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15 22:55:14
모성애의 다양한 형태들과 연대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리뷰
이 영화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과 다양한 어머니의 형태를 보여준 영화였다. 1999년도에 나온 영화인데 요즘에서야 다루어질 수 있는 이슈를 담았다. 또한 영화 속에선 다양한 소수자들이 얼마나 차별적인 환경에서 살았는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 다른 영화와 다를 바 없이 등장 하였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다른 퀴어 영화랑은 다른 점이었다. 영화를 볼 때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지기도 하였다. 여성으로 성 전환을 하는 트랜스 젠더인데 여성과의 아이를 낳는 점도 그렇고 내가 아직 많이 보지못한 사람들이 영화 속에 등장해서 이 영화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상식 밖의 내용과 설정이 담겨있던 영화였다.
아들을 잃어버린 미누엘라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 치유를 하는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치유 받는 대상이 아들의 아빠가 아닌 오히려 우연히 만난 여성들이 었다. 자신의 남편이었던 사람의 아이를 가진 로사와의 연대감이 돋보였다. 과연 나 였다면 로사를 돌봐주고 곁에 있어 줄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배우의 싸인을 받으러 갔다가 아들이 죽은 것인데 그 배우를 찾아가 원망을 할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 배우를 도와주고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 그 배우 또한 에스테반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에스테반의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어머니라는 큰 틀로 포용이 되는 것 같았다. 어찌보면 미누엘라의 적이 될 수도 있는 관계들인데 그렇게 그리지 않고 연대의식으로 그려낸 점이 인상깊었다.
하지만 롤라라는 캐릭터는 영화 속 미누엘라가 용서 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보면서 가장 민폐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소수자로써 존재 한다고 하더라도 롤라가 한 행동이 이해가 되거나 용서 받을 행동은 아니었다. 모성애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지만, 미누엘라가 과하게 희생을 한 것 처럼 보여졌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여성의 다양한 이미지를 담고 싶어했고 어머니의 다양한 형태와 그로 인해 이어지는 여성들의 연대를 담고 싶어한 영화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캐릭터나 내용을 하나 하나 생각해보면 충격적인데 너무 자연스러운 것으로 영화 속에 담겨있어서 나에게는 낯설고 본능적으로 이상하다는 감정이 생겼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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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불쌍하지 않아?" 피해자는 보이는데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 이유
‘보여주기’와 ‘들여다보기’. 언뜻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쾌락을 좇는 이들.
그러나 감추고 싶은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려는 순간 쾌락은 공포와 분노로 분한다.
당연하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 여자, 자신의 정체는 숨긴 채 남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했던 남자.
그들의 이해관계는 극 중에서 필연적으로 상충하며 갈등의 끝을 달린다.
결국 매한가지인 것은 둘 중 어느 쪽이든 자신의 비밀은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것. 저마다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쾌락을 좇으면서도, 정작 상대방의 쾌락을 목격하며 정신이 나갔다며 고개를 저어댄다. 한국판 <나를 찾아줘>를 연상케 하는 범죄 스릴러 <그녀가 죽었다>는 어느 쪽에도 공감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두 인물상을 통해 익숙한 맛으로도 관객의 몰입을 배가시킨다.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상대방이 ‘미쳤다’는 것. 그들은 제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상대방에게서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급급하다. 누구도 자신이 끼친 피해에는 반성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내가 피해자요, 나는 불행하노라 외쳐대며 서로를 삿대질한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그들. 그렇게 가해자로서 ‘나’의 죄의식은 흐려지고, 남는 것은 피해를 호소하는 억울한 ‘나’뿐이다.
그녀가 죽었다. 그렇다. 이 영화에는 ‘그녀의 죽음’으로 상정되는 피해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선악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그 실체는 사라지고 없다. 그들이 아무리 피해를 호소해도 관객의 뇌리에 남는 것은 그들의 가해다.
시체는 있었는가? 아니, 온데간데없다.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명백한 가해자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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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발하고 발칙한 모든 순간의 상상
‘해피 아워’,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까지 특별한 주제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 만나는 캐릭터 간의 긴 대화만으로 서사를 이끄는 역량과 그 사이사이에 녹아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따스한 시선으로 재미를 주는 자신만의 색깔로 하나의 장르화를 이루며 세계 유수의 시상식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영화 우연과 상상 리뷰이자, 시사회 후기입니다. 작년 제7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해외 평단의 호평을 받은데 이어 지난 BIFF에서도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봉준호 감독을 포함해 좋은 평이 이어졌기에 여느 때보다 기대감을 높여주고 있죠. 에릭 모레르 감독의 1994년 옴니버스 ‘파리의 랑데부’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번 작품은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우연이라는 리얼리티적 요소에 상상력을 가미해 만든 세 편의 단편 모음집으로 제목처럼 불쑥 찾아온 그 순간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고 소재가 가져올 수 있는 희극성으로 남다른 재미를 줍니다. 역시나 그만의 스타일이나 특징은 확연히 드러나기에 이번에도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이름의 장르적 신드롬은 이어질 거로 추측되네요.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우연과 상상 정보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걸 믿어볼 생각 있어?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메이코는 패션 화보 촬영으로 만난 절친 츠구미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그녀의 새로운 남자에 관해 첫 만남부터 하룻밤 동안 함께하며 나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다음 만남에 대한 기대에 부푼 츠구미를 내려주고 메이코는 어느 한 건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2년 전에 헤어졌던 자신의 전 남친이자 절친의 썸남 카즈아키를 마주합니다. 