귀게 됨. 그렇게 어느 커플들과 다를 것 없이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감. 하지만 둘이 취업을 하게되면서 관계가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서로의 가치관 차이가 들어남. 꿈을 좇는 키누와 반대로 현실을 좇는 무기... 이런 다름이 나중에는 잦은 다툼으로 이어지고, 더이상의 얘기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되고 결국 5년간의 연애를 끝으로 헤어지게 됨.
나의 평 :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연애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생각함. 그렇다보니 내가 다 연애하고 내가 다 헤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 영화임. 키누와 무기의 사랑과 영화의 따뜻한 색감이 더해져 더 설렜고 만남과 헤어짐까지의 과정을 영화에서 잘 표현해내서 마음고생을 좀 함. 그리고 영화를 다 본 뒤, 저런 이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함. 너무 잘 맞았기에 서로 더는 바랄 것도 더 부족한 것도 없으니 저런 이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음. 다만 아쉬웠던게 있다면 주인공 두명의 취향이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음. 오랜만에 괜찮은 일본 영화 발견한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았음. 리뷰 끝.
에디터 - 고삼조
에디터:고삼_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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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율이 맞지 않는 시의 아름다움, <문라이즈 킹덤>
*영화추천*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 2012
감독: 웨스 앤더슨
운율이 맞지 않는 시의 아름다움, <문라이즈 킹덤>
출처: 영화 <문라이즈 킹덤> 스틸컷(네이버)
아이들은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어른들의 간섭에 벗어나기 위해선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 욕망을 아이들이 가진 미성숙함이라 여긴다. 어른의 개입은 아이가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다. 자연스러운 욕망과 당연한 절차. 꽤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와 어른이 각자의 입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대화를 회피하기 위해 만든 단순한 대답이다. 상대방에게 나의 입장을 선언하는 목적 말고는 아무 의미 없는 말로, 운율이 맞아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시 같은 거다.
완벽한 사람이 완벽한 사랑을 하는, 그런 완벽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출처: 영화 <문라이즈 킹덤> 스틸컷(네이버)
<문라이즈 킹덤>엔 위와 같은 아이와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율이 맞지 않는 시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목적에 따라 아이와 어른이란 두 역할로 나뉜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위험한 실수를 저지르고, 서로의 해결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을 기다리는 결말에 가까워진다. 그들은 점차 자기가 맡은 역할이 상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다른 길을 걷고 있으나 같은 풍경을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느새 아이와 어른은 서로를 구분 지었던 장막을 없애고 ‘나’의 진심을 털어놓으며 예정되지 않은 선택을 한다.
영화는 세상과 우릴 아이와 어른, 감성과 이성, 솔직함과 거짓말 등으로 나누지 않는다. 빠르고 쉽게, 편리하게 분류하지 않는다. 열두 살 샘과 수지가 벌인 사랑의 도피를 섬 경찰과 수지의 부모, 카키 스카우트 대장, 사회복지국 직원이 개별적으로 겪는 사건과 같은 선상에 놓는다. 인물들은 감독이 구축한 독보적인 세계관(공간) 안에서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격돌한다. 운율이 맞지 않은 시들의 위험한 실수가 충돌할 때마다 이야기는 위트와 진솔함을 넘나들고, 결과적으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신다.
출처: 영화 <문라이즈 킹덤> 스틸컷(네이버)
<문라이즈 킹덤>은 황홀하고 우아한 영상미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더 매력적인 건 인물들의 대사다. 이들의 대화 속엔 영화가 끊임없이 보여줬던 상징이나 명확한 의도가 없다. 독립적인 장치로서 사건을 이끌고, 정체된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면서 어느 순간 관객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함께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듯한 확신을 갖게 한다. 운율이 맞지 않는 시가 선사하는 아름다움이랄까.
출처: 영화 <문라이즈 킹덤> 스틸컷(네이버)
분명 비밀스럽고도 마법 같은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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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아씨들> : 이 영화가 왜 다시 만들어져야 하는가?
루이자 메이 올콧의 명작 <작은 아씨들>은 그간 여러 차례 영화화된 작품이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2019년의 <작은 아씨들>을 촬영하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을 영화화할 때의 압박감만이 아니라 이미 영화로 제작된 작품을 다시 창작한다는 고민 역시 가졌으리라고 예상된다. 나 역시 <작은 아씨들>(2019)에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아야겠다고 속단했었으나, 먼저 영화를 본 관객들의 후기에 다시 약간의 기대를 회복하고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결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고전의 재해석이었다. 어떤 영화를 찍을 때, 특히나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다시 만들 때는 이 영화가 대체 이 시대에 왜 필요한지를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그 질문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영화이다.
2019년 <작은 아씨들>의 가장 혁신적인 연출은 현재(1868년)를 배경으로 시작해 과거 회상을 삽입한다는 점일 것이다. 조의 뉴욕을 보여주는 현재와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를 배경으로 한 과거는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대조된다. 현재의 조가 베스의 소식을 듣고 콩코드로 돌아간 후에도 이 구분은 유지된다. 이미 다섯 번이나 영화화된 고전을 리메이크하면서 고민되는 지점은 '어떻게 해야 관객의 지루함을 덜면서 신박함을 더할 수 있을지'이다. 과거 삽입이라는 비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은 이미 고전을 아는 관객들이 뻔한 전개를 예상하며 영화를 보는 것을 방지하고 몇몇 장면에서는 과거와 현실의 대조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베스의 침대 옆에서 병구완을 하다 잠든 조가 침대가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암스트롱의 <작은 아씨들>은 모두가 아는 <작은 아씨들> 작품의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시간상 한계로 중요한 포인트, 특히 베스와 로렌스 씨의 감정교류 장면을 배제해서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은 왜 갑자기 로렌스 씨가 베스에게 피아노를 선물하며 진작 주었어야 했다고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과감한 연출로 원작의 중요한 사건들을 놓치지 않았다.
