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12-18 07:38:19
연애와 연대 사이의 사랑
〈사랑은 낙엽을 타고〉

2023년, UN 자문기구에서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핀란드를 꼽았다(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인 57위다).* 무려 6년 연속 1위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을 테다. 지상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을 비춘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국제비평가연맹이 선정한 2023년 최고의 영화로 꼽히기도 했다.
안사는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홀라파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안사와 기계로 무언가 작업을 하는 홀라파의 표정은 건조하고 권태롭다. 색깔에 비유한다면 무채색의 느낌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어 보이고, 조금은 염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한 술집에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낀다. 통성명도 없이 데이트를 이어가던 둘. 그러던 중 안사가 홀라파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며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런데 홀라파는 그만 그 종이를 잃어버린다. 홀라파는 둘이 함께 있던 곳을 돌며 안사를 수소문하고, 홀라파의 연락 없음에 실망하고 있던 안사를 다시 만난다.
영화에서, 노동 현장에서의 생기 없는 표정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때의 표정은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닌, 안사와 홀라파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이들은 일할 때는 활력을 잃고, 사랑할 때는 기운이 샘솟는다. 불안정한 직장에서 당장 눈앞의 생계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설렘과 애타는 마음으로 감정이 들끓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이토록 선명한 대비의 공존은 둘의 사랑을 ‘연애’인 동시에 ‘연대’로 만들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비정규직이다. 그들의 고용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의미다.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관리직원에게 자그마한 트집이라도 잡히면 바로 해고다. 실제로 둘의 직업은 수시로 바뀐다. 안사는 마트에서 버리는 물건을 챙겨가다가 해고당하고, 고용주가 마약 거래를 하다가 체포돼 직장이 사라져 일거리를 잃는다. 홀라파는 항상 조금은 술에 취해 있는 것이 걸려서 해고당하고, 장비 노후화로 산재를 당해도 그 원인이 술로 돌려져 해고당한다. 그럼에도 빈털터리인 둘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는 흐릿하게만 보이던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연애와 연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라디오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채널을 바꾸거나 꺼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지만,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방송을 들으며 같은 감정을 느낀다. 커다란 폭력은 사람들의 유대와 연대, 일상을 파괴하며 개별 인간을 단절시키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위축된 채 서로 떨어져 있다는 공통적인 처지에서 무언가를 벼려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연출이다. 투박하고 고전적인 화면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는, 종종 능청스럽고 뻔뻔하며 동시에 비장한 대사와 만나 웃음을 자아낸다. 사회적 체면이나 가식 따위에 대한 고려 없이, 때로는 ‘망상’에 가까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은 영화가 그려내는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과 그럴듯하게 어우러져 잔잔하면서도 파격적인(?) 코미디의 효과를 자아낸다. 산재로 병원에 입원한 홀라파에게 안사가 키스한 후, 그가 눈을 뜨는 장면은 이와는 또 다른 패러디의 효과를 낸다. 연애와 연대 사이의,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일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들이 거주하는 세계로부터 반전될 수 있음을 무채색 세계에 따뜻한 유머를 곁들여 알려준다.
*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31210010002697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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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도 높은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
SYNOPSIS.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
POINT.
✔️ 일단 이 영화를 보세요. 시놉시스만 아시는 상태로 그냥 다짜고짜 보시기를 권합니다.
음향이 중요하니 돌비(메가박스), 사운드X(CGV) 등 음향을 강조한 상영관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 이외의 다른 모든 이야기는, 영화를 다 보신 후에 찾아보셔요. 이 글 같은 리뷰는 물론, 평론가 해설 또한 영화를 보신 후에! 찾아보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꼭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읽어주세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길지 않은 한 마디지만, 손을 떨면서 하는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주연을 맡은 산드라 휠러 배우가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D0v0WRqqVso
"... All our choices were made to reflect and confront us in the present,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rather 'look what we do now!'. Our film shows where de-humanization leads at its worst. It shaped all about past and present. 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se their jewishness and the Ha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applause)
... whether the victims of October the 7th in Israel or the ongoing attack on Gaza all the victims of this de-humanization, how do we resist? (applause)
Alexandra Bystroń-Kołdziejczyk, the girl who glows in the film as she did in life chose to, I dedicate this to her memory and her resistance. Thank you.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수)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학살의 희생자든...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박수)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지치크, 영화에서 만큼이나 실제도 빛났던 소녀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이 발언은 이 영화를 완성했다.
아니, 이 영화는 나의 마음에 닿아서 완성되는 영화일 것이다.
소리는 당신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오감, 아니 육감 중 가장 큰 부분을 시각에 의지한다. 철저하게 계산되어 고증된 공간과 의상, 내면에 깊은 두레박을 수도 없이 드리워 완성하는 배우의 연기, 그 장면 그 순간을 위한 깊은 노력 대부분이 시각에 의존한다.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그 '시각'이 주는 감정을 보조하기 위해, 그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다르다. 이 영화는 청각으로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시각이 보조한다. 붉고 불길하게 타오르는 꽃잎의 모양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에, 청각이 전달하는 불길한 느낌, 구역질 나는 느낌을 보조한다. 이건 대체 뭐지. 관객은 충격에 빠진다.
