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7-30 15:27:27
[7월 마지막 주 영화 한줄평] <갈매기>, <우리, 둘>
씨네랩 크리에이터가 말하는 한줄 리뷰
7월의 마지막 주를 맞아 씨네랩 크리에이터가 말하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갈매기>와 <우리, 둘>의 한줄 리뷰, 함께 만나볼까요?
1. <갈매기>
* 조금 더 자세한 리뷰를 보고 싶다면?
RABBITGUMI님 리뷰 - http://www.cinelab.co.kr/youtube.html?y_id=323
우두미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22
고태호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14
영직남님 리뷰 - http://www.cinelab.co.kr/youtube.html?y_id=321
드플레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30
공상가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39
코댕이님 리뷰 - http://www.cinelab.co.kr/sns.html?in_id=509
* 낯설지만 신선한, 다큐멘터리 같은 날 것의 힘이 느껴지는 웰메이드 독립영화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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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둘>
* 조금 더 자세한 리뷰를 보고 싶다면?
rewr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46
popofilm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49
드플레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48
이정원님 리뷰 - https://cinelab.co.kr/insight_sub_details.html?i_id=1042
* 그 어떤 로맨스보다 몽환적인, 독창적이면서도 독특한 활력을 지닌 레즈비언 로맨스 <우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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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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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2020)
* 이 리뷰는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정보
개봉: 2020.12.18
감독: 조지 C.울프
출연: 비올라 데이비스, 채드윅 보스만, 글린 터먼, 콜랜 도밍고, 마이클 포츠, 테일러 페이지 등
원작: 어거스트 윌슨의 희곡 <Ma Rainey's Black Bottom>
블루스의 어머니, 그리고 흑인문화
1927년, 미국 남부에서 '블루스의 어머니'로 통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마 레이니(비올라 데이비스)'는 음반 녹음을 위해 시카고의 녹음실을 찾는다. 그녀는 굉장히 거만하고, 괴팍하며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1세대 블루스 음악의 대가로서 상업적인 인기를 크게 누리고 있기에 백인 음반 제작자들마저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녀의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레비(채드윅 보스만)'는 자신의 음악에 엄청난 포부와 자신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마 레이니'는 물론, 밴드의 일원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작곡도 할 줄 알고, 트렌디한 편곡까지 가능한 능력캐임은 분명하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마 레이니', 그리고 '레비'를 비롯한 밴드의 일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음반 녹음을 하는 과정이 그려질 뿐 뚜렷한 사건 전개와 줄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한된 장소에서 짤막한 스토리가 이어질 뿐이지만, 인물들이 내뱉는 수많은 대사와 감정 표현들을 통해 당시 흑인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줄거리보단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다.
연극식 전개, 대화에 중점
앞서 언급했듯이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극을 관통하는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의 원작이 극작가 '어거스트 윌슨'이 쓴 동명의 연극이고, 영화 역시 원작의 연극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다. 마치 연극처럼 등장하는 공간도 녹음실과 연습실 단 두 곳 뿐이고, 인물들이 겪어온 과거의 삶이나 사건사고들이 단 하나의 회상 장면도 없이 오직 대사로만 풀어진다. 따라서 극의 재미가 상당히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사건의 공백을 인물들의 입체적인 연기만으로 충분히 채워나간다. 특히 관록의 연기력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비올라 데이비스'와 대사만으로 '레비'라는 인물의 아픈 역사를 가늠시켜주는 '채드윅 보스만'의 연기는 가히 탁월하다. 대사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연극을 관람하는 기분으로, 조금씩 극에 빠져들게 된다.
음악영화라고만 생각하면 오산
이 작품은 음악영화라고 생각하고 접근하기 쉽지만, 극을 감상해보면 음악은 그저 재료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극에 등장하는 블루스 음악은 음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노예해방이 이뤄졌음에도 백인들의 착취로부터 완연히 벗어나지 못한 미국의 흑인문화를 상징한다. 흑인문화에서 비롯된 블루스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백인 음반제작자들이 '마 레이니'를 비롯한 밴드의 재능을 착취하고, 차별을 일삼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인종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 레이니'의 태도다. 그녀는 오만방자하고 고집불통인 모습으로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며 눈쌀을 찌푸려지게 만들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다 이유가 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인 아티스트들과 차별받아왔던 오랜 세월, 자신을 아티스트가 아닌 노동력 착취의 대상 정도로만 바라보는 업계 백인 종사자들의 거슬리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해왔던 그녀이기에 그녀의 확고한 신념과 거친 언행은 백인이라는 타자에 대한 증오와 자신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대변한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분노를 터뜨린 직후 그녀의 표정에서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자신이 돈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었을 테니까.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게 되면, 왠지 모르게 씁쓸해지고 덩달아 함께 분노하게 된다.
