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수2021-11-28 09:24:41
착한 삶이 착한 게 아니다?
브레이킹 배드 리뷰
착한 삶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믿는다면 <브레이킹 배드>를 볼 필요가 없다. 넷플릭스 -<브레이킹 배드>는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 를 끄고, 자기 능력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도와줄지 고민하는 게 훨씬 낫다. 요즘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 중 몇몇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었다. 남들을 잘 살게 도와주면서! 그 사람들의 이타심 덕에 나도 성장했다. 글쓰기의 본질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에는 그 사람들이 주지 못한 깨달음이 있다. 자신의 착한 삶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라는 깨달음이다. 드라마의 내용부터 그걸 일으키도록 의도했다.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은 가난한 고등학교 교사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턴)이다. 그는 가족을 위해 마약을 제조해 파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을 위한다는 목적은 분명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불법적인 일로 그 목적을 이루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느새 월터를 응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월터의 범행을 막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발전된다. 특히 월터의 아내 스카일러(안나 건)를 보면서 이걸 많이 느꼈다. 그의 행적을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이 하는 일은 범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면 그녀의 집요한 질문이 거슬리는 때가 찾아온다. 심지어 그녀는 임신 중이었음에도 담배(!)를 남편 몰래 피우기까지 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월터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브레이킹 배드>의 매력은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로부터 나온다. 선행과 악행의 불분명한 경계선. 그 딜레마를 <브레이킹 배드>는 마약 범죄라는 흥미로운 소재와 접목시켰다.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볼 때도 똑같은 딜레마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우스 오브 카드>는 프랜시스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클레어 언더우드(로빈 라이트) 부부에게만 이런 딜레마가 나타났을 뿐이다. 덕분에 주변의 선한 인물들에게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등장인물 거의 전부에게 이런 딜레마가 드러난다.
서론에서도 이야기했다. 자신의 선한 삶을 세상이 알아줄 거라 생각한다면 <브레이킹 배드>는 안 어울린다. 솔직히 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알아서 자신의 삶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제공하려 블로그, 유튜브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러지 않았기에 <브레이킹 배드>를 재밌게 보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브레이킹 배드>는 나한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드라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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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박사의 그늘은 매력적이지만...
누구나 마음속의 그늘이 있다. 그걸 조금씩 드러내 놓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완전히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감추고 살아도 과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 그늘의 영향을 시종일관받으면서도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평생을 그렇게 벗어나고 극복하려 애쓰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한 사람의 성격과 생각을 만든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그늘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개인에게는 극복할 목표를 주고,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면서 좀 더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주인공 천박사(강동원)의 그늘을 다루고 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천박사는 가짜 퇴마사역할을 하는 것처럼 등장한다. 그는 퇴마를 하는 회사를 만들고 민배(이동휘)를 직원으로 고용해 함께 퇴마활동을 한다. 그 퇴마활동에는 여러 첨단 기기들이 동원된다. 즉, 천박사가 하는 퇴마 행위에는 진짜 귀신이 등장하지 않고, 심리학을 전공한 천박사의 심리적인 해결방법으로 의뢰자들을 설득해 나간다.
천박사의 숨겨진 그늘
그저 가볍게 보이는 천박사와 민배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천박사의 모습은 꽤 진지하고 심지어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의 과거가 이야기되면서 드러나는 천박사 복수는 그가 하루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천박사의 그늘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는 과거에 할아버지와 동생을 잃게 되었고 그 일에 관여된 악당을 찾고 있었다. 그 과정은 꽤 길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천박사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고 괴짜처럼 보이는 그는 무당이었던 할아버지의 기운을 물려받아서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악귀와 대결에 좀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천박사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가 가진 내면의 힘과 능력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악귀와 싸우면서 크게 다치지 않고 대등하게 대결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천박사가 유경(이솜)의 의뢰를 받은 이후 악귀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아무리 천박사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수십 명이 천박사와 동료를 공격하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천박사의 그늘이 공개되면서 천박사의 유머는 힘을 잃고, 옆에 있는 민배만이 망가지며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유머도, 액션도 힘이 떨어진다.
천박사가 본인의 그늘을 드러내지 않고 진지하게 악귀의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가 평생 가지고 있던 목표였고, 그의 슬픔을 해소할 수 있는 복수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점점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도움 없이 악귀 우두머리인 범천(허준호)과 대등하게 대결을 벌인다. 영화에서는 그 대결을 마지막에 넣어 두었지만 천박사의 강력한 힘과 그가 가진 무기의 절대적인 힘이 마지막 두 인물의 싸움을 시시하게 만든다.
천박사를 제외하면 흥미가 떨어지는 이야기와 캐릭터
천박사 역을 맡은 강동원은 과거에 <전우치>나 <군도>에 등장해서 조금은 비현실적인 상황에 맞는 이미지를 보여준 적이 있다. 도술을 쓰는 존재로 등장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과거의 작품들처럼 이번 <천박사 퇴마 연구소>에서도 가벼우면서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나머지 등장인물들에 비해 천박사라는 캐릭터는 꽤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천박사는 밝지만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천박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배는 유머 캐릭터로 소비되고 있고, 황사장(김종수)은 천박서의 퇴마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잔소리 꾼으로 남는다. 의뢰인 유경 역의 이솜은 유일하게 유머가 없는 조용하고 진지한 인물이지만 특별히 매력적인 역할로 등장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영화의 빌런인 범천의 카리스마는 눈에 띄지만 그 카리스마를 더욱 돋보이게 할 다른 빌런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범천을 따르는 부하들은 너무 약하고 그마저도 후반부에는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린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는 김성식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과거 <헤어질 결심>,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생충>의 조감독 출신인 그는 좋은 배우와 깔끔한 화면으로 퇴마활극을 만들었지만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98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에도 이 영화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 강동원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더욱더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영화다. <빙의>라는 원작 웹툰이 있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흥미가 떨어진다. 이어지는 웹툰의 후속 시리즈가 있기 때문에 이번 첫 번째 영화가 어느 정도 흥행하느냐에 따라 연작 시리즈가 될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천박사라는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고 주변인물들이 이야기를 맴돌고 있다. 무엇보다 악귀가 등장할 때도 특별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후반부로 갈수로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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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사의 손꼽히는 거인
7★/10★
〈길위에 김대중〉은 탄생부터 이른바 ‘양김 분열’ 직전까지의 김대중의 삶을 다룬 영화다(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고 한다). 90년대생인 내게, 이 영화는 그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정도로만 막연히 알고 있던 양김 분열 이전의 김대중의 정치적 여정을 살필 수 있던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민주주의, 평화, 지식인, 연설가의 이미지가 흐릿하게 중첩되어 있을 뿐이었던 그가 신념을 가진 협상가, 전술가, 의회주의자의 이미지로 재각인되었다.
1924년 전라도의 한 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사회에서는 해운회사를 세워 승승장구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는 사업을 지키기 위해 우익 단체에 가입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인민군에게 큰 고초를 당했고, 전후 부산에서는 권력을 향한 이승만의 야욕(이와 반대로 이승만의 ‘건국’과 ‘호국’ 업적을 기리는 영화로는 〈기적의 시작〉이 있다)에 크게 분노했다. 이 두 경험은 정치인 김대중의 향로를 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이긴다’라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사업과 달리 정치인으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연이어 낙선하다 38의 나이에 국회에 입성했다. 김대중은 정치 입문 초창기부터 탁월한 언변과 논리로 주목받았다. 박정희가 왜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김대중 하나를 못 당하느냐고 닦달했다는 대목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말이 평생의 든든한 무기가 되어주리라는 걸 짐작케 한다.