소리가 잔인한 이유는 당신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각이 아무리 충격적인 양상을 들이대도 당신의 상상보다 잔인할 수는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카피는 사실 불가능한 카피이다. 언제나 각자의 상상이 각자의 최대치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최악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성립시킨다. 간혹 들리는 비명 소리, 구타가 아닐까 싶은 소리, 총... 같은 느낌이 드는 소리, 동시에 우리의 식민지적 경험이 주는 그 총소리에 대한 의문, (일본군은 당시 총알이 아깝다며 한국과 중국에서 총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총검으로 찌르거나... 그 행위는 그들에게 유희처럼 여겨졌고, 사체의 일부분을 손에 든 채 히죽히죽 웃는 사진도 여러 장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내겐 ‘수용소에서 총 소리가 이렇게 자주 들리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전역과 731부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괴로움과, 서방에서 아우슈비츠가 갖는 의미 대비 그 괴로움이 서술된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자괴감... 나의 직접/간접 경험이 주는 가장 끔찍한 지옥도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파고든, 보는 내내 궁금했던, 마치 기계가 작동되는 듯한 소리.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가 밝혀질 때에, 한편으로는 안심한다. 역사는 언제나 눈을 치켜뜨고 있다. 비록 소리가 상상하게 한 최악의 지옥도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지만, 그들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일 가능성은 없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16p)"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단순히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일원들이 그저 일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 곧 판단의 무능성(20p)"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무너뜨려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21p)"고,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임으로써(42p)" 우리 모두는 아이히만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뼈 아픈 부분이, 이 영화에서도 지적된다. 과연 나는 영화 속 헤스 부부를 보며 단순히 그들을 절대악으로 지정하고 마음 편하게 영화관을 벗어날 수 있는가? 없다. 아이히만은 내 안에 있고, 헤스 부부 또한 그렇다. 17살 때부터 꿈꿔 온 이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헤트비히의 말은... 과연 이 사회에서 자기의 안위를 위해 '각자도생'해야 함을 배운 우리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수십 채나 되는 집을 소유하며 도시를 공허하게 만드는 사람들, '영끌'하는 자기만을 과하게 연민하며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법을 잊은 사람들, 소비로 존재를 대신하려는 사람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113p)"던 아이히만과 우리는 의외로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 속, 아우슈비츠 코앞에서, 연기와 비명 소리와 (아마도 존재했을) 사람'이었던' 것들이 타는 냄새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꽃을 심고 집안을 가꾸는 헤스 부부... 내 집 마련의 꿈을 중요시하지만 사회의 모든 모순은 무시하는 우리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이 영화가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평가되는 이 사건조차도, 단순히 그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최대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가하고 있나. 그들 안에는 아이히만이 없는가?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힘러가, 즉 나치가 사용한 책략은 우리의 "동물적인 동정심"을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174p)" 된 것이었다. 과연 작금의 유대인들은 여기서 얼마나 다른가. 자기 연민과 비뚤어진 자기애로 인류애를 대체하고, 타인의 상황에는 ‘누칼협’ 같은 소리나 들이대고 있는 우리는 또 얼마나 다른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님을, 그러므로 나와 무관하고 그냥 스크린 안에서만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를 뒤집을 수밖에 없다.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프로듀서 앞에서, 실제로 이후 그의 발언이 공식 입장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프로듀서 앞에서, 다시 말해 커리어가 끊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손을 떨면서 1분 남짓의 짧은 말을 이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같은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까지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단순히 아이히만만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영화를 보고 그냥 '미학적으로 좋은 영화군...' 하고 단순하게 돌아설 수 없도록 나와 당신을 막는 힘 또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갈망이 우리를 비인간적인 자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니 배 부른 돼지가 되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 영화는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밍크코트에 이어, 이미 죽었거나 그 근처에 이르렀을 여자의 립스틱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입술에 바르는 헤트비히의 모습에서도, 알고 지내던 유대인 여자가 끌려갔어도 그 커튼을 갖지 못한 것이나 아쉬워하는 대화에서도.
실제 헤트비히 헤스의 말에서 따왔다는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과격한 대사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좀 더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형태의 '인간'이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를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 영화는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시대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의외로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걸 보여주는 존재는 한 소녀다. 감독에게 매우 의미 깊었던 듯한, 영화 속에도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의미심장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감독의 아카데미 소감에도 등장하는, 알렉산드라라는 인물이 있다. 알렉산드라 비스트론 콜로지치크. 그는 영화 속에서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들이 일하는 곳을 밤에 몰래 찾아가 과일을 하나씩 박아 놓고 사라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밤에 뛰어다니는 그곳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굳이 어설픈 직역을 하자면 "이득 지역"인데, "Interessengebiet"라는 독일어 단어를 그대로 옮긴 영어 단어이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인근을 부르던 단어로, 실제로 그들이 아우슈비츠 행정을 위해서라며 이득을 취하던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1941년 나치는 폴란드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몰아낸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고 그 이득을 챙긴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교류를 막았음은 물론이다. 말발굽 아래 너무 쉽게 짓밟히던 과일을, 가방에 소중하게 담아 하나하나 배치해 두는 소녀의 존재는, 처음에는 '뭐지?' 싶게 낯선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이내 그 존재 자체로 어둠 속의 빛임을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열심히 가꾸는 헤스 부부의 집에는 한 번도 직통으로 내리쬔 적 없는 햇살이,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집안으로는 부드럽고 강하게 들어온다.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2016년 9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집에서 촬영했다는 장면에서, 소녀가 피아노로 연주한 곡은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가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제목도 <햇살>. 심지어 옷과 자전거 또한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사용했던 물건이라니 그 의미가 한층 두텁게 느껴진다.