채드윅 보스만, 신들린 연기
"마 레이니"를 연기한 '비올라 데이비스'의 연기력도 훌륭하지만, 극의 에너지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은 '채드윅 보스만'이다.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벗어나지 않는 제한적인 공간 속에서 그는 가장 많은 대사를 소화하며 극을 진행하는데, 말과 표정만으로 서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그 어떠한 회상 장면 없이도 어린 시절 자신과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과 백인으로부터 받았던 수모의 역사를 설명하는 장면은 그의 연기만으로 당시 상황에서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는 제한적인 공간 내에서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팔색조 같은 매력적인 연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음악에 들뜬 재능 있는 청년부터 '듀시 메이(테일러 페이지)'에게 플러팅을 거는 매력적인 남성, 가족의 아픔에 분노하는 아들, 백인으로부터 받은 핍박에 열변을 토하는 저항자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캐릭터의 유형이 허름한 연습실 단 한 공간에서 모두 나타나는데, 단순히 그의 연기력 하나만으로 모든 캐릭터를 소화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채드윅 보스만'의 명연기에 상당 부분 기댄 채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괜히 어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이 그의 손에 쥐어진 게 아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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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진짜 피스메이커를 찾아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코르테 말테제'에 반미 세력 쿠데타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 정부는 그들이 감옥에 감금된 정체불명의 외계인, '프로젝트 스타피쉬'를 악용할 것을 걱정한다. 이에 '아만다 월러(비올라 데이비스)'는 벨 레브 교도소에 투옥되었던 슈퍼 빌런들을 코르테 말테제에 침투시켜 스타피쉬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 결과 '릭 플래그(조엘 킨나만)'와 '할리 퀸(마고 로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1팀이 작전 개시와 동시에 끔찍한 실패를 겪는 사이, '블러드스포트(이드리스 엘바)', '피스메이커(존 시나)', '킹 샤크(실베스터 스탤론)', '랫캐쳐2(다니엘라 멜시오르)', '폴카도트맨(데이빗 다스트말치안)'로 구성된 진짜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안전하게 섬에 침투한다. 그러나 작전이 진행될수록 팀플레이가 체질이 아닌 악당들은 갈등을 빚기 시작하고, 그들 앞에는 프로젝트 스타피쉬 일명 '스타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1970~80년대 <슈퍼맨>과 <배트맨>의 성공과 이후 침체기였던 슈퍼히어로 영화는 2000년대 이후 변화한 시대상, 특히 미국의 패권주의가 불러온 부작용을 빠르게 작품 속에 녹여내면서 다시 영화계의 주류로 돌아올 수 있었다. 9.11 테러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실패로 인해 민주주의, 평화 유지, 도덕성이라는 명분과 정체성이 흔들린 미국의 어두운 현대사를 작품에 투영한 것이다. <다크 나이트> 속 배트맨의 활약이 더욱 강력한 악당인 조커를 끌어들이는 역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전개는 중동에서 악(테러리스트)을 없애기 위해 파견된 미군으로 인해 또 다른 악(알카에다, ISIS 등)을 불러일으킨 현실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현재 가장 큰 슈퍼히어로 시리즈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역시 기저에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를 지닌다.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는 납치된 채로 슈트를 만들어 테러 집단으로부터 탈출한 후에, 자기를 납치했던 아프가니스탄 테러 집단을 보복한다. 미군의 이라크 침공이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9.11 습격에 대한 보복이라는 현실을 재현한 셈이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에서 하이드라에게 잠식된 쉴드는 국가적 위협을 먼저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했던 미국의 현실(애국자법 등)을 암시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이름을 알린 제임스 건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흥행과 별개로 악평에 시달렸던 전편과 선을 그은 후 리런치(Relaunch)한 DC의 새로운 슈퍼 히어로(빌런)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미국의 패권주의적 악습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다만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는 앞서 살펴본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9.11 테러는 물론 그 이전부터 수십 년 간 자행된 미국의 대외적 악습을 한 데 모아 비판한다는 점이 첫 번째 포인트고, 그 악습을 철저히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적이며 과장된 조롱으로 상기시킨다는 점이 두 번째다.
