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8-17 13:27:42
삶이 내게 꽃을 내밀 때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리뷰
DIRECTOR. 마이크 리
CAST. 마리안 장 밥티스트, 미셸 오스틴 외
SYNOPSIS.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할 말 다 하는 '팬지'. 집, 길거리, 마트... 그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트러블이 생긴다.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보듬는 사람은 여동생 '샨텔'뿐, 남편과 아들은 귀를 닫은 듯 그저 무심할 뿐이다. '어머니의 날'을 맞아 '팬지'와 '샨텔'의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 '팬지'가 무슨 말을 할지 조마조마하던 가족은 그녀의 뜻밖의 반응에 당황하는데...
POINT.
✔️ 70년대부터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온 거장 마이크 리 감독의 컴백입니다.
✔️ 특히 <비밀과 거짓말>을 함께한 명배우, 마리안 장 밥티스트와의 조우! 마리안 장 밥티스트의 연기가 너무 훌륭합니다. 연기를 통해 팬지의 얼굴에서 그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를 다 가늠해 보게 만듭니다. 역시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네요.
✔️ 보고 나면 세상에 친절한 마음으로 꽃 한 송이를 내밀고 싶어지는 영화
✔️ 특히 K-장녀들에게는 꽃을 다발로 주고 싶어지는 영화...
✔️ 가족 상담 사이코드라마로 써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비전공자 비전문가 주제에) 해보았습니다. 당신은 팬지의 가족 중 누구에게 가장 마음이 가나요? 당신을 화나게 혹은 슬프게 하는 인물이 있나요?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요?

#1. 가족 상담의 사이코드라마
이 영화는 러닝타임의 상당 시간을 할애애 팬지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준다. 방을 지저분하게 해 놓은 아들에게, 남편에게, 마트에서 장 보다 마주친 여자에게, 치과 의사에게... 팬지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대개 고슴도치 같다. 팬지는 신랄한 말투로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도끼날처럼 떨어지는 말을 가만 들어보면 팬지는 우선 상대에게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촘촘하게 두른 이 마음 안에, 과연 어떤 상처와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 영화 속 팬지와 식구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누구도 온전히 저 가정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문제를 겪지 않는 사람,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와 상처 앞에 대처하는 방식을 아주 거칠게 묶어 보면 팬지처럼 불평불만을 토로하며 공격적으로 전진하는 유형, 팬지의 남편 커틀리처럼 문제를 회피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유형, 아들 모세처럼 회피형 중에서도 다른 무언가에게 시선을 돌리는 유형(모세는 계속해서 비행기와 관련된 책을 읽고 비행기 게임을 한다) 등이 있을 것이다.
공격형과 회피형의 조합은 꽤나 치명적인데, 자연히 팬지는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어?" "얼마나 더 이야기해야 해?"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회피형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고, 악순환은 이어진다. 처음에는 팬지의 화려한 언변(?)에 시선을 빼앗겼던 관객도 이내 이 가족에게 필요한 건 팬지 개인 상담이 아닌 가족 상담임을 인지하게 된다.

다만 이 영화는 팬지의 가족을 '문제 가정'으로 낙인 찍고 이들을 동물원처럼 구경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팬지 가족의 이야기를 사이코드라마 삼아 나는 어떤가, 내 주변은 어떤가 반추하게 한다. 유사 경험하는 집단 상담 같달까.
얼핏 팬지 가족의 대척점에 놓인 '화목한 가정'처럼 보이는, 팬지의 동생 샨텔과 두 딸 가정을 보아도 그렇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깔깔거리며 받아주고 마냥 유쾌하지만, 이들에게도 유쾌한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도 회사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을 굳이 말하지 않고 다 잘 지나갔다는 식으로 적당히 넘기는 '회피'의 순간이 있고, 이모의 어떠함에 대해 느낀 불쾌감을 토로하는 '공격'의 순간이 있다. 팬지 가정에서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은, 일반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선일 뿐.

#2. 우린 누구나 시간이 쌓여 이루어진 존재
그 가정의 배경에는 샨텔이 있다. 미용사로 일하면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샨텔의 장면들은 정말이지 경이롭다. 맞장구 쳐 주고, 웃으며 반응하는 선을 넘어서, 적당한 질문도 던져 주고 화제도 적절히 바꿔 주면서 상대가 이야기를 계속 끌어갈 수 있도록 한다. 마치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 앞에 길을 깔아 주는 것처럼.
샨텔이 이야기를 끌어내 주자 손님이 달라 보인다. 처음에는 그냥 잘 사는 사모님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데' 타령인 줄 알았는데, 샨텔이 끌어주는 대로 그의 이야기를 쭉 들어 보니 그는 정말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자, 삶의 어려움을 잘 버티면서 티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로 무거워진 미용실 분위기를 툭 털어내는 것까지 샨텔은 훌륭하게 해낸다.