실제 알렉산드라는 1940년 나치가 폴란드에 침공하면서 아버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두는 비극을 겪었고, 친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내부와 접점을 가지고 음식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1년부터는 무장투쟁연맹의 일원으로 연락망을 담당하고, 1943년에는 나치에 의해 노역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우슈비츠에 음식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헤스 작전'으로 소개된, 헝가리의 유대인을 '소거'하는 작전을 앞두고, 전출되었던 자리에서 다시 아우슈비츠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통화하는 부부의 전화로 끝을 맺다시피 한다. 원하는 모든 바가 다 이루어졌지만 내려오면서 어쩐지 구토의 심경을 느끼는 루돌프의 모습이 영화의 사실상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은 매우 역겹다.
구토하지 못하면서도 구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그 모습이, 마치 가해자가 되어야만 했던 자신을 연민하는 액션처럼 느껴져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178p)"이었다는 아이히만의 사고와 동일하게 느껴져서. 가스실을 만들고, "효율적인" 시체 처리법을 고안한 것이 "업적"이었던 그들의 사고방식. 자신의 알량한 삶을 위해 타인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그 방식과 체계와 행정이나 고민하고 있었던, 무뎌지고 마비되었던 두뇌들. 구토하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구토로 자신이 인간인 것처럼 호소하던, '비인간화'의 결과물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소개된, 매우 예외적인, 그래서 독특한 이야기 하나를 나눈다. 이 영화의 ‘헤스 작전' 회의 장면에서도 언급되듯 나치에 진작 동의했던 헝가리 정부와 달리, 끝까지 나치의 유대인 소탕에 반대한 나라가 있었다.
덴마크 국왕은 자신이 자진해서 유대인의 별을 달겠다고 했으며, (왕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굳이) 대신들은 혹시라도 왕이 반유대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자진 사퇴하겠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안전하게 운송'되었으며, 그 과정에 필요한 자금은 덴마크 부유층이 댔다. 결국 덴마크 출신의 유대인들 중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였고, 이들은 대부분 순순히 문을 열어줄 만큼... 노쇠하였거나 가난에 치이느라 현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다시 말해 사회적 최약자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덴마크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고, 그 결과 이들은 수용소에서도 남다른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거였다. 이럴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아우슈비츠와 '악의 평범성'을 타자의 위치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아이히만이 가리키는 지점을 묻고, 그 지점과 싸울 의지가 있는지 묻는 것과도 같다. 이미 시체마저 썩어버린 과거의 나치에게 섀도복싱을 하는 대신, 진짜 내가 싸워야 할 상대에 맞설 마음이 있는지 묻는다. 우리 시대의 나치는 무엇이며, 그 앞에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에 무거운 마음을 답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답이 있는 곳이, 완성도 높은 이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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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카프카의 질문에 지독하게 응수하는 아리 애스터
불안한 머릿속
이 영화의 주인공인 보 와서만은 미국 어딘가에 사는 평범한 백인 아저씨다. 심리 상담가와 상담 중인 보. 상담가는 보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솔직히. 어머니가 돌아가시길 바란 적 있었나요?” 아연실색하는 보. 어머니가 무섭다고는 느꼈지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약에 대해 처방받는 보. 의사는 보에게 ‘반드시 약을 물과 함께 먹어라’라고 당부한다. 할 일이 있던 보. 잠깐 외출하는 길에 여려 광경을 목도한다. 누구는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한다. 아예 길바닥에 시체까지 있다. 더러운 길거리. 어수선한 분위기를 무시하고 집에 돌아가려 하는 보. 문신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남자가 갑자기 뛰어온다. 당황하는 보. 집 엘리베이터까지 미친 듯이 달려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보는 안간힘을 쓰고 있다. 뭐가 문제인지 이 남자의 일상은 크게 뒤틀려있다.