당장 시작부터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미국 현대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코르테 말테제에 잠입하는 임무를 맡은 1팀은 거대한 성조기 앞에 모인 채 멋진 워킹을 보여준다. 그러나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지닌 쿠데타 군 앞에서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믿기 힘든 실패를 경험한다. 이러한 오프닝 시퀀스는 엄연한 주권국가에 몰래 병력을 투입하고, 미국의 의도대로 쿠데타 정권을 조종하려 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했던 '피그만 침공'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4월 17일,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 정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쿠바 해변에 상륙한 미국의 2506 여단은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남은 병력은 모두 포로로 잡히고 만다. 이 작전은 쿠바 미사일 사태를 촉발시킨 계기였고,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주권침해행위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피그만 침공의 그림자가 가득한 오프닝 시퀀스는 거대 외계 생물 스타로의 존재와 연관된 다양한 플롯을 미국의 어두운 현대사와 결부시킬 수 있는 장을 열어준다. 작중 나사의 우주비행사들이 스타로를 발견하고, 그를 감금하고 실험을 진행한 것은 냉전 시기에 체제 경쟁의 일환으로 비키니 섬에서 여러 부작용을 남긴 핵실험을 통해 소련뿐만 아니라 전 지구를 위협할 무기들을 개발했던 과거를 비꼬는 장치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괴물과 미국 정부 간의 연관성을 지우는 게 목적인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임무는 그간 관타나모 수용소처럼 미국 정부가 대내외적으로 자행한 비윤리적 폭거와 이를 숨기려고 했던 시도를 떠올리게 한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캐릭터들 역시 미국의 패권주의와 대외적 구태를 비판하는 데 가세한다. 그 중심에는 피스메이커와 블러드스포트의 대립이 있다. 두 인물은 인생사와 능력이 모두 동일하지만 정반대의 가치관을 지닌다. 블러드스포트는 개인적인 이유로 임무에 참가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방관할 수 없다는 소시민적 입장을 견지한다. 반면에 피스메이커는 평화를 부르짖지만 정작 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든 상관없다고 믿는 급진적 애국주의자다. 작중 피스메이커가 폭주할 때 본인 스스로 자유의 상징이라고 여긴 헬멧이 찌그러져있다는 점은 그의 신념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러한 둘의 차이는 진지한 성품을 지녔고 SF 스러운 무기를 선보이는 블러드스포트와 달리 피스메이커가 우스꽝스러운 외형과 행동을 보여주며 구식 무기들을 사용하는 외적인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이때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블러드스포트를 중심으로 새로 모습을 보인 등장인물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를 마련해 피스메이커의 신념을 비판하고, 그와 같은 광기를 통제할 수 있는 앞으로의 비전도 제시한다. 아동학대를 당했던 폴카도트맨, 쥐가 유일한 친구인 랫캐쳐2, 마음속 외로움이 가득한 킹 샤크는 블러드스포트처럼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고 치유하고 싶다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동기로 움직인다. 영화는 이처럼 전혀 관계없는 개인들이 자신들 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해결하는 와중에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점진적으로 친구, 가족, 하나의 팀으로 거듭나는 무용담을 부각한다. 즉, 아무리 사소하고 인간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개인들이더라도 그들의 연대는 광기 어린 국가 권력의 폭주를 막아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범죄자들이 하나의 팀과 가족으로 거듭나면서 우주를 구해내는 감독의 전작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맞닿은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작중 가장 결정적이고 영웅스러운 역할은 가장 약하고 무용해 보이는 능력을 지닌 소녀에게 주어진다.
교도소 상황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도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들은 코르테 말테제 섬에 처음 팀이 파견될 때만 해도 팀원들의 생존과 탈주 가능성, 사망 순서를 두고 도박판을 벌일 정도로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민간인을 도우려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보면서 이내 양심과 인간성을 되찾고 물심양면으로 슈퍼 빌런들을 지원한다. 이러한 변화는 꼭 권력을 지닌 군과 정보기관,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의 공동체적 힘이 과거와는 다른 미국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바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코르테 말테제 섬에 여전히 미국 정부가 심어놓은 분란의 씨앗이 남아있고, 미국 정부의 구시대 패권주의적 접근법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쿠키 영상도 이처럼 진짜 피스메이커를 밝혀내는 메시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힘을 실어준다.
흥미로운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의식과 달리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방식은 철저히 유머러스하고, 과장되어 있고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숲에서 만난 현지 무장 세력의 캠프를 마치 게임하듯이 습격하고, 사살한 인원의 숫자를 세며 경쟁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이 죽인 이들은 현지 반 쿠데타 세력, 즉 우군으로 밝혀진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쿠데타 정권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으니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얼렁뚱땅 넘겨버린다. 그 외의 장면에서도 영화는 유독 살인과 죽음을 희화화하고 과장한다. 감옥에서 탈출하는 할리퀸이 군인들을 창으로 찌르고 베자 피 대신 화려한 꽃잎들이 튀어나온다. 해변에 도착한 팀원들은 마지막 유언에서 제일 중요한 말을 못 한다거나, 전투에 쓸모없는 능력을 선보인다던가, 심지어 수영을 못해서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익사하는 식으로 황당무계하게 퇴장한다.
