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까기의 종이씹기2025-07-24 20:53:09
코고로는 거들 뿐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리뷰
스포일러 주의!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이하 <척안의 잔상>)은 10개월 전, 국립천문대 노베야마에 침입한 괴한을 추격하다가 눈사태로 인해 왼쪽 눈을 잃은 야마토 칸스케의 사연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모리 코고로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의 주인은 '와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메타니 코지라는 인물로, 형사 시절의 코고로의 동료였다. 와니는 코고로에게 나가노현에 있었던 눈사태 사고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며 급하게 약속을 잡게 된다. 약속 당일, 공원에서 코고로를 기다리던 와니는 누군가에 의해 총상을 입고 사망하고 만다. 이로 인해 코고로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분노에 차오르면서 다른 형사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범인을 추격하려 한다. 그와 동시에 코고로를 따라 현장에 있었던 에도가와 코난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공안의 도움을 받아 범인을 밝혀내려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명탐정 코난>의 28번째 극장판이다.
시즈노 코분이 떠난 이후, <명탐정 코난> 극장판은 회복기에 들어선 모양새다. 본격적으로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 <명탐정 코난: 할로윈의 신부>(이하 <할로윈의 신부>)를 시작으로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이하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까지 최근에 나온 극장판들은 과거에 비해 나쁘지 않은 완성도를 이어왔다. 이번에 개봉한 <척안의 잔상> 역시 비슷하다. 이번에도 무난하게 잘 만들었다. 가장 긍정적인 지점은 추리 부분에서 많은 향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극장판들, 그중에서도 완성도가 좋은 영화들조차 추리에서 약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척안의 잔상>의 경우에는 추리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이 눈에 띈다. 소소한 개그처럼 지나갔던 대목(모든 캐릭터들이 코고로에게 왜 코지로를 와니라고 부르는지 의문을 가지는 부분)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거나, 중간에 오토모 타카시라는 캐릭터를 추가하여 이전까지의 추리를 꼬는 방식은 근래 극장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다. 다만 캐릭터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다 보니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렵고, 여러 사연들이 얽혀 있는 각본의 구조 때문에 추리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추리 부분은 가까스로 회복했지만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구간도 있다. 바로 액션이다. 물론 이제 이 시리즈에서 (정도는 지킨) 과장된 액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다. 아예 제작진이 극장판의 전매특허로 내세우려는 심상인지, 뻔뻔하게 밀고 가는 듯한 태도가 몇 년 간에 걸쳐 여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부는 좋다. 그러나 초반부에 나오는 액션은 이를 감안해도 실망스럽다. 초반에 코난이 범인을 쫓기 위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추격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코난이 오토바이를 향해 정면으로 돌격하는 부분이나,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고 축구공을 차는 모습이 나오는데, 지나치게 과장된 것은 둘째치더라도 너무나 유치한 연출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초반의 액션을 지나고 나면 후반의 액션은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범인의 이동식 관측 차량을 쫓던 코난과 코고로가 함께 "절대 놓치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둘의 모습이 겹쳐지는 장면, 코고로가 범인의 차량을 향해 결정적인 한 발을 쏘는 장면은 코고로의 서사를 따라온 관객이라면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연출되었다. 이전까지 폭탄을 쓰거나, 비행기 위에서 칼싸움을 하는 액션보다 이런 식의 깔끔한 하이라이트를 원했던 관객에게는 나름의 갈증을 해소시켜준 대목이기도 하다.
캐릭터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렇게 갈리게 된 이유는 이야기 때문인데, <척안의 잔상>의 각본은 전반적으로 난잡하다. 추리를 위한 복선도 넣고, 캐릭터들 활약도 챙기고, 액션도 넣고, 주요 인물의 드라마도 넣다 보니 내용이 산만해진다는 점은 다른 극장판들과 비슷하지만 <척안의 잔상>은 이게 유독 심한 편이다. 중심인물을 무려 네 명이나 세팅한 것이 원인이다. <할로윈의 신부>는 아무로 토오루, <명탐정 코난: 흑철의 어영>(<이하 <흑철의 어영>)은 하이바라로 스포트라이트를 줘야 할 인물이 명확했는데 <척안의 잔상>의 경우에는 나가노 3인방에 모리 코고로까지 합세해버렸다. 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캐릭터가 생겼다. 나가노 3인방은 드라마가 상당히 잘 표현됐지만, 코고로는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게 될 거란 초반의 기대와 달리 중반 이후부터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다가 결말부에 가서야 잠깐 존재감을 발휘하고 활약이 끝나버린다. <명탐정 코난: 수평선상의 음모>처럼 코고로가 직접 추리를 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식의 활약은 안타깝게도 이번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챙겨야 할 캐릭터들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스포트라이트를 줘야 할 캐릭터를 챙기지 못한 각본 탓이다. 차라리 나가노 3인방과 코고로의 이야기를 별개의 극장판으로 제작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래도 <척안의 잔상>의 혼란스러운 각본을 지탱하는 것은 '상실'이라는 키워드다. 작중 캐릭터들 중 대부분이 주변 사람을 잃은 것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나가노 3인방 중 한 명인 타카아키는 동생 히로미츠를 잃었고, 코고로는 절친인 와니를 잃었다. 작중 피해자로 등장하는 에이조는 자신의 딸 마키를 잃었고, 마키와의 혼인을 약속한 아츠노부 역시 상실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범행을 저질렀다. 나가노 3인방 중 남은 인물인 칸스케와 유이는 실질적으로 누군가를 잃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서로를 잃어버렸다고 봐도 될 만큼 서로 간의 관계에 흠집이 나 있는 상태다. <척안의 잔상>은 이러한 캐릭터들이 서로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럼에도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라는 주제로 나아간다. 이러한 대비가 범인 아츠노부와 그에 대적하는 인물들을 통해 형상화되어 있으며, 결말부에 경찰의 직업윤리를 읊는 장면에서 이러한 주제를 훈계에 가까운 수준으로 강하게 드러낸다. 물론 여타 상실을 그리는 영화에서는 수도 없이 반복된 주제이지만 이걸 작품의 주요 소재인 '사법거래'라는 사회 문제와 엮어서 하니까 나름 색다르게 다가온다. <흑철의 어영>에서 인종주의 텍스트가 발견된 것처럼 확실히 최근 들어 이 시리즈가 시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은 충분히 만족스럽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극장판이다. 최근작들과 비교하면 <할로윈의 신부>, <흑철의 어영>보다는 살짝 아쉽지만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보다는 나은 완성도로 나와준 것 같다. 이전의 문제점들을 차례차례 해결하고 있는 노력에 대해서는 칭찬이 아깝지 않지만, 다음 작품은 무난한 정도를 넘어서 수작의 완성도로 나와주기를 바란다. 이제 엄청난 극장판 하나 보여줄 때도 되지 않았나.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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