어떻게 보면 좋은 대화의 정석 같은 사람, 나쁜 대화의 정석 같은 사람을 캐릭터로 내세우고 있음에도, 손쉽게 팬지가 잘못됐고 샨텔이 잘했다고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서 좋았다. 이 영화의 원제는 Hard truths, 어려운 진실들이다. 삶은 어려운 진실들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고 누구나 공감을 시도할 수 있다는 말은 샨텔의 손님들 뿐만 아니라 팬지도 대상으로 한다.
영화는 가계도를 가로로 펼친 현재 팬지 가족과 샨텔 가족의 삶을 보여주면서, 팬지와 샨텔이 원 가족에 있던 시절 즉 둘의 삶이 가계도 안에서 세로로 펼쳐지던 시절을 언급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은 무수한 과거의 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오늘 그 사람이 처한 상황 뿐만 아니라 그의 하루하루에 겪은 일들이 오늘을 만들었음을, 그러므로 나와 부딪힌 지금 순간만으로 그를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3.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설령 샨텔처럼 유려한 실력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해도, 그래서 약간의 이해와 공감이 순간적으로 피어 오른다고 해도, 우리는 한 사람의 무수한 과거지사를 다 들을 수 없다. 아니 다 말할 수도 없다. 하물며 그 일들의 의미를 해석해 지금의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억의 한계와 무의식에 덮어둔 일들의 분량으로 인해, 겹겹이 쌓인 과거를 다 하나하나 해석하고 서술하는 일은 전문가라 해도 불가능하다.
즉 노력으로도 우리는 이해에 다다를 수 없다.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스쳐간다. 내가 아는 상처든 모르는 상처든 누군가 건드리면 예민해지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몰이해와 오해가 번질 수도 있다.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멀어지기도 하며, 팬지처럼 사방천지에 공격적으로 상처를 발산하고 다닐 수도 있고 커틀리나 모세처럼 침묵으로 회피하여 상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뿐이다. 먼저는 스스로를 향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는 타인을 향해. 우리 누구도 혼자만의 힘으로 혼자를 끌어안고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인간의 상처도 기쁨도 절망도 소망도 뿌리도 결말도, 무엇 하나 온전히 다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마음을 나누고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내 삶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고 환영할 수는 있다. 그렇게 서로 가까이 들이고 더불어 살아갈 때, 온전하지 못한 이해가 성글게 열리고, 무엇보다 풍성한 사랑이 맺힌다.
그런 작은 초대와 환영의 시간이 삶을 180도 바꿔 놓지는 않겠지만, 1도씩 1도씩, 조금씩 뒤틀어 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작은 뒤틀림 덕분에, 평행을 달리던 두 직선이 언젠가 어디선가 만나는 선으로 변모한다.

마리안 장 밥티스트가 유리 문을 열 때, 그 얼굴에서 나는 소녀 팬지를 보았다. 자신의 삶에 불쑥 침범해 들어왔던 것들로 인해, 날을 세우고 버텨야 했던 날들. 어쩌면 공격이 최선의 방어였던 날들. 이웃을 지켜보는 팬지의 세밀한 관찰력을 보면, 어쩌면 팬지는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더 세밀하고 예민한 사람들이 더 잘 상처받지만, 삶의 현장은 멸균실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언젠가 집을 나서야만 한다.
삶이라는 정원이 벌레와 불안이 아닌, 꽃 한 다발을 내밀 때. 오랜 불안이나 상처가 눈물로 터져 나올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문을 열 수 있다. 평행선이 1도, 틀어진다. 그 세상은 어디를 향할지 모른다. 관계의 회복일 수도 있지만 관계의 종결일 수도 있다. 꼭 모두가 얼싸안는 결말만이 해피엔딩은 아니다.
팬지의 집을 비추며 시작한 영화는 다시 팬지의 집을 비추며 끝난다. 다만 그 의미는 내 눈에 아주 달라 보인다. 이제 그 집은 보이지 않는 불안과 맞서 싸우는 전쟁 참호가 아니라 베이스캠프다. 삶은 계속되고, 문제도 변하지 않았으며, 주변 사람들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나 스스로의 변화도 그렇게 드라마틱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공기 속에 바이러스와 세균이 불안하게 공명하는 대신, 어설픈 사랑과 따뜻한 마음이 공명하는 걸 느꼈다면 이미 세상은 달라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마음이 좀더 너그럽고 도량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도량이 넓다니 지나친 꿈 같지만 그것도 시작은 꽃 한 송이 아닐까. 지나가다 내 어깨를 툭 치고 말도 없이 사라진 행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내게 상처를 남겼던 가까운 이들에게도, 내 말에 상처를 받았을 누군가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영화가 내게 꽃 한 송이를 내밀어 주었다고 느낀 순간, 나도 삶에 꽃 한 송이를 전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것도 사랑이 아닐까.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의 국내 개봉일은 8월 20일입니다. 극장에서 만나보세요!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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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가 사라져도 사랑할 수 있을까
벽에 붙여둔 포스터를 보며 생각했다. 결국 인간은 무언가와 닿아야만 하는 존재일까.