<작은 아씨들>은 본질적으로 당시 시대상에서 여자가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적 참여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다만 1994년작의 여자주인공 조 마치는 그 한계로 결혼을 해야만 하고 로맨스를 찾아야만 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2019년작의 조는 너무나도 외롭다고 외치더라도 그 결말이 결혼으로 이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동시에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편집장의 요구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주인공은 죽거나 결혼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편집장 앞에서 비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꼿꼿한 사람이기도 하다. 94년작 <작은 아씨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 사실 초반부터 마미의 여성주의적 발언에 꽤 놀랐다. 암스트롱의 <작은 아씨들>의 마미는 로라 던이 연기한 마미보다 (최소한 말로는) 딸보다도 급진적인 사상가이며 더 오래된 작품인 94년작에서 19년작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인권 문제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볼 수 있다. 마미가 딸들이 로리를 썰매개처럼 부리는 것을 보며 브룩 선생에게 여자 아이들을 근본적으로 남자 아이들과 신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으며 성인 여자가 연약해지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코르셋을 입혀 집안에 가둬두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한다거나(19년작이든 94년작이든 브룩 선생은 좀 구식으로 맨박스에 갇혀 있어서 이 캐릭터와 메그를 이어주는 올콧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메그가 부자 친구의 집에 놀러가서 고급 드레스, 특히 면화 드레스를 사지 않는 이유로 흑인 아이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면화 농장은 아이들을 착취하기 때문이라는 발언을 한다거나, 마치 가 아버지가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야한다는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참전했다는 배경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장면이 그렇다. 반면 19년작 <작은 아씨들>은 이러한 직접적이지만 부수적인 무수한 표현 대신, 결말로써 조를 해방시킨다.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작가 조를 가장 강조하는 버전이다. 영화 초반부, 책 <작은 아씨들>의 표지가 등장하며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데, 사실 그 앞에도 조는 이미 등장해 살아 숨쉬고 있다. 책 표지 등장 전의 조 마치와, 책이 인쇄된 후의 조 마치의 등장은 조가 책 바깥의 작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이 버전의 <작은 아씨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현재'로 시작해서 과거가 간헐적으로 플래시백되는 시간의 흐름을 가지는데, 즉 이 영화에서 중요한 시대는 따스하고 아름답고 네 자매가 모두 한 지붕 아래 살았던 행복한 과거가 아니라, 베스가 죽었고 자매는 뿔뿔이 흩어져 차가운 세상에 내던져졌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현재, 1868년이다. 1868년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이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작은 아씨들>을 집필한 올콧-거윅-조는 남자 편집자 대시우드에게 미혼 여성 주인공은 결혼하든가 죽든가 해야한다(이영도라는 남작가가 쓴, 내가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 <폴라리스 랩소디>의 문장을 빌리자면, 어느 쪽이든 처녀는 죽는 것이다)는 강요에 가까운 조언을 받는다. 결국 작가 조(올콧)는 대시우드에게 '너 좋을대로 하라'는 여유를 보이며 작가로서 납득할 수 없는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성공을 위해 이 정도는 타협할 수 있다는 태도로 조와 베어 교수를 결혼시킨다. 한편 실제 루이자 메이 올콧은 <작은 아씨들>의 대성공으로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데 성공해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개봉한 직후에 영국에 있었기 때문에(이미 상영이 끝난 후였다) 극장에서 <작은 아씨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에 <작은 아씨들> 후기는 꽤 열심히 읽었었는데, 조가 베어와 이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소식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감상한 지금 내 의견을 말하자면, 비혼 엔딩이다. 극중 중절모를 쓴 작가 조의 입으로, 작가는 일관적인consistent한 주인공heroine을 쓰고 싶으며, 자신의 인물 조는 어렸을 때부터 로리의 청혼을 받은 순간까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말했으니 결혼을 하지 않는 엔딩이 지당하고 마땅하다고 말한다. 대시우드, 즉 가부장적 헤테로 로맨틱 엔딩(a.k.a. 결혼)을 원하는 사회와 독자의 대변자는 독자들은 일관적인 여주인공이 아닌 결혼을 하는 여주인공을 원한다고 주장한다. 대시우드가 '왜 로리가 조와 결혼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하는 대사에서 거윅의 또다른 올콧 해석이 강조되었다고 생각한다. 올콧은 소녀와 소년의 우정은 필연적으로 소꿉친구 헤테로 로맨스 결말을 봐야한다는 사회와 독자의 '압제에 저항'하기 위해 로리를 지조없이 자기가 좋아한다는 조의 동생인 에이미와 결혼해버리는 놈으로 만들어 소꿉친구 헤테로물을 외치는 독자에게 한방을 먹인 것이다. (내 상상일 뿐이다)
