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8-26 11:39:27
니더훈리 마이 러브 여름날 우리 너의 결혼식이라는 영화
영화 <여름날 우리> 리뷰
영화 <여름날 우리, 2021>는 중국에서 제작된 작품으로 한국영화 <너의 결혼식, 2018>을 리메이크하였다. 2016년 한중 관계가 냉랭해지면서 직접적으로 한국영화가 중국에 개봉하는 것은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대신 원작 스토리를 중심으로 하는 IP(Intellectual Property) 수출의 유형이 증가하였다. 현재까지 총 25편의 영화 및 드라마가 중국판 리메이크로 재탄생하였다. 제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한국영화 <너의 결혼식>을 리메이크한 중국 영화는 <니더훈리 你的婚禮>라는 중국어 제목, <마이 러브 My Love>라는 영어 제목, <여름날 우리>라는 한국어 제목이 붙었다. 이번 리뷰는 두 영화를 비교해볼 수 있는 키워드로 정리하고자 한다.
<너의 결혼식>과 <여름날 우리> 포스터
[280만 명, 4400만 명]
<너의 결혼식>은 이석근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한 첫 장편 데뷔 영화이다. 현실적으로 잘 녹여낸 우리 모두의 환상인 첫사랑 이야기와 주연배우인 박보영과 김영광의 케미가 잘 어우러져 2018년 8월 2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국은 영화 흥행을 한국과 달리 관객 수가 아닌 수익으로 집계한다. <여름날 우리>도 2021년 4월 30일 중국의 노동절 연휴를 겨냥해 개봉하여 약 6억 위안(1041억 원) 흥행 수입을 올렸다. 좀 더 쉬운 비교를 위해 관객수로 환산하면 약 4400만 명이 영화를 관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승희, 우영자(尤咏慈)]
<너의 결혼식>에서 박보영이 연기한 환승희는 타이밍 때문에 사랑이 빗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로 연애의 휴식기에 우연한 만남이 그 의미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캐릭터의 이름을 환승.희, 황.우연으로 지은 것도 다분히 전략적이다. <여름날 우리>의 우영자는 수영장(游泳池)이라는 단어와 중국어 발음이 '요우용츠'로 비슷하다. 수영 선수인 저우 샤오 치는 이름만으로 운명을 직감한다. <여름날 우리>는 <너의 결혼식>에 비해 남자 주인공의 비중이 조금 더 높은 편이며, 실제 배우 캐스팅도 노력을 기울였다. 드라마 <상견니>로 큰 인기를 얻은 대만 배우 허광한은 이 영화로 중국 본토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엔딩 크레디트에는 그의 이름 옆에 '중화 대만'이 표기되어 있다.
[떡볶이, 꼬치구이]
학창 시절 학교 수업을 빠지고 몰래 먹던 추억의 음식은 나라마다 다를 것이다. 따라서 영화 리메이크에서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영화 속 음식을 현지화하는 각색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어색하지 않은 대체물을 찾아야 한다. <너의 결혼식>의 떡볶이는 <여름날 우리>에서 꼬치구이로 변신하였다. 그 외에도 남자 주인공이 하는 운동이 럭비에서 수영으로 , 정장 스타일의 교복 케미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체육복 케미로 바뀌었다. 중국 본토는 실용적인 체육복을 교복으로 입는 경우가 많다.
<너의 결혼식>을 재미있게 보았다면, <여름날 우리>와 틀린 그림 찾기(사실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림을 찾는 것)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위에서 대표적으로 언급한 것 이외에도 아직 찾지 않은 것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본 리뷰는 브런치 작가 '삐뚜로 빼뚜로'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팀에서 업로드한 게시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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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곡을 깨는 얼굴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말이, 글이, 작품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세계를 산다. 어제의 유행가는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는다.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공감을 사던 장르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했다는 말은 바람 속에서 이리저리 조각나고 찢겨 날아다니다 잊힌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모든 이야기들은, 특히나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 여기의 내게까지 와 닿은 이야기들은, 여상해 보여도 사실 엄청난 질곡을 깨뜨리고 다가온 것이다. 한 이야기와의 만남을 기적으로까지 우러러볼 순 없더라도, 소중한 경험임은 분명하다. 심지어 그 이야기가 내 마음에 깊이 와 박혔다면, 그렇다면 그건 기적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 영화는 그래서 내게 기적이었다. 질곡의 땅에서 태어나, 밤에서 낮으로 또 아침에서 저녁으로 전해지다가, 오래 전의 음악을 덧입고 찾아온. 오월의 전주에서 이 영화를 만났다.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Film goes on’이라는 주제가 곳곳에 단단한 차돌처럼 박혀 있는 영화관에서. 사람들 틈에서 박수를 치고 눈물을 훔치고, 개봉하면 꼭 동종업계 사람들과 다시 봐야지 생각했다.
영화 <전장의 피아니스트>는 시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종교 극단주의자 그룹, 흔히 IS로 불리는 ‘다에시’가 시리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배경으로 한다. 한때는 평화롭고 풍요로웠을 도시는 딱딱한 공포의 압력으로 덮여 있다. 언제 총성으로 깨질 지 모르는 고요한 오후 햇살 아래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는 카림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트로이메라이. 환상, 꿈이라는 뜻의 단어는 슈만의 <어린이 정경> 7번째 곡이다. 슈만이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만들었다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을 총성이 찢는다. 사람들이 숨어 지내는 곳, 굳어 있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서로의 쉴 곳이 되어주는 은신처 같은 곳도, 안전하지는 않다.
그래도 거기서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한다. 카림은 피아노를 치고, 카림의 사촌은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났을 때를 기다리며 로스쿨에 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토플 공부를 한다. 삼백 년 전에도 같은 모양새였을 것 같은 얼굴로 물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아이를 돌보는 사람도, 체스를 두는 노인들도 있다.
물론 이곳이 진짜 무릉도원은 아니기에, 이 모든 건 잠시뿐이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압제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예술까지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사회에서, 싸움보다 예술이 하고 싶은 카림은 시리아를 떠날 계획을 세운다. 연주만으로도 눈엣가시가 되는, 어머니의 유품 피아노를 팔아 그 돈으로 유럽에 가겠다는 것이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카림의 발을 따라 간다. 함께 숨어 지내는 사람들도 마뜩찮아 하는 피아노를, 다에시의 일원들이 마음에 들어 할 리 없다. 수시로 급습 나오는 다에시 대원들은 결국 피아노를 부수고, 카림은 자신의 현재이자 미래가 모두 걸린 피아노를 수리하기 위해 똑 같은 피아노가 있다는 곳으로 무작정 길을 나선다. 피아노는 고사하고 그 집이 남아있을 지조차 보장이 없는,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폭격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도시로.
카림의 여정을 따라 수많은 인물들이 스쳐간다. 아버지가 다에시 대원들에게 끌려갔지만, 그래서 아마 돌아올 수 없겠지만, 어른들의 돌봄 아래서 자라나는 꼬마 지아드, 공개 처형 당하는 동성애자, 폭격으로 이미 텅 비어버린 도시에서 만난, IS에 맞서 싸우는 여성 부대원,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러나 친절을 베푸는 이웃… 10년도 훌쩍 넘어선 내전에서 수없이 비춰지던 얼굴들이, 그렇게 지나간다. 때로는 이름을 남기고, 가끔은 이야기를 남기고, 심지어 어떤 경우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로.
