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18 23:33:30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리뷰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최연이 학교에 전학오고 하경과 지내면서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다.
하경도 마찬가지로 최연에게 같은 감정을 느끼는데...
학창시절은 혼란스러운 시기다.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저렇게 사소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했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을 겪으면서 내가 성장한 것이 아닐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상대방을 향한 감정이 어떤 형태인지를 몰라서 혼란스러웠던 순간을 포근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그런 순간에도 최연의 시선은 하경에게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인 신호등 장면이 제일 좋았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같다고 하더라도 이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한 명이 인지하더라도 다른 한명은 아직 자기 마음을 모를 수 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어떤 감정인지 인지하는 순간이 일치하기는 어렵다. 먼저 인지하는 사람이 있고 늦게 인지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늦게 인지한다고 잘못은 아니다. 원래 자기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는 건 쉽지 않다.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부정할 필요도 없다.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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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들만의 문제가 아닌, 범인류적인 문제를 다룬 코미디
영화 좋아한다고 하니 어떤 분이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해 주셨다. 다만, 뇌를 빼고 봐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이 영화는 코미디영화인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만 이상해지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보게 되었던 이유는 여성 주연 4명의 개성이 각기 달랐고 미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에 대한 생각, 또한 그들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자각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인종적 비주류로 살아본 적 없어서 영화에서 그들을 묘사한 지점이 정확했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말이다.
1. 핫한 키워드들의 집합
이 영화는 핫한 키워드들은 다모아놓았다. 인종차별, 특히 아시아인 차별, 바디 포지티브 운동, 미국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k-pop 등등. 그런데 모든 키워드에 깊이가 느껴지진 않는다. 뭔가 대단한 혁신적인 내용인 척 하는데, 사실 모든 내용이 클리셰이다. 백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양인에 대한 클리셰가 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핫하게 떠올랐던 바 있는 '내 몸을 사랑하자' 운동에 심취한 롤로는 내 몸을 사랑하다 못해 욕망에 과도하게 솔직하다. 욕망에 솔직한 것은 좋지만 모든 대사가 그런 쪽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캐릭터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모든 캐릭터가 다 가볍게 그려지지만 그 와중에 범생이로 나오는 오드리 마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남자에 관심도 많고, 성공에 욕심도 많고, 뭐 하나 제대로 버리지도 못하면서 다 가지고 싶어하는 약간은 위선적인 캐릭터로 보인다. 이기적인 행동을 해도 이해가 되는 캐릭터들도 분명 있는데, 오드리는 표면적으로는 선해 보이지만 크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엄마를 찾고 싶으면서 솔직하게 표현하지도 않고, 마치 롤로 때문에 엄마를 찾아야만 한다면서 남탓하는 모습에서, 그 솔직하지 못한 모습 때문에 오드리에게 이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시아 여성 주연 4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야 하는 그녀들의 캐릭터를 코믹 그 이상의 어떤 매력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지점이 이 영화의 인종차별적인 시선이 아닐까 싶었다. K팝을 사랑하는 한 캐릭터는 미국 사회에서 일종의 찐따로 분류되며 주류 문화에 편승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
2. 차별은 의도보다는 무지가 아닐지
성공한 변호사가 된 오드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배려의 말을 듣는다. 생김새는 아시안이지만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그녀에게 회사 사람들은 같은 미국인으로서 대우하지만은 않는 느낌이다. 오히려 차별하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고 겉으로 티내지 않으면서도 은연 중에 더욱 심한 인종차별을 남발한다. 미국이 그녀에게 고향일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채 중국에 가게 된 그녀에게 모국에 가게 되어 기쁘겠다는 둥 소위 친절한 개소리를 시전한다.
뭔가 묘하게 기분 나쁜데 상대의 표면적 의도가 나름의 친절이라서 앞에서 쌍욕도 박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뭐랄까 나는 중국 음식 좋아한다고 외치면서도 그 중에서 덴뿌라를 제일 좋아한다고 하는 격인데 그걸 듣고 있는 나는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분명 의도가 있는 차별도 있겠지만 그냥 몰라서 하는 소리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난 비주류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는 인격자'라는 자부심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영화는 비단 백인들의 차별만 그리지 않는다. 아시안들 사이의 편견도 있음을 보여준다. 저기 시끄럽고 똑같이 생긴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라는 둥 말하는 롤로를 보면 인종차별은 백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인들 조차 한 사람을 바라볼 때 더이상 인종적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여전히 우리나라 방송가에서는 외양은 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오래 살아 한국인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진행자는 그들에게 '한국인 다 됐네' 이런 멘트를 날리곤 한다. 이제 이런 멘트도 한국에서도 더 이상 칭찬이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국제 결혼이 많아진 한국에서 정체성이 외모가 아닌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은연 중에 대한외국인들에게 '김치 잘 먹네요'라고 칭찬하는 것이 의도치 않은 무지이자 차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무슨 말은 할 수 있겠냐고 되묻겠지만 오랜기간 폐쇄적인 단일민족으로 살아왔기에 의도가 좋은 말을일지언정 그 말이 배려가 될지는 알 수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차별의 반은 열등감이고, 그 남은 반은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는데 열등감은 개인이 알아서 극복할 일이지만 무지는 가르치면 조금 나아지기 때문이기에 국제 결혼이 늘어나는 현 시점에서 한국인들도 외양이 다르면 무조건 외국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건 나도 실천해야 하는 지점이니 사실은 이것은 내가 하는 반성이다.