하지만 이처럼 부자연스럽고, 윤리적 금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판타지 덕분에 영화의 문제의식은 오히려 강조된다. 지나치게 만화적이라서 비현실적인 묘사가 기반을 두는 현실이 역으로 명료해지는 것이다. 일례로 피스메이커와 나머지 팀원 간의 충돌과 갈등, 그로부터 비롯되는 죽음은 다른 장면들과 달리 대조적으로 매우 진중하게 묘사되며, 따라서 그들의 대립이 갖는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또한 자신들의 과오인 불필요한 살육을 간단히 외면하는 팀원들의 태도는 미군이 개입되었던 여러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전쟁만 보더라도 미 공군이 군사적 목표뿐 아니라 대도시와 민간인 거주지역에도 융단폭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해당 사건들이 유야무야 된 역사가 발견된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슈퍼 히어로 작품에 비해 유달리 잔인하고 폭력적인 연출은 히어로 장르 안에서 이 영화를 (완성도와는 별개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고, 제임스 건이 제작하는 스핀오프 드라마 <피스메이커>에 대한 기대도 키우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모든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영화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의도된 연출이다 하더라도 수위가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잔인해서 꽤 불편할 수 있다. 액션이 밀집되어 눈을 떼기 어려운 전후반부에 비해 캐릭터들의 과거사가 소개되는 중반부는 전개상 반드시 필요하지만 리듬이 순간적으로 늘어지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미국식 성인 유머가 남발되는 등 미국적 정서가 강조되는 것도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 어렵게 한다. 빌런 소개나 충격적인 장면의 연출 시 유달리 아이들을 강조되는 것만 해도 그 임팩트나 뉘앙스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미국에서는 국내보다 미성년자에 대한 범죄 처벌이 더 엄격하고 사회적으로 더 금기시되는 정서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영화다. 우선 할리 퀸을 비롯해 다양한 캐릭터들을 폭넓게 활용하고 빌런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각인시키면서 전편의 실패를 씻어낸 공은 DC 팬들을 열광시킬 수밖에 없다. 특히 선배 슈퍼 히어로 영화들의 행적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비현실적인 판타지로서 미국 현대사의 그림자를 차별화된 방식으로 풀어내며 독보적인 매력을 뽐낸다는 점에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전반적으로 실망을 안겨주었던 DC 히어로 영화들을 다시금 기대할 한줄기 희망이 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미친놈들의 난동이 비추고 조롱하는 더 미치고 더럽게 꼬여버린 미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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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해리에게
내가 이 드라마를 완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워낙 드라마를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이탈이 빠른 편이라 내가 이 드라마에 대단한 이입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방영 초반이라서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 드라마 예감이 좋아서 오늘도 주절거려본다.
우선 배우진들이 아주 탄탄하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사람들의 수준은 아주 높아져서 캐스팅만으로는 그 드라마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기력은 알아주는 배우들이 나와주어 한 번은 기대하게 했다. 그렇다. 나도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본 것이다. 다만, 이 드라마를 완주할 수 있을지는 극본에 달린 듯하다.
다만, 이 드라마에 관심이 간 이유는 이 드라마가 해리성 장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새 드라마의 소재가 정신적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비추는 경우가 많아져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에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리뷰한 적도 있었다. 사실 이 드라마는 그냥 로맨스가 주된 내용이긴 하다. 로맨스만 있는 장르였다면 볼 생각을 안했겠지만 이 드라마는 소재가 굉장히 흥미롭다. 여기에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으로 여자 주인공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지금 현재 남주가 저렇게 까칠하게, 못되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될 것 같다. 현재 방영 시점까지 남자 주인공의 행동은 과잉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헤어진 연인에게 하는 행동이라기엔 과잉되어 있다는 뜻이다. 잠깐의 뇌피셜을 해보자면, 남주 현오는 여주 은호가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4화 엔딩에서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해리성 장애까지는 몰랐던 것 같다. 추후 나올 에피소드에서는 그의 과잉된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참 많구나 느끼는 현 시점에 이런 드라마가 나와주어 고맙긴 하다. 주은호가 동생을 기억하며 동생이 사라진 들판에서 해매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은호는 마음 속에 그런 들판을 해매면서 동생 혜리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애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혜리를 기억하면서도 혜리가 해매던 들판에 자신을 몰아넣어 자신을 벌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야말로 지금 이 신선한 느낌에서 입덕까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이 드라마는 베이스는 로맨스이긴 하지만 약간 '나의 아저씨' 같은 힐링이 될 만한 여지가 있는, 필력이 좋은 드라마라고 느꼈다. 어느 순간 신혜선 배우가 오열하는 신이 한 번쯤은 나올 것 같은데, 그 때에 이 드라마를 보는 내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었으면 좋겠다.
요새 볼 만한 드라마가 참 없다고 느꼈는데, 시작이 신선한 만큼 기대가 되는 드라마를 만나 기분이 좋아 이래저래 주절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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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디그/The Dig, 2021>
외국을 배경으로 한 역사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거기에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소재도 더해진다면, 처음 보는 형식의 영화를 만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넷플릭스에 새로 공개된 <더 디그>가 바로 그런 영화다. 흥미로운 소재와 탄탄한 출연진으로 바탕으로 나름의 매력을 보여주는 영화, <더 디그> 리뷰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운 시절, 어느 한 부유한 미망인이 아마추어 고고학자를 고용해 자신의 땅의 있는 무덤들을 발굴하기 시작하고, 그 무덤 속에서 역사를 뒤바꿀 부장품들이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역사와 고고학이라는 나름 신선한 주제를 이용해 우리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인류의 미래 등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역사의 일부분이고 후대에게 물려줄 전유물이 될 테니까. 조금 부족한 연출력이 거슬리기도 하지만 나름 생각할만한 문제를 던져준다. 고고학이라는 주제 자체의 색다름은 물론, 발굴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점점 진행되는 발굴 과정과 방해와 협력 등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에서 오는 재미도 충분히 있는 편이다. 정적인 분위기로 끌고 가 굉장히 건조하고 고전적인 이미지가 연상되는 점은 나름 인상적이고, 광활한 무덤의 풍경을 보여주는 촬영이 참으로 환상적이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둔 20세기 영국의 환경을 생생하게 살려낸 미장센들도 영화의 장점이다.