한 명의 얼굴이라도 더 담고 싶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 점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길고 인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한 줄기라도 더 대변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였다. 질곡의 땅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타인의 얼굴”들. 전쟁은, 분쟁은 각양각색 소극 같은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단선적인 비극으로 가린다. 생존 외의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극한으로 치달려도, 그래도 그 뒤에서 소극은 계속된다. 목숨을 걸고 피아노 부품을 구하러 폐허로 뛰어드는 카림을 손쉽게 비난할 수는 있지만, 생존 이외의 모든 것을 거세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삶을 이어가는 한 꿈도 이어진다.
삶이 이어지는 한 꿈을 이어간다. 광기 어린 상황에서 연필 사각이는 소리를 멈추지 않는 이. 내일이 있을 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가게 창틀을 푸른색으로 칠하는 이. 상대의 거친 믿음을 비틀어 무기로 삼는 이. 자기들의 방식으로 희망을 말하는 것. 그것이 각자의 방식대로 이어가는 싸움이다.
아마도 실화가 아닐, 환상에 가까운 결말 또한 그래서 희망으로 읽혔다. 귓병으로 유서까지 썼던 베토벤이 다시 음악으로 마음을 굳히고 시작한, 그의 제2 황금기를 상징하는 <발트슈타인>. 온 세상이 시리아를 잊어가는 것 같지만, 그렇게 다른 무수한 전쟁들처럼 시리아 사람들의 고통도 소리 없이 잊히고 있지만, 보라,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시작하겠다는, 계속해보겠다는 결연한 마음마저 읽힌다. 그건 카림의 싸움이자, 시리아의 싸움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데, 이 이야기에 묻어난 실화는 대체 몇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결국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투사는 죽거나 잡히거나 도망치지만, 투사가 아닌 자들도 그렇다. 죽지도 잡히지도 않고 전쟁의 손아귀에서 도망친 자들만이, 생존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다.
지극히 특정한 분쟁의, 특정한 이야기임에도, 보고 있노라면 이 땅을 지나간,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무수한 전쟁들이 보편적으로 떠오른다. <1917>도, <동주>도 생각난다. 동주와 몽규 같은 이들이,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같은 이들이, 어딘가에서 죽거나 잡히거나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하나하나의 얼굴들이.
<전장의 피아니스트>가 가까이에 비춰 준 “타인의 얼굴”들을 떠올린다. 시리아의 무운과 평화를 빈다. 이제는 이 문장을 그만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쓴다. 백여 년 전 독립만세를 외친 사람들은 더 이상 독립만세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길 얼마나 바랐을 것인가. 지금도 마음 다해 하는 일이 어서 소멸되길 바라며 일하고 움직이고 꿈꾸는 모든 이들의 무운을 함께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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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지 못하는 사이, 살인범이 내 뒤에 와 있다면
<미드나이트>
감독 권오승
주연 진기주, 위하준, 박훈, 길해연, 김혜윤
청각장애를 가진 '경미'는 귀가하던 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소정'을 목격하고, 그녀를 도와주려다 연쇄살인마 '도식'의 새로운 타겟이 된다. 살고 싶다는 의지로 미친듯이 도망치는 '경미' ,하지만 살인마의 발소리조차 들을 수 없고, '도식'은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나 경미를 위협하는데... 한밤중,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연쇄살인마와 그의 타겟이 된 '경미'의 멈출 수 없는 추격전! 극강의 음소거 추격 스릴러가 온다!
1. 감각에 의존하게 되는 스릴러 장르 속에서, 한 감각을 차단했을 때
흔히 '공포영화', '스릴러 영화'를 떠올릴 때면 자연스레 머릿속에 연상되는 그림들이 있다.
공포의 대상이 숨어 있다는 걸 모르고 함정에 빠지는 주인공, 범죄자 혹은 귀신 등에게 쫓기다 숨는 주인공, 공포의 대상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 두려움에 몸을 떠는 모습 같은 것들.
주인공에게 공포감을 주는 대상은 주인공의 눈앞에 있을 때가 아니라, 주인공의 눈앞에 없을 때 관객으로 하여금 공포와 스릴을 배로 느끼게 만든다. 이미 잡힌 뒤에 그가 주인공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지보다, 주인공이 그를, 혹은 그가 주인공을 잡기까지 쫓고 쫓기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긴장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주인공은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대상을 찾아내고자 한다. 가령 상대의 체취, 다가오는 발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누군가 나를 스쳐 지나간 듯한 기분.
그중에서도 가장 분명한 힌트를 줄 수 있는 것은 '소리'다. 발걸음 소리를 듣고 상대를 피하거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으므로. 그러나 <미드나이트>의 주인공은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미드나이트의 주인공이자 타깃이 된 경미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뿐만이 아니다. 경미와 함께 살고 있는 경미의 어머니, 해연 또한 경미와 마찬가지로 장애를 앓고 있다. 경미와 해연은 수화나 문자 메시지, 메모 등 '눈에 보이는' 표현을 통해 소통한다. 목소리를 통해서는 제대로 된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미와 해연은 오해를 부르기는 쉽고, 해명하기는 어려우며, 위기를 감지하기에는 더더욱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다. 이는 경미와 해연에게 큰 약점으로 작용한다.
2. 어떤 서사도 없는 살인범, 그저 '눈에 띄면 죽이는' 범죄자 캐릭터
영화나 드라마 등 작품 속 등장하는 범죄자 캐릭터들에게는 '이유'가 부여되는 경우가 많다. 그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지, 과거 어떤 트라우마나 사건이 있었는지, 어떤 문제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는 범죄자로 등장하는 캐릭터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지만, 동시에 잘못하면 그의 범죄를 정당화하거나 '사연을 만들어주는' 흐름으로 가 버릴 위험이 높다.
그래서 <미드나이트>는 범죄자에게 서사를 일체 부여하지 않는다. 늦은 밤, 홀로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곤 하는 범죄자 도식(위하준)에게는 그가 범죄를 저지르는 어떤 이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홀로 있는 여성을 보면 타깃으로 삼고, 흉기를 들고 나선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뒤 본인이 저지른 것이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인 척' 연기까지 한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과거의 서사는 없고, 그가 조작한 현재 상황에서의 '만들어진' 서사만 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살인범, 도식에게 공감이나 연민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도식의 타깃이 된 경미와 이미 납치된 채 차 안에 있는 소정(김혜윤)의 안위에만 집중하게 된다.
도식의 타깃은 나이 불문, 오로지 '눈에 띈 사람'이다. 성별도 한 성별로 제한되어 있지 않다. 영화 내 첫 타깃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도식이 내는 소리를 듣고 도와주러 왔다가 차 안에 납치되어 있는 남성을 발견하고, 그 순간 도식에게 붙잡혀 그대로 차 안으로 납치된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여성과 남성은 모두 사망해 공원에 남겨져 있었을 뿐이다. 도식이 조작한 '만들어진' 상황의 말판처럼.
이후 도식의 다음 타깃으로 잡히는 건 경미의 어머니, 해연이다. 경미가 차를 주차해두고 오겠다고 해연을 두고 사라진 사이, 도식은 홀로 걸어가고 있는 해연의 뒤를 쫓는다. 해연이 도식의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하고 태평하게 걸어가는 사이, 도식은 해연을 타깃으로 삼고 흉기를 꺼내든다.
그러나 해연을 납치하기 직전,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소정의 목소리에 도식은 고개를 돌린다. 그 순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해연 대신, 이어폰을 끼고 있는, 전화하며 목소리를 낸 소정이 타깃으로 대체된다. 같은 여성이지만 반대편 길로 향하는 두 캐릭터를 사이에 두고, 도식은 발걸음을 돌린다.