영화에 대한 감상보다 사족이 더 길었던 거 같은데, 하나의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들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한 번정도는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저 잡생각을 날리고 싶다거나 나는 웃기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가볍게 볼 코미디 영화를 찾고 있다면, 킬링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한 번만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예상하건대 두 번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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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어떤 '룸'에 갇혀 있나요?
2008년 요제프 프리츨 사건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소설 『룸』을 영화화 한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룸》(2015)
올드 닉은 17살 조이를 납치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금한 뒤 지속적으로 강간한다. 조이는 납치범의 아이인 잭을 낳게 된다. 7년 후 잭은 5살이 된다. 조이와 잭은 '룸'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다.
영화는 자극적인 사건(실제 사건보다는 아니지만)을 다루고 있지만 폭력적인 장면들은 절제되어 있다. 폭력적이거나 잔인하거나 고통스러운 장면을 못 보는 사람이라도 무리 없이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극을 이끌어 나간다. 스릴러지만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불호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작품이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살기 위해서는 '연결'이 필요하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올드 닉에게 7년 동안 지속적인 강간과 폭력을 당한 조이는 아들 잭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모성으로 극복한 시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조이가 살기 위해서는 잭이 필요했고, 잭은 엄마가 필요했다. 그들은 '룸'에 홀로 남겨지지 않기 위한 서로의 버팀목이자 숨구멍이었다.
영화는 잭의 시선을 따라간다. 올드 닉이 오면 잭은 옷장 안에 들어가 숨죽이고 있는다. 우리는 같이 숨죽여 조이의 고통을 가늠할 뿐이다. '룸'에서 태어나 5살이 될 때까지 나가본 적 없는 잭에게 이 작은 방은 세상의 전부다. 조이는 잭을 위해 세상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지만 마침내 탈출을 결심하고 잭에게 현실을 말해준다. '룸' 이외의 세상을 모르는 잭은 진짜 세상을 부정하고 탈출 작전을 미루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번뿐인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조이는 계획을 실행한다. 마침내 잭은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진짜 나무, 진짜 고양이, 진짜 개, 엄마가 아닌 진짜 사람. 작고 더러운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진짜 하늘.조이는 잭을 위해 세상으로 아이를 내보낸다. 조이는 그런 잭이 있었기에 닉에게 벗어날 수 있었다.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고, 세상을 만나게 해 주었다.
처음 세상을 만난 잭
세상을 만난 아이와 사회에 내던져진 엄마
조이와 잭의 탈출 작전은 영화의 약 절반 지점에서 성공한다. 감금과 폭력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뿐 아니라 이후의 상황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우리는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들이 견뎌내야 하는 모진 사람들과 사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행복하게 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조이는 7년이라는 세월을 잃었다. 17살이었던 그는 성인이 되었고, 엄마가 되었다.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한 선행의 대가는 컸다.
'착한 아이'에서 '엄마'가 된 조이는 7년 전에 멈춰버린 자신의 방과 추억을 복잡한 감정으로 마주한다. 극적인 사건에 이끌리듯 구름 떼 같이 모여든 대중들과 언론은 이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터뷰어는 조이가 자살을 시도했는지, 잭에게 미안하지 않은지, 닉을 아빠로 인정할 것인지를 질문하며 조이를 배려하지 않는다. 조이를 힘들게 한 건 닉뿐만이 아니다. 쏟아지는 질문과 시선, 그리고 응원조차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룸'에서는 살아남아 탈출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벗어났음에도 조이는 행복하지 않다.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조이는 주변의 도움을 거절하고 홀로 견딘다. 결국 조이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다. 조이가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죽음밖에 없었다. 그리고 잭은 다시 한번 조이의 죽음을 막아주게 된다.
"누구나 서로에게 힘을 주는 거야. 혼자서 강한 사람은 없단다."