방 한 쪽 벽에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를 잘 붙여두고 그 밑엔 잘 틀지도 않는 음반들을 쌓아둔다. 마음에 드는 책은 꼭 종이책으로 구입하고 굳이 손 편지를 써 보내는 우리는,
결국 사랑에도 손을 뻗어 닿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그 존재가 사라져 버린다면, 우린 어떻게 사랑을 이어가야 할까.
샬롯 웰스 감독의 영화 <애프터썬>은 31살이 된 주인공 소피가 11살 여름방학, 아빠 캘럼과 떠났던 튀르키예 여름휴가 영상을 돌려 보며 당시를 회상하는 영화다. 관객들은 소피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며, 11살의 그녀는 온전히 알 수 없었던 아빠의 우울을 천천히 목격한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캘럼은 영화에서 늘 작은 공간에 존재한다. 캠코더와 연결된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등장하거나 호텔 방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등 스크린의 가장자리나 희미한 화면, 어둠 속에 머무르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위태로운 난간 위에 올라서고, 어둡고 파도치는 바다로 뛰어든다. 캘럼은 좀처럼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떠다니는 인물이다. 소피에게 넌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고향에서 조차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 여의치 않은 지갑 사정에도 무리해서 구입한 카펫은 그가 온전히 발붙일 유일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작은 카펫을 세상의 전부로 여기는 어린 아빠는 소피에게 이를 선물한 듯 보인다. 31살의 된 소피는 자신의 침대에서 카펫에 발을 디디며 일어난다. 캘럼의 작은 카펫은 그가 유일하게 세상과 닿을 수 있는 공간이자, 어른이 된 소피(어쩌면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머물고 있을)가 발 디딜 곳이 되어주는 셈이다. 또, 캘럼의 부재 이후 그녀를 아빠와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제목 애프터썬은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크림을 의미한다. 이미 다 그을려 버린 피부지만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바르는 이 크림은 소피와 캘럼이 서로를 돌보는 방식이다. 그들은 영화 내내 애프터썬 크림을 바르며 서로의 존재와 함께함을 확인한다. 부모의 이혼 이후 소피는 주로 엄마와 지내는 듯 보인다. 그녀는 휴가 중 캘럼에게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 비록 같은 장소에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라는 말을 건넨다. 뜨거운 햇볕에 달아오른 피부에 닿는 차가운 크림의 감촉은 여행 내내 소피가 느낄 부드러움이며 계속해서 아빠의 부재를 상기시킬 시린 감각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캘럼의 춤사위를 비춘다. 그의 춤은 고통의 몸부림이자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며, 어떻게든 삶을 붙들어 보려는 시도다. 엔딩 장면에서 소피와 캘럼은 Under Pressure 음악 속에서 함께 춤을 춘다. 11살의 소피는 아빠의 우스꽝스러운 춤을 창피해하면서도 기꺼이 그와 춤추고 31살의 소피는 닿지 않을 절규와 함께 있는 힘껏 그를 껴안는다. 비로소 아빠의 우울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어버린 소피에게는 더 이상 그의 실체를 감각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한다. 사랑하는 대상의 실체를 잃는 것은 이를 불가능하게 하여 우리를 괴롭힌다. 그렇기에 우리는 떠난 이에 대한 기억을 기어코 끄집어내어 그를, 또 나를 안아주어야만 한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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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함으로부터의 구원
*본 영화의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더 웨일> 줄거리
처음 시작부터 강렬하다. 우연히 들른 집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찰리의 모습을 본 토마스에게 찰리는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달라고 한다. 그 글이 도대체 뭐길래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응급조치가 아닌 읽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일까?
자신의 친구이자 간호사인 리즈가 도착하고 나서야 진정된 찰리에게 토마스가 왜 이 글을 읽어달라고 했는지 물었을 때 그 의문이 해결된다.
'이것을 들으며 죽고 싶었다.' 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여기서 죽음을 목도에 둔 찰리를 발견한 토마스를 살펴보자. 토마스는 왜 연고도 없는 찰리의 집 문을 두드린 걸까?
그는 새생명 교단의 선교사이다. 집들을 방문하며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려는 다르게 말하면 타인을 '구원'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찰리라는 인물이 눈에 띄었다.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면서도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 에세이 하나를 읽어달라고 하는 인물이 말이다. 그래서 찰리는 그를 '구원'해주기로 한다.
