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025-06-14 10:57:52
놓아주다의 의미가 뭔가요?
샌디 탄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2018
어떤 이야기들은
쓰고 싶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쓸 수밖에 없었기에 쓰여진 것 같다. 창작자와 창작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작품들을 마주하게 되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그 모든 이별에 함께하고 싶다.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는 영화평론가로 일하고 있는 샌디 탄이 감독한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를
만들고, 평론가가 되었다가 영화 학교를 찾아간 그녀는 작품의 앞머리에 이런 내레이션을 넣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로 가야했다.’
1990년대의 싱가폴에서 10대 소녀로 살아가는 영화광 샌디와 친구들은
로드 무비 <셔커스>를 만든다. 그들에겐 교사이자 셔커스의 감독이기도 한 어른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조지이다. 이후 그는 패기와 열정이 반짝거렸을 셔커스의 필름을 들고 잠적하고, 샌디와 친구들은 필름뿐만 아니라 그 시절을 모두 잃은 듯한 허망함을 느낀다.
특히, 샌디는 셔커스를 잊으려 애썼다.
20년 후 조지가 죽고 셔커스의 필름이 다시 샌디에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 말이 그 때의 셔커스가 돌아왔다는 의미는 아니다. 샌디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절과 아픔을 마주한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보기 두렵다는
이유로 등에 지고 가는 게 아니라 직접 바라보고 끌어안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우린 대상을 온전히 마주하는
순간에만 작별인사를 건넬 수 있다.
‘네가 할 일은 셔커스를 다시 살리는 게 아니라 셔커스에 내세를 주고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는 거야.’
이 글에서만큼은
조지가 왜 필름을 훔쳤을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는 셔커스에서 떼어낼 수 없는 존재지만, 이 멋진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셔커스가 정말 좋았던 건 감독이
상실과 이별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고, 비슷한 아픔을 겪는 이들이 함께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며, 더하여 영화는 무엇인지, 왜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지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실존하지 않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건 어찌나 외롭고 환상적인지. 작품을 보며, 세상에
없는 ‘셔커스’를 그리워하는 샌디와 내 모습이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겹쳐 보였다. 결국 영화라는 이름의 허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 외로운 사람들이 허상의 존재에 마음을 기워 붙여 무게를 더하고, 부피를
키워온 걸까.
세 친구가 여전히 영화 일을 하고 있어 기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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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하고, 흐리고, 타오르지 못한 청춘들
최근 스크린은 다시금 '청춘'이라는 키워드를 소환하고 있다. 네오 소라감독의 <해피엔드>부터 안소니 첸의 <브레이킹 아이스>, 그리고 <한국이 싫어서>에 이르기까지, 국적도 언어도 다르지만 이들 작품은 기묘한 공명으로 연결된다.
각기 다른 국적의 젊은 감독들이 포착한 동시대 청춘의 초상은 명확한 해답 없이 부유하는 시대의 공기 속에서 저마다의 불안과 혼란을 힘겹게 감내하는 얼굴들이다.
답답한 현실,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존재론적 공포. 이들의 서사는 다르지만, 정서는 맞닿아 있다.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춘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공언했던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을 다시 보았다.
감독은 '푸른 봄'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통속적인 낭만성을 일찌감치 거둬낸다.
영화 속 세 젊은이, 종수, 해미, 그리고 벤은 따스함이나 찬란함과는 거리가 먼, 미세먼지처럼 부옇고 쾌쾌한 현실 속에 위태롭게 존재한다.
이들의 삶은 무언가를 향한 갈망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대상의 실체도, 방향 감각도 불분명한 욕망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휘청인다.<버닝>을 마주하는 경험은 종종 불쾌하고 껄끄럽다. 감독은 인물들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차마 말할 수 없거나 혹은 말하고 싶지 않은 감정의 응어리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영화는 현실의 무게와 불가해한 세계 앞에서 무력한 개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예컨대, 파주, 북한과 맞닿은 접경 지역의 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해미의 춤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녀는 아프리카 부시맨의 '그레이트 헝거' 춤을 추며 삶의 의미를 갈망하는 듯하지만, 그 몸짓은 공허한 하늘 아래 한없이 작고 위태로워 보인다.
카메라는 해질녘의 붉은 스산한 빛 속에서 반라의 몸으로 춤추는 해미의 모습을 무심한 듯 담아내며, 그녀의 존재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덧없음, 혹은 이미 사라지고 있는 중임을 암시한다.
이 장면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불안하며, 청춘의 열망이 실체 없는 허공을 향해 흩어지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것 같다.벤이 종수에게 폐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고백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가졌지만 정작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주기적으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벤의 말은, 종수에게는 해미의 실종과 연결되는 섬뜩한 암시로 다가온다.
여기서 비닐하우스는 사회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혹은 해미처럼 연고 없고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의 은유로 읽힌다.
벤에게는 그저 유희에 불과한 '태움'의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생존과 직결된 절박함일 수 있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한 단면과 계급적 박탈감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카메라는 벤의 말에 동요하는 종수의 불안한 눈빛과 대비되는 벤의 무심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교차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의 부조리와 그 안에서 느끼는 개인의 무력감을 생생히 체험하게 한다.혜미는 질문도, 판단도 유보한 채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가 키우던 고양이 '보일'처럼, 존재했는지조차 불분명한 흔적만을 남긴 채. 종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혹은 알기를 거부한 채 살아간다.