두 번째 ‘문은 열어둔 채로’는 교수 세가와가 취업 때문에 학점을 원복 해달라는 사사키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며 시작됩니다. 시간은 흘러 사사키와 잠자리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며 늦깎이 대학생활 중인 유부녀 나오가 뉴스를 보던 중 최근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한 세가와 교수의 인터뷰가 나온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사사키는 그녀에게 교수를 유혹하고 녹음해서 과거 자신의 복수를 하자고 이야기하고 그녀도 좋아하는 작가인 교수를 만나자는 마음에 수긍하는데... 세 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번’에서는 희귀한 바이러스로 인해 통신 두절이 된 세상에서 고등학교 동창회를 찾은 나츠코,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는 역 앞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동창 아야을 마주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偶然と想像, Wheel of Fortune and Fantasy│감독·각본 : 하마구치 류스케│출연진 : 후루카와 코토네, 현리, 나카지마 아유무, 모리 카츠키, 시부카와 키요히코, 카이 쇼우마,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 외 多│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 121분│국가 : 일본│등급 : 15세 관람가│평점 : 기자·평론가 8.4, 왓챠피디아 예상 5.0, 로톤 토마토 신선도 99%, IMDB 7.6, 메타 스코어 86점│수상 내역 : 제7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시청 가능 서비스 : 개봉일 2022년 5월 4일
“우연은 드라마로 만들기도 어렵지만 일상에 흔한 것이기도 하죠. 우연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이고, 반대로 말하면 이 세계를 그리는 것은 우연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우연이 넘쳐요. 이야기 측면에서 그걸 살리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보람 있는 일도 없을지 모릅니다” - 하마구치 류스케
인터뷰를 통해 그가 밝힌 주제에 대한 생각들이 이미 영화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간에 직접적인 접점은 없지만 각 에피소드의 인물들 모두가 기막힌 우연을 마주하면서 삶이 변화하는 순간을 담아내기 때문이죠. 흔히 일종의 운명이라는 그럴듯한 연결을 이끌어내는 스토리들은 이미 식상하기 그지없지만, 실제 일상에서 우리는 무수한 찰나의 순간과 마주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들이 때로는 우리 삶에 큰 파장을 일으켜 방향을 전환하기도 하기에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에 매력에 빠져드는 부분이 있죠. 그렇게 영화는 갑자기 다가온 선택의 순간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대신 상상을 펼쳐주고 이를 이끄는 도구로 인물 간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건을 만들고, 에피소드를 구축하며 벽돌을 하나씩 쌓아 집을 짓듯 관객에게 40분 동안의 부담 없는 동행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서요.
이번에도 하마구치의 드라마는 한번 시작한 장면의 편집을 최소화하며 각 에피소드별로 20여 분간의 기나긴 대화를 통해서 모든 순간의 행동들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많이 언급되는 바와 같이 소설 작가와 같은 흐름을 이어가는 형태는 세 편의 연극을 차례대로 보는 기분을 들게 하고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들이 모여주는 우연의 가능성과 이어지는 전개, 그리고 마지막 결과에 대한 섬세한 표현은 관객을 끝까지 집중하게 만들죠. 이것은 작품의 주제인 우연이라는 이름의 운명이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더 자주 마주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사실성은 탄탄하게 짜 맞춰진 개연성보다 좀 더 느긋한 리듬을 타고 있는 그의 연출에 더 빠져들게 만듭니다. 첫 번째에서 메이코 혼자만의 망상, 두 번째 나오와 세가와의 서로 간의 상상, 세 번째 두 사람의 공통된 착각까지 무언가 연결점이 없는 듯해도 우리가 상상하는 형태의 변화만 있을 뿐 그 우연이 가져다주는 개개인의 머리 속을 그대로 들춰내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해주고 그때마다 나오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깔리며 묘한 웃음을 전달해 줍니다.
이러한 감독의 뚜렷한 색깔은 참으로 독특하고 매력적인 영화를 만드는 걸 넘어서 현재 하나의 장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나왔던 그의 실제 리딩 방식은 책을 읽는 듯 감정을 빼고 단어 하나하나에 포인트를 주며 실제 촬영에서 배우들이 이루어내는 일상의 감정들을 일정한 리듬과 높낮이로 더욱 풍성함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굉장히 긴 시간을 끝없이 이어가는 배우들의 대화는 그저 친구들과 나누는 소소한 교류처럼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마주하는 우연에 왠지 나도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듯합니다. 이제는 하나의 시그니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라는 소통 행태에 대한 감독의 남다른 접근은 옴니버스로 분리된 단편들을 연결시켜주는 것 같고, 단 1대의 카메라로 촬영한 것도 화질, 색감에 있어서 올드함이 묻어나지만 그 투박함마저도 전체적인 색감에서 잔잔함과 따스함을 드러내줘서 일상의 분위기를 더욱 살려준 것 같습니다.
짧게 줄이자면 마음을 열고 다시 한번 마법보다 불확실한 것을 느끼며 우리가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일상의 놀라운 순간들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말하고 싶습니다. 기발하고 발칙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세 개의 단출한 이야기는 뜻밖의 웃음도 주고 마지막엔 왠지 모를 애틋함도 남기며 우리가 놓쳤던 그 우연한 순간들이 있었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그가 선사하는 남다른 대화의 결을 따라 그린 스케치 위에 각기 다른 에피소드들이 연결되어 무언가 하나의 일상이 꾸려지는 느낌, 어쩌면 전작처럼 스스로를 찾아가는 길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시금 나의 삶에 대한 공상을 해보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찌 되었건 일종의 트렌드처럼 맞춰가는 하마구치의 스타일은 굉장히 참신하기도 하고 인상 깊다고 확언할 수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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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영화의 제목 "이다(Ida)"는 안나의 본명이다. 안나는 서원식 전에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모에게 두 가지 사실을 듣게 된다. 자신의 실제 이름이 "이다(Ida)"라는 것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 이모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다. 쌀쌀맞은 이모의 태도와 그녀가 전하는 정보에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신의 부모에 대해 알고 싶어진 안나는 이모와 함께 그 흔적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이다"라는 한 이름의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이다(안나)와 완다 두 명이라 할 수 있다. 안나는 부모에 대해 알아가며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진실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그러나 안나가 부모에 대한 진실에 점점 다가갈수록 완다는 잊고 싶던 과거의 기억을 점차 떠올리며 그것에 잠식되어간다. 두 사람의 동행은 안나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임과 동시에 그녀의 이모 완다가 자신의 과거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과정이다.