하지만 구원에 회의적인 찰리의 태도뿐만 아니라 찰리의 친구인 리즈는 새생명 교단에 적대적이까지 해 그의 구원은 순탄치 않다.
그들의 태도는 언뜻 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 같지만 자세히 들여보면 사연이 있다.
리즈의 오빠이자 찰리의 연인이었던 이는 새생명 교단에 속해 있었지만 내쳐졌고 결국 끝은 죽음이었다. 이런 상황을 봤을 때 오히려 토마스를 반기는 찰리가 이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리즈의 적대적인 태도에도 토마스는 계속해서 찰리를 찾아오고, 찰리는 친절하지만 선을 긋는 듯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런 지지부진한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며 토마스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찰리의 딸, 엘리이다. 찰리에게 소중한 존재 중 하나인 엘리의 등장은 곧 그에게 ‘구원’이 내려올 것이라는 생각을 자아내게 만든다.
엘리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찰리를 증오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엘리가 가장 솔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찰리는 에세이를 쓸 때 솔직함을 강조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리즈는 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가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토마스는 사실 교단의 돈을 훔치고 도망친 자신의 의견대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모순 투성이인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솔직함을 가지고 있는 엘리는 파란을 가져온다.
엘리는 끊임없이 찰리의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부분을 건드렸고, 종국에는 찰리를 비롯한 리즈, 메리(리즈의 엄마), 토마스까지 파멸로 이끈다. 아니, 이끄는 듯하다.
엘리에 의해 찰리와 다시 만난 메리는 찰리에게 숨기던 엘리의 탈선을 들켜버린다. 또한 리즈는 자신을 속이고 엘리를 위한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엘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토마스의 말을 녹음해 토마스의 부모님과 교단에 보낸다. 이런 행동은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듯 보이지만 메리는 찰리와의 대면을 통해, 리즈는 실망하여 떠나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또 토마스가 흥분한 듯 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도리어 엘리의 솔직한 행동이 그들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찰리의 모습을 자신의 SNS에 올리는 엘리의 행동을 시작으로 찰리는 각종 외부에서 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온몸으로 받게 된다. 자신이 자주 시키던 피자집의 배달원의 놀라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토마스가 자신에게 구원을 내리기 위해 찰리의 사랑을 부정하다 끝내 숨겨놨던 찰리에 대한 혐오감을 내비치는 모습을 보며 결국 자기혐오를 터뜨려 버린다. 자신의 강의를 듣던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지나가는 새들에게도 먹을 것을 나눠주던 심성을 가진 이었다. 즉, 찰리는 다들 악마라고 하는 엘리의 행동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엘리의 솔직함이 다른 이들에게 구원이 됐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자신 역시 남에게 가감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도리어 솔직함을 드러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은 찰리는 엘리에게 계속해서 그가 완벽하다 말해주고, 끝끝내 엘리가 읽어주는 엘리 자신이 쓴 '모비딕'에 대한 에세이를 들으며 자기혐오를 버리고 엘리에게 직접 걸어감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 영화 속 찰리는 '모비딕' 속 에이허브 선장이 되기도 하고 모비딕이 되기도 한다. 에이허브 선장이 복수심에 불타는 것처럼 자신(모비딕)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국 엘리가 지신의 에세이 속에서 불쌍하다 평했던 에이허브 선장(찰리)은 결국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모비딕(찰리)에 대한 혐오를 버리며 스스로를 구원하게 된다. <더 웨일>은 결국 구원은 누구에게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솔직함에서 나오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영화의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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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해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하나레이 베이>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레이 베이 Hanalei Bay , 2018 제작
일본, 드라마, 97분
감독: 마츠나가 다이시
토해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하나레이 베이>
경찰관이 죽은 타카시의 잘려 나간 오른 다리를 사치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커다란 상어에 다리를 뜯겨 죽었습니다.” 사치는 무표정으로 아들의 유류품을 받고, 유골함을 고르고, 아들이 묵었던 호텔비까지 계산한다. 그리곤 아들을 빼앗은 하나레이 해변을 온몸으로 마주한다. <하나레이 베이>의 포스터를 봤을 때부터 그녀가 절대 쉽게 울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사치는 정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오직 바다만을 바라봤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도에 꽂힌, 초점 없는 눈동자. 깊이를 알 수 없는 사치의 공허에 상실이 자리한 걸 본 순간, 우린 그녀의 상실을 채운 게 자식을 잃은 슬픔과 그리움 때문만이 아님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사치는, 아들만 떠나보낸 게 아니었다.
