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12-18 07:38:19
연애와 연대 사이의 사랑
〈사랑은 낙엽을 타고〉

2023년, UN 자문기구에서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핀란드를 꼽았다(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인 57위다).* 무려 6년 연속 1위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을 테다. 지상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고, 행복은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을 비춘 영화로,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국제비평가연맹이 선정한 2023년 최고의 영화로 꼽히기도 했다.
안사는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홀라파는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물건을 정리하는 안사와 기계로 무언가 작업을 하는 홀라파의 표정은 건조하고 권태롭다. 색깔에 비유한다면 무채색의 느낌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어 보이고, 조금은 염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한 술집에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낀다. 통성명도 없이 데이트를 이어가던 둘. 그러던 중 안사가 홀라파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며 그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런데 홀라파는 그만 그 종이를 잃어버린다. 홀라파는 둘이 함께 있던 곳을 돌며 안사를 수소문하고, 홀라파의 연락 없음에 실망하고 있던 안사를 다시 만난다.
영화에서, 노동 현장에서의 생기 없는 표정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때의 표정은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 대비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닌, 안사와 홀라파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이들은 일할 때는 활력을 잃고, 사랑할 때는 기운이 샘솟는다. 불안정한 직장에서 당장 눈앞의 생계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설렘과 애타는 마음으로 감정이 들끓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이토록 선명한 대비의 공존은 둘의 사랑을 ‘연애’인 동시에 ‘연대’로 만들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비정규직이다. 그들의 고용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의미다.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관리직원에게 자그마한 트집이라도 잡히면 바로 해고다. 실제로 둘의 직업은 수시로 바뀐다. 안사는 마트에서 버리는 물건을 챙겨가다가 해고당하고, 고용주가 마약 거래를 하다가 체포돼 직장이 사라져 일거리를 잃는다. 홀라파는 항상 조금은 술에 취해 있는 것이 걸려서 해고당하고, 장비 노후화로 산재를 당해도 그 원인이 술로 돌려져 해고당한다. 그럼에도 빈털터리인 둘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는 흐릿하게만 보이던 미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연애와 연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듯싶다. 라디오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채널을 바꾸거나 꺼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하지만, 안사와 홀라파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방송을 들으며 같은 감정을 느낀다. 커다란 폭력은 사람들의 유대와 연대, 일상을 파괴하며 개별 인간을 단절시키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위축된 채 서로 떨어져 있다는 공통적인 처지에서 무언가를 벼려내기도 한다. 안사와 홀라파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연출이다. 투박하고 고전적인 화면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는, 종종 능청스럽고 뻔뻔하며 동시에 비장한 대사와 만나 웃음을 자아낸다. 사회적 체면이나 가식 따위에 대한 고려 없이, 때로는 ‘망상’에 가까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은 영화가 그려내는 핀란드 노동계급의 삶과 그럴듯하게 어우러져 잔잔하면서도 파격적인(?) 코미디의 효과를 자아낸다. 산재로 병원에 입원한 홀라파에게 안사가 키스한 후, 그가 눈을 뜨는 장면은 이와는 또 다른 패러디의 효과를 낸다. 연애와 연대 사이의, 안사와 홀라파의 사랑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일상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들이 거주하는 세계로부터 반전될 수 있음을 무채색 세계에 따뜻한 유머를 곁들여 알려준다.
*https://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31210010002697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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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고 돌아 마음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행복과 마주한다.
1977년, 일본의 야마다 요지 감독은 홋카이도를 풍경으로 한 로드무비, <행복의 노란 손수건>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그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미지와의 조우>로 우주를 떠다녔다. 할리우드에서 우주선이 날아다닐 때, 한적한 홋카이도에서는 빨간 차 한 대가 달달달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던 것이다. 그 시대의 고뇌와 청춘의 방황을 담은 이 영화가 자그마치 50년의 세월을 건너 2025년 한국의 극장에 걸렸다. 그렇다면 50년이 지난 지금, 현시대의 관객은 <행복의 노란 손수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21세기의 시점으로 바라보기에 불편한 요소들이 많다. 일단 주연 중 한 명인 킨야의 캐릭터성 자체가 ‘변태’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 그러하다. 킨야는 영화의 시작부터 직장에서 쫓겨나 무능력한 상태로 차를 한 대 뽑는다. 차를 뽑은 이유는 단순히 여자를 꼬시기 위함이다. 이런 목표 의식에 알맞게도 킨야는 홋카이도에 가는 길, 그리고 홋카이도에 도착한 이후 마주한 모든 여성에게 작업을 건다. 그때 넘어온 아케미는 킨야와 여행하는 과정 속 몇 번이나 성추행을 당하고, 심지어 성폭행 직전까지 다다른다. 분명한 거절에도 계속 들이대는 킨야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해 유머를 형성했다는 점, 유사쿠를 영원히 기다리는 미츠에의 수동적인 여성성 등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불편한 요소들이 이 영화에는 분명 존재한다.