그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 적도, 제대로 분노해 본 적도 없는 듯, 깊은 무기력에 잠식되어 있다.
결국 종수의 내면에서는 어떤 감정도 쉽사리 타오르지 못한다. 해미의 사라진 비닐하우스처럼, 청춘 또한 실체 없이 연기처럼 스러져가는 듯하다.지금의 청춘은 과연 '버닝'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향해 태워야 하는가.
<버닝>의 마지막, 종수가 벤의 포르쉐와 자신의 옷가지를 불태우는 장면은 처절하지만 모호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분노의 표출인가, 자기 파괴인가, 아니면 무력한 현실에 대한 절망적인 몸부림인가.어쩌면 지금의 청춘은, 이창동 감독이 포착한 것처럼, 붉고 노랗게 타오르다 이내 서늘하게 파래지며 스러지는 저녁 하늘처럼, 찬란하게 '타오르기'보다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싶은'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가장 정직한 감각이자, <버닝>이 던지는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의 무게일 것이다. 이 영화는 불안하고, 흐리고, 끝내 타오르지 못한 청춘들을 위한 쓸쓸한 진혼곡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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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곧 일일시호일
나의 취미는 영화를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차를 마시는 취미도 있다. 그렇다고 대단한 다도를 하진 않는다. 물론 다도를 하시는 선생님께 배워보기도 하였지만 다도는 격식이 굉장히 강조되는 행위라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도 행위에서 내가 할만하다 싶은 것만 취사선택하는 편이다. 그래서 제대로 다도를 배우거나 다도 자체에 큰 열정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차를 취미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차 자체가 가진 맛을 좋아해 차를 최소 하루에 한 잔은 먹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커피 한 잔, 차 한 잔은 꼭 마신다. 그래서 올해에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차를 테마로 한 중국 여행'을 드디어 실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눈이 돌아서 자스민부터, 백차, 운남 홍차 등 여러 홍차를 대량구매하고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예술이라고도 평가되는 다도에 관심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차와 함께 하는 차생활자 정도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에 차에 꽂힌 것은 어머니의 취미 생활이 다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집에 차가 넘쳐났고, 자연스럽게 차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일일시호일'이 개봉한 이후, 어머니가 참여하고 계시는 차 모임에서 이 영화가 꽤나 핫한 대화주제였던 듯했다. 그래서 한 번 보라는 추천을 받았고, 그래서 봐보았다. 일본의 명배우 키키 키린 배우가 출연했던 점도 영화를 보게 된 어필 포인트였다. 그래서 보았고, 솔직히 말하면 지루했다. 그런데 그 지루함이 나쁘지 않았다. 차라는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와는 달리 '내 길을 간다'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취미인 만큼 무조건 빠르게 세상에 발 맞춰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지점이 오로지 차를 주제로 했다는 것이 느껴졌고, 차를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를 주제로 한 영화는 세상사의 기준에서 지루함이 디폴트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노리코는 처음 다도를 시작했던 미치코와는 다른 곡선의 인생을 산다. 속도로 치면 미치코는 빨리 가는 편이고, 노리코는 느긋한 편이다. 언제나 자신보다 인생 경험을 일찍 하는 미치코를 보며 노리코는 조급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노리코는 관성적으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독인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사람마다 가는 속도가 전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나이대에 꼭 해야만 경험치는 따로 있지 않다. 내가 20대에 하는 경험을 누군가는 30대에도 할 수 있고, 70대가 되서야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나 블로그에 나돌아다니는 글들 중에서 '20대에 꼭 해야 할 인생 경험 리스트' 같은 그런 젊은 세대들에게 조언하는 듯한 글들은 잘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처한 위치와 감정이 다른데, 인생 경험을 나이에 국한하는 것은 좀 젠체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20대에 이런 경험 하지 않으면 너 후회할 걸'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거 아닌 가 싶은 것이, 20대에 그걸 하지 않아 후회하더라도 후회한 이후에 해도 크게 늦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생에 한해서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치코는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였고, 노리코는 자신의 성향과 성향에 맞는 선택을 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노리코의 삶을 더 추구하긴 한다. 느리더라도, 나의 길을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노리코가 차를 마시며 비를 느끼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름에는 녹차를 먹고, 겨울에는 홍차, 보이차 같은 발효차를 많이 마신다. '오늘 날씨에는 이런 차를 먹어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도 영화가 말하고자 한 '일일시호일'을 충족하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차를 마시면서 나의 과거를 관조하되, 심하게 몰두하지 않지는 않고,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삶, 그것이 일일시호일이 아닐까. 내 자신을 내가 평가해본다면, 나는 트렌드에 별 관심이 없고, 내가 관심이 없는 부분에서는 무식할 정도로 잘 모른다. 그래서 주위에 친구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것에 우울해하지도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혼자 잘 노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취미가 차 마시기라는 것만으로도 꽤나 당연한 수순인가 싶다가도 차를 마시는 것을 습관화한 덕분에 '나다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애초에 세상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휩쓸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차 마심으로써 이런 나의 모습이 고착된 것 같다. 이것이 아집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수 밖에 없겠지, 그것이 나의 과제일 듯 하다. 마치 노리코가 차를 꾸준히 하다보니, 차를 가르쳐볼 기회를 얻어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되었듯, 나도 차를 계속 하다보면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노리코를 보면서 희망을 가져본다.