출처: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그녀는 평생 엄마로만 살아왔다. 예상했듯, 행복만이 가득한 생활은 아니었다. 마약쟁이 남편의 폭력과 불륜은 사치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끝내 망가트렸다. 사치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자아(위치)가 한때 꿈꿨던 피아니스트도, 남편에게 맞는 아내도 아닌 타카시의 엄마임을 가슴 깊이 새겨야만 했다. 아들만 있는 엄마의 역할과 남편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우는 일도 처음이라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그녀를 숨 막히게 한 건 증오하는 남편을 닮은 아들을 ‘사랑만’ 하는 일이었다. 사치는 실패했고, 시간이 갈수록 아들과 멀어졌다.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아들은 사치를 이기적이고 억척스러운 엄마로 여기며 밀어냈고 하와이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고 싸늘한 주검으로 사치 앞에 나타났다. 아들의 죽음은 아슬아슬한 곡예처럼 흘러가던 모자 관계를 단번에 끝냈고, 진짜 혼자가 된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아들을 죽인 하나레이 해변, 아니 아들이 ‘사랑한’ 하나레이 해변뿐이었다.
하나레이 해변, 그곳은 무려 10년 동안 사치의 휴가 장소로 이용됐다. 사치는 일본에서 일상을 보내며 살다, 매년 아들이 죽은 날이 가까워지면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하와이로 떠났다. 해변에서 책을 읽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또 바다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고, 가끔 바에 가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정으로 특별한 것 없는 휴가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들을 모조리 외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치는 섬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섬 주민들도 여전히 멀리했다. 타카시는 분노로 휩싸인 전쟁 때문이 아닌 불가항력의 힘으로 인해 자연으로 돌아간 거라며 섬을 원망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은 경찰관과 타카시의 손도장을 건네며 애도의 끝을 강요하는 여자의 마음은 그녀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 사치의 시선은 계속 바다를 향했고, 표정 역시 아들의 잘린 다리를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출처: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수동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사치를 변화시킨 건, 두 청년이었다. 그들이 사치의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 건, 주민들과 달리 그녀의 비극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서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온 가난한 서퍼들이 타카시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빨간 보드를 든 외다리 서퍼를 봤다’라는 말 한마디로 사치 옆에 아들을 존재하게 했다. 사치는 그 외다리 서퍼를 찾기 위해 해변을 헤집기 시작한다. 외다리 서퍼가 타카시라고 굳게 믿으며 찾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사치는 외다리 서퍼를 만나지 못하고 결국 참았던 분노를 터트린다.
"난 아들을 싫어했어요. 그래도 사랑했어요. 난 이 섬을 받아들이려 했는데 이 섬은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아요. 그럼 그것도 전 받아들여야 하나요?"
사실 사치는 10년 동안 하나레이 해변을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남편과 다를 바 없는 아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릴 수 없는 아들을 자각하며 원망했다. 어느 날엔 아들과의 관계를 놓아버렸던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한없이 가여웠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억울해했다. 늘 거친 태풍에 흔들리며 사는 나와 어떤 파도도 유연하게 넘기며 살았을 서퍼(아들)를 같은 선상에 두고 곱씹기도 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딱 잘라 정의할 수 없었고, 그것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아들과 함께 잃어버린 ‘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 긴 혼란의 시간 동안, 사치는 빛 한 줌 허용치 않는 어둠과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는 파도 속에서 곡예를 먼저 중단해 버린 자를 끝내 가려내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자신이 진짜 애도 중인 건지 아닌 건지도 판단하지 못했다. 대신 부정과 외면을 택했다. 분노, 슬픔, 고통, 미움, 외로움, 그리움을 매 순간 침묵으로 바꾸고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으며 하나레이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는 척했다. 그렇게 고립을 자처했다. 이미 일어난 비극을 회피하지 못하는 현실이 아닌, 떠난 아들과 화해는 물론 남겨진 나를 용서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과거에 갇힌 채 말이다. 사치에게 하나레이 해변은 처음부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독하게 가혹한 곳이었고 그녀가 품은 혼돈의 근원일 수밖에 없었다.
출처: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모든 감정을 토해낸 사치는 마침내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손도장을 가슴에 품으며 긴 침묵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타카시가 사랑한 해변에 서서 고백한다, 떠난 네가 너무나 보고 싶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기에 가혹하다. <하나레이 베이>는 가혹함을 조금도 덜어내지 않고 ‘가혹’하다고 말하며 사치의 애도를 응원했다. 섬을 거부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분출하고, 비극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걸 멈추길 기다렸다. 말없이 파도만 보는 모습도, 외다리 서퍼를 찾느라 혈안인 모습도, 결국 참았던 울분을 모조리 토해내는 모습도, 전부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잔잔한 파도의 형태를 빌려 끝까지 함께 했다. 상실을 인지하고 스스로 옭아맨 혼란을 마주하는 과정은 곧 치유의 발판이었으니까. 사치가 토해내지 못했던 것들은, 전부 토해내야만 비로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눈과 마음에 가득 들어찬 하나레이 해변이 전하는 깊은 위로가 이제야 한없이 보이듯이.