어떤 일상을 살던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할 일은 해야 한다. 내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잠을 청하는 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집 덩그러니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누가 보의 집에 저벅저벅 걸어온다. 누군가는 보의 문 틈에 쪽지를 쓱 던졌다. “선생님! 우리 다 같이 잠들어야 하잖아요. 음악 소리 조금만 자제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이상했다. 보는 원래 조용히 잠을 자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점점 자주 날아오는 쪽지. 음악의 m자도 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경고는 더 심각해진다. 갑자기 음악소리가 커진다. 보가 늦잠을 잤다. 비행기 타야 하는데 시간을 놓쳐버렸다. 갑자기 꼬인 보의 귀로. 설상가상으로 악재가 겹치기 시작한다. 이런 보에게 경비 아저씨가 한마디 던진다. “넌 x 됐어. xx아.” 놀랍게도 말이 정확히 이뤄진다. 보의 귀향길은 너무 어려웠다. 그에게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감독님 직업이 영화감독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이 남자의 데뷔작은 무려 <유전>이다. 그리고 그 차기작은 <미드소마>다. 파멸적인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 아리 애스터는 일반적인 호러 영화 문법을 온몸을 바쳐서 거부하던 사람이었다. 첫 번째. 데뷔작 <유전>이다. <유전>에서 기억에 남았던 점은 화면을 담는 방식이었다. 영화에서 절대자가 등장한다. 이 절대자가 짜놓은 판에 주인공 가족이 휘말리는 게 영화의 핵심이 되는 만큼 어떻게 신의 존재를 묘사할지가 작품의 핵심이었다. 이를 카메라 구도와 건물 구조로 묘사한다. 악마가 바로 옆에서 보는 듯한 촬영 방식, 디오라마로 표상되는 시각적인 무력감 묘사 같은 것들이 거부할 수 없는 저주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했다. 다른 영화 <미드소마>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만 봐도 다른 호러 장르물과는 다르다. 영화의 초반부-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입장을 바꿨는지가 그게 대한 근거다. 트라우마가 있던 주인공.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공감하고 치유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미드소마>에서 핵심으로 작동하는 부분이었다. 이 과정 중에 주인공에게 큰 상처를 남긴 그녀의 가족들, 가짜로 공감했던 남자친구를 뒤로 하고 같이 울어주는 대안 가족의 역할을 보여주던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로 뽑을 만하다. 보통 트라우마를 주던 쪽이었던 호러영화들이 이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플롯을 끌고 갔던 것이다. 물론 공포 분위기를 주던 방식 역시 신선했다. <살인 소설>이라는 영화가 있다. 에단 호크가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는 ‘점프 스케어’와 사운드를 중심으로 한 연출법으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것 같은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미드소마>는 이 반대였다. 아예 대놓고 장면으로도 나온다. ‘설마! 헉!’같이 ‘실제로 이럴지도 모르겠다’라는 부분을 진짜로 구현하며 끔찍한 비주얼 호러를 묘사했다.
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도 색다른 연출방식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 영화가 전작 두 편에 비해 호러영화의 장르적인 특성을 띄고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기존의 감독 필모그래피에서 다른 지점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호러영화의 색을 띠고 있긴 하지만 장르적으로 보면 모험/판타지물에 가깝다. 하지만 기존 영화관을 계승한 지점도 있다. <유전>에서 딸을 떠나보내고 연대하는 두 인물, <미드소마>의 엔딩처럼 연대와 공감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으로 여러 번 삽입된다. 또 영화에서 호러 분위기를 나타내던 방식 중 하나는 분위기다. 이야기의 서스펜스를 끔찍하고 두려운 이미지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인공의 특성에 기반해서 만들었다는 부분은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게 한다. 이전과 다른 화법이지만 ‘역시 아리 애스터’라고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영화는 몇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구체적으로 ‘몇 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 챕터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어떻게 전개하는지를 유념하고 본다면 이는 아리 애스터의 상상력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반복과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은 영화의 선명한 개성으로 작동하며 엔딩신이 들어갈 이유가 된다.
카프카의 농담
1880년대 후반, 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감성적이었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는 이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폭언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아버지의 하대는 카프카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이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는 카프카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변신>이 있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다. 외로운 그레고르. 어느 날 눈을 떴는데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이상하게 생긴 벌레로 변한 것이다. 벌레가 됐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다. 그레고르는 그렇게 쓸쓸하게 혼자 죽어간다. 정작 위기에 직면할 때 가족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 실존주의라는 테마는 카프카의 작품 세계에서 핵심으로 작동했다. <변신>만 봐도 그렇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생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에 대한 문제다. 가족들에게 헌신했지만 다시 버림받은 그레고르. 인생 내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그레고르를 어떻게 다른 구성원들이 지켜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분명 생존을 책임졌다면 가족들이 그레고르의 실존을 긍정해도 되는 것 아닐까? 영화는 이 생존에 대한 딜레마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단순히 이야기 구조만을 갖고 온 것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인식론의 문제, 중반부부터 제시되는 몇 사건들, ‘벌레가 되었다’ 같은 극단적인 비유 같은 것들이 카프카의 색이 영화 안에 들어갔다는 느낌이 강하다. 대표적으로 1부 마지막에 벌어지는 일들은 불안장애에 대한 비유 같기도 하지만 세상과 나 사이, 그리고 가족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소재가 들어가 있다. 과연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세상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받는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영화가 사실 대중적으로 엄청나게 호평을 받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감독의 전작 <유전> <미드소마>가 대중적인 호러영화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야기 구조가 직선 형태라서 이해하기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솔직히 쉽지 않다. 분위기기에서 한발 더 들어가 거리 두기도 가까이 붙이며 반복함으로써 인간을 서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초현실적인 플롯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느낄 수 있다면 영화를 정말 잘 보고 있다고 쓰고 싶다. 감독의 이상한 유머감각이 잘 들어간 지점이다.