우리가 누군가의 혼자됨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많은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약자들의 연대
올드 닉은 이런 말을 한다. '너희들이 먹고 잘 수 있는 건 다 내 덕분이니 감사하라. 직장을 잃어서 나도 힘들다'라고. 부부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지만 그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미친 소리가 없다. 영화 속 올드 닉은 잔인한 범죄자고 이들은 부부가 아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우리는 가족 같은 느낌을 받는다. 경제력으로 가족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행위를 한다면 올드 닉과 다를게 무엇인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정폭력은 영화 속 올드 닉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탈출에 성공한 잭을 구조한 두 명의 경찰관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분명히 느껴진다. 여성인 파커 경관은 잭의 말을 기다려주고, 사건의 단서를 얻어 또 다른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남성 경관은 광신교의 짓으로 치부하고 미아보호소에 보내자고 한다. 남자 경관은 불안정하고 횡설수설하는 어린 잭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일상에서 위협적인 상황을 느끼는 경우가 적기 때문일까? 남자 경관은 잭을 보고도 범죄를 예상하지 못한다. 파커 경관과 남성의 차이는 여성이 모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강자가 아니기에 예민하고 직관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도 '룸'에 작별 인사해야지."
'룸'에서 잭은 자신의 완전한 세계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잭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 아침마다 방의 물건들에게 인사하고, 쥐와 친구가 되고, 무엇보다 엄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잭은 '룸'을 벗어나서도 종종 그곳을 그리워한다. 마지막으로 조이와 잭은 룸을 다시 마주한다. 잭은 테이블, 세면대 그리고 옷장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룸'에게 하는 작별 인사는 다음 문장을 위한 마침표와 같다. 끝내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룸'은 더 이상 공포로 걸어 잠겨 있지 않다. 원한다면 벗어날 수 있다.
"문이 열려 있으면 '룸'이 아니거든"
문은 열렸고, 어디로 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갇혀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 문은 누가 닫았는가. 문을 열자. 혼자서 버겁다면 누군가와 함께 어떻게든 그 문을 향해 나와 '룸'과 작별을 고하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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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와 연대 사이의 사랑
6★/10★
2023년, UN 자문기구에서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핀란드를 꼽았다(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인 57위다).* 무려 6년 연속 1위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을 테다. 지상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을 비춘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국제비평가연맹이 선정한 2023년 최고의 영화로 꼽히기도 했다.
안사는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홀라파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안사와 기계로 무언가 작업을 하는 홀라파의 표정은 건조하고 권태롭다. 색깔에 비유한다면 무채색의 느낌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어 보이고, 조금은 염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한 술집에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낀다. 통성명도 없이 데이트를 이어가던 둘. 그러던 중 안사가 홀라파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며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런데 홀라파는 그만 그 종이를 잃어버린다. 홀라파는 둘이 함께 있던 곳을 돌며 안사를 수소문하고, 홀라파의 연락 없음에 실망하고 있던 안사를 다시 만난다.
영화에서, 노동 현장에서의 생기 없는 표정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때의 표정은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닌, 안사와 홀라파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이들은 일할 때는 활력을 잃고, 사랑할 때는 기운이 샘솟는다. 불안정한 직장에서 당장 눈앞의 생계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설렘과 애타는 마음으로 감정이 들끓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이토록 선명한 대비의 공존은 둘의 사랑을 ‘연애’인 동시에 ‘연대’로 만들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비정규직이다. 그들의 고용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의미다.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관리직원에게 자그마한 트집이라도 잡히면 바로 해고다. 실제로 둘의 직업은 수시로 바뀐다. 안사는 마트에서 버리는 물건을 챙겨가다가 해고당하고, 고용주가 마약 거래를 하다가 체포돼 직장이 사라져 일거리를 잃는다. 홀라파는 항상 조금은 술에 취해 있는 것이 걸려서 해고당하고, 장비 노후화로 산재를 당해도 그 원인이 술로 돌려져 해고당한다. 그럼에도 빈털터리인 둘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는 흐릿하게만 보이던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연애와 연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라디오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채널을 바꾸거나 꺼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지만,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방송을 들으며 같은 감정을 느낀다. 커다란 폭력은 사람들의 유대와 연대, 일상을 파괴하며 개별 인간을 단절시키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위축된 채 서로 떨어져 있다는 공통적인 처지에서 무언가를 벼려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연출이다. 투박하고 고전적인 화면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는, 종종 능청스럽고 뻔뻔하며 동시에 비장한 대사와 만나 웃음을 자아낸다. 사회적 체면이나 가식 따위에 대한 고려 없이, 때로는 ‘망상’에 가까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은 영화가 그려내는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과 그럴듯하게 어우러져 잔잔하면서도 파격적인(?) 코미디의 효과를 자아낸다. 산재로 병원에 입원한 홀라파에게 안사가 키스한 후, 그가 눈을 뜨는 장면은 이와는 또 다른 패러디의 효과를 낸다. 연애와 연대 사이의,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일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들이 거주하는 세계로부터 반전될 수 있음을 무채색 세계에 따뜻한 유머를 곁들여 알려준다.