김대중에게는 평생에 걸쳐 추구할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있었다. 국가 주도 경제가 아닌 대중 경제론, 중앙집중이 아닌 지방 자치제 등은 이를 위한 구체적 정책 제언이었다. 더불어 의회가 필연적으로 협상을 통해 굴러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점을 인식한 그의 현실 감각이 흥미로웠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을 무조건 반대하는 대신 이를 국가 발전과 민주주의 제도 확립과 연결할 방안을 제시했다. 즉 그에게 정치는 전부냐 제로냐(all or nothing)의 문제가 아니라 이득을 보는 협상을 이끌어내는 행위였다. 이런 태도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운동가‧혁명가라면 타협할 줄 모르는 불굴의 정신으로 목표하는 바를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의회에 소속된 국회의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대중과 함께하는 정치인이라면 늘 그럴 수만은 없다. 이들의 방법론은 달라야 한다. 전제정치의 수장이나 왕이 아니라면 협상과 타협은 불가피하다. 영화는 정치인 김대중이 꺾이지 않는 신념과 협상할 줄 아는 현실감을 함께 가진 정치인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현대 한국 정치의 손꼽히는 거인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에 정치 활동을 하면서 김대중은 여러 고초를 겪었다. 100만 명이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이고, 당시 여당이 엄청난 금권 선거를 했는데도 간신히 대선에서 승리하자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김대중의 성취는 지역감정으로 줄곧 폄훼되었고(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는 어떻게 김대중에게 지역감정의 족쇄가 씌어졌는지를 다룬다), 심지어 정보기관에 의한 암살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탄압은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많은 이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멈추지 않았다. 해외에 망명 중일 때도 유수의 언론사에 기고문을 보내거나 인터뷰에 임했고, 강연을 진행하는 등 정치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민주화의 상징 김영삼과는 미묘한 연대를 이어가며 끝내 직선제를 쟁취해냈다. 그리고 언제나 김대중의 곁에는 그를 지지하는 국민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김대중 석방이었다는 데서 그가 많은 사람에게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적확히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의 시대정신을 제시하며, 단호하면서도 유연하게 원하는 것을 얻어낸 그의 정치 행로는 뭇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달리 사뭇 감동과 감탄을 자아내는 데가 있다.
정치인을 회고하는 영화는 모두 나름의 관점이 있다. 〈기적의 시작〉(2023), 〈노무현입니다〉(2017), 〈문재인입니다〉(2023) 등의 영화는 모두 대중에게 해당 정치인을 어떤 가치로 기억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 가치는 그 정치인이 살아온 시대를 대변한다. 〈길위에 김대중〉은 신념을 가졌으되 협상할 줄 아는 정치인 김대중의 가치를 관객에게 제시한다. 소구력이 있는 가치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집요함은 탄압‧협상‧개척의 질곡을 건너 끝내 꽃을 피웠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지났고, 이제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이유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김대중과 그의 시대가 빚어낸 무언가에 빚지고 있다. 대중 정치인과 운동가,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국면에 맞추어 대중과 함께 자기 영역을 넓힐 줄 알았던 정치인. 인물에 대한 호불호와 업적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순 있겠지만, 누구도 김대중이 우리 현대사의 손꼽히는 거인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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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엄마는 엄마가 아니잖아
벌써 20년이 넘도록 은퇴를 번복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마 그의 최고 문제작이 될 듯하다. 난해하다는 평가부터, 최고라는 극찬까지 사람들의 해석도 제각각이다. 심지어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도 시사회에서 "나도 무슨 얘긴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언급을 했다. 그만큼 이 애니메이션은 작가주의적 성향이 짙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숨겨진 뜻을 해석하려 들지 않고 그가 그동안 만들어왔던 애니메이션처럼 동화를 보는 기분으로 따라가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세계물일 뿐이다. 그래도 역시, 이야기는 통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싶어 지는 것들 투성이다. 특히 가장 중심인물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 이야기는 스튜디오지브리, 나아가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상징하는 이야기들로 꽉 차있고 그 안에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장부였지만 결핵으로 평생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어머니와, 군수공장으로 비행기를 만들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대부분 애니메이션에는 그래서 마더 콤플렉스, 강인한 여성상, 20세기 초 전투기에 대한 로망 등이 가득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인공 마히토는 엄마가 있던 병원이 불타 엄마가 돌아가시고, 도쿄대공습을 피해 시골 공장 근처로 이사 간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내는 도중, 집 근처 신비한 탑과 집 근처에 사는 왜가리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도 그렇게 도쿄대공습을 피해 공장 근처 시골집으로 이사 가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시골집으로 가서 이상한 세계로 가는 이야기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실제 어머니는 병원이 불타 일찍 돌아가시진 않았고 오래 사셨다.
군수공장으로 비행기를 만드는 아버지가 그대로 나오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마을의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 애니메이션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최대한 전쟁에 대한 언급이나 일본의 피해를 강조하진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자해를 했는데도 다른 아이들이 그랬을 거라 철석같이 믿는 아빠가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듯하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가져와 집안에 늘어놓는 비행기의 유리덮개들은 줄지어있는 유리관 같은 모습이다. 이렇듯 자국민들도 죽음으로 내몬 전쟁의 실체를 은근하게 비판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제로 종종 일본의 제국주의가 타국에 남긴 상처를 비판했고, 군수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전쟁부역자라 부르며 싸우기도 했다.
스승과 친구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지라 드러나는 정도일 뿐이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승이었던 타카하타 이사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프로듀서이자 대표이사인 스즈키 토시오에 대한 이야기다. 스즈키 토시오가 개봉 전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왜가리는 스즈키 토시오 본인이다. 자신과 했던 대화들이 그대로 애니메이션에 녹아있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즈키 토시오는 애증의 관계다.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메쥬>의 기자였던 스즈키 토시오가 미야자키 하야오 특집기사를 내려고 찾아갔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무시하며 문전박대한 일은 유명하다. 마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끈질기게 마히토를 찾아오는 왜가리와 흡사하다. 왜가리가 이상한 유언비어를 떠들고 다녀서 죽이고 싶어 하는 것도 비슷하다.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 만든 <게드전기> 홍보를 할 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로 홍보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분노한 적이 있다. 여러 루머와 안 좋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스즈키 토시오가 지브리 초창기 작품들을 히트시킨 프로듀서임에는 분명하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생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걸 알고 애니메이션 속 마히토와 왜가리의 관계를 살펴보면, '자기 길을 가려는 감독'과, '감독을 속이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고 이용해먹기도 하는 프로듀서'의 밀당이 느껴진다.
또 애니메이션 속 큰할아버지는 타카하타 이사오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토에이 동화'입사 선배로, 애니메이션에서 영화적인 내러티브와 훌륭한 미장센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한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으로는 <반딧불이의 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추억은 방울방울>, <이웃집 야마다 군>,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내러티브가 잘 잡힌 미야자키 하야오의 20세기 작품들은 전부 타카하타 이사오가 조언을 하거나 참여한 작품이다. 그만큼 그는 애니메이션의 이야기와 구성 미장센 등의 균형을 잘 맞추는 사람이었다. 그는 <원령공주>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오로지 자기 멋대로 내달리는 작가주의적 작품이 되는 건 그래서다. 이것을 알고 애니메이션 속 큰할아버지의 대사나 행동을 잘 살펴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를 얼마나 존경했었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작 도중 사망했다.
인터뷰에는 나오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탑 안의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키리코는 그의 그림스승이었던 천재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일 것 같다.(지브리의 채색 담당인 야스다 미치요라는 이야기도 있다) 키리코는 불꽃이 나오는 막대기로 선을 그리며, 그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 오오츠카 야스오도 단순한 그림 스승이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험난한 애니메이터 인생을 이끌어준 선배이기도 하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
숲으로 들어가 사라진 마히토의 새엄마 나츠코를 찾기 위해, 마히토는 탑으로 들어간다. 불에 타 죽은 마히토의 엄마가 살아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왜가리를 따라서. 그 탑은 원래 우주에서 떨어진 물건으로, 아주 이상한 것이라고 한다. 큰 할아버지는 그 밖에다 건물을 만든 것이라고. 탑의 속 안으로 빨려 들어간 마히토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기이한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엄마와 하녀 키리코도 만난다. 탑 속의 세상 역시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이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스즈키 토시오와 타카하타 이사오의 인연을 담고 있는 만큼 이 세계가 <애니메이션의 세계> 그 자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도착했을 때 마주하는 황금문에는 '나를 배운 자는 죽는다'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상업미술 업계 중에서도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같은 사람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려야 하는 일, 움직임을 물리적으로 이해하고 관객에게 이해시키도록 변형해서 멋있게 만드는 일, 내 그림이 아닌 그림을 수천 장씩 그려야 하는 고통, 그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중노동이다. 심지어 박봉. 나 역시 디자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므로 그 고통을 어느 정도는 안다.
내가 대학생 때, 같이 날밤새며 과제를 해 추레한 모습으로 과실을 나서는데 원서를 내러 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난 친구들과 이렇게 소리쳤다. "여긴 지옥이야! 도망가려면 지금이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황금문의 문구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어리둥절하는 마히토는 펠리컨들에게 떠밀려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 가지고 온 유일한 무기인 활은 다 망가져버렸다. 그래, 그렇게 멋모르고 이 업계에 들어오게 되는 거야. 게다가 그 망가진 활처럼, 네가 기존에 배운 건 다 쓸모없거든. 다시 배워. 애니메이션을 배운다고? 넌 이제 죽었다.