탄생의 이미지
영화에서 어떤 시각적인 이미지가 후반부에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고 극에서 반복되는 한 키워드를 대표하는 이미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사실 영화의 핵심을 그대로 관통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물이다. 작품의 첫 장면이 보가 어딘가에 있다가 나오는데 그것이 물과 관련이 있다. 이 물은 1부에서 단수와 홍수로 보여주다 2,3,4부로 넘어가면 각기 템포를 변형하며 각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극초반부야 당연히 탄생의 이미지라는 걸 말할 수 있지만 이후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당연히 강력한 스포일러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제일 첫 장면이 탄생과 관련한 일이고, 이를 중심으로 본다면 아리 애스터가 인간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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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을 바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인생의 오만 군데를 다 찌른다. 이 시선이 기괴하고 이상해서 관객 입장에선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의 정서가 어땠을까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입장에서 저런 기분을 느꼈는지 생각해 보면 영화를 보다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다. 아리 애스터의 변태 같은 디테일이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불사조 폼 미쳤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호아킨 피닉스다. 사실 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보고 극장에 들어갈 사람이면 <조커>가 어떤 영화인지 알고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상이란 상을 싹 휩쓸었던 호아킨 피닉스. 이 영화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조커’는 참고 있다 폭발하는 연기라면 반대로 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내내 분출하는 연기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핵심은 불안장애다. 이 불안장애의 특징이 뭘까?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으로 틈입해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이러려면 자그마한 것에도 사람이 불안해한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특히 1부에서 질주하는 몇 장면, 극후반부 시퀀스 전부는 이 사람이 가진 연기자로서의 역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다시 체감하게 한다. 이 사람의 최근작은 <컴온, 컴온>이었다. 이 영화에서 임팩트 쾅 주고 내내 배경이 됐던 연기의 반대 측면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웠다.
주연의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도 굉장히 훌륭하다. 우선 1부에서 보의 동선이 짜여 있는 방식을 본다면 인물 간의 동선을 세팅한 점이 꼼꼼하게 느껴진다. 이 동선을 촬영하는 구도도 어쩔 땐 시점 쇼트가 들어가고 인물의 표정이 제시되는지가 적재적소에 잘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공간적 배경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집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으로 바뀌고 이 변한 공간이 영화에서 변곡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영화가 어떻게 차이점을 두고 묘사했는지를 본다면 영화가 인간사의 어느 부분을 꼬집고 싶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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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어데블 | 자경단이냐, 변호사냐, 그것이 문제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슈퍼히어로의 도덕적 딜레마
독일의 법학자 엘리네크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말했다. 법은 외적인 행위에 대한 강제적 규범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율적이고 내면적 동기에서 기인하는 도덕의 영역 중 일부만 제한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법과 도덕은 딜레마를 낳는다. 도덕적으로는 옳아도 법적으로는 규제돼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답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이 딜레마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철학적 바탕을 이룬다. 영화 속 슈퍼히어로는 기본적으로 현행법을 위반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범죄자다. 그렇기에 일부 시민, 경찰, 검사나 정치인은 그를 경계하고 통제하고자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민들은 슈퍼히어로의 선한 의도를 믿기에 그가 옳은 일을 할 거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희망은 슈퍼히어로가 의심받고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영웅다운 일을 해내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에 슈퍼히어로는 부상당하거나 강력한 적이 등장했을 때 위기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의 도덕적 동기를 의심하고, 주어진 법에 순응하려 할 때 그는 약해진다. <스파이더맨 2> 속 피터 파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브루스 웨인, <어벤져스: 엔드게임> 속 토르,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젊은 찰스 자비에까지.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정체성을 잃고, 위기에 처한다.
디즈니+로 공개된 MCU의 새로운 드라마 <데어데블: 본 어게인>(이하 <데어데블>)도 마찬가지다. <데어데블>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넷플릭스에서 시즌 3까지 공개되었던 <마블 데어데블>의 후속작으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변호사 쉬헐크>에서 먼저 카메오로 등장한 '맷 머독/데어데블'(찰리 콕스)의 MCU 복귀작 역시 역시 슈퍼히어로의 도덕적 딜레마를 다룬다.
익숙한 고뇌
<데어데블>은 데어데블로서의 활동을 포기하는 맷 머독을 비추며 시작한다. 친구인 '포기 넬슨'(엘든 헨슨), '캐런 페이지'(데보라 앤 월)와 평온한 저녁을 보내던 와중에 맷은 '포인덱스터/불스아이'(윌슨 베델)의 기습을 받는다. 맷은 포인덱스터를 제압하는 데 성공하지만, 총에 맞은 포기가 사망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인덱스터를 옥상에서 떨어트려 죽이려 한다. 데어데블만의 불살주의를 지키지 못한 것.
포기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캐런마저 뉴욕을 떠나자 맷은 깊이 고뇌한다. 불살주의마저 지키지 못한 이상 데어데블이 과연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지, 폭력으로써 범죄에 맞서는 자경단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회의한다. 고민 끝에 그는 자기 내면의 규범이 아니라 외적 규범, 곧 법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데어데블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엘리트 맹인 변호사 맷 머독은 합법적으로 세상을 바꿀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그 일환으로 맷은 경찰을 죽였다는 혐의로 체포된 '헥터 아얄라'(카마레 데 로스 레예스)의 변호를 맡는다. 그는 헥터가 부패 경찰에 의해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헥터가 사실 '화이트 타이거'라는 자경단으로 활동하며 사회적 약자를 도왔다는 전력을 강조한 끝에 무죄를 받아낸다.
하지만 헥터가 무죄 판결을 받은 바로 그날 밤에 살해당하자 맷은 다시 한번 좌절한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선을 추구하고 실천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마저 배신당하자 그는 데어데블 마스크를 다시 만지작거린다. 법이 무용하다면, 불법이라 해도 데어데블의 힘과 능력을 이용하는 게 도덕적으로 옳은 게 아닐까 자문하면서.