원작과 2019년도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조는 베어와 결혼 엔딩을 보지만 조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요소 중 로맨스적 측면을 고찰할 때 로리라는 캐릭터를 떼어놓고 해석할 수는 없다. 우선 19년작과 94년작의 조와 로리 케미에 대해서 말하자면, 거윅 감독의 전작인 <레이디 버드>에서 시얼샤 로넌과 티모시 샬라메가 잠깐 동안 사귀는 사이였음에도 둘 사이에 낭만적 기류는 읽기 어려웠듯이, 2019년작은 1994년작보다 로맨스적 케미스트리가 훨씬 약하다고 생각한다.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된다. 이 차이는 로리 배역의 캐스팅에서 비롯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알려진 티모시 샬라메가 청초한 소년 이미지의 배우인 반면, 94년작의 로리 크리스천 베일은 <아메리칸 싸이코>나 <다크 나이트>를 찍기도 전이지만 확연히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배우이다. 샬라메가 1861년 과거 시점에서도, 1868년 현재 시점에서 방탕하게 사는 로리가 되었음에도 변함없이 가련미가 넘치는 소년이라면, 베일은 등장부터 곧 청년이 될 소년이라는 이미지이다. 헤테로 로맨스를 즐기는 주류 여성 관객들은 여주인공보다 아리땁고 가냘픈 남주인공을 원하지 않는다. (특수 니즈 제외, 보편론을 논하는 중) 헤테로 커플 키 차이는 몇 센티미터가 이상적이라느니 하는 헤테로 로맨스 롤플레잉에 적합한 구체적인 수치까지 존재하는 사회에서, 요약하자면 94년작 관객들은 매력적이고 케미 넘치는 처녀총각이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눈이 맞아야 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거부하는 위노나-조에게 배신감을 느끼도록 유도되지만, 19년작의 관객은 커플적 전망을 보기 어려운 사이의 아름다운 청춘의 우정을 고백으로 파괴하는 샬라메-로리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로맨스물에서 여주인공이 잠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홀랑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남주인공은 그 순간 실격이다. 허용되는 범위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강요된 약혼까지뿐, 그때는 네 말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 네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 네 동생에게 느끼는 사랑과 네게 느끼는 사랑은 다른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다르다는게 여주에게 느끼는 감정이 우정이고 여주 동생에게 느낀다는 감정이 사랑인 남자 캐릭터는 이미 로맨스 스토리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여자 주인공의 과거의 장애물일 뿐이며 넘어야 할 흑역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막내동생인 에이미만 아니었더라면 할리우드 로맨스 기준으로는 허용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의 동생인 에이미에게 청혼한 순간 로리는 아웃이다. 차라리 마치 가에 편입되어 따스한 가정의 정을 느끼고 싶어서 몸부림치던 로리가 맏이 메그와 결혼했으면 눈살 한번 찌푸리고 말았겠지만, 네 자매 중 막내이며 가장 철이 없는 어린 아이로 나오는 에이미와 로리가 결합하는 전개는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에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으리라고 짐작한다. (94년도 영화의 에이미는 심지어 아역과 성인 배우가 따로 있는데, 어린 에이미에게 그와 비교하면 거대한 성인처럼 보이는 로리가 나중에 크면 결혼해주겠다고 입맞춰주는 장면까지 나와서 이후의 전개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게 만든다.) 이 모든 점을 고려했을 때, 거윅은 올콧이 낸 결말을 표면 그대로 읽는 대신 올콧이 그렇게 밖에 결말을 쓸 수 없었던 배경까지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의 심볼인 디즈니마저도 2010년대 <겨울왕국>과 <말레피센트> 이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작은 아씨들>의 책과 영화를 본 독자와 관객은 많을 것이나, 당시 루이자 메이 올콧이 어떤 이유로 작품의 결말을 수정했는지 혹은 어떤 이유로 캐릭터들의 결말이 선사되었는지를 각자 상상하는 것과 그 상상을 구체화해 하나의 작품으로 보는 것은 다른 경험일 것이다.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조의 운명을, 여자주인공의 결말을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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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의 초상화 밖으로 뛰쳐나간 여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코르사주>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름을 날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비키 크립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플로리안 테히트마이스터)' 황제는 인형과도 같은 황후의 역할만을 요구한다. 이에 엘리자베트는 답답한 코르사주(코르셋)를 조인 채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며 그저 우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흔 살이 넘어가면서부터 그녀는 아들인 '루돌프(아론 프리즈)' 황태자의 경고도 무시한 채 여행, 불륜, 마약에 손을 대며 한 명의 여성이자 개인의 삶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2022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되어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고, 2023년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부문 오스트리아 공식 출품작으로 선정된 영화 <코르사주>. <코르사주>는 흔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이자 ‘시씨’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사실 엘리자베트 황후의 이야기는 뮤지컬 '엘리자베트(엘리자벳)'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소녀였지만 황후가 되었고, 전통과 관습이 지배하는 궁정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아름다운 미모로 전 유럽 사람의 찬사를 자아냈지만, 미모를 관리하던 중 거식증에 걸리는 등 온갖 고초를 거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궁전을 벗어나 자유를 갈망한 비운의 황후였다. 마치 다이애나 스펜서의 선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코르사주> 속 엘리자베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영화는 그녀의 일대기를 그려내는 대신 '마흔이 된 황후 엘리자베트’의 변화에 주목한다. 특히 그녀가 어느 시점부터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착안해 왜 그러한 선택을 내렸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렇게 영화는 황후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한 인간 엘리자베트의 얼굴을 세상에 내보인다.