젊은 키리코는 '와라와라'라고 하는 생명을 돌보고 있다. 이 세계에서 그가 하는 일은 무덤을 지키는 것과, 와라와라에게 먹을 것을 팔아 그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돕는 일이다. 애니메이션은 그런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생명을 주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 반복된 그림 몇 장을 그렸을 뿐인데, 그 그림은 살아서 움직이고 뛰어다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스승인 오오츠카 야스오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진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은 생명을 창조하는 것만큼 숭고한 일이다. 비록 그 일을 배운 너는 죽겠지만. 응.
그러나 이 세계에도 위험한 존재가 있다. 펠리컨들과 앵무새들이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먹어치우는데 몰두한다. 펠리컨은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생명인 와라와라를 먹어치운다. 앵무새들은 뜨거운 숨을 훅훅거리며 사람을 잡아먹는다. 펠리컨은 갈라파고스화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상징한다. 후대 양성의 실패, 보수적인 정치환경, 국내 내수만으로도 돌아가는 경제, 오타쿠 문화의 확산 등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침체되게 만들었다. 와라와라처럼 생명력 있는 애니가 태어나는 것을 갉아먹는다. 80~90년대만 해도 정말 독창적이고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많이 만들었지만, 지금은 예전 황금기 같은 애니메이션이 거의 없다. 또한 제살을 깎아먹는 업계는 스튜디오 지브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수많은 재능 있는 애니메이터를 키워냈지만, 정작 모회사나 제작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만 감독으로 원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감독으로 데뷔할 기회를 주지 못했다. 결국 스튜디오 지브리는 늙고 죽어가고 있다.
앵무새는 남의 말을 따라 하는 존재다. 큰 덩치에 식욕에 침잠되어 훅훅거리는 모양새. 앵무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토록 혐오하던 오타쿠들과 흡사하다. 앵무새들은 '애니메이션을 배운자'즉 애니메이터들을 먹이로 삼는다. 그들의 삶을 갈아 만든 모에화, 먹잇감에만 관심이 있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업계가 똑같은 성적 모에화 대상물만 만들게 한다. 그리고 오타쿠는 대체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만든 것에 열광하고 남이 만든 걸 보고 만드는 2차 창작(팬픽)에 열광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타쿠를 치가 떨리도록 싫어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
하지만 이런 위태위태한 세상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균형을 맞추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큰 할아버지, 타카하타 이사오다. 돌들을 깎아 만든 블럭을 아주 세밀하게 쌓아 만든 균형. 타카하타 이사오의 애니메이션은 그런 느낌이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그 블럭을 물려주고, 이 세계, 애니메이션의 균형을 지키게 하고 싶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멘토로 참여했던 작품들은 망상이나 상상보다는 현실적인 내러티브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하지만 잉꼬대왕, 오타쿠들의 대왕은 성격이 급해서 그 유산이 전달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결국 블럭을 쪼개버리고, 큰할아버지가 유지하던 세상은 무너져버린다.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한 유산은 사라져 버린다. 스튜디오 지브리도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물려받지 못해, 지난 9월 닛폰 테레비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사람들은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많은 것을 배웠다고 이야기하지만, 둘은 연출방향 자체가 다르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참여하지 않은 후기작들이 급격히 망상적인 작가주의적 애니메이션으로 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도 타카하타 이사오가 물려주려고 한 것들을 다 물려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큰 할아버지가 물려주려고 한 블럭들 중, 그 난리통에 한 개만 겨우 가지고 나왔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지브리 스튜디오,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전 세대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지 못한 불완전한 세계였던 셈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자신의 친구와 스승들이 죽어가고 자신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마땅한 자신의 후계자가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스튜디오 지브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신의 블럭을 펠리컨과 앵무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팬들은 또 다음 세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럼,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느꼈던 생명과 감동을 느껴야 할까. 이것에 대한 답은 바로 새엄마 나츠코와의 일화가 말해준다. 마히토는 엄마가 죽고, 엄마의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새엄마로 들어온 나츠코와 데면데면하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새엄마를 엄마로 인정하고 엄마라고 부르는 일은 쉽지 않다. 마히토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나츠코는 이미 아버지의 아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나츠코가 숲 속 탑 안으로 들어가 산실에 들어가 힘들어하고 있는 장면은, 아직 관객들에게 '진정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근래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들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가 만든 첫 작품 <게드전기>는 엄청난 혹평속에 팬들은 그 작품을 인정조차 하기 싫어한다. 게다가 최근 고로의 작품은 3D 애니메이션이었다. 수작업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지브리 스튜디오에선 정말 파격적인 행보인 셈이다.
위에서 말한 애니메이션 업계의 펠리컨들, 여러 사정으로 결국 스튜디오 지브리의 후계자가 될만한 인물은 아버지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한 미야자키 고로밖에 없게 되었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사망한 지금 앞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마저 사망하게 된다면,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으로 나올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고로가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행보를 보니 3D 쪽으로 가게 될 것 같다. 그것을 지브리의 팬들이 받아줄 것인가? 고로의 애니메이션을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라 인정할 것인가? 엄마가 죽어서 갑작스레 새엄마가 된 나츠코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죽은 엄마를 살릴 수는 없다. 죽음은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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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새엄마를 받아들여 달라고 말하고 있다. 고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랑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흉내 내는'것을 싫어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격을 존중한다면 더욱 그렇다. 거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도 역시 이전 세대의 유산을 다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온전하게 애니메이션 세상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노라고 고백한다. 좋든 싫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떠나게 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는 세상, 그대들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자, 그대들이여.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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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 나오는 리뷰들을 보니, 충격적 이게도 이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 미화로 알려지는 것 같다. 일단, 지브리의 타카하타 이사오는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제국주의 비판하는데 앞장서는 인물이다. <반딧불의의 묘>도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내용을 보면 일본의 제국이 '자국민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비판하는 이야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당지에 만화를 연재한 경력이나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일본의 좌파는 자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다. 지브리의 두 거장이 그런 성향이니 지브리 전체는 사실 말할 것도 없다. 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역시 도쿄대공습이 나오지만,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거나 무서운 모습보다는 병원이 불타는 모습이 보일 뿐이고, 도쿄대공습이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전쟁에 대한 피해나 반성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이 애니메이션은 그냥 반전영화가 되어버리므로, 그걸 최대한 피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시절에 집중한 것이다. 다음 장면은 그것을 더 잘 드러낸다.
마히토가 이사 간 시골 학교의 아이들과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기가 죽을뻔했다는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돌로 자기를 쳐서 자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한 게 아니라 넘어져서 그랬다고 하지만, 군수공장을 하던 아버지는 아이들이 그랬을 거라며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장면은, 도쿄대공습이나 원폭이 일본의 자해와도 같은 원죄이며 제국이 그것을 남탓하고 있고, 사실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변명하지 않는 일본국민을 비유하는 장면이다. 마히토는 아니라곤 하지만 거기서 더 강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마히토는 상처를 스스로 냈다고 큰할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이런 지브리가 제국주의 미화라니, 그건 좀 억측이라 생각한다. 전작 <바람이 분다>도 일본 내부에 있는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 것에 전쟁미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오히려 전쟁을 비판하면서도 전쟁무기 광인 자신을 비판한 내용이다.
진짜 제국주의 미화는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을 은근하게 깔고 있는 <크리에이터>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슈도 안되었던 점이 사실 더 의아하다.
*키리코 캐릭터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오오츠카 야스오이길 바랬으나, 이전 스즈키 토시오의 언급에 의하면 지브리 채색 담당이었던 야스다 미치오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우'라고 부르기도 했던 야스다 미치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바람이 분다>까지 거의 모든 지브리의 작품에 채색을 담당해왔었다. 사실 오오츠카 야스오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 스승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는 맞으나, 지브리가 만들어질 때 합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이 일하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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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게
DIRECTOR. 촹칭션(CHUANG Ching-Shen)
CAST. 천옌페이(Yan-fei CHEN), 항첩여(Chloe XIANG), 치우이타이(Yitai CHIU) 외
PROGRAM NOTE.