다만 영화 자체는 조금 아쉽게 다가온다. 영화는 시작부터 굉장히 빠른 전개와 생략을 통해 극을 풀어나가고, 세세한 설명도 없어서 약간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요소 때문에 영화가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순간, 앞서 말한 건조하고 고전적인 이미지의 영향으로 굉장히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단점이다. 거기에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드는 장면들도 종종 보이며, 인물의 심리묘사도 약간은 아쉽게 되는듯한 감이 있다. 거기에 러브라인까지 등장하는데, 사족 처럼 느껴진다. 이 러브라인은 따지고 보면 불륜인데, 이 관계의 주인공이 릴리 제임스 인건 참 아이러니하다. 극의 마무리도 급하게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많은 것을 담고 싶은 욕심으로 인해 흘러넘치거나, 혹은 폭발적인 감정을 드러낼 때 지나치게 절제한다. 완급조절이 상당히 아쉽다.
이런 극 속에서 배우들은 여전히 분한다. 캐리 멀리건은 참 매력적인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인사이드 르윈>에서 처음 만난 배운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다. 그녀가 맡은 캐릭터인 이디스 프리티 자체가 참 애매하게 그려져있는데, 캐리 멀리건은 프리티 부인이 겪고 있는 고민, 고통, 걱정을 잘 표출해낸다. 레이프 파인즈도 참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연기한 듯싶다. 빌런이 잘 어울리는 레이프 파인즈가 이런 고고학자 연기가 어울릴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나 름 중요한 위치에 있는 릴리 제임스는 참 아쉬운 배우다.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보고 빠져버린 배운데, 논란이 생겼으니 참. 어쨌든 그녀의 연기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엠마>에서 안야 테일러 조이의 상대역으로 눈도장을 찍은 자니 플린도 열연하며, 굉장히 익숙한 배우인 켄 스콧도 얼굴을 비춘다. 넷플릭스의 화려한 출연진을 볼 때마다 새삼 넷플릭스의 영향력에 놀란다.
분위기나 촬영이나 나름의 재미나, 여러모로 재밌는 요소는 갖췄지만 부족한 연출력이 아쉽게 다가온 영화다. 역사 영화나, 혹은 20세기 영국의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추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게 본 영화, <더 디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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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기다리는 동안,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이라니. '무의사결정'이란 말 참 매력적이다. 처음 들었을 때 인생의 진리를 한 마디로 정리한 기분같았다. 결정하지 않는게 대체로 No를 뜻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결정하지 않는 것에도 책임감과 무게감을 부여하고 있다. 좀 더 쉽게 접근하자면 의사결정을 확률에 맡기는 것도 비슷한 종류일 것이다. 확률에 내면의 자신감과 책임감 문제를 맡길 수 있다. 앞면의 이순신이냐, 뒷면의 숫자가 나오냐에 따라 결정이 달라진다. 이파리를 하나씩 뜯어서 기다 아니다를 정한다. 요즘엔 기계가 대신 결정해주기도 한다더라. 여긴 아예 있던 일도 없던 일로 만드는 시공간초월 무의사결정이 있다. 바로 영화 < 시간을 달리는 소녀 >에서.
취향의 문제겠지만 수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무려 최근에 본 눈이 부신 <너의 이름은>을 보고도 아직은 그렇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명언 때문덕이기도 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던 순간이 많아서 탐이 났다. 대리만족도 됐고 시간을 바꿔봐야 어차피 별로 대단하게 바뀌지 않는 걸 보고 안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눈에 아른거리는 건 마코토의 모습이었다. 바보같고, 오지랖 넓고, 당당한 마코토.
우연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얻었을 때 마코토는 바보같았다. 대단한 걸 바꾼게 아니었다. 동생이 대신 먹은 푸딩, 엊그제 먹은 철판구이 고기, 노래방 계속 가기. 갑자기 닥쳐온 쪽지시험은 그렇다 치자. 절친인 치아키와의 캐치볼 공의 노선을 다 알아서 잡는 용도로 쓴다. 세상에, 그 능력을 그렇게 쓰는데도 마코토니까 이해가 간다. 그렇게 평범하게 써서 좋았다. 용돈은 다시 타서 쓰게 시간을 되돌리지만 복권당첨번호를 써먹으려고 쓰진 않는다. 주가조작도 안했고 누구 돈을 뺏지도 않았다.
물론 그 중엔 정말 바보같은 결정도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치아키가 고백한 게 두려워서 없던 일로 만들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어떻게 말할지 잘 생각하고 돌린 것 같지도 않다. 맨날 할말 없으면 뜬금없이 동생 얘기를 해버리니까. 그래놓고 고백받은 기억 때문에 어색해서 치아키를 피해다녔다. 몰랐던 것이다. 때로는 같이 용기내 문을 열지 않으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 코 앞에서 영영 닫혀버리는 것이다. 상대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으로 내 마음은 이미 살금살금 문이 열려버렸는데 덫에 걸려버린 것이다. 거절하지도 승낙하지도, 듣도 보도 못한 고백은 이제 그녀의 기억에만 존재한다. 치아키는 아프지도 않게 차였고 마코토는 아무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아야 한다. 잔인하다.