수녀원의 제한적인 정보와 환경 속에서 격리되다시피 살아오던 안나에게 바깥세상은 신기하기만 하다. 안나는 바깥세상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진다. 수녀원 측의 배려로 서원식을 앞두고 직접 완다를 찾아가지만 이모 완다는 그녀를 쌀쌀맞고 퉁명스럽게 대한다. 이모는 안나가 유대인이라는 것과 그녀의 실제 이름과 부모의 이름,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주고는 그녀를 수녀원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첫 만남부터 비밀로 싸여있던 완다는 안나가 수녀원에서 그녀에 대해 아무 정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자 안나에 대한 경계를 늦춘다. 판사인 완다는 법정 재판 중에 생각이 잠기더니 이다를 데리러 버스터미널로 가고, 이때부터 그녀의 태도는 상반되게 온화해진다. 이다를 보고 마주하기 힘들던 과거를 떠올려서일 수도,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 때문일 수도, 혹은 온전히 이다에게 뿌리를 알려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계기가 어떻든 간에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다시 만나 서로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안나 가족의 죽음은 1941년 독일의 폴란드 점령 당시 폴란드 민간인들이 유대인 수백여 명을 죽였던 예드바브네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추측해보건대 안나의 부모와 함께 죽은 어린 남자아이는 아마도 그녀의 아들일 것이다. 과거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죽은 가족들의 유골을 마주한다. 완다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스탈린 정부 하의 폴란드 공산당원이 되어 살아남았고, 안나는 갓난아이라 유대인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 가족을 죽인 남자는 무덤을 판 구멍에 앉아 죄의식을 보이긴 하지만 끝까지 이들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더이상 괴롭히지 않고 집에서 계속 살게 되는 조건으로 유골이 묻힌 곳을 알려주는 거래를 했을 뿐이다. 완다는 아들의 유골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그녀는 자신이 판사로서의 권력을 휘두르며 저질렀던 과거의 행보를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반면 이다의 선택은 어떠한가. 이 영화의 엔딩씬을 그녀의 선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씬은 무척 독특하다. 내내 정적이던 카메라는 엔딩씬에서 급작스럽게 흔들린다. 감독은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이다의 모습을 핸드헬드로 잡는다. 핸드헬드 자체가 특별한 연출기법은 아니다. 다만 앞선 모든 장면에서 감독이 유지해오던 연출 방식과는 상반되게 끝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씬은 특별해진다. <이다>는 여백을 통해 스토리텔링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연출 특징이기도 하다. 차기작 <콜드 워>에서도 이어지는 1.33:1의 풀 프레임 화면비와 흑백의 이미지, 헤드룸을 많이 남기며 전통적인 미장센을 깨는 과감한 시도까지 그의 영화는 형식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크고, 그는 형식을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화면의 중심이 아닌 사이드에 위치하고 카메라는 여백이 많이 보이도록 대상을 비춘다. 그럼으로써 영화 속 인물들은 어딘가 위태롭고 불안해 보인다. 마치 세상의 구석으로 내몰린 느낌까지도 든다. 이 점을 <이다>에서 <콜드 워>까지 이어지는 그의 영화 속 시대 배경과 연결 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와 운명이 반기지 않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내쳐지는 인물들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다시 엔딩씬으로 돌아와서, 내내 무표정하던 그녀의 표정이지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 의지의 분위기가 엔딩씬 전체를, 관객을 압도시킨다. 안나는 어쩌면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찾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 길을 비로소 시작하는 건지도. 지금까지 살아온 '안나'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가든, 새롭게 알게 된 '이다'로서의 삶을 살아가든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가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딘가로 묵묵히 걸어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의 선택은 오로지 그녀의 의지와 발길에 달렸다. 이다는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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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한다고 XX! 「러브 라이즈 블리딩」
정신분석가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을 지키겠다는 판단이자 결의'다. 사랑에 대한 그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사랑이란 일종의 자기 파괴다. '모든 이해란 오해'라는 니체의 말을 받아들였을 때도, 사랑은 일종의 자기 파괴다. 이해할 수 없는 필연적인 오해를 지키겠다는 결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에서 '로맨틱'은 잠깐이고 지리멸렬한 갈등은 법칙이다. 성공하는 사랑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에 밖에 없다. 진짜 깊은 사랑은 서로를 파괴한다.
로즈 글래스가 연출한 「러브 라이즈 블리딩 Love Lies Bleeding」의 사랑은 어떤가. 헬스장 매니저로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던 ‘루’ 앞에 보디빌딩 대회 우승을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 ‘잭키’가 나타난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그들은 스테로이드(?)를 나눠 맞으며 사랑을 나누고, 잭키가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는 날에 함께 지겨운 도시를 떠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가정폭력을 당하는 언니를 도우려던 '루'의 시도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결국 '잭키'는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폭력을 숨기기 위해선 더 큰 폭력이 필요한 법. 피비린내 나는 그들의 사랑은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단 주요 캐릭터들의 존재감이다. 여성 보디빌더 '잭키'를 연기한 케이티 오브라이언의 무게감은 말할 것 없고,'루'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 역시 지금껏 보여준 연기의 관성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지만 지겹게 느껴지진 않았다. 약간 우스꽝스러운(변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음에도 위엄을 잃지 않는 에드 헤리스는 명불허전이다. 저런 머리를 하고 있는데도 무서운 건지, 저런 머리를 하고 있어서 무서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렬한 캐릭터 뒤로는 미덕과 아쉬움이 동시에 있다.
우선, 테마적인 면에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힘'이다. 이 '힘'이라는 것이 가질 수 있는 양태를 다면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영화적 미덕이다.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 발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와 성격은 세계의 인구수만큼 많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인 잭키를 보자.