영화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숨을 참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코르사주로 허리를 동여맨다. 준비를 끝내고 황제와 함께 미술관 개장 행사에 참여한 그녀는 코르사주를 지나치게 세게 묶은 나머지 돌연 정신을 잃고 기절한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인형으로 남아야 한다. 일례로 그녀의 식단은 만찬과 연회 중에도 철저한 관리 대상이다. 그녀는 남들이 먹는 화려한 음식들에 손조차 댈 수 없다. 황후에게는 황제 옆에 서서 인형처럼 웃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인형의 외관에서 벗어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하자 더 많은 압력이 가해진다. 황실 소속 화가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자 주치의는 여성의 평균 수명이 마흔이니 더 각별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오프닝은 엘리자베트라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빌려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지를 명확히 암시한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기준이 개개인을 억압하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며, 수동적인 존재로 격하한다고 비판한다. 이전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권리가 보장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움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엘리자베트를 구속한 악습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탈코르셋’(탈코) 운동처럼도 보인다. 사회구조적 외모 강박 혹은 여성성 강요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화장이나 긴 머리, 여성적 옷차림 등 ‘사회적 여성성’을 부정하는 시도가 엘리자베트의 삶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한 개인으로서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선택과 황후로서 엘리자베트가 자신을 옥죄는 규범을 어기며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을 같이 위치시킨다. 그녀는 코르사주를 벗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단발로 잘라버린다. 동시에 황제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거부한다. 황제에게 정부를 소개하고, 영국인 승마 선수 조지 베이나 사촌 루트비히 2세와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으로는 황후로서 참석해야 할 공무를 외면한 채 자유를 즐긴다. 또 고정된 이미지로 남아야 하는 초상화 작업은 거부하지만 자유롭게 들판을 거니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동영상 촬영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황후의 삶을 포기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유를 추구하는 엘리자베트의 노력은 그녀가 갖고 있던 또 다른 가능성 때문에 더 인상적이다.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린 자기 경험을 투사하며 정신병 치료와 정신병원 시설 개선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인 면모도 지녔고,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발칸반도 진출과 관련해 전황을 판단할 줄 아는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만약 그녀가 미모를 가꾸는 데 열중해야 했던 시간과 노력을 다른 데에 투자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의 지향점을 생각하면 꽤 의미심장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황실의 모습을 비추면서도 화려한 궁전 내부를 기대보다 자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각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칙칙하고 어두운 통로들을 더 자주 비춘다. 마치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실제로는 생기가 없는 엘리자베트의 외관과 내면을 한 공간에 담기라도 한 듯이. 또 그렇기에 <코르사주>가 완성한 황후 엘리자베트의 새로운 초상도 인상적이다. 황후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바닷속에 몸을 던져 자유를 얻는, 비극적이면서도 엄청난 해방감을 선사하는 결말의 순간에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엘리자베트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미인과 황후라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엘리자베트의 변화를 <코르사주>가 과연 적절히 전달하는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엘리자베트라는 실존 인물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만 부각해 원하는 인물상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마리 크로이쳐 감독은 "영화적 내러티브로 전환하면서 내용과 형식적으로 많은 자유를 부여했다"면서 "이야기하거나 묘사하는 것에 있어 모든 역사적 ‘실수’는 모두 예술적 결정이었다. 나는 멋지고 깔끔한 전기 영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코르사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 또한 조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선택은 그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황후라는 지위가 얼마나 부담되고 무거운 자리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엘리자베트의 고난과 시련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쇠락기에 접어든 제국이었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이 붕괴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헝가리의 요구를 일부분 받아들여 1867년에 오스트리아 황제가 곧 헝가리의 군주를 겸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제 체제를 구축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나름 동등한 위치로 제국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와 황실의 존재는 붕괴 위기에 빠진 제국을 지탱할 몇 안 되는 도구 중 하나였다. 마치 엘리자베스 2세와 영국 왕실이 영국이라는 국가와 영연방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 유지한 것과 유사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즉, 당시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실은 서로 다른 민족과 국가를 하나로 묶는 상징이자 실질적 제도로서 기능해야 했다. 실제로 엘리자베트의 막내딸 발레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제국의 통합을 상징하는 공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황후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은 단순히 미모를 관리하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나 맥락을 알 수 있는 장치는 많지 않다. 특히 오스트리아 관객이 아니기에 더욱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 결과 엘리자베트가 겪은 여러 어려움은 그저 막연하다. 짐작하고 동조할 뿐, 설득될 수가 없다. 황후로서 역할이 얼마나 막중했는지, 그녀의 역경이 얼마나 큰지, 또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강한지 명확히 드러날수록 해방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큰 쾌감이 느껴질 것이고, 그녀에게 자유가 의미하는 바가 더 절실히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승마를 그토록 사랑했는지, 왜 그토록 손쉽게 마약에 빠져들 수박에 없었는지 그 동기와 계기도 더 잘 설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다음처럼 이해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가 황후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도 져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전자를 누릴 뿐, 후자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배경이 어떻든 간에 작중 엘리자베트가 결국 무책임한 인물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이 약한 막내딸을 굳이 새벽에 외출시켜서 감기에 걸리게 하는 것, 그토록 엄중한 상황에서 자신의 스케줄을 마음대로 거부하는 것, 평생 여행을 다니며 황후의 역할을 회피하는 것도 마냥 동정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제목인 코르셋(코르사주)이라는 상징에 담긴 <코르사주>의 메시지는 여전히 시의적절하다. 그 메시지를 현현한 엘리자베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다소 부적절한 것도 사실이며, 그 결과 과연 이 영화가 원하는 대로 수용되거나 해석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코르사주>는 황후와 여성 사이에서 길 잃은 엘리자베트만큼이나 모호한 인상을 남긴 채 막을 내리고 만다.
A(Acceptable, 무난함)
평범한 여성이 되고 싶었던 황후. 실존적 불안과 치기 어린 불평 사이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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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살과 13살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5월은 푸르른 나무들이 싹을 틔우는 계절이고, 12월은 잎을 거두고 추위를 견디는 계절입니다. 영어권에서는 'May-December'가 5월과 12월의 간극처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커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는데요. 영화 <메이 디셈버>는 관용어를 사용해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소재를 내걸고 시작하는 작품입니다. 5월의 남자와 12월의 여자, 그들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의 사랑은 정말 '사랑'일까요?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메이 디셈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메이 디셈버>는 2024년 3월 13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메이 디셈버
May December
Summary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충격적인 로맨스의 주인공들인 ‘그레이시’와 그보다 23살 어린 남편 ‘조’.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영화에서 그레이시를 연기하게 된 인기 배우 ‘엘리자베스’가 캐릭터 연구를 위해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된다. 부부의 일상과 사랑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엘리자베스의 시선과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그의 잇따른 질문들이 세 사람 사이에 균열을 가져오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나탈리 포트만, 줄리안 무어, 찰스 멜튼
강렬한 스캔들을 둘러싼 세 인물
: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갇힌 사람
이 영화의 'May-December' 커플은 60살이 다 된 아내 '그레이시'와 36살 남편 '조'입니다. 23년 전, 유부녀였던 '그레이시'는 자신이 일하던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이자 아들의 친구였던 13살 '조'의 아이를 가집니다. 감옥에서 아이를 출산한 '그레이시'와 '조'의 이야기는 뉴스 1면을 장식하는 희대의 스캔들이 되었죠. 강렬한 그들의 사랑은 이십여 년이 지나 영화화가 결정됐고, 연기 인생의 또 다른 한 획을 그을 작품을 찾던 배우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 역을 맡습니다. <메이 디셈버>는 'May-December' 커플의 이야기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엘리자베스'가 부부의 집을 찾으면서 시작됩니다. 영화는 세 인물을 가까이에서, 또 멀리서 바라볼 수 있도록 시점을 조금씩 바꿔가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리고 이십 년 전의 스캔들을 중심에 둔 세 사람을 각각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갇힌 사람으로 정의하죠.