1997년. 제1여고 입학시험에 실패한 아이는 엄마의 강압에 못 이겨, 제1여고의 야간 학생이 된다. 같은 교복을 입지만 명찰의 색이 다른 주야간의 학생들은 교실을 공유하는데, 아이는 주간 학생 민과 책상을 나눠쓰게 되면서 단짝 친구가 된다. 민과 함께 민의 교복을 입고 주간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던 아이는 어느 날, 루커를 만나 미묘한 설렘을 느끼게 된다. 아련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학업 성취도에 따른 계급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했던 그 시절의 학교를 배경으로, <우리들의 교복 시절>은 십 대들의 사랑과 우정, 좌절과 성장의 스토리를 담백하고 솜씨 좋게 풀어 간다. <침묵의 숲>(2020)으로 금마장 신인배우상을 수상한 진연비(천앤페이)를 비롯한 대만의 연기파 신인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풋풋한 성장 드라마를 완성했다. (박선영)
생각해 보면 조금은 이상한 시절이었다.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는 말이 교과서 속 혹은 박물관의 유리벽 속에나 존재하던 시절. 모두 똑같이 소중한 제일여고 학생이라면서 주간반과 야간반 학생들의 명찰 색깔을 다르게 하고, 거기에 굳이 태양과 달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해 달이 발광체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 정말로 "똑같은" 것일 리 없다. 역시나 주간반과 야간반에게는 입학 첫 날부터 사뭇 다른 공지사항이 주어진다.
입시를 대하는 1997년 대만 풍경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꽤나 익숙하다. 구체적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큼직한 정서만큼은 같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에게 한 "여자는 사범대가 제일이야" 같은 말, 당시 훨씬 어린 나이였던 나조차 심심찮게 들었던 말이니까. 어른이 되고, 그 시절 그 분들이 진심으로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 것임을 이따금 실감할 때조차, 내가 아이의 나이가 될 때까지 쭉 이어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느꼈던 갑갑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자꾸 사춘기의 아이들을 채근한다. 어른들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당시 입시의 중요성이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기회로 보였을 테니까. 인생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그 계단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올라,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 추후의 노력으로 뒤집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 요즘은 많이 무너지고 있다지만 90년대와 그 이후 꽤 오랜 시간, 학벌은 그런 의미로 많이 받아들여졌으니까.
대입도 아니고 고입 시험에서부터 그런 소외감을 느껴버린 아이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거짓을 쌓는다. 그런 아이를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동경하는 친구 민, 자꾸 설레는 대상 루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발돋움을 해보려는 마음이었을 뿐인데. 그러나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거짓은 거짓이라, 결국 거짓들은 핑퐁핑퐁 튀어오르고, 누구도 못되게 굴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제각각의 상처를 받는다.
흔히 '친한 두 (여성) 친구가 동일한 한 남성을 좋아하게 된다'는 설정을 중심에 두는 구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정과 사랑이 서로 경합을 벌여야 하는 게 싫고, 그 과정에서 더 소중한 감정들이 배척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런 설정을 사용하면서도 과하게 중심에 두지 않는다. 우정과 사랑이 서로 경합을 벌이는 대신, 불평등한 현실의 감각과 퉁 부딪힌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나눠듣고 탁구를 치며 90년대 청춘을 아름답게 회상하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보다 평등하지 못하다는 감각이 앞서는 슬픔을 보여주는 식이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청춘이 드러난다. 사실 아름답기만 한 청춘이 어디 있나.
우리가 대만 청춘영화에 기대하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정서들을 충분히 가진 영화다. 동시에 성인의 시각에서 청소년기를 산뜻하게만 그리며 얄팍해지는 대신, 내면에서 끊임없이 재난 경보가 울리는 시기라는 점도 명확히 짚는다.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말을 긍정할 수 있게 된 후에도, 나는 그 시절 내가 느꼈던 갑갑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춘기가 그런 시기 아닌가. 나도 아직 나를 잘 모르겠는데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할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혼란스러움, 할 일은 많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일은 그게 아닌 것 같은 따분함, 마음의 가장 연약한 속살을 마주할 때마다 남들의 껍질은 참 단단해 보이기만 해서 계속 느끼는 초라함과 질투, 나 스스로도 내가 너무 어리고 서툴러 가끔은 나 자신을 견디는 게 벅차서 폭발할 것 같은 마음들까지.
이 영화는 그 나이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듯이. 재난만 있던 시절도 아니고, 아련함만 있는 시절도 아닌 그 시절에게. 때로는 거짓으로 위로 받은 마음조차 거짓은 아니었다고 끌어안으며, 영화에 나온 대사를 축복처럼 건넨다. May the Force be with you!
10/05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상영코드 202)
10/06 12: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상영코드 264)
10/08 17:00 영화의전당 중극장 (상영코드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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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미장센 빼고는 모두 실망스러운 영화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암암리에 활동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상황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독립투사를 제외하면 그 외의 운동가들을 알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렇게 독립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활동해야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일본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 상해 같은 도시 중심부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어떤 처지에 있었고, 의심받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그저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유령>은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이 겪었음직한 일을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보여준다. 영화의 처음부터 정체를 알려주는 인물은 박차경(이하늬)이다. 그는 상해의 한 극장에서 티켓이나 포스터를 통해 암호화 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활동하는 흑색단의 스파이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첫 암살 시도 장면은 박차경과 친분이 있는 난영(이솜)이 주도하는 작전이다.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그 이후 박차경은 주변의 몇몇 한국인과 함께 외딴 호텔에 갇히게 된다. 일본인 카이토(박해수)가 이끄는 일본군은 그 호텔에 모인 천계장(서현우), 무라야마(설경구), 유리코(박소담), 백호(김동희) 등의 한국인들을 모아 놓고 숨어있는 스파이인 유령을 색출하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스파이 유령의 존재를 다루는 영화
영화는 시작하면서 한 명의 유령을 공개했다. 바로 박차경이다. 영화에서 초점을 맞추는 건, 박차경의 정체가 밝혀지는지와 또 다른 유령이 존재하는 지다. 악랄해 보이는 카이토와 함께 등장하는 일본군 소속의 무라야마는 한국계라는 이유로 의심받지만 그 역시 일본 조직 내에 스며든 유령을 찾으려 노력한다. 박해수가 연기하는 카이토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이 뻔히 보이는 일차원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좀 더 복합적인 과거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무라야마가 더 영화 속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무라야마의 등장은 유령을 찾는 과정을 조금은 더 흥미롭게 만든다.
한정된 공간인 호텔 안에서 서로를 의심하며 유령을 찾는 과정은 아주 치밀하게 짜여 있지는 않다. 배경은 호텔과 각 방에 구성된 미장센은 아름답고 깨끗하지만 각 인물들의 행동은 그렇게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일단 모든 인물들이 호텔 내외부를 꽤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많은 일본군이 건물 내외부에 배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차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호텔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유령인지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한 인물과 관련하여 관객들을 헷갈리게 하는 함정을 던지지만 그것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또한 영화에는 불필요하게 보이는 인물도 등장한다. 천계장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지도 않고 자신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이상한 인물이다. 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스파이를 찾아내는데 필요한 긴장감을 없애버린다. 영화는 중반에 박차경 이외에 또 다른 유령이 공개된 이후 액션 장르로 완전히 전환된다. 그러니까 추리 서스펜스를 주려하던 영화는 엉거주춤하게 긴장감을 주려다가 완전한 액션영화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추리 장르에서 액션 장르로 바뀐 영화는 조금 더 힘 있고 과장된 액션을 통해 통쾌함을 전달하려 한다. 여기에 여성 중심의 서사와 액션이 추가되면서 힘을 잃어간다. 이건 꼭 여성 서사가 중심이 되어서가 아니다. 이야기의 전개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오게 되는데, 예를 들면 두 인물이 탈출 계획을 급하게 이야기하고 나서 갑자기 한 인물이 아주 쉽게 일본군에 잡혀버린다. 그 이후 남은 인물인 박차경은 도망가지 않고 다시 동료를 구하기 위해 호텔에 삽입하게 된다. 굳이 붙잡히지 않고 두 인물이 같이 탈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인물들은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밀어 넣는다. 그래서 영화 속 액션이 주는 통쾌함이 많이 사라져 버린다.