아, 그리고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뜨끔했던 지점이 있다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정제된 몸짓 속에서 정갈한 마음으로 차를 하시는 분들이 나오시는데, 나는 다도라는 장르에서 그 부분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보고 격식도 없이 차를 마시는 무식한 애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격식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격식을 제대로, 반복학습 해가면서 배우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급하게, 속성을 배운 자의 무지함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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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운탕도 끓어야 맛이다
이 글은 영화 [대무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인용하거나 퍼가는 경우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영화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이 언뜻 본다 해도. 영화만큼 종합 예술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형태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인 연기와 음악, 또 시나리오, 화면의 재현 등이 “어우러져야”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보았다는 포만감을 느끼며 영화관을 나서게 될 것임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표값이 치킨 한 마리 가격만큼이나 상승하는 지금은 다들 익숙하고 어느 정도를 보장하는 프랜차이즈 맛의 영화에 자신을 맡겨 안전한 경험을 하기 쉽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시도로 마니아의 입맛을 한 번쯤은 달래주는 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영화 [대무가]는 오컬트 물의 최전방에 서 있는 무당을 주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신빨이 떨어진 무당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더했다. 다시 전성기를 찾기 위해 피 튀기는 굿을 벌이는 세 무당을 보며 관객들은 과연 떡이나 먹고 있으면 될 것인지. 굿 하기 딱 좋은 날씨에 마침맞게 찾아온 영화가 더 보여줄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져 이번 주말 극장을 찾았다.
영화는 다채로웠고.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모든 게 다 들어가 있으니 끓기만 하면 맛은 보장하는 매운탕처럼 보였는데도. 대체 이 매운탕의 어떤 부분이 결국 관객을 아쉽게 했는지를 세 가지 요소를 통해 분석(?)해보려 한다.
재료;이게 다 들어가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를 소재라는 입장에서 보면. 정말 독특하다 못해 탐나는 재료들로 가득하다. 애초에 오컬트 물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입맛을 다시게 하는 재료가 없어 보인다. 무당이라니. 그것도 신빨 떨어진 무당이라니!!! 게다가 그런 무당이 셋이나 된다니!!
그러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당이 셋이나 된다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영화의 균형감이 자칫 잘못하면 깨지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절묘함은 영화에서 칭찬할 만큼 잘 지켜졌다. 세 배우는 각자의 색을 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딘가 한쪽으로 쏠리지도 않았다. 서로의 매력이 완벽하게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기주장을 한다.
또한 온화한 배역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던 정경호 배우의 악역 연기는 새로움과 함께 영화 속의 긴장감도 잘 챙긴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생기도 불어넣는다.
한국에서만 가능한 소재가 연기자들의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이걸로는 무슨 탕을 끓여도 맛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향신료;살인사건, 갈등, 성장
사진출처:다음 영화
물론 재료가 좋은 것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기본 재료의 맛을 끌어올릴 조미료마저 생략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절대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소금과 다진 마늘 같은 갈등과 성장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 기본적인 요소 위에 큰 두 가지 킥(Kick)을 첨가했다.
첫 번째는 무당들의 노래(대무가)를 랩 배틀처럼 풀어냈다는 점이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고해성사를 통해 발전을 이뤄나간다는 면을 지니고 있기에 이런 선택은 꽤나 탁월해 보인다. 여러 영화에서 보여줬던 굿 장면을 생각해보았을 때. 무당의 노래가 괴이하고 소름 끼치게 들렸던 가장 큰 원인(?)중 하나는 그 노래를 알아들을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당의 노래가 귀에 박히면서 그들에게 관객이 주화입마 하기 쉬울 정도의 리듬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 굿을 지켜보기만 한다는 느낌보다 굿에 함께 참여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니까.
두 번째는 살인사건이다. 무당과 살인사건은 가까우면서도 참 멀어 보이는데. 영화 속에서는 이승과 저승의 존재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무당이다.
또한 정경호는 이 신빨 떨어진 무당들이 반드시 용함을 되찾아야 하는 데 있어 기폭제 같은 역할을 악착같이 해내기에 이 동떨어져 보이는 관계 사이의 유착은 영화 내내 꽤나 잘 유지된다.
그 어떤 비린맛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신선한 재료와. 끓기만 하면 입에 쩍쩍 달라붙는 맛을 보장할 매운탕 끓일 준비가 어쩌면 완벽하게 다 끝난 셈이다.
불의 문제인가 냄비의 문제인가. 가게의 문제인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러나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끓지 않는다. 이것이 냄비 자체가 작았던 것인지. 혹은 버너의 가스가 모자라 최대 화력을 내지 못하거나 유지하지 못해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영화는 두 시간 내내 부분적으로만 끓어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찾아보지만. 그 어디에도 부탄가스를 갈아줄 주인이 보이지 않는 심정이다. 영화의 좋은 요건들을 확인한 관객이기에 괜히 애가 닳아 괜히 아직 끓지도 않은 매운탕에 수저를 집어넣어 휘휘 저어 보지만. 아직 이 매운탕은 여기저기 맛이 다를뿐더러 한쪽은 차갑고 또 다른 쪽은 덜 익어 풋내만 낼뿐이다.