잭키
이 영화에서 '힘'은 중요하다. 우선 '잭키'부터가 순수한 힘을 쫓는 보디빌더이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도망쳐 거리의 삶을 살았던 '잭키'에게 힘은 곧 생존이다. 순수한 힘을 향한 '잭키'의 집착은 영화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사격장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면접 자리에서 '잭키'는 총 같은 도구보다 육체 본연의 힘을 더 믿는다고 말한다. 체육관 앞에서 몇몇 남자들과 난투극을 벌인 후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루'에게 '잭키'는 "내가 그들을 이길 수 있어"라고 말하는데, 이는 '잭키'가 '루'에게 처음으로 정색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잭키'의 힘은 미숙하고 약하다. 그것은 버려진 두려움에서 비롯된 자기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잭키'가 격투기 선수나 역도 선수가 아닌 보디빌더인 점도 의미심장하다. 사실 보디빌딩은 '힘'을 쫓는 운동이 아니라, '미美'를 쫓는 운동이다. 실제로 보디빌딩의 번역어는 '육체미'다. 아름다운 몸(물론 여기서 '아름답다'의 기준은 근육의 크기, 강도, 균형 등이긴 하다)을 가꾸는 시합이지, 강력한 몸을 가꾸는 시합이 아닌 셈이다. 엄밀히 말해 보디빌딩은 스포츠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잭키'에게 원한 건 강한 게 아니라 강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잭키'는 시도 때도 없이 거울을 보며 자신의 근육을 관찰하고 포즈를 취하고, 누군가에게 강해 보이기 위해 불필요하게 선을 넘기도 한다(사격장 면접 씬과 헬스장 앞 난투극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으면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기대도 어리숙하고 헛되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보디빌딩 대회를 보면 그다지 큰 규모도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런 대회에서 상을 몇 개 받는다고 인생이 크게 변할 순 없다. 감독이 어디까지 현실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애초에 훈련만큼 휴식과 영양, 값비싼 불법 약물 등이 더 중요한 보디빌딩에서 '잭키' 같은 사람이 성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작중에서 '루'가 '잭키'에게 스테로이드를 권유했을 때 '잭키'는 매우 당혹스러워하는데, 이를 보면 그녀는 한 번도 약물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이때 '잭키'는 '루'에게 스스로를 내추럴*이라고 말하는데, 정말 신념이 있어서 스테로이드를 사용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루'가 스테로이드를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말하자 '잭키'는 곧바로 중독에 빠진다).
결과적으로 '터프함', '강함'에 대한 잭키의 어리숙한 집착은 그녀를 살인자로 만든다. 사실 영화 속에서 '잭키'가 살인을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물론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폭력성 과다, 숨기고 싶은 과거(잭키가 처음 도시에 왔을 때 일자리 알선을 위해 '루'의 형부와 원나잇을 했었다) 등이 엮여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살인을 설명하긴 무리다.
정작 당사자인 '루' 역시 '잭키'의 개입을 원치 않았음에도 굳이 그녀를 돕겠다고 나서 살인까지 저지른 건 순전히 '잭키'의 어리광이다. 물론 그 미숙한 집착이 개인의 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문화 탓에 자라났다는 사실도 분명하지만.
*불법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보디빌더. 흔히 피트니스 업계에서 내추럴과 로이더는 함께 경쟁하지 않는다.
랭스턴
그에 비해 '랭스턴'(루의 아빠)이 가진 힘에의 의지는 결이 좀 다르다. 대형 사격장의 주인이자 총기 밀매 업자인 '랭스턴'은 실질적인 힘을 추구하고, 실제로 힘을 가지고 있다. '랭스턴'은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의 유력자다. 사업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깔끔하게 '처리'할 능력도 가지고 있고, 막대한 부를 축적해 공권력까지 손에 넣고 주무른다.
'랭스턴'이 가진 힘에의 의지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는 영화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어쨌든 영화 속 시점에서 그것은 '잭키'의 자기방어기제 단계는 넘어선지 오래로 보인다. 총을 좋아하냐는 자신의 질문에 '잭키'가 총보단 스스로의 힘을 믿는다는 엉뚱한 대답(사격장 매니저를 뽑는 자리였으니까)을 했을 때도, '랭스턴'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잭키'를 채용한다. 아마도 그것은 '잭키'가 힘에 대한 미숙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언젠가 자신을 위해 이용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지 않았을까(실제로 그는 '잭키'를 '처리'의 도구로 이용한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근육을 구경하는 '잭키'에게 사격을 경험시키면서 "진짜 '힘'은 이런 것"이라고 위계(?)를 보여주는 장면 역시 '랭스턴'이 가진 지배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강력한 힘을 가진 '랭스턴'의 지배 욕구는 단순하지 않고, 그래서 그의 욕구 역시 불완전하다. '랭스턴'은 힘이나 돈으로 찍어누르는 1차원적인 지배를 원하지 않고, 좀 더 완결적이고 총체적인 지배, 그러니까 '완전한 장악'을 원한다. 그에게 인간이란 사무실에서 애지중지 기르는 애완용 벌레 같은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 '랭스턴'이 딸인 '루'를 자신의 사업(총기 밀매)에 끌어들이려고 한 것 같은 묘사를 생각해 보자. 보통 영화에서 성공한 갱이나 마피아들은 자식을 범죄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으려 하기 마련인데, '랭스턴'은 '루'에게 사업을 가르쳐 주고 일에 방해되는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까지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 '랭스턴'의 묘사로 볼 때 그에게 인력이 부족해서 '루'가 필요했던 건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랭스턴'은 '루'를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했다. 다만 그에게 사랑이란 '자아의 연장'이자 '힘의 확장'과 유사한 개념이었을 뿐이다.
'루'의 언니가 가정폭력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을 계기로 '랭스턴'과 '루'는 불편한 재회를 하게 된다. 이때 '랭스턴'이 '루'를 대하는 방식은 결코 미움이나 혐오가 아니다. 미움보다는 '그냥 내 말 듣고 시키는 대로 했으면 편하게 잘 살았을 텐데 사서 고생이냐'는 전형적인 K-아버지식 태도에 가깝다. 나아가 '잭키'가 저지른 실수 탓에 '루'가 곤경에 빠졌을 때도 '랭스턴'은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루'를 돕는다.
그러나 극의 후반부 결국 그의 사랑은 힘을 갖지 못한 채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사랑은 끝없는 자기 확장 욕구의 발현 방식이었을 뿐, '자기 파괴의 감수'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가 '랭스턴'의 입지를 흔들만한 비밀을 폭로하려 하자, '랭스턴'은 곧바로 돌변했다.
데이지와 베스
작중 양아치 남편 JJ로부터 끊임없이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하는 '베스(루의 언니)'와 '루'를 짝사랑하는 '데이지'가 가진 힘의 욕구는 수동적이고 퇴행적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에게도 욕구가 있다.