이쁜 미장센만 기억에 남는 실망스러운 영화
영화 후반부에 한 강당에서 펼쳐지는 액션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과장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흑색단 단원들과 그 대장을 구하려는 박차경의 액션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저 멋진 액션 장면들의 나열이 이어진다. 이런 과장된 액션은 전반부의 오밀조밀한 추리의 재미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일제 강점기에 있을법한 독립 운동가들이 겪었음직한 일들일 거라는 이야기의 강점도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영화 속 독립 운동가들의 노력에 어떤 현실감도 느낄 수 없다. 그런 점들이 영화 속 인물들에 공감하기 어렵게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아름다운 미장센이다. 특히 호텔에서 보이는 배경과 배치가 무척 세련된 느낌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해영 감독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서 비슷한 시대 배경을 다룬 적이 있다. <경성학교>가 학교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였는데, <유령>도 호텔에서 벌어진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느낌을 준다. 또한 직전 연출작인 <독전>처럼 누가 스파이이고 범인인지를 추리하게 만드는 느낌도 있다. 그런데 <유령>은 전작들에서 활용했던 점들을 끌어와 만들어낸 영화이기 때문인지 이 영화만의 독창적인 완성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비슷하게 흉내만 내다가 어영부영 멋을 부리며 마무리한다.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무라야마 역의 설경구와 카이토 역의 박해수가 보여주는 연기는 인상적이다. 다른 인물들보다는 이 두 인물의 연기가 극의 흐름을 바꾸고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상대적으로 주인공 박차경 역의 이하늬는 이 배역에서 특별한 그만의 느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액션에 강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영화 전반을 끌어나가는 힘은 약한 편이다. 유리코 역의 박소담이 오히려 좀 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전반부의 연기와 후반부의 연기톤이 완전히 바뀌는데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유령>은 중국영화 <바람의 소리>를 원작으로 한다. 비슷한 시대 배경을 한국식으로 변주했지만 성공적인 리메이크라고 하기 어렵다. 시각적으로 무척 훌륭해 보이지만 이야기 전개나 캐릭터들의 특성 그리고 다소 과장된 액션 장면이 실망스럽게 느껴진다. 오히려 전반부 호텔에서 벌어지는 추리극에 집중하여 연출했으면 어땠을까. 유령이라고 불렸던 이름 없는 항일 독립 운동가들을 떠올리게 하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영화는 그저 그런 액션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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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틀포레스트> 여름의 맛, 오이 콩국수
보고 나면 뭐라도 먹고 싶어 지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여름 장면은 하나로 기억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먹는 오이 콩국
혜원의 신나는 표정과 면대신 만든 오이의 초록이 오버랩 되어,
더운 여름이면 생각만으로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실 혜원의 오이 콩국수는 냉장고에 만들어 둔 콩국만 있다면,
불을 쓰지 않고 10분도 걸리지 않고 만들 수 있는 정말 간단 요리이다.
뜨거운 물에 팔팔 끓여야 하는 밀가루 면 대신
오이를 길게 채 썰어 넣은 것은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사실 이 요리에서 가장 큰 고민은 ‘콩국물을 직접 (!)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인데,
콩국물을 준비하는 세가지 방법을 보고, 각자가 원하는 대로 선택 하면 될 것 같다.
첫번째, 콩국물을 직접 모두 만들기
이 때는 일정을 한나절 정도는 넉넉히 잡아두는 것이 좋다.
메주콩을 깨끗하게 씻어 물을 넉넉히 넣고 냉장고에서 8시간 정도 불려준다.
적당히 불려진 콩을 센 불에서 삶다가 포르르 끓으면 거품을 걷어내고 중불로 10분 정도 더 삶아준다.
너무 오래 삶으면 메주냄새가 나기도 하기 때문에 비린 맛이 나지 않게 삶아 주는 것이 중요 하다.
삶은 후엔 찬물에서 콩껍질을 벗겨 준 뒤,
삶은 콩, 콩 삶은 물, 생수 기호에 따라 소금을 넣어주고. 믹서에 갈아주면 콩국물이 완성된다.
두번째, 두부로 콩국물 만들기
콩을 불려서 콩국을 만드는 것 보다는 간단하지만, 고소한 별미가 되는 방법이다.
아이가 어릴 때 자주 해 준 간식이기도 한데…
국내산 두부 1모에 두유와 견과류를 조금 넣고 믹서에 갈면 아주 고소한 콩국이 만들어진다.
세번째, 시판 제품 구입하기
몇 년전에 비하면 다양한 제품이 정말 많이 나와있다.
입맛에 맞는 브랜드 제품을 찾아두면 여름이 든든해진다.
콩국을 어떻게 준비 할 것인가 결정이 끝났다면
요리 순서는 아주 간단하다.
1. 오이 끝을 크게 다음, 오이를 면처럼 길게 채 썰어 준다.
2. 슬라이스나 스파이럴 같은 도구를 사용하면 더 쉽고 간단하게 채 썰기가 가능하다.
3. 오이의 아삭한 식감을 위해 얼음물에 오이를 담궈 주면 좋다.
4. 그릇을 준비해, 오이를 담고
5. 준비된 콩국물을 부어 준다.
6. 고명으로 삶은 계란, 토마토등을 올려주면 끝 !
이번 주말엔, 리틀포레스트 영화를 보며, 시원한 콩국을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게 바로 여름이지." 하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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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샹치 텐링즈의 전설]리뷰:서사는 부족했지만 액션은 지렸던 오락영화,마블의 새로운 시도/쿠기는 2개!/NO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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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양조위입니다. 시무리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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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메인 예고편
미국에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은 세무당국의 조사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남편의 이혼 요구와 삐딱하게 구는 딸로 인해 대혼란에 빠진다.
그 순간 에블린은 멀티버스 안에서 수천, 수만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모든 능력을 빌려와 위기의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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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어가 잠든 집> 메인 예고편
우리 아이는 살아있어요” 절망 끝에 피어난 간절한 희망! ⠀ #히가시노게이고 소설 원작 [인어가 잠든 집]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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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박사의 그늘은 매력적이지만...
누구나 마음속의 그늘이 있다. 그걸 조금씩 드러내 놓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완전히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감추고 살아도 과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 그늘의 영향을 시종일관받으면서도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평생을 그렇게 벗어나고 극복하려 애쓰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한 사람의 성격과 생각을 만든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그늘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개인에게는 극복할 목표를 주고,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면서 좀 더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주인공 천박사(강동원)의 그늘을 다루고 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천박사는 가짜 퇴마사역할을 하는 것처럼 등장한다. 그는 퇴마를 하는 회사를 만들고 민배(이동휘)를 직원으로 고용해 함께 퇴마활동을 한다. 그 퇴마활동에는 여러 첨단 기기들이 동원된다. 즉, 천박사가 하는 퇴마 행위에는 진짜 귀신이 등장하지 않고, 심리학을 전공한 천박사의 심리적인 해결방법으로 의뢰자들을 설득해 나간다.
천박사의 숨겨진 그늘
그저 가볍게 보이는 천박사와 민배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천박사의 모습은 꽤 진지하고 심지어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의 과거가 이야기되면서 드러나는 천박사 복수는 그가 하루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천박사의 그늘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는 과거에 할아버지와 동생을 잃게 되었고 그 일에 관여된 악당을 찾고 있었다. 그 과정은 꽤 길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천박사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고 괴짜처럼 보이는 그는 무당이었던 할아버지의 기운을 물려받아서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악귀와 대결에 좀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천박사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가 가진 내면의 힘과 능력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악귀와 싸우면서 크게 다치지 않고 대등하게 대결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천박사가 유경(이솜)의 의뢰를 받은 이후 악귀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아무리 천박사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수십 명이 천박사와 동료를 공격하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천박사의 그늘이 공개되면서 천박사의 유머는 힘을 잃고, 옆에 있는 민배만이 망가지며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유머도, 액션도 힘이 떨어진다.
천박사가 본인의 그늘을 드러내지 않고 진지하게 악귀의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가 평생 가지고 있던 목표였고, 그의 슬픔을 해소할 수 있는 복수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점점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도움 없이 악귀 우두머리인 범천(허준호)과 대등하게 대결을 벌인다. 영화에서는 그 대결을 마지막에 넣어 두었지만 천박사의 강력한 힘과 그가 가진 무기의 절대적인 힘이 마지막 두 인물의 싸움을 시시하게 만든다.