<미드나이트>의 두 인물의 운명은 이렇게 엇갈린다. 더 눈에 띄었기 때문에, 소정은 두 번째 타깃이 된다.
3. 운명이 바뀌는 또 다른 순간, 여성 캐릭터 간의 연대
그러나 소정은 그대로 목숨을 잃지 않는다. 소정은 살아남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움직인다. 그리고 이는 해연을 데리러 가던 경미가 멈춰서게 만든다. 소정이 던진 흰 구두가, 걸어가던 경미의 앞에 떨어진 것. 경미는 구두가 던져진 쪽을 바라본다. 어둠 속,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골목길. 이때 도식은 골목길 옆에 주차된 차 안에서 경미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경고하듯 중얼거린다. 그 구두를 건드리면, 너도 죽을 거라고.
하지만 경미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끼면서도 구두를 주워들고, 소정에게로 다가선다.
해연 대신 소정이 타깃이 된 순간 두 여성의 운명이 엇갈렸다면, 이제 소정의 구두를 주워든 순간 경미와 소정은 '도식의 타깃'이라는, 같은 운명의 길로 향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경미까지도 납치하려는 도식을 피해, 경미는 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한다. 아직 골목길 어귀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해연이 도식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해연이 있는 곳을 피해 반대편으로 도망친다. 골목을 지나, 건물로 들어가 지하주차장 구석에 숨기까지. 뒤늦게 경미를 바짝 쫓아온 도식이 주차장으로 들어섰을 때, 경미는 이미 구석으로 숨은 뒤다. 경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도식이 다른 곳으로 향하려던 순간, 구석에서 무언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경미가 비상구 문을 열기 위해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경미는 잠금장치를 여는 사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 때문에 도식이 경미가 있는 곳을 알아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더 빠르게 잠금장치를 돌려댄다. 경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므로,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의 스릴과 공포감은 배가 된다.
그리고 경미가 도식이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비상구의 문이 열린다.
이렇게 도식이 경미를 추격하는 사이, 이미 타깃이 된 채로 차 안에 납치되어 있던 소정은 도식의 시야 밖에 벗어난 채 있다. 다시 말해, 경미가 살아남기 위해 시간을 버는 동안, 소정 또한 살아남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4. '말하지 못한' 진실, '듣지 못한' 이야기, '보지 못한' 얼굴
경미는 악착같이 살아남아 경찰서로 간다. 그러나 경미는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때문에 완전히 다른 차림으로 멀끔하게 나타나 얼굴을 비춘 도식을 동일인으로 알아보지 못한다. 경미는 도식을 자신이 보았던 여성의 오빠로 착각하고, 경찰서에 가서도 자신이 봤던 범인의 옷차림만 진술하는 데 성공할 뿐, 도식이 범인이라고 지목하지는 못한다.
그 사이 진술서를 작성하던 경미와 떨어져 앉아 있던 해연은 경미가 '보지 못한' 얼굴을 본다. 도식이 가지고 있던 핸드폰이 두 개라는 것과, 두 번째 핸드폰의 배경화면이 피해자 여성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해연이 소정의 얼굴을 본 뒤 경찰서에 나타난 소정의 오빠, 종탁은 해연이 본 얼굴과 같은 얼굴을 보여주며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두 얼굴이 일치한다는 걸 알아챈 해연이 나서려는 순간, 도식은 경미에게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해연을 가린 채 해연에게만, 경미가 '보지 못한' 살인범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연이 나서면 경미가 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한다.
해연은 경미를 걱정해 결국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종탁과 도식이 엇갈리게 만들지는 않는다. 갑자기 집 앞에서 실종된 소정을 찾아다니다 경찰서까지 온 종탁은 취객을 내보내기 위해 경찰관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도식과 싸우게 된다. 흉기를 들고 종탁을 공격하는 도식을 피해 나온 해연과 경미는 경찰관들을 경찰서 안으로 무작정 들여보내지만, 그곳에서 경찰관들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채 본 광경은, 칼을 든 종탁 아래 깔려 있는 도식의 모습이다.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경찰들은 그 일촉즉발의 순간, 엇갈린 선택을 한다.
경미와 해연이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바깥에서 기다리는 사이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한 경찰관들은 종탁을 제압한 뒤 도식을 풀어주고 만다.
이렇게, 끝날 것만 같았던 사건은 다시 시작된다.
소정은 여전히 차에 갇혀 있고, 도식은 풀려났다. 경미와 해연은 이미 도식의 눈에 띄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식을 다시 붙잡아야 한다. 소정이 희생되기 전에.
5. <미드나이트>가 보여주는 엇갈린 관계, 그 속에서 찾아오는 긴장감
영화 <미드나이트>는 여러 인물들을 두고 여러 관계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물들의 선택에 따라 서로 엇갈리는 운명을 보여주며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한다. 소정의 등장으로 해연은 타깃이 되지 않았고, 경미의 등장으로 소정은 희생되지 않았다. 종탁의 등장으로 경미와 해연은 경찰서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나, 도식과 경미가 대치하고 있던 순간 경미가 아니라 소정을 찾으러 가는 쪽을 선택한 종탁 때문에 경미는 다시 위기에 처한다.
도식에게서 도망치고 있던 경미의 눈 앞에 차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소정이 발견되고, 경미와 소정은 함께 숨어 도식에게서 살아남기를 기도한다. 경미가 대신 시선을 끌고 멀리 도망쳤기 때문에 소정은 살아남아 신고하는 데에 성공하고, 살아남은 소정이 경미에 대한 소식을 전해준 덕에 경미와 도식이 대치하던 순간, 가까스로 종탁이 경미를 발견해 위기에서 구해준다.
공포나 스릴러 장르의 영화는, 특히 현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긴장감을 이어나가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다. 억지스러운 전개는 몰입감을 잃게 만들기 쉽고, 주인공이 너무 영웅처럼 등장해도 납득이 되지 않아 긴장감을 희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미드나이트>는 사람들과 쉽게 소통할 수 없는 위치에 처해 있는 주인공, 경미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해 악용하는 범죄자, 도식이 어떻게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동안 긴장감을 잃지 않고 여러 상사건들을 배치해 준다. 이 사이에서 모든 상황들이 억지스럽거나 갑작스럽지 않다는 점, 인물들의 선택이 납득이 된다는 점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몰입을 깨지 않고 도식의 최후를 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경미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역이용한다.
말할 수 없고, 듣지 못하는 사이,
살인범은 내가 걷던 골목으로, 내가 사는 집으로, 그리고 내 뒤로 성큼 다가와 칼을 들이민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긴장감 있는 전개, 속도감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오늘 밤 <미드나이트>를 추천한다.