또한 미츠에의 남편인 유사쿠는 영화의 진짜 주연이라고 볼 수 있는 역할인데 범죄자다. 유사쿠에게는 정당 방위적인 사유가 있지도 않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 생활을 하지도 않는다. 물론 기다리던 아이의 유산이라는 촉발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술에 취한 채 취객과 시비가 붙어 취객을 마구잡이로 때려죽인 무뢰한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언뜻 유사쿠는 호전적이고 마초적인 성격으로 킨야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선지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못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부인에게도 돌아갈 자신이 없는 겁쟁이다. 영화는 그런 유사쿠에게 멋대로 면죄부를 선사한다. 이로써 범죄자 미화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적 차이를 인지하되, 그것에 매몰되진 말아야 한다. 영화의 한 가지 요소일 뿐인 스토리에 묶여 영화의 진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야마다 요지는 킨야를 결코 미화하지는 않는다. 킨야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해야겠지만, 영화 속 킨야는 항상 벌을 받는다. 불순한 의도를 품을 때마다 킨야는 넘어진다. 나막신이 벗겨지고, 턱에 걸려 넘어지고, 게에 찔리기도 하고, 차에 끼어 자빠지기도 한다. 유사쿠도 그러하다. 유사쿠에게 행복은 불확실하고도 먼 이야기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이고 고사한다. 죄책감과 후회스러운 그의 마음은 영화의 중반부부터 관객에게 지겨울 정도로 전달된다. 그렇다면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 가진 진가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진가를 관객이 함께할 수 있는 시시콜콜한 여정이라고 보았다. 삶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관객은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과 갑작스럽게 마주한다. 그들의 일평생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무작정 함께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 행복만 담겨있지는 않다. 차가 도랑에 빠지기도 하고, 좋은 잠자리를 구하지 못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길에 시비가 붙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 때문에 따뜻한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터놓기도 하고,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끈끈해지기도 한다. 길을 떠날 적 홀로 자리하던 외딴 벚나무는 어느새 무리를 지어 일행을 반긴다. 오직 마지막 엔딩을 위해서 달려왔다고 볼 수 있을만큼 아름답게 펄럭이는 장대한 노란 물결은 이들을 섬세하게 위로한다. 그제야 우리는 방황해도 괜찮다고 말하게 된다. 돌고 돌아 마음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행복을 마주하게 된다.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행복의 노란 손수건> 시사회에 참석한 뒤 작성하게 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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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사랑한 '썅년들', 은수, 썸머, 서연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은수, <500일의 썸머>의 썸머, <건축학개론>의 서연. ‘옛사랑이자 썅년’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세 영화의 캐릭터다. 저 말이 맞다면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고 처참하게 짓밟아버리는 아름다운 악당인 셈이다. 정말 은수와 썸머, 서연이가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나빴을까?
우리는 여기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저 영화의 모든 시선은 남자 주인공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은수, 썸머, 서연의 입장은 전혀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다. 상우, 톰, 승민이 복잡한 심경으로 털어놓는 그 충분한 시간에 비해 세 여자 캐릭터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는 유추해야 할 뿐이다. 남자 캐릭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관객인 우리 역시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고 선을 긋게 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나 역시 무슨 생각이었는지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을 위한 대변을 해주고 싶은 것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인지.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지.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상우, 톰, 승민이 오히려 나쁜 놈은 아닐까?