천박사를 제외하면 흥미가 떨어지는 이야기와 캐릭터
천박사 역을 맡은 강동원은 과거에 <전우치>나 <군도>에 등장해서 조금은 비현실적인 상황에 맞는 이미지를 보여준 적이 있다. 도술을 쓰는 존재로 등장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과거의 작품들처럼 이번 <천박사 퇴마 연구소>에서도 가벼우면서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나머지 등장인물들에 비해 천박사라는 캐릭터는 꽤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천박사는 밝지만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천박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배는 유머 캐릭터로 소비되고 있고, 황사장(김종수)은 천박서의 퇴마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잔소리 꾼으로 남는다. 의뢰인 유경 역의 이솜은 유일하게 유머가 없는 조용하고 진지한 인물이지만 특별히 매력적인 역할로 등장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영화의 빌런인 범천의 카리스마는 눈에 띄지만 그 카리스마를 더욱 돋보이게 할 다른 빌런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범천을 따르는 부하들은 너무 약하고 그마저도 후반부에는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린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는 김성식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과거 <헤어질 결심>,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생충>의 조감독 출신인 그는 좋은 배우와 깔끔한 화면으로 퇴마활극을 만들었지만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98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에도 이 영화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 강동원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더욱더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영화다. <빙의>라는 원작 웹툰이 있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흥미가 떨어진다. 이어지는 웹툰의 후속 시리즈가 있기 때문에 이번 첫 번째 영화가 어느 정도 흥행하느냐에 따라 연작 시리즈가 될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천박사라는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고 주변인물들이 이야기를 맴돌고 있다. 무엇보다 악귀가 등장할 때도 특별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후반부로 갈수로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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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사의 손꼽히는 거인
7★/10★
〈길위에 김대중〉은 탄생부터 이른바 ‘양김 분열’ 직전까지의 김대중의 삶을 다룬 영화다(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고 한다). 90년대생인 내게, 이 영화는 그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정도로만 막연히 알고 있던 양김 분열 이전의 김대중의 정치적 여정을 살필 수 있던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후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민주주의, 평화, 지식인, 연설가의 이미지가 흐릿하게 중첩되어 있을 뿐이었던 그가 신념을 가진 협상가, 전술가, 의회주의자의 이미지로 재각인되었다.
1924년 전라도의 한 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사회에서는 해운회사를 세워 승승장구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는 사업을 지키기 위해 우익 단체에 가입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인민군에게 큰 고초를 당했고, 전후 부산에서는 권력을 향한 이승만의 야욕(이와 반대로 이승만의 ‘건국’과 ‘호국’ 업적을 기리는 영화로는 〈기적의 시작〉이 있다)에 크게 분노했다. 이 두 경험은 정치인 김대중의 향로를 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이긴다’라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사업과 달리 정치인으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연이어 낙선하다 38의 나이에 국회에 입성했다. 김대중은 정치 입문 초창기부터 탁월한 언변과 논리로 주목받았다. 박정희가 왜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김대중 하나를 못 당하느냐고 닦달했다는 대목은 정치인 김대중에게 말이 평생의 든든한 무기가 되어주리라는 걸 짐작케 한다.
김대중에게는 평생에 걸쳐 추구할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있었다. 국가 주도 경제가 아닌 대중 경제론, 중앙집중이 아닌 지방 자치제 등은 이를 위한 구체적 정책 제언이었다. 더불어 의회가 필연적으로 협상을 통해 굴러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점을 인식한 그의 현실 감각이 흥미로웠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을 무조건 반대하는 대신 이를 국가 발전과 민주주의 제도 확립과 연결할 방안을 제시했다. 즉 그에게 정치는 전부냐 제로냐(all or nothing)의 문제가 아니라 이득을 보는 협상을 이끌어내는 행위였다. 이런 태도가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운동가‧혁명가라면 타협할 줄 모르는 불굴의 정신으로 목표하는 바를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의회에 소속된 국회의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대중과 함께하는 정치인이라면 늘 그럴 수만은 없다. 이들의 방법론은 달라야 한다. 전제정치의 수장이나 왕이 아니라면 협상과 타협은 불가피하다. 영화는 정치인 김대중이 꺾이지 않는 신념과 협상할 줄 아는 현실감을 함께 가진 정치인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현대 한국 정치의 손꼽히는 거인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에 정치 활동을 하면서 김대중은 여러 고초를 겪었다. 100만 명이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이고, 당시 여당이 엄청난 금권 선거를 했는데도 간신히 대선에서 승리하자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김대중의 성취는 지역감정으로 줄곧 폄훼되었고(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는 어떻게 김대중에게 지역감정의 족쇄가 씌어졌는지를 다룬다), 심지어 정보기관에 의한 암살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탄압은 전두환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많은 이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멈추지 않았다. 해외에 망명 중일 때도 유수의 언론사에 기고문을 보내거나 인터뷰에 임했고, 강연을 진행하는 등 정치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민주화의 상징 김영삼과는 미묘한 연대를 이어가며 끝내 직선제를 쟁취해냈다. 그리고 언제나 김대중의 곁에는 그를 지지하는 국민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김대중 석방이었다는 데서 그가 많은 사람에게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적확히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의 시대정신을 제시하며, 단호하면서도 유연하게 원하는 것을 얻어낸 그의 정치 행로는 뭇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달리 사뭇 감동과 감탄을 자아내는 데가 있다.
정치인을 회고하는 영화는 모두 나름의 관점이 있다. 〈기적의 시작〉(2023), 〈노무현입니다〉(2017), 〈문재인입니다〉(2023) 등의 영화는 모두 대중에게 해당 정치인을 어떤 가치로 기억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 가치는 그 정치인이 살아온 시대를 대변한다. 〈길위에 김대중〉은 신념을 가졌으되 협상할 줄 아는 정치인 김대중의 가치를 관객에게 제시한다. 소구력이 있는 가치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집요함은 탄압‧협상‧개척의 질곡을 건너 끝내 꽃을 피웠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지났고, 이제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이유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김대중과 그의 시대가 빚어낸 무언가에 빚지고 있다. 대중 정치인과 운동가,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국면에 맞추어 대중과 함께 자기 영역을 넓힐 줄 알았던 정치인. 인물에 대한 호불호와 업적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순 있겠지만, 누구도 김대중이 우리 현대사의 손꼽히는 거인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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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엄마는 엄마가 아니잖아
벌써 20년이 넘도록 은퇴를 번복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마 그의 최고 문제작이 될 듯하다. 난해하다는 평가부터, 최고라는 극찬까지 사람들의 해석도 제각각이다. 심지어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도 시사회에서 "나도 무슨 얘긴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언급을 했다. 그만큼 이 애니메이션은 작가주의적 성향이 짙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숨겨진 뜻을 해석하려 들지 않고 그가 그동안 만들어왔던 애니메이션처럼 동화를 보는 기분으로 따라가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세계물일 뿐이다. 그래도 역시, 이야기는 통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싶어 지는 것들 투성이다. 특히 가장 중심인물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 이야기는 스튜디오지브리, 나아가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상징하는 이야기들로 꽉 차있고 그 안에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장부였지만 결핵으로 평생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어머니와, 군수공장으로 비행기를 만들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대부분 애니메이션에는 그래서 마더 콤플렉스, 강인한 여성상, 20세기 초 전투기에 대한 로망 등이 가득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인공 마히토는 엄마가 있던 병원이 불타 엄마가 돌아가시고, 도쿄대공습을 피해 시골 공장 근처로 이사 간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내는 도중, 집 근처 신비한 탑과 집 근처에 사는 왜가리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도 그렇게 도쿄대공습을 피해 공장 근처 시골집으로 이사 가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시골집으로 가서 이상한 세계로 가는 이야기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실제 어머니는 병원이 불타 일찍 돌아가시진 않았고 오래 사셨다.
군수공장으로 비행기를 만드는 아버지가 그대로 나오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마을의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 애니메이션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최대한 전쟁에 대한 언급이나 일본의 피해를 강조하진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자해를 했는데도 다른 아이들이 그랬을 거라 철석같이 믿는 아빠가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듯하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가져와 집안에 늘어놓는 비행기의 유리덮개들은 줄지어있는 유리관 같은 모습이다. 이렇듯 자국민들도 죽음으로 내몬 전쟁의 실체를 은근하게 비판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제로 종종 일본의 제국주의가 타국에 남긴 상처를 비판했고, 군수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전쟁부역자라 부르며 싸우기도 했다.