그러니 괜히 수저를 집어넣을 때마다 어쩐지 실망감이 이미 익어 곤죽이 된 쑥갓이나 미나리처럼 숟가락에 붙어 올라온다. 스스로의 성미를 탓해보며 꿍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영화가 온 전체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기를 기다리지만. 그 알맞은 순간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세 무당의 대무가 중창에도 오지 않는다.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 “들쑤심”에 있다. 분명 좋은 재료들이었으나 고루 끓지 못해 결국 이 좋은 재료들은 부스러져 매운탕에서 존재감조차 꽤 많이 사라져 버린다. 무엇이 들어갔건 간에 매운탕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결국 펄펄 끓어 온전한 재료의 형상도 갖추지 못한 채. 관객들은 들큼하고 미적지근한 국물만 들이켜다 극장을 나오게 된다.
더 끓었으면 맛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다.
마치면서
투박한 예고편이었지만. 소재 자체가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아쉬웠다. 배우분들의 연기야 뭐 말할 필요도 없었고. 살인 사건과 연루되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아 이거 괜찮다. 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저기 얽혀 있어 풀어낼 이야기가 많은 구조였는데. 잘 살리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컸다.
조금만 더 제대로 미쳤다면 어땠을까. 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이 글의 TMI]
1. 사랑니 후유증 거의 다 없어짐.
2. 그럼에도 모든 배우들의 연기는 대단하다. 그리고 이런 시도가 많아지길 바란다.
3. 환절기라서 레몬 생강청 담글 준비 하는데 또 손 커서 2킬로씩 살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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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바로 여기가 지옥이야
<지옥> 시즌1은 마치 재난 영화처럼 이야기를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특정인들에게 지옥의 사자가 고지를 하고, 죽는 날을 지정한 뒤 그 날이 되면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죄인이라고 지칭된 당사자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이러한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공포에 질리기 시작한다. 그 혼란이 극에 달할 때쯤 종교적인 인물인 정진수(김성철)가 등장한다. 그는 새진리회의 의장으로서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통을 신의 의도로 포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살촉이라는 지옥 추종자들이 생겨나 또 다른 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려는 소도라는 집단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지옥> 시즌1은 지옥 고지와 시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를 그리고, 각자의 입장에서 그것을 해석하며 더 큰 혼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가 갑자기 중세 사회 속으로 돌아간 것처럼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을 연상시키며, 막을 수 없는 재난에 대한 대처 방법으로 종교적인 마음을 이용해 세력을 늘려가는 새진리회가 등장한다. 시즌1이 정진수 의장의 시연과 고지를 받은 갓난아이를 살리려는 현실적인 과정을 그려냈다면, 시즌2는 더욱 혼란스러워진 사회와 갈라진 집단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정진수의 공포
시즌2에서는 부활자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특히 시즌1 중반에 시연을 당해 지옥으로 갔던 정진수 의장이 시즌2 초반에 부활한다. 그의 부활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가진다. 각 집단들이 그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는데 부활자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가 없던 동안 새진리회는 새 의장을 뽑았지만, 그 힘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고, 그 사이에 화살촉의 세력은 더 커졌다. 소도 역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 왔다. 정진수 의장의 부활뿐만 아니라, 시즌1에서 공개 시연을 당했던 박정자(김신록)도 부활하게 되면서, 두 부활자는 상반된 상황을 보여준다.
정진수 의장은 부활한 이후에도 불안한 상태를 지속한다. 그는 사실 지옥 고지를 받은 첫 번째 희생자였다.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고지를 받았던 그는 자신이 왜 죄인으로 지목되어야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가졌던 의문과 공포가 그를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정진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죄 없이 시연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오랜 시간 강력한 공포 속에서 살아왔고, 그 공포는 그가 부활한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를 부활한 메시아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정진수는 전혀 그 위치에 갈 생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을 뿐이고, 다른 부활자들도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번 시즌2에서 등장하는 정진수는 시즌1에서처럼 안정적인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공포에 짓눌려 온전한 자신을 잃어버린 허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그가 엄청난 파급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파급력은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쓰인다. 그리고 그 공포는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두 번째 감정] 각 집단의 혼란
부활자가 등장하면서 새진리회, 화살촉, 소도는 모두 바빠진다. 각자는 자신들이 신의 의도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 조직만이 유일하게 신의 의도를 따르는 집단이라고 주장한다. 소도는 새진리회와 화살촉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지만, 결국 그들도 신의 의도에 대한 자신들만의 해석을 가지고 활동한다. 시즌2에서는 또 하나의 집단이 등장하는데, 바로 정부다. 정부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이수경 정무수석은 점점 혼란에 빠지는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 등 각 세력을 만나며 힘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혼란스러운 현재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각 세력이 가진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국민은 공포 속에 살아가고, 각 세력들이 대립하면서 사회는 점점 무정부 상태로 흘러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등장은 그나마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모습은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과 비교해 씁쓸함을 남긴다. 현실에서 혼란을 방치하고 있는 현 정부와는 달리, <지옥> 속 정부와 관료들은 적어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 내부에서도 신의 의도를 해석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각 조직 내에서도 방향성에 대해 갈등이 존재하며, 내부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새진리회는 부활자 박정자를 이용해 신의 의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발표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화살촉과 소도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다. 정진수 의장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과 이야기 말미에 닥쳐온 또 다른 재난은 이러한 혼란을 극대화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수습하려 할수록 더 많은 변수들이 등장하고, 이로 인해 내부 분열과 사회 시스템의 붕괴가 가속화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감정] 민혜진 변호사의 따뜻함
<지옥> 시즌2는 전반적으로 무척 어둡다. 마치 세상의 멸망을 보고 있는 것처럼, 분열과 혼란, 정치적 모략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보며 불편함을 느끼고, 절망적인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민혜진 변호사(김현주)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 신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으며, 고지를 받은 사람이 죄를 지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고지는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지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도 찾아온다는 점이다. 민혜진 변호사는 그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신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민혜진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마음과 측은지심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그 마음에 따라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일종의 모성애 같은 감정을 가지고 고지를 받은 사람들을 보호하려 한다. 시즌2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반복된다. 그녀는 규모가 커진 소도라는 조직에 속해 있지만, 조직의 이익보다는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전체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민혜진은 어떤 집단과도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사람 자체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시즌1에서 혼자 살아남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나, 부활자 박정자를 구출해 그녀의 아이들에게 데려다주는 과정 등을 통해,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도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느껴진다. 이는 민혜진 변호사가 가진 따뜻함의 온기 덕분일 것이다. 결국 사회를 안정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은 차가운 이성만이 아니라, 따뜻한 감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민혜진이라는 인물은 <지옥>의 세계관에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보인다.