세 캐릭터의 공통점은 모두 같은 일(회사, 수업)을 하다가 만나 남자 캐릭터에게 먼저 다가왔다는 점이다. 은수는 상우와 함께 자연의 소리를 담아 방송을 하려고 처음 만났다. 처음 대나무숲에서 소리를 녹음하고 간 후 그녀는 비 오는 날 상우에게 전화를 했다. 한번 더 보자고, 그렇게 여러 차례 녹음을 하다가 심지어는 라면 먹고 갈래요? 를 시전하면서 상우의 마음을 가뿐히 들어올렸다. 썸머는 톰에게 엘리베이터에서 나도 이 노래를 좋아한다며 싱그럽게 한 소절 흥얼거리더니 새침하게 복사실에서 키스를 하더니 총총 걸어가버렸다. 종종 톰에게 너가 좋다면서 씩 웃고 지나갔었지. 서연이야 두 캐릭터에 비하면 덜 적극적이라고 볼 수 있다. 건축학개론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수업을 혼자 들어서 시작된 것이니까. 어쨌든 그래도 처음 말을 걸며 다가왔고 쭈뼛쭈뼛한 승민의 성격상 아마 늘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그에게 첫 눈 오는 날 만나자고 표현을 했고 나오지 않은 건 그였다. 어렵다면 어려운 만남의 물꼬를 튼 이는 그들이 아니라 그녀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자유롭고 변덕스러운 문제의 행동이 시작된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일까? 늘 적극적인 것 같은 세 여자라도 소심한 그들의 마음 한 구석처럼 고민하고 주저하는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남자 주인공들이 그럴 때, 영화는 그런 부분을 생략하거나, 그들이 바뀌었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은수는 처음에 무슨 사이다, 라고 말하고 시작하지 않았다. 상우는 그녀가 한번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넘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먼저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아버지가 만나는 사람 있으면 데려오라고 하셔. 그러니까 상우는 그녀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어떤 상처를 얼마나 받았을지도 모르면서 김치를 담그지 못한다며 말을 돌리는 그녀의 소극적인 거절에 김치를 내가 담그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상대는 결혼이 사랑으로 쉽게 유지되기 어렵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마음은 변하고, 결혼이 가져오는 수많은 관계의 부산물로 허덕였을 사람이다.
썸머는 처음부터 가벼운 사이가 필요했고, 누군가의 여자친구이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녀도 은수처럼 히스토리가 있다. 톰은 모르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아는 이야기. 부모님의 이혼으로 모든 사랑은 깨진다는 불신이 넘치는 점. 그리고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은 모르겠다는 말. 적어도 그녀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랑이란 것은 그녀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톰와 썸머 사이 역시 확신이 부재했다. 그녀는 그가 좋아하던 스미스며 건축이며 귀를 기울였고,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링고스타를 보며 아무도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놀려댔다. 그녀의 선물로 그가 좋아하는 '행복의 건축'을 샀다. 그러니까 그녀의 취향이 아니라, 그의 취향으로. 그녀는 더 이상 둘이 친구가 아니라며 싸우고 나서 비를 흠뻑 맞고 톰을 찾아온다. 나는 반대로 생각해봤다. 둘다 잠 못이루던 밤, 톰이 그녀의 집에 다시 찾아왔다면. 조곤조곤 속얘기를 했다면. 그녀의 가족을, 그녀의 취향을 좀 더 궁금해하고 존중해주려 했다면. 그러니까 그는 한번도 제대로 질문하지 않은 것이다. 썸머는 가벼운 사이, 친구이고 싶댔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게 된 이유가 대체 뭘까.
서연. 이 쪽도 할 말 많다. 그러니까 적어도 승민은 서연한테 화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좋아한다고 고백하려던 날 여자들의 이상형에 가까운 선배가 술에 취한 서연을 집에 데리고 들어갈 때, 끼어들어 그냥 둘이 같이 그녀를 재우고 사이좋게 집을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했는가. 고작 그 선배가 서연이와 함께 들어간 집안 문에 가만히 귀만 대다가 와서 대성통곡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예전과 달라진 승민의 행동에 찾아간 서연에게 그는 어떻게 했는가. 꺼져 버리라고 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는 솔직한 적이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가 그녀에게 뭐라고 할 권리가 있는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그가 생각나서 지어준다던 집 핑계를 대면서 그녀는 그렇게 찾아온 걸, 그래도 한 번쯤은 그녀가 제대로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을 무턱대고 욕할 수만은 없다. 그러고도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현재의 여자친구를 택하며 한번 더 도망갔다.
상우는 헤어지자고 말한 은수를 괴롭히듯 집을 찾아오고 차를 긁어댔다. 톰은 썸머를 지켜주려던 게 아니라 자신을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빈정거리는게 자존심이 상해 주먹질을 했다. 상우와 톰은 은수와 썸머의 수많은 이상신호를 아무렇지 않은 척 문제를 회피했다. 승민은 고백도 못하고 서연이 몰래 입술에 도장이나 찍어보며 좋아하더니 혼자 시작하고 끝내더니 그녀를 첫사랑이자 썅년이라며 날선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그녀들이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 건 그래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울어버리고 그녀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그들을 악당이라고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그녀를 정말로 증오했던 게 아니란 걸 안다. 설사 증오했더라도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안다. 바보같이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을, 그렇게 좋아했던 그녀가 끝끝내 자신과 멀어지는 걸 지켜보아야했기에 그랬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결정적으로 그들을 속이거나 이용하지 않았는데도 사랑한 이를 그렇게 악당처럼 욕할 수는 없다. 함께 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만약 진정한 악당을 고르자면 사람과 사랑이라고 답해야 한다.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랑의 관점, 사람들을 구성하고 있는 상처와 더 이상 상처받기 싫은 두려움이라고 답해야 한다.