시의적절한 빌런의 등장
여기까지만 보면 <데어데블>의 서사나 메시지는 특별하지 않다. 다른 히어로들이 경험한 도덕적 딜레마, 정체성의 위기를 맷 머독도 똑같이 경험한다. 그러나 <데어데블>에는 두 가지 특이점이 있다. 첫 번째는 <호크아이>와 <에코>에 얼굴을 비추며 MCU에 복귀한 빌런, '윌슨 피스크/킹핀'(빈센트 도노프리오)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악역으로 묘사된 킹핀 덕분에 데어데블의 고뇌는 다른 히어로들과 다른 결을 갖추는 데 성공한다.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다가 돌아온 MCU의 '블립' 사건 이후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진 뉴욕. 킹핀은 이를 데어데블, 화이트 타이거, 스파이더맨 같은 자경단의 탓으로 돌리면서 대중들의 불안함과 기대감을 공략한다. '레드 후크 부두'와 같은 우범지대를 재개발하고, 영장을 팔요로 하지 않는 초법적 권한을 가진 자경단 특별 수사대 출범과 같은 사이다 공약을 내세운 끝에 킹핀은 뉴욕 시장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다.
킹핀의 정치적 성공은 극우 정치인의 등장을 MCU에 맞게 각색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중의 사회적 불만과 불안함을 해소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적으로 집권한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에는 합법적인 척 불법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일례로 백악관에 재입성한 트럼프는 당선인 신분일 때 사적으로 발행한 밈코인을 위해 대통령이라는 직위와 백악관을 동원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부두 재개발 사업을 사업 확장과 탈세에 악용하려는 킹핀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특히 킹핀이 자기가 사주한 테러를 명분 삼아 뉴욕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순간, 맷 머독의 고뇌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불법적인 내용을 형식적 정당성으로 가리려는 킹핀의 독재를 합법적 수단은 막지 못한다. 이에 법과 도덕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맷은 데어데블의 길을 다시 걷기로 결심한다. 설령 위법하더라도 도덕적으로는 옳은 길을 선택해야 비로소 킹핀에게 맞설 수 있을 테니까. 이처럼 히어로의 정체성 회복 서사를 사회 정의를 바로잡는 공동체 차원의 이야기로 확장하면서 <데어데블>은 차별화에 성공한다.
보여주지 않아서 부각되는 갈등
두 번째는 <데어데블>의 구조와 연출이다. <데어데블>에서는 히어로와 빌런이 좀처럼 만나지 않는다. 데어데블과 킹핀은 1화와 8화에서 각각 한 번씩 만나는 것을 제외하면 접점이 없다. 둘이 한 액션 시퀀스에 함께 등장하는 장면도 없다. 그 대신 드라마는 그들을 편집으로 이어 붙여서 킹핀과 데어데블이 서로를 의식하고,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 다음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가시적 충돌을 보여주지 않는 연출은 오히려 그들의 신념을 부각하는 데 효과적이다. 윌슨 피스크가 뉴욕 시장과 킹핀 중 후자로 거듭나고, 맷이 변호사가 아닌 데어데블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흥분으로 물드는 뉴욕의 밤거리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는 킹핀과 혼란스러운 거리의 소음을 들으며 데어데블의 필요성을 깨닫는 맷 머독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더 나아가 드라마의 메시지도 구체화한다. <데어데블>은 다음 시즌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질 킹핀과 데어데블의 싸움을 예고하며 막을 내린다. 이때 카메라는 킹핀이나 맷 머독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바텐더, 전직 경찰, 변호사, 상담사, 기자와 같은 일반 시민들의 얼굴을 한 명씩 비추고, 그들이 킹핀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길과 맷을 도와 킹핀에게 맞서는 길 중 어떤 선택지를 골랐는지 암시한다.
이는 시민의 역할, 곧 시민적 덕성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설령 법을 위반할지언정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실질적인 위법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가 시민에게 주어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즉, 만약 히어로와 빌런의 대결에만 포커스를 맞췄다면 상대적으로 희미해졌을 사회적, 공동체적 차원의 메시지를 결말을 통해 다시 한번 환기하는 셈이다.
과정을 잊게 만드는 결과물
다만 킹핀과 맷 머독을 일부러 조우시키지 않은 선택은 일장일단이 있다. 서사적으로는 영리하지만, 장르적으로는 아쉬움을 남긴다. 히어로와 빌런이 좀처럼 만나지 않으니 절대적인 액션 분량이 줄어들고,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장면도 찾기 어려워지기 때문. 데어데블의 초인적 감각을 살린 고유의 액션 스타일은 건재하지만, 슈퍼히어로 장르의 쾌감을 살리지는 못한 것. 결국 다음 시즌을 위한 빌드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액션씬의 부재는 잡음이 많았던 제작 과정의 여파처럼도 보인다. <데어데블>은 본래 <마블 데어데블>과는 달리 법정물로 기획됐지만, 내부 시사회 평가가 좋지 않자 촬영 도중 작가와 감독들을 해고한 뒤 방향성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새롭게 추가된 에피소드인 1, 8, 9화에만 액션 시퀀스가 집중된 것은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데어데블의 MCU의 복귀는 아쉽더라도 충분히 성공적인 듯하다. 제작 과정의 난맥상을 고려했을 때 데어데블과 킹핀의 첫 발걸음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서사와 시의적절한 메시지로 꽉 차 있으니까. 이에 더해 '카말라 칸/미스 마블'의 아버지인 '유수프 칸' 같은 캐릭터를 활용해 MCU와의 연계도 있지 않았으니 <데어데블: 본 어게인>은 기존 팬들도, MCU 팬들도 모두 만족할 후속작 겸 복귀작처럼 보인다.