말하는 사람은 과거의 스캔들을 '엘리자베스'에게 들려주는 '그레이스'입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레이스'에게는 부끄러운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36살 유부녀가 13살 소년과 사랑을 나눠 아이를 가졌는데도, 아들 친구와 바람이 났는데도, 심지어 아들의 생일 전날에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는데도요. 손자와 자식이 같은 날 졸업하는 진 광경의 자리에도 당당하게 '엘리자베스'를 부릅니다. '그레이스'는 진실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더 중요시하는 인물로 비칩니다. 그래서 언제나 태연하고 뻔뻔할 수 있었죠. 그는 자신이 순진한 사람이길 원하고,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사랑을 완벽한 사랑으로 보길 원하며, '조'가 영원히 이 관계를 사랑으로 보길 원합니다.
듣는 사람은 완벽한 연기를 위해 부부를 취재하는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는 '그레이시'와 '조' 사이에 자리 잡은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빌미로 부부의 과거를 헤집고, 진실에 더 가까운 이야기를 들으려 애쓰죠. 그런데 단순히 취재라고 포장하기에 '엘리자베스'의 취재 여정은 다소 기만적입니다. '그레이시'와 '조'의 딸이 있는 자리에서 "배역을 선택할 때는 '도덕적으로 모호한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라고 말하거나, 13살에 '그레이시'를 유혹한 '조'의 매력을 가늠하기 위해 그와 잠자리를 갖는 것도 마다하지 않죠. 어느새 진실 찾기는 핑계가 되고, '엘리자베스'의 눈빛에는 야심만이 이글거립니다.
갇힌 사람은 스캔들의 또 다른 주인공인 어린 남편 '조'입니다. 영화 초반부의 '조'는 공동체의 기억 속에 남은 강렬한 이야기와는 달리 더없이 다정하고 화목한 가정의 가장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상 '조'는 그때 그 이야기 속에서 조금도 크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죠. "네가 나를 꼬신 거야", "나는 순진해"라는 '그레이시'의 함정에 빠져 죄책감과 부도덕함을 느끼고, 속죄와 책임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원한 삶이라고 굳게 믿으면서요. 나비의 알을 주워다가 성체로 키워 날려 보내는 것만이 유일한 감정의 배출구였습니다. 이러한 삶을 평화로운 일상으로 여겨왔던 '조'에게 '엘리자베스'의 등장은 균열이었습니다. 진실을 찾는 '엘리자베스'로 인해 마음속 물음표가 떠오른 '조'는 외면해 왔던 진실에 향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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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모호한 회색의 스펙트럼
영화를 만든 토드 헤인즈 감독은 <메이 디셈버>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거대한 거부감"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세 인물의 공통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 '자기 자신'이라는 진실을 대하는 방식 말입니다. 세 인물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진실을 바라보길 거부합니다. '그레이시'는 원하는 대로만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가렸고, '엘리자베스'는 남의 이야기를 파헤침으로써 자기 자신을 덮었으며, '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숨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잘못이 있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기꺼이 들여다보려 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그랬듯이, 함부로 직시하죠. 이렇듯 세 인물의 도덕성과 옳고 그름에 관해 끝없이 생각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이런 생각에 가닿습니다. 극 중에서 나오는 '도덕의 회색지대'라는 말처럼, 바로 그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모호한 회색의 스펙트럼이 곧 인간의 본질이구나.
<메이 디셈버>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이 인간의 모호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샘솟는 질문들도 모두 비슷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 36살 여인은 정말 13살 소년을 사랑했을까?
- 13살 소년은 정말 36살 여인을 사랑했을까?
- 13살 소년을 사랑한 36살 여인의 잘못은 무엇일까?
-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 도덕이 먼저일까, 사랑이 먼저일까?
- 타인의 진실을 향한 '엘리자베스'의 열망은 인간으로서의 도덕인가, 배우로서의 야심인가?
- '엘리자베스'의 선을 넘는 야심과 '그레이시'의 순진한 가면 중 어느 것이 더 부도덕한가?
질문의 답을 고민하다 보면 머릿속은 계속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정확한 답 하나 없이 모호함만이 두둥실 떠다닙니다. '누가 옳은가?', '누가 그른가?', '옳은 사람이 있긴 한가?', '옳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아, 하지만 복잡하고 모호한 인간처럼 흥미로운 것이 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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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디셈버>는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의 맛을 크게 살렸습니다. 가히 연기 대결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는데요. 줄리안 무어의 '그레이시'를 완벽하게 내재화해 연기하는 나탈리 포트만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름 돋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조'를 사랑의 감옥에 가두는 '그레이시'의 순진한 얼굴을 그려낸 줄리안 무어의 얼굴은 또 어떻습니까. 여기에 이 작품으로 연기상 21관왕을 휩쓴 찰스 맨튼의 활약도 빼놓으면 섭섭하지요. <리버데일>의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만나 기뻤습니다. 쉽지 않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그에게 손바닥에 불나도록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One-Liner5월과 12월, 알과 나비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나, 인간만은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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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선이 모호한 범죄 스릴러
윈드폴 (Windfall, 2022)
“기준선이 모호한 범죄 스릴러”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범죄, 드라마, 스릴러
러닝타임 : 92분
감독 : 찰리 맥도웰
출연 :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
개인적인 평점 : 3/5
윈드폴 줄거리
한적한 별장을 무대로 위험한 대치 상황이 벌어진다. 한쪽은 원한을 품은 평범한 사람. 다른 한쪽은 IT 업계의 콧대 높은 억만장자와 그의 아내.