방심하는 사이, 우리는 완벽하게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하룻밤 사이 순식간에 타깃이 되어, 늘 지나다니던 골목을 내달려야 했던 경미의 시간을 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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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다>에게 주어진 질문과 소통의 노래라는 답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아빠 '프랭크(트로이 코쳐)', 엄마 '재키(말리 매트린)', 오빠 '레오(다니엘 듀런트)'와 세상을 이어주는 막내딸 '루비(에밀리아 존스)'. 어느 날 그녀는 남몰래 호감을 품고 있던 '마일스(퍼디아 월시 필로)'를 따라간 합창단 연습에서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노래에 대한 열정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루비의 재능을 알아본 합창단 선생님 '빌라로보스(에우헤니오 데르베스)'는 그녀와 마일스의 듀엣 콘서트를 준비하고, 그녀에게 버클리 음대 오디션에 지원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그녀 없이는 생업에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들은 루비의 선택을 두고 고민에 빠지고, 루비는 가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이나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진심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미국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비롯해 4관왕을 달성하고, Apple TV+와 2,5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어 화제가 된 시안 헤더 감독의 <코다>는 기본적으로 모범적인 음악 영화다. 십 대 소녀가 자신의 꿈을 이해하거나 응원해주지 않는 부모님과 갈등을 빚는 가족 드라마와 아웃사이더인 주인공이 인싸인 학교 친구와 동아리 활동을 통해 점차 가까워지고 장애물이었던 모종의 오해까지 풀면서 사랑을 이루는 하이틴 로맨스의 흐름을 착실히 따라간다. 특히 어선 조업 중 노래와 리듬에 몸을 맡기는 루비의 첫 등장만 봐도 정석적이고 반듯한 영화의 전개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한 소녀가 본업과 관련이 없는 음악이라는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비긴 어게인>과 <싱 스트리트>, <스타 이즈 본>과 같은 영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그러나 <코다>의 진가는 이처럼 모범적인 면모가 영화를 결코 뻔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특히 마냥 평범해 보이는 요소인 노래에 여름날 햇빛을 닮은 감동을 담아내면서 힐링 영화로 발돋움하는 게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인 '코다(CODA, Childern Of Deaf Adults)'라는 루비의 정체성, 그리고 뜬금없이 합창단에 들어가고자 하는 루비에게 친구인 거티가 건네는 "너 노래해?"라는 질문이 있다. 언뜻 듣기에 거티의 질문은 단순히 노래라는 걸 부를 줄 아느냐고 묻는 듯하다. 그러나 루비가 겪은 코다로서의 경험과 만나는 순간 이 질문은 들리는 것 이상의 의미, 곧 소통과 불통의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우선 영화가 묘사하는 루비의 삶과 경험은 '통역'이라는 단어 하나로 축약할 수 있다. 루비 없이 그녀의 가족과 다른 사람들은 소통하지 못하며, 이는 일상의 위기로 이어진다. 당장 배 위에서 루비의 주된 역할은 해경 및 다른 어선들과의 무전 담당이다. 배 아래에서도 그녀는 잡은 물고기의 경매가를 흥정하고, 물고기 판매 방식을 둘러싼 회의에서 가족들의 의견을 대표로 전달한다. 그런 그녀가 조업에 나서지 않자 프랭크와 레오는 무전을 받을 사람이 없어서 해경에게 제지당하며, 그들은 회의장에서 안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남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통역으로 살아온 루비는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말하는 것을 꺼리고, 타인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가족과 사회 양쪽 세상을 이어주면서도 동시에 양쪽 모두에게 배척받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녀는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단순한 메신저에 불과하다. 당장 농인인 가족들과 루비는 삶의 기준이 다르다. 식사 자리에서 틴더 어플을 사용해도 아무 제지를 받지 않는 오빠와 달리 그녀는 식탁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례하다고 혼난다. 또 그녀는 가족들이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만들어내는 온갖 소음에 홀로 괴로워하며, 자신의 말에 그다지 귀 기울이지 않는(못하는) 가족들로부터 자신이 점차 소외되어 간다고 느낀다.
한편 가족 너머의 사회에서도 그녀는 괴짜다. 학교에 처음 간 날 친구들과 달리 농인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등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루비는 놀림을 받는다. 멸시와 조롱 때문에 그녀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자 그로 인해 그녀는 또다시 놀림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그녀는 양쪽 세상 모두와 점진적으로 단절되어 간다. 이는 루비가 마일스와 쌓인 오해와 감정을 푸는 장면이 그녀가 어선 조업 문제를 두고 가족들과 의견 조율을 제대로 하지 못한 대가를 맛보는 모습과 교차되는 이유다. 상반된 분위기의 장면이 엇갈리면서 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한 위기는 가장 극적으로 조성된다.
이때 영화는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이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말할 줄 모르던 한 소녀에게 탈출구를 선물한다. 바로 노래다. 일단 그녀에게 노래는 자신만의 감정과 사연을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일기장이다. 가족들이 음악과 노래를 들을 수 없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남길 수 있었다. 물론 동시에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흉터이기도 하다. 처음 합창단 연습에 간 루비는 노래를 부를 차례가 되자 연습실에서 도망쳐 버린다.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자 자신이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말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던 그녀의 트라우마는 반복된다.
하지만 그 흉터는 이내 치료를 위한 거울이 된다. 노래를 통해 마침내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릴까 봐 노래를 망설이는 루비에게 음악 선생님인 미스터 브이는 노래하는 목소리보다 그 목소리에 담긴 이야기가 소중하다고 이야기한다. 또 루비가 예쁘게 노래하려고 애쓸 때 그는 당장 예쁘지 않더라도 분노, 실망, 좌절처럼 그녀가 애써 숨기고 마음속에 가두려는 감정을 모두 노래에 털어놓아야 비로소 노래에 힘이 생긴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레슨을 받으면서, 또 노래를 부르면서 그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준비를 마친다.
이는 영화가 서두에 던진 "너 노래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루비의 이야기라는 특별한 맥락 안에서 위 질문은 단순히 노래한다는 행위의 유무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노래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그렇기에 루비가 마일스와 쌓인 오해를 풀고자 그를 자신이 혼자 노래하던 호수로 데려라고, 음대에 진학하겠다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질문에 대한 답이 되며, 그녀의 노래는 따뜻한 울림을 선사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코다>는 진정으로 노래하게 된 루비의 변화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노래를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대화와 소통은 말하는 사람과 말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까지 있어야 진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화자의 표현과 그 내용이 진실될 때 소통이 더 용이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에도 주목하여 그녀의 성장과 노력, 그리고 진심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닿는지에도 주목한다.
그래서 루비가 무대 위에 올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순간, 카메라는 루비보다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 특히 그녀의 가족을 주시한다. 노래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딸이 노래한다는 사실도 믿지 못하던 아빠 프랭크는 다른 관객들의 박수세례와 눈물을 통해서 비로소 그녀의 노래가 갖는 힘을 인식한다. 그러고는 집에서 루비가 노래할 때 그녀의 목을 만져서 울림을 확인하고, 입모양을 보면서 가사를 확인하며, 눈물을 보면서 노래에 담긴 진심을 확인한다. 이때 영화는 루비가 무대 위에 있을 때 영화 관객에게도 숨겼던 노랫소리를 그제야 들려주며 루비와 그녀의 가족이 진정으로 서로의 속마음을 이해하는 순간의 임팩트를 극대화한다.
이렇게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법을 배우고, 또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게 하는 루비의 노래는 그녀에게만 필요했던 탈출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비록 모든 사람이 루비와 같은 코다는 아니지만, 다양한 이유로 그녀가 겪는 것과 유사한 불통의 문제를 현실의 삶 속에서 공유하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에 더욱 공감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너 노래해?"라는 질문은 루비의 시점에서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에게 주어진 질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루비가 자신의 이야기로 노래하는 거 봤지? 이제 너는 어떤 노래를 부를 거야?"라고 묻는 것처럼.