*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31210010002697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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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밥 회수 성공! 딱 그만큼만
<외계+인 1부>가 공개되고, 1년 반 만에 2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초반 스타트가 좋지 않았던 터라 반환점을 돌고 마무리를 향해가는 길이 쉽지 않아 보였지만, 2부는 1부에서 뿌려 놓은 떡밥을 회수하는데 성공한다. 액션, 코믹 등 보는 재미도 괜찮다. 하지만 딱 그만큼 만이다. 멋지게 결승점으로 들어오기에는 태생적으로 힘이 부족하고, 뿌려 놓은 떡밥을 거둬드리는데 급급하다. 마치 2부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최대치보다 높게 잡고 가다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회수에 무게 중심을 두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2022년 외계인 죄수들에게 쫓기던 중 가드(김우빈), 썬더(김우빈)와 함께 고려 시대로 도망친 이안(김태리)은 홀로 성장하며 신검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신검을 찾아야 미래로 복귀하고,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막을 수 있기 때문. 외계인 자장(김의성)은 이안을 계속 추격하고, 무륵(류준열)은 이안을 도와 적들을 막는다.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은 무륵 안에 뭔가 있음을 직감하며 그를 계속 쫓고, 맹인 검객 능파(진선규)는 눈을 뜨기 위해 신검을 찾아 나선다. 한편, 2022년 서울에서는 외계인의 정체를 알게 된 민개인(이하늬)은 자신만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채비를 한다.
1부가 방대한 세계관을 소개하고, 인물들의 전사를 소개하는 등 빌드업에 치중했다면, 2부는 이를 발판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한 스피디한 전개와 화끈한 웃음, 그리고 이안과 무륵의 관계에 집중한다. 여기에 약간의 반전이 추가되면서 1부와 다른 2부만의 면모를 보여준다. 1부를 안본 관객들을 위한 서비스로 초반 이안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사를 확인할 수 있으니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2부는 1부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50여 가지의 편집본을 완성한 최동훈 감독의 노력이 엿보인다.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쉽게 이 세계관에 빠져들 수 있도록 스토리와 액션 등 장르 영화의 재미를 부각시켜 진입장벽을 낮췄다. 하지만 1부의 단점이 2부에서 충분히 메워졌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최동훈 감독이 그동안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중심 주제가 이 시리즈에서는 너무 가볍게 다뤄지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여러 인물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하나의 물건을 가지려는 케이퍼 장르의 특장점이 도드라져 있다는 것,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와 말맛이 넘치는 대사,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과 이를 알아가는 진득한 과정에 있다.
감독이 창조한 캐릭터의 공통점 중 하나는 가명 혹은 1인 2역 이거나, (본의 아니게) 남을 속이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범죄의 재구성>의 최창혁(박신양), <도둑들>의 마카오박(김윤석), <암살>의 안옥윤(전지현), 후자는 <타짜>의 고니(조승우), <암살>의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왜 가명을 쓰고 남을 속이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저마다 각자의 이유가 있지만,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찾아가기 위함에 있다. 특히 안옥윤은 후반부 쌍둥이 자매로 연기하며 자신은 친일파 집안의 딸임에도 이를 부정하고 독립군으로 사는 것을 결정한다. 고니는 구라가 판치는 도박 세계에서 발은 담근 후, 마지막 아귀(김윤석)와의 승부에서는 구라가 아닌 진실로 승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이 시리즈에서도 이안과 무륵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인간의 몸속에 외계인이 들어가는 설정에 기반, 자신의 몸에 설계자 혹은 누군가가 들어간 것으로 여기는 무륵은 계속 자신의 정체성에 물음표를 갖는다. 얼뜨기 도사인지 설계자인지, 그렇다면 부채에서 검을 집어 든 도술은 누구의 힘에서 비롯됐는지에 대한 궁금증 말이다. (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지만)후반부 그는 이 모든 실타래가 풀린 후 멋지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성장한다. 이안도 무륵과 같은 내면의 여정을 겪은 후 똑같은 결과물을 얻는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 얕고 빠르다. 무륵과 이안의 내면과 그 고민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어디선가 코믹함이 가미되고, 액션이 난무한다. 그리고 말 한마디와 장면 한마디로 모든 걸 해결하려 든다. 관객 또한 두 인물의 고민에 동참하고 그의 심리를 따라가려고 하지만, 그런 틈이 없다. 물론, 장르 영화에서 이런 부분은 부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면 마다 캐릭터와 상황이 붕 뜬 느낌을 주는 시리즈 특성상 조금이라도 지면에 발을 딛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는 꼭 필요했다. 그래야 캐릭터에 마음이 가 닿으니까 말이다.