<지옥> 이 훌륭하게 담아낸 혼란
<지옥> 시즌2는 현재의 정치적 혼란을 확장시킨 것처럼 보인다. 각 집단들이 균형을 잡고 나아가지만, 엄청난 혼란과 재난이 닥치면 그 균형은 쉽게 흔들린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는 이 혼란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하겠지만, 국민 개개인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것은 공허한 권력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로 <지옥>에서도 다양한 인물들이 권력을 쥐려 하지만, 시즌2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느 집단도 사회를 안정시키거나 권력을 확립하지 못한다.
이 드라마는 매우 현실적인 재난을 다룬다. 지옥 고지와 시연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고,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액션은 마치 실제 지옥에 온 것처럼 공포감을 자아낸다. 시즌2의 메시지는 시즌1보다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며, 관객들에게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사회 고발적 성격을 지닌 종교적 문제를 다루며, 연상호 감독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더욱 확립했다. 다작을 해온 그에게 <지옥>은 여전히 대표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진수 역을 맡은 김성철 배우는 시즌2부터 새롭게 이 역할을 맡았다. 시즌1의 유아인 배우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김성철만의 정진수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민혜진 역의 김현주 배우는 따뜻함을 감추고 있는 이성적인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박정자 역의 김신록 배우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며, 그녀가 보여준 절망과 고통의 감정은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였다.
<지옥> 시즌2는 사회적 혼란과 종교적 광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다양한 집단이 각기 다른 신념으로 움직이며, 그 속에서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는 모습은 현실 세계의 복잡한 문제들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민혜진과 같은 인물이 주는 작은 희망은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임을 일깨운다. 이 드라마는 단순히 공포를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복잡성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든다. 마치 지금, 바로 여기가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옥> 시즌2는 단순한 드라마 이상의 가치를 지니며, 반드시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이다. 혼란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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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잘 지내나요, 조제.
영화의 국경이 없다는 말이 있듯 개인적으로 로맨스 영화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로맨스를 즐겨보는 편인데 양국의 로맨스 영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매력이 있다. 한국 로맨스는 빠른 전개속도를 가진 현실적인 맛으로 본다면, 일본 로맨스는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나 특별한 소재들을 보는 맛이 있다. 다만, 2000년대 로맨스는 양국을 불문하고 조금씩 닮아있다. 좀 더 간단명료하고 편안하고 담백하지만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는 것. 영화의 전개 속도는 느릿한 반면, 인물들이 세세한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때문에, 2000년대 일본 로맨스 영화도 국내 영화만큼이나 좋아하는 편인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 중 가장 좋았던 영화로 꼽을 수 있겠다.