자신이 치게 될 사고를 남이 치게 만들고 나니 엄한 사람들이 다쳤다. 자신에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변수처럼 일어났다. 괴롭힘 당하던 친구는 억눌린 화풀이를 했고 그 결과 친한 친구 유리가 다치고 말았다. 유리는 다치긴 했지만 그 일로 좋아하던 치아키가 남자친구가 되었다. 마코토는 가장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이 순간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시간을 돌리는 이 축복같던 무의사결정에 기뻐했던 자신에게 주는 벌일지도 모른다. 이미 그녀는 그 고백도, 치아키도 놓쳤고 유리와 같은 반 친구에게 없어도 될 상처를 주었다. 많은 여주인공이 무너져버릴 순간, 그녀는 울지 않는다.
마코토는 이 상황에서 오지랖이 넓다. 변화가 있다면 그녀 자신을 위해서 쓰던 타임 리프가 이제 소중한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던 무의사결정 대신 시간을 돌려 능동적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친한 친구 고스케의 여자친구 만들어주기에 남은 기회를 거의 다 써버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다시 바보같았다. 치아키의 타임리프 질문에 얼어버려서 다시 회피용으로 시간을 되돌려 버렸다. 결과는 참혹했다. 소중한 고스케를 잃는 것이 분명해졌다.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시간 앞에서 그녀는 주저 앉아 미친 사람마냥 시간을 멈춰달라며 절규했고 그 소원을 들어주면서 치아키는 마코토와 이별해야 했다. 하고픈 말도 하지 못하고 괜한 소리만 하면서 마코토는 멋없이 치아키를 보내야 했다.
다시 한번 시간을 돌릴 기회가 생겼을 때 마코토는 이상하고도 멋진 결정을 한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열심히 달려가서 이 모든 것의 시작으로 돌아가 끝낸다. 이번엔 회피하지도 않고 치아키와도, 모든 사실과도 당당하게 마주한다. 그녀가 치아키를 좋아한다는 것마저도. 모든 상황을 치아키에게 털어놓고 그를 그가 있던 미래로 보내는 것. 굳이 그를 돌려보내는 건 대체 왜일지 생각해봤다. 여러번 볼 때마다 미래에서 기다리겠다는 치아키의 멋진 말에만 심취해서 그 뒤로 당당해진 마코토는 잘 생각하지 못했다. 치아키는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아왔고 이미 일찍 떠났어야 하지만 떠나지 않고 여기 시간의 흐름에 맡겨버렸다. 그조차도 무의사결정을 한 건 마찬가지다. 그 먼 시간을 지나 보고 싶었던 소중한 그림도 보지 못했고, 마코토도 좋고, 그에겐 과거이지만 여기선 현재인 이 시간이 좋아서라는 멋진 핑계가 있을 뿐.
그래서 마코토는 치아키를 위해 결정한다. 자신이 울어버릴 일인데도. 이제 시간을 되돌리는 게 얼마나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잔인하고 아플 수 있는 일인지 마코토는 알고 있다. 어쩌면 치아키의 그 고백, 마코토 모르게 치아키도 꽤 여러번 고백했다가 없었던 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소중한 친구 고스케가 이미 여러 번 죽을 운명이었던 것을 구해주었던 것을 마코토가 몰랐듯이. 아무도 모르는데 나만 감당해야하는 괴로움을 알기에 마코토는 좋아하는 치아키가 더 이상 시간을 오가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현재이자 마코토에게는 미래인 그 시간에서 치아키가 행복하길 바라기에, 그가 좋아하는 그림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게 여기 남아 그가 그의 시간에서 행복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더 멋진 사람이 되어 치아키를 찾아가는 게 그녀가 내린 결론일 것이다. 그렇게 치아키는 미래에서 마코토를 기다리고 마코토는 현재에서 치아키에게 달려간다.