A(Acceptable, 무난함)
코다의 노래를 빌려 모든 이들의 불통과 소통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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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치고 힘든 순간이 하이틴 영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성적표를 받은 미국의 고등학생, 거기에 적힌 글자는 ‘C’다. 여타의 학생이라면 우울한 기분으로 게을렀던 과거를 후회하거나 부모님께 혼날 걱정을 할 것이다. 그녀는 다르다. 선생님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부모님께 성적표 공개를 거부한다. 어떻게 자신하냐는 질문엔 매 학기 선생님들을 설득해 점수를 올렸다고 당당히 말한다. 심지어 독신인 토론 선생님이 행복하면 점수가 올라갈 거란 가정하에 다른 선생님과 로맨스를 만든다, 그녀의 계획은 성공하고 훌륭한 성적을 받으며 친구들의 고마움과 인기를 한꺼번에 얻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하이틴 영화 ‘클루리스’에서는 가능하다.
영화 ‘클루리스’는 벌써 개봉한 지 20년이 훌쩍 넘는 이야기로 제인 오스틴의 ‘에마’를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만든 작품이다. 많은 사람이 하이틴 영화의 정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꼭 봐야 할 하이틴 TOP’ 순위에도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마치 하이틴 영화계의 히치콕의 ‘사이코’고 셰익스피어다. 전체적인 내용은 간단하다. 베벌리 힐스에 사는 고등학생 셰어의 학교생활과 우정, 사랑을 다룬다. 부유한 집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자란 아가씨가 변호사 아빠를 닮아 말도 청산유수인데 자신감마저 넘칠 때 벌어지는 상황들이 주요 사건이다.
클루리스 영화의 특징은 셰어라는 인물의 특징과 일맥상통한다. 주인공의 매력이 특히 중요한 하이틴 영화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먼저 옷을 좋아한다. 몸에 달라붙는 슬립 원피스와 노란색 체크 셋업 의상, 가죽 치마와 프레피 룩은 화려한 외모와 잘 어울린다. 영화의 분위기마저 알록달록하고 다채롭게 보인다. 유행은 돌고 돌아서 촌스럽지 않고 2020년에 유행하는 의상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셰어가 집에서 입고 있는 보라색 이너와 세트인 카디건은 요즘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디자인이다. 게다가 영화가 셰어의 독백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최근 유행하는 Vlog를 보는 기분이 든다.
다음 특징은 영화 속 어떤 상황이라도 과즙미를 머금고 상큼하게 만드는 대사들이다. 아빠가 밤늦게 파티에 간 셰어에게 “몇 시인 줄 알아?”라고 묻자 그녀는 태연하게 씩 웃으며 ‘이 옷엔 시계가 안 어울려요.’라고 대답한다. 만화를 보며 의붓오빠인 조시에게 매우 실존주의적이라고 고급스럽게 말하고는 단어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또 다른 파티를 나가려고 할 때 아빠와 나누는 대사는 어이가 없어서라도 웃게 된다.
“그 옷이 뭐니!”
“드레스요.”
“누가 그래?”
“캘빈 클라인이요.”
설득력 없고 종종 이해되지 않는 그녀의 사고 회로는 당연하다는 듯 뻔뻔하고 당당하게 말하자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 사랑스럽고 멋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또래 남자애들은 자신보다 옷도 못 입고 멍청하다고 무시한다.
이렇게 세상을 다 알 것처럼 친구들에게 훈계하고 세상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거라 행동하던 그녀도 사회의 벽에 부딪힌다. 맞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연결해주다가 상처 받고, 사람에 대한 그릇된 편견으로 위기에 처한다. 기어코 운전면허 시험까지 떨어졌을 땐, 자신이 몹시 작고 바보가 된 기분을 느낀다. 그녀가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말하듯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10대다.
진정으로 셰어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이 순간이다. 좌절한 순간들마저 그녀 답게 해결한다. 철없던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다툰 친구에게 미안하다며 진심으로 사과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물품 기부 행사를 열며 앞장선다. 그러면서 엉뚱함을 잃지 않는다. 자신의 철없음을 깨닫는 순간조차 쇼윈도를 보며 내면을 고민하는 게 아니라 ‘저 옷이 제 사이즈가 있을까요?’라며 독백한다. 옛날 영화답게 연출도 귀여워서 셰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할 땐 그녀 뒤에서 분수가 튀어 오른다. 그녀와 영화는 뭘 해도 사랑스럽기만 하다.
하이틴 영화를 보는 이유는 쉽기 때문이 아닐까?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고 웃을 수 있다. 풋풋한 주인공의 로맨스에 대리 설렘 느낄 수 있다. 거기에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과거에 개봉한 하이틴 영화는 열이면 열 개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사랑을 이루고 우정을 얻고 성장한 주인공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마지막 장면이다. 우리의 일상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치고 무기력하게 버티는 시간들이 결국엔 하이틴 영화처럼 더는 닫을 수 없을 만큼 꽉 닫힌 행복으로 끝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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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번 자라나는 풀잎들처럼
더운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워졌다. 앞의 남자는 요즘 유행하는 나이키 덩크와 아이앱 후드를 입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누구는 서울 덩크를 신었다. 나도 집에 저런 거 있는데
.항상 어디서 일을 하면 무언가를 사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술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하는 나는 돈 쓰는 것에서 재미를 찾아야 했다.근데 요즘은 또 다르다. 익숙한 것들에서 아무 재미도 찾지 못하겠다. 뭘 원해서 이렇게 살았던 걸까? 열심히 외웠던 단어도, 대비하고 싶던 파트 5도 영 시원찮으니 하루 사는 낙이 뚝뚝 떨어졌다. 영화도 재미가 없다. 돈이 있어도 하루에 쓸 수 있는 범위가 좁고 뭐 좋은 것 사도 입을 일이 없으니 아무 쓸모가 없는 셈이다. 모든 게 식상해진 나는 늘 항상 하던걸 한다. 위로가 되는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나 <소울>을 볼까 생각한다. 아. 이거만 있으면 안 되지. <꿈의 제인>도 있다. 막상 재생하려니 손이 안 간다. 리뷰를 한번 더 써볼까? 할 말은 많은데 다루고 싶은 작품이 없다. <중경삼림>과 <노매드랜드>가 같은 궤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써내려 보고 싶었는데 막상 하려니 다른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운동도, 공부도, 그 무엇도 나를 채워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천천히 걸었다. 찬바람이 드는 가을 왠지 모르게 시든 풀잎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건 다 정해져 있다. 영원한 관계는 애초에 불가능한 개소리고, 많이 사랑한 사람은 무조건 지게 되어있으며 영화는 러닝타임이 있어 언젠가 끝나게 되어있다. 모든 생의 과정이 계단을 오르락 내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이 들 때 나는 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풀잎들>은 식물 같은 영화다. 영화는 '끝'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나간다. 영화는 이 감독의 초기작들처럼 인물의 위선이나 욕망을 조명하지 않는다. 홍상수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끝이 난 후의 정서다. 이후의 허무함과 우울함을 바탕으로 각본을 썼는데, 이는 끝이 난 다음의 사람들과 흑백영화라는 연출 의도가 버무려져 시너지를 낸다. 홍상수는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영화화하는데 능한 예술가라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깨달은 인물인 것 같다.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거대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물론 매력 있지만 홍상수는 이와는 반대로 셔츠에 와이드 슬랙스만 입고도 조곤조곤한 톤으로 깊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풀잎들> 이런 특장점이 더 부각되는 영화다. 이 영화는 흑백영화다. 장면 변환도 잘 없고 롱테이크가 주요하다. 간단하다는 뜻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식물들도 이 특성들이 적용된다. 식물을 오랫동안 째려보면 일단 눈이 아플 것이다. 당연하다. 풀들은 조용히 부대끼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풀잎들처럼 잔잔하다. 조용히 러닝타임 1시간이 지나간다.