그러니, 그러니 말이다. 적어도 은수와 썸머, 서연을 썅년이라는 악담을 하기 전에 잠깐만 멈춰보자. 마음이 앞선다는 이유로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고 결혼과 연인, 고백이라는 성공적인 결말을 맺지 못한 그들의 속풀이와 악담이 일면 더 심한 악당일 수도 있다. 그녀는 상처가 많아, 겁이 많아 벽에 부딪혀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썸머와 헤어진 톰에게 누가 묻듯이, 이 셋 중에 바람을 피우거나 그를 이용한 사람이 있는가. 변덕스러워 보였을지언정 진심을 더 많이 표현한 그녀들이, 속 좋은 사람처럼 끙끙 속만 앓고 표현하지 못했던 그들보다 아쉬워 뒤돌아 볼 것이 더 남아 있겠는가. 날 때부터 사랑 앞에 적극적인 사람은 없다. 똑같이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온 그녀들이다. 들어맞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들은 해볼만큼 해봤기에, 차마 욕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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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여성들의 이야기와 여전히 끝나지 않는 소외에 대하여
<열 개의 우물>은 필수적인 노동이지만 여타 운동과 역사에 가려져 그림자의 영역으로 머물렀던 ‘돌봄’의 영역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영화는 1970년대부터 80년대 유신체제 당시, 서로 다른 위치에서 ‘노동과 생계’ 라는 같은 경험을 공유했던 여성들을 탁아 운동을 통해 하나의 근원지로 연결하고, 공통된 경험 속에서 이제는 다양한 길로 뻗어나간 여성들의 저마다의 우물을 쫓는다. 당시 사회로 진출하는 여성들은 교육 기회의 제한 뿐 아니라 아이의 출산과 양육, 돌봄과 위탁의 부담과 문제 또한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돌봄의 영역은 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관심의 영역에 들지도 않았던 그림자의 영역이었으며 이때, 여성 운동이자 탁아 운동으로 불렸던 ‘돌봄’은 여공들을 회사로 나갈 수 있게 했던, 여성들도 부당한 힘에 저항할 수 있게 만들었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노동이 된다. 감독은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각자의 소명을 다하고 돌봄 노동으로 일상을 유지하게 만들었던 그녀들을 주목한다.
<열 개의 우물>은 그녀들의 과거를 정지된 이미지, 혹은 과거에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지금의 그녀들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요소로서, 현재까지 그녀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으로서 현재와 계속해서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는 <열 개의 우물>이 과거의 사실을 다루는 대개의 다큐멘터리에서 과거 자료를 제시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을 택한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대개의 다큐멘터리에서 과거 자료를 화면에 보여주고 현 인물들의 증언을 입히는 것과 달리, <열 개의 우물>은 2 분할 화면을 통해 한쪽에는 과거의 사진을, 한쪽에는 말을 하고 있는 현재 그녀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제시되는 그녀들의 과거는 단순히 회고하는 추억이나 지나간 어느 한때의 이야기로 머물지 않고 오늘날 그녀들의 모습과 끊임없이 연결 지으며 생각하게 만든다. 단순히 과거의 사진만이 제시될 때는 당시 모습을 단지 재현하거나 복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달리 한 화면에 동시에 제시된 같은 인물이 서로 다른 시간에 놓여있는 모습은 ‘Before – After’의 과정을 보여주는 연결된 하나의 자료이자, 연속된 해당 인물의 구성 과정으로 보인다. 과거 사진 옆, 현재의 그녀들은 시간이 흘러 예전의 앳된 모습이 지니던 활기는 잃었지만 생생히 움직이고 있는 영상 속에서 여전히 또 다른 생동감을 가진다.
감독이 그녀들의 과거를 단순히 회고하는 추억, 과거에 정지되고 고정된 기억으로 제시하지 않는 것은 감독이 그녀들에게 접근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검은 바탕의 유신 체제의 역사를 자막으로 드러내고, 공식적으로 기록된 과거를 제시하며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하는 듯하던 영화는 이내 바람과 햇살이 드나드는 열린 문을 보여주며 갑작스럽게 따스함이 느껴지는 분위기로 전환된다. 이 문은 김현숙 씨가 운영하는 책방의 문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여기서 감독이 그녀들의 마음의 문을 넘어 인생에 발을 내디딘 방식이 드러난다. 감독은 과거의 재현을 위해 그녀를 찾지 않는다. 그녀들의 현재의 삶을 찾는다. 특정한 순간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특정 순간을 보낸 후 그녀들의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 감독은 현재의 인물의 모습에 주목하되 현재를 통해 그 안에 잠재된 과거의 기억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김현숙 씨뿐 아니라 영화 속 만난 인물들과 만난 방식은 모두 현재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이다.