Exceeds Exectations 기대 이상
캐릭터 서사도, 현실적 맥락도 놓치지 않고 MCU에 안착한 헬스키친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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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한 가족의 여름
감독: 카를라 시몬
출연진: 아이넷 조우노우, 호르디 푸욜 돌세트, 안나 오틴, 제니아 로세트, 알베르트 보쉬
시놉시스: 복숭아 농장을 운영하는 한 가족에게 여름 안에 떠나 달라는 지주의 통보가 도착한다.
카를라 시몬 감독은 전작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에 이어 또 한 번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인물이 몇 등장하지 않던 전작에 비해 열몇 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비교적 스케일이 커진 이번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서 시작한다. 감독의 고향이자 지금도 가족인 삼촌들이 복숭아를 재배하며 살고 있는 알카라스가 바로 영화의 무대다. 원제에 '여름'이라는 한 단어가 더 붙은 국내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에서 여름이라는 계절의 의미는 어떤 의미로든 특별하다. 영화의 초반부터 이리스 가족은 통보를 받는다. 계약서가 없기 때문에 여름이 끝날 때까지 떠나 달라는 실토지주 피뇰에게서 온 통보문이다. 길지 않게 쓰인 글의 말미에 '예외는 없다'는 부분은 멀지 않은 이들의 미래를 짐작케 만든다. 복숭아나무가 자라고 아이들이 뛰노는 알카라스의 눈부신 여름의 풍광은 그럼에도 눈부시게 빛난다.
과거에 이리스의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피뇰 가는 이들에게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자신의 땅에 살게 해주는 대신 태양전지판을 관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복숭아 농사의 주축이자 이 집의 가장인 이리스의 아버지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농부이길 택한다. 마을을 채우던 복숭아 밭이 하나둘 사라지며 태양전지판으로 변하고, 이리스 가족은 이를 보게 된다. 자신은 끝까지 농부의 길을 걸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농사일 보다도 책을 읽고 공부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태도는 이처럼 자본에 잠식되어가는 개인 농부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방황하는 아들과 할아버지의 외출을 지켜보는 손녀의 모습은 그런 아버지 세대의 저물어감을 보게 되는 농촌 신세대로도 읽힌다.
농부들의 시위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나 태양전지판이 밭의 공간을 점차 차지하게 되는 정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바라보는 이리스 가족의 표정으로 이루어진 숏들로 미루어볼 때 분명 이 영화는 정치적인 영화로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정치 혹은 사회 영화로만 본다면 이 영화의 일부분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심어둔 몇몇 숏이 그 역할을 충분히 하나, 전체로 볼 때 이것은 사실 일부에 불과하다. 결국 이 영화는 한 3대 가족의 이야기이자, 그 가족이 다함께 보내는 어느 여름날의 추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어느 가족의 개인적 이야기에 가깝다.
감독은 전작에 이어 이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에서도 아이의 시선을 영화 안에 녹여내기를 택했다. 카를라 시몬 감독은 아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에 대본을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 대본을 주거나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어린 배우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유대감을 쌓는다. 촬영장에서 그들이 자유로이 놀도록 하고, 그렇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특히나 아이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롱숏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관객이 캐릭터와 그 캐릭터의 감정을 함께 체감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예상외로 쿡쿡대게 만드는 꾸밈없는 장면들이 가득하다.
*영화의 엔딩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가만히 지켜보며 찍는 연출은 어쩌면 감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냥 카메라를 두고 찍으면 되지 않냐는 식의 물음이 따라오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경우에 따라 맞는 말일지도 모르나, 이 영화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영화의 엔딩이 그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카메라에 담는 것만으로도 다른 의미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여느 날처럼 화목한 어느 날, 포클레인 소리에 이리스 가족은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본다. 바로 앞에서 포클레인이 나무를 뭉개고 있다. 리버스 숏으로 가족들의 표정이 보인다. 여기서 영화가 끝났을 수도 있으나, 이 영화는 원경에서 이 광경을 재차 보여준다. 마치 영화 전체를 한 숏에 압축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포클레인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는 아직 망가지지 않은 그들의 복숭아 밭이 보인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면 결국에는 끝이 날 이들의 소중한 여름을 마지막 한 숏에 담으며 영화가, 감독이 이들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올해의 엔딩이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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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닳고 닳은 이야기
이 글은 넷플릭스 [트렁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넷플릭스
그렇다.
나는 추리물을 좋아한다.
시작하자마자 비가 추적추적 오거나, 그 와중에 누가 죽어 나자빠져 있거나 하면 금상첨화다. 그런 내게 최소 토막사체 정도는 들어가 있을 거라는 추리를 하게 하는! 제목마저 [트렁크]라는 작품이라니!! 그것도 이 추운 날에 집에서 뒹굴거리며 볼 수 있는 넷플릭스에서!!!!