기다린다, 달려간다, 문이 열린다. 나도 모르게 < 시간을 달리는 소녀 >와 연결짓고 있던게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것을 글의 끝자락에서야 깨달았다. 글의 방향을 정하지 않고 쓴 무의사결정적 글이라니 부끄럽지만.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어쩌면 내겐 생애 첫 시다. 언니의 책상에서 어릴 적부터 의미도 모르고 읽었던 시였다. 애기 때는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아서 이 시가 어디가 좋아서 언니가 책상 안에 끼워넣었을까 했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가만히 있다가 생각나곤 하는 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엔딩이 혹시나 아쉬웠거나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나는 치아키와 마코토의 모습을 보여줄 시로 이 시를 꼽겠다.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마코토는 달라져있다. 여전히 덜렁대고 바보같지만 당당하다. 여전히 무의사결정을 생의 곳곳 틈틈히 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치아키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아주 어렵고도 쉬운 결정을 했다. 마코토는 시간을 달리지 않으면서 시간을 달리고 있다. 타임 리프도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먼 곳에서 오지 않는 치아키에게, 아주 먼데서 오는 치아키에게 가고 있다. 달려가고 있다. 치아키가 그러하듯이.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쾅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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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란하기만 한 뇌신의 사랑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노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합류한 천둥의 신 '토르(크리스 헴스워스)'는 새로운 동료들과의 모험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 공허함을 달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주의 모든 신들을 몰살하려는 신 도살자 '고르(크리스천 베일)'가 등장하고, 토르는 그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급히 뉴아스가르드로 돌아간다. '킹 발키리(테사 톰슨)'와 전 여자 친구이자 부서진 묠니르를 휘두르는 '마이티 토르'가 된 '제인(나탈리 포트만)'과 재회하여 고르의 습격을 막아낸 토르. 그는 '제우스(러셀 크로우)'를 비롯한 신들의 도움을 얻어 고르의 복수와 더 많은 신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토르>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인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우주로 떠난 토르의 후일담을 다룬 작품으로,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았다. 그래서인지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전작과 유사한 스타일을 유지한다. 이별했던 애인과 무기와의 재회가 낳은 토르의 개그와 유머는 오프닝 로고를 포함해 적재적소에 힘을 준 올드락과 어우러지며 전반적으로 경쾌한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전작에서 장족의 발전을 보여줬던 액션씬도 여전히 호쾌하다. 토르의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살린 장면들은 물론이고, 분리도 가능해진 묠니르를 활용한 망치 액션도 인상적이다.
또한 색상을 명징하게 대비하는 만화적 연출도 눈에 띈다. 특히 그림자 영역(shadow realm)에서의 전투씬이 압권이다. 화려한 색감으로 무장한 토르와 마음 가득한 절망을 표현한 듯 명암의 대조만 남은 고르의 대결은 두 캐릭터의 능력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면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이 모든 장점이 한 데 모였는데도 <토르: 러브 앤 썬더>의 몰입도는 떨어지고, 토르의 이야기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으며, 심지어 토르라는 히어로의 존재감도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왜냐하면 스타일은 화려할지 몰라도, 10여 년 간 쌓아 올린 토르라는 슈퍼히어로의 캐릭터성과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르: 러브 앤 썬더>의 가장 큰 특징은 MCU의 히어로 중 네 번째 솔로 영화가 나온 첫 사례라는 사실이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도 삼부작으로 시리즈를 끝내고 퇴장한 가운데, 유독 토르만 다시 한번 솔로 영화로 돌아온 것이다. 이는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을 거치며 토르라는 캐릭터가 성장할 수 있는 다른 방향성이 제시되었기에 가능했다. 그간 아스가르드의 왕자인 토르는 오딘의 후계자로서 아스가르드의 왕위에 올라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위의 무게감이 주는 책임감과 부담을 견뎌야 하는 역경과 시련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토르: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토르는 왕이 되어야만 하는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왕이 아닌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정체성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호자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다. 아스가르드의 멸망인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해 수르트를 처치한 것, 사카아르 행성에 갇혀 있던 와중에도 아스가르드로 되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것, 한쪽 눈을 잃어가면서까지 아스가르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헬라에게 저항한 것. 이 모든 것은 토르가 왕으로서 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아스가르드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가 끝내 아스가르드의 왕좌에 앉은 것 역시 같은 연장선상이다. 토르는 오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스가르드를 보호하는 수호자였기에 왕이 되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그가 타노스를 향한 복수심에 불탄 것도, <엔드게임>에서는 끝내 아스가르드를 지키지 못했다며 깊이 절망한 것도 그가 왕이기 이전에 아스가르드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천둥의 신으로서의 정체성도 확립해 나간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던 시리즈의 첫 두 편과 달리 전작인 <라그나로크>에서 유달리 그가 신이라는 사실이 강조된 이유다. 헬라는 그에게 왕의 자격보다도 그가 무슨 신이냐고 묻고, 오딘은 그가 망치의 신이 아니라 천둥의 신이라고 일갈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그래서 묠니르를 잃은 대신 토르는 뇌신으로서 각성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활용하게 된다. <엔드게임>에서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가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 타노스와 맞서는 순간, 러닝타임 내내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천둥의 신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타노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발키리에게 아스가르드의 왕을 맡긴 채 우주로 떠날 수 있었다. 더 이상 왕이 아닌 토르는 수호자이고 신으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탐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4편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토르: 러브 앤 썬더> 속 토르는 수호자로서, 또 신으로서의 여정을 지속하고, 새로운 캐릭터와의 만남을 통해 두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한다. 우선 수호자로서 토르는 제인과의 재결합을 통해 수호자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자격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사실 토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함께 전우주를 돌아다니며 여러 외계 행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서지만, 항상 상실감에 시달린다. 그들을 지켜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토르에게 제인은 다르다. 이미 모든 가족과 친구를 잃은 토르에게 그녀는 그가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토르와 제인의 재회는 자연스럽다. 즉, 제인을 향한 사랑은 수호자로서 토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그가 묠니르에게 그녀를 지켜달라고 부탁했기에 제인이 마이티 토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홀로 고르를 상대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제인을 보호하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수호자로서 토르의 서사를 로맨스와 결부시킨다.