극 중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의 활용도 아쉽다. 영화는 이 말을 빌려, 서로 다른 시간과 세계에서 온 이들이 관계를 맺고 힘을 합쳐 외계인을 물리치는 이들의 관계, 더불어 결국 자신의 세계로 남고 떠나야 하는 이안과 무륵, 이안과 유사 가족(가드, 썬더)의 관계를 설명한다. 함축적으로 그 의미와 메시지 전달에 용이하지만, 주마간산의 느낌은 배제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와 가장 닮은 <전우치>가 다른 전작들보다 완성도가 낮게 평가되는 건 이번 시리즈가 간과한 이 부분이 결여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우치>에서 마음이 가는 건 주인공 전우치(강동원)도,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된 인경(임수정)도 아닌 치매 걸린 노파의 예언(운명)에 굴복하는 화담(김윤석)이다. 도사인 줄 알았지만, 요괴였고, 운명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 운명에 따라가게 되는 이 인물은 전우치와 인경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전우치와 인경과 달리, 화담이란 캐릭터가 가진 무게감과 생각할 거리가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외계+인 2부>는 재미있게 즐기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외계인이 나오고, 신선, 도사가 나와 한바탕 신나게 노는 영화가 이 세상 어디 있으랴. 최동훈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뿐이다. 아쉽다. 360억 원의 제작비를 떠나서, 그동안 다수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해 나갔던 감독의 영화라서 더 그렇다. 인생은 ‘회자정리 거자필반’ 아니던가. <외계+인> 시리즈는 이제 떠나보내고, 감독의 장점이 담긴 작품으로 돌아오길. 갈고 닦은 그만의 신검으로 관객의 가슴에 '콱' 찍어주길 바란다.
사진 제공: CJ ENM
평점: 2.5 / 5.0
한줄평: 떡밥 회수 성공! 딱 그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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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렸다, 이런 영화.
영화
하이파이브
판타지 / 대한민국 / 119분
-감독: 강형철
-배우: 이재인, 안재홍, 라미란, 김희원, 유아인, 오정세, 진영
예고편부터 얼마나 기다렸던가, 올라오는 짤들을 보면서 얼마나 눈을 흐리며 영화관 가기를 고대했는가!
영화관가서 보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신나고 재미있는 영화 정말 오랜만이었다.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한국형 서민 히어로물이 아니라 배우들의 차력쇼를 보았다. 아니, 조연마저도 연기 구멍이 없었다.한국형 신파? 쬐금 나오다가 말아서 그것조차도 좋았다. 딱 그정도가 나와서 좋았다고 할까나. 물론 CG가 어색하다는 말이 있지만 뭐 어때! 그런 영화인데!
강형철 감독님이 <써니> <과속스캔들>의 감독이라 그런 느낌이 난다고 했지만 오히려 <극한직업> 이병헌 감독님의 냄새가 났다. 영화 쪽 보다는 <닭강정>의 이병헌 감독님 같았다. 끝없는 말장난과 뇌절과 뇌절을 거듭하는 티키타카가 내 맘에 쏙 들었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배우가 되어버린 것 같은 유아인 배우와 안재홍 배우의 합이 매우 좋다.
일 터지기 전에 얼마나 일을 많이 해 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병헌 배우와 더불어 '연기로 보답할게요'의 표본이 될 수도... 유아인 배우가 최근에 좀 무거운 캐릭터를 많이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저런 깨방정 캐릭터를 정말 잘 하는 사람이었던 걸 잊고 있었다. 유아인 배우가 아니라면 저걸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
안재홍 배우야 이쪽 분야(!) 갑이니까! 아! 그래서 <닭강정>이 더 생각 났을지도!
언제 저렇게 컸는지 귀여운 이재인 배우의 연기는 딱 그 나이의 청소년이었다. 아빠랑 싸우기도 하고 장난도 치는. 김희원, 라미란, 오정세 배우야 뭐 이름만 들어도 보증수표니까.