출처: 영화 <하나레이 베이> 스틸컷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햇빛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사치와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빨간 보드를 든 타카시. 그런 아들을 보며 미소 짓는 사치까지‥. 참으로 아름답고 눈부신 작품이다. 영상미도 뛰어나지만,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편집이 무엇보다 예술이다. 사치의 고요가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오는 장면 전환은 그녀의 몸의 언어를 만나 완벽한 한 장면, 장면을 만들어 낸다.
<하나레이 베이>는 『상실의 시대』, 『1Q84』를 집필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도쿄기담집」에 실린 단편)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이 주는 감동을 충분히 담아낸 작품이니 꼭 보길 추천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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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역시 조정석!
개봉 첫 주 <파일럿>이 <데드풀과 울버린>을 밀어내고 1위에 올라섰습니다.
누적 관객 수 174만여명으로 20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한편 <데드풀과 울버린>은 지난 7월 24일날 개봉했지만 한주 뒤 개봉한 <파일럿>보다 저조한 누적관객수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2024 청불 영화중 최고 흥행작에 등극한 작품으로 글로벌 수익8116억원을 벌어들이며 엄청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또한 <데드풀과 울버린>이 1위를 기록했으며 정이삭 감독의 <트위스터스>가 2위,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미스터리 스릴러 <트랩>이 3위를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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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영화 그 이상
8★/10★
뮤지컬 영화 그 이상을 본 것만 같다. 1964년에 제작되어 제1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쉘부르의 우산〉 이야기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뮤지컬 영화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사가 노래다.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로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영화를 연출한 자크 드미 감독도 이 영화를 ‘시네 오페라’라고 부르며 음악성에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쉘부르의 우산〉의 장점은 음악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과 어우러지는 드라마 역시 굉장히 강렬하다. 여러모로 〈쉘부르의 우산〉은 음악과 이야기에는 ‘진보’가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전자제품처럼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자연히 더 좋은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기와 쥬누비에브다. 둘은 모두 프랑스의 조그만 항구도시 쉘부르에 산다. 기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고, 쥬느비에브는 어머니를 도와 우산 가게에서 일한다. 서로를 깊게 사랑하는 둘은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우선 20살인 기는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다. 더불어 16살의 쥬느비에브 역시 너무 어린 나이에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힌다. 쥬느비에브의 가게 상황이 좋지 않은 것도 가난한 정비공 기와의 결혼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이유다. 즉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말고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지원받지 못하는 상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둘은 모든 고난을 극복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말이다.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에게 입영 영장에 날아오고, 둘은 급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다. 서로를 향한 둘의 마음은 여전히 굳건한데, 주변 상황은 자꾸 둘의 관계를 흔드는 상황도 반복된다. 부대 상황이 좋지 않아 자주 연락하지 못하는 기, 어머니의 설득과 핀잔에 점점 피로해져가는 쥬느비에브…. 그러나 결정적인 건 쥬느비에브의 임신이다. 임신으로 정신적‧신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 쥬느비에브는 결국 카사르라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다. 카사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자로 기의 아이를 임신한 쥬느비에브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를 결심할 만큼 쥬느비에브에게 진심이다. 쥬느비에브 역시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복잡한 상황과 불확실한 기와의 관계에 괴로워하기보다 자상한 카사르와 결혼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알제리에서 돌아온 기는 뒤늦게 쥬느비에브의 소식을 듣고 좌절‧방황한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쥬느비에브의 우산 가게를 쓸쓸히 배회하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기도 한다. 그러나 쥬느비에브가 카사르를 만나 위안을 얻었듯 기에게도 또 다른 여인, 사랑이 찾아온다. 기는 이제야 몸이 아픈 자신의 대모를 오래전부터 간호해온 마들렌의 존재가,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마들렌의 마음이 눈에 들어온다. 마들렌은 기가 쥬느비에브에게 실연당한 아픔을 자신에게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만 기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그와 결혼식을 올린다.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두 연인은 얄궂게도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해 서로를 잊은 듯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은 기와 쥬느비에브의 우연한(혹은 의도된) 만남으로 마무리된다. 각자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둘은 짧은 몇 마디 말로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지난 세월을 아련히 회상한다. 더불어 누군가는 서로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내보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 가능성을 단호히 잘라낸다. 운명과 사랑의 엇갈림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장면은 비극(기와 쥬느비에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희극(새로운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둘)이 동시에 공존하는 삶이라는 드라마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쉘부르의 우산〉은 사랑, 음악을 다루는 영화의 계보에 오래도록 기록될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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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할 수 없는 어딘가에 갇혀있는 사람들
'여름에 공포 영화를 보자'라는 말은 누가 만들어냈을까? 난 특히 여름에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다. 공포 영화는 라면 같은 존재다. 어느 순간에든 보기 좋은 그런 장르다. 그리고 공포 영화라고 해서 특히 여름에 개봉하거나 그러지는 않는 것 같다. 로맨스 영화라고 봄에만 개봉하라는 법 있나? <이터널 선샤인> 같은 영화도 겨울이 주요 소재인 영화인걸? 사실 계절에 특화된 장르라고 하는 건 없을 것이다. 그냥 잘 만들면 모두가 행복하다.