일본 로맨스가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조금 특별하다는 데에서 시작된다. 불치병이라던가 환상이라던가 같은 것들 말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이런 소재들을 활용하는데 조금 유난하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2000년대 일본 로맨스는 이런 유난함의 적절한 균형을 잘 맞추는 듯 하다. 주인공 조제(이케와키 치즈루 분)또한 마찬가지다. 배경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조제는 걸을 수 없다. 영화 전반적으로도 이유는 알 수 없다. '걸을 수 없다' 라는 전제 조건에서 이미 영화는 시작되어있다. 다만, 유난한 소재에 비해 사건진행은 사소하게 진행된다. 연출상 일본 특유의 문화가 보여 조금 당황스럽지만 뚜렷한 자극 없이 천천히 로맨스의 전개 방식을 따라간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런 면에서 매력적인 영화였다. 자칫하면, 로맨스 영화라는 틀을 벗어나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는 표현하기 어려운 소재를 두고 관객으로 하여금 완전한 한 편의 로맨스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뒤로 미뤄놓고 ... 영화 속 첫번째 관람포인트는 영화 속 여백에 있다. 배경음악과 필름화된 사진들의 적절히 교차시켜 영화 사이에 짧은 여백을 만들어낸다. 전반부에서는 오프닝의 느낌을 살려주려 한 것이 느껴지지만, 후반으로 돌입하며 감정선을 길게 이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둘째로, 당시 년도의 시대상과 배경을 보는 것에 재미가 있다. 국내 정서와는 다른 모습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에서 오는 재미도 영화가 주는 특별한 요소 중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전반적인 배치와 연출에 있다. 영상미는 둘째치고, 전개속도와 더불어 시점의 큰 변화 없이 영화를 끌어가는 것이 흥미롭다. 영화 속 인물들의 양상은 다양하고 시점은 츠네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것이 영화를 후반부까지 잘 이끌어간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제목부터 아이러니한 조합에 이끌려 영화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제목의 의미는 영화만큼이나 특별하다. 주인공인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와의 만남에서 그녀는 자신의 본명인 '쿠미코'라는 이름을 숨기고 '조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현실에선 움직일 수 없고 무엇도 할 수 없는 몸이지만 소설 속 '조제'라는 이름을 통해 사랑을 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전반적으로 그녀는 '조제'로 남아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쿠미코는 어디에도 갈 수 없기에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호랑이'는 그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다만, 츠네오를 만난 뒤 츠네오와 함께라면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츠네오는 상쇄시킬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제는 아주 외로운 곳에서 살았다. 그녀의 공간은 몇 평 되지 않는 방안이었고 만나는 사람은 할머니가 전부였으며 그녀에게 탈출구는 오직 이른 아침에 나가는 산책이 전부였을 뿐이다. 그런 그녀의 삶에 불쑥 등장한 츠네오였다. 함께 밥을 먹고, 외출을 하고, 시간을 나누며 둘은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그녀의 할머니가 나타나 조제에게 이런 삶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다시끔 찾아간다. 어쩌면 물고기는 그녀의 삶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소재가 아니었을까. 일정한 공간과 틀에서 제 몸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한정적인 삶만을 살아야 했던 그녀 스스로를 물고기에 투과했을 수도 있고, 결국 츠네오 덕분에 한계에서 벗어나 바다로 떠나게 되어 그녀의 삶이 한층 더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일 수도 있고, 그와 함께 묵은 숙소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물고기라 칭하며 쓸쓸함에 오는 동질감이었을 수도 있다. 앞선, '조제'와 '호랑이'에 비해 '물고기'의 의미는 어느 쪽으로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내용으로 돌아와,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던 점은 츠네오가 그녀를 단순 장애인으로써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를 '장애인'으로써 동정하는 것이 아닌 '한 여자'로써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한다. 그의 행동에 특별한 배려는 없다. 그녀를 업어주는 것 외에는 가끔 그녀가 걷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어렵다. 영화 전반적으로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평범히 연애하는 남녀' 그렇게 느껴지게끔 연출을 이어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기 떄문에 오히려 사랑의 평범함에 대해서 잘 드러나지 않았을까. 주인공 둘 다 극적인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나 둘의 행동에 큰 변화를 두지 않음으로써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꽤나 적나라한 베드씬을 넣어놓은 이유도 여기 있지 않나 싶다.
영화에 대해 알아보면서 조금 아쉽게 느껴졌던 건 이 영화가 마치 '장애'에 관한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처럼 비춰진다는 것이다. 물론 놓칠 수 없는 부분이고 감독의 주제의식이 어느정도 엿보이는 장면들도 여럿 볼 수 있다. 다만, 본질이 로맨스인 이 영화에서 더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사랑'에 관한 고찰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제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장애에 대한 극복으로 당당한 삶' 같은 것들이라기 보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변화와 여정'이라고 이야기 하고싶다. 무엇보다 영화 속 조제의 설정이었던 '장애'가 사실 신체적인 불편함 그 자체를 의미하기 보다 '일상 속 일반인들이 사랑하며 마주하는 일종의 장애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사람을 만나며 우리가 겪는 장애는 신체, 감정, 불안, 재력, 환경 등 어떤 요소도 될 수 있다. 영화 속 설정에서는 신체를 토대로 장애물을 구축해, 사랑하는 사람끼리 마주칠 수 있는 차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츠네오를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츠네오는 진심으로 오열한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담백하게 이별을 말하고서 말이다. 누가 있든 개의치 않고 그저 울기만 할 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조제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정으로서 그녀를 배려한 것이 아닌 짧고도 길었던 1년하고도 몇 달간의 연인 관계였던 조제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담담한 이별이었지만 조제를 두고 돌아서야 했던 츠네오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조제를 데리고 가족들에게 인사하러 가는 길에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랑에 대한 책임감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 츠네오의 모습도 이해가는 슬픈 양면성이 가슴에 남는다.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라는 무기력한 말과 다르게 전동휠체어를 타고 일상을 보내는 조제의 모습이 한편으론 마음이 놓였다. 넘치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고나서 깊은 후유증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그건 남아있는 조제를 위하는 마음이자 둘의 사랑을 옆에서 직관한 후에 오는 상실감일지도 모르겠다. 둘이 결국 이별했으니 비극적인 엔딩이라고 말해야할까? 어쩌면, 우리가 바랬던 것 처럼 '둘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와 같은 엔딩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원하던 엔딩에 도달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꼭 영화가 결말이 나야만 엔딩이 아닌 것처럼 주인공 둘도 결국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또 다른 사랑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몇 평짜리 공간에서 발을 뗀 조제의 앞에도 어떤 날들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삶을 기대할 수 있다. 조금 억지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해피엔딩이 아닐까. 사랑에 대한 본질과 동시에 사랑이 가진 연약함을 깊게 엿볼 수 있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아쉬움을 달래고 글 몇자로 영화를 담아낸다. 영화 속 츠네오가 그랬듯 조제같은 여자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만 같다.