Windfall : 우발적인 소득이나 횡재, 낙과
넷플릭스에 새롭게 공개된 영화 <윈드폴>은 제목 뜻 그대로 꽤나 우발적으로 돌아가는 영화다. 사실 포장하자면 ‘우발적’인 거고 안 좋게 말하자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정확한 기준선이 없다. 얼마간의 긴장감과 어느 정도의 메시지를 갖췄으나 ‘어느 정도’에서 끝나는것이 못내 아쉽다.
영화의 이름 없는 세 주연은 배우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이 맡았다. 얼떨결에 시작된 납치 상황 속에서 세 주연 배우는 각자의 파트를 잡고 극을 이끌어간다. 오만방자하고 모든 걸 다 가진 IT 기업의 CEO,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직원이었던 와이프, 그리고 떠돌이로 추정되는 남자까지. 세 사람은 우연히 벌어지는 사건 앞에서 각자의 불편함과 선택에 대해 변명한다.
세 주인공은 부자 백인 남자와 부자가 아닌 백인 남자. 부자 백인 남자의 액세서리처럼 여겨지는 여자로 해석될 수도 있고,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을 실패자라 기만하는 기득권층, 조용히 상황이 흘러가길 기다리거나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보통의 사람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윈드폴>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야만 했던 선(Line)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이 영화는 선택을 억눌렀던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영화다. 공평하게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과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 선택지. 그 선택지의 선을 넘는 것이다. 이렇게 느낀 이유는 영화의 엔딩에 가서 알 수 있다. 약간의 루즈함을 참을 수 있다면 말이다.
기준선이 모호한 이야기
<윈드폴>의 장점은 명확하다. 주연 배우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 그리고 단점도 명확하다. 이야기의 기준선이 없다. 영화의 처음은 집 없는 남자가 끌고 가는 납치극의 모양새를 하고 있고, 중반은 오만한 CEO의 헛발질, 아내와 남자의 감정적 교류로 채워진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선 약간의 충격을 가미한 누군가의 선택으로 마무리된다. 흐름 자체의 어색함은 없지만 어째 딱 집중할 만한 포인트가 없다. 납치극이 가진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느슨함이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집중할 만한 포인트는 릴리 콜린스가 연기한 아내 캐릭터 하나뿐이다.
캐릭터의 특성
이야기의 흐름은 전적으로 세 인물들에게 기대어 진행된다. 이들은 각자의 특성에 맞춰 상황에 대처한다. CEO는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고 도움이 될만한 기회를 잡기 위해 배팅을 하고, 아내는 움츠린 채 자극보다는 안전한 길을 찾으려 한다. 남자 또한 그렇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갈린다. 어쩌다 또는 어쩔 수 없이 선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아니면 극적으로 쟁취했는지에 따라서 말이다.
등에 과녁을 달고 있다고 생각하며 물불 가리지 않고 일에 뛰어들었던 CEO는 납치가 된 상황에서도 거만하게 남자를 깔보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다 CEO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자, 그 또한 남자에게 큰 위협을 느끼지 않지만 간혹 남편이 만드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수습하기 바쁘다. 어쩌다 강도가 되어버린 남자는 이 상황을 크게 키우지 않고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초조함과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항상 누군가의 윗선에서 살아온 사람의 여유와 오만함,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며 살아왔던 사람이 가진 초조함이 대비되며 극에 어느 정도의 텐션을 만든다.
이야기의 배경
이야기는 깔끔하지 못한 행색의 남자가 억만장자의 텅 빈 별장에서 ‘어쩌다’ 별장의 주인과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식사도 챙겼고, 잠시간의 휴식도 즐겼으니 이제 나가보려는 찰나~에 딱 마주친 거다. 지문까지 닦고 조용히 없었던 일로 묻어두려 했던 상황이 어쩌다 보니 본격 강도 사건이 되는 순간이다. 아름다워 보였던 별장은 그렇게 별안간, 납치극의 배경이 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겉보기와 다른 현실
납치극의 배경이 되는 초호화 별장의 상황은 CEO와 아내, 남자의 상황과 닮아있다. 지상 낙원 같지만 알고 보면 주인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아 잊혔던 별장은 CEO와 아내의 알맹이 없이 겉만 멀쩡한 결혼 생활, 별장에 침입한 남자의 존재는 CEO와 아내의 사이에서 여자의 속마음을 들어주는 비슷한 처지의 남자로 비유된다.
CEO 부부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다. CEO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아내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빚을 갚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CEO는 바쁜 와중에도 아내를 위해 스케줄을 취소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얼핏 보면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사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의 사이엔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진실한 감정이 없다.
CEO는 아내와 2세를 계획하고 있지만 아내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피임약을 소지하고 다닌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도 CEO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아내는 별장 구경을 원한다. 아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 장미를 발등에 새겼지만 CEO는 그것을 정말 못생긴 타투 정도로 생각하고 제거 시술을 받게 한다. 평범한 직원이었던 아내는 자신의 빚을 갚아준 CEO와의 결혼을 선택했지만 결혼 이후부터는 선택권을 박탈당한 삶을 살게 된다. 행복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삶으로 이어진 것이다.