같은 시대의 일어난 다른 사건에 주목한 다큐멘터리 <김군>에서 사진 속 김군의 존재를 찾기 위해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들, 당시 현장에 함께 있던 이들,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면 <열 개의 우물>에서 감독은 당시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건의 주요 인사라는 이유로 그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이 영화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소개해 주고 싶다.’는 현재 인물들의 말에 또 다른 인물들을 만나러 간다. 그녀들의 과거가 드러나기 전 항상 그녀들의 현재 모습이 제시되며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모습이 공존할 때에도 감독은 현재 과거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생생한 영상으로 제시하며 과거보다 그에 대해 현재 말하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더욱 우선시한다. 이로써 감독은 과거의 기억을 재현해 줄 여성들을 만나는 대신 과거의 기억으로 구성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만나고, 정지된 과거의 사실이 아닌 현재까지 끊임없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인물의 구성물로써 과거를 제시한다.
영화에서 주목한 돌봄의 문제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노동의 그림자 영역에 머물고 있다. <열 개의 우물>이 1970-80년대 당시 돌봄의 부재 상황을 드러낸다면, 현대사회에서도 소외되고 있는 돌봄 노동의 영역은 다큐멘터리 영화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공장으로 나가던 여성들처럼 현대 사회에도 여성도 일을 하는 맞벌이 가정이 많다. 개인주의가 발달하는 현대사회에서 마을의 개념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공동체의 유대와 연결이 약화하며 돌봄 문제는 더욱 커졌다. 특히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팬데믹이 덮치며 갑작스럽게 마주한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돌봄 위기는 더욱 커졌고, 마을 방과후 교사들은 위기 속 남겨진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의 방과 후 교사들도, <열 개의 우물> 속 돌봄을 책임진 여성들도, 국가의 지원도, 공공시설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떠한 보상도 대우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지만 그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소명을 다해 돌봄이라는 노동을 하고 그를 통해 다른 여타의 노동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두 영화를 보면 ‘여성의 노동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던 힘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꼭 필요한 노동으로 많은 노동자들을, 우리 사회를 돌보았던 그들을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돌봄이라는 노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에서 나아가 노동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힘을,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들을, 그저 엄마라는 여성의 영역으로 남겨졌던 돌봄의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한다.
영화 속 인물의 세대를 경험하지 못한 나의 입장에서 <열 개의 우물>을 보고 나니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재현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의 문제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재와 상호작용 하는 것으로 재현했을 때 비로소 바라보는 관객은 자신의 현실 경험과 관련 지으며 능동적으로 과거의 재현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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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영화추천*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Turtles Swim Faster Than Expected, 2005
감독: 미키 사토시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출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스틸컷
뭐든 하는 일마다 대단하고 특별해 보이는 친구, 쿠자쿠와 달리 우리의 주인공 ‘스즈메’는 자신이 늘 어중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애완용 거북이 밥을 하루도 빠짐없이 챙기면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투명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 걱정한다. 평범하다는 이유로 존재감을 잃어가는 삶. 그렇다, 스즈메의 삶은 너무 평범하다. 단조롭고 반복적이기까지 한데, 쿠자쿠가 가진 센스마저 손톱만큼도 없다. 심지어 딱히 바쁘게 사는 것 같지도 않아, 언제든 무력함과 무료함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인생이다.
하지만, 인생은 한방이라고 했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스파이 모집 광고, 계단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과를 피하고자 바짝 엎드려 투명 인간인 척하며 찾아낸 일상의 탈출구! 스즈메는 스파이 부부에게 스파이로 채용되면서, 난생처음으로 재미없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출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스틸컷
스파이의 조건은 딱 하나다.
스즈메가 가장 잘하는 눈에 띄지 않는 것. 평범한 바보가 비범한 스파이가 되는 순간, 영화는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온다. 평범함이 가진 위대함이 아니라 평범하기 전부터 갖는 당연한 ‘존재감’을 중요한 화두로 던진다. 쉽게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사는 사람들 틈에서 똑같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사는 삶이라니, 우린 처음부터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며 태어난 자들이다. 충분히 각자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자들. 이 작품을 보고 나면,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내일부터 스파이(?)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맛있는 라멘을 만들 수 있지만 명확한 목적을 위해 그냥 그런 라멘을 만드는 사장처럼, 나 자신만큼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아는 ‘나’로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위로가 아니라 힘을 주는 영화다. 스즈메가, 우리가 바꾸고 싶은 건 어중간한 삶의 태도가 아니니까.