그렇게 잘 만든 영화는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충분하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세상이 알아봐 주지 않아서 혼자서 불행하다. 왠지 많이 언급된 것 같은 영화 <소름>, 초중반부의 잔잔함과 쉽지 않은 이미지도 없어 '뭐가 무서운가'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일단 넷플릭스에서 서비스하고 있지 않다. 어찌 보면 '뭐야 재미없을 것 같은데?' 어림짐작하기 쉽고 손도 안 갈 것이다. 네이버에 들어가서 일일이 1200원 주고 결제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리뷰어들과 평론가들, 또 팬들이 '왜 우리 호러영화의 클래식 중 하나'라고 언급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영화 <소름>은 갑툭튀 점프 스케어 없이, 잔인한 비주얼 없이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는 공포영화다. 은근히 많이 못 본 영화 <소름>. 집에서 연인 혹은 가족, 친구들과 불 끄고 태블릿(모바일)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분명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2001년 낡아 무너질 것 같은 금화 시민아파트로 가보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방인
낡은 아파트에 새로운 입주자가 생겼다. 미금 아파트 504호에 새로 들어온 남자의 이름은 용현이다. 504호에는 끔찍한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용현이 입주하기 전에 소설가 광태가 불에 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집주인은 사람이 죽었다는 부정적인 에피소드에도 불구하고 사후처리를 깔끔하게 마무리짓지 않았다. 같은 5층에는 선영이라는 여자가 살고 있다. 선영은 아이를 잃어버리고 남편에게 맞고 산다. 남편은 이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 매일 도박에 빠져 선영을 때리고 있다.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번 돈도 다 뺏어가는 나쁜 놈이다. 용현의 이웃사촌으로는 출판사 하다 망한 남자가 살고 있다. 이 남자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공포소설을 쓰고 있다. 선영의 이웃에는 동네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강사 은수가 살고 있다. 이 은수는 화재로 사망한 작가를 사랑하던 여자였다. 선영과 은수는 금세 친해지게 된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용현은 선영에게 관심이 있다. 내면이 상처 투성이인 선영. 용현을 그냥 무시하지만 보유 중인 택시로 선영을 데려다준 일을 계기로 어느 정도의 친분이 쌓이게 된다. 근데 남편은 세상 둘도 없는 찌질이다. 이를 보고 선영을 구타하는 남편. 이 폭력사태는 가라앉을 틈을 주지 않는다. 점점 더 심하게 맞는 선영. 선영은 참다못해 남편을 살해하게 된다. 선영과 용현은 남편의 사체를 유기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선영과 용현은 예견조차 하지 못했던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가장 무서울 법한 것
작년에 <랑종>을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난다. 호불호가 강력하게 갈렸던 이 영화. 나는 극장에서 나가고 싶을 정도로 무서웠는데 싫어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영화가 무서웠던 이유는 '설마 이렇게 될 것 같아'가 죄다 맞아떨어져 서다. 그리고 그 예상이 점점 수위를 높이면서 커졌으니 눈을 질끈 감고 봤다. 이 <소름>이 견지하고 있는 공포도 이와 유사하다. 모두의 인생에 있어 가장 무서운 일이 뭘까? '설마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만약에의 공포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른 태도로 이 '만약에의 위기'를 벗어나곤 한다. 근데 이 위치에 한번 쳐해 보면 삶을 살아가면서 이 기억이 계속해서 든다. 또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저 사람처럼 되면 어떡하지. 이 두려움과 함께 인생의 과제들을 이겨낸다. 그게 나를 포함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인생일 것이다. 영화는 우리 내면에 있을법한 구멍을 포착해서 촘촘하게 그물을 짜 놓았다. 이 영화가 호러 분위기를 만드는 설정 중 하나는 주인공들이 '이렇게 되지 않을까'라고 짐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게 짜여 있는 소설처럼 이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얼핏 던져졌던 키워들이 하나하나씩 모여 광폭하게 폭주한다. 이 폭주하는 이야기는 '왜 예견하지 못했음에도 이 운명에 기시감이 드는가'를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아파트의 안과 밖