사진 출처 : <ジョゼと虎と魚たち .>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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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브스턴스 | 미치는 대신 미친 척하는 바디 호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걸 정도로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스타 배우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하지만 현재 그녀는 한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프로그램에 임하던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소식이 전해진다. 50살 생일날, '프로듀서 하비'(데니스 퀘이드)가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를 해고한 것.
충격에 빠진 엘리자베스는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 실려간다. 그곳에서 그녀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한 젊은 남성 간호사로부터 젊고 완벽한 신체를 만들 수 있다는 약물, '서브스턴스'를 소개받은 것. 7일이라는 기간만 잘 지키면 원래 몸과 젊은 몸 모두 부작용이 없다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기꺼이 약물을 주사한다. 그렇게 탄생한 '수'(마가렛 퀄리)는 엘리자베스를 대신해 두 번째 인생을 누리기 시작한다.
샹그릴라 신드롬과 엔디미온
샹그릴라 신드롬. 제임스 힐턴의 1933년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평생 늙지 않고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는 가상의 지상낙원, '샹그릴라(Shangri-La)'의 이름을 본뜬 말이다.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늙지 않고 젊게 살고 싶은 욕구가 확산되는 사회적 현상을 의미한다. 이 신드롬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인기 연예인의 관리 비법은 언제나 관심사다. 중장년의 전유물도 아니다. 최근에는 세대 막론하고 저속노화 열풍이 불고 있다.
젊음을 향한 열망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리스에서는 달의 여신 셀레네와 목동 엔디미온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셀레네는 절세의 미남 엔디미온에게 반한 나머지 그가 잠들었을 때마다 그와 그의 양들을 지켜주었다. 사랑이 더 커진 셀레네는 그의 미모가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부탁하여 그가 영원히 변함없이 깨어나지 않는 잠을 선사했고, 잠든 그와 관계를 가져 '메나에'라고 불리는 50명의 딸을 낳았다.
그런데 엔디미온 이야기는 샹그릴라 신드롬에 경종을 울리는 비극이기도 하다. 엔디미온은 영원한 젊음도, 가족도 전혀 알지 못하는 고통 속에 빠진 채 평생을 살았다. 태어나서 성장을 했다가 노화하여 안식, 즉 죽음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벗어난 대가인 셈이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이 오래된 경고를 재해석한다. 신선한 연출, 파격적인 이미지, 달라진 시대상황을 곁들여서.
탁월한 시작
<서브스턴스>는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잘 나가는 할리우드 스타였던 엘리자베스가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한 과정을 보여주는 시퀀스만 봐도 영화에 압도된다. 일반적인, 예측가능한 형태를 완전히 빗겨나가기 때문. 익숙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엘리자베스가 화려한 시상식에 초청받고, 정신없는 파티를 즐기는 컷이 연달아 나온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출연 제의가 끊기고, 어두운 방에서 좌절하는 그녀를 카메라가 비춘다.
<서브스턴스>의 카메라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배치된 엘리자베스의 별을 바로 위에서 비춘다. 별이 처음 제작된 후에는 그 주변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화려하게 터지고 여러 행사가 개최된다. 그녀의 별을 보러 온 팬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진다. 별 현판에는 금이 가고, 사람들은 마구 밟고 다닌다. 그녀의 이름을 아예 모르는 행인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먹던 햄버거를 떨어져서 소스가 묻어도 치우는 시늉만 하고 지나간다. 이 짧은 컷들의 조합만으로도 정상에서 서서히 내려온 엘리자베스의 현재 상황, 감정, 욕망, 결핍이 모두 전달된다.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한 이 오프닝은 배우의 부재 덕분에 더욱 인상적이다.
놀라운 이미지의 향연
이미지 활용 능력도 탁월하다. 젊음과 탐욕이라는 두 키워드가 스크린에서 넘쳐흐르는 듯하다. 엘리자베스의 몸을 비집고 나온 수가 처음으로 자기 얼굴과 몸을 거울에 비춰보며 만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엘리자베스가 진행자였던 에어로빅 쇼의 새 출연자 오디션 장면도 마찬가지다. 수의 신체 곳곳을 비추는 대목은 마치 여성의 젊음과 육체미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와 대비되는 음식의 이미지는 기괴한 만큼 소름 끼친다. 하비는 엘리자베스와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그녀의 해고 소식을 전한다. 더 젊고, 아름다운 신체를 지닌 진행자가 필요하다면서. 이 자리에서 하비는 새우를 게걸스럽게 까먹는다. 저작활동은 손과 입가가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엘리자베스의 심경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그의 욕망을 대신 보여주는 듯하다.