근데 이 영화는 절대 조용한 사운드만 품고 있지는 않다. 첫 번째. 두 남녀는 죽은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클래식 소리만큼이나 선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난 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란 말이 들린다. 둘 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큰 소리가 오간다. 마음이 아파 카페 밖을 나가는 남자. 밖에서 담배 한 개비를 핀다. 아름은 그걸 바라보고 있다. 지켜보는 아름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겠지? 아름은 혼잣말을 한다. 사연이 있겠지. 누군 없을까? 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마치 우리에게 반문하듯 내레이션을 읆는다. 다음 사연이 비친다. 중년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는 세상을 뜨려고 했었나 보다. 원인은 누군가와의 사랑이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갔는데도 남자는 아직 정신 못 차렸다. 이 악물고 대화 파트너의 집에서 살고 싶어 하던 남자. 같이 대화하던 중년 여자는 당연히 거부한다. 동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정리를 해야 할 때'에 관해 논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어차피 끝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인 셈이다. 아름은 이 중년 남자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하다. 갈 데도 없고 돈도 없고 일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 남자를 보며 '산다는 건 이런 것이다'라고 체념한다. 카메라는 다음 두 사람으로 넘어간다. 다른 중년 남자와 20대 후반쯤 되는 여자가 카페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고 있다. 남자는 배우 일을 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남자의 제자쯤 되는 것 같다. 여자는 웃으며 남자에게 '저 연애해요'라고 답하고 남자는 환하게 '그래, 사랑이 최고야. 나머지는 다 사랑이 안 돼서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방금 남자는 아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대시한다. 둘이 같이 동거하자는 제의다. 남자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나 보다. 아름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동생이 있는 쪽으로 이동한다. 아름은 가는 동안 제일 처음 지켜봤던 커플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휙 지나간다.
동생 커플을 만난 아름. 아름이는 동생과 이야기하다 갑자기 화를 낸다. 사랑은 개뿔. 누군지도 모르면서 연애를 하니? 갑자기 동생 커플에게 비난을 쏟아낸다. 그 옆자리에선 젊은 여자와 중년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중년 남자의 친구는 교수고, 이 여자와 불륜관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교수의 친구는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 교수의 친구가 여자에게 '당신은 그 사람을 갖고 놀았어.'라고 말한다. 여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지 시선 피하며 여자를 추궁한다.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바로 다음 장면. 카페 밖에서 중년 남자와 만났던 여자가 느닷없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마치 올라가서 봤던 것들을 부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듯, 여자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온다. 무의미한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여자. BGM으로는 클래식이 나온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이 끝나고 나서 아름은 동생을 호명한다. 뒷골목에서 동생에게 화를 내는 아름. '넌 누군지 알고 걔를 만나는 거니?'라고 말한다. 동생은 누나에 대해 '좀 힘든 구석이 있어'라고 말한다. 아름은 어느 가게에 들어와서 앞의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맥북에 글을 쓴다. '사람들이 만나는구나. 서로 감정이 부딪히고. 서로 힘을 내고. 서로 같이 서서 있게 되는구나. 숨겨서 먹는 소주가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일까.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그럴 일이 있을까. 왜 저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까. 저게 정말이면 정말 좋겠다. 결국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귀하고 싸구려고 너무 그립다.'라고 답한다. 다시 첫 번째 남녀로 돌아간다. 한바탕 불타오르고 난 후 둘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둘은 소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같이 한 잔 들이켜게 되고, 분위기가 무르익는 클래식과 함께 사랑을 약속한다. 그리고 아름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죽은 사람을 팔아서 지금을 행복하려 하는 거니.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지금은 너무 귀한 거니까. 너희들이 부럽다. 다 죽을 거면서. 죽은 친구가 옆에 있어서 내가 죽는 건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단정하구나. 예쁘고 단정하게 잘 놀자.' 아름의 독백이 끝나고 카메라는 동생 커플이 한복을 입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낸다.
줄거리에 대해 쭉 썼다. 사실 이것은 그냥 내가 노트북을 가져가서 카페를 관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상은 이렇게나 심심하고 별 것 아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영화를 좋아하는 모두들은 이미 우리 삶에서 반전 같은 건 드물다는 걸 알고 있다. 전적으로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원래 필연적인 결말이 있어서 인생은 허무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감정을 쓴다. 맛있는 건 언젠가 다 먹게 되어있고 돈도 다 쓰게 되어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난다. 빛나던 커리어도 언젠가 끝이 있다. 그걸 애써 부정하면 나 자신만 추해지는 것이다. 근데 나는 항상 더 욕심을 냈다. 결과는 참혹하다. 번번이 좌절한다. 이렇게 나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타인은 어쩌겠는가. 내 아빠가 대통령이건 법무장관이건 검찰총장이건 원래 자식들은 아버지를 오롯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도 사실 우리 아빠의 전부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안다는 게 원래 그런 거고, 우린 절대로 타인의 입장에 서 있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지나가다 본 풀잎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다. 엄연히 남이기 때문이다. 갈라지는 것은 다 이런 이치가 아닐까. 우습게도 우리는 이런 삶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영화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듯 초반부터 죽음에 대해 제시한다. 근데 이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다방면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남녀는 '죽은 후에도 함께 사랑을 약속하는 이들'이라는 키워드로 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남녀는 '죽었어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남녀는 '죽음이 드리우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남녀는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고 쓸 수 있지 않을까. 세 번째 남녀를 제외하곤 이 들의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첫 번째 남녀는 이내 커플이 되어 서로의 굳건한 사랑을 재확인한다. 네 번째는 후의 미래를 보여주진 않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함께 동석을 하며 술을 마신다. 그러니까 후회와 미련으로 보냈던 사람들의 후는 보여주지 않은데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동석을 시켜 엔딩부에 풀잎들과 함께 노출시킨 것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홍상수가 허무함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쪽이다. 간단하다. 미래를 바라보지 않은 쪽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미래가 없고, 큰 사건이 있는 후에도 본인의 모습과 변함없이 사는 사람들은 그 후가 있는 것이다. 이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대칭을 이루는 것과도 닿아 있다. ‘주변인의 죽음을 경험한 남녀’에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 누나인 커플’로 전환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름이 ‘잘 알아보고 연애를 해야지’라는 훈수를 뒀다. 완벽한 대칭이다. ‘주변인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상대를 잘 모르면서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동격으로 놓인 것이다. 애초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정확히 안다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닐까라는, 그런 홍상수의 세계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감독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었으니까. 그리고 이 첫 번째 연출 의도와 두 번째 연출 의도는 병렬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두 남녀 중 세 번째, 김새벽과 정진영 배우가 나온 부분들을 보자. 둘은 현재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글은 원래 혼자 쓰는 거예요. 사랑이 최고야. 뭐 이런 주제로 말을 이어간다. 이 현재를 주제로 대화하는 사람들 중 여자가 극의 중반부 즈음에 느닷없이 계단을 왔다 갔다 한다. BGM은 바그너가 만든 ‘탄호이저’와 관련된 음악이 나오는데, 나는 이 탄호이저와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행위도 연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일단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건 사실 되게 해석하기 쉽다.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가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이런 필멸의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거겠지? 또 바그너가 쓴 탄호이저 극본은 ‘희생에 의한 구원’이 주요 모티브라고 한다. 한 여성이 타락한 남자를 위해 희생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다. 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것도 이 <풀잎들>을 관통하는 키워드 아닌가? 현재의 문제는 끊임없이 반복되고(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를 피할 수 없기에 현재에 있는 관계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뭐 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첫 번째 ‘원인에 대해 모르면서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이 죽음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가 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 홍상수는 반복이라는 모티브를 본인의 필모그래피에서 흥미롭게 끌고 가는 감독이었는데, 이런 부분 역시 풀잎이라는 식물의 속성과 계단이라는 도구의 특징을 활용해서 삶에 은유했다. 참으로 홍상수스러운 연출법과 감정 활용이다.