그런데 박진영 배우. 아이돌 출신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연기를 잘 한다. <악마판사>에서 보여줬던 눈빛들과 다르게 악역도 잘 한다. 신구 할아버지를 삼켰다는 숏츠들을 많이 봤는데 진짜 어떻게 그렇 몸짓을 할 수 있나 신기했다. 최근에 똑같이 아이돌 출신인 김준영 배우만큼 다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소재가 '도교'라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본 것 같은 기증자가 누군지 매우 궁금하기도 하고 ㅎㅎ 최근에 괴물과 도교를 소재로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더 몰입이 되었다.
개봉하면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이 많이 언급되고 있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문신이 옮겨 가는 것이 비슷하기도 하니까 그렇겠지. 그 영화에서도 여러 캐릭터들이 깨방정이 맛나게 나온다. 안성기 배우도 살짝 합류하고 절정은 쿠키영상의 봉태규 배우라고 볼 수 있다. 두 영화에서 결이 비슷한 건 류승범 배우와 유아인 배우려나?
영화의 줄거리를 말 안하려니 배우들 이야기만 잔뜩했지만 아직 영화관에 있을 때 꼭 한 번 보기를 바란다. 누구는 뭐 이런 걸 영화관에서 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 꼭 '그런' 영화들만 개봉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영화이고, 후속작이 만들어지려나 기대가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 물론 후속작이 안 만들어지는게 대문자 I에 가까운 서민 히어로들의 히어로 생활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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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지성에 돌 던지기
추락의 해부보다도 해부되는 것들의 추락. 이 법정 가족 스릴러 드라마 안의 모두가 진실이 무엇인가를 두고 싸우지만 역설적으로 극 밖의 관객은 ‘무엇이’ ‘왜’ 진실인지가 전혀 중요치 않으며 ‘그 중 어떤 것이' '어떻게’ 발화되는가가 훨씬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것을 빠르게 깨닫게 된다.
거의 모든 씬이 긴장감과 흡인력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극 중 가장 흥미를 끈 것은 남편 사뮈엘이 자신의 가사노동 기여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잘 나가는 작가이자 실질적 가장인 부인 산드라 대신 가사와 육아에 더 집중하길 선택했던 사뮈엘은 몰래 녹취한 부부 싸움에서도, 아들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 속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희생’을 말하고 있다. 그는 ‘늘 남들을 먼저 챙겨야 해서‘ 힘들었다고, 파트너를 위해 일상 리듬, 시간, 언어까지 모두 맞춰주며 살았다고 절규한다. 사뮈엘은 심지어 시각장애인 다니엘에게 없어선 안 될 안내견 스눕에 자신을 투사한다.
그런데 이 기이한 플래시백에 다니엘의 음성을 빌어 입혀진 사뮈엘의 서사를 접한 관객은 희한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평생 독박 육아와 독박 가에 시달리던 부인들이 분노에 차 내지를 법한 진술 아닌가.
사뮈엘의 잘 계산된 분노는 같은 노역을 부인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당당하게 발화하지 못하는 와중 취해진 전략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아직 초등교육을 받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혼자 쉬는 시간을 가져본지 너무 오래됐으니 무려 1년의 안식년을 달라고 주장하는 여성 가정주부의 사례는 분명 흔치 않다. 여자들이 평생 군말 없이 자신을 희생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홀로 키웠으므로 사뮈엘 역시 군말 없이 복종해 억울함을 마냥 삼키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법정에서 실질적 경제활동을 도맡았던 산드라를 두고도 ‘남편이 위층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아래층에서 팬과 놀아났다든가 ‘남편의 고통을 무시했다’든가 기를 세워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검사 측 증인들의 성차별적 진술을 연이어 듣다 보면, 그들이 공교롭게도 전원 남성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사뮈엘의 언어와 여성들의 언어가 각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곱씹게 된다. 산드라처럼 성공한 작가는 끝내 되지 못했어도 제1세계 지식인인 사뮈엘이 과연 그 여자들과 자신의 차이를 몰랐을까.
'남성' 주부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걸 잘 아는 사뮈엘은 고분고분한 가정의 천사 따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재구성해 저항적 서사의 질료 삼아 투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사뮈엘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는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와 구조적 경력단절의 부당함을 인정받기 위해 몇 백 년간 투쟁한 여성들의 지적 노고를 너무나 쉽게 전유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투쟁의 언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파되기 마련이다. 피해자 정체화에 유용한 담론은 누구나 탐내기 때문이다. 정확한 타겟을 위해 고안되었던 언어가 대중적으로 남용되고 결국 최초의 본질과 다른 방향성을 띠게 되는 탈취의 과정을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산드라 역시 전형적인 ‘남편’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부부 싸움 당시 산드라는 ”왜 이렇게 흥분했냐“고, ”사소한 데 집착하지 말자”고, “나도 고생하고 있다”고 사뮈엘을 달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책망하는 말을 건넴으로써 그의 화를 점점 더 돋운다. 산드라가 이기적이고 자기 시간만 중한 줄 안다고 말하는 사뮈엘의 규명은 분명 일리가 있다. 첫 장면부터 그는 질문이 많다며 불안해하는 학생 조에에게 ”아, 괜찮아, 시간은 아주 넘치도록 많아“라고 답하지 않는가.