수가 유명해질수록 엘리자베스의 폭식증이 심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수가 음식을 광적으로 먹어치우는 모습뿐만 아니라, 그녀가 식사를 마친 후의 잔해가 더 눈에 띈다. 그녀가 먹어 치운 음식의 잔해는 앙상하고 피폐하다. 닭을 먹으면 기름이 흥건한 접시 위에 살점이 일부 붙은 뼈만 남긴다. 이 잔해더미는 수에게 생명력을 뺏긴 채 나날이 껍데기만 남고 생기를 잃어가는 엘리자베스의 모습과 같다.
개인이 아닌 시스템
독특한 오프닝과 이미지의 조합은 <서브스턴스>의 메시지가 극대화되는 환경을 마련해 준다. 겉보기에 <서브스턴스>의 메시지는 엔디미온과 셀레네의 사랑 이야기와 같다. 젊음을 욕망하다가 자기 인생을 파괴하는 주인공에 대한 비판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애 과정을 부정하고 이를 벗어나려는 탐욕과 그 선택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서브스턴스>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젊음을 욕망하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개개인의 노력을 탓하지 않는다. 개인의 욕구를 부추기는 시스템을 최종적으로 비판한다. 그 중심에는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쇼 비즈니스가 있다. 즉, 영화나 TV 같은 미디어가 젊어지고 싶고, 젊음만이 좋은 것이라는 욕망을 끊임없이 주입한다는 것. 젊음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은 가치가 없는 인물로 매도하는 시스템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수가 밤에 거대한 광고판을 보는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기 화보를 보던 그녀는 7일이 지났는데도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더 빨리 늙고 미라로 변해도, 젊은 몸을 유지하기로 결심한다. 그러지 않으면 수도 언제든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하루아침에 에어로빅 쇼에서 해고됐듯이. 즉, 지금과 같은 시스템 하에서 개인은 젊어지지 않아도, 젊어지려고 해도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에어로빅쇼 스튜디오 복도의 모습도 흥미롭다. 좁고 긴 복도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할 것 같은 갑갑함을 조성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가 해고당할 것이라는 소식도 듣고, 자기 물품과 무성의한 선물을 받는 공간도 모두 이 복도다. 즉, 이 복도는 TV 쇼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젊고 매력적이면 안 된다는 강박과 시스템의 원리를 시각화한 공간인 셈이다.
시스템을 향한 반란
클라이맥스는 충격적인 이미지로써 쇼 비즈니스 시스템의 내재적 문제를 직격한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뒤틀린 괴물의 생김새만 봐도 그렇다. 이 괴물은 코 대신 가슴이 얼굴에 달렸다. 여성 지원자들의 몸매를 품평하던 면접관들의 말 그대로다. 그들의 성희롱이 단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인 만큼, 엘리자베스라는 괴물은 영화가 지적한 모든 문제가 한 데 모여 형상화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극장 시퀀스도 호불호가 나뉠지언정 분명 의미심장하다. 괴물이 된 엘리자베스는 무대 위에 오른 뒤, 온몸으로 피를 내뿜는다. 무대와 관객석은 피바다로 변하고, 자리에 앉아 있던 관객들도 모두 피칠갑된다. 이는 호러라는 장르적 쾌감 못지않게 서사적으로도 중요한 갈무리다. 시스템의 피해자인 엘리자베스가 시스템에 종사한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그녀의 피에 그들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헝거게임>에서 캣니스가 화살을 날리는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녀는 매번 헝거게임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한 이들에게 활을 쐈다. 게임메이커에게, 스노우 대통령에게, 코인 대통령에게. 그렇게 그녀는 헝거게임 게임장을, 더 나아가서 판엠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전복했다. 캣니스에게 활과 화살이 있었다면, 엘리자베스에게는 피가 있었던 셈이다. 차이점이라면, 캣니스는 성공했고 엘리자베스는 실패했다는 것 뿐이다.
파격이 빠진 반란
그런데 엘리자베스의 반란은 보이는 것에 비해 감정적으로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물론 그녀의 반란 자체는 인상적이다. 군더더기 없는 전개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는 세련됐고, 깔끔하다. 약물을 만든 흑막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와 수 외의 인물은 최소한의 역할만 하고 빠진다. 자연히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 그들의 욕망이 낳은 비극에만 몰입할 수 있다.
다만, 큰 틀에서 보면 충격적인 이미지나 기교에 비해 내용물이 예측가능하다. 더 젊은 '나'가 무절제한 삶을 누리고, 무분별하게 젊음에 취해 살다가 본래 자기 자신과 함께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SF 영화 등에서 익숙하다. 즉, 오프닝 시퀀스나 식사 장면, 그리고 엘리자베스 몸에서 수가 빠져나오는 장면에서의 발칙한 상상력이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발휘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관통한 <서브스턴스>의 통찰은 중요성에 비해 충분히 날카롭지 않다. 시각적으로는 놀랍도록 기괴한 경험을 했지만, 이미지가 남긴 충격에 이야기의 메시지가 묻혀 버린다. 엘리자베스가 자기 별 현판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수미상관 결말이 오프닝만큼 뇌리에 각인되지는 않는 이유다. 결국 <서브스턴스>는 2%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Acceptable 무난함
선 넘은 이미지를 빛바래게 한 선을 지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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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내부에 숨어있는 스파이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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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로부터 다시 한번 비밀 작전을 맡게 된다.
한편, 러시아 고위급 장교를 감시 중이던 현장요원 ‘리키 타르’(톰 하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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