스승과 친구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지라 드러나는 정도일 뿐이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승이었던 타카하타 이사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프로듀서이자 대표이사인 스즈키 토시오에 대한 이야기다. 스즈키 토시오가 개봉 전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왜가리는 스즈키 토시오 본인이다. 자신과 했던 대화들이 그대로 애니메이션에 녹아있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즈키 토시오는 애증의 관계다.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메쥬>의 기자였던 스즈키 토시오가 미야자키 하야오 특집기사를 내려고 찾아갔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무시하며 문전박대한 일은 유명하다. 마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끈질기게 마히토를 찾아오는 왜가리와 흡사하다. 왜가리가 이상한 유언비어를 떠들고 다녀서 죽이고 싶어 하는 것도 비슷하다.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 만든 <게드전기> 홍보를 할 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로 홍보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분노한 적이 있다. 여러 루머와 안 좋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스즈키 토시오가 지브리 초창기 작품들을 히트시킨 프로듀서임에는 분명하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생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걸 알고 애니메이션 속 마히토와 왜가리의 관계를 살펴보면, '자기 길을 가려는 감독'과, '감독을 속이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고 이용해먹기도 하는 프로듀서'의 밀당이 느껴진다.
또 애니메이션 속 큰할아버지는 타카하타 이사오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토에이 동화'입사 선배로, 애니메이션에서 영화적인 내러티브와 훌륭한 미장센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한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으로는 <반딧불이의 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추억은 방울방울>, <이웃집 야마다 군>,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내러티브가 잘 잡힌 미야자키 하야오의 20세기 작품들은 전부 타카하타 이사오가 조언을 하거나 참여한 작품이다. 그만큼 그는 애니메이션의 이야기와 구성 미장센 등의 균형을 잘 맞추는 사람이었다. 그는 <원령공주>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오로지 자기 멋대로 내달리는 작가주의적 작품이 되는 건 그래서다. 이것을 알고 애니메이션 속 큰할아버지의 대사나 행동을 잘 살펴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를 얼마나 존경했었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작 도중 사망했다.
인터뷰에는 나오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탑 안의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키리코는 그의 그림스승이었던 천재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일 것 같다.(지브리의 채색 담당인 야스다 미치요라는 이야기도 있다) 키리코는 불꽃이 나오는 막대기로 선을 그리며, 그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 오오츠카 야스오도 단순한 그림 스승이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험난한 애니메이터 인생을 이끌어준 선배이기도 하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
숲으로 들어가 사라진 마히토의 새엄마 나츠코를 찾기 위해, 마히토는 탑으로 들어간다. 불에 타 죽은 마히토의 엄마가 살아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왜가리를 따라서. 그 탑은 원래 우주에서 떨어진 물건으로, 아주 이상한 것이라고 한다. 큰 할아버지는 그 밖에다 건물을 만든 것이라고. 탑의 속 안으로 빨려 들어간 마히토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기이한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엄마와 하녀 키리코도 만난다. 탑 속의 세상 역시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이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스즈키 토시오와 타카하타 이사오의 인연을 담고 있는 만큼 이 세계가 <애니메이션의 세계> 그 자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도착했을 때 마주하는 황금문에는 '나를 배운 자는 죽는다'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상업미술 업계 중에서도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같은 사람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려야 하는 일, 움직임을 물리적으로 이해하고 관객에게 이해시키도록 변형해서 멋있게 만드는 일, 내 그림이 아닌 그림을 수천 장씩 그려야 하는 고통, 그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중노동이다. 심지어 박봉. 나 역시 디자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므로 그 고통을 어느 정도는 안다.
내가 대학생 때, 같이 날밤새며 과제를 해 추레한 모습으로 과실을 나서는데 원서를 내러 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난 친구들과 이렇게 소리쳤다. "여긴 지옥이야! 도망가려면 지금이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황금문의 문구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어리둥절하는 마히토는 펠리컨들에게 떠밀려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 가지고 온 유일한 무기인 활은 다 망가져버렸다. 그래, 그렇게 멋모르고 이 업계에 들어오게 되는 거야. 게다가 그 망가진 활처럼, 네가 기존에 배운 건 다 쓸모없거든. 다시 배워. 애니메이션을 배운다고? 넌 이제 죽었다.
젊은 키리코는 '와라와라'라고 하는 생명을 돌보고 있다. 이 세계에서 그가 하는 일은 무덤을 지키는 것과, 와라와라에게 먹을 것을 팔아 그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돕는 일이다. 애니메이션은 그런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생명을 주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 반복된 그림 몇 장을 그렸을 뿐인데, 그 그림은 살아서 움직이고 뛰어다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스승인 오오츠카 야스오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진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은 생명을 창조하는 것만큼 숭고한 일이다. 비록 그 일을 배운 너는 죽겠지만. 응.
그러나 이 세계에도 위험한 존재가 있다. 펠리컨들과 앵무새들이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먹어치우는데 몰두한다. 펠리컨은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생명인 와라와라를 먹어치운다. 앵무새들은 뜨거운 숨을 훅훅거리며 사람을 잡아먹는다. 펠리컨은 갈라파고스화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상징한다. 후대 양성의 실패, 보수적인 정치환경, 국내 내수만으로도 돌아가는 경제, 오타쿠 문화의 확산 등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침체되게 만들었다. 와라와라처럼 생명력 있는 애니가 태어나는 것을 갉아먹는다. 80~90년대만 해도 정말 독창적이고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많이 만들었지만, 지금은 예전 황금기 같은 애니메이션이 거의 없다. 또한 제살을 깎아먹는 업계는 스튜디오 지브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수많은 재능 있는 애니메이터를 키워냈지만, 정작 모회사나 제작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만 감독으로 원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감독으로 데뷔할 기회를 주지 못했다. 결국 스튜디오 지브리는 늙고 죽어가고 있다.
앵무새는 남의 말을 따라 하는 존재다. 큰 덩치에 식욕에 침잠되어 훅훅거리는 모양새. 앵무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토록 혐오하던 오타쿠들과 흡사하다. 앵무새들은 '애니메이션을 배운자'즉 애니메이터들을 먹이로 삼는다. 그들의 삶을 갈아 만든 모에화, 먹잇감에만 관심이 있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업계가 똑같은 성적 모에화 대상물만 만들게 한다. 그리고 오타쿠는 대체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만든 것에 열광하고 남이 만든 걸 보고 만드는 2차 창작(팬픽)에 열광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타쿠를 치가 떨리도록 싫어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
하지만 이런 위태위태한 세상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균형을 맞추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큰 할아버지, 타카하타 이사오다. 돌들을 깎아 만든 블럭을 아주 세밀하게 쌓아 만든 균형. 타카하타 이사오의 애니메이션은 그런 느낌이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그 블럭을 물려주고, 이 세계, 애니메이션의 균형을 지키게 하고 싶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멘토로 참여했던 작품들은 망상이나 상상보다는 현실적인 내러티브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하지만 잉꼬대왕, 오타쿠들의 대왕은 성격이 급해서 그 유산이 전달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결국 블럭을 쪼개버리고, 큰할아버지가 유지하던 세상은 무너져버린다.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한 유산은 사라져 버린다. 스튜디오 지브리도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물려받지 못해, 지난 9월 닛폰 테레비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사람들은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많은 것을 배웠다고 이야기하지만, 둘은 연출방향 자체가 다르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참여하지 않은 후기작들이 급격히 망상적인 작가주의적 애니메이션으로 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도 타카하타 이사오가 물려주려고 한 것들을 다 물려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큰 할아버지가 물려주려고 한 블럭들 중, 그 난리통에 한 개만 겨우 가지고 나왔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지브리 스튜디오,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전 세대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지 못한 불완전한 세계였던 셈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자신의 친구와 스승들이 죽어가고 자신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마땅한 자신의 후계자가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스튜디오 지브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신의 블럭을 펠리컨과 앵무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팬들은 또 다음 세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럼,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느꼈던 생명과 감동을 느껴야 할까. 이것에 대한 답은 바로 새엄마 나츠코와의 일화가 말해준다. 마히토는 엄마가 죽고, 엄마의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새엄마로 들어온 나츠코와 데면데면하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새엄마를 엄마로 인정하고 엄마라고 부르는 일은 쉽지 않다. 마히토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나츠코는 이미 아버지의 아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나츠코가 숲 속 탑 안으로 들어가 산실에 들어가 힘들어하고 있는 장면은, 아직 관객들에게 '진정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근래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들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가 만든 첫 작품 <게드전기>는 엄청난 혹평속에 팬들은 그 작품을 인정조차 하기 싫어한다. 게다가 최근 고로의 작품은 3D 애니메이션이었다. 수작업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지브리 스튜디오에선 정말 파격적인 행보인 셈이다.