'베스'는 양아치 남편에게 가정폭력 피해를 당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떠나지 못한다. 일반적인 가정 폭력 피해자들의 경우와는 다르게 '베스'는 강력한 무력과 재력을 가진 아버지가 있음에도 JJ를 떠나지 못하는데, 이는 '베스'가 가진 왜곡된 사랑 탓이다. (작중 '베스'의 이야기가 많이 다뤄지지 않지만) 심각한 폭행으로 병원에 입원한 자신을 타이르는 '루'에게 '베스'는 "너는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몰라"라며 JJ를 옹호한다. 이에 더해 '베스'는 '루'와는 달리 아버지 '랭스턴'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왔던 듯 묘사되는데, '베스'는 사랑이 가진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온몸으로 수용하지만(JJ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악행 역시 감내했다) 그 의미를 오해하고 있다.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그래서 이해될 수 없는 타인을 지키겠다는 결의로서 사랑은 무비판적인 수동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힘을 가질 수 있는 사랑은 상대를 향한 적극적인 행동 양식이다. 베스가 진정 JJ를 사랑했다면, JJ의 인격적인 성장을 위해 힘썼을 것이다. 그게 JJ를 떠나는 방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데이지의 경우는 전형적인 '왜곡된 사랑' 그 자체다. 우선 영화는 데이지의 미성숙을 도드라진 방식으로 보여준다. 다 큰 어른이지만 우유와 사탕을 입에 달고 살고, 유아적인 표정과 말투를 가졌다. 다 빠져버린 치아의 상태를 봤을 때 아마도 그녀는 마약을 남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녀는 '루'에게 대마초를 권유하기도 한다).
'데이지'는 '루'를 향한 집착에 가까운 짝사랑을 가지고, 이에 대한 '루'의 반응으로 봤을 때 그 세월도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항상 기름진 머리로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데이지는 '루'를 자신의 답답한 인생에서 탈출시켜줄 구원자처럼 여긴다. 그들이 체육관 화장실에서 처음 마주치는 장면을 보면, '데이지'를 귀찮아하는 '루'는 마치 어린아이 어르듯 돈을 건넨다. 그러자 '데이지'는 상처받은 듯 실망하지만 이윽고 돈을 보고 웃는 낯을 보이는데, 이와 같은 '데이지'의 양가적인 모습은 영화 내내 계속 반복된다. 특히 시체를 싣고 가던 '잭키'를 목격한 이후, '데이지'는 '루'의 약점을 가지고 선을 넘을 듯 말 듯 교묘하게 그것을 활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데이지'는 순수하게 '루'를 사랑하는 순애보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데이지'는 '루'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계속해서 '잭키'와 JJ의 자동차와의 연결고리를 묻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삶에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힘(목격자의 지위)을 가지게 된 '데이지'의 행동을 보았을 때, '데이지'의 사랑은 어린아이와 같은 형태의 퇴행적인 자기애에 가까운 셈이다.
루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힘을 가지는데 성공하는 인물은 '루'다. 오직 '루'만이 주체적으로 '자기 파괴'의 결단을 내리는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우선 '루'는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랭스턴'의 악행을 스스로 거부하고 독립에 (반쯤?) 성공한 상태다. '잭키'를 먼저 발견하고, 관계를 리드하는 것도 '루'다. '잭키'를 위해 매일 계란 노른자를 분리해 주고, 스테로이드를 제공한다(비록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러브 라이즈 블리딩」 속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파괴를 겪는다. '잭키'는 평생을 꿈꿨던 무대를 망치고 살인자가 됐고, '랭스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군 왕국을 잃었으며, '베스'는 엉망이 된 채 JJ를 잃고 '데이지'는 배신당한 채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이 중에 타인을 위해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아를 희생한 것은 '루'가 유일하다.
'루'는 평생 아버지의 악행을 혐오하며 그와 닮지 않기 위해 우악스럽게 살아왔지만, 결국 '잭키'를 위해 피를 두 번 묻힌다(엉망이 된 JJ의 시체를 숨기며 첫 번째 죄를 저지른 후 영화의 결말에 또 한 번 결정적인 죄악을 저지른다). '잭키'를 위한 '루'의 자기 파괴적 희생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요소는 바로 담배다. 작중에서 '루'는 금연에 대한 언급을 여러 번 하면서도 계속 담배를 끊지 못하는데(금연 교육 테이프를 들으면서도 담배를 피운다), '잭키'가 떠나고 난 후 금연을 선언하고 실제로 금연에 성공한다.
그러나 '잭키'와 함께 사막을 떠나던 중 반쯤 죽었던 '데이지'가 다시 꿈틀거리고 '루'가 이를 다시 처리(?) 하는데, 이때 결국 '루'는 '데이지'가 가지고 있던 담배를 꺼내 물어버린다. 이 장면에서 '잭키'는 세상모르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루'는 타자를 지키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도덕적인 자기 파괴를 감행했고, 결국 (담배처럼) 자기 자신을 갉아먹을 것이 분명한 '잭키'와의 사랑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랭스턴'의 저택에서 '루'와 '잭키'가 힘을 합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랭스턴'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잭키'의 거대화(?)다. 그러나 이 거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 다시 말해 '잭키'가 그토록 갈망하던 '커 보이는 것 / 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힘(거대화)'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목숨을 걸고 '랭스턴'의 저택으로 돌아온 '루'의 용기 덕이었다.
'잭키'는 모든 것을 잃고 친동생에게 전화해 "(너무 힘드니까) 넌 사랑하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루'는 (베스와)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 가다도 "언니 사랑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힘에 대한 갈망이 가장이 없었던 '루' 만이 진짜 사랑에 도달해 '힘'을 얻었다.