우리 모두 스즈메처럼 실실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쿠자쿠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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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를 통해 한 발짝 나아가다
* <에놀라 홈즈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에놀라 홈즈 2 (2022)
감독: 해리 브래드비어
출연: 밀리 바비 브라운, 헬레나 본햄 카터, 헨리 카빌, 루이 파트리지, 데이빗 듈리스 등
장르: 추리, 드라마
상영시간: 129분
공개일: 2022.11.04
연대를 통해 한 발짝 나아가다
‘튜크스베리(루이 파트리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사라진 엄마 ‘유도리아(헬레나 본햄 카터)’를 찾으며 초짜 탐정으로서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에놀라 홈즈(밀리 바비 브라운)’는 오빠를 따라 탐정 사무소를 설립한다. 하지만 미성년자에 여성이기까지 한 ‘에놀라’에게 사건을 맡기는 사람은 없었고, 탐정 사무소를 찾아와 오빠인 ‘셜록(헨리 카빌)’을 찾는 사람들만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파리만 날리던 탐정 사무소를 접으려던 찰나, 성냥 공장에 다니는 소녀 ‘베시’가 ‘에놀라’에게 언니의 실종 사건을 의뢰하면서 ‘에놀라’의 첫 탐정 업무가 시작된다. ‘에놀라’는 호기롭게 성냥 공장에 잠입하며 추리를 시작하지만, 생각보다 크고 위험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앞에 놓인 위기와 난제들을 차례차례 헤쳐 나간다.
<에놀라 홈즈> 1편은 ‘에놀라’가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어른들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하는 모험 활극이 주된 이야기였다. 페미니즘적 색채도 담겨 있었지만 ‘유도리아’가 주도하는 여성 참정권 운동은 후반부에 살짝 드러나는 정도였고, ‘에놀라’의 서사를 통해 여성도 남성과 평등하게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원론적인 논리가 핵심이었다. 반면 속편은 성냥 공장에서 열악한 조건으로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당시 여성들이 처했던 사회적 문제와 결부 지어 페미니즘을 본격적으로 논한다. 전편을 통해 캐릭터의 성격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힌 만큼 추리의 비중이 커지긴 했지만 결국 작품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연대를 통해 권리를 쟁취한 여성들의 사회운동에서 비롯되는 주제의식이다.
‘에놀라’와 ‘셜록’이 맡은 사건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1888년 여성 노동자 ‘세라 채프먼(Sarah Chapman)’이 주도했던 ‘매치걸 파업(Matchgirls’ Strike)’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이끌어낸다. 당시 런던에서 최대 규모의 성냥 공장이었던 ‘브라이언트 앤드 메이’에서는 ‘세라 채프먼'의 주도 하에 1,400명의 어린 여공들이 비인간적 노동 실태를 폭로하고 질병을 유발하는 백린 사용을 금지하도록 집단 파업에 돌입했다. 이를 통해 런던 노동위원회로부터 산업안전을 위한 조치를 약속 받았고, 1908년에 백린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노동권 투쟁의 최전선에 있던 것은 권력의 최하위에 놓였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작은 불씨에 불과했던 이들도 연대를 통해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노동자가 행사할 수 있는 가장 큰 권리는 노동하지 않을 권리라는 노동기본권에 속한 개념마저 되새긴다. 물론 후반부에 주제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감정적으로 어필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전편에 비해서는 페미니즘을 자연스럽게 풀어냈고, 추리물과 사회운동을 억지스럽지 않게 연결 지었다.
전편에서 신선한 장치들을 모두 끌어 썼기 때문에 속편은 상대적으로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4의 벽을 뚫는 ‘에놀라’, 19세기 영국의 전형성을 파괴한 여성 캐릭터들, 성별의 고정관념을 틀어버린 ‘에놀라’와 ‘튜크스베리’의 관계 등은 이미 전편에서도 등장했던 요소들이다. 대신 추리극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하며 액션 모험 활극 정도로 비춰졌던 전작의 부족한 장르적 정체성을 보완한다. 단순히 의뢰인 소녀의 언니를 찾고자 했던 사건이 여성 노동자들의 집단 파업으로 이어지고, 대규모 횡령의 범인을 추적하던 ‘셜록’의 사건과도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캐릭터들을 의심하고, 복선을 해결해 나가는 재미를 선사한다. 기지와 명석함을 갖춘 ‘에놀라’가 점점 탐정의 면모를 갖춰 감에 따라 추리극으로서의 정체성도 짙어 지는 듯하다.