후반기의 홍상수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심심할 정도로 잔잔하지만 지켜보는 우리에게 또 다른 메세지를 전한다. 당신은 풀잎이 될 것인가, 지는 꽃이 될 것인가. 우리는 사실 이 답을 알고 있다. 모두 다 언젠가 다시 사라질 운명인데 항상 무언가를 꿈꾸고 있다. 아니, 홍상수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꿈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게 미련 가득한 과거였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났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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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도를 희생해 시리즈의 초석을 두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개발하려던 RDA의 공격을 물리친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와 '네이티리(조 샐다나)'. 그들은 '네테이얌(제이미 플래터스)', '로아크(브리튼 달튼)', '투크티리(트리니티 블리스)'를 낳고 '그레이스 박사(시고니 위버)'의 딸 '키리(시고니 위버)'와 인간 아이 '스파이더(잭 챔피언)'를 입양해 행복한 가족을 꾸려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이크는 밤하늘에 낯선 불빛을 발견하고 RDA와 인간들이 판도라에 귀환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가진 무기와 자원을 총동원해 인간들을 공격하나, 도리어 아바타로 되살아난 '쿼리치 (스티븐 랭)' 대령의 기습에 가족을 잃을 뻔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위기를 피하고자 '로날(케이트 윈슬레)'과 '토노와리(클리프 커티스)'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을 데리고 바닷가에 사는 멧카이나 부족 사이로 피신한다. 그러나 포기를 모른 채 복수심에 불타는 쿼리치의 추격은 제이크의 가족에 새로운 시련을 선사한다.
<아바타: 물의 길>은 올해 개봉한 작품 중 가장 많은 기대를 받은 작품이었다. 이유는 많았다. 역대 월드와이드 흥행 1위 영화이자 3D 혁명을 일으킨 <아바타>의 속편이라는 점, 개봉일이 숱하게 연기되어 13년 만에 공개된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라는 점, 제임스 카메론 감독 본인이 가장 비경제적인 영화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자된 작품이라는 점 빼놓을 수 없다. 전편의 주역인 샘 워딩턴과 조 샐다나는 물론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고니 위버와 스티븐 랭이 복귀했고, 케이트 윈슬렛 등이 새로이 합류한 배우들의 면면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아바타: 물의 길>은 감독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에이리언 2>와 <터미네이터 2>로 속편의 대가임을 증명한 바 있는 제임스 카메론도 이번에는 자기 장기를 온전히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13년간의 준비 기간 때문이다. 카메론 감독은 5편까지 이어질 시리즈를 모두 계획하기 위해 13년이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각본을 모두 완성하고, 모든 캐릭터와 생물을 미리 만들며, 제작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을 사전에 구축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이번 속편이 큰 그림의 일부라는 의미이며, 바로 이 대목이 양날의 검이다. 앞으로의 로드맵이 확실하다 보니 <아바타: 물의 길>이 암시하는 향후 시리즈의 내용이나 전편으로부터 더욱 발전한 주제 의식과 메시지는 화려한 영상미 못지않게 흥미롭다. 반면에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시리즈의 초석을 놓는 데 열중한 나머지 무엇 하나 온전히 완결 짓지 못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캐릭터 '로아크' & '키리'가 암시하는 시리즈의 길
우선 <아바타: 물의 길>은 새로운 캐릭터들을 차례대로 소개하면서 앞으로 <아바타> 시리즈가 나아갈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주력한다. 이는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로맨스가 가족 드라마로 확장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인물을 자연스럽게 극의 흐름에 끼워 넣고 동시에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 제격이므로. 실제로 영화의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양육 방향을 둔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돌, 형제자매 간의 다툼 등으로 가득하다. 특히 둘째 아들 로아크과 양녀 키리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이들의 서사에 담긴 비유와 클리셰는 시리즈의 지향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일단 로아크는 신약 성경 속 '돌아온 탕자'의 판도라 버전으로 보인다. 로아크는 나비족의 영웅이자 위대한 전사인 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들끓지만, 동시에 아바타의 특징이 강한 외모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아버지처럼 강한 전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완벽한 아들이자 형인 네테이얌처럼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공존한다. 그 때문에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 몫만큼의 유산을 받아 집을 나선 '탕자'가 된다. 그는 만용을 부리다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해 가족과 동료들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좀처럼 가족들과 융화되지 못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자신만의 여정을 겪는다.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한 단계 성숙해진다. 자신처럼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툴쿤 파야칸을 만나 안정을 찾고, 형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아버지를 위험으로부터 구해내면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다'. 결국 <아바타: 물의 길>은 로아크가 물속은 물론 인생의 길까지 찾는 이야기인 셈이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신비한 캐릭터 키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아바타에서 태어난 아기이자, 그 누구도 아버지의 정체를 모르는 존재인 그녀는 등장부터 범상치 않다. 유달리 에이와와 강하게 교감할 뿐만 아니라, 따로 훈련하지 않고도 물속에서 능숙하게 잠수할 줄 안다. 또 온갖 동식물과 소통하고 그들을 뜻대로 조종하기도 한다. 이러한 묘사는 그녀가 마치 판도라 버전의 예수와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인간과 나비족의 대립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구세주 메시아로 거듭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 본래 '아바타(avatar)'라는 단어가 지상에 내려온 신의 분신을 의미하는 만큼, 키리가 에이와의 아바타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로아크와 키리의 서사가 중심이 될 <아바타> 시리즈는 제임스 카메론이 써 내려가는 신약 성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시점 알려진 시리즈의 4편과 5편의 부제가 각각 <툴쿤의 기수(The Tulkun Rider)>와 <에이와를 찾아서(The Quest for Eywa)>이기에 더욱 그렇다.
전편으로부터 진일보한 생태학적 메시지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개발에 반대하며 자연을 보호하자는 메시지도 더욱 깊어졌다. <아바타>는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판도라의 모든 생명체는 에이와의 자식으로서 동등한 존재다. 따라서 그들을 소유하고 이용하는 대신 그들과 소통하며 허락을 구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는 제이크가 이크란을 탈 때 그들과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했던 이유였고, 또 사냥할 때마다 "당신을 봅니다(I see you)"라고 말하며 명복을 빌었던 이유였다. 판도라의 모든 나무가 마치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처럼 의사소통할 줄 안다는 언급도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설정이었다. 다만 이러한 묘사에도 한계는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설정과 설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판도라의 신기한 생태계와 삶의 방식을 관찰할 뿐, 다른 생명과 존재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었다.