그는 시종일관 여유 있는 승자의 자세를 취하고 때론 이기적인 가부장 특유의 나르시시즘을 재현한다. (이 오롯이 자신만의 편안함을 위해 기울어진 자세를 지켜보는 스눕이 물고 있는 공은 어느 층에서 누가 떨어뜨린 것일까. 혹시 그때 누가 그의 그 대답을 들었을까.) 그는 자신의 지위와 매력 자본을 십분 활용해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대화를 자기 입맛대로 끌어가며 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미묘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그는 복종이나 저항보다 우아한 군림이 선천적으로 어울리는 타입, <타르>의 리디아 타르를 떠올리게 하는 영리하고 냉정하고 자기애로 충만한 여성이다.
자, 어차피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저울에 두 사람이 올랐다. 가사와 육아 때문에 저술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취약함을 이미 드러내버린 사람과, “내 걱정 마. 난 어떻게든 써.”라고 얄밉게도 틀린 말 없는 선고를 내려버린 사람. 산드라가 말한 것 중 가장 날카로웠던 진실, 그래서 사뮈엘이 가장 인정할 수 없었던 진실은 아마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두고 날 원망하는 거야. 혼자 덫을 놓은 거야”보다도 “(가사노동의 배분에) 완벽한 균형은 없다고 봐. 순진하고 딱한 발상이지.”였을 것이다. 한 가정이란 무대가 이갈리아처럼 충분히 전복되기엔 너무나 작은 섬이었던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 싸움에서 누가 패자인지는 명백하다. 이때 패자에게 중요한 건 ‘왜’ 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느냐다. 녹취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사뮈엘은 최대한 지저분하게 부인을 옭아매기를 선택한 듯하다.
남편의 죽음을 두고 검사는 살인을, 변호사는 자살을 주장하는 꼭두각시 극에서 주연이 된 부인은 또 한 번 남편보다 한 수 위인 역량과 그릇을 입증한다. 결론적으로 변호사 뱅상에 의해 저지당하기는 하나, 죽은 남편을 불안정한 환자로 초장부터 몰아가는 쉬운 길을 피해 오히려 ’지저분한 이야기는 빼자‘며 파트너의 품위도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지켜주고 싶어하는 그의 선택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 선택에는 배려와 도덕성뿐만 아니라 온전한 진실에 대한 본능적 지향이, 또 그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드라는 자기주장을 입증하기 어려운 논쟁이 자기 파괴로 귀결되더라도 그 논쟁 자체를 피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그런 류의 복잡성을 추구하고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비범한 작가인 그의 재능은 남편이 말하지 않고 어쩌면 그 스스로도 몰랐던 무의식 너머의 욕망과 좌절, 왜곡된 인식과 뒤틀린 감정들을 정확히 간파하고 만다. ‘큰 상황의 아주 일부’만 보고 두 개인 사이 축적된 역사의 전부를 짐작하지 말라는 산드라의 논리정연한 호소는 검사를 비롯한 청중의 적의를 잠시라도 멈춰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주 일부’는 결국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적이고 강인하고 야망 있는 여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부부간 원망은 덜하고 동등한 수준에서의 지적 교류는 더 활발했던 시절, 사뮈엘의 허락 하에 그의 개요를 가져다 소설로 발전시킨 산드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뮈엘이 제기한 표절 시비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양성애자로서 언제든 남성을 거부하고 남성 없는 삶을 꾸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산드라는 남편과 그의 정신과 상담의, 검사와 수사팀장을 위시한 남성들에게 위협적이고 미스테리한 존재가 된다.
농담이 아니라 산드라가 ‘웃지 않는’ 즉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여성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 프랑스 법정에서의 - 이질적 존재감을 한 번 더 강조하는 알레고리나 마찬가지다. 그는 여러모로 남성-내국인-지식인들과 다르며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드문 이방인 여성이므로. "여성이 지능과 야망, 정신적 강인함 때문에 어떻게 공격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의도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산드라가 얻은 것이 오로지 고독뿐이라는 결말의 암시를 통해 슬프게 빛을 발한다.