위에서 말한 애니메이션 업계의 펠리컨들, 여러 사정으로 결국 스튜디오 지브리의 후계자가 될만한 인물은 아버지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한 미야자키 고로밖에 없게 되었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사망한 지금 앞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마저 사망하게 된다면,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으로 나올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고로가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행보를 보니 3D 쪽으로 가게 될 것 같다. 그것을 지브리의 팬들이 받아줄 것인가? 고로의 애니메이션을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라 인정할 것인가? 엄마가 죽어서 갑작스레 새엄마가 된 나츠코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죽은 엄마를 살릴 수는 없다. 죽음은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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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새엄마를 받아들여 달라고 말하고 있다. 고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랑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흉내 내는'것을 싫어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격을 존중한다면 더욱 그렇다. 거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도 역시 이전 세대의 유산을 다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온전하게 애니메이션 세상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노라고 고백한다. 좋든 싫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떠나게 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는 세상, 그대들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자, 그대들이여.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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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 나오는 리뷰들을 보니, 충격적 이게도 이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 미화로 알려지는 것 같다. 일단, 지브리의 타카하타 이사오는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제국주의 비판하는데 앞장서는 인물이다. <반딧불의의 묘>도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내용을 보면 일본의 제국이 '자국민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비판하는 이야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당지에 만화를 연재한 경력이나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일본의 좌파는 자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다. 지브리의 두 거장이 그런 성향이니 지브리 전체는 사실 말할 것도 없다. 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역시 도쿄대공습이 나오지만,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거나 무서운 모습보다는 병원이 불타는 모습이 보일 뿐이고, 도쿄대공습이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전쟁에 대한 피해나 반성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이 애니메이션은 그냥 반전영화가 되어버리므로, 그걸 최대한 피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시절에 집중한 것이다. 다음 장면은 그것을 더 잘 드러낸다.
마히토가 이사 간 시골 학교의 아이들과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기가 죽을뻔했다는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돌로 자기를 쳐서 자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한 게 아니라 넘어져서 그랬다고 하지만, 군수공장을 하던 아버지는 아이들이 그랬을 거라며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장면은, 도쿄대공습이나 원폭이 일본의 자해와도 같은 원죄이며 제국이 그것을 남탓하고 있고, 사실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변명하지 않는 일본국민을 비유하는 장면이다. 마히토는 아니라곤 하지만 거기서 더 강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마히토는 상처를 스스로 냈다고 큰할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이런 지브리가 제국주의 미화라니, 그건 좀 억측이라 생각한다. 전작 <바람이 분다>도 일본 내부에 있는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 것에 전쟁미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오히려 전쟁을 비판하면서도 전쟁무기 광인 자신을 비판한 내용이다.
진짜 제국주의 미화는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을 은근하게 깔고 있는 <크리에이터>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슈도 안되었던 점이 사실 더 의아하다.
*키리코 캐릭터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오오츠카 야스오이길 바랬으나, 이전 스즈키 토시오의 언급에 의하면 지브리 채색 담당이었던 야스다 미치오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우'라고 부르기도 했던 야스다 미치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바람이 분다>까지 거의 모든 지브리의 작품에 채색을 담당해왔었다. 사실 오오츠카 야스오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 스승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는 맞으나, 지브리가 만들어질 때 합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이 일하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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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게
DIRECTOR. 촹칭션(CHUANG Ching-Shen)
CAST. 천옌페이(Yan-fei CHEN), 항첩여(Chloe XIANG), 치우이타이(Yitai CHIU) 외
PROGRAM NOTE.
1997년. 제1여고 입학시험에 실패한 아이는 엄마의 강압에 못 이겨, 제1여고의 야간 학생이 된다. 같은 교복을 입지만 명찰의 색이 다른 주야간의 학생들은 교실을 공유하는데, 아이는 주간 학생 민과 책상을 나눠쓰게 되면서 단짝 친구가 된다. 민과 함께 민의 교복을 입고 주간 학생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던 아이는 어느 날, 루커를 만나 미묘한 설렘을 느끼게 된다. 아련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학업 성취도에 따른 계급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했던 그 시절의 학교를 배경으로, <우리들의 교복 시절>은 십 대들의 사랑과 우정, 좌절과 성장의 스토리를 담백하고 솜씨 좋게 풀어 간다. <침묵의 숲>(2020)으로 금마장 신인배우상을 수상한 진연비(천앤페이)를 비롯한 대만의 연기파 신인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풋풋한 성장 드라마를 완성했다. (박선영)
생각해 보면 조금은 이상한 시절이었다. 모두 똑같이 소중하다는 말이 교과서 속 혹은 박물관의 유리벽 속에나 존재하던 시절. 모두 똑같이 소중한 제일여고 학생이라면서 주간반과 야간반 학생들의 명찰 색깔을 다르게 하고, 거기에 굳이 태양과 달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해 달이 발광체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 정말로 "똑같은" 것일 리 없다. 역시나 주간반과 야간반에게는 입학 첫 날부터 사뭇 다른 공지사항이 주어진다.
입시를 대하는 1997년 대만 풍경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꽤나 익숙하다. 구체적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큼직한 정서만큼은 같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에게 한 "여자는 사범대가 제일이야" 같은 말, 당시 훨씬 어린 나이였던 나조차 심심찮게 들었던 말이니까. 어른이 되고, 그 시절 그 분들이 진심으로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 것임을 이따금 실감할 때조차, 내가 아이의 나이가 될 때까지 쭉 이어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느꼈던 갑갑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자꾸 사춘기의 아이들을 채근한다. 어른들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당시 입시의 중요성이란,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기회로 보였을 테니까. 인생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그 계단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올라,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 추후의 노력으로 뒤집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 요즘은 많이 무너지고 있다지만 90년대와 그 이후 꽤 오랜 시간, 학벌은 그런 의미로 많이 받아들여졌으니까.
대입도 아니고 고입 시험에서부터 그런 소외감을 느껴버린 아이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거짓을 쌓는다. 그런 아이를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동경하는 친구 민, 자꾸 설레는 대상 루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발돋움을 해보려는 마음이었을 뿐인데. 그러나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거짓은 거짓이라, 결국 거짓들은 핑퐁핑퐁 튀어오르고, 누구도 못되게 굴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제각각의 상처를 받는다.
흔히 '친한 두 (여성) 친구가 동일한 한 남성을 좋아하게 된다'는 설정을 중심에 두는 구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정과 사랑이 서로 경합을 벌여야 하는 게 싫고, 그 과정에서 더 소중한 감정들이 배척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런 설정을 사용하면서도 과하게 중심에 두지 않는다. 우정과 사랑이 서로 경합을 벌이는 대신, 불평등한 현실의 감각과 퉁 부딪힌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나눠듣고 탁구를 치며 90년대 청춘을 아름답게 회상하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보다 평등하지 못하다는 감각이 앞서는 슬픔을 보여주는 식이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청춘이 드러난다. 사실 아름답기만 한 청춘이 어디 있나.
우리가 대만 청춘영화에 기대하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정서들을 충분히 가진 영화다. 동시에 성인의 시각에서 청소년기를 산뜻하게만 그리며 얄팍해지는 대신, 내면에서 끊임없이 재난 경보가 울리는 시기라는 점도 명확히 짚는다.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말을 긍정할 수 있게 된 후에도, 나는 그 시절 내가 느꼈던 갑갑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춘기가 그런 시기 아닌가. 나도 아직 나를 잘 모르겠는데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할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혼란스러움, 할 일은 많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일은 그게 아닌 것 같은 따분함, 마음의 가장 연약한 속살을 마주할 때마다 남들의 껍질은 참 단단해 보이기만 해서 계속 느끼는 초라함과 질투, 나 스스로도 내가 너무 어리고 서툴러 가끔은 나 자신을 견디는 게 벅차서 폭발할 것 같은 마음들까지.
이 영화는 그 나이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듯이. 재난만 있던 시절도 아니고, 아련함만 있는 시절도 아닌 그 시절에게. 때로는 거짓으로 위로 받은 마음조차 거짓은 아니었다고 끌어안으며, 영화에 나온 대사를 축복처럼 건넨다. May the Force be with you!
10/05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상영코드 202)
10/06 12: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상영코드 264)
10/08 17:00 영화의전당 중극장 (상영코드 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