카메라
「러브 라이즈 블리딩」에서 힘을 갈망하는 마지막 주체는 카메라다. 이 영화에서 '형식'은 끊임없이 저 자신을 드러낸다. '루'가 손으로 직접 막힌 체육관 변기를 뚫고 있는 매우 부담스러운 클로즈업으로 시작한 영화는 이후 땀에 젖은 육체와 의미심장한 문구들을 접사한다. 영화 중간중간에 종교화의 색채를 띤 사막 위의 생명체와 기물들을 '몽타주'하는가 하면, 폭력을 전시하듯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연극적인(극단적인) 조명 연출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다가, 종국에는 (약간?) 당혹스러운 CG까지 나아간다. 저 자신의 영화적인 스타일리시를 백분 활용하는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카메라 역시 힘에 대한 욕구(사랑)가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랑은 어디를 향하며, 또 성공했을까?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어느 영화나 다 그렇듯) 영화를 본 관객마다 다를 것인데, 나의 경우 개인적으로 반쯤은 성공했고 반쯤은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우선 개인적으로 카메라가 [내러티브 - 인물]보다 앞섰다고 보았다(앞서 언급한 클로즈업/조명/인서트들이 내러티브를 돋보이게 한다기보단 저 자신의 스타일에 더 집중한다). 이를테면 '잭키'가 스테로이드 취해 '루'를 토해내는 환상을 보는 장면 같은 겨우, '잭키'가 겪고 있는 어떤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잭키'가 자신 속에 있는 '루'를 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야기의 맥락('루'가 '잭키'의 살인을 수습하고 있을 때다)으로 봤을 때 만약 토해내야 한다면 '루'가 '잭키'를 토해내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이와 같은 스타일리시의 과잉은 캐릭터와 내러티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저 자신의 형식에 더 취하는 것으로 보여 아쉬웠다. 그러나 이는 A24 영화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로즈 글래스 감독의 성향이기도 해서, 사실 미덕의 문제라기보단 취향의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종횡무진 활보하는 '스타일'의 수위를 조금만 더 낮췄다면 '80년대 미국 시골'이라는 배경과 '가부장제를 부시는 아웃사이더'라는 소재와 현대적인 스타일, 이 세 가지 부조화스러운 영화적 요소들이 조금 더 매력 있는 간극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인서트 컷들만 남기도 눈에 튀는 연출들을 배제했다가 영화의 후반부 거인화 장면이 갑자기 툭하고 튀어나왔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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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족이 완벽한 정반합을 망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퇴각 명령을 받은 '고니시'(이무생)는 즉각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권력 공백 상태인 일본 열도에서 곧 내전이 일어날 테니. 하지만 문제가 있다. 순천 왜성을 포위한 조명 연합군 함대를 뚫을 길이 없다. 이에 고니시는 '진린'(정재영)에게 열띤 뇌물 공세를 벌이고, 간신히 연락선 한 척을 포위망 너머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김윤식)은 분노한다. 조선군은 왜군 퇴각로를 막고 그들을 섬멸할 준비를 마쳤기 때문. 그는 진린에게 양자일택을 요청한다. 조선군 옆에서 싸우거나, 조용히 철군해 달라고. 이순신과 진린이 갈등이 극에 달하는 사이, '시마즈'(백윤식)의 함대는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노량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7년에 걸친 전쟁을 끝낼 마지막 전투의 막이 오른다.
장점만 모아 '3의 저주'에 도전하다
시리즈 영화는 징크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몸집을 키운 2편이 1편의 매력을 잃어버리는 '속편의 저주'가 대표적이다. 그 못지않게 자주 볼 수 있는 징크스가 바로 '3의 저주'다. 시리즈물 중 유독 3편이 비평적으로 평가가 안 좋은 경우를 말한다. 반복된 소재 때문에 피로감이 누적된 <트랜스포머 3>, 배급사 개입으로 인해 스토리가 중구난방이 된 <배트맨 포에버>와 <스파이더맨 3> 모두 '3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 사례다.
김한민 표 '이순신 삼부작'의 완결편인 <노량: 죽음의 바다>는 다르다. <한산>이 <명량>의 성공에 도취하지 않은 채 장점은 유지하고 단점을 채워 '속편의 저주'를 피했듯이, 이번에도 '3의 저주'를 영리하게 피해 간다. 특히 두 형의 장점만 취하려는 접근법이 인상적이다. 신파 연출이 과했던 <명량>, 이순신이라는 캐릭터는 돋보이지 않았던 <한산>을 반면교사 삼아 완벽한 정반합에 닿으려고 한다.
실제로 조선군, 명군, 왜군 세 진영을 오가는 초반부 외교전과 신경전은 <한산>의 초반부를 닮았다. 그러면서도 <명량>처럼 삼도수군통제사의 인간적인 일면도 놓치지 않는다. 셋째 아들 '이면'(여진구), 전라우수사 '이억기'(공명) 등 먼저 전사한 이들을 그리워하는 이순신의 모습은 모두가 아는 결말로 향하는 길을 감동적으로 장식한다. 다만 이 정반합은 완전하지 않다. 영화의 끝에 덧붙인 사족이 그 감동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한산>과 <명량>이 조화를 이룬 빌드업
<노량>의 도입부는 앞선 두 편과 유사하다. 모든 플롯을 포괄하는 확실한 콘셉트를 잡았다. <한산>의 콘셉트가 '의로움'이었고, <명량>의 모티브가 '천운'이었듯이. <한산> 속 의병, 항왜, 거북선과 이순신의 화살은 모두 같은 의미였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의로운 전쟁을 상징했다. <명량>은 조류의 변화, 거북선의 등장, 백성들의 응원을 통해 천운을 다양하게 보여줬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기적적인 승리의 발판이었다고 암시했다.
<노량>의 콘셉트도 명확하다. '집'이라는 공통 모티브를 살렸다. 당장 명군은 집에 가고 싶은 군대고, 왜군은 집에 가야만 하는 군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명군은 조선에서 싸울 명분이 없어졌고, 왜군은 본국에서 벌어질 다이묘 간의 내전을 대비해야 하니까. 그래서 왜군과 명군은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다. 집으로 가야만 하는 왜군은 명군을, 집에 가고픈 명군은 굳이 전투를 벌이려는 조선군을 설득하려 애쓴다.