CEO는 남자 앞에서도 ‘난 아내가 먼저’라고 외치며 겉으로는 아내를 위하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보기에만 좋았을 뿐, 바람까지 피우고 있는 상당히 못된 남편이었다. 아내의 타투를 알아보고, 아내의 마음을 들어주는 인물이 남편이 아닌 납치범인 남자인 게 조금 애잔한 부분이다. 어째 남편보다 남자와 더 잘 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릴리 콜린스는 영화 속 커플을 연기하기 위해 사회 엘리트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레드 카펫 위에 오른 커플의 사진을 보고 여성이 정말 행복해 보이는지, 그의 감정은 어떠한지 분석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선을 넘다. 결말 해석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진 대략 알 것 같다. 선택엔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스스로 선택한다는 건 일련의 선(Line)을 넘는다는 뜻이다. 영화의 후반부, ‘아무도 다치지 않고, 없던 일처럼 일을 끝내겠다.’고 했던 남자의 다짐은 정원사의 죽음과 함께 깨지게 된다. 이전에도 손과 발을 떨며 초조함을 내비치던 남자는 CEO와 아내에게 총을 들이밀며 고민한다. 억울한 누명을 덮어 쓸 수도 있으니 이들도 함께 죽이는 게 안전할 거라는 생각과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 남자는 훅 다가온 선택의 순간을 두고 고민한다.
고민하는 남자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선을 넘지 말아요. 당신은 살인자가 아니잖아요.”
남자는 아내의 말에 설득되어 결국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떠나기로 결정한다. 후반부 내내 무언가를 고민하던 아내는 결국 선을 넘는 선택을 한다. 부부를 위협했던 남자의 머리를 치고, 억압된 결혼 생활을 하게 만든 남편을 총으로 쏜 후 아내는 자신의 발을 바라본다. 아내의 발 앞엔 옅은 턱으로 된 정원과 현관의 경계선이 있다. 아내는 죽은 두 사람을 남겨두고 경계선을 넘어 걸어간다. 아내는 그렇게 어떤 선택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던 보이지 않는 선을 벗어난다.
선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나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선택과 아슬아슬한 상황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선택. 후자에 해당하는 선택만 가능했던 아내는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온전하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백인 남성으로서 많은 선택지를 가졌던 CEO와 여성으로서 몇 가지의 선택지를 받은 아내. 그리고 아무런 선택지를 받지 못하고 허무하게 하차한 유색 인종 정원사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선택의 순간, 선을 넘어설지 보이지 않는 선에 갇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반복할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 선택지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는 않는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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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뷰 - 온통 피칠갑을 했지만 따뜻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과잉' 일 것이다. 화려한 이미지들의 연속과 정신없는 편집 그리고 시종일관 영화 내내 흘러넘치는 음악들. 이것들은 혹자에겐 분명 불호의 영역일 것이다. 당장 포털사이트와 왓챠의 리뷰만 찾아보더라도 너무 과하다, 지독하다, 영상만 화려하다, 라는 평이 주를 이루고 그의 영화들은 관객들의 평가에서 4점(5점 만점의)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CF 감독 출신이라는 편견도 그런 시선에 어느 정도 작용하는 듯하다. 일부에서는 빈약한 서사를 외견의 화려함으로 덮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평도 들리는데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전 세계에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감독은 그가 유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좋은 영화일까. 아니 질문이 틀렸다. 코토코(마츠 다카코)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어째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 이니까.
그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주로 부조리하고 끔찍했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나카타니 미키)는 동생의 아픔으로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덕분에 생긴 버릇(곤란한 상황에서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과 애정결핍으로 일생 내내 고통을 받고 마츠코가 이루려는 남자와의 관계는 모두 무너진다. 「고백」에서 역시 수없이 망가지는 인물들의 가족을 보여줬고, 「갈증」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으로 가부장의 환상을 깨부순다. 그런 면에서 「갈증」과 「온다」의 가부장들은 닮아있다. 부부와 딸로 이루어진 세 가족이라는 것이 그럴 것이고 두 가족 모두 딸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진다. 그들은 아름답고 완벽한 가족(아파트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을 꿈꿨지만 그들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었고 그들의 잘못으로 가족은 처참하게 무너져버린다. 「갈증」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악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다」의 아버지는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갈증」은 분명 거기에서 멈춰 섰지만 「온다」는 다르다. 「온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영화가 중반을 넘어 잘못된 가부장이 죽어버리고 나서이다.
완벽해 보였던 부부
'좋은 아버지', 히데키(오카다 준이치)에게 가족은 그저 겉치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영화에서 그가 가족을 사랑했다는 묘사가 두어 번 반복해서 나오지만 그것은 본인이 원하는 이미지 속에서였을 뿐이다. 블로그에 올라가는 육아일기 속에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빠이지만 현실에서는 병원에 입원해 처치를 받고 있는 딸을 걱정하는 아내 앞에서 웃는 얼굴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시오패스가 있을 뿐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로 노자키에게 '나를 필요로 해서 사랑스럽다'라고 답하는 것을 보면 그의 모순을 잘 알 수 있다. 딸과 아내가 고통받고 있을 때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가족에 대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아름다운 가족의 이상이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들의 가족을 덮치고 어머니가 주신 부적이 찢어진다. 사태의 회복을 위해 친구의 소개로 노자키(오카다 준이치)를 따라 마코토(고마츠 나나)를 찾아가지만 마코토는 그의 역린을 건드리고(부인과 아이한테 잘해야 귀신이 오지 않는다) 그는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나쁜 면은 모두 부정한다. 노자키와 할머니 영매를 찾아갈 때, '그것'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절대 대답하지 말라는 영매의 당부를 무시하고 그는 자신의 목소리(아내에게 "고작 애 하나 낳아놓고 잘난척하는 거야?", "그런 몹쓸 여자를 어머니로 뒀으면서"라고 하는)를 듣고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화를 낸다. 하지만 본인이 기억하지 못할 뿐 아내의 회상에서 그 일은 진실로 밝혀진다. 그는 '좋은 아버지'의 모습만 올라가는 자신의 블로그처럼 편집된 기억만을 가진 채 살아가는 '빈 껍데기' 그 자체이다. 결국 코토코의 목소리를 빙자한 '그것'에게 속아 죽게 된다. 영화에서 그는 끝까지 무지한 채로 남는다. 영화에서 그것에 의해 부적이 두 번 찢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첫 번째 부적은 '그것'이 아니라 부인인 카나(쿠로키 하루)가 찢은 것이다. 계속되는 남편의 냉대와 가식에 지친 그녀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집안의 물건을 내던지게 되고 딸아이에게 폭언을 내뱉는다. 집안이 엉망이 되고 정신을 차린 카나는 남편이 오기 전 부적을 가위로 자른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귀신)가 집안을 이렇게 만든 것처럼 꾸민다. 후에 나오는 '귀신은 인간이 만든다'는 모티브를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히데키가 가식으로 무장한 무능한 가부장이라면 아내인 카나는 '좋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그는 좋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지 못했고, 절대 어머니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에 살아간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는 데는 무관심하고 오직 겉치레만을 중요시하는 남편이 죽고 나자 오히려 카나는 후련하게 생각한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듯이 결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느끼지만 그녀에게는 그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는 흔적인 딸아이가 존재한다. 그녀는 절대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하는 육아는 힘에 부치게 되고 결국 자유를 갈망해 남편의 친구와 바람을 피기 시작한다. 마코토에게 아이를 맡기고 화장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왔을 때 '그것'이 집에 들이닥치고 마코토가 대신 희생해 그녀는 딸과 함께 도망치지만 그녀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거울처럼 마주하고 죽게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나쁜 일은 다 귀신 탓이지. 옛날이야기 속에서 아이가 사라져서 귀신이 데려갔다고 하는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야. 가족이 아이를 죽이고 귀신 탓을 하는 거지.'