작품이 강조한 ‘연대’는 극중 등장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에놀라’와 오빠 ‘셜록’, 그리고 ‘튜크스베리’와 엄마 ‘유도리아’까지 연대를 통해 각자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끔 연출한다. 전편은 주인공인 ‘에놀라’의 능력과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변 캐릭터들을 소모적으로 활용한 감이 있다. 하지만 본편은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에놀라’가 ‘셜록’의 도움을 여러 차례 받고, ‘셜록’ 역시 ‘에놀라’를 통해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얻을 수 있는 안정감과 힘을 깨닫는다. ‘에놀라’에게 보호받는 존재로 그려졌던 ‘튜크스베리’는 비록 피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스스로 적과 맞서며 싸울 줄 아는 남자로 성장하고, ‘에놀라’와 상호보완을 이루는 연인이 된다. 잠깐의 등장만으로 임팩트를 남긴 ‘유도리아’는 여전히 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며 ‘에놀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그녀의 가르침이 언제나 해결책이 되어 준다. 결정적인 위기에서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우두커니 뒤편에 서서 ‘에놀라’의 성장을 바라봄으로써 모녀의 바람직한 연대 과정을 보여준다.
추리 영화의 서늘한 온도, 미스터리를 해결해 가는 촘촘한 연출을 기대했다면 어딘가 엉성하고 어수선해 보이는 <에놀라 홈즈>는 기대를 충족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에놀라 홈즈’다운 것이다. 만일 이 시리즈가 관객으로 하여금 충격적인 반전을 거듭 선사하고, 사건에만 집중하는 흐름을 보여주었다면 오히려 작품의 매력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로맨스와 어드벤처를 곁들인 하이틴 오락 영화의 색채를 풍기면서도 사건 추리를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이끌어내는 것이 곧 <에놀라 홈즈>의 정체성이다. (만일 3편도 제작될 예정이라면, 오빠의 동업 제안을 거절한 ‘에놀라’가 오빠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되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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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결말을 찾기 위한 정글 어드벤처
로스트 시티 (The Lost City, 2022)
“이야기의 결말을 찾기 위한 정글 어드벤처”
등급 : 12세 관람가
장르 : 액션, 코미디, 멜로/로맨스, 모험
러닝타임 : 111분
감독 : 애덤 니, 아론 니
출연 : 산드라 블록, 채닝 테이텀, 다니엘 래드클리프, 브래드 피트
개인적인 평점 : 3/5
쿠키영상 : 1개 (엔딩 크레딧 초반)
로스트 시티 줄거리
전설의 트레저를 차지하기 위해 재벌 페어팩스(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유일한 단서를 알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로레타(산드라 블록)를 납치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비지니스 관계로 사라진 그녀를 찾아야만 하는 책 커버모델 앨런(채닝 테이텀)은 의문의 파트너(브래드 피트)와 함께 위험한 섬에서 그녀를 구하고 무사히 탈출해야만 하는데… 적과 자연의 위험이 도사리는 일촉즉발 화산섬 대환장 케미의 그들이 생존하여 섬을 탈출할 수 있을까?
의자에 묶인 반짝이 우주복을 입은 산드라 블록과 열심히 수레를 미는 채닝 테이텀, 이들 뒤로 터지는 불꽃과 광기 어린 눈의 다니엘 래드클리프. 그 옆으로 보이는 브래드 피트. 이 포스터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아 이건 재밌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 영화 <로스트 시티>
남편의 부재 후 일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베스트셀러 작가 ‘로레타’와 책의 커버모델 ‘앨런’은 억지로 마무리 지은 모험 소설을 홍보하기 위해 북투어를 시작한다. 전설의 보물을 찾기 위해 눈이 돌아있던 재벌 ‘페어팩스’는 새로 나온 로레타의 소설에서 자신이 찾고 있던 보물의 단서를 발견하고 로레타를 납치해 섬으로 데려간다. 앨런은 로레타를 구하기 위해 의문의 파트너와 함께 섬으로 향하고, 두 사람은 페어팩스와 부하들의 손을 피해 섬을 탈출하기 위한 여정을 벌인다.
잃어버린 보물과 결말을 찾아서
<로스트 시티>의 주인공 로레타와 앨런은 목표를 찾아 달리다 나도 모르는 새 옆길로 빠져버린다. 그나마 앨런은 고민을 거쳐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길도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알고 열심히 커버 모델 일을 하지만, 로레타는 의무감에 밀려 억지로 소설을 마무리짓는다. 소설에 대한 작은 애정도 남지 않은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소설은 당연하게도 매가리가 없다. 무기력증에 빠진 로레타는 페어팩스의 손에 끌려온 섬에서 자신의 소설과 똑같은 전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고, 새로운 결말을 찾기 위해 페어팩스의 단서에 손을 댄다.
이 모험은 페어팩스가 말한 고대의 보물을 찾아가는 여정이자 로레타가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모험 소설의 진짜 결말과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모험인 온갖 위험과 고난이 도사리고 있지만 두 사람은 함께 고난을 거치며 달달한 결말을 찾아간다.