이때 <노량>은 <한산>의 화법을 취해 명군과 왜군의 상황을 묘사한다. 자칫 낯설 수 있는 명군과 왜군과 정치적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내며 그들이 싸워야만 했던 이유를 보여준다. 이 대목은 이순신과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서로의 전술을 알아내기 위해 첩보전을 펼친 <한산> 전반부를 확장한 버전처럼도 느껴진다. 진린, '등자룡'(허준호), 시마즈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과시할 장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노량>의 전반부는 이순신의 개인적 아픔을 보여준다. 영웅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한다는 점은 <명량>과의 공통점이다. 그는 셋째 아들 이면이 왜군과 싸우다 죽는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집을 지키려는 아들을 돕지 못한다. 아들의 이름을 외치며 흘린 그의 눈물에는 차마 왜군을 고이 보낼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 이 대목은 조선군의 심정을 대변한다. 조선군은 이순신처럼 돌아갈 집을 잃은 군대이기 때문.
<한산>처럼 보여준 노량 해전
착실히 쌓아 올린 명분과 감정은 100여 분에 달하는 해전 시퀀스로 터져 나온다. 우선 잘 짜인 군무를 보는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판옥선이 눈을 사로잡는다. <한산>이 어린진과 학익진을 선보인 것처럼 이번에도 진과 진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일례로 시마즈의 수군을 기습 공격할 때 조선군은 일자진으로 일제히 화력을 쏟아붓는다. 비교적 전투력이 약한 명군 집중 공격하는 왜군 진영을 일도양단하는 진법도 인상적이다.
동시에 왜군의 반격도 자세히 보여주며 긴장감을 살린다. 시마즈는 위기의 순간마다 함대를 냉철히 지휘하며 마지막 맞수다운 임팩트를 남긴다. 선봉대가 조선군에게 기습당하자 자기 손으로 선봉대를 포격, 침몰시킨 후 활로를 뚫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관음포에 갇히자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사들을 자극해 사기를 끌어올린다. 조명 연합군의 협공에는 등자룡과 진린의 함선을 집중 공략으로 맞대응해 전투의 균형추를 맞춘다.
다만 야간이라는 환경은 일장일단이다. 어두운 화면은 조선군의 화력을 강조할 때 유리하다. 특히 조선군이 화포, 총통, 신기전을 총동원해 화력을 퍼붓는 장면은 거친 박력과 압도적인 쾌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부감샷으로 전체적인 진의 움직임을 보여줄 때는 문제가 된다. 불을 끈 채로 배들이 이동하다 보니 상영관 환경에 따라서는 조선군, 왜군의 움직임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명량>처럼 터뜨리는 감정선
조선군, 명군, 왜군 가릴 것 없이 뒤엉킨 배에서 난전이 벌어지는 순간부터 <노량>의 분위기는 전환된다. 특히 롱테이크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전까지는 상업 영화다운 볼거리에 충실한 전투가 등장했다면, 이 순간부터는 진정한 노량 해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명량>에서도 롱테이크 백병전 장면이 당시 해전의 처절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바 있는데, <노량> 역시 롱테이크 씬을 활용해 노량 해전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갑판 위에 자리 잡은 카메라는 왜군-명군-조선군 순으로 옮겨가며 일반 병사의 시점에서 노량 해전을 비춘다. 조선군은 복수를, 명군은 신의를, 왜군은 귀향을 위해 죽을 각오로 백병전을 펼치고 있다. 그 광경은 지옥도나 다름없다. 피사체의 주체가 죽으면 그를 죽인 주체가 카메라의 대상이 되고, 또 그를 죽인 사람인 대상이 돼야 할 정도다. 7년 간의 전쟁과 살육을 단 한 순간에 끝내려는 처절함이 스크린을 뚫고 나온다.
그 끝에서 카메라는 이순신을 찾아낸다. 난전 속에서 그가 먼저 죽은 아들과 동료들의 환상을 보고, 갑판에 떨어진 북채를 들어 북을 치고, 전투를 독려하던 중 전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앞선 롱테이크 씬에서 곧장 이어지는 장면임을 생각하면 이 대목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앞선 전투가 처절하고 참혹할수록 이순신의 회한은 짙어지고, 고뇌도 깊어지기 때문. 삼부작 중 인간 이순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처럼도 보인다.
그는 죽은 동료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왜군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아들의 기개는 대견하지만, 지켜주지 못해 한스럽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는 왜군을 섬멸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다른 장병들에게 또 죄를 짓는 듯하다. 이처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의 파고 속에서 이순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전투를 독려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북을 치는 것. 바로 그 순간 <노량>은 클라이맥스를 맞이한다.
다만 그 이후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명량>이 신파가 과했다는 지적을 받았듯이, <노량>도 후반부로 갈수록 균형을 잃는다. 물론 연출 자체는 세련됐다. 모두가 기대하는 이순신의 전사 장면에 속임수를 주고, 마지막까지 유언을 아끼며 성웅의 죽음을 영리하게 보여준다. 전사하는 순간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진린이 오열하고, 장남 이완이 계속해서 북을 치며, 장례를 치르는 모습만 봐도 가슴은 충분히 미어진다.
단지 피로감을 떨칠 수 없을 뿐이다. 길고 긴 전투 시퀀스가 이어지는 가운데,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시리즈를 끝내고 싶은' 욕심이 끼어든다. 그 결과 영화 말미는 늘어진다. 이순신 전사 앞뒤에 북을 치는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다소 과하게 반복되고, 조선군과 명군의 돌격 장면도 필요 이상으로 연달아 등장하는 식이다.
다 된 밥에 떨어뜨린 마지막 오점
전반적으로 <노량>은 <명량>과 <한산>을 거쳐 완벽한 정반합으로 시리즈를 끝내려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등장한 쿠키 영상이 끝내 발목을 잡는다. 노량 해전 이후 광해군과 신료들이 순천 왜성에 모인다. 그들이 이순신을 기리고, 일본 공격을 다짐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작가적 관점에서 이순신의 죽음 이후를 그려낸 장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쿠키 영상 이후 150분 간 쌓아 올린 감동은 한순간에 식어 버린다. 고증, 완성도, 연결성에 모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이후 조선이 일본 공격을 논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당 논의는 광해군이 아닌 선조 시기에 진행됐다. 정작 광해군은 즉위 1년 차인 1609년에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포로를 송환받는 등 조선과 일본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데 주력했다.