열악하고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산드라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생각해낸 설을 밀어붙여야 하는 처지로 몰아붙여진다. 산드라에게 아직 미묘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 변호사 뱅상은 그를 믿는다고 공언한 유일한 어른이지만 애석하게도 ‘판단하는 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정작 산드라의 믿음을 획득하지 못한다. 뱅상은 법정에서 단 한 번 사실을 넘어선 추정을 ‘실수로’ 흘리는데 이때 그는 자기 피고인의 욕망(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다) 또는 자신의 직업인으로서의 의무(피고인의 결백을 입증한다)보다도 인간 뱅상으로서의 욕망(산드라를 보호한다)에 잠깐 휩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드라를 지키기 위해 사뮈엘을 비난하고 찢어발긴 후, 사뮈엘이었던 것을 다시 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재조립해 사뮈엘의 형상을 띈 것으로 창조한 직후. 지금까지의 변호 중 가장 감정적으로 설득적이었던 반론을 펼친 그가 마주한 것은 산드라의 화난 얼굴과 단호한 거부 제스처다. 말했듯 산드라는 악의나 계략에 맞서는 것보다 진실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달하는 데에 가치를 두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가 산드라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둘의 얼굴이 한 숏에 잡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 역시 산드라라는 독특한 인물의 불가피한 고립을, 단독자로서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하다. 산장 부엌에서 이뤄진 뱅상-산드라 간의 첫 진술 장면, 바로 직전까지 아주 가까이 앉은 둘을 한 번에 잡는 바스트 숏이 수 차례 등장했는데도 산드라가 진술하고 뱅상이 질문하기 시작하자 각 인물의 음성이 전개될 때마다 얼굴을 정면으로 비출 뿐이다. 함께 있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카메라의 빠르고 단호한 시점 전환 때문에 관객은 거의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단절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는 후일 법정에서 증인석에 선 채로 검사와 변호사 측 증인들의 말을 번갈아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다니엘을 트래킹 패닝 숏으로 잡은 것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칭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산드라를 두고 다니엘은 흔들리나 이어지고 뱅상은 확고하나 불통한다. 뱅상은 설원에서 취한 채 함께 담배를 피우고 텐션 가득한 농담을 할 때도 산드라를 마주 보고 있으나 카메라는 다정히 이어지는 시선 대신 각자의 후면 혹은 측을 보여줄 뿐이다. 아들의 축객령으로 우는 산드라를 뱅상이 태워 어두운 산길을 내려가는 씬에서도 그는 거의 음성으로만 등장하고 화면은 산드라의 표정에 집중한다.
법정에서의 지난한 싸움이 다 끝나고 승리감에 도취해 단둘이 남겨지자 또 한 번 숨 막히는 텐션이 오르지만, 뱅상은 반쯤만 기대 오는 산드라를 딱 그 반만큼만 안아줄 수 있으며 관객 역시 그이들을 ’창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 사람은 또다시 등만 보이는 채로. 우리에게 온전한 관람이 허락되는 교감은 뱅상과 산드라의 포옹이 아니라 귀가한 산드라와 다니엘의 한밤 침실에서의 보다 완전한 포옹이다.
산드라의 이해자는 변호인단이나 조에 같은 팬들이 아니라 극 중 유일한 미성년인 다니엘이다. 엄마의 언어와 아빠의 언어가 다르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중간 지점을 택한 부모 사이에서 가엾은 소년 역시 ‘남은 한쪽이라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한다. 다니엘은 사고 이후 고도 근시를 가진 소년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무지와 단차와 오해를 필연적으로 달고 다니는 존재다. 극 중 산드라의 진술보다 다니엘의 진술이 먼저 의심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법정에 선 산드라가 문득 다니엘의 시점에서 관찰되듯 그려지는 구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흐릿한 실루엣을 집요히 좇는 그는 엄마의 진술을 듣고 가장 효과적이고 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낸다.
완성형 작가 그리고 이제 막 자기 이야기를 처음 써낸, 작가의 운명을 타고난 아들. 그들의 ‘생각해냄’이 recall인지 invent인지 우리는 영원히 추측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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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반복 도르마무를 하고 있는 남자의 사연은?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8월 19일 개봉예정 영화 팜스프링스 시사회 관람 리뷰입니다. 100만번째 하루를 반복하고있는 남자의 사연은? 믿고 보는 타임루프물!! 솔직한 감상평과 함께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시사회 초대는 영화 전문 플랫폼 [씨네랩]에서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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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션 파서블>
"돈 되니까" VS "국가를 위해"
우린, 한다면 한다!
티격태격 하는 말마다 태클,
우당탕탕 하는 짓마다 사건!
우수한X유다희,
아찔한 이 공조를 멈출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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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슈퍼볼 예고편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다" 인류의 끝에 펼쳐진 유인원의 새로운 시대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슈퍼볼 예고편 공개 5월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