무려 8부작이라는 심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기세 좋게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만 해도. 누가 봐도 인지(서현진)가 호수에 토막시체를 버렸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뿜뿜 할 때만 해도.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었다. 물론 그 희망은 정원(공유)과 인지가 그놈의 탱고를 추는 순간부터 아주 소금빵 첫 입 마냥 파사삭 하고 내려앉았지만 말이다. 순간의 실망이었지만 그 틈을 비집고 여태 눌러 참고 있었던 불편함이 우르르 밀려왔다.
기간제 결혼이라는 어색하고 이해가지 않는 설정. 아무리 좋게 봐도 가스라이팅 하는 것으로 밖엔 안 보이는 정원의 전처(정윤하). 아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것 같은 엄마 바라기 한정원도 모자라서, 안타깝지만 이런 미묘하고 섬세한 연기는 아직 소화하지 못하는 것 같은 배우 서현진까지.
사진출처:넷플릭스
분명 새롭고 감각적이면서 섬세한 드라마를 만들려 한 것 같긴 한데. 미묘한 포인트에 대한 설명이나 처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불편함이 꽤 겹겹이 쌓인다. 게다가 후반부엔 정말 대놓고 로맨틱 코미디로 급선회를 해서 꼴 보기 싫게(?) 꽁냥 거리기까지 한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트렁크 안의 시체 어딨 어(없다고).라는 투덜거림도 함께 터져 나온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진 않다. 후반부의 두 주인공이 상처를 치유하고(내 상처는 어쩌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보는 모습에는 미소가 지어지긴 한다. 하지만 그 후반부마저도 급작스럽고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이 미래에 누리게 될 것이라 생각되는 행복도. 상처의 완벽한 치유도 전혀 기대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닳고 닳도록 다루었던. 판에 박힌 이야기로 남아버린다.
내 시체... 내놔.... 니들만 행복하지 마....
[이 글의 TMI]
1. 집에 가고 싶다.
2. 어제 네 명이서 피자집에서 메뉴 여섯 개 뿌심.
3. 엄지손가락이 너무 아파 병원 갈 예정.
#munalogi #넷플릭스 #트렁크 #영화리뷰어 #최신영화리뷰 #ott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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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분리수거>, “마음도 분리수거가 될까요?”
“마음도 분리수거가 될까요?”
“감정도 재활용이 되나요?”
다가오는 여름에 길어진 해를 저녁 시간까지 느긋이 즐기며, 연희동의 예술영화관 ‘라이카 시네마’를 찾았다. 한 관에 40명 남짓이 들어가는 작은 영화관 로비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영화 <분리수거>의 ‘게스트하우스 파티 GV’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관객들이다. 영화사에서 준비한 맥주 한 캔씩을 살짝은 어리둥절한 채로 받아 들고 영화관에 들어선다. 하지만 영화와 함께 맥주를 마시다 보니 ‘이 영화, 맥주와 함께여야 영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이야기도 술 없이는 듣기 힘든 사랑 이야기들이고 말이다.
* 씨네랩(cinelab)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한 GV 후기입니다.
영화 <분리수거> 포스터와 제주도로 향하는 주인공 재연 (C) ㈜모그픽쳐스
영화 <분리수거>는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 모인 여섯 인물의 가슴 아픈 연애담을 풀고 있다. 약혼자의 바람을 눈앞에서 목격해 버린 재연(박보경 역)은 모든 걸 뒤로한 채 제주도로 떠난다.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행복해 보이면서도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상처를 품은 채로 모인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공유할까. 도망쳐온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상처입고 제주도에 모인 여섯 명의 등장인물 (C) ㈜모그픽쳐스
이번 영화는 이소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단편영화 <한까치>(2021)로 청주국제단편영화제, 충무로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그가 약 4년 만에 장편으로 다시 관객들을 찾아왔다. 그의 이번 작품 <분리수거> 속 가슴 아픈 연애담은 일부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소민 감독이 실제로 주변에서 접한 이야기들을 각색하여 영화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현실에 감독만의 상상을 더한 이야기는 그 속의 아픔과 슬픔에 반해 담담하게 연출됐다.
<분리수거>에는 스크린에서는 신인으로 볼 수 있을 배우들이 빛나는 작품이었다. 첫 장편 주연을 맡은 박보경 배우, 연극이 아닌 영화에는 처음 도전하는 윤혁진 배우, 캐스팅을 위해 남다른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는 박민서 배우, 원래 성격과는 다소 다른 캐릭터라고 했지만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준 문경태 배우와 백민지 배우가 출연했다. 그리고 그간 조연과 단역으로 다수 작품에 출연해 온 태항호 배우는 이번 영화를 통해 기존과는 다른 부드러움을 보여줬다.
여담으로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감독이 직접 수중 촬영을 진행했다고 (C) ㈜모그픽쳐스
‘게스트하우스 파티 GV’에서 맥주 한 캔과 함께 만난 <분리수거>는 등장인물들로부터 전해 듣는 연애담이었다. 실제라면 말 그대로 술 없이는 들을 수 없었을 이야기 말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상처를 품은 채 본인의 일상으로부터 도망쳐 제주도라는 육지로부터 떨어진 게스트하우스에 모인다. 그들은 그곳에서 쉬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상처를 공유하며 새로운 경험을 통해 지난 감정을 분리수거한다.
영화 <분리수거> (2025)
감독 이소민
출연 박보경, 윤혁진, 태항호, 박민서, 문경태, 백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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