자꾸 집안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한 히데키는 민속학 교수인 친구 츠다에게 조언을 청하고 츠다는 귀신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귀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모든 일의 근원이 인간이었을 뿐이다. 히데키에게 그리고 이어 그의 딸에게 달라붙은 귀신이 어떻게 그들에게 붙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지만(어린 생명들이 죽음에 끌리듯-벌레나 작은 동물들을 죽이는 것- 죽음 역시 어린 생명들에게 끌린다는 말이 나오긴 한다) 결국 히데키의 딸에게 귀신이 붙은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외로워서'였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히데키가 귀신이 벌인 짓이라고 생각했던 첫 번째 습격은 아내의 거짓말이었다. 귀신에게 희생당하는 등장인물들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며 두려워하지만 모두 죽기 전에는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귀신이 거울 두려워한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히데키가 죽기 전에 들리는 그의 가식을 까발리는 말들과 카나가 죽기 전 보는 어머니의 환영은 그들 스스로를 보여준다. 지독히도 싫은 나 때문에 나를 마주하지 못하고 그들은 결국 자기혐오에 뒤덮여 그것에게 죽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독하게 잔인한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의 말로인가. 그것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인가. 다행히도 그것이 보여주는 거울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유사가족의 완성
이 작품의 두 주인공처럼 보이던 히데키가 죽고, 결국 카나까지 죽은 후 바통을 이어받는 것은 엉뚱하게도 노자키이다. 그저 마코토와 코토코, 영매 자매에게 주인공들을 이어주는 역할처럼 보이던 노자키가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노자키는 히데키와의 대화에서 히데키의 모순을 포착한 사람이다. 히데키가 딸이 '나를 필요로 해서 사랑스럽다'라고 얘기하자 '그런 말을 한 사람을 예전에 봤었는데 얼마 뒤에 부모가 아이를 죽였다'라고 답한다. 그는 예전 애인이 임신을 하자 중절 수술을 권한 과거가 있다. 애인은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만 그는 부모가 될 자신이 없었고 애인과 헤어진 후 연인도 친구도 만들지 않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호스티스를 하며 영매 일을 하는 마코토에게 마음을 주고 있고 히데키와 카나의 일에 분명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면서도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그런 그를 코토코는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는 잃고 싶지 않아서'라면서 그의 모순을 지적한다. 그는 자신의 모순을 마코토에게 투사한다. 영매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낸 상처 때문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마코토가 상처 받을까 봐 히데키의 딸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염려하지만 마코토는 내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과 그 아이(히데키의 딸)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 말한다.
마코토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 중에서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그녀가 스스로의 몸에 수놓은 수많은 상처는 할머니 영매의 말(통증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처럼 삶을 향한 욕구를 상징한다. 마코토는 언니인 코토코와 달리 영매의 자질을 타고나지 않았지만 언니가 귀신과의 싸움에서 얻은 흉터를 보고 언니처럼 영매가 되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몸에 새긴다. 끝끝내 카나조차 포기했던 아이를 마코토는 거리낌 없이 맡았고 결말 직전에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같이 그것의 세계로 끌려들어 가기까지 한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그것에 의해서 몸이 찢어지고 상처를 입으며 피를 흘리고 죽었지만 그녀는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릴지언정 죽지 않는다. 그녀는 상처에 익숙한 사람이고 그것은 자신을 마주하는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말에서 노자키는 다른 인물들처럼 그것을 마주하지만 할머니 영매의 말을 기억해내고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삶으로 돌아온다. 코토코는 그것과 너무 오래 함께해 잠식당한 아이를 죽이려 한다. 코토코를 막는 것은 노자키와 마코 토이다. 그들이 아이를 지키는 방법은 '확실하게 끌어안는 것' 뿐. 피칠갑과 수많은 죽음 끝에 한 가족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상처는 받을지언정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알량한 핏줄 따위가 아니라 잔뜩 뒤집어쓴 남의 피이니까.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아이와 함께 그들은 오므라이스를 먹으러 갈 것이다.
케첩은좀 덜 뿌렸으면 좋겠다. 영화가 너무 빨개요.한줄평 : ★★★★, 온통 피칠갑을 했지만 따뜻하고, 그 따뜻함의 원천은 분명 생명력일 것
※ ps. 그의 '과잉'이 가장 완벽한 리듬으로 어우러졌던 영화는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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