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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2025-09-12 23:25:43

슬픔을 말하지 않지만 가라 앉아 있는,

영화 <애프터썬>

 

 

<애프터썬>은 스토리를 극적으로 만드는 핵심 사건도 없고, 캐릭터의 서사 자체가 극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언뜻 보면 작품 속 인물이 처한 상황과 관객이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기 쉽다. 그저 부녀가 튀르키예에서 함께 노는 시간을 순서대로 보여줄 뿐이기에 단적으로 말하면 다큐멘터리 같은 성질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는 겉보기에는 ‘딸과 아빠’의 추억 속 한 장면을 깊이 파고들어 순간마다 존재했던 아빠의 딸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스토리를 지녔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감독이 ‘소피’와 ‘캘럼’, 둘의 ‘가족’이라는 보다 순수한 관계성에 빗대어 보편적인 인간에 해당되는 감정 자체를 다루고 싶어 했다고 본다. 원인은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동일하게 느끼는 감정들. 이에 더해 감각적인 편집과 감성적인 필름 화면으로 예술영화라는 정체성을 강렬하게 인식시킨다.

 

 

 

엔딩 직전, 소피와 캘럼의 여행이 끝나기 전날 밤 둘은 춤을 춘다. 모든 소리와 대사가 뮤트되면서 노래만 나온다. 빛이 점멸된다. 우리는 화면을 제대로 바라보기도 어렵다. 가사만 들린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 내내 소피에게 웃음만 지어 보였던 캘럼이 서럽게 운다. 자신에게 새겨진 상처는 보살피지 않고 덮는다. 아빠에게 늘 웃어 보였던 소피의 눈은 깊다. 캘럼이 몸을 맡겼던 어두운 바다보다 더. 장난스럽게 캠코더를 손에 들 때를 제외하고는 아빠보다도 의젓한 말과 행동을 보였던 소피는 이미 아빠를 집어 삼킨 밤바다를 직시하고 있었을 터이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슬픔들도 포용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물 속으로 잠식되고 있었을 것이다.

 

 

 

 

캘럼은 소피에게 타이머를 체크하면서까지 선크림을 꼼꼼히 발라준다. 작열하는 태양의 자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바르고 또 발라준다. 혹은 지금 함께하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흔적을 남겨두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반면 캘럼은 소피와의 시간들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화창한 하늘 아래서 난간에 서 있다든지,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춤은 절대 싫다는 소피까지 끌어 들이면서 흐르는 곡에 몸을 맡긴다. 정작 소피가 담아내는 화면에서는 갖은 이유를 대며 벗어난다. 마구 흔들리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자신의 잔상을 남기지 않으려는 캘럼은, 이미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순간들이 소피라는 한 사람의 삶에 스며든 줄도 모르고 뒤늦게 선크림을 챙긴다. 마지막까지 소피를 위한다.

 

 

소피는 그날의 추억을 다시,  다시 돌려본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 영상이 끝나면 아빠는 다시 소피가 만든 춤추는 공간으로 간다. 소피의 아빠는 춤과 노래로 가득했던 마지막 장소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소피가 말했다. 얼마나 떨어져 있든, 같은 태양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고 아빠에게 말한다. 이제는 아니다. 같은 태양을 보고 있지 않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태양을 보고 있었던 캘럼과의 시간 , 소피가 체감해 시간들. ‘After the Sun’이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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