한편 신 도살자인 빌런 고르와의 서사는 토르가 신으로서의 자격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된다. 이때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강조되는 신의 자격 역시 보호와 사랑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먹을 음식과 마실 물조차 없어 딸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신에게 헌신했던 고르. 그러나 정작 신이 그들을 보호하거나, 자신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분노하여 신 도살자가 된다. 이러한 고르의 분노는 인간과 신 사이에 상호 호의가 있어야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을 연상시킨다. 고대 종교적, 신화적 질서 안에서 신은 인간에게 삶과 세상을 베풀고, 인간은 신이 베푼 세상에 대한 감사함과 그 세상을 앞으로도 유지해줄 것에 대한 기대를 헌신으로서 보답하며, 이에 신은 다시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영화는 고르를 통해 이 질서를 신의 사랑과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는 책임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고르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이자, 고대의 대표적인 인격신인 토르와 제우스의 갈등 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작중 신 중의 신으로 등장한 제우스는 고르를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태 달라는 토르의 부탁을 거절한다. 제우스는 신들을 사랑했고 또 믿었던 인간의 분노가 낳은 재앙은 외면한 채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려 한다. 쿠키영상에서 그는 인간들이 토르와 같은 히어로만 사랑하고 정작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며 토르에게 복수하려 하는데, 이는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고르에게 납치된 아이들의 믿음에 응답한 토르와 달리 제우스는 사랑에 따르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호자이자 신으로서 토르의 존재 의의는 이제 사랑에 달려 있게 된다. 모든 신을 죽이려는 찰나에 고르가 토르의 사랑을 보고 예상외의 마지막 선택을 한 것, 토르에게 다시금 지켜야 할 가족인 '러브(인디아 로즈 헴스워스)'가 생긴 것이 이를 방증한다. 또한 이는 아스가르드의 왕 대신 수호자와 천둥의 신으로서의 성장을 완결시킨 토르의 후일담 제목이 '러브 앤 썬더'인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작중 마침내 수호자와 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꽃피운 토르보다 그의 성장을 돕는 두 조역, 제인과 고르의 서사가 더 빛난다는 점이다. 이는 전작의 유쾌한 분위기는 유지했지만 정작 웃음 뒤에 슬픔을 숨기는 토르의 캐릭터성을 살리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간 토르라는 캐릭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상실감'이었다. 가족과 고향, 무기와 친구,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리면서 그는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신이라는 완벽함 대신 인간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진취적인 태도, 거기서 기인한 그의 유쾌함과 웃음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가슴 깊이 남아있는 아픔과 흉터, 상실감을 애써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는 그의 모습이 개그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엔드게임>에서 뚱보가 된 토르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상처 입은 그의 내면을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토르의 옷을 벗기는 개그 장면에서도 그의 등에 로키의 죽음을 기리는 문신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러브 앤 썬더> 속 토르에게서는 그의 웃음 뒤에 자리 잡고 있을 아픔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토르는 그저 염소들에게 시달리고, 묠니르와 스톰브레이커의 삼각관계 안에서 동일한 개그를 반복할 뿐이다. 감독판을 원한다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과 크리스 햄스워스 언급대로 많은 장면이 편집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MCU의 대표 캐릭터에게 기대할 법한 무게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성장을 돕는 제인과 고르의 진중한 이야기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고,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를 만나 탄생한 고르는 조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섬뜩하고, 제인과의 로맨스는 그나마 토르가 진지해지는 순간이기에 오히려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의 서사를 완결 짓는 결정적인 순간에 정작 토르의 존재감은 부족해진다. 그로 인해 영화의 전개와 구조는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느껴지고, 이는 아이들에게 토르의 힘을 나눠주는 장면처럼 영화의 유쾌함이 유치함의 선을 자주 넘나드는 문제로 이어진다.
MCU에게도 어벤져스 원년 멤버인 토르의 실패는 큰 타격일 수 있다.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토르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매듭지음과 동시에 다시 한번 세계관의 확장을 시도한다. 헤라클레스를 비롯한 더 많은 신들과 발할라라는 새로운 배경을 등장시키면서 그 스케일을 더욱 키우는 두 개의 쿠키 영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페이즈 4 이후 커지는 세계관에 비해 각 영화의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토르: 러브 앤 썬더>도 피하지 못한 이상, 이러한 선택이 과연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는 과거 케빈 파이기의 발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과연 지금의 마블은 작품 하나하나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적어도 <토르: 러브 앤 썬더>는 그렇지 않다는 심증에 확신을 더해준다.
D(Dreadful, 끔찍한)
유쾌함과 경박함 사이에서 방황하는 천둥의 사랑
*Byron E. Shafer et al, Temples of Ancient Egypt.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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