<아바타: 물의 길>은 한발 더 나아간다. 지구의 고래를 닮은 생명체, 툴쿤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작중 툴쿤은 멧카이나 부족의 형제자매, 외관만 다른 부족의 일원으로 여겨진다. 멧카이나 부족과 툴쿤들이 재회하는 장면은 오랜 기간 보지 못했던 가족이나 친척들이 추석이나 설날에 만나 수다 꽃을 피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 단지 멧카이나 부족이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툴쿤들도 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영화는 로아크와 파야칸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툴쿤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파야칸의 시점에서 로아크가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하고, 도움을 주고, 친분을 맺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 결과 동등한 두 주체가 진정으로 우정을 쌓아나가는 과정에는 설득력이 더해진다. 또 인간과 멧카이나 부족이 결국 전투를 벌이는 결정적인 계기도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체험할 수 있는 주제 의식
즉, 전편이 인간도 자연계의 구성원 중 하나로서 선순환하는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속편은 인간 이외의 주체를 강조하여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정동(affect)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자연과 물질도 인간처럼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이며, 인간처럼 의지와 목적을 가진 채 행동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들도 툴쿤 사냥선을 급습하는 파야칸처럼 인간 행위의 방향성을 바꿀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능동적인 반응에 따라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특히 영화 초반부에 RDA의 목적이 망가진 지구를 대신해 판도라를 개척하고 이주를 도모하는 것으로 드러난 만큼, 이는 기후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연과의 공존을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층 깊어진 주제 의식은 <아바타: 물의 길>이 선보이는 화려한 영상미가 빛을 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작품의 CG 효과는 전편 수준의 충격적인 영상미를 재현하지 못한다. 3D 효과도 익숙해졌고, 판도라 행성의 경관도 한 차례 맛을 봤기에 13년 전만큼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판도라를 체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마치 지구의 바다를 촬영하듯이 다른 세상에 있을법한 바다의 상세한 모습을 그래픽과 상상력으로 표현한 결과, 주인공들과 함께 판도라의 바다를 진짜로 경험하고 경이로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해양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본의 고래잡이를 비판하는 듯 보이는 툴쿤 사냥 시퀀스도 마냥 교조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관객들은 해당 장면에 심정적으로 몰입하고, 영화의 메시지도 자연히 받아들일 수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아닌 시리즈의 부속품에 가까워진 결과물
그러나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아바타: 물의 길>은 전편에 비하기 어려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전반적인 스토리의 구성과 흐름, 캐릭터의 구축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전편과 달리 몰입도가 떨어진다. 1편은 인간과 아바타(나비족) 중 한 정체성을 골라야 하는 제이크의 고뇌를 그려냈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내적 갈등은 누구나 자신의 성장 경험과 사회적 위치를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반면에 이번 작품은 내적 갈등을 사회적인 이야기로 다양하게 확장한다. 일례로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아이들은 혼혈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심적으로도 괴로워하고 멧카니아 부족의 아이들과도 충돌한다. 이는 현실 속 인종 차별이나 다문화 청소년들이 겪는 집단 따돌림 등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이는 수용자의 경험과 태도에 따라 공감의 수준이 달라질 수 있는 화제이고, 결국 그 때문에 직관적인 몰입도도 덜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수많은 캐릭터의 활용법도 최선은 아닌 듯 보인다. 다음 세 편을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보니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간신히 시작될 뿐 진행되는 내용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제이크의 서사만 해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작업에 머무르고 있다. 줄곧 인간을 피해 도망치던 그가 인간과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만으로 3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스파이더의 활용도 애매하다. 인간과 나비 양쪽을 오가면서 비극적인 개인사와 가족사를 지닌 인물인 만큼 그는 분명히 향후 시리즈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정작 이 중요한 캐릭터가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주지 않는다. 그는 나비족의 습관과 정서를 이해하고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에서, 말 몇 마디에 쿼리치의 제이크 추적을 돕는 등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캐릭터로 변해 버린다. 이렇게 일관성 없이 플롯의 필요에 따라 캐릭터성이 달라지다 보니 그는 자연히 극의 흐름에 녹아들지 못한다.
갈등의 규모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얼핏 보기에는 전편보다 더욱 커진 전쟁을 그려내는 듯하다. RDA가 아예 실거주 목적으로 판도라 행성에 귀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다음 편을 위한 복선에 불과하다. 정작 종족의 생존을 두고 벌어지는 인간과 나비족의 결전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제이크, 네이티리, 그리고 쿼리치 대령 간의 오래된 악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쿼리치 대령은 개인적인 복수심을 이유로 제이크와 네이티리를 추격하며, 그저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제이크와 네이티리 역시 아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쿼리치의 도발에 응수하기로 한다. 그 결과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전편에 비해 다소 맥 빠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액션의 스케일이나 전투 시퀀스의 규모도 줄어들었고, 싸움에 임하는 비장함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바타: 물의 길>을 보다 보면 생각나는 두 작품이 있다. 바로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와 <호빗: 뜻밖의 여정>다. <아바타>를 일종의 프롤로그였다고 친다면, <아바타: 물의 길>의 목표는 <반지 원정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시리즈의 세계관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거대한 전쟁에 앞서 선악을 대표하는 인물들 간의 추격전을 그려낸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면 각각의 인물이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고 편을 정한 후 본격적인 전쟁에 나서기로 하는 흐름도 유사하다.
그러나 목표와 달리 <아바타: 물의 길>은 정작 <호빗> 1편을 보는 듯한 인상을 남기고 만다. 시리즈의 진행에 필요한 복선을 깔아 두는 데 지나치게 열중할 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는 않으며, 많은 캐릭터가 새롭게 등장했지만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인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유사한 문제점을 공유하는 까닭이다. 내용의 부실함을 전편에 비해 화려해진 시각 효과로 벌충하는 것 역시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아바타: 물의 길>은 장단점이 명확히 갈리는 가운데 향후 시리즈의 향방에 따라 재평가의 여지를 남겨두는 작품인 셈이다. 대서사시를 위한 완벽한 가교이거나, 시리즈의 진행을 위해 소비되어 버린 평범한 속편이거나. 2년 내지는 3년 안에 나올 것이라 공언한 <아바타 3>의 모습이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재평가는 속편들의 몫으로 남겨둔, 흠잡을 데 없는 시리즈의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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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티 토르와 다시 돌아온 토르! 마블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Rabbitgumi 입니다!
토르의 새로운 단독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이번에 4번째 토르 단독 영화인데요.
1편과 2편에서 아쉬움이 가득한 평가를 받았던 시리즈지만,
3편에서 타이카 와이키키 감독이 연출하면서 재치 넘치는 영화로 재탄생했죠.
4편도 같은 감독이 연출해서 그 분위기는 유지됩니다.
그럼 과연 이게 효과적으로 마블에 안착했을까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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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켄지 포이' 인터스텔라 소녀, 이제는 할리우드 성인 배우
? 인터스텔라 소녀 '맥켄지 포이' 배우 소개 영상
머피 가 이제 할리우드 주연급 배우로 성장을 했다니!!
*결말포함 영화리뷰 아닙니다#맥켄지포이 #멕켄지포이 #인터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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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에트로> 예고편
enna 지방의 칼라시베타라는 마을에서 목동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돕던 어린 피에트로. 성인이 된 피에트로는 고향을 떠나 북부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다. 전문 사진작가가 되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장소, 상점, 사람들을 기억하며 시칠리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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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수퍼 소닉2> 메인 예고편
때가 왔다! 초특급 히어로 소닉과 친구들? 소닉&테일즈 VS 너클즈&로보트닉의 대결로 2배 업그레이드 된 어드벤처 4월 6일 극장에서 만나소-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