아쉬웠던 정글 어드벤처
정글 어드벤처, 보물 찾기라는 컨셉을 보면 최근에 개봉했던 <언차티드>가 생각나기도 하고, 작년에 개봉했던 <정글 크루즈>가 생각나기도 한다. 보물 찾기는 <언차티드>와 모험 중에 피어나는 두 사람의 사랑은 <정글 크루즈>와 닮았다. 두 작품을 적절하게 섞은 듯,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로스트 시티>는 소재가 보장하는 기본 재미는 챙겼으나, 훌륭한 배우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아쉬운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제일 기대했던 캐릭터는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악역 페어팩스와 브래드 피트의 파트너 역할이었는데 페어팩스의 매력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고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의문의 파트너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오히려 그가 빠지는 순간 분위기가 팍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달까.
주연을 맡은 산드라 블록은 여전히 아름답고, 채닝 테이텀은 푼수 같은 커버 모델 앨런을 귀엽게 소화했지만 이 캐릭터들만으론 채울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또 하나 아쉬웠던 점은 영화의 자막이다. 물론 번역이라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걸 알지만, 가끔은 물음표를 떠올리게 하는 애매한 줄임말 같은것들이 등장하는데, 그런 단어들 때문에 당장 웃음이 나야 할 장면에 웃음이 아닌 “이게 뭐야?”하는 말이 먼저 나왔다.
가볍게 보긴 좋지만, 꼭 극장에서 볼 이유는…
매력이 넘치는 배우들과 그들의 환장하는 케미를 중점으로 밀고 나가는 이 영화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ㅎㅎ..ㅎ” 이상의 큰 웃음을 유발하기엔 모자란 느낌이 있다. 그래도 초중반부까지는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재미가 있는데 중반부 이상을 넘어가면 어느 순간 결말이 그려지게 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본건 오로지 배우들과 분위기 덕분이었다. 가볍고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좋은 영화라서 정말 머리를 비우고,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으면서 관람했다.
비중이 많진 않았지만 영롱한 눈에 광기를 가득 담은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느끼한 캐릭터지만 묘하게 매력적이고 너무 잘생겨서 계속 쳐다보게되는 브래드 피트의 캐릭터만 봐도 한 번쯤은 아무 생각 없이 감상할만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다만 꼭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영화일까? 묻는다면 섣불리 답하기 어렵다. 잠시 등장하는 잃어버린 도시 외엔 큰 볼거리가 없기도 하고, 압도적인 음향/음악…이라기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관객들의 눈도 높아지고, 영화 관람료가 너무 비싸져서… 이벤트나 할인 가격이 아닌 이상 정가 15,000원을 전부 다 내고 본다면, 관람료가 아깝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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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윅 4 - 시리즈 최고기록 경신한 어나더 레벨 액션영화의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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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영상은 영화홍보사의 VIP 셀럽 시사회를 초대받아 다녀온뒤 제작된 영상입니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존 윅’은 ‘최고 회의’를 쓰러트릴 방법을 찾아낸다.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희망을 보지만, NEW 빌런 ‘그라몽 후작’과 전 세계의 최강 연합은 ‘존 윅’의 오랜 친구까지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새로운 위기에 놓인 ‘존 윅’은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는데,, 레전드 액션 블록버스터 [존 윅]의 새로운 챕터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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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개봉 예정 독립, 예술 영화 Best 7 - ( #프렌치수프 #이소룡들 #니자리 #양치기 #다섯번째방 #생츄어리 #다우렌의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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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영화등대 채널을 사랑해주시고 봐주시는 구독자 및 시청자 여러분들 모두 잘 지내셨나요. 오늘은 오랜만에 돌아온 영화등대 채널이 선정한 [6월 개봉예정 영화] 소개 영상을 준비해보았는데요. 해당 작품들은 상황에 따라 개봉 일정이 변경될수 있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하였으니 작품성이나 별다른 기준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또한 해당 작품들의 관계자나 투자 및 배급사의 어떠한 대가를 제공받고 제작된 영상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럼 바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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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싸우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라! 금메달리스트였든, 치어리더였든, 가수였든 상관없다. 인종도, 젠더도, 종목도 상관없다. 오직 하나의 룰. 몸으로 끝까지 살아남는 1명이 이긴다! 각 필드 최고의 피지컬 100인 중 최후까지 살아남을 '궁극의 피지컬'은 누구인가 세상 어디에도 없던, 극한 생존경쟁 《피지컬: 100》 2023년 1월 24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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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0만 년 전, 지구로의 불시착 4월 20일, 지구 역사상 가장 극한의 사투가 시작된다! 서바이벌 액션 블록버스터 [65] 메인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