아리 애스터의 <유전>이 생각난다. 이 <유전>에서 중요했던 설정 중 하나는 네 명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 집은 애니가 구현했다. 애니는 디오라마 아티스트다. 애니는 이 집을 디오라마로 묘사했다. 이 '집과 인물'사이의 관계는 이 영화의 키워드와도 어울린다. 세상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애니의 맘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공간인 '집'과 애니의 직업이 공포를 만드는 소재로 쓰인 것이다. 이와 별개로 오두막이라는 공간은 또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된다. 누가 여기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 와 같은 사소한 포인트 하나하나가 엔딩신을 향해 달려가는 디딤돌이니 아리 애스터가 설정한 공간적 배경은 영화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이렇게 공포영화에 있어 공간 세팅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는 우리나라 공포영화 <불신지옥>에서도 재현됐다. 아파트라는 공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 <소름> 역시 앞 두 영화처럼 아파트라는 공간 세팅이 중요하다. 일단 분위기를 만드는 미술의 비주얼이 눈에 띈다. 당시 금화 시민아파트의 외관에서 오는 낡은 비주얼은 낡았기 때문에 압도적이다. '저주가 걸린 집'의 개연성을 주는 듯한 공간 설정이었다. 또 이 아파트 안에 깔려있는 수많은 유사 쓰레기들, 듬성듬성 붙어있는 벽지, 누리끼리한 아파트의 색감까지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는 아파트라는 공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아파트만큼이나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는 공간은 '아파트 밖'이라는 설정이다.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서서히 조여드는 압박감과 패배감이다. 근데 영화 전반적인 줄거리가 '이렇게 될 것 같아서 발버둥 치는 내용'이라 '이렇게 했기 때문에 저렇게 대응함'식의 반복이라면 이 영화 하이라이트에 집중되는 압박감이 살짝 퇴색될 수도 있다. 영화는 해야 할 말에 힘을 빡 주고 있기 때문에 선영과 용현이 아파트 밖에서 행복한 모습을 중심으로 극을 이끌고 간다. 이 두 사람이 느꼈던 행복까지 누군가가 설계한 공간 아래에 놓아있는 사람처럼, 영화는 두 인물을 그렇게 묘사한다. 공간마다 임팩트를 주는 윤종찬 감독의 연출이 빛을 발현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반짝반짝 빛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김명민, 장진영 배우다. 지금 2022년 김명민 배우는 드라마 판에서 슈퍼스타다. 그와 반대로 영화 출연작들은 죄다 시원찮다. 솔직히 하나도 기억이 안 날 정도다; 근데 이 <소름>은 김명민 배우의 영화 출연 이력 중 가장 빛나는 영화가 아닐지 생각이 든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차가운 연기와는 정반대의 퍼포먼스를 소화한다. 비극적인 성장 서사를 갖고 있는 탓에 폭발하는 분노, 선영에게 의존하는 내면, 이기적인 성격, 또 후반부 특정 신의 표정연기까지 파릇파릇한 김명민 배우의 높은 잠재력이 느껴지는 영화다. 또 지금은 별이 된 장진영 배우도 굉장히 뛰어났다. 이 영화에는 베드신이 있다. 또. 남편에게 맞는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어 리액션 연기를 이끌고 가야 한다. 내가 배우라면 '이런 역할 해보고 싶다'라고 행복 회로를 굴릴 법한 역이었다. 장진영 배우는 이를 서릿발같이 차갑게 소화하며 영화의 분위기를 잘 이끈다.
앞의 이 두 배우의 연기도 탁월했지만 기억에 남는 건 기주봉 배우다. 홍상수 영화에서 '사랑이 최고야' 외치는 아저씨로 자주 봤던 기주봉 배우. 이 영화에서의 기주봉 배우는 '아런 역할일 것 같아' 예상하지만 그 외의 방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대사 치는 톤, 표정, 인상, 심지어 글 쓸 때의 자세까지 홍상수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테크니컬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엇을 절제하고 있는가'라는 인물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멋진 연기였다.
맨 위의 위로
많은 분들이 모를법한 영화다. 실제로 관객 수가 10만 명도 되지 않았으니 구체적인 수치도 근거로 들 수 있을 정도다.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도 윤종찬 감독이 비교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분이고 넷플릭스나 왓챠에 서비스하고 있는 영화도 아니다 보니 접근성이 그렇게 높진 않다(그 대신 네이버에서 1200원으로 구매할 수 있다. 나도 이를 통해서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공포는 우리나라 호러 영화 중 위에 있는 이유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장진영 배우의 파리한 비주얼, 소리 지르는 톤, 김명민 배우의 뜨겁게 폭발하는 광기, 낡은 아파트, 깜빡깜빡거리는 조명, 귀가 아픈 빗소리, 어두운 색감 등 이미지에 의한 공포-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도 챙기면서 서서히 내면을 잠식시키는 공포를 많은 분들이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곡성>과 함께 우리나라의 호러 영화 중 가장 돋보이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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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영화 후기 / 최민식이 다했나? / 감동이 살아있음 / 바흐의 무반주 첼로 연주곡 / 파이송이 뭐지?
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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