완결성도 문제가 된다. <노량>은 집을 잃은 사람, 집에 가고픈 사람, 집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혈투를 보여줬다. 함선 간의 전투보다도 병사들의 시점에서 이어진 롱테이크 씬이 인상적일 정도였다. 이는 죽음을 끝내기 위해 더 많은 죽음을 각오한 이순신의 비장함이 돋보인 배경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전쟁과 죽음을 암시하는 쿠키 영상은 승전의 기쁘보다도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는 메시지와 상충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시리즈 전체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갑작스럽다. '이순신 삼부작'은 조정의 정치적 갈등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었다. 당장 선조나 광해군은 시리즈 내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극 중 선조와 광해군의 갈등 역시 초반부에 잠깐 암시될 뿐, 주요 플롯이라 볼 수는 없다. 또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가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반면, 이순신과 광해군의 관계는 알려진 바가 없기에 이번 쿠키는 더 어색하다.
<노량: 죽음의 바다>는 분명히 기념비적인 영화다. 이순신이라는 위인을 고찰한 작품으로서도, 사극 해전 영화로서도, 김한민 감독의 변화와 발전을 볼 수 있는 시리즈로서도 부정할 수 없는 성과를 일궈냈다. 하지만 그 의의가 크고 의미가 깊을수록 찬물을 끼얹는 마무리는 퍽 아쉽다. 이순신의 죽음을 그 어느 때보다 장엄하고, 품격 있게, 공들여 그려냈기에 특히 그렇다.
Acceptable 무난함
더 바랄 것 없이 품격 있는 마무리. 쿠키 영상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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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관습이여, 이제는 안녕
간만에 찾아온 영화관은 주말임에도 한적한 분위기가 감돈다. 다섯 살 때부터 단골이었던 영화관에서 풍기는 한적함은 낯설기만 하다.
오늘 볼 영화는 크레이그 길레피스 감독의 <크루엘라>다. 사실 감독보단 엠마 스톤이 연기해 관심을 갖고 있던 작품이다. 나는 그녀가 좋다. 뭔가 장난기 가득한 모습만 있는 거 같은데 특유의 시니컬함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라라랜드>의 미아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라라랜드>에서도 좋은 역할을 보여줬지만 개인적으론 <버드맨>의 샘이 좋다. 진정한 배우로 인정받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아버지(마이클 키튼)는 인정받는 배우로 거듭난다. 이때 샘(엠마 스톤)이 아버지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내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녀는 분명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 나를 그녀의 매력에 빠져버리게 만들었다. 여전히 나는 그녀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한다.
기대 속에 영화를 보고 나온 소감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대만족이었다. 크루엘라는 <101마리 강아지>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던 캐릭터다. 오래된 악당을 소비한 채로 방치하지 않고 재해석해 현재로 불러들이는 건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본다. 과거 디즈니의 관습에 의해 제한된 역할로 남았던 캐릭터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알라딘>의 쟈스민이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왕국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에게 기대야만 했던 수동적인 과거를 이야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능동적으로 변화시켜 입체적인 캐릭터가 완성됐다.
<크루엘라>는 디즈니의 관습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작품이다. 일단 크루엘라는 영웅이 아닌 악당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마녀를 주연으로 한 <말레피센트>도 악당을 재해석한 영화지만 영웅적인 요소가 가미된 악당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다. 하지만 크루엘라는 천성 악당이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라는 두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크루엘라의 손길에서 결코 자유로울 순 없다. 결국 진정한 악당의 이야기를 담는 것으로 악당을 좌시했던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디즈니의 꽃인 뮤지컬적인 요소를 배제했다. 물론 뮤지컬을 매력적으로 느껴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뮤지컬을 기대하고 관람하게 되면 아쉽게도 실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대신 뮤지컬을 대신해 70년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명곡들이 영화를 채우고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존 주인공들의 변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101마리 강아지>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로 인해 기존 주인공들이 작중에 등장하는데 원래 알던 모습으로 그들을 찾는다면 결코 쉽지 않을 거라 자신한다. 그들의 변화한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힌트는 그들의 이름에 있으니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보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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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알라딘 총정리 #9
환몽씨네 디즈니 특집 1편!
영화 알라딘 (Aladdin, 1992) 분석**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올해도 내년도 디즈니꺼!
환몽씨네 '디즈니 라이브 액션' 특집!'알라딘'과 '라이온 킹'에 대해 재밌게 떠들어 봤어요 :)
1편에서는 알라딘 실사화를 기념해,
환몽씨네가 26년만에 애니메이션 알라딘을 이야기합니다.- 승승장구하는 디즈니
- 디즈니의 실사 프로젝트 ‘디즈니 라이브 액션’
- 알라딘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 알라딘이 중국인이라고?
- 디즈니의 캐릭터 설정
- 영화주제 : Be Yourself
- 실사화에서 기대되는 장면!영화 '알라딘'을 보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2편 '라이온킹'도 많은 기대해주세요!
#알라딘 #aladin #영화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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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윤희에게 #MoonlitWinter
-BGM
Raphael Leto - Wanted Me (feat. DNAKM)-Contact
93mar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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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티저 예고편
기다림은 끝났다!
전 세계가 기다려온 단 하나의 액션블록버스터!도미닉(빈 디젤)은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형제 제이콥(존 시나)이 사이퍼(샤를리즈 테론)와 연합해
전 세계를 위기로 빠트릴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다시 한 번 패밀리들을 소환한다.
가장 가까운 자가 한순간, 가장 위험한 적이 된 상황
도미닉과 패밀리들은 이에 반격할 놀라운 컴백과 작전을 세우고
지상도, 상공도, 국경도 경계가 없는 불가능한 대결이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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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매미소리> 메인 예고편
여기 소리에 울고 웃는 부녀가 있다 매미소리만 들으면 곡소리를 내는 딸, '수남' 곡소리 나는 초상집만 다니면 신명이 나는 아버지, '덕배' 최악의 죽음을 맞이하려는 딸과 최고의 죽음을 찾으려는 아버지 진도의 어느 뜨거운 여름날 20년 만에 마주친 부녀의 듣그러운 불협화음 한 판이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